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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4분의 1
오사키 요시오 지음, 우은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9월의 마지막 날 공교롭게도 9월이 들어간 작품을 읽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에도 모두 정해진 인연이 있듯이 사람과 책도 그런 모양이다.
모두 4편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초기 단편집이다. 이 작가는 완성된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아니다. 이 작가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작가다. 그것을 담담하게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그래서 그런 못 이룬 사람이 애절하기 보다는 그런 사랑이 있었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기억을 다시 꺼내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가슴 속에 묻어둔, 깊이 침전시킨 사랑이 있을 것이다. 스쳐 지나간 사랑, 먼발치에서만 보던 가슴 설레던 짝사랑, 어쩌면 이룰 수도 있었는데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사랑 등등...
그 사랑들이 읽는 내내 아련하게 코끝을 스쳐갔다.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모습처럼, 가을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처럼. 간직한 기억의 잔상이 하나의 깃털이 되어 둥실 떠올랐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잊혀 지는데 어떤 기억은 더욱 새로워지듯 가라앉은 수많은 깃털들 중에 더 깊이 가라앉는 깃털이 있고 자꾸만 떠올라 마음 설레게 하는 깃털이 있다.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못 이룬 사랑을 늦게나마 이루려는 엘리시오가 있다. 보상받지 못할지라도 그는 엘리시오가 되어 기꺼이 사랑을 찾고자 한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고 그때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그는 이제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자신의 잡지를 타국에서 사랑해준 독자를 사후에 만나러 간 직장을 그만 둔 편집자는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바라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일 뿐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자신이었음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었음을. 가끔 인간은 가장 쉬운 것을 늦게 깨닫는 경우가 있다.
소년과 소녀의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기억이다. 한 줄기 소나기처럼 언제나 맑고 아름답다. 아마도 이 작품이 모티브가 되어 작가는 <아디안텀 블루>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한 느낌의 작품이다.
9월의 4분의 1이라는 말이 참 이상했다. 남자는 9월의 4분의 1이라고 읽었다. 하지만 여자는 9월 4일을 말한 거였다. 이런 착각이 사랑을 비켜가게 만드는 것이다. 작은 것 같지만 이 안에 얼마나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사는 지가 담겨있다. 사랑은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라는데 이런 작은 말 조차도 알지 못한다는 거... 하지만 뒤늦게 알고 찾아간다는 건 그래도 항상 반쯤 사랑을 담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작품들이다. 그래서 더욱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이제 시월이 온다. 달력은 벌써 다음 달로 넘어갔다. 우리가 넘긴 것이 단지 달력뿐일까. 이 순간 우리는 우리의 사랑도 무심코 넘기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남겨야 할 기억을 넘기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만드는 쓸쓸하고 시원한 가을바람 같은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