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영어, 내 마음의 식민지>(당대, 2007)에 관한 리뷰를 올려놓았는데, 생각난 김에(멍석이 깔린 김에) 영어 강의('외국어강의'라고도 표현하지만 99%는 '영어강의'를 가리킨다)에 관한 자료들도 모아놓는다. 대학 경쟁력 강화와 세계화를 명분으로 영어강의의 비중을 늘이는 게 대학가의 추세인데, 그것이 필요한지에서부터 얼마나 가능한지, 또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영어공용어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신 분들도 제한적인 범위에서의 공용어론, 곧 '학문어로서의 영어공용어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강의 현장의 교수 두 분과 작년 경향신문의 '대학 영어강의의 그늘'이란 타이틀의 기획기사들을 옮겨놓는다.

교수신문(07. 03. 16) 외국어로 강의하기와 한국어로 학문하기

여러 대학에서 외국어로 강의를 진행하는 과목을 늘이고 있다. 외국어로 강의를 진행하는 과목에 대해서는 연구보조비를 지급하고, 폐강 기준을 완화하며, 절대 평가도 허용하고, 강의 시수도 높게 인정하겠다고 하면서, 신임 교수는 반드시 1과목 이상을 외국어로 강의하도록 하고, 학생들은 반드시 외국어로 진행하는 과목을 수강하도록 강제하려고 한다. 

국제화 시대에 우리 대학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외국어로 강의하는 과목을 설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내 대학에도 외국 유학생이 늘어나고, 우리 학생들도 국제무대에서 활약하기 위해서는 전문 분야의 차원에서 외국어에 능통할 필요가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또 우수한 외국인 교수를 초빙하여 교수진 구성도 다양하게 한다면 당연히 외국어로 강의하는 과목이 개설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외국어로 강의하는 과목의 확대가 한국어가 학문의 언어로서 자리 잡아 나가는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학문 분야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학 강의실에서 쓰이는 한국어는 정상적인 한국어라 하기 어렵다는 점이 거듭 지적되어 왔다. 주요 용어는 물론 서술어조차 외국어 일변도이고 한국어는 ‘토’로만 쓰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상황에서 아예 강의를 외국어로만 하는 과목이 늘어난다면 한국어는 지식의 생산과 소통의 역할을 급격하게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다(*이미 의학, 공학, 자연과학 분야의 경우 한국어는 학문어로서의 위상을 거의 상실한 것 아닌가? 가령, 의학 드라마들에서 주요 용어들을 우리는 '한국어 자막'으로나 접수하듯이 말이다).

사실 근대 직전까지 우리는 한문으로 학문을 해왔고, 학문의 영역에서 한글은 기껏 경전의 번역용이었을 뿐이었다. 한글이 공용문자가 된 것은 1894년부터이며, 대학에서 학문의 언어로 자리 잡은 지는 이제 겨우 60년이 되었다. 그것도 난삽한 한자어, 번역어, 외래어 및 외국어로 점철된 한국어로 우리는 학문을 해왔던 것이다. 제대로 된 한국어로 학문을 하려는 노력도 전개되어왔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다 외국어로 전공 강의를 하도록 하니 우리 학문의 세계에 마치 제 2의 중세가 도래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지난 중세에는 한문으로 학문을 했어도 수업만은 한국어로 했는데, 이제는 수업도 외국어로 하자니 말이다. 

원효, 퇴계, 율곡 등 여러 선인들이 한문으로 세계적인 학문을 했으니 장차 우리가 외국어로 세계적인 학문을 할 가능성은 충분하다(*하지만 그때의 '세계적인 학문'이 '한국 학문'이며 '한국 철학'인 것일지는 의문이다. 한국인이로서 '세계적인 학자'가 된다는 것과 '세계적인 한국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닐까?). 세계에 널리 쓰이는 언어로 학문을 하여 곧장 외국 학자들과 소통하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세계화는 일원화의 방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다원화의 방향에서도 이루어진다. 지식의 창조 역시 다양한 언어로 이루어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라틴어 못지않게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가 훌륭한 학문의 언어 역할을 하듯이 한국어도 한문 못지않게 세계적인 지식을 창조하는 언어로 자리 잡아야 한다(*현재와 같은 한국어의 위상과 역량으로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우리말로학문하기모임' 도 없지는 않지만. 가령, '한국어 철학'이 현재 가능한가?). 그것을(*그것은) 학문하는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그러므로 외국어로 강의하는 과목을 개설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한국어로 창조적인 학문을 하는 일에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김종철/ 편집기획위원` 서울대) 

대학신문(07. 04. 01) 영어 강의, 우리말 강의

우리 대학도 국제화 촉진의 일환으로 영어로 하는 강의가 부쩍 늘어날 전망이다. 우리 학생들의 영어능력 향상은 물론, 늘어나는 외국인 학생들이 들을 수 있게 하라는 시대적 요구에 의해서도 영어 강의는 필연의 대세로 자리잡을 것 같다. 교재와 강의 내용이 이미 영어로 잘 정리되어 있는 전공 분야에서는 그런대로 큰 문제가 없을지 모르나 교재 개발이 잘 되지 않은 과목이나 인문 사회 예술계의 특수 전공 분야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가능성도 있겠다.

나는 1992년 봄 학기 이래로 대학원 과목을 벌써 16년째 줄곧 영어로 강의해 왔다. 농생대 대학원 공통과목인 ‘세포생물학특강’, ‘분자유전학’, ‘유전자조작론’, ‘유전체학’을 두꺼운 원서로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바로 바꿔 가며 학생들을 위해 독파해 주었다. 범위도 많고 어렵다고 하는 학생들에게 ‘나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바로 이 교재를 하버드, 엠아이티, 캠브리지 대학은 물론, 이웃 일본과 중국에서도 그리고 국내 다른 경쟁 대학에서도 사용’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자긍심과 명예를 걸고 노력해 줄 것을 호소했다.

학생들은 고맙게도 열심히 공부했고, 정말 좋은 성과를 올렸다. 학생들이 최신 논문을 읽어 발표할 때 영어로 하면 가산점을 주어 독려했다. 앞으로 국제 학술대회에 나가서 자신의 논문을 발표하게 될 날을 생각하며 준비하라고 했다.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호응했고, 해가 갈수록 그 수와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다. 그 당시 내 영어 강의를 듣고 유학의 길에 올랐던 많은 학생이 이제는 귀국도 하여 여러 곳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낀다.

영어 강의를 시작할 그 시절, 주소와 성명을 밝히지 않은 어느 암자의 수도승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대학에서 영어로 강의한다는 것은 나라말을 버리고 민족정신을 흐리게 하는 심각한 사안이니 즉시 중단하라는 권유였다. 깊은 생각 끝에 시간을 내어 글을 썼을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우물 안 개구리들을 탈출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감에 불타는 나의 영어 강의는 계속되었다. 국제화로 치닫는 지구촌 시대가 지속되는 한, 대학의 영어강의는 더욱 확대 보급될 것이 분명하다. 한 사람이 3~4개 국어를 구사하는 시대도 도래할 것이다.

한편 우리말의 세계화도 크게 신장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이제 달리 깨닫고 있다. 영어로만 읽고 쓰기를 계속하는 한, 과학 기술은 우리 학생들에게는 먼 서양에서 빌려 온 동화 속 이야기 또는 수입 상품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배울 것은 배워야 하되, 과학적 사고 자체를 영어를 통해서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언제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요구할 것인가? 젊은이와 일반인이 과학과 문화를 우리말로 배우고 생각하고 쓰는 가운데, 창조적 과학과 원천 기술이 샘솟아 나오는 시대를 원한다면, 이는 너무나 시대착오적인 망상일까?(*현재로선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이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일반에게 보급한 마틴 루터가 처했을 시대적 상황과 관념의 두터운 장벽을, 그리고 후세에 끼친 영향을 잠깐만이라도 음미해 본다면, 우리말 교재와 강의의 병행은 너무나도 작은 망상이 아닐까? 영어도 처음부터 국제어로 군림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언젠가 누군가 물줄기를 바꿀 것이면 그것이 오늘 우리들여서는 안 될까?(김병동 교수/ 농생대·식물생산과학부)

경향신문(06. 06. 27) [대학 영어강의의 그늘](上) 준비안된 부실수업

수업을 영어로만 진행하는 대학 강의들이 늘고 있다. 학생들의 영어실력이 천차만별이고 교수들의 영어수업 역량도 떨어지면서 부실강의로 이어지고 있는게 현실이다. 글로벌화의 명분 아래 진행되는 영어강의의 그늘을 2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주

#1. ㄱ대의 ‘수리물리학’ 시간. 원서를 보며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지만 책을 보고 읽는 수준이었고 어려운 개념을 설명할 때는 학생도 교수도 진땀을 뺐다. 수업에 참여한 한 학생은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많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주요 대학들이 글로벌화 명분 아래 영어강의의 비중을 급격히 높이고 있지만 오히려 부작용만 속출하고 있다. 학생들의 영어실력이 천차만별인 데다 일부 교수들은 영어강의를 소화할 역량이 없다. 영어에만 집착한 나머지 부실한 강의로 이어지는 게 현실이다.

26일 각 대학에 따르면 고려대는 전체 강의 중 30%가 영어강의이며 2010년까지 절반 수준으로 늘릴 계획이다. 2007학년도부터 5개 이상 영어전공강의를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졸업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연세대도 전체 수업 중 18%가 영어로 진행되고 있다. 연세대 관계자는 “2010년까지 40% 선으로 영어강의를 늘리려 한다”며 “영어강의시 강의료를 추가 지급하는 등 인센티브를 줘 더 많은 영강이 개설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강대 역시 2006학년도 입학생은 3과목, 2007학번은 4과목 이상 들어야 졸업할 수 있게 된다. 서울대는 2006학년 1학기 전체 교양강좌의 10%를 영어강의로 지정했다. 이중에는 한국 근현대사·한국문학 등 한국학 관련 과목도 포함됐다.

문제는 이런 영어강의의 확대가 대학본부로부터 상명하달식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굳이 영어로 할 필요가 없는, 혹은 해서는 안 되는 강의를 영어강의로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고려대는 한국사학과 등 역사관련학과를 ‘한국학의 세계화’를 위해 영강의무화 학과로 지정했다(*강의를 담당할 만한 교수를 끝내 구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김모씨(21)는 “영어에 없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선 결국 학생·교수 모두 한국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학생간 영어 실력차와 교수들의 영어강의능력 부족도 걸림돌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영어원서를 읽는 수준이거나 아예 영어회화수업으로 변질된 강의도 많다. 문제는 강의 질이 떨어지더라도 전공필수 과목이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수강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양대 영문과 조모씨(22)는 “지난 학기에 영어강의 ‘문학과 시’를 수강했는데 영어능력 향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대학생 허모씨(24·여)는 “교수님들도 영어강의를 하면 의미가 70%밖에 전달되지 않는다며 힘들어한다”고 전했다.

지난 3월 고려대 학보인 고대신문이 재학생 375명을 대상으로 영어강의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56%가 “불만족스럽다”고 답했다. 불만족의 이유로 ‘영어수준이 너무 높아 이해하기 힘들어서’가 42.5%였다. 연세대 언더우드국제학부의 모종린 학장은 “굳이 영어강의가 필요없는 곳도 많다”며 “전공별로 차별화해서 영어강의 비율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김준일·이호준·김유진기자)

경향신문(06. 06. 28) [대학 영어강의의 그늘](下) 교수들도 피해자

독일에서 10년 넘게 여성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은 김모씨(42)는 지난해 모 국립대에서 사회학과 교수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여성학에 관해서는 상당한 자신이 있던 김씨는 면접자리에서 당황했다. 면접위원들이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인터뷰를 했기 때문이다. 무사히 면접을 마치긴 했지만 임용에는 실패했다. 김씨는 “임용된 사람을 알아보니 그 학교 출신에, 영어회화가 뛰어난 사람이었다”며 “실력보다는 영어가 중요시되는 것 같아 씁쓸했다”고 말했다.

김씨처럼 유럽에서 공부한 박사들은 요즘 좌불안석이다. 김씨는 “사회학이나 법학은 세계적으로 독일이나 프랑스를 더 알아주지만 국내 분위기는 오직 영·미권을 우대한다”며 “같이 공부한 사람끼리 만나면 미국으로 유학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한탄한다”고 전했다. 대학들의 영어강의 확대로 피해를 보는 것은 학생뿐 아니다. ‘영어 강의능력’이 능력평가의 주요 지표가 되면서 영·미권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각광받는 반면 유럽출신 박사들은 임용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다.

‘영어강의 능력’ 우대는 국내 학계의 영·미 편향성이 더욱 심화되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상명대 영어교육학과 박거용 교수는 “최근 유럽에서 공부해 임용되는 교수가 거의 없을 정도로 학문의 미국 종속이 심화되고 있다”며 “영어지상주의가 불러오는 폐단”이라고 지적했다. 박교수는 이어 “학자라면 외국 학문을 우리말로 정착시켜 ‘한국적인 학문’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한데 번역없이 영어로 떠든다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했다. “영어를 잘하는 것과 강의를 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지적이다.

상당수 대학들이 신규임용 교수들에게 영어강의를 의무화하고 있어 ‘울며 겨자먹기’로 영어강의를 진행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해 임용된 고려대의 한 교수는 “내 전공은 실습위주 과목인데 억지로 영어로 진행하다보니 의사소통이 안돼 어려움이 많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나이든 교수님들이 영어강의를 안하다보니 영어강의 부담은 전부 젊은 교수들에게 지워지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영어만능주의에 대한 반발기류도 나타나고 있다. 고려대 이상신 교수는 지난 3월 어윤대 총장에게 보낸 공개 질의서에서 '“교수가 되려면 대학원 과정부터 미국에서 다녀야 한다”는 발언과 학문적 능력이 검증 안된 외국인 교수를 채용하도록 여러 학과에 요구한 점, 학문을 고려치 않고 영어강의 능력을 채용기준으로 설정한 점’ 등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지난 5월 고려대 문과대 교수회는 “문화적 정체성을 위협하고 자유로운 진리탐구 역량을 훼손하는 영어강의 전공과목 이수 의무화 방침을 거부한다”고 결의했다. 전공과목을 영어교육의 실습수단으로 여기는 발상에 대한 항의였다. 고려대도 교수회의 일부 주장을 받아들이겠다고 한발 물러섰지만 영어강의 확대 방침은 여전히 확고한 상황이다.

물론 세계화의 거센 파고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영어강의가 불가피하다는 목소리도 많다. 고려대 화학과 최동훈 교수는 “어느 나라에서 공부하든 국제어인 영어로 소통할 일이 많기 때문에 교수들 역시 영어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세대의 한 교수는 “영어강의 자체는 반대하지 않지만 대학측이 운영의 묘를 살려 학문과 영어실력 둘 다 키울 수 있는 방안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김준일·이호준·임지선기자)

경향신문(06. 06. 27) [대학 영어강의의 그늘]조기 어학연수 붐

“이왕 갈 어학연수라면 일찍 가는 게 낫죠.” 대학들이 영어강의를 확대하면서 캠퍼스 풍속도 변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조기 어학연수 붐. ‘영어강의 스트레스’를 못 이긴 신입생들이 영어실력을 높이기 위해 조기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경우가 늘고 있다.

고려대 언론학부 이모씨(20)는 “친구들 절반 정도가 2학년 마치기 전 어학연수를 생각하고 있다”며 “영어 스트레스로 군입대를 서두르는 후배도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재외국민 특례입학 학생들의 약진도 눈에 띠는 현상. 외국에서 오래 생활한 경험 덕분인지 의사표현이 적극적인 데다 최소한 영어강의시간에 자기 뜻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학점을 잘 받고 있다.

서강대생 박모씨(26)는 “교수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학생들은 영어회화를 잘하는 특례입학생의 학점이 더 잘 나온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전공지식보다 영어로 학점이 결정되는 현실에 분개하는 사람도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대학원생들도 죽을 맛이다. 각종 과제와 시험 채점은 대학원 조교의 몫인데 영어강의가 늘면서 채점 스트레스가 늘었기 때문이다. 고려대 대학원생 김모씨(28)는 “문법이 틀리는 영어를 읽는 것도 괴롭지만 정확한 점수 매기기가 어려워 단어 중심으로 채점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틀이면 끝나던 채점이 일주일을 넘길 때는 정말 죽을 맛”이라고 말했다.(김준일기자)

07. 04.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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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7-04-07 12:46   좋아요 0 | URL
취업 인터뷰 할 때, 혹시 영어로 강의가 가능하겠냐는 질문을 많이 하시더군요. 듣는 사람의 자질과 수준의 문제 아니겠냐고 대답했는데, 별로 바람직한 대답은 아니었나봅니다 ^ ^

로쟈 2007-04-07 13:59   좋아요 0 | URL
바람직한 대답은 아마 '물론입니다!'였을 거 같네요.^^;

마늘빵 2007-04-07 14:35   좋아요 0 | URL
영어가 필요한 학문이 있고 그렇지 않은 학문이 있다 생각합니다. 필요하더라도 강의까지 하느냐, 아니면 그저 읽고 해석하는 수준이냐도 달라질 것이고요. 최근의 학부에서의 모든 강의를 영어로 하겠다는 흐름은, 본질에서 한참 벗어났다고 봅니다. 국어국문학과 교수 채용시에도 영어를 보고, 강의도 영어로 하라고 한다면 말 다 했죠. 영어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은 아주 적습니다.

로쟈 2007-04-07 18:38   좋아요 0 | URL
경영학과나 이공계 학과처럼 아예 '영어 교재'를 사용하는 경우에 '영어강의'가 필요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적으로 그 분야의 의사소통이 '영어'로 더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영어강의'의 비율을 세계화의 척도로 삼으려는 것이죠. 그 논리에 있어서 '영어공용화론'을 그대로 답습하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기인 2007-04-07 19:28   좋아요 0 | URL
보다 바람직한 대답은 'of course~!'였을까요.. 국문학도의 입장에서, 한국어의 풍요로움이라는 방향, 한국어로 학문를 해야한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이것이 세계적으로는 궁극적으로는 다양성이라는 점에서 도움이 될 것이고요. 이다/있다 라는 구분 등 언어와 사유에는 분명 긴밀한 끈이 있고, 인류의 입장에서 다양한 언어들이 다기하게 발전하는 것이 길게 보았을 때 좋을 것이라는 원칙에 동의합니다.
바벨탑을 세우는 것도 좋은 점은 있겠지만, 그것이 '영어'라는 데에는 일정 거부감이 드네요. 에스페란토어 같은 '국제적 인공어'를 다시 부흥할 수 있다면 각 집단의 언어와 함께 전세계 공용어 같은 것은 좋을 것 같습니디만.. 어쨌든 퍼갑니다.
한국문학사 영어로 강의하면.. 정말 암담할 것 같네요.

로쟈 2007-04-10 08:29   좋아요 0 | URL
미국 학생들에게만 '영어'로 강의하면 되지 않을까요?^^;

jalousies 2007-04-11 08:25   좋아요 0 | URL
학교를 떠난 지 10년 정도 되는데,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면 영어로 불어를 가르치는 날이 오겠군요. 어쩌면 그 시절에 불어과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르겠네요. 세상이 미쳐가는건지, 대학이 미쳐가는건지...
 

지난 2월에 출간된 <궁정전투의 국제화>(그린비, 2007)란 책에 대해서는 예전에 이미 리뷰를 소개한 바 있는데(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1067249) 이에 대한 읽을 만한 리뷰가 다시 눈에 띄기에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소장도서이긴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언제쯤 읽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리뷰들만 열심히 읽다 보니, 덩달아 읽은 듯한 느낌도 들고). 책은 라틴아메리카의 경우를 다루고 있지만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시사점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리뷰의 필자인 이승원 연구교수는 '새로운 지식네트워크'의 형성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라고 제안한다. 고민해볼 문제이다.

교수신문(07. 04. 02) 미국 유학파와 전통적 엘리트의 힘겨루기

1917년 1월 1일 한국 근대문학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춘원 이광수가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족주의자로서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이광수는 구시대의 유학자들과 철저하게 단절하고 서양 학문으로 무장한 신세대 엘리트였다.



<무정>의 주인공인 경성학교 영어교사 이형식은 이광수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식민지 조선 민족의 계몽을 위해 목청을 돋웠던 이형식은 조선의 무궁한 영광과 발전을 위해 미국 ‘시카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과연 이광수가 걸어갔던 길을 이형식도 따라 갔을까. <무정>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광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땅은 날로 아름다워 간다.” “우리의 어둡던 정신에는 날로 빛이 난다.” 이광수의 바람대로 이형식이 귀국한 식민지 조선은 과연 아름답고 빛이 났던가.

이광수의 혜안이 그야말로 글로벌했는지는 몰라도 이후 시공간을 뛰어 넘어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이형식과 같은 존재들이 등장한다. 이른바 시카고 보이스다. 이들은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유학한 칠레 경제학자들의 별칭이다. 시카고 보이스는 칠레로 돌아와 전통적 엘리트들인 대지주·법률가들과 치열한 힘겨루기를 벌인다. 구시대 엘리트들은 자본과 가문으로 무장했고, 시카고 보이스는 미국산 경제학을 무기로 삼았다.

<궁정전투의 국제화>의 두 저자는 이들의 대결을 은유적으로 ‘궁정전투’라 부른다. 그러나 저자들이 단순하게 칠레 내의 정치적 헤게모니의 싸움 혹은 국가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궁정전투’로 은유한 것은 아니다. 미국이 만들어낸 지식 네트워크와 이를 기반으로 정치·경제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라틴아메리카(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의 소수 관료들과 국제적 엘리트들 사이의 ‘은밀한 동맹’이야말로 궁정전투의 본질이다.

이 책은 라틴아메리카를 사례로 미국산 지식의 국가권력화를 미시적인 차원에서 분석한 역작이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유럽대륙을 지향하는 법률의 강조에서 미국을 지향하는 경제학으로의 이동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이다. 또한 그 변동의 순간들을 미국의 전략적 차원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궁정전투의 국제화>는 라틴아메리카에 한정하지 않고 국가권력을 둘러싼 지식투쟁의 흔적들을 국제적인 차원에서 분석한 실증적 사례 보고서이다.

저자들이 분석 대상으로 삼은 모델은 미국의 시카고학파와 그의 적자들인 시카고 보이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경제·법률 엘리트들을 비롯한 국제적 법률 엘리트들 간의 역학관계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시카고학파는 케네디 정부와 함께 형성된다. 케네디는 동부 아이비리그 출신인 케인즈학파 경제학자들을 정부의 관료로 대거 등용한다. 마침 미국 중부에 위치한 시카고대학에서는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시카고학파가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시카고학파는 공화당의 소수 보수주의자들과 연대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해 갔다.

시카고학파는 대부분 미국 이민 1세대와 2세대였다. 그들은 그동안 미국을 지배해왔던 토착 엘리트들과 경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들에겐 가문의 영광도 자본도 사회적 ‘빽’도 없었다. 하여 그들은 지적 경쟁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지적 경쟁을 위해 동원한 학문은 수학적인 기술이었다. 수학적인 엄격성이야말로 케인즈학파를 이길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다.

이 무렵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전략을 마련한다. 1960년대는 이른바 냉전 전략 모델이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였다. 포드재단, 국제개발처, 진보를 위한 동맹, 법과 발전 등의 기관과 프로그램이 가동됐다. 이런 것들은 라틴아메리카의 젊은이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미국의 해외지원 프로그램에 힘입어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 라틴아메리카의 젊은이들은 자연스럽게 시카고학파의 제자가 되었다.

시카고학파가 주장했던 수리경제학은 언어·문화적인 능력의 중요성을 최소화했다. 따라서 수리경제학은 미국에 있는 외국 학생들을 통합하는 데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미국인들과는 문화도 언어도 인종도 다른 라틴아메리카 유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형식이 문명의 상징을 서양의 기계문물과 영어로 파악했듯이, 라틴아메리카의 젊은이들에게는 수리경제학이 곧 세계화의 상징이었다.



시카고학파가 길러낸 칠레의 시카고 보이스는 쿠데타와 함께 등장했다. 이미 그들은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형성했던 것과 유사한 정치동맹을 칠레에서 형성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73년 피노체트는 아옌데 정권을 쿠데타를 통해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았다. 피노체트는 그동안 권력의 심장부에 포진해 있었던 구엘리트 세력을 추방·살해하고 그 자리에 시카고 보이스를 등용했다. 그들은 기술적 전문성과 정치적 개입의 결합을 강조하는 용어인 테크노폴(technopols)로 찬양되었다.

시카고 보이스는 단순한 경제학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정치가였고, 권력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의사(擬似) 군인’이었다. 미국의 시카고학파는 자신들의 지식을 국제시장에 유통시켰으며 라틴아메리카는 이러한 지식을 수입하여 국가의 헤게모니를 미국식으로 장악해갔다. 신엘리트에 의해서 축출된 구엘리트들 역시 새로운 상징권력을 마련했다. 법률로 무장한 전통적인 엘리트들은 인권을 무기로 신엘리트들과 투쟁하였다.

그렇지만 군부의 억압적인 정치권력에 저항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외쳤던 지식인들 또한 미국과 연루되어 있었다. 인권운동이나 시민운동의 주축들은 칠레와 브라질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권력을 획득하자 곧 정치계로 입문했다. 더욱이 새로운 형태의 초국가적인 NGO는 세계화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힘썼다. 그들은 사회적 폭력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정치 기술을 발명하는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사업 법률가가 되어 재계의 이익에 봉사하는 ‘고용된 총잡이’의 역할을 자임하였다.

한쪽에는 경제, 다른 한쪽에는 법률이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권력을 구성하는 핵심이었다. 미국이 생산한 법률과 경제학은 라틴아메리카에 이식되어 상징권력이자 상징자본으로 변화했다. 막스 베버의 말처럼 정치란 ‘악마적인 힘들’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가들이 이런 악마적인 힘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동원한 것은 미국산 지식이자 그들이 구성한 지식 네트워크였다.

이브 드잘레이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냉전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라틴아메리카의 궁정전투는 동남아시아나 한국에서도 익숙한 시나리오다. 따라서 <궁정전투의 국제화>는 한국 사회의 정치권력을 분석하는 유용한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현재 한국에는 수많은 ‘이형식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고급 기술과 지식으로 무장하여 전문기술지식을 독점하는 테크노크라트이다. 지식인은 권위를 통해 대중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 대중적이어야만 한다.



한국의 ‘궁정전투’를 분석하는 것도 물론 의미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질문해야 할 것은 그동안 한국을 지배해 왔던 미국산 지식 네트워크에 균열을 내고 이를 재배치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 네트워크의 형성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가 아닐까. 어린 시절 해외에 살다가 장성한 뒤 일자리를 찾아 국내로 들어오는 젊은이들을 가리켜 ‘연어족’이라 부른다. 조기유학 열풍에 따라 급증하는 미래의 연어족들은 과연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까. 그들이 이 ‘궁정전투’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의 네트워크는 어떤 모습일까.(이승원 / 한양대·국어국문학)

07. 04.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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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주말판 북리뷰들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책은 단연 <영어, 내 마음의 식민지>(당대, 2007)로 보인다. 주중에 구내서점에 갔다가 (절실한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의무감에서) 사든 책인데, 한국사회에서의 영어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예상대로 언론의 포커스는 받았지만 다소 '학술적'으로도 읽히는 책이 일반 독자들에게도 적극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관련리뷰 정도는 한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FTA 덕분에 혹 '언어시장'마저 완전 개방될지 모르는 형편에서 '우리에게 영어는 무엇인가'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겠기 때문이다.   

경향신문(07. 04. 07) 한국에서…영어는 이미 ‘권력’

언제부터인가 ‘영어 완전 정복’은 이 땅의 ‘지상목표’가 됐다. 정부에선 영어 조기교육 도입을 주도하고 지자체는 영어마을을 앞다투어 만들고 있다. 조기유학생의 숫자는 해마다 급증하고 ‘기러기아빠’는 일상적인 게 됐다. 심지어 월 100만원의 수업료를 내면서 영어유치원에 다니고 원어민처럼 영어발음을 할 수 있도록 혀근육 절개수술까지 받는 지경이다. 영어를 잘 해야 한다는 한가지 목표에 따라 우리 삶의 곳곳이 일그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한 번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보자. 도대체 우리에게 영어는 무엇인가. 영어가 뭐기에 우리 삶과 사회에 이토록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가. 과연 우리는 영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공부해야 하는가.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는 우리의 입장에서 영어를 근본에서부터 성찰해보자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책이다. 지난 10여년간 국내에 발표되었던, 영어에 대한 반성적 시각을 담은 17편의 글을 모았다. 필자의 대다수는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영어전문가들이다. 시각이나 관심 주제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결같이 현재 우리나라의 ‘영어 광풍’에 대해 우려하고, 더욱 근원적인 사고와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오늘날 영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영어가 국가경쟁력”이라는 세계화 논리가 그 뒤에 있다. 사실 근대 이후 영어는 그 위력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반드시 습득되어야 할 당위의 모습”으로 우리 심리 속에 굳어져 왔다. 미국과 미국적 사고방식을 경험하고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자들이 실질적인 지배세력으로 떠오른 현대사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이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영어를 잘 한다는 것은 사회적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능력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최샛별 이화여대 교수)을 의미한다. 영어실력이 제도화된 ‘문화자본’이 된 것이다. 문제는 영어를 잘 하는 것이 다른 가치들을 초월하는 지상목표로 자리잡는 데 있다. 유창한 영어가 의사소통이라는 기술적 능력을 넘어 한 인간의 능력과 성실성을 판별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상황이 이 정도니 우리 대다수에게 영어는 ‘억압’으로 작용한다. ‘영어를 정복’하고자 하는 욕구도 그 억압 대상에 대한 공격적인 소유욕의 발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영어를 정복하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영어라는 제국에 정복되는 과정”(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이다. 언어는 중립적인 도구만이 아니라 우리 속에 개입하고 우리를 형성하는 힘이기도 하다. ‘영어와의 얽힘’이 한 민족이나 그 구성원들의 정체성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다. 이런 점에서 더글라스 루미스 일본 쓰다대 전 교수의 글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들어 영어회화 학습이 미국 중심의 세계관에 무비판적으로 젖어드는 과정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책은 특히 영어가 “자본주의 발흥과 함께 세계어로 올라선 역사적 과정을 가진 자본의 언어”라고 지적한다. 영어의 세계적 확산에는 모든 것을 사물화하는 자본주의의 기제가 작용하고 있다. 결국 우리 사회의 ‘영어 광증’은 인간을 자본주의적 생산성의 도구로 보는 관점과 연결돼 있다는 주장이다. 필자들은 영어의 실용성만을 추구하는 태도도 비판한다. 언어는 창조적이고 문화적인 공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영어의 실용성 강조는 경쟁력만을 앞세우는 신자유주의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그러나 “경쟁력의 핵심은 전문적인 식견과 폭넓은 교양이지 초보적인 회화능력일 수 없다.”

김진만 전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교양있고 지적 균형이 잡힌 국제인을 만들기 위해 영어를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병민 서울대 교수는 영어의 필요성이 “침소봉대됐다”고 일침을 놓는다. “상당 수준의 영어 능력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준의 영어가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믿게 됐다”는 것이다.



책장을 덮고나니 책에 거론된 두 사람이 떠오른다. 먼저 국내 최초의 영어 통역관이었던 윤치호의 경우. 그는 서구 근대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영어를 배웠으나 근대 달성과 서구화를 동일시한 나머지 오히려 제국주의의 식민논리에 포섭돼 친일파로 돌아섰다. 그 다음은 반제국주의의 기수 프란츠 파농. 그는 자신의 저서 ‘검은 피부, 흰 가면’에서 자신의 민족성(검은 피부)을 감추고 서구를 모방(흰 가면)하고자 하는 욕망이 식민지인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위기에 빠뜨리는지 실감나게 그렸다. 윤지관 교수는 이같은 예를 빌려 “영어에 대한 숭배에 빠져 모국어가 자신의 삶에서 가지는 의미조차 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언어에서 유배당한’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김진우 기자)

한겨레(07. 04. 06) 영어에 빠져 살려다 영어에 빠져 죽을라

우리 사회는 ‘영어 광풍’이 불고 있다. 해외 영어연수가 대학생의 필수과정이 된 지 오래다. 지금은 초등학생 단계까지 내려왔다. 월 100만원대의 어린이 영어유치원도 호황이다. 국내 영어 사교육 시장은 한해 10조원 규모로 추정된다. 공교육에서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친다. 10살 남짓때부터 영어에 대한 흥미와 능력의 양극화가 시작되고, 중학교 쯤 가면 제법 영어를 하는 학생과 알파벳도 완전히 익히지 못한 학생이 한 교실에 섞여 수업을 받는다.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당대 펴냄)는 최근 10여년 동안 국내에 발표됐던 영어에 대한 반성적 시각의 담은 글들을 추려 엮은 책이다. △우리에게 영어는 무엇인가 △영어, 어떻게 배우고 가르쳐야 하나 △영어의 지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라는 3개의 주제를 큰 얼개 삼아, 영문학자·사회학자·언어학자들이 쓴 17편의 글을 실었다.



우리 사회가 영어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100여년 전. 강내희 중앙대 교수는 ‘식민지시대 영어교육과 영어의 사회적 위상’에 주목한다. 한국 근대소설의 효시라는 <혈의 누>(이인직, 1906년)에는 미국 유학파 출신의 남녀 주인공 구완서와 김옥련이 정분을 나누는 대목이 나온다. 구씨는 본래 활발하고 거칠 것 없이 수작하는 사람이라 옥련이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애 옥련아, (중략) 우리가 입으로 조선말은 하더라도 마음에는 서양 문명한 풍속이 젖었으니, 혼인을 하여도 서양 사람과 같이 부모의 명령을 좇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부부 될 마음이 있으면 서로 직접하여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러나 우선 말부터 영어로 수작하자. 조선말로 하면 입에 익은 말로 외짝해라하기 불안하다”하면서 구씨가 (중략) 서투른 영어로 수작을 하는데, 옥련이는 조선말로 단정히 대답하더라.

이것 말고도, 이광수의 <무정>, 현진건의 <희생화> 등 개화기 문학작품들에서 영어를 하는 인물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구한말 지배계층 엘리트나 지식인 절대다수는 미국 문물을 직·간접으로 경험했거나 독학으로라도 영어를 익혔다. YMCA는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최초의 대중 공간이었다. 영어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여러 언어 중의 하나가 아니라 ‘새 시대 개화문명’의 상징으로 들어온 셈이다. 분단과 미군정, 한국전쟁과 냉전은 우리 사회에서 미국과 영어에 ‘주류 지배권력’의 무게를 얹었다.



최샛별 이화여대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영어실력을, 부르디외의 개념을 빌어 ‘문화자본’ 내지 ‘구분짓기’와 ‘계급재생산’의 중요한 기준으로 봤다. 한국사회에서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가지 외국어를 잘한다는 것을 넘어, 개인적 능력과 사회적 성공의 척도가 된다. 최 교수는 전국 6개 대학생 1719명을 대상으로 부모의 소득·학력·직업과 자녀의 영어에 대한 자신감의 상관관계를 설문조사한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예컨대, 월소득 500만원 이상 가구의 자녀 29.2%가 “영어에 자신 있다”고 답한 반면, 150만원 미만 가구에서는 9.9%에 그쳤다. 또 부모의 직업이 고학력, 전문·관리직일수록 “자신 있다”는 응답이 많았다.

이승렬 영남대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영어의 매혹은, 영어가 이 땅의 지배적 이념의 전달자로 자리잡게 됐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짚는다. 일각에서 영어공용화론이 나오는 배경도 이러한 사회언어학적 맥락에서 분석된다. 이런 사정은 자본주의적 세계화 물결과 무관하지 않다.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는 “영어의 확산이 그 이전의 지배적 언어였던 라틴어나 프랑스어와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은 그 기원이 자본주의의 발흥과 때를 같이하고 있”으며, “영국에 이어 미국이 패권을 장악한 금세기에 이르러 영어는 이 시대에 가장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매개체가 된다”고 갈파한다. 영어가 ‘중립적 언어’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닌 지배·억압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이데올로기가 영어교육체계를 통해 청소년기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알게 모르게 전파되고 학습된다는 것이다.

원로 영문학자 김진만은 영어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올바른 영어교육을 저해하는 현실을 ‘인권유린 수준’이라고 질타하면서, “교양 있고 지적 균형이 잡힌 국제인을 만들기 위”한 방향으로 영어교육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박찬길 이화여대 교수가 자신의 유학 경험을 전하면서 진정한 영어실력은 자기 생각과 주장을 적절한 표현으로 조직해내는 ‘사고력’과 어휘력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 쓰다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친 더글라스 루미스는 한발짝 더 나간다. “중요한 것은 영어를 문화지배의 언어가 아니라 아시아와 제3세계의 연대를 위한 언어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회화 교재들이 수강생들의 체질에도 맞지 않은 ‘미국식 개성’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그런 어색한 상태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라고 한다”는 비판도 우리네 풍경과 꼭 닮았다.



언어는 한 집단의 얼을 담는 그릇이자 문화의 총체이다. 윤지관 교수는 이 책의 제목이 된 마지막 글에서 알제리의 사회철학자이자 반제투쟁가였던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흰 가면>(1978년 번역본 제목은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떠올린다. 자신의 민족성을 감추고 서구를 모방하고자 하는 욕망이 식민지인들의 의식을 왜곡시켜 위선적이 되게 하고,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위기에 빠뜨린다는 것.

영어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의사소통수단이자 국제협상을 비롯한 외교 언어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영어를 잘 할 이유와 필요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영어에 대한 숭배에 빠져 모국어가 자신의 삶에서 가지는 의미조차 망각하는 사람들은, 김남주 시인의 의역을 빌리자면, ‘자기의 언어에서 유배당한 것’이다.”(조일준 기자)

07.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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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7-04-07 00:50   좋아요 0 | URL
좀 뒤떨어진 애기 같네요.
영어는 지상목표가 아니라 기본입니다.
물론 한국의 일부 애기겠지만 그 일부(미국유학생만 10만인세상)가 적지 않고
초등학교때 영어는 기본 제2외국어 겸하는것이 트렌드이고요.
외고에서 영어로는 애들 우열을 가릴수 없어 수학에서 판별하는 세상에.
오디오나 다른 기기 그리고 영어책을 쉽게 구할수 있는 애들 차분히 시키면 영어가 그리 큰 장벽은 아닌세상인데.

biosculp 2007-04-07 00:51   좋아요 0 | URL
그리고 지금 영어 상황은 대학 1,2학년보다 초딩애들이 더 잘하는 수준입니다.
어려운 문법빼놓고는 회화, 작문은 월등합니다.
초딩애들 잘하는 애들은 머리에서 번역안하고 그냥 영어로 생각하는 수준이니.

로쟈 2007-04-07 00:57   좋아요 0 | URL
'영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는 그 경우에도 던져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닐까요? 말씀대로라면, '영어로 생각하는 수준'에 이른 다음 세대에게 '한국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할 것도 같지만...

드팀전 2007-04-07 09:35   좋아요 0 | URL
^^..두 책의 리뷰가 비슷하군요...언젠가 직장동료가 TV에서 영어잘하는 사람을 보더니 "와..무지 똑똑한데" 그러더군요.^^ ...

소경 2007-04-07 10:40   좋아요 0 | URL
영어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까지만 생각 했는데..'영어로 생각하는 수준'가지는 미치지 못했네요 .

마늘빵 2007-04-07 10:51   좋아요 0 | URL
오늘 아침 한국일보 책 소개서 이거 보고 바로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제가 가장 관심갖는 주제 중 하나에요.

마늘빵 2007-04-07 10:54   좋아요 0 | URL
영어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세계화의 추세이고 영어를 못하면 도태된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경쟁을 우회하는 것이지요. 경쟁의 대열에 들어서지 않으면 됩니다. 외부에서보면 저는 영어경쟁에서 '도태'되었다고 하겠지만, 저는 '우회'하고 있는 겁니다. 한때 영어를 잘했던 내가 왜 문맹의 수준에 도달했는가 하면, 기회비용이 크기 때문이라고 대답 하겠습니다. 영어 꾸준히 잘하려고 노력하는 시간에, 저라면 차라리 책을 더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해적오리 2007-04-07 11:06   좋아요 0 | URL
가끔 (저를 포함한) 만은 사람들이 어떻게 영어를 잘할 것인가하는 만큼 자신들의 삶을 큰 시각에서 바라보는 시선이나 자세에 대해 고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 직업상 연관이 많은 사안인데, 제가 접해본 선에서 아이들의 영어 실력 향상에 대한 엄마들의 강박이 전 무섭다고 느낄 정도에요.

로쟈 2007-04-07 11:30   좋아요 0 | URL
다음 세대의 한국인들이 모두 영어에 능통하다면(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영어공용화론' 자체가 무의해지겠지요(민족에 대한 정의 하나는 '언어공동체'이지요). 더불어, '한국인'이란 말 자체도 다시 정의되어야 할 것이고, 'Yellow Skin White Masks'에 훌쩍 다가설 것이고. 문제는 언어가 '소통의 수단'을 넘어서 '사고의 방식', 그리고 '삶의 양식'과 맞물릴 때입니다. 모두가 자랑스런 'Yellow American'이 되는 그날엔 사소한 문제일 법하지만...

웅아 2007-04-07 12:02   좋아요 0 | URL
로쟈님 질문입니다. 그럼 영어를 잘 하면서도 정체성을 어느정도 보존하는 나라는 있나요? 잘모르지만 네덜란드나 스위스는 어떤가요?

로쟈 2007-04-07 12:29   좋아요 0 | URL
글쎄요, 유럽 국가들은 원래가 다중언어적 상황에 처해 있었고, 또 같은 '백인'인지라 우리와는 사정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비교하자면 중국이나 일본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클리오 2007-04-07 13:23   좋아요 0 | URL
영어가 필요없는 사람들까지 영어로 스트레스 받게 하는 세상이 좀 어이가 없어요. 영어가 기본이라지만 우리 나라 안에서 쓸 일도 한번 없는 사람도 많잖아요. 학문의 문제에 있어서는 뭔가 이중적인 느낌으로 좀더 생각해봐야겠지만요.. 휴휴..

biosculp 2007-04-07 14:18   좋아요 0 | URL
영어가 별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실용영어를 말하는것이죠.
이건 자주 말하고 듣고 하면 그리 부담되지 않는다는 것을 요즘 초딩들 보면서 다시금 느낍니다. 고딩이상들하고 배우는 과정이 달라져서 그런것 같기도 하고요.
문법 배우기 전에 외국인과 직접대화하거나 오디오 있는 책 읽어가거나 비디오 보면서 직접 대하니.
그리고 정체성 문제는, 영어잘할려면 가장 먼저 해야할것은 모국어의 수준을 높이는것이다 라고 하더군요. 영어 잘할려면 한국어의 수준이 높어져야하는것이니.
기본은 한국어.
오히려 문법하나를 이해하려해도 한국에서 써진 문법책은 거의 없다는것이 문제라면 문제일것 같습니다. 그냥 예 덜렁 내놓고 문제풀이식.
영어된 좋은 책들, 이것도 하나의 이유는 될것같습니다.

로쟈 2007-04-07 16:54   좋아요 0 | URL
클리오님/ 대부분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대학교수나 강사들에게도 "영어는 ‘억압’으로 작용"합니다.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한.
biosculp님/ 표제에서 암시되는 것이지만, 중요한 문제제기 중의 하나는 "영어를 정복하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영어라는 제국에 정복되는 과정"이라는 주장입니다. 영어를 잘 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어를 잘 해야 한다, 는 주장도 사실 달리 보면 섬찟하게 들립니다...

붉은달걀 2007-04-07 19:18   좋아요 0 | URL
영어는 문화라는 이제는 국제화라는 이름아래 우리에게 권력의 한 형태로 다가와 있습니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로자님의 말에 적극 동감하고요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겠습니다만 우리것이라는 기둥 속에서 다른문화든 언어든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biosculp 2007-04-07 23:00   좋아요 0 | URL
윽,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는 아닙니다.
그냥 외국어 실력은 모국어 실력을 넘을수 없다는 애기정도니까요.
영어, 제국까지 연결되는 주장은 동감하기가 어렵군요.
영어숭배를 벗어나게 하려면 영문학자들이 한국말로 된 영문법이나 좀 제대로 써주시고 나서 애기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구학관이라는 분 의 영문법책 보고나서 이런 영문법책도 있구나 했습니다.
가구라는 단어가 있을때 불가산 명사와 가산명사 해서 이때는 어쩌고 단순히 외우기만 하던 부분을 이분 책을 보니 많은 설명이 달려있더군요.
영어나 미국을 보는 눈이 성인인 우리와 애들이 같을것 같지는 않습니다.

로쟈 2007-04-08 23:19   좋아요 0 | URL
삶은달걀님/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고 단언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부분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죠. 각론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biosculp님/ '한국말로 된 영문법' 책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필요할 거 같지는 않은데요.^^; 아이가 다니는 영어학원에서도 교재는 영어권 것을 그대로 쓰니까요!..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이스라엘 작가 에프라임 키숀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마음산책, 2007)은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다. 예전에 같은 제목으로 디자인하우스(1996)에서 출간된 바 있기 때문이다. <개를 위한 스테이크>(디자인하우스, 2001)가 작년말 마음산책에서 다시 출간된 데 이어 이번에는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가 말을 바꿔타게 된 것인데, 디자인하우스의 에프라임 키숀 판권을 마음산책에서 모두 인수한 모양이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개를 위한 스테이크>는 오래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수준에 맞아서가 아니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학원강사를 하던 시절, 초등학생들의 논술교재로 사용했기 때문. 그때 쓴 교재로 아직 기억에 남는 것이 로알드 달의 <마틸다>와 키숀의 <개를 위한 스테이크>이다. 한두 편씩 읽히고는 줄거리와 감상을 쓰게 한 것이 강사로서 내가 한 일이었다. 언젠가 적은 듯하지만, 고등학생들에겐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마음산책, 2000)를 주로 복사해서 나누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 또한 마음산책에서 나온 책이로군.

이번에 판을 바꾸면서 몇 가지 교정을 가했다고 하니까 새로 구입하시는 분들이야 손해는 없을 듯하지만, 디자인하우스판을 갖고 있는 사람과는 무관한 얘기이다. 다만, 현대미술에 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연관된 기사('전지현과 낸시 랭 누가 더 예술적인가')가 눈에 띄기에 콜라주를 해보았다.  

한겨레(07. 04. 06) 현대미술은 사기다!

현대미술이여, 침을 뱉어라! 유치원생이 긁적거린 듯한 그림을 보며 고등교육을 받았음직한 사람이 꽤 심각한 표정으로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하니까 필시 저 그림 뒤엔 뭔가가 있을 거야”라고 중얼거린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 뒤엔 벽 밖에 없다. 당신은 지적 야바위꾼에게 ‘낚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전람회의 그림’은 관람객의 지적능력을 시험에 들게 하고 인내력의 극한을 체험하게 한 뒤, 이윽고 그 난해함 앞에 “꿇어!”라고 윽박지른다.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다. 조롱과 야유는 끝이 없다. 현대미술 앞에 무력한 개인은 뭔가를 통해 그 답답함과 모욕감을 털어내고 싶어 이를 박박 간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미술 마피아와 작가에게 업신여김 당하는 하나의 ‘오브제’일 뿐이니.

풍자소설 <개를 위한 스테이크>로 널리 알려진 에프라임 키숀은 이 책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를 통해 복잡하고 난해한 현대예술의 죄악에 대해 유쾌하게 까발리며 대중들에게 퍽(!) 쓸 만한 반격무기를 쥐어준다. 1996년 반성완 교수가 같은 이름으로 번역했던 이 책은 그 동안 절판돼, 소수의 알음알이 입소문을 타고 돌려보았다고 한다. 개인 블로그에서도 종종 “00도서관에서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를 드디어 빌렸다”라는 포스트를 볼 수도 있다. 11년만에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고 잘 읽히게 손질했다고 한다.

피카소전을 보러 가면 그림보다 앞사람 뒤통수를 더 극사실적으로 감상할 만큼 붐비고 피카소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논술시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저기 길모퉁이를 돌면 바로 피카소 미술학원이 보일 만큼 현대미술은 우리 삶 가까이 있다. 그렇지만 예술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술가 자신이 아니라 좌절된 지식인으로 구성된 작은 국제 마피아조직이라고 지은이는 힘줘 말한다.

그렇게 해서 유명해진 화가들은 엉터리 궁정광대가 되거나 아니면 기성 미술화단의 엉터리 어릿광대가 된다. 지은이는 파카소나 앤디 워홀, 마르셀 뒤샹 등을 앞 뒤 분간 못하는 유머리스트라고 못 박는다. “그들 작품의 오락적 가치를 인식해 마음껏 즐겨라. 실컷 웃음을 터뜨려라.” 이것이 지은이가 말하는 유쾌한 한마디다.

자, 이제 지적 사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마음껏 즐겨’ 보자. 앞의 것은 비평전문용어고 괄호 안은 실제의 예술대상이다. 자기도취적으로 끓어오르는 힘의 유희가 만들어낸 팽창하는 부드러운 구조(왼쪽 모서리의 갈색 얼룩), 리듬을 넣은 선의 아폴론적 완성(두개의 테두리 줄), 시대를 초월한 변용으로 인해 우주적으로 상승하는 세포(무 無), 멜로디의 과잉에 대한 시각적 거리두기로서의 미리 구성한 진테제(뒷면에 작가 사인이 있는 텅 빈 캔버스), 원형적인 비의와 키메라적인 비의의 나선적이고 유동적인 대립(다섯 개의 녹색 사각형), 태아에 근접하는 파괴계수의 폭발을 예고하는 기하학적이고 몽유병자적인 의식의 형태(부풀어 오른 콘돔).

재미있다면, 몰래카메라 얘기 하나 더. 텔레비전은 침팬지 두 마리가 물감으로 뭔가를 마구 그리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이 그림을 ‘제3세계 젊은 미개인전’에 출품한다. 교양있(는 척 하)는 관객들은 추임새 넣듯 주기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참석한 예술전문가들은 최대 찬사를 사용해가며 이 기발한 예술작품을 칭찬하는데 침이 마른다. <디 차이트>에는 “미로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지만 나는 만족과 존경심을 가지고 이 그림을 감상했다”는 평이 실린다. 함부르크 시립미술관장은 “젊음의 신선함과 패기,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작가는 최소한의 도구, 네 가지 색만 사용하는데 처음에는 파란 색만 쓰다가 대칭을 맞추기 위해 위와 아래에 빨간색을 칠했다. 완벽하다.” 몰카임을 알고나서 그들은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을까. 이 소동은 글자 그대로 미술관 옆 동물원이다.(손준현 기자)

낸시랭, < 터부요기니 - 명성황후>, 캠퍼스 위에 혼합매체, 162x110cm, 2006

컬처뉴스(07. 04. 04) 전지현과 낸시 랭 누가 더 예술적인가

낸시랭을 둘러싼 일련의 소동은 나에게 의아한 사건이었다. 처음에 낸시랭에 대한 언론보도를 봤을 때, 나는 무엇이 그를 “주목할 만한 차세대 예술가”로 비치도록 만드는 건지 정말 궁금했다. 그를 ‘특이한 예술가’라고 규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과문한 탓인지, 내 눈에 그의 행위예술이라는 것에서 그 어떤 ‘특이성’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작년에 그가 발간한 책을 읽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도발적’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도발적인 걸 꼽자면, 미국 유수대학의 의대생이었다가 플레이보이 잡지 모델이 된 이승희보다 못한 게 아닌가 싶었다. 현상의 측면에서 본다면, 낸시랭은 여러 모로 이승희를 닮았는데,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여성해방을 동일시하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진보적’이라는 언론이나 인사들이 의아할 정도로 그에게 친절한 것도 그랬다. 물론 다른 것도 있었다. 낸시랭은 이승희보다 더 노골적으로 돈을 밝혔는데, 해괴하게도, 한국 화폐가 아니라 ‘달러’만을 돈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미술은 돈”이라고 말하지 않고 “미술은 달러”라고 말했다. 과연 여기에서 그는 피카소를 패러디하고 싶었을까? 모를 일이다. 다만 확실한 건 그에게 달러는 절대적 가치 또는 지고의 쾌락을 뜻하는 하나의 기호라는 사실이다.

내가 놀라웠던 건, 이런 낸시랭의 천방지축에 대해 거의 누구도 적절한 비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강명석이나 진중권 같은 이들이 낸시랭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긴 했지만, 모두 완곡한 태도로 “좀 더 지켜보자”는 수준에서 주춤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 낸시랭에 대한 비판을 유보하도록 만드는 걸까? 어떤 수컷도 애교 떠는 암컷 앞에서 이빨을 드러낼 수 없다는 동물행동학의 논리를 적용해서 설명한다면, 의외로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다. 어떤 기자 말대로, “애교는 에너지”니까. (참으로 부끄럽지만, 이게 한국의 문화부 기자 수준이다) 그러나 이런 장난이나 치려고 내가 낸시랭을 들먹이고 있는 건 아니다. 정말 낸시랭에 무언가 있는 걸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렇게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낸시랭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만약 우리가 굳이 낸시랭을 ‘의미 있는 예술가’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이 지점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거다. 그의 작업은 확실히 “예술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세계사적 맥락에서 운위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원에서 그런 게 아니다. 그의 ‘예술’은 예술 따위가 필요 없는, 예술성 같은 건 물 말아 먹어도 시원찮아 할 세계를 드러낸다. 낸시랭에게 ‘예술’은 상품교환체계 속에서만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낸시랭에게 중요한 건 예술이 아니라, 그 예술이 잘 팔려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예술성이 아니라 “비즈니스 마인드”다. 그냥 쉽게 말하자면, 그에게 예술은 자본의 축적 수단이다. 상품이 되어버린 예술, 이걸 낸시랭은 “진짜 예술”이라고 부른다. 낸시랭은 확실히 예술의 죽음을 보여주는데, 그 죽음의 집행자는 자본주의다. 그러나 낸시랭은 예술의 죽음을 증언하고 이에 항의하는 게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자본주의에 ‘솔직하게’ 투항해버린다. 이런 솔직한 태도가 낸시랭에 대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지점에서 여러 가지 곤혹스러운 사태가 발생하는 것 같다.

낸시랭에 대한 착시현상은 여러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황우석 사태와 유사한 맥락에서 낸시랭을 둘러싼 일련의 현상들 또한 ‘여론’에 약한 한국 지식사회의 포퓰리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돈과 쾌락에 대한 낸시랭의 태도는, “즐겨라!”라는 자본주의적 초자아의 명령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따라도 될 것 같은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런데 이는 결국 자본주의로부터 계속 쾌락을 얻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재확인하고 여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낸시랭은 충실한 자본의 전도사다. 왜 건담과 명품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는가 하는 질문에 낸시랭은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세상살이가 로봇의 차가운 갑옷처럼 강한 척 하고 살아야하는 거잖아요. 거기에 조합시키는 기생은 조선시대의 잔 다르크 같은 존재였다는 걸 부각시키고 싶어서예요. 아이의 얼굴을 붙인 건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사람의 모습을 대변하고 싶어서죠. 아,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평론가들의 말이에요. 저는 그냥 좋아하는 이미지들을 모은 거예요. 특히 명품요. I love 명품! 구찌를 특히 사랑하죠.”

낸시랭이 전하는 평론가들이 쏟아낸 그 말들이 민망하기 짝이 없는 건 둘째치고라도, 이 평론조차 ‘너무 심각하다’고, 자기는 아무 생각 없이 좋아하는 이미지를 그냥 모은 것뿐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낸시랭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그러나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낸시랭이 체현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내포되어 있는 본질적 특성이다. 자본주의는 원칙적으로 해방에 대한 요구를 내재하고 있고, 권위주의와 에고이즘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한다. 이런 맥락에서 ‘박애’같은 고통에 대한 반응을 도덕적 표준으로 등재하기도 한다. 한미FTA에 대한 현 정부의 집착도 이런 자본주의의 해체적 속성에서 자신의 ‘진보적’ 신념을 추인해줄 어떤 ‘실재의 응답’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낸시랭이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이런 자본주의의 ‘아방가르드적 특징’ 때문이다. 자본주의만큼 예술과 삶의 일치를 주장했던 아방가르드는 없었다. 현대 자본주의의 광고는 아방가르드적 감수성과 상업주의가 결합한 거다. 예술의 산업화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건 산업의 예술화다. 산업은 부르주아의 예술이고, 기계는 부르주아의 작품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자체가 ‘예술’이 되어버린 상태, 다시 말해서 ‘예술 없는 자본주의’가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낸시랭은 보여주고 있는 거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바로 낸시랭에게 비극일 수밖에 없다.

모든 예술이 광고이고 상품이라면, 낸시랭과 전지현 중 누가 더 ‘예술적’이겠는가?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 질문이다. 낸시랭을 가능하게 만든 그 조건은 낸시랭의 무가치함을 증명하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비평의 양심 같은 게 아직 남아 있다면, 이제 ‘이건 아니잖아’를 외칠 시간이 된 것 같다.(이택광_문화평론가)

07. 04.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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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7-04-06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는 뱉을라고 했는데 뱉으라고 하니까 잘 뱉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이런거죠. 현대미술.)

2007-04-06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4-06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06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oule님/ 미술쪽에 관심이 있으시군요.^^
**님/ 뭐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천천히 읽어보시면 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톰 울프도 신랄하죠. 아쉬운 건 이런 비판들이 좀더 두툼하고 체계화된 형식으로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인데요, 그런 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들레르와 모더니티'라면 하도 많이 다루어진 주제라서 무슨 새로운 얘기가 있을까 싶은데, '담론비평'에서 이 주제에 관한 새로운 학위논문을 요약해주고 있다. 자세한 건 논문을 읽어봐야 알겠지만 관심있는 독자라면 챙겨둘 만하다.   

담비(07. 04. 04) 아방가르드와 결별한 21세기 보들레르

보들레르는 19세기 중엽 새롭게 등장한 '현대적 삶'이 예술에서의 변화를 요청한 장본인이라는 독자적인 인식에 근거하여 그러한 요청에 답하는 예술론을 모더니티 개념을 통해 정식화해냈다. 보들레르의 문제의식은 전통적인 재현론을 대체한 새로운 예술론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로, 이미 도덕적 가치를 내재한 대상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이 동시대 변화된 삶의 제 양상을 재현하는 방식으로서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따.

보들레르가 보기에 범죄자나 정치적 모사꾼, 혹은 첩과 같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현대적 삶을 재현하는 것이 새로운 예술의 임무이기에 도덕적으로 무의미한 그런 인간군상을 심미화하는 것, 즉 도덕으로부터 미적인 것을 분리시키고 심미적인 것에 완전한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 새로운 재현론의 성격이었다.

이런 보들레르의 예술론은 그가 프랑스혁명 이래 제2공화정 기간 누구보다도 공화주의에 헌신한 진보주의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혁명의 실패, 연이은 국민투표가 입증한 프랑스 국민들의 정치적 무능함과 기만성, 그 결과물로서의 제2제정 사회의 등장 및 나폴레옹 3세의 등극을 보면서 보들레르는 혁명과 대학살, 진보와 데카당스가 반대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라고 믿게 됐다.

보들레르는 물직적인 풍요로움에 근거하여 역사의 진보에 심취해 있는 동시대인들의 타락한 면모를 비판하기보다는 진보의 신화에 가리워진 동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전개했다. 이런 글쓰기를 통해 그가 제시한 대안적 삶은 댄디즘이다. 개인이 따를만한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가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의 자율성과 독자성은 보존이나 발굴이 아니라 발명의 문제라고 보들레르는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산업화, 문명화된 동시대 삶이나 예술의 일차적인 조건 혹은 사실은 일시성이었다. 도시적 삶은 덧없이 스러져가는 순간에 대한 경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 과연 일시성과 순간성이 경험의 조건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예술은 어떻게 영원성에 헌신하려는 노력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를 스스로에게 제기한 뒤 보들레르는 일시성으로부터 영원성을 끌어내는 임무를 '현대적 삶의 화가'에게 부여하게 된다.

따라서 보들레르의 관심은 들라크루아나 마테나 쿠르베와 같은 위대한 화가들이 아니라 신문에 삽화를 그리는 풍속화가 기의 작업방식에 대한 성찰로 나타난다. 기를 통해 보들레르는 일시성으로부터 영원을 끌어낼 수 있는 화가의 힘을 보았고, 예술가 주관의 심미적 변형의 능력이 일시성을 영원성의 위치로 승격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모더니티 개념에 담긴 이러한 보들레르의 생각은 20세기에 들어서 아방가르드 개념의 영향력 아래에서 잊혀져 버리고 보들레르의 모더니티는 그저 일시성의 미학으로서 제한적으로 해석, 수용되었다. 그 결과 보들레르의 모더니티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시작을 알리는 이른바 새로움 숭배의 기원으로 잘못 평가되었다.

이런 보들레르 수용에 반성이 인 것은 1970년대 들어서다. 기존 보들레르 문학에 대한 제한된 해석을 수정하려는 것과 보들레르 모더니티 개념의 본래적 의미를 새롭게 발굴하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아방가르드 모더니즘과 맺어진 끈도 떨어져나갔다.

양효실 서울대 강사는 최근 이러한 요지를 담은 박사학위논문 '보들레르의 모더니티 개념에 대한 연구'(2006, 서울대학교)를 제출했다. 그는 보들레르의 모더니티는 아방가르드 개념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를 부정하는 데 헌신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현재의 부정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구제일 수 있는 방식을 모색했으며 형식 개념처럼 예술의 자율성을 위해 삶과의 연관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예술의 독자적 가치를 동시대 삶의 맥락 안에서 모색한 예술론이라고 결론 내린다. 아방가르드 모더니즘과 형식주의 모더니즘을 둘 다 뛰어넘는 예술적 인식론을 보들레르를 통해 새롭게 정초해보자는 제안인 것이다.(리뷰팀)

07. 04. 04.-05.

P.S. 이 리뷰 기사에 눈길이 간 건 마침 새로 편집돼 나온 벤야민의 보들레르론 <현대적 삶의 작가(The writer of modern life : essays on Charles Baudelaire)>(2006)을 구해보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벤야민과 보들레르에 관한 글도 언젠가는 쓰고 싶은데, 그 '언젠가'는 언제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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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2007-04-05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케이드 프로젝트> 보들레르 장을 읽고 뒤늦게<악의 꽃>을 구입하려 한다는 사실이 너무 후회됩니다(너무 뒤쳐져서 부끄럽기도).

그러나 로쟈님의 벤야민과 보들레르 너무 기대 됩니다. 그 언젠가를 기다리전 보들레르에 대해 어느정도 소양을 갖추기 위해 분발해야겠네요. 건강하세요 ^^

로쟈 2007-04-0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아케이 프로젝트>는 남들보다 빨리 읽으신 것 아닌가요? 자기 나이에 맞게 읽고 생각하게 되는 거라면 굳이 남들과 견줄 이유는 없을 거 같습니다.^^ 거창하게 '벤야민과 보르레르'라고 적었지만 실상은 '지나간 여인에게'란 시를 중심으로 두 사람 얘기를 몇 자 적는 게 취지였고, 얼마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일주일 정도의 여유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일 뿐입니다.--;

2007-04-07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