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에 '로쟈의 인문학 서재'라는 코너를 (3주에 한번씩) 연재하게 됐다. 이번주에 첫 꼭지가 나갔는데(잡지는 나도 아직 못 받았다) 제목은 '천한 것과 돼먹잖은 놈의 진화'(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7/08/021162000200708090672010.html)라고 붙어 있다. 나는 '다윈주의 좌파' 정도의 제목을 적어 보냈는데 편집진에서 보다 '자극적인' 제목을 붙인 모양이다. 눈에는 더 잘 띄지만 칼럼의 내용은 그냥 '다윈주의 좌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단 옮겨놓고 분량 때문에 못 적은 말들을 '뒷담화'로 덧붙여놓는다.

한겨레21(07. 08. 09) 천한 것과 돼먹잖은 놈의 진화

다윈주의 좌파? 그렇다, 우파가 아니라 좌파다. 세계적인 윤리학자이자 동물해방론자인 피터 싱어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원제는 <다윈주의 좌파>)에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다윈주의 좌파’의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은 두 가지 남용과 오류에 대한 교정에서 성립한다. 남용은 ‘사회적 다윈주의’란 이름으로 불린 다윈주의 우파의 것이고 오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전통적인 좌파’의 것이다.

각기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다윈주의 우파와 전통적인 좌파는 다윈주의에 대한 이미지를 공유한다. ‘경쟁에 기초한 적자생존’이라는 이미지다. 인간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란 관점이 공통적인 전제이다. 다만 다윈주의 우파가 보기에 그 이기성은 변하지 않는 본성으로서 구제불능이며, 전통적인 좌파가 보기에 그 이기성은 본성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다(이 경우 그 사회적 관계들을 변혁한다면 본성이란 것은 얼마든지 변화 가능하며 심지어 개조해낼 수 있다). 즉 인간 본성은 변화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믿음을 기준으로 좌·우의 스펙트럼은 나뉘어왔다.

그러한 분류에서 고려되지 않은 것은 진화생물학이 발전해감에 따라 확인된 새로운 ‘사실들’이다. 다윈주의에서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이 이타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자연의 도태 압력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의 본성에는 경쟁 성향뿐만 아니라 협동하려는 성향 또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미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개정판) 등에서도 자세히 설명된 것이지만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식의 극단적인 이기주의 전략은 “너도 살고 나도 살자”라는 협력적 전략에 비해 덜 효과적이다(“나 죽고 너 살자”라는 이타주의는 진화되기 어려운 성향이다). 극단적인 상황에서가 아니라면 생존에 불리하다는 것이다. ‘협동의 진화론’을 주장한 로버트 액설로드 등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보여준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게 가장 효과적인 생존전략이라는 사실이다.

 

가령 휴가철을 맞이해서 피서지 바가지요금을 생각해보자. 피서지별로 ‘바가지요금 근절’을 내세우지만 피서객들을 ‘등쳐먹는’ 바가지 상술이 올해도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숙박업소 상인들은 ‘한철 장사’라는 생각에 화장실도 없는 방을 15만원이라고 내놓고 숙소를 구하지 못한 일부 피서객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런 바가지요금을 감수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피서객은 봉인가? 적어도 한 해만을 놓고 보자면 그렇다. 하지만 장사 한두 해 하는 것 아니다. 그리고 휴가철은 해마다 찾아온다(우리의 진화적 본성은 장구한 시간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다). “차비나 숙박비 생각하면 차라리 비슷한 금액이니까 동남아시아나 해외로 가죠”란 관광객들의 푸념을 볼멘소리로만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윈주의 좌파는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그래서 다윈주의다). 그렇지만 그러한 바탕에서도 상호 협력을 촉진하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경쟁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목표를 향해 작동할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약자, 빈자,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설 수 있다고 믿는다(그래서 좌파다).

흔히 말하기에, 우파는 교양을 따지고 좌파는 품성을 논한다. 우파는 좌파가 무식하다고 욕하고(“천한 것들!”), 좌파는 우파가 돼먹지 않았다고 비난한다(“돼먹잖은 놈들!”). 하지만 그 둘 사이에 적대적인 관계만 설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유식하고 돼먹은 인간’으로 진화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우파적 교양을 기본으로 갖추고 거기서 좀더 나가서 골고루 먹고사는 문제, 그러니까 평등의 문제를 고민하면 좌파인 거다”(강유원)란 정의를 이어받자면 “다윈주의라는 교양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거기서 좀더 나가서 상호 협력의 문제를 고민하면 다윈주의 좌파가 된다”.

07. 08. 10.



 

 

 

P.S. 시간관계상 '뒷담화'도 간추려놓는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다윈의 대답1>의 번역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윈주의 좌파의 숙제'에 관한 것이다. 이 숙제가 제기되는 것은 싱어의 책이 '다윈주의 좌파'와 관련한 여러 문제들을 '풀스케일'로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최소한 300쪽은 써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문제의 윤곽 정도만을 그려놓고 있기에 나머지는 독자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이 문제는 다소 견적이 나올 듯해서 나중으로 미루어놓고 번역 문제만을 언급해둔다.

 

이미 이덕하님도 지적한 바 있지만(http://blog.aladin.co.kr/718825194/1482017), 국역본은 이런저런 오역/오류들 때문에 무성의하다는 인상을 준다. 바쿠닌의 책 <국가주의와 무정부성>(1873)을 마르크스가 이듬해인 1874년에 읽고서 코멘트를 붙인 대목들을 싱어는 서두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국역본에서는 바쿠닌의 첫문장부터가 잘못 번역됐다.

"국가 지도자들과 대표들이 주장하는 전체 인민에 의한 보통선거권.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 진영과 민주주의적 진영에서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슬로건이다."(11-12쪽) 원문은 "Universal suffrage by the whole people of representatives and rulers of the state this is the last word of the Marxists as well as of the democratic school."(3쪽)

문제가 되는 건 'last word'의 번역이다. 이덕하님의 지적대로,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엉터리 번역이다. last word최종 발언, 유언, 결정적 발언을 뜻한다. 바쿠닌은 결국 마르크스가 내세울 것이 보통 선거권밖에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나대로 다시 옮기면, "전체 인민의 보통선거를 통한 국가 대표자와 통치자의 선출 - 이것이 민주주의 진영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끝마다 내놓는 구실이다."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이 주장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나 민주주의자나 '국가주의'라는 틀안에서는 똑같이 '대의제'를 명분으로 독재를 한다는 것이고(가령 북한의 정식명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그들은 그걸 '보통선거'에 의해서 정당화한다는 것이다('대중독재'란 말이 이 경우엔 적절하겠다. 우리가 왜 독재냐? 대중이 우리를 뽑아줬는데?). 이런 식의 정당화에 대한 바쿠닌의 비판은 이렇다: "이 슬로건은 소수 지배자들의 전제정치를 교모히 은폐시키는 거짓말이며, 자신들의 지배를 소위 전체 인민의 의지의 표현인 것처럼 가장한다는 점에서 아주 위험한 거짓말이다."

계속 이어지는 그의 신랄하고 예리한 비판: "일단 국가라는 저 높은 곳에 안착하게 되면 그들은 노동자들이 사는 속세를 경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인민을 대변하지 않을 것이고,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대변할 것이다. 그들은 인민들을 지배, 통치하려고만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12-13쪽)

이러한 바쿠닌의 우려에 대해 마르크스가 붙인 코멘트: "바쿠닌 선생이 노동자 협동조합에서 관리자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가 어떤 건지를 조금만 이해했더라도, 권력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과 악몽은 갖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저자 싱어가 바쿠닌이나 마르크스에게는 미래의 세기였지만 이젠 과거가 돼버린 지난 20세기를 돌이켜보며 내린 결론: "지난 한 세기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했던 정부들이 위의 논쟁에서 마르크스가 한 말이 틀렸고, 바쿠닌이 가졌던 '권력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과 악몽'이 섬뜩할 정도로 예언적이었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13쪽) 당신 또한 이러한 판단에 동의한다면 <다윈주의 좌파>는 일독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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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쟈님? 저기 "한겨레21" 에...
    from 당신과 나의 침실 2007-08-12 17:39 
    어... 제가 이번 호 <한겨레 21>을 읽다보니 로쟈님 칼럼이 있어서요 ^^; 저만 모르고 있었나??? 축하드립니다. ^-^)/ 저는 언제쯤 <오마이섹스> 같은 칼럼 좀 연재하는 영광을 누려볼 수 있을까요? :)     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7/08/021162000200708090672010.html 로쟈님의 칼럼입니다. 저처럼 궁금
  2. [펌]다윈주의 좌파?
    from 영혼의 아까징끼 2007-08-13 14:17 
    '로쟈'라는 아이디는 눈에 익다. 예전에 그가 쓴 서평을 몇번 읽어본 적이 있었고 날카로운 시각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알라딘에서 꽤 유명한 소위 '스타급' 서평자라는데, 공부하는 분인 듯(러시아문학 같다) 하다. 얼마 전부터는 『한겨레21』에 칼럼도 쓰나 보다. 아래의 글은 그가 『88만원 세대』에 대해 포스팅한 글인데, "저자들의 입장이 다윈주의 좌파의 전형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어 흥미롭다"고 말한다. 그가  다윈주의 좌파에 대해...
 
 
2007-08-11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8-11 09:14   좋아요 0 | URL
숨은 공로자가 따로 있었군요.^^

2007-08-12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7-08-1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 21 정기구독 신청해야 되는건가요? 축하드립니다..^^

수유 2007-08-11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모로 좋은 일입니다^^ 축하해요~~~

nada 2007-08-11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한겨레21 구독 안 해도 로쟈 님이 페이퍼 써 주실 거죠?
근데 3주에 한 번이라니.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잖아요.
좀 더 부지런해지세요. 딱! (채찍질! -_-)

philocinema 2007-08-11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구독해오던 한겨레21을 지난주를 끝으로 구독중지 했는데, 로쟈님이 혹시 그 사실을 아셨던가요? 절묘한 타이밍에 첫글이 실리셨군요! 우선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고민이네요. 구독연장과 중지지속 사이에서...

허리우스 2007-08-11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카드립니다. 로쟈님 때문에 한겨레21을 다시 사보아야겠군요. ...ㅠㅠ 요즘 긴축경제인데 기대만땅입니다.

로쟈 2007-08-12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공연히 '부담'을 드린 건가요?^^;

비로그인 2007-08-12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나 뒷북이네 -_-;;;

로쟈 2007-08-12 17:50   좋아요 0 | URL
지대로 뒷북이십니다.^^

마늘빵 2007-08-14 22:07   좋아요 0 | URL
난 더 뒷북. -_-

다락방 2007-08-12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어쩐지 저도 정기구독을 해야할것 같은 느낌이 ^^
축하드려요 :)

로쟈 2007-08-12 23: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정기구독까지야.^^;
 

이번주에 출간된 신간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책은 사카이 다카시의 <폭력의 철학>(산눈, 2007)이다. 저자도 출판사도 모두 생소한데, 눈길을 끈 것은 저자의 프로필. "1965년 출생. 현재 오사카여대 인문사회학부 강사. 저서로 <자유>, 역서는 <부정적인 것과의 체류(슬라보예 지젝)>, <제국>(네그리) 등이 있다."로 돼 있다. 즉, 우리말로도 번역돼 있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와 <제국>(이학사, 2001)의 일역판 역자인 것이다(저자의 '반폭력론'에서 지젝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나라마다 사정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 인문서의 역자는 그 나름의 식견과 인문학적 파워를 갖춘 경우가 많다(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영어로 옮긴 가야트리 스피박이 가장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250쪽이 안되니까 비교적 얇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신간에 눈길이 가는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는 물론 '폭력'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책들이 최근 유행을 타고 있기 때문. 조르주 소렐의 <폭력에 대한 성찰>(나남출판, 2007)이 가장 최근의 예일 텐데, 이 주제에 관한 책들만 모아놓고 읽어도 한 계절은 족히 잡아먹겠다. 그 경우에도 사카이의 책은 유익한 가이드북이 돼주지 않을까 기대된다. 신간을 비교적 크게 다룬 리뷰를 하나 챙겨둔다.

한국일보(07. 08. 11) 정당한 분노의 표출, 그 폭력이 악인가?

“폭력에 대한 폭력을 억누른다고 하는 것은 폭력의 공범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인 우리에게 폭력은 숙명이다.”

프랑스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테러>(*<휴머니즘과 폭력>) 속 한 구절을 인용하며 끝을 맺는 이 책은 ‘불온하게’ 묻는다. 폭력은 모두 악인가? 모든 폭력은 그저 야만일 뿐인가? 그렇다고 굳게 믿는 평화 지상주의자라면 이 책을 읽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폭력에도 ‘급(級)’이 있고, 그러므로 구분짓기가 필요하다는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호해야 할 어떤 폭력’이 있음을 인정하라고 집요하게 독자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오사카시립대 사회학부 준교수인 저자는 폭력을 거부하는 것이 반드시 폭력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폭력은 안 된다’는 막연히 ‘올바른’ 도덕이야말로 도리어 폭력에 가해지는 더 큰 폭력을 용인하며, 폭력의 다양한 층위에 대한 무감각을 비대화시키는 동력이라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에서 시작해 마틴 루터 킹, 맬컴 엑스, 프란츠 파농, 한나 아렌트, 위르겐 하버마스, 프리드리히 니체, 미셸 푸코에 이르는 다양한 폭력의 담론들을 비교, 분석하는 이 책은 하나의 개념으로 포괄될 수 없는 폭력 내부에 철학적 구분선을 긋기 위해 ‘반폭력’(anti-violence)이라는 개념을 주창한다.

일체의 폭력을 거부하는 비폭력(non-violence)은 물론 ‘폭력에는 폭력을’을 구호로 내세우는 대항폭력(counter-violence)과도 구별되는 반폭력은 폭력을 구조화하는 제도 차제를 해체하려는 폭력이다. 여기서 반폭력을 다른 폭력들과 구분하는 기준은 적대성과 주권. 적대성이란 자기자신이나 타자를 향해 분출되는 증오와는 다른, 구조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뜻하며, 주권은 폭력 수단을 독점하고 그 폭력을 누구에게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리를 일컫는다. 저자는 폭력이 반폭력이 되기 위해선 올바른 적대성을 갖되, 주권의 쟁취를 목적으로 하지 않아야만 한다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반폭력의 구체적인 예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저자는 북미자유협정에 저항해 무장봉기한 멕시코 게릴라 집단,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첫 손에 추켜세운다. 그들이야말로 총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총을 든 자들이기 때문이다. 적대성에 기반한 폭력은 억압받는 자를 자기혐오로부터 구원한다. 폭력은 행위뿐 아니라 언어와 이미지의 영역에서도 작동하기 때문에 폭력의 전개는 자기치유의 과정과 고스란히 겹치기도 한다.

프란츠 파농의 말처럼 “구체적인 폭력행사 전에 적을 확인하고 어디에 균열이 생겼는지 정확하게 인식하여 전투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비로소 뿌리 깊은 의존 콤플렉스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시 한번 묻는다. “이래도 당신은 폭력은 모조리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박선영 기자)

07. 08. 10.

P.S. 조금 다른 방향에서 맥을 짚은 기사도 옮겨놓는다. 나로선 더 수긍이 가는 리뷰이다.

중앙일보(07. 08. 11) 폭력의 밑바탕엔 항상 공포가 있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인 우리에게 폭력은 숙명”이라고 말했다. 숙명. 그래서인지 폭력은 참 다양한 형태로 우리 옆에 있다. 전쟁과 테러, 조직폭력배들의 패싸움, 집단 따돌림, 그리고 자살과 사형….

이 책은 이런 다양한 양상의 폭력을 철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일본의 소장파 사회학자인 저자는 “‘폭력은 안 된다’는 구호가 옳은가”를 화두로 던지며, 폭력의 속성을 파헤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무책임하고 공허한 주장이다. ‘폭력은 안 된다→그러니까 폭력을 증오한다→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증오한다→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폭력을’이란 역설을 잉태하고 있어서다.

역사적으로 폭력이 정치적 의미를 띤 경우가 많았다. 민족분쟁이나 종교전쟁이 그랬다. 하지만 최근의 폭력 양상은 점차 정치성이 없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예를 들어 1970년 대까지만 해도 브라질에서 유괴는 정치적인 목표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돈이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정치성을 초월한, ‘의미 과다’의 폭력도 늘었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한 테러리즘이 그 예다.

저자는 폭력의 밑바탕에 ‘공포’가 있다고 분석한다. 92년 LA폭동의 도화선이 됐던 ‘로드니 킹 사건’을 보자. 25세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이 LA 근교를 드라이브하던 중 경찰의 검문을 받고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했다. 킹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경찰에 둘러싸여 주먹과 발, 경찰봉으로 맞았고 두 차례의 전기충격 공격까지 받았다. 볼과 발목뼈가 으스러지고 두개골이 아홉 군데나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 이 폭행에 가담한 네 명의 경찰이 무죄로 풀려났다. (판결이 난 날이 바로 LA폭동이 일어난 날이다.) 어째서 ‘무죄’인가.

“로드니 킹을 공격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경찰에게 달려들어 폭력을 행사할 무시무시한 육체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는 경찰 측 변호인단의 주장이 먹혀들어 간 것이다. 저자는 이를 ‘전도(inversion)’현상으로 해석했다. ‘강자’에 속하는 측이 ‘약자’에 속하는 쪽을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끼는 현상이다. 우리 주변에선 ‘노숙자에게 공포를 느끼는 일반 시민의 심리’가 그 예가 된다. 이런 ‘전도’는 사람들을 쉽게 폭력적으로 만드는 장치다. 국가에 의한 폭력이 ‘예방을 위한 대항폭력’으로 정당화되고, 침략적 성격의 전쟁이 ‘자위’를 구실로 이뤄지는 과정에서도 전도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테러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다. 저자는 테러리즘의 특징으로 ‘쇼’라는 점을 들었다. 국지적인 피해로 한정된 공격이 미디어를 통해 증폭돼 세계를 뒤흔드는 효과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쇼’라는 측면에서 테러리즘과 비폭력 행동-간디의 소금행진 같은-은 통한다. 저자는 어느 특정한 폭력을 비난하거나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옹호 받아야 하는 폭력으로 ‘적대성을 갖되 주권의 쟁취를 목표로 하지 않는 폭력’을 들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적대성’이란 옳지 않은 제도나 폭력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의미하며, ‘주권’은 폭력 수단을 독점하고 그 폭력을 누구에게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폭력의 예는 뭘까. 우리 역사상 80년 광주항쟁이 아닐지. 쉽지 않은 결론이다.(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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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10 20:02   좋아요 0 | URL
벌써 토요일이군요. 참 빠릅니다. -_- 어휴. 벌써 둘째주 다 갔네요. 토요일자 신간서적 나들이 글이 올라오면 아 토요일이구나, 합니다. :)

로쟈 2007-08-10 20:05   좋아요 0 | URL
이러다 곧 늙겠습니다.--;

philocinema 2007-08-11 16:39   좋아요 0 | URL
불로초라도 한뿌리 선물해 드릴까요? ㅎㅎ

로쟈 2007-08-23 01:30   좋아요 0 | URL
반뿌리라도.^^;
 

'상반기 베스트'로 미리 올려놓았지만 오늘까지도 손에 들고 있지 못한 책이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이다. '꼭두각시와 난쟁이'란 원제가 국역본의 제목으로 탈바꿈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최근 출간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과도 얼추 운이 맞는다. 해서 이 또한 겸사겸사 같이 읽으면 좋겠다(물론 지젝이 아무리 대중적인 철학자라 하더라도 도킨스와 나란한 가독성을 기대해서는 곤란하겠지만).

내용을 더 잘 드러내주는 부제는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이다. 영어본(The Puppet and the Dwarf)을 옮겼을 텐데, 알라딘에 떠 있는 원서는 독어본(Die Puppe und der Zwerg)이다(책을 아직 펴들지 않아 모르겠지만 독어본 판권을 구해서 영어본을 옮긴 것인가?). 아무려나 지난봄 김용옥의 문제제기로 화제가 되었던 기독교/종교 문제가 도킨스/지젝을 연결고리 삼아 자연스레 가을까지 이어질 모양이다. 이 참에 '나의 종교'는 안녕하신가, 한번쯤 돌이켜봄 직하다. 서두에서 밝힌 사정상 신간에 대해서 내가 덧붙일 말은 없고 가장 먼저 뜬 언론 리뷰를 하나 대신 옮겨놓는다. 그다지 친절한 리뷰는 아니군(*해서 한겨레의 리뷰도 추가해놓는다)...

경향신문(07. 08. 11) 神과 인간, 유물론적 접근

오늘날 믿음은 “부인되거나 치환된 형태로만 존재한다.” 부인이 갖는 거리가 종교를 문화로 치환하지만 문제는 냉소적 거리가 늘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에 대한 아이러니한 거리가 은밀한 믿음을 필요로 하는 이율배반과 마주하여 슬라보이 지젝은 다시 칸트의 질문을 반복한다. ‘믿음이란 가능한가?’ “우리가 정말로 믿지는 않으면서도 실천하는 모든 것”이 문화라면, 그러나 이 문화가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에 자신의 믿음을 전가하고 있다면 믿음은 문화의 가능조건인 동시에 불가능조건이 아닐까?

지젝에게 믿음은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경험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핍 없는 초월적 실체로서의 신이 아닌 십자가 위의 예수,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는 “믿지 않는다고 가정된 주체”인 그리스도의 회의와 불신에 동참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결핍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이 불가능한 경험이 오직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바로 ‘죽은 신을 위하여’이다.

‘꼭두각시와 난쟁이’란 원제에서 보듯 지젝은 여기서 발터 벤야민(‘역사철학테제’)을 반복하고 있는데, 두 번 읽기로서의 반복은 정신분석학적 읽기의 주요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반복적 읽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대립구조 속에서 포착될 수 없는 ‘사이공간’이다. 유물론과 신학, 인간과 신의 사이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유물론도 신학도 아닌 “생성 중인 종교”, 인간도 신도 아닌 괴물로서의 예수이다. 자신의 고통이 의미없음을 고집하는 욥.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욥의 결핍이 아닌 신의 결핍이다. 초월적이고 예외적인 공간에 거주하던 실체로서의 신이 역사 속으로 타락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주체가 될 때 사랑이 시작된다. 타락이 구원과 같아질 때, 결코 다가설 수 없던 신이 이미 우리의 이웃일 때 유물론적 신학이 발생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생성 중인 기독교’는 사도 바울의 마치-아닌-듯한 태도(as if-not)로 반복된다. ‘마치 법을 지키지 않는 듯이 법을 지키라’는 바울의 명령은 법과 초자아의 악순환을 벗어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위반에의 욕망을 부추기는 초자아는 죄의식을 통해 주체를 지배하는 권력 기제이기 때문이다. 위반하기 위해 금기를 필요로 하는, 구원을 위해 타락을 필요로 하는 법의 도착적 구조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지젝에게 유물론적 신학은 곧 정신분석학이 된다. 정신분석학 역시 타자의 내부적 결핍을 지시하는 주체의 가능성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욥의 의미없는 고통처럼 의미로 구성된 우주 속에서 주체는 자신의 고유한 장소를 갖지 못한다. 기표 속에 있지만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는 빈 공간으로서의 주체는 그러나 기표 체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칸트의 추상적 보편성과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을 구분해주는 것은 바로 이 기표화할 수 없는 기원적 빈 공간의 포함 여부이다. 보편/특수의 대립구조로 설명할 수 없는 사이공간을 지젝은 특이성(singularity)이라 부르는데, 특이성을 포함한 보편성이 바로 구체적 보편성이다. 그러나 특이성의 포함은 보편성의 내재적 분열을 초래한다. 이제 보편성은 특수성 속으로 하강하여 특수한 요소들 속의 간극, 특수성도 보편성도 아닌 특이성이 된다.

기독교는 특이성으로서의 주체의 공간을 포함할 때 유대교의 추상적 보편성을 넘어선다. 타자의 결핍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감추고 있는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는 인간도 신도 아닌 예수라는 특이성의 주체를 드러낸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배설물과도 같은 주체로서 예수는 신의 결핍, 체스터톤의 말대로 “스스로에게 버림받은 신”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신교는 특수하고도 다양한 요소들을 폭력적으로 통합하는 일의성이 아니라 니체의 정오처럼 자신의 내재적 결핍을 보여주는 둘로서의 하나, 하나로서의 둘이다. 다신교는 내재적 분열을 외재적 차이로 환원시킴으로써, 다시 말해 불가능성을 다양성으로 치환함으로써 의미의 불가능성을 피해가는 방어기제이다.

일신교의 혁명은 다양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불가능성을 말하는 유대교에서 시작된다. ‘뿌리없음’, 상징질서로부터의 절대적 분리를 보여주는 유대교는 그러나 메시아를 여전히 ‘미래에 오는 자’로 상정하여 그와의 만남을 끊임없이 연기한다. 기독교는 ‘이미 항상 와있는’ 메시아를 이야기함으로써 신을 상징질서 속으로 끌어내린다. ‘아직 오지 않음’과 ‘이미 항상 와있음’의 간극 속에서 사랑의 윤리학, 곧 정신분석학이 시작된다.(민승기|경희대 겸임교수·영문학)

» 한스 홀바인 작 <죽은 그리스도>(1521)

한겨레(07. 08. 11) '신이 죽어버린 기독교’ 외설스러운 재해석

슬라보예 지젝은 옛 유고연방 출신의 철학자다. 슬로베니아 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최신 사상의 중심이자 태두가 지젝이다. 20세기 사상의 거목들이 쓰러진 자리에서 그의 사상적 지위는 거의 독보적으로 빛난다. 국내에서도 그는 소수이지만 맹렬한 지적 사도들을 거느리고 있다. 지난 10여 년 사이 그의 거의 모든 주요 저작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그에게 쏠리는 관심의 강도를 보여준다.

지젝의 사상은 옛 유고연방이라는 지역적 특수성 속에서 영근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이 발칸의 다민족국가는 소련의 헤게모니가 무너지면서 급속한 ‘자유화’ 과정을 겪다가 민족주의의 광기 어린 폭발로 만신창이의 상처를 입었다. 한때 ‘서구식 민주화’에 기대를 걸었던 지젝은 그 민주화의 결과가 아무런 해방의 전망도 제시하지 못한 채 파멸적 재앙으로 귀결하는 것을 보면서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애초에도 삐딱하고 반주류적이었던 그의 사상은 더욱 발본적이고 급진적이고 과격한 국면으로 나아갔다. 특이한 것은 20세기 후반의 체제 반란적 사상운동을 이끌었던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에 대립하는 지점에 그가 서 있다는 사실이다. 지젝은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 정통 관념론을 이어받고 자크 라캉의 ‘정통적’ 정신분석학을 그 흐름에 접목해 매우 정통적인 방식으로 반역적 사상을 펼치고 있다. 이번에 번역된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도 그는 헤겔과 라캉을 위시한 유럽 정통 사상을 입론의 주춧돌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정통의 세례를 받은 그의 사상은 거의 외설스러울 정도로 반정통적이다.

<죽은 신을 위하여>는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라는 부제가 얼핏 보여주는 대로 기독교에 대한 오래된 해석체계를 전복하는 작업이다. 요약하자면, 기독교를 유물론적으로, 다시 말해 신이 없는 종교, 신이 죽어버린 종교로 재해석하자는 것이다. 더욱 불온한 것은 그리스도를 20세기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연결지어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 요컨대, 예수를 종교상의 레닌으로, 유물론적 혁명가로 이해하는 것이다.

지젝의 기독교 해석의 관점을 지젝 자신의 목소리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나의 주장은, 내가 뼛속까지 유물론자라거나,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유물론적 방법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장은 훨씬 더 강도 높은 것이다.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오로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역으로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지젝은 이 논의를 펼치기에 앞서 오늘날 서구에서 기독교의 대안으로 자주 거론되는 불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먼저 풀어놓는다. 그가 불교를 이야기하는 것은 기독교의 폭력적·독재적 전횡을 중화시키거나 치유할 방법이 불교에 있다는 생각이 널러 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서구에 이식돼 유통되는 ‘서양 불교’를 단호하게 부정한다. “서양 불교는 광란의 시장 경쟁 속도에 대하여 내적 거리를 두고 무관심할 것을 설교하는 대중문화의 한 현상이다. 이는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 자본주의 역학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완벽하게 참여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는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 이데올로기다.”

‘서양 불교’의 원형인 ‘동양 불교’도 그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일본의 사례가 결정적 근거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와 선을 결합했던 일본 선사 스즈키 다이세쓰의 선사상을 사례로 끌어들인다. “군국주의적 선지도자들은 선의 기본적 메시지를 순진한 군사적 충성, 곧 명령에 즉각 복종하고 자아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임무를 다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한다.” 문제는 무념무상이라는 불교의 내적 평화의 원리에 있다. ‘분별적 사고를 중지하고 무의 상태로 돌입하는 것’이 윤리적 판단 자체를 거부하게 만든다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그런 무차별의 종교에서는 진정한 혁명도 사랑도 불가능하다고 지젝은 판단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즉각 기독교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목표는 ‘유신론적 기독교’를 해체하고 전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통 기독교의 원리를 뿌리부터 잘라 버리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기독교는 신의 죽음 위에 성립된 종교다. <신약성서>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최후에 외치는 말,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구절이 결정적이다. 지젝은 이 말로써 그리스도 자신이 기독교가 범할 수 잇는 궁극의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바로 믿음을 부인하는 죄다. “그리스도가 죽을 때, 그와 함께 죽은 것은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소망이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이렇게 ‘신이 없다’는 확인에서 출발한 종교다.

이런 역설 혹은 도착은 예수의 행적 곳곳에서 발견된다. 유다의 배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예수가 유다의 배반을 사전에 몰랐을까? 몰랐을 리 없다. 지젝은 여기서 유다의 배반이 기독교의 성립에 필수적임을 지적한다. 유다의 배반을 통해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진정한 구원자로 등극한다. 유다는 배반 행위를 통해 예수의 혁명사업을 적극적으로 실행한 일종의 영웅이다. 왜 영웅인가. 유다는 영원히 예수의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것을 알면서도 예수를 위해 배반을 저지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배신하는 것이다.

지젝은 예수가 유다에게 이렇게 은밀히 명령했다고 추정한다. “내가 너의 전부임을 보여라. 그러려면 우리 둘 다를 위한 혁명 과업을 위해 나를 배반하라.” 그런 사랑의 배반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가 성립했다. 그 그리스도는 지젝이 보기에 혁명가다. ‘사랑의 과업’을 실현하려고 목숨을 던진 혁명가다. 그 혁명가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초인이다. 그 초인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려면 신이라는 관념에 입각해 구축된 기독교 제도를 버려야 한다. 그렇게 지젝은 말한다.(고명섭 기자)

07. 08. 10.

P.S. '유물론적 신학'은 기억에 지젝의 타르코프스키론에서도 키워드였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http://blog.aladin.co.kr/mramor/714863, http://blog.aladin.co.kr/mramor/715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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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8-10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8일, 매장에 아직 깔리지 않은 책을 직원을 통해 꺼내오도록 해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머릿말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그리고 역시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만, <만들어진 신>과 같이 읽으면 재밌겠다 싶어요. 제목들이 좀 그렇네요..만들어진 신도 그렇고.
이 글과 아랫글을 옮겨갑니다.

로쟈 2007-08-10 20:26   좋아요 0 | URL
빠르삼.^^

philocinema 2007-08-1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들어진 신"에 "죽은 신을 위하여"까지 책상에 책은 쌓여 가는데,
시간이 허락될지가 걱정입니다. 그래도 목차는 훑어봐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로쟈 2007-08-12 01:16   좋아요 0 | URL
그 정도는 하실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책사랑 2007-08-12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만든 출판사입니다. 책제목을 어떻게 결정할까로 고민을 많이 했으며, "만들어진 신"이 출간되기 이전에 이미 번역자 선생님과 "죽은 신을 위하여"로 하기로 했었습니다. 저희는 뭐 그리 책을 잘 팔지 못하는 출판사라서 어떤 시류에 잘 따라가지 못한 답니다. 저작권은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가 갖고 있어서 그쪽과 계약을 했고, 번역은 영어본으로 했습니다. 워낙 지젝이 독일어본과 영어본으로 자신의 책을 출간해서 큰 문제는 없습니다. 영어본에 보면 역자 이름이 없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독일어본 역시 역자명이 없습니다.

로쟈 2007-08-12 10: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궁금증을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젝의 경우 독어, 영어, 불어는 따로 역자가 필요할 거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목 때문에 지젝의 책이 더 팔리거나 덜 팔리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소경 2007-09-0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삽입된 그림 중 <백치>에서 바보공작이 거론한 문제의 한스홀바인 그림을 이제 보는 군요...

로쟈 2007-09-01 20:2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경악을 했던 그림이기도 합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환상 여행기'란 게 따로 있는 건 물론 아니다. 그가 쓴 <코메디아>, 즉 <신곡>을 가리키는 말이다. 두 종의 <신곡> 번역서가 새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인데, 올여름에는 어디 여행도 못갈 형편인지라 단테가 안내하는 '환상여행'이라도 떠나고픈 마음이 굴뚝 같지만(정말 '지옥'이라도 구경하고 싶다!) 이 또한 마음대로 될 성싶진 않다(밀린 책들만으로 파묻힐 판이다).

여하튼 재작년 가을 한형곤 번역의 <신곡>이 출간되었을 때 첫대목에 대한 나대로의 읽기를 시도한 바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758708, http://blog.aladin.co.kr/mramor/759358) 이번에 진도를 좀더 나가보는 게 내가 갖는 최소한의 희망이다. 일단은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매일경제(07. 08. 09) 시인이 여행한 천국과 지옥…`신곡` 완역본 발간

단테의 '신곡(神曲)'이 없었다면 이탈리아어도 없다.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신곡'을 쓸 무렵인 13세기 이탈리아어는 통일된 언어가 아니었다. 지역마다 각기 다른 방언 형태 언어를 사용했고 지식인들은 글을 쓸 때 주로 라틴어로 썼다. 하지만 단테는 '신곡'이라는 방대한 문학작품을 고집스럽게 이탈리아어로 썼다. 피렌체어로 쓰여진 '신곡' 이후 이탈리아어는 이 위대한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하나로 통일되기 시작했다.

'신곡'은 한 나라의 언어적 정체성을 만든 텍스트이자 전 세계인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 대작이다. 오죽했으면 독일인인 괴테가 '신곡'을 두고 "인간이 손으로 만든 최고의 것"이라는 헌사를 바쳤을까.단테의 '신곡'을 제대로 완역한 책 2권이 동시에 나왔다.

국내에서도 서구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근대 초기부터 '신곡' 번역본이 무수히 쏟아졌다. 하지만 그중 상당수가 스페인어본이나 영역본을 중역한 것이었다. 이번에 발간된 2종류 '신곡'은 모두 이탈리아어 직역이다.

민음사가 펴내는 '세계문학전집' 제150권으로 출간된 '신곡-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는 박상진 부산외국어대 이탈리아어학과 교수가 움베르토 보스코와 조반니레조의 주해서 등 이탈리아어 판본과 영어판본을 참고해 펴냈다. 이 책은 일본어식 제목인 '신곡'에 원제목을 처음으로 병기해 놓았다. 일본어 중역본으로 처음 알려지면서 '신곡'이라는 제목이 익숙해졌지만 이 책 원제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다. '단테의 희극'이라는 뜻이다. 책에는 영국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 삽화 102장도 책 곳곳에 수록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신곡'은 김운찬 대구가톨릭대 이탈리아어학과 교수가 사페뇨의 주해서 등 다수 이탈리아어 원서를 바탕으로 10여 년에 걸친 번역작업 끝에 펴냈다. 김 교수는 원본 시행을 그대로 살리고 기존 번역서들이 저지른 왜곡을 꼼꼼히 바로잡았다. 또 창작 당시 시대적 상황, 중세 이탈리아어의 의미, 등장인물 성격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신곡'은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인간의 삶과 영성을 그리고 있는 중세문학의 백미다.
정치적 파동에 휘말려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시인 단테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과 신의 가치를 묘사한다. 동시에 '신곡'은 지옥ㆍ연옥ㆍ천국을 여행하는 형식을 취한 우화다.

논라운(*놀라운) 건 단테의 이 환상여행기는 역대 교황들, 플라톤, 마호메트, 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토마스 아퀴나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스타티우스 등 실존했던 인물들과 아킬레우스, 제우스, 미노스 등 그리스ㆍ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은 물론 솔로몬, 유다, 다윗 등 성서 속 인물까지 등장한다. 단테의 모든 것을 통해 서양문화의 모든 특질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대서사시다.(허연 기자)

07. 08.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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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8-09 13:40   좋아요 0 | URL
가슴 설레게 하는 소식이군요. 비교 분석 들어가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8-09 14:34   좋아요 0 | URL
<신곡>에 대해서는 이 정도면 나올 번역은 다 나온 게 아닌가 합니다. 차세대 번역이 나오더라도 십수 년 이후가 아닐까 싶어요...

urblue 2007-08-09 14:52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 때 시도했다 그냥 덮은 기억이... -_-; 이 참에 다시 도전해볼까요?

로쟈 2007-08-09 22:55   좋아요 0 | URL
네, 다시 시도해보시길.^^

수유 2007-08-09 23:02   좋아요 0 | URL
동생 왈 **야 책이 쌓인다 쌓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책들은 자꾸 쏟아져 나오고 나는 주체할 수가 없네요...그래도 사놓기는 하여야, 정말 지옥편이라도 끝내길 저도 바랍니다.

로쟈 2007-08-10 10:51   좋아요 0 | URL
우리는 '책의 지옥'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죠...
 

국내 최대 시인단체인 시인협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시협회장을 맡고 있는 오세영 시인 같은 분은 여러 가지로 분주하겠다. 지난달말 읽은 문화일보의 기사까지 떠올라서 한국일보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8. 09) 오세영 한국시인협회장, 11일부터 기념행사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년)를 효시로 한 한국 현대시의 역사가 햇수로 100년을 맞았다. 올해는 회원 1,000여 명의 국내 최대 시인단체인 한국시인협회(이하 시협)가 창립된 지 50주년이기도 하다. 시협은 이번 주말부터 뜻 깊은 해를 기념하는 다양한 문학 행사를 개최한다(별도 기사 참조). 작년 3월부터 2년 임기의 회장을 맡아 행사 준비에 분주한 오세영(65) 시인을 만났다.

국내 순수시단의 중견이자 이달 정년을 맞는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인 시인은 월간 <문학사상> 이달 호에 “한국 문단을 양분한 ‘문학과 지성’ 파와 ‘창작과 비평’ 파 사이에서 나는 철저하게 외면 당해 왔다”는 요지의 회고록을 실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아래 문화일보 기사 참조).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등의 주도로 창립된 시협이 50돌을 맞았다.
“자유당 시절 대표적 문화단체인 문총(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약칭)이 어용 단체 노릇을 하는데 반발해 시협이 창립됐다. 독재에 맞서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겠다는 취지였다. 신석초, 서정주, 김춘수, 조병화, 정한모, 김남조 등이 회장을 맡으며 한국 시단의 정통을 계승해왔다고 자부한다.”

-11~13일 동아시아 시인 포럼 주제가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 동아시아 시의 역할’이다.
“세계화와 민족주의가 상충하는 시대다. 세계화의 실상은 미국화로, 서구적 가치와 표준이 일방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고유의 문화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세계화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동양적 가치관이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자는 취지다.”

-한국 현대시를 연구하며 19권의 학술서를 냈다. 시사(詩史) 100년을 평가한다면.
“한국 현대시 100년은 한마디로 정치사였다. 문학이 정치 권력에 기대고 시류를 쫓았다. 1920, 30년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만 존재했고, 해방 이후에도 참여, 민중이란 구획을 벗어난 시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순수시조차도 독재와 반공 이데올로기란 정치적 상황을 의식한 것이었다. 문학다운 문학, 문학으로서의 문학이란 의식을 가져보지 못했다는 점은 시단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문제다.”

-현실참여적 시풍은 시대적 요청 아니었을까.
“맞다. 나는 문학 지상주의자가 아니다. 80년대만 해도 민주화를 향한 열망에 문학이 복무한 것은 정치적으로 옳은 일이었다. 다만 정치적으로 훌륭한 시가 문학적으로도 그렇다고 주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의 언어는 소설과 달리 전달적 기능이 아니라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젊은 시인들의 탈정치성은 어떻게 보나.
“크게 두 가지 경향성을 보인다. 영상 문화에 익숙한 세대답게 환상, 해체 등을 표방하는 감각적 작품과 천진난만한 감성을 앞세우는 서정적 작품.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어서 자유롭지만, 시 세계를 지탱해줄 철학이 부족해 보인다. 문태준, 김경주 등은 깊은 사유가 서정성을 뒷받침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문학사상>에 기고한 글이 화제가 됐는데.
“많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창비와 문지가 자기 경향이나 계열에 참여하지 않는 작가들을 고립시켜왔다는 점은 비판받아야 한다. 등단 작가와 발표작이 크게 늘어난 요즘엔 평론가가 옥석을 가리는 역할을 잘해내야 할텐데, 이들이 특정 문학 권력에 편입돼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작품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23년 봉직한 대학 강단을 떠나게 됐다.
“다음달 중순에 마지막 강의가 예정돼 있다. 정년에 맞춰 42년 간 써온 시집 17권을 2권으로 묶은 책을 냈다. 창작을 계속할 테니까 ‘전집’은 아니고 ‘집합본’이랄까. 이달 중순엔 동창이나 문단 지인들이 나에 대해 쓴 글을 묶은 문집이 나온다. 서울을 벗어나 꽃, 나무를 기르며 창작에 전념하고 싶다.” (이훈성기자)

문화일보(07. 07. 31) "나는 좌파 문학의 왕따, 철저하게 소외 당했다”

“나는 좌파문학권력의 ‘왕따’였다.”

곧 서울대 국문과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는 오세영(65·한국시인협회장) 시인이 문학인생을 회고하며, 자신은 ‘순수문학’을 고집한다는 이유로 ‘창작과비평파’(창비파)와 ‘문학과지성파’(문지파) 등 소위 ‘민중 문학권력’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됐고, 대학 강단에서도 좌파문학에 경도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고 토로해 파장이 예상된다.

서울대 국문과 출신인 오 시인은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그동안 17권, 1100여 편의 시를 쓴 순수문학 계열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1985년 이후 22년간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올 1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한다. 이처럼 손에 꼽는 강단문인이자 순수문학 시단의 ‘원로’가 주요 문예지는 물론 각종 문화단체를 장악한 ‘문학권력’을 겨냥해 이같이 발언함에 따라 논란이 뒤따를 것 같다.

오 시인은 30일 발간된 ‘문학사상’ 8월호에 실린 “문단의 외톨이 혹은 ‘왕따’”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2005년 발간된 영문 한국시인 인명사전에 자신의 이름이 빠진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민음사가 출판하고 한국문학번역원이 발행한 이 인명사전은 당시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여했던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을 위해 만든 것. 이미 오 시인의 시집은 독일에서만 3권이 번역·출간되는 등 4개국어로 해외에 소개될 정도였으나 우리 시인의 인명사전에 정작 그의 이름은 오르지 않았다.

그에 앞선 수년전 당시 문예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 몇 개의 주요 외국어로 한국 현대 문단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발간할 때도 오 시인은 이름조차 제외됐다. 오 시인은 “프랑크푸르트 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도 그때(소책자 발간)의 위원들이 포함된 것을 보니 속칭 ‘왕따’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며 우연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이어 그는 “197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학권력을 양분했던 ‘창비파’와 ‘문지파’가 발행하는 문학지나 그들 세력이 접수한 그 어떤 문학지로부터 단 한번도 원고청탁을 받은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 그는 “그들 유파의 핵심 비평가나 시인들 역시 그 어떤 글에서도 내 이름을 올리지 않았으며, 시단의 어떤 경향을 이야기하면서 단순히 시인들의 이름을 나열할 경우에도 내 이름만큼은 생략해 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문학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핍박받은 시인이라는 점에서 나는 일종의 민중 시인”이라고 자조했다.

그는 ‘왕따’의 이유로 자신의 ‘순수문학’ 지향을 꼽았다. 우선 민중문학 계열이 ‘어용’으로 몰아붙인 박목월 시인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등단했고, 박 시인이 회장으로 있던 한국시인협회 간사를 지냈으며, 또 김수영과의 문학논쟁으로 민중문학으로부터 무차별 비판을 받은 이어령과 가깝게 지내는 등 “그(순수문학) 인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던 내가 그들에게 곱게 보일 리는 없을 터”라는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나는 문학이 원래 정치의 도구는 아니며 시대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나는 문학이란 원래 정치의 도구라고 주장하는 민중문학의 일원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오 시인은 주장한다.



그는 20여년의 서울대 봉직 시절도 “고독했다”고 되돌아 보았다. 오 시인에 따르면, ‘순수학문이 소외되고 정치 우선주의가 전횡’했던 그 시절은 ‘교수의 가르침보다 운동권 선배의 말이 더 권위가 있었으며, 운동권·좌파·주사파가 선정한 독서목록 이외에 다른 어떤 책도 읽기를 거부’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현대문학 강의 역시 그 추세를 따라 서구에서는 오래 전에 한물간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마치 아카데믹하고 절대적인 방법론인양 활개를 쳤다. 그것들을 최상의 것처럼 옹호하는 교수들이 있었으며 그래야 인기도 얻고 학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오 시인은 “그럼에도 나는 대세를 거부하며 고집스럽게 순수문학과 시의 본질을 옹호하고 신비평이나 형식주의, 구조주의를 강의했으니 학내외에서 얼마나 눈에 든 가시같이 보였으랴”라고 되물으며 “지금 생각하면 따돌림까지는 모르겠으나 어용으로 몰리지 않은 것만큼은 천만다행”이라고 회고, 그가 학생은 물론 교수진으로부터도 달갑지 않은 존재로 대접받았음을 짐작하게 했다.

오 시인은 “나는 순수문학파이다”라고 다시 분명히 밝히면서 “이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라고 강조하고 있다.(엄주엽기자)

07. 08. 09-10.

P.S. 문지와 창비쪽으로부터 왕따를 당했다고는 하지만 오 시인은 '문학사상' 같은 곳에서는 언제나 융숭한 대접을 받아왔다. 20년전 지난 1987년 문학사상사에서 제정한 소월시문학상의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된 이도 바로 오세영 시인이었다(나는 수상시집을 갖고 있다). 그때 수상작인 '그릇1'을 옮겨놓는다. 아마도 시인이 생각하는 '순수시'의 한 전형이겠다('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이란 구절이 인상적이군)...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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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9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8-09 22:56   좋아요 0 | URL
연유는 문학사상을 참조해시길.^^

philocinema 2007-08-09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시인의 “이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동감합니다.
모든 시인이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참여시든 순수시든 그 선택의 자유는 시인 내부로부터의 요청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사회적 상황에의해 참여시가 강요된다면 "자유"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닐까요?

로쟈 2007-08-09 23:04   좋아요 0 | URL
옳다/그르다와 무관하게 각기 다른 문학적 입장이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로선 순수문학론자들 역시 참여문학론자들 이상으로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지라(무관심은 관심을 배제하는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이니까요. '순수시단'이란 말부터도 그렇고). 오시인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순수/참여의 이분법이 서로에 대한 알리바이만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요컨대 결과적으론 둘이 공모적이라는 것이죠)...

philocinema 2007-08-10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수시를 쓰는 시인 내부의 요청이 "정치적"이라는 로쟈님의 말씀이 제겐 신선하군요.
순수와 참여는 그러니까 "적대적 공범자" 관계라 볼 수 있겠군요!

로쟈 2007-08-10 10:34   좋아요 0 | URL
이 세상에 '옛애인'이란 없는 것처럼 '순수시'란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시들이 있는 것이죠...

philocinema 2007-08-10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바라보는 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로쟈 2007-08-10 14:58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기인 2007-08-10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엇; '옛애인'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요? ㅎㅎ 궁금하네요 ^^;;;

로쟈 2007-08-11 00:32   좋아요 0 | URL
따로 페이퍼를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