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사이트에서 우연히 보게 된 기사를 옮겨놓는다. '기자 도올, 소설가 김훈 인터뷰'라고 돼 있다. 기자 도올? 문화일보 관둔 지가 언젠데 하며 검색해보니, 이 양반 어느새 중앙일보 기자가 돼 있다. 대우가 파격적인 것인지, 기자직의 '맛'이 끊기 어려운 것인지 여하튼 그는 다시 기자가 되어 전직 기자인 소설가 김훈을 인터뷰했다. 두 양반 다 로쟈의 페이퍼에는 자주 출연해온지라 모른 체하기도 어렵다. 두 사람 모두 1948년생이니 동갑내기이다. 더불어 고대 동창이고. 초면이더라도 할말이 많을 듯한데, 어지간한 구면이다. 이만한 분량으로 끝난 게 다행이지 싶다.

중앙일보(07. 04. 13) 기자 도올, 소설가 김훈 인터뷰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의별 희한한 일도 많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나를 가장 많이 인터뷰한 기자가 있다면 김훈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난 기자가 되었고, 김훈은 당대 가장 주목받는 소설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엊그제 우연히 그가 병자호란을 주제로 한 또 하나의 소설, '남한산성'을 탈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의 말을 건네는 중에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다(*짐작에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 듯하다. 나는 어제 주문을 넣었다). 기자 도올이 소설가 김훈을 인터뷰해 보면 어떨까? 김훈과 나는 대학(고려대)을 같이 다녔다.그는 영문과에서 영시를 외우고 있었고 나는 한시에 탐닉하고 있었다. 1982년 귀국했을 때 우리 사회에서 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도 한국일보 기자 김훈이었다.

"암울했지요. 6.25 전쟁의 찌꺼기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고, 찢어지게 가난했고, 박정희 군사독재 권력이 태동했고, 베트남에 가서 우리 친구들이 죽어갔고, 더 거대한 지옥이 예비되어 있었던 그 시대에 난 밝은 희망만을 품고 워즈워스, 바이런, 셸리, 키츠를 암송하고 있었죠. 그들의 낭만주의 혁명성 속에는 인간의 희망, 번영, 평등,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어요."

-난 대학 시절에 이미 영문과 김치규 선생님과 한시를 주고받곤 했는데, 김 선생님은 대단한 영시의 시인이기도 하셨죠.

"김치규 선생님은 주로 고전을 가르치셨고 전 여석기.이호근 선생님께 더 많이 배웠어요. 운에 맞춰 암송하는 숙제가 많았는데 지금도 19세기 낭만주의 시를 대부분 정확히 암송해요. 전 주입식 교육의 위대성을 그때 깨달았어요. 도대체 주입식 교육이 왜 나쁘죠? 디시플린을 안 가르치는 교육을 과연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때부터 이미 소설 쓰기를 작심했나요?

"'옥스포드영어사전(OED)'을 많이 뒤져야 했기에 주로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있었는데 하루는 우연히 '난중일기'라는 책이 눈에 띄었죠. 이은상 선생이 번역한 책이었는데 영시에 비하면 참 딱딱하고 드라이한 한 군인의 단편적 진중일기에 불과한 책이었어요. 그런데 암울한 현실을 끝까지 암울하게 뚫어 나가더군요. 19세기 낭만주의 시들처럼 찬란한 희망에 의지하지 않고 절망을 끝까지 절망으로 버티어내더군요. 그때 난 낭만주의적 희망의 허구성을 깨달았어요. 동시에 모든 이념의 허구성을 같이 버렸어요. 그랬더니 삶이 더 절망스러워지더군요. 그리곤 대학도 졸업 못했죠. 소설을 쓸 엄두도 안 났고요."



-그런데 한 가닥의 빛도 안 보이는 그 절망감을 어떻게 버티어 냈습니까?

"기자생활로 이럭저럭 뒹굴다가 83년 봄 우연히 '세계의 문학'이라는 잡지에서 온몸이 감전되는 듯한 문장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번역의 중요성을 말하는 매우 단순한 내용의 글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도올 선생님의 글이었어요. 저에게는 그것은 새로운 문체의 발견이었어요. 볼티지가 있는 글이었죠."

-기자로서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좀 쑥스럽군요. 그런데 볼티지라니?

"볼티지가 있어야 감전이 되잖아요. 사유의 깊이와 압축감, 과감한 절제, 그리고 거침없는 포효, 그리고 리듬감 있는 음악성, 그리고 생동하는 그림이 퍼뜩퍼뜩 스쳐 가는 영상미 이런 것들이 혼합되어 전압이 확보되는 것이죠. 왜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소설을 한번 써 보시라고 했잖아요. 전 그때부터 다시 문학에 희망을 걸기 시작했어요. 새로운 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죠."



-김훈과 같은 문호에게 나의 정신세계가 조금이라도 도움되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역시 '칼의 노래'에서 대중이 사랑한 것은 김훈의 절제된 문체일 거예요. 그리고 그 문체가 이순신이라는 한 군인이 치열한 전화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고독한 심리적 내면을 파고들었다는 데 여태까지의 소설이 건드리기 어려웠던 강렬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김훈의 문체가 너무 까다롭고 유미론적이고 너무 체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은데?

"많은 사람이 내 문장을 수사학적 문장이라고 평하는데 전 오히려 형용사, 부사 없는 글을 쓰고 싶어해요. 주어, 동사의 뼈다귀만으로 된 동편제 같은 글, 서편제의 계면이 빠진 그런 진솔하고 우람찬 우조 같은 글 말이죠. 그런데 주어, 동사조차 수식이라고 까대면 난 죽어야죠. 아니면 선(禪)의 침묵으로 가야죠."

-역시 영문학도다운 얘기군요.

"영어를 잘해야 한국말도 잘해요. 국제적 감각이 있어야 한국말이 풍요로워지는 것이죠. 김 선생님도 그렇잖아요. 전 우리말의 조사가 싫어요. 우리말에서 토씨를 빼면 나머지를 메우는 개념어, 지시어, 행위어는 대부분 한문이에요. 영어는 '아이 러브 유'하면 토씨 없이도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말은 '가'니 '를'이니 이런 토씨를 쓰지 않으면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죠. 토씨 없으면 신택스가 성립 안 해요. 법전의 우리말을 보세요. '사기는 타인을 기만하여 재물을 편취한 죄'라고 하면 토씨 빼놓고는 다 한자죠.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놓았는데도 수백 년 동안 그것을 열심히 쓰지 않은 죄를 우리가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죠(*그런 언어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나는 법전을 읽지 않는다). 우리말은 아직 개념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토씨만 있는 언어! 참 걸리적거려요. 전 조사의 매개 없이 단어와 단어가 맞부닥쳐 전압을 발생시키는 그런 언어를 쓰고 싶어요."

-김훈은 그런 언어에 집착한 나머지 사회의식이 박약한 자가 아니냐는 비판도 있는데.

"사회의식? 뭔 말라빠진 사회의식입니까? 그건 노무현이 자유무역협정(FTA)을 한다고 이념적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예요. 진보인 줄 알았더니 보수네? 이따위 얘기들이 모두 개념 규정이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개념 규정을 하는 데서 파생하는 오류일 뿐이죠. 진보니 중도니 보수니 이따위 말들이 다 엉터리고, 노무현에게는 애초부터 진보도 보수도 없었던 겁니다. 의미 없는 비연속에다가 일관성을 운운치 말자는 것이죠."

-도덕적 일관성(moral integrity)이 있으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한 국가의 목표가 도덕일 수는 없습니다. 이익이죠. 이익 추구에 실패하면 부도덕해질 뿐이죠."

-맹자는 국가의 목표가 도덕적이면 오히려 부강해진다고 말했는데?

"그건 까마득한 이상이죠. 그렇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럼 한.미 FTA는 잘한 짓이고 그로 인해 한국민이 잘살게 되리라고 전망하십니까?

"그런 걸 점칠 수 있는 능력은 저에게 없습니다. 단지 우리 사회에는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념, 빈부, 교육, 의료, 재산, 기회,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어요. 정치적 리더십이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없으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어요. 돈 많은 사람들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 주고 그들로부터 세금을 더 뜯어내면 되죠."

-진부한 신자유주의 언어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한다면?

"글쎄요. 전 인간의 바탕은 개별적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회적.공동체적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주장되고 있는 모든 가치가 개별적 존재 속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공허합니다. 전 사실 이런 철학을 도올 선생님의 방대한 저작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동의하시잖아요?"

-내 사상에도 분명 아나키스틱한 측면이 있지요.

"칸트가 말하는 양심이나 자유의지, 이런 것도 우리 존재의 근원이겠지만 저는 폭력과 악이야말로 세계의 근원적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

-약육강식에 우리 존재를 내맡기자는 것입니까?

"프랑스혁명, 동학혁명, 볼셰비키혁명이 모두 약육강식에 반대하고 일어났지만 결국 또다시 약육강식에 얽매이는 사회를 만들 뿐이죠. 악에 저항하고 승복하고 또 저항하고, 그런 모순된 꼬라지가 나 김훈의 꼴입니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은 도올의 명언입니다. "



-그래 소설가가 되어 행복해졌습니까?

"생각보다 책도 좀 팔렸고, 애들이 다 직장 구해 집을 나갔고, 아내는 여행 열심히 다니고, 대부분 집에 홀로 있습니다. 토굴을 지키는 스님같이, '혼자 있음'(Being alone)의 존엄을 즐기고 삽니다. 우리 사회 병리현상의 상당 부분이 혼자 있는 것을 즐기지 못해 생기는 것 같아요. 외롭다는 핑계로 파당을 만들고 추저분한 짓을 하는 것이죠."

-저런, 부럽소. 내가 해야 할 이야기를 하시는구료.

"안 그래요. 선생님은 항상 자신의 성취를 부숴 버리고 다시 시작하시잖아요.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통쾌감을 주는데."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내가 잘 불렀죠. '이제 다시 시작이다. '

"저도 그래요. 항상 초년병, 영원히 신인 작가로 살다 죽겠습니다. "

07. 04.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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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4-13 15:21   좋아요 0 | URL
옮겨 가렵니다 어서 완성하시길.

로쟈 2007-04-14 21:48   좋아요 0 | URL
많이 늦지는 않았지요?^^;

수유 2007-04-14 23:06   좋아요 0 | URL
감사히 옮겨 갑니다. 그리고 <데리다>를 보러갈 마음은 있었습니다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로쟈님 강의를 엿볼 기회였는데요.^^

yoonta 2007-04-14 23:37   좋아요 0 | URL
"정치적 리더십이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없으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어요." 요말 결국은 권위주의에 의존하자는 이야기로 들리네요..-_-

로쟈 2007-04-14 23:44   좋아요 0 | URL
수유님/ 강의 자료들은 조만간 올려놓을 예정이므로 너무 '상심'하진 마시길...
yoonta님/ 물론 '무정부주의'쪽 얘기는 아니지요...

yoonta 2007-04-14 23:47   좋아요 0 | URL
무정부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김훈씨의 경우 좀 권위주의적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 편집장시절 풍문도 그렇고.

로쟈 2007-04-14 23:53   좋아요 0 | URL
권위와 권위주의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식별해야겠지만, 김훈이 '권위주의'에 어필한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데, 그런 규정은 아무래도 일반론이고 그런 일반론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게 또한 김훈식이죠. 그러니까 '말'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권위주의'보다 우선적이라고 생각됩니다...

yoonta 2007-04-14 23:58   좋아요 0 | URL
흠..이전의 님과의 대화를 상기해보니 무슨 말씀이신지 대충 알긴 하겠는데.. 그렇다면 김훈식의 권위주의는 그럼 말이 아니라는 건가요? 권위주의가 작동하는 혹은 작동해야하는 현실이라는 건 말이 아닌 당면한 현실이라는 말씀?

로쟈 2007-04-15 00:06   좋아요 0 | URL
인터뷰에도 그런 표현이 있지만, 제가 이해하는 김훈은 '뼈다귀'주의자입니다. 어떤 액션에 대해서 권위적인가 아닌가를 평하는 것은 '살코기' 얘기거든요(살코기주의자들은 그걸로 밥먹거나 입닦고 살겠지만). 그에 대해서 '권위주의자'다, '마초주의자'다 하는 레테를 다 갖다 붙일 수 있고, 또 일견 다 말이 됩니다. 다만 뼈다귀가 빠져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yoonta 2007-04-15 00:13   좋아요 0 | URL
뼈다귀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 하는것은 결국 김훈이나 여타 사람들의 수다한 말들속에서가 아니라 당면한 현실속에서 어떻게 작동되느냐에 의해서 결국 검증되겠죠. 그런데 제가보기엔 김훈식 레토릭도 무지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뭐가 어쨋다는거야? 현실속에서 그 말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데?" 라고 묻는 다면 혹은 "그래서 그 김훈이 추구하는 정치가 뭐야? 한나라당지지야? 열우당지지야? 민노당지지야 뭐야? 아님 다 필요없구 철인 정치하자는 거야 뭐야? " 이런 식으로 되묻게 될수밖에 없다는 거죠.
"뼈다귀주의자"인지 아닌지는 결국 님말마따나 현실속에서 그의 레토릭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의해서 검증되겠죠.

로쟈 2007-04-15 00:20   좋아요 0 | URL
yoonta님과는 '뼈다귀'에 대한 이해가 다른 거 같습니다. 저는 이번에 나온 책 '남한산성' 같은 게 뼈다귀입니다. 글에서 메시지를 증발시키고 남은 문체가 뼈다귀고요. 그걸 저는 감각적으로 읽기 때문에 '무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제겐 '한나라당' '열우당'... 이 관념적이구요...

yoonta 2007-04-15 00:36   좋아요 0 | URL
로쟈님은 아직도 "문학의 힘"을 믿으시는가보군요..^^ 저는 일정정도 "근대문학은 죽었다"라는 고진의 명제에 동의하는 편이기 때문에 그런 소설이나 문체가 얼마나 현실적 힘으로 작동할수있는가 하는점에 있어서는 무척 회의적입니다. 아무리 뼈다귀를 환상적으로 나열한다고 한들 그것을 사람들이 도무지 읽지 않는게 오늘날의 현실이기 때문에..문체가 아무리 뼈다귀면 뭐합니까.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소설로서만 볼뿐이지요. 올드보이같은 영화한편보다도 사회적 힘이 없는 그런 뼈다귀..

이처럼 실질적인 현실적 힘이 없는 뼈다귀에는 그 뼈다귀가 레떼르로서의 뼈다귀인지 아닌지 검증하는 장치가 결여되기때문에. 결국 아무도 무엇이 진짜 뼈다귀인지 알수없게 되는 그런 현실...

로쟈 2007-04-15 00:41   좋아요 0 | URL
오해가 있으신데, '문학'도 레떼르입니다. '직업'이 아닌 '밥벌이'에 상응하는 것으로서의 '글쓰기' 정도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런 특정한 글쓰기를 제가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올드보이'의 사회적 힘을 믿으신다는 건 좀 의외입니다...

yoonta 2007-04-15 01:08   좋아요 0 | URL
올드보이 이야기는 그냥 믿는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통계적인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김훈의 소설을 읽는 사람보다 박찬욱의 영화를 본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통계에 근거한 이야기지요..^^ 오늘날의 사회는 엄연히 '대중사회'입니다. 그래서 소설도 아무도 읽지 않는(읽어도 거의 이해되지 않는 -_-) 박상륭식 소설보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더 사회적 힘을 갖게 된다는 거죠. 그런 차원의 이야기로 보시면 되구요.

문학도 레떼르다...이 표현 약간 의외의 말씀이신데요. 어쨋든 님은 그냥 "김훈의 문학이라기 보다는 그의 문체가 좋다..사회적 영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라는 정도의 말씀이신지?

로쟈 2007-04-15 01:25   좋아요 0 | URL
아마도 어떤 행위를 '사회적 영향력'이란 말로 푸신 것 같은데, 애초에 '뼈다귀' 얘기를 꺼낼 때 고려했던 것과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체가 좋다'라는 식의 취향을 말씀드린 게 아니라 무엇이 진짜인가에 대한 '신뢰'를 피력한 것이구요. '남한산성'에 대해서 예전에 작가가 언급해놓은 구상을 옮겨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 높이의 고민을 제가 신뢰한다는 것이고, 그 형식은 문학이 아니어도 무방합니다(레떼르란 건 그래서 붙은 거구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어떤 행위라면 저에겐 김훈의 어떤 글쓰기도 그런 행위에 값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들뢰즈의 <안티오이디푸스>가 그런 것처럼...

virtuepeak 2007-04-15 23:25   좋아요 0 | URL
yoonta님 말씀처럼 김훈의 소설이 영화 올드보이보다 실질적인 힘이 없다면 그가 권위주의자라고 해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 로쟈님이 바로 위에 말씀하셨듯이 뼈다귀가 어떤 사회적 힘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뼈다귀는 이문열에게서 찾아야 하겠지요.

yoonta님은 김훈의 칼럼이나 소설을 읽어 보신 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의 글을 읽어 보면 로쟈님이 김훈에 대해 어떤 평을 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실 수 있을실텐데요. 김훈의 글은 문학이기 전에 '김훈의 글'로서 다가오는 게 있습니다. 추상과 관념을 걷어낸 언어로 구성된 글, 그러나 글이라는 것 자체가 추상적인 기호라는 어찌할 수 없는 본질적 조건.. '이 사람 역시 파시스트야!'라는 정치적 견해를 벗고 한 번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저도 작년까지는 아예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가 옛날 글까지 모두 찾아서 읽은 경험이 있거든요.

yoonta 2007-04-16 12:05   좋아요 0 | URL
永革님/ 읽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구요. 한두편의소설과 약간의 수필은 접해봤습니다. 그정도로 읽어봤다라고 말씀드릴수있을진 모르겠지만요.^^ 봤는데 저에게는 그다지 감흥이 오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로쟈님이 관심이 많으신것 같아 로쟈님에게 귀동냥좀 하고 있는 중입니다..^^

님 말씀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쟈님이나 영혁님이 느끼시는 '김훈의 글'이라는 것의 실체를 제가 아직은 느낄수가 없으니 말이죠. 제가 보는 그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너무나 진부한 한 한국적 가부장의 모습만 보일뿐입니다. 길바닥에 채이고 채이는 그런..인간형..단지 그런데 글재주가 비상한 그런 사람..그정도로 밖에는 안보인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닥 새로울것도 없는 그런 생각과 심성을 가진 사람인데..로쟈님같이 공부많이 하신 분이 높이 평가하신다니 신기해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내일자 한겨레에 저명한 번역자 김석희씨의 이야기가 기획기사로 실렸기에 옮겨놓는다. 비록 소설가로서는 문명을 드높이지 못했지만 일급의 번역자로서 그의 능력과 태도는 귀감이 될 만하다. 번역에 너무도 많은 걸 빚지고 또 의지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그런 현실과는 전혀 걸맞지 않게) 한편으론 번역을 홀대하는 문화적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지만) 다시금 공유하도록 한다. 

한겨레(07. 04. 13) “번역이 살아야 학문도 출판도 살지요”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가 1968년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일본 소설을 영어로 옮긴 미국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공로에 주목했다. 그의 번역을 놓고 이러저러한 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번역문이 <설국>에 묘사된 탐미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풍경을 탁월하게 형상화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일본어 원문보다 더 낫다는 평판을 얻은 영어판 <설국>이 아니었더라면, 서구인들이 가와바타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번역은 일종의 문화 간 통로였던 것이다.

한국 출판 시장에서도 번역은 통로 구실을 한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통로라기보다는 병목에 가깝다. 단행본 출판물의 4분의 1이 번역서이고, 자비 출판이 아닌 시장을 상대로 한 출판물만 따로 놓고 보면 번역서의 비율은 이보다 훨씬 더 높다. 번역서의 비중이 이렇게 큰데도, 역량 있는 번역 전문가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다. 문장의 표층뿐만 아니라 심층까지 책임지는 번역가가 드물다보니, 마음 놓고 즐길 번역서를 찾기도 쉽지 않다. 오문으로 점철돼 무슨 뜻인지 알아먹을 수 없는 책들이 겉포장만 그럴 듯하게 꾸며져 독자를 유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번역서는 쏟아져 나오는데 믿을 만한 번역서는 찾기 어려운 것, 번역이 통로가 아니라 병목인 이유다.

김석희(56)씨는 이런 황량한 번역 풍토에서 자기 세계의 꽃을 피운 드문 번역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통상의 번역가가 영어면 영어, 일본어면 일본어, 어느 한 언어를 번역 품목으로 삼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영어·일본어·프랑스어에 두루 능통하다. 지금까지 번역한 책이 150종, 200권 남짓 되는데, 그 가운데 50%가 일본어 책, 30%가 영어 책, 나머지 20% 가량이 프랑스어 책이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국문과에 편입한 뒤 대학원에서 한국 근·현대시를 공부했는데, 근·현대시를 연구하려면 일본어로 된 1차자료를 읽어야 한다. 일본어를 그때 익혔다.” 그의 일본어 번역 실력은 <로마인 이야기>(전 15권)로 정평이 나 있다. 시오노가 직접 한국인 독자에게 이야기하듯 생생하고 자연스런 문장은 <로마인 이야기>가 인기를 얻은 또 하나의 이유다.

그는 속전속결의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웬만한 두께의 책도 잡았다 하면 한 달을 넘기지 않는다. “<로마인 이야기> 마지막 권을 받은 게 지난해 12월 17일이었는데, 번역을 끝내고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게 1월 7일이었다. 200자 원고지로 쳐 1800장을 번역하는 데 딱 20일 걸린 셈이다.” 번역가 정영목씨는 “번역이란 머리나 손으로 하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김석희씨도 그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이다. 그는 20년 가까이 ‘8·8·8’의 생활 수칙을 지키고 있다. 하루를 셋으로 나눠 8시간은 잠을 자고 8시간은 쉬고 8시간은 책상 앞에 앉아 번역 일을 한다. “번역이란 게 자기관리 못하면 무너지는 일이다. 나에게 번역은 직업이다. 8시간 노동제를 어떻게든 지키려 한다.”(*이런 경우를 '프로'라고 할 터이다.) 

출판 편집자들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번역문을 매끄럽게 다듬은 일이다. 비문을 바로잡고 거친 문장을 솔질하고 앞뒤가 앉맞는 문장을 가려내는 것이 편집자들이 늘상 하는 일이다. 이 점에서 보면 김석희씨는 예외적 존재다. 편집자들 사이에서 그는 완성도 높은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으로 이름이 높다. 번역 원고를 그대로 조판해 책으로 만들어도 문제 없을 만큼 그의 문장은 빈틈이 없다. 편집자들이 그의 문장에 손을 대는 건 일종의 금기다. “바른 문장을 쓰고 맞춤법, 외래어 표기법을 지키는 건 글쓰는 사람의 기본 의무다. 그걸 편집자들에게 맡겨선 안 된다.”

서양사학자 박상익 우석대 교수는 좋은 번역을 이루는 성분을 “외국어 실력 30%, 해당 분야 지식 30%, 그리고 한국어 실력 40%”라고 이야기하는데, 김석희씨가 그런 경우다. 그의 번역문이 잘 읽히는 것은 그가 한국어로 능숙하게 글을 쓰기 때문이다. 전문 번역가로 나서기 전에도 그리고 그 후로도 한 동안 그의 꿈은 소설가였다(*내게도 '소설가 김석희'가 먼저였고, '번역'은 그의 부업으로 알았다. 이젠 거의 '전업 번역가'라 해야겠지만. 초창기 번역으로 기억에 남는 건 데즈몬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정신세계사, 1991). 김석희씨는 모리스의 자서전도 우리말로 옮겼다).

문학청년 시절 시와 소설을 썼고,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돼 등단하기도 했다. 소설 쓰기로 다진 한국어 문장 실력을 번역에서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번역을 하다보면 원서의 저자가 힘주어, 공들여 쓴 단락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땐 문장을 뛰쫓아가는 식으로 번역하지 않고, 전체 문단을 숙지한 뒤 우리 말로 다시 써본다. 그러면 문장이 훨씬 명확하고 유려해진다.”

1급 번역가인 그가 볼 때 한국은 번역을 홀대하는 나라다. “가장 문제가 큰 쪽은 학계다. 전공 분야의 고전을 번역해도 연구업적으로 대접을 안 해준다. 짜깁기 논문 하나 쓰는 게 더 점수가 높다. 그러다 보니 비전공자가 고전을 번역해 망쳐놓는 경우가 적지 않고, 그런 허술한 번역서를 읽느니 차라리 원서를 읽겠다고 낑낑거리는 게 현실이다. 먼저 학계에서 용기를 내야 한다. 전문 분야 번역을 대우해줘야 학문도 살고 출판도 산다.”

그는 일본의 예를 강조했다. “일본은 번역을 통해 근대화를 이룬 나라다. 이미 개화기 때 일본어 번역판이 나온 책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우리말로 나오지 않았다. 번역을 우습게 알다보니, 우리 책을 외국어로 번역할 때도 똑같은 잘못을 범한다. 아무리 질 높은 작품도 고등학생 수준으로 번역해 놓으면, 그쪽 사람들은 ‘겨우 그 수준이야’ 하는 식으로밖에 인식 못한다. 가와바타의 <설국>을 서구에 알린 사람은 결국 사이덴스티커였다.” (고명섭 기자)

07. 04. 12.

P.S.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아니지만 기사를 읽다 보니까 기억에 떠오르는 책은 <북마니아를 위한 에필로그 60>(한길사, 1997)이다. 저자가 60권의 번역서를 낸 걸 기념하여 역자후기만을 모아놓은 책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150종, 200권 남짓을 번역했다고 하니까 지난 10년간 최소 90종의 책을 더 번역한 셈이다. <북마니아를 위한 에필로그 150> 정도의 증보판이 나올 만하다. 아마도 이윤기, 안정효 선생과 자웅을 겨룰 만하지 않나 싶다. '번역의 달인'들이 따로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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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12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일어도 능통한게 틀림없습니다.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책(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도 김석희씨가 번역한 것이더군요. 이런 우연이!

다소 2007-04-12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김석희씨 말씀 절대 공감이에요. 번역을 홀대하는 나라..ㅠㅠ
제대로 된 보수를 주지도 않고, 대우도 해주지 않으니 기껏 공들여 번역해봤자 헛수고며 그게 지속되니 '대충' 번역하게 되고...에휴;
근데 이제는 그런게 너무 만연해있다보니 제대로 된 번역자는 가뭄에 콩나듯 하고, 정말 '발로 번역했냐?'고 소리치고 싶을 만한 책이 산더미에요. 그에 대해 글로 끄적끄적 한소리 하면 '그럼 그렇게 잘난 니가 번역해!'란 초딩같은 댓글이 달리지를 않나.-_- 어처구니 없죠.
저도 그렇지만 언어 전공하고서도 이 길이 힘들다는 걸 아니까 이쪽은 아예 생각도 안 하는 친구들 보면서 참 암담했는데, 모쪼록 제대로 된 번역문화가 자리 잡혔으면 좋겠어요.
(추천 꾸욱!!)

마노아 2007-04-13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깊이 공감하며 읽었어요. 김석희씨 참 대단해요. 그분의 이름이 새겨진 책이라면 깊은 신뢰가 가지요.

2007-04-13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열매 2007-04-13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명속의 불안>(열린책들)은 독일어가 아니라 스트레치의 standard판을 번역한 것입니다. 역자 해설에 밝힌 것인데, 자신의 인터뷰대로 한다면 '비전공자가 고전을 번역'하는 셈이 됩니다. 실제로 그 해설에는 '오랜 망설임끝에 작업에 착수하고 나서도, 과연 제대로 번역하고 있는지, 의미나마 제대로 읽고 있는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고 밝혀 제 돈 내고 산 사람을 불안케 만들었습니다. 열린책들 '프로이트전집'말고도 번역으로 문제만든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니...

2007-04-13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3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매님/ 맞습니다. 영역본을 옮긴 것이죠. 전문용어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저는 전공자들의 번역보다 전문번역가들의 번역이 더 읽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한국어'라서요...
햇빛비둘기님/ 네, 드디어 나왔네요. 특히나 1권이 <알키비아데스>여서 더 반갑습니다.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에서 다루고 있는 책이어서요...
**님/ 제가 풀기엔 너무 난해한 수수께끼입니다.^^;

마늘빵 2007-04-13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자를 제대로 대접해줘야합니다. 요새 시간강사 처우 개선하자는 이야기도 나오던데, 진작에 그랬어야할 것들이 너무 늦었습니다. 학부시절 시간강사 샘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고 아 할 게 못되는구나 학문의 길은. 그런 생각 했더랬는데.

2007-04-13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3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그게 좀 문제적인 대목이죠. 여러 가지가 꼬여 있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이기도 하고...
**님/ 그런데, 질문은 그 여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인가요? 그게 아니라 단순히 어떻게 번역되는지를 물으신 거라면, Itary는 Italy로 봐서 "이탈리아에서 그녀는 종종 단순한 노부인 이상이었다"쯤인데요...

2007-04-13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적오리 2007-04-1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요. 동생이 번역일에 관심있어 하는데 읽히고 싶네요. ^^

2007-04-13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3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적님/ 한편으론 관심을 꺾지나 않을까 걱정되네요.^^;
**님/ 별 말씀을요.^^

자꾸때리다 2007-04-13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번에 얇은 책 한 권 번역해보려고 하는데요... 번역가의 고통을 한 번 느껴봐야겠군요.

2007-04-17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 권의  평론집이 나란히 출간되었다. 강유정의 <오이디푸스의 숲>(문학과지성사, 2007)과 유희석의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창비, 2007)이 그 나란한 책의 이름들이다. 연배상으로는 10년 터울을 갖고 있지만 이번에 나온 책이 첫 평론집이라는 점도 공통적이다. 강유정씨는 데뷔 2년만에, 그리고 유희석씨는 데뷔 10년만에 그간에 발표한(혹은 미발표한) 글들을 모아펴냈다. 비평적 지향과 입지는 다르더라도 한 언론의 표현을 빌면, '젊은 피'로서의 역할을 기대해보게 만든다(유희석씨는 40대의 나이이지만 창비쪽 스타일을 고려하면 '젊은 피'란 표현이 무색하진 않다).

먼저, <오이디푸스의 숲>은 "2005년 데뷔 후 문학과 영화, 문화 전반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평론가 강유정의 첫 비평집이다. 지난 2년간의 활동 중 한국 문학의 흐름과 작가론을 중심으로 한 20여 편의 글을 묶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그녀는 재작년 신춘문예 3관왕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단했고(관련기사는 http://www.korea.ac.kr/webzine/KF4S02T02F00-view.jsp?idx=209783&page=3&search1=&search2=) 이후에 주목받는 만큼이나 활발한 행보를 보여왔다.  

개인적으로 2005년 2월 1년간의 모스크바 체류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한 모임자리에서 처음으로 '강유정'이란 이름이 호명되는 걸 들었었다. 마치 '살아있는 전설'처럼. 외지에 있었던지라 내가 체감할 수 없었던 '경악'을 그이들은 연초에 경험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각인된 '강유정'이란 이름은 개인적으로 '장윤정' '채연' 등 연예인들의 이름과 나란하다. 모두가 '당신이 없는 사이에' 스타가 된 이름들이다(나는 공항에서 딸아이가 '어머나'를 흥얼거리는 걸 들었고, 집에 와서 TV를 틀어보니 '채연'이란 이름의 생소한 가수가 춤추고 있었다). 차이라면, 두 연예인과는 달리 비평가는 잠시의 휴지기도 없이 무소의 뿔처럼 진군하고 있다는 것. 그의 비평 속에서 '문학의 위기'는 그저 풍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네 부로 나누어진 이 비평집에서 저자는 "2000년대 문학, 그 새로움을 향한 깊은 애정과 기대 뿐 아니라 사뭇 예리한 시선으로 동시대 문학의 현실을 꼬집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준다."고 소개된다. 2000년대 한국문학의 근황이 궁금한 독자라면 엉뚱한 곳에서 헤맬 것이 아니라 명석하고 유창한 화법의 가이드와 함께 '오이디푸스의 숲'으로 떠나보시길(참고로, 영화평론가 강유정의 글들은 주로 필름2.0에서 만나볼 수 있다. 가장 최근 리뷰로는 <타인의 삶>에 대한 것이 있다. http://www.film2.co.kr/feature/feature_final.asp?mkey=4385 참조. 한편 생각해보면 비평가란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들이 아닐까?). 

영문학 전공의 평론가 유희석이란 이름을 내게 각인시켜 준 건 데뷔평론(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작)인 '보들레르와 근대'이다. 외국문학에 대한 비평으로도 평론가로 데뷔할 수 있다는 사실이 파격으로 여겨졌고 신선했다. 그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이번 평론집에 실린 글들도 절반은 서구문학과 문학론에 관한 것이다. 특히나 프랑코 모레티(프랑꼬 모레띠)에 관한 글도 두 편 포함돼 있어서(영미문학연구회에서 펴내는 학술지 <안과 밖>에서 이미 읽은 것이기는 히자만) 구내서점에서 바로 책을 들고 계산대로 향하게 만들었다. 나 또한 외국문학 전공자로서 어떤 자기몫을 찾을 수 있을지 유익한 시사가 되어준다.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안팎'이란 부제에서 '팎(밖)'은 비유가 아니라 진짜 '바깥(의 문학)'이다. 나는 한편으로 그것이 '문학의 바깥'을 향하는 것이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 '바깥'은 공시적이면서 또한 통시적이다. 문학을 넘어선 문학, 문학의 종언 이후의 문학, 사회적 주목을 받거나 말거나 이 시대 비평의 몫은 점점 많아지고 무거위지는 듯하다... 

07. 04.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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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2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눈팅 2007-04-13 00:24   좋아요 0 | URL
문학평론집을 좀 읽어왔는데 요즘은 관심이 줄었습니다. 90년대 이후 문학이 변화한 모습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뻔하고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평론집도 작가론 목차만 봐도 식상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중국소설을 읽지 않는 것은 90년대 이전의 한국소설처럼 촌스럽기때문입니다. 일본소설은 드라마나 영화처럼 쿨합니다만 저에게는 오락거리 이상은 아닌것 같습니다. 미국의 60년대 비트문화를 경험해보지 못해서 한국에는 잭 케루악, 윌리엄 버로스같은 작가가 없습니다. 이들 작가들의 작품이 거의 번역되지 않은 점도 하나의 징후이겠지요.

로쟈 2007-04-13 00:39   좋아요 0 | URL
**님/ 저도 몇 번 합석한 적은 있습니다...
모비딕님/ 저도 예전만큼 읽지는 않습니다. 1년에 몇 권 정도 손에 꼽을 정도인데, 마침 눈길이 가는 평론집들이 나온지라 따로 거명한 것이구요. 한국문학에 없는 게 어디 케루악과 버로스 뿐이겠습니까? 다만 '한국어'로 씌어진 '한국적 현실'에 관한 소설들이라는 게 미우나고우나 내칠 수 없는 이유겠지요...

수유 2007-04-13 09:09   좋아요 0 | URL
<타인의 삶>은 오래 상영해서 다행이네요..이제사 보러갑니다. 주변의 강추들이 많네요 :)
저 또한 평론집을 샀던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읽어보고싶습니다.
 

오랜만에 영화리뷰 기사를 옮겨온다. 최근 개봉한 송강호 주연의 영화 <우아한 세계>에 대한 영화평론가 오동진씨의 리뷰이다. 이미 기대 이상의 '물건'이라는 평판이 자자한 이 영화는 <연애의 목적>(2005)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한재림 감독의 두번째 영화이다. 데뷔작으로 사고 친 감독들의 경우 흔히 '두번째 영화 징크스'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데, 한감독의 경우엔 예외인 듯하고 여러 인터뷰 기사들을 보건대 앞으로 더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필름2.0'에서 한 평자는 "한재림에게서 홍상수를 봤다"고 했는데, 왠지 '장르 영화의 홍상수'가 될 거라는 기대도 갖게 한다. 예감은 그렇다. 요즘 영화 <300>이 중년 남성 관객들로 만원사례라고도 한다. 나는 그 '근육질적인 세계'나 소위 '우아한 세계'의 이면을 이 영화가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환상의 횡단' 같은 것 말이다(문득, 동시대 문학이 이런 몫을 해주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여러 리뷰들을 읽어봤지만 아래의 기사를 옮겨오는 건 '짧아서'이다.

문화일보(07. 04. 10) 조폭이나 화이트칼라들이나 약육강식에 휘둘리는 家長들

명백하게, 미국의 인기 TV시리즈 ‘소프라노스’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는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사실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거나 아예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느낌을 준다(*'소프나노스'를 나는 본 적이 없다. 하니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들어갈 때는 ‘소프라노스’였으나 나올 때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됐다. 모방과 창조는 종이 한 장 차이란 얘기는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우아한 세계’는 그 사이의 얇은 막을 건너옴으로써 자칫 그렇고 그런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작품을 근래에 나온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독보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되게 했다.



‘소프라노스’처럼 ‘우아한 세계’ 역시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꿈꾸는 한 조직폭력배 중간 보스의 좌충우돌 삶을 그린다. 중산층 가장과 조폭이라는 직업이 상충되듯이 영화의 이야기는 안과 밖이 사뭇 다르다. 바깥의 이야기는 이렇다. 들개파의 부두목급 중간 보스 강인구(송강호)는 얼마 전 수백억원의 이권이 걸린 건축 사업권을 가로채는 데 성공한다. 이 일로 그는 보스 노 회장(최일화)에게 다시 한번 두터운 신임을 얻지만 조직 내 또 다른 중간 보스이자 노 회장의 친동생인 노 상무(윤제문)로부터 심각한 견제를 받게 된다. 그런 와중에 인구는 오랜 고향친구이자 상대편 조직인 자갈치파의 부두목 현수(오달수)로부터 사업권을 돌려달라는 압력을 받는다.

이 같은 바깥이야기와는 달리 인구의 집안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축으로 달린다. 집밖에서의 생활에는 살벌한 회칼과 각목, 쇠파이프가 난무하지만 일단 집안으로 들어오면 여타의 중년 가장과 다를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인구는 자신의 직업적 콤플렉스 때문에 보통의 가장들보다 더 주눅든 생활을 한다. 아이는 조폭인 아버지가 확 죽어버렸으면 하는 데다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 온 아내 미령(박지영)은 그에게 줄곧 이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몸에 손도 대지 말라고 하고 그러면 그는 투덜투덜 옷장에서 여분의 이불을 꺼내들고 마루로 나가기 일쑤다. 바깥에서도 칼 맞을 일 투성이지만 안에서 아내와 딸아이에게 맞는 마음의 칼이 그를 더 아프게 한다.



조폭영화(갱스터 영화)와 스크루볼 코미디형의 가족드라마를 뒤섞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사실 우리 사회의 중층적 모순을, 한 남자의 우울하고 우스꽝스러운 삶을 통해 보여주려는 일종의 리얼리티 드라마다. 영화는 특히 우리의 사회체제 자체가 가족의 해체를 유도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드러내려 애쓴다. 주인공 인구가 불안정한 자신의 직업을 생각해 스스로 기러기 아빠의 삶을 선택하는 건 그 때문이다. 인구가 몸담고 있는 조폭의 세계는 우리 사회 자체를 은유하며 영화에서 ‘조폭세계=사회’는 그를 자꾸 궁지에 몰아넣는다.

또 다른 중간보스 노 상무가, 새로 따 낸 이권의 일부를 떡고물로 내놓으라는 요구를 하자 인구는 이렇게 얘기한다. “거 알잖아. 회장님 드리고, 캐나다에 학비보내고, (조직) 애들한테 좀 주고, 그러면 나도 남는 게 거의 없다는 거. 알면서 왜 그래?” 조폭의 삶이든, 시장통 날품팔이의 삶이든, 아니면 고급스러운 척 유세를 떠는 화이트칼라들의 삶이든, 알고 보면 그 원칙에는 큰 차이가 없다. 위의 놈한테 떼이고, 아랫놈들한테 떼이고, 자식과 마누라한테 떼이고 나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거의 남는 것이 없는 법이다. 극단의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한국 자본주의에서 가장의 삶은 피곤하다.



영화는 주인공 인구가 조직에서도 살아남고 동시에 집에서도 인정받는 가장이 되는 식의 상투적인 전개와 결론을 거부한다. 송강호의 독특한 난센스 유머감각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영화는 더 진실되게 느껴진다. ‘우아한 세계’는 그저그런 상업영화가 아니다. 도덕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올바른 리얼리즘영화라는 평가가 훨씬 더 어울리는 작품이다.(영화평론가 오동진)

07.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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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4-1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기대 이상이라고 하니, 더 기대 ^^

로쟈 2007-04-10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체의 와중에도 좋은 영화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서 대견하기도 합니다...

hikrad 2007-04-10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밤에 산책을 하는데 제 앞에서 건장한 남자가 갓난 아이를 안고 부인과 다정하게 걷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핸드폰 소리을 듣게 되었는 데 이 남자가 조폭아니면 양아치 였는지 온갖 쌍욕으로 상대방을 협박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이에게 까꿍까꿍하더라구요.

순간 느꼈던 공포스러움이란....


로쟈 2007-04-1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세계'의 속을 들여다보신 셈이네요.^^;

마늘빵 2007-04-11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세계 봤는데, 오 송강호가 영화를 제대로 빛나게 했더군요.

나비80 2007-04-1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곧 보려합니다. ^^

2007-04-11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2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사람들은 그 자신의 성격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들이 행복 혹은 불행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행동을 통해서이다." 저라면 그냥 그렇게 옮길 거 같습니다...

2007-04-12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2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공부는 평생이죠.^^;
 

 

 알렉산드르 돌린(1949- )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В 4 томах. Том 1. Романтики и символисты

420쪽

Впервые в западном японоведении вниманию читателей предлагается полная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охватывающая более чем столетний период с конца XIX по конец XX века. Увлекательные биографические описания сочетаются с поэтологическим анализом разнообразных жанров и форм японского стиха, с летальной классификацией важнейших школ и направлений - от шедевров танка, хайку и киндайси Серебряного века до смелых экспериментов современного неоавангарда гэндайси.
Итоговая работа известного литературоведа, культуролога, писателя, переводчика классической и современн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Александра Долина представляет собой уникальное крупномасштабное, глубоко фундированное историко-литературное исследование.

В первом томе на обширном материале статей, манифестов, эссе и многочисленных поэтических сборников раскрываются особенности уникальной литературной традиции синтайси и киндайси, синтезировавшей лучшие достижения эстетики Востока и Запада в шедеврах стиха "новой формы". Поэзия романтизма и символизма периода Мэйдзи- Тайсе (конец XIX - первая четверть XX веков), положившая начало блестящей эпохе японского Серебряного века, предопределила пути развития нового стиха и дала миру таких талантливейших поэтов, как Симадзаки Тосон, Китахара Хакусю, Мики Рофу, Хоригути Даигаку.

Издание рассчитано на ученых-филологов и историков, студентов и аспирантов, а также па широкие круги читателей, интересующихся японской поэзией.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В 4 томах. Том 2. Революция поэтики

324쪽

Во втором томе рассматриваются важнейшие этапы эволюции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первых десятилетий XX века: развитие школы натурализма, народ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ой школы, зарождение пролетарской поэзии и поэзии революционного анархизма, становление авангардистских течений и школ. Большое внимание уделяется анализу теоретических работ лидеров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определивших сущность "духовной революции" и восточно-западный синтез культур. Тщательно выписаны литературные портреты крупнейших поэтов-гуманистов и модернистов XX века Миядзава Кэндзи, Такамура Котаро, Хагивара Сакутаро, Муроо Сайсэй, Нисиваки Дзюндзабуро.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В 4 томах. Том 3. Грани модернизма

292쪽

В третьем томе рассматривается процесс развития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от космополитических эстетских течений предвоенного периода до гуманистического ренессанса послевоенных лет и далее, вплоть до конца XX в. Наряду с творчеством таких прославленных мастеров, как Канэко Мицухару, Кусано Симпэй, Миеси Тацудзи, Таникава Сюнтаро, автор анализирует широкий спектр школ и направлений современного японского стиха - от сурового реализма "поэзии Хиросимы" до эпатажных экспериментов постмодернистов.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В 4 томах. Том 4. Танка и хайку

428쪽

В четвертом томе на материале, литературного наследия многих десятков мастеров танка и хайку воссоздаются основные этапы развития японского стиха традиционалистского направления с конца XIX века до наших дней. Описанию современных школ и течений в обеих частях исследования предшествуют очерки истории поэзии классических жанров в Средние века, вводящие читателя в мир традиционной эстетики и поэтики. Литературные портреты Есано Акико и Сайто Мокити, Вакаяма Бокусуй и Маэда Югурэ, Кимата Осаму и Тавара Мати, Масаока Сики и Такахама Кеси, Одзаки Хосай и Танэда Сантока, Мидзухара Сюоси и Исида Хаке создают колоритную картину мира танка и хайку Нового времени, до недавних пор почти не знакомого западному читателю, но привлекающего миллионы японских любителей поэзи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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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4-10 10:01   좋아요 0 | URL
Описанию современных школ и течений в обеих частях исследования предшествуют очерки истории поэзии классических жанров в Средние века, вводящие читателя в мир традиционной эстетики и поэтики

이 부분이 참 감동적이네요. ㅋ

로쟈 2007-04-10 23:51   좋아요 0 | URL
러시아어를 아시는군요!^^ 오존에서 온 신간안내 메일에 들어 있어서 알게 된 책인데, 일단 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경삼아 올려놓은 것이고 정리는 시간이 날 때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