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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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적의 모살에 잃고, 아내를 습격자들에게 빼았기고, 아무것도 없이 굶주리며 포로로 잡혀
노예 처럼 부림도 당했던 사람이 있다. 당연히 교육도 못 받았고 뒷받힘이 될 만한 자산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도 성장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가 바로 사상유래가 없는 대제국의 창업자가 된 징기스칸이다.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활동에는 일정한 철학이 존재하였다.
우선 싸움을 끝내고 구성원을 처리하는 방식이 일정한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과거의 귀족들은 처형한다. 그들은 회고적이고 분열의 씨앗이 될 수 있기에.
이는 마키아벨리도 적극 추구한 방법으로 군주론의 모델이었던 체사르 보르지아가 집요하게 실천했다.
다음 패자들을 자신의 부하로 새롭게 받아들인다. 심지어 노예까지도 풀어서 자유인을 만든다.
아마 징기스칸 본인이 가장 바닥의 노예 생활을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고를 뒤집어 보면 노예라고 하더라도 똑 같이 말타는 재주가 있어서 전사로서 전환이 가능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더 큰 자유에 더욱 감읍하여 충성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고나서 집단의 구성방식을 과거의 씨족 중심에서 새로운 천호제로 바꾸어 버리며
그 장은 전장에서 공이 많은 사람으로 임명한다.
나폴레옹도 레닌도 혁명을 하고 나서 그렇게 처리했다. 징기스칸도 그 원리를 잘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거대한 제국들로 몰려가서 새로운 방식으로
전장의 승리를 거두고 무진장 많은 자원을 약탈해 재원으로 삼는다.

이런 구조를 현대에서 찾아보면 빌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 제국을 비롯해 미국의 벤처의 모델도 비슷할 것이다. 조직원들에게 하나의 꿈을 심어주고 어떻게 하면 그 꿈에 도달하는지 가르켜줄 수 있고, 세세히 그 아래의 과정을 이해하는 인물 그런 사람들이 위대한 지도자일 것이다.

징기스칸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제국의 핵심에는 또한 보편성이 존재한다.
그 핵심은 갈등을 조절할 법이 놓이고 그 위에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이 존재한다.
종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취한 것도 꽤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것이다.

로마도 살펴보면 먼저 모두의 다툼을 공정히 처리된다고 믿을 수 있는 법 체계를 만드는데 주력했다.
물리력은 그 다음인데 유태인들도 자신들의 동포 예수를 붙들어 로마의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않는가?

유목민들이 세웠던 국가들이 수십년을 넘기지 못하고 몰락하던 시절에
징기스칸은 정말 아무것도 없이 출발했지만 수백년을 지속할 수 있는 제국을 만들었다.
오늘의 관점으로 보면 빌 게이츠 혁신자였고 잭 웰치 같은 경영자라고 하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의 삶을 하나 하나 세세히 살펴보도록 도와 준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꽤 좋은 경험이다.
더 해서 몽골세계제국 - 스기야마, 몽골비사, 김종래의 CEO 징기스칸 등의 독서도 마찬가지로
괜찮은 경험이 될 것이다.

오늘 하루 물려 받은 것, 교육 받은 것 없고 오늘이 고달프고 투덜대는 자신들이 스스로를
돌아볼 좋은 그런 좋은 경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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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7-02-15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적인 편견이나 판타지에 빠진 책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전략적인 사고방식을 잘 이해했던 것 같기도 하고... 저도 꽤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이... ^_^

사마천 2007-02-15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쓰여졌더군요. 저자의 다른 책들도 찾아보고 있습니다. 요즘 바쁘게 지내시나 봅니다. ^^
 
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
김용환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뛰어난 일을 한 사람과 좋은 책을 지은 사람은 같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마키아벨리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유배되어 활동하면서 정치학의 고전 군주론을 만든 것이나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만든 것 등이 그런 예다.

반대로 일을 뛰어나게 하고 있지만 책은 매우 허접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특히 선거철에 우르르 나오는 책들을 보면 그런 믿음을 더 강하게 가지게 된다.

책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독창적으로 만들어가야 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중요하다.

최근 박정희 시대에 대해 여러 책을 들추어보고 있다.
얼마전 읽었던 오원철의 책이 꽤 괜찮아서 기대를 가지고 이것저것 살피다가
정치인이자 경제관료였던 김용환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결과는 대실망.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원철은 나이가 더 들어도 한가한 분이다. 전두환에게 밀린 이후에
현직에서 바쁘게 몰려가면서 활동해야 하는 처지는 안되었다.
반면 이 책의 김용환은 아직 현역 국회의원으로 활발히 움직이기 있다.
그래서 시간이 나기 매우 어렵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가치관의 문제보다는 일의 경과 정도를 정리한 부분이 많다.
그리고 워낙 오랫동안 활동하다보니 박정희 초기의 관주도 경제운용 시절의 무소불위
방식 - 대표적인 것이 채무관계를 부정한 8.3조치로 자본주의 기본 원리에 위배되는 약탈경제 -
에서 최근 IMF의 요구를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신자유주의 개혁 - 저자가 DJ 정부 인수단으로
급한 불 끄러 미국을 왔다갔다 하면서 협상 대표로 활약했다 -
까지 가치의 차이 문제가 크게 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런 부분을 심도 있게 논의 한 대목은 거의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IMF 직전 경제 차관이었던 강만수의 책이나 앞서 이야기한 오원철의 책보다 심도가 낮고
바깥으로 비교하면 루빈이 언급한 한국경제의 IMF 상황 만큼 global 시각도 없다.

그래도 아무나 만들어내는 허접한 선거용 프로파간다 보다야 건질 것들이 있다.
관료 시절 말 한마디로 금융권 인사가 뒤바뀌는 장면을 보면 모피아라는 집단의 위력이
여기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때로는 원치 않는 상대방을 은연 중에 추천이라는 이미지로
포장해 한직으로 보내는 솜씨는 마키아벨리즘의 모습 혹은 삼국지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래도 주변에 권한다면 우선 강만수,오원철을 읽고 다시 생각해보겠다.
언제 이 책의 저자분은 좋은 책을 만들만큼 한가해지실까? 아니면 아예 한가해지지 않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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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남자의 생활혁명 프로젝트
이시형 지음 / 청아출판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프로젝트가 한참일 때 이 책을 들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제일 바쁜 동료가 뭐야 하고 보다가 갑자기 푹 빠져들더니 주의깊게 보고나서
몇시간 동안 일을 멈추어버렸다. PM이 와서 들볶던 말던 책을 보고 생각하고를 거듭했다.

무슨 내용들이 책에 담겼기에 그러했을까?

한국의 40대 남성들 특히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이 기로에 서 있음을 분명히 느낀다.
우선 직장과 인생에서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 느껴진다.
그런데 눈 앞에는 두 길이 있는데 한쪽은 성공의 길로 임원 진급, 개인사업 성공 등 환한
모습들이 보인다. 반대쪽에는 퇴출의 길이다.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떠나는 동료의 뒷 모습은
쓸쓸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남으면 인간관계 챙기기위해 밤술도 하고 다시 낮에는 지친 몸으로 스트레스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이런 비 웰빙 삶의 결과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점점 늘어나는 뱃살이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안되는데 스스로 되뇌여보면서도 고민 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직격탄을 날린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그리고 과학적 근거를 하나하나 확인시켜준다.

우선 암이 무서운 것은 전이가 아니라고 한다. 이건 나의 의학상식과 많이 달랐는데
저자는 암이 한곳에 온 것은 이미 몸 여러 곳이 암에게 넘어가려는 추세에 놓인 위험한 상태라고 한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터진 둑 하나를 막기 위해 칼로 도려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몸 상태를
암을 이기기위한 체질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기를 덜 먹으라는 충고도 한국인의 장이 서양인보다 1.2M 길기 때문에 배출하는 과정이
늦고 - 덕분에 과거보다 배설물의 양이 작다(김용옥 왈) - 고기는 생명을 유지하는 비상식량을
소모시켜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차라리 식전에는 과일을 먹어 공복감을 줄여주고 포식을 막는다.
역시 애피타이저 먹으며 얘기하라고 하는 문화가 이렇구나 하는 느낌.

그리고 회식에서 절대로 안주빨 세우지 말라고 한다.
이미 저녁은 넉넉히 먹었고 술먹으며 채운 칼로리 더해서 맛있는 안주를 합치면
몸이 감당하기 어려운 영양축적이 된다고 한다.

천천히 먹어야 하는 이유도 침이 가지는 강력한 소화,살균 기능을 살리기 위해서인데
한동안 직원식당에서 서 있는 사람 눈치보느라 급하게 먹던 습관이 후회된다.
옛날부터 할머니들이 음식을 씹어서 손자에게 먹이는 전통이 있었는데 지금 신세대는
이를 거부하지만 다 강력한 생활의 지혜가 담긴 것이었다고 한다.

내용이 쉬워서 우리 아이도 부분적으로 읽히면서 이해시켰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실천 아닌가? 아이고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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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반양장) - 불굴의 도전 한강의 기적
오원철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높은 정상에 올라가면 발아래로 산 전체의 모습이 들어온다.

가끔 그런 경험을 나누어주는 책들이 있다.

캐사르의 갈리아전기는 갈리아 정복 과정 전체에서 그가 가졌던 생각들을 잘 드러내준다.
그의 행동의 결과 갈리아의 로마가 이루어졌기에 그 생각을 따라가보는 것은 꽤 흥미가 있다.
이 책도 유사한 경험을 나누어준다.

박정희 시절은 물리력을 기반한 강력한 리더십으로 국가의 경제를 만들어간 시대다.
유래없을 정도로 강했던 이 드라이브의 정치적 공과는 잠시 놓아두고 성과를 보면 아직도
많은 다른 나라가 궁금해하고 있다.

이 책은 그 힘의 가장 중심에서 자신의 브레인을 최대한 동원하여 경제를 기획해나간 비서관
오원철에 의해 쓰여졌다.
수십년이 지난 경험이라 좀 낡지 않았을까 의문을 가졌지만 기우라는 것이 금방 판명이  났다.
일을 추진해가면서 획득한 지식과 깨달음을 주는 내용은 지금도 우리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평평한 지도 하나를 놓고 이곳에는 화학공장, 저쪽에는 기계공장을 놓자 하는 한마디에
대산 화학단지가 생기고 창원 기계단지가 생겨난다.
공단과 공단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줄을 그으면 바로 길이 생기고 철도가 이어진다.
이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고위 공무원들의 재테크 노하우가 나온다.
평범한 농지와 공단의 땅값은 다를 것이기에 다들 돈 빌려 투자에 나선다.
대한민국 고위 공직자들이 인사청문회 서면 하나 같이 나오는 투기 문제의 원조가 여기에 있다.

세부적인 산업으로 내려가보면 축적된 지식도 만만치 않았다.
포스코의 성공은 후공정 부분을 완성해 먼저 제품을 만들고 점차 전공정을 채워가는 전략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금 돌아보면 간단한 것 같지만 북한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화학 등 다른 분야에서도 일일이 따져가면서 상대와 비교를 했고 결과는 폭넓게 해외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인 남한의 승리였다.
Tank를 만드는 것도 독특했다. 왜 소련의 탱크가 미제보다 좋을까?
답은 의외로 작게 만든다는 simple한 이치에서 나왔다. tank가 작으면 어떻게 큰사람들이 탈까?
역으로 작은 사람들만 탱크병으로 선발한다는 해법이 도출된다.
결과는 작기에 낮아서 피격되기 어렵고 철의 무게가 적어서 더 많이 만들고 빨리 기동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읽어가는 것은 때로는 박진감 넘치는 전투의 장면을 보여주는 영화 같기도 했다.

어설프게 남의 이론 들여와서 입으로 떠벌리지만 막상 권한 주면 하나도 해결못하는 인간들이 있다.
노무현과 주변의 집단들이다.

최근 최장집 vs 조희연 논쟁이 있었다.
과연 지금 집권세력의 문제는 무엇이고 계속 집권하는 것이 사회전체적으로 바람직하냐는 논란이다.

내가 볼 때 노무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조교수 쪽은 아직도 상아탑에서 적당히 가공된 외국산 툴을 조합하고 여전히 신념에만 매달려 자신의 이론과 신념에 부합하지 않는 현실을 외면하는 꼴 이상이 안된다고 느껴진다. 차라리 최장집 처럼 안되면 놓으라고 하는 태도가 더 솔직하지 않는가?
최근에도 보면 한홍구 교수를 비롯해서 조희연 교수와 유사한 분들이 많은데 솔직히 종이 값이 아깝다는 느낌을 넘지 못했다.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들이 한국의 마오이스트들을 만나보기 보다는 박정희 시대의 테크노크라트 - 황병태 등 - 에 훨씬 관심이 많았고 박태준을 영입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잘 음미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건데 박정희 시대의 모는 과를 안고가서는 안된다.
박근혜가 인혁당 재심논란을 자신에 대한 정치적 공세로 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정치적 선택이다.
386세대가 다시 노무현을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혁당 사형까지 박정희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도 그 정도 수준에 밖에 정치적 조언을 받지 못한다면 대권을 쥐고도 노무현처럼 소규모 측근에 둘러싸야 대세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반대 입장에서 손쉽게 나는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우습지도 않은 개념 만들고 떠벌리고 다니는 후안무치도 없어져야 한다.
얼마전 한홍구의 글 하나를 보니 아직도 유시민에 대한 꿈을 버리지 말자며 80년대 항소이야기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때 그 글은 분명 감독적이었다. 아마 유시민이 정치인이 되지 않고 외곽에서 비판을 해나가고 있다면 여전히 어느 정도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정치인 특히 책임을 맡은 행정부는 그 결과물로 심판받아야 한다.
성과 나오지 않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기회비용의 손실이고 한 마디로 밥만 축내는 밥통보다도
못한 존재일 따름이다.
그런 노시민 그룹을 변명하기 위해 추억을 들먹이는 태도는 오늘도 고난의 행군을 써먹는 모 집단의
태도와 별로 차이가 없다.

좌냐 우냐 과연 그 기준이 앞으로도 그렇게 중요할까?
자유주의,신자유주의,사회주의 모두들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장단점은 있지만 시대와 상황에 따라 각자 몸에 맞는 해법을 다를 수 밖에 없다.
자신에게 맞추는 치열한 고민 없는 모든 논설은 가치 없는 프로파간다일 뿐이다.
그것이 없다면 유시민과 공병호 두 사람의 case에서 볼 수 있듯이 같은 수준의 잡다한 이야기꾼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보면 조희연,한홍구의 책 보다 분명 이 책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 더 값어치 있다. 가끔 독설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자신감,기획력 그리고 폭 넓은 시야는 분명 배울 점이다.
가까운 중국이 침흘리며 사려는 경험을 우리는 너무 쉽게 내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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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구박사 2007-02-14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궁금합니다...^^
남들이 다 지겹다고 했을 때, 박정희를 떠들던 사람의 하나로, 아직도 궁금합니다...
1. 입증가능한 역사적 과거로서의 실체적 경험인지 (아님 그냥 결과론인지)
2. 재생할 수 있는 경험인지 (그냥 교훈 수준의 경험은 아닌지)

▩ 개발독재 뒤집기


개발독재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생각은 거대한 담론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독재는 했지만 경제는 건설했다”는 것과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못했다)”는 것으로 대변할 수 있다. 이런 담론구조는 사실확인과는 별도로 일종의 믿음, 즉 신념체계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다수대중이 이런 신념체계를 받아들이고 있고 그것이 정치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존재하는 사실”이 된다.



이것은 마치 “이승만은 너무 늙어서 아랫사람들이 그렇게 부정부패를 저지르는줄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들과 닮았다. 한편으로는 몇 년이 아니라 근 20년(후계통치까지 합하면 3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이것을 사실로 인정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권력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사실이냐 아니냐와는 관계없이 “사실로 믿도록 강제할 수 있는” 방법과 자원을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망각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했던 사실”이 되려면 현재 존재하는 정치이슈로만이 아니라 과거에 실제했던 사실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검증작업은 사실상,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사실 검증할 주체세력이 형성되지 않은 상테에서, 오히려 기득권세력은 줄곧 “민주화”에 대한 공격목적으로 개발독재 이데올로기를 “양산”했으며, 이 포화는 이미 시장을 거의 완벽히 독점하고 있는 언론권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김영삼 정부 시절 복고적 이데올로기 공세로 굳어진 개발독재에 관한 담론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범사회적으로 검증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한다. 그것은 교과서에 그렇게 써놓았다는 말이다.



반대로 이런 이데올로기에 저항해야할 과거의 야당 정치권력은 오히려 기득권과 결탁하여 정권을 획득하고자 했고, 그 결과 그들은 이런 이데올로기 공세의 보조역을 자청했다.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세력”의 결합이니, 경제개발 결과를 새로운 세기에 맞게 재편해야한다느니 하는 것은, 비록 한계를 둔다해도 “개발독재의 올바른 영향”을 인정하는 중대한 선택이었다.



이런 사회적 주류흐름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도덕적 저항에 대해서도 “바르다”는 판단을 내리게 했고, 저항해야 마땅한 나쁜 짓을 행한 군사정권이 행했던 “경제개발정책”에 대해서도 “바르다”는 판단을 내리게 강요함으로써, 왜곡된 가치관을 낳고 말았다. 한마디로 독재는 민주주의를 위한 필요악이었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이런 이데올로기를 학문적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런 “승화”작업은 과거 기득권 세력이 주축이 된 적극적인 부류와 “일단 이루어놓은 것은 부인하지 말자”, “현재가 중요하다”는 소극적인 부류로 나뉘지만, 어쨌거나 개발독재 이데올로기 공세의 아카데미즘으로 전락해버렸다.



여기에는 “아시아적 가치”나 “유교적 자본주의”같은 “민족적 민주주의”의 신종모델이 모두 포함된다. 때로는 이런 이론들이 외국사례까지 차용해 이광요나 마하티르의 서구저항적 자본주의 모델과 박정희의 것을 같은 논리의 연장에 놓고보는 수도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과오다. 왜 그런지는 차차 설명하자.



어쨌거나 우리는 30년의 세월, 멀게는 40년의 세월을 거슬러 세계경제가 어떤 식으로 변화했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실상이 어떤 것들이고, 그 결과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 또한 개발독재로 인한 “기회비용”까지 냉정하게 따져봐야한다. 이것은 학문적인 과제이며, 결코 정치담론으로 굳어져서는 안된다. 내가 항상 담론에 저항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남한에서 “박정희가 나라를 살렸다”고 하는 동안 북한에서는 “수령께서 우리를 구해냈다”고 가르쳤으며, 남북한을 돌이켜보면 이것이 결코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들이밀 수 있는 증거는 한 둘이 아니다. 흔히 우리를 북한이나 중국, 또는 더 못산다는 나라와 비교하면서, 그게 다 박정희 덕이라고 치부하고 마는 것을 보는데, 이게 바로 이 담론구조의 특성이다.



같은 자본주의권과의 경쟁에서는 여지없이 패퇴한 결과, 비교가능한 대상이 겨우 이런 제한된 “봉쇄경제 독재정치”를 펼친 아시아국가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유아적 발상으로는 정말로 나라를 사랑하기 힘들다. 기왕이면 경쟁대상의 수준을 좀 높이는 것이 어떨까? 하긴, 경쟁대상을 돌리면 비교할만한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도대체 이런 담론구조를 끝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간단하게 말해 “이땅에서 보릿고개를 없앤 공화당”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복지정책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를 객관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과연 개발독재가 빚 얻어다가 공장 세우고 농사판 다 뒤집어엎어 시골처녀총각들을 공돌이 공순이로 만들어 잠안재우고 수출해가며 이룩한 것은, “다른 방식으로 했을 경우” 정말 이룩하지 못했을 것인지, 만약 다른 방식을 채용했을 경우 더 나아질 수는 없었을 것인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담론구조에 빠지면, “그래도 경제를 이룩한 업적은 있는 박정희”라는 함정에 빠져, 역사를 거꾸로 보는 꼴이 된다. 그러면 거기서는 정신병적인 “운명”과 “필요악”과 “밉지만 고운” 괴상한 괴물이 등장한다. 나는 박정희가 이런 식으로 평가받고 싶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자긴 잘했다는데 우린 왜 그저 “필요악”이라고 하는가? 잘했는지 못했는지 결과는 분명 하나다. 아니라고? 경제는 잘하는데 정치는 못할 수가 있다고? 그걸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괴상한 버릇”이 바로 우민화정책의 결과라는 걸 모르는가? 정치가 뭐라고 생각하시는가? 경제가 뭐라 생각하시는가?



나 역시 이런 담론같은 추상적 어구로 이 글을 맺지는 않는다. 통계에 약하긴 하지만, 통계수치까지 들이대면서, 때로는 이집트나 이스라엘이나 스페인이나 영국까지 비교해볼 것이다. 제한된 자료지만 내가 무슨 박사 따려고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므로 이 정도도 잘 하는 거라고 믿는다. 이 작업은 다음 글에 올리겠다.



※ 자유민주주의의 경쟁력


자유민주주의는 왜 다른 체제와의 경쟁에서 승리했는가? 많은 문제를 안고있는 자유민주주의지만 근세에 들어 다양한 정치체제와 경쟁해 “승리”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① 미완결의 현재진행형 정치체제 (원칙만 있다)
- 절대 선보다는 현실적인 악을 피해가는 성격
② 실패에서 반성하고 변화할 줄 아는 유연성
③ 내부에서 발생한 체제전복적 세력을 포용하는 시장성



※ 한국적 민주주의와 닮은 것들
① 주체적 사회주의 : 보편에 대한 완강한 거부로
② 덩샤오핑의 신중국 : 정경의 극악한 분리개념으로
③ 프랑코 파시즘 : 히틀러/ 무솔리니의 아류로
④ 피노체트 군사정권 : 패거리 쿠데타와 정경유착으로
⑤ 노리에가(파나마) 정권 : 정권유지를 위한 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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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없었으면 경제개발도 없었다는, 그래서 “민족중흥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는 평가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너무 심한 “자학”이다. 그것은 정말 민족성에 대한 멸시이자 종족의 인간적 능력을 원숭이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야만이며, 결국 역사에 대한 정말 낯뜨거운 조롱이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들이 사실과 다른 숱한 담론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은 이미 설명드렸지만, 그 담론조차 “신화적 허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흔히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맨손으로 총알을 잡으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원쑤들을 혼쭐내신 수령님”타령을 들으면서, 같잖은 웃음을 짓곤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치들은 순진하기나 하다. 그래서 웃음거리로 끝나니 다행이다. 거기에 반해 박정희 신화를 만드는 인간들은 정말 간악하다. 거기에는 역사왜곡과 사실조작이 있고, 때로는 인권을 유린하는 실존인물에 대한 “과감한 공격”의 결단도 있다. 그들의 수호신 박정희를 보호하고 빛내기 위해서라면 그들은 결사항전도 불사하며, 나라가 거덜나더라도 그 가치는 지켜야한다고 믿는다. 이것조차 북쪽과 너무 닮아있어 가끔씩 착각을 하게 만드는 유치함의 극치이기는 하되, 그 막강한 전파능력과 “관심을 끌어당길 수 있는 권력”에 대해서, 사람들은 너무나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좃선”이 끔찍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그들은 대중의 몽매함에 기초한 사유언론 권력을 이용해, 역사로 가장하고 그것을 자라나는 2세들에게까지 재교육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역사 바로잡기”로 오도되는 오늘의 현실이, 히틀러 치하의 독일보다 더 끔찍하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살아있는 전두환에 대한 칭송이 더 도덕적이다.



죽은 박정희를 살려내 자신들의 왕국을 지켜내려는 이 세력의 파렴치한 음모는 30년을 뿌리내린 지역차별과 인권유린, 정치유린, 가치파괴, 역사왜곡, 문화말살, 도덕멸시, 환경 거덜내기를 “보릿고개를 없앴다”는 가당치 않은 “그들만의 구호”로 정당화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이 독점했던 지식을 악의적으로 편집, 왜곡해 공중망을 통해 전파하고 있다.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정치권력에 대한 훈수와 압력행사,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를 정치 권력화해 실제로 한국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주려는 극우파시스트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과거에 우리는, 지향해야할 것과 지양해야할 것을 분명히 알고있었으나, 이제는 섞여버리고 변색해버린 이 위장색 때문에, 그들이 바로 그 파시스트들이라는 사실을 왠만해서는 파악하지 못한다. 지식인이건 일반대중이건 그 차이는 크지 않다. 우리는 어려운 경제사정과 계급갈등에 처해있는 20세기 말 한국의 현실이 파시스트들이 살아가는 토양이며, 그들이 이 고통을 거름으로 자라나, 세기초와 세기말에 우리가 경험한 적이 있는, 인간본성을 회의하게 만드는 파시스트 국가를 세우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정말 이 상황이 위험스럽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나 50년만의 정권교체라는 초유의 권력이동이 일어난 마당에, 대중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을 이 정권이 전 정권에 맞먹는 실패를 반복하면, 파시스트 세력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김대중은 무조건 성공할 것이란 보장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이 걱정은 결코 과민한 반응이나 기우가 아니다. 419 이후의 정치경제적 상황도 바로 이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으며 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 후기도 다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과연 “사실적인 박정희시대”를 찾아내고 진실과 허구를 분리해낸다는 작업은 그렇게 급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한다면, 파시스트들의 젖줄기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작업이 진행되지 않는한, 지루한 소모전으로는 악몽같은 이 시기를 버텨낸다한들, 그들의 또다른 파괴적 유희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 시점에서 해야하는 정확한 사실의 복원과 “역사회복”은 정말로 중요하다.



만약, 우리의 생각이 사실이 아니고 저 파시스트들의 주장대로 박정희가 우리민족을 중흥시켜 오늘의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용기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주장이 아니라, 사실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날조되지 않은 “우리들의 박정희 수령아바이”의 진짜 모습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그대들은 과연 김일성보다 박정희를 더 잘 알고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우리의 문제의식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1999.2

 
죽음, 또 하나의 세계 - 근사체험을 통해 다시 생각하는 죽음
최준식 지음 / 동아시아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누구에게나 닥치지만 아무도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주제가 있다.
바로 죽음이다.
그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종교가 그 영역을 독점하기도 하지만 현대에 와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탐구해보는 사람도 있었다.
죽기 직전에 살아온 사람, 혹은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는
근사체험의 분석이 그것이다.

근사체험을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이 LSD와 같은 마약 복용과 비슷하다는 분석도 있는데
이를 놓고 의학계에서 괴로움을 줄이려는 호르몬의 집중 분비에 의해 나타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한다.
반면 수천키로 떨어진 집에 갔다왔다고 하는데 그 묘사가 정확하다는 특정한 증언들이 그 반론으로
제시된다.

어쨌거나 우리는 정확한 죽음 이후의 영역을 알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최준식 교수는 이 책에서도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우리에게 이해를 돕고자 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주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 내세가 있던 윤회가 있던 그건 일종의 연장일 따름이다.
시간을 늘려서 계속 존재하는 것이 종교가 추구하는 목표가 아닐 것이다.
동양의 종교의 추구하는 바는 저기 저 너머로 가서 그곳에 있자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자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지금 여기에서 깨달아야 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깨달아야 하고 바로 여기에서 나를 초월해야 한다"
302-3page

더해서 노년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이키루>라는 영화다.
30년 봉직한 공무원이 갑자기 죽음의 선고를 받았을 때 그는 충격을 받고 다시 돌아보니 자신은 쳇바퀴만 돌았지  의미는 없이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죽기 전에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찾아보니 공무원으로 그만한 지위에 오른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공원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모두 다 귀찮다고 미루던 일을 단시일에 해치운 그가 개장 직전에 그 곳에서 그네를 타며 조용히 숨을 거두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분명 사랑과 봉사만이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게 해주는 덕목이라는 것에 눈을 떴을 것이다.
죽음은 평범한 우리들을 더 높은 성숙한 경지로 끌어올려 우리의 전체를 바꾸어버리는 힘이 있다.
304-5page

우리가 살아야 할 공간은 어제의 놓쳐버린 기회도 아니고 미래의 막연한 꿈도 아니고
바로 오늘 이순간이다. 가장 귀중한 자원인 시간을 이것저것 허접한 일에 보내면서 그 삶을
길게 길게 늘려만 달라고 기도하거나 막대한 돈을 수명 연장에 투입하는 것이 과연 현명할까?
오늘 우리가 먹는 식사 하나를 위해 수많은 동물이 희생되었다.
과연 우리의 삶은 그 동물들의 죽음을 딛고 서야만 할 정도의 가치를 주변에 주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육식을 위해 동물을 사육하고 다시 그들의 먹이를 위해 사료만들기 농업을 기계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그 결과는 많은 종들의 멸망이고 지구의 온난화다. 특히 소가 내뿜는 방귀에 담긴
메탄에 의해.

이 상황이 되어 지구의 모는 종들을 멸망으로 몰고 가는 것 보다 오히려 인간이 지금 보다 1/10 혹은 1/100 정도로 줄어든다면 지구가 현재 겪는 고통이 보다 줄어들 것이라는 만화 <기생수>가 주는 메시지가 더 설득력이 있지는 않을까?

존재의 가치를 묻는 것 이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 여부를 떠나 우리에게 꾸준하게 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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