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출간된 책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도널드 시먼스의 <섹슈얼리티의 진화>(한길사, 2007)이다. 학술명저번역 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되었는데, 지난 1979년에 출간된 원저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는 진화생물학/진화심리학 분야의 '고전'으로 살아남은 이유/비결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데이비드 버스의 책들이나 제래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사이언스북스, 2005)를 비롯해서 이후에도 이 분야의 '명저들'은 많이 출간/소개됐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저자의 이름도 다소 생소하기도 하고. 책소개도 이런 점을 의식했는지 아래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출판된 지 2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이에 따라 진화심리학에서 그 당시 이뤄졌던 논의와 현재 진행되는 논의가 다소 다를 수도 있으나, <섹슈얼리티의 진화>는 성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논의의 이정표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있는 책이다. 관련 분야의 다양한 논의를 심화시키는 데 이바지한 바가 크며, 특히 국내의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 성 심리학, 그리고 여성학적 논의의 성숙에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성매매 특별법' 등에 대한 입장을 정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요컨대, 이정표가 된 책이라는 것. 분량도 560쪽(원저는 368쪽)에 이르기에 부피에 대한 바람도 채워준다. 장서용으로 좋다는 얘기이다. 다윈의 <인간의 유래>(한길사, 2006)도 아직 꽂아놓고 있지 못한 형편인지라 소장도서로 만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하지만, 리뷰 정도는 미리 읽어두도록 한다.  

 

문화일보(07. 03. 02) 남성의 바람기는 ‘유전자의 명령’

여성을 위한 ‘플레이 보이’지를 창간하려는 사람에게 주는 충 고. 첫째, 음경이 발기한 남성의 사진이 음경이 축 늘어진 남성 의 사진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둘째, 남성의 단독 사진보다는 벌거벗은 남성과 함께 있는 여성의 사진이 좀더 효과적이다. 셋째, 남녀가 서로 어루만지는 사진이 특히 효과적이다.

이 같은 충고는 여성의 성(性)적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여성의 벗은 모습에 시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남성과 달리 상당수 의 여성들은 남성의 누드사진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기한 남성의 사진이 그렇지 않은 남성 사 진에 비해 효과적인 것은 보다 실질적인 성 관계를 시사하기 때 문이다. (이는 여성을 위한 포르노 잡지의 입지가 빈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포르노토피아(pornotopia)에선 합당한 맥락에서의 성적 현실 보다는 환상적인 상황을 설정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은 남성을 시각적으로 대상화하는 데서 오는 자극보다 는 사진에 같이 나오는 여성에 대해 주관적인 동일화를 함으로써 더욱 자극받는다. 이는 세번째 충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단순한 시각적 자극보다는 사진에 자신을 투사해보기를 여성은 더 선호한다. 사진에 자신과 같은 성인 여성이 나오는 것은 경쟁과 질투심 같은 정서 또한 촉발할 수 있다.



책은, 이 같은 인간의 성 특성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고찰을 집대성한 고전이다. 진화심리학에선 인간의 진화사를 통해 보통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심리적 특성과 행동을 설명한다. 저자는 인간의 성적 행동과 태도, 감정에서 남녀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차이가 생래적이라는 결론을 내놓는다. 다시 말해 똑같은 환경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남녀 사이에는 전형적인 성 특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인류의 진화사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성 특성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이성을 두고 벌어지는 동성간의 경쟁은 일반적으로 여성들 보다 남성들 사이에서 훨씬 치열하다. 둘째, 남성은 일부다처적인 성향이 농후하지만 여성은 이런 측면에서 비교적 유연성이 있다. 셋째, 배우자에 대한 성적 질투심은 남성이 더욱 강렬하다. 넷째, 육체적 특징 특히 젊음은 여성의 성적 매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이에 비해 남성의 육체적 특징(젊음 등)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작다. 다섯째, 여성에 비해 남성은 훨씬 많은 수의 성 파트너를 갖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여섯째, 성은 여성이 남성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또는 호의로 간주되며 그 반대는 아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이 같은 남녀의 성적 특성이 유전자의 보존과 후대 전달을 위해 모든 생물이 프로그램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유전자의 후대 전달을 위해 남녀간 성적 특성과 행동에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남성은 될 수 있으면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평생 낳을 수 있는 자녀의 수에 제한이 있는 여성은 다수의 남성과 무작위로 관계를 맺기 보다는 우수한 유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더욱 유리하다. 따라서 남녀는 각기 다른 성행동 전략을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사족 한마디. 남성에게 다수의 성 파트너를 얻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특성 이 있다는 ‘사실(fact)’에서 ‘가치(value)를 도출해내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자연’과 ‘선(善)’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은 진화론적 원인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김영번기자)

07. 03. 03 - 04.

P.S. 저자인 도널드 시먼스는 "캘리포니아 대학 인류학과 교수"로서 "인간의 성 특성의 진화론적 해명에 관심을 가지고 줄곧 연구해왔으며, 성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탐구를 대표하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소개돼 있다.

"지은 책으로는 <놀이와 공격성: 붉은털원숭이에 대한 연구>, <섹슈얼리티의 진화>, <전사 연인들: 성애적 허구, 진화 그리고 여성의 섹슈얼리티> 등이 있다"고 하는데, 마지막에 언급된 <전사 연인들>이 최근에 나온 <다윈의 대답> 시리즈의 한권이다. 마저 소개되면 좋을 듯하다...

P.S.2. 섹슈얼리티의 진화심리학의 연장선상에서 '강간의 진화심리학'에 대한 소개/논의를 옮겨놓는다. 온라인 학술저널 담비의 리뷰팀이 <섹슈얼리티의 진화>의 역자이기도 한 김성한 교수의 연구논문을 요약정리해놓고 있다.

담비(07. 03. 03) 진화심리학을 오해하는 페미니즘에 맞서

강간 같은 흉폭한 강력범죄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서는 그 원인에 대한 설명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설명의 유파가 존재한다. 피해 여성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는 강간은 그 원인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예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강간에 대한 기존의 설명은 주로 페미니스트들의 사회심리학적 분석이 그 주도권을 잡아왔다. 강간을 사회문제화하고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처벌 기준을 제시해온 그들의 공력은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강간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해석이 등장하면서 양 측이 해석공방을 벌이고 있다.

최근 '철학' 제89집에 발표된 김성한 서울여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의 '강간에 대한 진화심리학의 설명 비판은 타당한가?'는 진화심리학적 설명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분류하고 그 각각에 대한 반론을 시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먼저 김 연구원은 강간에 대한 진화심리학의 설명을 요약해서 제시한다.

불필요한 질문처럼 여겨지지만 왜 남성이 강간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을까부터 보자. 이는 기본적으로 남녀 간의 생물학적 성 특성의 차이 때문으로 "여성이 상대를 가림에 비해 남성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모습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남성은 단순히 교접만으로도 자손을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사랑없이, 상대와 비교적 무관하게 성관계를 맺을 수 있을뿐만 아니라, 시각적 자극 등 비교적 단순한 기작을 통해 성적 욕구가 일어난다. 반면 여성은 임신과 출산 등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상대를 잘못 고를 경우 자칫 자손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 선택에 신중하다. 이 때문에 성관계와 관련한 수요 공급의 불균형이 일어나고 대부분의 남성들이 성적 파트너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가 성매매의 사회적 승인여부와 관계없이, 나이와 사회경제적 지위 또는 정신병의 유무와 관계없이 지극히 정상적인 남성들마저도 강간범이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이유다. 남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어떤 설문조사에선 잡히지 않으면 강간을 범하겠는가의 질문에 35%가 그렇다고 답했다는 건 이런 주장을 보강해주는 자료다.

강간으로 인한 여성의 고통에 대해 진화심리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왜 강간의 고통이 여타의 폭력 등에 비해 더 심각한 상처를 안겨주나. 강간 희생자인 여성은 육체적 상처를 넘어서, 아이출산 시기와 상황, 그리고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가 될 남성을 선택할 기회를 박탈당하며, 이로 인해 번식적 성공의 가능성이 현저히 줄기 때문이라는 게 그 설명이다. 심지어 진화심리학자들은 이런 가정도 해봤다고 한다. 만약 여성들에게 번식적 성공의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교육을 시키면 어떻게 될까. 물론 터무니 없는 추론이다. "여성은 교육을 받음으로써 강간당하는 경험을 원하게 될만큼 유연한 본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게 결론.

그렇다고 진화심리학이 강간을 옹호하거나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레이(R. Gray) 같은 학자는 "진화론적 설명은 우리의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유전자에 프로그램화돼 있으며, 그래서 그 행위가 자연스럽고 고정적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하다"라고 비판적 입장을 보이지만, 진화심리학은 남성이 상대방에게 고통을 야기하면서까지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망을 타고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즉, '여러 여성과의 성관계'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이 곧 강간에의 욕구는 아니라는 것. 이런 맥락에서 유전자 결정론자로 비난을 받고 있는 도킨스조차 "우리는 유전자에 대항할 힘이 있으며,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이기적 자기 복제자들의 전제적 지배에 반역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에드워드 윌슨도 인간의 공격성은 유전적 성향과 사회가 처한 환경, 그리고 그 사회의 역사라는 세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함으로써 발생한다고 말한바 있다.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진화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결정은,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구했다'라는 의미의 결정이 아니라, '직각적으로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사실이며, 그러한 감정이 우리에게 육박해 들어온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라고 김 교수는 되풀이 설명한다.

그럼에도 진화심리학자들은 학습이나 환경적 요인들이 통제력을 발휘해 행동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일부 성향 자체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는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는 호랑이의 맹수적 본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이것 때문에 진화심리학자들은 오해를 사기도 하는데, 김 교수는 논문에서 이들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자연적인 것'이라는 등식은 받아들이지만, '자연적인 것=옳은 것'이라는 등식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연적인 경향을 인정하는 게 곧 옳음을 주장하는 게 아니며, 이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진화심리학에 대한 기타 사회과학자들의 구체적인 반박을 살펴보자. 먼저 진화심리학의 강간에 대한 설명은 꼭 필요하지 않은 군더더기라는 관점이다. 니네들이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충분히 설명된다는 것으로 탕-말티네즈(Z. Tang-Martinez) 같은 이는 "강간이 생물학적 토대를 갖는다고 주장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페미니스트 사회심리학 분석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페미니스트 사회심리학이란 남성은 어렸을 때부터 사회화를 통해 여성을 통제, 지배하려는 욕구를 습득하게 되고, 이것이 고착 강화되면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으로 나타난다는 해석으로, 강간이 일종의 정치적 행위라는 주장을 표방하는 입장을 지칭한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김 교수의 주장처럼 동일한 현상에 대해 근인(proximate cause)적 설명과 궁극인(ultimate cause)적 설명을 모두 추구하는 게 바람직하다. 우리는 동물의 행동을 신경, 호르몬, 인지과정, 유전자, 조건화, 감정 등을 통해 설명할 수 있으며, 이들 중 어떤 한가지만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강간에서 생물학적인 성 특성을 간과한다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회심리학자들은 강간이 성범죄가 아니라는 걸 주장하기 위해 강간범들의 증언을 활용하기도 한다. 강간범들은 붙잡히고 나서 왜 그랬냐는 질문에 "불만, 분노, 소외감" 등을 대기도 하는데, 이를 근거로 강간을 힘, 지배, 굴욕, 착취, 가학성에 관한 폭력행위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 강간범들이 "더 이상 내가 위험인물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성적 충동을 최소화해서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사실상 크고, 일부 조사에서 강간범들은 자신의 실제 동기를 말하기보다 연구자들이 원하는 설명을 제시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간할 때의 폭력사용을 이유로 강간을 폭력으로 이해하려는 경우도 비판하고 있다. 강도가 피해자의 물건을 강탈할 때 강도의 목적이 물건이지 폭력이 아닌 것처럼, 강간도 마찬가지라는 것. 이 문제에 대해서는 손힐(R. Thornhill) 등의 경험적 연구가 있는데, 강간범의 폭력을 도구적 완력과 과도한 완력으로 나눌 때 대부분 전자에 속한다는 연구가 그것이다. 또한 강간희생자가 살해당하는 경우도, 전체 살인사건에 비해 극히 일부분이고, 면식범의 소행일 경우 사건은폐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점도 덧붙이고 있다.

또한 일부는 전쟁중에 강간이 많이 발생하는 것을 근거로 강간이 성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브라운밀러 같은 이는 전쟁 중에 남자들이 떼거지로 다니면서 여자의 나이를 가리지 않고 집단윤간을 행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이나 지배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데 이것도 생각해보면 성적 욕구의 충족을 목적으로 일어난 강간으로서, 다만 전쟁중에는 처벌받을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아지기 때문에 강간빈도가 높아지고 행위의 수준도 강화된다는 것쯤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아무튼 강간의 원인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설명은 기존의 사회심리학적 설명의 부족한 부분을 잘 메워주고 있는 듯하다. 물론 김 교수의 논문은 진화심리학적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사회심리학적 설명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감이 없지 않다. 때문에 이것은 논쟁을 통해 가다듬어 나가야 할 주제인 듯하다.(리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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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마다 옮겨오는 경향신문의 연재 '작가와 문학사이'이다. 이번주에는 시인 김선우씨가 '스스로 충만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고 평론가 신형철씨가 거들고 있다. 한겨레('모 일간지')의 '18도' 지면에서도 그녀의 칼럼을 종종 읽을 수 있으므로 젊은 시인들 가운데는 지명도가 높은 편이다. 시집으론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2000),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물밑에 달이 열릴 때>(창비, 2002), <김선우의 사물들>(눌와, 2005) 등이 있다.

 

경향신문(07. 03. 03) [작가와 문학사이](8)김선우-스스로 충만한 아름다움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만취한 여자 하나 밤거리에서 비틀대고 있었다. 몸 가누지 못하고 기어이 쓰러져 머리가 깨졌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피 흘리던 그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한다. “아아 상쾌해.”(‘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80년대는 “격렬한 외상의 날들”이었으나 90년대는 “우울한 내상의 날들”이었다. 한 시절은 속절없이 저물고 함께 꾸던 꿈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몸 상할 일 없어 좋겠구나 했는데 꿈 없는 세상이 끔찍해 마음은 속에서 곪아갔다. 그러니 아시겠는가, 무엇이 그녀를 쓰러뜨렸는지. 취중난동은 자해공갈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선우, 1970년에 태어나 1996년에 시인이 되었다.

그녀가 여성성의 매혹과 위력을 새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녀의 머리 미처 성할 날 없었을 것이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얼레지는 얼레지/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얼레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타자(남성)의 시선을 바라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족하는 아름다움이다. 원한의 여성주의가 아니라 긍정의 여성주의다. 꽃을 여성의 생식기와 포개었던 화가 조지아 오키프 생각도 난다. 특히 “얼레지는 얼레지”가 이 시를 어여삐 들어올린다. 힘 있는 것들이 발설하는 자기확인의 동어반복은 역겹지만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자기확인은 당당하다. 이 시인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분별 자체를 해체하는 길 말고 여성의 고유성을 더욱 보듬는 길을 택했다. 이를테면 “그냥 두세요 어머니, 아름다워요”(‘어라연’)라고 말하는 긍정의 길이다.

제 안의 여성(어미)됨에 지극한 이라면 고통 없이는 볼 수 없는 사태들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 앞에/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피어라, 석유!’)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검은 피’에 굶주린 이들 앞에서 어머니-대지는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했다. 화자-석유는 제 자신이 차라리 ‘무용한 꽃’이거나 ‘무력한 꽃’이기를 바란다. 안쓰러운 반전시위다. 둘 다 꽃을 노래하고 있지만, ‘얼레지’의 관능과 ‘석유-꽃’의 절규 사이의 거리는 멀다. 애틋한 긍정에서 애절한 부정까지의 이 거리가 바로 김선우 시의 넓이다. 이 화력(花力)의 시학을 세간에서는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이라고도 한다. 어떻게 그 꽃들의 산파가 될 것인가.

거름을 줘야 한다. 시인은 어렸을 적 파밭 밭둑에 똥 한 무더기 누고는 밭고랑에 던져놓고 오기도 하였다(‘양변기 위에서’).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채로 오줌을 누기도 하였다. (뒤의 시를 아껴 읽은 소설가 천운영은 언젠가 이 시인을 만나면 꼭 한번 함께 오줌을 누리라 다짐한다. 마침내 시인을 만난 소설가, 통음난무 끝에 얼추 목표달성 했다는 후문.) 건강하고 생생하다. 꽃의 시들이 한바탕 피고 나면 똥오줌의 시들이 능청스럽게 거름을 뿌린다. 그 위에서 다시 꽃은 피리라. 이것이 김선우 시의 선순환(善循環)이다.



세상의 꽃은 세상의 칼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백전백패의 아름다움만이 서정의 본진(本陣)이고 문명의 배수진이다. 혹여나 그녀 시의 아름다움을 많이 배운 여자의 우아한 성정 탓이라 할 텐가. 모 일간지에 띄엄띄엄 실린 그녀의 세설(世說)들을 읽으면 모진 말 쉽게 못할 것이다. 세상의 낮은 곳으로 퍼져 흐르는 연대(連帶)의 향기가 거기에 있다. 내처 기다려 보라. 곧 나올 그녀의 세번째 시집은 아마도 자신이 꽃임을 잊어버린 이 시대의 슬픈 여성들에게 바쳐질 것이다. 피어라, 꽃! (신형철|문학평론가)

07. 03. 03.

P.S. 시인은 지난 2004년, 그러니까 '당신이 없는 사이'에 '피어라, 석유!' 등의 시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기사에도 인용되고 있는 시의 전문은 이렇다. 그 아래는 두번째 시집의 표제시 '도화 아래 잠들다'. 

피어라, 석유!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
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앞에
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온몸으로 꽃이어서 꽃의 운하여서
힘이 아닌 아름다움을 탐할 수 있었으면
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
차라리 나를 향해 저주의 말을 뱉으세요
포화 속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의 발 앞에
검은 유골단지를 내려놓을게요
목을 쳐주세요 흩뿌리는 꽃잎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의 상한 발을 덮을 수 있도록
꽃잎이 마르기 전 온몸의 기름을 짜
어머니, 낭자한 당신의 치욕을 씻길게요

도화 아래 잠들다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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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7-03-04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깐 야구 선수 김선우를 생각했었습니다.^^ 요즘은 작가들도 인물이 좀 되야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는 건가요? ㅎㅎ

jouissance 2007-03-04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측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저는 이 시인의 책이나 칼럼에 함께 실린 사진을 보면 왠지 불편하더라구요. 만일 제가 바르트라면 '모델처럼 찍힌 시인의 사진'이라는 기호를 가지고 아주 재미있는 설을 풀어 볼 수도 있을텐데 말입니다. 그냥 그런저런 시인이라면 모르겠는데 '에코 페미니즘과 진보'를 얘기하는 시인이라, 그 사진이 무심하게 보이지만은 않더라구요. 너무 강팍하고 삐뚤린 시선으로 본 건가요? 한 가지 분명한 건 그의 시와 산문이 좋다는 겁니다...ㅎㅎ

로쟈 2007-03-0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니다님/ 아무래도 매체환경이 유인하는 면이 있겠죠. 게다가 여성성을 강조하는 시인이기도 하고...
jouissance님/ 한마디로 색을 쓸 줄 아는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데 개인적으로 특별히 와닿는 시인은 아닙니다...

jouissance 2007-03-04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성을 노래하는 시인은 '색'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페미니스트들에게 '색'을 얘기하면 당연히 으르렁 대겠지요. 그렇다면 여성성과 페미니즘 동시에 강조하는 사람은 '색'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슬며시 궁금해집니다^^ 그나저나 신형철 선생이 조금 오바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벌써 '색'에 포섭된 걸까요..ㅎㅎ

로쟈 2007-03-0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시집에 대한 김승희 시인이 추천사를 다소 길지만 인용해봅니다. "김선우의 두번째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는 여성적 글쓰기의 긍정적 차이와 해체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전범이다. 그녀의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맛있는 모국어와 무의식이 질주하는 치렁치렁한 환유의 시 문법은 남성 시인의 직선적 상상력과 발성과는 차이가 있으며, 여성적 글쓰기의 긍정적 차이와 흘러넘치는 환상(環狀)선의 욕망을 보여주는 기표들의 춤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육체와 대자연의 쾌락, 성욕 등이 무한한 욕망으로 겹쳐지면서, 이 대자연-상상계적 여성 육체는 그리하여 아버지-근대-로고스중심주의를 넘어서서 탈근대라는 새로운 담론의 공간으로 태어나게 된다. '민둥산'이나 '69-삼신할미가 노는 방'이 보여주는 우주적 에로티시즘, '완경(完經)'이나 '물로 빚어진 사람'이 보여주는 엄마-딸의 생리적 연대와 사랑, 여성의 '여성다운' 육체와 생리를 대자연의 성욕에 천연스럽게 연결시키는 열락(jouissance)의 상상력. 이러한 특징은 김선우적 여성 텍스트가 모유와 음문(陰門), 유방과 아주 능동적인 클리토리스로서의 풍요로운 글쓰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jouissance의 상상력에 대해서는 jouissance님이 가장 잘 아실 거 같습니다.^^

jouissance 2007-03-0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러 인용해주신 로쟈님께는 죄송하지만, 일순 짜증나게 만드는 추천사입니다. 평론도 아니고 추천사인데, 이런 고답적인 어투 조금 거북스럽네요. 꼭 이렇게 교수티를 내고 싶은 걸까요. 아무래도 김선생이 교수들의 나쁜 습성을 너무 여과없이 받아들인 것 같아요. 사실, 최근 몇년 사이에 읽은 김승희 선생 대부분의 글에서 이런 불쾌감을 경헙했답니다. 하루빨리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기를 바랄뿐입니다...ㅠㅠ

로쟈 2007-03-0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교수'로서의 정체성은 다른 것이니까요. '대부분의 글'을 읽으셨다니 놀랍습니다.^^;

jouissance 2007-03-04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교수가 발표한 '대부분의 글'을 읽은 게 아니라, 제가 읽은 김교수의 글에 한에서 '대부분'이 그랬다는 말입니다. 근데 로쟈님, '시인 김승희'가 역량에 비해 평단에서 너무 홀대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외도를 많이 해서 그런가^^

로쟈 2007-03-0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이 양반은 크리스테바의 기호분석론 같은 걸 시텍스트 분석에 적극 도입하려고 해서 좀 '현학적'인 게 나오지요. 그리고 '시인 김승희'는 소월문학상을 이미 수상했고 아마도 '서정주 문학상' 정도만 남은 듯한데, '홀대'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소설가로서도 좋은 평을 받았었고. 그보다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시인, 작가들이 더 많지 않을까요?..

jouissance 2007-03-05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동년배의 여성 시인들 중에서 '김승희'를 특별히 좋아합니다(그냥 취향이 맞아서요^^) 애독자로서 비슷한 연배의 최승자, 김혜순, 고정희에 비해 비평가들로부터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문학상 수상 경력(소월, 고정희 문학상)과 평단의 주목은 별개일 수 있습니다. 발표된 시인론을 예로들면 되겠네요. 비교해보면 아시겠지만 저 세 시인들보다 상대적으로 편수가 적답니다. 가벼운 연구 책자 정도는 나올 법도 한데 아직 없구요(예컨대 '작가세계', '깊이읽기', '문학앨범'...뭐 이런 시리즈 말입니다) 그래요, 그보다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시인,작가들이 훨씬 많지요. 아마 이런 저의 불만은 애독자의 편향된 시각,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면 거의 정확할 겁니다...^^ -
 

출판계에서 조금 의외의 일이 벌어져 유감스럽다. 지난달에 출간된 책 한권이 외국서적을(그것도 번역된 적 있는 책을) 그대로 도용했다는 것. 따지고 보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찌하여 '원로' 과학자들이 구태여 그런 불미스런 일에 관여했는지 의문이다. 아무래도 보편화된 '불감증' 탓이 아닐까 싶다.

경향신문(07. 03. 03) 진실 배반한 과학원로들…외국책 베껴 파문

‘황우석 논문조작’ 사태를 계기로 연구자의 표절 등 부정행위를 방지하자는 취지로 출간된 책이 외국책을 그대로 베낀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2일 출판계에 따르면 올해 1월 출간된 ‘탐욕의 과학자들’(일진사 펴냄)은 전체 25%에 해당하는 84쪽을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Betrayers of the Truth)’에서 무단도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책은 갈릴레오·뉴턴·다윈 등 고대 과학자에서부터 최근 과학자들까지 표절 등 부정행위 사례를 엮어 출간됐다. 머리말에는 ‘연구 진실성과 투명성을 촉진하는 데 기여하고자 출판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이 책은 1982년 뉴욕 타임스 과학담당 기자인 윌리엄 브로드 등이 저술한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의 일부를 그대로 도용했다.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은 국내에서 한차례 번역소개됐지만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가 지난달말 미래M&B에서 재출간됐다.

Betrayers of the truth

‘프롤레마이우스의 관측 오류’를 담은 부분의 경우 ‘탐욕의 과학자들’과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이 내용이나 표현, 글의 진행이 거의 유사하다. 갈릴레오, 뉴턴, 돌턴, 다윈, 멘델 등의 부정행위를 설명하는 총 19쪽에 달하는 내용은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을 그대로 베낀 수준이다. 로버트 훅의 부정행위 사례를 담은 부분 역시 29~30쪽에 걸쳐 그대로 베꼈다. 심지어 민영기 교수가 필자로 돼 있는 ‘펄서 발견에 얽힌 사제 간의 공적 논란’은 15쪽에 걸쳐 주어·서술어·수식어의 흐름이 모두 유사하다.

당사자도 ‘무단도용’에 대해서 시인했다. 민영기 교수는 “다른 공동저자가 원서를 주면서 저작권이 이미 소멸돼 편저로 내자고 했다”며 “책이 출간된 이후 표지에 저자로 돼 있어서 출판사측에 잘못됐다고 항의했다”고 해명했다. 박택규 교수는 “편저라 하더라도 출처 표시를 하지 않은 점은 잘못”이라며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을 판권 없이 편집출판하는 관행에 대해서 잘못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출판사인 일진사의 대응도 부적절했다는 지적이다. 일진사는 출간된 이후 ‘편저’라는 사실을 필자들로부터 들었으나 곧장 책을 회수하지 않았다. ‘편저’라고만 쓰인 띠지를 만들어 판매를 강행했다.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을 출판한 미래M&B측은 “책의 일부를 발췌한 것도 아니고 무더기로 베꼈으며 역사연표까지 모두 표절했다”면서 “출처를 표시하든가 번역자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07. 03. 03. 

P.S. 찾아보니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은 <배신의 과학자들>(겸지사, 2002)이라고 번역된 적이 있다. 저자들이 뒤늦게 '편저'라고 밝혔다지만 그 경우에도 정식으로 발췌에 대한 저작권 위임을 받지 않았다면 위법 아닌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을 판권 없이 편집출판하는 관행에 대해서 잘못을 느끼고 있다”고 한 발언은 특히나 문제적이다. 그러한 표절/도용이 과학계의 흔한 '관행'이라는 증언도 되기 때문이다(어디 과학계뿐이겠는가). 여러모로 뒷맛이 씁쓸하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의 기사들 참조).   

표절이나 도용에 관한 문제는 아니지만 며칠 전에 읽은 한 서평도 뒷맛이 씁쓸한 건 마찬가지였다. 마샬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현대미학사, 1994)과 프랭크 렌트리키아의 <신비평 이후의 비평이론>(문예출판사, 1994)을 다룬 송승철 교수의 서평 '모더니즘 미학과 근대성의 역학'(<창작과 비평>, 1996년 봄호)이 문제의 서평인데, 나도 렌트리키아의 책은 출간 직후에 지방에서 사서 읽어보고(물론 다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나는 이후에 원서를 구했다) 어처구니 없는 번역을 개탄하는 편지를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써보낸 기억이 있다. 서평은 말미에서 두 번역서의 실태를 꼬집고 있는데, 특히나 문제가 되는 건 원로 영문학자가 공역자로 참여한 <신비평 이후>. 원서는 워낙에 평판이 좋은 책이지만 한국어로는 읽을 수 없게 돼 있다. 

영문학계에서 그냥 쉬쉬하고 넘어간 건 줄 알았는데, 내가 과문했다. 서평은 직설적으로 오역의 실태에 대해서 질타하고 있다. "<신비평 이후의 비평이론>은 지금까지 내가 검토해본 숱한 번역이론서 가운데 최악의 것이며, 정말 본인들 자신의 번역이라면 비평이론의 수준을 따지기 앞서 역자들의 영어교사로서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게 일단 총론이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가관이 된다.

"도대체 번역을 한 후 제대로 교정을 보았는지 의심가는 대목이 한 페이지에 평균 대여섯 군데씩 있다. 예를 들면 책의 첫 페이지에 있는 에피그라프 두 개의 번역(9면)에서부터 오류가 발견되거니와, '감사의 말' 앞부분에 있어야 할 것이 '들어가는 말' 다음으로 옮겨져 있다. 게다가 사전만 제대로 들쳐도 피할 수 있는 오역, 즉 문장의 'whether... not' 'not just' 따위를 거꾸로 해석한 부분(152면)도 부지기수여서 구체적으로 지적하기가 오히려 민망하다."

민망한 내용을 조금 옮겨오자면, "데리다를 논하면서 presence와 being을 똑같이 '존재'로 옮겼다든지 generic이 genre의 형용사임을 몰라 '일반적'으로 옮기거나 바흐찐적 술어인 sociolect(집단방언)를 '사회학강의'로 번역한 것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discourse를 줄곧 '논술'로, discoursive를 '산만한'으로, 독일 관념론을 지칭하는 idealistic을 '이상주의적'으로, 더구나 dialect를 '변증법', pragmatist를 '실증주의자'로, fault-line을 '잘못된 선'으로, 심지어 latest를 '마지막'으로 번역한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평자로서는 이 번역이 역자들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제자들의 번역을 적당히 추려서 내놓은 것으로 믿고 싶은데, 그렇더라도 역자들의 책임이 면피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역자의 한 사람이 최근 관민합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번역원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실을 생각하면..."

이 번역서와 원서는 다행히 박스보관도서가 아닌데 언젠가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서가에 악착같이 모셔둔 탓이다('discoursive practice'를 '논술 연습'이라고 번역한 사례도 이 책에 나온다). 다행히 애써 그럴 필요는 없게 되었고, 번역자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개정판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겠다(기대할 걸 기대해야 하나?). 개인적으론 서평자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애꿎은 영문과 대학원생들)의 (한심한) 번역이라고 믿고 싶지만 원로 영문학자께서는 이런 '옮긴이의 말'을 남기셨다.

"이 번역 작업은 학교에서의 강의와 다른 글쓰기 등으로 간간이 오랜 시간 동안 중단되기는 했지만, 약 3년에 걸친 노역(勞役)에 가까운 나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동안 많은 좌절감과 함께 오역에 대한 두려움을 적지 않게 느꼈으나, 우리는 한권의 뜻 깊은 책을 내겠다는 보다 큰 희망과 목적을 위해서 작은 고통이나 두려움은 잊어버리기로 했다."(489쪽)

그리하여 우리가 갖게 된 것이 이 '뜻 깊은' 오역서이다. 무슨 '뜻'인가? 한국 학계에 믿을 만한 원로들은 많지 않다는 것. 그리고 오역과 표절에 관한 이 오랜 '관행'은 쉽게 근절되지 않을 거라는 것.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부도덕'이 정치경제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의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근간일지도 모른다는 매트릭스적 깨달음. 이게 과연 우리의 '현실'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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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3-03 22:57   좋아요 0 | URL
혹은 "(내 번역이)오역과 표절이 위험수위에 있다는 걸 알아. 그러나 번역서가 없는것 보다는 나은거 아냐?"와 같은 과소진술적(understatement) 깨달음일지도..-_-

릴케 현상 2007-03-04 00:28   좋아요 0 | URL
2006년 봄호의 송승철씨 글은 <<크리티카>>1호 소개글이군요

로쟈 2007-03-04 00:36   좋아요 0 | URL
yoonta님/ 그건 제 깨달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산책님/ 오타네요.^^; 1996년 봄호입니다.
 

지난주에 '새로운 비평용어사전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하고 나서 사라 밀즈의 <담론>(인간사랑, 2001)을 원저(1997)와 함께 도서관에서 대출해 절반 정도를 읽었다. '담론'은 물론 'discourse'의 역어인데 푸코가 처음 소개될 즈음만 해도 '언술' '언설' '술화' 등의 경쟁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대략 '담론'으로(언어학에서는 '담화'로) 통일되어 가는 듯하다(알라딘에서 '담론'을 검색하면 현재 286건의 상품이 뜰 정도로 상용화돼 있다).

 

 

 

 

그러한 용어의 정착에 기여한 책으론 밀즈의 책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있는 다이안 맥도넬의 <담론이란 무엇인가>(한울, 1992/2002)와 푸코의 <담론의 질서>(새길, 1993; 서강대출판부, 1998)를 꼽을 수 있겠다. 토도로프의 <담론의 장르>(예림기획, 2004)도 번역돼 있고, 국내서 가운데서는 학술서로 분류될 이정우의 푸코 연구서 <담론의 공간>(민음사, 1994; 산해, 2000)이나 고명섭 기자의 서평집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은 '담론'이란 용어를 표나게 내세운 경우이다(한국학 관련서들을 제외할 경우 그렇다).

사라 밀즈의 책은 그러한 단상을 잠시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그다지 재미있거나 유익한 책은 아니었다(이미 '담론'을 다루는 다른 책들을 읽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재미있는 내용은 내가 아직 읽지 않은 나머지 절반(4,5,6장)에 집중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5장의 제목이기도 한 'Colonial and post-colonial discourse theory'를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담론 이론'이라고 생경하게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자의 독특한 취향을 고려하연서 읽어야 할 터인데 그럴 만한 여유가 내겐 없다. 게다가 간간이 눈에 띄는 오역과 고유명사의 독특한 표기 등이 이 책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든다.

가령 러시아의 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은 내내 '미하일 박틴'이라고 옮기고 있다(아예 'Mikhail Bakhtin'을 'Mikhail Baktin'이라고 병기하면서!). 번역서가 나온 2001년이면 바흐친의 책들이 그래도 적잖게 소개된 형편이었는데도 말이다(역자가 국내의 이론 담론에 둔감했다는 것밖에 안된다). 그리고 저자가 푸코의 담론이론을 더 정교하게 이론화한 사례로 들고 있는 '미셸 페쇠(Michel Pecheux)'의 경우도 역자는 '미셸 뻬슈'라고 옮겼다. 물론 취향에 따라 그렇게 옮길 수도 있다. 단, 국내의 문헌들에 소개된 '페쇠'를 역자가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다(적어도 맥도넬의 <담론이란 무엇인가> 정도는 참조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페쇠의 공로는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 언어학자 미셸 페쇠의 작업은 보통 미셸 푸코의 작업과 함께 읽는 것이 유리하다. 담론에 관한 그의 작업(페쇠, 1982)은 그가 단어들의 의미와 단어들이 더 큰 규모의 구조와 갖는 관계의 의미를 단어와 문장을 스스로 의미를 갖는다고 상정하지 않고서 분석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페쇠의 작업은 그가 미셸 푸코 이상으로 담론의 충돌적인 성격, 즉 담론이 항상 다른 입장들과 대화 또는 갈등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는 담론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담론 구조의 본질을 이룬다는 것을 강조한다."(29-30쪽) 

그러니까 페쇠는 단어나 문장 들이 갖는 자체적 의미 따위를 인정하지 않고 막바로 그보다 큰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분석하고자 했으며, 한편으로 그러한 시도의 이론적 원천을 푸코라는 것. 하지만 "담론이란 용어는 푸코의 작업에서는 잘 정비된 이론적 관념 체계에 뿌리를 두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 푸코 자신의 표현을 빌면, "나의 모든 책들은... 도구로서의 기능은 거의 하지 못한다."(34쪽) 이런 식의 연결이 뭔가 어색한 것은 인용문에 오역이 포함돼 있어서이다.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All my books ... are little tool boxes...."이다('나의 모든 책은... 작은 도구상자들이다"). 그런 식으로 옮겨놓으면 번역서의 기능은 거의 하지 못하는 거 아닌가?

참고로, 저자가 참조하고 있는 페쇠(1982)는 <언어, 의미론, 이데올로기>(1975)의 영역판이다(두껍지 않은 책이다). 어쨌든 담론과 이데올로기와의 관계를 더 정교하게 다듬는 일에 페쇠가 기여한 거로 보면 되겠다. 그러한 구도는 푸코와 알튀세르의 작업을 접합시키려는 시도로 평가될 수 있을까?

밀즈의 <담론>를 읽으며 그래도 얻은 소득은 이 '담론'과 '이데올로기'가 일종의 긴장관계에 놓인다는 사실이다('담론과 이데올로기'는 2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모든 문화이론가와 비평이론가들은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에 토대를 둔 작업과 담론에 의거한 작업 중 어느 쪽을 원천으로 삼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극심한 이론적 어려움을 겪었다."(51쪽) 즉, 담론과 이데올로기 중에서 어느 것이 '베이스'이고 또 '베이스캠프'이어야 하는가, 가 논란의 쟁점이라는 것.

"작업의 토대를 이데올로기에 두는 이론가와 담론 이론에 두는 이론가 사이의 극명한 대조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는 정치적 올바름/성차별주의에 대한 논쟁일 것이다.(...) 이데올로기 비평가와 담론이론가 모두 어떤 언술이 성차별적인지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견해에서는 성차별주의는 허의의식의 한 형태로 간주되어 알튀세르의 용어로 표현해서 주체가 질의받는, 즉 스스로를 특정 유형의 성적 주체로 인식하기를 요구받는 방식으로 보여진다.(...) 담론이론의 관점에서는 성차별주의가 주체집단에 부과된 일단의 믿음의 문제인지 여부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된다."(71-2쪽)

большой пикчер

인용문에서 '언술'은 'statement'의 역어이다('언표'라고 자주 옮겨지는). 이데올로기 이론가나 담론이론가 모두 어떤 언술/언표가 성차별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그것을 보는 관점은 서로 다르다는 것. 알튀세르의 용어로 표현해서 '주체가 질의받는' 방식이라고 보는 게 이데올로기 이론가의 입장이라고 했는데, '질의받는'는 알튀세르의 술어 '호명받는(interpellated)'을 잘못 옮긴 것이다(인문이론서의 역자가 소위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에도 무지하다는 것은 좀 놀랍다).

 

 

 

 

요컨대,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성차별주의적 표현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지표로 간주하는 것이다. 반면에 담론이론의 입장은 성차별주의가 단순히 '부과'되는 것이라 투쟁을 통해서 정당화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 성차별주의는 남성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억압적 전략이지만 담론이론에서는 성차별주의는 논쟁의 자리이다. 성차별주의는 여성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권력적인 위치를 얻어내기 위한 다수의 남성의 시도가 정당화되는 전장이다. 성차별주의는 또한 여성들이 항변하고 이러란 저항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자리이다."(73-4쪽).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핵심적인 대목이기에 원문을 옮겨적자면: "Thus, whilst within an ideological view sexism is an oppressive strategy employed by men to bolster their own power, within a discourse theory model, sexism is the site of contestation; it is both the arena where some males are sactioned in their attempts to negotiate a powerful position for themselves in relation to women, but it is also the site where the women can contest or collaborate with those moves."(45쪽)

원문의 'those moves'를 국역본은 '이러한 저항운동'이라고 옮겼는데 내가 보기엔 근거가 없다(일단 'those'는 '이러한'이 아니다). 'those moves'란 복수형이 받을 수 있는 건 앞에 나오는 'their attempts'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그러한 시도에 대해서 여성들은 논쟁하거나 협력할 수 있다는 게 원문의 내용이다. 해서 다시 옮기면,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성차별주의가 남성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이용하는 억압적 전략이라면, 담론이론의 모델에서 성차별주의는 논쟁의 장소이다. 즉, 성차별주의는 남성들이 여성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권력적인 위치를 얻어내려는 시도를 인가받는 격투장이면서, 동시에 여성들이 그러한 시도와 논쟁하거나 반대로 그와 협력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담론 이론의 편에 서고 있는 사라 밀즈의 정리는 사실 푸코의 견해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며 인용문 자체가 <성의 역사1>에서의 인용을 부연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담론-권력론을 푸코 스스로가 요약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해서 유의미한데 이런 내용이다.

"담론이 침묵보다도 더 권력에 봉사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담론이 권력의 수단도 되고 효과도 되는 동시에 권력의 장애물, 권력이 비틀거리며 부딪히는 벽, 저항의 지점, 반대 전략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복합적이고 불안정한 과정을 고려해야 한다. 담론은 권력을 생산하고 전달하며 강화할 뿐만 아니라 권력을 소멸시키고 폭로하며 허약하게 만들고 권력을 좌절시킬 수도 있다."(73쪽)

대략적인 요지는 맞지만 첫문장은 오역이다. "담론이 침묵보다도 더 권력에 봉사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성의 역사> 영역본에서 인용하고 있는 원문은 "Discourse are not once and for all subservient to power or raise up against it, any more than silences are."(44쪽, 영역본 110쪽) 고등학교식 영문법을 되새겨보자면, A whale is not a fish any more than a horse is.(고래가 물고기가 아닌 것은 말이 물고기가 아닌 것과 같다)와 같은 구문이다. 즉, "담론은 침묵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전적으로 복종하지도 전적으로 저항하지도 않는다." 침묵은 복종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항의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담론 또한 그렇다는 얘기이다.

이 책에서 내가 챙긴 건 별로 새로울 게 없는 그 정도의 상식이고 그런 상식의 확인이다. 그러니 재미없을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비하면 당혹스러운 대목들은 보다 자주 눈에 띈다. 그걸 늘어놓는 것도 소모적이므로 한가지만 지적하자면, 99쪽 이하에서 푸코의 <담론의 질서>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어인 일인지 역자는 푸코의 논문/강연 제목인 'The order of discourse'를 모두 '사물의 질서'라고 옮겼다. 

우리말로는 단행본 <담론의 질서>라고 번역돼 나왔지만(영역본 <지식의 고고학>에 부록으로도 붙어 있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취임강연문이기도 한 이 글의 영어본은 로버트 영이 편집한 <텍스트 풀기(Untying the text)>(1981)에 실려 있다. 이 텍스트를 황당하게 역자는 내내 '사물의 질서'라고 옮기고, 112쪽에 가서야 원래대로 '담론의 질서'라고 번역해준다(역자가 둘인가?). 이해 못할 노릇이다.

 

이해를 좀 해보고자 한다면, 역자가 <말과 사물>의 영역본 제목인 <사물의 질서(The Order of Things)>와 <담론의 질서>를 혼동한 게 아닌가 싶다(여담으로 덧붙이자면 영역본 제목인 <사물의 질서> 또한 <말과 사물>로 옮겨줘야 한다. 자신의 무지를 과시하려는 게 아니라면. 절판중인지라 우리가 현재로선 푸코의 <말과 사물>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흥미로운 건 이러한 혼동/착오가 역자만의 것은 아니라는 점. 사라 밀즈의 원서 참고문헌에도 푸코의 <말과 사물> 영역본(1970)이 <담론의 질서: 인문과학의 고고학('The Order of Discourse: An Archaeology of Human Sciences)'이라고 오기돼 있다(164쪽). 루틀리지의 편집/교정자들도 눈이 밝은 편은 아닌 모양이다.  

책은 어제 그냥 반납하려다가 읽은 시간이 아까워서, 그리고 또 'discourse'를 '논술'이라고 내내 번역한 또다른 번역서가 생각나기도 해서 간단히 정리도 해둘 겸 몇 자 적어보았다. '논술 읽기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07. 0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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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7-03-08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가라타니 고진 책을 읽었는데, 한국어 번역자는 미국을 줄곧 '아메리카'로 표기하고 있더라고요. 일본인들의 용법을 굳이 그대로 살려서 번역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함으로써 해당 글의 원문이 일본어로 씌어 있으며 읽을 때 일본이라는 맥락을 항상 고려해야 함을 상기시킬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바'인가요? ^^;) [말과 사물]을 영역본 제목인 [사물의 질서]로 옮기는 문제도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 글이 영미권에서 씌어진 책이라는 사실 하나는 확실히 알려줄 수 있겠지요. 물론 [사물의 질서]가 영역이 아닌 '원문'이라고 받아들여지면 낭패지만..^^;;

로쟈 2007-03-0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일어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미국'과 '아메리카'가 선택적 관계에 놓여 있음에도 '아메리카'라고 했다면 그걸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로선 어색한 번역이라고 생각하고요. <말과 사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사물의 질서>라고 해놓고 병기해주거나 각주를 달아준다면 양해할 수 있지만, <사물의 질서>라고만 옮겨주는 건 좀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국역본입니다. <말과 사물>이라고 번역돼 있으면 그렇게 통일시켜주는 게 불필요한 혼동을 줄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레디앙>과 <프레시안> 등의 온라인 저널에서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대한 서평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 바 있는데, 그에 대해 정리하면서 겸사겸사 몇 가지 생각을 얹어놓으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개강이 코앞인지라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던 차에 마침 그 논쟁을 잘 정리해놓은 기사가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덕분에 수고를 덜게 되니 고마운 일이다(하기야 같은 정리라 하더라도 내가 하면 무급이다, 곧 무가치하다!). 나는 나중에 얹어놓을 생각만 추려놓으면 되겠다.

한겨레(07. 03. 02) '트로츠키주의’냐 ‘자율주의’냐

트로츠키주의냐, 자율주의냐? 스탈린주의적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이후 반자본주의 혁명 대안을 놓고 좌익 진영에서 심심찮게 제기되는 이분법적 질문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인터넷 매체 <레디앙>과 <프레시안>을 통해 트로츠키주의 문제가 몇 차례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21세기 사회주의 전망’ 이분논쟁

올해는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90돌을 맞은 해다. 그 혁명의 주역 가운데 한사람인 레온 트로츠기(본명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스테인·1879~1940)의 혁명노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은 반자본주의 혁명 운동 안에서는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 됐다. 최근의 국내 논쟁을 촉발시킨 계기가 된 책은 정성진 경상대 교수(경제학)가 쓴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아카데미 펴냄)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광범위한 경제학적 주제를 다루는 전반부에 이어, 후반부에서 트로츠키 사상을 재평가하고 거기에 근거해 ‘21세기 사회주의’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논쟁의 불씨를 제공했다.

그 뒤에 나온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은 트로츠키주의 논쟁을 ‘트로츠키주의 대 자율주의’라는 구도로 바꿈으로써 불씨를 키우는 구실을 하고 있다(*나중에 적을 테지만 별로 새로운 내용이 없는 좀 부실한 책이다). 국내 트로츠키주의 단체 ‘다함께’의 운영위원인 최일붕씨가 쓴 이 책은 제1장에서 국내 자율주의 운동의 이론가인 조정환(갈무리 출판사 주간)씨를 실명으로 불러들여 대립지점을 명확히하고 있다(*본격적인 것도 아니고 각주에서 조정환, 황광우 씨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1970년대 후반 아우토노미아(자율) 운동을 벌이면서 형성된 자율주의 운동은 혁명 주체, 혁명 전략, 혁명 전망에서 트로츠키주의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반자본주의 운동이다. 트로츠키주의와 자율주의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1921년 러시아 크론스타트(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에 대한 평가다.

1917년 10월혁명 뒤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내전이 휩쓸고 간 러시아는 산업시설이 거의 다 붕괴된 황폐한 땅으로 변했다. 10월혁명의 주역인 볼셰비키와 그 지도자인 레닌·트로츠키·스탈린은 ‘전시 공산주의’ 상황에서 혁명의 유산을 막으려 가혹한 억압적 조처를 시행했다.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고 볼셰비키의 전위독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러시아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상트페트르부르크 요새지역 크론스타트의 수병 부대원 1만5000명은 1921년 3월 1일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요구하며 임시혁명위원회를 결성했다. 빵과 자유, 민주주의를 달라는 요구를 볼셰비키는 무력으로 진압했다. 당시 트로츠기는 볼셰비키 정부의 군사인민위원(국방장관)이자 적군(붉은군대)의 총사령관이었다. 크론스타트 진압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혁명을 구하기 위한 피할 길 없는 유혈사태였는가, 10월혁명 이상의 파국을 알리는 조종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그 ‘불가피성’을 강조한다. 그런 주장은 트로츠키 자신이 먼저 내놓았다. 뒷날 국외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는 이 반란 진압을 ‘비극적 필요’라고 불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전은 휴머니즘의 학교가 결코 아니다. 이상론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은 언제나 혁명의 ‘극단성’을 비난한다. 그러나 ‘극단성’은 혁명의 본성 자체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혁명 자체는 역사의 ‘극단성’을 뿐이다.”

트로츠키주의자 최일붕씨는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에서 크론스타트 반란을 백군(반혁명군)이 개입한 반혁명적 봉기로 규정한다. “만약 크론스타트 반란이 성공했다면, 그리하여 안 그래도 약화된 볼셰비키 정부가 타도됐다면 그 즉시 혼란과 그걸 틈탄 공산주의자 학살, 국외로 도주한 백군의 귀향, 그리고 마침내는 극우 독재의 수립이 그 자리를 메웠을 것이다.”

혁명 극단성 비난하지만 불가피

정성진 교수도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진압의 불가피성’을 이해하는 쪽에 선다. “트로츠기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크론스타트 봉기의 진압을 트로츠키가 직접 지휘했다면서 트로츠키의 잔인성을 강조하지만, 이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트로츠키는 비극이지만 크론스타트 봉기를 불가피하게 진압해야 한다는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의 결의안에 찬성했을 뿐이다.” 트로츠키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진압 당시 트로츠키가 현장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비판자들은 5·18광주항쟁에서 전두환이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반박한다.

크론스타트 문제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질문은 자율주의 진영에서 나왔다. 자율주의 운동과 흐름을 같이하는 책 <무엇을 할 것인가?>(워너 본펠드·세르지오 티슐러 외 지음, 갈무리 펴냄)는 크론스타트 봉기를 러시아 볼셰비키 독재에 대항해 10월혁명의 이념을 실현하려 한 ‘제3의 혁명’으로 묘사한다. 이 책은 크론스타트 반란자들이 자신들의 신문에 쓴 글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노동계급은 10월 혁명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쟁취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좀더 심한 억압이다. 볼셰비키 정부는, 정치 위원과 관료들의 편안한 삶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 국가의 유명한 상징인 망치와 낫을 총검과 감옥으로 바꾸었다.”

책의 지은이들은 트로츠키가 제시한 ‘영구혁명론’에 빗대어 “역사의 아이러니에 걸맞게, 영구혁명이론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존경받는 대표자인 트로츠키는 1917년 10월 이후로 혁명을 영구화하기 위한 가장 진지한 시도를 저지했다”고 트로츠키를 비판한다.

자율주의 진영에서 크론스타트 봉기가 중요한 것은, 볼셰비키 독재라는 전위 중심의 혁명이 아닌 노동자를 비롯한 피억압자 자신들의 자율적 혁명의 가능성을 봉기 참가자들이 보여주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볼셰비키가 아니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코뮨(공동체)으로써 그리고 자유롭게 선출된 자신들의 평의회(소비에트)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노동자 권력의 원형을 제공했다.”

 

말하자면, 트로츠키주의와 자율주의는 전혀 다른 혁명의 공식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트로츠키주의는 볼셰비키 혁명과 볼셰비키 독재를 역사 발전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인정한다. 트로츠키는 이 혁명 과정의 주역이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의 역사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뒷날의 소련을 혁명의 배반이자 탈취라고 보기 때문이다.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트로츠키는 스탈린 일파와 벌인 권력투쟁에서 밀려나고 볼셰비키당에서 제명당한 데 이어 국외로 추방당한 뒤로 스탈린의 소련을 ‘혁명을 배반한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저주했다. 스탈린이 혁명을 배신했으며 권력을 강탈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이 빼앗아 파멸시킨 혁명을 원점으로 되돌린 뒤 거기에서부터 혁명을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스탈린 폐해 트로츠키 안에 내재

반면에 자율주의는 스탈린주의의 폐해가 트로츠키 안에 벌써 내재해 있다고 본다. 러시아 10월혁명을 프롤레타리아의 자율적 혁명이 아니라 볼셰비키라는 전위들의 독자적 혁명이었다고 보는 데서 이들의 관점은 뚜렷이 드러난다. 10월혁명은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하나라고 볼 수는 있지만, 프롤레타리아가 주체가 된 혁명,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크론스타트 봉기는 볼셰비키의 독재를 뚫고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자기를 지배하겠다고 일어선 ‘혁명의 혁명’이었다.

트로츠키의 사상은 혁명정당이라는 전위를 중심으로 하여 혁명세력을 철저한 규율에 복속시키는 경향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규율주의라고 할 만하다. 자율주의의 자율은 이렇게 외부에서 부과하는 규율, 다시 말해 타율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들은 그 타율이 근본적으로는 당이라는 조직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따라서 자율주의 운동은 어떤 형태의 당도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그렇다면 ‘어떻게 혁명을 이룰 것인가’하는 문제가 불거진다. 전통적인 혁명 도식을 따르면, 혁명세력은 당을 중심으로 하여 뭉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주의자에게 자율주의는 관념적으로 보일 것이고, 자율주의자에게 트로츠키주의는 억압적으로 보일 것이다.(고명섭 기자)

07. 03. 02.

P.S. 자칭 트로츠키주의자인 최일붕씨는' 크론슈타트 봉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크론슈타트 반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반란의 주동 세력은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라고 본다. "크론슈타트 반란은 상이한 계급 이해관계가 충돌한 것이엇다.(...) 1917년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농민의 가장 선진적인 부분과 인근 페트로그라드 공업 노동자들로 이뤄졌었다. 그러나 내전 동안 그들은 앞장서서 전투를 이끌었기 때문에 대부분 죽거나 부상했다. 그래서 1921년 크론슈타트 요새는 새로 징집된 농민 신병들이 메우게 됐다. 크론슈타트 주둔 발트해 함대 수병들의 4분의 3 이상이 이런 농민 신병들이었다."(52쪽) 즉, 반볼셰비키 농민반란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트로츠키의 진압 책임에 대해서. "트로츠키는 당시에 우랄산맥 지방에 출타중이었다. 그곳에서 곧바로 모스크바로 가서 제10차 당대회에 참가했다. 그가 크론슈타트에 가지 않은 이유는 노동조합 논쟁에 연루돼 있었기 때문이다. 진압 책임자는 서부전선 담당 적군 사령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였다. 그러므로 트로츠키가 진압 책임자였다는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은 순준히 지어낸 얘기다."(54쪽)

이러한 주장을 펼치면서 저자가 가장 많이 참조하고 있는 책은 아나키스트이기도 한 폴 아브리치(애브리치)의 <크론슈타트 1921>(프린스턴대출판부, 1970)이다.

  

정다신/러시아 과학아카데미사회학연구소 연구원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70216114040&s_menu=문화

다함께가 '국제사회주의자(IS)'라는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던 시절, 그들은 그나마 학계에서는 유일하게 자신들의 이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정성진에 대해 IS 그룹에 속해 활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입만 살아있는 지식인 분자'로 취급했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는 이토록 정성진을 옹호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바로 관념론의 소산이자 자신들의 지주 격인 국가자본주의론을 자신의 조직원도 아닌 이가 풍부하게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 분자의 입은 어느새 범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그 누구보다도 저들에게 힘을 실어 줄 이데올로그로 전화하여 칭송받게 됐다. 이번에 <프레시안>을 통해 제기된 논쟁에 이들이 이렇게 핏대를 세우게 된 이유도, 그 동안 타 정파나 집단들이 무시해 오던 다른 때와는 달리,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다함께가 신주처럼 모시는 국가자본주의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토니 클리프에 의해 발명된 국가자본주의론은 저들이 항상 자신들이 트로츠키 교조주의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애호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건, 자신들이 비판에 열려 있고 심지어 트로츠키주의 그 자체까지도 비판하는 융통성 있는 활동가들임을 보여 주려고 애용하는 부분은 철저하게 클리프와 그 계승자들인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교과서에 나온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누가 진정 역사를 왜곡하는가?
  
  이정구를 비롯한 다함께 그룹, 아니 저들이 암송하는 영국 SWP의 이데올로그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의 모든 혁명을 국가자본주의 혁명으로 만들기 위해, 유일무이한 노동자 혁명이었다는 러시아 혁명을 계속 왜곡해 왔다. 그러다 보니 그 과정에서 늘 혁명 계급이 노동자 계급인지, 또 '무슨 무슨 주의'에 오염된 이들인지가 강조돼 왔다.
  
  노동자 계급은 거의 예외 없이 볼셰비키를 지지했고 문맹에 가까운 농민을 비롯한 여타 계급은 철저하게 무슨 주의에 물들고 무슨 주의자들인 양 과장, 왜곡하는 나쁜 습관은 이런 왜곡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 시기 러시아 혁명의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은 볼셰비키 지지 세력이고 농민을 비롯한 여타 계급은 철저하게 반 볼셰비키였다는 특유의 이분법 논리로 역사를 과장, 왜곡하는 일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이 이전 수병들과는 다른 농민 출신 신병들이 주가 되었던 것은 맞다. 그런데 이정구는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 운운까지 하며 이 점을 무슨 엄청난 일인 양 하고 있다. 바로 그 비밀문서에 나와 있는 당시 노동자 계급 주도의 수많은 반 볼셰비키 파업, 반란 등에 대해서는 아예 침묵하고 말이다.
  
  페트로그라드에는 푸틸로프 공장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반도의 수십 배는 더 되는 러시아에 도시가 페트로그라드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페트로그라드에는 노동자 계급 중에 상대적으로 볼셰비키 지지 세력이 많았다. 그럼에도 심지어 최대의 볼셰비키 지지 기반인 푸틸로프 공장마저 잔혹한 전시 공산주의 기간 내내 반 볼셰비키 파업이 진행된 사실을 이정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인 이유를 주로 식량 부족에 있는 것으로 축소, 왜곡시키는 버릇도 영국 이데올로그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소비에트 선거에 대한 부분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서 박정희까지 빗댄 부분을 보며 이정구가 진정으로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인지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크론시타트 반란은 일부 반 볼셰비키 세력에 철저하게 조종된 농민 출신 신출내기들의 반란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 당시 전국적으로 줄을 이었던 노동자 계급의 요구였다는 사실은 학계에서는 정설로 인정되었다. 당시 푸틸로프 공장은 친 볼셰비키 노동자들의 주도 하에 간신히 파업이 마무리되었지만, 그 외 수많은 페트로그라드 공장들에서의 파업은 이정구의 주장과는 달리,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에도 이어졌었다.
  
  무엇보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 이 때 내전은 유럽, 러시아 지역에서는 거의 종결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을 아사 직전으로 몰고 가던 곡물 징발은 계속되었고, 볼셰비키가 주장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비롯한 민주주의 약속은 파괴되었다. 크론시타트 반란을 비롯한 일련의 파업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지극히 정당한 노동 대중들의 항의 행동이었다.
  
  지지하기 애매한 집단마저도 '비판적 지지' 운운하는 다함께가 감히 굶어 죽어 가는 생존권과 관련된 항의 행동을 억지로 노동자와 농민으로 나누어 한 쪽을 반동으로 몰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해 당시 여타의 공장에서의 파업과 시위에는 볼셰비키 지지 노동자들의 볼셰비키에 대한 항의 행동이 즐비했다는 것만은 꼭 알아 두기를 바란다.
  
  이정구가 정직한 활동가이고 진정한 유물론자라면 크론시타트 반란은 크론시타트에서만의 일부 농민 출신 수병의 반란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크론시타트 반란은 크론시타트 외의 전 러시아에서까지 벌어졌던 노동자 계급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반란은 정당했다. 진압 이후 볼셰비키가 전적으로 전시 공산주의를 폐지하고 수병들의 주장 중 중요한 부분인 농업과 가내 공업 등의 자유시장경제 요구 등의 맥락에서 시장 요소를 도입한 신경제 정책을 채택한 것은 이정구의 말과는 정반대로 그들의 요구가 옳았음을 증명해 준다. 농민뿐 아니라 노동자들 역시 볼셰비키에 대한 실망과 반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완전한 흑백 논리로 이 당시부터 소련 붕괴 때까지 지속되었던 크론시타트 반란에 대한 거짓을 그대로 인용하여 크론시타트 반란을 왜곡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이기는커녕 스탈린주의의 교조에서 한 발 자국도 못 벗어났음을 보여 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만약 크론시타트 반란의 주역들이 노동자 계급 출신이면 다함께 동지들은 또 무슨 이유를 댔을까? 혁명의 대의를 이해하지 못 한 후진 노동자들, 멘셰비키 영향 하 노동자들 뭐 이런 게 아니었을까?
  
  제발 현실로 돌아오라!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노동자의 군대화, 노동조합의 국가 기관화 등등 명백한 반사회주의적 조치들을 옹호하려거든 똑같은 맥락에서, 아니 맥락은 그만 두더라도 역사적 사실만이라도 알고 주장하기 바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영국 SWP와 같은 외국의 이데올로그가 발행한 교재가 아닌 사료들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며, 자신이 발 딛고 선 곳에 대해 독립적이고 객관적이며 자주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초를 갖는 것이다. 영국에서 내려 온 거 그냥 아무거나 무조건 외지 말고 사료를 근거로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영국 SWP의 이론은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가장 핵심적인 주장들과 거리가 멀다. 트로츠키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였다고 자평하는 클리프의 주장만 절대적으로 따르는 다함께에 그들이 좋아하는 '~주의'를 갖다 붙이자면, 트로츠키주의자라기보다는 클리프주의자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하루라도 빨리 국가자본주의를 비롯한 관념론의 극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들을 클리프주의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라고 치장하는 데에도 조금 더 나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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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2 0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b 2007-03-02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안녕하세요. 한겨레 기사를 스크랩 해두려고 접속했는데, 벌써 올리셨군요. 퍼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