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이자 시민운동가 정수복씨의 신간이 출간됐다.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생각의나무, 2007)이란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600쪽에 육박한다!). 지난주에 책이 나온 걸 서점에서 봤지만 너무 두꺼워서 읽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이전에 살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리뷰 정도만 챙겨두도록 한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옮긴 피에르 앙사르의 <현대 프랑스 사회학>(문학과지성사, 1992)를 오래전에 읽은 적이 있다. 벌써 15년 전이라니...

문화일보(07. 08. 03) 한국인의 병폐 낳은 巫敎-儒敎 ‘잘못된 만남’

한국인들은 상대방과 얘기할 때 흔히 “(무엇무엇이) 있거든요…”라는 말을 앞세운다. 대화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들어간다. 상대방은 겉으로는 웃으면서 응대한다. 속으로는 “그래 너 잘났구나… 어디 한번 해봐”라고 코웃음을 친다. 이어 상대방의 말을 열심히 듣기보다 자기가 무슨말을할까만을 골똘히 생각한다. 노래방에서 상대방의 노래는 듣지 않고 자기가 부를 노래만을 열심히 찾듯이. 대화의 역동성은 사라지고 심각한 소통장애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의 그릇된 우월감은 자신을 제대로 성찰할 수 없게 만든다. 한국인들은 20세기 전반기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강점’이라는 굴종의 경험에 치를 떨었다. 그에 대한 반작용인가. 20세기 후반을 거쳐 21세기로 진입하면서 폭발적 경제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뒤 한국인들은 어디에서고 우쭐대고 싶어한다. 동남아시아인에 대한 우월주의가 대표적이다. 이미 세계 초강대국이 돼 버린 일본을우습게 보는 것은 남한과 북한밖에 없다는 얘기도 있다.

이 책은 우월주의와 근거없는 낙관주의, 감정우선주의, 이중규범주의, 수단방법 중심주의 등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거침없이 무너뜨린다. 한국인의 병폐를 성역없이 들춰낸 박노자 오슬로국립대교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이어 오랜만에 나온 비판적 한국인론이다. 무척 논쟁적이다. 곳곳에 뇌관이 묻혀 있다. 굿의 지역 공동체적 정감 회복이라는 의미가 부각되는 상황인데 무교(巫敎)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최근 네트워크 사회가 진전될수록 심해지는 개인주의, 파편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하지만 이 책은 개인을 인정하는 개인존중사상과 개인주의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초청연구원으로 지난 2002년 이후 두번째 파리 생활을 하고 있다. 1980년대에는 유학생 신분으로 머물렀었다. 집을 나온 뒤에야 기존 관습에 젖지 않고 집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어볼 수 있다. 저자는 파리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이나 거리를 배회하면서 한국사회의 종교와 문화, 교육, 의식구조 등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곱씹어본 듯하다.

저자는 545쪽에 이르는 이 책에서 방대한 담론을 풀어놓기 전에 우선‘한국사회의 문화적 문법’에 딴죽을 걸겠다고 선언한다. 문화적 문법을 사회구성원들의 행위의 밑바닥을 가로지르는 공통의 사고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영어문법을 모르면 무시당하듯 여러번 문화적 문법을 어기면 ‘상대하지 못할 사람’이 되고, 계속 어기면 ‘미친 사람’이 돼 버린다는 것.

저자는 “한국은 경제적으로 세계 10대 교역국가가 됐고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기존의 전통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를 한 경험은 빈곤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먼저 현세적 물질주의, 감정우선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갈등회피주의 등 6가지 근본적 문법으로 정리했다. 이어 파생적 문법은 감상적 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 속도지상주의, 근거없는 낙관주의, 수단방법 중심주의, 이중규범주의 6가지로 분류한다. 이 12가지 요소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한국사회의 여러가지 문제점으로 분출된다.

저자가 예로 들었던 황우석 사태에서부터 신정아 학력위조 파문에 이르기까지 지식인, 대학사회에서도 윤리적 불감증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할 때도 이 같은 요소들은 유용한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는 무슨 일이 터지면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 재발을 막는 근본적 방법보다는 공적 자리에 있는 책임자를 찾아내 그를 사퇴시키거나 법적 책임을 묻는 일로 마무리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특히 종교적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도교, 불교, 기독교 등 외래종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무교와 결합함으로써만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한국사회의 기저에 무교 - 유교 결합체를 근간으로 하는 문화적 문법이 끈질기게 작용하고 있다. 나쁜 일을 피하고 현실에서 복을 바라는 무교는 현세적 물질주의를 강화시켰다. 무교의 조화론은 갈등회피주의라는 문화적 문법의 뿌리다. 또 무교의 현세주의적 세계관이나 조화론은 이후 도래한 불교와 기독교에도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있다. 한국 기독교에서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가족이기주의와 연고주의는 유교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이 책에 따르면 유교도 조선시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권력과 질서의 유지, 국민동원에 적합한 이데올로기로 변질됐다. 개인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당연시됐고 이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논리로 정당화됐다. 또 한국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개인주의 = 자기만의 이익추구 = 무질서 = 무정부주의 = 혼란 = 난장판’이라는 등식이 자리잡고 있다.

저자는 이제 한국사회는 권위주의를 해체하면서 수직적 인간관계를 수평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정치 중심의 사회운동도 문화중심의 사회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밝혔다. 문화예술분야의 역할강화, 가족관계와 종교단체, 학교 교실의 민주화 등과 함께 영성훈련, 문화체험, 자원봉사, 우정과 연대의 발견, 독서토론 등을 통해 개인 내부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한국인의 낡은 문화적 문법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뇌관이 개인주의에 있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은 주체성과 자주성과 독자성을 갖춘 개인을 뜻한다. 저자는 “개인존중사상이 없는 한 나이와 성별, 출신가문과 출신학교, 지역을 기준으로 한 서열의식과 권위주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한 공동체 논리 앞에 개인을 줄 세우는 오래된 문법은 계속 통용될 것”이라고 밝혔다.(예진수기자)

한국일보(07. 08. 04) 우리의 의식은 아직 상투를 틀고 있다

사회학자 정수복(53)씨. 1989년 프랑스에서 사회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2000년대 초까지 강의와 시민운동,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했던 그는 2002년 서울생활을 접고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연구자로 5년간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탐구했다.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은 그가 한국사회에 대해 의도적인 ‘떨어져보기’를 시도하며 끌어낸 한국인론이다.

한국인의 내면세계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한국의 근대는 미완이고 절름발이’라는 선언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한국이 외형적으로는 근대의 꼴을 이룩했지만, 그 시공간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전근대의 정신적 유산을 떨치지 못했다고 본다. 그가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발생한 황우석 사태가 상징적이다. 이때 한국 지식인들은 “개인이나 공동체나 너무 까발리면 생존하기 어렵다.

큰 공적을 이룬 분들은 공헌도 크지만 과정에서 오류도 있기 마련”이라며 희박한 윤리의식과 도덕불감증을 날것으로 보여줬다. 또한 경제위기 이후 시나브로 확산되는 박정희 전두환 이승만 등 전근대적 지도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 역시 그의 확신을 굳혔다. 그는 ‘문화적 문법(cultural grammar)’이란 개념을 동원해 한국인의 내면세계를 비판적으로 읽는다. 문화적 문법이란 구성원 행위의 밑바닥을 가로지르는 마음의 습관, 의식구조 등을 아우르는 개념. 이는 다시 한국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내면화한 근본적 문법과 20세기 들어와 형성된 파생적 문법으로 나뉜다.

근본적 문법은 현세적 물질주의, 감정우선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갈등회피주의이고 파생적 문법은 감상적 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 속도지상주의, 근거없는 낙관주의, 수단방법 중심주의, 이중규범 중심주의다. 이 문법들의 기원은 유교, 도교, 불교 등 전통종교와 사상인데 지은이는 특히 유교의 부정적유산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 가령 유교의 권위주의적 성격 때문에 한국인들은 불합리한 문제가 발생해도 문제 제기를 못했고, 이는 비판과 토론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자율적이고 근대적인 개인’들의 출현을 봉쇄했다는 것이다.

좌파건 우파이건 남한이건 북한이건 이 유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운동권이나 시민단체 내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강한 위계질서나, 사회주의를 내세웠지만 봉건적 수직적 질서를 강화했던 북한사회가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이런 낡은 문화적 문법을 해체할 수 있는 주역으로 청년층과 여성들을 주목한다. 2030이라 불리는 청년세대는 나이, 직위, 영향력으로 유지되던 수직적 위계질서를 인격존중, 설득, 격려로 유지되는 수평적관계로 전환시키고 있으며, 오랫동안 남성지배적 문법에서 배제돼 있었던 여성들도 기존의 문법을 비판적이고 상대적으로 해석하며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저자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세계를 낡은 문화적 문법으로 파악해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하는 희망에서 이 책을 썼다”며 “한국사회에 독자성과 존엄성을 지닌 개인을 그대로 인정하는 개인주의가 고양될 때 낡은 문법들이 해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왕구 기자)

07. 08.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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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에다 별달리 즐거운 일이 없던 차에(물론 반대로 착잡하고 짜증나는 일들은 차고 넘친다) 모처럼 '즐거운' 기사를 읽었다. 한 신인 작가의 등장을 소개하는 기사들이다. 이번에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했다는 정한아씨가 그 '신인 작가'인데 소설이야 안 읽어봤으니까 평가 유보이고(장편이라고 하지만 중편 분량의 경장편이 아닌가 싶다) 다만 소설을 쓰는 일이 너무 즐겁다는, 소설을 쓰는 자세가 즐겁다. “서울 집을 떠나 대전의 시골 마을에서 집필했는데, 작업실 밖에 나와 춤출 때마다 촌로들이 경운기를 멈추고 빤히 쳐다봤다”는 고백마저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스럽지만, 그렇더라도 여하튼 '즐거운' 거짓말이다. 그 즐거움이 사진에서도 묻어나는군...

한국일보(07. 08. 01) 문학동네작가상 받은 소설가 정한아

“거짓말이란 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늘 생각해요. 진심이란 건 이해받을 수도 없고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거짓말은 가장 인간적인 의사소통 수단이자 세상을 훨씬 아름답게 해주는 것이죠. 제게 있어 소설은 바로 거짓말입니다.”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자인 정한아(25)씨가 낭랑한 목소리로 밝힌 문학관이다. 수상작 <달의 바다>는 바로 그 ‘아름다운 거짓말’에 관한 장편소설이다. 혼외로 낳은 아이를 친정에 버리듯 맡기고 훌쩍 미국으로 떠난 고모는 할머니에게만 몰래 항공우주국의 우주비행사가 됐노라며 편지를 보내온다. 원형 탈모증에 걸린 취업 재수생 ‘나’는 할머니의 은밀한 부탁을 받고 고모를 만나러 미국으로 간다. 소설은 고모가 쓴 일곱 통의 편지와 ‘나’가 목격한 고모의 비루한 현실을 교차 편집한다.

31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정씨는 자신의 첫 장편이자 수상작을 “한 호흡에 쓴다는 생각으로 보름 만에 완성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2005년 대산대학문학상 소설 부문 당선자이기도 한 그는 “단편을 쓸 땐 작업 내내 신경에 날이 서는데 반해, 장편은 어깨춤이 절로 나올 만큼 글이 술술 풀렸다”고. “서울 집을 떠나 대전의 시골 마을에서 집필했는데, 작업실 밖에 나와 춤출 때마다 촌로들이 경운기를 멈추고 빤히 쳐다봤다”는 것이 작가가 전하는 후문이다.

작품 속 ‘나’의 가족처럼 정씨는 조부모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의 장녀다. 고모, 할머니 등 등장 인물의 성격과 이미지도 실제 가족 구성원의 그것과 많이 겹친다고 정씨는 설명한다. ‘나’의 미국 여행 동행자로 등장하는, 성전환 수술을 원하는 남자 친구 ‘민이’도 여성적 성향이 다분한 친구를 모델로 삼았다.

이것이 꼭 경험이 일천하기 마련인 젊은 작가의 손쉬운 선택인 것 같지는 않다. 정씨가 가장 본받고 싶은 작가로 폴 오스터를 꼽으면서 “읽고 있으면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좋다”는 이유를 드는 걸 보면 말이다.

심사위원들은 “구조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다”(평론가 김화영), “생에 대한 냉정한 통찰이 느껴진다”(소설가 이혜경)는 호평과 함께, 특히 편지글 부분에서 보여준 문장의 밀도와 긴장감을 한목소리로 칭찬했다. 우주비행사로서의 경험을 실감나게 묘사한 편지글은 정씨가 우주, 달 탈험 등 관련 전문서 여러 권을 탐독하며 일궈낸 결실이다.

혼자서 글 공부를 하다가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이후부터 소설가 구효서씨를 사사하고 있다.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김애현씨도 한때 동학이었다. 대산대학문학상 상금 500만원에 이어 이번 수상으로 받은 2,000만원도 모두 할아버지를 드렸다는 정씨는 “작년 겨울 동문(건국대) 모임에서 만난 김홍신 선배에게 등단 작가라고 소개했더니 한숨을 푹 쉬며 가여워 하더라”며 웃었다. 물론 이 당찬 스물다섯살 소설가에게 ‘거짓말’의 즐거움은 창작의 고행에 비할 바가 아닐 듯싶다. 그의 다음 작품은 계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서 만날 수 있다.(이훈성 기자)


 

 

 

 

 

 

 

 

 

세계일보(07. 08. 01) 소설이 정말 좋다는 25세 ''명랑작가'' 정한아씨

장편소설 ‘달의 바다’로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에 선정된 정한아(25·사진)씨가 31일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젊은 소설가답게 명랑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소설론을 밝혔다. “소설은 거짓말인데 세상을 아름답게 해요. 거짓말은 인간적인 의사소통 수단인 것 같아요.”

‘달의 바다’는 꿈이 좌절된 이에게 건네는 위로다. 주인공 은미는 오랜 백수 생활 탓에 집안의 애물 취급을 받는다. 무직자의 우울한 생활은 고모와 만남으로 일대 변화를 맞는다. 15년 전 소식이 끊긴 고모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비행사가 돼 있다. 소설은 은미의 일상과 고모의 비밀스러운 삶을 교차시키며 인생을 긍정한다. 우주생활을 묘사한 고모의 편지와 가벼운 반전이 소설의 재미를 높인다.

미국 소설가 폴 오스터를 존경한다는 그는 대학 2년 때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정씨는 “미래를 고민하느라 6개월 동안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며 “그때 ‘소설가 아니면 되고 싶은 게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회상한다. 2005년 제4회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은 단편 ‘나를 위해 웃다’로 문단에 나왔다. 지난 5월, 처음 써본 장편 ‘달의 바다’가 문학동네작가상에 선정되며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길을 나선 셈. ‘달의 바다’를 쓸 당시, 대전에서 전원 생활을 했는데 “원고 쓰는 일이 무척 즐거워 간간이 디스코까지 췄다”고 말한다.

소설가가 된다고 했을 때, 할머니는 손녀의 앞길이 막막하다고 하셨다. 정씨가 잇달아 문학상을 수상하자 할머니는 “한아가 글 쓰는 동안 가족 모두 조용히 생활해라”며 집필 분위기를 만드신단다. 그는 젊은 소설가 중에서도 최연소 군에 속한다. 앞으로 70, 80년대 출생 소설가들과 한데 묶이거나 비교될 가능성이 크다. “젊은 소설가들과 겨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작가들이 은연중에 표현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가 제겐 없어요. 저는 저만의 소설을 쓸 뿐입니다.”(심재천 기자)  

07. 08.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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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0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다 생각했는데 작가님이 정말 어리군요!!!!! 휴...
은연중에 표헌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가 없다, 라...

비로그인 2007-08-0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진심이라는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는지가 더 의문이 가네요. 책을 봐야 작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아요..
사회에 대한 분노가 없다는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도 놀랍고요. 그게 글에 표현을 안했다는건지, 작가내부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다는 건지도요 ..궁금하네요. 사회에 대한 분노라는게 누구는 있고 누구는 없을 수도 있다라는 점이 너무 새로워요. 그럴 수 있는 문제일까.. 세상에 대한 사랑이 분노와 동전의 양면이 아니던가 싶은데 .. 말이지요

로쟈 2007-08-01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로 인상 쓰는 작가들 틈에서(소설 쓰다가 주로 이 빠지고 욕창 걸리고 하더군요) 밝게 웃고 있는 작가를 보니까 기분전환은 되는 듯합니다. 분노/원한 없이 쓰는 소설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줄 수 있지 않나 싶고. 하지만 압권은 소설쓰기가 너무 즐거워 췄다는 '디스코'입니다...

다크아이즈 2007-08-01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질 안 한지 오래 된지라 간만에 로쟈님 뵙네요(!?) 요즘 '사회에 대한 분노' 따위를 들먹거렸다가는 젊은 작가 축에도 못낍니다. 짐짓 세상에 대한 분노와는 먼 척 해야 세련된 작가 소릴 듣는 걸요. 의도된 트렌드를 따르는 것 같아 미심쩍긴 하지만 로쟈님 말처럼 '디스코' 출 정도로 쓰는 게 즐겁다,는 대목에선 무척 부럽군요. 진정한 소설가는 이가 빠지고 욕창이 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치들의 껄쩍지근한(?) 표정이 궁금하네요.

로쟈 2007-08-01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오랜만이네요.^^ 이번에 나온 소설은 200쪽이 안되는 분량이라서 '장편'이라고 하기엔 좀 멋쩍긴 합니다. 이가 빠지거나 욕창에 걸릴 새도 없었을 거 같아요. 보름만에 다 썼다고 하니까...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8-01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단편을 인상적으로 봤는데 이번 소설도 굉장히 재미있을 거 같아 바로 주문했어요.
음, 근데 흑백 사진과 컬러 사진의 느낌이 왠지 다르군요. -_-

로쟈 2007-08-03 22:25   좋아요 0 | URL
단편도 읽어보셨군요! 흑백이 더 나은가요?..

twinpix 2007-08-0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겁게 썼다는 게 부럽네요. 언제고 꼭 읽어봐야겠어요.

로쟈 2007-08-03 22:26   좋아요 0 | URL
즐겁게 쓰는/사는 건 재능이죠...

마늘빵 2007-08-02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재밌군요. <달려라 아비> 쓴 김애란씨도 80년생으로 어리던데, 이야 이분은 더. '언젠간' 읽어봐야겠단 생각합니다. 정이현 소설이나 주문해야겠습니다. 우선순위가 있지. :)

로쟈 2007-08-03 22:26   좋아요 0 | URL
한국소설들도 꼬박꼬박 챙기시는군요.^^

나비80 2007-08-02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겨울 몇 번 같이 모임을 하다가 소설 쓴다고 시골로 내려가더니 떡 하니 문학동네작가상 수상해서 나타나더라구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이전에 대산문학상에서 실력을 인정 받긴 했습니다만. 밝고 명랑하고 쾌활한건 제대로 보신 듯 합니다. 술도 곧잘 하더군요.

로쟈 2007-08-03 22:27   좋아요 0 | URL
오랜만인 듯한데요! 소이부답님의 정체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8-04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준에선 흑백이 좀 더 나은 듯... ㅎㅎ
이 소설은, 책 뒷부분의 심사위원들이 과찬한 만큼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어느 순간 '거짓말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더군요.
에잇, 그래도 기대를 충족시켜주진 못했어요. 문장도 별로고...

로쟈 2007-08-04 14:16   좋아요 0 | URL
리뷰도 곧 써주시나요?^^
 

이번 아프간 사태에 관한 칼럼을 아침에 읽고 늦게서야 시간을 내 옮겨놓으려 하다가 그만 딴데 눈길을 팔게 되었다(칼럼은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07/h2007073017584024400.htm). 강렬한 원색이 잠시 뒤숭숭한 상념과 착잡함을 잊도록 해준 탓인 듯하다. '텍스트 인 바디스케이프'란 전시회 소식을 대신 옮겨놓는다(그러고 보니 같은 시립미술관에서 하는 모네 전시회에도 못 가봤군)...

경향신문(07. 08. 01) 작가 27명의 ‘텍스트 인 바디스테이프’ 전

미술작품들은 대부분 다양한 소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드러낸다. 문학이나 음악 등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로 화가나 시인, 음악가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한길 사람 속’을 나름대로 표현한다. 그 작품들로 관객, 독자, 청중들은 감동하고, 느끼고, 비판과 공감을 통해 또 스스로의 내면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서울시립미술관의 ‘텍스트 인 바디스케이프(Text in Bodyscape)’전은 작가들이 인간의 몸, 신체를 통해 이야기하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끝 없는 욕망이나 욕구, 기억, 지울 수 없는 상처, 꿈이나 희망, 고민, 향수, 불안한 심사 등이 다양한 신체의 풍경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술관 본관 1층에 마련된 전시장에는 모두 27명의 작가가 회화, 영상, 사진, 조각, 설치작품 8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마다 독특하게 드러내는 다채로운 내면세계가 한 여름의 한 때를 뜻깊게 한다. 한 공간에서 다양한 매체를 동시에 선보이면서 매체 간의 특성들도 비교해 흥미롭다.

김윤경은 인도에서 기증 받은 많은 옷들을 큰 하나의 옷으로 재구성한 설치, 곽윤주는 징그러운 칼자국의 상처를 여자의 등에 표현하고 이를 찍은 사진을 통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과거의 사건과 그 흔적을 이야기한다. 한 켤레의 하이힐과 흑백의 여행지 풍경을 담은 안경 등으로 구성된 영상(황혜선)에서도 기억과 연결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느껴진다. 밥그릇을 머리맡에 놓고 바닥에 엎드린 인물상의 조각작품(이종빈)은 배고픈 시절의 한 장면. 녹이 잔뜩 낀 밥그릇에 관객들은 동전과 지폐까지 던져넣고 있어 작품과 관객이 잘 소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 속에 사진작업 당시 상황을 쓴 설명 팻말을 삽입한 김나음의 작품은 촬영 당시의 한 순간을 관객으로 하여금 되살리게 한다.

안재홍의 구리선으로 만든 거대한 인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어쩌면 불안정한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것 아닐까. 젖병의 고무 젖꼭지를 활용한 김주연의 설치, 컴퓨터 그래픽으로 벌거벗은 몸 위에 화려한 문신을 그려넣은 김준의 사진, 무한정한 번식을 괴기스럽게 담아낸 이희명의 설치 등은 원초적인 욕망, 욕구의 표현이다.

전시장에는 또 가는 스프링 줄에 인체 일부를 프린트해낸 설치(홍성철), 센서를 통해 관객의 몸짓을 따라 움직이는 눈동자 영상작업(전인혁) 등 작가들의 신선한 아이디어와 독특한 재료 등도 눈길을 끈다. 이종구 구경숙 민재영 이윤태 이배경 정소영 박진호 김병직 송은영 이건용 이수경 김선주 백기은 박수만 전수경 김재옥의 작품도 볼 수 있다. 이은주 큐레이터는 “몸, 신체 담론이 풍성하다”며 “그러나 이번 전시회는 몸 담론과 관계된다기보다는 작가들이 몸이 담고 있는 내면을 어떻게 풀어내는지 보자는 취지”라고 밝혔다. 12일까지.(도재기 기자)

07. 0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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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의 '오늘의 책' 연재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란 이름을 접하고 바로 스크랩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소설들을 아직 읽지 않았지만(어느 세계문학전집에 <치인의 사랑> 같은 작품이 들어 있었던 듯도 하지만 박스도서인지라 확인이 되진 않는다) 일본 작가들 가운데 마땅히 가장 먼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어야 할 작가라는 평판 정도는 듣고 있었다.

개인적인 인연을 꺼내자면 재작년초 모스크바 체류를 끝내고 귀국할 무렵에 가장 마지막까지 만지작거렸던 책 중의 하나가 다니자키의 <그늘에 대하여>(<그늘 예찬>)였다(클래식 문고본이라 책값은 3,000원도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국역본이 있을 듯하여 손에 들지는 않았는데, 찾아보니 <음예공간 예찬>(발언, 1996)이라고 나온 적이 있었고 고운기 교수의 새번역본이 나온 건 그해 겨울이었다. <그늘에 대하여>(눌와, 2005). 책은 바로 구해서 연구실에 꽂아두었다가 이번에 생각이 나서 집으로 옮겨왔다(어제 전철에서 '연애와 색정'을 읽었다). 다니자키와 그의 작품들을 영어로 옮긴 사이덴스티커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7. 30) [오늘의 책<7월 30일>] 그늘에 대하여

1965년 7월 30일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가 79세로 사망했다. 3년 후,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일본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두 작가의 작품을 서구에 소개한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다니자키가 1968년까지 살아 있었다면 노벨문학상은 그가 받았을지도 모른다며 다니자키 없는 일본 근대문학은 '꽃 없는 정원'이라고 했다.

그는 그만큼 중요한 작가였다. 영국 신문 타임즈는 그의 사망에 "성과 결혼 문제를 다룬 소설을 118편이나 발표해 '동양의 D H 로렌스'로 불린다"는 부고 기사를 실었다. 타임즈의 보도처럼 다니자키 문학은 여체, 관능, 변태 같은 단어로 요약됐고 그는 종종 탐미주의 혹은 악마주의 작가로 불렸다. 잘 알려진 <치인(痴人)의 사랑>이나 <후미코의 발> 등은 그 계열의 대표작이다.

<그늘에 대하여>는 다니자키의 소설과 달리 국내에 비교적 덜 소개됐던 그의 산문집이다. 표제작과 '게으름을 말한다' '연애와 색정' '뒷간' 등 흥미로운 주제의 산문 6편이 실려있다. 산문이라는 형식에 그는 한층 세심하고 유려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아름다운 문장을 위해 하루에 원고지 3~4매 이상은 쓰지 못했다는 다니자키 글의 진수이기도 한 셈이다.

'그늘'은 일본적인 미를 설명하려는 그의 개념이다.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럼한 어떤 모습. '연애와 색정'에서는 '색기(色氣)'를 이렇게 풀이한다. "방종하여 노골적인 것보다도, 내부로 억제된 애정을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아서, 때로 무의식적으로 말씨나 몸짓 끝에 드러나는 것이 한층 남자의 마음을 이끈다. 색기라는 것은 대개 그런 애정의 뉘앙스이다."(하종오 기자)

서울신문(04. 10. 09) 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 지음

한국은 언제쯤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을까.한국문학의 세계화에 관심을 기울여온 이들은 한결같이 “우리에게도 한국의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사이덴스티커는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번역해 그가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 사이덴스티커는 1974년 외교관 자격으로 일본에 오지만,이내 갑갑한 외교관 생활을 접고 도쿄에 머물며 프리랜서 작가 겸 번역가로 활동한다.그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다니자키 준이치로,미시마 유키오 등 일본 현대문학 3대 거장의 소설을 처음 영어로 번역해 세계에 알렸다. 일본인들도 현대어 번역 없이는 읽을 엄두를 못내는 고전 ‘겐지 이야기’를 10여년간의 고투 끝에 번역해내기도 했다.‘설국’에 대한 유려한 번역은 지금까지도 화제다.



‘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원제 Tokyo Central,권영주 옮김,씨앗을뿌리는사람 펴냄)는 미국 최고의 일본문학 번역가로 꼽히는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자서전이다. 사이덴스티커는 1921년 2월11일 미국 콜로라도주 더글러스 카운티라는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2월11일은 일본의 건국기념일. 이 때문에 그는 전생에서부터 일본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는 병역문제로 고민하다 우연히 해병대 일본어 통역 요원으로 입대한 것이 계기가 돼 일본 문학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다.



책에는 전후 일본 문단의 풍경,번역에 대한 저자의 소신 등이 담겨 있다. 한국의 도자기와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에 대한 일화도 소개돼 눈길을 끈다. 이 책은 전통적인 일본의 미를 추구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저자가 일본 최고의 작가로 평가하는 탐미주의 경향의 다니자키 준이치로, 국수주의 색채를 보이다 결국 할복으로 생을 마친 미시마 유키오(본명 히라오카 기미타케) 등 전후 일본 문학을 이끈 이들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사이덴스티커는 번역가를 지망하는 이들에게 좋은 번역의 요령에 대해 한마디 조언한다. “작품을 시작하고 끝맺는 단락에는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사람들이 가장 많이 주목하고 흠을 잡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원칙을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나도 ‘설국’의 서두를 보다 직역에 가깝게 했을 텐데….” 그는 “번역이란 끊임없이 뭔가를 내버릴 것을 요구하는,마구잡이에다가 가차없는 작업”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저자는 일본 못지않게 한국에도 관심을 갖고 좋은 인연을 맺었다. 일본 도자기보다 한국 도자기를 더 좋아해 슬쩍 밀반출한 한국 도자기를 평생을 옆에 끼고 살았다고 멋쩍게 회고하는가 하면 장준하를 가리켜 유교에서 말하는 군자의 전형이라고 격찬하기도 한다. 장준하에 대한 추억 한토막. “일본에서는 한국인이 시끄럽고 싸움을 좋아하며 마늘 냄새를 풍긴다고 생각하지만, 장준하는 그런 일본인들의 고정관념과는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정한 태도와 부드러운 말씨를 지니고 있었고, 매우 품위 있는 사람이었다.”

07. 07. 30 - 08. 01.

P.S. 다니자키의 책들은 영어로는 물론이겠지만 러시아어로도 다수 번역/소개돼 있다. <열쇠>의 러시아어본 표지.

Ключ

P.S.2. <세설>(열린책들, 2007)의 한국어본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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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갑작스레 '화두'가 됐다.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는 아프칸 인질 사건과 최근 출간된 도킨스의 종교비판서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이 이 화두의 배경이다. 그리고 이는 종교적 근본주의 내지는 종교 자체에 대해 새삼 성찰해볼 것을 요구한다. 그와 관련한 여러 문제들 가운데 공산주의와 종교, 보다 정확하게는 '종교로서의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임지현 교수의 칼럼을 스크랩해놓는다(처갓집에 점심을 먹으러 건너갔다가 우연히 읽게 된 해외서평인데, <종교를 닮은 공산주의>란 폴란드 책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종교로서의 주체사상'에 관한 기사도. 따지고 보면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내용들이긴 하나 그러한 비판이 함축하는 바는 더 음미될 필요가 있다. 가령, 나로선 '공산주의로서의 종교', '주체사상으로서의 종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사실 이런 타이틀의 책들도 이젠 나옴 직하지 않을까?). 

조선일보(07. 07. 28) 공산주의는 종교를 패러디한 권력의 산물

종교를 닮은 공산주의(Religiopodobny komunizm)
마르친 쿨라 지음|크라코프 노모스|181쪽|32즐로티

구 소련에서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레니나(Lenina), 니넬(Ninel) 등의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레니나는 레닌의 여성형, 니넬은 레닌의 철자를 거꾸로 부른 이름이다. 남자 아이에게는 블라딜렌(Vladilen)이라는 이름이 주어지곤 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약어인 셈이다. 유대인 아이들이 모세라는 이름을 흔히 갖듯이, 소련의 아이들은 러시아 인민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공산주의의 모세인 레닌의 이름을 가졌다.

공산주의의 종교적 특성에 주목한 것은 물론 마르친 쿨라(Marcin Kula)가 처음은 아니다. 저자도 인용하듯이, 사회학자 오소프스키(Ossowski)는 1956년 일기장에 “사회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신정국가의 신의 독재의 근대화된 형태”라고 조심스럽게 썼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후, 폴란드의 신학자 티쉬네르(Tischner) 신부는 “공산주의는 종교의 적대자일 뿐만 아니라 캐리커처이자 패러디였다”고 선언했다.

무신론을 외치는 공산주의와 종교는 서로 적이라는 상식을 한 꺼풀 벗겨보면, 닮은 점이 의외로 많다. 공산주의 역사철학은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마니교적 비전을 담고 있으며,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라는 세속적 사탄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위대한 수령의 영도 아래 낙원을 향해가는 고난의 행군의 역사인 공산당 약사는 동족을 끌고 광야를 통과해 가나안에 정착한 모세의 이야기와 닮았다. 결국 공산당 약사와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역사는 같은 플롯 위에 서 있다.

교회와 당은 계시된 진리 혹은 절대적 진리의 유일하고 정당한 수호자이다. 교회와 당은 모두 밖의 이교도보다는 내부의 이단을 더 위험하게 여겼다. 트로츠키 주의와 수정주의를 비롯한 무수한 이단적 ‘주의’들에 대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스페인의 종교재판소를 떠올리게 한다. 이단이기 때문에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재판을 받기 때문에 이단이 되는 것이다. 모스크바는 공산주의의 로마였으며, 크레믈린은 세속의 바티칸이었다.

당 조직은 수도원과 유사하다. 교회법에 대한 순종, 엄격한 규율, 완전한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수도원의 조직은 당 조직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들은 집단 이익을 추구하는 시민사회적 조직이라기보다는 굳건한 ‘형제애’에 기반을 둔 공동체를 지향한다. 이들 공동체는 개인의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대신, 의식주에서부터 장례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한다.

가톨릭의 역사 못지않게 공산주의의 역사 또한 많은 ‘성인’들을 낳았다. 이 성인들은 죽어서도 당과 인민에 봉사한다. 평양의 혁명 열사릉이나 크레믈린의 담장 밑에 묻힌 죽은 자들이 산 자를 인도한다. 붉은 광장의 ‘영묘’ 속에 누워있는 레닌의 시신을 필두로 불가리아의 디미트로프, 프라하의 고트발트, 하노이의 호치민, 베이징의 마오쩌둥, 평양의 김일성 등 방부 처리된 ‘성인’의 시신들은 부패한 가톨릭 성인들의 유해보다 기술적으로 근대화되었을 뿐, 기본 정신은 같다.

모로조프, 스타하노프, 레이펑 등의 각종 사회주의 영웅들은 바로 이들 사회주의 성인 따라잡기의 결과이다. 1980년대에 한국의 대학가에서도 널리 읽힌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중세 성인전의 사회주의 버전이며, 그 주인공 파벨 코르차긴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 및 순교자 명부 등재 요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인민들에 대해 체제에 대한 순응과 동의를 넘어서 그들의 영혼까지 지배하고자 했던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적 권력은 교회 못지 않게 많은 성인들을 필요로 했다.

공산주의는 사실상 ‘호모 소비에티쿠스’ 혹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려는 ‘인간혁명’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기적이고 원자화된 개인을 혁명과 공동체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회주의적 인간으로 만드는 작업은 각 개인의 실존적 근거까지 근원적으로 바꾸는 ‘개종’ 작업이기도 했다. 스탈린주의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인간혁명’의 프로젝트는 곧 현실의 벽에 부딪쳐 그 원대한 꿈을 접어야 했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자신이 직접 겪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전한다. 매년 레닌의 기일마다 연구소와 문화 관련 국가기관을 다니며 그 안에 놓인 레닌 흉상에 꽃다발을 바치고 가는 문화부 고위 공무원이 있었다. 그는 저자가 근무하던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건물 안의 레닌 흉상에도 어김없이 꽃다발을 바치곤 했는데, 소장 비서는 그가 나가자마자 늘 그 꽃다발을 소장실의 화병에 꽂아버렸다는 것이다. 스스로 성자가 되지 못한 관료들이 남에게 성인처럼 굴기를 설득하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이 아니었을까?

흥미진진한 분석과 유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전근대적 동유럽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종교를 닮게 됐다는 저자의 결론은 다소 아쉽다. 민족, 조국, 국가, 계급 등의 세속적 실재를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정치의 신성화’ 혹은 ‘정치종교’는 그 자체로 이미 근대성의 산물인 것이다. 막스 베버가 근대에서 ‘탈주술화’와 ‘재주술화’를 동시에 읽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근대적 합리주의가 정교분리에서 보듯이 전통종교의 헤게모니적 지위를 박탈했지만, 근대야말로 새로운 유형의 세속적 종교성이 만들어지는 온상인 것이다(*참고로, 임지현 교수가 주도한 <대중독재2>는 '정치종교와 헤게모니'를 주제로 하고 있다).

프랑스혁명 당시 쟈코뱅이 공화주의 사상에 입각해 정교분리를 외치면서 국가교회였던 팡테온을 혁명열사와 민족 영웅의 성스러운 묘역으로 만들었을 때, 이미 정치종교는 근대적 헤게모니적 지배장치로서 꿈틀대고 있었다. 주기도문을 그대로 패러디한 나치 독일의 히틀러 총통을 위한 기도문이나 종교를 닮은 공산주의는 모두 근대 권력의 무한한 지배 욕망이 만들어낸 산물인 것이다.

내용을 조금 바꾸더라도 국기에 대한 맹세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인 21세기 남한사회에서 스스로 종교가 되고자 하는 근대 권력의 욕망은 얼마나 큰 것일까? 나라 사랑의 표현인 우리의 ‘국민의례’는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의 정치종교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세계일보(07. 05. 18) 北 주체사상 종교로 볼 수 있나

미국의 종교 사이트 ‘어드히런츠닷컴’(adherents.com)이 최근 “어마어마한 신도수(1900만명)를 가지고 있고, 그들 인생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다” 등의 이유로 북한 주체사상을 종교로 규정, 세계 10대 종교로 올려놓자 국내 관련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어드히런츠닷컴은 심지어 ‘주체교’를 유대교(12위·신도수 1400만명)보다 앞세웠다. 그런데, 왜 ‘주체’를 종교로 파악했을까.

 

 

 

 

 

 

 

 

 #주체사상이 종교인 이유
어드히런츠닷컴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주체사상은 명백히 종교”라고 못박았다. 사이트는 북한 체제가 옛 소련과 중국 공산주의에서 연유됐음을 인정하면서도 스스로 독특한 변이를 이룬 점에 주목한다. 또, 북한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승을 공식적으로 부인한 점도 언급했다. 사이트는 “지금 상황에서 주체사상을 공산주의의 이단적 갈래라고 구분하는 것은 불교를 힌두교에 포함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순위 선정의 합리성을 주장했다.

종교가 성립되려면 ‘교주(敎主)’ ‘교리(敎理)’ ‘교단(敎團)’ 등 크게 3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주체사상은 일견 그 요건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주체사상을 태동시켰던 김일성을 교주로 볼 수 있고, 주체사상 자체를 교리로 파악할 수 있으며, 김일성과 주체사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북한사회 전체를 하나의 교단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알려진 전 조선노동당 황장엽 비서도 김일성의 수령절대주의 독재가 계급독재와 다른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동안 남한사회에서 주체사상을 거의 ‘종교’ 수준으로 보아온 것도 사실이다. 이미 국내에는 주체사상을 종교로 인식한 ‘북한사회의 종교성-주체사상과 기독교의 종교양식 비교’(김병로 지음, 통일연구원 펴냄)라는 저서까지 출간된 바 있다.

#국내 신학자·종교학자들의 반응
주체사상이 10대 종교로 ‘둔갑’한 것에 대해 국내 신학 및 종교 학자들은 다양한 반응을 내놓았다.
신학자인 이정배 감리대 교수는 “주체사상을 종교에 포함시키는 건 신학적인 면에서 어불성설”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주체사상은 아주 인위적인 통치이념으로 자기초월적 기능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종교엔 자기초월·자기비판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인간을 숭고하게 이끄는 체험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사회학 입장에서 종교로도 볼 수 있지만, 이 경우 미국과 대결 상황에서 발생한 아주 기형적인 형태임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종교·인류학자 김성례 서강대 교수 역시 부정적 입장이다. 그는 “주체사상이 종교라면 히틀러의 나치즘도 종교“라면서 “한 세대만 지나면 소멸할 유사종교일 뿐”이라며 통계의 의미를 축소했다. 주체사상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땔감으로 쓰인 ‘가장된’(disguised) 종교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김정일이 죽고, 계승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간단히 와해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매우 정치적인 통치 이데올로기일 뿐인데, 북한의 위력을 간접적으로 선전할 가능성이 있다”며 통계 결과가 초래할 파급력을 우려했다.

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실장은 “주체사상을 충분히 종교로 볼 수 있다”며 유연하게 말한다. 단, 종교의 범주가 넓고 역기능도 있음을 전제한다. 장 실장은 “내세관과 초월적 요소가 없어도 종교라 부를 수 있다”며 “심지어 사람을 미혹하고, 괴롭히는 종교도 있지 않은가”하고 반문했다. 장 실장은 “‘종교’란 용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주체사상을 달리 볼 수 있다”면서 “통계 결과보다는 종교의 개념을 좀더 확실히 한 뒤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서방 세계의 시각과는 달리, 북한은 주체사상을 하나의 철학과 사상 체계로 선전하고 있어 이에 대한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 불거져 나올 것으로 관측된다.(심재천 기자)

07. 07. 29.

P.S. 러시아 공산주의와 관련하여 언급해두고 싶은 책은 니콜라이 베르쟈예프(1874-1948)의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1937). 우리말로는 <러시아 지성사>(종로서적, 1975)로 옮겨졌는데, 영역본을 중역한 책이다(영역본은 http://www.questia.com/PM.qst?a=o&d=297502에서 읽어볼 수 있다). 저자는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을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닌 러시아 전통사상과 공동체의식에서 찾는다. 20세기 러시아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인 베르자예프의 책들은 과거에 몇 권 번역된 바 있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되었다. 분량도 얇은 만큼 이 책만큼이라도 재번역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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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7-29 23:28   좋아요 0 | URL
모든 거대 담론이 신학적인 지점들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주체사상도 종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임지현 교수가 조선일보에 글을 쓴 것을 보니,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많은 학자들이 우파들과 모종의 이해의 일치를 보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다면 조선일보와 임지현은 '적대적 공범자'?)

로쟈 2007-07-29 23:51   좋아요 0 | URL
조선일보(박정희주의)와 주체사상(김일성주의)가 실상 '적대적 공범자'였던 걸 상기해볼 수 있겠습니다...

자꾸때리다 2007-07-30 00:12   좋아요 0 | URL
지금의 조선일보를 박정희주의로 볼 수 있을까요? 조갑제 같은 사람 제외하고는 대세는 신자유주의로 알고 있는데요...

로쟈 2007-07-30 00:22   좋아요 0 | URL
지금이야 이명박주의쯤 되나요?(성장주의, 친미주의 혹은 기득권주의?)사실 '생활우파'란 말이 시사해주듯이 '머릿속 이념'은 한국에서 별거 아니거나 속임수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그때 필요한 포장이거나 알리바이인 셈인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조선일보는 순진한(노골적인) 면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