제갈량의 약점 하나는 쉽게 위임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실제 정사 삼국지에는 사마의가 촉의 사신에게 물어서 얻은 정보로 제갈량을 비판하면서 사소한 일까지 스스로 결정하고 직접 수행하기까지 한다면 어찌 몸을 오래 보전할 있을까.”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일을 지나치게 손수 처리하려고 노력하여 스스로 부담을 많아졌고 이것이 단명하게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결국 사람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우선 촉이라는 땅이 좁다 보니 배출되는 인재의 수가 많지 않아 믿고 맡기기가 어려웠다는 것이 일차 원인이다. 그가 가정전투에서 마음먹고 일을 맡겼던 마속 또한 개인의 과실과 역량의 부족으로 패배하는데 일조하였다. 이것 또한 한편으로는 인재 부족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발탁하여 일을 맡긴 제갈량에게 부분적인 책임을 물을 밖에 없다.

 

마지막 오장원의 싸움을 보면 제갈량의 죽음으로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퇴각한 것으로 묘사된다. 상식적으로 자신의 수명이 거의 했다는 안다면 굳이 대병력을 이끌고 위험한 전쟁에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갈량 스스로도 자신의 죽음을 의외로 생각했고 충분한 대비도 하지 같다. 후퇴하는 과정에서의 위연의 죽음도 배신이라기 보다는 사후에 대한 준비의 부족함이 지도부의 혼선을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갈량의 뜻과 역량에도 불구하고 굳어진 세력구조를 쉽게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개인적으로 종합적인 평가를 하자면 후세에 길이 남을 모범적 재상이었지만 군사적으로는 조조보다 분명히 떨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렇다고 제갈량이 싸움의 재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닌 같다. 우선 상대방이었던 사마의가 쉽게 제갈량과 승부를 겨루려고 하지 않았다. 대치 상태에서 오래 머물다가 제갈량의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마의의 전략이 얄밉다고 느껴지지만 이것 또한 사마의로서는 합리적 선택이었다. 버티면 제갈량이 군량이 떨어져 스스로 돌아갈 밖에 없고 보면 굳이 목숨을 걸고 확률이 낮은 싸움의 길을 필요는 없다는 논리다.

 

원래 사마의가 싸움을 못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필요하면 엄청난 속도를 내서 싸움의 승부를 내버린다. 맹달을 기습할 때나 요동에서 공손연을 격파할 때도 속전속결로 승부를 결정짓는 명장이었다. 그런 사마의가 계속 대전을 회피한 보면 제갈량과 사마의의 실력을 쉽게 가름하기는 어렵다.

실제 제갈량은 퇴각하는 과정에서 복병을 배치했다가 성급히 추격해오는 위나라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 명장 장합이나 왕쌍과 같은 위나라 장수들이 이런식으로 죽어버렸다.

마지막 원정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죽자 촉군이 물러갔지만 사마의가 함부로 쫓지 못했던 것도 이런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로 인해 위나라 조정에서 비판을 받았고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도 죽은 공명이 사마의를 쫓았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머쓱해진 사마의는 여기에 대해서 나는 산사람과 싸워서는 이겨도 죽은사람에게는 어찌 해보지 못한다는 투로 대꾸를 했다고 한다.

 

어쨌든 북벌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이미 나라의 역량이 전선에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위나라로서는 사회가 안정이 되면서 영토가 넓고 물산이 풍부하다는 장점으로 변방의 촉과 오에 대해 누리는 우위가 점차 드러나고 있었다. 따라서 제갈량이 한두번 전투에서 이겼다 해도 계속 앞으로 나가서 끝까지 이길 것인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물론 과거 조조는 그런식으로 거의 모든 전투를 이겨서 위나라를 세웠지만 제갈량의 군사적 역량은 아쉽게도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제 삼국지의 다른 백미라고 있는 제갈량의 북벌을 살펴보자. 여러 번의 대위 전쟁 중에 가장 조건이 좋았던 싸움은 천수,안정 지역의 호응과 맹달의 내응을 받을 있었던 첫번째 출전이었다. 원래 지역은 마초가 맹활약하며 지지를 받았던 곳이다. 마초와 조조의 싸움은 매우 치열했고 패전의 결과 마초의 일족 300명이 모두 멸해지고 오직 마대 혼자만 남았다고 한다. 정복된 지역의 주민들 또한 마음 깊이 조조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마초의 나라인 촉나라의 군대가 오자 크게 호응을 했다. 더해서 맹달 또한 조비가 들어서면서 자신의 입지가 불안정해지자 촉에게 내응의 뜻을 보였다. 두가지가 결합되었다면 성공을 거두지 않았을까 기대해본다.

전장을 나서는 제갈량의 각오는 출사표라는 훌륭한 문장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전략으로 가자면 논란이 많다. 당시 위연은 자신에게 별동대를 주면 험하지만 가까운 길로 장안 앞까지 막바로 달려가서 적을 기습하겠다고 제안했다. 삼국지에서는 여기에 대해 무모한 이야기라고 비판하며 제갈량 편을 든다. 하지만 전략은 과거 한나라의 시조 유방이 취해서 대성공을 거둔 전례가 있다. 더해서 적이었던 사마의 또한 제갈량이 전략으로 나왔다면 위나라가 한층 위험했을 것이라고 평했던 것으로 보아도 타당성이 있었다. 당시 위나라에서는 제갈량의 존재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바꾸어 말하면 과거의 전쟁에서 제갈량의 전과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래서 잠잠하던 국경선을 넘어 촉의 군대가 밀고 들어 오자 우선 당황했다고 한다. 이렇게 준비가 안된 상대라면 역시 기습이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생각되는 증거들이다. 덕분에 차분하고 안정된 길만 선택했던 제갈량의 당시 선택에 대해 후세의 비평가들로부터 오랫동안 비판을 받았다.

한참 뒤에 여기에 대한 반론이 하나 제기 되었다. 왕부지라는 유명한 학자가 고증을 통해 제갈량이 사실은 전면적 북벌전쟁을 원한 것이 아니라 제한적 전쟁을 시도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설혹 장안을 점령한다고 해도 위나라가 더욱 많은 군대로 반격해온다면 촉의 군사력으로 계속 이기기는 어렵다고 것이다. 그래서 마초의 영향이 있던 강족 지역으로 가서 사람들을 끌어들여 군사를 보충하고 백성의 머리수를 늘리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라는 해석이다.

실제 지역 백성들은 북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군대를 따라서 촉으로 이주 했다. 어쨌든 가정의 실패 이후 이어진 모두 다섯 차례의 위나라에 대한 원정은 거의 대부분 성과 없이 실패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제갈량이 입신하여 유비를 만나서 천하의 패권 경쟁에 뛰어들었을 나이가 아직 20 였다. 오랜 기간 동안 그를 보좌하게 되는데 먼저 손권을 설득 힘을 합쳐 조조와 적벽에서 겨뤄 이겼고 촉이라는 천하의 귀퉁이를 차지하여 계속 양쪽에서 견제하는 전략을 추진하여 삼국이 마치 솥의 발과 같이 균형을 잡아 서로 견제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유비가 떠난 그의 아들을 보좌하여 여러 위에 대한 전쟁을 일으켜 유업을 이루려고 노력하지만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전장에서 명을 다했다. 삼국간의 대립 당시에도 촉과 대치하던 진의 장수들도 그를 존경하여 휘하의 병사들이 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할 정도 였고 후대에도 많은 사람들의 끊이지 않는 추앙을 받았다. 문학적인 재주는 후제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出士表에 드러나 있고 사회 경영에 대한 이해는 맹획을 잡았다가 놓아주는 전설에도 나오듯이 깊이와 폭이 제법 되었다.

 

유비가 쫓기는 신세에서 촉에 안착하는 과정까지 제갈량이 보여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선견력은 매우 탁월했다. 당시 유비는 별다른 영토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세력의 수준이었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 벌였던 촉과 한중의 공략은 후세에 보아도 정확한 방향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영토확장 과정에서 그의 안목의 정확함이 많이 확인되었다.

 

다음 리더의 요건 중의 하나가 따르는 사람들이 적절히 자기 목표를 갖게 하는 것이라면 제갈량의 업무수행은 높은 점수를 받을 있다. 촉이라는 나라는 유비를 따르던 떠돌이 세력에 의해 다양한 지방 호족들을 정복하거나 연합하면서 세워졌다. 이런 조건에서 후일 까지 불화 없이 정권을 유지할 있었던 것은 그만큼 내부의 단합을 유지했다는 증거다. 이를 통해 그의 리더쉽을 상당부분 확인할 있다. 이는 특히 조조의 위가 촉과의 전쟁을 통해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된 사마의에 의해 무너졌던 것에 비교해볼 보이는 장점이다.

 

물론 그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다. 나이 어린 군주와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처음에는 서로 의지하고 일을 꾸려갔지만 막상 제갈량이 떠나자 궁안에 머무는 군주를 둘러싸고 환관을 중심으로 파당이 생겨서 의사소통을 가로막아서 군주와 신하가 서로 이반되었다. 이래서는 결코 전쟁을 이길 없었다. 이런 구조를 타파하지 못한 것은 제갈량이 신하의 분수를 지켰다고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의 한계를 일찍부터 그었다고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제 삼국지 전반부를 만들었던 조조와 유비가 퇴장하고 다음 세대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촉에서는 제갈량이 전권을 가지고 위나라를 공격하는 북벌에 나섰고 여기에 대해 위에서는 사마의를 내세워 막게 된다. 이후 사람의 대결로 삼국지의 이야기가 전개 된다.

 

제갈량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가 만들어낸 과장을 극복해야 한다. 적벽대전에서 바람을 불러 조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벌이는 싸움마다 이겨서 사마의를 혼쭐내었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죽음까지 예견했지만 그대로 운명을 받아들일 밖에 없었던 비운의 천재가 삼국지연의에서 그려진 제갈량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진수가 정사인 삼국지에서의 묘사는 다르게 그려져 있다. 유능하고 성실하며 공정한 재상이었다는 점은 강조하지만 반면 전장에서 대단한 기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라는 평가다. 이를 놓고 진수의 집안이 원래 제갈량에게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되기도 하고 멸망한 국가의 관리로서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운 입장에서 글을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제갈량이 전투의 전면에 나서서 커다란 성과를 적이 예상외로 적은 것은 부인 없는 사실이다. 정말 제갈량만 동원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유비가 서촉원정에 처음부터 동반하지 않았을까 의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역량 없이 후대에 그렇게 칭송을 받는 것은 아니다. 먼저 제갈량과 직접 대결하던 위와 진의 시각을 보면 제갈량은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진에서 촉의 사관이었던 진수를 받아들여 제일 먼저 시켰던 일이 <제갈량평전>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제갈량은 어려운 존재였다고 느껴진다.

제갈량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알아야 점은 제갈량이 상당한 명문가 출신의 준재라는 것이다. 친형 제갈근은 오나라에서 손권을 섬겨 2인자의 자리인 재상의 지위에 올랐고 조카인 제갈각은 한때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둘렀다. 약간 조카뻘되는 제갈탄도 위나라의 지방 지사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여 나중에 사마씨에게 맞서기도 하였다. 가까운 친척들이 이렇게 각기 섬기는 군주를 달리하면서 인정받을 있었던 것을 보아도 집안이 상당한 명문이었다고 보여진다. 당시 사회의 특이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