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신문에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일제히 발표되는 건 한국사회/언론의 관행이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근래에 '웰메이드' 작품들이 양상되면서 신춘문예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부쩍 많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내가 근심하는 건 당선자들의 평균 연령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다간 문학 또한 '실버산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문제의식과 맞물려 신년 벽두부터 '센' 구호가 등장했다. '한국소설, 장편으로 진화하라!', '변화'가 아니라 '진화'이다. 그건 두 가지를 전제한다. (1)'단편'보다 '장편'이 진화한 양식이다. (2)그러한 진화의 과정은 좀 시간이 걸린다. 사안의 견적상 그러한 '진화'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건 다 아는 일이다. 필자도 지적하고 있는 바대로, 단편 중심의 등단제도와 문예지 중심으로 움직이는 한국 문단의 '체질'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계 사람들 대부분 인정하는 건 단편보다 장편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다. 고액의 상금이 걸려 있는 문학상들이 대부분 장편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제는 장편의 일정한 '질'을 담보할 (제도적?) 방책이 불비하다는 것, 혹은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것. 문학의 위기 국면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의견이 적지 않으므로 모종의 윈-윈 전략이 마련될 수 있을지 두고볼 일이다.  

한겨레(07. 01. 01) 한국 소설, 장편으로 진화하라!

새해 첫날 아침이다. 저마다 희망과 포부를 한껏 부풀리고 있을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들은 누구일까? 여러 사람이 있겠지만, 문학 담당 기자의 직업의식을 조금 발휘해 답해 보고 싶다.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어떨까? 그들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세상 전부를 얻은 것 같은 행복감을 맛보고 있지 않을까.

새해 첫날 아침을 신춘문예라는 문학적 축제와 더불어 맞이하는 일은 분명 축복이다. 문학의 위기가 공공연히 운위되는 가운데서도 신춘문예를 비롯한 문예 공모의 출품작들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현상은 고무적이다. 문학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응모자들의 열기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신춘문예에도 그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춘문예 제도의 제정 취지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적 견해들이 제출되어 있다. 당선 작품들의 천편일률성, 소수 심사위원들의 독점적 ‘심사권’ 행사, 패기와 실험성이 결여된 ‘웰 메이드’ 계열 작품들의 난무 등….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조금 다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거의 모든 신춘문예에서 소설 부문은 단편으로 제한해서 모집하고 있다. 드물게 중편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지만, 장편이 신춘문예에 포함된 사례는 전무하다. 물론 장편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 공모가 없지 않고 갈수록 느는 추세이기는 하다. 그러나 소설가를 꿈꾸는 이들은 등단의 관문을 뚫기 위해 우선 신춘문예가 요구하는 단편 습작에 매진하기 마련이다.

등단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지면은 대체로 문학잡지들이다. 이때도 잡지들이 청탁하는 작품은 대개가 단편들이고 약간의 중편이 포함된다. 문학잡지에 장편소설이 실리는 것은 다소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다음 단계는 각종 문학상이다. 우리나라 유수의 문학상들은 특이하다 싶을 정도로 단편소설에 쏠려 있다. 일본의 아쿠타가와상 정도를 제한다면, 외국의 소설 부문 문학상들은 대체로 장편을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쪽 사정은 오히려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삼은 문학상이 예외로 취급되는 현실이다.

등단에서 잡지를 통한 작품 발표, 그리고 각종 문학상 수상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 우리의 소설 장르가 단편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히 작가들 역시 습작 무렵부터 단편을 써 버릇하고, 등단 이후에도 잡지 발표와 문학상을 염두에 두고 단편을 쓰는 데에 진력하게끔 되어 있다. 장편은 단편에 비해 소홀히 취급되기 마련이다.

물론 단편은 장편을 쓰기 위한 훈련으로서도 의미가 없지 않다. 대개의 작가들이 등단 초기에는 단편에 주력하다가 점차 필력이 붙으면서 자연스럽게 장편 쪽으로 옮아 가곤 한다. 그렇다 해도 우리 작가들은 과도하리만치 단편에 매달리는 것이 사실이다. 장편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단편에 ‘낭비’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단편을 쓸 때 작가들은 단어 하나와 문장 한 줄에도 최선을 다해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다. 상대적으로 장편을 쓸 때는 전체적인 틀에 신경을 쓰면서 독자와의 소통에 더 무게를 둔다. 미학적 완성도라는 기준을 들이대면 장편에 비해 단편소설 쪽이 높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따라서 단편은 '소설'보다는 '시'에 더 근접한다. 소설다운 소설'보다는 '시적인 소설'이 더 득세하는 것이 우리의 문학현실이다).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단편문학의 전통이 있다. 이효석, 김유정, 이태준에서 김승옥과 오정희를 거쳐 내려오는 미학주의의 전통이다(*물론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장편문학의 전통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독자들은 단편에 비해 장편을 선호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즈음의 출판사들이 단편을 묶어 책으로 낼 때 ‘소설집’이라는 표기 대신 그저 ‘소설’이라는 모호한 표기를 앞세우는 까닭은 단편(집)에 대한 독자들의 냉담한 반응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들은 장편소설을 원한다

우리 소설을 외국에 소개할 때에도 단편은 장편에 비해 꽤 불리하다.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해 보아도 우리 독자들이 외국의 단편집보다는 장편소설을 선호하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 소설이 외국어로 번역 출간될 때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오르한 파무크의 주요 작품들을 비롯해 오에 겐자부로, 엘프리데 옐리네크, 귄터 그라스 등 대부분의 역대 수상 작가들은 장편 작가들이었다(*국제시장에 대한 감각이 탁월한 작가 김영하가 장편에 매진하는 이유이다).

 

 

 

 

이제 이 글의 결론을 말할 차례다. 간단하다면 간단하다. 한국 소설의 체질을 단편에서 장편 중심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은 아니다. 작가들 자신과 문학잡지 및 출판사들, 그리고 평론가와 독자들이 두루 합의하고 노력해야 한다(*이미지는 가장 최근에 나온 몇 권의 공모 장편들이다). 우선 이 아침,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행운을 거머쥔 주인공들에게 당부드리고 싶다. 단편보다는 장편에 주력해서 침체에 빠진 한국 소설의 활로를 열어 주시라!(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7. 01. 01.

 

 

 

 

P.S. 몇 권 더 꼽아본 작품들이 지난해 장편으로 문학상을 수상하거나 문학상에 당선된 작품들이다. '장편'으로의 진화를 가늠해보는 척도가 됨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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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7-01-0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신춘문예를 두 편 읽어보았는데..뭐랄까. 갈수록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단편에서의 역량을 잘 살려서 멋진 장편들을 쓸 수 있는 작가들이 되길 바라는 마음, 저도 함께입니다....좀더 공부하는 작가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구요...

로쟈 2007-01-0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편과 장편은 시와 소설만큼 차이가 크다고 여기는 편인지라(문장의 기본기만 공유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진화'에 대해서 좀 회의적이긴 합니다. 단편(short story)와 소설(novel)을 '소설'로 통칭하는 데 문제의 일단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신년이긴 하나 휴일의 하루인지라 느지막이 일어났다(돼지해이니까 돼지꿈이라고 꿔줘야 했을 텐데, 설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아침신문들을 읽다가 눈에 뜨인 기사는 '책읽기 365'를 제안하는 도정일 교수의 칼럼이었다. 365이니까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끈을 바짝 조이는 의미가 있겠다. 그간에 독서문화운동이나 독서캠페인 등을 많이 있어 왔지만, '사회적 독서'를 기치로 내건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 독서'의 짝이 될 이 말의 효용에 대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의 방점은 '해보자'에 찍힌다. 뭐라도 해보기로 결심하는 게 또한 시년을 맞는 의례이기도 하므로 '사회적 독서를 시작해보자'라는 제안에 한 표를 던진다.   

경향신문(07. 01. 01) 독자여, 당신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미국 일리노이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 바락 오바마는 차세대 대통령 감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떠오르는 별로 알려지고 있는 사람이다. 마흔 다섯 살의 초선 의원이 정계 진출 3년 만에 이처럼 빠르게 부상한 것은 존 F. 케네디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이런 오바마 현상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정치에 실망하고 정치판에 덧정 떨어진 국민들에게 그가 신선한 희망으로 비치기 시작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희망’을 말하기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근년 한·미 두 나라 정치판은 기이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국민은 극단적인 분열과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풍비박산 쪼개져 있으나 정치는 이 분열을 치유할 힘이 없다. 정치 자체가 분열의 조장자이자 분열을 먹고 사는 독버섯 같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판은 진지한 토론과 숙고 대신 막말, 욕설, 비방, 험담으로 날 새는 저열하고 잔인한 정쟁의 지옥이 되어 있다.

-희망의 원천은 시민의 자질-

대립과 싸움은 정치의 숙명이다. 민주정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대립이고 싸움이냐에 따라 정치의 품질과 수준은 한참 달라진다. 국민을 위한 봉사보다는 오로지 권력잡기가 목표일 때 정치는 사회악이 되고, 국가적 현안과 국민생활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보다는 당략과 점수따기를 위한 진흙던지기가 될 때 정쟁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싸움질로 전락한다.

인권변호사, 공동체 운동가, 시카고 법대 강사의 경력을 가진 오바마가 정치에 투신한 이유는 미국의 ‘깨진 정치과정을 수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분열보다는 공통의 희망과 꿈으로 국민을 한데 묶어주는 일이 더 위대하고 시급하다는 것이 그가 최근 저서 ‘대담한 희망’ 등에서 말하는 희망의 정치 기조다. 당리당략과 이데올로기를 넘어 건강한 양식과 상식의 힘으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자는 주장도 그가 제안하는 새로운 정치 방법론이다.



-‘사회적 독서’를 시작해 보자-

금년은 우리에게 대선의 해다. 우리에게도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정치문화가 필요하고 정치과정의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하다. 희망의 메시지도 그립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를 가능하게 할 궁극적인 힘은 ‘시민’에게서 나오므로 그 시민의 판단력과 자질이 또다시 요긴해지고 있다. 시민적 자질을 강화하는 첩경 중의 첩경은 누가 뭐래도 책 읽기이고 독서를 통한 숙고의 능력 키우기다.

무슨 책? 독자여, 나는 당신에게 어떤 책도 권할 생각이 없다. 나는 오히려 당신이 뽑아주는 책, 당신이 만드는 책들의 목록을 보고 싶다. 그 목록으로 우리가 사회적 독서를 시작하고, 이슈를 가리고 문제를 토론해 보는 것이 금년에 우리가 해야 할 소중한 일의 하나다. 경향신문이 새해 벽두부터 책읽기 문화의 확산을 위한 연중시리즈 ‘책읽기 365’를 시작하는 의미도 거기에 있다.(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07. 01. 01.

P.S. 그러니까 논리는 이렇다. 새로운 정치문화는 시민에게서 나온다 -> 따라서 시민의 판단력과 자질이 요긴하다 -> 그러한 자질을 강화하는 첩경은 책읽기이다. 이 책읽기가 다가올 '파국'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해줄 수 있을지 회의적이긴 하나(지젝의 표현을 빌면, 소행성과의 충돌 같은 재난 앞에서 철학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기분이면 못할 것도 없겠다. 한데, '주최측'에서 어떤 책도 권할 의사가 없다고 하므로 좀 난감하다. '당신이 뽑아주는 책으로 시작해보겠다고 한다. 젠장, 민주주의의 고단함이여!

 

 

 

 

해서, 마지못해 몇 권의 책을 꼽아본다. 한국사회에 대한 책으로 지승호의 대담집 <금지를 금지하라>(시대의창, 2006), 그리고 미국에 대한 책으로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알마, 2006), '인문서'로 어느샌가 출간된 테리 이글턴의 <우리시대의 비극론>(경성대출판부, 2006), 그리고 시집으로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네 권을 1월에 짬짬이 읽을 책으로 정해둔다. '이슈를 가리고 문제를 토론해보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적 책임감'이 강제하는 책읽기도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올해는 분단국에서 또 한 차례 대선이 치러지는 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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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 책 2007-01-01 11:46   좋아요 0 | URL
새해를 맞이해서 올해는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고 있는 제게 좋은 화두를 던져주셨네요..감사합니다..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로쟈 2007-01-01 11:50   좋아요 0 | URL
제가 '화두'를 인수인계한 셈이군요.^^

승주나무 2007-01-02 09:13   좋아요 0 | URL
경향에서 1면마다 책 한 권을 소개하기로 했다네요. 경향의 기획력은 인정하지만, 제발 동아처럼 설대 교수가 추천하는 고전 100선처럼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에발~

로쟈 2007-01-02 11:15   좋아요 0 | URL
첫호를 보니까 김지하의 서평을 싣고 있더군요. 한데, 분량이 너무 짧아서리...
 

2006년의 책들을 꼽아보려던 생각을 접었다. 이미 여러 매체들에서 나름대로 선정한 책들과 부분적으론 중복되고 무엇보다도 내가 완독한 책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이다(이유가 없지도 않은 게 대부분이 두툼한 책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게으른 독서가'가 면책될 수는 없겠지만). 다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서 한번 더 군소리를 덧붙인다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과거를 돌이켜보기엔 아직 일이 너무 많다. 차라리 2007년으로 발빠르게 넘어가는 게 더 나은 성싶다.

그래 책장을 뒤져 책상에 올려놓은 책이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민음사, 1992)이다. 나는 그해 여름에 나온 초판을 갖고 있는데, 기억에 내가 책을 완독한 건 96년 겨울이었다(정확하게는 97년 1월?). 그러니까 대략 10년전이다. 얼마전에 이 책을 2007년 1월에 (다시) 읽을 책으로 꼽아놓은 이유이다. 물론 이거 말고도 읽어야 할 책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책들이 얼추 20여 권은 된다. '책읽는 로쟈'를 여럿 빌려와야 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지식의 고고학>(1969) 국역본은 2000년에 새로운 판이 나왔지만 역자 서문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내용 자체에 수정이 가해진 것 같지는 않다. 해서, 아마도 몇 차례 <지식의 고고학>을 다룰 페이퍼의 인용문 쪽수는 모두 1992년판에 근거한다. 잠시 서론을 읽어보다가 문득 캉길렘(캉기옘)의 중요성에 대해 상기해보게 됐는데, '푸코와 캉길렘에 관한 메모'라고 제목을 달고 우선은 몇 자 적어놓는다. 내가 참조한 것은 국역본 외에 영역본과 러시아어본, 그리고 김현의 <시칠리아의 암소>(문학과지성사, 1990)이다(아직 국내에서 이 책을 넘어설 만한 연구서가 나오지 않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인문학이 죽었다는 이유가 외부에만 있을까?).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십 년이 지났다."(17쪽) <지식의 고고학>의 첫문장이다. 여기서의 '역사가들'은 역주에서 밝혀진 대로 페르낭 브로델 등의 아날학파를 말한다. 국내에서 아날학파에 정통한 학자는 <아날학파의 역사세계>(아르케, 2001), <페르낭 브로델>(살림, 2006) 등을 쓴 김응종 교수이다. <페르낭 브로델>은 특이하게도 브로델과 아날학파가 과대평가됐다는 언급으로 시작되는데, 아날학파에 대한 프랑스 내의 신랄한 비판은 프랑수아 도스의 <조각난 역사>(푸른역사, 1998)에서 읽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아날학파는 역사/시대를 지질학에서의 지층처럼 다루었는바(그래서 총체성의 결여로서의 '조각난 역사'다), 그럴 경우에 당연히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연속과 불연속에 대한 물음이다. 그들의 관심은 변화/불연속보다는 (장기)지속/연속에만 두어졌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당시 프랑스에서 역사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는 지속이 아닌 단절에 더 관심이 두어졌다. 푸코에 따르면, "(일반적인 역사학과는) 반대로, 흔히 '시대'나 '세기'로 기술되는 방대한 단위들로부터 비약의 현상들로 관심이 옮겨졌던 것이다."(19쪽) 인용문에서 '비약의 현상'은 영역본의 경우 'phenomena of rupture, of discontinuity'로 풀어서 옮기고 있는데, '단절 현상' 혹은 '불연속 현상'이라고 하는 게 이해에 용이하다. '연속성'의 상대어로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사/과학철학에서 이런 단절, 단면에 관심을 기울인 철학자가 바로 바슐라르와 캉길렘이다. 바슐라르가 사용하는 개념으론 '인식론적 활동과 문턱들(epistemological acts and thresholds)'이 있고, 캉길렘의 모델에 따르면 '개념들의 변위와 변환(displacements and transformations of concepts)'이 있다.

이에 대한 역자의 주석은 이렇다: "캉길렘(깡길렘)은 과학사를 '개념'의 수준에서 다룬다. 캉길렘은 개념과 이론을 구분한다. 바슐라르가 이미 지적했듯이, 순수한 자료 또는 해석되지 않은 자료는 없다. 그러나 캉길렘은 자료와 해석을 그들을 이론에 의해 읽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자료를 최초로 해석하는 것은 개념이다. 그 뒤에 이론은 자료를 '설명'하는 것이다. 개념은 한 대상에 대한 '최초의 이해'를 담지하며, 그 대상을 이해하는 출발점을 이룬다. 이 개념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한 이론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캉길렘에 따르면, 오히려 한 개념이 여러 이론들의 변환과정을 담지할 수 있다. 즉 개념은 '이론적으로 다가(多價)'이다. 캉길렘에 있어서 과학사는 바로 이러한 개념의 현성과 변환을 다루는 것이다."(20쪽)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캉길렘이 바로 미셸 푸코의 스승인 조르주 캉길렘(1904-1995)이다. 사르트르, 레이몽 아롱 등과 고등사범학교 동급생이었던 캉길렘의 주된 관심분야는 과학철학이었고(그는 소르본대학의 과학사연구소 소장직을 바슐라르로부터 이어받는다), 주저는 <정상과 병리>, <생명의 인식>. 전자는 <정상과 병리>(한길사, 1996),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인간사랑, 1996) 2종이나 국내에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모두 품절됐다.

 

 

 

 

이 책들과 함께 '바슐라르-캉길렘-푸코'로 이어지는 인식론의 계보를 다룬 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 1996)이 필독서이지만 역시 품절됐다(영역본의 제목은 <맑스주의와 인식론>이다). 아쉬운 대로 참조할 수 있는 책이 개리 거팅의 <미셸 푸코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의 제1장 '바슐라르와 캉길렘'이다. 이정우의 <담론의 공간>(산해, 개정판 2000)도 이 문제에 대해서 다룬다.

새삼 <정상과 병리>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독서는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지체된다!) 구입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끝내 사두지 못한 책이다. 국역본의 이미지가 없어서 영역본의 이미지를 대신 붙여놓았는데, 표지에서 알 수 있듯이 서문은 제자인 푸코가 썼다. 곁에 국역본이 없어서 영역본에서 인용하면, 아래의 문단은 캉길렘의 위치와 영향력을 단적으로 웅변해준다. 캉길렘을 제쳐놓으면, 알튀세르도 부르디외도, 라캉도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는 얘기.

"Take away Canguilhem and you will no longer understand much about Althusser, Althusserism and a whole series of discussions which have taken place among French Marxists; you will no longer grasp what is specific to sociologists such as Bourdieu, Castel, Papperson and what marks them so strongly within sociology; you will miss an entire aspect of the theoretical work done by psychoanalysts, particularly by the followers of Lacan. Further, in the entire discussion of ideas which preceded or followed the movement of '68, it is easy to find the place of those who, from near or from afar, had been trained by Canguilhem." 

그 캉길렘은 제자인 푸코에 대해 뭐라고 적어놓았을까? 푸코에 관한 자세한 전기는 디디에 에리봉의 <미셸 푸코>(시각과언어, 1995)이지만(아직 절판은 아니라지만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박스보관 도서인지라 참고할 수 없다. 대신에 <시칠리아의 암소>에서 캉길렘의 말을 인용한다. 자신이 지도한 푸코의 박사학위논문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1961)에 대해서.

 

 

 

 

"(*스웨덴의) 웁살라에 머무는 것을 이용하여 많은 일을 한 뒤에, 다시 말해 그것도 하나의 탄생 방법인 책읽기를 우선 한 뒤에, 그때는 함부르크의 프랑스문화원에 있던 푸코가 고등사범학교 교장이던 이폴리트에게 934면의 두툼한 원고를 제출했을 때, 그는 그것에 감탄한 그의 독자(*이폴리트)에게서 그 작업을 내게 넘기라는 충고를 받았다. 내가 그 전에 정상적인 것과 병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쓴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푸코를 열광적으로 읽고 나니 내 한계도 보였다. 1960년 4월에, 이 작업이 우선 인쇄되면, 소르본에 학위논문으로 그것을 제출할 것을 나는 제안했다. 아주 호의적인 보고서에서 나는 심리학의 '과학적'지위의 기원들을 다시 문제삼는 것은 이 연구가 촉발한 놀랄 만한 주제들 중의 하나를 이룰 것이라고 미리 예측했었다... 이것은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1938년에 <역사철학 서설>이라는 레이몽 아롱의 학위논문이 불러일으킨 아연실색을 상기시킨다. 심리학에서의 과학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역사에서 객관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22쪽) 

그러니까 푸코의 학위논문 지도교수는 장 이폴리트였지만, 그는 본논문의 지도를 과학철학 전공자인 캉길렘에게 넘기도록 충고하며 푸코는 그에 따랐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광기의 역사>였다...

06. 12. 31.

P.S. 이제 30여 분 후면 제야의 종이 울리겠군. 여기에 새해 인사를 적어놓기로 하자. 여러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비록 서재를 자주 찾아주시는 분들 때문에 나의 게으름은 축나고 지적 허영은 남아돌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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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랑스 의학철학의 전통과 깡귀엠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12 18:52 
    국내에는 미셸 푸코의 스승으로 처음 알려진 프랑스의 과학철학자(혹은 의학철학자) 조르주 깡귀엠의 <생명과학의 역사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아카넷, 2010)이 출간됐다. 타이틀은 책 제목이라기보다는 논문 제목에 더 어울릴 만한데('학술서'의 티를 팍팍낸다) 마침 교수신문에 책의 내용과 의의를 소개하는 역자의 글이 실렸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필자의 동의하에 옮긴이의 글을 재수록했다고 하니까
 
 
끼사스 2007-01-01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이 페이퍼는 (약간의) 읽고 싶었던 책과 (대부분의) 읽고 싶어지는 책들로 가득한 '환상적 비블리오그래피'입니다…. 로쟈님이 선사하는 새해 선물로 알고 퍼갑니다. 즐거운 일로 가득한 정해년 되시길!

로쟈 2007-01-01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관심이 맞아떨어졌던 모양이네요. 비슷한 관심의 독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알라딘의 매력입니다.^^

테렌티우스 2007-01-26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작긴 하지만 한길사 정상과 병리 표지가 아래에 있네요...^^

http://www.hangilsa.co.kr/bookimage/106normal1.jpg

로쟈 2007-01-26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놓았습니다.^^
 

다니얼 챈들러의 온라인 기호학 입문서 <초보자를 위한 기호학(Semiotics for Beginners)>이 번역돼 나왔다. <미디어 기호학>(소명출판, 2006)이 그것이다. 책이 나온 건 좀 됐는데, 소개를 하려고 해도 마땅한 리뷰가 그간에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침 북데일리에서 이 책을 다루고 있어서 겸사겸사 옮겨놓는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웨일스대학 연극/영화/텔레비전학과 교수인 대니얼 챈들러가 1994년에 처음 인터넷에 공개해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은 '기호학 입문(Semiotics for Beginners)'이 교정을 거듭한 후 책으로 발행되었다." 이미지의 책이 그것인데, 나는 한때 문화기호학 강의를 준비하느라 온라인에 떠 있던 텍스트를 다 프린트했었고, 책으로 묶여 나온 것도 (교보에선가) 눈에 띄길래 구입했었다. 말 그대로 '초보자용'이어서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교재로서는 유용하지 않나 싶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표'니 '기의'니 하는 말만 들어도 멀미를 하는 게 강의실의 현실이기 때문에.

국역본의 제목은 특이하게도 '미디어 기호학'이라고 붙여졌다. 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미디어'가 그렇게 어필하는 것인지?). 소개를 더 읽어보면, "기호학의 일반 이론을 쉽게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졌으나 미디어 학자가 '미디어 교육' 수업으로 쓴 교재이기 때문에 영화. 텔레비전, 광고 등의 미디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기에 미디어학자인 옮긴이가 원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사진과 그림, 그리고 100여 개의 역자주를 추가해서 미디어기호학의 입체성을 충분히 살려 냈다." 즉, 저자와 역자가 모두 미디어학자인 탓에 <기호학 입문>이 <미디어 기호학>으로 탈바꿈한 것. '영화. 텔레비전, 광고'가 활용되는 것은 설명의 용이함 때문이기도 할 텐데, 그것이 '미디어 기호학'으로 특화될 만한 성질의 것인지는 의문이다. 여하튼 드물게 눈에 띈 리뷰도 참조해보시길. 아래 사진은 저자 다니엘 챈들러.  

북데일리(06.12. 29) '분홍’은 남자, ‘파랑’은 여자의 색? 기호의 허구!

분홍색과 파란색, 이렇게 두 가지 색 곰 인형이 있다고 하자. 이를 여자와 남자 어린이에게 준다고 할 때, 어떤 색을 줄지 고민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분홍’이 ‘여성’을, ‘파랑’이 ‘남성’을 상징하는 자연스러운 기호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상황은 반대였다고 한다. <미디어기호학>(소명출판. 2006)의 저자 대니얼 챈들러는, 책 서문에서 1918년에 발행된 미국 잡지에 실린 글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일반적 상식에 따르면 분홍은 남자아이를 위한 것이고, 파랑이 여자아이를 위한 것이다. 분홍은 파랑보다 더 과감하고 강렬한 색이기 때문에 남자에게 잘 어울린다. 반면에 파랑은 더 섬세하고 우아하기 때문에 여자아이들에게 잘 받는 색이다.”

현대인은 분홍색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스러움’을 연상하지만, 불과 80여 년 전에는 같은 색으로부터 강렬한 ‘남성성’을 발견했던 것. 저자는 “이처럼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기호의 허구성을 깨닫는 것은 인식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일깨운다”며 “바로 여기에 기호학의 목적이 있다”고 설명한다.

즉 <미디어기호학>은 기호학의 일반 이론을 다루고 있는 책. 영국 웨일스대학의 연극.영화.텔레비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미디어학자답게 미디어에 초점을 맞춰 기호학을 풀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샷의 크기(카메라 거리)에는 ‘발화’의 기호가 숨어있다고 한다. 클로즈업(close-up)은 친밀하거나 개인적인 양식이고, 미디엄샷(medium shot)은 사회적 양식이며, 롱샷(long shot)은 비개인적인 양식이라고. 책은 이에 대해 “시각미디어가 재현하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관객의 감정적 개입을 이끌어 낼 수도 있고, 이와 반대로 무관심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해설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미디엄샷’은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흔히 유지하는 ‘사회적 거리’를 모방한다. 관객에게 부담 없이 접근하는 방법이다. 반면에 대상을 멀리서 잡은 ‘롱샷’은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방함으로써, 관객의 무관심을 유도한다.

<미디어기호학>은 이외에도 문학, 미학, 심리학, 예술이론, 신화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최대한 쉬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책이 지닌 가장 큰 미덕. 움베르토 에코의 학생 가운데 한 명이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지도교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는 편지를 저자에게 보냈을 정도다.

역자 강인규(미국 위스콘신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강사)가 추가한 사진과 그림, 100여 개의 역자주 역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06. 12. 31.

 

 

 

 

P.S. 기호학 입문서들에 대해서는 예전에 다룬 적이 있는 듯한데, 먼저 코블리의 만화책 <기호학>(김영사, 2002)과 존 피스크의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커뮤니케이션북스, 2001/2005)를 챈들러의 책과 함께 추천한다. 피스크의 책은 훌륭한 '커뮤니케이션학'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기호학 입문서'이기도 하다(기호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의 차이는 전자가 '의미작용'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에 후자는 '의사소통'을 주된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데 있다). 거기에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다른 책들이 보태질 수 있지만, '교재'로 적합한 것은 이 세 권이다(코블리의 책도 물론 수업용은 아니다). 절판된 책들 가운데는 테렌스 혹스의 <구조주의와 기호학>(을유문화사, 1987)이 조감도로서 뛰어나며, 이께가미의 <시학과 문화기호론>(한국문화사, 1994)도 훌륭하다.

 

 

 

 

물론 국내 저작들도 다수 출간돼 있다. 김경용의 <기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4), 김운찬의 <현대 기호학과 문화분석>(열린책들, 2005) 등이 '교재'로 활용될 만하다. 거기에 기호학연대의 책들은 기호학의 유용한 쓰임들을 보여준다. 한국기호학회에서 출간하는 논문집들은 보다 전문적인 수준이다. 입문서 몇 권을 읽어보고 흥미를 갖게 된다면 자신의 구미에 맞는 책들을 더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알아둘 만한 기호학자들의 이름은 소쉬르(스위스)와 퍼스(미국), 그리고 롤랑 바르트와 그레마스(프랑스), 움베르토 에코(이탈리아)와 유리 로트만(러시아), 토마스 시벅(미국)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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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 송년회 자리에 가면서 읽은 건 '씨네21' 신년호(07. 01. 02)의 전영객잔 코너였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랑페르> 읽기인데, 폴란드의 거장 키에슬로프스키(키에슬롭스키)의 유작 프로젝트를 보스니아의 젊은 감독 다니스 나토비치가 완성한 <랑페르>(=지옥)에 대한 불만과 비판, 그리고 먼저 떠난 거장에 대한 애도를 두루 포함하고 있는 아주 '핫'한 글이었다. '지옥은 천국에 다가갈수록 가까워진다'가 그 타이틀인데, 너무 긴 분량에다 아직 온라인에서 서비스되지 않는 글이라 대신에 이달 중순 같은 지면에 실린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작년과 비교하더라도 아주 '조용한' 세밑이지만, 그래도 마음은 '지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서. 지옥 같은 지옥이 아니라 우리가 자주 '천국'이라고 착각하는 지옥에서부터...   

씨네21(06. 12. 13) 키에슬로프스키보다 호사스러운 지옥 <랑페르>

1996년 3월13일의 비극. 이날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심장수술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것으로 키에슬로프스키가 친우 크지슈토프 피시비츠와 계획하고 있던 ‘천국-지옥-연옥’ 3부작은 완전히 끝이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가의 유산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난 2002년에 <천국>(Heaven)을 연출한 <롤라 런>의 톰 티크베어에 이어 두 번째로 거장의 봉인된 원고를 풀어젖힌 것은 <노맨스 랜드>의 의기양양한 보스니아 감독 다니스 타노비치다.

‘랑페르’(L’Enfer: 지옥)로 떨어진 주인공들은 세명의 자매다. 그들은 유년기에 겪은 무시무시한 사건 이후 교류도 없이 각자의 상처를 속으로 곰기며 살아간다. 잘나가는 사진작가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맏딸 소피(에마뉘엘 베아르)는 남편의 외도로 고통받고 있으며, 남편의 뒤를 몰래 밟아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며 배신감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대학생인 막내 안느(마리 질랭)는 친구의 아빠이자 교수인 프레데릭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프레데릭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느를 버리기로 결심하고, 이에 이성을 잃어버린 안느는 금지된 사랑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둘째 셀린느의 삶은 가장 적막하다. 세 자매 중 유일하게 요양원에 있는 엄마(캐롤 부케)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그는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고독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상처를 되짚어내는 이는 세바스티앙(기욤 카네)이라는 미스터리한 젊은이로, 그는 셀린느에게 접근해 자신이야말로 지옥의 근원이었다고 폭로한다.

유년기의 기억은 여전히 자매들을 맴돈다. <랑페르>의 지옥은 영원히 반복되는 인류의 형벌이다. 주인공들은 그 속에서 과거의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고, 무시무시한 다람쥐 쳇바퀴에서 떨어져 살아가는 타인에게까지 똑같은 지옥을 안겨준다. 간통과 간음과 불신과 속임수는 그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전염된다. <랑페르>는 세 자매의 지옥을 좀더 직접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종종 그리스 신화의 여인 메데아를 인용한다. 동생까지 희생하며 남편인 이아손을 따랐던 메데아는 남편의 배신으로 분노한 나머지 복수를 위해 자식들을 죽였다.

<랑페르>의 어머니 역시 아비의 목숨을 끊었으나 그 고통을 이어가는 것은 자식인 세명의 자매들이다. 타노비치(그리고 두명의 크지슈토프)는 현세의 메데아들을 통해 인간의 오해와 복수심과 불신이 빚어낸 인간 마음속의 지옥을 들여다보며 관객에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메데아의 자식들이며, 그 비극의 핏줄은 인간이 실존하는 한 영원히 대를 이어 전해질 것이라고. 무시무시한 제언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는 이의 심장에 서리를 내린다. 형식적으로 <랑페르>는 조각조각 다른 색깔로 만들어진 퀼트와도 같다. 각각의 캐릭터를 넓은 보폭으로 뛰어넘으며 진행되던 이야기는 서서히 자매들의 관계를 가까이 가까이 이어붙이고, 발화점이 높은 인간들의 드라마와 관객의 숨을 죽이는 미스터리 구조는 농밀하게 짜여져 결말을 향해 달음박질친다.

물론 영화의 형식은 두명의 크지슈토프가 창조해낸 시나리오 속에 이미 완결되어 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유산을 영화화하는 감독이라면 거장의 세계에서 완벽하게 유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니스 타노비치는 <랑페르>가 자신의 창조물이기보다는 키에슬로프스키를 향한 오마주임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다. 그는 주인공들에게 각각 레드, 블루, 그린의 색채를 입히고, (세 가지 색 3부작에 공히 등장하는) 병을 분리수거하는 할머니를 등장시킴으로써 대가를 향한 존경의 마음을 내보이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다.

타노비치가 자신만의 지장을 찍으려는 야심을 드러내는 부분은 젊고 감각적인 붓터치다. <랑페르>의 스타일은 키에슬로프스키가 만들었음직한 지옥보다 훨씬 호사스럽다. 촬영감독 로랑 다리양(<타인의 취향> <아스테릭스2 :미션 클레오파트라>)은 현실보다 화려한 빛과 색채를 이용해 바로크 음악처럼 휘몰아치는 스토리를 시각화하는 재주를 보인다. 가끔은 시각적 과시가 지나친 나머지 노골적인 미장센으로 주제를 과시하는 프랑스 멜로영화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는데, 이를 내밀한 은유의 언어로 바꾸어주는 것은 네 주연배우의 공이다. 언제나처럼 지옥에 빠져 바스락거리는 영혼을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비추어내는 에마뉘엘 베아르는 상처입은 메데아의 모습 그대로이며, 마리 질랭, 카랭 비야, 특수분장에 힘입어 단호하고 냉정한 공기를 발산하는 캐롤 부케의 연기는 각각의 호연을 따라가기 힘에 부칠 지경이다. 세대를 뛰어넘는 프랑스 여배우들의 화음을 듣고자 하는 관객에게는 프랑수아 오종의 <8명의 여인들> 이후 가장 기가 막힌 관현악이다.

<랑페르>는 언젠가 만들어질 <연옥>(Purgatory)을 위한 징검다리로도, 69년생 젊은 작가의 야심만만한 행보로도, 프랑스 여배우들의 내공을 발산하는 무대로서도, 충분한 값을 치를 만한 예술품이다. 물론 키에슬로프스키 팬들은 젊은 유럽 작가들의 ‘신곡 3부작’을 향한 오마주 난도질에 마뜩잖아 할 테지만, <랑페르>는 (티크베어의 <천국>이 그랬듯이) 키에슬로프스키의 무게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태초에 지고 태어난 영화다. “분명히 큐브릭 팬들은 싫어할 거야. 어쩌겠어.” 큐브릭의 오랜 지기였던 프로듀서 잔 할란이 스필버그에게 던진 충고는 타노비치에게도 유효할 것이다.(김도훈 기자) 

06. 12. 31.

 

 

 

 

P.S. 그러니까 이 '호사스러운' 지옥은 키에슬로프스키의 관객들에게라면 (정성일의 경우처럼) '충분한' 지옥일 수 있겠다("나는 <랑페르>라는 영화보다 원래의 시놉시스, 원래의 토픽, 내가 미처 볼 수 없었던 메모들, 만들지 않은 키에슬로프스키의 판본이 훨씬 흥미롭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에 대한 지지는 타르코프스키와 키에슬로프스키에 대한 그의 열광적인 지지와 겹친다(거기에 약간의 틈새를 이루는 건 임권택에 대한 그의 열광적인 지지이다). 키에슬로프스키에 대해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데, 아직도 갈길은 멀다. 올해 그에 관한 책들만 해도 서너 권을 더 구한 이유이다. 내년엔 보다 근사한 말들을 덧붙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욕심을 내자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 '씌어지지 않은 책'들에 대해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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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31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에슬로프스키가 보여서 정신없이 클릭했어요! 랑페르 봐야겠네요.. 정성일도 찾아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혹시 키에슬롭스키 십계 보셨어요? 예전에 조금 봤고 또 보고픈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로쟈 2006-12-3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계>는 오래전에 봤습니다. 저도 소장하고 있진 않은데, 방법이야 구입하시거나 어디서(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다운받으시는 거겠지요...

수유 2007-01-01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랑페르를 못봣네요.. 이래저래 연말연시는 분주하기만 할뿐 실속은 없습니다. 이제 방학이고 하니 여유롭게 영화관 순례를 해야겠는데 날 기다려주질 않을 영화들일까봐 다소 걱정.

로쟈 2007-01-0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이시다니 부럽습니다.^^ 더불어, 새해인사를 드려야겠네요. 분주하지만 실속도 챙기는 한해가 되시길!..

수유 2007-01-01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로쟈님도 만족스런 새해 맞으시길 바랍니다. 건필!!

도톰 2007-01-09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영상 재생툴중의 하나인 곰플레이어의 무료영화 코너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 시리즈를 한 편씩 보여주더군요. 지금까지 3개가 걸렸었는데, 이런 방법으로 시리즈를 다 보여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무료영화는 유료 영화로 바뀝니다.
http://searchgom.ipop.co.kr/cgi-bin/search_gom_movie.cgi?sub=1&whr=6100&key=%BD%CA%B0%E8

로쟈 2007-01-09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왕이면 다 걸렸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