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준비차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을 다시 읽었다. 톡쏘는 문체는 4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살아있다(1986년에 한국어판이 나왔으니 40년차다). 다시금 확인하는 건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글턴의 문제의식이다. 실제로 <문학이론입문> 전후의 관련 저작 목록만 보아도 이글턴의 이글턴의 문제의식을 가늠해볼 수 있다(대부분 번역본이 나왔다가 절판된 상태다. <비평과 이데올로기>만 남아있는 듯싶다).

<비평과 이데올로기>(1976)
<마르크스주의와 문학비평>(1976)
<문학이론입문>(1983)
<미학의 이데올로기>(1990)
<이데올로기 입문>(1991)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1996)

문학과 이데올로기(문학의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의 문학)를 탐색하는 것이 이글턴의 정치적 비평(<문학이론입문>의 결론장)이다.

문학을 ‘객관적이고‘ 기술적인 범주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그저 사람들이 문학이라고 부르기로 제멋대로 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류의 가치판단들은 개인적 변덕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치판단들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처럼 분명히 흔들리지 않는 더욱 심층적인 신념의 구조들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밝혀낸 것은, 문학은 곤충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존재하는것은 아니라는 사실, 나아가 문학을 구성하는 가치판단들이 역사적으로 가변적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또한 이 가치판단 자체도 사회의 이데올로기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치판단들은 궁극적으로는 단지 개인적인 취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집단들이 다른 사회집단들에 대해 힘을 행사하고 또 그 힘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의거하는 전제들을 가리킨다. 만일 이 말이 지나친 주장이요 저자 개인의 편견처럼 보인다면 우리는 영국에서의 ‘영문학(연구)‘의 발흥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이것을 검증해볼 수 있을 것이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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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문학 강의와 지성사 강의

10년 전 페이퍼다. 강의경력 30년차가 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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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의 <오후의 예항>을 강의에서 읽었다. 주로 주인공 노보루(패거리에서 ‘3호‘로 불리는 13세 소년)와 류지(이등항해사였다가 그만두고 노보루의 새 아버지가 되는 30대 초반 남성)의 관계, 그리고 노보루 패거리의 의미에 대해서 다뤘는데 패거리의 두목(노보루와 같은 또래)에 대해서는 덜 말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마저 적는다.

류지는 1만톤급 화물선의 선원으로 노보루의 선망(욕망)의 대상이었지만 노보루의 어머니 후사코(남편과 사별한 지 5년이 된 33세 여성)와 사랑에 빠지면서 선원(바다의 남자)을 그만두고 육지의 남자로 변신하려고 해서 노보루를 실망시킨다. 노보루 패거리의 두목은 그런 류지에 대한 처벌(살인)을 기획하고 노보루를 포함한 패거리와 함께 실행에 옮긴다. 그렇게 보면 <금색>이나 <금각사>와는 다른 인물 구도를 보여준다. 여성(후사코)의 존재감이 약화되는 대신에 두목이라는 제3자의 존재감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다른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시마의 남성 인물들은 미시마의 분신 역을 맡는다. 한편에 노보루-미시마가 있다면, 다른 편에는 류지-미시마가 있다. 둘의 관계가 새로운 부자관계로 갈등과 갈등의 봉합(화해)로 진행되면 전형적인 성장소설이 된다. 문제는 미시마(혹은 미시마의 인물들)가 이를 거부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 두목의 존재기 특이한데 그 역시 13세 소년이지만 아버지의-이름(부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두목-미시마도 있는 셈). 아버지를 부정하는 아버지의 형상이란 면에서 여느 아버지와 다르다(안티-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설은 노보루가 류지처럼 되고 싶어하다가 그에게 실망하면서 두목처럼 되는 쪽으로 결말지어진다. 그 과정에서 류지(아버지)는 제거되어야 한다. 그것을 이들은 타락한 류지를 다시 영웅의 자리에 되돌려놓는 일로 간주한다. 이전 소설들에서와 달리 두목과 그 패거리가 등장하여 류지를 처벌하려고 한다는 점은 징후적이며 미시마 문학이 본격적으로 파시즘 미학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보게 한다(<오후의 예항>은 매우 위험한 소설이다). 미시마가 이미 단편 <우국>(1961)을 쓰고 영화(1966)로 만들던 무렵이니 이상한 건 아니다. 그는 수년 뒤 위험한 작가의 실례(할복 자살)를 선언적으로 보여주게 될 것이다...

(...)
늘 말하는 것처럼 세계는 단순한 기호와 결정으로 구성되어 있어, 류지 본인은 몰랐을 수도 있지만, 그 기호 중 하나였던 거야. 적어도, 3호의 증언에 따르면 그 기호 중 하나였던 것같아.
우리의 의무는 알고 있겠지? 굴러떨어져 나온 톱니바퀴는 다시 원래의 장소에, 억지로라도 끼워 맞추지 않으면 안 돼. 그러치 않으면 세계의 질서가 유지되지 않아. 우리는 세계가 텅비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 텅 빈 질서를어떻게든 유지해가는 수밖에 없어. 우리는 그를 위한 파수꾼이고 그를 위한 집행인이니까."
그는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어쩔 수가 없네. 처형하자. 그것이 결국 그놈을 위한 일이기도 해.......3호. 기억하고 있니? 내가 야마시타 부두에서, 그놈을 다시 영웅으로 만들어줄 방법이 한 가지 남았다. 곧 그것을 말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라고 했던 거."
"기억해."
노보루는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허벅지를 누르며 대답했다.
"지금이 바로 그 시기야."
대장을 뺀 다섯 명은 얼굴을 마주 보며 침묵했다. 모두 대장이 말하려고 하는 일의 중대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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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요제프 로트의 ‘나의 소설 <라데츠키 행진곡>에 부치는 머리말‘에서 가져왔다. 마지막 두 문단이다. 작가의 말이 대개 그렇듯, 어떤 주제의식이나 정념을 바탕으로 작품을 썼는지 알게 해준다. 오스트리아 문학은 오스트라아 제국의 경험, 구체적으로는 그 몰락의 경험을 다룬 문학이다(제국의 멜랑콜리를 담은 문학이라고 해도 좋겠다). 오스트리아문학의 3대 장편소설로 꼽고 싶은(흥미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나왔다) 로트의 <라데츠키 행진곡>과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 그리고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나머지 두 작품도 묶어서 강의하면 좋겠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조국과 세상을 잃고 외국을 떠도는 많은 동포들에게 잘 알려지고 친숙한 오스트리아는 이 나라가 있을 당시에는 수출용 오페레타들에서 드러났었으며, 망한 뒤에는 싸구려 수출 영화들에서 그려지고 있는 오스트리아와는 전혀 다릅니다. 나는 트로타라는 기이한 가문을 알게 되고 사랑했으며, 이들에 관해 나의 책 <라데츠키 행진곡>에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인에 섞여 사는 스파르타인이었습니다. 우리는 트로타 가문의 융성과 몰락을 보며 저 으스스한 역사의 의지를 깨닫고, 역사는 한 가족의 운명에서 역사 권력의 운명을 보여준다는 것을 느껴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민족들은 사라지고 제국들은 없어집니다. (사라지는 것들로 역사는 이뤄집니다)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 중에서 기이하면서도 인간적이고 특징적인 것을 찾아 기록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입니다. 역사가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떨어뜨리는 듯보이는 개인의 운명들을 주워모아야 하는 숭고하면서도 겸허한 임무를 작가는 맡고 있습니다. -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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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에서 소포클레스의 유작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읽었다. 소포클레스의 노년작이자 사후에 공연된 유작. 노년작이어서 늙음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며(오이디푸스는 테바이에서 추방된 눈먼 노인이다), 유작으로서 아테네(아테나이)에 대한 예찬과 영속성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다(아테네에 묻히는 조건으로 오이디푸스는 아테네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아테네왕 테세우스는 이를 수용한다. 둘의 맹약을 통해서 오이디푸스는 저주받은 운명에서 벗어나 도시의 수호신으로 승화된다. <오이디푸스왕>이나 <안티고네>에 비해 덜 주목받지만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이방인에 대한 환대의 의미와 그 조건에 대해 음미하도록 해주는 고전이다...

오이디푸스: 내 삶의 저울이 기울고 있소. 내가 당신과 이 도시에 약속한 것을 지키고 죽고 싶소이다.

테세우스: 무슨 증거로 그런 죽음을 말하십니까?

오이디푸스: 신들께서 직접 전령이 되어 그것을 알려 주셨소.
이미 정해진 징조들 중 어느 하나도 속이지 않았으니까.

테세우스: 어르신, 그 징조들이 어떻게 분명하게 드러났습니까?

오이디푸스: 계속해서 제우스의 천둥소리가 이어지고 무적의 손에서 수많은 번개들이 번쩍거렸소이다.

테세우스 그 말을 믿소. 당신이 숱한 예언을 한 것을보았지만 그것들은 틀리지 않았소이다.

오이디푸스: 아이게우스의 아들이여, 내가 설명하리다.
흐르는 세월에도 당신의 도시에 해가 되지 않는 게 무엇인지를. 어떤 길잡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 스스로 죽어야 하는 장소를 당장 보여 줄 것이오. 그 장소에 대해서는 어떤 인간에게도 말해선 아니 되오.
어디에 그게 숨어 있고 어느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지를.
그 장소는 이웃들의 창과 방패보다 더 강력하게당신을 늘 방어해 줄 것이오. 한편 종교적으로 금기이고 말로 교란해선 안 되는 것들은혼자서 그곳에 갈 때 당신이 직접 배우게 될 것이오.
시민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나는 발설하지 않을 것이오. 내 아이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소, 비록 그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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