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는 책읽기를 철저하게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명저가 오늘날 그렇게 적게 읽히는 이유이기도 한다.

명저라고 해서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읽어야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가벼운 읽을 거리가 어떤 때는 훨씬 개개인에게 효용이 있을 있지만 사실이 결코 명저가 가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굳이 것을 읽지 않았다고 책의 가치가 떨어지는 아니고 읽었다고 자부심을 가지는 만으로 가치가 마구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현재 나한테는 고전을 읽는 것이 효용이 없고 나에게 굳이 것을 읽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창조력이 고전에서 나오고 내게 의무가 없다는 것은 냉정하게 보면 결국 내가 세상에 창조할 가치가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나?

 

그런 반성에서 나도 고전에 도전을 해보았다. 결과는 비참하였는데 이제 이야기를 해보자. 가령 칸트의 철학사상을 알기 위해 순수이성비판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용기를 찬양하고 다음으로 진지하게 다른 방법을 권유하고 싶다.

 

전에 철학사를 여러 날에 걸쳐 열심히 읽고 나서 이제 철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친구에게 자랑을 늘어놓으려고 하였다. 나는 두터운 철학책을 여러 보았고 친구는 철학을 만화로 풀어놓은 권만을 읽은 상태였다. 내가 한참을 열을 내며 다양한 개념에 대하여 설명을 진행하였는데 친구는 아주 짤막한 지적을 철학자에 대하여 하였다. 내가 미처 파악하지 이었다. 평소에 투자해 놓은 것이 워낙 많은 탓에 내가 전체적으로 상대방에게 있는 말은 많았지만 상대방이 쉽게 깨달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친구는 만화책 별다른 고민 없이 읽은 뿐이고 나는 많은 시간을 고민 속에서 두터운 책과 씨름한 결과가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는 것일까? 고민에 들어가지 않을 없다.

 

나의 문제는 우선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목적의식이 명확하지 않았다는 것은 위에서 이문열씨의 <젊은날의 초상>에서 인용했듯이 진리를 쫓기 보다는 카페에서 마주친 어줍잖은 숙녀를 위한 다시 말해 주변의 어줍잖은 찬사에 도취하는 수준에서 머물게 하였다는 의미다.

독서는 무엇보다도 목적의식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독서 자체는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 중의 하나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진리를 구하는 방법으로 독서만이 존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음으로 자기 수준을 바로 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읽는 방법이 좋지 않았다.

비유적으로 이야기 하면 길을 가는데 있어서 출발점 - 수준 - 도착점 - 목적의식 - 그리고 도달하려는 방법 - 독서법 - 모두 불완전 했다는 것이다.

결코 시간과 노력을 내가 적게 쏟아 부은 것은 아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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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비자다.
내가 하나의 물건을 있기 까지는 생산자와 유통업자가 있어야 한다. 지식에도 마찬가지로 생산자와 유통업자 소비자라는 서로 다른 계층이 있다.

학문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러한 여러 단계 중의 하나에 자신을 자리 매김하는 것으로 생산과정에 종사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외국에서 공부하시던 교수님 분이 자신은 소비자 약간 유통업자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것을 들었다.

한국에서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문에 뜻을 두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을 느끼게 하는 것에는 가지 원인이 있는 하나는 고전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어다. 고전은 앞에 묘사 한대로 지식의 산에서 중간 중간의 굵은 능선이다. 다른 사람의 지적인 축적물을 정확히 파악하지 한다면 그들이 도달해 놓은 한계가 어느 곳인지 방법도 없다.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언급한다. 기껏 고민을 하다 보면 이전에 누가 깔끔히 정리해 놓은 것을 발견할 있다. 얼마나 허탈할 것인가?

어지간히 뛰어난 사람도 역사 속에서 지적 능력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 났던 사람들을 무수히 만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다른 사람의 노력이 만들어 결과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중턱의 무수한 쉼터나 앞선 등반객의 자취를 무시하고 밑바닥부터 혼자 힘으로만 오르겠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이 용기 있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겠지만 적어도 현명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할 것이라고 있다. 가령 누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들고 산에 올라가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헤겔의 <정신현상학> 만들어 내려왔다고 가정해 보자 이미 시대는 헤겔의 시대를 넘어 마르크스를 거쳐 포스트 모던까지 흘러갔다. 심하게 말하면 그는 고대인간일 따름이다.

 

따라서 창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이 소화한 고전의 범위를 알아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하고 지금까지 인류가 도달한 한계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다시 앞으로 나아갈 있는 힘이 된다. 자연과학과는 다르게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자신이 섭렵한 고전의 범위를 따져 보아야 한다. 그것이 창조를 이룰 있는 가능성의 한계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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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고등학교 교육을 마친 사람 대부분이 2 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안다. 2 방정식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답이 있다. 그러면 3 방정식의 경우는 어떨까? 4 에서는 5 에서는 이런식으로 계속 올라간다면 수학을 어지간히 잘했다고 자신하던 사람도 모호해 진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일부 수학자들이 문제와 씨름하여 3,4 방정식에 대한 일반적인 답을 얻었다. 하지만 5 차에 이르러서는 쉽지 않아 수백년간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다 1800 경에 프랑스에 와서야 풀리기 되었다. 답은 일반적인 해법이 나올 없다는 것이다.

백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매달린 문제인데 나는 지금 그들이 고민하던 문제의 답을 알고 있다. 그러면 내가 그들보다 수학을 탐구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가?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기하학이나 수에 대한 원리를 보면 현대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전혀 지능적인 차원의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들보다 결코 머리가 좋아서 그들이 평생 고민하던 문제를 있는 것이 아니다. 앞과 그들 사이의 누군가가 풀어낸 해법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후대에 태어났다는 점에 대해 감사할 수도 있지만 결코 그것을 자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식과 지적 능력의 사이에는 이와 같은 불일치가 존재한다. 물리物理에 비유하면 지식은 위치位置고 지적능력은 물체를 운동運動하게 하는 힘으로 있다.

 

지식의 추구라는 것은 거대한 산의 등반과 같은 것이다. 결코 한두 사람의 발걸음에 의해 정복되지는 않는다. 한참 근력이 좋을 때는 무조건 앞으로만 나간다. 그렇게 오르다 보면 도저히 넘을 벽을 만나서 되돌아오기도 한참을 나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곳에서 그리 벗어나지 했구나 하는 아쉬운 순간도 있다. 문득 되돌아보면 세월을 보냈기에 어느 정도 아래가 보이고 앞서갔던 현인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쉼터를 만나기도 한다. 아래에는 자기와 같은 목적으로 이제 어귀에 접어든 많은 후배가 보인다.  선한 마음으로 오를 두개만 가르쳐 주어도 자기 자리까지 올라오는데 훨씬 적은 시간이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도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시간이 허락하는 때까지 밀고 나가고 다한 것은 나은 후배가 언젠가 해결해 주리라 기대할 밖에 없다. 이와 같이 인간의 지식이라는 거대한 산에 대한 추구는 무수한 세대의 협력에 의해 이루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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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가혹한, 목메이는 사진 한 장



 

 

 

 

 

 

 

 

 

 

 

 

 

 

 

 

 

 

 

잭 캘리라는 한 신문기자가 소말리아의 비극을 취재하다가
겪은 체험담이 있습니다. 기자 일행이 수도 모가디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기근이 극심한 때였습니다. 기자가 한 마을에 들어갔을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그 기자는 한 작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온몸이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배가 불룩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빨갛게 변해 있었으며, 피부는 한 백살이나 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마침 일행 중의 한 사진기자가 과일 하나 갖고 있어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허약해서 그것을 들고 있을 힘이 없었습니다.기자는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고맙다는 눈짓을 하더니 마을을 향해 걸어 갔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년의 뒤를 따라갔지만,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 작은 아이가 땅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아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이 작은 아이는 소년의 동생이었습니다. 형은 자신의 동생 곁에 무릎을 꿇더니 손에 쥐고 있던 과일을 한 입 베어서는 그것을 씹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입을 벌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동생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동생이 씹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기자 일행은 그 소년이 자기 동생을 위해 보름 동안이나 그렇게 해온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결국 소년은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동생은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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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게 힘들다고 종종 투덜대는 나의 모습이 저 사진 한 장에 참혹하리만치 부서져 내립니다. 가난해서 꿈을 실현하기 어렵다고 방금전까지 불평불만으로 가득하여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사한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가는 일이나, 미국의 팽창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일과, 철학적 산책이 어쩌고 하는 일이 굶주린 동생을 살리려는 눈물겨운 노력보다 더 대단한 걸까요? 지상 최고의 양식은 '밥'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헛소리들뿐이라는생각이 듭니다. 지갑에 천원짜리 한 장 남겨있지 않았던 기억이 있는 사람, 뒷산에 올라가 고사리 나물을 뜯어다가 쌀을 팔아와서 먹어본 사람만이 저 사진속의 가혹함을 온전히 이해할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안다고 말하지 마십시요. 이미 풍요로운 당신의 요설일 뿐입니다.

늦은 점심을 먹어야겠습니다. 어느 때보다 고마운 밥그릇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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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하게 설명하면 하나의 사물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사고를 하면서 동시에 이상 원인을 찾는 사고를 전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황당하게 들리는 이야기 이므로 일단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절약이 미덕이다라는 구호는 매우 오랫동안 들어와서 우리 귀에 충분히 익숙해져있다.  같은 논리로과소비는 나쁜 것이다라는 비난도 정부기관, 언론, 학계의 조예있는 지성들로부터 자주 듣게 된다.

과소비가 나쁜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과소비를 한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적절한 수준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로서의 정당한 주권 행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언론을 통해 정부나 여러 학자, 지성들이 당사자에게는 별로 소용 없는 같은 규범들을 강조하는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의의는 과소비의 당사자가 아니라 과소비를 현실적으로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결국 문제는 절약을 강제 당하는 사람들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기 위한 것이다.

좋은게 좋은 것이란 말이 있듯이 소비란 것은 원래 긍정적이다. 누구나 좋은 물건을 구매하고 즐거운 삶을 꾸려가고 싶을 것이다. 결국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소비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현실을 수용하도록 만들기 위해 절약이 미덕이고 과소비는 악덕이라는 규범을 가지도록 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소비에 대해 나쁘다는 생각을 하게되면 내가 굳이 나쁜 쪽으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게 된다. 위의 명제 - 인과관계적인 인식과 규범적인 인식이 상호 배타적이다 - 따라나는 과소비를 하지 못할까하는 의문을 일으키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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