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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최후의 14일
요아힘 페스트 지음, 안인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히틀러라는 인물을 평하기는 그렇게 쉽지는 않다.
대표적 시각은 독재자의 표본이고 유태인 학살의 주범이고 결국 자신의 민족에게까지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한 전범이다.
한편으로는 중졸 수준의 학력으로 최고 지도자까지 오른 성공사례를 보여주고
혼란스러운 사회를 일거에 질서로 재편시킨 비전과 리더쉽의 소유자였다.
군중의 참여라는 정치환경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탁월한 대중연설을 통해 마음을 지배할 줄 아는
천재였다.
독일인들에게 있어서도 대체로 히틀러는 부담이었다. 나의 투쟁은 독일에서 금서가 되었다.
이 책은 그런 히틀러에 대해 담담한 시각으로 최후의 몰락 순간을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베를린 방어를 책임진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병사들의 초조한 모습에서
수도를 탈출하기 위해 마지막 걸음을 재촉하는 시민들, 하루 빨리 적의 수도를 장악해
승리를 확인하려고 재촉하는 소련의 지도자들의 모습이 죽 나타난다.
짧은 영광의 꿈은 가고 그들의 잔혹한 행위를 잘 알기에 더욱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했던
사람들은 마지막 총탄을 다 쓸대까지 끝까지 싸워야 했다. 특히 친위대라는 이름으로
나찌의 이데올로기를 가슴에 안고 살아왔던 사람들은 더욱 최후를 전장에서 맞으려고 했다.
2인자 격이었던 괴벨스의 아내가 아이들 모두를 독살시키는 장면은 전쟁의 불행이 다음 세대로
이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바깥의 참호에는 15세 소년이 방공호에서 초조한 모습으로
전투를 기다리고 있게 된다. 잠시 더 버티기 위해 무모하게 희생되는 이들의 죽음을 과연
지도자들이 보상하고 있는 것일까? 참고로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보면 소년병들 수백명을
마구 죽이고 나서 주인공이 가지게 된 충격이 나오게 된다. 이들 소년병이 바로 이런 어리석은
전략에 의해 전장에 끌려온 소년들이었다. 하긴 한국전쟁에서도 비슷한 일은 있었다.
이런 반발 또한 주변의 최측근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전쟁은 계속 된다.
심지어 히틀러가 자살하고 여러날 무모한 싸움은 계속 되었다.
독일이 저항한 방향은 주로 동부전선이었다. 상대적으로 미국이나 영국과는 직접 대결이
적었고 영국에 대해서는 늘 동맹의 희망을 품었던지라 마지막까지도 꿈을 버리지 않았다.
히틀러가 가장 가깝게 놓고 보았다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화를 보면 실제 이 대왕이 치렀던
막강한 적과의 포위전에서의 동맹국이 영국이었다는 점과도 연관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 얻어진 승리가 너무 손쉬웠기에 더욱 더 큰 모험을 동경했는데 이는 그가 즐겨했던
바그너 오페라의 주인공들이 보여준 영웅심리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바그너의 친구였고
숭배자였던 루드비히 왕이 나중 디즈니의 모델이 된 아름다운 궁전을 남기고 개인으로는 몰락했듯이
히틀러 또한 영웅 아니면 몰락이라는 종말이 있는 길을 가려고 했고 결국 몰락을 맞게 된다.
자신이 이끌었던 독일 민족 또한 자신과 함께 그 길을 끝까지 가기를 희망했고
힘이 부친 민족이 처지기 시작하자 그들을 마구 매도하면서 연약한 자는 살아남을 자격이 없다고
몰아 붙인다.
영광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메시지는 멀리 일리아드의 아킬레스가 보여준 영웅의 전형이고
조금 뒤 카르타고가 굴욕보다 최후의 저항이라는 운명을 선택한 것과 비교된다.
파괴된 베를린을 그렇게 묘사한 작품속의 언급이 정말 가슴에 다가온다.
이런 대목에서는 갑자기 요즘 우리를 둘러싼 일등 논리와 사회의 양극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히틀러가 스스로 되돌아보며 아쉬움을 느끼는 대목도 흥미로왔다.
인도와 아랍에게 전적으로 해방을 약속할 것을, - 실제 이는 일본이 동남아에서 즐겨썼던 전술이고
아라비아 로렌스를 이용해 영국이 써먹었던 전술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부르조아를 척결해 노동자를 위한 정치를 펼것을 - 아마 이렇게 했다면 사회가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소련이 추구하던 세계 혁명 처럼.
무솔리니의 어리석음과 무능함에 의해 동부전선의 개전이 늦어져 결국 모스크바에서 멈추어버린
점도 후회하게 된다.
이런식의 상념은 빠르게 스쳐가지만 기회는 다 지나갔다.
소련의 볼셰비키는 제정러시아의 어리석은 군주보다 훨씬 강력한 사회를 만들어냈다.
모든 것의 핵심에는 그가 동맹을 잘 못 구성했다는 가장 큰 전략적 판단 잘못이 있었다.
한국사회의 히틀러 이해수준은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전문 연구가도 없고 관련 서적의 번역도 약한 편이다.
내가 굳이 단언컨데 박정희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지도자들의 수준이 히틀러에 비해
월등히 떨어진다.
히틀러의 나의투쟁을 보면 때로는 내가 유태인의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성경의 핵심은 구약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사상과 신약의 인간은 인간이기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다. 나의 투쟁에 나오는 핵심은 자본주의의 붕괴에 의해 버림받은
사회의 하층민들에게 당신들은 독일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충분히 대접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를 위해 노력한 점들은 국민차라는 상징을 보아도 뚜렷이 나타난다.
참고로 타이타닉을 떠올려보면 당대의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계층적 차별을 강하게 가졌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런 차별을 단숨에 없애버렸다.
물론 그가 독일인만을 위한 지도자로 남았기에 한계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가 식민지로 머물러야 했던 일본제국주의의 동맹자였던 점도 또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독일인 모두가 함께 미래를 건설하자는 그의 메시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한 점
또한 거부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편협한 민족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물론 인정한다.
하지만 성경의 앞부분인 구약은 지금도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는 동기부여가
되는 점도 떠올려보자. 사상들은 묘하게 서로 소통한다.
한국 사회는 지금 양극화라는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부작용을 체험하고 있다. 노동자는 여러 계층으로
나뉘어 일부는 귀족소리를 듣지만 다른 일부는 점점 바닥으로 내려간다.
외형적으로 민주화라는 구호를 입에 달고 살았던 YS,DJ,노무현 세사람 모두 실제로는 국민들에게
폭넓은 혜택을 주기보다 자신들 가족과 측근을 먹여살리는 패거리 두목의 수준에 머물렀다.
과연 당신들이 만들어낸 이렇게 암담해져가는 현실이 또 다른 히틀러를 한국사회에 부른다고 한다면
그것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히틀러와 가장 닮았던 박정희가 딸의 얼굴로 부활하는 모습을 보면서 김종인(현 민주당 국회의원,
과거 노태우정권의 경제수석, 서울대 정운찬 총장의 절친한 친구)이 던진 다음 정권은 경제가
결정할 것이라는 말이 남기는 여운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