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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2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전쟁의 영웅은 현실의 권력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일까?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로마의 장군 크라수스를 격파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한 장군이 왕에게서 잔을 받고 나서 독에 의해 죽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생각을 뒤집어보면 승리의 영광을 누린 장군이 아예 현실의 권력을 접수하려는 예도 많이 있다. 나폴레옹은 상승장군에서 아예 황제로 등극해버렸다. 제2의 나폴레옹이 나오지 않도록 러시아혁명의 주역들이 트로츠키를 경계한 것이 스탈린의 독재를 불러왔다는 분석도 있다. 가깝게 보면 조선의 이씨왕조 자신이 상승장군 이성계의 권위를 입고 고려의 왕씨 왕조를 뒤엎었다.
역사가 이러다 보니 왕의 경계는 어쩌면 매우 당연한 흐름인지 모른다. 그런데 현실의 권력과의 충돌은 왕과의 갈등만이 아니었다. 당장 적이 쳐들어올 것 같은 상황에서 군대는 항상 경계하고 자신의 몸을 키워야 했다. 먹어야 했고 무기를 만들어야 했고 성책을 방비하며 배를 늘려야 했다. 군비가 이제 충실해졌습니다 라는 보고서 하나를 올리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백성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 백성들에게는 멀리 왜인을 막아야 한다는 대의 만큼이나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목줄이 시급했다. 굶어 죽으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도의 왜를 막아냈기에 백성이 생존할 수 있었지만 군대를 부양하는 부담 또한 타지역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클 수 밖에 없었다.
지방의 수령 또한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자신들이 백성이 무수히 끌려가고 식량을 공출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수행하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가령 규정에는 쌀 100가마를 보내라고 했다고 치자. 이미 전란으로 세상이 흐트러진 상황에서 평시의 기준은 절대로 충족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순신의 요구에 형식적으로나마 대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정에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게 된다.
이런 시각차가 엄연히 존재했고 양측 사이에서는 강한 긴장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조정의 권신들은 쉽게 통제되지 않는 각 지역의 군 사령관들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고 반대로 전선의 사령관들은 목숨을 거는 만큼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불만이 많았다.
그것이 바로 칼의 불만이었다.
국가와 국가의 경계를 지키는 칼, 그 칼을 쥔 자들은 항상 자신의 옷이 바로 수의가 될 수 있다는 각오로 산다. 순신 또한 갑옷을 벗고 편하게 자지 못해 몸에 부담이 생겼다. 물에 떠다니다 보니 몸은 출렁거렸고 식량 또한 충분치 못한데 부하들을 채 먹이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먹어야 했기에 마음의 부담이 작지 않았다.
다음으로 전선의 영웅이 된 것은 좋지만 그 반대 급부로 적의 표적이 되어서 고향 아산에 적의 기습부대가 출동하여 일가의 손실이 컸다고 한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보낸 아버지의 아픔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더해서 비록 창기라고 하지만 정을 주었던 연인은 왜군에 의해 죽고 어머니의 3년상은 채 치르지 못한 것 등 불효의 부담은 컸다.
거기다 더해지는 것은 왕이 항상 자신을 불충 죄인이라고 뒤집어 씌울지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있었다. 왕은 자주 사적인 요구들을 해왔다. 왕릉을 파헤친 적병을 찾아오라는 주문이 그런 것이다. 하긴 순신도 자신의 아들을 죽인 적병을 직접 참하게 된다.
이제 다시 시선을 돌려보면 전쟁의 또 다른 슬픔이 나타난다.
적을 물리치고 발견된 배 안에서 조선인 포로들이 나타난다. 그들을 심문하니 다양한 이적행위가 나타난다. 물길을 알려주고 우물의 위치를 알려주고 적을 위해 배를 저었고 심지어 총포를 쏘기도 했다고 한다. 자신의 죽은 부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이들을 처단하게 해달라는 부하 장수의 요청에 이순신은 뭐라고 답할까? 그 백성들을 지키지 못한 우리 스스로가 처벌받아야 하지 않냐고 되묻는다.
또 칠천량의 죽음의 현장에서 병선 10척이라도 끌고 도망나온 부하장수를 너무 탓할 것도 없다.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그렇게 기다리던 우군의 분대를 이끌던 장군은 결국 패배를 불러왔지만 남은 전력을 온전히 보전해서 프랑스 육군 원수가 되었다.
순신도 바로 그 10척이나마 가지고 있었기에 노량의 해전을 이끌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릇 장수는 미워해도 그에 끌려다닌 부하들까지 탓 할 수는 없게 된다.
어쨌든 이 대목에서 이승만이 떠올랐다. 김동춘의 책에 의하면 나이 든 어르신이 겪은 6.25에 대한 기억 중에 이승만 나쁜 놈이라는 부분을 잘 드러내준다. 전쟁이 발발하면 개성에서 점심, 저녁은 평양이라고 호언장담하던 정권은 적군이 내려오자 서울은 반드시 지킨다고 광고 해놓고 먼저 내려가면서 다리를 끊어버렸다. 그 다음 그들은 소위 수복된 서울에서 부역자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잠시 북한군에 끌려 깃발 흔들었던 죄 밖에 없는 어린 여학생을 몰아다가 총살시키는 등 갖은 행패를 보였다.
이순신과 이승만 두 사람의 그릇 차이가 나타나는 대목 아닐까?
비슷한 현실은 후일로도 이어진다. 조정래의 <오 하느님>이라는 책을 보면 일본군으로 징집되었다가 적군에 의해 소련군 다시 독일군으로 끊임없이 유전해가는 조선의 백성들이 나타난다. 수군이라는 것이 역할이 서로 나뉘다 보니 가장 바닥의 노 젓는 일은 노예와 같이 하층민들에게 맡겨지는 일이 많았다. 로마 시대의 모습은 영화 벤허에서 주인공이 받은 벌이 바로 배 젓는 일이었다는 점을 참조하시면 될 것 같다.
이제 전쟁은 막바지에 다다르게 된다. 명군이 참여해서 북진을 막아내었고 서서히 압박하면서 외교전이 전개된다. 양쪽의 신경전 와중에 명은 해군도 추가 파병해준다. 그런데 이들은 싸움에 바로 동참하지 않고 강화도에 머물며 대접을 잘 받고 있었다. 순신은 여기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하긴 막상 남도로 내려와도 먹일 병량이 별로 없었다.
최고의 병서인 손자병법을 보면 가장 뛰어난 싸움의 전략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중국의 장수들은 하나같이 남의 나라 싸움에 와서 자신의 부하 목숨을 잃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싸우지 않고 서서히 압박해가며 전과를 올리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왜군들은 포로나 부상병을 활용하여 상대가 원하는 전리품인 수급을 만들어내었고 이를 넘겨주며 자신들의 안위를 돌보았다.
그들의 교묘한 머리싸움에 비해 순신의 원수 갚기 사고방식은 오히려 순진한 측면을 드러낸 것인지 모른다.
싸움의 결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원하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전개되었다. 그가 가장 아끼고 믿음을 주었던 주력군들은 전쟁에 참여해서 큰 부담을 졌지만 속에 검은 생각을 가진 토쿠가와의 경우 전쟁 참여를 회피하며 서서히 힘을 길렀다가 마침내 자신이 만든 정치구조를 뒤엎고 자신의 자식을 죽여버리게 된다.
명나라의 경우도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큰 부담을 조선에서 지면서 남방의 반란과 북방 이민족인 여진의 대두를 막지 못해 결국은 정권이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전쟁 과정에서 그들은 조선의 모습을 보며 성리학의 교조주의 보다는 양명학을 강조했는데 그들이 남긴 유물 중 하나는 관우를 모신 동묘다. 지금 전철역 동묘역 바로 옆에 있는 바로 그 건물이다.
더해서 전염병도 퍼지게 된다. 사람의 교류는 병의 교류를 만들어낸다. 일본,중국 멀리 네덜란드와 같은 이방인까지 함께 하게 되면 이들이 가진 병균이 다 퍼지게 된다. 덕분에 곳곳에 전염병이 돌게 되고 드라마 허준을 보면 이 병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온다.
조선은 또 어떠한가? 명나라는 재조의 은을 거론하며 수시로 사절을 파견했는데 이들의 뇌물요구는 매우 커서 재정의 부담을 적지 않게 주었다.
그리고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조선의 왕조는 또 다른 전쟁을 부르게 된다. 정묘와 병자에 일어난 청과의 갈등은 외교의 실패, 현실감각의 부재, 당파에 치중한 왕조와 권력의 말기 현상이 잘 드러난다.
무릇 역사를 배우지 못한 자는 실수를 반복하기 나름이니까 말이다.
순신의 유명이 달리한 이후에도 그 명성은 멀리 멀리 남는다. 중국에서도 노량의 전과는 놀라운 것이었기에 중국 황제에게 천거하겠다는 명의 장수 말이 빈 소리로 들리지는 않는다.
고래로 명장들은 자신의 장단점을 잘 이해하고 지리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제갈량의 적벽대전의 경우를 보면 그 계절에 동남풍이 가끔은 불어온다는 지리적 상황을 현지인으로서 알았기에 가능한 싸움이었다.
순신은 자신들의 군대와 병선 그리고 주 무기인 총통의 성능을 종합할 때 적과 적당한 거리를 두면 싸움이 유리할 것임을 잘 알았다. 괜히 용감히 돌격해서 적에게 근접했다가는 바다에 떠 있는 육군이었던 적에게 단숨에 먹히고 말 것이었다. 그래서 항상 거리를 두고 적을 유도해서 격파해내었다. 반대로 싸운 사람이 바로 원균이었고 그 결과는 칠천량의 참패가 말해준다. 무릇 만용은 결코 없는 것보다 못하리리라.
적은 수의 군대와 무기로 상대를 효과적으로 물리친 장수로는 롬멜을 거론할 수 있다. 그의 탱크가 적보다 빨랐던 것도 아니고 숫자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 보급이 충분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늘 지리를 활용해 포진을 설치하고 적을 유도한 것이나 집중해서 적의 약점을 돌파한 것 항상 적 가까이 직접 항공기를 몰고가서 전황을 파악해 즉시 대처한 점 등이 그의 승리를 만들어낸 주요 요인이었다. 마침내 적은 그를 일종의 영웅으로 치부하면서 자신들의 패배를 합리화 시켜버린다. 영웅에게 어찌 범인이 당하리요 하면서 말이다.
순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적의 존경은 전란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이어진다. 노일 전쟁의 핵심이었던 쓰시마 해전의 경우 일자진에서 학익진으로 전환하는 이순신의 전법을 그대로 차용해 내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승리를 전후해서 순신의 사당에 참배했다는 점은 순신이 이제 한 지역 한 시대의 영웅이 아니라 역사의 인물이 되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모든 군인들이 누릴 수 밖에 없던 본원적 고민을 한 몸에 겪었다는 점에서도 그에게 공감한 것 같다.
칼이 남긴 울음은 노래가 되어 먼 훗날 많은 사람의 가슴에 심금을 울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