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1차세계대전의 기원

7년 전 책소개다. 개인적으로 강의에서 가장 자주 언급하는 전쟁이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조국전쟁)과 제1차세계대전이다. 조국전쟁은 러시아사와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하기에, 그리고 1차세계대전은 19세기와 20세기의 분할선이어서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 오늘 강의에서 읽은 <라데츠키 행진곡>만 하더라도 1차대전의 당사국 오스트리아제국의 운명을 다룬 작품이다. 브로흐 소설과 제목이 같은 <몽유병자들>을 구해놓기만 하고 아직 통독하지 못했는데 시간을 좀 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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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광부처럼 노동할 의향이 있는가

7년 전 페이퍼다. 프루스트가 옮긴 러스킨의 독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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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을 강의에서 읽으며 그의 신작들도 언급했는데 <더 리얼 씽>(2024)과 <모더니즘>(2025)이 그에 해당한다. 모두 80대의 비평가가 펴낸 책(이글턴은 1943년생이다). 더불어 <더 리얼 씽>은 번역이 안 좋아서 강의에서 교재로 쓰려다 포기한 기억이 떠올랐다. 단순하게 아래 인용문에서 원문에도 없는 ˝19세기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운운은 뭔가 어이없다는 인상을 준다. ‘19세기‘가 번역에만 들어간 말이다.

생년이 비록 19세기(1871년생)라 하더라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의 작가를 발자크(1799-1850)나 에밀 졸라(1840-1902)와 같은 19세기 작가로 분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 페이지에 ˝18세기 영국 작가 클라라 리브˝(이건 원문 대로다)란 말이 나와서 짝을 맞추려 ˝19세기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로 옮긴 듯싶지만, 그렇더라면 그런 친절은 ˝20세기 프랑스 작가˝로 표현됐어야 했겠다. 같은 단락을 AI에게 번역하도록 해봤다.

˝그러나 예술은 어떻게 삶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일 수 있는가? 예술이란 형성하고 선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예술을 “삶을 충실하게 재구성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렇다면 사물들이 겉으로 나타나는 방식에 충실한 채 어떻게 그것들을 다시 구성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들을 재배치함으로써 오히려 그 진실을 더 온전히 불러낼 수 있는 것일까? 어떤 경우이든, 모든 것이 재현될 수는 없다. 양성자는 실재하지만, 그것의 스케치를 휘갈겨 그릴 수는 없다. 척추를 따라 전해지는 찌릿한 감각은 회화보다 인쇄물에서 더 쉽게 재현된다. 기독교인에게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어떤 존경받는 신학자도 당신이 휴대전화를 준비한 채 예수의 무덤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면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실제로 벌어졌지만, 모든 칼부림과 고통의 비명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모든 리얼리즘은 자신이 묘사하는 것의 편집된 버전이다.˝

개인적인 판단으론 별차이 없거나 더 이해하기 쉽다(AI의 번역은 1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뜻하는 바는 우리가 철학이나 이론서 번역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 거의 모든 언어의 어지간한 난이도의 책들을 이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번역에 대한 시비나 비평도 이제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긴 한데 아직 비용 고지서가 날아오지 않은 편익 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형태와 선택성의 문제인 예술이 어떻게 삶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이 될 수 있는가? 19세기 프랑스 작가인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예술을 ‘삶의 충실한 재구성‘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어떻게 보이는 대로 충실하면서 한편으로 사물을 재구성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그것들을 재구성함으로써 진실을 더 완전하게 환기할 수 있을까? 어찌 되었거나 모든 것을 표현할 수는 없다. 양성자는 실제 존재하지만, 그 개요를 단숨에 휘갈겨 쓸 수는 없다. 척추의따끔거림은 그림보다 글에서 더 쉽게 표현된다. 기독교인에게 부활은 실제 사건이었지만,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라 해도 휴대폰을 들고 예수의 무덤 주변에 숨어 있었다면 부활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아우스터리츠전투(1805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동맹군과 치른 전투)는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지만, 이 전투에서 격돌하는 검들과 고통스러운 비명까지 표현할 방법은 없다. 그러한 모든 사실주의는 사실주의가 묘사하는 것을 편집한 버전이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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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다카시의 미시마 유키오 평전을 읽다가 오류가 눈에 띄어 교정한다. 원문의 오류인지 오역인지는 불확실하다(짐작엔 역자가 잘못 본 듯싶다). 일본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탄생과 관련한 것인데, 사이덴스티커의 회고에 따르면 1950대 후반부터 일본작가가 유력한 수상후보로 부상하고 1960년대 들어서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가외바타 야스나리에 이어서 젊은 작가 미시마도 대열에 가세한다(사이덴스티커가 마음에 정해둔 순서이기도 하다). 결국 수상자는 1968년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

연장자이자 유력 후보였던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가 사망한 1965년은 미시마가 최후의 대작 <풍요의 바다> 연재를 시작한 즈음이다. 이미 1963년에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했다는 미시마는 3년 연속(그러니까 1963, 1964, 1965년에 후보였다는 것이겠다) 그리고 1968년과 1969년에도 후보에 올랐다고 이노우에는 전한다(모두 다섯 차례다). 최종후보에 올랐었다는 1963년이 눈길을 끄는데 (다니자키와 가와바타를 제치고 수상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이 해의 최종후보 6인 가운데 결과적으로는 3인이 노벨상 수상가 된다. 만약 미시마가 수상했다면 38세 수상으로, 역대 최연소 수상자가 됐을 것이다(실제로는 러디어드 키플링이 최연소이고 카뮈가 뒤를 잇는다).

이노우에가 마지막에 덧붙인 ˝실제 최연소 수상자는 그리스 시인 요르고스 세페리스˝가 오류인데 ‘최연소‘가 빠져야 한다. 1963년의 실제 수상자는 그리스 시인 요르고스 세페리스(1900-1971)라는 문장이어야 하기에. 우리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 시인 세페리스는 수상시점에 63세였으므로 최연소라는 수식어는 맞지 않다. 일설에는 노벨상 수상 불발이 미시마의 자살 동기 중 하나라고도 한다. 이 설에 따르면, 문학적 스승 가와바타가 이를 부담스러워 해 1972년 자살한다. 노벨상 유력 후보작가와 실제 수상작가가 연이어 자살한 것이 1960년대말-1970년 일본문학의 특이한 풍경이었다.

4부작 <풍요의 바다>의 제1부가 되는 <봄눈>(<신초), 1965.9.~1967. 1.)을 쓰기 시작한 1965년에 사망한 작가는 에도가와 란포(江戶川)와 다카미 준(南見順) 등 여러 명이다. 미시마가 다카미 준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미시마가 첫 번째에 염두에 둔 것은 7월 30일에 사망한 다니자키 준이치로일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니자키는 미시마도 추천서를 쓴 1958년 이후 매년 노벨상 후보에 올랐지만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결국 수상하지 못하고 말았다. 수상을 전제로 한 외국 미디어의 취재가 허사로 끝난 적도 있어서 다니자키는 쇼크를 받았을 것이라고 도널드 킨은 전한다.
그러한 과정을 옆에서 보았던 미시마 자신은 1963년부터 3년 연속 공식 노벨상 후보가 된다(그 후 1968년과 1969년에도). 특히 1963년에는 사뮈엘 베케트(1969년 수상), 파블로 네루다 (1971년 수상) 등과 함께 최종후보 여섯 명에 포함되었다. 이때 미시마 나이 38세, 만약 수상했더라면 2020년 지금까지 최연소 수상자로 남았을 것이다(실제 최연소 수상자는 그리스 시인 요르고스 세페리스).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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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도 전에 읽은 것 같은 책들이 있는데 렉스 버틀러의 <슬라보예 지젝>이 그렇다(라이브 이론 시리즈의 여러 권이 그렇다). 원서는 2005년에 나왔고 나도 그 즈음에(아마도 도서관 책을 복사했을 것이다) 손을 댔던 책이니 얼만큼은 읽었을 것이다. 최근 몇년 팬데믹과 관련된 지젝의 책들만 읽다가 그의 철학서들을 올해 다시 읽으려는 참이라(오랜만에 들뢰즈와 지젝 읽기 모드다) 점검 차원에서 빼들었다. 다시 시작이다...

이런 모든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지젝이 말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우리는 서양 문명의 기원 이후 오직 드물게 찾아볼 수있었던 어떤 가능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 누구보다도 고대 그리스의 영웅 안티고네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녀는 아주 터무니없이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비극적 대의를 위해자신을 희생한다. 즉, 우리는 여기서 라캉의 용어로 하면 ‘두 죽음 사이‘에 있는 존재, 자신의 외면이 껍데기나 잔해로 축소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안티고네처럼 대의가 결핍된 세상에서 어떤 비범한 대의에 사로잡힌 채, 모종의 멈출 수없는 힘으로 충만한 것 같은 사람이다. 지젝은 일종의 죽음충동, 자기소멸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가드러내는 것은 삶 자체가, 즉 심오한 의미에서 삶은 이러한 죽음을 향한 전진 앞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 우리가 그와 같은 삶을 영위할 때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저편 (저승)에서 볼 때만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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