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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 나와 나 사이에 숨겨진 열두 가지 이야기
요시다 슈이치 외 지음, 유은경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슨 비밀이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묻고 싶었다. ‘자, 비밀 있으면 털어놔봐.‘ 이렇게 누군가 얘기를 한다면 나는 어떤 얘기를 할까. 대답해주는 이가 없으니 내가 나에게 대답을 해보기로 했다. ’내 비밀은... 에이, 별거 아냐.‘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이 이렇지 않을까. 아주 심한 비밀이 아니라면 말이다. 진짜 숨기고 싶고 숨겨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보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비밀이라고는 여기에 등장하는 이런 얘기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결혼을 앞두고 과거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비밀은 잘못 전개되면 진짜 추리소설의 소재가 될지 모르지만 서로가 이해하고 모르게 지나간다면 먼 훗날 나이가 들어 저녁놀을 바라보며 다정히 앉아 얘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사실은 말야, 여보...”하면서 그럼 서로 웃으면서 지난 일이고 지금 행복하잖아 하게 될 것이다. 이 정도 비밀 없이 일생을 살아가고 아내, 또는 남편의 작은 비밀 하나 모르는 부부가 있을까 싶다. 서로 감싸주고 감춰주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소중하고도 사소한 비밀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것을 작가는 제목으로 나타낸 것이리라.
한 사람에게 불행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행복일 수 있다. 삶이란 늘 그렇다. 내가 엄청난 불행 속을 헤매고 있는 그 순간, 누군가는 기뻐서 똑같이 눈물을 흘린다. 눈물의 의미는 다르지만 우리는 인생이라는 굽이굽이를 돌면서 이렇게 살게 되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고 나와 너가 교차하고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엇갈리기도 하고. 그렇다고 내 불행으로 인해 남의 행복을 가로 막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언제나 불행과 행복은 교차해서 온다. 반드시. 그래서 누구에게나 삶은 공평한 것이다.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 한 남자는 불행하고 다른 남자는 행복하다. 어쩜 다시 닫힌 문을 열고 불행한 남자가 행복을 만끽하는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축하하오. 그 이름, 참 좋은 이름이라오.” 하고 말이다.
삶에서 만나고 헤어짐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별하는 사람이 있고 만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모두가 특별하게 시작을 하고 어쩌면 특별하게 끝날지도 모른다. 회자정리라 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는 법. 인간사가 그렇게 이루어져 있음을 그러므로 이별을 슬퍼하지 말고 만남을 넘치게 기뻐하지 말지니. 언제나 사람의 인연이 이렇듯 좋게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일 년에 딱 한번 전화를 하던 사람과 일 년에 딱 한번 전화를 받던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의 만남은 어떤 것이었고 그들의 헤어짐은 어떤 것이었을까. 많지도 않은 전화통화의 기록은 애잔하게 사랑의 울림으로 남는다. 떨리는 손으로 일 년에 딱 한번 전화를 하던 모습,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화를 받던 사람은 얼마나 가슴 설렜을까. 비록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누군가 잊지 않고 해마다 전화해주는 이 한 명 정도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인생은 넘치게 황홀하지 않을까...
인생은 꿈이다. 우리 모두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깨어나면 불행한 사람은 행복할지도 행복한 사람은 불행할지도 모른다. 둘 중 하나라면 말이다. 하지만 인생은 그 두 가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린 불행 속에서도 행복을 발견하고 살고, 행복 속에서도 불행을 느끼며 우울한 것이다. 이 세상 누가 감히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으랴. 모든 것은 바람처럼 스쳐지나 가는 것인 것을. 연연하는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검정 전화>라는 호리에 도시유키의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사라져버린 드르륵 촤르륵 소리가 나던 돌리는 전화기. 0부터 9까지 구멍이 나 있어 손가락을 걸어 돌리고 장난감이 없을 때는 그것을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요즘 아이들은 이런 전화가 있었다는 것도, 어떻게 사용하는 지도 모른다지. 아무리 핸드폰 컬러링이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고 해도 지난 날 우리의 추억을 대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추억 속에서 느끼는 아련한 포근함도. 지금도 얼마나 많은 것이 우리 곁을 스치고 사라지는 지. 그것이 진짜 비밀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가 알게 모르게 사라지는 것들이.
이 단편집은 짧지만 괜찮다. 행간을 읽어보면, 거기에 내 비밀을 조금 보태면, 더 근사한 무엇이 되어 마음에 남는다. 어릴 적 친구도, 연인도, 전화만으로 주고받는 손님과 고용인일지라도 동시에 무언가를 느낄 수도 있고 동시에 상반된 것을 나눌 수도 있다. 안도감을 주기도 하고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슬픔을, 기쁨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어떤 비밀을 원하는 가? 이런 작지만 아름답고 소중한 비밀들 아닐까. 거창하고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런 상상 속에서나 일어날 일들, 동화 같은 이야기들 말고.
이 작품이 괜찮은 건 이 때문이다. 일상의 스쳐 지나감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도 바쁜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잊어 가는지도 모르며 살지 않았던가. 밤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좋은 만남과 즐거운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 작품에서의 사소한 비밀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