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이었나 평론가를 만났을 때 요즘 쓰고 있는 글이 뭐냐고 물었더니 무슨 본드걸 이야기에 대한 해설이라고 했다(아이디어를 쥐어짜는 데에서만큼은 우리 작가들도 발바닥에 땀날 정도이다). 직감에 본드 이야기만큼이나 재미는 있겠다 싶었던 소설이 최근에 출간됐다. 평론가는 해설에 '남근이여, 안녕'이란 제목을 붙였군. '본드걸'이란 말이 고상한 뉘앙스를 풍기지는 않지만 재미만큼은 보장할 수 있을 법하다. 어쩌면 좀 섹시할는지도 모르겠고. 한 서평기사를 미리 읽어둔다.

경향신문(07. 02. 24) 본드보다 더 007같은 본드걸

20세기의 아이콘인 이안 플레밍 원작의 영화 ‘007 시리즈’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21편이 제작되면서 그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대단한 완력과 성적 매력을 갖춘 영국 스파이 제임스 본드, 그의 상관인 M, 신무기를 개발해 극의 잔재미를 더해 주는 과학자 Q, 그리고 M의 비서인 머니페니. 늘 등장하는 이들 사이에서 본드의 능력을 시험하는 악당들과 그의 조력자이자 연인인 본드걸은 매번 바뀐다.

젊은 여성작가 오현종은 그 본드걸 중 하나인 미미를 내세워 ‘007 시리즈’의 코드를 뒤집어보는 패러디 소설을 시도한다. 다음 에피소드의 등장과 함께 사라질 운명인 본드걸 미미가 자신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본드에게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 스파이가 되고, 007과 함께 작전에 투입돼 활약하면서 남성중심적·이분법적인 ‘007 시리즈’를 해체해 버린다.

이 소설에서 본드는 더이상 제3세계를 종횡무진하면서 지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백인남자가 아니다. 모종의 작전을 끝내고 휴식에 들어간 본드는 무서워서 공포영화도 보지 못하는 쫌생원이고, 미미의 기분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이기주의자이며, 홈쇼핑이나 코미디 채널을 돌리며 악당과 비슷한 웃음소리를 내는 왜소한 한국 남자다.

그런가 하면 취직면접에서 줄창 떨어진 뒤 언니와 형부가 운영하는 갈빗집 카운터를 보고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미미는 청년백수이자 비정규직 노동자다. 그런 미미가 새로운 출동명령과 함께 다른 애인을 만든 본드에게 복수하기 위해 M의 밑으로 들어가 스파이 교육을 받고 살인번호 013이 된다. 그러나 동료의 말처럼 스파이는 이 시대의 사양산업이다. “위성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제트테러리즘 시대에 스파이가 대체 뭘 할 수 있겠냐”는 자조가 떠돈다.

어쨌거나 좌충우돌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스파이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미미는 드디어 본드와 함께 이쪽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줄 스파이 백색공포를 데리러 일본으로 향한다. 그러나 백색공포는 M의 경쟁상대인 하이드측에 의해 납치되고 백색공포의 애인이던 미스 플라워, 이같은 일을 꾸민 것으로 추정되는 또다른 스파이 살로메 사이에서 본드와 미미는 길을 잃는다.

그런데 주어진 체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본드와 달리, 미미는 스파이세계의 허를 찌르기 시작한다. 착한 본드걸 미미와 나쁜 본드걸 미스 플라워 사이에 대화가 이뤄지고, 하이드의 첩자인 살로메는 다름아닌 M으로 드러난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M은 자신이 키우던 사자에게 먹히는데 그의 몸에 조금씩 쌓여있던 독이 사자를 죽인다.



결국 본드와 본드걸, M과 하이드, 아군과 적군, 선과 악 등의 구분과 위계가 사라지면서 철저히 환멸과 혼란만 남은 ‘007 시리즈’가 독자들 앞에 던져진다. 지난해말 개봉된 ‘007 시리즈, 카지노 로얄’은 본드가 스파이가 되기 전의 에피소드로 돌아가 상처받은 현대의 남성상을 대변하면서 이 시리즈의 클리셰를 해체해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더욱 완전하면서 얄궂은 해체를 보고 싶다면 미미 같은 본드걸의 입장으로 돌아가라고 작가는 강변한다.(한윤정 기자)

07. 02. 24.

P.S. 리뷰기사는 <카지노 로얄>의 본드걸 프랑스 여배우 에바 그린(*이 아니라 카테리나 뮤리노)의 이미지를 붙여놓았는데, 개인적으로 '본드걸'하면 떠올리게 되는 여배우는 캐롤 부케이다. 그건 그녀가 나오는 007영화 <유어 아이즈 온리(For your eyes only)>(1981)가 극장에서 제일 처음 본 007영화였기 때문이다(당연히 가장 흥미진진하게 본 영화이며 이후에 본 007영화들은 대개 시들했다. 물론 머리가 점점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짐작에 영화를 찍었을 무렵 그녀의 나이는 23-4살 정도였다.

한데 지금은 만 50세가 되었다. 이번에 검색해보니 한번 상처한 이후에 지난 2003년 제라르 드파르디유와 재혼한 걸로 나온다. <내겐 너무 이쁜 당신>(1989)에서의 그 바람둥이 남편 말이다!(물론 '내겐 너무 이쁜 당신'이란 게 바람 피는 이유였지만.) 삶은 참으로 뻔하면서도 미스테리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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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4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4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맞습니다. 카테리나 뮤리노란 배우네요. 두 여자 중 왼쪽이 에바 그린이죠. <몽상가들>에 나온 배우. 전 그 새 살이 쪘나 했더니 기자가 잘못 안 것이네요.^^


마늘빵 2007-02-24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몽상가들>에 나온 배우요? 아 이렇게보니 또 다르네요. <몽상가들>에서 참 섹시하고 귀엽고 은은한 매력도 있고 그랬는데.

stella.K 2007-02-2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엊그제 이 책을 선물 받았는데, 로쟈님 페이퍼 보니 선물해준 분이 그냥 보내준 게 아니었네요. 전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거든요.
그런데 <내겐 너무...>이 영화 본 것도 같고 가물가물 하네요. 정신하군...>.<;;
 

한겨레의 '18도'를 편의점에서 사들고 와서 훑어보다가 가장 호기심을 갖게 된 책은 '다윈의 대답'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시리즈이다. 가격이 2만 8500원이라고 돼 있어서 꽤 두툼한 책인 줄 알았더니 4권 합계가 그렇다는 것이고 각 권은 130쪽 안팎 분량에 정가 7500원짜리 책이다. 그러니까 문고본 컨셉에 해당한다.

 

 

 

 

예일대출판부에서 나온 시리즈라고 해서 찾아보니까 'Dawinism Tdoay'라는 원 시리즈 제목이 풍기는 인상과는 약간 어긋나게 지난 1998-9년부터 나온 책들이다(그러니까 지난 세기의 시리즈이다!). 한겨레의 간략한 소개에 따르면, "예일대 출판부에서 펴내 화제를 부른 ‘다윈이즘 투데이 시리즈’의 번역본 <다윈의 대답>(이음). 편집자들은 ‘사회과학적 논제의 패러다임을 진화생물학으로 뒤집는다’는 도전적 표제를 내걸었다.(...) 실제로 책은 인문·사회과학과 진화생물학이 충돌하는 현대사회의 쟁점들에 대한 다윈주의자들의 도발적 ‘대답’을 담고 있다."

"‘다윈주의 자체는 좌도 우도 아니다’며 기존 좌·우파 모두를 비판하고 나선 1권의 저자 피터 싱어는 “적자생존이 아니라 협동”을 인간의 본성이라 주장한다. ‘왜 인간은 농부가 되었는가?’(2권), ‘남자 일과 여자 일은 따로 있는가?’(3권), ‘낳은 정과 기른 정은 다른가?’(4권)로 이어지는 책들은 제목에서 이미 ‘한 판 벌어질 듯한’ 흥미를 자극한다. 이를테면 “여성의 성공을 방해하는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은 고의적인 남녀차별 장치가 아니라 오랜 기간 누적된 본질적 성차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여성주의자들을 도발한다."

이만한 시놉시스라면 좀더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란 아쉬움은 든다. 원서가 80여쪽 정도의 분량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보다는 좀더 두툼했으면 하는 것이다(그러니까 번역본 분량으론 한 200쪽 가량). 물론 이런 푸념은 먹어보기도 전에 양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번역본의 첫 권을 장식하고 있는 건 피터 싱어의 책으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를 부제로 단 <다윈의 대답1>이다. 원제는 '다윈주의 좌파: 정치, 진화 그리고 협동'으로 돼 있다. '프로이트 좌파'와 계열체를 이루는 원제 자체가 내겐 더 매력적인데 요즘 '좌파'란 말이 별로 호감을 주지 않는 국내 정세를 반영한 듯도 하다. 그래도 목차만 보면 저자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마지막 제안으로 그가 덧붙이고 있는 게 '오늘날 다윈주의 좌파의 숙제'인 것이다.

 

 

 

 

시리즈의 첫번째 권으로 출간됐지만 원저 자체는 2000년에 나왔다. 그러니까 영어본 시리즈의 '첫권'과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다위니즘1>의 자리를 차지한 데에는 물론 저자인 피터 싱어의 지명도가 고려됐을 법하다(기억에 싱어는 호주 철학자이다). 알다시피 저명한 윤리학자인 싱어의 책들은 국내에 (거의 놀라울 만큼) 많이/자주 번역돼 있기 때문이다(지명도에 비하면 베스트셀러 학자라고도 할 수 없는데, 좀 기이한 일이다). <다윈의 대답>을 제외하더라도 최근 2년간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이 5권이나 된다. '철학 가판대의 숨겨진 베스트 싱어'라 할 만하다.

나머지 2, 3, 4권의 저자는 모두 생소하며 (알라딘에는) 목차 또한 떠 있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겠다. 대신에 나로 하여금 다윈이즘에 입문하도록 해준 도킨스의 신간이나 덧붙이도록 한다. 작년에 나온 책 <신이라는 망상>이 그의 최신간이다(http://en.wikipedia.org/wiki/The_God_Delusion). 제목 그대로 종교(유신론)에 대한 한 다윈주의자의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종교계와 사이가 안 좋은 걸로 치면 도킨스도 도올 급인 듯하다). 그러한 도킨스의 '무신론'을 유신론적 다윈주의의 입장(?)에서 비판한 책도 <도킨스의 신>이란 제목으로 나와 있다(http://en.wikipedia.org/wiki/Dawkins'_God:_Genes,_Memes,_and_the_Meaning_of_Life). 얼른얼른 번역되면 그 또한 좋지 아니한가?..

07. 02. 23.

P.S. 그러고 보니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 아래의 책도 아직 나오지 않았군. 책장에만 꽂아두기엔 좀 아쉽다. 번역본이 나와야, 멍석이 깔려야 떠들어볼 수 있을 텐데...

P.S.2. 고대하던 책이 드디어 출간됐다. <리처드 도킨스: 우리의 사고를 바꾼 과학자>(을유문화사, 2007). <이기적 유전자>를 낸 출판사에서 그래도 '책임감'을 갖고 출간한 듯하여 미덥다.

간단한 소개에 따르면, "<이기적 유전자> 출간 30주년을 기념하여 펴낸 책. 리처드 도킨스가 과학자로서, 합리주의자로서, 작가이자 대중 지식인으로서 활동하면서 사회에 미친 다방면의 영향들을 살펴보고 있다. 과거 도킨스의 대학원생이었고 지금은 생물학자들인 앨런 그래펀과 마크 리들리가 엮은 이 책에는 리처드 도킨스를 깊이 분석하거나 그와의 개인적인 일화를 회상하는 과학자, 철학자, 저술가의 글들이 실려 있다."

거기에 보태는 스티븐 핀커의 추천사: "내게 가장 심오한 과학적 영향을 끼친 인물은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였다." 얼른 원서와 나란히 꽂아두어야겠다...

07. 0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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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7-02-23 13:13   좋아요 0 | URL
피터 싱어의 책 중 <전쟁 대행 주식회사>는 다른 Singer의 책인데요^^;

로쟈 2007-02-23 13:17   좋아요 0 | URL
수정했습니다. 언젠가 싱어가 둘 있다는 건 확인해놓고 깜박했네요.^^;

2007-02-23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3 13:42   좋아요 0 | URL
**님/ 제가 '개봉박두'라고 해도 되겠군요.^^

자꾸때리다 2007-02-23 23:17   좋아요 0 | URL
알리스터 맥그래스... 옥스퍼드의 성공회 역사신학자... 물리학도 출신... 전 별로 안 좋아하지만 대단한 인물임은 맞는 것 같음...근데 맥그래스가 유신론적 다윈주의라는 이야기는 첨 듣는 이야기삼... 이 사람은 지적 설계 운동하고 맥이 닿아 있는 사람이라 하워드 반틸 류의 유신론적 진화론은 별로 안 좋아할텐데...(아주)

로쟈 2007-02-23 23:29   좋아요 0 | URL
맥그레스에 대한 진술은 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기댄 건 "Alister E. McGrath is one of the world's leading theologians, with a doctorate in the sciences." 같은 소개구절들이었기 때문에요...

2007-02-24 0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4 08:39   좋아요 0 | URL
**님/ 축하드립니다. 정신 없으실 텐데, 내주면 곧 강의부터 하시겠네요(보통 책도 오기 전에 학기가 시작하죠?^^). 싱어와는 나름의 인연이 계시군요. 푸코에 대한 소개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2007-02-24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4 09:02   좋아요 0 | URL
**님/ 그 기사는 몇 달째 걸려있어서 남세스럽게 하더군요.^^;

미생지신 2007-02-25 17:43   좋아요 0 | URL
한겨레의 18도를 편의점에서 사 오셨다는 말씀은 18도만 따로 판다는 말씀인지 금요일자 한겨레를 사셨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편의점에 잘 안 가서...ㅡㅡ.

로쟈 2007-02-25 18:13   좋아요 0 | URL
따로 팔리가 있겠습니까?^^ 주된 목적이 '18도'에 있다 보니 그렇게 적었네요...

자꾸때리다 2007-03-19 11:57   좋아요 0 | URL
아 잘못 알았습니다. 맥그래스는 물리학도가 아니라 분자생물학도 출신이군요. 22세 옥스퍼드 분자생물학 박사 24세 옥스퍼드 신학 박사.

자꾸때리다 2007-05-10 23:27   좋아요 0 | URL
아 죄송합니다. 맥그래스 유신론적 진화론자 맞습니다. ㅡㅡ;;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에서 '바디우, 발리바르, 랑시에르'란 절을 읽다가(이에 대한 정리는 시간이 나면 해둘 생각이다) 문득 호기심에 '자크 랑시에르'를 검색해보았다. 일부 번역문을 포함한 관련자료들이 몇 가지 된다. 그 중 하나를 옮겨놓는다(씨네21에 실렸다는 랑시에르의 인터뷰는 찾지 못했다. 어찌된 일인지 편집장의 말만 뜬다). 랑시에르의 철학 전반을 소개하는 것으로 2005년 봄 연세대학원신문에 실렸던 듯한데, 필자는 최원씨이다. 아래는 필자가 다시 교정을 본 것이라고 한다(작성일자는 05. 03. 28로 돼 있다). 어젠가 '자크 랑시에르 워밍업'을 했지만 워밍업의 마무리로 적합해 보이는 글이다.

'불화'의 철학자 랑시에르 

아마도 한국에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알튀세르가 한창 국내에 소개되고 있던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15년 가량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국내에 변변한 책 한 권 번역된 적 없는 낯선 철학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가 알튀세르의 주도로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1960년대 초반에 진행되었던 <'자본'을 읽자> 세미나에 멤버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간 국내에서 진행된 알튀세르에 관한 논의에서 그의 이름이 거의 자취를 감춰버린 이유는 68년 학생운동에 대한 대응 문제를 둘러싸고 그가 알튀세르와 갈등하다 결국 독자적인 길을 선택했었기 때문이다(74년에 자신의 에세이를 모아 낸 <알튀세르의 교훈>이라는 책자에서 그는 알튀세르의 철학을 대중투쟁을 마비시키는 "질서의 철학"이라고 혹평하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그 자체로 엘리트주의적인 이론에 불과하다고 힐난한다―이러한 평가가 과연 얼마나 정당한지는 이 자리에서 논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가 단지 알튀세르주의에 대해서만 거리를 두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동시에 '차이의 철학'이라 불리는 일군의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상들(료타르, 들뢰즈, 데리다 등)에 대해서도 소원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상들은 '변혁'보다는 '해석'의 문제에 집착함으로써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대해 쓴 테제 가운데 11번째 테제("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를 다시 취소하는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많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이제껏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랑시에르의 작업만이 소개되지 않고 있었던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즉, 그는 어떤 학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철학자라는 것이 그것이다. 사실 이러한 그의 '비소속성'은 단지 철학 내 이러저러한 학파나 입장들에 관련해서만 드러나는 그의 특징도 아니다. 예컨대 그는 지속적으로 정치와 철학에 관해서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철학자'는 아니다. 반대로 그는 정치철학 내의 어떤 경향이 되길 단호하게 거부하고, 정치철학이라는 학문분과 전체를 자신의 비판대상으로 삼는다.

공인된 학문분과 체계 내에서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 랑시에르의 이러한 이론적 위치, 이것이야말로 공인된 정치 공간 그 자체에 대해 그가 취하고 있는 외부자적인 태도와 상당히 조응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테면 '공적 공간'(혹은 '공론장')의 경계선에 서서 그 공간 바깥에 여전히 우리가 잊고 있는 어떤 '외부'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구성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있기에, 그 안에서 주체들이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서로 말을 교환할 수 있게 되는 '호혜성'의 감각적 공간이야말로 고유한 정치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정치철학'적인 사고(이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시작해서 근대의 다양한 사회계약론, 현대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에 이르기까지 정치철학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전제다)에 대해 랑시에르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할 권리'를 비롯한 다양한 권리들의 분배가 다소간 평등한 방식으로 행해지는 이러한 '공적 공간'을 성립시키기 위해 사회는 언제나 내부의 어떤 특정 부분이나 구성원들을 "몫이 없는 부분(une part des sans part)"으로 미리 배제하고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구축이야말로 '호혜성'을 가장하는 공적 공간 내의 모든 '공정함'과 '정의'의 조건인 것이다.

정치철학에 대한 랑시에르의 이 같은 급진적인 비판은 특히 <불화>(1995)라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에서 발전된다(*짐작에 'Disagreement'가 그 영역본인 듯싶다. 언젠가 복사해놓은 책인데 바로 못 찾겠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인 폴리테이아(politeia)의 번역어가 '정치(politique)'일 뿐 아니라 '경찰(police)'이기도 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정치'라고 인식하는 '분배'("집단들의 결집이나 합의가 달성되는 절차들, 권력의 조직화, 장소와 역할의 분배, 그리고 이 분배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체계")가 사실은 정치가 아닌 경찰의 일임을 폭로한다. 단, 그는 푸코를 참조하여 경찰활동의 의미를 폭력행사에 의한 질서유지 활동에 국한시키지 않고, 구성원들 각자에게 정당한 '몫'을 찾아주기 위해 사회가 행하는 그 모든 활동으로 확장시킨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분배란 언제나 사회의 한 '부분'으로 이미 인정받은 사람들(서로 '호혜성'이 형성된 사람들)이 다소간 평등한 방식으로 공동체로부터 자신의 몫을 찾아가는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 간에 때때로 분배방식 등을 둘러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분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가 누구인가(즉 누가 그 사회의 '부분'인가)를 둘러싼 논란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다. 만일 공동체에 어떤 기여도 한 바가 없으면서 자기 몫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도둑심보'를 가진 자들로 분배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결국 경찰활동의 목표는 이러한 배제의 실현이며, 정치철학은 이를 정당화하고 이론화한다.

이제 랑시에르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치를 이러한 경찰 논리에 대립시켜 새롭게 규정한다. 정치란 바로 공동체에 별반 기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없는 자들이 뻔뻔스럽게도 '평등주의' 논리에 입각하여 자기 몫을 주장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정치는 본래 자기 근거나 기원(arkhê)이 없는, "추문"에 불과한 것이다.

<니코마쿠스 윤리학> 제 5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문제에 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공동체에 보다 많은 기여를 한 사람들이 더 많은 분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에 대해 동의하지만, 그 기여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기에 서로 다투게 된다(즉 '불화'하게 된다). 귀족(aristoï)은 덕(aretê)(이는 '뛰어남(excellence)'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귀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는다)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부자(oligoï)는 재산(공동체 경제에 대한 기부금)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전자는 귀족제(aristocracie)를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후자는 과두제(oligarchie)를 실시하자고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귀족은 보통 부유한 계급과 마찬가지로 부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양자 사이에는 진정한 쟁점이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아테네의 데모스(demos, 자유인 신분의 고대 도시국가 빈민들)가 주장하는 기준 때문에 발생한다. 데모스는 당시의 귀족들이나 부자들과 달리 공동체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자유'―발언의 자유―라는 '빈 껍데기 재산'만을 가져와 공동체를 '논쟁'과 '분열'로 몰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전체를 다수자인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민주제의 실시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데모스의 주장과 실천이야말로 랑시에르에게는 정치적 실천의 원형을 구성하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있어 정치란 한 사회의 '부분'으로 인정받지 못한 '몫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그 사회에 폭로하고 인정받아 공동체를 완전히 새로운 원리에 입각하여 재구성하도록 강제하는 '범법' 활동이며, 따라서 이는 몫이 있는 자들 사이에서나 행해질 수 있는 '대화(dialogue)'가 아니라, 자신을 대화상대로 전혀 인정치 않는 사회에 대해 자신의 존재를 '3인칭'으로 폭로하는 '독백(monologue)'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은 후기 하이데거의 진리(aletheia, 베일을 걷어냄) 개념 및 그와 긴밀하게 연결된 포이에시스(poiesis, 이는 '제작'이라는 뜻을 갖지만 하이데거에게서는 특히 사물을 이름짓고 그것을 현전 안으로 불러내는 언어의 '시적(poétique)'인 기능으로 인식된다) 개념과 유사하게 미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것은 공적 공간 안에서 감각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이름지어 불러내고 공공연하게 전시함으로써, 기존의 감각공간을 다시 분할하는 실천이다. 이 때문에, 랑시에르에게 있어 정치란 '사건' 이외의 것이 될 수 없다. 하나의 정치적 사건을 통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을 보이고 들리게 하자마자 그것은 공인된 감각공간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다. 마치 기이한 피카소의 그림이 이제는 커피 잔의 무늬로 사람들에 의해 편안하게 소비될 수 있듯이, 또 그렇게 소비되는 그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예술작품이 될 수 없듯이.

그렇다면 공인된 감각공간 내에 본래적으로 흡수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일까? 랑시에르에 따르면 그런 것은 없다. 오히려 정치의 이러한 사건적 성격을 잊게될 때 '전체주의'와 같은 최악의 결과가 생겨날 수 있다. 랑시에르는 데모스(demos)와 오클로스(ochlos)를 구별하고 후자를 정치의 주체로 사고하려는 일체의 시도들을 비판하는데, 전자가 비규정적인 다수자(하나의 비어있는 장소)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자신의 통일(unification)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다수군중을 의미한다. 언제나 통일이란 '합의'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정치란 언제나 '불화'에 기초해야만 한다는 랑시에르의 테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최원l Loyola University Chicago, 철학 박사과정)  

07. 02. 22.

On the Shores of Politics (Radical Thinkers) CoverHatred of Democracy Cover

P.S. 그런 관점에서 더 읽어볼 만한 책은 <정치의 해안에서(On the Shores of Politics)>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Hatred of Democracy)> 같다(정치의 계절에 소개될 만하지 않을까?). 거듭 말하지만, 그의 미덕은 너무도 얇은 책들을 쓴다는 것(지젝도 바디우도 주저들은 두껍다). 이런 점에서도 그의 '비소속성'이 드러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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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7-02-23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튀세르-이후(Post-althusser)'의 정치철학적 경향(발리바르, 랑시에르, 바디우, 아감벤, 라클라우, 네그리 등)은 '군중'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정립하려는 시도에서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스피노자의 언급처럼 체제에 위협을 가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위협하는, 양가적인 '다수'의 위상을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 말이지요. 더 흥미로운 건 이런 경향을 일별하는 지젝은 '절대적'으로 그들 모두를 참조하면서 비판의 외양을 취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지젝은 칸트의 뒤를 이어 일련의 '비판서'들을 이미 써 온 건지도 모르겠네요...^^

로쟈 2007-02-24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만한 '강사'가 따로 없지요. 다 읽어서 정리해주고 비판해주고 아울러 계발적인 생각들도 툭툭 던져주고.^^
 

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북리뷰들을 훑어보다가 뜻밖의 책이 나온 걸 알게 됐다. <인간론>으로 잘 알려진 에른스트 카시러의 <문화과학의 논리>(길, 2007)가 그것이다. 흔히 '문화철학자'로 일컬어지는 카시러의 저작에 '문화과학'이란 문구가 들어간 것도 이채롭다(찾아보니 독어본 원제는 'Zur Logik der Kulturwissenschaften'이며 영어로는 <인문학의 논리(The Logic of the Humanities)>라고 옮겨진 책이다. 그러니까 카시러의 '문화과학'은 '인문학'과 유사한 개념이며 영어권의 '문화연구'와는 계보가 다른 것이겠다. 더 찾아보니 영역본은 <문화과학의 논리>라고 새로 번역돼 나왔다) . 김상봉 교수의 서평을 옮겨놓으며 몇 자 보탠다.

한겨레(07. 02. 23) ‘문화’라는 학문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를 아는 것은 세계를 아는 것보다 어렵다. 세계는 눈앞에 펼쳐져 있어 바로 볼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대상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내게 가장 익숙하지만 가장 낯설고,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멀리 있는 존재이다. 이런 사정은 개인으로서의 자기인식만이 아니라 유적 존재로서 인간 전체의 삶을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인류의 삶의 객관적 현실태를 가리켜 우리는 문화라 부를 수 있다. 문화는 인간성의 객관적 표현이자 실현인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를 이해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유적 존재로서 인간이 자기를 안다는 것을 뜻한다 하겠는데, 이른바 문화과학이란 문화에 대한 학술적인 인식의 체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Cover

카시러의 책 <문화과학의 논리>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문화를 인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 새로운 학문의 근본적인 곤경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문화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등장하기 전까지 학문과 인식의 모범은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자연과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자연에 대한 학문적 인식은 주어진 사실을 두 가지 방법론적 원리에 근거해서 해명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왔는데, 그 하나는 주어진 사실을 그 사실이 아닌 다른 원인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런 인과관계를 보편적 법칙을 통해 해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학문적 인식은 주어진 사실이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증명하려 한다.

따라서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인식의 이상은 세상만사를 외적 필연성에 따라 인식하는 것이다. 대상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외적 필연성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은 타율성과 수동성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자연인식의 방법을 통해 우리들 자신의 삶의 현실태인 문화를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문화과학의 논리>를 관통하는 근본 물음이다.

생각하면 자연과학의 방법은 죽은 사물을 인식하는 데나 합당한 것으로서 문화는 고사하고 생명현상을 이해하는 데조차 쓸모가 없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생명현상이란 외적 필연성에 의해 떠밀려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에 의해 스스로 생겨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아무리 생명현상을 외적 필연성과 합법칙성에 따라 분석하고 해명한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생명체의 발생과정일 뿐, 그 발생과정을 이끌어가는 근원적 힘과 원리인 생명 그 자체는 아니다.

생명이 그러한데, 인간의 일은 또 어떠하겠는가? 칸트가 말했듯이 자연은 법칙에 따라 운동할 뿐이지만 인간은 법칙의 표상에 따라 행위한다. 그렇게 법칙을 인식할 수 있는 까닭에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타율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기계가 아니다. 그리하여 모든 대상을 타자적 원인과 타율적 법칙을 통해 해명하려는 시도는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순간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물론 인간은 타자의 작용과 객관적 법칙 밖에 거주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를 지배하는 법칙 그 자체를 대상화하고 타자로부터의 작용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줄 아는 존재인 까닭에 언제나 법칙 속에서도 법칙을 넘어서고, 타자성 속에서도 자기를 발견하고 형성하는 존재이다. 문화란 그런 인간성의 객관적 현실태이니, 그것을 학문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제 단순한 외적 필연성의 논리가 아닌 다른 학문 방법과 논리가 필요한 것이다.

카시러는 이 책에서 그 새로운 학문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박식한 철학자는 문화과학의 어려움이 어디에 있는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또 다른 학문 방법이 필요한지, 그 가장 기본적인 문제 상황을 다양한 시대와 학문분야들을 넘나들면서 명석한 필치로 소상히 설명한다. 어떤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려는 사람은 다른 것에 앞서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인간성의 객관적 현실태인 문화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 인간성의 신비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사람을 위한 이상적인 길잡이이다.(김상봉/전남대 교수·철학)

07. 02. 22.

 

 

 

 

P.S. 카시러(캇시러) 입문서로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 외>(책세상, 2002)이다. 역자의 해설과 관련문헌 해제가 유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고본이어서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다. 역자인 오향미 박사는 카시러 전공자인데(국내에서는 최명관, 신응철, 박완규 교수 등이 카시러 전문가로 분류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카시러는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에 비하면 독일에서도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철학자의 속한다."(7쪽) 독일어 주저인 <상징형식 철학>(전3권)의 핵심을 압축/축약해서 출간한 것으로 알려진 영어판 <인간론(An Essay on Man)>(1957)의 출간 이후에는 오히려 미국에서 더 많이 연구되고 있다 한다(저자 스스로 축약해준다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론>은 국내에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서광사, 1988)로 번역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인간과 문화>라는 발췌역본  있었다). 최초 번역본은 <인간론>(민중서관, 1960)이었다. 이어서 나온 것이 <국가의 신화>(서광사, 1988)이며 모두 최명관 교수의 번역이다(<국가의 신화>는 아직 절판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는 좀 터울을 두고 나온 책들이 <계몽주의 철학>(서광사, 1995),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서광사, 1996), <루소, 칸트, 괴테>(서광사, 1996) 등이다. 완독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가장 흥미로운 책이었다. 카시러 연구서로는 신응철 교수의 <캇시러의 문화철학>(한울, 2000), <문화철학과 문화비평>(철학과현실사, 2003), <카시러의 사회철학과 역사철학>(철학과현실사, 2004) 등을 꼽아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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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23 00:30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보니 벌써 또 금요일이군요. 내일 한겨레를 사야겠습니다.

로쟈 2007-02-23 00:32   좋아요 0 | URL
'오늘'입니다.^^

2007-02-23 0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도올 김용옥의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가 이런저런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시끄러운 건 개신교계(한국기독교총연합회)인데 동아일보와 한겨레에서 두 가지 유형의 반응을 다룬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에 실린 김경재 교수와의 인터뷰기사는 읽어볼 만하다(일단 '동네 개가 짓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동아일보(07. 02. 22) 개신교계 '도올 딜레마'

도올 김용옥(사진) 세명대 석좌교수의 EBS 외국어학습 사이트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를 둘러싸고 개신교계가 고민에 빠졌다. 강력히 대응하기도 그렇고 아예 무시하기도 어려운 형국이다. 개신교계는 표면적으로 ‘무대응’ 방침을 밝히면서도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다고 김 교수의 강의에 대한 체계적이고 신학적인 반론이 나오지도 않는다.

김 교수는 이번 강의에서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민족신인 야훼가 유대인들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믿는 조건으로 애급의 식민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주겠다고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계약”이라며 구약의 폐기를 주장했다. 그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구약의 모세를 믿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성황당을 믿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는 ‘성경무오류설’에 대해서도 “한글 성경에서조차 틀린 데가 많다. 한자도 틀린 것이 적지 않고, 예수의 족보도 세어 보라. 한 대가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이용규 목사는 20일 “김 교수의 가치 없는 주장에 일일이 답할 생각이 없다”면서도 “구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과 신학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도올은 실력 있는 철학자지만 철학자가 자기 영역을 벗어나 신학을 철학으로 해석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표회장은 “예컨대 모세를 주몽과 비교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했다.

한기총 총무 최희범 목사도 “도올의 강의는 교회를 훼손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음모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비판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통합)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김 교수의 강의 자체를 무시하는 분위기다. 김 교수의 성경 해석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 자체가 긁어 부스럼이라는 속내로 보인다.

예장통합 사무총장 조성기 목사는 “설득력 없는 한 개인의 해프닝에 반응할 이유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김 교수의 성경 해석이 어디에 근거를 뒀는지 모르겠다”며 “김 교수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해석이 기발한 착상일지는 모르지만 누구도 공감하기 어려운 기행일 뿐”이라고 말했다. KNCC 총무 권오성 목사는 “동네 개가 짖는다고 ‘왜 그러느냐’고 물을 필요가 있는가”라며 “터무니없는 내용에 흥분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어느 동네인지는 모르겠으나 도올이 '개' 수준이라면 최고 석학의 할애비들만 모여사는 동네인 듯하다). 그는 “김 교수의 말 한마디 때문에 2000년 역사 속에서 고백해 내려온 교회의 진리가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윤완준 기자)

한겨레(07. 02. 22) 교계 정치참여는 강자에 동조하는 것 구약폐기론은 잘못”

우리나라 기독교 신학계의 대표적 지성인 김경재(67) 한신대 명예교수가 지난 21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최근 도올 김용옥 교수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논쟁에 대해 입을 열었다. 최근의 논쟁은 김 교수가 〈교육방송〉 인터넷 요한복음 강의와 〈한겨레〉 인터뷰 등을 통해 보수 교계의 정치참여 행태를 비판하고, 성서적으로는 구약 폐기를 주장하면서 촉발됐다. 이에 한기총은 “교회 매도 음모”라며 도올의 주장을 맞받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기독교의 정치참여를 경계하되, 최근 보수 교계의 정치참여 행태를 “하나님을 빙자하며 강자에게만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도올이 제기한 구약 폐기론에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보수 기독교계가 시시콜콜한 것을 시비삼지 말고, 큰 틀에서 한국 기독교의 생명력을 살려 한국 기독교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크게 기여하는 종교로 거듭나게 하려는 (도올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개방적 성찰’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지 않고 “현재의 모습을 고수하겠다면 결국 한국 기독교도 죽고, 한민족도 불행해지고, 세상에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문일답이다.

-도올은 기독교인들이 거대한 압력단체를 만들려 한다며 기독교의 정치 참여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보수 기독교는 진보 쪽이 70~80년대에 참여한 것은 로맨스고 우리가 하면 불륜이냐고 반박하기도 한다.

=70~80년대엔 약자들을 아무도 대변하지 않았다.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비상한 상황이 끝나면 종교인들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논공행상에 참여했다. 그것은 옳지 못하다. 또 우파들은 안보를 위해 한-미 동맹이나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등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며 강자에게만 동조하고 있다. 이것은 특정 이데올로기이지 성서의 정신이 아니다.

-도올이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구약의 야훼는 수없이 사람을 죽이고, 질투하고 화낸다. 예수가 신약에서 ‘아버지’라고 한 분과 구약의 야훼가 같은 분인가. 이런 질문이 신학계에서 있어 왔는가?

=당연히 있었다. 도올이 질타하는 것은 오직 유대민족만을 위해 타민족을 죽이는 부족신 개념에 대한 맹신일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자들은 ‘야훼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수없이 얘기했다. 자식 열둘 가진 부모가 있다고 치자. 정상적인 부모라면 가진 것도 없고, 장애를 가진 자식에게 가장 마음이 쓰이게 마련이다.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애급의 노예로 끌려가 그토록 고초를 받을 때 그들을 긍휼히 여긴 것이다. 그들만이 특별해서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신의 편벽한 모습이 성서에 비침으로써 반목과 전쟁의 역사를 부채질한 것이 아닌가?

=구약도 솔로몬과 다윗 등 왕권이 성립된 뒤 편집된 것이다. 제왕 전승이 자리를 잡으면서 그런 제왕적 모습을 부각시켰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도 야훼의 전지전능성, 제왕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게 현실 아닌가?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도 야훼야말로 진짜 신이니, 환웅, 환인, 제석신,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등 다른 신을 모두 쫓아내고 이 땅을 야훼가 제패하는 것처럼 묘사한 게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의 종교로서 선교 사명을 갖고 있다는 정치 메시아니즘도 구약을 밑바닥에 깔고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것으로, 그런 잘못된 신관(神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야훼는 어떤 신인가?

=야훼는 제왕적 신이 아니다. 야훼란 말의 뿌리를 추적해 보면 ‘긍휼히 여기는 모성적 고통, 산고의 진통에 동참하는 이’다. 한반도의 초기 백성들이 교리적 도그마가 아니라 아무런 선입관 없이 성경을 읽다 보니 어렴풋이 그런 어머니 같은 하나님이 느껴져서 마음속으로 공감해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은 것이다.

-제왕처럼 하늘 위에 앉아 지배하는 하나님이 아니란 말인가?

=섬김과 봉사를 통해 정의와 평등을 이루는 분이다. 일제나 미국 극우주의자들처럼 침략하고 세상을 제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견강부회하며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메시아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관이다.

-도올이 예수와 한반도 초기 올곧은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이라면, 보수 기독교가 왜 이처럼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인가?

=신관이 중요하다. 신관이 바뀌지 않으면 기독교가 바뀌지 않고 세상이 바뀌지 못한다. 그래서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로 인해 기존의 신관과 교권이 흔들리는 데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교회를 파괴하려는 음모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정치적 우파들과 결속하는 것에 대한 방해라고 여긴다. 약자와 함께하고 그들을 섬김으로써 예수의 사랑을 실현하려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통해 세상적 힘을 갖기를 원한다. 그래서 젊은 지성인들이 도올의 강의를 듣고 깨어나서 ‘정치적 메시아주의’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한기총 이용규 회장과 최희범 총무는 기자들과 만나 ‘철학자가 성서를 해석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철학과 신학은 같지 않다. 그러나 지성과 이성을 배제한 신학은 없다. 초자연적 신을 얘기하는 보수적 신학도 교리들을 보면 대단히 논리와 합리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신이나 구원도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계시적 진리다, 영이다, 신앙이다’라며 신성의 보자기로 감싸는 ‘경계 침해의 논리’는 교권 보호를 위해 상대를 침묵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카르 바르트는 “신학도 인간이 하는 학문적 시도”라고 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계시된 신학이란 없다는 얘기다.

-그들은 ‘신앙은 신앙의 눈으로 봐야 열리지 지식과 과학으로는 안 된다’고도 주장했다.

=‘신앙=반지성주의’로 몰고 가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인가. 그것은 몽매주의다. 상당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도들을 그런 교권주의와 권위로 다스려 전근대적 복종의 미덕만을 강조해 오면서 무지한 맹신이 진짜 신앙인 양 호도했다.

-기독교에서 도올의 주장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는가?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 낡은 부대는 신축성과 유연성이 없어서 새로운 것을 담아내기 어렵다. 담으면 터져버려서 술도 상하고 부대도 상한다. 한국 기독교는 과연 어떤 부대인가.



구약폐기론 반대이유
김경재 교수는 “어떤 맥락인지 들어봐야 하겠지만 구약을 폐기하라고 했다면 이는 잘못”이라며 도올의 구약폐기론엔 반대를 분명히 했다. 그리스철학에 뿌리를 둔 헬레니즘과 히브리사상이 만나면서 신약의 정신세계가 형성됐는데, 구약을 제거해버리면 도올이 소중히 여기는 인간 평등과 존엄성 등을 담은 헤브라이즘이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예수 이후 최고의 인물로 꼽히는 사도 바울도 히브리사람이긴 하지만 헬레니즘적 배경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아 용어와 내용에 두 요소가 함께 포함돼 있다고 한다.

그는 “구약을 빼면 율법주의에선 자유로울지 몰라도 기독교답게 하는 (헤브라이즘) 정신이 약해져버린다”고 경계했다. 그는 또 “구약과 신약은 서로를 비춰주는 빛”이라고 했다. 또 “기독교가 이스라엘에서 탄생했는데, 그 뿌리를 제거해버리면 기독교가 천박해진다”고 주장했다.

김경재 교수가 본 도올
김경재 명예교수는 김재준·함석헌·서남동·문익환·안병무·강원용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가르쳤던 한신대에서 신학대학원장과 학술원장을 지냈고, 강원용 목사에 이어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도 맡았다. 상당수 종교인들과 신학자들이 이성보다는 감정을 드러내 도올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달리 김 교수는 도올에 대해 “물건!”이라며 웃었다. 한신대 재직 시절 후배들의 총장 추대를 거절한 채 기숙사 사감을 자처해 정년을 맞은 뒤 서울 신촌 이화여대 후문 ‘김옥길 기념관’ 지하의 ‘삭개오작은교회’에서 매주 일요일 소박한 목회를 하기도 하는 그다운 ‘폭’이었다.

김 교수는 특히 도올의 용기를 높게 평가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더구나 그의 집안이 속한 예수교장로회의 중도 및 중도 우파적 사상 계보로 볼 때 도올에겐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보았다. 그는 또 “노자와 불교, 유교, 천도교, 원불교, 서양철학 등을 섭렵한 도올이 <요한복음 강해>에서 ‘초월적 인격신’을 믿는다고 신앙 고백을 한 것을 보고 놀랐다”며 “기독교에선 어떤 교리를 믿어야 정통이 아니라, 그런 신앙을 ‘정통’으로 본다”고 했다.

그는 “한국 개신교 120년 역사에서 도올만큼 ‘준비된 지성’도 흔치 않다”며 “서양 선교사들의 말을 그대로 답습한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유영모, 함석헌 선생의 맥이 도올에까지 가 닿았다”고 평했다. 김 교수는 “루터와 칼뱅도 성서 해석을 바로 함으로써 새로운 기독교를 열었다”며 도올이 한국 기독교의 루터와 칼뱅이 될 수 있다고 점쳤다.

그러면서 그는 “도올은 <요한복음 강해>에서 자신의 독특한 신관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성서와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고, 어느 한 집단만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전 세계,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했던 한반도 초기 기독교인들의 마음으로 돌아가자고 촉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조연현 기자)

07. 0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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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22 21:25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

antitheme 2007-02-22 21:31   좋아요 0 | URL
도올의 이번 문제제기가 나름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몇몇 언론의 인터뷰를 봤을 때 우려가 되는 부분도 있긴 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파편적인 인터뷰 글이 아니라 그의 글과 강의를 통해 평가해 보고 싶네요.

sommer 2007-02-22 23:07   좋아요 0 | URL
도올선생의 기독교에 대한 '해석'은 상당히 '위상학'적이고 그래서 충분히 '정치적'인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침묵과 유사하게 한국의 기독교는 '신학/교리(해석)'에 모른 척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외면은 그러한 해석이 곧 '자기 부정'으로 귀결되고 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기인하고 있을 테지요. 여태 '믿는 척'해 왔는데, '네가 믿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당혹감, 그걸 묻는 자에 대한 부정...

도톰 2007-02-23 16:07   좋아요 0 | URL
영어로 강의를 하는 것은 민감한 사안에 대한 도올의 꾀로 보이기도 합니다.

로쟈 2007-02-24 00:05   좋아요 0 | URL
antitheme님. 기회는 어렵지 않게 마련하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약간의 비용이 들긴 하지만...
suture님/ 적어도 신학과 신앙은 구별했으면 싶어요. 목사님들이...
kaosmapak님/ 사정이 그렇지만도 않은 게 요한복음에 대한 도올의 언급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이 참에 겸사겸사 칼을 뽑아든 것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