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앙에 실린 박노자와의 인터뷰를 옮겨놓는다. 한미FTA에 관한 것인데, 그밖에 다양한 관심사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나로선 북한 체제와 민노당에 대한 그의 견해에 공감한다). 이미 우리시대의 논객이자 국외자적 지식인으로 자리잡았지만, 박노자는 가라타니 고진이 인용하고 있는 바로 그 ‘non-Jewish Jew’(비유대적 유대인)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혹은 ‘non-Korean Korean’(한국인이 아닌 한국인). 그런 입지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요긴하며 필수적이다. 그의 모든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한미FTA 관련인지라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다. 

레디앙(07. 04. 09) 한미FTA 정치사회적 겨울 온다

"미국과 한국의 시장을 통합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신자유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정책을 수립할만한 여지가 남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이 아닌가 싶다. 어떤 세부적인 혜택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이 나라에서 부자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어떤 정책도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환영하는 것 같다"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박노자 교수는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지배층이 한미FTA를 추진하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한미FTA 협정이 체결되면 우리 사회는 미국식 모델 외에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될 것이라면서 "사회와 국가의 장기 보수화, 일종의 정치사회적 겨울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 이라고 전망했다. 박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를 들먹이고 진보적 슬로건을 하나의 어법으로 이용하면서 일부 민중을 포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국가를 미국형 사회모델, 한 편에는 소수의 부유층과 고소득층과 중산층 상층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70-80%나 되는 빈곤층과 준빈곤층, 몰락 중인 하급중산층이 있는, 민중에게 대단히 고통스러운 사회모델로 몰아가고 있다"고 노 대통령을 비판했다.

박 교수는 한미FTA의 효과로 소비자 잉여가 증대될 것이라는 논리에 대해 "소비자가 바로 노동자다. 소비하려면 우선 벌어들여야 하는데, 직장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며 "오세훈 서울시장이 벌이고 있는 공무원 '퇴출 쇼'가 그런 것인데, 일종의 시범케이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모델이 공고화된다면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은 공포의 나날이 될 것"이라며 "당장 다음 달을 예측할 수 없는 공포의 연속일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노 대통령에 대해 대단히 신랄했다. 그는 "(노 대통령같은) 그런 자들이 장기적으로 한국 민중에 가장 위험하다. 카멜레온처럼 기만책을 대단히 잘 구사한다. 일부 민중층을 포섭하는 언어적 수법에 능하다. 또 자수성가한 민중 출신이다. 그런 사람이 민중운동을 파괴하는 데는 가장 쓸모가 있다"고 맹비난했다.

박 교수는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진보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고, 좌파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한다"고 분별하면서 자신과 노 대통령을 진보로 규정한 데 대해 "조기숙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이화여대에서 시간강사를 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 중에 교수가 될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수 많은 시간강사들, 수 년 동안 시간강사 일을 해온 사람들, 상당수는 정규직 교수에 비해 능력 좋고 업적 좋은 사람들, 조기숙 선생이 만들고 싶은 사회에서는 이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그것부터 물어보고 싶다"고 꼬집었다(*이러한 '맡바닥' 사정은 조교수보나 박교수가 훨씬 잘 아는 듯 보인다). 

박 교수는 이번 대선과 관련해 "지금 같아선 극우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것이 뻔해 보인다"면서 "(민주노동당이) 그것을 막을 수는 없어도 제대로 저항해서 수 백만 표를 얻을 수 있다면 앞으로 극우 세력과 제대로 투쟁하면서 한국의 보수화를 제지할 수 있을 것"이지만 "요즘 민주노동당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담하다"고 했다.

박 교수는 민주노동당의 문제로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 먼저 당이 젊은층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민주노동당은) 80년대 운동권의 보수적이고 서열위계적인 문화가 강하다. 양성평등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경우도 많지 않나 싶다"면서 "20대 여학생이 친근하게 대하기 굉장히 힘든 구조"라고 지적했다. 또 비정규직 노동자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당 지도부나 국회의원 후보 선출시 비정규직에 쿼터를 부여하는 것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심상정 의원이 제안한 비정규직 대상의 당원 가입 특례안에 대해서도 "일리 있는 제안"이라고 호응했다.

박 교수는 민주노동당의 대선 레이스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면서 "대중적인 호소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 선출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 교수와의 인터뷰는 한미FTA 문제가 주제였지만, 한미FTA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다른 이슈들로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특히 북한 문제에 대한 박 교수의 분석은 독특하고 흥미로웠다.

박 교수는 북미관계와 관련, "북한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과 러시아, 남한까지 견제할 수 있는 카드는 미국"이라며 "북한은 미국이 허락만 한다면 가장 친미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미국이 허락한다면 북한의 자체 식민화가 진행되지 않을까 싶다"면서 "미국 자본과 남한 자본, 일본 자본에게 자기 나라의 저임금 노동력을 어떻게 팔아먹을 것인가 하는 것이 북한 지배층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같은 분석에서 보듯 북한의 현 지배층에 대해 박 교수는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러니 북한의 지배층을 추종하는 운동권 내의 일부 경향에 대해 박 교수가 어떤 입장을 갖고 있을지는 능히 짐작되는 바다. 그는 '탈북자' 문제와 관련, "남한 운동 진영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는 탈북자를 체제 부적응자나 심하면 배신자로 규정해서 왕따시키는 게 아닌가 싶다"면서 "주사파를 이해하기 힘든 게 이런 점이다. 본인들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데, 같은 민족인 북한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면서 무슨 놈의 민족주의인가. 이건 조선민족이 아니라 북조선이라는 국가를 위주로 놓고 생각하는 아주 악질적인 국가주의"라고 맹비난했다.

박 교수와의 인터뷰는 7일 낮 12시부터 성균관대학교 야외 휴게실에서 약 90분에 걸쳐 진행됐다. 인터뷰를 마치고 혜화역으로 가는 길에 보니 대학로에선 한미FTA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 한미FTA 협상이 타결됐다. 어떻게 평가하나.

= 자세한 평가는 세부 내용을 봐야 가능할 것 같다. 정부는 개성공단 문제와 관련해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말하지만, 이는 앞으로 대중국 정책 방향에 따라 결정될 문제다. 

- 한미FTA 특위 열린우리당측 간사인 송영길 의원은 한반도역외가공지역위원회 설치 건을 놓고 "동북아에서 경쟁력 있는 통일경제의 꿈"을 말했다.

= 송영길 의원이 말하는 경쟁력이라는 건 60~70년대 한국식 성장모델의 재판이다. 한국 노동자 대신 북한 노동자를 저임금 착취 모델로 몰아내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섬유제품 등을 미국에 팔아 60~70년대 한국자본주의의 기적을 재현해 보겠다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북한 정권이 한국 자본의 대리인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 북한 지배집단의 동향을 보면 여기까지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이렇게 되면 북한 노동자들은 한국 자본과 북한 지배집단이라는 대리인에 의해 이중착취 상태에 놓일 것이다. 북한 민중이 절대적 기아사태를 면하면 다행이지만 이중착취 구조에서 생활수준도 크게 개선되지 못할 것이고, 결국 지금과 같은 무권리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송영길 의원의 기대대로 된다고 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송 의원의 기대대로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국이 이란 침략 계획을 실행하지 않고 보류한다면 다시 한 번 동아시아로 눈을 돌려 잠재적 경쟁 상대인 중국을 약화시키는 집중적인 포위 프로젝트에 착수할 확률이 높고, 그 한 부분이 북한 때리기다. 북한은 미국의 대중국 전략의 종속변수다. 중국의 대국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것에 따라 미국의 북한 때리기는 언제라도 재개될 수 있다.

- 미국에겐 대중국 정책이 상수라는 얘긴데.

= 그렇다.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유전처럼 약탈할만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미국에게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를 공격할 수 있는 최적의 교두보다. 이는 열강정치에서 확인된 지 오래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1901년부터 협상을 했는데, 당시 러시아측 요구가 뭐였느냐면 39선 이북 지역의 중립화였다. 한반도 북부지역을 일본 영향권과 대륙 영향권 사이의 완충지대로 파악한 것이다. 지금 중국이 북한을 보는 것도 당시 러시아의 시각과 같다. 당시 일본, 그리고 현 미국 세력의 영향권과 대륙 세력의 영향권의 충돌의 문제이지 북한 자체를 특별히 미워할 것도 없고 북한을 공격해서 얻을 것도 없다.

- 송영길 의원은 운동권 출신이고 햇볕정책의 신봉자다.

= 햇볕정책이라는 것이 북한의 지배집단을 잘 포섭하자는 얘기 아닌가. 싸우자는 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을지 몰라도 한국 지배계급의 자기 위주 발상이다.

- 구여권에 있는 운동권 출신 인사들 가운데는 한미FTA와 남북관계 개선을 같은 궤에 놓고 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 지금 정부와 구여권이 팔아 먹을 수 있는 건 북한 문제밖에 없다. 복지정책은 내세울 게 없고, 부동산 값도 잡히지 않고 있다. 민생파괴와 농업파괴는 한미FTA로 이미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도시의 30~40대 화이트칼라, 농민, 노동자들에게 팔아 먹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유일한 게 북한 문제다. 이들은 진보적 지지층에 먹힐 수 있는 북한문제와 전혀 먹히지 않을 것 같은 한미FTA를 묶어서 강매하려는 것이다. 북한과 잘 되기를 원하면 한미FTA를 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속아넘어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 그런 단기적 속셈 말고 통일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구상의 일단을 비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 만의 하나 미국이 앞으로 10~15년간 중국을 대상으로 침략과 포위 전략을 쓰지 않을 경우 북한은 동북아에서 일본 이상의 친미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 북한은 이 지역에서 가장 취약한 국가다. 제일 약자다. 북한은 중국에게서 투자도 받고 원조도 받고 있는데, 이런 과정에서 종속적인 관계가 되어 가고 있고, 이는 북한 지배층으로선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과 러시아, 남한까지 견제할 수 있는 카드는 미국이다. 북한은 미국이 허락만 한다면 가장 친미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 미국이 허락한다면 북한의 자체 식민화가 진행되지 않을까 싶다. 미국 자본과 남한 자본, 장기적으로는 일본 자본에게 자기 나라의 저임금 노동력을 어떻게 팔아먹을 것인가 하는 것이 북한 지배층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이다.



- 한반도 남쪽 진보진영은 어떤 각도에서 통일문제에 접근해야 하나.

= 한반도 진보진영에겐 나쁜 전통이 하나 있다. 외부에서 이상향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다. 처음에는 소련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은 러시아 혁명의 파급 효과로 구성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러시아는 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적 성격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30년대 이후로는 국가자본주의 국가가 됐다. 그런데 한국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스탈린주의 및 러시아 혁명의 왜곡과 반동화를 비판한 사람이 없다.

중국만 해도 진독수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한국에 트로츠기(*트로츠키) 전통이 생건 건 90년대 초반이다. 소련이 한국 공산주의자들에게 숭배 대상이었는데, 이게 나중에 엄청난 재앙을 낳았다. 그리고 수십년 후인 80년대 남한에서 그 비극이 재연됐다.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로 착각했고, 소련이나 동독을 희망으로 여겼다. 이것이 운동권 문화를 왜곡시켰고 운동권 붕괴의 원인이 됐다.

동구권이 붕괴된 후 이런 환상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남아 있는 북한을 대상으로 해서는 지난 20년대부터 있어왔던 이상향 찾기의 욕망이 계속 투사되고 있다. 이른바 주사파들 사이에 이런 경향이 강하게 존재한다. 운동권은 이를 완벽하게 버리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고 대중화될 수 없다. 남한 대중은 북한의 실체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운동권에서는 계속 비현실적인 환상들을 붙들고 있다. 이것이 운동권 전체가 대중화될 수 없는 이유다.

- 소위 좌파 진영도 이렇다 할만한 대북 접근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겠나.

= 최적의 방향은 북한 민중이 혁명적인 노선으로 가는 것이다. 북한 지배계급에 대한 민중적 혁명이 한반도 정치를 급진화하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상황에서 북한 민중의 계급적 각성을 기대하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최선의 방향을 얘기하기 어렵다. 그래도 내가 보기엔 북한 민중의 계급적 각성에 기대를 거는 것이 민중 진영의 유일한 길이 아닌가 싶다. 이런 기대가 일정한 현실성이 있는 이유는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민중의 계급적 각성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전국 조직이 없어 그렇지 적어도 지역적으로는 노동자의 저항이 강해지고 있다. 민중 저항에 참여하는 사람만 해도 지난해 300만명이 넘었고, 저항의 방법도 급진화되고 있다.

중국 민중들이 중산계급과 지배계급의 개발연대에 대한 정치적 반대노선으로 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런 저항의 분위기가 맨 바닥에서 형성되고 있다. 북한은 중국이나 베트남 노선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북한 민중이 그간 얼마나 속았으며 지배계급의 전략에 어떻게 놀아났는가 각성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런 각성에는 위험성도 따르는데, 남한 사회에 대한 미화로 빠져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남한은 천국이라는 인식이다. 탈북자들이 대개 극우적인 성향을 띠는 것도 이런 이유다. 북한 지배계급에 대한 반항심이 남한 지배체제에 대한 동경으로 잘못 흘러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남한 민중세력이, 남한 지배체제와 북한 지배체제를 동시에 반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혹은 그런 운동의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북한 민중의 계급적 각성에 도움되지 않을까 싶은데, 실제로는 남한 운동 진영이 탈북자를 철저히 외면한다. 탈북자를 매개로 북한 민중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줄 수 있을 텐데도 그렇다.

남한 운동 진영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는 탈북자를 체제 부적응자나 심하면 배신자로 규정해서 왕따시키는 게 아닌가 싶다. 이건 대단한 손실이다. 인간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건 물론이고. 주사파들 이해하기 힘든 게 이런 점이다. 본인들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데, 같은 민족인 북한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면서 무슨 놈의 민족주의인가. 이건 조선민족이 아니라 북조선이라는 국가를 위주로 놓고 생각하는 아주 악질적인 국가주의다.

- 어느 강연에선가 한미FTA를 '제2의 을사늑약', 이런 식으로 비유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청와대가 반대진영을 쇄국론자로 몰아붙이는 논거 중 하나가 '어떻게 한미FTA를 을사늑약과 비교하느냐' 하는 것이다.

= 나는 물론 한미FTA가 을사늑약과 같다고 보지 않는다. 하나의 비유였을 뿐이다. 그 비유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에 반대했다. 주요 각료는 찬성했지만 황제가 반대했다. 지배층 중에서도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데 대한 반대가 있었던 셈이다. 자기 사유물처럼 국가가 남의 손으로 넘어가니까 고종으로선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미FTA는 좀 다르다. 한국의 지배계급 전체가 한미FTA를 찬성할 뿐더러 끌고 가고 있다. 대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기업에 종속된 중소기업도 환영하고, 고소득 전문직종에 있는 사람들도 환영한다. 이들 엘리트들이 한미FTA를 환영하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를 공고화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과 한국의 시장을 통합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신자유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정책을 수립할만한 여지가 남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이 아닌가 싶다. 어떤 세부적인 혜택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나라에서 부자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어떤 정책도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환영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한미FTA 협정을 체결하면 부유세 같은 정책을 시행하는 게 어려워질 것이다. 미국에 없는 정책을 한국에서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의료보험도 자기 부담 위주로 가는 완성되지 못한 제도로 남거나 미국처럼 민간보험 위주로 퇴보할 수 있다.

미국이 하나의 모델이 되면 교육의 공공성도 흔들리기 쉽다. 아직까지 3불정책이 유지되고 있고, 평준화 정책을 탈피하고 싶어도 국민 불만을 생각해서 원칙을 지키고 있는데, 한미FTA가 체결되면 모든 학교가 귀족학교와 빈민학교로 나뉘는 시스템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 지배층의 새로운 유토피아다.

- 한미FTA를 찬성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신자유주의적 사회정책의 역진불능성에 대한 기대에 있다는 지적은 흥미롭다.

= 한국이 참고할 수 있는 모델은 굳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도 많다. 일본 모델도 있고 서유럽 모델도 있다. 서유럽 모델 중에선 독일,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모델 등이 있는데, 국가를 통한 재분배가 위주가 된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선 북구식 복지국가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 여론조사 해보면 상당히 높게 나온다. 그런데 한미FTA로 인해 이런 모델에 대한 모색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 사회와 국가의 장기 보수화, 일종의 정치사회적 겨울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 정부는 한미FTA 찬반 논쟁을 '개방이냐, 쇄국이냐'는 구도로 몰아가고 있다.

= '개방이냐, 쇄국이냐'는 구도는 허구적이다. 조선 말기의 경우 강화조약 이전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1%가 안됐다. 지금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한미FTA를 하지 않더라도 80%에 달한다. 한미FTA는 쇄국의 반대어로서의 개방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시장과 미국 시장을 높은 수준으로 통합하는 문제이고,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국가사회 발전모델을 미국식 모델에 종속시키는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를 들먹이고 진보적 슬로건을 하나의 어법으로 이용하면서 일부 민중을 포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국가를 미국형 사회모델, 한 편에는 소수의 부유층과 고소득층과 중산층 상층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70~80%나 되는 빈곤층과 준빈곤층, 몰락 중인 하급중산층이 있는, 민중에게 대단히 고통스러운 사회모델로 몰아가고 있다.

- 한미FTA로 피해를 입게 될 70~80%의 민중층 가운데 상당수가 이 협정을 찬성하고 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 문화적 헤게모니의 문제다. 한국은 국가와 보수적 재벌과 미디어가 영합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나라다. 보수신문의 한미FTA 보도를 보면 가히 대국민 선전선동, 대국민 홍보 수준이다. 게다가 한국에는 개발주의 신화가 강하다. 70년대 개발주의가 특정 시기에 일정 부분 성공한 면이 있고, 박정희 시대의 이런 성공 신화를 미디어들이 재생산하고 있다. 한미FTA에 대한 찬성 여론은 '박정희 신화처럼 해보자'는 분위기에 도움을 얻은 것 같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의 개발은 외자와 차관, 무역 위주의 개발이었고 지금과 같은 시장통합적 개발은 아니었다. 박정희 개발주의가 일정 부분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시장통합을 하지 않고 미국 재벌로부터 한국시장을 보호한 데 있다. 이게 성공비결이라면 비결인데, 한미FTA는 이 부분을 무시하고 시장통합으로 가는 것이다.

- 불리한 여론지형을 극복하고 반대론이 힘을 얻을 수 있을까.

= 아직 협상은 체결된 것이 아니다. 미국쪽 사정 때문에라도 협정 체결은 지지부진해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협정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을 계층과 지역이 존재한다. 반대 여론을 커지게 하자면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얘기해야 한다. 농민들이야 너무 분명하니까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지만. 도시근로자들도 일부의 고소득 전문가층을 빼고는 장기적으로 혜택보다 피해가 많을 것으로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식 모델이 강하게 도입되면 우선 직장의 안정성부터 흔들릴 것이다. 한미FTA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소비자잉여를 자주 얘기하는데, 소비자가 누군가. 바로 노동자다. 소비하려면 우선 벌어들여야 하는데, 직장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그 효시로 보이는 것이 진행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벌이고 있는 공무원 '퇴출 쇼'가 그런 것인데, 일종의 시범케이스로 봐야 할 것이다. 장차 공공부문 시장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인데, 이 모델이 공고화된다면 한국에서 직장생활은 공포의 나날이 될 것이다. 당장 다음 달을 예측할 수 없는 공포의 연속일 것이다. 서울시의 공무원 '퇴출 쇼'를 보면서 궁금한 건 왜 사람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나 하는 것이다. 인권침해 요소가 대단히 큰 일 아닌가. 근무태만 같은 분명치도 않은 근거로 한 개인의 직장 안정성을 파괴하는 것이 법적으로 유효한가도 따져봐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수 많은 다른 직장에서도 태만과 무능을 이유로 노동자들이 퇴출될 것이다.

무능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사람이 언제나 보스일 것이고 보스가 노동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될 것은 불보듯 뻔하다. 유럽의 경우 노동자 해고사항은 노조와 경영자측의 협의사항이다. 노조의 동의 없이 노동자를 해고시키는 것은 유럽에선 보기 드문 일이다. 반면 한국은 공무원노조를 국가가 인정도 않고 있다. 해고할 때 노조 동의는 커녕 아무 고려 없이 경영자의 판단으로 노동자를 무능력자로 규정해 왕따시켜 밀어내는 것은, 일본 영화 '배틀로얄'에 그려진 대로 약육강식이란 사회진화론적 이론을 현실화시키는 잔인한 쇼다. 



- 피해당사들이 협정 체결 후 어떤 피해를 입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실감을 하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각도에서 지금까지의 한미FTA 반대 투쟁을 평가한다면.

= 민족경제론적 발상으로 협정을 반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일종의 애국주의적 기조로 반대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국제적 분업구조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분업구조가 복지망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 적용될 때 민중의 생활을 파탄시킬 것이라는 게 문제다. 우리가 미국 농민이나 중국 농민을 혐오할 이유는 없다. 예컨데 중국 농민이 생산하는 농산물이 한국에서 소비되는 것이 그 자체로 해악은 아니다. 다만 현재의 구조에서 한미FTA가 체결될 경우 한국 농민층의 붕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고, 기댈수 있는 복지망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사태를 맞을 경우 농민들의 삶은 파탄으로 내몰릴 것이라는 점이다.

- 찬성측과 반대측이 공히 자신들의 논거로 드는 것이 있다. '국익'이다.

= 국익이라는 건 실체 없는 얘기다. 나라를 무엇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다. 만약 협정이 체결되면 일부 대기업은 득을 볼 것 같고, 거기에 하청화되어 있는 일부 중소기업들도 득을 볼 것이고, 귀족학교와 귀족병원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일부 고소득층도 득을 볼 것이다. 우리가 나라의 실체를 이 기업들과 이 고소득층으로 본다면 한미FTA는 국익에 부합하는 것일테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부자들만 사는 게 아니지 않나.

-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국익을 말한다.

= 한국에는 아직 국가의 신화가 강하다. 민중의 이득을 말하면 되고, 그게 훨씬 더 실체에 가까울텐데, 우리는 민중이라는 얘기를 고상하게 하려면 국가 얘기를 꺼내야 한다. 국가 없이는 고상하고 고매한 당위론적 담론이 서질 않는다.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가 아직 국가주의에 지배당하고 있다. 

- 국제적 분업구조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정부는 반대론자들에게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 내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대안은 한 국가 내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선의 궁극적인 대안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겠다. 당장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안은 국제적인 신자유주의적 분업구조에 깊이 들어가기 전에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튼튼한 재분배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 재분배 장치라는 건 농민들의 소득보전 같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부유세, 교육무상화, 의료무상화의 3대 조건이 충족된다면 한국은 그나마 민중들이 살만한 사회가 될텐데, 지금 전혀 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

- 방금 말한 3대 조건이 충족되면 FTA도 가능하다는 의미인가.

= 이런 것들이 개선된 이후에도 굳이 FTA를 모색해야 한다면, 지역적으로 가까운 나라와 서로 민감한 부분을 100% 감안한 후에 체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의 경우 잘 하면 노동시장까지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언어 배우기도 쉽고, 지리적으로 가깝고, 시스템이나 문화가 비슷하고. 한국 노동자들에게 선진국인 일본 노동시장 유입을 보장하는 그런 FTA라면 민중들에게 덜 해롭지 않을까 싶다.

- 진보진영 일각에선 대안적 FTA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있다.

= 자본보다 민중의 이해관계를 생각하는 FTA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노동시장 진입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우라나라에도 불법 체류자가 많지만, 일본에서 불법으로 노동하는 한국 노동자들도 많다. 고생도 많이 하고 잡혀서 송환도 당한다. 한국 노동자들이 합법적으로 일본에 가서 노동하도록 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떤 협정을 맺더라도 우선적인 고려는 이런 것이 돼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 

- 협정을 밀어붙이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몇 가지 물으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자칭 '유연한 진보'라고 한다.

= 그 사람 얘기 별로 하고 싶지 않다(웃음). 그런 자들이 장기적으로 한국 민중에 가장 위험하다. 카멜레온처럼 기만책을 대단히 잘 구사한다. 일부 민중층을 포섭하는 언어적 수법에 능하다. 또 자수성가한 민중 출신이다. 그런 사람이 민중운동을 파괴하는 데는 가장 쓸모가 있다. 한국 사람들이 노무현 열풍 같은 것을 다시 재현하지 않으려면 지배계급이 어떻게 민중을 기만할 수 있는지 철저히 학습해야 한다. 2002년을 생각하면 허무하다. 당시 주관적으로는 스스로를 진보라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이라는 속 빈 이미지에 얼마나 놀아났는가. 이런 것이 재현되면 안 된다.

- 역시 유쾌한 질문도 아니고 유쾌한 답변도 나올 것 같지 않은데, 현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했던 조기숙이라는 정치학자가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진보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고, 좌파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한다. 그런 분류법에 따를 때 자신과 노 대통령은 진보다.

= 조기숙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이화여대에서 시간강사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 중에 교수가 될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조기숙 교수와 같은 정규직 교수가 5만명 있고 시간강사가 6만명 있다. 지금의 구조에서 6만명 중 정규 교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한국 대학의 재정상황이나 운영 방향으로 볼 때 많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수 많은 시간강사들, 수 년 동안 시간강사 일을 해온 사람들, 상당 수는 정규 교수에 비해 능력이 좋고 업적이 좋은 사람들, 조기숙 선생이 만들고 싶은 사회에서는 이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그것부터 물어보고 싶다. 한국 교수들 참 이상하다. 시간강사 한 달 벌이는 100만원 될까 말까 하고 조기숙 선생같은 정규직의 급여는 잘은 몰라도 300~400만원은 될 것 같은데(*확실히 잘 모르는 것 같다), 전혀 그런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이 없다. 희귀한 사람들이다. 시간강사들이 주당 시수도 훨씬 높고, 시간강사들이 많은 수업을 해가면서 적은 돈을 받으니까 정규 교수들이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건데, 말하자면 자신들이 하급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는 건데, 이런 데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안 한다. 희귀한 사람들이다(*박노자의 '진지함'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 노무현 정부를 파시즘에 가까운 정부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다.

= (노 대통령은) 그냥 '쇼맨'이다. 쇼맨인데, 이 쇼맨의 특기가 뭐냐하면 민중진영의 일부를 포섭해서 무력화하는 것이다. 한미FTA 계기가 돼서 더 이상 이런 쇼맨들이 특기를 발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파시즘은.... 원래 한국 우파의 기본 심성이 파시즘 아닌가. 노무현 대통령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그의 동반자, 정적들도 다르지 않다.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더하면 더하겠지. 파시즘은 한국 우파의 기본 정서다. 국내에서 실행되고 있는 상당수의 법안들은 유럽의 기준으로 보면 극우적이다. 이주노동자에 관한 법안 같은 것이 그렇다. 유럽 극우들이 꿈꾸고 있는 것이다. 

- 이번 대선을 어떻게 전망하나.

= 지금 같아선 극우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게 뻔해 보인다. (민주노동당이) 이를 막을 수는 없어도 제대로 저항해서 수 백만 표를 얻을 수 있다면 앞으로 극우 세력과 제대로 투쟁하면서 한국의 보수화를 제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민주노동당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담하다.

-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문제가 뭔가.

= 당은 정파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데, 당 사업의 중심에 정파갈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것들이 서있는 것 같이 보인다. 결국 이 갈등에 에너지가 소모되면서 당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 당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20~30대층, 학생이라는 미래의 노동자를 흡수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젊은 노동자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당의 문화 자체가 20-30대 위주가 아니지 않나. 80년대 운동권의 보수적이고 서열위계적인 문화가 강하다. 양성평등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경우도 많지 않나 싶다. 예컨데, 20대 여학생이 민주노동당을 친근하게 대하기 굉장히 힘든 구조다.

- 학생들은 민주노동당을 어떻게 보나.

= 40대 운동권 아저씨들이 거드름 피우는 곳으로 보는 것 같다(웃음). 80년대 운동권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얻어 작은 수령님 노릇하는 아저씨들의 놀이터, 이렇게 보는 시각이 있는 것 같다. 이래서는 성공 못한다. 당은 더 민주적이어야 하고, 미시적 문화도 젊은층과 여성 위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노르웨이 사회당이나 좌파를 보면 20대 국회의원도 있다. 민주노동당은 지도층이 40대 후반 아닌가.

- 다른 문제는.

= 당은 비정규직을 포획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당의 중심에 비정규직이 없다.

-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얼마 전 심상정 의원은 비정규직 지분을 높이기 위한 당원 가입 특례를 제안한 적이 있는데.

= 일리 있는 제안이라고 본다. 또 당 지도부를 뽑을 때 비정규직에 일정한 쿼터를 할당하는 것도 방법이다. 국회의원 후보를 뽑을 때도 여성 쿼터처럼 비정규직 쿼터를 주는 방안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비정규직이 당 사업의 중심으로 들어오기 힘들 것 같다. 비정규직의 투쟁이 있는 곳마다 민주노동당이 달려가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기본일테고. 

- 당에 조언하고 싶은 게 있다면.

= 좀 이상하게 생각되는 게 있다. 그 이론을 받아들이진 않더라도 '다함께'라는 그룹의 활동 자체는 생산적인 것 같은데, 당내에서 그 분들에 대한 반감이 강한 이유가 뭔지 이해하기 힘들다. 개인적으로 '다함께'의 활동 가운데 마음에 드는 부분은 탈북자에 대한 태도다. 민중진영이 가장 신경 써야 할 대상인데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그들은 하고 있다. 북한 정권에 대한 태도나 미국의 이라크 침략 반대 등은 다함께 이데올로기에 찬성하지 않아도 충분히 동의가 될만한 활동인데, 왜 당에서는 '다함께'를 왕따시키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의 이론에 찬성을 하지 않는 것은 않는 것이고. 나만 해도 트로트키주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아무튼 나름의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동지들인데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얼마 전 <레디앙>에서 정성진 교수의 책을 놓고 오간 논쟁도 그렇다. 물론 정 교수의 논리에 몇 가지 점에서 오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적대적으로 몰아세울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특히 기사의 댓글들에서 확인되는 '다함께'에 대한 적대감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다함께'는 섹트적이지만 내부 문화가 비교적 민주주의적이고 학생을 확보하는 능력도 좋다. 당이 '다함께'의 활동방식에서 배울 것도 많다고 본다.

- 당내 대선 경쟁은 관심 갖고 보나.

= 유심히 보고 있다. 대중적인 호소력이 제일 강한 사람이 선출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은 대중성이 생명 아닌가. 나중에 그 사람의 정치노선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선은 대중적인 호소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 선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07.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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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0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0 20:16   좋아요 0 | URL
**님/ 파시즘과 스탈린이즘도 거부하기에 그에겐 '민중적 혁명'이 최선의 방책인 것이죠(그 혁명은 자발적인 봉기의 형식을 갖는 것인지 궁금하지만). 이 주장의 역설은 바로 그러한 혁명의 호기란 유럽과 같은 유연한 체제가 아니라 남북한 같은 파시즘/스탈린이즘 체제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요? 하니, 우리에게 더 많은 억압을 달라!..

2007-04-10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0 21:57   좋아요 0 | URL
**님/ 그냥 단순한 논리입니다. 혁명은 관용적인 사회가 아닌 보다 억압적인 사회, 계급적인 각성과 사생결단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더 쉽게 일어나는 것이라는...

2007-04-10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4-10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네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갔다가 열람실에만 죽치고 있기에는 허전한 듯하여 대출카드를 다시 만들고 몇 권의 책을 대출했다(3권을 2주간 대여해준다). 그 중 하나가 전집판 니체의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책세상, 2005)이다. 번역본을 구입하지 않은 건 이미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국역본과 영역본을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도 '새 번역'으로 또 어떨까 싶어서 대출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새 번역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역자가 반론을 제기한 바도 있었다. <비극의 탄생>을 다시 읽어보기 전에 그러한 논란부터 먼저 챙겨둔다. 교수신문에 게재된 박찬국 교수의 번역비평은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 재수록돼 있다.

교수신문(06. 01. 02) 고전번역비평-최고번역본을 찾아서(23)니체의 ‘비극의 탄생’

‘비극의 탄생’은 니체의 나이 불과 28세에 쓰인 처녀작으로 청년 니체의 열정과 고뇌를 강렬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니체는 이에 대해 스스로 ‘청년의 용기와 우수(憂愁)가 가득한 책’이라고 평했다. 이 책에서 니체는 청년다운 대담함과 재기발랄함으로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한편,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염세주의로부터의 탈출구를 그리스의 비극정신에서 찾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극의 탄생’은 당시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고전문헌학적 연구를 넘어서 삶과 세계의 본질과 고통 그리고 그것의 극복방안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탐구이기도 하다.

이 책에 대해 니체는 나중에 일정 거리를 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니체 자신의 사상 전개 뿐 아니라 철학과 미학을 비롯한 인문학과 예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니체의 저작들 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못지않게 고전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입증하듯 국내에서 ‘비극의 탄생’ 번역본만 8종이나 나왔다. 이위범 역(양문사 刊, 1960), 김영철 역(휘문 刊, 1969), 이일철 역(정음사 刊, 1976 외), 김병옥 역(대양서적 刊, 1978 외), 박준택 역(박영사 刊, 1976), 곽복록 역(동서문화사 刊, 1978 외), 김대경 역(청하 刊, 1982), 성동호 역(홍신문화사 刊, 1989), 이진우 역(책세상 刊, 2005)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번역본 전부를 살펴볼 순 없다. 번역자들 중 철학전공자로서 니체사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박준택과 이진우를 제외하면 나머지 역자들은 주로 독문학(곽복록, 김대경)이나 심지어 영문학(이일철)을 전공했기에 일단 번역자로서 요구되는 전문성이 결여됐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들 번역의 많은 곳에서 어렵잖게 오역과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이 중 김대경 역은 1982년 이래 1997년까지만 해도 16쇄가 나왔을 정도로 가장 많이 읽히는 번역본이라 생각되기에 여기에선 박준택 역, 이진우 역, 김대경 역만을 살펴보겠다.

고전번역의 완전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보다 원전에의 충실성과 가독성이라고 여겨진다. 이 두 기준에 입각해 우선 박준택 역과 이진우 역을 비교하겠지만, 지면관계상 본문의 첫째 문장 번역만 검토할 것이다. 본문의 첫 문장은 보통 번역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기에 이 문장에 비춰 우리는 번역의 전체적인 수준과 성격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전에서 본문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Wir werden viel f?r die ?sthetische Wissenschaft gewonnen haben, wenn wir nicht nur zur logischen Einsicht, sondern zur unmittelbaren Sicherheit der Anschauung gekommen sind, daß die Fortentwicklung der Kunst an die Duplizit?t des Appolinischen und des Dionysischen gebunden ist: in ?hnlicher Weise, wie die Generation von der Zweiheit der Geschlechter, bei fortw?hrender Kampfe und nur periodisch eintretender Vers?hnung, abh?ngt.”

이 문장을 이진우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세대(世代)가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단지 주기적으로 화합하는 남성과 여성의 이중성에 의존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예술의 발전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논리적 통찰뿐만 아니라 직관의 직접적 확실성에 이른 상태라면, 우리는 미학을 위한 큰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이진우, 29쪽)

이 번역은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제 동일한 문장에 대한 박준택 역을 살펴보자. “만일 우리가 다음에 말하는 것을 머리만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구체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된다면 미학(美學)에 크게 기여하는 바가 많으리라고 믿는다. 즉, 예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에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생식(生殖)이라는 것이 부단한 싸움 속에서도 단지 주기적으로 화해하는 남녀 양성(男女兩性)에 의존되어 있는 것과 흡사하다.”(박준택, 9쪽)

박준택 역은 일본 암파문고판의 번역을 그대로 옮긴 것이지만, 이진우 역에 비해 정확할 뿐 아니라 읽기에도 훨씬 자연스럽다. 이진우 역은 ‘세대가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다음에 쉼표를 찍음으로써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주체가 남성과 여성이 아닌 세대인 것으로 잘못 읽도록 오도하고 있다. 아울러 전체적인 문맥상 ‘세대’라는 번역어보다는 박준택이 택한 ‘생식’이라는 번역어가 더 적합하다고 여겨진다. 이진우 역에서 ‘논리적 통찰뿐만 아니라 직관의 확실성에 이른 상태라면’ 부분에서도 주어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이 경우도 사람들은 ‘세대’가 주어인 것처럼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논리적 통찰뿐만 아니라 직관의 직접적 확실성에 이른 상태라면’은 지나친 직역으로 매우 부자연스런 번역이다.

니체 텍스트 본문의 첫 문장에 대한 박준택 역은 큰 문제는 없지만 원문을 굳이 의역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에서 의역을 했다. 가령 ‘머리만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구체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된다면’은 원문에 보다 충실하게 ‘논리적으로 통찰할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직관한다면’으로 해도 충분히 자연스럽다. ‘머리만으로써’라는 표현도 보통 쓰이지 않는 어색한 표현이다. 이 문장에 대한 번역 외에도 박준택 역에서는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러운 표현들이 눈에 띄는데, 이는 주로 암파문고판에 대한 중역에 가깝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박준택은 일일이 지적할 순 없지만 여러 곳에서 심각한 오역을 하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200쪽에서 박준택은 “…비극은 비극적 신화를 통해서 비극적 주인공이라는 인물의 모습을 빌어서, 디오니소스적 세계에의 탐욕적인 충동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옮겼는데, 여기서 ‘디오니소스적 세계에의 탐욕적인 충동’ 부분은 오역이며 ‘개체적인 삶에 대한 탐욕스런 충동’으로 번역해야 한다. 심지어 박준택은 암파문고판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정작 암파문고판에서는 오역을 하지 않은 곳들에서도 오역을 범하고 있다.

첫째 문장의 김대경의 다음과 같은 번역은 가장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 이는 마치 생식이라는 것이 부단한 싸움 속에서도 단지 주기적으로 화합하는 남녀 양성에 의존되어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 점을 단지 논리적 통찰로서 뿐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확실한 직관에 의해 알게 된다면, 이는 미학을 위하여 큰 소득이 될 것이다.”(37쪽)

전체적으로 볼 때도 세 번역본 중 그나마 김대경 역이 원전에 대한 충실성과 가독성면에서 가장 낫다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경 역은 여러 곳에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오역을 범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그 예를 둘만 들겠다. 김대경 역 48쪽, 49쪽 등에서 보이는 ‘근원적인 한사람’이란 표현의 원문은 ‘der Ureine’로서 원래는 디오니소스적인 세계의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김대경은 ‘근원적인 한사람’이 아니라 ‘근원적 일자’라고 번역했어야만 한다. 또한 120쪽의 ‘그 자체로서 부패하고 타락한 기독교적인 인간들의 사고방식’이라는 번역은 굳이 원문과 대조하지 않아도 오역이라는 게 분명하다. 이 부분은 ‘인간을 그 자체로 부패하고 타락한 것으로 보는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 외에도 김대경 역에선 ‘탐욕적 충동’(130쪽)이나 ‘설득적으로 밀어닥치는’(130쪽) 등과 같이 일본역본을 글자 그대로 중역한 투의 문장들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그리고 138쪽이 대표적인 경우지만 원문의 몇 줄을 번역하지 않고 있는 곳들이 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비극의 탄생’에 대해서는 그동안 8종의 역본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번역수준은 상당히 실망스럽다.(박찬국/ 서울대·현상학)

교수신문(06. 02. 01) 이진우 교수 번역, "의미파악 어려워"

‘출판저널’에 이번 2월부터 새롭게 연재되는 강대진 건국대 강사(고전그리스문학)의 번역비판 코너 ‘번역의 허와 실’에서 이진우 계명대 교수의 번역을 ‘문제번역’으로 삼고 나서 전공자들의 오역문제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다. ‘잔혹한 책읽기’(작은이야기 刊, 2004) 등을 통해 국내 고전번역에서 오역의 심각성을 제기해온 강 씨는 연재의 첫 회로 이진우 교수의 ‘니체저집 3: 유고(1870~1873년), 디오니소스적 세계관, 비극적 사유의 탄생 외’(책세상 刊, 2001)을 검토했다.

강 씨가 이 교수 번역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삼는 것은 ‘독일어 직역’이다. 즉, “번역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 가령, ‘소크라테스와 비극’이라는 니체 강연원고에 나오는 문장을 이진우 역은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가 표현한 것처럼, 위대한 마지막 사자(死者)에 대한 동경을 느꼈습니다.”(33쪽)라고 옮겼다. 그런데 이 문장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희랍비극이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 때문에 소멸했다고 주장하는 내용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서 “시인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비평가인 에우리피데스가 소크라테스의 논리 중심주의를 따라 비극을 재조직한 결과, 원래의 비극은 죽어버리고 신희극만이 남겨졌다”라는 논지라고 강 씨는 덧붙인다. 따라서 “위대한 마지막 사자”는 “위대한 사람들 가운데 최근에 죽은 이”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는 게 강 씨의 지적이다.

“에우리피데스가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들>에서 물 치료법으로 비극예술을 쇠진하게 만들고 또 비극예술의 중압감을 약화시켰다는 공로를 자신에게 돌렸는데”(35쪽)라는 번역도 이해하기 어렵다. 강 씨는 이에 대해 “물 치료법으로 쇠진하게”는 “설사제를 먹여 체중을 줄인 것”이라는 뜻이라고 풀어놓는다. 이 외에도 “우리는 왜 그가 생시에 알량하게도 비극적 승리의 영광만을 얻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38쪽)도 고전문학 전공자가 보기에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는 구절들이 많다는 것. 

사실 번역자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외국에 실력에 준하는 모국어 실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은 흔히 번역평가의 기준으로 ‘자연스러운 한국어 구사’를 문제 삼는다. 물론 직역의 원칙을 따를 경우 ‘번역어의 자연스러움’을 희생해야 할 경우들이 생기지만, 그런 경우라도 모국어로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라면 번역의 의의는 퇴색할 수박에 없다.

이 교수의 번역이 이러한 문제점을 갖게 된 것은 사실 국내 번역자들의 공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강 씨는 “왜 천병희 교수의 좋은 번역들이 나와 있는데 참고하지 않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데, 고전전공자의 번역을 현대독일철학 전공자가 참고하지 않는 것은 학자로서 그리 성실한 태도라 볼 수 없으며, 국내 학자의 번역성과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진우 역 중 “에우리피데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의 입을 빌려 아이스킬로스를 비난합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강 씨는 “개구리의 입을 빌려”라는 부분은 틀린 것으로 천 교수 역을 참조했더라면 오류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낸다.

그 외에도 이 교수의 번역에는 중요한 구절이 누락되거나 중요 단어들이 잘못 표기되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가령 복수의 여신인 에리뉘에스를 “에리스”(75쪽), “에레니메스”(110쪽)로, 아이스퀼로스도 “아르킬루스”(29쪽)로 잘못 옮겼다는 지적이다. “에폭푸테스”(137쪽)의 경우도 ‘추종자들’로 고치는 것이 낫다는 게 강 씨의 제안이다. 

사실 이진우 교수는 그동안 끊임없이 번역서를 내놓아 부지런함을 보여왔다. 하지만 최근 교수신문 ‘고전번역비평-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23: 니체의 ‘비극의 탄생’’편(제384호, 2005년 12월 26일자)에서 박찬국 서울대 교수(철학)에 의해 번역상의 오역과 부자연스러움 등이 제기되면서 문제가 된 바 있다. 그의 ‘니체전집 2: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책세상 刊, 2005)는 총 18종이나 되는 ‘비극의 탄생’ 번역 중 가장 최근 것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전공자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20여년도 더 앞서 번역된 김대경의 ‘비극의 탄생’(청하 刊, 1982) 이 “원문에 가장 충실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읽힌다”라는 평가를 두고 학계에서는 “뜻밖이다”라는 반응들을 보였던 것. 박찬국 교수 역시 이진우 역에 대해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는데, 그만큼 한국어 구사에 문제는 이진우 번역의 가장 큰 약점으로 꼽히고 있다.

이진우 교수는 올해에도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뿐만 아니라 하버마스의 저서 한권도 번역해 내놓을 예정이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은 “이 교수의 번역에서 이러저러한 문제가 지적되고 있는 만큼 다른 전공자들의 번역과 더불어 이 교수의 번역도 전면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같은 게 아닐까?).(이은혜 기자)

교수신문(06. 02. 07) 어느 번역비평 기사에 대한 반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이처럼 간단명료하고 잔혹한 평가는 없을 것이다. 글이든 대화이든 무엇을 말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면,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파악의 어려움은 그 주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글을 읽고 듣는 사람이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비평은 그것이 아무리 생산적이고 호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글을 쓰는 사람에겐 정말 감내하기 힘든 혹평임에 틀림없다.

이 말은 종종 비평자의 권력의지를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는 진리를 논하는 학계에서도 이 말을 얼마나 자주 듣고 말하는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충돌하는 곳에서 어김없이 들리고, 자신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벗어난 이론과 담론을 들을 때면 서슴없이 사용하는 말, 그것이 바로 이 간단한 한마디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이 말에는 종종, 설령 제압의 심리학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해의 거부’가 묻어 나온다.

최근 내 자신이 이런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그 시발점은 <니체전집 2: 비극의 탄생>에 대한 박찬국 서울대 교수의 비평이었다. 그는 첫 문장의 번역이 번역문 전체의 수준과 성격을 가늠케 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비극의 탄생>의 첫 문장을 박준택 역 그리고 김대경 역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간단히 평가한다. “이 번역은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 첫 문장에 대한 나의 번역문이 다른 두 번역보다 명료하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번역과정에서 다른 번역본을 참조하였던 내가 왜 이렇게 번역하였을까. 번역할 때마다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이 부분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던 것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의역을 해야 할까. 아니면 원전에 충실하게 직역을 해야 할까. 이 문장은 8행이나 되는 긴 가설법 문장이다. “예술의 발전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논리적 통찰에... 이른 상태라면, 우리는 미학을 위한 큰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자는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는 직설법의 번역문장을 선호한다. 나는 니체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경우에는 원문에 충실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원전에 충실하고 동시에 자연스럽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비판은 이중적이다. 생산적이고 동시에 파괴적이다. 첫 문장에 대한 박찬국 교수의 비평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도 부당하게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부분을 전체로 일반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가 정말 나의 번역 전체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번역문을 원전에 대한 충실설과 가독성의 두 가지 척도로 평가한다. 원전에 충실하다보면 가독성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김대경 역이 몇몇 오역에도 불구하고 “원전에 대한 충실성과 가독성 면에서 가장 낫다”고 판단함으로써 나의 번역이 마치 원전에도 충실하지 않은 것처럼 교묘하게 말하고 있다. 오역과 원전에 충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지적해야 마땅할 것이다.

전체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부분을 마치 전체인 것처럼 만든다면, 그것은 왜곡의 폭력이다. 교수신문은 박찬국 서울대 교수의 비평문에 “이진우 譯 의미파악 어려워”라는 표제어를 붙였다. 이렇게 뒤틀린 왜곡은 출판저널 2월호에 게재된 번역비평에 관한 기사에서 다시 한번 이루어졌다. 강대진의 “니체전집 완간의 기쁨과 몇 가지 아쉬움”이라는 글은 번역비평이 어떠해야하는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글쓰기이다. 그는 그리스 비극에 관한 니체의 글을 올바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고전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한다. 맞는 말이다. 그는 몇몇 군데 잘못 표기된 인명을 예리하게 집어낼 뿐만 아니라 그가 “더 좋은 번역, 더 나은 책 꾸밈새를 위해” 제안하고 있는 지적들은 실제로 주석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는 니체가 다루고 인용하는 그리스 고전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그의 글과 사상이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번역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당시에 고전 문헌학자들을 경악시켰던 그의 글들을 문헌학의 기준에 맞춰 번역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예를 들어 그는 “durch Wasserkur abgemergelt”를 “물 치료법으로 쇠진하게 만들고” 대신에 “설사제를 먹여 체중을 줄이고”로 풀이한다.

이와 관련된 아리스토파네스 <개구리>의 구절은 이렇다. “‘흰 무우’로 그것의 체중부터 줄이고 나서, 책에서 짜낸 잡담의 액즙을 주었지요.” 이 희극의 전체맥락을 알지 못한다면, 이 문장 자체의 뜻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흰 무우”가 당시 설사제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뜻이 명확한 “Wasserkur”를 “흰 무우” 또는 “설사제”로 번역해야 할까. 당시의 문헌학자들이 평한 것처럼 몽상적이고, 과장되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심한 그의 문체를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무튼, 번역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손질할” 수 있도록 지적해준 데 대해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교수신문은 이 비평에 대한 기사에서 비평자의 선의를 악의로 왜곡시킨다. 교수신문은 여기서 비평의 전체적 맥락을 무시한 채 나의 번역을 “문제번역”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매우 선정적인 표제어을 사용한다. “이진우 교수 번역,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처럼 분명한 말로 교수신문이 두 번씩이나 한 인격을 짓밟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비평에는 호의적 비평도 있고 악의적 비평도 있다. 이들의 비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직역의 문제점을 조금 더 치열하게 고민하라는 주문일 것이다.

번역을 하면 할수록 번역이 어려워진다. 원문이 어려워도 번역은 쉬워야 되는가. 원문이 만연체라도 번역은 간결체여야 하는가. 난해한 하이데거를 이해하기 쉬운 야스퍼스로 만들고, 하버마스를 호르크하이머로 만들어야 하는가. 니체가 말한 것처럼 번역에는 뜻도 중요하지만 리듬, 호흡, 문체도 중요한 것인가. 간단히 말해, 번역은 반역인가? 교수신문의 기사가 아무리 부당하고 잔혹할지라도 이런 문제점을 일깨워준 데 대해 감사할 뿐이다.(이진우/ 계명대 철학과)

07. 04. 09.

Рождение трагедии/Die Geburt der Tragodie

P.S. 러시아에서는 최근 들어서 13권짜리 니체 전집이 새로 출간되는 등 '니체붐'이 일고 있다(실제 상황은 모르겠지만 옆에서 보기에 그렇다).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본 니체는 과거에 나온 2권짜리 전집과 함께 <비극의 탄생>(2001) 대역본 등인데, 이 대역본은 (당연한 말이지만) 독어-러시아어 텍스트가 나란히 배열돼 있다. 상세한 주석을 포함하고 있어서 분량이 736쪽이나 된다. 한국어로도 이만한 수준의 책을 읽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그 전에 전공자들도 찬탄할 만한 멋진 번역서가 먼저 출간되면 더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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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극단의 고골 3부작에 대해서 몇 달 전에 소개한 바 있는데(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1909487&paperId=1049610) 이번에 국립극장에서 재공연된다고 한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의 연출자와 배우들이 중심이 되어 새롭게 해석한 고골을 무대에 올린 작품들이고 그간에 호평을 받아왔다. 이번에는 놓치지 말고 한 작품이라도 구경을 좀 해봐야겠다. 

한겨레(07. 04. 07) 국립극장서 만나는 러시아 대문호

러시아 대문호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의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 연극 ‘고골 3부작’이 4일부터 잇달아 관객을 찾아간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으로 구성된 명품극단은 고골의 우크라이나를 다룬 소설 가운데 <비이(4~7일)>,  <광인일기(18~22일)>,  <행복한 죽음(13~17일)>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라는 부제 속에 녹였다. 올 1월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공연 당시 평단과 관객의 호평에 힘입어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에서 재공연하는 것인데,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고골의 대표적 단편소설을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3부작의 서막인 <비이(4~7일)>는 키예프신학교에 재학 중인 어린 신학생 호마부르뜨의 하루 일과를 그렸다. ‘봄’이라는 부재처럼 호마부르뜨의 일과는 참을 수 없도록 졸리운 봄날의 꿈처럼 장난스럽기도 하고 괴기스럽기도 하다. 세트의 구성보다는 배우의 신체행동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소도구를 통한 다양한 공간변화, 러시아 전통 민속음악과 한국의 전통악기 가야금의 조화를 엿볼 수 있다.

<행복한 죽음(13~17일)>은 노부부의 삶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하고 따뜻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노부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와 쁠리헤리야 이바노브나는 한적한 시골에서 살고 있지만, 일상에서 전원의 목가적인 무료함이나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배우자의 죽음이나 자신의 죽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광인일기(18~22일)>는 페테르부르크의 계급사회를 배경으로 인간의 고독한 삶을 표현했다. ‘여름’이라는 부제처럼 작품 속 주인공 뽀쁘리신의 일기는 한 여름의 열정이 만들어 낸 사랑과 그것에서 비롯된 절망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조하석의 간결한 마임연기와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로미오와 줄리엣>이 시대적 분위기를 한껏 살린다.

기치스 모스크바 연극예술 아카데미에서 유학한 뒤 현재 명품극단 상임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원석씨가 세 작품의 연출을 맡았고, 그가 상임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베르니사쥐 극장의 러시아 스태프와 배우가 결합했다.(김미영 기자)

07. 04.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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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작가와 문학사이'는 소설가 천운영(1972- )씨 편이다. '바늘'이란 데뷔작으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작가인데 기사에서도 '바늘'은 이 작가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제시돼 있다. 몇몇 단편들을 더 읽어보았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장편인 <잘가라, 서커스>(문학동네, 2005)를 아직 소장하고 있지 못하다. 서커스 구경을 갈 기회가 언제 생기려는지(이 작가에 대해서 글을 쓴다면 아마도 그녀의 '카니발리즘'에 대한 것이지 않을까 싶다). 말미엔 첫 소설집 <바늘>(창비, 2001) 출간 이후에 진행된 인터뷰를 창비홈피에서 옮겨놓았다.

경향신문(07. 04. 07) [작가와 문학사이](13)천운영-‘바늘’로 우리를 자극하다

천운영은 ‘바늘’의 작가다. 특히 2000년도 신춘문예에 당선된 ‘바늘’이라는 단편은 바늘에 관한, 바늘에 의한, 바늘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예리한 바늘이 정곡을 찔러 육체에 음산하고 정교한 수를 놓으며 살 속에서 맴돌던 언어를 해방시킨다”는 신춘문예 심사평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늘’은 이후 ‘원색의 고통과 절규로 점철된 사실화’로 상징되는 천운영식 소설을 직조하는 중요한 글쓰기의 도구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바늘은 여성적 도구로 인식되었다. 시대극의 여성들을 보자. 그들은 언제나 바늘을 들고 있다.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혹은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느라,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자신들이 다소곳한 여성임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들은 바늘을 든다. 바늘은 그렇게 우리 사회에서 가부장제적 여성상을 상징하는 수동적 도구로 동원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천운영 소설에서 바늘은 ‘찌르고 꿰매는’ 동작에서 연상할 수 있는, 다분히 가학적인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능동적 도구다. 그리하여 이제 천운영 소설의 여성들은 더 이상 바늘을 바느질하는데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들은 문신사가 되어 바늘로 남성의 몸에 야만적인 상처를 내고 그 위에 자신의 욕망을 그려 넣는다. 그 순간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중략)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바늘’)은 펜을 대신할 새로운 글쓰기의 도구로 탄생한다. ‘펜은 페니스다’(pen is penis)라는 가부장제적인 동어반복적 명제는 그 순간 부정된다.

그러나 천운영의 바늘로 글쓰기를 단순히 남성중심적 글쓰기를 부정하는 여성적 글쓰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바늘은 그 길쭉한 모양새 때문에 남성 성기의 상징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구멍 난 바늘귀 때문에 여성 성기의 상징물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성적이되 강하지 않고 여성적이되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오히려 바늘로 글쓰기는 육체라는 텍스트를 찌르고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우리가 애써 부정하고자 했던 익명의 감각과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도착적 글쓰기에 더 가깝다.



모든 욕망은 다 도착적이다. 그래서 모든 연애는 다 기괴하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욕망하지만 결코 사랑은 사랑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물고 핥고 빨고 삼키는 사랑의 행위는 결코 충족되지 않을 사랑을 충족시키려는 불가능한 몸짓인 것이다. 사랑의 대상을 삼켜버림으로써 완전히 합체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사랑도 만족스럽지 않다. 그러니 함부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천운영의 바늘을 통해 감각되는 사랑은 그렇게 자기 상실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대상과 합체하고자 하는 욕망에 불타오른다.(‘명랑’의 주인공은 할머니가 죽은 뒤 유골을 갈아서 먹기도 한다.)

그래서 천운영 소설의 독자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머물러온 삶과 질서의 세계 바깥으로 밀려난 낯설고 기이한 사랑의 감각을 체득하게 된다. 그 순간 우리의 감각과 욕망은 확장되고 심화되면서 죽음과 무질서의 세계에 견인된다. 천운영의 바늘은 그렇게 우리를 낯선 감각의 세계로 이끈다. 그 세계는 도착적이되 도착적이지 않으며, 추하되 결코 추하지 않다. 천운영의 바늘에 찔림으로써 새롭게 눈 뜬 우리의 감각법에 따르면 말이다.



그러니 바늘을 든 작가 천운영을 두려워하지 말지니. 아무리 바늘에 찔려도 우리는 죽지 않으니. 물론 찔리는 순간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은 우리를 낯선 즐거움의 세계로 이끄노니. 고통을 동반한 쾌락의 경험이야말로 우리를 진정한 사랑에 눈뜨게 할지도 모르니. 더불어 이 권태롭고 나른한 세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지도 모르니. 그러니 천운영의 바늘로 글쓰기는 계속되어야 한다.(심진경|문학평론가)

07. 04. 07.

P.S. 창비에서 가져온 아래의 인터뷰는 작가 천운영씨와 평론가 백지연씨의 대담이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바늘'의 전문은  http://www.donga.com/docs/sinchoon2001/sub03_2_01.html 참조.

백지연(이하 백): 첫 소설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천운영(이하 천): 고맙습니다.

백: 등단과 동시에 주목을 많이 받고 활발히 활동을 해오셨는데요. 등단한 다음해에 창작집을 내기가 쉽지 않은데 책을 내면서 뿌듯하기도 하고 부담도 많이 될 것 같아요.

천: 부담이 많이 되죠. 작년부터 작품 발표는 계절에 한번씩 꼬박꼬박 했어요. 여덟편 발표했으니까요. 책 내기 한 일주일 전부터는 잠이 안 오더라구요, 부담이 돼서.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요.

백: 출간에 관련해서 인터뷰도 하고 책도 부치느라 요즘 바쁘시겠어요.

천: 조금 바빠요. 인터뷰 몇개 하는 것보다는 인사 다니는 것, 아는 분들께 책 부쳐드리는 것 그런 것 때문에요.

백: 현재 전업작가로 생활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글을 써서 원고료로 생계를 부담해야 하는 생활을 막상 시작하니까 느낌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천: 원고료는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지요. 얼마전에 창작지원금 받은 것도 있고요. 처음에는 신춘문예 상금으로 몇달 버텼죠. 어떨 때는 원고료 나오기 전에 미리 필요한 돈을 쓰고 원고료로 막을 때도 있구요.

백: 작품을 쓰면서 평론가나 동료 작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작품에 대한 평을 들을 때가 있을 텐데요. 실제로 작품에 대한 일반독자의 반응을 직접 느낀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천: 신문에 「바늘」이 실렸을 때 팬레터를 몇통 받아봤어요. 그 작품에 문신 얘기가 나오잖아요? 교도소에 계신 분들이 자기한테도 문신이 있는데 그 작품을 읽고 감동받았다, 앞으로 꿋꿋하게 살아보겠다는 편지를 보내셨어요. 인터넷 문학 싸이트의 작가방 같은 곳에도 제 작품을 읽었다는 얘기들이 올라오구요.

백: 독자의 반응을 직접 실감할 때 기분이 어떠세요?

천: 처음에는 무작정 좋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무섭더라구요. 발표한 것을 한편도 빼놓지 않고 읽은 분도 계세요. 게시판에서 제 작품이 실린 지면을 누군가 질문하면 제가 답하기도 전에 그 작품은 어디 언제 실렸고 다른 작품과 어떤 면에서 유사하다는 식의 답변을 올리는 분도 있어요. 그런 거 보면 놀랍고 겁도 나고 그래요.

백: 실제로 창작과정에서 독자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쓸 때도 있습니까?

천: 요즘에는 좀 달라요. 어떤 독자들은 「바늘」을 비롯한 몇 작품의 강렬한 이미지들이 계속 등장하기를 요구하기도 해요. 그런 장면이 없으면 왜 이렇게 작품이 밋밋하냐는 식으로 말하는 분도 있죠. 도움이 되는 지적이기도 하지만 실제 쓸 때는 고정된 틀에 따르게 될까봐 의식하지 않습니다.

백: 창작활동을 구체화하게 된 건 아무래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다니면서일 텐데요. 그 곳에서 문학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습니다.

 

 

 

 

 

 

천: 대학을 졸업하고 소설 공부를 하고 싶어서 서울예대에 들어갔죠. 서울예대에서 얻을 수 있는 건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 함께 문학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거예요. 저는 고등학교 때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계속 습작을 해왔던 것도 아니어서 친구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친구도 얻었고요. 몇명이 모여서 모임 비슷한 것도 하고 그랬죠. 사실 최인훈 선생님에 대한 기대를 많이 하고 갔죠. 다른 분들도 많이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불행히도 제가 들어갔을 때에는 선생님이 안식년이어서 직접 못 배웠구요. 이제하 선생님께 문학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많이 얻었어요.

백: 지금 문단에서 가깝게 교류하는 작가도 있을 텐데요.

천: 조경란씨가 우선 친해요. 저는 언니라고 부르는데요, 언니 데뷔하고 제가 습작 계속하고 있을 동안 옆에서 봐주고 북돋워주고 그랬어요. 아마도 그 언니 없었으면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백: 이제는 같은 위치에서 소설을 쓰니까 경쟁자이기도 하고 서로 자극을 주는 관계 아닌가요?

천: 언니는 등단 6년차잖아요? 저는 2년차고. (웃음)

백: 소설 공부하면서 선배 소설가들 중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는 누구죠?

천: 김소진의 작품에 한참 열광했었구요. 황석영의 단편소설이 주는 생생한 현실세계의 느낌, 성석제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활달한 입담을 좋아했어요. 좀더 위로 올라가자면 김유정의 단편소설들 아주 좋아했고요.

백: 본인의 소설과는 매우 다른 색채의 작품들을 좋아했군요.

천: 그렇게 써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구요. (웃음)

백: 소설을 쓰다 보면 아무래도 선배작가들을 의식하면서 이런 점에서 나는 뭔가 새로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텐데요. 천운영씨 소설의 어떤 부분이 기존의 문학적 규범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나요? 자기 작품이 동세대 작가들하고도 다르게 읽혀졌으면 하는 부분도 있을 테구요.

천: 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산은 사람들인 것 같아요.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방식, 그게 제 문학의 관심사예요. 우리 주변에는 대학생들이 많지만 실제로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을 만큼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잖아요? 제 소설에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들, 생활전선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요. 저는 제가 잘 모르는 음악, 미술작품 같은 것을 작품에 동원하고 싶지 않아요. 특정한 지식인들만이 느낄 수 있는 체험을 그리거나 일상인들의 생활체험을 배려하지 않는 작품을 보면 싫더라구요. 모든 사람이 읽어도 내 삶과 많이 다르지 않다, 혹은 다르더라도 아 이런 삶도 있었구나, 이렇게 비루하고 비참하게 사는 사람도 있었구나 하는 그런 걸 느끼게 했으면 좋겠어요.

백: 그런데 천운영씨 소설을 보면 직접적인 문화기호를 동원하진 않지만 상당히 미학적인 의도와 창작방식을 즐기는 스타일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생활의 리얼한 반영이라는 측면보다는 미적인 작법이 두드러지고요.

천: 제가 그리는 사실적인 대상에도 미학적인 아름다움이 있어요. 예를 들면 동태 지느러미를 손질할 때 어떤 방법으로 칼을 쓰는 게 좋다, 이런 건 미학적으로 사고하지 않아도 이미 그 안에 미학이 내재되어 있는 거죠. 저는 그런 것에 관심이 많아요. 흔히 음악이나 미술•영화 등 예술적인 대상에만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들 생각하는 거 같아요. 저는 오히려 아름다움의 절정이 일상의 밑바닥에 존재한다고 봅니다.

 

 

 

 

 

 

백: 지금 이야기한 부분이 천운영씨 소설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대목일 것 같아요. 일상의 비루한 삶 속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미적인 장치로 이끌어내는 것 말이에요. 이와 관련하여 작품들을 읽다 보면 작가가 매우 부지런히 취재를 다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횟집, 마장동 축산시장, 병원 등 작가가 기자처럼 그 삶의 장소를 직접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소설을 쓰기 위해 일부러 그런 곳을 찾아다닌 건지 궁금해요.

천: 이 소설집에는 취재뿐 아니라 제가 우연히 겪은 생활체험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예를 들면 마장동 축산시장도 우연한 기회에 갔다가 순간적으로 「숨」의 줄거리가 떠오르더라고요. 『바늘』에 실린 아홉편의 작품 중에서도 「숨」은 대상을 보는 순간 '이거 내가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작품이에요. 그래서 일주일 정도 축산시장을 찾아다녔어요. 작가의 말에도 썼는데 그때가 한참 마장동에서 소에게 물 먹이다가 적발되어서 난리가 났을 땐데요. 시장사람들이 저보고 여기자가 들어왔다고 난리쳤어요. 카메라 들고서 뭘 적고 그러니까요. 그때 정말 쫓겨날 뻔했지요. 그런데 다행히 소설 쓰려고 한다고 말했더니 "그럼, 소설 속에 제 이름을 좀 넣어주십시오"라고 말씀하신 한 아저씨가 있었어요. 그 아저씨가 일일이 칼 쓰는 법도 알려주시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구경도 시켜줬죠.

그리고 제주도에서 한달 동안 횟집주방에 있으면서 회 뜨는 것도 배웠어요. 배우려고 배운 게 아니고 횟집에서 일하는 친구 좀 도와주겠다고 내려갔다가 우연찮게 배웠고요. 꼼장어집 같은 경우에는 제가 친구와 3개월 정도 직접 실내포창마차를 운영했었어요. 소설을 쓰기 위해 일부러 현장들을 찾아다니지는 않았지만 실제 저의 생활경험들이 배어 있어요.

백: 다이내믹한 여러가지 생활방식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소설가가 아니었으면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겠는데요.

천: 이 인물로요? (웃음)

백: 신문기자도 어울릴 것 같아요. 다른 삶에 호기심이 많으니까요. 이제 개별 작품의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요. 아무래도 천운영씨 소설집에서 「바늘」 얘기가 빠질 수가 없겠죠. 어떻게 보면 모든 작가에게는 등단작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있잖아요? 「바늘」은 천운영씨의 등단작이기도 하면서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 같아요. 「바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일단 추악하고 그로테스크한 인물의 등장입니다. 이후의 작품들에도 천운영 소설 특유의 괴기스럽고 뒤틀린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인데요. 이런 인물들이 자주 나오는 이유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비참하고 고단한 일상의 삶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작가가 유독 이러한 인물형에 애정을 갖기 때문인 것 같아요.



천: 저는 남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비루한 삶에 눈길이 많이 가요. 예를 들면 김기덕의 「악어」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아주 추잡한 인생이잖아요? 그런데 미워할 수가 없더라구요. 아주 비굴하고 나쁜 인간인데, 가만히 보면 미워할 수 없고 측은하고. 그런 인물들에 애정이 많이 가요. 제가 소설인물들의 외모를 일부러 괴상하게 그리는 건 아닌데 무의식적으로도 그렇게 설정이 되는 걸 보면 많은 애정을 갖고 있는 거지요.

백: 인물들의 외향도 그렇고 대체로 보면 소설 속 인물들이 의식하는 성(性)이 굉장히 황폐해요. 노화했거나 선천적인 성불구거나 정신적•육체적으로 거세된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인물들의 성적인 상징이 사회적인 의미도 띠고 있겠지만 그 자체로 대단히 강렬하고 섬찟한 이미지를 줍니다. 특히 인물들이 육식에 집착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띠는데요, 불구화된 자신의 육체적 성징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육체의 생생함을 갈구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심한 말로 작품 곳곳에 '피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은데요.

천: 작품집을 내기 전에 아홉편의 작품을 봤는데 정말 피냄새가 나는 것 같더라구요.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봤어요. 육식과 성적인 것에 내가 굶주려 있는 게 아닌가 하고요. (웃음)

백: 작가의 실제 식생활이 그런 거 아니에요?(웃음)

 

 

 

 

 

 

천: 정말 저의 식생활은 소설 속 인물들과 비슷해요. 저는 육식과 날것을 좋아해요. 회도 좋아하죠. 그리고 닭도 퍽퍽한 살은 안 먹어요. 연골, 목뼈 이런 부분을 좋아하거든요. 인물들의 식성을 묘사하는 부분에는 제 모습이 조금씩 들어가 있어요. 「바늘」에서도 "쌀눈이 살짝 비치도록 말간 밥알에 약간 검어진 육류의 핏물이 스며들 때, 고기의 맛은 정점에 이른다"는 구절도 나오죠. 정말 저는 고기를 먹을 때 밥과 같이 먹는 그 느낌을 좋아해요.

백: 주인공들의 강렬한 캐릭터의 묘사는 작가의 전략적인 부분이기도 한데요. 중심인물의 강한 개성에 비해 그 인물들이 소설 내의 다른 인물들과 맺는 관계는 서사적인 연결고리가 좀 약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작가가 의도적으로 폭넓은 사회적인 관계를 차단하고 주로 가족, 핏줄의 이야기에 집착한다는 생각도 들구요. 예컨대 「바늘」에서 딸과 어머니의 삶이 겹치는 이유가 특정한 서사로 설명되기보다 운명적인 동질성으로 읽히구요. 어머니가 스님에게 느끼는 억눌린 욕망이나 딸이 문신해주는 남자들에게 암암리에 품고 있는 욕망이 상징적으로만 암시됩니다.

천: 저는 인물들의 관계를 표현할 때 실제 가족관계에 있어서의 억압이나 상처들을 구체적으로 거명하기보다 그걸로 인해서 주인공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가 하는 점을 주로 표현하죠. 직접적인 사회관계를 맺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좀더 상징적인 것으로 쓰고 싶어요. 예컨대 욕망의 억눌림 역시 남성적인 거대제도와 그렇지 않은 것으로의 상징으로 쓰게 된 것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이 사회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운명, 아버지라는 대상과의 싸움이 바로 사회와의 싸움이에요. 그런 점에서 어떤 분들은 제 작품의 인물들이 열려 있지 않는다는 지적을 하시기도 하죠.

백: 그런 맥락에서 보면 작가가 인물의 특정한 행위를 예술적으로 묘사하는 데 공을 무척 들인다는 건 확실합니다. 등장인물들이 추악하고 그로테스크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장면에서 대단히 아름답지요. 여자가 문신을 새기는 장면의 섬세함이라든지 소를 도살하여 다루는 장면 하나하나, 회를 뜨는 장면, 심지어 소설 속의 인물들은 무엇인가를 먹을 때조차도 예술적(?)입니다. 「등뼈」에서 여자가 닭튀김을 먹을 때 세심하게 뼈를 발라내는 장면은 바라보는 남자에게 놀랍고 매혹적인 장면이지요. 이러한 탐미적 경향 때문에 비루한 현실조차도 판타스틱하게 그려지는 게 아닐까요.

천: 「바늘」에서 제가 천착했던 게 '미'와 '추'였어요.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정말 우리가 아름답다고 믿는 것은 정녕 아름다운 것인가, 추함 속에 아름다움은 없을까.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작품을 구상할 때 2, 3주 정도 절에 보살로 들어가서 생활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스님이 저한테 툭 내뱉은 물음이 있어요. "새가 나뭇가지를 물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간다. 왜 가냐?" 저는 장난삼아 "집 지으러 가겠죠"라고 답했어요. 그랬더니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파리가 어디에 집을 짓느냐"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네?" 하고 반문을 했더니 "파리는 변소에다 집을 짓는다. 거기서 새끼가 나오고 그 새끼들이 다시 변소통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좌선하는 동안에 계속 그 질문을 생각했어요. 정말 새가 왜 날아가지, 하고요. 그러던 어느 순간 그 질문이 어떤 대답을 요구하는 건지도 모르고 새가 날아가는 장면이 그려지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리고 '집'이라는 단어와 '아름답다'는 단어를 계속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바늘」을 쓰게 되었거든요. 물론 다른 에피쏘드도 있었지만요. 그래서 아름다움이란 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백: 한 인간의 내면에 묻혀 있는 이미지나 관찰하는 사람의 시선에 포착되는 아름다움을 감각적으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천운영씨의 소설을 영상적인 스타일과도 연관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이 천운영씨도 영화 보는 것 무척 좋아하지요? 어떤 영화가 특히 인상에 많이 남는 편인가요?



천: 네. 아까 김기덕의 영화를 이야기했지만 「하이 힐」(Tacones Lejanos)을 만든 뻬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의 영화도 좋아해요. 섬찟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런 영화들을 좋아해요.

백: 최근 영화작품 중에서 재미있게 본 것 있어요?



천: 여행을 갔다가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낯선 극장에서 봤는데, 장면 하나하나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네요. 주인공이 단란주점에서 발가벗고 무표정하게 기타를 치는 장면도 그랬고 기타 선생님 얘기도 그렇고요. 인물들의 느릿느릿한 말투에서 나오는 그 생활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보이더라구요. 사람들의 표정이 콸콸 눈물을 쏟아내게 하진 않지만 은근하게 슬퍼지더라구요. 지나가다가도 문득문득 그 생각이 나요.

백: 영화 보고는 노래 부르러 가지 않았어요? 다들 이 영화 보면 노래 부르고 술 마시는 게 절차라고 하던데. (웃음) 형식적으로 시도하는 스타일은 다르지만 바탕에 자리한 생리적 감수성에 공감이 가나 보군요. 소외된 인물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는 점에서요.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소설을 쓸 때 그 이미지들이 의식되지 않나요?

천: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저는 우연히 떠오르는 이미지들로 연상시켜 쓰는 스타일은 아니예요. 소설을 쓸 때는 자세히 구상하는 편이지요. 실제로 학교 다닐 때 수학 과목을 무척 좋아했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답이 딱 나오는 걸 참 좋아했어요. 소설 쓸 때에도 문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게 아니라 원인과 결과를 구성하고 생각해서 써요.

백: 예를 들어 역사소설 쓸 때 흔히 시도하는 인물 사건 도표 같은 걸 만들어놓으시나요?

천: 네. 전 도표를 만들어요. 장면마다 뭐가 나오는지, 거기서 상징으로 들어갈 단어 몇개 쓰고 이 장면의 분량은 몇 매쯤 되겠다, 이런 식으로 장면을 구성해요. 어쩌면 그게 영화 씨놉시스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죠. 영화가 나에게 직접 들어온다거나 영화의 카메라 기법을 따라가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스토리 구성을 할 때 그렇게 하죠.

백: 그 방식은 추리소설가들이 즐겨 쓰는 방법이기도 한데요.

천: 나중에 추리소설을 써볼까 생각도 조금 하고 있어요. 부커상(The Booker Prize)을 받은 맥완(Iwan McEwan)의 『암스테르담』(Amsterdam)을 보면 굉장히 추리소설적이지만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이거든요.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추리소설 하면 판타지하고는 분리된 별도의 영역으로 자리잡고 있잖아요? 전 추리소설의 박진감 넘치는 부분과 문학적인 상상력과 상징들을 합쳐서 새로운 양식을 시도하고 싶어요. 사실 초등학교 때 열광했던 게 추리소설이거든요. 홈즈부터 시작해서 씨드니 쎌던까지요. 생각해보니 하이틴로맨스도 무척 많이 읽었네요. (웃음)

백: 여학생 시절 때 하이틴로맨스 안 읽어본 사람 없잖아요? 쉬는 시간에 가방에서 꺼내 서로 돌려 읽던 기억이 나네요. 그 당시는 그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였던 것 같아요. 백마 탄 왕자님을 찾아가는 다소 야한 이야기들…… 남학생들의 도색잡지보단 약하지만 하이틴로맨스가 유일한 성인로맨스의 분위기를 제공했던 것 같은데…… (웃음) 다시 소설쓰는 이야기로 돌아와서, 작품은 규칙적으로 쓰나요? 한번에 몰아서 쓰는 스타일인지 아니면 조금씩 나누어서 쓰는지.

천: 쓰다 보면 보통 밤을 새긴 하는데요, 잘 쓰는 분들처럼 사오십매는 못 쓰고요 십매, 십오매 정도 하룻밤에 쓰죠. 전 한 장면씩 써요. 그 장면을 쓰고 다음날 다음 장면을 쓰고 그래요. 보통 한시에서 해 뜨기 전 일곱시까지 쓰고 그랬는데, 마지막 소설을 쓰면서 조금 바뀌었어요. 아침이 좋더라구요. 네다섯시쯤 일어나서 씻고 해 떠올라서 비출 때까지 썼어요.

백: 몸이 힘들 때도 많죠? 소설쓰기는 그야말로 체력과의 싸움이라고 하는데요. 지금이야 젊으니까 못 느끼겠지만. (웃음) 작가로서 내가 관리해야겠다 하고 느낀 적은 없나요? 어떤 작가는 달리기를 규칙적으로 하기도 하고 헬쓰클럽을 다니는 분들도 있고 나름대로들 체력을 관리하는데……

 

 

 

 

 



천: 저도 한동안 조깅도 하고 수영도 하고 그랬는데요, 요즘은 통 안 해요. 소설쓰다 지치면 같이 사는 친구하고 고기 먹어요.

백: 고기요? (웃음) 천운영씨의 유일한 힘은 처음부터 끝까지 육식에서 나오는군요. 채식주의자들이 보면 놀라겠는데요. 지금까지 여러 작품 중에서도 「바늘」만 가지고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은데 첫 소설집 중에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다른 작품 이야기도 좀 해볼까요.

천: 네 있어요. 물론 「바늘」이야 첫 작품이니까 애착이 가고요. 저는 「월경」을 좋아해요. 왜냐하면 첫 소설집의 모든 작품이 「바늘」 이후에 쓴 작품들인데, 「월경」만 그 전에 쓴 작품을 손질한 거예요.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던 작품이죠, 제목은 물론 그게 아니었지만. 아마도 이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지 않았으면 소설을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이 작품 가지고 주어, 서술 시제 이런 걸 다 써봤을 거예요. 현재형으로도 써봤고 과거형으로 써봤고. 그런 연습을 제일 많이 했던 작품이죠. 인물도 특별히 애정이 가고요. 「월경」 마지막 부분에 "보름달은 스스로 몸을 허물어 경계를 지우리라"는 부분하고 여성성의 이미지하고 다 제게는 의미가 있는 것이어서 더 그렇죠. 그리고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애착이 더해요. 그 외에 「눈보라콘」은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쓴 작품으로 기억에 남아요. 제 나름대로 여러가지 문화적 기호들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재미있게 썼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 모양이에요.

백: 작가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과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웃음) 전 개인적으로 「눈보라콘」의 새로운 면도 주목하지만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어요. '눈보라콘'이라는 응집된 이미지를 보여주면서도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려는 새로운 시도가 의도만큼 충분히 살아나지는 못한 것 같아요. 하나의 섬세한 이미지가 모든 인물들과 사건을 묶어주기에는 너무 약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 부분이 앞으로 천운영씨가 소설을 쓸 때 중요한 문제로 계속 부각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뭔가 방법론을 변화시켜나가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도가 느껴졌어요. 아마 앞으로 이 작품이 발단이 되어 여러 종류의 스타일을 보여줄 것 같아 이후의 작품이 궁금해지기도 해요.

어쨌든 천운영씨의 첫 소설집 『바늘』은 신인으로서는 상당히 과감하고 뚜렷하게 자기 스타일을 부각시키고 있는 편인데요. 작품집이 전체적으로 상당히 고르고 짜임새가 있고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모여 있어서 탁월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성적인 특징이 이후의 작품 스타일을 변화시키는 데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때요?

천: 네 부담이 많이 돼요. 한권을 묶어내고 나서 다음의 첫 작품이 특히 그렇죠. 사람들이 일단 주목을 할 테니까요. 또 이렇게 계속 나갈 수 없지 않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고요. 제가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시선은 변하지 않을 것 같고 다만 방법적인 거, 소재나 묘사적인 부분들에 좀더 상상력을 넣는 그런 쪽으로 나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설핏 하고 있어요. 그리고 '육체'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백: 현재 살아가면서 소설 쓰는 것만큼 좋아하는 일이 또 있나요? 전문가적인 식견을 쌓는 분야가 있을 것 같아요.



천: 소설을 위해서건 아니건 여행을 좋아하고요. 요리하는 것 좋아해요. 그래서 문화쎈터 같은 데서 요리강좌도 듣고요. 양식조리사, 중식조리사 그런 수업도 들었어요. 아마도 그래서 횟집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시장 보는 것도 좋아하죠. 시장 보고 요리하면서 모든 스트레스 다 푸는 것 같아요. 영화 「301 302」 보면 다른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고 먹는 걸 보면서 만족감을 얻잖아요? 저도 그래요. 제 동거녀가 거의 모르모트죠. (웃음) 음식재료를 만지고 쓰다듬어보고 냄새 맡고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요리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백: 지금까지 주로 단편작품을 써오셨는데, 장편소설도 나름대로 구상하고 있을 것 같아요. 출판사에서 제의도 들어올 것 같고요.

천: 다들 좋은 중편, 장편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러는데요, 아직은 제 호흡이 그렇게 조절이 안되는 것 같아요. 점차 늘려가려고 계획은 잡고 있어요.

백: 구체적으로 다루고 싶은 소재나 취재하고 있는 거 있나요? 물론 비밀이겠지만요.

천: 비밀인데요. (웃음)

백: 추리소설 얘기도 하셨지만 장르를 넘나들고 싶은 생각도 있겠죠?. 판타지에도 관심 많을 테고…… 또 작가들 보면 동화에도 관심을 갖는 것 같던데요.

천: 판타지에는 관심 많아요. 그런데 저는 아직 동화는…… 제가 동화 쓰면 얘들이 무서워할 것 같아요. (웃음)

백: 동화가 항상 따뜻하고 예쁜 이야기만은 아니잖아요?

천: 사실 영국이나 독일동화 보면 상당히 현실적이고 어두운 면을 반영하고 있어요, 때론 엽기적이구요. 늑대 배를 가르는 장면 같은 건 아이들 보기엔 잔인하다 싶구…… 제 소설에서도 가끔 그런 면을 들여오긴 하죠. 하지만 동화는 그래도 뭔가 아름답고 따뜻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해요.

백: 소설을 쓰면서 지금까지 느꼈던 것,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약속 같은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천: 『바늘』에 실린 소설 아홉편을 쓰면서 정말 빨리 달려왔거든요. 청탁 받은 거 쓰기에 급급했던 것 같아요. 이제는 완급도 조절해야 할 것 같고요, 조금 천천히, 좀더 깊이 생각하고 나아가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박완서 선생님처럼 오래도록 그 나이를 느낄 수 있는 소설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백: 앞으로도 좋은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천: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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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 교보에 들렀다가 손에 든 책은 루틀리지의 '크리티컬 씽커즈'의 한 권인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앨피, 2007)이다. 폴 드 만(1919-1983)은 대중적으로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문학비평과 이론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지나칠 수 없는 '예일 마피아의 대부'로서 예일대학에 오래 봉직했던 벨기에 태생의 비평가이다.

 

 

 

 

드 만의 높은 지명도(혹은 악명?)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단 한권의 저작도 번역돼 있지 않아서 사실 이런 입문서의 출간이 반가운 것만은 아닌데, 어쨌거나 이번 출간이 계기가 되어 적어도 두어 권 이상은 번역/소개되었으면 한다(러시아어로도 <맹목과 통찰>, <독서의 알레고리> 두 권이 번역돼 있다. 짐작에 일어로는 더 많은 책들이 번역돼 있을 법하다). 적어도 데리다나 스피박의 책들이 번역되는 만큼은(드 만은 데리다의 친구였고 스피박의 지도교수였다) 소개되는 게 공평하다고 나는 생각한다(문학이론쪽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지라 나는 세 사람의 책들은 거의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번역본이 나온 김에 원서(2001)는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복사했다. 같은 시리즈의 여느 책들과 마찬가지로 143쪽의 콤팩트한 분량(국역본은 254쪽). 바쁜 일들에도 불구하고 제 버릇 남 못 주기에 서론(왜 드 만인가?)을 읽어보았다.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 몇 가지를 적어놓는다('비워놓는다'는 게 정확하겠다. 자꾸 어른거리기에 다른 일에 방해가 된다).

앨피출판사의 이 시리즈로는 올초에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과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이 출간된 바 있고(<제임슨>과는 좀 '시끄러운' 인연을 갖게 됐다) <폴 드 만>은 세번째 책이다. 이어서 나올 근간 목록에는 <줄리아 크리스테바>, <주디스 버틀러>,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이 눈에 띄는데, 모두 여성이론가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덕분에 하반기에는 이 여성이론가들에 대해 정리할 기회가 생길 듯하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로부터 시작된 이 시리즈의 책들을 나는 다 갖고 있다. 개인적으론 내가 갖고 있는 많은 책들의 저자들을 다루고 있기에 일종의 '로드맵' 삼아서 소장해두는 격이다(이 시리즈의 의의는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이론가 사전을 겸한다는 데 있다). 매우 요긴함에도 불구하고 간혹 불만스런 번역이 없지 않아서 역자에 좀 민감하게 되는데, <폴 드 만>의 경우는 낭만주의와 벤야민의 문학이론 연구로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전공자'가 번역을 맡았다.

벤야민과 드 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모르겠지만(아, 알레고리론으로 연결된다!) 드 만이 낭만주의에 관한 권위있는 저작들의 저자인지라 '낭만주의 전공'이라는 이력은 그래도 의지할 만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맨앞에 실린 '옮긴이의 글'에서 프랑스의 비평가 '제라르 주네트(Gerard Genette)'를 '제라르 자네트'라고 표기한 건 상당히 특이해 보이지만('쥬네트'나 '즈네트'란 표기는 본 적이 있지만 '자네트'는 처음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구조주의 비평가의 한 사람인 주네트의 경우에도 '제라르 즈네뜨'의 <서사담론>(교보문고, 1992) 이후에는 전혀 소개되지 않고 있다(폴 드 만이나 제라르 주네트가 대단하지 않기 때문에 번역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 딱히 우리가 읽어야 할 문학이론서는 몇 권 되지 않는다).  

폴 드 만을 포함하여 힐리스 밀러, 제프리 하(르)트만, 해롤드 블룸 등 예일대학의 쟁쟁한 문학비평가 네 사람을 미국 대학가에서는 '예일학파'라고 칭하고 일부에서는 '예일 마피아'란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는데, 드 만은 (가장 연장자이기도 하지만) 그 대부격의 인물, '돈 파올로(Don Paolo)'로 간주됐다(더 친숙한 인물로 고르자면 '돈 꼬레오레'라고 해야할까?).

이 예일학파에 대한 소개로는 페터 지마의 <데리다와 예일학파>(문학동네, 2001)가 단행본 분량으로서는 유일하면서도 유용하다(서론을 읽은 바로는 <폴 드 만>의 저자 맥퀼런은 드 만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지마와 의견이 좀 다를 듯하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최악의 번역서란 평도 얻은) 프랭크 렌트리키아의 <신비평 이후의 비평이론>(문예출판사, 1994)의 한 장이 폴 드 만에 할애돼 있고('폴 드 만: 권위의 수사학'), 빈센트 라이치의 <해체비평이란 무엇인가>(문예출판사, 1993)와 조너던 컬러의 <해체비평>(현대미학사, 1998)에서도 드 만은 자주 언급된다.(*<이론에 대한 저항>과 <독서의 알레고리>도 번역돼 나왔다.)  

그리고 "청년시절 드 만이 전쟁 중에 전쟁 중에 점령된 벨기에에서 나치에 협력적인 언론을 위해 글을 썼다는 사실이 알려진 1987년 소위 '드 만 사건'"에 대해서는 책의 6장('저술과 책임: 드 만의 전시 언론활동') 외에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2004)의 12장('파시즘 문제 - 폴 드 만/하이데거/니시다 기타로')를 참고할 수 있다.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던 데리다에 의하면 드 만의 업적은 '문학이론 영역의 변혁(transformation)'에 놓인다(두 사람은 1966년 존홉킨스대학에서 열린 '구조주의 논쟁'을 주제로 한 컨퍼런스에서 처음 만났다). "이 변혁은 대학 내외의 그리고 미국과 유럽 양쪽의 문학이론 영역에 물을 대는 경로들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동료였던 힐리스 밀러의 단언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이 드 만적 감각의 좋은 독자가 된다면 보편적 정의와 평화적 평화의 밀레니엄이 도래할 것"이다. '드 만적 감각의 좋은 독자(good readers in de Man's sense)'는 나라면 '드 만적 의미의 좋은 독자'라고 옮기겠다(일급의 비평가였던 '드 만적 감각의 좋은 독자'가 되는 것보다는 '드 만적 의미의 좋은 독자'가 되는 게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높은 일 아닐까?).

1970년대 예일대학에 몸을 담게 된 드 만과 동료 비평가들의 "선구적 작업으로 형성된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관심은 (*미국) 학계에 상당한 마찰을 불러왔다. 문학비평의 전통적 형식들이 새로운 지식체계의 극단적 함의들로 위협받는다고 여겨졌다. 이 무렵에 종종 옛것과 새것 사이의 '매서운 토론'이 잇따라, 흔히 이 시기(대략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말까지)는 영미권 지식인의 삶 속에 이른바 '이론 전쟁(theory wars)'이라는 극적인 명칭으로 불린다."(21쪽) '이론 전쟁'이란 말은 '예일 마피아'란 별명과 잘 어울리는군.

"드 만의 저술은 상대적으로 그렇게 많지 않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부터 사망하기까지 약 65편의 에세이와 평문을 남겼다."(23쪽)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지만 '계산'은 정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겠다. 드 만의 저술은 ' 75편(some seventy-five)'이다. "책으로 출간된 드 만의 첫 에세이 모음집은 <맹목과 통찰>인데, 이는 1971년에 출간되어 1983년에 수정판이 간행되었다.(...) 이 책에 이어서 문학과 수사학을 탐구하는 <독서의 알레고리>(1979)가 간행되었다."

"드 만의 글 중 영향력이 가장 큰 몇몇 글들은 사후 첫번째 간행된 모음집인 <이론에 대한 저항>(1986) 속에 실려 있다. 이 책의 표제 제목으로 선택된 논문은 소위 '이론 전쟁' 기간 동안 이론적 질문의 방향을 규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낭만주의의 수사학>(1984)은 <독서의 알레고리> 속에 표현된 이론들을 확장시키는데, 낭만주의적 사유에 대한 드 만의 작업의 중요성을 공고히 한다. <낭만주의와 현대비평>(1993)은 어떤 의미에서 <낭만주의의 수사학>과 한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24쪽) 국역본에서 <낭만주의와 현대비평>에 병기된 원어 'Romanticism and Contemporary' 다음에 'Criticism'이 누락됐다.

"이상의 모음집들에 이어 <미학적 이데올로기>(1996)가 나온다. 1977-83년 사이에 씌어진 에세이들이 포함되었으므로 이 저작은 <독서의 알레고리>의 후속편으로 생각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이 책은 수사학, 지식의 생산과 미학 사이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심도 깊게 숙고하는데, 이는 드 만의 저작이 비정치적이라는 비난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그것은 드 만 저작의 정치적 정향성을 재획인해주며 그의 다음 프로젝트가 부분적으로 카를 마르크스에 집중될 것임을 예시한다. 유감스럽게도 드 만은 이 프로젝트를 완수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24-5쪽)

이 책에서 역자가 새롭게 시도하는 번역어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물론 제목에도 포함돼 있는 '탈구성(deconstruction)'이다. 흔히 '해체(론)'라고 옮겨지는 데리다의 이 용어를 역자는 '텍스트 이론적 맥락에서' '탈구성'이라고 옮길 것을 제안한다(일본에서는 '탈구축'이라고 옮겨지는 걸로 안다). 나는 이러한 시도에 반대하지 않는다(데리다 자신이 어떤 고정적인 'key word'를 거부한다). 하지만 몇 가지 다른 번역은 새로운 시도가 아닌 부주의의 소치로 보인다.

가령 26쪽의 박스에서 데리다를 '파리대학의 철학자'라고 소개했지만 그는 '고등사회과학원의 철학자'였다(원문에도 그렇게 표기돼 있다). 같은 파리 하늘 밑에 있는 것일 테니 대수로운 건 아니지만. 하지만, 29쪽에서 "예일에서 문학 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드 만은 제프리 하르트만, 해럴드 블룸, 힐리스 밀러 등을 가르쳤다."고 한 건 오역이다(동료들이 드 만에게 감화를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번역대로라면 세 사람이 드 만의 '제자'란 것인데 넌센스이다).

원문은 "While teaching on the literary studies program at Yale, de Man taught alongside the critics Geoffrey Hartman, Harold Bloom and J. Hillis Miller."이다. 하르트만, 블룸, 밀러와 함께 가르쳤다는 뜻이다. 거기에 1975년부터 데리다가 객원교수로 가세하게 되어 소위 '예일학파'가 형성된다는 것. 비록 저자가 부적절한 명칭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왜냐? "드 만,  하르트만, 밀러, 데리다의 글에 어떤 유형적 유사성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한 가지 목소리로 말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 자신을 결코 어떤 특정한 유의 비평적 과업과 관련지어 묘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형적 유사성'은 'family resemblances(가족 유사성)'의 번역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굳이 다르게 옮길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밖에 'desire'를 '욕구'라고 옮기는 것 등도 특이한 선택으로 보인다...

07. 04.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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