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06. 12. 01) 서양철학의 새지평 개척 베르그손 철학 다시 읽기

근대 서양 철학과 과학의 대표 주자로, 정신과 물질 이원론자인 데카르트와 기계적 운동법칙을 발견한 뉴턴이 꼽힌다. 그리고 이같은 전통은 인간 중심적인 기독교적 인간관과 결합한, 서양 근 대 문명의 한계로도 이해된다. 인간의 이기적인 과학기술 만능주의와 경제 제일주의를 비판할 때 서양 근대의 기획이 도마에 오 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 은 불교나 노장, 혹은 유학의 양명학으로 대표되는 동양적 사유 다.

하지만 동양의 불교나 노장, 그리고 양명학이 이른바 정파(正派)라 할 유학의 주자학 입장에서 보면 사파(邪派)였듯이, 서양에서도 불교나 노장에 비견할 만한 지적 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들이 근래 프랑스에서 일군의 걸출한 철학자들을 만나 자본주의를 축으로 하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에 탁월한 설명력을 발휘했으니, 바로 현대 프랑스 철학이다. 그리고 그 절정에는 들뢰즈가 서 있는 듯 보인다.

한국에서 베르그손이 각광받게 된 계기도 들뢰즈 철학의 곳곳에 서 배어나는 베르그손의 영향력 때문이리라. 들뢰즈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니체와 함께 베르그손을 꼽는데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그린비 출판사가 ‘연구공간 수유 + 너머’와 함께 기획한 ‘리라이팅(rewriting·다시 쓰는) 클래식’의 하나로출간된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은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쓴 것이다.

‘물질과 기억’은 베르그손이 37세 되던 1896년 출간돼 당시 고교 교사였던 베르그손을 단번에 유명인사로 만든 책. 당시까지 이어져 온 철학 전통은 물론, 심리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탁월한 분석으로 출간되자마자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으나, 비전문가가 이해하기에는 녹록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그의 철학적 방법론과 주요 개념의 대부분을 포괄하면서도, 심 리학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약 20년간 베르그손에 천착하며, 그의 주저인 ‘창조적 진화’를 번역하고 베르그손 연구서를 낸 저자가 ‘물질과 기억’ 에서 드러나는 베르그손의 철학을 쉽고도 입체적으로 조망한 책이다. 어렵거나 오해의 여지가 있는 개념에 대해서는 부록까지 만들어가며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고, 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에는 그림까지 삽입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물론 ‘리라이팅 클래식’의 첫 책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처럼 게으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문외한이더라도 조금만 집중해서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 면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이미지’와 ‘기억’이라는 독특한 개념들로 설명하면서, 서양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베르그손의 면모를 즐길 수 있다.(김종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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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7 02:14   좋아요 0 | URL
물질과 기억’은 베르그손이 37세 되던 1896년 출간돼 당시 '고교 교사'였던 베르그손을 ...<- 이 대목이 눈에 확 들어오는 군요.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굉장히 부러워집니다..

로쟈 2006-12-28 16:26   좋아요 0 | URL
프랑스에서도 드문 경우 아닐까요?^^
 

커피를 한 잔 마시다가 문득 책장에 있는 책 한권을 꺼내들게 되었다. 독일의 문예학자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1921-1997)의 <미적 현대와 그 이후>(문학동네, 1999)가 그것이다. 독어본이 1989년에 나온 걸로 돼 있으니까 10년 안쪽으로 '발빠르게' 번역소개된 문예이론서이다. 이번에 찾아보니까 영역본도 아직 나오지 않은 책이다.

흔히 수용미학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야우스는 그의 대표작인 <도전으로서의 문학사>(문학과지성사, 1983)를 통해서 비교적 일찍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이후에 몇몇 글들이 더 번역된 걸로 기억되지만 단행본은 그 두 권이 전부인 듯하다. 나는 영역된 그의 책을 2-3권 더 갖고 있다.

  

<미적 현대와 그 이후>는 "수용미학의 창시자이자 독일의 대표적인 문예학자가 쓴 근현대 서유럽의 철학, 예술적 담론에 대한 학문적 탐색"이다. 러시아 모더니즘에 대한 강의를 준비해야 하는 까닭에 그 '미적 현대'를 되짚어볼 필요성이 생겼는데, 야우스의 책은 요긴한 준거점이다. 그 모더니즘/모더니티에 대한 이야기는 내년에 자주 하게 될 듯하고, 다만 이 번역서의 책갈피를 들여다보다가 이 책이 속해 있는 '모더니티 총서' 목록에 눈길을 주게 되었다. <진리와 방법>부터 시작된 총서는 9번째 책으로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책 <세계의 독서가능성>을 '근간'으로 적어놓고 있다. 그게 7년 전 일이고, 책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아마도 '엎어진' 기획인 듯싶다.

야우스란 이름과 함께 곧잘 떠올려지는 독일 철학자/문예학자의 이름이 한스 블루멘베르크(1920- )인데, 두 사람은 연배도 비슷하고(비록 야우스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또 이름도 똑같이 '한스'이다(한스 vs 한스?). 모처럼 블루멘베르크의 주저 한 권을 읽어볼 수 있겠구나, 라고 기대를 걸었던 일이 목록을 보면서 다시 상기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국어와는 아직 인연이 없는 것을. 도서관에 있는 영역본으로 당분간은 만족해야겠다(책을 복사해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블루멘베르크의 책으로 내가 읽어본 건 'Shipwreck with spectator : paradigm of a metaphor for existence'(MIT Press, 1997)이란 얇은 책 한권이다. 흥미는 갖고 있었지만 대개의 그의 책들은 잘 엄두가 나지 않는 방대한 부피를 자랑한다. 영역본 <세계의 독서가능성>과 함께 같은 시리즈(Studies in contemporary German social thought)의 책으로 출간된 <코페르니쿠스적 세계의 발생(The genesis of the Copernican world)>(1989)만 하더라도 본문만 772쪽에 이르는 책이다(블루멘베르크의 책으론 그밖에 'Work on myth'(MIT, 1985) 정도가 더 영역돼 있다). 

독일 현대 문예이론의 봉우리들을 이루는 이러한 저작들이 조만간 번역/소개될 수 있을까? 블루멘베르크의 '독서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여기에 적어두도록 한다...

06.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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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이란 제목의 책이라면 어떤 내용이 연상되는가? 아무래도 그리스 비극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쓴 인문교양서라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힘들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사실이 그러하며 원제 또한 그러하다. 이번에 번역본을 낸 출판사에서도 한번쯤 고민을 해봤겠지만 '비극'보다는 '러브'와 '섹스'의 선정성에 기대/내기를 건 듯하다. 표지까지 어두침침해진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목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 쉬운(?) 책인 듯싶어서 부랴부랴 낚시질을 해둔다.

 

경향신문(06. 12. 23) 고대 그리스인도 ‘몸짱’에 열광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그리스 문학과 문화를 가르치는 저자는 그리스 비극의 세계적인 권위자. 그의 저서 ‘그리스비극 읽기(Reading Greek Tragedy)는 이 분야의 대표적 참고문헌이다(*그렇다면 이 책이 먼저 소개되어도 좋지 않았을까? 조만간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은) 그런 그가 섹스 몸 결혼 종교 오락 정치 등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고대 그리스와 현대를 조목조목 비교해놓은 대중교양서다. 2004년작.



일례로 현대의 ‘몸짱’ 열풍과 비슷한 몸만들기 노력이 고대 그리스 시민(여성과 아이와 노예를 제외한 남성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다. “자넨 올림픽 경기 선수 못지않게 몸을 관리해야 하네”. 이는 소크라테스가 몸이 빈약한 친구 에피게네스에게 한 말이다. 훌륭한 몸은 자아감을 높였던 만큼 체육관과 다이어트 및 운동안내서가 번창했다.

그리스인들의 부부관계가 가족유지를 위한 형식적인 것이었다는 대목도 있다. “아내와 연인처럼 같이 자는 것은 간통만큼이나 혐오스러운 짓”이라는 세네카의 말대로라면 아내에게 애정을 갖는 것은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인 일이었다.

동성애는 보편적일 뿐 아니라 명예롭게 받아들여졌다. 사춘기를 지나 턱수염이 나기 직전의 미소년은 성인 남성들에게 갈망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이 체육관에 들어섰을 때 벼락을 맞은 듯 눈을 홉뜨면서 혼란스러워 했다. 모든 이들이 그를 조각상처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때 나는 소년의 망토 안을 얼핏 보고서 활활 타올라 더 이상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타우레아스체육관에서 미소년 카르미데스를 본 뒤의 느낌을 이렇게 토로했다.

상류층 여성이 거친 남성에게 끌리는 일도 다반사였던 것 같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황제의 부인인 파우스티나는 한 검투사를 좋아하게 돼 그것을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황제는 즉시 그 검투사를 죽이게 해서 왕비와 잠자리를 갖기 전 그의 피로 목욕을 하도록 했다.

여성에 대한 비하는 서구문명의 전범인 고대 그리스의 치부였다. 미술이나 조각작품에서 여성의 몸을 볼 수 없는 것은 여성의 몸을 남성의 몸의 기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혈액과 체액이 흐르는 관이 서로 연결돼 있는 항아리로 간주됐는데 이것이 잘 뚫려있는지 보기위해 여성의 질 속에 밤새 마늘조각을 넣어두었다가 이튿날 아침 입을 통해 냄새가 올라오는지 확인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후대인들에게 숭모의 대상이었던 고대 그리스를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모습으로 복원해놓는다. 그 목적은 “네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면 너는 언제나 어린아이에 머물러있게 될 것이다”라는 키케로의 말처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이다.(한윤정 기자)

06. 12. 23.

 

 

 

 

P.S. 그리스 비극과 관련한 책 몇 권의 이미지를 띄워놓는다. 천병희 선생의 원전 번역과 함께 시중에서 구해볼 수 있는 작품집에는 현암사에서 출간된 '그리스비극' 시리즈가 있다. 천병희 교수의 <그리스 비극의 이해>(문예출판사, 2002)와 김상봉 교수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한길사, 2003)는 이 분야의 '업적'이다. 그리스 비극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다루고 있는 사이먼 골드힐의 책과 같이 읽으면 유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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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우스 2006-12-24 19:58   좋아요 0 | URL
이 '우리'의 문제... 저자 혹은 기자에 따르면, 한국인인 우리도 '우리'가 누구인지 혹은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고대 그리스를 알아야 하는군요... 가히 그리스는 우리의 또 다른 '또 하나의 조국'입니다....

책 자체는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네요...^^

로쟈 2006-12-24 20:08   좋아요 0 | URL
철학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 되는 것이죠.^^
 

교수신문에서 연재하고 있는 '고전번역비평-최고 번역본을 찾아서'에 몇 달 전 출간된 최초의 원전번역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제이북스, 2006)에 대한 번역비평을 옮겨온다.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소개한 바 있기에 흥미롭게 읽은 기사이다. 필자는 몇몇 번역어들의 일관성 부족과 부절적절함에 대해 아쉬움을 피력하고 있다. 새 번역서를 읽으면서, 혹은 읽기 전에 참조해둘 만하다.

 

 

 

 

교수신문(06. 12. 19) 고전번역 비평_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은 어떤 삶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붙들고 씨름하는 물음의 내용이다. 그의 관심은 신(들)의 삶이나 짐승들의 삶(?)이 아닌 인간의 삶에 있다. 또 아무리 좋은 삶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실제로 영위할 수 있는 삶이 아니면 소용이 없다. 그의 문제의식은 인간이 실제로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은 어떤 삶이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일련의 논의 끝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결론은 실천적 지혜와 도덕적 덕을 드러내 보여주는 행동의 삶이 그런 삶이라는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처음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1966년 최명관(숭실대 명예교수)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무엇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했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을유문화사와 서광사(1984)를 거쳐 지난 해 훈복문화사에서 새롭게 출간되었다. 최명관 역은 최초의 한국어판으로서 고전철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서 그리스 고전에 눈을 뜨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마도 이 땅에서 철학하는 사람들 치고 최명관 역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난 달 이창우(가톨릭대)·김재홍(숭실대)·강상진(목포대)에 의해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 고대 그리스 원전을 3인의 전공자가 5년간 공들여 번역한 결과물이다. 최초의 본격적인 원전 번역이라 하겠다. 말미에는 용어해설을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 한편, 왜 새로운 번역어를 선택했는지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이제 우리도 한글세대에 의한 제대로 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제이북스, 2006)번역본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3인의 공동번역은 기존의 번역어를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번역어를 채택하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탁월성’이라는 ‘아레테’의 번역어이다. 통상 ‘덕’으로 번역되던 ‘아레테’가 인간의 기능이나 본성을 지속적으로 잘 실현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마땅히 ‘탁월성’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을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다른 맥락에서 보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한국어에서 탁월성이란 근본적으로 ‘~의 탁월성(~에서 빼어남)’이기 때문에 그냥 탁월성이라고 하면 ‘팔다리가 잘려나간 풍뎅이’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와 대조적인 ‘카키아’는 종전처럼 ‘악덕’으로 번역했는데 여기서는 왜 ‘[악]덕’을 그대로 두었는가. 아레테를 ‘탁월성’이라 할양이면 ‘카키아’는 ‘열등함’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똑같은 ‘아레테’를 ‘능숙함’(VI 5)이라 옮겨 일관성이 없는 경우도 보인다.

‘아가톤’은 ‘좋음’으로 번역했다. 기존의 ‘선’보다 훨씬 나은 번역어이다. 그렇다면 ‘카키아’도 ‘악덕’보다 ‘나쁨’으로 옮기는 게 낫지 않았을까. ‘헤도네’는 ‘즐거움’으로 번역했다. ‘쾌락’이라는 한자말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반대되는 ‘뤼페’도 ‘고통’이라기보다는 ‘괴로움’이라고 하는 편이 나았을 듯 싶다.

제5권에서는 ‘정의’와 ‘부정의’가 논의된다. 그러나 ‘디카이오쉬네’와 ‘아디키아’는 각각 ‘정의’와 ‘불의’로 옮기는 편이 조어(造語) 면에서 나았을 듯싶다. ‘아이스테시스’의 번역에서는 ‘감각’과 ‘지각’이 혼용되고 있다.
‘헥시스’는 ‘품성상태’로 번역했다. 이때 ‘품성’은 ‘稟性’이 아니라 ‘品性’일 텐데 그렇게 되면 ‘성격’과 별반 다를 바 없게 되어 ‘헥시스’와 ‘에토스’가 구별되지 않게 된다. 원래 ‘헥시스’란 ‘영혼의 상태’로서 영혼이 어떻게 틀 잡혔는가를 뜻하는 말이다. ‘테크네’는 ‘기예’로 번역했다. 예술적 기량의 면을 부각시키기 위함일 것으로 짐작되나 테크네가 앎의 일종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도 ‘기예’와 ‘기술’이 혼용되고 있다.

기술과 학문의 분과가 별다른 기준 없이 ‘~학’과 ‘~술’로 번역되고 있다. ‘의술’, ‘조선술’, ‘마술’이 있는가 하면, ‘가정경제학’, ‘정치학’, ‘수사학’이 나온다. 어떤 기준으로 이렇게 번역하였는가. 일관성을 고려한다면 ‘가정관리술’, ‘정치술’, ‘수사술’로 옮기지 못할 것도 없다. 실제로 ‘의술’(I 1)과 ‘의학’(X 9), ‘정치학’(I 2)과 ‘정치술’(VI 8)이 혼용되고 있다. 공동번역이기 때문일까.

3인의 공동번역은 상당히 많은 대괄호 [ ]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역자들이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보다 더 정확한 의미 전달과 가독성을 함께 고려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괄호의 남용은 독자로 하여금 선입관을 갖게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덧붙인 괄호가 오히려 가독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독자로 하여금 독서를 잠깐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경우를 보자. (1) “그렇기에 그들이 행하는 것은 탁월성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면서 [그저] 다른 사람들을 낮추어 보는 것이다.”(IV 3) 여기서 ‘그저’라는 말이 없어도 문장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2) “이런 까닭에 테티스 [여신] 또한 제우스에게 베풀어 준 선행들을 이야기 하지 않았으며…”(IV 3) 여기서 ‘여신’의 첨가어는 필요치 않다. 각주에서 “테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여신으로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3) “아마도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즐거움이나 그들이 추구한다고 말하는 즐거움이 아닐 것이며, [사실] 그들은 오히려 동일한 즐거움을 추구하는지도 모른다.”(VII 13) 여기서 ‘사실’이라는 괄호는 필요치 않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문장에서 ‘그들’이라는 단어가 4번 나옴으로써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인칭대명사, 지시대명사 등의 번역은 융통성을 보이는 게 좋다.

(4) “많은 사람[다중]들이 그러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다중]이 즐거움으로 기울어지며 여러 가지 즐거움들의 노예가 된다고 말한다.” 이들 예에서 ‘많은 사람’ 다음에 [다중]이라는 첨가어가 꼭 필요한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대괄호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1) “이때의 동등함은 저 [기하학적] 비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산술적 비례에 따르는 것이다.”(V 4) [기하학적]이라는 괄호를 사용함으로써 원문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2) “이러한 친애들은 [선행의] 우월성에 근거하는데, 부모님들이 존경을 받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VIII 11) 여기서 [선행의]라는 첨가어가 없다면 우월성이 선행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임을 선뜻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나 번역이라는 게 어차피 역자의 해석이 가미된 것일진대 굳이 괄호를 사용할 필요 없이 노출시켜도 무방하리라 본다.

잦은 복수형 사용도 거슬린다. ‘다중’이 복수형인데 왜 ‘다중들’이라고 해야 하는가. ‘모든 품성상태들’에서도 ‘들’을 없애는 게 낫다. ‘모든’에 이미 복수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굳이 복수형을 쓰지 않아도 복수의 뜻을 담아내는 경우가 많다. 복수형을 쓰면 외려 거추장스럽다. 그외 ‘만들어지는’에서처럼 수동형을 사용하는 것이나 ‘~에 있어서’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한국어 어법에 어울리지 않는다.

제1권 제2장에 ‘총기획적’이라는 말이 나오고 제10권 마지막 장에는 ‘인간적인 것에 관한 철학’이라는 말이 나오나 아무런 주해도 없다. 다른 개념들에 해설과 각주를 다는 데 비하면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둘 다 윤리학의 학적 위상에 관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총기획적’이란 ‘아르키테크토니코스’의 번역어로서 정치학을 규정하는 표현이다. 정치학이 아르키테크토니코스하다는 것은 그것이 다른 모든 실천적 과학의 목표를 포함하고 그것들을 내용으로 갖고 있다는 말이다.

‘건축학’(architecture)이 ‘아르키테크토니코스’에서 파생된 점을 감안하면 ‘건축학적’으로 번역해도 좋겠으나 ‘총기획적’이라는 말이 더 적합해 보인다. 다만 이 번역어가 최명관 역에 나오므로 그런 것쯤은 언급해두는 것이 학적으로 성실한 태도가 아닐까.

흠 잡자고 덤비면 어떤 번역인들 배겨낼 수 있겠는가. 이창우·김재홍·강상진 3인의 공동번역은 특장이 훨씬 더 많은 번역이다. 당분간은 한국어 표준판의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인다. 제3의 한국어판이 나와 그 자리를 넘보기까지는. 그러나저러나 아무리 번역이라지만 번역체의 문장이 아니라 원래 우리말처럼 술술 읽히는 번역은 언제쯤이나 만날 수 있을까.(한석환/ 숭실대·철학)

06.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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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6-12-23 11:19   좋아요 0 | URL
우리말처럼 술술 읽히는 번역을 하려면, 지금 번역하는 것이 실제로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국가에서 연구비타서 하는경우 전공자가 번역을 하면 국문학이나 문학을 공부하는 분이 같이 감수하는 식으로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연구비에 이런것까지 포함하라면 택도 없을려나요.
전공자가 번역, 같은 전공자에게 일차 감수후, 문장을 볼수있는 사람에게 감수후 최종적으로 번역자가 결정. 현실에 안맞는 애기인지?

로쟈 2006-12-23 11:54   좋아요 0 | URL
번역의 관행 자체가 바뀌는 시간이 필요하겠죠. 역자들끼리 의견을 조율하는 데에도 상당한 진통과 애로를 겪는 게 다반사니까 감수자/편집자의 의견까지 고려한다면 상당한 견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인 2006-12-24 21:34   좋아요 0 | URL
오, 강상진 선생님! 정말로 꼼꼼하고 치밀한 선생님이셨는데 :)
이것도 새로 장만하던지 해야겠네요.

로쟈 2006-12-24 23:05   좋아요 0 | URL
같은 고전 전공인 강대진 선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 분인가요?..

기인 2007-01-01 19:57   좋아요 0 | URL
ㅋㅋ 한 때 두 분이 형제라는 '설'이 있었는데(4~5년 전에 서울대에서 라틴어 1, 2 두 분이 번갈아 수업하시기도 했습니다 ㅋ), 두 분 모두께 수업을 들어본 결과(?) 두 분은 '의형제'시라고 하시더라고요. 강대진 선생님은 정말 유쾌하고 재미있으시고, 강상진 선생님은 정말 진지한데, 그 진지함이 또 유쾌한 분 ^^

로쟈 2007-01-01 21:5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러고 보면, 기인님도 한 고전 하시겠는데요.^^
 

 

문화일보(06. 12. 22) 개신교 목회자 삭발 70명 넘어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요구하는 개신교계의 대여당 압박이 22일에도 계속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와 ‘한국교회연합을 위한 교단장협의회’ 사무총장을 겸하고 있는 조성기 목사는 이날 문화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국회에서 여야 협상과정을 지켜본 뒤 오늘 중 긴급 교단장 회의를 열 예정”이라며 “사학법 재개정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낙선운동을 포함한 조직적인 저항 운동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조 목사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대거 삭발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는데도 나 몰라라 하는 정부·여당을 이해할 수 없다”며 “일제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숭실학교를 폐교했듯, 학교 폐쇄를 각오하고 사학법 독소 조항을 반드시 철폐하겠다”고 강조했다.

예장통합은 이에 앞서 21일 오후 서울 영락교회에서 대의원 1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비상기도회를 개최하고 사학법이 재개정될 때까지 순교를 각오하는 마음으로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이날 비상기도회에서는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를 비롯, 영락교회 이철신 목사, 장로회신학대 이만규 이사장, 목민교회 김동엽 목사, 뉴라이트 계열의 서경석 목사 등 30여명이 또 다시 집단 삭발했다. 이에 따라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하며 집단 삭발을 한 목사와 신도들은 모두 70여명으로 늘었다.

예장통합 이광선 총회장은 이날 기도회에서 “목사들이 삭발한 것은 단지 수십여 명의 목사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의 목회자들이 한 것”이라면서 “정부는 교회의 소리를 똑똑히 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장통합의 기도회에 이어 ‘한국교회연합을 위한 교단장협의회’도 이날 오후 5시 같은 장소에서 목사·평신도 등 2000여명이 참석한 비상기도회를 열고 사학법 재개정을 촉구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열린우리당이 제출한 사학법 재개정안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개방형 이사제’를 전혀 수정하지 않은 것으로 절대 수용할 수 없다”면서 “개방형 이사제와 임원승인 취소 사유 확대 등의 조항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김종락 기자)

문화일보(06. 12. 21) “사학법 재개정 안되면 학교 문 닫는 건 당연”

개방형 이사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개정 사립학교법의 재개정을 촉구하는 기독교계의 중심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이광선 총회장이 서 있다. 영락교회, 명성교회 등의 대형교회를 포함, 약 7000 교회 250만 신도를 포용한 예장통합은 한국 기독교계 최대 교단. 서울 종로구 종로5가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5일째 삭발한 채 금식기도 중인 이 총회장은 21일 오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개방형 이사제가 폐지될 때까지 줄기차게, 끝까지 저항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초 기독교계가 사학법을 재개정하라고 제시한 시한이 오늘이다. 지금 상황은 어떤가.

“기독교 교단장들과 함께 기도하는 마음은 한결같다. 회기를 연장해서라도 사학법을 재개정하라는 것이다. 국가 백년대계와 사학의 육성을 위해 사학법은 반드시 재개정돼야 한다. 현행 사학법은 사학을 말살하려는 악법이다.”

―지난 17일 이 총회장이 삭발한 것에 이어, 20일에는 35명의 목사와 신도들이 집단 삭발했다. 심정은.

“목회자들의 삭발은 신앙 발전과 선교를 위한 순교자적 표현이다. 사도 바울도 순교를 위한 서원을 세우고 삭발한 적이 있다. 목회자들이 순교도 불사하려고 할 만큼 사학법 문제는 심각하다.”

―21일 오후 영락교회에서 여는 예장통합 비상기도회와 22개 교단 소속 목사 및 장로들의 기도회는 어떤 의의를 지녔는가.

“사학법 문제의 심각성을 교회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1000만 성도들에게 알리자는 것이다. 사학의 비리를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비리가 있으면 관련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벌하면 된다. 현행 사학법은 나라를 위한 법이 아니다. 사악한 의도가 실려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개방형 이사제를 절대 반대하고 있는 것에 반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개방형 이사제를 받아들이되, 학교운영위나 대학평의회가 아닌, 교단이나 종단에서 파송하도록 하자는 입장이다. 예장통합은 두 단체에 모두 소속돼 있는데….

“독소조항인 개방형 이사제를 전면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교단에서 이사를 파송한다면, 이해는 할 수 있다.”

―사학법이 재개정되지 않으면 학교를 폐쇄하겠다고 했다. 정말인가.

“기독교계 학교에서 선교를 못하게 하면 학교 문을 닫는 것은 당연하다.”

문화일보(06. 12. 21) “기독교 사상 첫 소수종교로 전락”

‘기독교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는 물론 유럽에서도 소수 종교다. 세계 지성계의 흐름이 기독교에 적대적으로 가고 있다. 국제정치 환경도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다. 각 지역의 전통종교들이 발흥하고 있다….

기독교와 관계없는 제3자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영국 에든버러대 신학부에 유학 중 이 대학 사상 처음으로 졸업도 하기 전에 교수로 임명된 뒤 현재 미국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강의중인 이문장 교수를 비롯, 앤드루 월즈 에든버러대 신학부 은퇴교수, 라민 싸네 미국 예일대 신학부 교수, 존 음비비티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 등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등 세계 각 대륙 출신인 이들 6인의 신학자는 최근 함께 펴낸 ‘기독교의 미래’(청림출판)에서 “지난 300여년 동안 기독교는 서구 선교의 결과로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으나, 이와 동시에 서구 교회가 쇠퇴하면서 전 세계적으로는 소수 종교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밝히는,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나는 가장 뚜렷한 현상은 세계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 소수자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유럽 대륙은 물론이고, 한때 세계 선교의 중심이었던 영국의 상황을 보더라도 교회 출석 인구는 5%를 밑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서구사회에서 기독교가 소수자의 종교로 바뀌면서 정신 세계를 주도하거나 통제하는 규범으로서 영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독교가 서구 사회를 떠났으나 기독교가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미에서도 여전히 소수 종교라는 것. 필리핀과 한국,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아시아 국가의 기독교 인구는 1%를 밑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탈현대주의나 종교다원주의와 어우러져 세계 지성계의 흐름이 반기독교적으로 가는 반면에 불교, 힌두교 및 이슬람 등 전통종교들은 급부상하고 있다는 게 신학자들의 위기의식을 더한다. 게다가 뉴욕 세계무역센터를 대상으로 한 9·11 사태 이후 아시아 대다수 지역에서의 종교 환경과 국제정치 환경이 기독교에 비우호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어떤가. 서구 신학계에서 한국적 신학, 한국적 성경읽기의 대가로 알려진 이 교수의 진단에 따르면 그동안 한국 교회는 빠르게 성장하면서 동시에 교회를 붕괴시키는 자해행위도 동시에 진행해 왔다. 교단의 분열이나 교회 지도자의 비윤리적인 행태, 교회 세습 문제 등이 그 사례다.

이 교수는 특히 한국인이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한국 교회가 종교적이지 않은 데 있다고 말한다. 종교인이라면 진리의 체득에 있어 치열함, 자기를 부정하는 모습, 사랑의 실천, 세속의 재물과 권세와 명예에 초연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보통사람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 교수는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의 윤리적 평가가 그리 좋지 않은 점 ▲종교적인 깊이가 없음 ▲한국 교회에 뿌리박힌 서구적 모습 ▲물량주의, 성장주의, 경쟁 논리 및 상업주의를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가치관 ▲배타성과 패권주의 등도 한국인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교수는 기독교가 한국(아시아) 종교로 자리잡으려면, 성경의 세계를 깨닫는 깊이와 영적인 능력이 통전적으로 어우러지는 것과 동시에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을 심층적으로 고려, 한민족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무엇보다 “한국 교회가 한민족의 삶에 뿌리내리려면 기독교의 원형을 회복해야 한다”며 “한국 교회 안에 하나님이 살아있고, 예수 정신이 살아있고, 민족의 소망과 나아갈 길이 있다면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사용하실 것”이라고 강조했다.(김종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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