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주저리 적다가 또 날려먹었다(빌어먹을, 알라딘! 잠시의 틈도 안 주는구나!). 그냥 줄여쓴다. 이번주 북리뷰들을 대충 훑어본 결과 별로 눈에 띄는 책이 없더라는 것. 그래서 고맙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다는 것. 시인이자 철학도인 진은영씨의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그린비, 2007)에 대한 리뷰 정도를 챙겨둔다는 것. 너무 식상한 제목이긴 한데(이젠 '차이'란 말도 지겹다!), "니체 철학을 주제로, 용수와 들뢰즈를 넘나들며 보여주는 저자의 독법(讀法)은 한 문장, 다음 글귀에 눈이 저절로 갈만큼 매혹적이다"란 리뷰는 '유혹적'이라서... 

한겨레(07. 09. 08) 현대 차이철학의 허무주의를 극복하라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관문이다. 그를 통과해야 현대철학의 지평이 제대로 열린다. 진은영(37)씨는 니체 철학 전공자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그린비 펴냄·1만5900원)은 그가 모교인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을 갈무리해 펴낸 책이다. 니체 철학의 함의를 풍성하게 담은 그의 책을 사이에 놓고 한겨레신문사 자료실에서 그와 만났다.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차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는 것입니다. 이 성과는 특히 하이데거·바타유·푸코·데리다·들뢰즈 같은 일군의 탈근대 철학자들이 이루어낸 것입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들을 모두 니체의 후계자로 지목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니체 철학을 베이스캠프로 사용해 현대철학이라는 산을 등정했다는 것이죠.”

그는 현대철학의 출발점에 니체 철학이 있는 이상, 니체를 공부할 이유는 분명하다고 말했다. “탈근대 철학에 도입된 차이 개념을 사유하고 차이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작업은 니체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통해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철학이 ‘차이’ 개념에 주목하는 것은 근대 철학의 폐해를 극복할 길이 거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근대 철학이란 요약하자면, 동일성의 철학이다. 하나의 보편적 기준을 상정하고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거기에 폭력적으로 복속시키거나 복속되지 않으면 배제하고 추방해버리는 철학이 동일성의 철학이다. 이 철학의 폭력성을 극복하자는 것이 탈근대 철학이고, 그때 탈근대 철학이 구사하는 가장 중요한 전략이 ‘차이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니체는 말하자면, 차이의 철학으로 가는 직행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이 니힐리즘(허무주의), 힘에의 의지(권력의지), 영원회귀,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차이의 철학’이다. 이 가운데 니힐리즘은 니체가 평생을 두고 싸운 사유의 주제였다. “니체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목표는 ‘니힐리즘의 자기극복’이었습니다.” 왜 니힐리즘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니체는 자기 시대가 니힐리즘에 철저하게 감염돼 있다고 보았다.

니체가 니힐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탄식하는 단순한 허무의식이 아니라, 현실의 세계 자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현실 너머의 ‘진짜 세계’, ‘초월적 본질’을 찾는 모든 본질주의적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상계 너머의 영원한 이데아(본체계)를 찾는 플라톤주의와 그것의 쌍둥이인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현세 부정의 관념으로서 전통적 니힐리즘이다. 신이 죽어버림으로써 이 전통의 니힐리즘은 끝났지만 그것을 대체해 새로운 신이 등장했다고 니체는 말한다. 현실 세계를 관통하는 어떤 법칙을 찾아내 거기에 매달리거나 자본·화폐·국가 같은 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이 니체가 인식한 현대의 니힐리즘이다. 니체는 이 니힐리즘을 극복해야 할 질병이라고 규정했다.

“그 질병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니체가 발견한 개념이 ‘힘에의 의지’입니다.” ‘힘에의 의지’를 니체의 말로 풀면 이렇다. “이 세계는 곧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힘이며, 힘들과 힘의 파동의 놀이로서 하나이자 동시에 다수이고, 자기 안에서 휘몰아치며 밀려드는 힘들의 바다이며, 영원히 변화하며 영원히 되돌아오고, 어떤 포만이나 권태나 피로도 모르는 생성이다. 영원한 자기창조와 영원한 자기파괴의 세계가 ‘힘에의 의지’다.”

이 힘들의 흐름은 영원히 되돌아와 영원히 되풀이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니체는 ‘영원회귀’라고 말한다. 그때의 영원회귀는 똑같은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된다는 뜻이 아니다. 영원회귀는 차이의 반복이다. 다시 말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이다. 그리하여 삶은 끝없는 변화와 생성 속에서 반복하되 항상 차이나는 반복이 된다. 삶과 세계는 차이의 바다, 차이의 축제가 된다. “그런 식으로 니체는 차이를 새롭게 사유했고 적극적으로 끌어안았습니다.”

근대의 동일성 철학을 돌파하는 차이의 철학은 바로 여기에서 성립했다. “그러나 이 차이의 철학은 차이라는 개념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유행하는 탈근대적 차이철학에도 동일성 철학의 폐해가 끼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차이를 불변의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차이를 ‘승인’하는 형태의 철학에서 그런 경향이 발견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걸로 끝내버리는 것인데, 그래서는 차이와 차이의 진정한 만남도 없고 그 만남을 통한 또다른 차이의 생성도 없다.

이런 ‘차이 승인’의 철학을 그는 ‘탈근대적 니힐리즘’이라고 부른다. 이 현대적 니힐리즘을 극복하려면 차이·다름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사유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차이를 즐기는 것,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 생산 활동’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것이 그가 말하는 진정한 차이의 철학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 생산 철학’도 오늘날 자본주의적 지배 전략으로 전용되고 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끝없이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면서 ‘차이’와 ‘다름’의 판매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지금 자본주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차이의 철학은 거기에 합당한 정치학과 윤리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책은 차이의 철학이 자본의 논리에 빠져들지 않고 자본의 포획욕망에 저항해 그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소수 정치학’을 내세운다. 지배의지로 뭉친 다수성의 논리와 맞서 싸워 다름의 풍요로움을 지켜내고 또 그 풍요로움을 창조하는 소수성의 정치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차이의 철학’은 니힐리즘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글 고명섭 기자)

문화일보(07. 09. 07) 소멸은 곧 생성… 삶을 끝없이 긍정하라 !

이 책의 저자를 처음 접한 것은 시집을 통해서다. 지난 2003년 출간된 저자의 첫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보고, 이렇게 기사 첫머리를 풀었다.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은 항상 가슴을 설레게 한다.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같은 새로운 세계가 한, 두편의 ‘우연’에 머무르지 않고 시집 전반을 관통할 때 설렘은 기쁨과 탄성으로 연결된다.”

이 책 역시 설렘을 넘어 기쁨과 탄성을 자아낸다. 더욱이 난해하기 그지없는 니체 철학을 주제로, 용수와 들뢰즈를 넘나들며 보여주는 저자의 독법(讀法)은 한 문장, 다음 글귀에 눈이 저절로 갈만큼 매혹적이다. 빼어난 감수성과 예민한 지성의 결정체를 보는 듯하다.

저자는 니체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딴 소장 철학자다. 결코 호락호락한 책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철학에 별 조예가 없는 일반인의 시선까지 잡아끄는 흡인력을 갖고 있다. 조금만 정신차려 읽는다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우선 니힐리즘을 화두로 니체를 푼다. 니힐리즘을 통해 서구 철학사의 지배적 흐름을 형성했던 경향을 규명하려고 했던 니체의 생각을 보여준다. 니체는 ‘불변의 실체’를 상정하는 경향을 니힐리즘의 한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니힐리즘은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먼지 같은 존재로서 하루해를 넘기지 못하고 부스러져 영원히 사라져간다’는 정서다. 따라서 니힐리스트들은 자기 존재의 불안정성을 완화시켜 줄 안정감을 갈구하게 된다. 즉, ‘영원불변한 실체’를 상정함으로써 안정감을 가상적으로 확보하려고 한다. 예컨대 ‘가상계에 대립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차안을 넘어선 피안을, 제1원인으로서의 신을, 자연현상의 배후로서의 법칙 등을 상정’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 같은 시도들이 삶을 병들게 할 뿐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영원불변하는 것에 대한 욕망은 유전(流轉)과 파괴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 두려움을 제거하고 변화 자체를 긍정하며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영원성에 대한 욕망, 안정화되고 고착되려는 욕망은 완전히 사라진다”며 “(영원성에 대한 욕망의 제거를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유전과 파괴가 허무한 소멸이 아니라는 점이 납득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유전과 파괴를 ‘생성(生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성에 대한 긍정만이 유전하고 소멸하는 자연과 삶에서 슬픔과 고통 대신에 평안한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생성이란 무엇인가. “생성은 질적 ‘차이’를 가진 다수의 질료들이 끊임없이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는 과정 그 자체”이며 “다수자들의 차이는 생성을 보장하며 생성의 철학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원리”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가 이 같은 차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근대성의 사유가 다양한 종류의 차이를 절대적인 보편성을 통해 억압함으로써 현실적 차이를 지닌 존재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왔다고 탈근대 철학자들은 파악한다. 따라서 근대성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차이 개념을 철학에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차이 개념은 오늘날 시장이데올로기와 냉소주의의 상투어가 돼 버렸다. “새로이 등장한 탈근대적 지배전략은 근대성의 산물인 국가, 민족, 인종 등의 배타적 경계를 강화하거나 실체화하기보다는 그것을 해체”하며 오히려 “차이들이나 복수성을 강조, 상품생산과 시장형성의 논리에 이용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이의 상대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차이를 고정화해 실체화함으로써 서로 다른 존재자들간의 어떠한 관여나 상호 작용도 불가능하게” 만들며 “이처럼 차이를 고정화해 실체화하는 오늘날의 흐름을 ‘탈근대적 니힐리즘’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같은 탈근대적 니힐리즘에 맞서기 위해 “인도의 불교 철학자 용수,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들뢰즈와 더불어 니체의 통찰이 아로새겨진 사유의 긴 회랑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굳이 용수와 들뢰즈를 통해 니체를 보려 하는 것일까. 니체의 사유를 한층 더 발전시켜 탈근대적 니힐리즘에 맞서는 새로운 존재론이자 정치학을 만들기 위해서다. 저자는 용수와 들뢰즈의 입을 빌려 ‘원인이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는 상호의존성’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풋사과를 먹고 배탈이 났다고 하자. 원인(풋사과) 때문에 결과(배탈)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만일 풋사과를 먹은 뒤 장을 보완해주는 다른 음식을 먹어서 배탈이 나지 않았다면 더 이상 풋사과는 배탈의 원인이 아니라 소화라는 결과의 원인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과거 사건을 구성하는 원인들의 배치에 현재 발생하는 새로운 원인들이 참여함으로써 전혀 다른 새로운 사건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재의 순간은 언제나 생성의 순간이며, 과거 사건의 배치 속에 원인들을 새로운 사건의 원인으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숙명론을 극복하고, 현재를 무한히 긍정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용수와 들뢰즈를 경유해 해석한 니체는 저자 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하다.(김영번기자)

07. 09. 08.

P.S. 여기도 간단히 적는다. 참고문헌에 대해서 세 문단쯤 적었었는데(참고문헌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나의 '취미'다), 오기된 부분만 지적한다. 데리다의 <에쁘롱>(동문선, 1998)의 역자들이 '김다운, 황순회'로 잘못 기재됐다. '김다은, 황순희'가 맞다. 그리고 알랭 르노의 <개인>(동문선, 2002)의 원저가 잘못 기재됐다. 'L’ère de l’individu. Contribution à une histoire de la subjectivité'(1989)로 돼 있는데, 국역본의 부제가 '주체철학에 관한 고찰'이니까 원저는 'L’individu. Remarques sur la philosophie du sujet'(1995)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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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9-07 21:30   좋아요 0 | URL
허 이분 칸트 전공자 아니었나요? 언제 갈아타셨지? (물론 칸트에 대한 개설서에서 니체, 들뢰즈에 대한 애정을 듬뿍 드러내긴 하더군요.)

로쟈 2007-09-07 22:11   좋아요 0 | URL
제가 알기엔 원래 니체 전공자인데요...

자꾸때리다 2007-09-08 07:33   좋아요 0 | URL
리라이팅 시리즈로 처음에 칸트 개설서를 내서 칸트 전공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요?ㅋ

로쟈 2007-09-08 20:50   좋아요 0 | URL
석박사가 모두 니체입니다...

nada 2007-09-08 14:09   좋아요 0 | URL
이젠 차이란 말도 지겹다, 는 구절에서 키득거렸어요.^^
고병권 씨 책하고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동어반복일 거 같기도 하공.

로쟈 2007-09-08 20:52   좋아요 0 | URL
제가 그것까지 염두에 둔 건 아니었는데요.^^; 여하튼 '차이의 철학'이 거꾸로 유행어가 되다보니...

yoonta 2007-09-08 17:47   좋아요 0 | URL
기사에 있네요. 저 책이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이라고..

로쟈 2007-09-08 20:51   좋아요 0 | URL
혹시 석사는 칸트를 했는지 확인해보니까 모두 니체입니다.
 

오랜만에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을 다시 집어들었다(앞으로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고 적겠다). 지젝에 관한 짤막한 글들을 쓰면서 그의 '기원'에 대한 관심이 다시 돋았기 때문인데, 부분적으로 읽은 것까지 포함하면 세번째 읽기 정도 된다. 지젝의 생각과 어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탓인지 책은 수월하게 읽힌다. 그런 수월성에 한몫하고 있는 건 물론 깔끔한 번역이다. 가끔씩 실족하지만 않았다면 모범이 될 만한 번역이었다. 조금 손을 봐서 개정판을 내는 건 어떨까 싶다(<삐딱하게 보기>도 그런 경우이다).

지젝 입문서들도 몇 권 나와 있지만 내 생각에 지젝 읽기의 첩경은 그의 저작 한 권을 꼼꼼하게 완독하는 것이다. 비교적 읽을 만한 번역서 한 권을 가급적이면 원서와 대조해가면서 고시서적 읽듯이 완독한다면 나머지 책들을 읽어내는 건 그닥 어렵지 않아 보인다(나름대로 '지젝이고 라캉대기' 시작할 수 있다). 지젝 읽기의 장벽이라면 그 한 권 읽어내기다.

 

 

 

 

그러한 읽기의 대상으로 예전에 <삐딱하게 보기>나 <혁명이 다가온다> 등을 제시하고 나름대로 운을 뗀 적은 있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803797, http://blog.aladin.co.kr/mramor/1262413, http://blog.aladin.co.kr/mramor/1010978 등의 페이퍼 참조) 지젝으로 입에 풀칠하는 처지가 아닌지라 매듭은 짓지 못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읽기'는 내가 '짓지 못할' 또다른 매듭이다.

내가 갖고 있는 국역본은 초판 1쇄이어서 나중에 첨부된 참고문헌이 빠져 있다. 복사한 원서를 참조할 수밖에 없는데, 번역본이나 원서나 페이지가 튿어져 나가는 등 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 그나마 상태가 가장 나은 건 부분부분만 참조했던 러시아어본이다(내가 은근히 자랑스러워 하는 책이다). 대략 그런 연장들을 들고서 지젝의 광맥을 캐보고자 한다.   

알다시피 영어로 씌어진 이 처녀작의 서문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썼다. 하지만 이 서문은 당연히 본문보다 나중에 씌어진 것이며 읽는 순서도 그에 따르면 된다고 본다. 처음엔 그냥 대충 읽고 넘어가면 되겠다. 이어지는 건 이후의 지젝의 책들에선 잘 보기 힘든 '감사의 말'이다. 지젝은 이렇게 적었다.

"필자는 파리 8대학의 세미나를 통해서 라캉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던 자크-알랭 밀레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라캉의 개념적인 장치를 이데올로기 분석의 도구로서 활용하도록 방향을 제시해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에게도 고마움을 표한다."(17쪽)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대학에서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젝은 당국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자리를 못 잡고 있다가 밀레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정신분석학 수련을 받게 된다(간단한 사연은 http://blog.aladin.co.kr/mramor/424267, http://blog.aladin.co.kr/mramor/677684 참조). 기억에 그가 불어로 쓴 최초의 단독 저작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 헤겔이 지나간다>(1988)는 밀레의 지도하에 받은 그의 정신분석학 박사학위 논문이다(<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특이하게도 불어본이 없는 듯하다).

라클라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스타브라카키스의 <라캉과 정치>가 번역된 걸 계기로 쓴 '라클라우-라캉-지젝'(http://blog.aladin.co.kr/mramor/1033614)을 참고하시길. 지젝이 직접적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있는 것은 라클라우/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인데(국역본은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판권 문제가 어떻게 돼 있는지 몰라도 절판된 국역본이 재출간되었으면 좋겠다. 라클라우를 위해서나 지젝을 위해서나(그리고 물론 그들의 독자들을 위해서나).

안 그래도 어제 부분 복사한 책은 루틀리지에서 나온, 사이먼 크리칠리 등이 편집한 <라클라우: 비판적 독해>(2004)인데, '철학' '민주주의' '헤게모니'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4부는 비판적 독해들에 대한 라클라우의 답변이고 주디스 버틀러와의 서신대담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지젝의 글은 포함돼 있지 않다). 덧붙여 말하면, 버틀러와 라클라우, 그리고 지젝이 공저한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2000)은 도서출판b의 근간 도서이다(올해는 나오는 것인가?). 세 사람의 '화끈한' 논전을 담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배경으로 읽어야 할 책으론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외에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도 필수적이다. 지젝의 서론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책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포스트 구조주의' 논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하버마스의 책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에서 라캉의 이름이 언급될 때는 특이한 사항이 하나 있다. 그의 이름은 고작 다섯 차례 언급되는데, 그것도 항상 다른 이름들과 함께 등장한다."(19쪽)

지젝은 아예 다섯 차례 거명되고 있는 쪽수까지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징후적으로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결국 라캉의 이론은 제 고유의 독립체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그것은 항상 일련의 등가물들 속에서 제시된다. 자신의 진짜 논쟁대상인 푸코를 포함해 바타이유, 데리다 등에 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는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왜 유독 라캉과는 직접 대면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 "알튀세르의 이름이 하버마스의 책에선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결론: "따라서 우리의 첫 논제는 오늘날 지성사를 전면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대논쟁인 하버마스와 푸코의 논쟁이 이론적으로 더 심원한 논쟁인 알튀세르와 라캉의 대립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젝이 보기에 '하버마스 vs 푸코'라는 이론적 대립은 '알튀세르 vs 라캉'이란 본원적인 대립에 비하면 가면이자 유사 대립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알튀세르와 라캉의 대립이 일종의 은유적인 대체를 통해 하버마스와 푸코의 대립으로 전환된 것일까?" 지젝은 이 문제가 "네 가지 서로 다른 윤리적 입장과 네 가지 서로 다른 주체개념"의 문제와 연루된 것으로 본다.

"하버마스에겐 단절되지 않은 의사소통의 윤리학, 보편적이고 투명한 상호 주관적인 공동체에 대한 이상이 있다. 따라서 그 이면에 있는 주체개념은 당연히 초월적 반성이라는 고루한 주체의 언어철학적 판본이다. 반면, 푸코와 함께 우리는 보편주의적 윤리학으로부터 돌아서서 일종의 윤리의 미학화에 도달하다.(...) 스스로를 계발하여 주체로서 창출하고 자기만의 독특한 삶의 기술을 발견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푸코는 주체성의 특수한 방식을 구성하는 주변적인 삶의 방식에 매혹되었던 것이다."(19쪽) 

마지막 문장에서 '주변적인 삶의 방식(marginal lifestyles)'은 '주변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이해하는 게 편하다. "예를 들어 사도마조히즘적 세계, 동성애적 세계 등등"인데, 원문이 "the sadomasochistic homosexual universe, for example"이므로 그냥 "예컨대, 사도마조히즘적인 동성애적 세계"라고 하는 게 낫겠다(알려진 바대로 푸코는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다). 지젝이 지목하고 있는 책은 푸코의 대담집 <권력과 지식>(나남, 1991)이다(절판된 책이지만 오역 범벅이라고 하므로 아쉬울 건 전혀 없겠고 다만 재번역돼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는 어떤 푸코를 읽었던 것인지?). 지젝이 참고하고 있는 건 물론 영어본(1984)이다.

"이러한 푸코의 주체개념이 얼마나 엘리트적-휴머니즘적 전통에 부합하고 있는지를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을 가장 그럴싸하게 실현한 것은 내적인 열정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삶 자체를 일종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르네상스의 '전인주의적' 이상이 될 것이다. 푸코의 주체개념은 오히려 고전적인 것이다. 적대적인 힘들을 조화시키는 자기-매개의 힘으로서의 주체, 자기 이미지를 복구함으로써 '쾌락의 사용'을 통제하는 방편으로서의 주체. 결국 하버마스와 푸코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20-21쪽)

 

 

 

 

푸코의 주체개념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참고해볼 수 있는 책은 강의록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이겠다. 그리고 <성의 역사>(나남)와 같은 그의 후기 저작들과 <자기의 테크놀로지>(동문선, 1997) 같은 책들. 특히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미셸 푸코, 혹은 주체의 이론가'(http://blog.aladin.co.kr/mramor/1120854)라고 옮겨놓은 리뷰를 참조하는 게 유익하다.

여하튼 그래서 하버마스와 푸코의 대결구도는 '가짜'라는 것이다. 대신에 "진정한 단절을 도입하는 사람은 바로 알튀세르이다. 그가 분열-간극-오인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인간 조건의 특징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가능하다는 사고는 탁월한 이데올로기적인 발상이라는 논제를 전개할 때, 바로 거기서 진정한 단절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가능하다는 사고는 탁월한 이데올로기적인 발상"이라는 말은 "이데올로기는 끝났다!"는 사고 자체가 이데올로기 중의 이데올로기라는 뜻이다. 여기서 지젝이 지목하고 있는 책은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1965)이다. 국내에서 지난 90년대 중반 알튀세르 '열풍'과 함께 <맑스를 위하여>(백의, 1997)라고 번역/소개된 책이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이다. 국내에서의 알튀세르 수용 또한 프랑스 현지에서의 경로를 밟은 것인지?

지젝의 지적대로, "알튀세르 학파의 갑작스런 소멸엔 뭔가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론적인 패배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알튀세르의 이론엔 곧바로 잊혀져야만 하는, '억압되어야만' 하는 외상적인 중핵이 있는 듯하다."(20쪽) 하다 못해 알튀세르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론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아미앵에서의 주장>)를 지금은 도서관에서나 빌려서 읽어볼 수 있다. 이건 국내에 적지 않은 알튀세리앵들이 있었던 걸 고려하면 기이한 일이다. 혹은, 지젝이 인용하는 셜록 홈즈의 용어를 빌면 '기이한 사건(curious accident)'이다(홈즈의 국역본에서는 '흥미로운 사건'이라고 번역되지 않았을까?). 

"알튀세르는 윤리적인 문제들에 관해 폭넓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폐지나 소외의 영웅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급진적인 윤리적 태도가 그의 저서 전반에 걸쳐 구혀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주체의 폐지'는 'subjective destitution'의 번역이다. 다른 책들에서 주로 '주체의 궁핍'이라고 직역된 표현인데, 말 그대로 '텅 빈' 주체를 떠올리면 된다(아니 그 '비어 있음' 자체가 '주체'이다).

"핵심은 주체효과를 이데올로기적인 오인으로서 산출해내는 구조적인 메커니즘을 폭로해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오인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역사적인 활동의 조건으로서, 역사적인 과정의 작인이라는 역할을 떠맡는 조건으로서 일정한 착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주체는 일정한 오인을 통해서 구성된다. 이데올로기적인 원인을 소환하면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수신자로 '인정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단락(短絡)을, 말하자면 미셀 페쇠가 지적했듯이 반드시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하는, "나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라는 식의 환영을 내포한다."(21-22쪽) 

두번째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the process of ideological interpellation through which the subject 'recognizes' itself as the adressee in the calling up of the ideological cause implies necessarily a certain short circuit". (2쪽) 'interpellation'에 걸리는 관계사절을 빼면 "the process of ideological interpellation necessarily a certain short circuit..."이란 문장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단락(短絡)을 내포한다"는 게 줄거리이다,

문제는 관계사절, 즉 the process of ideological interpellation through which the subject 'recognizes' itself as the adressee in the calling up of the ideological cause"의 번역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원인을 소환하면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수신자로 '인정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 원인'을 주체소환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이데올로기에 의해 우리가 주체로 호명된다는) '호명이론'에서 어떻게 주체가 소환의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 소환의 주체는 당연 '이데올로기'이고 '이데올로기적 명분(ideological cause)'이 아닌가? 다시 옮기면, "주체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명분이 소환(호출)하는 수신자로 '인지'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 호명과정" 정도가 되겠다.

해서 전체를 다시 옮기면, "이런 관점에서라면 주체라는 것 자체는 일정한 오인을 통해서 구성된다. 주체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명분이 소환(호출)하는 수신자로 '인지'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의 호명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단락(短絡),'나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는 식의 환영을 내포하며 이것은  미셸 페쇠가 지적했듯이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한다."

여기서 알튀세르의 제자인 미셸 페쇠(1938-1983)는 '호명이론의 가장 정교한 판본을 제시했던' 철학자로 '호명'되고 있는데(보통은 '담론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지젝이 염두에 둔 책은 <팔리스의 진실(Les vérités la Palice)>(1975)이고 이 책은 <언어, 의미론, 이데올로기(Language, Semantics and Ideology)>(1982)로 영역돼 있다(오래전에 복사해둔 책인데 어디에 있는지는 신만이 아실 듯하다). 

한데, 페쇠와 관련하여 국역본의 이어지는 대목은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하고 있다. 호명이론이 함축하는 단락에 대한 설명이다. ""당신이 프롤레타리인 이상 프롤레타리아로 호명되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없지 않은가?"라는 식의 단락인 것이다. 페쇠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농담을 남긴 막스 브라더스를 언급하며 마르크스를 보충한다. "당신을 보니 엠마누엘 라벨리가 생각나는군요." "하지만 내가 바로 엠마누엘 라벨리요." "그렇다면 당신이 그처럼 보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군요.""(22쪽)

이 대목의 원문은 이렇다: "the short circuit of 'no wonder you were interpellated as proletarian, when you are a proletarian'. Here, Pecheux is supplementing Marxism with the Marx Brothers, whose well-known joke goes: 'You remind me of Emanuel Ravelli.' 'But I am Emanuel Ravelli.' 'Then no wonder you look like him!'(3쪽) 

내가 보기에 역자는 '여기서(Here)'를 '다음과 같은'으로 잘못 옮겼다. 해서 막스 브라더스의 유명한 농담을 페쇠가 직접 '언급'한 것처럼 돼버렸지만 페쇠의 책은 제법 '진지한', 막스 브라더스의 농담이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이는 책이다(지젝이 아니라면 누가 이론서에 막스 브라더스를 끌어오겠는가?). 다만, 페쇠는 호명이론을 설명하며 'no wonder you were interpellated as proletarian, when you are a proletarian'이라고 말했을 뿐이고, 이게 지젝이 보기에는 "마르크스를 막스 브라더스로 보충하는" 듯한,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하는 일이다.     

우리말로는 '마르크스'와 '막스 브라더스'라고 옮기지만 원어는 'Marx'와 'Marx Brothers'여서 그 희극적인/패러디적인 대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체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이들 형제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계 이민자 가계이며 192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누린 코미디언들이다(http://www.youtube.com/watch?v=ycZJZY5uPh0 같은 동영상 참조). 아버지의 이름이 원래 사이먼 매릭스(Simon Marrix)에서 샘 막스(Sam Marx)로 개명되면서 본의 아니게 '막스 브라더스'가 되었다고.

여하튼 요점은 알튀세르-페쇠에게서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한 주체형성은 자기-소외의 과정을 함축하며 이것은 희극적인 효과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러한 알튀세르의 소외의 윤리학에 라캉의 분리의 윤리학을 대비시킨다. 하지만 라캉의 윤리학은 따로 다루어야겠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요컨대,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읽기는 계속 진행될 수 있다. 마음 먹기에 달린 문제이다...

07.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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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9-0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에서 한창 푸코가 유행하던 90년대 초반을 기억해보면, 정말로 "우리는 어떤 푸코를 읽었던가"라는 물음을 다시 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연상으로, 지젝ㅡ그리고 라캉ㅡ에 대해서는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도 잠시 해보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나중에 우리가 지젝ㅡ그리고 라캉ㅡ의 '수용사'를 반추해보게 될 때, 어떤 작가의 말마따나 단순히 '지젝이고 라캉대기'의 시기로 기억될 것인지, 아니면 그 어떤 다른 것으로 기억될 것인지, 그런 잡념들이 바로 저 '생각들'에 해당될 테지요.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로쟈 님의 저 제목('Marx and Marx Brothers')은 시사하고 암시하는 바가 더 크다고 생각되는데요, 저로서는 개인적으로 지젝의 이론적 형상과 그 그림자가, '마르크스'보다는 '마르크스 브러더스'로, '히치콕'보다는 '채플린'으로, 그리고 어쩌면 '라캉'보다는 '알튀세르'라는 레테르로 더 기억되고 논의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은유'의 바람 한 자락 풀어놓게 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외형적으로 '퇴조하여 사라진' 듯이 보이는 '알튀세리앙'들의 계보가 어쩌면 현재 '스피노지스트'들의 모습 안에 '변형'된 형태로 '보전'돼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물론ㅡ이것이 사실이라고 할 때ㅡ이를 이론사적 혹은 이론수용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별개의 것이겠지만요(우리는ㅡ혹은 그들은ㅡ마르크스에 대한 '파생적/현대적' 대안으로서의 알튀세르로부터, 알튀세르의 '근원적/근대적' 보충으로서의 스피노자로, 이행해 간 것일까요?).
덧붙여, "진행중"이라는 '부제'는 언제나 더 큰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젠가 저도 '알튀세르를 [다시] 읽자'라는 제목으로 페이퍼 하나 써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9-07 19:37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 람혼님의 알튀세르 페이퍼를 고대하게 되네요.^^

람혼 2007-09-08 01:41   좋아요 0 | URL
이런 주제의 페이퍼에는 관심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지젝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식견을 갖고 계신 로쟈 님의 글임에야...^^

미지 2010-08-06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늦었지만, 이제사, 잘 읽었습니다. 로쟈님께서 오랫동안 지젝을 붙잡아두신 덕에 제가 아주 훌륭한 지젝과 라캉 입문 경로로 진입하고 있다는 든든한 느낌이 듭니다. 감사드립니다.
 

지난달 말에 읽어보려고 했던 영화 리뷰를 좀 뒤늦게 시간을 내서 읽고 옮겨놓는다. 얼마전 개봉됐던 영국 감독 대니얼 고든의 <푸른 눈의 평양시민>(2006)에 관한 것인데, 전작인 <천리마 축구단>(2002)과 <어떤 나라>(2004)를 포함하면 '북한 3부작'이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김동원 감독과 대니얼 고든의 대담은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rticle_id=33175 참조). 여하튼 2년 터울로 북한에 관한 영화를 꾸준히 제작해낸 열정은 감탄할 만하다. 나로선 아직 한 편도 보지 못했지만 이왕이면 TV에서 방영해도 되는 게 아닐까 한다. 제2차 남북 정상회담도 곧 다가오고 하니 말이다.  

<푸른 눈의 평양시민>은 평양에 살고 있는 미국인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컬처뉴스(07. 08. 30) 삶에서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영국 감독인 대니얼 고든의 북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66년 월드컵에서 8강 신화를 이룩한 북한 선수들을 촬영한 <천리마 축구단>(2002),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북한 매스게임의 두 소녀를 기록한 <어떤 나라>(2004)에 이어 그는 1960년대 초중반에 월북한 미국인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푸른 눈의 평양시민>을 2006년에 완성했다. 서양인이 입국하기도 어려운 북한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도 보통일이 아니지만, 연이어 세 편을, 그것도 거의 6년여의 시간을 들여서 기록했다는 것은 엄청난 작가적 고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니얼 고든은 하고 많은 나라 가운데 왜 북한을 선택한 것일까? 그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축구광이었던 그의 처음 관심사는 1966년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8강에 올랐던 북한 축구였다. 당시 놀라운 활약을 했던 선수들이 이후 국제대회에서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는 그들이 당시 어떻게 8강에 오를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고든의 순수한 관심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북한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게 된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대상에 대한 애정이 깊어진,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엄청난 규모의 매스게임을 벌이는 북한을 보면서 그는 북한이 다른 나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북한을 알 수 있는, 다르게 말하면 북한을 서구에 소개하는 소재로서 매스게임을 하는 두 소녀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어떤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 이 다큐멘터리의 영어 제목인 <정신의 나라 A State of Mind>는 북한의 현실을 그 어떤 것보다 정확히 집어낸다. 미국의 통제 때문에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이겨내려는 정신을 지닌, 단체 활동의 나라이며, 그것을 매스게임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오늘날 북한의 모습 아닌가.

평양에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던 고든은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1960년대에 월북한 미군들이 평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감독은 즉시 이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 얼마나 좋은 소재인가. 미제국주의를 원수로 생각하는 나라에서 미국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도 남한의 DMZ에서 스스로 월북해서 수도 평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푸른 눈의 평양시민>의 원제가 <경계를 넘어서 Crossing The Line>인 것도 그들이 남한의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사실 고든은 북한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도 북한 사회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가령 <천리마 축구단>에서 이제는 늙어버린 축구선수들이 자신들을 격려해주었던 김일성 주석을 기리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고든은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같은 구미(歐美)인이지만 평양에서 살고 있는 이들을 통해 풀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의 솔직한 입장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때문에 <푸른 눈의 평양시민>은 평양에 살고 있는 미국인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자 자신과 미국인의 격차를 해소하거나 확인하는 작업이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1962년 38선을 넘어 월북한 제임스 드레스녹이다. 그는 자신이 월북한 상황을 솔직하게 말한다. 그는 감독에게 “난 당신들을 믿소. 진실을 찾아온 거니까”라고 말한다. 그의 생애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고아였던 그는 첫째 양부모에게 학대당해 둘째 양부모가 길렀지만 중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입대해서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서독으로 파병 간 사이 부인은 다른 사람을 만나 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으로 온 그는 허가 없이 휴가를 나갔다가 이것이 발각돼 군사법정에 설 위기에 처했다. 군사 재판 하루 전날 결국 그는 DMZ을 넘어 월북했다. 그는 북한 체제가 좋아서 월북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월북했다. 이것은 다른 세 명의 경우도 비슷한데, 영화에서 인터뷰를 통해 솔직하게 드러난다.

미국에서 하층민이었던 드레스녹은 북한에서의 생활에 대해 큰 불만이 없다. 미국으로 돌아갔으면 하층민으로 살았을 것이 뻔하지만, 북한에서의 생활은 중산층 이상이다. 자식들은 엘리트 코스인 평양외국어대학에 다니고 있고, 그는 보통강변에서 낚시를 하며 여유 있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 무엇보다 국가에서 배급을 주기 때문에 걱정 없이 살 수 있고(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그는 많은 쌀을 배급받았다고 한다), 건강이 좋지 않지만 언제든지 병원을 찾을 수 있다. 하층민으로 살았을 미국이나, 자신이 겪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활이다. 그가 북한 체제에 만족을 표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선택이며 그의 환경의 영향 때문이다.

감독은 그것을 아주 편하게 보여준다. 이 다큐멘터리를 위해 감독은 미국의 드레스녹의 집, 그의 어린 시절 친구들, 같이 군에서 근무했던 동료들을 인터뷰한다. 심지어 DMZ으로 들어가서 월북하던 상황을 재현하기도 하고, 당시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감독은 평양에 살고 있는 미국인은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이것이 억압적인 체제 속에서 속마음을 토로하지 못하는 위선이 아니라 진짜 그의 진솔한 고백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고든의 이전 영화와 달리 매우 정치적이다. 하긴 소재 자체가 민감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이들 존재 자체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사건은 발생하고 만다. 드레스녹과 비슷한 시기에 월북한 젠킨스이 일본으로 가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해석의 장에 놓이게 된다. 제킨스의 부인이었던 소가가 일본에서 납치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간 젠킨스는 북한 생활은 지옥이었고, 드레스녹에게 많이 맞았다고 증언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 북한이 외국인을 납치해 망명자들과 결혼하게 했고, 그렇게 해서 낳은 2세들을 스파이로 활용할 계획이었다는 소문이 이어졌다. 젠킨스의 아내 소가도 북한 스파이들에게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감독은 이 문제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 입장을 취하고자 노력한다. 일본으로 가기 전의 드레스녹과 젠킨스의 진술을 담고, 이후 엇갈린 진술을 다시 담는다. 그렇게 해서 감독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 가급적 객관적으로 상황을 담아 관객이 직접 판단하도록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라스트 장면에서 묘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 내내 김일성 수령에 대해 특별한 말을 하지 않던 드레스녹이 “위대한 수령께선 늘 우리를 각별히 염려해주셨어. 죽는 날까지 나라에서 지켜줄 거야”라는 말을 하고 넓은 광장을 걸어간다. 카메라는 그의 뒷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광장의 확성기에서 “북한은 지상 낙원입니다”라는 내용의 선전문구가 나온다.

감독은 객관적일 수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만, 이 장면을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드레스녹의 말이 모두 허구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이제까지 드레스녹이 했던 말이 모두 체제의 선전 도구로 사용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드레스녹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의 자포자기적 발언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 나서 드레스녹의 말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이 장면을 통해 이제까지의 모든 것이 회의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전작을 통해 북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북한을 이해하려고 했던 고든은 3부작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북한 체제에 대해 다소 회의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이 주도하는 통제된 국제 사회도 싫지만, 그렇다고 미국을 반대편에 세운 후 그것을 핑계로 주민을 통제하고 신격화하는 북한의 모습도 긍정할 수 없는 현실이 고든이 접한 상황이다. 고든은 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인간다운 삶인지, 그런 삶에서 이데올로기는 무엇인지 이 영화를 통해 묻고 있다.(강성률_영화평론가) 

07. 09. 06.

P.S. 참고로 '필름2.0'에 실렸던 감독 대니얼 고든과의 인터뷰기사도 옮겨놓는다(기사를 읽어보니 대니얼 고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필름2.0(07. 08. 24) "다음엔 평양 밖에서 촬영할 것이다"

<푸른 눈의 평양 시민>으로 ‘북한 삼부작’이 완성됐다.
계획한 건 아니지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앞으로도 내게 엄청난 이야기라고 판단되는 소재라면 북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계속 만들 생각이다.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을 기획하면서 의도한 건 무엇인가?
북한으로 망명한 미국인 네 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다. 소재가 민감하지만 어떤 정치적인 견해를 밝히고자 한 건 아니다.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를 얘기했고 몰래 생각하고 있다가 나중에 덧붙인 것은 없다.

지금 와서 이들에 대한 사연을 밝히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항상 사실을 이야기하려 하고 대상을 솔직하게 대하려 한다. 어떤 사실을 파헤치려고 이 영화를 만든 건 아니다. 나는 한국전쟁을 경험한 역사적 기억이 없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는 상태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단지 이 사람들의 얘기가 놀랍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췄다.

편견이 없다는 것이 당신 영화의 강점이다. 하지만 미국인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어떠한 편견도 갖지 않는다는 게 가능한가?
물론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드레스녹에 대해 워낙에 알려진 바가 없었고 1962년 망명 후에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인물이라 외모가 어떤지도 몰랐다. 물론 촬영 전 그의 스무 살 사진을 본 적은 있지만 실제 만나보고 몸이 그렇게 큰 줄(키 196cm, 몸무게 128kg) 짐작도 못 했다. 그만큼 그가 주는 분위기가 강렬했다. 2004년이 돼서야 만났는데 버지니아 억양으로 1950년대 영어를 쓰면서 가슴에 김일성 배지를 달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했다.

젠킨스는 어땠나?
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게 젠킨스가 북한을 떠남으로 인해 스토리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젠킨스의 미국 고향에 가서 가족들도 만나고 군대 친구들도 만나며 언젠가 젠킨스가 돌아오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젠킨스는 인터뷰에 응해주지 않았고 그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은 드레스녹과 젠킨스 간의 진실공방을 끝까지 파헤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체제의 우월이 아닌 환경에 적응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은 것인가?
바로 그게 의도였다. 양쪽의 소리를 모두 들려줬기 때문에 관객이 알아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드레스녹과 젠킨스의 직속 상관을 만나 인터뷰를 했지만 영화에 넣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밝힌다면, 드레스녹 상관의 경우, 드레스녹의 월북으로 난처한 상황에 빠져 곤란함을 겪었지만 40년 넘게 북한에서 생활한 것만으로 충분히 벌 받을 만큼 받았다는 의견을 밝혔다. 반면 젠킨스의 상관은 죽는 날까지 젠킨스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한 가지 의문은, 북한 삼부작이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일종의 특권층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생활을 가감 없이 보여주려면 그 외 지역의 북한 주민들에 대해서도 다뤄야 하지 않았을까?
영화상에서 밝히지 않았지만 평양이 특별한 도시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 거다. 북한 내에서도 모든 사람이 평양에 살고 싶어하고 평양 주민들도 자신들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북한 삼부작에 나오는 사람들은 평양 내에서도 평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드레스녹의 경우, 식구가 다섯이지만 방은 두 개밖에 없는 집에서 산다. 물론 평양 외에 대여섯 도시를 방문했었고 31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백두산에도 가봤다. 북한에서 기차를 탄 서양인은 내가 처음이었고 다시 말해, 외부인들이 전혀 본 적이 없는 광경을 봤다는 얘기다. 당연히 평양 밖에서 촬영을 하고 싶은 생각에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기도 해봤지만 평양 외의 지역에서 영화를 만드는 건 너무나 어려웠다. 그나마 북한에서 영화를 촬영할 수 있는 곳은 평양이 유일하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북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게 된다면 평양 외의 도시에서 진행할 것 같다.

당신이 겪어본 북한 주민들은 어떤 사람이던가?
우리가 만난 북한 사람들은 외교관들이 접한 북한 사람이나, 자선단체가 접한 북한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들은 뭐든지 급하게 하려는 생각이 없다. 자기들이 준비가 되면 자기 방식대로 일을 하는 스타일이다. 남한 사람과는 정반대다.(웃음) 우리는 북한 사람을 대할 때 먼저 이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솔직하게 다가갔다. 처음부터 뭔가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삼부작이 가능했다고 본다.

그래서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던 드레스녹이 지금은 찍기 싫다고 하자 바로 촬영을 중단한 건가?
그건 다른 문젠데 나는 촬영 대상이 불편해하면 당연히 찍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촬영을 진행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미안하기도 하고.

그것 외에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자신만이 고수하는 원칙이 있나?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이야기의 핵심에 도달하는 것이고 원래 했던 이야기가 무언지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재밌게 만들려고 한다. 관객들이 내 영화에 한 시간 반이나 투자하는데 즐겁게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내레이션으로 크리스천 슬레이터를 기용한 건 그 때문인가?
미국인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미국인의 내레이션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슬레이터의 열혈 팬인데 그의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가 영화에 무게감을 부여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출연료를 줄 수 없어도 참여해줄 수 있냐고 물으니 영화가 좋으면 상관없다 그러더라. 그 답례로 김정일이 쓴 <감독의 자세>와 <배우의 자세> 책 두 권을 선물했다.

미국에서는 8월 10일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이 개봉했다. 그쪽의 반응을 접했는지?
그에 대한 반응을 알 수 없는 것이 인터뷰를 위해 8월 11일 영국에서 서울로 출발했다. 접하진 못했지만 당연히 다들 좋아했을 것이라고 본다.(웃음) 뉴욕에서는 3주 전 브루클린이 내려다보이는 건물 옥상에서 300명이 모인 가운데 상영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참석했다. 완전히 매진됐고 반응 역시 무척이나 좋았다.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 때문에 미국 정부나 군부가 관심을 가질만한데 공식반응을 나타낸 적이 있나?
내가 알기로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다. <천리마 축구단>과 <어떤 나라>도 물론이고. 하지만 <어떤 나라>의 경우, 영국 정부에서 미국 정부에 보내준 것으로 알고 있으며 특히 영국 외교부는 북한의 일상을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북한 삼부작을 만드느라 영국에 갈 시간이 있기라도 했나?(웃음)
안 그래도 영국에서 한 편을 만들었다.(웃음) 한 달 후에 완성될 예정인데 영국 북부의 광산지역에서 개 경주를 하는 내용이다. 너무 외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영국에서 찍었는데 주로 밤에 촬영하는 바람에 이번에도 역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없었다.

우간다 출신의 육상선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지 않았나?
이 작품을 마친 뒤에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우간다 출신의 육상선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역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다.
그렇다. 아프리카인으로는 최초로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이다. 아버지의 부인이 8명이고 자녀가 43명이나 될 만큼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장애물 400m 육상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는 엄청난 업적을 이뤘다. 그런데 이디아민 정권 때문에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했고 자기 타이틀을 지킬 수 있는 기회도 박탈당했다. 전세계적으로 기억돼야 할 위인임에도 그렇지 않아 영화로 만들게 됐다.(허남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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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난 김에 '한 줄 오역'을 지적하려고 하니까 부지기수다. 어제 학교에서 들고 온 리처드 커니의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 1998)의 첫 장도 예외는 아닌데, '스스로에게 이방인이 되어(Strangers to ourselves)'란 제목의 이 장은 크리스테바와의 대담이다(크리스테바는 같은 제목의 책을 썼다). 한 대목만을 따라가본다. 이 대목은 민족주의와 코스모폴리타니즘에 대한 것이고 전체 대담은 1991년 파리에서 이루어졌다. 참고로 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커니: 프랑스 국민으로서의 당신의 코스모폴리타니즘과, 당신의 출신지(*불가리아)에 대한 충성을 어떻게 결합시키겠는가? 민족적 또는 지역적 출신 기원을 어느 정도 인식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당신은 민족주의가 병적 현상이라는 견해를 보였지만, 그건 단지 우리가 어떤 민족적 정체성을 위해 기본적인 인간적 요구를 부정할 경우에만 그렇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크리스테바: 내가 보기에 발틱, 시베리아,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는 퇴행적이고 우울증적 태도다. 잠시 옆길로 새서 약간의 정신분석을 해보아도 좋다면, 이 분리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정체성이 굴욕을 당해온 사람들이다.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정체성을 인식하지 않았고, 그래서 현재 조증의 형태를 띤 반울증적 반작용이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해도 좋다면 말이다.(29쪽)

일단 여기서 끝으면, 먼저 오역은 '세르비아(Serbian)'를 '시베리아'로 옮긴 것이다. '발틱(Baltic)'도 형평에 맞게 옮기자면 '발트국' 내지는 '발트 3국'이라고 해야겠다.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Soviet Marxism did not recognize this identity, so they have now an anti-depressive reaction which takes manic forms, if I may put it like that."(9쪽)인데, 여기서 'recognize'는 내가 보기에 '인식하다'가 아니라 '인정하다'로 옮겨야 한다. 소비에트 블록 하에서 구 동구권 국가들의 민족적 정체성이 인정되지 않고 억압돼 왔으며 이것이 사회주의 몰락, 사회주의 블록 해체와 함께 거의 조증의 형태로 폭발했다는 얘기다. 이러한 현상의 문제점?

출신 기원과 의고적 민속 가치를 찬양하는 것은 폭력의 형식을 띨 수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적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이상 공산주의가 적이 아니므로 다른 것이 적이 된다. 다른 종족 집단, 다른 민족, 희생양 등등 말이다. 이 병적 상태는 오래 갈 수 있고 또 이런 낡은 원한을 품는 것은 그 나라들이 필요로 하는 경제적-문화적 발전을 막거나, 또는 분명히 불리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병적 상태가 좀더 빨리 지나가도록 돕기 위해 사람들은 그 과정을 가속화시키려 노력할 수 있고, 정체 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하려 애쓸 수 있다. 그리고 그 차원에서 한편으론 교회가, 한편으론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

내가 보기에 '동유럽' 가톨릭 교회는 공산주의 반대 저항운동에서 주된 역할을 했다. 오늘날 민족주의를 초월하는 일에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상 - 순전히 종족의 것이거나 낡은 민족적 이상이 아닌 - 을 부여하는 일에서 교회가 맡은 바 역할이 크다. 최근에 작성된 교황의 회칙을 보면, 교회가 전체주의에 대항하면서 또한 일종의 '아메리카니즘'에도 대항하는 도덕적 투쟁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도 기독교 교회가 저 민족주의들 - 지나치게 신속히 없애 버려서는 안되겠으나 초월하고자 노력해야만 하는 -을 위한 치료책으로 이러한 코스모폴리탄, 보편주의의 이념을 제시한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29-30쪽)

대담 번역에서 하이픈(-)을 집어넣는 것은 '현명한' 처사는 아닌 듯싶다. 여하튼 당연해보이는 것은 스스로를 언제나 '이방인'으로 간주하는 크리스테바가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보편주의로서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상적인 것은 그러한 보편주의의 이념을 제시하는 데 기독교, 특히 동유럽 가톨릭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대목: "교회가 전체주의에 대항하면서 또한 일종의 '아메리카니즘'에도 대항하는 도덕적 투쟁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도 기독교 교회가 저 민족주의들을 위한 치료책으로 이러한 코스모폴리탄, 보편주의의 이념을 제시한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기독교의 보편주의(=바울주의)에 대해서는 바디우나 지젝 등이 최근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와 관련된 부분만 조금 더 읽어본다.

커니: 당신은 종교가 특정 종파나 분파를 넘어서 어떤 공통의 보편적 비전을 투사함으로써 어떤 긍정적 역할을 할수 있으리라고 시사하는 것인가?

크리스테바: 배타적 종교들에는, 당신이 그들의 전제들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이방인으로 만들 그런 어떤 동질성이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유일신 종교들은 타자 개념을 발전시키려 노력해 왔던 것이며, 바로 이것이 우리가 풍부하게 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서구 사상의 유산이다. 계몽주의자들은 그것을 추론해내려고 애썼고,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다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기독교적 사랑'이라는 카리타스(caritas)의 이념은 오늘날 기독교 교회에 어떤 힘을 준다. 이를테면 '가톨린 구호단' 또는 프랑스의 기독교인들이 외국인들을 위해 조직하는 여타의 행동 양식들을 보면 이것이 발전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주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읽기를 가르치고, 물질적 도움을 제공하는 등의 그런 일들 말이다. 나는 종교 문화의 이런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대중적 지지를 누리고 또 협소한 민족주의의 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 한에서는 말이다.(31-32쪽)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관점에서 개인에 주목하며 그 단독성(singularity)의 차원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가라타니 고진도 같은 의견이지만, 오직 단독성의 차원만이 보편성을 보장한다). 그녀의 '사랑의 정신분석', 혹은 '사랑으로서의 정신분석'이 뜻하는 바가 그런 것인데, 거기서 정신분석은 기독교적 사랑(카리타스)과 만난다. 사실 크리스테바 자신이 프랑스 도미니크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고 그러한 교육에 의해서 그녀의 삶 자체가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그녀의 독특성(singularity)이 보편적 이론의 차원에 어떻게 스며들고 있는가를 확인해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07. 09.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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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제목이 없어서 그냥 '헌팅턴과 미국의 정체성 위기'라고 붙였다(이때의 정체성은 당연히 '국가 정체성'을 말한다). 실상은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김영사, 2004)의 한 문단 읽기이고, 재미있는 한 오역에 대한 지적이다. 마침 9.11과 관련된 내용이라 '시의성'은 있는 듯해서 적어둔다.

 

헌팅턴의 책은 '우리는 누구인가(Who Are We?)'란 원제와 (직역하면) '미국의 국가정체성에 대한 도전들(The Challenges to America's National Identity)'이란 부제(국역본에는 '미국의 정체성 위기'라고 돼 있다)에 충실한 내용으로 짜여져 있다. 그의 지적대로, 이 정체성 위기가 세계적인 차원의 것이라면 비단 미국의 국가정체성에 별로 관심이 없는 독자라 하더라도 참조할 만하다. 내가 읽을 대목은 '국가정체성의 위기'란 1장의 한 문단인데,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에 영원한 사회는 없다. 루소는 이렇게 얘기했다. "스파르타와 로마가 명망했는데, 어떤 나라가 영원히 계속될 수 있겠는가?" 가장 성공한 사회들조차도 언젠가는 내부 분열과 해체의 위협에, 그리고 더 격렬하고 무자비한 외부의 야만적 힘에 노출된다. 결국에는 미국도 스파르타와 로마, 그밖의 인간 공동체들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다."(28쪽)

여기까지는 흔히 말하는 '제국의 종말'론을 따른다(더 나가면 '문명의 붕괴'가 되겠다). 헌팅턴의 입장은 그래도 그러한 '자연적인' 종말을 좀 지연시켜보자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미국의 정체성 실체는 인종, 민족, 언어와 종교로 대변되는 문화, 그리고 이념이 규정했다. 그중에서 인종과 민족에 의한 미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문화에 의한 미국은 위협을 받고 있다. 소련의 경험이 잘 보여주듯이, 이념은 공동체의 인종, 민족, 문화의 원천이 부족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 부족하다. 그래서, 로버트 캐플런이 주장했듯이, 일부에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미국은 처음부터 죽기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헌틴턴이 국가정체성의 구성소로 카운트하고 있는 것은 (1)인종(race), (2)민족(ethnicity), (3)문화(culture), (4)이념(ideology), 네 가지이다(문화의 가장 중요한 구성소는 언어와 종교이다). 이 중 미국의 경우에 인종, 민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만큼 인종과 민족은 더이상 미국의 국가정체성의 변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겠다), '미국식' 문화라는 것도 쇠잔해간다는 것. 그렇다면 남는 건 이념, 곧 이데올로기뿐인데. 이건 소련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확실한' 구성소가 못된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국가정체성이라는 게 아주 취약하다는 얘기이다. 인용문의 '로버트 캐플런'은 최근에도 <제국의 최전선>(갈라파고스, 2007)이 우리에게 소개된 '로버트 카플란'을 가리킨다.   

"그러나 일부 사회는 자신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때 국가정체성, 국가의 목표, 그리고 공동의 문화 가치를 갱신해 붕괴와 해체를 연기시키고 중단시킬 수 있다. 미국인들은 9.11사태 후에 그렇게 했다. 그리고 다가올 3001년에도 그들이 마찬가지로 직면한 도전은 공격을 받지 않아도 국가와 공동의 정체성을 계속 갱신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28쪽)

이 대목은 오역이 포함돼 있으므로 원문을 같이 인용한다(예전과 달리 영문 인용이 깨져보이는 건 유감스럽다). "Yet some societies, confronted with serious challenges to their existence, are also able to postpone their demise and halt disintegration, by renewing their sense of national identity, their national purpose, and the cultural values they have in common. Americans did this after September 11. The challenge they face in the first years of the third millennium is whether they can continue to do this if they are not under attack."(12쪽)

'재미있는 오역'이라고 한 건 맨마지막 문장을 가리킨다. "그리고 다가올 3001년에도 그들이 마찬가지로 직면한 도전은 공격을 받지 않아도 국가와 공동의 정체성을 계속 갱신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라고 옮겼는데, 뜸금없이 '3001년'이 왜 나오는가?(현실정치를 다루는 정치학자가 천년 후의 일을 왜 걱정하겠는가?) 역자가 좀 무신경하게 옮긴 경우인데, 'third millennium', 곧 '세번째 밀레니엄'은 3000년대가 아니라 2000년대이다. 그리고 'the first years'를 '3001년'이라고 해놓았는데 전문번역가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는다(하청을 주었다면 몰라도).

다시 옮기면, "2000년대 초반에 그들이 당면한 도전은 외부의 공격을 받지 않더라도 그들이 그러한 일을 계속해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국가라는 건 쇠퇴해가기 마련이지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러한 과정을 연기하거나 중단시킬 수 있다는 게 헌팅턴의 생각이다. 그리고 9.11이라는 국가적 도전에 직면해서 미국사회는 일시적으로나마 '단합'함으로써 확고한 국가정체성("우리는 미국인이다!")을 확인시켜주었다고 평가한다. 문제는 그러한 '단합'을 어떻게 상시화하느냐이다. 즉, 외부로부터 공격받거나, 9.11과 같은 비상시국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와 국가정체성을 확고하게 유지해나갈 것이냐 하는 것. 그러한 문제의식(위기진단)과 나름의 해법제시가 책의 골자이다.  

물론 그 이면은 국가적 단합을 '상시화'하기 위해서 차선의 방책으로 계속적인 외부의 공격과 위협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부적으로 어찌해보겠다는 거야 누가 말리겠는가...

07.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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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7-09-05 22:02   좋아요 0 | URL
"third millennium" 말씀이지요?

로쟈 2007-09-05 22:2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귀가하는 사이에 '퀴즈'가 돼 버렸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