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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건축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살기위해 필요한 3대 요소가 의식주라고 하는데 그 중 특히 주에 해당하는 부분이 건축이 담당하는 것 같다. 인간은 그리 강하지는 못하지만 생각하는 능력이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먼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동굴을 찾았고 점차 움집 등으로 자신의 주거를 안정화시켜 왔다.
건축의 기본 목적은 공간의 확보일 것이다. 안전한 공간 특히 동물과 같은 외부의 침입이나 기후의 변화에 대해서 생물적으로 자기 보존을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 목적이 될 것이다. 특히 가족의 거주 목적을 위해서 몇 가지 유형으로 공간을 나누어 확보해나갔다.
목적을 중심으로 조금 시야를 넓히면 신을 위한 공간인 신전, 죽은자를 경배하기 위한 무덤, 여러 사람들의 교류를 위한 회당 등이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건축물들을 보면 인간이 추구한 두 가지 방향이 나타난다. 하나는 예술로서 특히 심미안을 만족시키기 위한 방향이 있고 다른 하나는 공학적 특히 안정성과 효율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방향이 있게 된다. 건축가라고 자신을 자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자신의 작품이 오래오래 남아 이름을 잘 떨치기를 바랄 것이다. 한번 만들어진 건축물을 부수려면 수십년이 걸리기 때문이니 말이다. 참 한국이라면 예외적으로 단 20년만 지나도 아파트를 부수게 한다. 아마 많은 건축 관련 관료들이 삼풍이나 와우, 성수대교에 놀라서 그런 정책을 수립했는지 모르겠다.
건축물 자체가 오래 남아 이름을 떨치려면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 우선 장대함이 될 수 있다. 노트르담, 비잔틴, 쾰른 등에 남아 있는 대성당이나 왕들의 성들 그리고 피라미드 등이 주는 장대함은 인간이 이렇게 커다란 존재구나 하는 자부심을 갖게 한다. 이는 커다란 폭포와 대양을 만나며 자연에 대해 경외를 갖는 것과는 상이한 감정이다.
그 장대함을 만들어낸 것은 과연 소수의 노력 만일까? 아니다. 성당을 보면 외부의 작은 조형물이나 안을 장식한 스테인글라스와 같은 유리 장식 심지어 벽돌 하나까지도 많은 공이 들어가 있다. 만든 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노동을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에 따라 신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고 자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곳곳에서 위대한 건축물에 감탄하지만 꼭 당대에 그것이 건축주들에게 행복을 준 것만은 아니라고 보인다. 베드로 성당을 거창하게 만들어 종교의 권위를 다시 살려보겠다던 교황의 의지는 결국 면죄부까지 남발하며 자금확보에 나서는 추태를 보이게 했다가 독일을 중심으로 군주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 결과는 종교전쟁이 되어버린다. 타지마할에서 느끼는 왕비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마음은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을 인도로 끌어들이지만 왕 자신은 유폐되어 죽어야만 했다. 가깝게 디즈니랜드의 모델이 된 노이반슈타인 성은 어떠한가? 왕국을 위태롭게 한 결과 왕은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런 예들이 건축의 질과 인간의 삶의 질이 꼭 같이 가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라면 여기 책에서 보통이 거론한 몇가지 사례도 비슷한 논리적 밑받침이 되어주는 것 같다. 거장 코르뷔지에의 작품들이 실 거주자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움을 주었는데 어떤 이는 소송을 걸고 또 어떤 이는 자기 식대로 변형을 가하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 하나 더 붙여 준다면 라이트의 낙수장도 매한가지였다고 들었다. 도대체 집 안에 물을 들여 놓는다는 것에 대해 거주자는 매우 놀랐고 갈등 또한 작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문제는 왜 나타날까? 기본적으로 창조란 기존의 것의 파괴를 의미해나간다. 그 결과 우선 놀라움을 줄 수 밖에 없고 더해서 창조된 질서는 아직 불안정해서 기술적으로 완벽히 그 안에 거주해야 하는 사람들의 안정성을 충분히 담보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준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예술을 추구하는 많은 거장들은 꾸준히 기술이 새로이 허용하는 한 자기 식의 실험을 할 수 밖에 없다. 특히 고전적 재료인 나무와 돌, 콘크리트를 넘어서 근대에 이르러 철과 유리가 도입되자 자유로움의 추구는 매우 다양해졌다. 스페인에서는 가우디에서 나타난 실험도 있지만 미스 반 로데에 의한 심플하면서도 혁신적인 유리에 더 많은 역할을 부여한 실험도 새로운 전형이 되었고 보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건축물의 정방향 자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최근 한국에 나타난 SK유의 건물이나 삼성동 코엑스 앞에 놓인 현대산업개발 본사의 모습이 그런 예들이다. 처음 독일 하노버에 갔을 때 전시장의 건축물 하나 하나가 다 지상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에 무척 놀랐다.
사실 고딕 성당의 주변이 수 많은 기둥과 일명 플라잉 버트리스로 채워져야 하는 것은 공학적 한계에 따른 필연성이었다. 이쁘게 보이는 것 같지만 무척 번거롭고 많은 비용이 드는 작업이었다. 이런 한계를 덜어내주는 기술의 발달 특히 품질 좋은 철의 사용은 건축가에게는 큰 매력이었다.
그렇게 한쪽에서 자유로움이 추구된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늘 비용 대비 효율이라는 문제를 들먹인다. 그리고 왜 꼭 예술이 새로움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물어간다. 과거에 이미 훌륭한 전형이 있지 않은가 하며 그리스의 고전작품을 거론한다. 마치 자신들의 삶이 그와 비슷하다고 자부하는 태도가 자신을 둘러싼 건축물에 의해 담보되는 양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느 시대에는 현실을 강조하는 주장이 강했고 다른 시대에는 이상을 강조하는 주장이 강했다는 점을 보통은 잘 드러내준다. 그리고 속에 담긴 위선까지도 잘.
그럼 도대체 건축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도움을 줄까? 여행의 기술에서 꼼꼼히 보통이 알려주듯이 무엇을 느껴서 알기 위해서는 사전에 준비된 또 다른 앎이 필요하다. 여행의 상당 부분은 사람들의 이해가 차지하게 된다. 이를 뒤집어 보면 사람을 둘러싼 공간의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집,사무실,상가 그리고 종교적 건축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속의 사람들에 대한 이해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절이라는 공간은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이해 없이 제대로 소화될 수 없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래서 산사를 다룬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이라는 김봉열 교수님의 책을 들추어보겠다는 의욕이 생긴다. 또 성당을 제대로 알기 위해 데이비드 멕컬레이의 작품을 찾게 된다.
조금 더 욕심을 내본다면 건물과 건물이 함께 만들어내는 도시라는 공간까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럼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보통의 작품 중에서 이 책은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할까? 나의 답은 더 많은 사례와 더 많은 숙려가 있어야 <불안>이나 <여행의 기술>의 수준에 오르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다. 대상이 되는 건축물이 일부로 한정되었고 특히 동양의 주요 건축물과 그 배경에는 아예 관심이 미치지도 못해서 아쉬움을 주었다. 그래도 아주 실망스럽다고 투덜대는 것은 아니다. 덕분에 나도 이렇게 긴 리뷰를 쓰면서 평소 내가 생각했던 건축에 대한 잡다한 사항을 함께 끄집어내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참 사는 것을 고민하는 분들에게는 아마 여행의 기술(페이퍼 백이긴 하지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는 할 것 아니냐고 조언은 할 수 있겠다. 나는 이미 하나 주문에 3권을 덤으로 받는 이벤트에 주문을 눌렀고 <불안> 한권 만으로도 지불한 대금을 훨씬 넘어서는 기대 충족이 되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