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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2 - 인조실록 - 명분에 사로잡혀 병란을 부르다 ㅣ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2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600년대 전후는 동북아 역사에서 회오리가 강하게 몰아친 시기다. 일본과 중국 모두 체제와 최고권력이 교체되었고 새로운 질서가 들어선다.
무릇 새로운 권력은 강한 힘을 가지고 주변에 영향을 주려고 한다.
그 힘을 일,중 양쪽에서 번갈아 받게되는 조선으로서는 무척 괴로운 형세는 데 큰 전쟁으로만 세어도 일본과 두차례 청과 두차례를 겪었다.
먼저 일본의 공세에는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중국의 힘을 빌어야 했고 다음 청의 공격에는 대항할 힘이 아예 없어서 인조가 머리를 땅에 숙일 수 밖에 없었다.
한번 한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사람 목숨이라는 비싼 수업료를 치루면서 우리가 배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품게 된다.
그 전장 중 3번째와 4번째는 바로 이 책의 주인공 인조가 집권하고 있을 때 일어난다.
맨 마지막 남한산성의 싸움의 결과는 매우 비참해서 일방적 패배였고 개인의 생존과 왕조의 존립의 고민을 함께 하는 처지로 몰렸다.
이 책의 앞부분은 남한산성까지의 과정으로 광해군 정권의 전복뒤의 일련의 흐름을 먼저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왜 전쟁을 피하지 못하고 치닫게 되는지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게 된다.
남한산성에서 벌어지는 처절했던 전쟁 상황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여기서는 그 다음이 더 궁금했다.
이 책의 뒷부분으로 가면 남한산성의 치욕 뒤에 나온 일련의 흐름이 자세히 기술된다.
김상헌과 3학사의 북경 압송 이후에 최명길가지 청에 끌려간 이유, 임경업 장군의 파란만장한 생애 등이 잘 묘사되어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또한 김상헌, 최명길이라는 남한산성 속의 두 주역이 이후에도 계속 대립하는데 그들의 인생관,국가관 등도 보다 깊게 이해하게 해준다.
항복의 증빙이 되는 문서를 쓰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김훈의 책을 보면 이 문서를 쓰지않으려고 사대부들이 갖은 핑계를 대거나 차라리 목숨을 자진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명의 재조지은을 잊는다면 개돼지와 다를 바 없다며 그런 항서를 찢는 김상헌의 지조도 분명 필요하다. 반면 생존 이후에야 지조도 있다며 그 문서를 주워담는 최명길의 현실주의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항복 이후의 역사 흐름에서도 두 사람의 대립된 태도는 계속 나타난다.
최명길의 역할은 항서의 작성이라는 역겨운 작업에 그치지 않았고 영의정이란 중책으로 있으면서 패전 이후 처음 겪게되는 다양한 사회 문제에 역량과 현명함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환향년의 발생이라는 대목에서 그는 정조 보다 소중한게 목숨이라며 사대부들에게 아내들을 다시 맞으라고 권했다. 명과의 지속적인 교류에 의해 청에 끌려가지만 약소국 조선이 아직 명을 완전히 등 지기에는 벅찼다고 항변하며 이해를 구하는 현명함을 보여주었다.
무릇 일이 꼬였을 때 털고 일어나기는 오히려 쉽다. 반면 하나 하나 꼬인 실타래를 풀어가는 일을 꾸준히 하는 작업이 훨씬 어렵다.
김상헌의 지조가 없었다면 정말 조선을 도우려 와 목숨을 버린 명의 장병들의 원혼이 울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기개는 높이 사야겠지만 최명길의 실용주의가 없었다면 조선 왕조는 아예 남한산성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 어려운 선택의 와중에서 두 인재가 있었기에 조선의 얼과 생명 모두가 부지될 수 있었다.
반면 이 일련의 과정에서 가장 교훈을 얻지 못한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최고 책임자였던 인조다.
인간의 발전은 그가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의해 크게 차이가 나게된다.
한니발에 연패하고도 그의 강점을 익혀 마침내 한니발의 전술로 한니발을 물리친 스키피오는
위대하다. 조금 눈을 돌려도 왜군의 배가 쓰는 전술이 사다리 건너타기에 의한 근접전이라는 점을 발견하고 판옥선 위에 뚜껑을 씌운 거북선을 잘 활용한 이순신도 앞선 패배에서 교훈을 얻은 사람이다.
더 나아가면 조선의 적장 이순신에게 지고나서 그를 사숙하며 후일 쓰시마해전에서 학익진의 모방으로 대승을 거둔 일본 장수들도 위대하다.
반면 조선의 인조는 패전에서 아무것도 배우려하지 않았다.
아들 소현세자는 심양과 북경을 오가면서 청의 위력, 사농공상의 체제의 한계, 널리 개방되어 가는 세계 심지어 사민이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교리까지 익히고 과학기술의 도구를 함께 가지고 돌아왔건만 인조는 이 모두를 거부했다.
명이 광해군을 치켜세우자 이를 시기해 아들을 몰아내려던 선조와 똑 같은 역사가 여기서 반복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소현세자의 모살이었고 그와 함께 따라온 천주학에 물들은 시녀들까지 함께 사라져야했다.
힘은 현실의 문제다. 현실에서 나타나느 열세를 정신의 세계에서 만족하자면서 과거를 미화하는 등 다른 우월의 요소를 찾는 행동들은 잠시의 마약은 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정말 억울하다면 만주족이 상하 한마음이 되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매진한 면을 배워야 했다.
광해군 대에 있었던 대동법의 시행을 조속히 확산시키고 고루한 성리학을 버리고 명나라의 구원온 장수들이 강조하던대로 실용주의적인 양명학으로 사회철학을 변화시키는 결단을 했다면 훨씬 결과가 좋았을 것이다.
북경과의 교류도 막지 말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청이 보여준 동양의 르네상스에서 벌어지지도 않았다고 예상된다.
이 모든 거대한 흐름의 중심에서 온전히 퇴영의 길로 나라를 접어들게 한 중심에 바로 인조가 있었고 그의 책임은 결코 작지 않는다.
소현세자만 죽인 것이 아니라 며느리 아들 둘 까지 모두 모살시키는 치졸함과
잡혀간 신민들의 고통을 한사코 외면한 점, 이후 개혁 보다 현상유지의 옹고집을 보이고
순서를 바꾸어 아들 봉림을 세워 북벌이라는 어리석은 과제에 국력을 소모시키며 백성을
학대하게 한 죄 등 모두가 다 그의 잘못이 크다.
패륜과 우매함의 상징이 그에게 어질 인자를 붙여 시호를 만들어 준 조선의 사가들에게
통렬이 반론을 펼치는 박시백의 그림 솜씨와 논지가 너무 돗 보였던 작품이다.
PS : 임경업 장군의 비참한 최후 등이 어떤 경로로 이루어졌는지 등을 잘 묘사해서 당대의 주인공들의 어려운 삶을 보여준 점도 덤으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