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8세부터 88세까지 읽는 동화
루이스 세뿔베다 지음 / 바다출판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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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풀베다의 책을 읽다보면 작가와 나 사이의 인식차이를 느끼게 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연보호와 환경보호를 외치고 있지만 그것이 중립적이며 보편적인 것이 아닌 한쪽으로 쏠린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언제나 2퍼센트 모자란 느낌을 준다. 이 작품도 그런 면에서 마찬가지였다.

 

왜 하필이면 고양이였을까? 다 읽고 내가 감동을 느낄 새도 없이 점령당한 의문이었다. 고양이는 잡식성 동물이다. 새도 잡아먹고 새의 알도 먹는다. 그런 고양이에게, 물론 애완 고양이기는 하지만 갈매기의 알을 맡긴다는 것이 좀 억지스러워 보였다. 그러니까 캐스팅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는 얘기다.

 

고양이가 아니라 초식 동물이었다면 달랐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초식 동물은 갈매기와 멀리 떨어져 있고 인간과도 거리감이 있다. 인간의 시각 내에서 모든 것은 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인간, 나쁜 인간, 좋은 고양이, 나쁜 고양이식의 이분법적 편 가르기를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러한 관계가 모두 인간에 의해 설정된 인간 편의적이라는 점이 불편하다는 얘기다. 자연적의 반대 개념은 인공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반대 개념은 결국 인간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 인간이 소통을 말하고 있다. 인간들끼리의 소통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이겠지만 우리가 어려서 읽은 동화와 우화의 잔인함을 커서 느끼게 되듯이 이 작품 속 고양이와 갈매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 설정은 인위적인 것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있음직한 한 가지 별난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악어의 눈물처럼 느끼게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갈매기를 키운 고양이는 갈매기나 갈매기 알을 먹지 않았을까? 육식을 하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자연적인 일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버리니 세상이 비틀리는 것이다. 토끼에게 잘 먹는다고 달걀 프라이를 주어서 토키의 난폭함을 키워주고 양의 뼈는 사료로 쓰면 안 되는 데 그 사료를 초식 동물인 소에게 먹여 결국 광우병을 만들었듯이 말이다.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구분할 수 있는 기준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제 인간은 자연에 맞서는 유일한 동물이 되어 버렸다. 책에서까지 인간이 자연을 자연적이지 않게 만들고 자연적 본성을 파괴하여 인간을 위한 안식의 제물로 만들어야 했을까. 작가에게 묻고 싶다.

 

이래서 내가 세풀베다의 작품은 <핫라인>과 <감성적 킬러의 고백>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 작품들에서는 인공 감미료의 느끼한 맛은 느껴지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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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8-03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걸 노린것이 아닌 걸까요..^^
포식자의 입장인 고양이를 통해 그보다 더 막강한 포식자인 인간의 교화..^^

물만두 2006-08-03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그렇게 생각해야 하나요? 교화라... 반성과 성찰이 아닌... 생각해 볼 문제군요^^:;;

해적오리 2006-08-0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전의 언니 페퍼보고 이책 표지가 이쁘길래 보관함에 넣었는데 ... 리뷰를 읽고 나니 빼버릴까 하는 생각이 드오..

물만두 2006-08-03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난적 나는 다른분과 시각차이가 큰 편이니 나 믿지 말고 읽고 판단하라구. 책은 스스로 읽어야 맛이지. 리뷰보고 읽는게 아니쥐~

물만두 2006-08-03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우 내 시각이 삐딱하이 ㅡ..ㅡ

물만두 2006-08-03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ㅡ..ㅡ 옥상 뜨겁다~~~
 
폭소
권지예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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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고통을 절망적이지 않게, 고통스럽지 않게 그리는 작가가 있다. 그러면서 절망과 고통을 가슴에 각인시키는 치밀함을 가진 작가들이 있다. 반대로 절망과 고통을 토해내기만 하는 작가도 있다. 그 구토의 증거를 보며 사람들을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그 증거를 다가가서 보게 만드는 것이 아닌 외면하게 만드는. 권지예는 후자에 속하는 작가다.

 

<스토커>을 읽을 때까지 나는 좋았다. 아, 이 작품 추리소설로도 손색없다. 뜻밖에 좋은 작가 만났구나 싶었다. <행복한 재앙>을 읽고 나서도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 거지. 삶의 고단함이야 어차피 비루하고 남루한 것인데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폭소>를 읽으면서 이미 내 마음은 식어가기 시작했고 <내 가슴에 찍힌 새의 발자국>을 읽고 나서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런 이분법적인 생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마치 눈물을 억지로 짜내려고 만든 삼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자폐아가 등장하고 소아마비가 등장하고 그래서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것 같은 느낌... 작가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나는 지금 무척 불쾌하다. 삶이 힘든 건 사실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더 힘들다. 그들에게 당신은 마치 먹다가 이 정도만 줘도 만족하겠지 하는 투로 자신이 베어 먹다 남은 사과 한 알을 던져주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풋고추>와 같은 작품은 이제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이미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다 나온 소재다. 조세희보다 더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니라면 참신한 자신만의 소재를 고르기 바란다. 마지막은 참 보기에 민망했다.

 

<행복한 재앙>이 그나마 좋았는데 그 괜찮음이 <스토커>의 마지막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한때 티비에서 이런 카피가 유행을 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 이 말을 작가에게 해주고 싶다. ‘당신이 바닥의 남루한 삶의 재앙을 알아?’

 

그리고 <내 가슴에 찍힌 새의 발자국>은 구도가 영화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에서의 여주인공의 구도와 같다. 우연일까? 물론 전개 과정은 다르고 다만 소재가 비슷할 뿐이지만 읽는 순간 이런 얘기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사실이라 더 예민하게 받아들인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장애인에게 뾰족한 창을 들이댈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시종일관 여자는 머리가 빈 듯, 불륜만 저지르는 듯 그리고 있다. 사과가 썩어간다. 썩은 사과에서 과연 무엇을 건질 것인지.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냄새만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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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2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6-08-02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케이^^

반딧불,, 2006-08-02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댓글의 의미가 더욱 궁금하옵니다)

야클 2006-08-02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토커>만 재미있게 읽었어요.

물만두 2006-08-02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디님 비밀글이옵니다~^^
야클님 흑흑흑...

2006-08-02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DJ뽀스 2006-11-14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지예님 상받으신 그 단편, 도대체 뭔 소리야??? 이러다 다 읽었는지, 읽다말았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빠리 생활을 기록한 에세이는 무척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소설은 좀 망설여지네요.

물만두 2006-11-14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제이뽀스님 저도 권지예님과는 빠이빠입니다^^:;;

DJ뽀스 2006-11-14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그냥 편하게 뽀스라고 부르심 되요. ㅋㅋ DJ는 딴 뽀스들과 구별하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ㅋㅋ

물만두 2006-11-1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스님 넵^^
 
계피색 가게들 - 슬라브 문학 2
브루노 슐츠 지음, 정보라 옮김 / 길(도서출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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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내가 이 작품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카프카의 <변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나는 이 작품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작가는 여러 편의 단편으로 나누었고 이 단편집은 그가 직접 만든 단편집은 아니다. 하지만 단편들이 물 흐르듯 이어짐을 읽으며 알 수 있었다.

 

맨 처음 등장하는 <8월>의 뚜야와 그녀의 엄마 마리아를 보면서 나는 실비 제르맹이 <프라하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를 쓸 때 이들의 모습을 투영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뚜야와 마리아는 폴란드의 거리를 헤매겠지만 폴란드를 거닐든, 프라하를 거닐든 그 차이는 없는 것 아닐까. 그 8월 슐츠가 본 뚜야는 지금 폴란드의 어디에서 걸어 다닐지. 어쩜 우린 그녀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보이는 건 파리뿐일지도 모르니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아버지의 기행은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하녀 아델라의 아버지에 대한 행동은 <변신>에서 그레고르에게 사과를 던진 아버지를 생각나게 한다. 아버지의 광기는 새가 되었다가 바퀴벌레가 되었다가 하면서 어린 소년인 저자를 당황하게 하지만 아델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새를 내쫒고 바퀴벌레를 쓸어담아 버린다. 물론 아버지는 <변신>에서의 그레고르처럼 완전하게 변신을 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건 저자의 어린 시절의 환상의 투영일 수 있다.

 

여기에 저자는 몽환적인 환타지를 구사한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바스라지고 벽 틈으로 사라지게 그리고 쪼그라들고 거울 속에서 돌아다니며 있지도 않는 거리와 있었으면 하는 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유대인인 저자는 작품 안에 유대인의 문화를 삽입시키면서 다른 문화와의 충돌을 보여주고 은근히 다른 문화를 형이하학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것은 잠깐 스쳐 지나치기 때문에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저자의 단어 하나하나가 은유적이고 곱씹어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알아채기 쉽기도 하다.

 

놀라운 것은 저자가 <마네킹>이라는 작품과 다른 여러 작품 안에서 나타내지만 물질적인 것에 숨결을 불어넣어 살아 숨 쉬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 마네킹이라든가, 박제된 새라든가, 지나가는 혜성 등은 마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명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물론 몽환적이기에 벽지라던가 길가의 담같은 것을 생물적으로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탄을 하게 만드는, 아니 그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누가 아는가. 슐츠의 말처럼 그들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우리가 모르는 동안 자신들만의 생명을 가지고 우리를 쳐다보며 생각하고 있을지...

 

이해하기 힘든 작품이었지만 읽고 난 뒤 읽었다는 만족감을 주는 작품이다. 물론 역자의 도움을 받아 이해하게 되는 것도 많았지만 이 얇고 작은 분량 안에 이렇게 풍부한 묘사와 표현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어떤 사실, <까롤 아저씨>를 통해 이혼한 남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은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글을 쓴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만 아하 하게 되는 작품도 있지만 그런 배경을 몰라도 현대에도 충분히 그려질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이라 놀라웠고 끊임없이 환상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그의 아버지의 존재감은 부정할 수 없는 가족에 대한 저자의 끊을 수 없는 끈이고 그의 종교와 민족에 대한 버리지 못하는, 버릴 수 없는 중압감의 표현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가 만약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더 좋은 세상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더 좋은 글을 썼을지는 알 수 없지만 몇 편의 작품을 통해서 그의 천재성은 유감없이 발휘됨을 알 수 있고 삽입된 그의 그림이 삽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잘 어울린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그가 천재였다고 말하고 싶다.

 

천편일률적인 작품들에 질린 독자들에게 어서 이 책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머리를 쥐어뜯더라고 이 책을 읽고 나면 보기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것이다. 나는 이 책을 본 내가 정말 자랑스럽고 대견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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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6-07-31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로 나쁜 상황이나 시련이 숨겨있던 어떤 재능 같은 것을 발휘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물만두님 리뷰 보면 늘 그냥 확 사버려~!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요..저 이제 고양이는 알고 있다 읽는 중에요..게으르죠???


물만두 2006-07-31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씩씩하니님 작가들의 능력이 그런 것으로 발휘된다는 점이 늘 안타까워요.
무슨 말씀을요^^;;; 천천히 재미나게 읽으세요^^

플레져 2006-08-01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때는 좀 고된(?) 느낌이 없잖아 있었는데
읽고나면 뭔가 뭉글뭉글 피어나는 느낌이었어요.
제목도 참 이쁘죠? 계피색 가게들 ^^

물만두 2006-08-01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읽은 부분 또 읽고 또 읽고를 얼마나 반복했는지 몰라요 ㅠ.ㅠ 근데 진짜 좋더군요. 8월의 뙤양볕아래에서 몽환적으로 피어오르는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작품이었습니다^^

stella.K 2006-08-01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볼까 생각했는데, 머리를 쥐어 뜯는다니 다시 고려해 봐야겠군요. 흐흐

물만두 2006-08-0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그리고 나중에 후회로 또 한번 머리를 쥐어 뜯으세요^^ㅋㅋ

stella.K 2006-08-02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머리털 남아나지 않겠군요! 흐흐

물만두 2006-08-02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가발 잘하는 하이모가 있잖아요^^ㅋㅋㅋ

stella.K 2006-08-0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력하구 집요하군요. 알았어요. 얼았어. ㅜ.ㅜ

물만두 2006-08-02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제가 괜히 호객만두겠어요^^ㅋㅋ
 
꽃미남과 여전사 1 - 21세기 남과 여
이명옥 지음 / 노마드북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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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의 표지 맨 위에 <메트로섹슈얼과 콘트라섹슈얼의 신비를 벗기다>라고 썼다. 그럼 메트로섹슈얼과 콘트라섹슈얼이란 무엇일까?

 

‘메트로섹슈얼이란 영국의 작가이자 문화비평가인 마크 심슨(Mark Simpson)이 1994년에 일간지 《인디펜던트(Independent)》에 기고한 글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 패션에 민감하고 외모에 관심이 많은 남성을 이르는 말이다.

 

그와 반대 개념으로 쓰이는 콘트라섹슈얼은 2004년을 전후해 영국에서 처음 생긴 용어로, 전통적인 여성상과는 반대되는 20, 30대의 여성상을 일컫는다. 반대를 뜻하는 라틴어 콘트라(contra)와 성을 뜻하는 섹슈얼(sexual)의 합성어이다. 다시 말해, 결혼이나 육아에 중점을 두는 전통적인 여성상보다는 사회적 성공과 고소득에 중점을 두는 젊은 여성들을 가리킨다.’ 라고 백과사전에 나와 있다.

 

그러니까 메트로섹슈얼은 작품 제목처럼 꽃미남을 콘트라섹슈얼은 여전사를 가리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다시 저자가 융이 말한 심리적인 용어인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대해 알아보자. 아니마란 남성이 지니는 무의식적인 여성적 요소를 말하고 아니무스는 여성이 지니는 무의식적인 남성적 요소를 말한다.

 

저자는 처음에 신화와 종교를 통해 양성이 인간의 원초적 이상향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자웅동체가 바로 인간이 지향하는, 인간이 만들어야 하는 인간의 참모습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있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은 외관적으로만 다를 뿐 내재된 안에는 양성이 모두 있다는 것이다. 그 중 우리가 어떤 것을 더 많이 표출하고 더 많이 억압하느냐가 남성적이라는, 또는 여성적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시대를 거치면서 가부장적인 시대 안에서 꽃미남을 낳고 여전사를 낳았다. 하지만 이것은 시대가 원하는 것이었지 스스로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성 화가가 자신의 시각으로 여성적인 모습의 남성을 그린다. 이것을 아니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존의 여전사는 아니무스의 표현이겠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어디에도 긍정적인 여성성은 없다는 것이다.

 

여성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아름다움과 섹시함만을 나타내는 것인가? 남성성이라는 것이 사회적 지배욕과 힘만을 나타내는 것인가? 물론 지금까지 우리는 이렇게 배웠다. 이것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까지 여성은 없었다는 말이 되며 앞으로도 여성은,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여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참으로 씁쓸한 결론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이 생각났다. 그 행성에는 성의 구분이 없는 존재가 산다. 그들은 외양적 성으로 구분되지 않으니 외모에서 차별받을 이유가 없다. 그들은 성을 공유하고 출산도 합의하에 정한다. 만약 이런 사회가 되지 않는 한 지금 시대가 메트로섹슈얼과 콘트라섹슈얼이 출연한 시대라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금기를 깬 양성 평등 시대, 저자가 처음에 지향한 양성공유의 이상적 사회로 나아가는 길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란 어떤 곳에서든 규범과 금기, 법률과 차별을 만드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현상들이 한때의 유행이라면, 인간들이 즉, 남녀가 서로의 편의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금세 사라질지도 모른다. 부계 사회에서는 여성이 억압받았고 지금도 부계 사회이므로 여성은 억압받고 있다. 그렇다면 모계 사회로 바뀌면 반대로 남성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억압받을 것이다. 성이 존재함으로 억압이 존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등장한 메 웨스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내가 만든 창조물이다'.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성을 뛰어 넘어 스스로가 스스로를 창조하는 자가 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성은 약간 수면 아래에 가라앉은 듯, 경계가 허물어져 뜨거운 포옹으로 아름답게 만날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아니라고 본다. 저자가 그렇게 주장하려고 보여준 많은 그림과 인물과 신화와 그 모든 것들이 메트로섹슈얼과 콘트라섹슈얼을 나타낸다 할지라도 그것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꽃미남이든 여전사든 모두 남성 지향적이라는 점이다. 꽃미남도 결코 여성지향적은 아니다. 한쪽의 성 밖에 없는 곳에서 양성의 평등과 만남과 작게는 조우를 바라고 있다.

 

저자가 2권으로 책을 만들었는데 1권반의 분량이 꽃미남에 대한 것이고 반쪽 분량만을 여전사가 차지하고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남성과 여성의 만남과 그 성적 경계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이르지 않나 싶다. 물론 남성의 세계 안에서 그만큼 여전사가 없었음의 반증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성이 아니라 성을 초월하려는 것, 또 다른 금기를 깨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존중... 이것이야말로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결론을 보면서 저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가치관의 진화를 논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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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6-07-25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옥씨 책들은 재미는 있지만 좀 비약이 심한 구석도 있고 지나치게 자극적인 부분이 있달까...
제목부터 엄청나게 선정적이지만, 왠지 끌립니다.-_-; 꽃미남 때문일까.후훗...

물만두 2006-07-25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님 선정적입니다^^ 비약은 심하더군요. 주제와도 좀 동떨어지구요. 꽃미남 무지 많이 나옵니다. 특히 제임스 딘도 나옵니다~^^

Koni 2006-07-27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목을 보고 꽤 끌렸었는데(꽃미남!) 꽤 무거운 책인가봐요.

물만두 2006-07-27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님 무거운 책 아닙니다. 약간 저자와 제 의견이 다를뿐이지요^^
 
사랑하는 다나다 군
후지타니 오사무 지음, 이은주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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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심각한 방향치 다나다군은 잠시 산책을 나갔다가 이상한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기묘하고 이상한 동네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그때 다나다군의 눈에 한 여인의 뒷모습이 눈에 뜨인다. 다나다군은 무작정 그 여인을 따라간다. 평소같으면 할 수 없었을 일이지만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다나다군은 그녀를 따라 갔다가 호텔에 난입한 도둑으로 오해를 받고 감금당하는 상황에 처해진다. 그리고 자신이 본 여인이 그곳에서 감시를 받으며 빠져 나올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알고 어떻게든 그녀를 구해주려 애를 쓴다. 다나다군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사랑하는 다나다군, 사랑을 시작하려했던 다나다군이 들어갔던 곳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들어갔던 그런 곳이었다. 앨리스가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고 빠져나오기 위해 애를 썼듯이 다나다군도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빠져 나오려 애를 쓴다.


다나다군은 이 작품에서 사랑은 방향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무작정 누군가의 모습에 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랑은 어느 한순간 불처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만들어가는 것임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지만 사랑을 시작하기에는 필요한 일임을 알려준다. 거기에서부터 시작해보라고 몸소 뛰어다니며 가르쳐준다. 

 

이 작품은 일본판 사랑에 대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인 셈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보다 간단하고 알기 쉽고 읽기 쉽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다나다군과 함께 빠져 나온 뒤 우리가 살아가는 일, 사랑하는 일은 미로와 안개속을 헤쳐 나가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심각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냥 다나다군처럼 부딪쳐보는 거다. 그리고 아님 말고. 어차피 인생은 도박이니까, 사랑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우리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들, 이상한 도시의 다나다군이 된 들, 다나다군을 기다리는 마바씨가 된 들 어떨까. 가끔 우리 이런 곳에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살지 않았던가. 그러니 다나다군과 함께 사랑이라는 이상한 도시로 뛰어들어보자. 다나다군처럼 우리도 무언가 찾게 될지 누가 알것이며, 마바씨처럼 누군가 사랑이라는 길을 헤메다가 우리를 찾아올지 모를 일이니까.
 
 

유쾌하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처럼 다나다군에게 사랑받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다나다군처럼 이런 곳으로 뛰어들고 싶은 생각은 든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 여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고 싶은 분께 강력 추천한다. 요시모토 바나나처럼 이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친해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요시모토 바나나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호기심이 생긴다면 한번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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