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과학자 황우석
매일경제 과학기술부 엮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언론인 여럿이 모여 쓰는 책쓰기 작업은 무엇보다 속도면에서 효과가 있다.
세상의 화두가 되는 주제를 빠르게 소화해서 뚝딱 한권의 책을 만든다.
읽다보면 어 이런 내용도 있구나 할 정도로 폭 넓게 내용을 담았다.
그렇지만 문제는 깊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다.
어린시절에서부터 성장기, 다시 성공시대까지 황우석 교수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담겼다.
그의 업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글들도 담겨 있다.
단 거기까지다.

황교수의 업적이 외국의 사례와 비교해서 정말 얼마나 앞서 있고
이게 상품화되려면 산업의 지원이 얼마나 필요한지
요즘 뜨는 줄기세포 주식들의 전망이 과연 있는지
한국에서 BT(바이오테크놀로지)가 정말 비전이 있는지 등등
관련된 물음으르 한 단계 내려보려고 하면 더 이상 줄 것이 없다.

아쉬운대로 황교수에 대한 개인적인 궁금증을 풀수는 있겠지만
탐사보도, 기획보도가 별로 없는 한국 언론의 글쓰기에 아쉬움을 갖게 하는 책이다.

참고로 황교수가 상당히 주변에 친화적인 분인 것은 ㅄ?것 같다.
주변 사람들의 상가집에 자주 참석하는 면이 보인다. 하긴 나도 삼성의료원에서 한번
왔다가시는 걸 본적이 있다.
벤처로서의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에 대해서도 관심은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최대 벤처캐피털인 KTB 권성문 사장과의 특별한 교분이 언급된 것으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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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로 읽는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 김춘추에서 노무현까지
이덕일 지음 / 마리서사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책의 주제는 역사속의 개혁이고 제목에는 노무현까지라고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내용은 역사책이라 아직 노무현 시대를 담지는 않는다.
막 노무현의 통치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서문격으로 개혁의 어려움에 대해
우려와 함께 역사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충고를 던지는 글이 맨 앞에 들어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용 하나 하나를 보면 지금 시대의 난제를 헤쳐가며 살아가야하는 우리들에게
과거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라는 저자의 고심이 이곳저곳에 잘 담겨 있다.

먼저 개혁에는 아젠다가 필요하다는 점으로부터 시작한다.
무엇을 향해 개혁하지를 모두에게 알려야 따라올 사람과 저항할 사람이 구분된다는 것이다.
자신을 대통령 만들어준 당을 갑자기 깨는 행위나 이제 한나라당과 통합하자고 주장하는 행위
의 중심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는게 현실이다.

백제의 의자왕이 초기에 개혁군주였지만 결국 나라를 몰락으로 끌고간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궁금했었다. 저자는 초기 성공에 자만한 군주가 왕권의 강화에만 몰두해서 자식들을
대거 고위직에 등용하면서 귀족연합형 체제가 무너져버렸다는 점을 들고 있다.
개혁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가야한다는 이치를 다시 깨닫게 해준다.

또 이론이 거창 하다고 치더라도 실제 삶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이건 개혁이 아니라는
점도 강조한다. 행정수도가 지방분권의 가치를 실현한다고 해도 전국을 땅투기장으로 만들면서
거대한 불로소득을 만들어 노동의욕의 쇠약을 가져온다면 그것도 웃기는 일이다.
과거 광해군 시절부터 대동법의 주창에 대해 끝까지 반대입장을 취한게 바로 우암 송시열이다.
예송 논쟁에서 고증을 통해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던 그 이지만 정작 민생에는 준게 없다.
이런 식의 문제점 있는 논란들이 과거사 등 곳곳에 나타난다.

저자의 비판이 현정부에 너무 따갑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건 꼭 노무현을 미워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같은 칼날이 DJ의 실패한 개혁에도 겨누어진다.
처음 집권해서 태종과 같이 과감하고 적과 주변 모두를 정리하고 후반부에는 화합으로
치달았어야 하지 않았냐고 다그친다. 이덕일의 이상적 군주는 바로 정조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과 한지붕 밑에서 국가의 정사를 논해야 하지만
절제된 감정으로 처벌을 최소화하면서도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고 미래를 위한 성장동력을
위해 학문과 민생에 투자한 군주의 모습을 그리워한다.

늘 자신이 받은 학력과 언론의 차별의 불이익을 잊지 못하고
미래의 방향 보다는 개혁이라는 구호만 있으며
교육을 개혁하고 미래산업을 육성할 비전도 없는 현실이 갑갑할 뿐이다.

물론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 적과 아군이 분명하게 갈리고 무소불위의 힘으로
과감하게 정책을 밀고갈 수 있는 혁명은 차라리 쉬울 것이다. 하지만 혁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을 걸어야 한다. 절대적 자유로움은 목숨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하에서의 선거는 일종의 타협이다. 져도 굳이 죽이지는 않겠다는.
따라서 반대자를 포함한 모두를 논리로 이끌어갈 포용적 리더쉽이 늘 필요한 게 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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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내 주변에 발생한 일 두어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까운 분이 같이 작업을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본인, 나 그리고 한 사람 더.
그런데 그 사람이 전에 같은 직장에서 일을 했는데 나와는 상극이었던 사이였다.
내가 느끼기에 공동으로 노력한 것도 혼자 챙겨가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나만 느낀게 아니라 주변에서도 많이 느끼던 사항이라 그런 이야기를 해주니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어쨌든 공동작업 논의는 일단 중지되었다. 물론 내가 나서고 싶지는 않다.

다른 하나.
가까운 후배가 북경에 출장을 갔는데 업무적으로 만난 사람이 있었다.
이름이 나와 비슷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신입사원 시절 나와 같이 근무한 선배였다.
결국 나라는 사람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나도 남을 평가하지만 나 또한 남들에게 쉬지 않고 평가 받는다.

한두 다리 건너면 서로 걸칠 정도로 정말 좁은게 세상이다.

세상에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다.
내가 이 사람과 단지 이번 한번 밖에 만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사람이 혹 이 만남 하나로 나에게 잘못된 기억을 가지면 억울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매 만남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게 일기일회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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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5-08-06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정말 세상이 넓은 것 같아도 알고보면 좁더라구요. 한다리 건너 아는 사람들을 통해 제 친구 얘기 들을때 저도 깜짝 놀라곤했어요. 정말 착하게 살아야 할텐데..^^;

사마천 2005-08-06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우리 모두 이 땅을 떠나겠죠. 그때 무엇으로 기억되고 무엇을 남겼을까요?
참 몸과 컴퓨터가 좋아지셨나봅니다. 다행스럽게. 건강하시기를.
 

직장 생활을 하고 나면 퇴직금이라는 목돈이 마련된다.

그런데 어떤 직장에서는 이 퇴직금이 받는 모두인 경우가 있고
어떤 직장에서는 그 이외의 것들이 많은 경우가 있다.

가령 직장을 옮기며 연봉이 많이 올랐다면 그건 일종의 퇴직금이라고 보아야 한다.
반면 별로 할일이 없다면  그건 퇴직금으로 끝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면 퇴직금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선 선배들을 보면 된다.
매킨지와 같은 컨설팅 회사는 퇴직 연령이 매우 짧다.
승진하지 못하면 퇴직해야 한다는 강제 규정이 있어서 매우 빡빡하지만
그래도 일반 회사에서 매킨지 출신이라면 환영하고 높은 연봉을 보장한다.
이러한 메리트가 매력으로 작용한다.

점점 평생직장이 없어지는 추세다.
따라서 돈 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본인이 습득한 기술 등 모두가 다 퇴직금이다.
그런데 이런 퇴직금도 개인차가 난다. 앞서 페이퍼 하나로 알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산인가
부채인가를 물은 적이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이제 묻고 싶다. 당신은 퇴직금을 비축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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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몰락을 보았습니다.

20세기 최대 권력의 하나 였던 히틀러가 무너지는 직전과 직후를 다룬 영화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 때문에 벙커에 갖혀 있게 되었지만 이제는 아예 지상에서
소련군이 쏘는 포탄까지 사방을 때리게 됩니다.
아 이제 모든게 무너지는게 아닌가 하고 히틀러 주변의 장군들은 생각하지만 여전히
히틀러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어디 선가 막강한 군대가 일어나 적의 배후를 물리칠 것처럼
자신있게 이야기하고 때로는 새로 개발된 독일의 제트 전투기 - 실제 속도면에서 놀라운
효과가 있었지만 불량률이 높아 많은 전투조종사의 목숨을 잃게 했죠 - 수백기가 날라와
적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런 히틀러에게 아무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베를린 바로 앞의 강을 두고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발 물러서 지키면 훨씬 수월할 것을 끝까지 자리를 고수하라고만 외치는
지도부에게 답답함을 느낍니다. 오늘 사형시키라고 명령내린 장군을 직접 만나보고는
거꾸로 방위군 사령관으로 다시 임명합니다.
어떤 명령은 이렇게 지켜지기도 하고 어떤 명령은 아예 무시되기도 합니다.

벙커는 방향을 잡지 못해 혼란 스럽지만 바깥은 더욱 참담하죠.
나이 어린 소년이 탱크 잡는 바주카포 비슷한 무기를 들고 무려 두대의 적 탱크를 잡아내었더군요.
덕분에 히틀러는 철십자 훈장을 수여하는데 이는 자신이 1차 대전 때 받았던 것과 비슷합니다.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에서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타이거 탱크의 굉음을 기억하건데
그 임무를 수행하는 소년의 가슴은 아마 그 훈장 보다 훨씬 단단했을 것입니다. 단지 14-5세 되는
소년이 그렇게 전장에 나갔죠.
반면 이렇게 된 현실을 보는 기존 군 지도부의 심리는 착찹합니다. 마지막 총알이 떨어져도
병사들이 항복해서는 안되냐고 간곡히 묻는 장군들에게 히틀러는 노우라고 답합니다.
거꾸로 꼭 히틀러가 답을 해야만 병사들에게 지시할 것인지 장군들을 보면서 답답하기도 합니다.
더 싸워보았자 이제 부상병과 시민들만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호소에도 전투는 쉽게 멈추지 않습니다.
1차 대전이 끝났을 때 독일의 병사들은 자신의 총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허용받았으며 그들의
명예는 지켜졌습니다.

반면 2차 대전의 끝자락에서 병사들은 끝까지 싸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의
이념에 경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념이 시키는데로 여러가지 잔혹한 행위들을 했습니다.
유태인 학살, 생체실험 등 여러가지 행위들은 그들 스스로 보아도 범죄로 보여질 것입니다.
덕분에 그들 상당수는 시베리아까지 끌려가게 되었죠.

이른바 국가사회주의라는. 이는 소련의 공산주의와 엇비슷한 면이
있었죠. 닮았기에 서로 미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협력하기도 한 그런 모습입니다.
1차 대전의 패전, 대공황을 겪으며 실업자가 거리를 메울 때 바이마르의 민주주의 또한 판산해버렸습니다.
실의에 찬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은 단지 독일인이라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존귀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히틀러는 지지를 긁어모았습니다. 너무 단순하다고요?
성경을 읽어보십시요. 예수가 던진 메시지는 너희가 하나님의 형상을 모방해 창조되었기에
존귀한 존재라는게 주 메시지 아닐까요? 공산주의든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든 이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사상이었고 모두가 함께 잘 살아보자는 전체주의의 모습이 강했습니다.

어쨌든 전쟁은 막바지에 달했고 사람들은 광기에 빠집니다. 히틀러의 마지막에 가장 용감하고 위대한
독일의 어머니라고 칭송받은 괴벨스의 부인이 결국 자신의 자식들에게 죽음 밖에 남겨주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의 모순입니다. 바로 이런게 위대함이라면 아마 독일민족 모두는 목숨을 끊어야겠죠.
바로 그게 바그너의 장엄한 음악에서 나오는 영웅의 운명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한 진리를 체득하였기에 살아남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총탄을 퍼붓는 친위대의 모습 또한 일종의 광기이고 모순입니다.
독일인을 위해 천년왕국을 만들겠다던 그들의 자부심어린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가 기껏 이 수준에
머물게 되버렸군요. 

그렇다고 히틀러의 유산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국민차를 만들어 요즘에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게 만들었고 그 차가 달릴 도로인 아우토반의 모습은 후일 독일을 점령한
미국의 패튼 장군에게서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습니다. 심지어 독일의 체제에 매혹되버린
패튼의 찬양에 놀란 연합군 수뇌부가 그를 강제로 본국 송환시켜버렸죠.
생체실험에 두려움을 느낀 친위대의 의사에 대해 당신의 업적에 대해 나중 사람들은 감사할 것이라고
히틀러가 이야기합니다. 실제 최근에도 유태인들은 당시 수용소에서 행해진 실험의 결과물들인
사진들이 지금도 의학 교과서에 다수로 실려있다고 고소장을 내었습니다.
독일 등 국가들의 생명과학이 강한 것 또한 같은 결과입니다.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를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있습니다. 프랑스는 자국의 노동자들을 범죄자로
몰아 수만명을 일거에 학살해버린 파리 코뮌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고 두 번의 전쟁 까지 대립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반면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최초의 보험 등 사회보장을 만들어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했죠. 비록 반대편을 탄압했지만.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도 뿌리에는 이러한 맥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누누히 강조하건데 히틀러는 타이타닉호에 나오는 것과 같은 3개층으로 만들어진 벽을 없애버렸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히틀러는 모호한 대상입니다.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전두환을 파쇼라고 하죠.
하지만 그런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인 김대중,김영삼,노무현 등에게서도 실제 히틀러에 비해
훨씬 못한 모습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국가를 부도로 몰아가고 또 신자유주의에 모든 것을 내놓으며
부동산 거품을 마구 불어넣어 강남 땅 부자들 배를 불리는 이들이 과연 한 민족의 지도자라고 자부할
만할까요? 얼마전 청남대를 가보았더니 대대병력이 경비하도록 만들어놓았다더군요.
동포의 가슴에 총칼을 박는 지은 범죄가 두려워 국민들을 피해다닌 전두환 등을 보면 이래 저래
한민족의 새로운 리더쉽을 찾기는 쉽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어려서부터 히틀러를 비난 하는 정치인들의 많은 목소리는 들었지만 그를 넘어서는 리더쉽을
보여주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던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영화로 돌아가보자면 분명 반전영화라는 색깔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아마 이를 찬찬히 중립적
시각에서 보고도 전쟁을 다시 일으키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영화속의 수 많은 죽음들 속에서 정말 의미가 있는 죽음이 몇이나 있었을까요?
총탄을 뚫고 적 한둘을 더 헤치운들 역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참고로 이 영화의 대본이 된 책 두권의 시각이 약간 다른데 요아힘 페스트의 책은 읽다보면
이곳저곳에서 그래도 독일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상대방을 더
많이 죽이는 그런 모습들이 나옵니다. 반면 여비서의 말 하나 하나는 대부분 자괴감이 강했죠.

전쟁, 국가의 운명, 이념, 개개인의 선택 등 여러가지 면을 느끼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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