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남한산성이라는 하나의 작은 공간 안에 정말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생각들이 함께 놓여 있게되었다.
청과 조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비 된다. 강함과 약함 그리고 빠름과 느림이다. 국경을 단숨에 넘어 얼어 붙은 강을 건너 서울까지 단숨에 달려온 청나라 기병의 빠름에 비해 조선의 판단과 행동은 너무 느렸다. 도성에서 움직일 것인가, 강화로 피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이미 진로가 막혔고 임금 이하 대소 신료들은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으로 몰려들어가 포위되어 갇히고 말았다.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공간을 넘어 추운 겨울에 굳이 만나 된 이유는 서로의 다름 때문이다. 여진족이 만든 청은 나라를 세워 단기간에 급속히 세를 확장해가면서 자신을 존중해달라고 주장한다. 어제는 잠시 국경을 넘어와 약탈하고 가는 소규모 오랑캐였지만 이제 중원을 차지해서 동아시아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겠다는 큰 포부를 가진 형님이자 어른으로 대접받기를 원한다.
반면 조선은 어제의 시선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여진은 국경에 빌 붙어 식량이나 구걸하는 수준 낮은 문화의 존재로 감히 맞먹으려 드냐 깔아 뭉갠다.
이렇게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있다 보니 두 개의 사고는 누가 옳은지 확인하고자 충돌하게 하나의 공간에서 만나게 되었다. 말과 정신의 싸움이 아니라 직접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는 진검 승부가 된 것이다.

다름은 조선 안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조정 내에도 대의 명분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쳐야 한다는 사대부의 비분강개가 있는가 하면 치욕이 짧고 삶은 길다는 실용주의도 있다. 그리고 더욱 큰 다름은 전각 안의 조정의 고관들 사이에서 보다 바깥 성곽 위의 병사나 마을의 촌민들과 사이에서 나타난다.
성곽에 처음 농성 할 때는 다름 대로 전략이 있었고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이견이 적은편이었다. 병졸들은 추운 겨울에 굶주리면서도 사대부와 고관대작의 허우대를 믿었다.
하지만 그 전략은 사실은 낡디 낡아 효용이 거의 없는 무용지물이었다. 임진전쟁 때 조선의 수법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덤비는 적에게 더 큰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 임진전쟁의 3 대첩에 포함된 행주와 진주 모두 같은 방식으로 나가서 싸움을 주도한 것이 아니라 성곽에서의 농성전이었다.
지키는 것 만으로는 결단코 적을 땅에서 내몰지는 못한다. 그냥 지쳐 물러가게 만들 따름이다. 임진전쟁에서도 전세를 바꾼 것은 기본적으로 명의 원군이었다. 즉 우리 기준의 3대 대첩이라고 외치는 싸움들로만 이길 수는 없었다.
이번 싸움을 보아도 조선은 전략을 바꾸지 않았지만 이미 청은 이를 간파해 내었다. 그들은 산성을 제쳐놓고 얼어 붙은 강을 넘어 빠른 속도로 왕성으로 몰려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임진란에 도와 주었던 것처럼 원군이 올 희망은 없었다.

하나 더 해서 청은 신기술인 홍이포를 들고 있었다. 외곽 고지 위에 올려 놓은 이 무기만으로도 충분히 조선의 왕이 머무는 농성장안 단박에 박살을 낼 수 있었다. 고전적으로 병력을 직접 동원하게 되면 성곽 한 두 곳은 무너지고 싸움은 단박에 끝난다.
실제 왕명에 의해 바깥으로 나가 청과 대결해 본 장졸들은 상대의 강함을 충분히 알기에 고관대작의 머리에서 나온 전술의 허망함을 잘 알았다. 반면 전각 안의 신료들은 여전히 도상에서의 게임이 주는 호쾌한 결말을 그려내고만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장졸들의 무능함과 불충함을 몰아세웠고 다시 장졸들은 그 명령을 들어가며 허탈함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성곽 내에서의 서로 다름은 점점 커져만 갔다.

성곽 밖을 보면 조선에서의 다름은 더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 한 것은 나루터의 살인 사건이었다. 조선의 고관 대작 김상헌은 백성 하나를 죽여 철 없는 어린 딸아이를 고아로 만든다.
그에게는 왕의 길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여린 백성들의 주림에 대한 공감은 없었다. 그의 칼에 힘 없이 쓰러져간 백성이 한 가정의 아버지이기에 그가 오늘 좁쌀 한 줌을 못 가져가면 그의 어린 딸이 주려야 한다는 그 아픔에 대해서는 아무런 배려가 없었다. 칼은 휘둘러지고 소녀는 고아가 된다.

서양의 예 하나를 들어 보면 로베스피에르가 만든 단두대는 천하의 공적을 넘어 대의에 불충한 어제의 동료들을 무수히 처형해나간다. 자유여 너는 그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가 하며 비통해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모택동의 문화혁명 또한 대의에 덜 충분한 지식인과 백성들에게 더 제대로 충실하기를 원하면 낙오자에게 과감히 칼날을 날렸다. 과연 그런 혁명들이 영원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 중에 하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시 남한산성으로 돌아가 보자. 식량이 부족해져가자 처음에는 초가 지붕을 헐어 말을 먹인다. 기병의 돌진을 통한 과감한 승리를 위해 말이 필수였다. 이제는 성벽에 머무는 장졸들이 기력의 쇠함이 도저히 안되기에 말을 잡아 병사들을 먹인다. 모순과 광기, 이상과 현실의 차이 속에서 서서히 현실론을 우세를 차지해간다.
밥은 모든 문자보다 우선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답지 못한 삶이라도 사는 것 자체는 하나의 은총이기 떄문에 말이다. 왜 오딧세이를 보면 죽은 영웅이 산 동료들에게 지상에서 천대받는 노예가 되더라도 다시 살고 싶다고 말하지 않던가.

다시 시선을 밖으로 돌리면 산성을 둘러싼 청의 군대가 보인다. 이상할 정도로 그들은 정적이다. 절대로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이유는 무엇일까 갸우뚱 기울여 본다. 답은 단순하다. 그들은 조선보다 더 멀리 더 크게 보고 있었다.
성곽을 부수어 임금을 죽이는 것은 간단하나 머리가 잘려 팔다리가 따로 노는 조선을 다시 통제하기에는 시간이 급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왜냐면 그들은 중원으로 나가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의 군대는 조선의 궁궐을 굳이 태우지 않았다. 그것 또한 궁궐을 다시 지어야 하는조선 백성의 노고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참 이점은 임진란 때의 일본 보다 한 수 위라는 증거다. 청은 조선 왕의 무덤을 파헤치는 불구대천의 원수 짓도 안 했다. 참고로 칼의 노래를 보면 조선의 왕이 끝까지 추적하려던 것이 선릉 등을 파헤친 일본의 만행이었다.

그럼 청을 이토록 강하게 만든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당시 청은 일종의 사회 혁명을 통해 내부의 에너지를 한데 모으고 이를 밖으로 돌리고 있었다. 사회 구성원 하나 하나를 차별하게 대우하지 않고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다 보니 싸움의 최전선에서 압도적 힘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과거 징기스칸이 몽골족을 통합해서 세계 정복에 나선 것과 비슷한 원리다.
같은 방식의 사회 혁명이 이미 한차례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도하에 발생했다. 히데요시 또한 사회의 가장 바닥에 근접한 곳에 머물렀고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아 천하를 통일하고 동아시아를 흔드는 큰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주변의 사회들이 내적으로 크게 변하고 다시 그 힘으로 주변으로 뻗어나가는 동안 조선은 어떠했는가?
임란 전 조선은 사회와 기술에 무심했다. 기술만 보더라도 일본이 총포를 사들일 수 있던 힘이 된 은의 제련술은 조선의 백성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모두 전쟁을 부른 무지였다. 그렇게 어렵게 몰려 전쟁을 치르는 중에도 임금은 백성과 전장의 장수 이순신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칼의 노래에 잘 나타났듯이 말이다.
그 힘든 전쟁을 끝내고서도 조선은 힘들게 고난을 이겨낸 백성들을 다시 내리쳐갔다. 각종 부역을 부과하고 세금을 뜯어내고 공리공론을 하며 당파 분란만 일으키는 구태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선에서 버려진 천한 백성 하나가 청으로 가더니 역관의 지위에 올라 조선을 쥐어 흔드는 장면은 일종의 소극이지만 따지고 보면 쉽게 웃지도 못하게 된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다름도 시간이 가면서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싸움이란 승자와 패자를 갈라내면서 이견을 강제로 조정해버린다. 그렇게 청이라는 밖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조선 안에서의 의견도 통일 될 수 밖에 없었다.

모래시계가 마지막에 몰리면 더욱 빨리 내려가듯이 성안에 확 몰려든 사람들을 다 먹일 식량이 더 이상 없었다. 배고픔은 인간을 매우 동물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만들어간다. 인간적인 존재는 대의명분을 찾으며 다양하게 의식의 분화를 겪을 수 있지만 동물에 가까워진다면 대개 비슷한 니즈와 감정을 겪을 수 있게 된다.
소설은 다수의 평범한 대중의 가장 일상적 문제 바로 밥에 초점을 맞추어간다. 아무리 고상한 존재도 먹고 자고 싸는 일상이 없다면 존립할 수 없다. 백성은 곧 땅이요 하늘 인 것이다.
성곽 위 졸병들의 불만, 촌락의 백성들의 불안은 점점 커져서 관료들의 위신으로도 쉽게 제어되지 않게 된다. 이런 압박 속에서 결국 임금은 결단을 내려 성밖으로 걸어 나오게 된다. 임금의 자존감이 죽어 거의 대부분이 사는 길이 열리게 된다. 하지만 정말 죽은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사념의 세계가 아니었을까?
인조라는 임금을 만든 서인들이란 광해군의 현실 외교론을 부정하며 대의를 주장하던 인간들이다. 그들이야말로 보고 싶은 곳에 머물러 자족하며 살고 싶었던 존재들이었지만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힘은 그들을 되돌려 똑 바로 자신을 보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지불해야 했던 비용은 무척이나 컸다. 수레 위에 앉아 청으로 끌려가는 양반집 아낙들의 웃는 모습을 씁쓸히 묘사하는 대목은 가슴을 슬프게 한다. 훗날 그들도 환향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돌아오게 된다.

이렇게 많은 백성들이 받은 고통 속에서도 조선에서는 제대로 된 교훈을 얻지는 못했다. 인조는 머리는 숙였지만 마음을 열지 못했다. 삼전도의 교훈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현세자가 가져온 서양 문물과 천주교라는 새로운 대안을 한번에 거부하고 독살이라는 형벌을 내린다. 다시 문은 닫혔고 조선은 효종이라는 과대 망상 환자에 의해 북벌이라는 이념적 대오로 몰려간다. 대의명분을 들고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리더는 모든 자원을 별 유용하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은 사업에 소모해버리면서 대내적으로는 절대 복종만 강요한다.
그렇게 닫혀버린 시간이 오래 오래 계속되다 보니 훗날 박지원과 같은 실학자들이 연행길에 올라서 보니 조선은 너무나 너무나 낙후된 나라가 되어버려서 안타까워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베스트 셀러로서 이 소설이 현대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냥 읽어가면 슬픈 옛 이야기를 다룬 하나의 소설이지만 읽히는 방향은 여러 갈래가 될 수 있다.
좌에서 읽는 방법이 다르고 우에서 읽는 방법이 다르다. 덕분에 나도 내 방식의 독법으로 주장을 해보고자 한다.
소설을 처음 다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존재는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었다. 다음은 노무현, 또 그 다음은 한나라당의 극우 보수 골통들이었다.

김정일이 얼마 전 노무현을 만나면서 나온 정상회담 기사를 보면 메추리는 몇 일간 키우면 가장 맛있다거나 와인 고르기 등 화제가 나온다. 백성이 굶어 죽지 않으려 국경을 넘어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국가의 수장이 과연 할 짓이 이건가. 왜 스스로 백성을 버렸던 조선의 임금들, 그리고 밖에 변화에 문을 닫고 내식대로 살면 충분하다가 강제하는 효종의 모습을 다시 보아야 하는가? 물론 그들도 할 말은 있다. 역사를 이끌어간 힘이 자신들의 편에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청춘을 바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하지만 말이다 정말 진보라고 주장하려면 나아갈 진, 걸음 보라는 의미에 맞게 내일 그 세상이 온다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미 저바린 꿈을 강조만 한다면 사이비 종교집단과 무엇이 다를까? 현세에서 천국을 만들겠다고 외치고 이를 방해하는 미제에 항쟁하라고 백성을 독려하는 행위는 이미 도그마다. 덕분에 북한은 인조 시대의 거대한 남한산성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최근에 반가운 일 하나는 이제 그들이 막 그 문을 걸어서 나오려고 하는 점이다. 종전 선언을 통해 한국전쟁을 끝내고 진정 민족의 힘이 하나되려고 하는 순간이 막 닥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대를 거꾸로 하며 안보론을 외치는 한나라당의 골통들은 어떠한 존재들일까? 그들 또한 인조와 효종의 또 다른 모습이다.
무릇 골통은 좌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우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노무현과 그를 따르는 빠들도 골통이다.

이 모두의 공통점은 바로 닫힌 세계에 사는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스스로를 높이고 현명하다고 주장하는 소피스트 같은 자들은 사실은 어리석은 인간이요 오히려 자신이 알지 못하기에 끊임없이 물어가는 소크라테스야 말로 진정한 현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보자.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가. 바로 교훈을 얻지 못한자는 다시 한번 그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쟁으로 갈라지고 자신의 이상론에 푹 빠지고 그 이상을 다시 백성에게 가하면서 그 백성이 느끼는 진정한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들 이 모두가 인조요 서인일 것이고 그들의 통치에 눌린 백성은 모두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에 갇힌 존재가 된다.
가장 아픈 비극이야 말로 우리를 깨우쳐 주고 한 단계 위로 고양시켜 줄 수 있다. 진정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남한산성이라는 비극을 통해 우리를 성찰 할 기회를 맞지 않았는가? 바로 그점이 김훈과 이 소설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erky 2007-11-15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남한산성.이 '인조'때의 파란만장한 사건들 얘기 였군요. 저는 조선왕독살사건.이라는 책을 통해 그때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알게 되었었는데요. 극단적 보수주의의 극치 '서인'들과 '인조'의 우물안개구리식 사고방식에 한숨이 다 나오더라구요. 화도 나구요..요즘 정치인들 하는 꼬락서니와 선조들의 행태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는 발전 가능성이 없는건가..라는 비관적 체념까지 하게 되더군요. 기회되면 한번 남한산성 읽어보고 싶네요. 비록 김훈 작가의 책이 저랑 코드가 좀 안 맞는것 같긴 하지만..리뷰 잘 읽었습니다.

사마천 2007-11-15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에는 코드가 잘 맞지 않더군요. 마초,보수,조선일보 반면 경력을 꼼꼼이 읽어보면 한겨레도 있어요. 어느편인지 처음에는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이 책도 좌에서 읽는 방식과 우에서 읽는 방식이 다릅니다. 어쨌든 양쪽에 읽혔다는 점에서 작가는 마케팅에 성공했던 것 같아요. 참 한명기님의 <광해군>이라는 책이 참 유익했습니다. 아마 그 책이 마음에 꼭 드시리라 보입니다 ^^

perky 2007-11-1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한명기님의 '광해군'. 언제 기회되면 읽어볼께요. 제목부터 확 끌리네요. ^^

사마천 2007-11-16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학 책도 이렇게 재미있고 유익할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을 줍니다. 비슷하게는 스펜스의 <옹정제> 등의 책 스타일입니다.

상념 2007-11-16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조선조 중후기의 사고 방식을 보면서 김정일의 북한을 떠올린 점이 눈에 확 띄네요. 우리의 정당정치는 그 시절의 당파싸움을 극복 한 것일까요? 왜 당파싸움의 형태는 그리 변치않고 300여년전의 구태를 답습하는지... 논문 꺼리 같네요.

짱구박사 2007-12-06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이제 김훈을 읽지 않아요...
사람 맘 속에 있는 슬픔을 죄다 긁어내 상처를 도지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이 그에게 있지요.

2007-12-07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문가가 될 자질 중 하나는 파는 능력이라고 한다.
digging으로 표현 될 수 있는 이 능력은 젊어서 왕성한데 말이 시사하는 바는
여러 곳을 파려고 노력해서는 아무것도 깊게 팔 수 없다는 점이다.
땅 속에 정말 보배가 있는지는 처음에는 쉽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꾸준히 파다보면 정말 보배는 아닐지라도 어지간히 먹고 살만큼의 농토는
만들어낼 수 있는지 모른다.

맨 처음 잘 고르고 그 다음부터는 열심히 꾸준하게 끈기를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전문가의 한계 중 하나는 혼자서는 큰일을 하기 어렵다는 점이 있다.
이를 잘 이해해야 하는데 전문가가 섯불리 전체를 다 하려고 덤비면 오히려 죽도 밥도 안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잘 알아줄 관리자나 사업가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전문성을 키워주고 길을 열어주는 윗사람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다.

장기적으로는 1인 기업도 가능하다. 구본형씨 등이 좋은 예다.
단 이를 위해서는 내면에 있는 능력을 잘 정리해서 외화시키는 작업이 중요하다.

앞서 들었던 예가 식자공의 몰락이 있었는데 위기감을 느꼈을 때 차라리 식자의 도구를 만드는 회사를 창업하거나 조인하는 것도 방법이다.
만화 초밥왕 등을 보아도 초밥체인을 만드는 사업가들이 나와서 오랫동안 한 가게를 지키는 자신의 스승을 비웃으며 싸움을 거는 장면이 비슷한 예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일을 열심히 하다가 문뜻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닫게 된다. 이 때 내가 지행해야 할 길이 무엇인가 묻게 된다.

이럴 때 흔히들 세가지 길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전문가, 한가지 테마를 확실히 파고들어가 남들에게 그 사람이야말로 문제해결사야라는 소리를 듣는다.
관리자, 두루 사람과 일을 알아 힘을 모아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같이 하는 사람에게 목표를 잘 부여할 수 있다.
사업가, 일을 돈으로 환산시킬 수 있다. 돈으로 돈을 벌 수 있게 한다. 최종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다.

회사로 보면 처음 실무자로서 일하다가 과장부터 관리자 생활을 하고 나중에 임원이 되면 최종적으로 사업가로서 활동하다가 마친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그럼 전문가 < 관리자 < 사업가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인가 질문을 가질 수 있다.

예전이라면 그렇지만 지금은 꼭 그것이 맞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먼저 업종에 따라 전문가가 관리자보다 더 많은 대우를 받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ERP 분야에서는 한 업무를 오래 한 사람들이 월 1000만원이 넘는 보수를 받으며 개인 전문가로 활동하게 된다. 반면 이들을 관리하던 관리자들은 오히려 전문성이 없어서 그 보다 반 정도의 보수로도 만족하면서 자신의 일을 하게 되는 모습도 보게 된다.

우스개 소리지만 비슷한 예로 세무공무원들이 승진 하지 않으려 한는 현상이 있다. 직접 발로 뛰는 현장을 떠나면 오히려 보수가 내려간다고 한다. 이 것이 단순 급여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아시는 분이 많을 것이다.

하여간 전문가의 길을 가려면 몇가지 오해를 넘어서야 한다.
대상이 과연 시간이 오래갈수록 깊이를 인정받는 분야인지 아니면 단순히 육체적 노동력만 원하는 분야인지를 알아야 한다. 괜히 당신이야말로 전문가야 하면서 한가지 일에 오래 사람을 붙들어 놓으려는 관리자가 있기 때문인데 헛된 믿음이야 말로 위험하다.
단순이 일과 직장에 자신의 시간과 몸을 빌려주는 지 아니면 시간과 노력을 들인만큼 깊이가 만들어지는지 잘 보아야 한다.

나이 들수록 장인의 대우를 받을 수 있나 아니면 일거에 대체품에 의해서 사라질 수 있는지 그런 흐름도 잘 보아야 한다. 피아노 조율사나 식자공이 단번에 사라지는 현상을 보면 그렇다.

한 가지 더 고려할 점은 대체품의 등장이다. 바다를 넘어서 온 중국 조선족 요리사 덕분에 중국집 주방장들이 거리에 많이 나왔다는 소문도 있다. 이는 첨단 컴퓨터 분야도 예외가 아닌데 미국의 경우 아웃소싱 바람으로 IT 분야 job이 인도로 날라가버리기도 한다.
다니엘 핑크의 경우 심하게 말해서 화이트컬러들의 job 중 반복적인 많은 부분, 회계사 등 전문가라고 하는 부분도 대체되거나 사라진다고 예언하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빈 바우어, 맥킨지의 모든 것
엘리자베스 하스 에더샤임 지음, 안진환 옮김 / 스마트비즈니스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컨설팅 회사와 같이 우수한 인력을 바탕으로 급성장하는 조직은 다른 운영원리를 가지게 된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는 군대식 문화를 강조하는 회사도 있다. 
앞으로 돌격이라는 구호를 들으면 낮이건 밤이건 절대적으로 지휘관을 따라서 돌파를 해나가야 한다.

고객으로부터 받는 고액의 수임료를 만족시키기 위해 집중해서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하기에 군대와 같은 일사분란함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부하의 생사여탈권을 모두 움켜쥐는 프로젝트 매니저는 그만큼 각광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거꾸로 말하면 긴장이 커지게 되고 잘 못 흘러가면 전체 조직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기 때문에 (예를 들면 프로젝트 drop, 지연 등) 우수한 프로젝트 매니저는 회사로서 매우 중요하다. 이런 과중한 일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인재를 양성하고 또 거기에 걸맞는 보상을 해주는 메커니즘이 잘 발달되어 있다.

먼 옛날 산중노인은 절대복종하는 암살단을 양성하기 위해 젊은이들에게 아편(해시시)을 먹이고 미녀와 놀게 해주는 천국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컨설팅 회사도 비슷하게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준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화려한 면모의 삶을 보여주면서 너도 이런 것을 가지고 싶지 하는 마음을 준다. 너무 많이 주지는 않고 약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가장 꽃은 PM이라고 넌지시 비추어준다.

이 과정에서 더욱 빠른 급성장을 원하는 모 회사는 소속 구성원들에게 무한 경쟁을 허용한다. 여기서 표현된 무한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오는 두번째 비서의 첫번째 비서 자리 차지하기를 연상해보라. 올라가는 자의 쾌감은 내려가는 자의 치욕적 수모와 대비된다.
이런 조직에서는 공을 세우는 작업이 팀웍보다는 개인에 의해 더 많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날 때마다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 사람은 올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과감히 쳐내버린다. 매해 고과에 의해 수천만원의 성과급이 차이 날 수도 있게 만든다.
이런 조직 속에서 사람들은 겉으로는 협조하는 듯 하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경계하고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치열했던 싸움터로서의 직장을 만든 창업자를 비판하면서
마지막으로 부언하던 말이 그래도 그곳에서는 꿈이 살아있었잖아요라는 것이었다.

이 속에서 내편인게 네편인가가 쉽게 구별되지 않을 것이고 인화는 영 얻기 쉽지 않다.
하지만 말이다. 분명 그곳에서 사람들은 무한히 자기의 에너지를 승부에 쏟을 것이다.
독한 스타벅스 커피를 뱃속에 부어넣으면서 긴장을 유지하고 일에 집중하고 무언가 새로운 고객을 만족시킬 개념을 끄집어낸다.

크게 보면 미국이라는 사회가 아마 이런 사람들이 다 모인 거대한 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청소부의 아들이 교수가 되기도 하고 교수 아들이 청소부가 되는 사회.
기회가 널리 열려있고 가끔은 그 기회를 잘 잡아 성공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면
훨씬 많은 수의 사람이 이를 위해 달려들게 된다.

그곳은 별로 편안한 쉼터가 되지는 못 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것은
드림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 골드러시, 캘리포니아 드림 그리고 또 무엇이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마전 같이 일했던 친구 하나가 매우 분개해 하는 모습을 보았다.

프로젝트를 수주했는데 초기에는 대형 수주라고 좋아하면서 그 공은 영업을 잘 한 임원이 가져갔다고 한다. 막상 진행해보니 처음 계획만큼 유연하게 흘러가지 않아 결국 손익이 기대보다 낮아지게되었다. 이 부분은 과로서 현장에서 팀을 지휘한 리더가 지게 되었다.

전형적인 공은 위로, 과는 아래로라는 원칙으로 운영되는 구조다.
이런 잡음이 나오게 된 연유에는 두 사람의 다른 출신배경이 작용한다.
한 사람은 컨설팅 회사 출신이라 공을 극단적으로 위에서 챙겨가는 운영 방식에
익숙하다.
다른 한 사람은 인화를 중시하는 기업 문화속에서 성장해서 서로 도닥거려주면서
함께 가는 운영을 기대했다.

대부분의 기업이 기본적으로 공이 위로 쏠리도록 만들어져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구조가 회계법인, 경영 컨설팅 등의 회사인데 여기서는 소수의 파트너가 성과의 대부분을 독식한다. 80:20 법칙을 현실에 적용하여 설명한 명저를 만들어낸 리처드 코치도 바로 컨설팅회사의 파트너였다.

결국 직장 생활도 하나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존을 도모하고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요즘처럼 이곳 저곳에 컨설팅적 사고가 번져가는 것을 보면서 이 흐름에 익숙해지려면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