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한다. 르 클레지오의 문학상 수상에 이어서 특이하게도 올해는 '친숙한' 저자들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책을 나도 읽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알려진 대로 크루그먼은 뉴욕타임즈의 칼럼리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는 '대중적인' 경제학자이다.

관련기사에 따르면, "올해 3월에는 경제전문지 포천과의 인터뷰에서 미국경제 침체가 2010년까지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으며, 지난달 리먼브러더스 파산 당시엔 미국 금융시장의 상황을 누가 쓰러질 지 모를 '러시안 룰렛'에 비유하기도 했다. 경제 정책 및 정치 문제에도 관심이 높아 7월에는 중도성향을 보이던 민주당 대선후보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에게 미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모색하려면 분명한 의제를 갖고 선거에 임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2006년에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정실주의'가 미국 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새 이민법안이나 사회보장세의 일부를 개인계좌에 적립해 자유롭게 투자한다는 내용의 사회보장 개혁안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올해 6월에는 NYT에 광우병을 빗댄 '악우병(惡牛病)'이란 칼럼을 기고, 한국의 촛불집회 상황을 거론하며 미국의 식품안전 규제에 대한 신뢰성 저하가 대외정책상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한국에서 미국식 경제학, 소위 '주류 경제학'을 한다는 이들도 크루그먼 정도 해주면 좋지 않을까? 이 정도도 '좌파 경제학자'여서 어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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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폴 크루그먼 지음, 예상환 외 옮김 / 현대경제연구원BOOKS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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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그먼의 경제학입문
폴 크루그먼 외 지음, 김재영 외 옮김 / 시그마프레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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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그먼의 경제학
폴 크루그먼 지음, 김재영 외 옮김 / 시그마프레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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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폭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 교수의
폴 크루그먼 지음, 송철복 옮김 / 세종연구원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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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8-10-13 23:19   좋아요 0 | URL
앗 방금 크루그만 최신 칼럼 읽고 오는 길인데 반가워서 얼른 댓글답니다 ㅎㅎ
NYT에서도 노벨상 수상 소식을 첫화면에 둥실 띄워놨네요 ^^

로쟈 2008-10-14 12:49   좋아요 0 | URL
올해는 경제학책도 노벨상 특수가 좀 있겠습니다. 불황이긴 하지만...

드팀전 2008-10-14 09:30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둘 다 이미 많이 알려진 사람들이네요.

로쟈 2008-10-14 12:49   좋아요 0 | URL
옆집 사람들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4 16:53   좋아요 0 | URL
한때 노벨경제학상은 영화상에서 공로상 정도의 지위라는 비아냥도 있었는데 이렇게 현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사나이도 상을 받는군요.

로쟈 2008-10-14 20:57   좋아요 0 | URL
생소한 학자들이 받는 것보다는 나은 듯싶어요. 물리학상이나 화학상 수상자들처럼 생소한 학자가 받으면 왠지 '속는' 기분이었거든요...
 

퇴근길에 들른 서점에서 손에 든 책은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 근간 예정이었던 도서였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같은 시리즈의 책들과는 다른 표지여서 의외였다. 흰색 바탕의 표지보다는 좀더 고급스럽게 보인다. 물론 이렇듯 '고급 담론'으로 소개된다는 점이 역설적이긴 하다. 역자의 바람대로, "이 책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게 돌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수행적 모순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초에 나온 두 권의 랑시에르에 비하면 월등히 나은 수준의 번역서인지라 반갑다(랑시에르 수용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011741 외 허다한 페이퍼들을 참조). "랑시에르의 사유 전체를 개괄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하니까 이 ''자리 옮김'의 철학자'의 문제의식과 사유가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부터 집어드는 게 수고를 더는 길이겠다(랑시에르의 한국어판 서문도 붙어 있다). 필시 이번 주말 북리뷰들에서 다루어지겠지만 아직 아무런 리뷰도 뜨지 않은 탓에 출판사의 책소개만 옮겨놓는다(알라딘에는 이마저도 아직 뜨지 않아서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 '옮긴이의 덧말'도 배여 들어간 소개이다(*국내 출판가의 '랑시에르 붐'에 대한 해설기사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0141729275&code=960205 참조).

철학ㆍ정치학ㆍ문학ㆍ사회학ㆍ영화학ㆍ미학ㆍ역사학ㆍ교육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친 사유의 폭!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 ~ )는 현재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라바르 등과 함께 프랑스 사상계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 철학자이다. 한때 루이 알튀세르의 영향으로 함께 지적 활동을 했으나, 68운동을 경험하면서 알튀세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적 실천이 내포한 '앎과 대중의 분리', 그들의 이데올로기론이 함축하는 '자리/몫의 배분'에 반대하며 자신만의 사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초반부터 19세기 노동자들의 문서고(文書庫)를 뒤지기 시작하여 노동자들은 단지 '노동자 고유의 사유'를 전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심지어 수준 높은) 사유와 말을 전유하려는 의지를 봄으로써 자신의 사상적 체계의 근본적인 출발점, 즉 사회 질서 속에서 각자에게 분배된 자리와 기능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정체화'(이른바 '자리 옮김')함을 목도한다. 비록 정치철학적 저술로부터 자신의 사상적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무지한 스승』(1987)과 같은 지적 평등을 교육의 기초로 제시하는 책을 비롯하여 아날학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역사의 이름들』(1992), 그리고 문학ㆍ사회학ㆍ영화학ㆍ미학에 관한 다양한 방면의 독창적인 작업을 통해 21세기 세계 지성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다.



'정치'를 논하는 첫 번째 저술이자, 랑시에르 사유 전체를 개괄하는 길잡이 역할!
이 책은 자크 랑시에르가 본격적으로 정치를 논하기 시작한 첫 번째 저작이다.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정치의 종언(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버전)과 정치의 회귀(레오 스트라우스와 한나 아렌트의 버전)라는 언뜻 보기에 대립되는 두 언설이 똑같이 갈등과 계급투쟁, 해방의 정치를 제거하던 정세 속에서 개입하기 위해 씌어졌다. 오늘날 정치를 경영으로 보는 실태와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랑시에르의 고민은 그 현재성을 담지해내고 있다. 특히 이 책은 그의 정치철학적 사상의 핵심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전 저작들과 이후 저술들에서 보여지는 사상적 전개의 중심테마를 명쾌하게 제시하여, 우리가 감히 이 책을 랑시에르 사유 전체를 개괄하는 길잡이로 봐도 손색이 없다.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 과정 - 그것이 곧 진정한 의미의 '정치'
랑시에르는 이 책에서 '정치'와 '치안', 그리고 '정치적인 것'이라는 삼항조를 제시한다. 랑시에르에게 '정치적인 것'이란 이질적인 두 과정, 즉 통치 과정(치안)과 평등 과정(정치)의 마주침이다. 흔히 우리는 정치란 이해가 상충하는 개인 또는 집단 사이에서 조정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랑시에르에게 이런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은 결코 정치가 아니다. 이는 이미 정치적 주체로 받아들여진 공동체 주체들 간의 통치(즉 치안)이며, 그것은 곧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랑시에르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또는 '몫 없는 자들의 탈정체화')를 통한, 즉 지배적 질서 속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존재들 스스로의 드러냄의 과정이라고 본다. 앞서 랑시에르가 19세기 문서고에서 노동자들의 말과 글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 과정이었던 것이며, 역자가 전태일의 예를 통해 보여준 것 역시 바로 이 지점이다. 역자의 말대로 전태일과 그의 동료 노동자들의 행위는 사업주가 보기에, 또 치안 논리가 보기에는 주제넘은 짓일지 모르지만,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신분이나 자격, 자기 처지의 한계를 넘어 말과 행동을 통해 그것을 지나침으로써 '정치'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랑시에르에게 본래의 '정치'란 바로 이것이다. 즉 권력의 행사에서 정당한 상대자로 올곧게 자리서는 것이야말로 그것이다.

정치의 과정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을 '주장/단언'하는 것!
그렇다면 그에게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은 무엇인가. 랑시에르는 정치 집단을 조직화하는 형태나 미래에 대한 처방, 혹은 예단에 어떠한 이론적 관심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인데, 그것은 국가 전복이나 조직적인 권력 장악과 같은 혁명론이 아니라 정치 혁명은 '감성적 혁명', 즉 지각장의 틀을 다시 짜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권력 장악은 주체를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랑시에르가 의미하는 '정치'의 과정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을 주장/단언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한다. 이는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그 요구의 만족을 전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보기에는 평등 전제 그리고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가운데 선언되고 단언되는 평등의 입장, 이 과정이야말로 '정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의 핵심인 '정치적 주체'에 대해서도 랑시에르는 독특한 자신의 견해를 내보인다. 즉 정치적 주체 역시 어떤 객관적인 속성(계급결정론적인 속성)에 따라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치안 질서에 대한 정치적 투쟁이 전개될 때 비로소 정치적 주체가 등장하게 된다고 본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의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자크 랑시에르 현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최근 국내에도 새롭게 선보인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과 자크 랑시에르의 사유가 갖는 우리 사회에서의 함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서도 새롭게 문제화되고 있는 '배제된 자'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 요구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거부당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치를 언제나 행위, 그중에서도 논거를 만들고 말과 사물의 거리, 틈을 가리키는 탈정체화하는 양식으로 정의하는 랑시에르에게서 우리는 배제된 자들, 몫 없는 자들이 어떻게 정치 과정 속에 합류하는지 최근의 우리 사회 문제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08. 10. 13.

Жак Рансьер На краю политического Aux bords du politigue

P.S.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감성의 분할>, <미적 무의식> 등이 더 소개돼 있다). 최근에 검색하다가 알게 된 것인데, <질 들뢰즈>(경성대출판부, 2008)의 저자 토드 메이의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사상>(2008)도 탐나는 책이다(국내 대학 도서관들에는 아직 들어와 있지 않다). <질 들뢰즈>가 훌륭한 소개서라서 더욱 기대를 갖게 한다(국역본 <질 들뢰즈>는 훌륭한 번역서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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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2008-10-14 22:32   좋아요 0 | URL
'자끄 랑시에르'하니 거의 반사적으로 '그 책'이 떠오르는군요. 이후에 해결은 잘 되셨는지요.

로쟈 2008-10-14 22:35   좋아요 0 | URL
법정까진 안 갔습니다.^^;
 

경향신문의 연재 '자서전 읽기'의 한 꼭지를 스크랩해놓는다. 저명한 문학비평가이자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게오르크(죄르지) 루카치의 자서전 <맑스로 가는 길>(솔, 1994)을 다루고 있다. 하도 오랜만에 접하는 책인데다가 장문의 기사여서(원고지 25매 가량인데, 일간지 북리뷰로서는 파격적인 분량이 아닐까) 눈길이 머물렀다. 나도 오래전에 읽은 책인데, 현재는 절판된 지 오래인 듯싶다.  

  

경향신문(08. 10. 11) 게오르크 루카치의 자서전 ‘맑스로 가는길’

분명히 가슴 찢어질 듯한 고통이었으리라.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모진 풍파를 겪은 스승이 죽어가며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장면을 지켜봐야 하니 말이다. 혁명과 반혁명, 전쟁과 숙청의 시대를 견뎌낸 노철학자이건만 생명의 순리는 어길 수 없었다. 암에 걸린 데다 동맥경화가 심해져 죽음을 준비해야 했다.

기실 서둘렀어야 했다. 혁명의 동지이기도 했던 아내에게 자서전을 쓰라고 권했지만, 작업을 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그때부터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죽음을 선고 받고서야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로 했다. 자료를 뒤지고 문서를 찾을 시간이 없었다. 책을 쓸 때 흔히 했던 대로 초안을 잡는다는 심정으로 타이프를 쳤다. 죽음을 앞두고 서둘러 썼으니 제대로 된 글이 될 리 없다. 기억의 사금파리만 널려 있을 뿐이니, 난수표도 이런 난수표가 없었다. 미완성의 문장인 데다 머리글자만 적혀 있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스승의 육신을 떠나보낼 수는 있으나, 삶과 정신의 흔적마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스승을 녹음기 앞에 앉혔다. 초안을 읽으며 무슨 내용인지 물었다. 87세의 노철학자는 죽어가며 답변해주었다. 그것은 경이로운 의지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포기했을 일이다. 엄습하는 죽음 앞에, 밀려드는 육체의 고통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발음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노철학자도, 그의 제자도 포기하지 않고 작업에 매달렸다. 이제 자서전이 아니라 유언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1971년 5월 작업이 끝났다. 그리고 6월4일, 별을 바라보고 가야 할 길을 알았던 시대는 얼마나 복되더냐고 말했던, 헝가리 출신의 철학자 게오르크 루카치는 영면했다.

루카치 자서전 <맑스로 가는 길>(솔)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우리말 번역본은 루카치의 초고와 대담인 <삶으로서의 사유>, 그리고 자전적 글과 또다른 대담을 부록으로 덧붙여 펴냈다). 숱한 오해와 곡해, 그리고 비판으로 얼룩진 삶이 비로소 복원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상당히 곤혹스러워지게 된다. 헝가리 역사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펼쳐진 유럽혁명사를 알지 못하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숱하게 나와서다. 이런 상황은 루카치를 다시 보게 한다.

우리는 흔히 루카치를 세계적인 철학자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자서전을 읽다보면, 그는 헝가리라는 배경을 떼어 놓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문인과 예술인, 그리고 혁명가들이 즐비하게 나온다. 이래서는 자서전을 읽기가 곤란하다. 헝가리 혁명사를 공부하면서까지 그의 자서전을 읽을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걸림돌을 피하면서 루카치 삶의 핵심에 도달하는 방법은 없을까. 다행히 있다.



자서전 서문은 공동대담자였던 이슈트반 에외르시가 썼다. 그는 여기에서 루카치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말을 한다. 널리 알려졌듯 토머스 만의 <마의 산>에 나오는 나프타는 루카치를 모델로 하고 있다. 자서전에 토머스 만과의 관계와 그의 작품에 모델로 나온 소감을 피력하는 대목이 나온다. 에외르시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하고 있는데, 토머스 만이 루카치 삶의 미묘한 모순을 잘 파악했다고 본다.

“나프타는 예수회 회원이다. 즉 그는 세계 지배를 추구하는 조직의 이데올로기적 전위 투사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날카로운 이지력 탓으로, 자신이 전력을 다 쏟는 운동의 바깥에 서 있기도 하다. 비록 그에게는 운동이 자유를 보장하긴 하지만 운동 쪽에서는 그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이것은 결국 그 스스로 유발한 것이다. 즉 최종적인 결론으로까지 파고드는 집요함으로 이단에 거의 가깝게 되는 그의 과감한 구상에 의해서 이러한 일이 유발되는 것이다.”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날 이미 미학자로서 우뚝 섰던 사람. 서양 철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를 가장 높이 평가했고, 속류화한 마르크시즘을 건져내려 했던 사람. 이념과 문학의 갈등에서 진정한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이를 해결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써냈던 사람. 중부 유럽의 변방 출신이지만, 서구 사회에 충격을 가한 사람. 그러나 줄곧 자신이 믿고 따랐던 당은 그를 못미더워했다. 늘 숙청과 망명의 대상이었고, 마침내 당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는 반복하거니와, 나프타였으니, 여기에서 루카치의 삶은 보편성을 띤다. 지식인과 권력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느냐는 화두거리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뒤쫓으며 지속적으로 드는 의문이 있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서양 지성사의 수수께끼일 터이다. 남부럽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배울 만큼 배운 데다 그의 지적 도반들이 대체로 자유주의적이긴 하나 좌파적 성향을 띠지 않은 탓이다.



먼저 어린시절의 독서편력을 들 수 있다. 그는 아버지가 매우 올바르고 사려깊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성공만이 올바른 행동을 판가름하는 기준이라고 여겼다. 아버지와 다른 생각을 품게 된 것은 <일리아드>와 <모히칸 족의 최후>를 읽고 나서다. 그는 이 책들에서 “성공이 올바른 행동의 기준은 아니며 올바르게 행동한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이제 안락한 부르주아적 삶을 거부하는 반항아로 성장할 자격을 얻은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읽은 <공산당 선언>으로 마르크스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의 인상을 “매우 강렬했다”고 했으니,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알 만하다. 대학에 들어가서 <브뤼메르의 18일> <가족의 기원> 등을 읽었고, 특별히 <자본> 1권을 깊이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몇 가지 핵심 지점들의 정당성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토로했다. 어린 휴머니스트가 세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얻은 셈이다.

그러나 루카치가 곧바로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만하임, 하우저 등과 같이 공부했던 일요서클 시절만 해도 그는 아직 뚜렷한 혁명적 성향을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피히테에 빗대어 그 시대를 죄악의 시대로 보았을 뿐, 사회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는 전망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의 사상적 방황은 1918년 가을 장미혁명에 대한 회상에서 드러난다. 역사에서 폭력이 차지하는 긍정적 역할을 믿고 있으면서도 막상 “내 자신의 행위로써 폭력을 촉진할 것인가를 결단해야 했을 때” 큰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그의 사상적 전회를 자극한 것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도대체 누가 영국과 프랑스의 문화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애매한 이 표현을 이해하려면 에외르시가 쓴 서문을 참조해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현존하는 권력과 제도, 그리고 세계를 열광에 휩쓸리게 하면서 파국으로 몰고가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루카치의 경멸을 강화했다고 풀이한다. 예상할 수 있겠지만, 루카치는 10월 러시아 혁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1918년 12월 막스 베버와 게오르그 짐멜의 제자였던 그는 헝가리 공산당에 가입한다.



루카치는 본디 작가가 되고 싶었다. 18세에 희곡을 썼는데 스스로 보기에도 형편없다 싶어 불태워버렸다. 그러고는 문학사가가 되길 꿈꾸었다. 그러다 베르테르의 눈색깔이 검은색이냐, 파란색이냐를 놓고 벌이는 논쟁에 환멸을 느껴 철학에 관심을 돌렸다. 그의 철학은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스의 학설은 날마다 매 시간 실천에 의거해 새로이 다듬어지고 자기화되어야 한다”는 데 충실했다. 하지만 당은 늘 그에게 자기비판을 강요했다. <소설의 이론>과 <역사와 계급의식>에 실린 서로 다른 서문은 그 갈등이 낳은 산물이다. 세계 지성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존재를 걸고 혁명 대열에 동참했으나, 당은 그를 사상적으로 박해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스탈린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그의 자서전을 읽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나는 스탈린주의가 일종의 이성의 파괴라는 것을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았고 또 늘 그렇게 주장해왔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런 답변에 쉽게 물러설 수는 없다. 알면, 왜 맞서 싸우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는 당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히틀러의 멸망이었고, 그를 대적할 수 있는 집단은 스탈린의 소련뿐이었다고 변명한다. 파시즘에 맞서려면 그를 지지해야 하나, 그의 전제적 통치는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에 반대하면 유리해지는 것은 파시즘 세력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루카치의 고민이 있었다. 물론 그는 스탈린 체제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다고 말한다. 스탈린의 말을 인용해서 검열자를 만족시키면서 그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써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빈약한 저항이었던가.



더욱이 “나는 항상 사회주의의 가장 나쁜 형태가 자본주의의 가장 훌륭한 형태보다 살기에 더 낫다고 생각해왔다”는 발언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당연히, 양차대전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자본주의적 폐해를 극복할 대안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한 루카치의 윤리적 결단을 폄훼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20세기의 이념 지형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발언이 이념에 눈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현실사회주의 몰락으로 드러난 체제의 속살은 얼마나 보잘것없었던가.

루카치는 벌라주를 평가하면서 공산주의에 공감하는 부르주아 작가로 남았어야 할 사람이라고 했다. 자서전을 읽다보면 루카치가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실천적 지성으로 남았더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의 스승인 베버는 “학문상의 모든 ‘성취’는 새로운 ‘질문’을 뜻한다”고 말했다. 루카치가 줄곧 학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도 정치적으로 패배한 것은 그의 새로운 질문이 체제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체제나 당이 내부 구성원의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질문을 참아주겠는가. 모든 지식인은 결국 나프타로 분한 루카치와 같은 운명을 안고 있다. 결국 권력의 품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비판적 지성이 있어야 할 자리는 따로 있으니, 그를 기리는 조사에 나와 있다. “쉴 사이 없이, 그리고 지칠 줄 모르고 그는 인간을 옹호하는 데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했습니다.”(이권우 | 도서평론가)

08. 10. 12.

P.S. 내가 읽은 범위 내에서 루카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유익했던 책은 하우저와의 대담을 담은 <변증법적 미학에 이르는 길>(문학과비평사, 1990)이다. <소설의 이론> 번역자인 반성완 교수의 편역으로 나왔던 책이다. 더불어, <맑스주의의 향연>(이후, 2001)에 실린 마샬 버먼의 글도 좋은 참고문헌이다. 흔히 브레히트와 많이 비교되기도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루카치와 벤야민을 비교해보는 것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나중에 에세이로 써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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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0-13 02:25   좋아요 0 | URL
반가운 기사 옮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편애'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루카치에 대한 글은 어떤 글이라도 항상 반갑습니다. 저 또한 루카치와 벤야민의 비교에 개인적으로 큰 관심을 두고 있는데, 어서 에세이를 완성해주시기를 고대할 뿐입니다.^^

로쟈 2008-10-13 21:40   좋아요 0 | URL
'나중에'는 '좋은 시절이 오면'이란 뜻이죠...^^;

소경 2008-10-13 14:53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대해 발표를 놔두고 있는데 (기한은 널널하지만) 쫌만 더 욕심을 내야 겠네요 ^^:;

로쟈 2008-10-13 21:41   좋아요 0 | URL
<역사와 계급의식>까지 포함하려면 욕심을 많이 내셔야겠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3 16:21   좋아요 0 | URL
이권우 씨는 루카치가 1956년 헝가리의 임레나지 정권을 지지했다는 죄로 고초를 당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군요.그걸 언급했다면 스탈린주의에 너무 약하게 저항했다는 평가는 유보했을텐데요.

로쟈 2008-10-13 21:44   좋아요 0 | URL
지젝은 루카치와 반목했던 브레히트가 오히려 '스탈린주의의 내적 위대성'을 보여주는 시인이라고 평했죠.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해제도 썼는데, 아직 못 읽어보고 있습니다...

히드라 2008-10-14 18:44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쓰신, P.S.를 읽고, <변증법적 미학에 이르는 길>을 읽어봤는데, (루카치가 아니라) 주로 하우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특히, 앞쪽에 실린 (세 편의) 대담 중 두 편이 (루카치가 아닌 다른 이들과 했던) 하우저와의 대담이고, 루카치도 동참했던 하우저와의 대담에서도 루카치는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아서, 사실 책을 읽고 조금 실망....^ ^;; --로쟈님으로부터 자주 공부에 도움을 받고 있어 고마워하고 있는 독자로부터 --


로쟈 2008-10-14 20:55   좋아요 0 | URL
네, 하우저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 맞습니다. 제가 주목한 건 '진리는 단수이다'라는 루카치의 단언이었어요. 하우저는 단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지요. 저는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하여 자주 인용하곤 했습니다.^^;

히드라 2008-10-15 01:40   좋아요 0 | URL
부정확한 사실 수정 추가 : <변증법적 미학에 이르는 길>에 만하임과 나눈 대담은 없습니다. 로쟈님 덕분에 루카치의 '진리는 단수이다'라는 단언에 다시 한번 더 주목하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

로쟈 2008-10-15 07:17   좋아요 0 | URL
아, 하우저를 만하임으로 잘못 썼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5 16:44   좋아요 0 | URL
혹시 루카치의 정치적 유언이라는 <사회주의와 민주화 운동>을 보셨는지요? 비교적 차분한 마음으로,자아비판 당할 염려도 없이 솔직하게 인간적 사회주의 노선을 밝힌 책입니다.

로쟈 2008-10-15 17:07   좋아요 0 | URL
<사회주의와 민주화운동>이나 <이성과 파괴> 등은 사놓기만 하고 안 읽은 듯합니다. 90년대엔 루카치도 '매장' 분위기였죠. '인간적 사회주의'라는 노선 자체도 스펙트럼이 넓어서(스탈린주의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니까요) '진의'가 무엇인지는 살펴봐야 할 거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16 16:06   좋아요 0 | URL
스탈린주의자가 보기엔 수정주의겠지요.그런데 이성의 파괴 아닌가요?

로쟈 2008-10-16 21:16   좋아요 0 | URL
<이성의 파괴>는 흔히 루카치의 최악의 책이라고들 얘기해서 읽게 되지 않던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7 15:32   좋아요 0 | URL
예.그 책이 그다지 평이 좋지 않더군요.유물론과 관념론으로 도식적인 분류를 하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그런데 위에 오타가 났어요.이성과 파괴.

로쟈 2008-10-17 23:45   좋아요 0 | URL
네, 이성의 파괴죠...

독립만세 2008-10-17 23:20   좋아요 0 | URL
<딩통의 죽음> 이란책도 있나요?

로쟈 2008-10-17 23:45   좋아요 0 | URL
<당통의 죽음>인데, 어디 오타가 났나 보네요...
 

매주 주말 북리뷰에서 '처리'해야 할 책들이 몇 권씩은 된다. 이번주엔 리하르트 다비드 프레히트의 <나는 누구인가>(21세기북스, 2008)도 그 중 하나다. 생소한 저자나 흔한 책 제목은 전혀 눈길을 끌지 않지만, '독일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라는 광고문구는 호기심을 유도한다. 독일 사람들이 열광(?)하는 책은, 특히나 철학책은 어떤 것일까, 란 궁금증. 저자는 학술 저널리스트라고 한다(흠, 저널리즘적인 '글발'에 기댄 책인가? 하지만 철학박사이기도 하다). 국역본은 저자의 사진을 띠지에 크게 박아놓았는데, 젊은 저자의 '외모'로도 승부를 보려는 심산인가 보다. 아동틱한 독어판의 표지와 대비된다...

경향신문(08. 10. 11)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와 뇌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시오는 서로 가는 길은 달랐지만 가고자 하는 곳은 같았다. 연구 분야는 달라도 그들은 평생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매달렸다. 데카르트가 찾은 인간이해의 열쇠가 ‘이성’이었다면 다마시오가 발견한 답은 ‘감정과 느낌’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철학이라 부르는 학문은 데카르트를 논하고 이성에 천착할 뿐 다마시오를 거론하거나 감정을 중시하지 않는다. 독일의 학술저널리스트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사진)가 볼 때 인간을 이해하는 데 이성과 감정 가운데 어느 하나가 우위에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성과 감정을 아울러야 ‘나라는 존재’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철학은 뇌신경과학의 성과를 쉬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철학과 뇌신경과학은 따로 논다. 심리학, 생물학에 대한 철학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배워왔던 철학의 틀만으로 인간 이해에 다가갈 수 없다고 여긴다. 책은 ‘육체적인 나’에서 ‘도덕적인 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나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을 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왜 남을 돕는 것일까’ ‘도덕은 타고 나는 것일까’ ‘조물주는 계시는가’ 등 살면서 한번쯤은 부닥쳐 봤을 법한 질문 34가지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저자는 기존 철학 교육이 불만이었다. 지나치게 사상의 역사적 서술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철학 교육이 학생의 지적 창의성과 사색을 북돋우기보다 암기 능력만 키워주는 아카데미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루하지 않은 철학 입문서를 쓰고 싶었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다양한 학문과 주제를 넘나들며 철학의 원초적 질문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흡사 딱딱한 철학 개론서에 강렬한 한 방 펀치를 날리는 듯하다.

가령 미국 TV시리즈 <스타트렉>의 등장인물 미스터 스폭을 통해 ‘감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나열한다. 스폭은 감정이 거세된 채 이성적 사고만 하는 외계인이다. 저자는 스폭을 통해 감정과 이성의 차이·양면성을 알기 쉽게 드러낸다. 그러나 결코 유치하지 않고 논리가 정연하다. 또한 동물도 고통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피터 싱어를 통해 ‘동물을 먹어도 될까’라는 윤리적 질문에 다가간다. 고래의 고통을 꼼꼼하게 설명하면서 환경보호론에 담겨 있는 철학적 질문을 더듬어보기도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34가지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이 어렴풋이 손에 잡힐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취하는 철학의 태도는 ‘장르 파괴’이자 통섭이다. 철학 고유의 문제의식만으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학문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소유욕에 대해 성찰할 때 게오르크 짐멜 못지않게 로빈슨 크루소를 주목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안락사, 배아 복제, 자살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한 성찰도 적지 않다. 이 책이 여타 철학 개론서와 다른 점이다.

이 책은 지난해 독일에서 철학 입문서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에 등극, 1년간 45만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풍부한 일화를 통해 철학에 쉽게 다가가게 만드는 글솜씨가 인정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학년 논술교재로도 괜찮을 듯하다.(서영찬기자)

08. 10. 12.

P.S. 독일에서도 인정받은 글솜씨가 어떤 것인지 한번 '구경'해봐야겠다. 타이틀만 놓고 보자면 개인적으로 더 관심이 가는 책은 작년에 같이 나온 책 <Lenin kam nur bis Lüdenscheid>이다. 좌파 가정에서 자란 자신의 어린시절을 다룬 자서전인 듯싶다(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http://www.lenin-film.de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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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의 생각
    from sanghyun's me2DAY 2008-10-13 02:59 
    철학 교육이 학생의 지적 창의성과 사색을 북돋우기보다 암기 능력만 키워주는 아카데미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hahaha 2008-12-12 18:18   좋아요 0 | URL
이 영화 보고 싶네요! /ㅅ/ 언젠가 들어오려나?

로쟈 2008-12-12 23:29   좋아요 0 | URL
네, 재미있을 듯싶어요...
 

미국식 탐욕의 대명사라면 단연 '월스트리트이다. '금융자본 권력의 역사 350년'을 다룬 존 스틸 고든의 <월스트리트 제국>(참솔, 2002)은 그런 점에서 '뒤늦게' 눈길을 끄는 책인데, 마침 참고할 만한 칼럼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미국 관련 기사들을 연이어 스크랩해놓은 계기가 된 칼럼이다.



경향신문(08. 10. 11) [서재에서]탐욕의 거리, 월스트리트

“탐욕스러운 월스트리트 금융귀족들의 실패를 왜 납세자의 돈으로 구제해야 하느냐. 월스트리트 스스로 구제금융 자금을 조성하라.”

부시 미 행정부가 마련한 7000억달러 구제금융안을 연방 하원에서 처음 표결할 당시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의 격앙된 주장이다. 표결 토론을 보면서 마이클 더글러스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월스트리트>가 먼저 떠올랐다. 이 영화에서 기업 사냥꾼인 주인공 고든 게코(더글러스)는 텔다 페이퍼 주주총회에서 소리 높여 연설한다.



탐욕은 좋은 것입니다. 탐욕은 옳은 것입니다. 탐욕은 효과가 납니다. 탐욕은 명료하게 하고, 헤치고 나가게 하며, 전진하는 정신의 진수(眞髓)를 북돋웁니다. 탐욕, 그 모든 것들 중에서 인생, 돈, 사랑, 지식에 대한 탐욕은 인류를 도약시켰습니다. 탐욕은 텔다 페이퍼를 살릴 뿐만 아니라 미국이라고 불리는, 또다른 삐걱거리는 기업도 구해낼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주주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은 이 연설만큼 월스트리트를 상징하는 말도 찾아보기 어렵다. 월스트리트만큼 모든 사람들이 돈이라는 한 가지 욕망을 탐닉하는 곳도 드물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사가 존 스틸 고든의 역작 <월스트리트 제국>(참솔)도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금융제국의 탐욕적인 게임과 심판 없이 글로벌화한 금융시장의 파국을 경고했다. 월스트리트의 욕망은 마약왕에 비견될 정도다. ‘곰과 황소는 돈을 벌지만 돼지는 돈을 벌지 못한다’는 월스트리트의 격언에 무지했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사람들의 말로를 그린 대목은 타산지석이다. 강세시장에서도 돈을 벌고 약세시장에서도 돈을 벌 수 있지만 과욕으론 결코 돈을 벌 수 없다는 뜻이다.



2000년에 첫 출간된 이 책에서는 월스트리트가 자유화·시장화·규제완화라는 레이건 경제철학을 등에 업고 ‘탐욕의 전성기’를 구가한 1980년대, 인터넷 거품으로 ‘탐욕의 극치’를 달린 90년대가 가장 극적으로 그려진다.



350여년간의 ‘월스트리트 통사’이면서도 드라마처럼 흥미로운 것은 다채로운 등장인물 때문이다. 거대한 게임 같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화려무비하다. JP 모건 같은 위기의 구세주, 가치투자의 선구자 벤저민 그레이엄, 도덕 귀족의 대표적인 인물 코닐리어스 반더빌트,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 같은 주연급 거물이 있는가 하면 한 시대를 풍미한 악당 대니얼 드류, 감방에 가야 했던 뉴욕 증권거래소 회장 리처드 휘트니 같은 사기·협잡꾼들, 피눈물로 범벅이 된 개미들에 이르기까지. 물론 미국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에서부터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 이르는 정부 고관들의 배역도 생생하게 소묘된다. 그러잖아도 월스트리트의 역사는 많고 많은 신화와 일화, 우화로 점철돼 있다.

영국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이 쌓은 나무 담장에 불과했던 월스트리트가 오랫동안 무소불위의 금융 권력을 휘두르는 제국으로 군림한 역사가 굴곡지게 펼쳐진다. <부의 제국>으로 이름을 더욱 널리 알린 고든이 월스트리트를 하나의 제국으로 파악한 것은 더없이 적절하다. 월스트리트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순진한 인간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는 지적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미국민들은 이제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된 월스트리트의 탐욕과 악마 같은 습성을 비난하고 분노한다. ‘어떤 나무도 하늘까지 자라지 않는다’는 또 다른 월스트리트의 격언을 막상 자신들은 잊고 살았던 데 대한 업보가 아닐까. “사회주의의 최대 약점은 사회주의 그 자체이고, 자본주의의 최대 약점은 자본가 그 자체”라며 전 지구적 금융감독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고든의 정문일침(頂門一鍼)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용’이라도 되면 다행이겠다.(김학순 선임기자)

08. 10. 11.

P.S. "사회주의의 최대 약점은 사회주의 그 자체이고, 자본주의의 최대 약점은 자본가 그 자체”라는 저자 고든의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새로운 지적은 아니지만 '월스트리트 통사'를 훑은 저자의 말인지라 무게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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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12 16:14   좋아요 0 | URL
유럽의 로스차일드,미국의 모건 집안...돈으로 세계를 쥐락펴락한 괴물들...마이클 더글라스의 영화가 궁금하네요.

로쟈 2008-10-12 19:43   좋아요 0 | URL
저도 극장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찰리 쉰과 같이 나온 거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