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옮겨오는 연재물 '작가와 문학사이'이다. 이번주엔 소설가 윤성희씨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달초 한국일보에 게재됐던 '작가의 우정편지'까지 같이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2. 24) [작가와 문학사이](7)윤성희-문학은 선물이다

우리가 자주 듣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부가 세 가지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준다는 원숭이손을 얻게 된다. 이들은 시험 삼아 100만원을 갖고 싶다는 소원을 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것은 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와 위로금 100만원이다. 부부는 슬픔에 빠져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는 두 번째 소원을 빈다. 죽은 아들은 좀비가 되어 돌아온다. 부부는 울면서 마지막 소원을 빈다. 아들을 다시 죽게 해달라고.

이 이야기가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파워를 가진 원숭이손? 좀비가 된 아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러한 냉혹한 경제적 순환의 논리는 우리를 불안하고 우울하게 한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니! 따지고 보면 그렇다. 상품과 돈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언뜻 그러한 논리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랑이나 우정, 가족애조차 교환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이러한 진실한 감정조차 사실은 그러한 논리 속에서만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 ‘그’는 우연한 사고로 자기 대신 죽은 사내의 한쪽 구두만 신은 발을 본 뒤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들을 상상하지 않고는 깊게 잠”(‘무릎’)들지 못한다. ‘그’는 죄책감 때문에 집을 떠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쓸모없이 소진한 뒤, 자신이 정원사로 일하던 집의 주인에게 꽃다발 타일을 선물로 준다. ‘레고로 만든 집’과 ‘거기, 당신’에서 주변부 마이너리티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때로는 무거운 절망으로, 때로는 가벼운 유머로 포착해 온 윤성희의 최근작들은 이렇듯 죄책감과 선물의 테마로 우회하고 있다. 그런데 죄책감과 선물이라니?

윤성희 소설의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들의 죄책감은 많은 경우 자신의 사소한 실수로 인해 누군가가 죽거나 자살하거나 이혼한 데서 생기는 것이지만(‘무릎’ ‘재채기’ ‘저 너머’),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자장가’)에 시달리거나 임신한 담임선생님이 기형아를 낳으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으로 시험을 망치기도 한다.(‘하다 한 말’)

이러한 죄의식은 되갚아주어야 한다는 어떤 부채의식으로 발전하면서 선물의 논리를 작동시킨다. 이때 선물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정해진 답례나 경제적 계산에 얽매여 주고받는 것과는 다르다. 윤성희 소설에서 선물은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거나 엉뚱한 대상을 향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낯설다. ‘무릎’에서 ‘그’의 부채의식은 분명 죽은 사내로부터 촉발되지만 ‘그’의 선물은 죽은 사내의 가족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사건과는 무관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게다가 윤성희 소설에 등장하는 선물의 목록을 보면 꽃다발 타일, 달력, 늙은 말, 허름한 카페, 혹은 틀니 등이다.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다.

선물은 그렇게 세상 이치와 계산법을 벗어난 곳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은 완고한 경제적 이해관계의 논리 속에서만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상 현실세계에서 선물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선물은 현실사회의 악무한적 원환구조를 찢고 느닷없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주어진다.

부채의식을 떠안은 윤성희 소설의 인물들은 축적 대신에 무의미한 소진을 선택함으로써 살벌한 교환의 원환을 벗어나 “눈동자가 있는 곳 너머”(‘등 뒤에’)에서나 펼쳐질 법한 낯설고 불가능한 세계를 응시한다. 그러한 응시가 윤리적인 것은 현실세계의 교환과정에서는 포착되지 않는 이름붙일 수 없는 것, 비가시적인 것들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 세계의 익숙한 현실논리는 낯설어지고 세계는 새롭게 구성된다.

그러니 ‘문학은 선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냉혹한 현실논리에 두려워하고 삭막한 세상 이치에 불안해하는 고독하고 소심한 자의 부채의식으로부터 문학은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윤성희 소설은 우리에게 주어졌다.(심진경|문학평론가·서울예대 강사)

한국일보(07. 02. 08) [작가의 우정편지] 소설가 윤성희가 소설가 강영숙에게

전 아직도 그 공중전화를 기억하고 있어요. 이화여대 후문을 지나는데 삐삐가 울렸어요. 번호를 보니 선배였어요. 헤어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선배는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었던 걸까요? 전날 저는 술이 과해서 집엘 가질 못했죠. 그래서 선배의 집에서 하룻밤을 신세졌었잖아요. 우리가 같이 술을 마셨던 술집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 나요. 명동 근처의 중국집이었죠. 성희야, 안주 먹어라. 안주. 선배는 내게 말했어요. 그러고는 내 쪽으로 비싼 안주를 밀어주었어요. 그 덕에 전 아주 술을 많이 마셨어요.

암튼, 다음날 저는 공중전화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죠. 전화기 저편에서 선배는 이렇게 말했어요. “성희야. 니가 떠나자마자 전화가 왔단다. 됐단다.” 그렇게 짧게 말하고 선배는 전화를 끊었어요. 그게 선배의 당선 소식이었죠. 갑자기 눈이 왔다거나, 가슴이 두근거렸다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선하게 보였다거나, 하지 않았죠. 아, 됐구나, 하고 혼자 중얼거려봤죠.

그리고 일 년 후, 저도 선배에게 전화를 해서 이렇게 말했죠.(역시 공중전화였어요) “선배님. 저 됐어요.” 크리스마스 이틀 전이었어요. 역시, 갑자기 눈이 내리지 않았죠. 세상이 온통 내 것처럼 느껴지거나,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다짐을 하지도 않았죠. 전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오들오들 떨었어요. 사방이 막혀 있었는데도 바람이 부는 것 같았죠.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저는 일 년 전 선배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선배, 미안해요. 그 생각만으로도 저는 많은 위로를 받았거든요.

그때 이후로 전 이렇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선배라면 어땠을까?’ 내가 가는 길이 안개처럼 보일 때, 똑같은 문장을 하루에 수십 번씩 반복해서 중얼거릴 때, 새벽녘 방 한구석에서 쪼그려 뛰기를 해도 머릿속이 개운하지 않을 때면 선배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보곤 했죠. 그런 생각들이 오늘날 나를, 팔 년 전의 나보다, 조금은 더 단단하게 만든 것 같아요. 이제는 선배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생각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대입시키게 되었죠. 존경하는 많은 선생님들, 의지하는 많은 선후배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의 주인공들…. 그들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들이라면 어떻게 견뎠을까?

제가 이십대일 때 선배는 삼십대였죠. 같은 삼십대가 되기 위해 얼른 달려왔더니 선배는 사십대가 되어 버렸네요. 가끔 선배는 제 작품에 대해, 압정 같은 말을, 한마디씩 던져주곤 했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전 태연한 척 했지만 실은 무엇인가를 들켜버린 것 같았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렇게 들켜버린 게 그다지 기분 나쁘진 않았어요. 이 편지를 다 쓰면, 술 마시자고 전화할게요. “이년아, 넌 너를 너무 몰라.” 술 취한 선배의 목소리로 이런 욕을 듣고 싶거든요.(성희 / 2007년 2월)

07. 02. 24.

P.S. '선물'은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이후에 현대철학에서 매우 인기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지극히 바타이유적인 주제이면서 지극히 레비나스-데리다적인 주제이다). 하지만 한국소설에서 그러한 주제를 탐구하는 일은 드문 게 아닌가 싶다(편지에서도 작가의 밸런스 감각, 교환의 논리가 읽힌다). 작가의 묵직한 장편소설이 씌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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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이었나 평론가를 만났을 때 요즘 쓰고 있는 글이 뭐냐고 물었더니 무슨 본드걸 이야기에 대한 해설이라고 했다(아이디어를 쥐어짜는 데에서만큼은 우리 작가들도 발바닥에 땀날 정도이다). 직감에 본드 이야기만큼이나 재미는 있겠다 싶었던 소설이 최근에 출간됐다. 평론가는 해설에 '남근이여, 안녕'이란 제목을 붙였군. '본드걸'이란 말이 고상한 뉘앙스를 풍기지는 않지만 재미만큼은 보장할 수 있을 법하다. 어쩌면 좀 섹시할는지도 모르겠고. 한 서평기사를 미리 읽어둔다.

경향신문(07. 02. 24) 본드보다 더 007같은 본드걸

20세기의 아이콘인 이안 플레밍 원작의 영화 ‘007 시리즈’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21편이 제작되면서 그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대단한 완력과 성적 매력을 갖춘 영국 스파이 제임스 본드, 그의 상관인 M, 신무기를 개발해 극의 잔재미를 더해 주는 과학자 Q, 그리고 M의 비서인 머니페니. 늘 등장하는 이들 사이에서 본드의 능력을 시험하는 악당들과 그의 조력자이자 연인인 본드걸은 매번 바뀐다.

젊은 여성작가 오현종은 그 본드걸 중 하나인 미미를 내세워 ‘007 시리즈’의 코드를 뒤집어보는 패러디 소설을 시도한다. 다음 에피소드의 등장과 함께 사라질 운명인 본드걸 미미가 자신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본드에게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 스파이가 되고, 007과 함께 작전에 투입돼 활약하면서 남성중심적·이분법적인 ‘007 시리즈’를 해체해 버린다.

이 소설에서 본드는 더이상 제3세계를 종횡무진하면서 지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백인남자가 아니다. 모종의 작전을 끝내고 휴식에 들어간 본드는 무서워서 공포영화도 보지 못하는 쫌생원이고, 미미의 기분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이기주의자이며, 홈쇼핑이나 코미디 채널을 돌리며 악당과 비슷한 웃음소리를 내는 왜소한 한국 남자다.

그런가 하면 취직면접에서 줄창 떨어진 뒤 언니와 형부가 운영하는 갈빗집 카운터를 보고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미미는 청년백수이자 비정규직 노동자다. 그런 미미가 새로운 출동명령과 함께 다른 애인을 만든 본드에게 복수하기 위해 M의 밑으로 들어가 스파이 교육을 받고 살인번호 013이 된다. 그러나 동료의 말처럼 스파이는 이 시대의 사양산업이다. “위성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제트테러리즘 시대에 스파이가 대체 뭘 할 수 있겠냐”는 자조가 떠돈다.

어쨌거나 좌충우돌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스파이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미미는 드디어 본드와 함께 이쪽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줄 스파이 백색공포를 데리러 일본으로 향한다. 그러나 백색공포는 M의 경쟁상대인 하이드측에 의해 납치되고 백색공포의 애인이던 미스 플라워, 이같은 일을 꾸민 것으로 추정되는 또다른 스파이 살로메 사이에서 본드와 미미는 길을 잃는다.

그런데 주어진 체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본드와 달리, 미미는 스파이세계의 허를 찌르기 시작한다. 착한 본드걸 미미와 나쁜 본드걸 미스 플라워 사이에 대화가 이뤄지고, 하이드의 첩자인 살로메는 다름아닌 M으로 드러난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M은 자신이 키우던 사자에게 먹히는데 그의 몸에 조금씩 쌓여있던 독이 사자를 죽인다.



결국 본드와 본드걸, M과 하이드, 아군과 적군, 선과 악 등의 구분과 위계가 사라지면서 철저히 환멸과 혼란만 남은 ‘007 시리즈’가 독자들 앞에 던져진다. 지난해말 개봉된 ‘007 시리즈, 카지노 로얄’은 본드가 스파이가 되기 전의 에피소드로 돌아가 상처받은 현대의 남성상을 대변하면서 이 시리즈의 클리셰를 해체해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더욱 완전하면서 얄궂은 해체를 보고 싶다면 미미 같은 본드걸의 입장으로 돌아가라고 작가는 강변한다.(한윤정 기자)

07. 02. 24.

P.S. 리뷰기사는 <카지노 로얄>의 본드걸 프랑스 여배우 에바 그린(*이 아니라 카테리나 뮤리노)의 이미지를 붙여놓았는데, 개인적으로 '본드걸'하면 떠올리게 되는 여배우는 캐롤 부케이다. 그건 그녀가 나오는 007영화 <유어 아이즈 온리(For your eyes only)>(1981)가 극장에서 제일 처음 본 007영화였기 때문이다(당연히 가장 흥미진진하게 본 영화이며 이후에 본 007영화들은 대개 시들했다. 물론 머리가 점점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짐작에 영화를 찍었을 무렵 그녀의 나이는 23-4살 정도였다.

한데 지금은 만 50세가 되었다. 이번에 검색해보니 한번 상처한 이후에 지난 2003년 제라르 드파르디유와 재혼한 걸로 나온다. <내겐 너무 이쁜 당신>(1989)에서의 그 바람둥이 남편 말이다!(물론 '내겐 너무 이쁜 당신'이란 게 바람 피는 이유였지만.) 삶은 참으로 뻔하면서도 미스테리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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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4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4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맞습니다. 카테리나 뮤리노란 배우네요. 두 여자 중 왼쪽이 에바 그린이죠. <몽상가들>에 나온 배우. 전 그 새 살이 쪘나 했더니 기자가 잘못 안 것이네요.^^


마늘빵 2007-02-24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몽상가들>에 나온 배우요? 아 이렇게보니 또 다르네요. <몽상가들>에서 참 섹시하고 귀엽고 은은한 매력도 있고 그랬는데.

stella.K 2007-02-2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엊그제 이 책을 선물 받았는데, 로쟈님 페이퍼 보니 선물해준 분이 그냥 보내준 게 아니었네요. 전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거든요.
그런데 <내겐 너무...>이 영화 본 것도 같고 가물가물 하네요. 정신하군...>.<;;
 

한겨레의 '18도'를 편의점에서 사들고 와서 훑어보다가 가장 호기심을 갖게 된 책은 '다윈의 대답'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시리즈이다. 가격이 2만 8500원이라고 돼 있어서 꽤 두툼한 책인 줄 알았더니 4권 합계가 그렇다는 것이고 각 권은 130쪽 안팎 분량에 정가 7500원짜리 책이다. 그러니까 문고본 컨셉에 해당한다.

 

 

 

 

예일대출판부에서 나온 시리즈라고 해서 찾아보니까 'Dawinism Tdoay'라는 원 시리즈 제목이 풍기는 인상과는 약간 어긋나게 지난 1998-9년부터 나온 책들이다(그러니까 지난 세기의 시리즈이다!). 한겨레의 간략한 소개에 따르면, "예일대 출판부에서 펴내 화제를 부른 ‘다윈이즘 투데이 시리즈’의 번역본 <다윈의 대답>(이음). 편집자들은 ‘사회과학적 논제의 패러다임을 진화생물학으로 뒤집는다’는 도전적 표제를 내걸었다.(...) 실제로 책은 인문·사회과학과 진화생물학이 충돌하는 현대사회의 쟁점들에 대한 다윈주의자들의 도발적 ‘대답’을 담고 있다."

"‘다윈주의 자체는 좌도 우도 아니다’며 기존 좌·우파 모두를 비판하고 나선 1권의 저자 피터 싱어는 “적자생존이 아니라 협동”을 인간의 본성이라 주장한다. ‘왜 인간은 농부가 되었는가?’(2권), ‘남자 일과 여자 일은 따로 있는가?’(3권), ‘낳은 정과 기른 정은 다른가?’(4권)로 이어지는 책들은 제목에서 이미 ‘한 판 벌어질 듯한’ 흥미를 자극한다. 이를테면 “여성의 성공을 방해하는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은 고의적인 남녀차별 장치가 아니라 오랜 기간 누적된 본질적 성차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여성주의자들을 도발한다."

이만한 시놉시스라면 좀더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란 아쉬움은 든다. 원서가 80여쪽 정도의 분량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보다는 좀더 두툼했으면 하는 것이다(그러니까 번역본 분량으론 한 200쪽 가량). 물론 이런 푸념은 먹어보기도 전에 양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번역본의 첫 권을 장식하고 있는 건 피터 싱어의 책으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를 부제로 단 <다윈의 대답1>이다. 원제는 '다윈주의 좌파: 정치, 진화 그리고 협동'으로 돼 있다. '프로이트 좌파'와 계열체를 이루는 원제 자체가 내겐 더 매력적인데 요즘 '좌파'란 말이 별로 호감을 주지 않는 국내 정세를 반영한 듯도 하다. 그래도 목차만 보면 저자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마지막 제안으로 그가 덧붙이고 있는 게 '오늘날 다윈주의 좌파의 숙제'인 것이다.

 

 

 

 

시리즈의 첫번째 권으로 출간됐지만 원저 자체는 2000년에 나왔다. 그러니까 영어본 시리즈의 '첫권'과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다위니즘1>의 자리를 차지한 데에는 물론 저자인 피터 싱어의 지명도가 고려됐을 법하다(기억에 싱어는 호주 철학자이다). 알다시피 저명한 윤리학자인 싱어의 책들은 국내에 (거의 놀라울 만큼) 많이/자주 번역돼 있기 때문이다(지명도에 비하면 베스트셀러 학자라고도 할 수 없는데, 좀 기이한 일이다). <다윈의 대답>을 제외하더라도 최근 2년간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이 5권이나 된다. '철학 가판대의 숨겨진 베스트 싱어'라 할 만하다.

나머지 2, 3, 4권의 저자는 모두 생소하며 (알라딘에는) 목차 또한 떠 있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겠다. 대신에 나로 하여금 다윈이즘에 입문하도록 해준 도킨스의 신간이나 덧붙이도록 한다. 작년에 나온 책 <신이라는 망상>이 그의 최신간이다(http://en.wikipedia.org/wiki/The_God_Delusion). 제목 그대로 종교(유신론)에 대한 한 다윈주의자의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종교계와 사이가 안 좋은 걸로 치면 도킨스도 도올 급인 듯하다). 그러한 도킨스의 '무신론'을 유신론적 다윈주의의 입장(?)에서 비판한 책도 <도킨스의 신>이란 제목으로 나와 있다(http://en.wikipedia.org/wiki/Dawkins'_God:_Genes,_Memes,_and_the_Meaning_of_Life). 얼른얼른 번역되면 그 또한 좋지 아니한가?..

07. 02. 23.

P.S. 그러고 보니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 아래의 책도 아직 나오지 않았군. 책장에만 꽂아두기엔 좀 아쉽다. 번역본이 나와야, 멍석이 깔려야 떠들어볼 수 있을 텐데...

P.S.2. 고대하던 책이 드디어 출간됐다. <리처드 도킨스: 우리의 사고를 바꾼 과학자>(을유문화사, 2007). <이기적 유전자>를 낸 출판사에서 그래도 '책임감'을 갖고 출간한 듯하여 미덥다.

간단한 소개에 따르면, "<이기적 유전자> 출간 30주년을 기념하여 펴낸 책. 리처드 도킨스가 과학자로서, 합리주의자로서, 작가이자 대중 지식인으로서 활동하면서 사회에 미친 다방면의 영향들을 살펴보고 있다. 과거 도킨스의 대학원생이었고 지금은 생물학자들인 앨런 그래펀과 마크 리들리가 엮은 이 책에는 리처드 도킨스를 깊이 분석하거나 그와의 개인적인 일화를 회상하는 과학자, 철학자, 저술가의 글들이 실려 있다."

거기에 보태는 스티븐 핀커의 추천사: "내게 가장 심오한 과학적 영향을 끼친 인물은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였다." 얼른 원서와 나란히 꽂아두어야겠다...

07. 0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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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7-02-23 13:13   좋아요 0 | URL
피터 싱어의 책 중 <전쟁 대행 주식회사>는 다른 Singer의 책인데요^^;

로쟈 2007-02-23 13:17   좋아요 0 | URL
수정했습니다. 언젠가 싱어가 둘 있다는 건 확인해놓고 깜박했네요.^^;

2007-02-23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3 13:42   좋아요 0 | URL
**님/ 제가 '개봉박두'라고 해도 되겠군요.^^

자꾸때리다 2007-02-23 23:17   좋아요 0 | URL
알리스터 맥그래스... 옥스퍼드의 성공회 역사신학자... 물리학도 출신... 전 별로 안 좋아하지만 대단한 인물임은 맞는 것 같음...근데 맥그래스가 유신론적 다윈주의라는 이야기는 첨 듣는 이야기삼... 이 사람은 지적 설계 운동하고 맥이 닿아 있는 사람이라 하워드 반틸 류의 유신론적 진화론은 별로 안 좋아할텐데...(아주)

로쟈 2007-02-23 23:29   좋아요 0 | URL
맥그레스에 대한 진술은 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기댄 건 "Alister E. McGrath is one of the world's leading theologians, with a doctorate in the sciences." 같은 소개구절들이었기 때문에요...

2007-02-24 0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4 08:39   좋아요 0 | URL
**님/ 축하드립니다. 정신 없으실 텐데, 내주면 곧 강의부터 하시겠네요(보통 책도 오기 전에 학기가 시작하죠?^^). 싱어와는 나름의 인연이 계시군요. 푸코에 대한 소개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2007-02-24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4 09:02   좋아요 0 | URL
**님/ 그 기사는 몇 달째 걸려있어서 남세스럽게 하더군요.^^;

미생지신 2007-02-25 17:43   좋아요 0 | URL
한겨레의 18도를 편의점에서 사 오셨다는 말씀은 18도만 따로 판다는 말씀인지 금요일자 한겨레를 사셨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편의점에 잘 안 가서...ㅡㅡ.

로쟈 2007-02-25 18:13   좋아요 0 | URL
따로 팔리가 있겠습니까?^^ 주된 목적이 '18도'에 있다 보니 그렇게 적었네요...

자꾸때리다 2007-03-19 11:57   좋아요 0 | URL
아 잘못 알았습니다. 맥그래스는 물리학도가 아니라 분자생물학도 출신이군요. 22세 옥스퍼드 분자생물학 박사 24세 옥스퍼드 신학 박사.

자꾸때리다 2007-05-10 23:27   좋아요 0 | URL
아 죄송합니다. 맥그래스 유신론적 진화론자 맞습니다. ㅡㅡ;;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에서 '바디우, 발리바르, 랑시에르'란 절을 읽다가(이에 대한 정리는 시간이 나면 해둘 생각이다) 문득 호기심에 '자크 랑시에르'를 검색해보았다. 일부 번역문을 포함한 관련자료들이 몇 가지 된다. 그 중 하나를 옮겨놓는다(씨네21에 실렸다는 랑시에르의 인터뷰는 찾지 못했다. 어찌된 일인지 편집장의 말만 뜬다). 랑시에르의 철학 전반을 소개하는 것으로 2005년 봄 연세대학원신문에 실렸던 듯한데, 필자는 최원씨이다. 아래는 필자가 다시 교정을 본 것이라고 한다(작성일자는 05. 03. 28로 돼 있다). 어젠가 '자크 랑시에르 워밍업'을 했지만 워밍업의 마무리로 적합해 보이는 글이다.

'불화'의 철학자 랑시에르 

아마도 한국에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알튀세르가 한창 국내에 소개되고 있던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15년 가량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국내에 변변한 책 한 권 번역된 적 없는 낯선 철학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가 알튀세르의 주도로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1960년대 초반에 진행되었던 <'자본'을 읽자> 세미나에 멤버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간 국내에서 진행된 알튀세르에 관한 논의에서 그의 이름이 거의 자취를 감춰버린 이유는 68년 학생운동에 대한 대응 문제를 둘러싸고 그가 알튀세르와 갈등하다 결국 독자적인 길을 선택했었기 때문이다(74년에 자신의 에세이를 모아 낸 <알튀세르의 교훈>이라는 책자에서 그는 알튀세르의 철학을 대중투쟁을 마비시키는 "질서의 철학"이라고 혹평하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그 자체로 엘리트주의적인 이론에 불과하다고 힐난한다―이러한 평가가 과연 얼마나 정당한지는 이 자리에서 논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가 단지 알튀세르주의에 대해서만 거리를 두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동시에 '차이의 철학'이라 불리는 일군의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상들(료타르, 들뢰즈, 데리다 등)에 대해서도 소원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상들은 '변혁'보다는 '해석'의 문제에 집착함으로써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대해 쓴 테제 가운데 11번째 테제("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를 다시 취소하는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많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이제껏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랑시에르의 작업만이 소개되지 않고 있었던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즉, 그는 어떤 학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철학자라는 것이 그것이다. 사실 이러한 그의 '비소속성'은 단지 철학 내 이러저러한 학파나 입장들에 관련해서만 드러나는 그의 특징도 아니다. 예컨대 그는 지속적으로 정치와 철학에 관해서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철학자'는 아니다. 반대로 그는 정치철학 내의 어떤 경향이 되길 단호하게 거부하고, 정치철학이라는 학문분과 전체를 자신의 비판대상으로 삼는다.

공인된 학문분과 체계 내에서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 랑시에르의 이러한 이론적 위치, 이것이야말로 공인된 정치 공간 그 자체에 대해 그가 취하고 있는 외부자적인 태도와 상당히 조응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테면 '공적 공간'(혹은 '공론장')의 경계선에 서서 그 공간 바깥에 여전히 우리가 잊고 있는 어떤 '외부'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구성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있기에, 그 안에서 주체들이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서로 말을 교환할 수 있게 되는 '호혜성'의 감각적 공간이야말로 고유한 정치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정치철학'적인 사고(이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시작해서 근대의 다양한 사회계약론, 현대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에 이르기까지 정치철학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전제다)에 대해 랑시에르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할 권리'를 비롯한 다양한 권리들의 분배가 다소간 평등한 방식으로 행해지는 이러한 '공적 공간'을 성립시키기 위해 사회는 언제나 내부의 어떤 특정 부분이나 구성원들을 "몫이 없는 부분(une part des sans part)"으로 미리 배제하고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구축이야말로 '호혜성'을 가장하는 공적 공간 내의 모든 '공정함'과 '정의'의 조건인 것이다.

정치철학에 대한 랑시에르의 이 같은 급진적인 비판은 특히 <불화>(1995)라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에서 발전된다(*짐작에 'Disagreement'가 그 영역본인 듯싶다. 언젠가 복사해놓은 책인데 바로 못 찾겠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인 폴리테이아(politeia)의 번역어가 '정치(politique)'일 뿐 아니라 '경찰(police)'이기도 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정치'라고 인식하는 '분배'("집단들의 결집이나 합의가 달성되는 절차들, 권력의 조직화, 장소와 역할의 분배, 그리고 이 분배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체계")가 사실은 정치가 아닌 경찰의 일임을 폭로한다. 단, 그는 푸코를 참조하여 경찰활동의 의미를 폭력행사에 의한 질서유지 활동에 국한시키지 않고, 구성원들 각자에게 정당한 '몫'을 찾아주기 위해 사회가 행하는 그 모든 활동으로 확장시킨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분배란 언제나 사회의 한 '부분'으로 이미 인정받은 사람들(서로 '호혜성'이 형성된 사람들)이 다소간 평등한 방식으로 공동체로부터 자신의 몫을 찾아가는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 간에 때때로 분배방식 등을 둘러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분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가 누구인가(즉 누가 그 사회의 '부분'인가)를 둘러싼 논란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다. 만일 공동체에 어떤 기여도 한 바가 없으면서 자기 몫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도둑심보'를 가진 자들로 분배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결국 경찰활동의 목표는 이러한 배제의 실현이며, 정치철학은 이를 정당화하고 이론화한다.

이제 랑시에르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치를 이러한 경찰 논리에 대립시켜 새롭게 규정한다. 정치란 바로 공동체에 별반 기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없는 자들이 뻔뻔스럽게도 '평등주의' 논리에 입각하여 자기 몫을 주장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정치는 본래 자기 근거나 기원(arkhê)이 없는, "추문"에 불과한 것이다.

<니코마쿠스 윤리학> 제 5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문제에 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공동체에 보다 많은 기여를 한 사람들이 더 많은 분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에 대해 동의하지만, 그 기여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기에 서로 다투게 된다(즉 '불화'하게 된다). 귀족(aristoï)은 덕(aretê)(이는 '뛰어남(excellence)'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귀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는다)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부자(oligoï)는 재산(공동체 경제에 대한 기부금)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전자는 귀족제(aristocracie)를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후자는 과두제(oligarchie)를 실시하자고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귀족은 보통 부유한 계급과 마찬가지로 부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양자 사이에는 진정한 쟁점이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아테네의 데모스(demos, 자유인 신분의 고대 도시국가 빈민들)가 주장하는 기준 때문에 발생한다. 데모스는 당시의 귀족들이나 부자들과 달리 공동체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자유'―발언의 자유―라는 '빈 껍데기 재산'만을 가져와 공동체를 '논쟁'과 '분열'로 몰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전체를 다수자인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민주제의 실시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데모스의 주장과 실천이야말로 랑시에르에게는 정치적 실천의 원형을 구성하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있어 정치란 한 사회의 '부분'으로 인정받지 못한 '몫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그 사회에 폭로하고 인정받아 공동체를 완전히 새로운 원리에 입각하여 재구성하도록 강제하는 '범법' 활동이며, 따라서 이는 몫이 있는 자들 사이에서나 행해질 수 있는 '대화(dialogue)'가 아니라, 자신을 대화상대로 전혀 인정치 않는 사회에 대해 자신의 존재를 '3인칭'으로 폭로하는 '독백(monologue)'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은 후기 하이데거의 진리(aletheia, 베일을 걷어냄) 개념 및 그와 긴밀하게 연결된 포이에시스(poiesis, 이는 '제작'이라는 뜻을 갖지만 하이데거에게서는 특히 사물을 이름짓고 그것을 현전 안으로 불러내는 언어의 '시적(poétique)'인 기능으로 인식된다) 개념과 유사하게 미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것은 공적 공간 안에서 감각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이름지어 불러내고 공공연하게 전시함으로써, 기존의 감각공간을 다시 분할하는 실천이다. 이 때문에, 랑시에르에게 있어 정치란 '사건' 이외의 것이 될 수 없다. 하나의 정치적 사건을 통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을 보이고 들리게 하자마자 그것은 공인된 감각공간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다. 마치 기이한 피카소의 그림이 이제는 커피 잔의 무늬로 사람들에 의해 편안하게 소비될 수 있듯이, 또 그렇게 소비되는 그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예술작품이 될 수 없듯이.

그렇다면 공인된 감각공간 내에 본래적으로 흡수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일까? 랑시에르에 따르면 그런 것은 없다. 오히려 정치의 이러한 사건적 성격을 잊게될 때 '전체주의'와 같은 최악의 결과가 생겨날 수 있다. 랑시에르는 데모스(demos)와 오클로스(ochlos)를 구별하고 후자를 정치의 주체로 사고하려는 일체의 시도들을 비판하는데, 전자가 비규정적인 다수자(하나의 비어있는 장소)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자신의 통일(unification)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다수군중을 의미한다. 언제나 통일이란 '합의'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정치란 언제나 '불화'에 기초해야만 한다는 랑시에르의 테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최원l Loyola University Chicago, 철학 박사과정)  

07. 02. 22.

On the Shores of Politics (Radical Thinkers) CoverHatred of Democracy Cover

P.S. 그런 관점에서 더 읽어볼 만한 책은 <정치의 해안에서(On the Shores of Politics)>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Hatred of Democracy)> 같다(정치의 계절에 소개될 만하지 않을까?). 거듭 말하지만, 그의 미덕은 너무도 얇은 책들을 쓴다는 것(지젝도 바디우도 주저들은 두껍다). 이런 점에서도 그의 '비소속성'이 드러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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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7-02-23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튀세르-이후(Post-althusser)'의 정치철학적 경향(발리바르, 랑시에르, 바디우, 아감벤, 라클라우, 네그리 등)은 '군중'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정립하려는 시도에서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스피노자의 언급처럼 체제에 위협을 가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위협하는, 양가적인 '다수'의 위상을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 말이지요. 더 흥미로운 건 이런 경향을 일별하는 지젝은 '절대적'으로 그들 모두를 참조하면서 비판의 외양을 취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지젝은 칸트의 뒤를 이어 일련의 '비판서'들을 이미 써 온 건지도 모르겠네요...^^

로쟈 2007-02-24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만한 '강사'가 따로 없지요. 다 읽어서 정리해주고 비판해주고 아울러 계발적인 생각들도 툭툭 던져주고.^^
 

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북리뷰들을 훑어보다가 뜻밖의 책이 나온 걸 알게 됐다. <인간론>으로 잘 알려진 에른스트 카시러의 <문화과학의 논리>(길, 2007)가 그것이다. 흔히 '문화철학자'로 일컬어지는 카시러의 저작에 '문화과학'이란 문구가 들어간 것도 이채롭다(찾아보니 독어본 원제는 'Zur Logik der Kulturwissenschaften'이며 영어로는 <인문학의 논리(The Logic of the Humanities)>라고 옮겨진 책이다. 그러니까 카시러의 '문화과학'은 '인문학'과 유사한 개념이며 영어권의 '문화연구'와는 계보가 다른 것이겠다. 더 찾아보니 영역본은 <문화과학의 논리>라고 새로 번역돼 나왔다) . 김상봉 교수의 서평을 옮겨놓으며 몇 자 보탠다.

한겨레(07. 02. 23) ‘문화’라는 학문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를 아는 것은 세계를 아는 것보다 어렵다. 세계는 눈앞에 펼쳐져 있어 바로 볼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대상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내게 가장 익숙하지만 가장 낯설고,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멀리 있는 존재이다. 이런 사정은 개인으로서의 자기인식만이 아니라 유적 존재로서 인간 전체의 삶을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인류의 삶의 객관적 현실태를 가리켜 우리는 문화라 부를 수 있다. 문화는 인간성의 객관적 표현이자 실현인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를 이해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유적 존재로서 인간이 자기를 안다는 것을 뜻한다 하겠는데, 이른바 문화과학이란 문화에 대한 학술적인 인식의 체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Cover

카시러의 책 <문화과학의 논리>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문화를 인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 새로운 학문의 근본적인 곤경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문화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등장하기 전까지 학문과 인식의 모범은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자연과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자연에 대한 학문적 인식은 주어진 사실을 두 가지 방법론적 원리에 근거해서 해명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왔는데, 그 하나는 주어진 사실을 그 사실이 아닌 다른 원인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런 인과관계를 보편적 법칙을 통해 해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학문적 인식은 주어진 사실이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증명하려 한다.

따라서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인식의 이상은 세상만사를 외적 필연성에 따라 인식하는 것이다. 대상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외적 필연성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은 타율성과 수동성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자연인식의 방법을 통해 우리들 자신의 삶의 현실태인 문화를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문화과학의 논리>를 관통하는 근본 물음이다.

생각하면 자연과학의 방법은 죽은 사물을 인식하는 데나 합당한 것으로서 문화는 고사하고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데조차 쓸모가 없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생명현상이란 외적 필연성에 의해 떠밀려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에 의해 스스로 생겨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아무리 생명현상을 외적 필연성과 합법칙성에 따라 분석하고 해명한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생명체의 발생과정일 뿐, 그 발생과정을 이끌어가는 근원적 힘과 원리인 생명 그 자체는 아니다.

생명이 그러한데, 인간의 일은 또 어떠하겠는가? 칸트가 말했듯이 자연은 법칙에 따라 운동할 뿐이지만 인간은 법칙의 표상에 따라 행위한다. 그렇게 법칙을 인식할 수 있는 까닭에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타율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기계가 아니다. 그리하여 모든 대상을 타자적 원인과 타율적 법칙을 통해 해명하려는 시도는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순간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물론 인간은 타자의 작용과 객관적 법칙 밖에 거주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를 지배하는 법칙 그 자체를 대상화하고 타자로부터의 작용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줄 아는 존재인 까닭에 언제나 법칙 속에서도 법칙을 넘어서고, 타자성 속에서도 자기를 발견하고 형성하는 존재이다. 문화란 그런 인간성의 객관적 현실태이니, 그것을 학문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제 단순한 외적 필연성의 논리가 아닌 다른 학문 방법과 논리가 필요한 것이다.

카시러는 이 책에서 그 새로운 학문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박식한 철학자는 문화과학의 어려움이 어디에 있는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또 다른 학문 방법이 필요한지, 그 가장 기본적인 문제 상황을 다양한 시대와 학문분야들을 넘나들면서 명석한 필치로 소상히 설명한다. 어떤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려는 사람은 다른 것에 앞서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인간성의 객관적 현실태인 문화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 인간성의 신비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사람을 위한 이상적인 길잡이이다.(김상봉/전남대 교수·철학)

07. 02. 22.

 

 

 

 

P.S. 카시러(캇시러) 입문서로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 외>(책세상, 2002)이다. 역자의 해설과 관련문헌 해제가 유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고본이어서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다. 역자인 오향미 박사는 카시러 전공자인데(국내에서는 최명관, 신응철, 박완규 교수 등이 카시러 전문가로 분류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카시러는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에 비하면 독일에서도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철학자의 속한다."(7쪽) 독일어 주저인 <상징형식 철학>(전3권)의 핵심을 압축/축약해서 출간한 것으로 알려진 영어판 <인간론(An Essay on Man)>(1957)의 출간 이후에는 오히려 미국에서 더 많이 연구되고 있다 한다(저자 스스로 축약해준다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론>은 국내에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서광사, 1988)로 번역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인간과 문화>라는 발췌역본  있었다). 최초 번역본은 <인간론>(민중서관, 1960)이었다. 이어서 나온 것이 <국가의 신화>(서광사, 1988)이며 모두 최명관 교수의 번역이다(<국가의 신화>는 아직 절판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는 좀 터울을 두고 나온 책들이 <계몽주의 철학>(서광사, 1995),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서광사, 1996), <루소, 칸트, 괴테>(서광사, 1996) 등이다. 완독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가장 흥미로운 책이었다. 카시러 연구서로는 신응철 교수의 <캇시러의 문화철학>(한울, 2000), <문화철학과 문화비평>(철학과현실사, 2003), <카시러의 사회철학과 역사철학>(철학과현실사, 2004) 등을 꼽아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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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23 00:30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보니 벌써 또 금요일이군요. 내일 한겨레를 사야겠습니다.

로쟈 2007-02-23 00:32   좋아요 0 | URL
'오늘'입니다.^^

2007-02-23 0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