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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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동생이 귀 밥을 파다가 “언니, 흰머리 있다.”며 뽑아주었다. 문득 생각났다. 반백의 머리가 되어버린 엄마와 이제는 검은 머리 찾기도 힘들어진 아버지의 뒷모습이. 엄마는 자식 셋을 먹이느라 얼마나 오물거리셨으면 입가에 잔주름이 가득하실까. 그 잔주름 바라보며 늙은 어미에게 아직도 그 밥을 받아먹는 자식이라니 가슴 한 구석 저린 바람이 불었다. 아버진 자식 위해 자루를 메고, 그 자루에 눌려 한쪽 어깨가 내려앉았어도 그저 좋아 하시지만 나는 무슨 욕심에 바닥에 구멍 뚫린 자루를 메고 무엇을 넣으려고 애를 쓰는지...


시인은 비우라 한다. 평평하고 낮게 비우라 말한다. 그저 나무 한그루 마음에 담으면 그뿐. 가재미로 누워 바라볼 사랑이 있으면 족하다지만 나는 왜 그것이 안 되는지. 이제는 쥐고 있다는 것이 부질없음을, 내 것인 것은 세상에 없음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만도 한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가보다. 십년을 채우려 했던 것이 아주 허무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질없었음을 보았으면서 내가 가진 자루에 결코 채울 것은 없음을 알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집어넣는다. 시인의 시라도 집어넣는다. 그 시도 아마 지금쯤이면 벌써 어디론가 구멍에서 빠져나가 제 갈 길을 갔을지도 모르는데...


<빈집의 약속>이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내 마음은 빈집인데도 착한 사진사가 아닌 독사만 살아서 풍경 하나 들어앉히지 못하는 모양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숙연해지고 마음에 담을 것이 많다. 시월 첫날, 그래도 나는 욕심 부려 알지도 못하면서도 담아본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벌레 한 마리, 작은 길 하나, 어느 허름한 시골 음식점 평상까지도... 단 한 가지 가재미만은 담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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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6-10-02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만순님은 착하세요.귓밥도 파주고...
상상만해도 가슴 따뜻한 장면이에요..
책이야기는 안하고 엉뚱한 댓글만...ㅋㅋ

물만두 2006-10-02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 당근 파줘야죠. 당연한 걸 뭘^^;;;

건우와 연우 2006-10-02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로 터프하고 때론 따뜻한 만순씨가 너무 좋아...^^

물만두 2006-10-02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연우님 그것땜에 산다지요^^
 
9월의 4분의 1
오사키 요시오 지음, 우은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9월의 마지막 날 공교롭게도 9월이 들어간 작품을 읽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에도 모두 정해진 인연이 있듯이 사람과 책도 그런 모양이다.


모두 4편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초기 단편집이다. 이 작가는 완성된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아니다. 이 작가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작가다. 그것을 담담하게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그래서 그런 못 이룬 사람이 애절하기 보다는 그런 사랑이 있었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기억을 다시 꺼내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가슴 속에 묻어둔, 깊이 침전시킨 사랑이 있을 것이다. 스쳐 지나간 사랑, 먼발치에서만 보던 가슴 설레던 짝사랑, 어쩌면 이룰 수도 있었는데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사랑 등등...


그 사랑들이 읽는 내내 아련하게 코끝을 스쳐갔다.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모습처럼, 가을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처럼. 간직한 기억의 잔상이 하나의 깃털이 되어 둥실 떠올랐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잊혀 지는데 어떤 기억은 더욱 새로워지듯 가라앉은 수많은 깃털들 중에 더 깊이 가라앉는 깃털이 있고 자꾸만 떠올라 마음 설레게 하는 깃털이 있다.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못 이룬 사랑을 늦게나마 이루려는 엘리시오가 있다. 보상받지 못할지라도 그는 엘리시오가 되어 기꺼이 사랑을 찾고자 한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고 그때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그는 이제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자신의 잡지를 타국에서 사랑해준 독자를 사후에 만나러 간 직장을 그만 둔 편집자는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바라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일 뿐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자신이었음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었음을. 가끔 인간은 가장 쉬운 것을 늦게 깨닫는 경우가 있다.


소년과 소녀의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기억이다. 한 줄기 소나기처럼 언제나 맑고 아름답다. 아마도 이 작품이 모티브가 되어 작가는 <아디안텀 블루>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한 느낌의 작품이다.


9월의 4분의 1이라는 말이 참 이상했다. 남자는 9월의 4분의 1이라고 읽었다. 하지만 여자는 9월 4일을 말한 거였다. 이런 착각이 사랑을 비켜가게 만드는 것이다. 작은 것 같지만 이 안에 얼마나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사는 지가 담겨있다. 사랑은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라는데 이런 작은 말 조차도 알지 못한다는 거... 하지만 뒤늦게 알고 찾아간다는 건 그래도 항상 반쯤 사랑을 담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작품들이다. 그래서 더욱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들이다. 이제 시월이 온다. 달력은 벌써 다음 달로 넘어갔다. 우리가 넘긴 것이 단지 달력뿐일까. 이 순간 우리는 우리의 사랑도 무심코 넘기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남겨야 할 기억을 넘기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만드는 쓸쓸하고 시원한 가을바람 같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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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뽀스 2006-11-14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매번 스쳐지나가는 책인데, 내년 가을쯤??? 읽어보고 싶네요. ^^:
(왠지 꼭 9월에 읽어야 할 것 같아요.)

물만두 2006-11-14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그럼 꼭 그런 기분이 들죠^^
 
마왕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의 시작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시카 코타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작품을 쓴 거냐고 옆에 작가가 있다면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 읽은 뒤 이 작품에서 <기생수>를 봤을 때 느꼈던 그런 느낌을 받게 되었다.


생각을 너무 하는 형과 생각을 너무 안하는 동생이 각기 초능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런 초능력을 과연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마치 미야베 미유키의 <용은 잠들다>가 연상되지만 절대 아니다. 완전 딴판이 작품이다. 거기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인이 등장한다.


형은 할 수 있는 일은 행동에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되든 안 되든 부딪쳐보는 사람이었고 치바의 등장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주 허무하게. 하지만 죽는 순간 그는 평화롭게 죽는다. 그리고 동생은 휩쓸리는 대중이 되지 않기 위해 살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작가가 파시즘을 말하려는 건지, 반파시즘을 말하려는 건지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누군가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라는 말이 우습게 들린다. 역사 교육을 정말 안 받는 모양이다. 도대체 누가 일본을 침략했다는 건지... 미국과 중국에 대항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런데 차기 총리로 지명된 아베 지명자의 걱정이 그거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한국은 그렇다 쳐도 중국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고 미국에서 벗어난다고 하면 위험 부담이 크고... 이것이 책에서든 현실에서든 일본의 딜레마일 것이다. 하지만 앞을 잘 내다 본 건지 작가의 바람인지 암튼 여러 가지가 책과 현실이 비슷하다.


우리가 일본 얘기할 처지는 아니다. 우리도 이 작품을 보면서 우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선동되는 대중이고 그랬다가 실패했지만 그것 때문에 앞날이 그렇잖아도 더욱 우울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진짜 무솔리니같은 파시스트가 나타나서 선동만 잘하면 우리도 넘어갈지 모른다. 또 한 번... 스스로의 손으로. 한번 후회하는 것은 약이 되지만 두 번은 후회가 아니라 체념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이 책은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주위에서 별로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 기대를 안 하고 봤더니 그나마 괜찮았다. 역시 기대 심리가 작품을 읽는데 영향을 끼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작가가 남긴 생각할 여백이 좋았다. 하지만 일본인 특유의 겉과 속이 다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것이 이 책을 다 읽고도 찜찜한 구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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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9-21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별로란 소리 많이 들었는데 리뷰 보니까 궁금해졌어요. 근데 맨날 궁금해만 하고 대체 책은 언제 보는 건지..;;;;;

물만두 2006-09-2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책은 리뷰로 선택하지 마시고 보고 싶은 책을 보시길^^;;;

문학仁 2006-09-22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엔 마왕인가요?ㅡ..ㅡ;; 항상 무시무시한 책제목을 좋아하시는듯.

물만두 2006-09-2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은거인님 무시무시한 내용아닙니다^^;;;

레이라 2006-09-22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 중인데..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아 다른책과 함께 찝쩍거리며 읽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이것 저것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더군요

물만두 2006-09-22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라님 그렇죠. 진도는 준야로 넘어가면 빨리 나갑니다. 안도가 좀 미적대게 만들죠.

2006-09-22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6-09-22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최대한 빨리 해야한다고 했잖아요^^;;
 
아디안텀 블루
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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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작 <파일럿 피쉬>에서 작가는 살아감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다. 이제 작가는 사별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 한번은 이별을 하게 되어 있다. 그 헤어짐의 방법은 가지각색 다르지만 이별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좋게 헤어지기도 하고 나쁘게 헤어지기도 하고 쿨 하게 헤어지기도 하고 가슴 아프게 헤어지기도 하고...


야마자키는 사랑하는 연인과 사별했다. 그리고 3개월 동안 멍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 그는 회사에 나가지도 않고 백화점 옥상에 앉아 멍하니 사람들을 쳐다보며 과거를 회상한다. 그의 과거는 중학교 때까지 거슬러 내려가고 그는 그런 회상으로 자신의 기억 어딘가에 자신의 연인이 들어가 숨 쉴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젊은 나이에 죽는 건 언제나 슬프다. 하지만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런 당연함을 어떻게 극복하고 잘 이겨 나가는 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의 기억을 다치지 않게 마음 속 물웅덩이에 침전시키는 법과 그것을 통해 살아가는 동안 더 괜찮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음가짐을 야마자키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수족관을 설치하고 십년 뒤 다른 사랑을 하게 되고 여전히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요코는 아디안텀이었고 아디안텀 블루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오그라드는 동안에도 요코라는 아디안텀은 보석처럼 빛났고 야마자키가 뿌려주는 물을 받아들이며 행복하게 죽었다.


그 뒤 요코는 야마자키의 파일럿 피쉬가 되었다. 많은 파일럿 피쉬 중 요코는 하나로 야마자키에게 영향을 주었고 야마자키는 요코의 마지막 파일럿 피쉬로 남았다.


그러므로 아디안텀 블루는 극복해도 좋고 극복 못해도 좋다. 내 것이어도 좋고 내 것이 아니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물웅덩이에 비친 모습처럼 아름답고 따뜻한 기억을 많이많이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이 가을, 사랑을 위해 읽기 좋은 작품이다. 적당히 촉촉하고 적당히 거리감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바라보는 물웅덩이는 어떤 모양이고 내 안의 물웅덩이는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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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9-20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일 것같네요^^
가을이라 ~

물만두 2006-09-20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읽어보세요~

2006-09-20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6-09-2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뭘 속삭이시나요~ 도망은 왜 가세요=3=3=3

2006-09-24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6-09-24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부담이라기보다는... 그럼 감사하게 잘 읽겠습니다. 다음에 꼭요^^
 
오르가니스트
로버트 슈나이더 지음, 안문영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기이한 외모를 타고 나 부모에게까지 인정받지 못한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로 볼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나게 발달한 청각으로 한 번도 배운 적 없으면서 음악에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는 천재,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천재의 인생 이야기로 볼 것인지,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한 남자의 이야기로 볼 것인지를 생각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은 매우 짧았고 그 기간 내내 파란만장했기 때문이다.


엘리아스가 태어날 때 울지 않았고, 세례 받을 때 끔찍한 목소리로 울었고 파란 눈이 누렇게 변하고 모습이 기형이 되어 버렸다고 해도 그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했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자식은 누구나 부모의 사랑을 갈망한다. 부모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부모는 맹목적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과 작은 인정을 베풀 의무가 있다. 자기 자식을 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데리고 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싶을지도 모르지만 학대는 버리거나 데리고 있으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엘리아스의 첫 번째 불행이다.


두 번째 불행은 천재적인 청각을 타고 났지만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고 인정받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엘리아스가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하고자 했다면 어떻게든 싹 틔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천재는 원하지 않았는데 감히 그에게 천재의 멍에를 씌우다니 작가가 참 잔인하게 느껴졌다.


세 번째 불행은 사랑을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약간의 자신감만 있었다면 그의 상사병과 그의 사랑을 아는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면 그는 사랑을 이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세 가지 모두 그에게 이루어져 행복을 선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들이다. 그랬다면 우린 어쩌면 이 천재 오르가니스트의 작품을 지금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많은 천재들이 이렇게 갔으리라. 저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채 피우지 못한 꽃이 지는 까닭은 언제나 가슴 아프게 만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충실하게 살다 갔다. 그는 스스로 원하는 일을 하고자 했고 그 일을 이루었다. 그는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사랑에 충실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나름의 방식으로 그를 사랑했다. 그는 불행했고 또 행복했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 비친 것이 다가 아니다. 스스로 만족한 삶이었다면 그 삶이 비루하고 남루해 보일지라도, 지독하고 고통스러워 보일지라도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삶을 행, 불행으로 평가하는 잣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엘리아스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천재 오르가니스트가 아닌 자연인 엘리아스에게. 그가 어릴 적 스스로 집에서 나와 자신을 이끌었음에,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생각으로 삶에 충실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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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이맘, 또또맘 2006-09-05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자꾸 쉬운 책만 찾게 됩니다. 보육원 사무실의 산만한 분위기를 탓하며~ 어려운 책은 피하게 되더라구요... 그치만,이 책...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일단 담아두겠습니다.

물만두 2006-09-05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똘이맘, 또또맘님 이 책 안 어려운 책입니다. 단지 관점의 차이가 있죠. 저는 오르가니스트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오르간 연주에 대한 얘기는 일부러 안썼습니다. 잘 몰라서요^^;;;

마노아 2006-09-05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르가니스트가 그 오르간이군요. 전 이름인 줄 알았어요ㅡ.ㅜ

물만두 2006-09-05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ㅡㅡ;;;

KNOCKOUT 2006-09-05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까 말까 망설이다... 애플님과 물만두님의 리뷰에... 또 다시 구입.. ㅠㅠ 엉엉엉.. 읽는게 아니었는데.. ㅠㅠ

물만두 2006-09-05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넉아웃님 매번 미안시럽잖아요^^;;;

moonnight 2006-09-06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쩐지 슬퍼지네요. ㅜㅜ 향수랑 비슷한 분위기라고 어느 분이 그랬다 하셨죠.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흑. 읽을 책이 너무 많아요. 그래도 일단은 보관함으로;;) 물론, 추천이야요. ^^

물만두 2006-09-06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밤님 슬프지 않은데요. 산다는게 다 같을 수는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