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기획기사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을 그만 옮겨올 생각이었지만 내일자 조간에 실리는 내용은 그런 생각을 접어두게 한다. 무엇보다도 설문조사에 근거한 데이터이기에 '한국을 바꾼 지식인'이란 타이틀만큼이나 흥미를 끌고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저술들의 목록도 일별해 볼 만하다. 지난 2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군...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3. 한국을 바꾼 지식인

지식인들 사이에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 지식인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최장집 고려대 교수 세 사람이다.

경향신문이 최근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집을 위해 각계 지식인 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복수응답) 조사 결과, 24명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백교수를 뽑았다. 이어 21명이 리전교수, 17명이 최교수, 10명이 강준만 전북대 교수를 꼽았다. 여기에 ‘대중적 글쓰기’로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깨는 도전적 작업을 해온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90년대 이후 등장한 지식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77)는 지난해 9월 “지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사상의 은사’로 기억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시대의 흐름을 이끈 70~80년대 학번들의 이념적·사상적 출발점”(강맑실 사계절 출판사 대표)이나 “한국사회에 보기 드문 보편주의, 국제주의자로 ‘지적 거인과 같은 존재’”(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왜 아직도 리영희인가.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는 “87년 민주화의 분수령 이후 한국사회는 새 변화를 추동할 세력을 창출하지 못했다”며 “이것이 리영희 선생의 주 활동기가 87년 이전인데도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리영희는 1929년 평북 운산에서 지방 말단직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때 혼자 서울의 공업학교로 유학했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해방된 사회에서 동창생이 없다는 것은 나의 삶에 있어서 만사에 불편하였다”고 되뇌곤 했던 그는 평생 누구와 무리지어 세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강준만(전북대 교수)은 리영희 서재에 걸려 있는 백범의 휘호로 리영희의 꼿꼿함을 설명한다.

“踏雪夜中去 / 不須胡亂行 / 今日我行跡 / 遂作後人程 (눈길을 걸을 때 / 흐트러지게 걷지 말라 / 내가 걷는 발자국이 /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

중국전문가로서의 리영희는 외신부 기자생활을 하며 단련됐다. 합동통신·조선일보에서 해·복직을 거듭하면서도 굵직한 특종들을 남겼다. 특히 그는 베트남전쟁으로 상징되는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함과 중국 사회주의의 인본주의적 모습을 서구 지식인들의 입을 빌려 소개하는 방식으로 반공주의에 맞섰다. 리영희는 기자직과 교수직에 있는 동안 다섯 차례 구속되고 모두 1012일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자신의 몫을 주장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독재의 시대에 그의 글들은 “아무리 작게 잡아도 몽롱한 의식에 끼얹는 찬물 한 바가지”(강준만)였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갖는 힘은 사회적 발언의 중단을 선언할 만큼 스스로 자신의 육체적, 지적 한계를 인정할 때까지 그가 의미있는 비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이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가 한국사회를 ‘시장맹(盲)’ ‘북한맹(盲)’으로 만들었다”고 리영희를 본격 비판한 것은 불과 4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계간 ‘비평’을 통해서 였다. 그러나 윤평중은 이번 경향신문 설문에서 영향을 미친 지식인으로 리영희를 꼽았다. 그는 말했다.

“리영희 선생은 민주화운동 시기의 젊은 세대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시대적 패러다임을 형성했고 그 여파는 87년 체제 이후에도 지속됨으로써 현대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 보수진영이나 우파에서는 그 특유의 이론적 빈곤이나 도덕적 결함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만한 인물이 전혀 부재하다.”

리영희는 민주화 이후 자신의 책들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계속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왜일까. 그 대답은 백낙청, 최장집 등 후배지식인들의 왕성한 지적, 실천적 활동이 요구되는 현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말해준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69)이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지식인 1위로 꼽힌 것은 40년 창비 역사와 함께 해온 그의 실천적 글쓰기 덕분이다. 차병직(법무법인 한결 변호사)은 “한반도 특유의 정치 상황에 대해 민족 문제를 고려하면서 지속적으로 분석해 왔으며 현재와 미래의 대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모색한 지식인”이라고 했고, 박명림(연세대 교수)은 “언제나 시대정신에 맞는 화두를 잘 던지며, 그것을 대중들에게 맛깔나는 문체로 풀어내는 데 탁월하다”고 말했다.



백낙청은 55년 경기고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인제대 백병원을 세운 백인제·백붕제가 각각 그의 백부·친부이고, 현 인제대 이사장인 백낙환이 형이다. 스스로 ‘변칙적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말한 바 있는 백낙청은 28세 때인 66년 계간 ‘창작과 비평’을 창간하며 한국 사회의 분단현실을 실천적으로 극복하는 데 투신했다. 창비는 정간, 폐간, 판금 처분을 반복하면서도 “지난 40년간 비판적 연구자-문인-저술가 그룹을 한데 묶은 ‘비판지성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유지해오며”(조효제) 백낙청의 실천적 지성 활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백낙청의 담론 주도력 뒤에는 “유일하게 시장에서 성공한 비판적 지식인 미디어인 창비”(류준필 성균관대 연구교수)가 있었던 것이다.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에 문학이 기여해야 한다는 ‘민족문학론’을 펴온 백낙청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최근 그 이름에서 ‘민족’을 떼느냐 마느냐 문제로 논란을 벌일 때 민족의 삭제에 찬성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뿌리는 여전히 민족과 통일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최근 이명원(문학평론가)과의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2825).


“상당수의 진보적 학자들이 어떤 면에서는 보수 논객이나 학자보다 분단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수 학자들은 마치 이 사회가 분단과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없고, 분단이라는 것이 하나의 부수적인 사실로 있는 것처럼 전제를 깔고, 분단 안된 사회의 척도로 진보 보수를 따지는 경향이 많아요. 최장집 교수도 그런 예의 하나이고, 손호철 교수도 그런 경향이 강하고, 그런 분들이 많아요.”



일관되게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학문적, 실천적 역량을 쏟았다는 점에서 최장집(고려대 교수·63)은 백낙청에 비견된다. 최장집은 강릉의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고려대 재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한 4·19 세대다. 그는 고려대 정외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후 박정희 대통령의 공보비서실 행정관으로 1년여 일하기도 했으며 잡지 ‘세대’에서 기자생활을 거친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만개했던 각종 변혁이론들이 91년 소련 붕괴로 몇 년 못가 시들해졌을 때 최장집은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1983년 40세 늦깎이 박사를 받고 돌아온 최장집은 한국산업사회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80년대 초 대학을 다녔던 이른바 ‘제3세대 학자군’을 이끌며 그람시류의 네오마르크시즘을 비롯한 비판이론을 소개했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서구의 눈을 빌려오되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왔던 흐름을 꿰뚫어보고 현실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최교수 정치학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최장집은 외형적 자유화가 아닌 실질적 민주화를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국 민주주의 이론’(1993) 때부터 피력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으로 일하다 조선일보의 사상검증에 휘말려 1년 만에 학교로 돌아온 뒤로 그의 공부는 더욱 깊어졌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이 책 제목이 하나의 관용어로 정착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학문적 천착보다는 사회적 활동으로 유명해진 학자도 아니고, 순수한 학문의 세계에 갇혀 있는 교수도 아닌, 이 둘을 아우르는 이론적 실천가라는 점에서 독특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 리영희

1929년 12월 평북 운산 출신. ‘삭주 대관국민학교 개교 이래 몇 천재 중 하나’였다. 42년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진학하며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학비면제, 숙식·제복 국가부담’에 이끌려 한국해양대를 다녔다. 외신부 기자생활을 거쳐 72년부터 한양대 신방과 교수를 지냈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최근 저작 활동을 접었다.

◇ 백낙청
1938년 1월 대구 출신. 남들보다 2년 일찍 학교에 다녔다.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에서 영문학 학사,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고 귀국했다. 66년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뒤 72년 미국작가 DH 로렌스 연구로 뒤늦게 박사학위를 받았다.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 최장집

1943년 5월 강릉에서 태어나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같은 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한 후 청와대 공보비서실과 잡지사 ‘세대’에 잠시 몸 담았으며 이후 미국 시카고대에 유학했다. DJ 시절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았다가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때문에 물러났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90년대 강준만 등장

전통적 지식인이랄 수 있는 세 지식인의 틈새에서 90년대에 등장한 전북대 교수 강준만(51)의 약진은 변화된 지식인 지형의 일면을 보여준다. 10명의 응답자가 그를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았으며 그가 글을 쓰는 잡지 ‘인물과 사상’은 6명이 영향력 있는 저술로 꼽았다.



강준만은 ‘지역주의 비판’ ‘서울대 망국론’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등의 민감 이슈를 도발적인 문체로 제기한 ‘게릴라 지식인’이었다. 모든 ‘금기와 성역에 도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인물과 사상’은 강준만 1인이 글을 쓰고 출판하는 독특한 체제도 관심을 끌었지만, 거침없이 실명을 거론하는 전방위적 비판으로 이른바 ‘강준만식 글쓰기’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박상훈(후마니타스 주간)은 “다작의 교양도서 작가로서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차치하고라도 민주화 이후 기성체제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날카로운 시각과 직설적 논쟁화법으로 비판해 ‘강준만식 글쓰기’ 양식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강교수가 남긴 사회문화적 영향은 매우 컸다”고 강조했다.

강준만은 “진의가 왜곡되기 쉽다”며 기자들의 전화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팩스 또는 e메일로만 외부와 소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회적 개입은 책 쓰고 신문에 기고하는 것으로만 한정된다. 강준만은 언젠가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하는 등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만큼 스스로의 행동에 조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강준만의 칼날 화법은 어느 순간 많이 순화된 것이 사실이다. 1인 출판으로서의 인물과 사상은 지난 2005년 막을 내리고 지금은 다수 필자가 참여하는 잡지로 성격이 바뀌었다.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강준만으로 대표되는 게릴라 지식인들은 몇 년 못가서 초기의 기개와 전의를 크게 상실했는데 이는 기존 제도권 지식인 사회의 무응답과 외면에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보수 지식인으로는 송복(연세대 명예교수) 안병직(서울대 명예교수) 박세일(서울대 교수) 김대중(조선일보 고문) 복거일(소설가) 이문열(소설가) 등이 이름을 올렸다. 자연과학자로는 임지순(서울대 교수)과 황우석(전 서울대 교수)이 거명됐으며 김대중(전 대통령), 기업인 황창규(삼성전자 사장)를 선택한 이도 있었다. 영향을 준 지식인을 국내·외 구분 없이 물었기 때문에 해외 지식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카를 마르크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새뮤얼 헌팅턴, 에드워드 사이드 등이 꼽혔다.(손제민기자)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한국의 지성 ‘금서’가 키웠다

◇ 국내서적

지식인들이 뽑은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외 저술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이른바 ‘금서목록’에 올랐던 책들이 주류였다. ‘해방전후사의 인식’(23명)과 ‘자본론’(18명), ‘전환시대의 논리’(15명)는 대표적인 금서였으며 ‘태백산맥’(10명)은 불과 2년 전까지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계류돼 있었다. 79년 10·26 사태를 열흘 앞두고 한길사에서 출간됐던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은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한국현대사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준 교과서였다.

송건호·오익환·백기완·진덕규 등이 참여해 ▲해방의 민족사적 의미 ▲분단의 배경과 과정 ▲친일파 문제를 다뤘다. 대다수 응답자들이 “대학시절 지하 이념서클의 의식화 교재로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현 시점에서 보면 이 책 내용은 상식적이다. 그러나 발간 당시는 상식이 불온하던 시절이었다.

김언호(한길사 사장)는 “애초 송건호 선생과 책을 기획할 때는 ‘한 5000권 나가려나’ 예상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40여만권이 나간 초특급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책에 실린 생각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였어요. 진덕규, 임종국 같은 필자들도 대부분 이데올로기와 관계 없는 분들이었죠. 그런 책인데도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1차적으로 독자들이, 즉 시대가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땐 정말 대단했어요. 10·26이 터져 책이 판금될 때까지 열흘 만에 4000권이 나갔으니…. 판금됐다고 그 책을 안 읽었겠어요. 판금시키면 오히려 복사본이 더 많이 나돌던 때였죠.”



해전사가 한국현대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줬다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깨우쳐 준 책이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으로 드러난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한 본질을 폭로하고, 중국사회주의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렸다. 냉전 이데올로기 교육을 받았던 대학생 김동춘(성공회대 교수)으로 하여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줬으며 김세균(서울대 교수)이 “밤 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던” 그 책이다.

이 책은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의 ‘우상과 이성’(2명)과 함께 “사회과학도로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 준 고마운 책”(신광영 중앙대 교수)으로 기억되고 있다. 신광영은 “이 저술로 인해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이 가능함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조정래(소설가)의 ‘태백산맥’에 대해 이광일(성공회대 교수)은 “지식인 사회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준 책은 태백산맥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195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냉전의 족쇄를 깨는 데 일조했다”고 평했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소련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항한 우파-전통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 보편성을 획득한 솔제니친이 있다면, 한국에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한 좌파-민족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한 조정래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복거일(소설가·미래문화포럼 대표)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태백산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2000년대에 나온 책으로는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임지현(한양대 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3명), 임지현·권혁범·박노자·임은실 등이 함께 쓴 ‘우리 안의 파시즘’(2명)은 민족주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문제 제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 해외서적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해외 저술로 가장 많은 지식인들이 꼽은 ‘자본론’(18명)은 1980년대 후반 과학적인 변혁이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 첫 한글 번역본이 나온 87~89년 이전에도 일본어 번역본 등의 형태로 은밀하게 유통됐지만 본격적으로 학생들 손에 쥐어진 것은 87년과 89년 강신준(동아대 교수)과 김수행(서울대 교수)이 잇달아 번역본을 내면서부터이다. 고병권(수유+너머 대표)은 “87년 이후 첫 10년간이 지식사회가 마르크스주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그 후 10년간은 마르크스주의에 회의하거나 그것을 전환시키려 시도했던 과정이 아니었나 한다”고 말했다.

87년 민주화 직후 서울대 교수 김수행을 통해 자본론 1~3권을 번역해낸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자본론은 지금도 해마다 1000여권씩 나가는 스테디셀러”라며 “다만 책의 결론에만 줄 치는 운동권식 독법보다는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논리를 따라가는 자본론 읽기가 더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81년 미국에서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6명)은 번역도 되기 전에 널리 읽히며 냉전체제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 현대사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 중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종문(한신대 교수)은 “우리를 옥죄어 온 냉전체제를 뒤집어보게 해 준 의미를 높이 살만하다”고 했다. 김원(서강대 연구교수)은 “냉전적 시각, 빈약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한국현대사 해석을 하던 한국학계에 ‘지적인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8명)은 98년 서울대 교수인 한상진·박찬욱에 의해 번역돼 한국 사회에 ‘실용주의’와 ‘중도론’뿐만 아니라 ‘사회적 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됐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얘기되며 대안적 진보이념을 갈구하던 시점에 소개돼 큰 영향을 미쳤다. 진보진영은 공개적으로는 기든스를 비판하면서, 자기 방에서는 몰래 정독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책이 소개된 90년대 후반을 거쳐 최근 와서 대안적 진보이념으로 사회국가, 사회투자 국가, 사회서비스 국가, 사회연대 국가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거의 모두 기든스식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일종의 ‘거명되지 않는 영향력, ‘스텔스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조효제는 “푸코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저술은 권력과 담론에 관한 인식 전환의 계기를 줬다”면서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한국적 문제의식의 지형에 맞지 않았음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설적”이라고 지적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로마인 이야기’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등 대중 서적들이다. 김만흠(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대중사회 수준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소설, 성공학 번역서들이 미치는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전영평(대구대 교수)은 “지식인 집단보다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측면으로 파악한다면 해리포터가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일 것”이라고 말했다.(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07. 0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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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30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30 00:35   좋아요 0 | URL
바람구두님/ 이런 건 먼저 날라주셔도 됩니다!..
**님/ '오랜만에'는 저도 '?'입니다...

마늘빵 2007-04-30 00:47   좋아요 0 | URL
저도 가져갑니다. :)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7-04-30 01:06   좋아요 0 | URL
저두요!(오랜만에 인사드려요.^^;;)

드팀전 2007-04-30 07:50   좋아요 0 | URL

 예전에 봤던 이 책이 생각납니다.^^...

생활하는 지식인이 많아지면 좋을텐데,,,


향기로운 2007-04-30 12:14   좋아요 0 | URL
저도 갖고 갈게요^^

yoonta 2007-04-30 15:59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강준만씨나 진중권씨같은 도발적인 "게릴라 지식인"이 좀더 많이 나와주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서로 치고 받고 해야 좀더 생산적인 논의도 활발해지고 지식인 사회의 담론들도 대중화될 수 있겠지요.
 

경향신문의 주말판에는 '서양사상의 뿌리를 찾아서'가 연재되는데, 서양고전학 전공자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집필하고 있다. 한 면의 2/3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나름 파격적인 지면구성이라고 할 만하다. 얼마전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관한 연재를 옮겨온 바 있는데, "'삶에 대한 앎'은 삶의 강제다"라는 주장을 내건 이번 주 꼭지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4. 28) 지식의 궁극적 쓸모

지식의 쓸모는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을까? 권력 획득의 도구에, 재산 증식에, 박학다식함의 자랑에 있을까? 지식이 자본인, 지식-자본(scientia-capitalismus)의 시대에 쓸모없는 물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쓸모없는 물음과 잠시 씨름하고자 한다. 우리는 도대체 왜 뭔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가? “인간은 본성상 알기를 원하기”(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80 a 21) 때문이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에 따르면, 지식은 “어떤 쓸모”가 있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모르는 것과 부딪혔을 때 자신이 모른다는 자각과 함께 그것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생겨나고, 이는 생활의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앎 자체의 욕구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이 ‘앎 자체’에 대한 욕구는, 그것이 욕구인 한, 욕구의 주체인 인간에 속하지만, 이 욕구는 좀 특이해서, 욕구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무엇’이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한다. 재미있는 생각이다. 대체로 지식의 습득 여부가 학력을 결정하고, 학력이 삶의 수준(?)을 결정하는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좀 이상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좀더 읽어 보자.

“가장 보편적인 것이 사람들에 있어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다. 감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기에. 지식 중에서 일차적인 것에 가장 가까운 지식이 가장 정확하다. 더 적은 수의 원리로 구성된 지식이 추가적인 원리를 필요로 하는 지식보다 더 정확한 지식이기에 그렇다. 예를 들면 산술학이 기하학보다 더 정확하듯이 말이다. 원인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또한 가르침을 더 준다. 각각의 것에 있어서 원인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많은 가르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를 목표로 하는 앎과 지식은 지식을 대상으로 삼는 지식에 속한다. 그 자체로의 지식을 선택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체로’ 지식인 것을 선택할 것이다. 이 지식은 무엇보다도 대상에 대한 지식의 지식이다.” (‘형이상학’ 982b 21-982b10)



읽다보니 어느 사이에, “사물들의 일차적인 원인들과 원리들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세계에 도달해 버렸다. 여기가 형이상학의 세계다(Ecce! hic est metaphysica). 지식이 지식을 대상으로 놓고 따지는 세계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을 묻고 싶다. 형이상학의 세계에 온 소감을! 어렵고, 무슨 소린지 감을 못 잡겠고, 철학하는 사람들 정말 쓸모없는 짓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한 가지만 확인하고 이론(理論)의 세계에서 현실(現實)의 세계, 삶의 세계로 돌아가자.

어떤 이가 무엇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다 해서, 그 정보가 완전한 지식일까?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서 그것이 단편적 정보는 될지언정, 진정한 앎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에 대한 지식이 앎으로 성립하려면, 그 지식에 대한 앎의 체계(학문)가 성립해 있을 때만이 가능할 것이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앎이 앎으로 설 수 있도록, 앎에 대한 앎의 세계에 대한 기초를 마련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어떤 쓸모” 없는 앎, “앎 자체”의 욕구가 펼쳐낸 이론의 세계가 “학문(scientia)”의 세계다. 학문은 ‘쓸모없음’이 만들어낸 세계인 셈이다. 하지만 ‘진리(veritas)’가 상주하는 공간이 또한 학문의 세계다.

이렇게 앎의 세계에서 위엄과 권리를 자랑하던 진리를 삶의 세계로 끌어 내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다. “철학(지혜의 사랑, 학문)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피타고라스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물에 실제 지식을 넓혀준 현인(賢人)이기도 한다. (중략) 그러나 학문이 처음 생겨났던 고대로부터 소크라테스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학문은 수(數)와 운동(運動)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만물이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어디로 되돌아가는지 그리고 별자리의 크기와 별자리 사이의 거리와 ‘별들의’ 운행 행로 등 온통 천문(天文)에만 정성을 기울였다. 물론 소크라테스도 ‘자연학자’ 아낙사고라스의 제자인 아르케라오스의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첫 번째다. 처음으로 학문을 하늘의 세계에서 도시(국가)로 끌어 내렸고 또한 집안으로 끌고 들어왔던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삶(vita)에 대해서, 사람 사는 법(mores)에 대해서, 선과 악에 대해서 따지고 캐물었다. 다양한 관점에서 따지고 캐묻는 방식과 다루었던 주제들의 폭넓음과 그가 보여주었던 지성의 크기는, 이는 플라톤의 기억과 기록을 통해서 신적 경지의 반열에 올랐다.”(‘투스쿨라눔의 대화’ 제5권 10~11장).

키케로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삶의 문제를 걸어서 앎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한 첫 번째 사람인 셈이다. 앎의 세계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이전의 학문 세계와는 다른 종류의 앎의 세계를 열고 있다. 삶의 입장에서 앎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기존 앎 중심의 지식 세계가 삶의 통제를 받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를 통해서 앎의 세계와 삶의 세계 사이에는 서로 교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겨나는데, 이 통로가 “철학”이라는 길(via)이다.

키케로가 말하듯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피타고라스의 철학(앎)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삶과 앎을 연결해준다는 점에서, 앎을 일차 대상으로 추구하는 분과 학문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삶의 요구를 앎의 세계에 요구하고 전달한다는 점에 삶의 지킴이로서, 앎의 세계의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학문인, 철학이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인 셈이다. 앎 일반을 지칭하는 의미로서의 철학이 아닌, 비판적 기능의 수행자로서의 철학이 말이다.

비판적 의미에서 “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던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그는 이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삶에 실천한 철인(哲人)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안다는 것과 철학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름을 일깨워 준 이가 소크라테스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앎과 삶의 관계에 대해서 좀더 따져보면 어떨는지? 곧 삶과 앎은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앎은 삶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삶이 앎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아마도 가능하다면 앎이 삶을 통제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싶다. 앎은 예측 가능하고, 항상성(constantia)을 보장하기에. 하지만 앎이 삶의 영역을 얼마나 포괄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안다는 것의 경계는 어딜까?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은 아닐까? 결국 앎의 구경(究竟)은 결국 미지(未知)의 바다가 아닐까? 그런데 삶은 이 미지의 바다에 던져진 것이라면, 앎은 삶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삶은 앎의 통제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인간조건(conditio humana)의 근본적인 제약에 부딪히고 만다. 그러니까 앎이 삶의 전 영역을 모두 포섭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예컨대 아름다움에 대해서, 과연 보편의 앎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 정확한 계산이 가능하지 않은 그리고 일률적인 척도와 기준을 허용해선 안 되는 영역이기에 그렇다. 곧 앎의 보편 세계가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고 마구잡이로 개입해선 안 되는 공간이 삶의 공간엔 있고, 실은 그것이 ‘사람살이’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삶은 앎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은 분명하다. 아는 것이 힘(Knowledge is power)인 시대를 넘어, 모르면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기에 그렇다. 어찌 되었든 배워야 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을 믿는다.

그러면 앎은 삶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따져보자. 앎이 앎의 세계 안에서만 머무르고, 삶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문제에 대해선 이미 소크라테스가 비판했다. 그는 앎의 세계만을 중시하는 학문(Wissenschaft)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접근해, 삶의 영역에서의 앎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곧 철학(Philosophie)을 정초했다. ‘삶 안에서의 앎’의 문제에 대한 길잡이가 철학이라는 점에 대해선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동조한다. “철학에 의해서 삶 전체는 교정 받고 지도되어야 한다. (중략) 삶의 지도자인 철학이여, 덕의 탐구자요 악덕의 방어자여, 철학 없이 우리 자신을, 우리의 삶을 도대체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고 (미략)” (‘투스쿨라눔의 대화’ 제5권 5장).



삶의 입장에서 탐구 결과에 대한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은 채, 지식만을 생산하는 앎의 지식생산 공장으로서의 학문이 아닌, 삶의 길잡이로서 철학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키케로는 소크라테스 철학의 계승자로 보인다. 곧 앎은 삶의 조정과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앎이 없는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삶이 없는 앎’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매일 저녁 뉴스를 통해 접하는 현대적 비극의 배경에는 아마도 ‘삶 없는 앎’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삶에 대한 앎’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절실하게 여기지 않는 풍토가 한 원인일 것이다. 따라서 ‘삶에 대한 앎’을 배우는 일, 곧 인문 교양은 삶의 장식이 아니라 삶의 강제이다. 그것이 장식이 아니라 강제인 것은 삶의 어느 중요한 순간에 삶을 결정짓는 지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행운이 지배하는 삶의 세계에서 말이다.

특히 삶의 지배자가 행운이 아니라 지혜임을 배우는 일은, 어느 순간 삶의 강제가 아니라 삶의 지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삶에 대한 앎’에 대해선 최소한의 “삶의 강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듣기 싫고 거북해도 말이다. 물론 그러다가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들어야만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더불어 살아야 하는 한, 삶의 강제는 필요하다.(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07. 0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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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전설적인 첼리스트이면서 국내에는 장한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제 바람구두님의 페이퍼를 읽고 처음 알게 됐는데, 관련 부고기사들을 옮겨놓는다. 클래식에 특별한 취향이 없는 탓에 그의 죽음에 별다른 감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정도를 갖고 있나 보다). 다만, 과거 절친했던 한 친구가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첼리스트 정도로 기억이 날 따름(그녀는 로스트로포비치의 내한 공연을 빼놓지 않았다). 기사를 읽다가 알게 된 건 지휘자로서의 데뷔작이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는 것. 1968년이었고 볼쇼이에서였다...

한국일보(07. 04. 28) '천상의 선율' 러 첼로 거장 로스트로포비치 '천상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러시아 출신 첼리스트 겸 지휘자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가 27일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 로스트로포비치는 간장 질환으로 입원 치료 중이었다. 1927년 구소련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음악가 부모 밑에서 태어난 그는 13세 때 첫 첼로 공개 연주를 했다. 16세 때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배운 피아노와 첼로 외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지휘도 공부했다.



23세 때 소비에트 시절 최고의 영예인 스탈린상을 받으며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고, 서방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반체제 인사 솔제니친을 옹호하는 글을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보냈다가 요주의 인물로 찍혀 국내 활동과 해외 연주여행을 제한 받자 74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파리에 머물던 78년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나 90년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에 의해 복권돼 모스크바로 금의환향했다.

냉전시절 구소련의 예술적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로도 잘 알려진 그는 91년 민주화에 저항하는 구소련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다시 모스크바로 날아가 이에 맞서는 시위대에 합류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그 앞에서 즉흥 연주를 했고, 99년 다시 그 자리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 기념공연을 했다.

첼리스트로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테크닉과 깊이를 보였을 뿐 아니라 첼로의 레퍼토리를 넓히는 데 누구보다 힘써 수많은 곡의 작곡을 위촉하고 직접 초연했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브리튼, 루토슬라브스키, 펜데레츠키, 뒤티외 등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첼로 곡을 썼다. 한국 첼리스트 장한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수많은 어린 첼리스트들의 정신적 후원자로도 유명하다.



지휘자로 데뷔한 것은 1968년, 볼쇼이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지휘하면서부터다. 망명 후 첼로 연주와 지휘를 병행한 그는 77년 워싱턴의 내셔널심포니 음악 감독이 되어 17년간 이끌면서 지휘했고, 세계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객원지휘했다. 프랑스의 레종도뇌르 훈장 등 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최근에는 아내인 소프라노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와 함께 아제르바이잔 어린이를 위한 건강 재단을 만들어 운영해왔다.(오미환 기자)

동아일보(07. 04. 28) "거장, 천상의 현을 울리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별세"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 첼리스트 겸 지휘자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27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고인은 지난해 말 간 질환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으나 이날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 그는 지난달 27일 80세 생일을 맞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크렘린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이달 들어 건강이 악화됐다.



1927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태어났으며 모스크바 국립 콘서바토리를 졸업한 뒤 1945년 소련 국제음악콩쿠르에서 황금상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를 사사했으며 리히테르(피아노)의 반주로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에밀 길렐스(피아노)와 레오니트 코간(바이올린)과 트리오로도 활동했다.

1974년에는 반체제 인사인 솔제니친과 사하로프를 공개 지지했다가 추방당했다. 공민권을 박탈당한 뒤 서방에서 자신의 역사를 다시 만들었다. 첼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적 연주를 선보인 그를 위해 작곡가들은 앞 다투어 곡을 헌정했다. 생전에 세계 초연한 작품은 240곡이 넘는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벽돌 더미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했다. 1990년 소련 체제 붕괴 후 복권된 로스트로포비치 부부는 1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첫 무대에서 지휘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비창’은 세기의 명연으로 손꼽힌다.

러시아인들은 그를 ‘슬라바’(영광)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므스티슬라프’를 짧게 줄인 이 애칭은 최고 연주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도 4, 5차례 공연을 가졌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의 김치와 갈비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에서 나를 부르면 언제든지 가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전승훈 기자)



■ 애제자 장한나의 추모

세계적인 첼리스트 장한나(24·사진) 씨는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그의 애제자가 됐다. 장 씨는 27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한 시대가 막을 내린 느낌”이라며 스승에 대한 애도의 뜻을 밝혔다. 이를 정리했다.

선생님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첼리스트였다. 처음 만난 것은 11세 때였다. 선생님 앞에서 연주하고 싶어 선생님이 파리에서 여는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 나갔다. 선생님은 “처음에 첼로가 혼자 걸어 나오고 있는 것 같아 놀랐는데 뒤에 조그만 여자애가 있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연주를 마친 뒤 선생님은 나를 번쩍 안아 주셨다.

이후 15세 때까지 워싱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선생님을 찾아가 레슨을 받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마지막 레슨을 받던 날 선생님은 “네게 음악의 열쇠를 주었다. 이제 그 문을 열고 나가 너만의 음악을 만들어라”고 말씀하셨다.



1996년 첫 음반을 녹음할 때 선생님께서 지휘를 해 주셨다. 선생님은 “첼리스트 음반의 녹음을 지휘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며 “나이 들면 그 뜻을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첼리스트로서의 대물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음반은 선생님께서 지휘한 유일한 첼리스트의 음반이 됐다.(전승훈 기자)

07.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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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4-29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스트로보피치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들어봤는데, 로스트로포비치가
매우 공들인 연주라고는 하지만 (요요마가 20대에 한 녹음한 곡을 60대에 했으니깐요..)
저한테는 별로 안 땡기더군요. 안너 빌스마나 피에르 푸르니에의 연주를 더 좋아한다는...

(p.s)그나저나 이 분 녹음도 30년만 지나면 모두 저작인접권이 풀리겠군요.흐흐흐...ㅡㅡ;; (돌아가신 분에게 이 무슨 망발..ㅡㅡ)

필라멘트 2007-04-29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이 관심분야가 아님에도 음악관련 기사를 소개해주신 로쟈님에게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60대에 와서야 바흐전곡을 녹음했는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거장의 겸손함과 신중함을 느끼게 합니다. 미샤 마이스키, 요요마.. 푸르니에.. 다들 훌륭한 첼리스트들이지만 로스트로포비치의 완벽한 경지에 이르기엔 아직.. 이번 3월에 푸틴 대통령이 크렘린궁에 초청해 팔순을 기념했는데.. 최고의 거장에 대한 입증이랄까요 예우랄까요. 아무튼 20~21세기 최고의 음악가를 잃어서 많이 아쉽습니다.

로쟈 2007-04-29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ravinsky님/ 거장의 경우에도 호오는 갈리더군요...
juin님/ 그렇군요.^^
ysp988님/ 음악은 관심분야가 아니지만 '러시아' 음악가라서요.^^
 

경향신문에 주말마다 연재되는 '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의 이번주 꼭지가 '문학위기론과 한국소설'을 다루고 있다. 가라타니의 종언론 이후에 그에 대한 수긍과 비판이 일종의 유행담론처럼 돼 버렸는데, 기사는 문학평론가 신수정씨의 적극적인 문학옹호론으로 읽힌다. 

경향신문(07. 04. 28) 문학위기론과 한국소설

얼마 전에 9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의 하나로 우리 문학을 풍요롭게 했던 소설가 고 김소진을 추모하는 단행본 ‘소진의 기억’이 발간되었다(*지난주에 페이퍼에서 다룬 바 있다). 1991년 등단 이후 1997년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주로 서울 길음동 산동네 판자촌의 기억을 자신의 소설적 소재로 삼아왔던 이 작가는 80년대 노동소설의 관념주의와 구별되는 그 특유의 따뜻한 민중적 공감을 소설 속에 자주 표출해왔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동료들과 후배들이 시와 소설을 싣고 작가와의 추억을 회고하는 장을 마련한 이 추모집은 한 시대의 종말과 그를 애도하는 감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소진이 죽은 해인 1997년을 역설적인 의미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으로 규정하는 후배 작가 김연수의 글이 특히 그러했다. 1993년 이십대의 나이로 등단한 뒤 이렇다 할 작품을 쓰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던 김연수는 1997년 5월 생애 처음으로 넥타이를 매고 직장에 출근하는 삶을 살게 된다. 곧이어 일산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오랫동안 사귀어온 여자친구와 결혼을 한다. 1997년 이전이라면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IMF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으로 마감되는 1997년은 그에게 오랜 예술가-낭인 생활을 접고 생활인이자 한 집안의 가장으로 구속되는 결절점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닌 어떤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1997년을 우리 문학사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는 없을까. 1997년, 1963년생 소설가 하나는 조용히 한 생을 접었고, 1970년생 소설가 하나는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을까봐 불안감에 시달리며 어쩔 수 없이 직업의 세계 속으로 투항해 갔다. 어쨌든 그 이후의 한국문학이 그 이전의 그것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달라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몇몇 스타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초판 3000부를 소화하기도 버거운 우리 출판시장의 침체는 말할 것도 없고 영화나 텔레비전과 같은 영상매체 및 컴퓨터 사이버 매체의 약진에 힘입어 점차 소멸해가는 장르의 하나로 스스로를 규정할 수밖에 없게 된 저간의 사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1997년 이후 한국문학은 이제까지 문학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가정되고 또 당연히 그러리라 요구되어 왔던 모든 전제들이 무시되거나 폄하되는 새로운 문학 환경 속으로 뛰어들게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 사태를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말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로 대표되는 근대문학은 공감의 공동체, 즉 네이션의 기반이다. 소설이 단순한 읽을거리들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소설은 그 스스로 철학이나 종교보다 더 심원한 인식론적·도덕적 기능을 떠맡음으로써 근대적 국민국가를 상상하는 주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우리가 소설을 근대의 역동적 힘이 살아 움직이는 가장 현실적이고 진실한 허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 특유의 능력은 오늘의 문학적 현실 속에서는 더 이상 발휘되기 어렵다. 1950년대 미국소설에서 시작해 1990년대 일본소설, 그리고 1990년대 말의 한국소설들에 이르는 과정은 이 사실을 말의 의미 그대로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해 일본소설이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는 것이 이즈음 일본문학계의 현실이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근대소설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다만 협소한 형식 속에 안주한 오락물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한 이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진단에 우리마저 쉽게 주눅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한국소설 역시 일본의 전철을 많은 부분 그대로 밟고 있는 듯 보인다. 현재 소설 시장의 대부분은 일본번역소설들이 차지하고 있다.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장르소설에서부터 다양한 형식의 본격문학에 이르기까지 일본소설이 한국 독자들의 감수성에 미치는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사태가 이런 식으로 계속 흘러간다면 우리 소설 시장 역시 더 이상 일본식 소설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소설 시장 역시 이미 일본풍 소설에 의해 잠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시장과 독자를 상대로 근대소설의 이상만을 강조할 수 없을 것이다. 가라타니가 이야기한 대로 소설은 이제 그 이전의 자신의 규준 대신 새로운 시대적 이상을 표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시내 대형 서점에 달려가면 이 모든 사태를 그대로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소설이 지금 당장 그간의 전통과 결별하고 오로지 가벼운 상업주의와 내통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문학의 위기, 근대문학의 종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야기들은 때로 우리 소설이 진흙 속에서 펼치고 있는 이 움직임에 다소 인색한 경향이 있다. IMF의 경제적 여파보다 그로 인해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는 어떤 사태에 휘말려 버린 자신들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더 불안해하던 김연수 또래의 작가들은 선배들의 소설이 끝나는 곳에서 자신들의 소설을 다시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우리 소설이 이룬 성과들은 이들 세대의 불안감을 기반으로 꽃피워진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들은 선배들의 고답적 문학 형식을 거부하는 한편, 그들의 문학정신은 그대로 이어받고자 했다. 김연수를 비롯하여 김영하, 김경욱, 천운영, 윤성희, 강영숙, 조경란, 김중혁, 박민규, 천명관, 편혜영, 이기호 등의 소설적 성취가 말해주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소설을 근대소설의 외양과 다르다고 해서 쉽게 배척하는 것은 근거 없는 문학위기론으로 문학을 대체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이기 쉽다. 가라타니의 말처럼 소설이 더 이상의 비판적 정치 기능을 상실했다면 문학이 아니어도 그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은 많을 것이다(*가라타니 자신의 말이기도 하다). 이라크 반전운동을 펼치고 있는 오수연이나 생태 환경운동에 헌신하는 최성각, 베트남이나 몽골 작가들과의 연대를 기획하는 방현석과 전성태 등은 한국소설에 불어닥친 이 딜레마를 구체적인 사회운동과의 접맥을 통해 해결해나가려는 움직임을 대표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소설계엔 황석영과 같은 근대소설의 적자가 현재까지도 여전히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오랜 영어생활에서 해방되자마자 그간의 침묵을 보상하려는 듯 ‘오래된 정원’에서부터 ‘손님’을 거쳐 ‘심청’에 이르는 해원의 길을 모색해나가고 있는 그의 움직임은 한국소설의 현재를 웅변한다.

우리는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일된 국민국가를 이룩하지 못했다. 한국소설은 아직 한 번도 이 정황을 잊어본 적이 없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 조건은 우리 소설을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적 현실로부터 결코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 근대문학의 종언론이 때로 배부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식 속물주의가 멀리 수평선 저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시장의 이름으로 우리 소설의 형질 변경을 요구하고 나선다. 지금 우리 소설에 불어 닥친 대중문화담론들은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문학은 이 경계에 있다. 한편에는 동아시아의 정치적 모순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속물적 소비주의가 있다. 우리 소설이 이 가운데 어느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한국소설의 미래가 동아시아의 미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소설은 여전히 근대문학의 정언명령에 충실한 것 아닐까. 한국소설은 아직 근대적 기획의 열정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이다.(신수정|문학평론가)

경향신문(07. 04. 28) 근대소설 희망을 본다

황석영의 ‘심청’은 심청전의 구조를 빌려 온몸으로 동아시아 근대를 살아내야 했던 한 여자의 운명을 재현하고 있는 소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심청은 전근대적 효(孝)이데올로기의 화신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봉건사회의 균열을 방지하고 지배질서의 우위를 확인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황석영은 이 심청의 이야기를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황석영의 심청은 단순한 희생물이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형식을 선보이는 근대의 전복적인 힘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단지 자신의 몸 하나를 자본으로 중국 남경, 일본 등 19세기 말 동아시아 일대를 주유하는 심청의 여정은 근대적 풍랑에 내던져진 한반도의 운명에 대한 하나의 은유에 가깝다.

이에 비할 만한 젊은 작가의 소설로 김영하의 ‘검은꽃’을 들 수 있다. 19세기 말 봉건조선으로부터 멕시코로 이어지는 이산의 여정은 이 소설에서도 중요한 소설적 구조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신세대의 대표주자로 이야기되는 김영하의 소설적 관심사가 그의 선배라고 할 황석영의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을 가지게 된다. 봉건조선으로부터 근대로 내던져진 19세기 다양한 계급군상들의 근대에 대한 반응양상을 재현하는 작가의 시선은 한국소설의 미래와 관련, 지금 우리 소설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황석영과 김영하가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한국소설의 자장이 근대소설의 영역을 확장하고 변형시키는 장관을 기대해 볼 일이다.(신수정/문학평론가)

07. 04. 28-29.

P.S. 평론가의 논점을 간추리면: (1)1997년은 우리 문학사의 터닝 포인트일 수 있다. 이후의 한국문학이 그 이전의 그것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달라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2)가라타니 고진은 이 사태를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말로 규정한다. 근대문학(소설)은 공감의 공동체로서의 네이션(국민국가)를 떠받치는 기반이었지만 오늘날의 문학은 더이상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 않다. (3)1950년대 미국소설에서 시작해 1990년대 일본소설, 그리고 1990년대 말의 한국소설들에 이르는 과정은 이 사실을 말의 의미 그대로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4)하지만 이러한 비관적 전망에 쉽게 주눅들 필요는 없다. 근대소설의 외양과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1990년대 후반의 한국 작가들은 선배들의 문학정신(근대문학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근거 없는 문학위기론으로 문학을 대체하는 것이다. (5)더구나 우리는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일된 국민국가를 이룩하지 못했다. 한국소설은 아직 한 번도 이 정황을 잊어본 적이 없다. 한국소설은 아직 근대적 기획의 열정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이다.

이에 대한 의문은 이런 것이다: (1)1997년이 우리문학사의 터닝포인트이며 1990년대 말의 한국소설들은 '근대문학의 종언'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주장과 '근거 없는 문학위기론/문학종언론'은 어떻게 양립가능한 것인지? (2)근대소설과는 외양이 다른 방식으로 근대문학의 정신을 보전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가라타니의 종언론에 대한 논박이 되는 것인지? (3)김연수를 비롯하여 김영하, 김경욱, 천운영, 윤성희, 강영숙, 조경란, 김중혁, 박민규, 천명관, 편혜영, 이기호 등의 소설적 성취가 과연 '근대적 기획의 열정'과 관련하여 평가되는 것인지? 즉, 이들 젊은 작가들의 소설이 단순한 읽을거리를 넘어서 "철학이나 종교보다 더 심원한 인식론적·도덕적 기능"을 떠맡고 있기에 의미심장한 것인지? (4)더불어 이러한 문학정신의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왜 동아시아의 정치적 모순과, 미국식 속물적 소비주의 가운데 우리 소설이 어느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게 될지는 알 수 없는 것인지? 열정만으로는 부족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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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8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28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저는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요.--;
 

독일로 간 작가 배수아씨의 근황 기사를 옮겨놓는다. 독일 작가 야콥 하인의 소설 번역이 얼마전 출간됐는데, 그와 관련한 인터뷰 기사이다. 기사를 보고 안 것인데 번역 생활 3년동안 (공식적으로만) 7권의 번역서를 냈다고 한다. 창작과 번역으로만 채워진 이국에서의 이방인 생활이, 문득 부러워지는군... 사실 작가는 '외국인 놀이'의 달인이었기에 굳이 독일에까지 건너갈 필요가 있었을까, 란 의문을 나는 전부터 갖고 있었다. 한데,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로 글쓰기'가 작가 배수아의 방법론인 이상, 생각해보면, 외국생활은 한국어를 '외국어'로서 만끽하는 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여건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생은 다른 나라에 있다?..

 

한국일보(07. 04. 28) "야콥 하인 소설 읽는 순간 내 거야! 느낌"

배수아(42)씨를 만났다. 소설가가 아닌 번역가로서 말이다. 그녀가 번역한 독일 소설가 야콥 하인의 장편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영림카디널)가 출간됐다. 이 작가의 데뷔작 <나의 첫번째 티셔츠>는 배씨의 ‘첫번째 번역작’이기도 하다. 동독 출신, 1971년 생, 소아정신과 의사인 하인의 작품을 배씨가 처음 접한 건 독일 체류 중이던 2003년이었다. 동독에서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그의 데뷔작엔 으레 있을 법한 슬픔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짧고 유쾌하게 전개되는 문장, 연신 웃음을 빼물게 하는 유머만이 반짝였다. 게다가 유명 소설가(크리스토프 하인)인 아버지의 후광까지! “읽는 순간 ‘바로 내 거야!’란 느낌이 들었어요. 이걸 영원히 소유하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 떠오른 게 번역이었죠.”

하인은 97년부터 베를린의 카페에서 자신의 글을 낭독하는 젊은 작가 모임에 속해 있다. 이들의 작품 낭독은 엄숙과 상극이다. 무대 위에서 담배까지 물고 청중을 즐겁게 해주는, 스탠딩 코미디에 가까운 것이란 게 배씨의 설명이다. 카페를 찾은 출판사 관계자의 귀를 번쩍 틔워 책으로 나온 그의 작품 1, 2호는, 그래서 연예적 요소가 다분했고 독일의 젊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배씨가 이번에 소개하는 하인의 세 번째 소설은 다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는 내용으로, 읽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자전적 작품이다. 작가의 슬픔에 동화돼 열흘 만에 번역을 마쳤다는 배씨는 “솔직하면서도 감정의 과잉을 억누르는 작가의 태도가 오히려 비애감을 더했다”는 소감을 밝힌다. 덧붙여 작가가 처음으로 ‘듣는 독자’가 아닌 ‘읽는 독자’를 의식하면서 한층 성숙해졌다고 평한다.

소설은 4월의 어느날 아들인 ‘나’가 어머니의 심상찮은 호출을 받는 것으로 열리고, 이듬해 1월 ‘나’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집안을 둘러보는 것으로 닫힌다.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유난히 친밀했던 모자 간의 올망졸망한 추억들이다. 부엌에서 요리하던 어머니와 도란거릴 때의 행복, 함께 영화를 보며 어머니 손바닥에서 집어먹던 과자의 달콤함, 여름캠프 기차를 놓쳐 울고 있는 ‘나’를 자가용에 싣고 먼 길을 달리던 어머니의 멋진 모습…. 정말 그렇다. 담담하게 말할수록 더욱 짙어지는 슬픔의 농도.

‘소설가 배수아’ 만큼이나 ‘번역가 배수아’도 다작이다. 번역 생활 3년 만에 벌써 일곱번 째 번역서다. 장편과 소설집을 각각 2권씩 내면서도 말이다. “사실… 번역 능력 기르기 차원에서 다른 필명으로 번역한 책도 있답니다.” 이 부지런한 작가는 계간지에 보낼 단편 집필과 장르소설 번역을 마저 마친 뒤 7월께부터 400쪽 넘는 장편소설 번역에 나선다.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독일 소설가 마틴 발저의 최근작이다. 자세한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아주 특별한 연애소설”이란다.(이훈성 기자) 

07.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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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4-28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수아도 많이 늙었네요--;;

로쟈 2007-04-28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어가는 거야 다들 일 없이도 하는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