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전철에서 읽으면서 옮겨놓는다고 해놓고 깜박한 기사가 있다. 이른바 '석궁사건'의 주인공인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재판이 주초에 있었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대학사회에 던지고 있는 한정숙 교수의 칼럼이다. 재판관련 기사와 함께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3. 09) 교수의 품위, 대학의 품위

이 일이 다시 상기되는 것을 본인들은 쑥스러워할지도 모르겠다. 삼십대 초반의 청년이던 장희창 교수는 1987년 재직하던 부산의 한 사립대학에서 해직당했다. 그는 86년 봄 정국을 소용돌이치게 한 대학교수 시국성명 발표 당시, 재직 대학에서 이 일에 앞장섰다. 교수들은 대통령을 선거인단 간선제로 뽑게 돼 있던 5공 헌법을 고쳐 국민이 직접 선출토록 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이 당연한 일에 동참했던 그는 그 직후부터 대학 당국한테 시달림을 받다가 끝내 재임용 탈락 통보를 받았다. 이유는 그가 대학교수로서 ‘품위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가깝게 여기던 동료에게 회식 자리에서 가벼운 기분으로 한 말과 행동이 ‘품위 없음’의 사례로 찍혔다. 대학 쪽은 교수를 해직시키면서도 그가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것을 근거로 대지 않고 ‘품위 없는 교수’라는 이유를 댐으로써 인간적 모멸을 더했다. 얼마 후 대학에서는 입시부정이 있었고, 장 교수와 함께 시국성명에 동참했으나 대학에 남아 있다가 부정에 항의한 두 교수도 마저 해직당했다.

그 후 제기한 복직소송에서 이들은 계속 패했고 한국사회의 어떤 제도권 기관도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직 뒤 20년 만인 지난해 복직을 할 때까지 학원 강사로, 프리랜서 번역가로 사는 동안, 이들은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킨 이상한 인간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생각해 보자. 독재정권에 저항한 교수들과 그들을 내쫓은 대학, 어느 쪽이 품위 상실의 주역인지.

서울 쪽 한 대학에 재직하다가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김명호 교수가 복직소송 2심에서 패했다. 그는 대법원에서도 판결 번복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2심 담당법관과 옥신각신하다가 상대에게 상해를 입혔고, 이 때문에 형사범이 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지난 월요일에 첫 공판이 있었다. 그가 재직 대학의 수학 입시문제 오류를 지적했다가 미움을 받아 재임용에서 탈락했음은 대한민국이 다 안다. 그런데 대학 쪽은 인간적 갈등에서 빚어진 몇 사례를 극단화시키고서 그를 ‘교수 품위를 떨어뜨린 인물’로 몰아 해직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사실 대학이란 데가 그렇게 품위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은 아니다. 성추행자도 있고 소위 ‘또라이’도 없지 않다. 정작 이런 사람들도 대학이라는 강자의 비위만 거스르지 않으면 무사하다. 조직 이기주의 아래 보호받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이 철칙의 대척점에 선 인물이었고 해직이 그 대가였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하다 종교재판에 회부됐다. 종교재판을 주관한 교황청과 학문적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갈릴레이, 이 둘 가운데 인간의 품위에 치명타를 가한 쪽은 누구일까. 갈릴레이는 극한 상황을 피하고자 자기 학설을 일시적으로 철회했다지만, 김 교수는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법원에서는 종교재판 때 같은 극한 상황이 없으리라 믿었기에 변호사도 없이 혼자 법리를 따져가며 재판에 임했다. 자기가 옳다는 것이 자명했기에 그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리라 믿었다. 그러나 법원은 그를 인간적으로 모욕한 강자의 정의를 수호했을 뿐이다.

만약 법관 재임용제도로 법관들도 함부로 해고된다면, 그리고 그들에게 변호사 개업이라는 출구가 없다면, 법관들은 ‘내 탓이오’라고만 여기고 이를 받아들일까?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 대한수학회는 김 교수 해직을 두고 지금껏 견해를 밝히지 않았다(*이 사건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가장 미스테리한 일이면서 실망스러운 대목이다. 수학자들의 '계산법'이라지만 나의 상식으론 이해되지/납늑되지 않는다). 10년도 넘게 제도권에서 버림받은 채 유랑 세월을 살아 온 그의 큰 울음소리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석궁이 등장했다. 소속 연구자가 학문적 양심을 수호하려다 고통받을 때 학회가 할 일은 무엇일까?(한정숙/서울대 교수·서양사)

경향신문(07. 03. 06) ‘그들만의 재판’ 겨눈 ‘석궁 교수’

“판사님이 법에 따라 판결하시겠다고 약속하거나 맹세할 수 있습니까?” 현직 부장판사에 대한 ‘석궁테러’ 사건 피고인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50)는 당당했다. 판사는 “답변하지 않겠다. 당연한 얘기다”라며 고개를 돌렸지만, 표정은 몹시 곤혹스러워 보였다. 판사와 피고인의 입장이 뒤바뀐 듯한 순간이었다.

5일 오전 10시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김 전 교수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김 전 교수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법정에 들어섰다. 손에는 작은 법전 한 권과 대학노트가 들려 있었다. 이날 김 전 교수는 시종 자신의 행동이 “정당방위이며 국민저항권을 행사한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규정과 원칙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김 전 교수는 재판부와 검찰에 대한 불신을 공판 내내 숨기지 않았다. 본인 확인을 위해 판사가 사는 곳을 묻자 “성동구치소입니다”라고 답해 법정에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함께 사는 가족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다른 수용자 두 명과 함께 살고 있다”고 답했다. 검찰의 피고인 심문 때는 심문 내용을 문서로 요구해 꼼꼼히 읽어가며 심문을 받았다. “‘불만’이라는 표현은 문제가 있다”거나 “석궁을 ‘겨누었다’는 표현은 쓰지 말아달라”는 등 표현 하나하나를 반박하거나 수정했다.

김 전 교수와 재판부는 공판이 끝날 무렵 ‘충돌’했다. 검찰측 증거신청 절차가 진행될 때 김 전 교수가 “나도 증거신청할 권리가 있다. 내 의견도 물어달라”고 이의를 제기, 논쟁의 막이 올랐다. 김 전 교수가 “검찰은 증거가 각각 어떤 공소사실을 입증하는지 설명해야 한다”며 “형사소송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판사와 검사는 김 전 교수를 설득하는 데 5분이 넘도록 진땀을 빼야 했다.

변호인측과 재판부의 신경전도 날카로웠다. 변호사가 김 전 교수를 계속해서 “김교수님”이라 부르자 판사는 “피고인으로 부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기욱 변호사는 “공판에서 피고인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법으로 규정돼 있지 않다”며 공판이 끝날 때까지 김 전 교수를 ‘피고인’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날 공판을 지켜본 임종인 의원은 “법조인들만의 용어와 방식으로 진행되는 재판에 대해 김 전 교수가 신선한 문제제기를 했다”고 말했다.(박영흠기자)

07. 03. 10.

P.S. 내친 김에 예전에 읽었던 도정일 교수의 칼럼까지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1. 19) 타락한 문화가 ‘석궁’을 쏘았다

한때 국제 학계에서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라는 두 개의 축 가운데 어느 쪽으로 더 쏠리는가에 따라 세계 여러 지역의 문화적 차이를 규정해보려는 연구를 꽤 열심히 진행했던 적이 있다.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충돌론’을 들고 나와 문화에 대한 사회과학의 관심을 정치학 쪽으로 납치하게 된 1990년대 초반까지 10년 남짓 사회학, 인류학, 심리학 같은 분야의 상당수 연구자들을 매료했던 것이 바로 그 집단주의 대 개인주의라는 화두다. 당시의 연구들을 보면 북서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개인주의 문화’의 강세지역에 속하는 반면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남부 유럽 일부 국가들이 ‘집단주의 문화’의 강세지역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계열의 연구들은 그 방법론이 너무 단순하고 연구에서 얻어진 발견들도 상식을 크게 넘어서지 못할 정도로 진부한 것일 때가 많다. 집단주의 문화가 개인의 행복보다는 집단의 이익과 명예를 중시하고 개인의 자유보다는 가족 등 친밀집단에 대한 충성을, 수평적 평등관계보다는 수직 위계서열과 상부권위에 대한 숭상을, 개인의 도드라짐보다는 집단의 내부 인화와 화합을 더 중하게 여긴다. 속담을 빌리면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시끄러운 바퀴에 기름“ 칠해주고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반면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집단을 앞세우는 문화에서는 소속 집단에의 무조건적 복종이 강조되고 소속원들은 자기 집단을 위해 기꺼이 싸울 것은 물론 목숨까지 바칠 용의도 갖고 있다. 집단문화에 대한 이런 식의 기술은 이미 낯익은 것이다. 집단주의 문화의 가치서열을 거꾸로 뒤집어 놓으면 소위 ‘개인주의 문화’가 된다는 식의 주장도 별로 새로울 것 없어 뵈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그 1980년대식 문화연구에 귀담아 들을만한 발견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 문화권에서 ‘가치’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반드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동일한 액면가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적 가치들은 인간사회의 문화적 ‘보편’이 아니라 ‘특수’이며 지역적 크기로 따져도 세계의 70%는 오히려 집단주의 문화의 특성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지리적 이동성이 높아지면 질수록 개인주의적 가치들이 우세하게 나타나고 개인주의가 개인이기주의로 변질하는 정도도 높아진다, 이런 문화적 변동은 상당한 위험성을 안고 있다- 당시 연구자들이 내놓은 이런 발견은 지금도 경청할만한 것들이다.

민주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개인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 역시 당시 연구가 내놓았던 발견 사항의 하나다. 미국과 달리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는 지금도 개인의 품위와 그의 사회적 책임을 나란히 강조하는 건강한 개인주의 문화 모델들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당시 연구에서 나온 발견의 일부다. 한때 미국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행복과 이익 말고도 공동체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알았으나 현대 미국의 개인주의에서는 다른 어떤 고려사항보다도 개인 이익의 최대화가 가장 중요하다. 지금의 미국 백인 중산층 사람들은 자신을 개인적 특성, 선호, 욕망의 집합으로 정의하는 반면 아시아 문화에서는 사람들이 사회관계의 망 속에서 자기 위치를 규정한다. “그래서 내게 득 되는 것이 뭐지?”가 현대 개인주의의 지배적 질문 방식이다. 그러나 만사를 개인 이익을 잣대로 해서 따지고 드는 극단적 이기주의 성향이나 탐욕은 인간본성의 항구한 법칙도 보편사항도 아니다- 이런 주장도 지금의 경제학이나 생물학이 들으면 웃을 소리 같지만 그 80년대 연구들이 내놓았던 발견의 일부다.

어떤 문화도 완벽하게 집단주의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80년대 문화연구자들이 설정했던 집단주의/개인주의의 구별 역시 순진한 2분법의 적용이기보다는 학문적 연구를 위한 순수모델, 또는 ‘아이디얼 타이프’의 일종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변화가 어떻게 문화변동을 유도하고 가치체계를 서서히, 때로는 급격하게 변화시키는가라는 문제다. 지난 30년 혹은 40년간 우리 사회에 발생한 변화들, 특히 경제적 변화가 현대 한국인의 가치관, 인생관, 정체성 규정방식, 교육목표 등 문화적 차원에 일으켜 온 지형변화는 실로 심대한 데가 있다. 전체 그림을 놓고 보면 가장 현저한 문화변동의 패턴은 ‘집단주의적 문화로부터 개인주의적 문화로의 대이동’이다.

이 이동 패턴의 어떤 부분은 정치 민주주의나 개인의 품위 향상 등 사회발전이나 인간발전에 긍정적인 것인 반면 어떤 부분은 아주 부정적이다. 이 부정적 변화들 중에서 우리가 백번도 더 주목할 것은 1980년대 연구자들이 집단주의/개인주의로 분류한 문화적 특성들 가운데 가장 나쁜 것들을 용케도 골라서 뭉쳐낸 ‘악성조합’의 측면이다. 집단주의 문화나 개인주의 문화의 좋은 가치들은 다 내버리고 집단주의의 가장 나쁜 것들과 개인주의의 가장 나쁜 것들만 골라 선택 조합하고 결합시키는 것이 악성조합이다. 문화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에는 전통적 집단주의의 가치, 이데올로기, 지향들과 근대 개인주의적 문화 요소들이 아주 어지럽게 혼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혼재양상의 지배적 특성은 두 문화의 악성조합, 곧 문화의 타락상이다.

이 타락을 보여주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거의 매일, 하루에도 수백건씩 발생하고 있다. 최근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전직 대학교수와 판사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석궁사건’이다. 사건의 발단 지점을 들여다보면 대학, 학회, 정부 부서, 사법 당국 등 우리 사회의 위세당당한 집단들이 집단주의 문화의 악성 요소와 개인주의 문화의 악성 요소들을 잘도 결합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집단주의가 악성의 개인주의와 결합하면 집단이기주의 혹은 ‘집단적 개인주의’가 된다. 개인주의가 악성의 집단주의와 결합하면 개인의 이익과 행복을 집단의 뒤에 숨어서, 집단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개인 집단주의’가 나온다. 이런 악성조합의 결과는 문화의 타락이다. 그 타락은 누가, 무엇이, 치유할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타락 앞에서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울어야 할 이유를 갖고 있다.(도정일/ 문학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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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10 13:25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역시 법 쫌 공부해 둬야겠군요.

로쟈 2007-03-10 13:46   좋아요 0 | URL
기인님 공부가 언리미티드입니다.^^

3794 2007-03-10 15:13   좋아요 0 | URL
대한수학회 이사가 당시 성균관대 수학교수였다고 김명호 교수 홈페이지 나와있네요. http://geocities.com/henrythegreatgod/kms2.htm 기사보고 들어가봤는데 정확히 누구 사이트라고 나온곳이 없네요.ㅡ.ㅡ

로쟈 2007-03-10 15:26   좋아요 0 | URL
'한국식 수학'은 따로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합니다. 그들이 또한 이 사회의 '주류'라는 사실도...

마노아 2007-03-10 23:45   좋아요 0 | URL
저도 퍼가요.
 

다소 뜬금없는 제목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한 출판동향 기사의 제목이다. '국내 출판계 슬라보예 지젝에 반하다'. 부제대로 '슬로베니아 출신 세계적인 정신분석이론가' 슬라보예 지젝이 국내에 잇따라 번역/소개되고 있고 있다는(아마 올해도 서너 권이 더 출간될 듯하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기사이지만 '자료'로 보관해놓는다.

세계일보(07. 03. 10) 국내 출판계 슬라보예 지젝에 반하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58·사진). 철학이나 사상사 혹은 정신분석학 등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분명 낯선 이름인 지젝이 한국 지성계를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동유럽 조그마한 나라 출신으로 세기를 넘기며 전 세계 철학·사상사 판도를 뒤흔드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왜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결코 쉽지 않은 그의 저작들이 잇따라 번역되고 출판되고 읽히고 연구되는가. 1995년 ‘삐딱하게 보기’(김소연·유재희 옮김, 시각과언어)와 97년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주은우 옮김, 한나래)가 선보인 이후 한국 출판계에 불어닥친 ‘지젝 현상’의 베일을 벗겨본다.

49년 슬로베니아(옛 유고연방)에서 태어난 지젝은 파리 제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현재 모교인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뉴욕, 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다)를 오가며 활발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서유럽 학자들로부터 ‘동유럽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그의 이론·사상적 토대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헤겔의 관념 철학,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유 전통이다.

 

영화 등 대중문화론은 물론 미학, 정치 이론 등을 자유자재로 결합하면서 성과물을 양산하는 그는 80년대 류블랴나에서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립해 회장으로 취임한 뒤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가로 활동했다(*학회라고는 하지만 처음 회원은 믈라덴 돌라르와 지젝 두 사람이었고, 연장자인 지젝이 회장을 맡았다). 현실 정치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90년엔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사회주의 체제를 경험하고 몰락을 목도한 것도 지젝에겐 소중한 지적 체험이었다.

2003년엔 한국철학회 초청으로 방한해 6회나 강연하며 국내 철학도들을 흥분시켰고, 올해엔 청소년잡지 ‘인디고잉’에 무료 기고문을 보내 화제가 되는 등 한국과도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지젝이 신선하고 매력적인 21세기형 사상가로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소소한 대중문화와 정치 현상들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독특한 방식의 사유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삐딱하기 보기’의 번역자 김소연씨는 “그가 종횡무진 접어드는 길목에는 현실, 욕망, 무의식, 환상, 쾌락, 이데올로기, 포스트모더니티, 형식적 민주주의와 관료적 사회주의 등이 망라돼 있다”며 “지젝을 따라 그 길목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뒤통수를 치는 듯한 ‘발상의 전환’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때론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한 ‘논리의 비약’으로 직행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젝 소개에 앞장선 출판사는 인간사랑(대표 여국동)과 도서출판 b(대표 조기조). 인간사랑은 2001년 ‘향락의 전이’(이만우 옮김)를 필두로 2002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의 대상’(이수련 옮김), ‘환상의 돌림병’(김종주 옮김), 2003년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9·11과 그에 관련된 날짜에 관한 다섯 가지 논문’(김종주 옮김), 2004년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김재영 옮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박정수 옮김)를 펴냈다(*반타작이다. 읽을 만한 번역과 그렇지 못한 번역이).

2004년부터 슬로베니아학파 총서 번역 작업에 뛰어든 b는 그해 ‘이라크―빌려온 항아리’(박대진 외 옮김), 2005 ‘성 관계는 없다’(공저, 이성민·조창호 옮김), ‘까다로운 주체’(이성민 옮김), 2006년 ‘신체 없는 기관’(김지훈 외 옮김), 그리고 최근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이성민 옮김)을 잇달라(*잇따라) 소개했다(*b에서는 아직도 몇 권의 책이 더 나올 예정이다. 그러고 보니 책을 읽는 속도보다 나오는 속도가 더 빠르군!). 

 

유럽 철학·사상서를 주로 소개하는 새물결(대표 홍미옥)과 길(대표 박우정)도 지젝 저서 번역 대열에 가세했다. 새물결은 2001년 지젝이 엮은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김소연 옮김)을 펴낸 데 이어 이달 말 출간을 목표로 ‘전체주의가 어쨌다고?’(한보희 옮김)를 제작 중이다. 지난해 ‘혁명이 다가온다―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를 출간한 길도 올 여름께 ‘꼭두각시와 난쟁이―기독교의 전도된 핵심’(김정아 옮김)을 번역 출간한다.

이 밖에 지젝의 ‘믿음에 대하여’(동문선, 2003),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이운경 옮김, 한문화, 2003), ‘잉여 쾌락의 시대―지젝이 본 후기산업사회’(권택영 옮김, 문예출판사, 2003), ‘진짜 눈물의 공포’(곽현자 외 옮김, 울력, 2004)도 이미 서가를 채우고 있고, 연구서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토미 마이어스 지음, 이성민 옮김, 앨피, 2005)와 ‘슬라보예 지젝’(정현숙 옮김, 경성대출판부, 2006)도 선보였다.

너무도 많은 분야에서 너무도 박학다식한 지식을 동원해 삐딱하게 기존 지식을 마구 파헤치는 지젝은 그만큼 적도 많다. 특히 해체주의자, 푸코주의자, 페미니스트들, 데리다주의자, 하버마스주의자들은 대부분 지젝을 싫어한다. 이유는 물론 그가 스스로 라캉주의자로 선언한 데도 있지만, 지적 호기심이 부지런한 지젝이 이들 학계보다 항상 먼저 움직이기 때문이다.(조정진 기자)

07.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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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09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지젝 책 중 반절 정도는 가지고 있는데, 그 중 반절 정도나 이해했나 모르겠네요. 사실 저도 지젝을 '이해'하는데 큰 노력을 쏟아보지 못해서.. 그렇게 매력적인지 아직은 의문부호입니다. 물론 '지젝'만으로 하는 수업을 한학기 들은 적이 있었기는 했는데... 그것도 벌써 2년 전이네요. ^^;

로쟈 2007-03-10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철학자도 많습니다. 사유는 어떤 자력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각자가 끌리는 쪽으로 가면 되는 것이죠...

jouissance 2007-03-10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만간 "로쟈는 왜 지젝에 매혹되었는가" 라는 페이퍼가 뜰 것이라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

로쟈 2007-03-10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의 경우도 그렇지만, 지젝의 모든 글이 저에겐 경탄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거면 충분한 이유가 아닐까요?^^

sommer 2007-03-10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샌 지젝과 초기(60년대의)의 하버마스와의 근친성-과감한 논리적 도약/비약-이 흥미롭게 보이던데요. 데리다주의자, 하버마스주의자들보다 지젝이 오히려 데리다적이고 하버마스적일 수 있다는 묘한 생각까지 듭니다.

로쟈 2007-03-10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류들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파고든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주의자'들은 좀 게으르니까요...
 

언제나 그렇지만 매주 책들은 쏟아지고 그 중 주목할 만한 책들이 10여 권 정도 언론의 리뷰를 탄다(단평까지 포함하면 20-30권쯤 되겠다). 그 중에서 내가 관심을 갖는 책들은 물론 한 손에 꼽을 정도이다. 여러 가지 여건이 관심을 제약하기 때문이다(그러고도 '책벌레'란 소리를 듣는다!). 금요일자 한겨레의 북리뷰들을 대충 훑어보다가(읽을 시간도 없다!) 이 주의 책으로 혼자서 꼽은 건 앨런 그로스의 <과학의 수사학>(궁리, 2007)이다. 기념비적인 책이 아닐 경우에 내가 책을 선정하는 기준은 '의외성'이다. 즉, '예기치 않은 책'에 아무래도 눈길을 주게 되고 <과학의 수사학>은 그런 책이다. 이때 수사학은 물론 '과학 수사'와는 전혀 무관한 '레토릭'을 말한다. 부제대로 하자면, '과학은 어떻게 말하는가'를 다룬 (아마도 드문) 책이다. 원저는 지난 1990년에 출간됐다고 하니까(하버드대출판부에서 나왔다) 나이 좀 먹은 책이다. 관련리뷰를 먼저 읽어두고 언제쯤 구매할/읽어볼 것인지 가늠해본다.  

한겨레(07. 03. 09) 과학도 철학처럼 ‘설득의 산물’

백과사전은 ‘과학’을 “이제까지 아무도 반증을 하지 못한 확고한 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한 보편성과 객관성이 인정되는 지식의 체계”라고 정의한다. 이런 규정은 “사상이나 감정 따위를 효과적˙미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문장과 언어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학문”인 ‘수사학’으로 분석 가능한 정치적인 것, 사법적인 것, 나아가 철학, 문학비평, 역사 등과는 달리 과학에 절대적 신화나 특권을 부여한다.

<과학의 수사학>(궁리 펴냄)은 과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유래의 고전적 정의와 달리 수사학적 분석 대상이 가능하다는 걸 ‘설득’하고 있다.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 앨런 그로스는 과학적 주장들도 단지 ‘설득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과학이 ‘자연의 원초적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자체가 지식이 아니며, 문제가 선택되고 결과가 해석되는 과정은, 설득을 통해서만 중요성과 의미가 구축된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수사학적이라는 것이다. 수사학적 관점으로는 과학은 ‘발견’이 아니라 ‘발명’이다.

뉴턴은 1672년 기존의 관점을 뒤집는 광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데카르트가 <방법론 서설>의 부록에서 ‘백색광이 기본이며 색은 백색광의 변형으로 이차적인 것’이라고 정의한 것을 ‘백색광은 이차적인 것으로, 가시 스펙트럼의 모든 빛들이 합성된 결과’임을 밝힌 논문이다. 그러나 뉴턴은 전통적 관점·방법들과 대립함으로써 ‘설득’에 실패했다. 결정적 실험의 설득 능력은 실험을 재현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음에도 , 뉴턴의 논문은 결정적 실험에 대한 어떤 그림도, 분명한 실험방법들도 결여돼 있었다. 30여년 지나 1704년 뉴턴은 <광학>을 출간해 2차 시도를 한다. 뉴턴은 “데카르트가 한 일은…훌륭한 발걸음이었다.…만일 내가 더 멀리 내려본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라며 <광학>에 역사적 연속과 논리적 불가피성이라는 인상을 부여했다. 또 세밀한 실험을 거듭해 ‘압도적 현존감’을 창조했다. 그는 <광학>의 말미에 수사학적 질문을 쏟아내 실험에 의해 확실해진 것과 불확실한 채로 남은 것을 구분함으로써 질문 이전에 제시된 결론들의 ‘과학적 지위’를 확고히 했다. 그로스에게 뉴턴의 <광학>은 ‘수사적 개종’을 통해 성취된 ‘수사학의 걸작’이다.

저자는 과학에는 종종 잘 숨겨져 있지만 수사학이 내포돼 있으며, 정치연설과 학술논쟁, 과학논증의 영역에는 서로 닮은 꼴(유비)이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진화생물학에서 새로운 ‘종’의 발견은 자연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지나칠 정도의 구분과 분류에 대한 설득을 통해 ‘창조’됨을 보여주고 있다. 또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왓슨의 회고담 <이중나선>이 담고 있는 설화 서사구조와 왓슨과 크릭의 논문의 문체를 분석하면서 “DNA 구조의 실재는 설득을 위해 사려분별 있게 사용된 말과 수사, 그리고 그림의 결과들”이라는 ‘급진적 주장’을 내놓는다.

그로스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이성의 개종’을 요구한 수사학적 혁명으로 해석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천문학이 이성의 혁명이기 위해서는 정밀관측과 틀림없이 일치하고 정확한 물리학에 부합하는, 수학적으로 깐깐한 체계가 돼야 했지만, 이런 이상적 설명은 그가 죽고나서 1세기 이상이 지난 뒤에야 가능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체계가 증거와 논증이 아니라 ‘선전, 감정, 임시방편의 가설, 선입견에 대한 호소’ 등 비이성적 수단들에 의해 지지됐음을 저자는 당시 텍스트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우리가 과학과 수사학을 각각 다른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의 융합을 들고 있음은 과학저술의 전범인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다윈의 <종의 기원>, 뉴턴의 <프린키피아> <광학>, 왓슨의 <이중나선>, 아인슈타인의 논문들을 수사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저자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이근영 기자)

07. 03. 09.

P.S. 최근 '수사학' 붐이 얼마간 조성되고 있지만, <과학의 수사학>은 그러한 붐에도 한몫 낄만 하겠다. 책은 궁리출판사에서 내는 '궁리하는 과학'의 두번째 책인데, 왓슨의 <이중나선>(궁리, 2006)이 첫번째 책이었고 이번에 같이 나온 듯한 로저 트리그의 <인간 본성과 사회생물학>(궁리, 2007)이 세번째 책이다. 트리그의 책에 대한 리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트리그의 책들은 몇 권 더 소개돼 있다), 내게 더 친숙한 책은 <과학의 수사학>이 아니라 <인간 본성과 사회생물학>이다. 그건 예전에 사회생물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책의 원서를 모셔둔 지가 벌써 오래됐기 때문이다. 'The Shaping of Man'(1982)이 그 원서이고 부제는 '사회생물학의 철학적 측면'이다(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저자는 생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이다). 186쪽의 얇은 책인데, 국역본은 333쪽. 책이 폼나게 나오긴 했으나 이런 식의 분량 '인플레'는 슬슬 염증이 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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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7-03-09 13:02   좋아요 0 | URL
벌써 꽤 되었는데, 제 꿈에 로쟈님이 나타나셔서는 "그런데 '이기적 유전자'는 읽으셨는지..?" 라고 물으시는 거에요. 제가 "아뇨, 아직..."이라고 대답했는데도 그 책에 대한 얘기를 계속 하시더라구요.
책을 사 놓긴 했는데 계속 미뤄두어서, 드디어 읽을 때가 된 것인가 생각했더랍니다. 그치만 여전히 미뤄놓고 있네요. -_-;;

로쟈 2007-03-09 18:14   좋아요 0 | URL
제가 어쩐지 밤낮으로 피곤하다 싶었습니다.^^; 때가 되면 읽으시겠지요. 읽고 안 읽는 것도 어쩌면 다 '확장된 표현형'의 힘입니다...

소경 2007-03-10 17:40   좋아요 0 | URL
<문화 기호학>에서 잠시 다룬 내용이 나오는 군요. 사실 이에 단지 유추로 이해하고 지나가고 있었는데 언젠가 읽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처음으로 접한 기호학책이라 어려움은 있지만 재미가 쏠쏠합니다. 대신 책을 읽자니 시간을 솔찬히 지났지만 ... 페이지수는 몇장 안되는 군요. 과학의 수사학이라~

로쟈 2007-03-10 20:08   좋아요 0 | URL
<과학의 수사학>이 분량은 좀 되는데요.^^
 

올해는 1937년 난징 대학살이 일어난 지 70주기가 되는 해이고 이 사건을 다룬 영화들이 제작될 거란 소식은 작년 11월에도 전한 바 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040276&paperId=1007817). 오늘자 프레시안의 '할리우드 통신'은 그 영화들이 대거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기사에서는 우리에게 '아이리스 장'이라고 소개된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원제는 <난징의 강간>)의 저자가 '아이리스 창'으로 표기되고 있다('Iris Chang'이니까 영어로는 그렇게 읽히겠다). 만지면 덧나는 상처 같은 역사적 상흔이지만 우리와 무관하달 수도 없기에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국내에서도 개봉되는 것인지...  

프레시안(07. 03. 08) 아이리스 창의 <난징대학살> 영화화

"미국 하원이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키더라도 사과하지 않겠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 야당 및 진보세력, 그리고 미국 정가 일각에서도 아베 총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이 일본의 과거사 인식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데는, 올해가 난징 대학살(1937~38) 70주기를 맞는 해란 점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타임지는 최근호(12일자)에서 난징 대학살 70주기를 맞아 미국, 일본, 홍콩, 중국 등에서 관련 극영화, 다큐멘터리들이 대거 제작, 개봉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난징 주민은 무려 26만명. 강간 피해여성만 2만명이 넘는다. 그러나 일본정부와 보수파는 난징대학살의 실상이 왜곡됐거나 과장됐다는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난징대학살 관련 영화들이 속속 선보이는 것을 계기로 세계각지에서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고 타임은 전망했다.

난징대학살 관련 영화 중 가장 먼저 개봉되는 영화는 빌 구텐타그, 댄 스터언 감독의 <난징>. 지난 2003년 9.11테러 관련 다큐멘터리 <쌍둥이 빌딩>으로 아카데미 장편다큐부문상을 수상했던 두 감독의 극영화 데뷔작이다. 우디 해럴슨과 마리엘 헤밍웨이가 1930년대말 난징에 거주하다가 일본군에 의한 현지 중국인 학살을 목격하게 되는 미국인들로 등장한다. 두 감독은 사건 당시의 기록필름, 생존자 및 목격자들의 증언, 극중인물들처럼 난징에 살았던 외국인들의 서신 및 일기 등을 기초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지난 1월 미국 선댄스영화제에 처음 선보여 호평받았으며, 이번달 말 홍콩 국제영화제에도 출품될 예정이다.
  
<난징>제작 뒤에는 아메리칸온라인(AOL) 부회장 테드 레온시스의 재정적, 정신적 뒷받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2004년 카리브해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베스트셀러 <난징대학살(원제 : 난징의 강간)> 저자인 아리리스 창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신문기사를 통해 알게됐다"며 "그때까지 내가 그처럼 끔찍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고 영화 <난징>제작에 뛰어들게 됐던 계기를 털어놓았다.


  
레온시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난징대학살>은 지난 97년 미국에서 출간돼 무려 10주간이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목록에 올랐던 저서. 중국계 미국인인 저자는 난징에서 직접 발굴한 광범위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사건의 실상을 상세하게 재구성해냈다. 이 책은 난징대학살에 대해 알지못했던 미국 독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아이리스 창은 당시 나이 29세로 유명 작가반열에 올랐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7년뒤인 2004년 아이리스 창은 갑작스럽게 자살로 생애를 마쳐 다시한번 독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있다. 하지만 주변인물들은 창이 생존시 일본 보수우파로부터 많은 협박을 받아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그것이 그의 죽음에 한 원인이 됐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미국사회에 난징학살의 진상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창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현재 제작 중에 있다. 캐나다 감독 빌 스파힉의 <잊지 못하는 여자 : 아이리스 창 스토리>가 바로 그것. 그런가하면 창의 책도 곧 영화화된다. 제작자인 제럴드 그린은 <난징대학살>의 영화화 판권을 3800만달러에 구입, 곧 촬영에 들어갈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감독은 <툼레이더>를 만들었던 사이몬 그린.

이 밖에 올리버 스톤 감독, 홍콩 감독 스탠리 통, 중국감독 류추안 등도 난징 관련 영화를 준비중이거나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다. 타임에 따르면, 아이리스 창의 어머니 잉잉창은 "영화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난징의 비극을 알리려는게 아이리스의 소원이었다"며 딸의 책을 기초로 한 작품 등 관련 영화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대해 감격을 나타냈다.
  
그런가하면 일본에서도 난징 영화가 만들어진다. 지난 1월 미시마 사토루 감독은 기자회견을 열고 빌 구텐타그 감독의 <난징>을 "중국의 조작된 자료만을 토대로 한 작품"으로 맹비난하며, 자신의 영화<난징의 진실>이 "사실있는 그대로"를 관객들에게 알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우파인 미시마 감독은 " 30년대 말 난징에서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 학살, 강간이 자행됐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한편, 구텐타그 감독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수많은 법의학적 증거,수많은 사진증거, 수많은 필름 증거, 그리고 수많은 목격자들의 증언이 존재한다. 난징의 참상을 입증하는데 이 이상 더 어떤 증거가 필요한가"라며, 역사의 진실을 거부하는 일본을 날카롭게 비판했다.(신영 기자)

07. 03. 08.

P.S. 난징대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http://www.youtube.com/watch?v=YoW2WYdOsvg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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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존 라베와 난징대학살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17 22:01 
    난징대학살을 다룬 책이 오랜만에 출간됐다. 아이리스 장의 <난징대학살>(이끌리오, 1999), 혹은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미다스북스, 2006) 이후니까 3년만이다. 아이리스 장의 책은 난징대학살 60주년이 되는 해에 출간됐고, 국역본은 70주년을 앞두고 나온 것이었으나 정작 70주년이 되는 해였던 지난 2007년은 너무도 '조용히' 지나갔다. 중국과 일본 모두 이 '불편한' 과거에 대해서는 침묵하기로 합의라도
 
 
해적오리 2007-03-08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징에 갔을 때 난징 대학살 피해자들을 기리는 기념관을 다녀왔어요. 어디를 가나 그런 곳을 방문할 땐 마음이 참 쓰라려요. 영화도 책도 참 관심이 가지만 정작 직접 볼 수 있을 지는 모르겠네요.

로쟈 2007-03-08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책이나 영화 모두 읽고 보는 게 괴롭고, 그렇다고 무심할 수도 없는 그런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yoonta 2007-03-08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군의 난징등에서의 학살이 농민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더군요. 만약 일본군의 학살이 없었다면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긴데 그럴듯한 가설이더군요.

로쟈 2007-03-09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럴 법하네요. 역사적 가정법이라는 게 대개는 호사담에 그치는 것이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보이지만요...

외로운 발바닥 2007-03-09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의 국력이 계속해서 커지고 있는 것을 보면 난징대학살도 어느정도 많이 알려질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로쟈님 말씀처럼 실상을 알기도 괴롭고 무심할 수도 없는 문제같습니다. 살짝 퍼갑니다.
 

담비(http://www.dambee.net/)에서 학술동향기사를 하나 옮겨온다. 담비에는 학술저널들에 실린 논문들을 '리뷰팀'이 정리해주는 기사들이 게재되는데, 어차피 일반 독자들과는 거리가 먼 논문들이지만 '리뷰' 정도는 따라가볼 수 있고, 그게 교양의 한 부분을 이룰 수도 있겠다. 플라톤에 관한 이 정리기사는 '19-20세기 플라톤 연구동향 총정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짤막한 리뷰로서는 너무 큰 타이틀이 아닌가 싶지만 믿거나 말거나 한번 읽어봄 직하다. 이제이북스의 플라톤 전집은 곧 나오기 시작하는 건지 궁금하군...  

담비(07. 03. 03) 플라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풀라톤의 대화편들은 플라톤의 당대와 그의 사후 이래로 각 시대나 사상가들에 의해 매우 다양하고 상이하게 해석되어 왔다. 이런 플라톤 저작연구의 다양성과 상이성은 근본적으로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이러한 플라톤에 대한 메타철학적 물음에 대한 답변이 시도돼 눈길을 끈다. 주인공은 김진 경희대 교수로 '철학탐구' 제19집에 실린 '플라톤,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만나볼 수 있다(*칸트 전공자인 김진 교수와는 동명이인인 모양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1855년 슐라이에르막허(*슐라이어마허)가 플라톤 대화편의 형식과 내용은 '분리될 수 없다'는 관점을 내보였으나, 이러한 해석의 원칙은 당시 헤어만이 이끄는 발전론적 관점 때문에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최근 재음미되고 있다. 그것이 대화드라마적 관점의 연구를 견인해내고 있다. 이것은 대화편 안에 내적으로 구성된 철학적 요소들을 주목함과 동시에 대화편의 문학적, 희곡적 요소들, 등장인물, 무대장치적 묘사, 해설자의 설명, 기타 문학적 장치 등을 고려하여 본다는 뜻이다. 

플라톤은 역사상 유래없이 자신의 전 저작을 대화의 형식으로 저술한 유일무이한 철학자다. 그는 서술의 형식 그 자체를 자신의 철학적 사상에 포함시키려고 했다는 것(*그렇다면 데리다가 벤치마킹하고 있는 철학자는 바로 플라톤?). 김 교수는 플라톤의 대화편이 다른 철학적 대화편의 저술가와 비교해 보았을 때 문학적으로 정교하고 치밀하며 체계적인 구성양식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희곡적 요소들의 적절한 배치로 저자가 대화의 내용으로만 전달하기 힘든 철학적, 역사적, 대화상황적 뒷배경을 정교하게 묘사한다는 것.  

그러려면 무엇보다 논문식 해석을 지양해야 한다. 대부분의 철학적 저작이 저자가 주장하려는 바가 분명하지만, 플라톤의 저작은 이러한 직접적 이해의 방식이 우선적으로는 배제되어 있다는 것. 일단 플라톤이 등장하지 않는 책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쉽게 그의 주장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의 익명성'이란 주제로 연구자들이 풀어야 할 과제로 남겨져 있다고 한다.

그러면 저자 자신이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대화편을 어떻게 읽어나가야 할까. 여기서 두번째 원칙이 발생하는데, 철학적, 문학적 요소를 꼼꼼히 고려하는 것이다. 철학적 요소의 예를 들자면 질문과 대답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플라톤 대화편에서는 '질문'보다는 '답변'에 무게중심이 가 있다고 한다. 때로 질문을 주장으로 착각하여 해석하는 방식을 지양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 그리고 김 교수는 플라톤 대화편의 대화논증술적 서술들이 가만히 보면 규칙성이 감지된다고 한다. 먼저 가장 많이 등장하는 형식은 "예"와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 많다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이런 의미인가 아니면 저런 의미인가"와 같은 선택질문의 형식이 많다.

마지막으로 각 대화편은 완결된 일회적인 통일적 전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각 대화편은 플라톤에 의해 탄생된 허구이며, 등장인물들이 역사적 인물이고, 역사적 모티프를 갖는 것이라고 해도, 결국 플라톤이라는 저자에 의해 재구성되고 창조되어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게 보면, 대화편끼리 서로 부딪히는 현상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국가편에 나오는 참주와 법률편에 나오는 참주는 매우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국가편의 대화가 이뤄지는 곳이 피레아스(pireas, 당시 상업과 민주정치의 요새)로 시라쿠스(Syrakus) 출신의 거주외국인 케팔로스(Kephalos)의 집이다. 여기 등장하는 케팔로스의 두 아들은 참주정치의 희생자들로 이들에게 참주정의 장점을 얘기할 수 없다는 상황이 있다는 것. 반면 법률편의 상황은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플라톤이 마음대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수 있었다는 식이다.

플라톤은 동시대부터 그 난해성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위에서 고찰한 대화드라마적 해석방법은 이러한 난해성을 뚫고 플라톤과 만나기 위해 지난 19~20세기 동안 플라톤 연구자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도달한 대체적인 합의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리뷰팀)

07. 03.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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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3-0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자료 퍼갑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