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어김없이 읽게 되는 북리뷰들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을 몇 권씩 골라보는 게 나의 '취미'이다(적어도 한두 권은 구입하게 된다). 이번주의 첫번째 후보작은 스티븐 하우의 <제국>(뿌리와이파리, 2007)이다. '제국'에 관한 책들이 그간에 적잖게 나왔기 때문에 또 무슨 '제국'이냐 싶은데, 별로 부담스러운 분량은 아니어서 독서목록에 넣어둔다. 아직 읽지 않은 책들과 아직 구입하지 않은 '제국' 책들의 이미지들도 몇 권 띄워놓는다.

서울신문(07. 08. 17) '제국 아닌 제국’ 美國

영화로 더욱 유명해진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제국을 통제하는 ‘악의 축’ 사우론은 ‘절대반지’를 빼앗아 세계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반면 사우론에 대항하는 난쟁이 호빗족은 평화롭고 작은 공화국 샤이어에 살고 있는데, 샤이어는 뜻밖에 잉글랜드를 암시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소설을 쓴 영국작가 존 로널드 로웰 톨킨(1892∼1973)의 청년 시절 대중매체와 문화예술 속 제국의 이미지는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다고 한다. 제국을 건설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모험가, 영웅,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얼토당토않아 보이지만, 샤이어가 ‘대영제국’을 암시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제국’이나 ‘제국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혐오스러운 존재가 돼버린 것이 사실이다. ‘제국’(스티븐 하우 지음, 강유원·한동희 옮김, 뿌리와 이파리 펴냄)은 이처럼 ‘제국’이라는 단어가 혼란스러운 개념을 갖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지은이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정치학과 교수. 그는 20세기 후반 ‘제국’이나 ‘제국주의자’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이들만이 경멸적으로 쓰는 용어였지만, 최근에는 ‘미국 제국’이라는 개념이 대단히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제국´ 옹호하는 수정주의의 범람
물론 제국주의와 관련된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지만, 미국이 제국 건설자의 역할을 떠맡는 것이 미국 자신을 위해서나 세계를 위해 좋은 일이라며 호감을 갖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점은 놀랍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식 세계 지배와 미국식 세계 지배는 대비되는 점이나 비교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면밀하게 살펴보면 실은 그리 많이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미국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지배와 통치의 확장이 공격성이나 부와 세계 제패에 대한 열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측하지 못한 위기에 대한 방어이거나 혼란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고자 마지못해 수행하는 의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하지만 21세기 미국의 ‘좋은 의도’와 ‘피할 수 없는 반응’이 대개 오해와 원망을 사고 있다는 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영국 제국에 대한 묘사에도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또 미국은 자신들의 통제나 영향력은 지역의 정치체제를 통해 수행되고, 통제수단도 경제적·외교적·문화적이어서 사실상 ‘형식적인 식민주의’가 아니라 ‘비형식적인 제국’으로 작용해 왔다고 내세운다. 하지만 이 또한 영국 제국도 힘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형식적 지배 못지않게 상당 부분은 비형식적 지배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반박한다.

영국의 비형식적 자유무역 제국은 라틴아메리카와 중동, 동아시아에서 아주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으며, 형식적 제국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내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영국의 정치인들도 비형식적 통치를 선호했으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형식적 정복에 들어가는 비용지출과 위험을 감수했다. 과거의 제국과 오늘날 새로운 제국 사이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미제국, 대영제국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이 미국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국과 식민주의 시대의 역사에 대한 개괄서라는 형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제국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오늘날 국제사회에 미치는 미국의 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라는 과제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분명 ‘미국 제국’에 대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지은이는 “군사적 관점에서 미국의 강력함을 강조하는 이들은 미국의 취약함을 희석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더구나 과거의 제국과 달리 형식적 지배가 없는 상황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훨씬 복잡하고 위태로운 만큼 미국이 가진 힘의 본질을 이해하고 전망하는 데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고한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07. 08. 17.

P.S. 번역서는 두 가지가 눈에 띈다. 먼저, 강유원씨가 공역자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 덕분에 번역에 신뢰감을 갖게 된다. 한가지 궁금한 건 그가 서평에서처럼 번역에서도 '미국'을 '유에스'라고 표기하는지 여부이다(일본을 '저팬'이나 '니폰'이라고 부르는 격인데, 그는 '유에스'란 표기에서 무슨 향락을 누리는 걸까? 그저 '미국'에 대한 혐오인가?). 그럴 리야 또 없겠지만.

그리고 두번째는 옥스포드대학출판부에서 나오는 '아주 간명한 입문(A Very Short Intoduction)' 시리즈의 한권이라는 것. 이 시리즈의 책들이 탐이 나서 나도 한 출판사에 번역출판을 제안한 적이 있지만 무산됐었다. 현재 170여 권의 타이틀이 나와 있다(목록은 http://www.oup.co.uk/general/vsi/titles/). 간명하다고는 하지만 우리 분량으로 '짧은' 책들은 아니다. 원서가 비록 문고본 판형에 백 몇 십쪽 분량들이지만 <제국>에서 보듯이 우리말로 옮기면 200쪽은 그냥 넘어가기 때문이다. 내 식으로 분류하면 시리즈 자체는 아주 '교양 있는' 백과사전으로 읽힌다. 이 정도가 '교양상식'으로 통용될 수 있는 날을 고대해본다...

P.S.2. 알고 보니 최근에 출간된 <러시아혁명>(박종철출판사, 2007)도 '아주 간단한 입문' 시리즈의 한권이다. 이거 '숨은 있는 책' 찾기도 아니고 이미 번역된 책들을 다 불러모으는 건 간단하지 않은 일 같다...

P.S.3. '제국' 얘기가 나온 김에 좀 늦게 입고된 듯한 책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휴머니스트, 2007)도 눈길이 가는 책이다. 이 만만찮은 분량의 저자는 앙드레 슈미드 교수이고 역자는 문학평론가로도 활동중인 정여울씨. 하버드대 역사학과의 카터 에커트 교수의 평에 따르면, "이 책은 한국 근대 지성사의 근원적 해체이자 분과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 역작이다." 정말 그런가는 확인해보면 되겠다. 한국 학계의 수준과 비교해볼 수도 있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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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7-08-18 12:04   좋아요 0 | URL
이 시리즈중의 하나인 러시아혁명도 번역되었더군요.
동문선에서 한 10권넘게 번역되었던에 전체 판권을 산것은 아닌것 같기도 하고요.
여기 저기 산재해서 번역되는것을 보면.
저는 이책시리즈 모으고 있거든요.이뻐서요.

로쟈 2007-08-18 16:5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동문선에선 하도 여러 종의 시리즈를 내놓고 있는지라 미처 이 시리즈에는 주목하지 않았었는데, 알려주신 덕분에 살펴봐야겠습니다.^^

2007-08-19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9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9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9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은 하버마스의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나남, 2003)이다. 책은 2003년 정초에 나온 걸로 돼 있지만 그 전 주에 이미 서평이 나온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2002년 연말에 나온 듯하다. 분량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판단에서 구입하지 않았던 책인데 문득 읽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하버마스의 논지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나는 예전에 읽었었다). 하버마스 '전문가'인 이진우 교수의 서평을 미리 읽어둔다.

동아일보(02. 12. 28) [인문사회]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해질녘에야 비상하는 것처럼, 철학은 어떤 문제가더 이상 문제로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보편화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을 문제삼는 것 같다. 생명공학이 바로 그런 문제이다.
생명공학은 우리들에게 자신과 후손, 세계의 비전을 만들고 영향력을 행사할 힘을 주는 ‘꿈의 기술’로 인식되고 있다. 이제까지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렀던 인간복제를 현실화시킨 생명공학이 정말 꿈의 기술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유전학만큼 우리를 흥분시킨 자연과학도없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유전학이 생명의 신비를 해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생명을 생산적으로 다룰 수 있는 생명공학으로 발전함으로써 ‘생명’은 이제 이 시대의 핵심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생명공학의 문제는 이성적으로 논의되기는커녕 ‘축복’과 ‘재앙’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극단적 이원론의 덫에 걸려 있다. 한편에는 생명공학의 출현으로 모든 것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긍정적 예측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인간이 생명공학을 통해 창조주인 신(神)의 기능을 탈취함으로써 결국에는 인간 존엄성을 파괴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이원론은 어쩌면 실제의 생명과학적 인식과 그것이 적용될 때 나타날 수 있는 기술적 결과들과는 별로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간된 하버마스의 이 책은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한편으로, 이 책은 생명공학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인간본성’의 관점에서 생명공학에 도덕적 한계를 설정하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철학은 무조건 생명공학을 반대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우리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다. 다른 한편으로 하버마스는 일련의 포스트휴머니스트들처럼 기존의 인간 이해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생명공학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진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을 이제 진화의 주체로 올려놓음으로써 생명공학은 어떤 윤리적 문제를 낳는가? 하버마스는 이 문제를 대체로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한다.

첫째,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불확실성은 근본적으로 자연스럽게‘태어난 것’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진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인간의 체외수정을 허용한다면, 왜 우리는 인간의배아 연구를 금지해야 하는가? 생명공학에 대한 도덕적 과잉반응을 비판하는 과학자들은 지금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25년전 체외수정도 반대했다고 꼬집는다. 생명공학의 발전을 막을 도덕적 댐은 이미 붕괴된 것이다.

둘째, 하버마스는 태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해 모든 시민들이 수용할 수있는 중립적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수정란에도 도덕적 주체에 주어지는 인격과 인간의 존엄성을 부여한다면, 생명공학 자체는 어떤 이유에서도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하버마스가 절대적 생명권을 주장하지 않고서도 생명공학의 도덕적 한계를 설정할 수 있는 근거를 찾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셋째, 하버마스는 생명의 존엄과는 다른 ‘인간다운 삶의 존엄’을 도입함으로써 “우리는 생명공학 시대에도 ‘자신의 삶의 창조적 주체’로서 실존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만약 우리가 생명공학 시대에도 서로를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인격으로 인정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침해하는 기술행위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버마스는 치료의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소극적 우생학’과 치료의 논리를 넘어서 유전자의 특성을 변형시키는 ‘적극적 우생학’을 구별하면서, 소극적 우생학은 허용될 수 있지만 유전자 조작에 바탕을 둔 적극적 우생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물론, 하버마스의 이러한 시도가 우리의 불안을 말끔하게 씻어주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철학적 성찰이 다음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게 만든다면 그것으로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존재이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태어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만들어지기를 바라는가?”(이진우 계명대교수·철학)

07. 08. 16.

P.S. 국역본의 제목이 <인간 본성의 미래> 대신에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가 된 것은 읽기에 좀 거북하다(영역본의 제목은 'The Future of Human Nature'). 'Human Nature'를 일부러 '인간적 자연'이라고 옮기는 철학자들도 있지만 본인들 생각만큼 의미심장한 건 아니며 오히려 이해를 방해한다. '인간이라는 자연'이라고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식이라면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는 <인간 자연에 대하여>가 될 터인데 이게 얼마나 어색한 번역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해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런, 본문을 보니 '인간 자연의 도덕화' '인간 자연의 기술화'가 난무하는군. 그냥 자연스럽게 '본성'이라고 해두면 편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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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7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7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7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8-18 01:15   좋아요 0 | URL
'업자'들은 다 아는 얘기지만 역시나 고유명사가 문젭니다.^^; 제가 알량하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즐거운 일이지요.^^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1915-1980)의 '데뷔작' <글쓰기의 영도>(동문선, 2007)가 번역/출간됐다(바르트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880102 참조). 예전에 한번 <영도의 에크리뛰르>(동인, 1994)라고 <기호학의 원리>과 합본으로 번역된 바 있는데, '무참한' 번역으로 기억된다(다행히/당연히 절판됐다). 이번에 나온 책은 본문 215쪽으로 생각보다는 두꺼운데, '역자후기'를 보니 1961년부터 1972년 사이에 씌어진 여덟 편의 비평문이 제3부로 묶여서 원래의 1953년판에 추가됐다. 판권란에는 1953년판이 기재돼 있지만 실상은 1972년 개정판을 옮긴 것이다.

내가 책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아마도 김현의 <프랑스 비평사>(현대편)에서였을 듯한데, 김현은 롤랑 바르트에 관한 장에서 <잠재태의 기술>이라고 옮겼었다. 수잔 손택의 서문이 붙어 있는 112쪽의 얇은 영역본(3부가 들어 있던가?)을 읽은 건 대학원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로부터 이제 거의 15년만에 제대로 된 한국어본을 읽게 된다니 감회가 없지 않다(동문선의 책들이 그래도 외양은 아주 번듯하지 않은가?). 

알라딘에는 아직 입고되지 않은 듯한 <글쓰기의 영도>는 "바르트가 내놓은 최초의 평론집으로 그의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알리는 신호탄"(217쪽)이다. 관련리뷰가 혹 있나 싶어 검색해 보다가 발견한 건 안 그래도 요즘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진중권의 '아듀' 칼럼이다.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연재를 끝마치면서 쓴 것인데 나도 읽은 기억이 난다. 거의 폐허처럼도 보이는 작업실의 프란시스 베이컨 사진과 함께 다시 읽어본다. 칼럼에서 그가 말하는 '글쓰기의 영도'가 바로 바르트의 표현을 빌어온 것이다(바르트와는 다른 의미로 쓰고 있지만).

 씨네21(06. 06. 09)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글쓰기의 영도(零度)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중에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쏟아내다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사내의 그림이 있다. 뱃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토하고 토하다가 더 토해낼 게 없어 괴로워하는 것처럼, 글쟁이도 요동하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현기증과 역겨움에 글을 토하고 토하다가 더 토해낼 게 없어 괴로울 때가 있다. 그때는 입으로 신체 안의 모든 기관을 다 토해내고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싶어진다.

본의 아니게 논객 노릇을 한 지도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우연한 계기에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그게 아예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토해놓을 지면을 갖고 있다는 게 어찌보면 특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지면을 채우려면 세상의 거의 모든 일에 ‘견해’를 가져야 한다. 그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다. 때로는 아무 견해없이 그냥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살고 싶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언급하다보면 나중에는 아직 언급하지 않은 주제를 찾기 힘들어진다. 똑같은 글을 소재만 바꿔 고쳐 쓰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언젠가는 동일한 글쓰기가 반복되는 지루한 동일자의 무한증식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세상이 제아무리 다양하다 하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솔로몬의 격언처럼 세상이라는 것만큼 동일한 일이 지겹게 반복되는 지루한 드라마도 없다.

하루라도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이도 있다고 하나, 사실 미디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피부의 두께가 다르듯이, 사람마다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노출의 적정량이 있다. 자외선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피부가 상하고 마는 것처럼, 견딜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미디어에 노출될 때 존재 역시 화상을 입어 상처에 물파스를 바른 듯한 고통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논객은 글을 칼처럼 사용한다. 그러다보면 온몸으로 적대자들이 휘두르는 보복의 칼집을 받아야 한다. 비난도 적당히 받으면 기분이 나쁘지만, 과도하게 받으면 무감해지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 비난을 받는 것 자체가 쾌감으로 바뀌어버린다. “내가 비난을 받는 것은 뭔가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말했다는 증거다.” 증상이 이쯤 되면 하루라도 욕을 안 먹으면 혀에 가시가 돋는 변태가 된다.

논객의 발언은 기술적(descriptive)이 아니라 규범적(normative)이다. 윤리학에 ‘공약의 부담’이라는 게 있어, 규범적 발언을 하는 이는 그 말을 지킬 책임을 먼저 자신에게 지워야 한다. “약속을 적게 할수록 더 많이 지킬 수 있다”는 과학의 윤리는 동시에 논객의 윤리. 하지만 논객은 과학자보다 불행하여 글을 쓸 때마다 약속을 해야 한다. 말과 글을 쏟아낼수록 글쟁이는 제 말로 제 몸을 옭아매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숨이 막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흔히 독자는 글을 보고 필자의 인격을 추정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인간과 삶을 사는 인간은 다르다. 글쓸 때의 인간은 ‘이상적 주체’가 되지만, 원고료를 챙기는 글쟁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주체’다(종종 글쓴이를 직접 보고 나서 독자들이 글에서 얻은 아우라가 무너지는 체험을 하는 건 이 때문이다).

글쟁이는 자신의 비루한 현실과 글을 쓸 때에 연기하는 이상의 괴리에 역겨움을 느끼다가 결국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바로 이때가 더이상 글을 쓰는 게 불가능해지는 글쓰기의 영도(零度). 지금 그 제로 디그리에 와 있다. 그동안 이곳저곳에 셀 수 없이 많은 말과 글을 뿌리며 살아왔다. 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다 토해놓고, 더 토할 게 없어 위산까지 토해놓고, 그것도 모자라 몸 안의 기관을 증발시켜 스프레이처럼 입으로 뿜어내어 마침내 존재를 허공으로 날려버린 느낌이다.

이것이 내가 이 지면을 개인적 넋두리로 장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씨네21>의 독자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이제는 규점을 말하고 지키는 논객이 아니라, 그냥 사실을 기술하는 기록자나 허구를 늘어놓는 이야기꾼이고 싶다.(진중권/ 문화평론가)

07. 08. 16.

P.S. 1년만에 다시 논객의 자리로 돌아온 걸 보면 "사실을 기술하는 기록자나 허구를 늘어놓는 이야기꾼"의 자리를 지키는 게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곁가지 이야기이고 바르트의 책들이나 한데 모아놓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의 표현을 빌자면 '텍스트의 즐거움'에 스스로를 온전히 내맡기면서 말이다. 실상은 그런 게 책읽기/글쓰기의 유토피아이다. 유-토피아, 이 세상엔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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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16 20:38   좋아요 0 | URL
제목보고 진중권의 칼럼을 가져오셨구나 했습니다. :) 저도 이 칼럼 읽었죠. 덕분에 저 책까지 관심이 가는군요.

로쟈 2007-08-16 20:45   좋아요 0 | URL
바르트의 책과는 무관한 칼럼이지만, '낚시'는 되겠군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8-18 11:23   좋아요 0 | URL
역시 동문선인가 싶기도 하고, 왜 하필 동문선인가 싶기도 하네요.
번역은 누가했을려나... 이 책 번역은 마음에 들길 바라야겠네요.

로쟈 2007-08-19 16:58   좋아요 0 | URL
바르트는 동문선에서 전담하고 있고, 번역 또한 김웅권씨 전담입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예전에 이대대학원생들이 번역한 거에 비하면 양반인 면도 있습니다...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의미가 증폭되고 있는 영화 <디워> 신드롬에 관한 좌담기사를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영화이지만(나는 극장에서건 TV에서건 심형래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고, 더불어 '괴수'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디워 현상' 혹은 '디워 신드롬'은 올해의 문화사회학 주제가 될 만하다(관객 천만을 돌파한다면 문제는 좀더 '심각'해진다. 이 경우는 관객층의 분포에 대한 데이터가 요구된다. 아무래도 <디워>는 '방학특선'이란 성격이 강하기에). 굳이 페이퍼로 '기록'해두는 이유이다. 아래 좌담 내용 중 개인적으로는 "<디워>를 굳이 비평적 입장에서 접근할 필요는 없다. 그럴 경우 얻는 것도 적고…. 반면 산업적으로 접근할 경우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의견에 동감한다. 더불어 "<디 워> 신드롬은 심형래 감독이 건드린 대중 심리, 영화 감상의 주체로 나서고 싶다는 대중의 욕구가 결합한 현상"이라는 진단에도. 오르테가 이 가세트라면 '대중의 반역'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물론 그 반역은 이제 '용가리에서 이무기로'만큼 버전-업됐다. 그런 의미에서도 '디워'는 징후적이다...

한국일보(07. 08. 16) '디워' 관객만큼 논란도 폭발… 영화평론가의 이유 찾기

심형래(49) 감독의 <디워>가 역대 한국영화 흥행 ‘톱 10’에 진입했다. 배급사 쇼박스에 따르면 14일까지 총 613만 8,000여명이 <디워>를 관람, <투사부일체>(610만)의 10위 자리를 빼앗았다. 15일 광복절과 뒤이은 주말을 감안하면 <디워>는 이번주 <쉬리>의 기록(9위ㆍ620만)까지 넘으며 1,000만 관객을 향해 맹렬히 돌진할 것 같다.

<디워>의 눈부신 흥행질주 이면에서는 논란도 뜨겁다. 과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괴물>의 흥행을 두고도 충무로 안팎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그러나 <디워>가 생산하는 논란은 차원이 다르다. 네티즌 대 평론가, 인터넷 토론공간 대 기존 언론매체, 심형래 감독 대 충무로라는 중층적인 전선을 형성하며 하나의 ‘현상’을 낳고 있다. 한쪽에서는 사이버 테러 수준의 막말이 분출되고, 다른 편에서는 부르디외와 그리스 희곡의 이론까지 동원된다.

괴수가 등장하는 SF오락영화 한편이 이처럼 커다란 담론의 원천이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화평론가 전찬일(46ㆍ숙명여대 겸염교수), 오동진(43ㆍ동의대 초빙교수), 심영섭(41ㆍ대구사이버대 교수) 씨가 모여 <디워> 신드롬의 겉과 속을 분석해 보았다.(진행= 이대현 문화대기자)

좌담회에 참석한 평론가들은 "<디 워> 신드롬은 심형래 감독이 건드린 대중 심리, 영화 감상의 주체로 나서고 싶다는 대중의 욕구가 결합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대중은 왜 <디워>의 사수대가 됐는가
<디워>에 대해 대중들이 보이는 반응은 ‘열광’보다는 ‘보호심리’에 가깝다. 과거에도 <인디펜던스 데이> <투모로우> <고질라>처럼 평단의 혹평을 받고도 많은 관객이 든 영화가 있었다. 그러나 <디워>에 대한 반응은 유난스러울 정도로 뜨겁고 감정적이다.

심영섭= 이 영화의 흥행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승자가 모든 것을 갖고, 대중도 그런 승자에 환호한다. 미식축구를 봐도 점수를 딴 선수에게 공을 한번 더 찰 기회를 준다. 반면 한국사람들은 패자에 애착과 동질감을 느낀다. 씨름경기에도 ‘패자부활전’이라는 게 있다. 진 사람에게 떡 하나라도 주고 싶은 무의식이랄까. 심형래 감독은 그런 대중의 심리를 건드렸다. 심형래는 꼴찌 인생이라고, 나보다 나을 게 없는 패자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일등이 된 거다. 그래서 장하고 대견한 거다. 영화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그런 잠재된 대중심리를 격발시켰다.

전찬일= 나는 다르게 본다. 심형래 감독이 꼴찌였고 패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다른 신화고 이데올로기다. 한국 연예 역사에서, 가요계에 조용필이 있었다면 코미디계에 심형래가 있었다. 누구보다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런데도 TV속 바보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약자로 인식됐고,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다. 대중의 무의식 속의 심형래는, 심형래가 아니라 아직 영구다. 그걸 이용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심형래 감독은 심할 정도로 악용하고 있다. 이미 <디워>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할 지경이 돼 버린 배경에는 분명 그런 이미지 조작의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다.

오동진= 언제부턴가 대중이 영화산업의 주류에서 밀려났다는 피해의식이 있었다. 누구보다 한국영화를 사랑했고, 영화산업이 성장할 수 있게 힘을 준 것이 관객이다. 하지만 평론가와 영화 담당 기자들에 의해 무식한 대중, 즉 꼴찌로 밀려나 버린 것이다. 여기에 대한 반감이 <디워>라는 영화에서 표출된 것이다. 가혹할 정도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관객 600만명까지 가면서, 나의 정서적 취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픈 욕구가 생긴 것이다.

<디워>의 한계와 가능성
비록 원치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영화적 담론을 생산하는 주체들에게 <디워>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가 돼 버렸다. ‘심형래 대 충무로’라는 갈등의 실체, 애국주의 마케팅, 유사 할리우드(카피우드) 전략 등이 모두 도마에 오른다. 그런 가운데 정작 주목받지 못하는, 혹은 애써 피해가는 주제는 영화로서의 <디워>의 가치다.

= 한국 관객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스토리다. 이 원칙은 모든 영화에 적용됐으나 <디워>만 제외된다. 다른 영화는 볼 만한 부분이 있어도 스토리가 약하면 깎아내렸는데, 유독 이 영화만 다른 부분으로 스토리의 허약함을 덮고 있다. 이것이 언론매체를 이용하는 심형래 감독의 파워다. 다른 감독들은 절대 하지 않는, 눈물 마케팅 전략을 썼다. 같은 개그맨 출신이라도 이경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영화는 신파가 아닌데, 본인은 신파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게 먹혔다.

= 모두들 ‘특수효과는 뛰어나다’라고 말하고 끝나는데, 특수효과는 사실 시각적 만족을 위한 도구다. 이 영화는 시각적 스펙터클을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제외하고도 이 영화가 로우틴(10대 초반)에 먹혀 드는 이유는 영웅신화다. <용가리>와 <괴물>은 한강에서 괴물이 나오지만, <디워>는 미국이 배경이다. 그런데 그것을 물리치는 것은 전생에 한국인이었던 주인공이다. 엉성하고 감동을 주지는 못하지만, 호기심을 줄 수 있는 이야기다.

= <디워>를 굳이 비평적 입장에서 접근할 필요는 없다. 그럴 경우 얻는 것도 적고…. 반면 산업적으로 접근할 경우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다른 영화 얘기지만, <꽃미남 연쇄 테러사건>이라는 영화가 나왔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 영화나, 또 <디워> 같은 영화는 영화산업에서 일정한 영역을 차지할 것이라고 본다. <디워>는 비주얼의 스펙트럼만으로 7,000원이라는 돈이 아깝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한국 영화산업과 <디워>
그렇다면 <디워>가 한국영화산업에 미칠 영향은. 그리고 심형래가 앞으로 선택할 길은?

= 한국영화의 위기의 큰 원인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라면, <디워>는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두 편의 영화가 잘 된다고 해서 영화계 전체의 분위기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 투자확대 측면에서는 영화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구아트무비는 영화제작보다는 특수효과에 집중하면 좋을 것 같다. 예컨대 동남아시아 영화제작자들이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을 수출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지 루카스의 ILM(특수효과 전문회사)처럼 아시아의 특수효과 인프라가 되면 어떨까. 다른 영화인들이 SF에 도전할 때 찾게 되는. 하지만 그것이 영화계 전체가 심형래 감독을 도와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왜 봉준호 강우석은 아니고 심형래는 도와줘야 하는가? 그러면 과대망상에 빠질 수도 있다. 다음 작품에서도 심형래라는 이름이 <디워>처럼 먹힐지도 의문이다.

= <디워>는 영화 자체보다 심형래의 인간승리를 보러 극장에 간 관객들이 많다. 심형래 감독의 작품이 계속 성공하려면 콘텐츠가 믿음을 줘야 한다. 제리 브룩하이머처럼, 좋은 제작자가 됐으면 좋겠다.

문화 프로슈머시대의 영화평론
<디워> 논란의 가장 첨예한 전선은 언론과 평단의 혹평과 그것을 반박하는 네티즌(대중)의 목소리다. 대중은 더 이상 평론을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화비평의 방법에도 변화가 모색돼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 관객은 더 이상 영화에 있어서 수용적 입장에 머무르지 않는다. <디워>는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영화를 소비하는 입장이지만, 텍스트의 가치를 평가하고 싶은 강한 욕망과 자신감이 있다.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플랫폼으로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런 자긍심이 기존 평론가들의 권력과 충돌해 이번의 논란이 발생한 것이다. 평론가들이 더 이상 텍스트 자체만을 분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문화적, 산업적 측면에서 다양한 비평을 해야 한다.

= 네티즌과 평론가의 역할이 다른데, 서로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 대중은 비평가를 인정하고 비평가도 대중을 낮춰봐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엔터테이너가 아닌 스페셜리스트의 영화평을 싣는 언론의 자세도 필요하다.

07. 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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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충무로는 왜 "d-war"를 인정하지 않는가..?
    from 깔끄미(입주청소) 2007-08-16 20:51 
    현재 우리나라 영화계는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d-war"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영화비평가들이나 전문가들은 디워를 혹평을 한다. 아니다..이정도 수준이면 혹평의 정도를 떠나서 거의 말살이라는 표...
 
 
수유 2007-08-16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조카가 보자 그래서 보게 되었는데, 관람객들은 가족단위가 있긴 했어도 이전의 용가리 때처럼 초등학생들만 들어온 영화는 아니었구요, 다른 영화들 관객층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어요. 대중이 그의 영화에 반응하는 것은 용가리나 그 외 심형래의 괴수영화들과는 확 달라진 CG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편견과 선입견이 작용할 수 있는 평단의 잣대로 그를 평가하지 말라는 대중들의 욕구가 드러난 것 같아요. 위의 오동진 교수의 어떤 스페셜리스트로 보자는 말과도 연결이 되는데 그런 암묵적 동의가 대중들에게 있었던 것 같아요, 신지식인 선정에 관련된 뒤늦은 사회시선도 그랬고.. 그것이 정치적이었거나 우둔한 지도자의 즉흥이라든가..또는 정당하거나 옳거나 비판을 받아야 한다거나 하는 문제와는 다르게 말이죠..여하튼 영화자체의 완결성 같은 건 대중에겐 그리 크게 어필하지 않았다는 점, 애초부터 대중은 심형래에게 그런 기대는 안했을 수도 있어요.. 그게 평단과 대중의 갭 일수도 있지만서두...어린조카도 내용은 좀 이상하지만^^ 그래픽은 좋았고 괜찮았어요 라고 말하더군요^^
영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군데군데 짧은 박수도 있었고.^^

로쟈 2007-08-16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여름방학에 남녀노소 같이 볼 영화가 별로 없기도 하구요. 그나저나 오늘따라 갑자기 서재 방문객이 많아진 게 아무래도 '디워' 탓인가 봅니다. 말로만 신드롬이 아니네요.^^;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고 잠시 기사들을 검색해본다. 밖은 또 비다. 장마가 지나간 건지 아니면 아직도 장마인 것인지 헷갈린다(아마 밖에 내리는 비도 헷갈릴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여름휴가가 없다는 것. 이런 '우기(雨期)'에 휴가를 보내느니 차라리... 그래도 휴가는 있는 게 좋겠다(안 그런가?). 눈에 띄는 기사들도 없어서 최근 한국을 찾았다는 사진작가 데이비드 앨런 하비(1944- )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사진 몇 장 감상하는 것으로 '휴식' 시간을 대신한다... 

 

한겨레(07. 08. 14) "좋은 사진? 피사체와 친해져라”

“나는 항상 처음처럼 일한다. 스스로를 비우고 거울과 창문이 되고자 한다.” ‘현재의 한국’을 찍기 위해 한국에 온 사진작가 데이비드 앨런 하비(64)의 대답은 거리낌이 없다. 37년의 사진 이력에다 세계적인 다큐사진작가 그룹인 매그넘 정회원이란 자신감이 묻어난다.

그의 모토는 일을 즐긴다는 것. “흔히 사진 따로 일 따로인데 나는 좋아하는 사진이 곧 일이어서 즐겁게 일한다.” 그가 사진에 매료된 것은 자신의 특별한 과거와 관련된다. 6살 때 소아마비를 앓으면서 못 걸을 줄 알았다. 바깥세계를 동경하게 된 그는 카메라에서 외부와의 소통방법을 찾았다. 그가 97년 54살 때 정회원이 된 매그넘은 그에게 명성이나 트로피가 아니다. “매그넘은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서 참 좋다.” 미주리대 저널리즘 스쿨 졸업 뒤 캔사스의 <토피카 캐피탈 저널>을 시작으로 여러 신문사에서 일을 했는데, 그는 “신문사 일이라는 게 하고싶은 일이 아니라 주어진 일”이었다고 말했다.

86년 프리랜서가 되기 전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궁합이 가장 잘 맞았다. 직원일 때 30꼭지, 프리랜서일인 10꼭지 등 모두 40꼭지의 기사를 실어 가장 많은 기사를 실은 축에 속한다. 체사피크 어부들의 작은 섬인 탕기에 섬에 관한 기사를 시작으로 프랑스의 10대, 베를린 장벽, 마야문명, 베트남, 미국 원주민, 멕시코와 나폴리 등 전세계에 걸친 기사를 썼고 79년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미 국립공원 특별판의 총책임을 맡기도 했다.

“사진작업은 반드시 친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는 갱들의 삶을 취재한 경험을 얘기했다. “그들은 삶의 반을 감옥에서 지낼 만큼 거칠다. 이웃한테도 무서운 존재다. 하지만 2년동안 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친구가 되어 전시회를 열 때 그들은 손님으로 와서 랩 음악을 연주해 주었다. 그들은 시인이기도 해서 사진집에는 그들의 시가 들어갔다.”

그가 ‘현재의 한국’에서 맡은 부분은 ‘젊은이와 그들의 문화’. 홍익대, 명동, 코엑스, 종로, 대학로 등을 중심으로 해서 확장해나갈 생각이다. 60대 노인이 젊은이 문화를 잘 포착해 낼까. “젊은이는 에너지가 충만하고 상승욕구가 강하다. 나 역시 그렇다.” 비교적 짧은 20일동안 가능할까.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그동안 이곳 관계자와 지속적인 접촉을 했고 작년에 한 힙합 작업의 결과가 좋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도 본다. 문제는 교감인데, 아는 사람과의 교제와 나의 본능이 교감을 가능하게 하리라 본다.” 그는 낯선 주제에 부닥쳤지만 늘 성공했다면서 스스로도 그게 미스테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블로그에 부지런히 사진과 글을 올리고 그것을 통해 각국의 젊은이들과 교유하고 있다. 또 입국하기 전 한국의 지인을 통해 각종 정보를 입수해둔 상태였다.

인터뷰 머리에서 “무엇이든 물어보라”, 중간중간에 “좋은 질문이다”라고 말하는 모양이 좋은 선생님을 연상시켰다. 알고보니 그는 매그넘 교육부문 책임자였다. 가끔 대학강단에 서기도 하고 오랫동안 여러 워크숍을 진행한 바 있다. 그는 즐기면서 일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에 들어가면 그냥 열중하는 게 아니라 전보다 더, 다른 사람보다 더 열중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말할 꺼리를 갖지 않으면 의미있는 발언을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사진이 그렇게 좋다면 애지중지하는 사진기와 아내가 물에 빠지면 무엇부터 건질까. 파안대소 뒤에는 역시 정답. “가족이 최우선이다. 아이가 둘인데, 그들이 어려서는 일하는데 데리고 다녔다. ‘쿠바’를 주제로 찍었을 때는 영화를 하는 아들과 함께 일했다.”(임종업 선임기자)

07. 0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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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8-16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좋은 사진인데요.. 감정적으로 끌립니다..

로쟈 2007-08-16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바로 보이는) 해변가 사진은 저도 눈에 익습니다...

수유 2007-08-16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렇죠? 발레를 배우는 소녀들과 노란 하늘 밑으로 땅에 코를 박고 걷는 개의 사진도 참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