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 걸러서 '작가와 문학사이'를 옮겨놓는다. 이번주는 소설가 편혜영 편이다. 첫 창작집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을 통해서, 우리문학에서는 좀 낯선 '하드고어 원더래드'의 세계를 펼쳐보인 바 있는 작가이다(첫 창작집의 제사가 '안녕, 시체들'이었다). 개인적으론 그녀의 문장들을 좋아하며(건조한 단문들이다) 그녀의 장편소설이 기대된다(그게 가능한지 궁금하기도 하고). 아래 글에서 평론가는 그녀의 세계를 인간이하(subhuman)의 인간성 탐구로 규정하고 있다. 

경향신문(07. 05. 12) [작가와 문학사이](17)편혜영-인간 이하의 인간성 탐구

여기 죽음의 수용소에서 떼죽음을 당한 유태인과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도살된 가축이 있다. 대개 학살된 유태인은 연민과 공감의 대상이 되지만 도살된 가축은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런가? 아니, 어쩌면 인간의 죽음과 동물의 죽음을 비교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존 쿳시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서 노작가의 말을 빌려 우회적으로 이 두 죽음이 다르지 않음을, 다르지 않아야 함을 주장한다.

흔히 공감(sympathy)이나 감정이입(empathy)을 타자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것으로 보지만 사실은 전적으로 주체의 자기 이해에 불과하다. 나는 나를 연상시키는 존재만을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다.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란 상상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물의 마음이란 의인화와 동일시의 과정을 거친 이후의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동물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인간성(humanity)이란 동물의 마음, 혹은 동물됨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감과 감정이입을 불가능하게 하는 속성에 불과한 것이다.



편혜영의 소설에는 바로 그런 인간성이 실종된 존재들, 예컨대 다양한 혐오동물(쥐 바퀴벌레 개구리 구더기 등등)과 썩어가는 시체 혹은 시체나 다름없는 인간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인간적으로’ 참기 어려운 악취(얼마나 지독했으면 “다락의 쥐들조차 미쳐 날뛰게” 할까?)를 풍기고 ‘인간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괴한 모습을 지닌 존재들이다. ‘아오이가든’에서 인간은 고양이를 삼키다가 개구리를 낳다가 급기야 개구리가 된다. 인간과 고양이, 개구리는 뒤섞이면서 인간을 인간 이상이거나 인간 이하가 되게 한다.

그런 지경이니 편혜영의 소설에서 “이성적이고 정당한 것은 내가 아니라 개”(‘만국 박람회’)라는 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또 “우리는 결국 또 하나의 쓰레기가 되어 소각장에 던져질” 운명(‘맨홀’)이라는 말에 충격받지 말기를. 오히려 편혜영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다른 존재가 될 때까지” 변신을 거듭한다. 급기야 인간은 ‘부패하기 쉬운 단백질 덩어리’인 시체의 자리에 서게 된다. 편혜영의 소설은 그렇게 인간의 지위를 단백질의 자리로까지 끌어내린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역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이 아닌 모든 비루한 것들과의 공감을 위한 제스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른다. 아무리 시체되기, 동물되기 ‘놀이’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진짜 시체가 되기 전에는, 진짜 동물이 되기 전에는 시체와 동물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시체와 동물이 된다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는 시체와 동물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은 시체와 동물이 되는 순간 그저 시체와 동물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게다가 시체와 동물은 말이 없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시체와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우리는 나와 다른 존재들, 흔히 타자라고 불리는 존재들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혜영은 시체 동물 사물 등과 같은 비인간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비인간적 존재들의 총체임을, 즉 잡종적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썩어가는 시체의 살조각은 물고기의 밥이 되고 다시 그 물고기는 ‘입맛 다시는 반찬’이 되는 순환구조를 상상해보자(‘시체들’). 그때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시체와 물고기가 뒤섞인 존재가 된다. 우리 인간이 시체와 물고기의 마음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리 안에 시체와 물고기가 있다는 자각에서부터 나와 다른 존재와의 불가능한 공감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니 편혜영 소설의 불편함과 불쾌감을 ‘인간적인’ 편함과 쾌감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말자. 그 ‘비인간적인’ 불편과 불쾌야말로 ‘너’라는 불가능한 허구(fiction)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심진경|문학평론가)

07. 05. 12.

P.S. 캐리커쳐와 사진 속의 작가는 너무도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내가 실제로 본 작가는 사진 속 이미지와 같았지만 작가 편혜영의 이미지는 검은 옷을 입은 캐리커처와 가깝다. '편혜영'이란 이름의 두 동거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작년 11월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자 인터뷰('편헤영-정미경'편)를 페이퍼로 옮겨놓은 게 있는데, (링크할 주소가 너무 길어서)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에 관한 대목만을 다시 옮겨놓는다. 그녀의 대표작이면서 작년에 발표된 가장 중요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편혜영, '사육장 쪽으로'

“천성적으로 착하고 교훈적인 얘기엔 흥미가 없어요. 이질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를 좋아하다 보니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인 상상력이 발달한 것 같아요.”

작품과 작가의 실제 이미지가 상충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사육장 쪽으로>의 편혜영(33)씨는 그 충돌이 유별나다. 얌전하고 부끄럼 많은 성격을 보면 ‘천상 여자’이지만, 그의 작품은 엽기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통해 독자의 청각과 후각에 극한의 공포를 불어넣는다. “제 소설을 보고 집에 혼자 있을 때 뭐하고 지내는지 궁금하다는 분들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쥐 배 가르며 놀아요’라고 농담했어요.(웃음) 제 작품이 저의 인상과 괴리되는 데서 오는 충격효과가 컸던 것 같아요.”

<사육장 쪽으로>는 평화로운 전원주택 마을의 중산층 소시민이 파산 경고장과 마을 사육장 개들의 습격을 동시에 받게 된, 강렬한 위기의 하루를 그린 단편. “처음부터 중산층의 속물성과 깨지기 쉬운 허구를 드러내자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고, 이미지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제가 생겼어요. 사육되는 개들은 사육장 안에서만 생활하고 삶과 죽음의 방식이 타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도시인과 비슷하기도 하잖아요.”

편씨는 “전에는 문제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 극단으로 이미지를 밀고 나갔는데, 이젠 그런 이미지들에 손이 안 간다”며 요즘의 변화에 대해 말했다. “워낙 강력한 감각이라 중복되면 효과가 체감되게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주인공의 아기가 개한테 물리는 장면도 묘사를 참았는데, 많은 분들이 여전히 잔인하게 느끼시더라구요. 아, 나는 태생이 끔찍해서 이런 걸 너무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 자책했어요.”

2000년 등단해 그 이듬해부터 직장생활과 소설쓰기를 병행하고 있는 편씨는 “사무원의 쓸쓸함에 관한 소설은 열 편이라도 쓸 수 있다”며 웃었다(*그런 쓸쓸함에 관한 소설도 읽고 싶다, 사실은). “사실 소설이라는 게 노동으로선 참 형편없는 일이거든요. 하지만 소설을 쓰는 그 시간만큼은 내가 유일하게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 매혹적이에요. 사회적 인간으로 살다 보면 남들 눈에 보이는 내가 진짜 나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많은데, 소설을 쓸 때만은 그런 고민이 없으니까요.”

◆ 심사평: 삶의 부조리 감각적 형상화 탁월
<사육장 쪽으로>는 우리 소설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야생의 상상력이 그로테스크하게 빛나는 작품이다. 도시 인근의 전원주택단지를 지배하고 있는 삶의 부조리를 이 소설만큼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소설도 드물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사육장의 개 짖는 소리로 청각화한 이 야만적인 공포는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소시민의 삶을 위협하는 삶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놀라운 메타포라고 할 만하다.

편혜영이 이런 종류의 알레고리에 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상적 삶을 특유의 판타지로 추상화하는 알레고리 작가로서의 편혜영의 독특한 위상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첫 소설집 <아오이 가든>은 역겹고 끔찍하며 엽기적인 상상력의 창고와도 같았다.

그러나 <사육장 쪽으로>에 이르게 되면 이 작가가 그 기괴한 악몽 아래 하나의 현실적인 밑그림을 살짝 배치해 둠으로써 독자들에게 해몽의 실마리를 제공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실과 판타지가 절묘하게 섞여있다고 할까. 파산 직전에 이른 가장이 치매에 걸린 노모와 개에게 물어뜯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 헤매는 이 소설의 마지막은 우리의 현실이 이 끔찍한 악몽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상상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문학평론가 신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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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바이지만, 김훈의 신작 <남한산성>(학고재, 2007)이 상반기 한국문학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문학의 전반적인 위기/침체론과 일본문학의 지속적인 강세 속에서 사뭇 이례적인 '스코어'이다. 그와 견주자면 이미 많은 리뷰들이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평단의 미적지근한 모양이다(정말로 그런 기이한 무관심에 의해서 김훈과 공지영은 묶이는 것일까?). 현장 평론가인 이명원씨의 리뷰를 읽어보니 그렇다. 평론가들에게는 이미 '견적'이 다 나와있는 작가인 탓일까?(하지만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평론을 쓸 일 자체가 드문 것 아닐까?) 다른 이유도 있는 것인지는 더 두고봐야겠다... 

한겨레(07. 05. 10) 김훈의 소설은 유령인가?

문학평론가라는 자가 왜 문학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질 때가 있다. 특히 요즘처럼 한국 소설의 침체가 심각하게 운위되는 때는 더욱 그러하다. 대중적인 차원에서 일본 소설 읽기가 선풍인 것처럼 말해질 때, 그 현상에는 동의하지만, 한국 소설도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출판평론가 한기호씨의 견해를 들어보면, 위기의 원인은 명료해 보인다.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비평의 신뢰성 상실이다. 그간의 한국 소설 비평이 작품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덕담과 주례사로 일관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발언을 신뢰했던 독자들이, 오히려 지금 한국 소설에 대한 불신을 노골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소설의 단편장르에의 집중현상도 위기의 한 요인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겨레>의 최재봉 문학전문기자나 문학평론가 남진우씨 등에 의해 제기된 바 있는데, 한국 문단과 문학상 제도가 단편소설에 편중됨으로써, 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장편소설의 미학적 혁신과 문학성이 취약해졌다는 견해로 요약될 수 있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연초에 몇 차례 페이퍼로 다룬 바 있다). 설득력이 있는 견해인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단편소설이 집중적으로 게재되고 있는 문예지 시장이 침체일로를 겪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소설 독자층의 변화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 견해도 존재한다. 문학평론가 천정환씨는 현재 한국의 소설 독자층은 대단히 협소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문학지망생 그룹과 20~30대의 여성 독자들은 여전히 한국 소설의 유력한 독자층이지만, 1970∼80년대의 소설시장의 활황을 가능하게 했던 30대 이상의 남성 독자들과 소설에서 ‘재미’ 이상의 것을 추구했던 계몽독자 또는 지식인 독자들이 대거 소설 시장에서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인 것이 소설보다는 역사 전기물과 인물평전류가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폭넓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나는 ‘재미’도 중요하고, ‘의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미와 의미가 정교하게 결합된 소설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베스트셀러 외국 소설들이 그간 보여주었던 문학시장의 사정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한때 폭발적 독서붐을 일으켰던 쿤데라와 베르베르의 소설들, 쥐스킨트와 하루키, 그리고 에코의 소설들은 재미와 결합된 소설적 의미의 파급력을 잘 보여주었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나는 유독 소설에 대해서는 깊은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는 성인남성 독자들을 견인할 수 있는 성숙한 고민을 담은 소설도 더 많이 출현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시장에서 독자들의 이 압도적인 성적 불균형이 얼마간이라도 시정되기 위해서는, 소설 읽기에서 이탈한 성인남성 독자들과 계몽독자들에게, 소설을 읽는 일이 단지 ‘시간 때우기’의 수단만이 아니고 성숙한 인간세계에 대한 심원한 고민의 산물일 수 있다는 기대를 충족시키는 소설의 출현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소설가 김훈의 작품들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독서열에 대해 치밀한 비평적 분석이 가해질 필요가 있다. 김훈의 소설들은 그가 써내려간 에세이들을 포함하여, 산다는 일의 치욕과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구조화된 권력의 냉혹한 질서에 대한 정교한 보고서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무력한 개인이 몰락할 것이 분명한 운명 앞에서조차, 그것과 치열하게 싸우고 또 패배를 끝없이 자기화하는 면모를 드라마틱하게 형성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훈 소설에 대한 비평가들의 무관심은 실로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김훈의 소설은 유령인가?(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07. 05. 11-12.

P.S. 온라인 학술저널 '담비'에서도 김훈에 대한 특집기사를 엊그제부터 연재하고 있다(기사가 회원전용으로 돌려져 있어서 붙여놓았던 링크주소는 지운다. 대신에 무화과나무님이 옮겨놓은 기사를 참조하시길. 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1114273). 기자는 마지막 문단에서 예전에 '로쟈'가 쓴 '김훈론'을 인용하고 있어서 이채롭다.

이처럼 그는 자기에게만큼 타인에게도 애정을 베푸는데 거기서 발생하는 장점이자 단점 중의 하나는 손만 대면 작품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데에 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독특하고 깊이 있는 북 리뷰로 필명을 떨치고 있는 ‘로쟈’라는 분은 김훈의 문체가 기본적으로 에세이스트의 것이고 소설가의 문체는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그 이유는 아름다워도 적당히 아름다워야지 너무 아름다우면 소설이 안 된다는 데 있었다. 평범한 것도 김훈이 묘사하면 평범함의 극단이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공감이 가는 지적이라 해두고 싶다.

아마도 인용출처는 '문체, 혹은 양파에 대한 생각'(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040596&paperId=841840)인 듯하다. 기자가 참조한 듯한 인용문이 포함돼 있는 원래 문단은 이렇다.

"카뮈와의 논쟁에서 사르트르-장송이 지적했던 바는 카뮈의 아름다운 문체가 ‘앙가주망’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의 아름다운 문체,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허무주의적 세계관(“내가 무어라 말했을 때, 그 반대로 말을 해도 다 말이 되는 것 아닌가.”)은 소설에 적합하지 않다. 소설가의 문체는 적당히 아름다워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그것이 ‘산문적 일상’을 묘사/기술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소설가가 자신의 얼굴, 필체, 문체를 갖는 건 바람직하며, 동시에 좋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문체’이어서는 안된다(<내겐 너무 예쁜 당신>이란 프랑스 영화의 문제의식이기도 한데,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아내’로서 적합하지 않다. 결혼생활은 ‘산문적’이기 때문이다)." '독특'하다기보다는 상식을 재확인하는 수준의 내용이다...

P.S. 김훈의 문장에 대한 평 한 가지를 더 옮겨놓는다.

국민일보(07. 05. 18) 김훈 소설의 문장

소설가 김훈은 우리 문단에서 특이한 작가다. 오래 전부터 그는 신문 기사나 산문 등을 통해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오다가, 2000년대 들어 장편소설 '칼의 노래'를 통해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그가 발표하는 작품에는 거의 모든 매체들이 비중있게 지면을 할애할 만큼 그는 스타작가가 됐다. 우리나라의 주요한 문학상도 하나하나 차지하고 있다.

이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근작 장편 '남한산성'을 보면 그가 얼마나 도저하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 깊고 비장한 인식이 얼마나 촘촘한 문장으로 표현돼 나오는지,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私)소설화·여성화돼가는 우리 소설계에서 얼마나 튼실한 웅성(雄性)으로 남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뛰어난 소설의 출현을 고대하는 독자로서 한가지 주문을 하고 싶다. 문장을 아끼고 인물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김훈에게서 문장을 버리라는 것은 가혹한 주문일 것이다. 그는 2000년대 우리 문단에 나타난 문장의 검객(劍客)이다. 그의 칼은 유례없이 예리하다.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신속하게 베어버리는 검법으로 강호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는 최근 한겨레 신문에 실린 한 대담에서 "저는 사실 글을 쓴다는 일에 대해서 아주 잔혹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문장에 얼마나 집요한 관심을 갖는지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말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때론 그런 문장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예를 들어보자. 청나라 장수의 역관(譯官)이 되어 병자호란 때 매국행위를 했던 정명수를 묘사하는 문장- "눈치로 단련된 천례(賤隷)의 총기는 예민했다. 정명수는 여진말과 몽고말을 쉽게 배웠다.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정처 없는 말과 사물에서 비롯하는 정처 있는 말이 겹치고 비벼지면서, 정처 있는 말이 정처 없는 말 속에 녹아서 정처를 잃어버리고, 정처 없는 말이 정처 있는 말 속에 스며서 정처에 자리잡는 말의 신기루 속을 정명수는 어려서부터 아전의 매를 맞으며 들여다보고 있었다."(72쪽)

산문으로는 아름다운 글이지만 소설로서는 애매한 표현이다. 이런 문장에 의지하면 소설의 형상화는 힘들게 될 것이다. 반면, 김상헌이 임금의 격서를 대장장이 서날쇠에게 전하는 장면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 중 하나로 읽혀진다. 떠나는 서날쇠가 눈 위에서 김상헌에게 큰 절을 하고 김상헌이 땅에 엎드려 맞절을 받는 장면은 특히 뛰어나게 다가오는 데, 이 부분에는 김훈 특유의 관념과 유미(唯美)의 극한을 탐색하는 문장이 개입하지 않고 있다.

소설은 아무래도 등장 인물들의 성격을 만드는 게임이다. 그래서 소설의 도처에서 유미한 문장이 기승을 부리면 등장인물의 성격은 살아나기 어렵다. '남한산성'의 하이라이트는 왕조의 운명을 가르는 주전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논리 대결이다.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의 논쟁은 장엄하다. 그러나 문장에 눌려서 인물이 살아나지 않는 흠이 있다.

요즘 보도되고 있는 이 소설에 관한 많은 기사들을 보면 딱히 삼전도 굴욕의 무엇을 형상화한 내용이라고 자신있게 쓴 내용을 만나기 어렵다. 문장이 작품을 압도하는 데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설의 독자는 작품 속의 등장인물과 연애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소설 독자의 중요한 특권이다. '남한산성'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장대한 인식은 보여주었지만, 연애하고 싶고 두고두고 생각나게 하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데까지도 이른 것인지는 의문이다. 앞으로 김훈 소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더 빛나기 위해서는 이 지점에서 씨름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임순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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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5-11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 스스로 사유의 계통없음을 공시한 이상 비평가의 어떠한 지적도 피해갈 방편을 마련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미당이 스스로를 무당이라 칭했듯 말이죠.

로쟈 2007-05-12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식 허무주의가 어떤 '사상'의 정립과도 거리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데요, 저는 미당식 초월주의와는 그래도 계보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김훈은 그래도 '전장(戰場)'에 있는 작가라서요...

이비 2007-05-13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비 기사의 말미가 로쟈님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덕분에, 로쟈님의 글도 찾아서 읽게 되었네요(‘진행중’ 꼬리표를 떼기 전이시라 전 본의 아니게 담비 회원가입의 수고를 치러야 하였지요. 아, 그리고 ‘양파’ 페이퍼 너무 길어서 읽다가 눈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옮겨 놓으신 담비 기사, 그리고 기사에서 언급되었던 로쟈님의 글을 연이어 읽고 난 뒤 몇 가지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로쟈님은 김훈이 에세이스트는 될 수 있어도 소설가는 될 수 없는 이유로 그의 문체가 아름답다는 점(즉, 문체가 지저분하지 않다는 점)과 작가가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담비 기사에서는 둘 중 첫 번째 이유만을 옮겨 놓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이유도 ‘지저분하지 않다’는 로쟈님의 부연은 생략하고 ‘적당히 아름다운 게 아니라 너무 아름다워서’ 라고 다소 완곡하게 표현되었네요). 하지만 저는, 문체가 지저분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문체가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 라는 단언이 언뜻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저의 이러한 혼란은 아마도, 지저분하다 라는 형용어가 갖는 윤리적 함의 때문일 텐데요, 즉, 지저분하다는 우선 더럽다는 뜻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만들고 그것은 상식의 수준에서는 결코 애호의 요건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담비 기사에서 로쟈님의 글을 언급하면서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 라고만 표현했던 것도 이런 곡해의 가능성을 염려한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1)로쟈님의 표현, 소설은 ‘문체가 지저분해야 한다’도 ‘문체가 너무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는 말의 강조형 정도로 받아 들이고 그 외에 다른 뜻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만약 된다고 말씀하신다면, 전 더 이상 ‘지저분하다’라는 표현에 연연해 하지 않고 이제 ‘문체가 (너무) 아름답다면 왜 소설이 아닌가?’ 라는 한 문장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우선 로쟈님이 사용하신 a이면 b가 아니다 라는 명제에 내포된 의미가 궁금합니다. “어떻게 문체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담! 이래서는 도대체 ‘소설’이라고만 규정하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말이야” 이라는 뜻의 찬사는 아니겠지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게 된다’는 로쟈님의 지적을 떠올린다면 김훈의 아름다운 손가락(문체) 때문에 정작 보아야 할 아름다운 주제(달)에는 눈길을 줄 수 없다 로 풀이할 수 있을 터인데 여기서 세 번째 의문이 생깁니다. 3)그럼, 아름다운 손가락과 아름다운 달의 조합은 현실적으로(소설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건가요? 아무리 손가락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어쨌든-달이 아름답기만 하다면-우리는 그 달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손가락이 아름답다면 당장은 손가락에 눈이 먼저 가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영 달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식의 인과관계는 저로서는 얼른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만약 아름다운 손가락을 가진 것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이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경우일 것입니다. 그건 기만이 될 테지요. 진정 알아보아야 할 아름다운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시선을 아름다운 손가락을 이용하여 현혹시키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혹시 4)로쟈님이 처음에 언급했던 두 번째 이유, 김훈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아름답지 않은 달과 유비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이 결국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은 소설이 아니다 라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면 과연 소설이 표방해야 마땅할 세계관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의문에 다다릅니다. 이러한 의문은 로쟈님이 샤르트르의 앙가주망을 언급하셔서 더욱 깊어지는 기분이에요. 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참여를 이야기하며 engage와 embarque를 구분하였지요. 전자는 (사회에) “끌려드는 상태를 능동적, 자의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에 대처해 나가는 태도를 의미”하고 그에 반해 후자는 “수동적, 강제적으로 끌려드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허무주의적 세계관도 나름의 의지표현이 될 수 있지만 샤르트르의 분류대로라면 앙가주망이 될 수는 없겠지요. 제가 파악한 것으로는 샤르트르가 카뮈를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는 1947년 프랑스 라는 특수한 환경 하에서 이루어진 논의인데 이것을 문학(로쟈님의 글에 따른다면, 산문 또는 소설) 전반에 대한 일반론으로 결론내릴 수 있을지요.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앙가주망하지 않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5)그럼 사회적 목소리를 내지는 않아도 미학적 성취를 이루내었거나 인간 내면의 성찰을 행한 소설(제가 여기서 들고 있는 이 두가지 예가 특별히 김훈의 작품을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의 거취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의아해집니다.

언젠가 로쟈님이 페이퍼의 덧글에서 ‘김훈은 스스로를 타자화할 수 없는 작가이기 때문에 아무리 소설을 써도 그건 에세이에 불과하다’라는 요지의 말을 하였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니 로쟈님이 알라딘 페이퍼에서 했던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이 했던 말을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영 자신이 없습니다(그 덧글을 찾기 위해 로쟈님의 엄청난 수의 페이퍼를 뒤질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랬다가는 정말로 제 눈알이 제 자리에 가만 있지 않을 같아 포기했습니다). 어쨋거나 개인적으로 저는, 작가가 스스로 타자화가 불가능하면 소설을 쓸 수 없다 라는 단언에 더 고개가 끄덕여지거든요.

이비 2007-05-13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길어서 잘렸습니다)타자화 되지 못한 혹은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데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 작가라면 그 사람이 쓴 소설은 자전적 수기의 알레고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자전적 수기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자신의 과거에 대한 미화 혹은 변명 혹은 자기 도취 등 지극히 개인사적 진단에 머무르고 말 테니까요.

몇 가지 물어본다고 해놓고 어처구니없이 긴 덧글이 되었습니다. 조용한 서재에 들어와서 괜히 분위기만 산만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약간 걱정이 되는군요. 너무 산뜻한 봄날이네요. 남은 일요일 오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아, 저는 왜 안부메일 식의 인사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로쟈 2007-05-14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드문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진지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길게 질문을 주셨지만 여건상 간략하게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로쟈님의 표현, 소설은 ‘문체가 지저분해야 한다’도 ‘문체가 너무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는 말의 강조형 정도로 받아 들이고 그 외에 다른 뜻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 다른 뜻이라고 하면 '시장의 언어' 정도의 뜻이 포함된 것으로 보시면 좋겠습니다.

2) 문체가 너무 아름다우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라는 제 주장은 시적인 것과 산문적인 것(소설적인 것) 사이의 구별에 근거한 것입니다. 김훈의 경우엔 에세이적인 것과의 구별일 텐데, 시적인 것을 무엇보다도 자기지시적인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시적 기능'에 관한 야콥슨의 정의를 따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더 주목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죠(미모의 여성운동가 스타이넘의 사례도 같은 맥락에서 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주장을 '호소'하는 것이므로 '공감'하지 않으신다면 할 수 없는 것이고요.

3)그럼, 아름다운 손가락과 아름다운 달의 조합은 현실적으로(소설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건가요? ->2)와 연계해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가능하지만(카뮈의 소설이나 김훈의 소설처럼), '소설'로서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조세희의 소설에 대해서 황순원 선생이 '문체'는 쳐줄만하다고, 했는데 작가에 대한 상찬임에는 분명하지만 '소설가'에 대한 멘트로서도 그러한가는 좀 다른 문제라고 봐요.

4)로쟈님이 처음에 언급했던 두 번째 이유, 김훈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아름답지 않은 달과 유비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이 결국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은 소설이 아니다 라는? -> '아름답지 않은 달'과 관련된 말씀은 제 취지와는 무관합니다. 김훈의 세계관과 소설양식의 관계는 좀더 자세하게 다뤄줘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그럼에도 아웃라인 정도는 제시했다고 생각하고요).

5)그럼 사회적 목소리를 내지는 않아도 미학적 성취를 이루내었거나 인간 내면의 성찰을 행한 소설(제가 여기서 들고 있는 이 두가지 예가 특별히 김훈의 작품을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의 거취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의아해집니다. -> 저는 그것이 긴장관계에 놓인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문학작품으론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같은 소설이 문제적인데, 저는 기본적으로 그 작품이 '소설로 씌어진 서정시'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뛰어난 작품이긴 하나 '소설'이라는 기준으로 봤을 땐 불만족스럽다는 것이죠(이건 제 의견만은 아닙니다). 김훈의 '소설들'도 저는 뛰어난 '에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설'로는 아니라는 것이구요.

끝으로, 김훈은 스스로를 타자화할 수 없는 작가이기 때문에 아무리 소설을 써도 그건 에세이에 불과하다, 같은 진술은 김훈 자신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3인칭으로는 소설을 쓰지 못하겠다고 고백한 바 있으니까요. 김훈도 그렇겠지만, 본격적인 소설이란 건 '3인칭'의 세계입니다... 부족하다 싶은 대목들에 대해서는 다시 질문해주시면 저도 보충하겠습니다...

이비 2007-05-14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잘 읽었습니다. 처음 로쟈님에게 질문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제 마음 속에 떠오른 문제는 사실 4번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앞에 드린 세 가지 질문은 4번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과정이었고요. 1번에서 3번까지의 질문에 대한 로쟈님의 답변 또한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리면 너무 외람될까요? 관점의 문제고 취향의 차이라고 결론내린다면 앞의 세 가지 문제는 어쩌면 '사소한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평론가 입장에서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요). 사실, 소설이면 어떻고 에세이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4번의 문제는 반드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이라는 느낌입니다.

김훈의 작품을 두고 마치 기정 사실처럼 말해지고 있는 아름다운 문체라는 세간의 평에 저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의 오독의 결과인지 아니면 제가 과문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문장이 조성하는 비장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제를 이미지로 형상화시키려고 부단하게 애쓴 흔적이 역력한, 절차탁마된 비장함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거든요. 조금 노골적으로 말해볼까요? 그것은 무협지의 정제된 환영을 불러일으킵니다(적어도 소설에서는 그렇습니다. 그의 에세이는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수는 없군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문체가 따로 뚝 떨어져서 이야기되어진다는 현재의 담론방향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문학이 그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예쁜 옷은 아니니까요. 주제의식과 내용에 걸맞는 문체일 경우에만 아름다운 문체라는 어구가 칭찬이 되는 게 아닐까요. 문체가 아름답다 혹은 문체는 아름답다 라고만 말해지는 것은 문학이 임자 없는 예쁜 옷에 불과하다는 혹평에 다름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김훈이 아름다운 문체 운운하는 말 때문에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 애석하기 그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매체에서 다루어지는 '김훈론'이 핵식을 비껴가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 싶었습니다. 문체의 화려함이나 작품 바깥에서 조명되는 작가 개인의 행보에 지나치게 많은 무게가 실린다는 느낌이에요. 로쟈님의 말처럼, 김훈의 세계관과 소설양식의 관계가 앞으로 좀더 자세하게 다뤄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아웃라인만으로는 조금 부족해요^^)


로쟈 2007-05-1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에세이를 읽어보지 않으셨다니까 좀 의외이면서 왜 그런 의문을 가지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의 소설의 문체는 곧바로 그의 에세이의 문체였습니다(에세이스트였을 때부터 그는 최고의 미문가였습니다). 소설이란 장르로 이동하면서 '절차탁마'한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허무주의자가 미문가가 되는 것은 염세주의자가 미식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됩니다. 특별히 독창적인 생각도 아니기에 자세히 다루지 않는 것인데요, 나중에 본격적인 김훈론이라도 쓰게 된다면 보완해볼 계획입니다...

주니다 2007-05-14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고재가 이번에 대박이 났겠네요. 어쩌다 학고재에서 책이 나오게 됐을까요? ^^

로쟈 2007-05-14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와 무슨 인연이 있었겠지요.^^ 책도 잘 뽑았더군요. 몇 십만 부는 나갈 거 같습니다...

이비 2007-05-14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기대하겠습니다 ^^.

그 사이 몇 가지 의문이 또 생기기는 하였지만 로쟈님에게 질문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것 같지 않아서 제 서재에서 혼자 독백하는 걸로 대충 마무리하였습니다. ^^ 덕분에, 알라딘 인터페이스에도 많이 적응하게 된 의외의 수확이 있었군요.
 

멜기세덱님과 stella09님의 주문에 따라, 요 며칠전부터 알라딘에 '다단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독서문답에 답을 단다. 대부분 평이한 질문들이라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는 점과 애써 호명해주신 분들의 체면이 내가 고려한 사항들이다. 대신에 다른 분들께 바톤을 넘기는 일은 생략할 작정이다(나는 다단계를 좋아하지 않는다).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의례적인 안부인사에 대한 의례적인 답변을 다는 수밖에. "예, 그럭저럭.^^;" 

독서 좋아하시는지요?
'무릎팍도사'에서의 분류를 따르자면 '식상한 질문'이다. 질문자를 한 대 때려주던가?

그 이유를 물어 보아도 되겠지요?
왜 때리느냐고?


한 달에 책을 얼마나 읽나요? 
평균적으로 한달에 30권 이상의 책을 구입하니까 많이 읽어봐야 30권 이내이다(목차와 서론, 혹은 후기 등은 읽어둔다), 라고만 적으면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냥 3권 이상 읽는다고 해둔다. 
 
주로 읽는 책은 어떤 것인가요?
알라딘의 분류대로 하면 가정/건강/요리 범주의 책들을 거의 읽기 않는다. 만화를 읽지 않는다. 수험서/자격증도 읽지 않고, 자기계발, 좋은부모, 청소년도 읽지 않는다. 참고서/학습서 안 읽고, 컴퓨터 안 읽는다. 나머지는 대충 읽는다(무슨 식성 얘기 같군)...  
 
당신은 책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책은 전부이다. 그런데 이 전부인 책들은 책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책의 패러독스이다.
 
당신은 독서를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이 또한 '식상한 질문'이다. 당신은 삶이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만큼이나.
 
 
한국은 독서율이 상당히 낮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더 재미있는 게 많아서가 아닐까? 많은 이들이 재미있다는 만화를 나는 읽지 않는다. 나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굳이 읽으라고 강권하지 않는다. 책읽기는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다.
 
책을 하나만 추천 하시죠? 무엇이든 상관 없습니다.
지금 책상머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책은 <에이젠슈테인 100년>(러트거스대학출판부, 2002)이란 책이다. 오늘 강의한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우연이긴 하지만, 에이젠슈테인은 <죄와 벌>을 영화화하려고도 했다(그의 강의노트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 책을 추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냥 눈앞에 있어서이다. 물론 눈앞에 있는 책들이 얼추 수백 권은 되지만...
 
만화책도 책이라고 여기시나요?
이것도 '식상한 질문'이다('만화책'이라고 적어놓지 않았나?). 나는 만화는 좀처럼 읽지 않지만 <만화의 이해>(시공사, 2002) 같은 책은 읽는다. 
 
 
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비 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나는 문학과 비문학의 구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판타지와 무협지는 '소비문학'이라는 장르로 분류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판타지와 무협지를 잘 손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소비문학'이란 말은 처음 들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아무 생각 없는 게 당연하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책의 작가가 되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작가'가 아니라 '저자'이겠지. '자가출판'한 책까지 포함하면 그래도 꽤 된다.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떻던가요?
반나절쯤 우쭐거리게 된다.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많다(적어도 두 손으로는 다 꼽지 못할 정도로). 오늘은 <죄와 벌>을 읽었으니까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해두자.
 

좋아하는 작가에게 한 말씀 하시죠?
나는 감정표현에 서툴다. 그냥 차나 한잔 권하고 싶다...

이제 이 문답의 바톤을 넘기실 분들을 선택하지 않겠다. 당신의 독서를 잠시 방해해서 미안하다...

07. 0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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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5-10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도 문답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주 잘 읽었습니다. 역시 책 좋아 하시는 분은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시다니까요.

마늘빵 2007-05-10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로쟈님도 걸려드셨군요. 이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로쟈님 책이 뭔지 궁금합니다. 알려주세요.

로쟈 2007-05-10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가출판'(러시아식으론 '사미즈다트')이란 게 책형태로 만들어서 주변사람들에게 나눠줬다는 얘깁니다. 그런 책이 6-7권 됐다는 얘기고 논문에다 공동번역서도 있고... 해서 궁금증에 부합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보다 '멀쩡한' 책들이 나오면 알려드리죠.^^;

비로그인 2007-05-1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실례입니다만 되게 근엄하실 거라고만 막연히 상상했던 로쟈님이
이렇게 유머가 있으신 분인줄 미처 몰랐네요?
정말*100 재밌게 읽었습니다. :)

마늘빵 2007-05-10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쟈님 그럼 접할 수 없겠군요. 서점에 깔리는 책이 나오면 알려주십시오. :)

stella.K 2007-05-10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시니컬하면서도 썰렁하지만 춥지 않은 건 저 이미지들 때문인가요? 킥킥대고 웃다 갑니다.^^

수유 2007-05-1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문답까지 하시다니...그러고 보면 없는--;; 유머도 보이시고. 블로깅의 미덕일까? 아닐까 요?

필라멘트 2007-05-10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픞팍도사"가 아니라 "책도사"이신 로쟈님의 답변이 재미있습니다.^^*

우주돌이 2007-05-10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너무 재미있습니다. 전 재미있는 분이 좋아요. 로쟈님 만세!

다락방 2007-05-11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정말로 재미있게 읽었어요. :)

멜기세덱 2007-05-11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시리 로쟈님의 "독서를 잠시 방해"한 것 같은 죄송스런 마음에 댓글을 다는게 쪼께 송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유머와 재치, 그리고 솔직 담백을 맛보게 해주신 로쟈님....짱~! 이세요...ㅎㅎ

로쟈 2007-05-1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어들 하셔서 다행이네요. 별 내용이 없는 문답인지라 '무릎팍'의 힘을 좀 빌린 것뿐인데요...

yoonta 2007-05-12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평소 글쓰시는 쎈스를 볼 때 이정도 유머감각은 저로선 실망 쫌 인데요..^^;;

로쟈 2007-05-12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yoonta님에게 맞는 유머는 또 따로 있는 것이죠.^^;
 

한겨레에서 옮겨오고 있는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세번째 꼭지는 '볼셰비키 혁명가'이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08093.html). '레프 트로츠키'란 이름이 좀 낯선데, 흔히 '레온 트로츠키'로 알려져 있지만 러시아어 이름은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이다.

한겨레(07. 05. 09) 사진으로 보는 러시아의 20세기 ③ 볼셰비키 혁명가

»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들. <북폴리오> 제공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들 = 1897년 시베리아로 유형 가기 전 모습이다. 조숙하고 대담한 중앙의 블라디미르 레닌이 그룹을 이끌고 있다. 율리 마르토프가 그의 오른쪽에 앉아 있다. 레닌은 법률가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경찰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1895년 파업 물결에 연루될 때까지 실제적인 봉기가 아니라 경제이론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 그들을 방치했다. 본명이 체데르바움인 마르토프는 오데사 출신의 유대인 지식인이었다. 시베리아 유형이 끝난 뒤 그들은 서유럽으로 갔다. 그들은 이상한 동료들이었다. 마르토프는 자신이 사랑한 파리의 혼잡한 ‘라 로통드’ 카페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레닌은 파리를 혐오했고―“제길, 어떤 놈이 우릴 여기에 데려다 놓았는가!”―사도들을 도를레앙 대로에 있는 형편없는 카페로 데리고 가서 그레나딘과 소다를 병적으로 마셔댔다. 그들은 곧 레닌의 볼셰비키와 마르토프의 멘셰비키로 분열했다. 1918년과 1919년에 마르토프는 대담하게 레닌의 테러를 비난했으며 망명지로 쫓겨나 1923년 사망할 때까지 볼셰비키 물결을 중단시키기 위해 애썼다.

» 시베리아의 망명 정치가 그룹. <북폴리오> 제공
시베리아의 망명 정치가 그룹 = 1916년, 그들은 이따금 가장 가까운 기차 종착역에서 1,100킬로미터나 떨어진 이르쿠츠크 주변의 거대한 지역에 위치한 마을에서 생활했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모자를 뒤로 눌러쓴 사람이 요시프 스탈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대원수는 어릴 때 왼팔이 약해져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의무 복무를 면했다. 나중에 스탈린에게 처형당하는 동료 볼셰비크 레프 카메네프가 뒷줄에서 그의 왼쪽에 서 있다. 황실 가족 살해를 명령한 야코프 스베르들로프는 앞줄의 납작 모자를 쓴 사람 바로 뒤에 서 있다. 그는 대부분의 구볼셰비키가 겪은 운명을 모면했다. 스탈린보다 앞서 독감이 그를 데려간 것이다. 시베리아로 추방된 정치 망명객들은 다가올 볼셰비키 체제보다 차르 체제하에서 훨씬 형편이 좋았다.

» 7월 봉기에 연루된 볼셰비크들. <북폴리오> 제공
7월 봉기에 연루된 볼셰비크들 = 7월 봉기에 연루된 볼셰비크들이 법정에서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1917년 7월 볼셰비키가 처음으로 기도한, 실패한 쿠데타에 가담했다. 레닌은 핀란드로 도주했다. 레프 트로츠키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니콜라이 크릴렌코가 앞줄 중앙에 앉아 있다. 4개월 뒤에 “가장 혐오스러운 타입의 타락자”인 이 전직 소위는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북폴리오> 제공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 어려운 정치 사건을 전문으로 담당한 서른여섯 살의 법률가. 혁명은 케렌스키를 러시아의 지도자로 밀어 올렸으니, 처음에는 임시정부의 육군 장관, 그 뒤에는 수상이 되었다.

» 변장한 레닌(왼쪽)과 레닌의 말년. <북폴리오> 제공
변장한 레닌 = 1917년 7월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후, 레닌은 잘 알려진 턱수염을 없애고 대머리를 숨기기 위해 가발을 썼다. 그는 유능한 음모가가 아니었다. 가발이 벗겨져 동료 정치인들은 쉽게 그를 알아보았다.

레닌의 말년 = 레닌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23년 여름 이 사진을 찍을 즈음에는 업무를 처리할 수 없었다. 의사와 간호원 40명으로 이루어진 의료팀이 그를 돌보았다. 레닌이 제일 좋아한 여동생 마리야 울리야노바의 간호도 받았다. 사진에서는 신경외과 전문의가 뒤에 서 있는 동안 마리야가 레닌 쪽으로 몸을 굽히고 있다. 레닌의 다차에 근무하던 한 정원사가 사진을 찍었다.

» 레프 트로츠키. <북폴리오> 제공
레프 트로츠키 = 영국의 비밀첩보원 로버트 브루스 로커트가 묘사했듯이, 레프 트로츠키는 볼셰비키의 정신적 지도자인 레닌과 더불어 “기질 전체가…… 부르주아 혁명가를 서투르게 모방한 모습 그 자체였다.” (왼쪽)

군복을 입은 레프 트로츠키 = 군복을 입은 레프 트로츠키가 트레이드마크인 코안경을 걸치고 10월 쿠데타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그의 오른쪽에 레닌이 서 있다. 트로츠키는 쿠데타를 고무했다. 그의 열정과 웅변은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의 달필은 나중에 쿠데타를 붉은 10월의 영웅적인 신화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상하게 생긴 장갑차량만이 무관심한 대중에게 정부가 전복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 혁명의 변호. 레프 트로츠키. <북폴리오> 제공
혁명의 변호 = 레프 트로츠키가 붉은광장의 공원 벤치를 이용해 만든 임시 연단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볼셰비키 쿠데타 이후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트로츠키는 쿠데타로 인해 발발한 내전에서 적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특별 열차를 타고 전선에서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볼셰비키 군대를 규합하고 다그쳤다. 적군은 부르주아 장교와 전문가에게 많이 의존했다. “일부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 쪽으로 왔고, 일부는 새로운 것을 찾아왔으며, 일부는 대안이 없어서 왔다. 그들은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던 것이다.”라고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썼다. “그리고 일부는 배신을 하고 왔다.”

» 스탈린. 사진(왼쪽)/G. 페트루소프. <북폴리오> 제공
강철 인간 스탈린 = 강철 인간을 뜻하는 스탈린에게는 코바, 니샤라제, 멜리캰츠, 치지코프 등 많은 가명이 있었다. 그루지야의 한 오두막에서 요시프 주가시빌리로 태어난 소년은 1927년경 러시아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곧 수많은 테러를 가하고 사람들을 살해했으며, 편집증으로 인해 사진에서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로이 산책을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 (왼쪽)

가정적인 스탈린 = 스탈린이 아들 바실리와 딸 스베틀라나와 함께 있다. 독재자의 사생활은 가혹하고 비극적이었다. 1932년 한 파티에서 스탈린은 부인 나데주다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봐, 한잔해.” 나데주다는 “제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라고 날카롭게 외치고 파티를 빠져나와 크렘린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스탈린의 무례함은 나데주다를 부러뜨릴 마지막 한 올 지푸라기였고, 그리하여 그녀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1941년 또 다른 아들 야코프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스탈린은 러시아가 포로로 잡고 있던 독일군 장교들과 야코프를 맞바꾸자는 독일의 제안을 거절했다. 러시아 포로들에 대한 독일군의 대우는 이 거절을 사형선고로 만들었다. 스베틀라나는 젊었을 때, 스탈린이 “병적으로 박해를 즐기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 악당들 사이에서. 1936년 모스크바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있는 스탈린. <북폴리오> 제공
악당들 사이에서 = 1936년 모스크바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있는 스탈린. 맨 앞줄 왼쪽 끝에 앉은 흐루시초프는 훗날 스탈린의 학살행위를 비난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흐루시초프의 왼쪽에 검열관 안드레이 주다노프, 집단화 책임자 라자르 카가노비치, 삼류 국방인민위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앉아 있고 엉터리 관료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별 볼일 없는 미하일 칼리닌이 스탈린의 왼쪽에 앉아 있다. 또 다른 생존자들인 게오르기 말렌코프와 니콜라이 불가닌이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다섯 번째에 앉아 있다. 지나치게 비굴했던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는 몰로토프의 부인이 수용소로 보내지고 카가노비치의 형이 처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스탈린에게 아첨했다. 맨 앞줄 오른쪽 끝에는 내전의 영웅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가 있는데, 그는 안장에서 턱걸이를 할 수 있다고 전해졌다. 스탈린은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데 열중했다. 1937년 투하체프스키는 재판을 받고 총살당했다.(<북폴리오> 제공)

07.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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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는 바이지만, 지난 6일 프랑스 대선에서 집권 우파의 사르코지 후보가 당선됐다. 반대로 사회당 후보이자 첫여성 대통령을 꿈꾸었던 루아얄 후보가 패배했다. 좌파 이론의 지주 역할을 해온 프랑스인지라 '현지'의 정치 지형과 선거 뒷얘기도 흥미를 끄는데, 이와 관련하여 레디앙에서 '프랑스통'이라고 할 우석훈 교수의 '관전평'을 옮겨놓는다(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6250).

레디앙(07. 05. 08) 우파의 승리가 아니라 '복수'

1.
프랑스 대선에서 사회당이 졌다. 정확히 말하면 루아얄 여사가 진 것인데, 어떻게 포장하든 좌파가 우파한테 졌다는 객관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회당을 지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오래된 노조 간부출신이었던 뻬레고부아 총리가 권총자살한 이후로 사회당의 미셀 로까르니 하는 정치 엘리트들의 말장난이 싫기도 했지만, 동구의 몰락 이후로 몰락한 공산당에 간호부 출신의 노베르 위가 "코뮤날리즘(communalism. 공동체주의. 파리 코뮌을 상상해보자-편집자)은 인류에게 늘 필요한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은 이후로 대체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막상 TV에서 토론하는 거 보면 공산당이든 아니면 녹색당이든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다.

2.
루아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나는 루아얄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가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정책이라는 눈으로만 보면 루아얄이 과연 좌파 후보인지 오락가락하기도 하는데,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보고도 놀란다고, 선거 내내 나는 노무현을 연상했다. 사실 남자와 여자라는 점과 전문 정치인 출신이 아니라는 점들 - 이런게 중요한가? - 을 빼고 나면 두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그들은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측으로 급회전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래도 정치인으로서의 루아얄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동거 가정 1세대로서 그녀의 사회적 진출 등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점이 많다.



그녀는 1차 결선투표도 사실 간당간당했고, 막판에 차이가 더 벌어졌지만, 대체적으로 출발시점에 비하면 선방한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선방이 사회당의 과실은 아니다. 프랑스 신문들은, 나머지 좌파들이 표를 몰아줬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진 사회당이 정치적 타격이 크게 받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당장 총선이 문제라는 지적도 많다.

3.
사르코지의 승리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많다. 우파라고 다 같은 우파는 아닌데, 지스카르 데스탱 이후로 거의 30년만의 우파의 승리라는 말은 우리 입장에서 이해하기가 조금 복잡하다. 이 얘기는 4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드골이 집권하면서 자신은 좌파와 우파를 초월한다고 말을 했는데, 이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독특한 의미가 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드골은 제 3세계 동맹국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하면서 서방세계 내에서 독립노선을 걸었고, 이런 일련의 입장을 드골주의라고 한다. 공화국연합(RPR)의 지금 시락 대통령이 이런 드골주의를 계승한다. 시락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공한 드골주의자이다.

사르코지는 대중운동연합(UMP)라는 정당을 이끈다. 이게 진짜 프랑스의 우파 정당이다. 그냥 생각하면 시락이 자신의 후계자로 사르코지를 지명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둘 사이는 정적 관계이다. 노선도 다르고, 가는 길도 다르다. 우파도 연정하지 않으면 집권할 수 없는 이런 구도에서 시락이 밀렸고, 사르코지는 그야말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자기 힘으로 대선 후보에 오른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고, <르몽드>지의 편집진은 이것을 "우파의 복수"라고 부른다. 단순히 우파들이 좌파를 이긴 그런 의미만이 아니라 드골주의자들에게서 30년만에 권력을 찾아왔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첫 번째 한 얘기 중의 하나가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라는 것이다. 미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드골주의와의 결별이 사르코지의 당선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의미이다.

4.
미테랑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람이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매력있는 사람이다. 가장 정확한 불어를 구사하고, 몇 분에 한 번 정도만 문법 실수가 나온다고 문법학자들의 연구 대상에 오르기도 했을 정도로 프랑스를 상징했던 정치인 중의 한 명이다. 그 이후로 좌파가 대선에서 이긴 적은 없다. 프랑스에서는 언제나 좌파가 절대수치에서 부족하다. 우파와 시락주의자가 분열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틈을 타고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로 절대로 우파는 분열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좌파 대통령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국회의원 선거는 조금 다르다. 지방정치가 우리나라처럼 지역색으로 호화찬란하게 도배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연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당이 카드를 내어주면서 다른 정당과 손을 잡을 것인가에 따라서 우리식 여당에 해당하는 총리 자리는 대통령 집권에 실패하더라도 어떻게 해볼 여지가 좀 열려 있다. 내 관찰에 의하면 프랑스는 대통령직보다도 총리가 누구인가가 진짜로 국정운영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5.
사르코지는 우파이면서 대표적인 강성이다. 이로 인해서 가장 타격을 받게 될 정치집단은 오히려 극우파들일 수 있다. 영역과 정책이 겹치기 때문이다. '68년의 종언'이라고 호기있게 사르코지가 치고 나가기는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총선까지 지켜봐야 알 수 있다. 하여간 현재로서는 독기가 단단히 올랐다. 전면적인 신자유주의 도입은 물론이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관리 강화 등 대체적으로 극우파 정책들이 도입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미테랑은 물론이고 시락도 극우파는 아주 싫어했다. 미테랑 시절에 우파들이 총리를 먹고 파스쿠아라는 아주 강성 정치인이 내무부장관을 했던 적이 있었다. 무섭던 시절이었는데, 이젠 대통령이 그렇게 하겠다니 사방에서 곡소리가 날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마냥 한 방향으로 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러가지 견제장치들이 작동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프랑스는 그 처절한 '민중'이라는 실체가 눈을 뜨고 버젓이 살아있다. 50%의 투표율을 기록할 수 없어서 투표에서는 지지만, 그래도 몸으로 정책을 막는 일 정도는 아직 할 정도의 정신과 기백은 남아있는 듯하다.

6.
프랑스 대선을 보다가 우리나라 정치판을 보면 심란하다. 프랑스에서는 우파가 대통령이 되고 좌파가 졌다고 대서특필하던 언론들이 갑자기 우리나라 얘기만 하면 진보와 보수라는 또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 이거 우습다. 프랑스식으로 살펴보면, 한나라당의 일부는 극우파에 가깝고, 그 안에 시락주의자들이나 일부 분파들이 열린우리당에 가깝다. 순전히 우파들끼리 나와서 서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이 우리나라 모습이라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이미 권력에 깊이 물든 프랑스 사회당이 좌파 정당으로서는 민주노동당보다 더 선명할 정도이다. 좌우 대립의 구도로 간다면 민주노동당의 왼쪽에 또 다른 정당들이 '나래비'를 서 있는 게 당연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좀 다르다. 내 생각으로는 진보/보수라는 말장난하다가 이렇게 된 것 같기는 하다. 지금이라도 좌파들이 자신을 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이게 무슨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도 아니고, 때로 우습고 때로 서글프다.

7.
패배를 자꾸 경험하거나 자꾸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먼 나라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당장 사르코지를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비교하거나 혹은 사르코지옹이라고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걸면서 깃발 들고 나선 프랑스의 젊은이들을 보면 가슴이 안쓰럽다. 먼 나라의 일이 아니라 당장 우리나라의 민주노동당을 보면 한숨이 푹푹 난다. 솔직히 민주노동당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당장 나부터 그렇다. 그래도 나름대로 선방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셈인데, 그야말로 마음이 안 좋기는 정말 안 좋다.

8.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들은 너무 모범생 같아 보인다. 한 쪽에서는 사생결단을 내리고, 수틀리면 "당 뽀갠다"고 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경선'을 다짐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범생 같아 보인다. 그렇다고 나라고 무슨 뾰족한 답이 있을 리 없으니 지켜보는 심정이 답답할 따름이다. 다당제가 제대로 정착해서 연정과 같은 고급스러운 메카니즘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좌파라면 경기들어서 손을 파르라니 떨 사람들이 당장 내 어머니, 내 아버지인데, 좌파의 깃발을 높이 들라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또 하고 있는 것도 우습다.

대선 시뮬레이션에서 한 번도 사르코지를 이기지 못했던 루아얄을 지켜보던 많은 프랑스 좌파들이 심정이 이와 비슷했을 것 같다. "뭐 좀 쌈박한 거 없어?" 그런데 그게 정책의 눈으로 보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정책에는 기술적인 검토와 대중적 지지라는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필요한데, 이게 거의 마케팅에 버금가는 예술의 영역이라서 골방에서 죽어라고 계산해봐야 '변방의 북소리'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9.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많다. 이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면 좋겠다. 민주노동당이 대한민국 대선에서 승리한다... 국제적인 세계화의 흐름이 멈칫하고, 전세계적인 지형도가 바뀔 일이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다다익선 FTA'를 멈춰 세우고, 민중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일이 더 있겠는가?

꿈도 머리가 아파서 잘 못꿔진다. 우리나라의 좌파가 지금 그렇다. 현재로서는 민주노동당 외에는 대안이 없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당장 내 주위의 동료들만 보더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뭔가 엑기스 하나가 더 필요한 것 같은데, 대선주자들이 모범생 같이 움직여서는 그런 엑기스가 생겨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프랑스는 프랑스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다. 현실로 돌아오면 더 머리가 아프다.

"좌파가 돼도 나라 안 망한다"고 지금부터 편지를 쓰라고 하면, 나도 한 50통 정도는 못 쓰는 글씨지만 쓸 생각이 있다. 뭐든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그래도 민주노동당이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누가 뭘 좀 제시해주면 좋겠다. 연말에 소주 마시면서 "우리나라는 안 된다"는 소리나 하고 있기 보다는 팔 아픈 정도는 감수할 생각이 있다.

하여간 루아얄에게는 사람들이 바라던 "뭔가"가 마지막 TV 토론 때까지도 결국 안 나왔다.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들에게는 "뭐"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뭣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래서 말도 안되는 대 역전드라마가 종종 나오는 야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우석훈 / 성공회대 외래교수)

07. 05. 09.

P.S. 사르코지의 프랑스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는 오마이뉴스의 기사 '2007 프랑스, 나는 소름이 돋았다'(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9012&ar_seq=7)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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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lousies 2007-05-09 04:42   좋아요 0 | URL
프랑스 대선과 관련되어서 이 기사와는 조금 관점이 다른 오마이뉴스 박영신 기자의 글(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9012&ar_seq=7)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로쟈 2007-05-09 07:52   좋아요 0 | URL
선거결과를 생각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기사이군요. 링크해놓았습니다...

전호인 2007-05-09 09:44   좋아요 0 | URL
조중동에서 우파쪽으로 몰아가는 느낌도 듭니다.

로쟈 2007-05-09 22:23   좋아요 0 | URL
우파신문이 우파를 지지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