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세계화시대 언어의 운명과 관련한 몇 가지 이슈를 짚어본 것이다. 타이틀과 소제목은 편집부에서 붙인 것이며 글의 일부 내용은 '거꾸로 바벨탑 이야기'(http://blog.aladin.co.kr/mramor/2341396)에서 따왔다. 알고 보면, 두 글은 거의 같은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    

고교 독서평설(08년 11월호) 세계 공통 언어, 과연 필요한가?

바벨탑 이후 - 지구상엔 왜 이렇게 많은 언어들이 생겨났을까?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처음 세상에는 하나의 언어만 있었고, 단어도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은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바빌로니아의 어느 평야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 하늘까지 닿을 탑을 쌓기 시작했다. 잘 아는 대로 이때 여호와가 등장한다. 여호와는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고서 분노했다. “저들은 한 민족이며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이 이런 일을 시작하였으니 앞으로 마음만 먹으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가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여호와가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지 못해서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것이 언어의 기원에 대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언어 다양성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다.

“지구상에는 왜 이렇게 많은 언어들이 생겨났을까?”라는 의문에 나름대로 답해 주는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바벨탑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될 수 있다. 적어도 언어에 관한 한 말이다. ‘바벨탑 이전’이란 모든 인류가 단 하나의 언어, 하나의 ‘보편 언어’를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었던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바벨탑 이후’란 인간의 오만에 대한 신의 징벌이 있은 뒤, 너무도 많은 언어들이 생겨나서 서로 소통할 수 없게 된 시대를 뜻한다. 물론 언어의 다양성은 어느 한순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진 언어적 변화의 산물이다. 그 결과 인류는 불행해졌을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오해와 반목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른바 ‘바벨탑 이후’에 인간의 언어는 분화에 분화를 거듭하였고, 현재 지구상에는 최소로 잡아도 5,000개가량의 언어가 제1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한 공동체 내에서 여러 언어가 공용되는 것을 ‘다언어적 상황’이라고 한다면, 현재의 지구 공동체 또는 지구촌은 그러한 상황의 전형적인 사례다. 아니, 인류가 살아온 세계는 언제나 ‘다언어적 세계’였다. 우리가 여기서 갖게 되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이러한 다언어적 상황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세계시민주의, 혹은 세계주의의 이상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먼저 고민했던 폴란드의 한 안과 의사의 이야기는 참고할 만하다.

세계어 - 에스페란토의 탄생
폴란드의 옛 도시 비알리스토크에 자멘호프(1859~1917)라는 유태계 안과 의사가 살았다. 그가 태어난 비알리스토크에는 러시아 인, 폴란드 인, 게르만 인 그리고 히브리 인의 4개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했기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멘호프는 이러한 다언어적 상황이 인간을 서로 분리시키고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고 믿은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창안해 냈다. 그것이 1887년에 나온 에스페란토다.

사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국민 국가의 정치적·문화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세계시민의식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세계 공통 언어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인공 언어를 창안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자멘호프의 에스페란토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경우로,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성원과 지지를 받았다. 에스페란토 잡지가 창간되고 많은 문학 작품이 에스페란토로 번역되었다. 우리의 경우도 한국 근대 시사(詩史)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김억(1896~?)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가 에스페란토로 번역된 서양 시들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고 하니, 에스페란토 열풍에서 비껴 나 있지 않다(참고로, 국내에도 에스페란토 사전이 발간되어 있으며, 1994년에는 제79차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이상주의자였던 자멘호프는 에스페란토의 활용이 각 지역과 국가에 속한 개인들의 세계시민적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키고, 결과적으로는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이룩하는 데 기여하기를 희망했다. 에스페란토의 말뜻 자체가 ‘희망을 가진 자’인 것은 그의 이러한 바람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그 자신은 1914년 제10회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 참석을 위해 파리로 향하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전 유럽이 전쟁의 도가니로 변화하는 광경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이 상처로 인하여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17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이러한 생애는 이상으로서의 세계어가 놓여 있는 오늘날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자멘호프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1905년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개최되었고, 또 1908년에는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가 결성되면서 세계적인 보급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전 세계적으로 200만 명이 에스페란토로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에스페란토는 아직 세계 공통 언어로서의 위상을 얻기에 역부족이며, 공식적으로 그런 대우를 받고 있지도 못하다. 사실, 에스페란토 자체가 각 국가어로부터 거리를 둔 중립적인 언어를 표방했지만, 가장 주요한 어원은 라틴 어, 에스파냐 어, 프랑스 어, 독일어 그리고 영어 등이고, 그런 탓에 동아시아의 아이들은 유럽과 미국의 아이들보다 배우는 데 시간이 두 배 정도 더 소요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런 까닭에 자멘호프의 기대와 달리 오늘날 현실적으로 세계어에 근접해 있는 언어는 ‘국제어’라 불리기도 하는 패권 국가들의 언어다.



영어의 힘 - 소수 언어의 종말이 다가온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5,000개의 언어가 남아 있다고 했지만, 이 숫자는 이미 상당수가 사라지고 남은 언어의 숫자다. 언어학자들의 전망에 따르면, 앞으로 21세기에만 이 중 절반가량의 언어가 더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평균 2주에 1개꼴로 언어가 사라지는 셈이 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200년 이내에 200개 정도의 언어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 이 200이란 숫자가 국가의 수와 대략 일치한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앞으로 국가어 외의 소수 언어는 대부분 소실될 것이라는 게 언어학자들의 예측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국가어들의 운명 또한 장담할 수 없다. 현재와 같은 정치적·경제적 세계화 추세가 강화될수록, 국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소통될 수 있는 세계어나 국제어에 대한 요구도 점차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가장 유력한 세계어의 후보가 현재로선 단연 영어다. 이미 현실에서 많은 나라가 영어를 국가어로 채택하였고, 또 전 세계적으로는 제2언어, 제3언어로 급속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능통한 영어 사용자가 세계적으로 18억 명에 이르며, 영어 학습자 수가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나오고 있다. 이만하면 영어와 함께 ‘바벨탑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일로 비친다.

하지만 그 ‘회귀’는 바벨탑을 쌓은 인간에 대한 신의 분노와 징벌만큼이나 폭력적인 과정을 수반한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중세 때만 하더라도 앵글로-색슨의 한 부족어였던 영어가 어떻게 세계적인 언어로 성장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어학자 앤드류 달비가 <언어의 종말>에서 지적한 내용에 따르면, 영어와 과거 로마 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 어의 확산 과정에는 세 가지 유사점이 있다. 이 두 언어의 ‘제국주의’는, 첫째로 식민화의 결과로 비롯되었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걸친 방대한 식민지를 경영했고, 영어는 식민지 이주자들의 유일한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공통 언어, 곧 모국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상호 이해를 위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뜻함)였다.

둘째로 제국과 속국 사이의 관계가 불러온 결과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제국의 속국에서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자기 발전과 부(富)를 얻는 최선의 경로는 영어를 아는 것이었다. 고위 관리가 되거나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적이었고, 모든 고등 교육은 영어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인도처럼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에만 한정된 사례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영어는 여러 사회적 특권에 대한 진입 장벽으로 간주된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영어 실력은 제도화된 문화 자본이며, 이를 갖지 못한 집단으로부터 능력과 성공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강력한 문화 재생산의 기제(機制,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의 작용이나 원리)다.” ‘세계어’이기 이전에 영어는 ‘제국의 언어’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러한 언어 제국주의의 발생은 원거리 교

역, 특히 해상 교역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영어로 이루어지는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영어와 영어의 친척어인 피진어(pidgin, 비즈니스의 중국식 발음으로, 주로 상거래에 사용되며 문법이 간략화되고 어휘가 극도로 제한된 영어를 말함)는 점점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사정은 ‘세계는 평평하다’고도 말해지는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다. 영어는 무엇보다도 비즈니스 언어로서 널리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언어가 몇몇 언어로, 특히 영어로 집중되는 현실의 뒷면에서는, 소수 언어들의 소실과 언어 다양성의 상실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대로다. 그리고 앞으로 ‘언어 전쟁’, 개별 국가어와 영어와의 전쟁 또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한국어가 사라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미 10년 전인 1998년 영어 공용화 논란이 벌어지던 당시 한 언론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영어 공용화에 찬성하는 의견이 45%였고, 이듬해 교육 방송(EBS)에서 찬반 토론이 벌어진 뒤의 여론 조사에서는 찬성 비율이 62%까지 증가했다. 그렇다면 어림잡아도 한국 국민의 절반가량은 영어 공용화에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공용어’란 말 그대로 공공 생활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가리킨다. 영어 공용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쪽에서는 영어가 이미 국제어로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언어 사용자들이 영어를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처음 공용어론을 제기한 소설가 복거일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영어 공용화는 예비적인 단계일 뿐이고, 아예 모국어를 영어로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영어 공용화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한 나라의 경제력이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지구 제국이 형성되리라는 기대는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적 논리일 뿐이며, 이에 따르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더불어 영어 공용화가 그 자체로 국민의 영어 실력을 향상시켜 주지는 않으므로,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공용화가 아니라 영어 교육의 질적인 개선이라는 의견도 제시한다. 실제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는 인도의 경우에도 영어로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구는 2%에 지나지 않으므로, 공용화 자체가 궁극적인 해법인가는 미지수다.



이중 언어 -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는 사회
영어 공용화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지금 같은 전 지구화 시대에 모국어와 국제어의 이중 언어 사용이 대세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단일 언어를 통한 소통이 국민 국가 형성의 주된 바탕이었고, 이에 따라 민족(또는 국민)을 언어 공동체로 규정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 아래에서는 이러한 단일 언어적 상황보다는 이중 언어적 상황이 보다 표준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이렇듯 변화된 언어 현실에 적응하면서도 언어적 다양성을 보존하는 일을 앞으로의 지향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바벨탑 이후의 기억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바벨탑 이전으로 회귀해야 한다. 이는 개별적인 자연어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세계어를 배워 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풀어서 말할 수도 있겠다.

소수 언어들이 지속적으로 사라져 가고, 국가어마저도 존립을 위협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언어적 다양성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러한 다양성이 ‘세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벨탑의 신화를 다시 상기하자면, 인류가 하나의 무리를 지어 살다가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된 것은 언어적 혼잡성·다양성이라는 신의 징벌 이후다. 곧 세계는 그러한 혼잡성·다양성으로 구성되며, 결국 그것의 산물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세계주의는 이러한 혼잡성·다양성 자체를 보존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는 각기 다른 언어로 달리 전승되고 보존되어 온 지식을 보존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각 언어는 세계를 보고 인식하고 구분 짓는 각기 다른 관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것이 그려 내는 현실 세계의 지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각각의 언어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각기 다른 통찰력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한 언어의 소실은 곧 인간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의 상실을 뜻한다. 게다가 보다 중요하게는 다른 언어와의 상호 작용만이 우리 각자의 언어를 더욱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준다. 영어만 하더라도 새로운 단어와 리듬과 생각들을 다른 언어들에서 얻음으로써 활력을 얻고 번영을 누려 왔다. 세계어는 그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언어들과 공존 가능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

08. 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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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자주 눈에 띈다 싶었지만 '대박'이 난 줄은 모르고 있었다. <잉글리시 리스타트>(뉴런, 2008) 시리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기껏해야 나의 관심은 저명한 문학비평가 'I. A. 리처즈'의 이름을 이제 사람들은 <잉글리시 리스타트>의 저자로 기억하겠구나 정도였는데, 한겨레21의 '베스트셀러 워스트리더' 꼭지를 읽어보니 '장난'이 아니다. 오죽하면, '무시무시한' 영어 욕망일 것인가! 알고보면, 원제가 <그림으로 보는 영어>이고 한번 나왔던 책이 다시 나온 것이다. 아마도 올해의 가장 '기이한' 베스트셀러가 아닐까 싶다(출판사회학의 연구대상이다)...

한겨레21(08. 10. 31) ‘무시무시한’ 영어 욕망

신기한 물건 하나가 등장했다. 원래 있던 겉표지를 어디에 두고 온 듯한 노란색·파란색·초록색의 단순명료한 디자인, 한글 제목은 귀퉁이에 둔 과감함, 우유 한 갑 무게도 안 되는 가벼운 종이, 듣기용 MP3는 인터넷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1만원이 안 되는 가격…. 가벼운 책이 무겁게 베스트셀러를 가격했다. <잉글리시 리스타트>(I. A. 리처즈·크리스틴 깁슨 공저, 뉴런 펴냄)가 터졌다.

<잉글리시 리스타트>의 ‘BASIC’편은 발간(7월2일) 한 달 만인 8월2일 인터넷서점 ‘예스24’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9월4일에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에도 올랐다. ‘어학’ 부문이 아니다. 종합베스트셀러다. 이후 연속 7주 종합 1위를 지키고 있다. 10월 둘쨋주 교보문고에는 ‘ADVANCED1(스피킹편)’이 종합 2위, ‘ADVANCED2(리딩편)’가 종합 6위에 올라 있다. 편집부에서 전하는 판매부수는 30만 부(인쇄는 35만 부). 첫 쇄는 3천 부를 찍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베스트셀러’였던 것이다.

‘영어 교재’가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것은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정찬용 지음, 사회평론 펴냄)의 2000년 2~4월 총 9주, <해커스 토익>의 2006년 7월 첫째·둘쨋주 총 2주가 있었다.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가 ‘학습법’에 관한 것이라면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본격 영어 교재’를 표방한다. <해커스 토익>의 베스트셀러 등극이 대학 여름방학 초기 거의 모든 대학생들이 토익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머리를 동여맸음을 보여준다면,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한국 일반인들이 영어 공부를 하려는 욕구가 꿈틀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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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낸 뉴런은 ‘전략적’으로 가볍게 만들었다. 홍은숙 대표는 영어 원제인 ‘그림으로 보는 영어’(English through Pictures)를, 타깃을 명확히 가다듬으면서 ‘리스타트’로 바꾸었다. 1997년 <그림으로 보는 영어>(창문사)로 국내에서 한 번 나왔다가 사라진 타이틀이 일신한 것이다. 그리고 카페를 통해 학습그룹을 조직했다. 카페 가입자는 현재 6만4천 명을 헤아린다.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앞부분 ‘학습법’과 ‘소감’을 덧붙인 글을 제외하고는 시작되는 첫 장부터 해답까지 모두 영어와 그림으로 돼 있다. ‘I’와 ‘YOU’로 시작한다. 단어 아래 철사로 만들어진 단순한 남자가 자신을 가리키고 상대방을 가리킨다. 장이 끝나면 연습문제가 있다. 책을 딱 반으로 나눠서 뒷부분은 연습문제로 이뤄진 ‘워크북’이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일반인이 몽땅 영어로 된 한 권의 책을 읽어내려간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한 경험일 것”이라고 말했다.

책 표지엔 제목보다 크게 ‘영어 한 달만 다시 해봐’라고 쓰여 있다. 능률영어사 대표인 이찬승씨는 “영어 공부에 손을 놓았던 일반인들이 책을 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영어를 할 필요도 없고 생각도 없던 사람들이 요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영어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능률영어사 홈페이지에는 65살 할머니가 한국방송통신대에서 영어를 배우는 사연을 적어놓기도 하고, ‘발음을 배우고 싶다’고 문의를 해오기도 하는데, “옛날에 없던 분위기”다. 이명박 정권의 ‘영어 몰입’도 한몫했고, 해외여행이 많아지는 환경도 더해졌을 것이다.

이 폭발은 일반인들에게 ‘영어에 대한 욕구’가 무시무시하게 잠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어 학습 시장은 점점 분화돼왔다. 쓰기, 말하기, 읽기, 단어, 문법 등. 이런 조류는 영어를 적극적으로 구하는 이들을 위한 시장이다. 일반인들을 위한 학습서 시장이 존재해오긴 했지만 미미하다.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이런 조류를 역행한다. ‘영어 공부 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어 교재 시장의 여집합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략했다. 그 부분은 ‘영어 공부 하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방대한 시장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베스트셀러의 여건 또한 완성된다. 베스트셀러의 기본 조건은 ‘누구나 집어든다’이다. 그런 면에서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본격’ 영어 교재를 표방하긴 하지만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의 ‘일반인이 보는 영어책’이라는 욕구와 비슷하다. <잉글리시 리스타트>의 키워드는 ‘제너럴’이다. 영어책을 겨냥하고 있지만 핵심은 ‘누구나’다. 아주 특수한 분야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키워드는 ‘일반인 독자’인 것이다.

그런데 정말 영어 학습은 효과가 있을까. 이찬승씨는 지금 아무런 해답을 내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베스트셀러에 등극하고 사람들을 자극하고 있을 뿐 아직까지 검증된 건 없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수천 시간이 필요하다. 머리에 들어가고 나오는 과정까지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책은 어쨌든 책이다. 책은 단순 지식이지 사용과는 관련이 없다”고 덧붙인다.

이 책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영어교재’이다. 머리말에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문구도 나온다. 출판사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원서에 나온 말을 옮겼다고 한다. 10월23일 현재 미국 ‘아마존닷컴’의 이 책 순위는 ‘26만2788’. 2005년판인데 ‘템포러리 아웃오브 스톡’(일시 품절)이다. 원서의 출판연도는 1945년, 성경 이후로 가장 오래된 영어교재인지도 모르겠다.(구둘래 기자)

08. 11. 02.

P.S. 이미 적은 대로 <잉글리시 리스타트>에 대한 나의 반응은 'I. A. 리처즈'(보통 그렇게 읽었다)가 이런 책도 썼나 하는 것이었다('썼다'기보다는 '만들었다'는 게 맞겠지만). 이 저명한 신비평가의 책으로 현재 구할 수 있는 건 <문학비평의 원리>(동인, 2005)와 <수사학의 철학>(고려대출판부, 2001)이 있다. 모두 베스트셀러와는 거리가 먼 책들이다. <문학비평의 원리>는 예전에 <문예비평의 원리>(현암사, 1981)로 출간된 적이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것도 이 현암사판이다.

리처즈의 책으론 고전인 <시와 과학>(을유문화사, 1947)이 고 이양하 선생의 번역으로 나온 적도 있다(저자가 'I. A. 리차아드'로 표기됐다). 그리고 또 하나 C. K. 오그든과의 공저 <의미의 의미>(현암사, 1987; 한신문화사, 1990)도 예전엔 많이 읽히던 책이다. 물론 독자는 주로 어문학 전공자들이었지만...

영미비평사 3 - 뉴 크리티시즘 : 복합성의 시학

미국의 신비평(뉴크리티시즘) 얘기가 나온 김에 정평있던 연구서도 적어두도록 한다. 영문학자 이상섭 교수의 <복합성의 시학: 뉴크리티시즘 연구>(민음사, 1987)가 그것인데, 나중에 <영미비평사3 - 뉴크리티시즘: 복합성의 시학>(민음사, 1996)이라고 재출간됐다. 하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된 듯하다. 현역에서 은퇴한 책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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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03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저자가 문학비평가로군요.몰랐네요.

로쟈 2008-11-03 22:22   좋아요 0 | URL
네, 나름 저명한 비평가이면서 대학 영문학과에서 무얼 해야 하는지 틀을 마련한 사람이죠...
 

오랜만에 한국시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강정과 김경주 두 시인이 각각 새로운 시집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강정 시인의 세번째 시집 <키스>(문학과지성사, 2008)와 김경주 시인의 두번째 시집 <기담>(문학과지성사, 2008)이 그 시집들이다. 최근시의 한 경향을 확인해볼 수 있다.

강정(37·사진 왼쪽) 김경주(32·오른쪽)

한겨레(08. 10. 31) '시인의 실험실’에서 발사된 4차원 언어

“시인은 그의 이미지들의 새로움으로 하여 언제나 언어의 원천이 된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에 나오는 이 말은 시와 시인이 ‘새로운 언어’의 탄생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인은 언어의 완성자이자 개척자이다. 그는 말하자면 고전음악의 완성자이자 낭만주의 음악의 개척자였던 베토벤과 비슷한 운명을 부여받는다. 그는 언어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언어의 궁극에 이르고자 하는데, 그 궁극은 일종의 임계 지점 또는 비등점과도 같아서 언제든 다음 차원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최근 간행된 두 권의 시집에서 언어의 완성자이자 개척자로서 시와 시인의 속성을 만나 보자.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제353권과 354권으로 연이어 나온 강정(37·사진 왼쪽)씨의 <키스>와 김경주(32·오른쪽)씨의 <기담>이 그것이다.

“오래전 한 편의 시가 끝나고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민둥산의 태양을 끌어내렸다”(<사후(死後)의 바람> 앞부분)

“이 오래된 바람의 내력엔 서로 피를 나눠 먹던 종족의 역사가 흐른다/(…)// 또 다른 궤를 그리며 땅속에 덮이는 하늘/ 맨발로 뛰쳐나가 생의 지도를 다시 찍으니/ 펄럭이는 파도 끝 자락에 마지막 시가 불붙는다”(<사후의 바람> 뒷부분)

<키스>는 <처형극장>과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에 이은 강정씨의 세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을 열고 닫는 것은 제목이 같은 두 편의 <사후의 바람>이다. 인용한 시들 중 ‘한 편의 시’가 나오는 것이 시집 맨 앞에 실린 작품이고 ‘마지막 시’가 등장하는 것이 마지막 작품이다. 앞의 작품이 명백한 종말의 분위기를 풍긴다면, 뒤의 작품은 종말을 딛고 선 모종의 갱신을 꿈꾼다. 종말과 갱신의 지표로 나란히 ‘시’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키스>는 제목에서 짐작되다시피 사랑의 노래를 담은 시집이다. 시인은 사랑이 초래하는 혁명과도 같은 새로움을 시집 전편에 걸쳐 강조한다. 하나의 시가 종말을 고하고 또다른 시가 탄생하듯이, 사랑은 하나의 세계를 여의고 새로운 세계를 일구는 행위가 된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나와 당신과 무관한/ 또 다른 인격이 형성된다/ 사랑이란 하나의 소실점 속에 전 생애를 태워/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 이 우주에 더 이상 밀월은 없다”(<불탄 방-너의 사진> 부분)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 이은 김경주씨의 두 번째 시집 <기담(奇談)>은 제목처럼 기이한 이야기들의 집적과도 같다. 시집은 전체 3막에 ‘연출의 변’과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구운몽(口雲夢)’ 등 희곡적 구성이 도드라진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낯선 것은 관습과 약속을 위반함으로써 빚어지는 언어의 충격적 변신이다.

“라미가 는에게 저녁에 손을 잡아주었다 귀머리가 를에게 속삭였다 손에 목을이 달렸다 라미가 을의 생존을 물었고 분홍귀가 욜을 불러냈다 아슬이 나무의 우유 방울을 약속했고 동화는 저녁에 읽지 않기로 는의 손목을 잘랐다 라미는 투명을 흔들던 기괴한 한(寒)이 되었고”(<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도 저녁은 찾아온다-베리에게> 부분)

인용한 시는 사물들의 이름을 서로 바꿔 부르는 페터 빅셀의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을 떠오르게 한다. 빅셀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기담>의 시인 역시 남들과 다른 새로운 언어를 모색한다. 아니, 시인이 새로운 언어를 시도한다기보다는 언어가 시인을 부려서 (인간에 얽매이지 않은) 독자적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래는 언어가 인간들을 향해 하는 말이다.

“‘나는 내 세계의 바깥에 너희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희들은 나를 가지고 춤을 추고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너희들의 세계는 내가 보는 너희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아 우리는 모두 인형들이고 너희들이 들고 있는 인형 역시 나일 것이지만 너희들이라는 인형을 들고 있는 유령 역시 바로 나이지’”(<제1막 인형의 미로> 부분)

새로운 언어의 개척자라는 측면에서 김경주씨는 강정씨보다 더 극단적이고 근본적이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8.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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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 패트릭 모디아노 등과 함께 동시대 프랑스문단의 3대 작가로 꼽히는 미셸 투르니에의 에세이집 <푸른 독서노트>(현대문학, 2008)가 출간됐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민음사, 1995/2003) 외 다수의 소설이 소개돼 있지만, 그의 독서노트와 에세이도 이제 여러 권 소개된 셈이다. 가독성이 떨어지는 책들도 없지 않았는데, 이번엔 '청소년을 위한'이란 수식어가 붙은 만큼 편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간단한 소개기사는 이렇다.

작가는 프랑스·독일·영국·미국·스웨덴 등에서 19~20세기에 걸쳐 출간된 ‘청소년 문학’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명작들과 그 작품의 저자에 대해 독특한 시각과 재치 있는 분석을 제공한다. 폄하의 의미를 담은 ‘청소년용’ 작가로 치부되는 쥘 베른에 대한 재평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타나는 루이스 캐럴의 성적 취향, 셀마 라게를뢰프의 <닐스의 모험>에서 사실주의와 환상문학이 어떻게 행복한 만남을 이루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논리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다. 급된 작품들을 거장의 눈을 통해 읽으며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하는 지적 즐거움이 쏠쏠하다. 언급된 작품들을 읽지 않았다면 한 번쯤 찾아 읽어보고 싶어질 듯하다.(경향신문)

그의 에세이집만의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아래는 <뒷모습>(현대문학, 2002)의 표지.


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미셸 투르니에의 푸른독서노트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10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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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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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침묵- 개정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4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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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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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tois 2008-11-02 01:49   좋아요 0 | URL
술김에 하는 말인데, 르 클레지오 보다는 파트릭 모디아노가 더 좋아요. 물론 노벨상 받지는 못하겠지만...

로쟈 2008-11-02 18:04   좋아요 0 | URL
술김이 아니어도 하실 수 있는 말씀인데요.^^ 짐작엔 모디아노의 독자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적어도 제 주변엔 르 클레지오보다 많았습니다)...
 

이번주 신간들 가운데 학술적인 성격의 교양서로 가장 눈길을 끄는 책 두 권은 각각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를 다루고 있다(그래서 같이 모아놓고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권은 지난 여름 유럽중심주의 역사학 비판서 <역사학의 함정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푸른숲, 2008)로 처음 소개된 제임스 블라우트(제임스 블로트)의 <식민주의자의 세계모델>(성균관대출판부, 2008)이고(http://blog.aladin.co.kr/mramor/2270833 참조. 저자명이 다르게 표기되는 바람에 알라딘에는 '제임스 블로트'와 '제임스 블라우트'가 서로 다른 인명으로 설정돼 있다), 다른 한권은 로버트 영의 <백색신화>(경성대출판부, 2008)이다(로버트 영의 책으론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박종철출판사, 2005)이 이미 소개된 바 있다). 둘다 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두 권에 대한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11. 01) 왜곡된 유럽중심 이데올로기 해부

국가와 도시, 조직화된 종교, 봉건제, 노동분업, 민주제, 관료제, 근대국가, 자본주의…. 고대와 중세, 근대를 거치면서 유럽이 처음 만들었거나 완성시켰다고 배워온 것들의 목록을 나열하자면 한이 없다. 유럽 어딘가에서 시작한 화살표가 동쪽(아시아)으로, 남쪽(아프리카)으로, 혹은 서쪽(아메리카)으로 퍼져 나가는 지도들까지 곁들여지면 이런 주장은 더욱 그럴듯하게 보인다.

저자는 이런 주장에 ‘유럽 중심적 확산론’이 깔려 있다면서 하나씩 기각해 나간다. 세계사에서 항상 주변으로 간주돼 온 지역들을 복권시켜 유럽 단일 중심이 아닌 여러 개의 중심을 갖는, 혹은 아무런 중심을 갖지 않는 탈근대적 세계사를 서술하기 위한 노력이다.

기존 유럽중심주의의 기본 명제는 “유럽은 스스로 진보하고 근대화한다”는 것이다. “비유럽은 정체되고, 불변하고, 전통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비유럽 역시 근대적인 국가를 수립하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도입했으며 나름의 기술을 발전시켜 오지 않았는가. 유럽중심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현상은 유럽이 이식시켰거나 비유럽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확산론’이다.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중국과 인도가 이룩한 상당한 기술적 진보들(예를 들어 제지술과 화약의 발명 등)은? 유럽중심주의자는 태연하게 답한다. “중세 중국과 인도에서 어떤 기술적 진보가 발생했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멈춰버렸다는 것”이라고. 이런 논리는 비유럽이 이룩한 진보를 뭉개버리는 도식으로 자리잡았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1492년은 비유럽 지역에 대한 대규모 식민지 시대가 열린 해이기도 하다. 저자는 1492년 이전, 즉 중세 유럽은 비유럽에 우월하다고 주장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고, 오히려 상당부분은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돼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비유럽 사람들은 유럽인과 달리 태생적으로 미개한 종자들이고, 비유럽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 개념이 없다고 치부함으로써 노예제와 토지침탈의 강력한 논리적 근거를 마련했다. 역사적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 속속 드러남에도 유럽 중심적 확산론이 제국주의 시대, 그리고 지금까지도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신념체계가 강력한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는 식민주의 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1993년 발간된 이 책의 울림이 상당한 것을 보면 식민주의자의 이데올로기는 완전히 퇴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식민주의 이데올로기 아류들이 판치고 있지는 않은지.(김재중기자)  

한겨레(08. 11. 01) 마르크스주의도 유럽 중심주의 갇혀 있다

로버트 영(뉴욕대 영문학·비교문화학 교수·사진)은 ‘트리콘티넨털(3대륙) 탈식민주의’ 이론을 제창한 이론가다. 3대륙 탈식민주의 이론이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억압받는 서발턴(하위계급·기층민중)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서양의 주류 반체제 이론을 비판하고 그 이론들의 진보적 유산을 3대륙 현실에 맞게 번역해 소화하려는 이론이다. <백색신화>는 영의 이론활동에서 전환점이 된 책이다.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에 몰두했던 영은 이 책 집필을 계기로 하여 탈식민주의로 이동했다.

이 책이 주목받는 이유는 지은이 자신의 이론적 전환점이라는 의미를 넘어 탈식민주의 이론의 출현을 알린 저작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데 있다. 탈식민주의 이론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호미 바바의 표현을 빌리면, 이 책은 “탈식민주의 사유의 역사적 계보학을 수립하는 데 의미심장한 기여”를 한 저작이다. 탈식민주의의 이론적 장이 막 형성되고 있던 때 그 장의 형성을 역사적 차원에서 보여준 것이 이 저작인 셈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이 탈식민주의 이론의 장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서구의 주류 반체제 이론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사실이다. 헤겔의 변증법을 이어받은 마르크스주의와 그 계승인 사르트르를 비판하고 알튀세르·푸코 같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의 기여와 한계를 동시에 검토하는 것이다. 이어 이들의 사유를 극복하려 한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 가야트리 스피박의 이론을 탐색한다. 이런 검토 작업에서 중심을 이루는 개념이 ‘유럽중심주의’와 ‘탈식민주의’이다. 유럽 마르크스주의가 유럽 중심주의에 갇혀 있었다면, 사이드 이후 탈식민주의는 이 유럽중심주의 신화를 해체하려는 이론적 도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 책에서 탈식민주의 이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 책은 1990년 초판이 출간된 뒤 2004년에 재판이 나왔다. 2004년 판에서 지은이는 ‘다시 읽는 <백색신화>’라는 제목으로 긴 서문을 썼다. 한국어판은 이 재판을 옮긴 것이다. 이 책의 토대가 된 것은 사이드의 기념비적 저작 <오리엔탈리즘>(1978)이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의 그 어떤 지식도 오리엔탈리즘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는데, 영은 한발 더 나아가 서양의 가장 진보적인 이론들조차 유럽중심주의적 백색신화에 갇혀 있음을 입증한다. 이때 영이 맨 먼저 공략 대상으로 삼는 것이 헤겔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타자를 흡수함으로써 주체를 더 큰 주체로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주체-타자 대립을 해소한다. 지은이는 헤겔의 변증법이 19세기 제국주의 기획을 철학적으로 모방한 것이라고 말한다. 타자의 주권을 박탈해 주체에 통합시키는 변증법의 지식 구성 방식이 서구가 비서구를 지리적·경제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을 흉내낸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런가 하면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관념론을 뒤집었을 뿐 유럽중심주의와 공모하는 개념체계의 작동양식을 뒤집지는 못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럽중심주의의 연장이었다. 지은이는 유럽의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모든 인간 현상들을 경제결정론으로 환원시켰으며, 인간의 역사적 과제를 근대성 달성에 귀속시킴으로써 유럽 역사를 모범으로 제시했고, 혁명주체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수렴시켰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 담론은 “여성, 인종, 다른 소수집단들, 나아가 식민화되거나 식민화를 경험한 제3세계 국가의 사람들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을 겪은 사람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기능”을 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화한 것은 미래의 계급투쟁을 위한 조건을 창출했기 때문에 결국 최선이었다고 한 마르크스의 진단은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유럽중심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지은이는 사르트르가 식민지 해방 투쟁에 동참했지만, 결국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유럽중심주의 한계를 반복했다고 비판한다. 지은이가 보기에 당시 유럽 마르크스주의는 제3세계에 대한 ‘생색내는 온정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말할 수 없는 제3세계 민중을 대신해 발언하면서 그들을 종국엔 지워버리는 유럽 마르크스주의를 지은이는 이렇게 비판한다. “서발턴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배세력들이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한계는 알튀세르·푸코·데리다·들뢰즈를 포함한 광의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됐다. 그리고 그런 이론적 바탕 위에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출현했다. 그러나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작동 시스템을 폭로하기는 했지만, 그 시스템을 획일적으로 인식함으로써 비서구 내부의 모순·갈등을 보지 못했다. 이런 한계는 다시 바바와 스피박의 비판을 받았으며, 이들이 등장함으로써 탈식민주의 사유의 새 지평이 열렸다고 지은이는 말한다.(고명섭 기자)

08.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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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스트식민주의와 문화번역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19 21:00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로 국내에는 소개된 로버트 영 교수가 학술대회 참석차 방했던 모양이다. 인터뷰기사가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그의 책으론 <백색신화>(경성대출판부, 2008)와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박종철출판사, 2005) 두 권이 번역돼 있다. 간략한입문서 시리즈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 책도 소개됨직하다. 교수신문(11. 06. 17)번역불가능한 것은 새로운 실천을 낳는 '씨앗' 제공" 로버트
 
 
노이에자이트 2008-11-01 18:27   좋아요 0 | URL
근대화는 서구화가 아니라고 해버리면 간단하지 않을까요.예를 들어 유럽이 예전엔 이슬람을 통해 문물을 수입하던 때도 근대화라고 봐도 될 것 같아요.그렇게 되면 근대화가 몇 번 씩 있게 되지요.탈근대 논의에 이런 주장은 없나요?

로쟈 2008-11-01 19:27   좋아요 0 | URL
근대화의 모델을 만들어놓은 것이고 또 그게 가장 '성공적'이었기 때문이겠죠. 월러스틴이 '유럽적 보편주의'라고 부른 '보편주의'를 세계화하고. 월러스틴은 근대 대학제도 역시 '유럽적 보편주의'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는데, 그렇다면 탈근대화, 탈서구화가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지금과는 다른 대학제도를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