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영화감독 빔 벤더스 특별전에 개최된다는 소식은 지난주에 영화잡지들을 통해서 접했다. 벤더스 자신이 7년만에 내한할 예정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어차피 영화제를 구경 가볼 만한 처지가 아니어서 무뚝뚝하게 전해듣고 말았는데, 한 관련기사에서 ''파리, 텍사스' 다시 만난다'란 타이틀을 보게 되니까 감정이 없을 수 없다.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았던 그의 초기작들을 대부분 보지 못했지만 <파리, 텍사스>(1984)야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영화이자 '내 인생의 영화'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대학 1학년때 한 변두리극장에서 이 영화를 혼자 보며 나는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10년만 젊었더라도 이런 영화제 같은 건 다 챙겨봤을 터인데 나로선 좋아하는 영화의 스틸사전을 몇 장 감상하는 정도로 입막음을 해둔다.

문화일보(07. 03. 12) '파리, 텍사스’ 다시 만난다

독일 출신의 거장 빔 벤더스 감독의 대표작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행사가 열린다. 영화사 스폰지와 독일문화원이 공동주최하는 ‘빔 벤더스 특별전’. 15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종로의 스폰지하우스(구 시네코아)에서 열리는 이번 특별전에 맞춰 벤더스 감독도 내한할 예정이어서 그의 영화를 사랑해 온 영화팬들에겐 더없이 희소식이 되고 있다.

벤더스 감독은 ‘페널티킥을 맞은 골키퍼의 불안’(1972)으로 데뷔해 칸,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주목 받았다. 칸 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받은 ‘시간의 흐름 속으로’(1976),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파리, 텍사스’(1984) 등은 국내 영화팬들에게 그의 이름을 알린 대표작들이다. 이후 그는 ‘베를린 천사의 시’(1987)로 다시 칸 영화제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그는 특히 주인공이 여정을 떠나는 ‘로드무비’ 형식을 통해 황량한 현대인의 내면과 소외감 등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감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번 특별전에 상영되는 작품은 모두 10편. 벤더스 감독의 대표작들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어 그의 작품 세계를 한번에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우선 그의 ‘로드무비’ 가운데 초기 대표작으로 분류되는 ‘도시의 앨리스’(1973)와 ‘시간의 흐름 속으로’, ‘미국인 친구’(1977)가 상영된다. 한국 팬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작품 ‘파리, 텍사스’, ‘베를린 천사의 시’도 다시 상영되며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에게 바치는 다큐멘터리 영화 ‘도쿄-가’(1985)도 상영작 리스트에 올랐다.

또 쿠바 뮤지션들에 대한 헌시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1999)과 감동적인 음악 다큐멘터리 ‘더 블루스:소울 오브 맨’(2003) 등을 통해선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도 확인할 수 있다. 9·11 테러 이후의 미국을 그린 ‘랜드 오브 플렌티’(2004),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돋보이는 ‘돈 컴 노킹’(2005) 등 최신작들도 다시 관객들을 만난다.



특별전에 맞춰 14일 내한하는 벤더스 감독은 17일까지 국내에 머물며 공식 기자회견, 무대인사, 감독과의 대화시간 등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지난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밀리언 달러 호텔’ 출품차 한국을 찾은 다음 7년 만의 방한이라 더욱 관심을 모은다.

빔 벤더스 특별전은 28일까지 서울 상영을 마치고 부산(국도극장·3월29일~4월11일), 광주(광주극장·4월13~19일), 대구(동성아트홀·4월26~29일), 대전(대전아트시네마·5월3~9일) 등 4개 도시를 돌며 지방 순회상영을 이어간다. 서울 상영에 관한 정보는 스폰지 홈페이지(www.spongehouse.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강연곤기자)

07. 03. 13.

P.S.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벤더스는 로드무비의 대가이며 <파리, 텍사스> 또한 로드무비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멕시코와 미국의 접경 지역 부근, 텍사스주의 어느 황량한 마을에 탈진한듯 보이는 한 남자가 걸어온다. 그의 이름은 트래비스. 의식을 잃은 트래비스의 소지품에서 '월트'란 이름을 발견한 의사는 연락을 취하게 되고, 로스앤젤레스에 살던 월트는 형 트래비스를 4년만에 만나게 된다. 그동안 형의 아들인 헌터를 맡아 기르던 월터와 그의 아내 앤은 헌터가 트래비스를 아버지로 인정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른 정에 얽매여 헌터를 잃게 되진 않을까 우려한다." 그 헌터에게 트래비스는 어릴 적 암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주며 함께 엄마/아내를 찾아나서기로 한다. 아래는 아들 헌터가 어렴풋하게만 기억이 남아있는 엄마의 사진을 건네받고 쑥쓰러워 하는 모습.

"기억을 잃어버린데다 실어증까지 걸려버린 트래비스는 아들과 함께 떠나버린 아내를 찾아나서게 되고, 그녀가 아들의 부양비를 매달 입금해 오고 있는 은행에서 무작정 기다리다 결국 아내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내는 환락가의 여자가 되어 었다. 손님은 여자를 볼 수 있고, 여자는 손님을 볼 수 없는 유리벽이 있는 방에서 손님으로 가장한 트래비스는 아내를 만난다. 아내는 얼굴도 보지 못하는 이 손님의 사연을 기꺼이 들어주겠다고 하고, 트래비스는 자신과 제인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게 영화 포스터에 가장 자주 쓰이는 바로 그 장면이다. 트래비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인은 점차 이 '손님'이 자신의 남편이란 걸 알게 되고 흐느낀다. 이야기를 마친 트래비스는 헌터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고는 다시 정처없는 길을 떠난다. 아래는 은행에서 기다리는 동안 헌터가 다시금 엄마의 사진을 꺼내보는 모습.

저명한 극작가 샘 셰퍼드가 각본을 쓴 이 영화의 음악은 라이 쿠더가 맡았다(벤더스와 쿠더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서도 조우한다). 그 건조하면서도 서정적인 기타 소리가 다시금 듣고 싶군. 물론 제인역을 맡은 나스타샤 킨스키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참고로, 영화의 대본은 '샘 쉐파드'의 <파리, 텍사스>(예니, 1987)로 출간된 적이 있다. <아빠는 출장중> 대본과 함께 내가 고이 모셔두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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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3-13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파리텍사스랑 도쿄-가를 볼까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난 필름으로 그것을 보지 못했다지요. 입막음 하셨네요...

자꾸때리다 2007-03-13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텍사스 저도 봐야겠네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모닝커피 한잔 마시면서(정신도 차릴 겸) 신문들을 훑어보는데, 문학기사 하나가 눈에 띈다. 계간 '세계의 문학' 봄호에 실린 문학평론가 천정환의 '2000년대 한국 소설의 독자'에 대한 리뷰기사인데 이전에 읽었던 리뷰들과 초점이 전혀 달라서이다(참고로, 이번 봄에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평문이다). 

책이 출간되기 이전부터 나온 리뷰들의 초점은 문학독자층이 변화하고 있다는 그닥 새롭지도 않은 얘기였는데(사실 <근대의 책읽기: 독자의 탄생과 한국근대문학>(푸른역사, 2003)의 저자인 천정환씨는 한국 근/현대문학 독자층 연구라는 '블루오션'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한국소설 중간계급 전유물 전락'이라고 타이틀을 뽑게 되면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다시금 다른 언론의 리뷰들을 찾아보니까 '25-35세 여성이 문학시장 움직인다' '엘리트 독자 가고 대중 독자가 왔다' 같은 타이틀이 붙어 있다. 거의 '라쇼몽' 수준 아닌가? 가히 '독자의 시대'가 도래한 걸 입증해주는 듯도 하다. 당신이 무얼 쓰든지 간에 독자는 자기 구미에 맞는 것만 읽어내는 시대! 나는 가장 최근의 리뷰를 편들고 싶다. 세 편의 리뷰를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3. 12) 한국소설 중간계급 전유물 전락

“하위계급의 남성 및 여성 독자와 상층계급의 남성 독자는 소설로부터 이탈했다. 남은 건 엽기·추리·무협 등 하위 서사장르를 소비하는 남성 중간계급 일부와 여성 중간계급뿐이다.”

문학평론가 천정환씨(성균관대 국문과 교수)가 계간 ‘세계의문학’(민음사) 봄호에서 ‘2000년대의 한국 소설 독자’에 대해 분석했다. 그는 “한국인 작가가 한국어로 쓴 소설을 읽는 독자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지만 번역된 외국소설을 읽는 독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늘어나고 있다”면서 ‘한국 소설의 독자’와 ‘한국의 소설 독자’는 구분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한국 소설의 독자가 줄어드는 것을 한국의 소설 독자가 줄어드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뜻이다. 또 한국 소설의 독자에게만 집착하는 현재 문단의 구조에 대한 간접적 비판도 담고 있다.

천씨는 “한국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다면 이는 교육과 훈련, 배제와 선택을 통해 걸러진 ‘한국 소설’ ‘한국 작가’가 독자들의 삶·취향과 불화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면서 “상·하위 계층을 거의 잃어버린 주류 한국 소설은 프티부르주아 여성과 여학생, 문학청년 이외의 문화 수용자들의 관심을 잘 끌고 있지 못하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1950~60년대를 거치면서 엘리트 독자와 대중독자로 재편된 한국 소설 독자 가운데 엘리트 독자인 상층계급 남성들은 문학을 떠났다. ‘교양’의 발로로 소설을 읽던 이들은 현재 계간지 시스템으로 유지되는 한국문학 질서의 근간이기도 하다. 저자는 소설 애호가로 알려진 정치학자 최장집씨나 80년대까지 신문 문학월평을 꼼꼼히 챙겨봤다는 노회찬 국회의원을 이 범위의 독자로 들었다.

그러나 386세대 이후 이같은 엘리트 독자는 사라졌다. 아직까지 소설을 읽고 있는 엘리트 독자는 최후의 근대적 독자일 뿐 탈근대의 독자는 아니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인문학 전공자와 문학 연구자조차 연구는 할 망정 소설 독자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대중독자 가운데서는 전통적 의미의 노동계급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남성 중간계급과 남학생 일부, 여성 중간계급과 여학생층이 남았다. 그런데 남성 중간계급과 남학생 일부는 주로 엽기·추리·무협 등 하위 서사장르 소비의 주역들로, 순수·본격을 추구하는 한국문학이 이들을 놓고 영화·만화·게임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란 지적이다. 그렇다면 남은 독자는 여성 중간계급과 여학생층인데 이들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같은 칙 릿,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일으킨 공지영 신드롬, 그리고 일본소설 수입붐의 주역들이다.

천씨는 “소설에서의 일류(日流)에 드러난 초국적·무국적의 소설 향유는 세계화한 삶이 소설 향유에 미치는 영향으로 막기 힘든 대세이며, 80만부가 팔려나간 ‘우행시’의 성공에 대해서도 문단은 스스로 반성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면서 소설 독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빈사상태의 한국문학이 독자에게 투사한 자기모습일 뿐 그들이 모르는 독자층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결론을 맺었다.(한윤정기자)

한국일보(07. 02. 27) 25-35세 여성이 문학시장 움직인다

'칙릿(chic lit)을 잡아라.' 젊은 여성(chic)들을 위한, 그녀들의 문학(literature)이 21세기를 호령할 태세다. 문학ㆍ출판계가 그 같은 변동상에 감응하고 있다. <내 이름은 김삼순> <브리짓 존스의 일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젊은 여성들 사이에 인기를 끈 영상물의 성공에서 확인되는 추세에 대한 문학의 대응이다. 신간 일본 소설은 보다 직설적이다. <워킹 걸 워즈>. 매일 전쟁 치르듯 살아 가는 30대 전후의 여성 직장인들을 속도감 있게 그린 소설이다(랜덤하우스).

성균관대 국문과 천정환 교수는 계간 <세계의 문학>을 통해 "25~35세의 비물질 노동 종사 여성들은 문화적 소비에서 일종의 전위 부대"라며 "지난해 출판계 전체의 화두였던 칙릿은 향후에도 한국 소설의 유력한 독자층으로 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층 계급 및 남성 독자의 상당 부분이 소설 독자에서 이탈한 현재, 순수ㆍ대중의 장벽을 허물며 21세기 초 문화계의 화두로 등장한 칙릿 층은 고학력 중간층이라는 외형적 공통점을 지닌다. 천 교수는 그러나 "그들의 상당수는 불완전 고용 상태에 놓여 있다"며 그들의 현실적 입지를 외면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고학력 전문직이지만 사실상 직종 내부에서 성별로 분업화하고 저임금과 비정규직으로 차별화한 노동에 투입되기 십상인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노동과 소비의 불일치, 출신 계급(부모의 계급)과 소속 계급(자신의 현실)의 불일치 등 현실에서의 이중적 지위가 따라서 엄존한다는 지적이다. 본디 근대 소설의 가장 중요한 독자층이었던 여성 중간 계급과 여학생 층은, 최근 가족과 결혼의 문제에서 결정권이 강해짐에 따라 더욱 큰 지분과 역할을 부여받게 됐다는 것.

천 교수는 "성공한 대중 소설은 독자의 취향과 의식의 평균치에 대해 과감히 도발하는 소설"이라며 관련 작가의 분발을 촉구했다. 그는 <나의 달콤한 도시>에 대해 "TV나 영화 같은 데서 심심찮게 본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한 네티즌의 서평을 인용, 기시감과 상투성을 극복할 것을 작가들에게 요청했다. 천 교수는 서사가 매우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상식을 비트는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는 성공한 작품에 속한다고 평했다.

천 교수는 "1990년대 이후 문학 독자의 재생산 구조는 상당히 달라졌다"며 "소설의 전통적 독자가 이탈하고 재구성되면서 우리 눈앞에서는 문명사적 전환이 벌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2000년대 한국 소설의 독자를 주제로 펼쳐진 논의에서 천 교수는 "하위 계층과 젊은 세대는 블로그와 UCC 등 인터넷을 통한 산 지식 습득과 향유에만 집중, 독서 문화에서 이탈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며 "이들이 문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 문학의 미래가 바뀔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한편 국립국어원은 최근 문화 지형도를 바꿔 놓고 있는 칙릿을 '꽃띠 문학'으로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장병욱 기자) 

 

동아일보(07. 02. 23) 엘리트 독자 가고 대중 독자가 왔다

■ 세계의 문학 ‘2000년대 표준 독자’ 분석

서울 거주 22세 여대생 김모 씨. 한 달에 한두 번 시내 중심가 대형 서점에 가며 ‘에쿠니 가오리’류의 소설을 사 본다.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인터넷 독자 서평을 살펴보긴 하지만 구매를 결정하는 것은 책의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다. 대학 도서관이나 대여점, 친구들에게서 빌려 읽을 때도 있다. 독서 시간은 잠들기 전 1시간 정도. 인터넷 이용 시간이 훨씬 많고 개봉 영화 무료 시사회를 알뜰히 챙기는 영상 세대지만 재미있는 소설이라면 기꺼이 손에 잡는다.

다음 주 출간되는 ‘세계의 문학’ 봄호에 소개되는 ‘2000년대 표준 문학 독자’의 모습이다. ‘세계의 문학’은 특집 ‘누가 문학을 읽는가’에서 한국의 문학 독자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짚었다. 결론은 ‘엘리트 독자가 물러난 자리를 대중 독자들이 채우고 있다’는 것.

○ 엘리트 독자가 쇠하다

이 특집에서 성균관대 천정환 교수는 ‘2000년대 한국소설 독자 Ⅱ’라는 기고를 통해 엘리트 독자가 사라져 간다고 선언한다. 그는 직접 인터뷰한 모델 독자 G, C, Y 씨를 통해 엘리트 독자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사회과학을 전공한 40대 초반의 남성 교수. 주요 한국소설 작품과 김윤식 백낙청 등 대가급 평론가의 저작을 읽었다. ‘창작과 비평’ 등 문예지를 읽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한국 현대소설 사상 최고의 유산이라고 믿는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선 ‘한국문학의 대안’인지 모르겠다며 유보적이다.

인문학 출판사의 40대 남성 주간. 문예지는 안 보지만 우리 작가의 주요 작품집과 장편을 꾸준히 읽는다. 천명관의 ‘고래’, 박민규의 ‘카스테라’ 같은 30대 작가들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었고 ‘좋은 문학적 역량을 갖고 있다’고 평한다.

문학박사 학위를 소지한 30대 초반 여성 대학강사. 한국소설 중 어떤 작품이 대중적으로 읽히는지, 평단에서 회자되는지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현장의 한국문학 작품은 거의 읽지 않는다. “재미가 없을 것 같고, 안 읽어도 세상 사는 데 별 문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독자 G 씨는 우리 문학 교육과 인문학 제도가 길러 낸 가장 모범적인 엘리트 독자다. C 씨는 성실한 엘리트 독자이긴 하지만 G 씨에 비해 문학의 변화를 보는 태도가 유연하다. 천 교수는 “Y 씨는 문학도이면서도 G, C 씨와 같은 선배 엘리트 독자의 명맥을 잇지 못하는 독자”라면서 “전통적 의미의 엘리트 독자가 단절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밝혔다.

○ 재미난 이야기를 찾는 대중 독자들

그렇다고 문학 독자 자체가 사라지는가? 이 특집에 따르면 엘리트 독자의 뒤를 잇는 것은 들끓는 대중 독자다. 출판문화연구소 백원근 책임연구원은 특집 기고 ‘통계로 본 소설 독자’에서 지난해 ‘국민 독서실태 조사’(성인 1000명, 초중고교생 3000명 대상)를 꼼꼼하게 분석했다. 그 결과 남성보다는 여성이, 세대별로는 20대가, 대학생과 화이트칼라 직업군이 소설을 많이 읽으며, 소설 독자들이 다른 문학 장르 독자들보다 영화를 많이 본다는 등의 자료를 토대로 ‘서울 거주 22세 대학생 김모 씨’라는 2000년대 표준 문학 독자의 초상을 뽑아냈다.

이들에게는 앞선 엘리트 독자들처럼 한국문학 작품을 읽거나 최소한 알아야 한다는 ‘충성심’이 없다. 일본소설이나 영미권 치크리트(chick-lit)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읽으며 소설의 선택 기준은 ‘재미와 오락’이다. 백 연구원은 이 같은 대중 독자들 때문에 “소설 판매량은 안정적이고 견실하며, 다양한 방식을 통해 여러 사람이 한 권의 소설을 읽는 경향이 있다”면서 소설은 힘센 장르라고 밝혔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소설은 엔터테인먼트 경쟁력 제고가 필요한 조정 국면”이라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김지영 기자)

07. 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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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7-03-12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준 독자가 미모는 떨어지는군요. 근데 에쿠니 가오리 책, 그거 두시간이면 다 읽지 않나요? 그럼 한달에 15권 읽어야 하는데....

비로그인 2007-03-12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민음사가 <세계의문학>를 통해 자기변호를 하는듯한 인상이군요.

열심히 개기면서 한국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겐 맥 빠지는 일이겠고요. 이게 현상이고 이게 대세다. 독자 입장에선 작가가 무얼 쓰든 꼴리는 대로 읽는 게 맞고, 작가 입장에선 독자가 무얼 읽든 꼴리는 대로 쓰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의문 하나. 작가와 독자의 불화, 작가와 시대의 불화, 이 어긋남들이 결국 문학의 힘이긴 할 텐데.

많은 수를 거느린 작가가 있으면 그렇지 않은 작가도 있을 테고요. 더이상 루카치식 리얼리즘을 고수하는 소설가는 요즘엔 없던데, 작가들이 더더욱 세련되고 감각적이 되라는 것 같네요. 하위장르의 구분은 이미 허물어진지 오래여서, 기성작가들이 낡은 소설문법으로 쓰는 소설에 입맛이 안 당기는 건 너나할 것 없겠죠.

암튼 민음사가 <세계의문학>을 폐간하지 않고 펴내는 게 용하다 싶은데, 그건 아마도 문학정신이 있어서라기보담은 자본 덕분이겠죠. 문학지형의 변화를 읽기에 좋은 자료들, 로쟈님, 감사...^^

기인 2007-03-12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천정환 선생님이 '문학평론가'로 호명되는 것도 신기하네요. ㅋ 등단을 한 적도, 전통적 의미에서의 문학'평론'을 한 적도 없는데.. 역시 싸잡아서 '문학평론가'인지.. 정말 주위를 둘러보면. 국문학도들도 요즘 소설 잘 안 읽는 것 같습니다. 등단한 분들을 빼고는 말이죠. 저도 일년에 '본격' 한국소설 10권정도 읽나 싶습니다. 계간지 제외하고 말이죠...

2007-03-12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iosculp 2007-03-12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의 독자애기 보니 미술애기하나 적겠습니다.
집에다 타일로 판넬을 만들어서 복사된 그림을 붙여놓고 가끔 갈고 보고있는데
애들 미술공부에 좋다고 하니 옆집에서도 몇몇이 따라하더군요.
옆집은 판넬로 만들어져나온 그림을 가져다 붙여놓았는데
친구분들 두분이 오셔셔(속칭 사회적으로 사자들어가는 사모님들)
하시는 말씀, 이거 직접그리신거예요.
그 그림은 고호의 해바라기 였습니다.
과도한 일반화 같지만 그 애기듣고(나중에 다른 그림붙여놓은 이번에는 마티스 그림였는데 그렇게 물어보는 분이 있다고 하더군요) 부동산이나 재태크로 먹고 살만한
경제적 여유층들의 교양 수준이라는게 어떨지 참참참 이런생각이 들더군요.
보는 그림도 그런데 하물며 읽는 문자는 어떨런지.
와이프한테는 이런 과제를 주었는데요.
애편네들 모여 수다떨때 좀 이제 엎그레이드좀 하지.
창비에서 나온 한국 단편전집이 있으니 일주일에 한권씩 사서
그 책중에 한편만이라고 골라서 읽고 수다떨때 애기좀 하지.
그리고 강조한 말, 나중에 애들 논술할때 어짜피 사야되는 책이니 다해야 50권 1년이면 책도 사고 수다 질도 높이고 애들한테 모범도 되고(뭔짓을 해도 공부와 연관시켜야 씨알이 먹히는 세상이라서요.)

로쟈 2007-03-1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워낙에 표준 이상의 (가오리를 읽는?) 미녀들만 만나시니.^^
까마귀님/ 저널이나 출판사들에서 '체질' 개선에 들어간 지는 꽤 되는 것 같은데요, 작품들이 제때 못받쳐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시장'의 얘기가 빠진 <문학개론>들도 반성해야 할 거 같고...
기인님/ 하다못해 저도 '문학평론 하시는...'이라고 소개받을 때가 있으니까요.^^;
**님/ '문학에서 문학으로'라는 구호 자체가 좀 식상한 구호죠. 90년대 구호였으니...
biosculp님/ 그게 '사자들어가는 사모님들'의 비결이 아니었을까요? 엉뚱한 문학 읽고 삶에 회의를 가져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로그인 2007-03-1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질' 개선으로 체질이 좋아지지 않은 듯해서. 문지, 창비의 자기갱신이야 그렇다 치고 민음사의 문학 갇다버리기는 도가 지나친 측면이 있지요. 홈쇼핑에서 마진을 엄청 줄이면서 덤핑판매로 군소출판사의 목줄을 쥐는 것도 명망 있는 출판사로선 할 짓이 아니고. 안타까워서 이런 글 쓰게 되네요.

먹고살기 힘든 작가들에게 "당신들 앞으로 이렇게 소설을 써야 팔려!" 하는 해묵은 주문을 옹알이하는 것과 진배없으니. 문제가 단순하지 않은데, 독자와 작가 사이의 관계, 독자의 취향 같은 몇몇 변수로 한국소설을 가름하기에는 사태가 복잡해서 무리가 따르지 않나 싶습니다. 독자와의 소통이 중요하지만, 언제나 대중이 옳은 건 아니니까.

세상에, "2000년대 표준 독자"라니,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나? 소설의 판매량이 그 근거라는 건데, 상품으로서의 예술작품, 저버릴 수 없는 문제겠지만,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싶네요. 한국소설이 썩 재미있는 건 아니지만, 외국소설과 다른 활력도 엄연히 존재하고, 그게 언젠가 맞아떨어지는 날도 있겠죠. 어차피 한국출판사 역시  엔터테인먼트 사업처럼 도박논리로 움직이고, 그래서 역동성도 나오는 것일 테니까요.

류시화가 그렇듯, 공지영이란 작가도 흥행성적을 깔고앉아 대중적 영향력으로 고평가를 받는군요. 그런데 요즘 논리에 따르면, 류시화(시인) 공지영(소설가)은 2000년대의 표준작가가 되는 건가? 억울하면 팔리는 작품을 쓰시라. 것도 맘대로 되진 않겠지만!  이렇게 쓰고 보니, 고군분투하는 한국작가들이 생산하는 물건들을 편견을 걷어버리고 봐야겠다는 생각, 한국문학의 독자로 성실함을 좀더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여전히 꼴리는 대로 외국소설 열심히 찾아보겠지만.

아무튼 수사학, 그 기묘한 말장난은 경탄스럽습니다. 한국의 소설독자, 한국소설의 독자...라...


맑음 2007-03-1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 독자의 취향도 한몫하지만, 자본주의 시대이니 광고도 비중을 크게 차지한다고 봅니다. 일간지 신문에서도 하루 여러 컷 책광고가 실리지만, 주로 대형출판사의 외국문학이죠. 같은 한국 소설이라도 일반 출판사 문학상보다 세계일보문학상 작품이 잘 팔리는 현상을 볼 때도... 텍스트와 독자 선호도의 부합 여부보단, 일반 독자들은 1억 원 고료란 타이틀에 더 시선이 가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합니다. 소극적인 독자들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광고(인터넷 서점의 메인 광고, 베스트셀러 목록, 오프라인 서점의 매대 진열, 주위 사람이나 권위있는 사람들의 평 등등)에 익숙하게 구매력을 행사하니까요.^-^

니브리티 2007-03-17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들도 신자유주의 행보에 맞춰 3% 퇴출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겠죠. 어쨌거나 믿음 이전에 문학은 계속 될 겁니다. 평론가씨들은 출판시장에 대한 걱정은 출판사에 맡기시고 일단 많이들 읽으시고 적절한 평가를 내려주시는 게 본연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로쟈 2007-03-26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마귀님/ 덕분에 한국소설들을 더 챙기게 되신다면 '수사학'을 탓할 일도 아닌 거 같습니다. 오기로라도 더 읽어주마!^^
맑음님/ 공급자가 문제냐 소비자가 문제냐, 는 원론적인 질문이 나올 수도 있을 텐데, 사실은 같이 가는 것이고 모두가 공모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해서 반성이 필요하다면 모두 자기반성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고...
니브리티님/ 말씀대로, 문학은 계속 연명할 거라는 데 저도 동감합니다. 문제는 '어떤 문학'이냐에도 걸려있는 거겠지요. 아시겠지만, 사실 동업자들끼리도 잘 안 읽지 않습니까?^^;

니브리티 2007-03-2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뉘앙스 비틀기가 또 로쟈님의 특기시군요.
<문학이 계속 될 것이다/연명할 것이다>는 뉘앙스가 너무 다르군요. 공통점이라면 계속 쓰여진다는 것 뿐이로군요. <어떤 문학>이냐의 문제는 거기에 문학을 바라보거나 평가하는 기준과 가치가 개입되는 것인데, 기준이나 가치를 논하려면 먼저 균형있고 '세심한 눈'이 필요하겠죠. 거기에 부합하는 눈을 가진 평론가가 몇이나 되는지 저는 잘 감이 안오는군요. <동업자끼리도 서로 잘 읽지 않는다>(오타 치셨군요..^^)는 말은 <소설가끼리도 서로의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라는 말로 제게 반문을 하시는 것 같군요(평론가들도 잘 읽지 않지만 소설가들도 잘 읽지 않는다). 그런데 소설이라는 창작자의 입장과 그 창작물을 '비평'하는 비평가들을 그렇게 동일한 잣대로 말해서는 안되겠죠. 그런 잣대로 말해버리면 결론은 다음 두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1.너희들도 잘 안읽는데 비평가라고 재미없는 것을 읽어야 하느냐? 우리도 관심가는 것만 읽을 권리가 있다.
2. 비평가가 읽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만 너희도 읽지 않으니 오십보 백보 아니냐. 너희는 그런 불만을 표출할 권리가 없으니까 입닥치고 열심히 글이나 써라. 혹 내 마음에 들면 우리가 띄워줄수도 있느니라...ㅋㅋㅋ

로쟈 2007-03-2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오타가 있었네요. '잘 안 읽지 않습니까?'로 수정했습니다.^^ 니브리티님의 문제의식은 평론가들이 게으를 뿐더러 작품을 보는 안목이 없다, 는 것인가요? 사실, 다른 나라 문학사들에서도 '저주받은 거장'들이 심심찮게 나오는 걸 보면, 그러한 오판/오독은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란 생각도 듭니다. 모두에게 공평한 비평이란, 그런 사랑만큼이나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믿을 건 '미래'의 독자들이겠죠...

니브리티 2007-04-03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작품 보는 안목이 없다고 말하면 <저같이 주목 못받는 사람들의 푸념>으로 들릴 게 뻔한데 제가 왜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문제가 되는 부분은 <게으르다>일 것이고, 그 게으름에 부수적으로 따라 붙는 것이 폭넓은 독서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겠죠. 물론 <게으름>은 또한 계산된 게으름이라는 것도 압니다.... 믿을 것이 '미래'의 독자라는 말도 참 이상하군요. <독자가 선택한 것=명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인지요? 기본적으로 비평이 공평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비평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란 필시 어떤 기준에 의해 재단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문제는 <비평-대상에 대한 공평성>이 아니라 바로 <비평-기준의 공정성>이 되겠죠. 그 부분이 바로 비평가들이 '윤리'에 대해 숙고해야 할 가장 현실적인 지점일테구요.
같은 작가의 텍스트를 같은 비평가가 잡지 기준에 맞춰서 어떤 곳에서는 칭찬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자의식이 없다는 식으로 비난한다면 그 기준을 누가 신뢰할 수 있을까요?
 

한국일보의 서평을 둘러보다가 어제 지면에서도 지나쳤던(게재는 되었던 것일까?) 기사가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미스테리한 것은 아직 어느 온라인서점에서도 이 서평기사의 대상이 떠 있지 않다는 점. 무슨 유령 같은 책이다. 기자가 서평을 작성한 것으로 보아 언론사에는 '뿌려진' 듯하지만 다소 늦게 보내진 탓에 다음주로 서평들이 미뤄지거나 별로 주목을 못받은 것이 아닐까 추측만 해본다. 한데 주제 자체는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고 있는 쪽이어서 책은 나오는 대로 훑어봐야겠다. 그 책의 타이틀은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시유시, 2007)이다.

원저의 제목은 <자본가 없이 자본주의 만들기(Making Capitalism Without Capitalists)>이며 지난 1999년 버소출판사에서 나왔다(부제는 '사회주의 이후 중부유럽에서의 계급형성과 엘리트 투쟁'이다). 이런 류의 책으로는 좀 오래된 듯한 인상을 주는 게 흠이긴 한데, 책에서 다루는 러시아나 동유럽 경제만 하더라도 2000년 이후에 상당히 변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표지는 맘에 든다.

한국일보(07. 03. 10)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 동유럽의 脫공산주의 다시보기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속속 몰락하자 미국의 정치학자 후쿠야마는 재빨리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가 냉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헤겔-마르크스가 말하던 진화적 역사가 끝났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이 책의 저자들도 후쿠야마의 판단에 딱히 이의를 제기할 것 같진 않다. 대신 그 선정적 구호를 ‘역사의 다양한 종언’이라고 바꾸지 않을까.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본주의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이다. 책은 그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특히 유산 부르주아 층이 빈약한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로 역이행하면서 밟는 다양한 경로에 주목한다. 저자들은 그 대표적 사례로 동유럽 국가의 변동 과정을 실증 분석한다. 설명에 따르면 사유재산을 가진 계급이 없었던 이들 나라에서 체제 전환을 진두지휘한 것은 교양 부르주아였다.

이들 대부분은 국가사회주의를 공격하던 반체제 지식인이었다. 예상과 달리 ‘노멘클라투라’로 불리는 귀족 관료는 신체제에서 기존 권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대신 신세대 관료라 할 수 있는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가 교양 부르주아와 손잡고 새로운 주류 세력으로 등장했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에서 두드러진, 이런 일련의 과정은 그야말로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이었다. 이 같은 현상의 분석 틀을 마련하고자 저자들은 베버와 브루디외의 이론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한다. 전자에선 신분과 계급의 구별을, 후자에선 정치자본 문화자본 경제자본 등을 포괄하는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빌렸다.

이 관점에서 동유럽의 탈공산주의를 들여다보면 다양한 사회 주체들의 역동성이 포착된다. 체제 변동에 뒤쳐질세라 개인들은 앞 다퉈 사회주의적 신분에서 자본주의적 계급으로 정체성을 조정한다. 바꿔 말하면 변화한 환경에 유리한 자본은 늘리고 불리한 것은 버리면서 자본 포트폴리오=아비투스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치열한 적응 과정을 거치며 문화자본을 가진 지식인-기술관료 연합은 정치·사회자본을 갖춘 엘리트 관료를 압도한다. 교양이 권력과 권위 위에 군림하는,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없는 진풍경이 펼쳐진 셈이다.

영미식 모델에 구애받지 않고 각각의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특성을 드러내는 것. 저자들은 이 야심찬 기획을 ‘신고전사회학’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으로 대표되는 고전사회학이 19세기 근대자본주의 이행을 분석했다면, 신고전사회학은 20세기 말 자본주의로의 역이행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설명이다.(이훈성 기자) 

07.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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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12 07:30   좋아요 0 | URL
오옷. 퍼갑니다. 애인이 체코에서 동유럽 역사 공부하고 있는데, 이 책을 체코에서 소개했을지도 모르겠네요. :)

로쟈 2007-03-17 23:18   좋아요 0 | URL
앉으나 서나 애인 생각이십니다.^^ 그나저나 희한하게도 알라딘에는 아직도 입고가 안돼 있네요.--;
 

지난주 강준만 교수의 칼럼 하나를 옮겨놓는다. 이미 알라딘의 다른 서재들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굳이 옮겨놓는 것은 이달의 '사회적 독서'로 제안한 바 있는 고종석의 <바리에떼>와 무관하지 않아서이다. 컴퓨터의 하드를 교체하는 바람에 즐찾 설정부터 하나하나 다시 해야 하는 처지라서(예전의 하드를 카피해오는 건 좀 미뤄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이래저래 불편한 터라 다른 학술적/시사적 동향들에 대해서는 며칠 관심을 접어두어야겠다(사실 그런 일들만 챙기는 걸로도 24시간을 꼬박 보낼 수 있겠지만 그게 '생활'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생활만 돌보기에도 24시간이 모자라는 '현실'이기에 피로와 무기력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게 요즘이다). 사실 혼자서 읽을 책들 읽는 데에도 늘 시간은 부족하거늘...

한겨레21(07. 03. 08) '고종석'식 진보주의를 위하여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께 질문을 하나 드리겠다. 민주노동당(민노당)이 창당 기념일 행사로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여론 형성에서 민노당의 발전과 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지식인에게 감사장을 수여한다면, 1순위로 누구를 꼽겠는가?

나는 고종석이다. 고종석의 반열에 오를 만한 다른 지식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이런 주장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 고종석이 펴낸 <바리에떼: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개마고원)이라는 책을 읽기를 권한다. ‘사람’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고종석의 ‘복잡성’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복잡성'에 대한 강조는 소설에 대한 쿤데라의 예찬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고종석식 진보주의'를 나는 따로 '산문적 진보주의'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혹은 '산문학의 정신'). 아니 무심코 읽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나는 자칭 ‘고종석 전문가’로서 그가 얼마나 ‘복잡한 사람’인지에 대해 이제부터 예비 지식을 드리고자 한다. 고종석에 대한 칭찬도 비판도 아니다. 담담하게 해부해보는 것이다.

고종석은 “개인적으로 나는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나는 진보 정당의 지지자가 아니다”(203쪽)라고 했다. 고종석은 진보주의자가 아닐뿐더러 집단주의를 혐오한다. 그는 “만국의 개인들이여, 흩어져라! 흩어져서 싸우라! 민족주의의 심장에, 모든 집단주의의 급소에 개인주의의 바이러스를 뿌려라!”(30쪽)라고 선동적인 개인주의 선언을 한 바 있다.

고종석이 낙관적 열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나는 염세주의자에 가깝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탐욕과 포악과 비굴에서 사람에게 맞설 만한 동물이 있을지 모르겠다”(291쪽)고 털어놓았다. 이 정도면, 고종석을 잘 모르는 분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런 사람에게 왜 민노당이 감사장을 줘야 한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고종석만큼 효과적인 민노당 지지를 역설한 지식인은 찾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이다.

민노당 당원이거나 당원은 아니더라도 민노당 색깔을 가진 진보적 지식인들은 평소 글쓰기 활동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민노당 당원들도 잘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로 논문식 글을 쓰는 지식인들이 다수다. 대중적인 글을 쓰는 지식인들도 있지만, 이들은 보수(자유주의 포함) 정당 비판에만 몰두한다. 보수 정당 비판이 곧 민노당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충분히 입증된 것 같은데도, 이들은 왜 민노당을 지지해야 하는지 겸손하고 간곡한 자세로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보수 정당 지지자들에 대한 호통, 야유, 조롱이 주요 메뉴다. 비극은 많은 민노당 당원들이 그걸 말리면서 “손님 쫓아내지 말라”고 고언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고 속 시원해라” 하면서 즐긴다는 사실이다.

호통, 야유, 조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차분하고 정중한 설득보다는 그게 더 필요할 때도 있고 효과를 낼 때도 있다. 문제는 시종일관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져 본말이 전도되는 사태다. 나를 위한 진보인가, 민중을 위한 진보인가? 고종석은 시종일관 겸손하게 민노당 지지를 설득한다. 그는 한국 사회의 극우 편향을 개탄하면서 ‘이념적 정상화’를 위해 자유주의자들이 민노당에 표를 던져야 한다고 타이르고 호소한다. 이 책에도 그런 호소가 나와 있지만, 고종석이 정치를 주제로 쓴 많은 글엔 명시적·암묵적인 민노당 선전이 들어 있다.

고종석이 묘한 사람인 건 분명하다. 한국 사회의 야만에 대해 그 어떤 진보주의자보다 더 진보적 의분을 표출해왔으면서도, 자신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니 말이다. 문학평론가 백철(*'백철'이 아니라 '김철'이다)은 고종석의 소설집 <제망매>에 쓴 발문에서 고종석의 묘한 이념 지향성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어떤 ‘좌파들’보다도 더 좌파적이었고, 어떤 ‘우파들’보다도 더 우파적이었다. 인간과 세상의 진보를, 아니 진보의 험난한 좌절들을 진실로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그는 충실한 좌파였고, 많은 좌파들을 부끄럽게 만들 줄 안다는 의미에서 또한 충실한 우파였다.”

사회과학적 분석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고종석은 한국형 진보주의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진보 세력이 ‘고종석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선 큰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 시험의 이름은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 정립 문제다. 개인주의는 오랫동안 사회주의와 갈등 관계를 유지했다.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사람들도 개인주의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해 유보적 자세를 취하곤 했다. 예컨대,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사회주의에 공감했지만 사회주의가 개인과 천재에 반대하는 것을 싫어했다. 가치 있는 것은 오직 개인뿐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그런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1891년에 낸 <인간의 영혼과 사회주의>에서 “우리가 사회주의를 통해 이르고자 하는 것이 개인주의”라고 주장했으며, 조레스는 1898년에 낸 <사회주의와 자유>에서 “사회주의는 완전하고 논리적인 개인주의”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를 개인주의의 논리적 완성으로 보았으며, 빅토르 바슈는 1904년에 낸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에서 “일관성 있는 개인주의는 사회주의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알랭 로랑의 <개인주의의 역사>)

한국에서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주의’를 시사한 이는 한양대 교수 임지현이다. 그는 “낡은 전통에 가위 눌려 있는 남한의 좌파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에서만 건설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회한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것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론 없이 곧장 실천으로 들어간 대표적 인물이 바로 고종석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종석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 가운데 사회주의자는 얼마나 되겠는가? 고종석은 진보주의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고종석은 한사코 자신이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개인주의와 진보주의가 양립하지 못하는 한국의 진보주의 풍토를 정면 돌파할 뜻이 없기 때문일까? 나는 그게 고종석의 개인주의가 요구하는 ‘책임 윤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책임 윤리가 박약한 편이다. 책임 윤리란 어떤 일을 할 때 나타난 결과뿐만 아니라 예상 가능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윤리의식을 말한다. 옳은 일이니까 결과에 개의치 않고 무조건 밀어붙인다는 진보주의는 책임 윤리가 없는 모험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선 곧잘 모험주의가 진보주의로 통용되기도 한다. 독재정권 시절에 형성된 습속이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지속된 탓이다.

이념을 떠나 일상의 차원에서도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공직을 맡는 걸 두려워한다. 책임 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비극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공직자, 특히 고위 공직자들의 책임 윤리 부재 또는 박약을 들겠다. 대부분 고위 공직을 출세로 생각한다. 그건 ‘출세’가 아니라 ‘봉사’하는 거라고 반박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봉사하기 위해 치열한 로비를 하고 남이 자신보다 좋은 봉사 기회를 갖게 되면 배 아파하고 헐뜯는 사람들이 왜 그리도 많단 말인가?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함부로 공적 단체를 만들지도 않는다. 공공의 목적을 위한 단체면 성공 가능성을 검토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만들고 보는 게 우리 시민사회의 풍토다. 하다 안 되면 때려치우면 그만이다. 책임? 공익을 위한 이타적 활동에 무슨 책임?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이타성을 면죄부로 내세우는 그런 반문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책임 윤리 유전자를 가진 고종석이 영원히 공직을 맡거나 상시적인 공적 단체를 만드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여태까지 내가 분석해온 고종석은 그렇다는 것이다.

고종석은 진보마저도 책임 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선뜻 “나 진보요!”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진보를 고위 공직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백철(*강교수가 작고한 평론가와 혼동한 모양이다)의 평가를 다시 읽어보라. 가슴에 와 닿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고종석은 과격한 개인주의 선언을 하였지만, 나는 실천에선 내가 고종석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이기주의에 더 충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2003년 12월 나는 고종석과 민주당 분당 문제로 논쟁을 한 바 있다. 이와 관련된 글이 <바리에떼>에 실려 있으므로, 이 이야기를 좀 해보자. 민주당 분당에 비판적이었다는 점에선 나와 그의 생각은 같았지만, 전체 또는 집단을 생각한다는 점에선 고종석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고종석은 “가난한 부모가 창피하다며 집을 뛰쳐나갔다가 세상에서 따돌림당하는 자식을 거두어 보살피는 어미의 심정으로 호남 유권자들은 신당을 감싸야 한다”(187쪽)는 주장을 폈다.

나는 이런 ‘부모·자식·어미’론이 부적절한 유추라고 생각한다. 고종석이 ‘참여정부의 파산’을 염려해 열린우리당 지지를 역설하고, 다른 대안으로 민노당 지지를 제시한 건 나로 하여금 “이 양반 개인주의자 맞나?”라는 의문을 갖게 했다. 고종석은 나의 주장이 ‘민주당 지지’를 ‘암시’한다고 해석했지만, 나는 “이 양반 진짜 개인주의자 맞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혹 ‘대안 중독증’이나 ‘독수리 5형제 신드롬’에 빠져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했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노무현의 해체주의는 ‘창조적 파괴’라고 예찬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그건 노무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란 말이냐고 내심 쏴붙였다.

나는 열린우리당은 내가 반대한 정당이므로 열린우리당이 파산하건 말건 아무런 책임 의식이 없는 반면, 고종석은 대선에서의 투표에 대한 책임을 말하면서 노 정권에 대한 책임 윤리마저 역설하는 게 아닌가! 고종석이 자유주의자요, 개인주의자라고?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노무현은 자신의 약속을 뒤집고 민의를 폄하하면서 결과야 어떻게 되든 모험주의라고 불러주기조차 어려운 도박주의로 치달리는데도 고종석은 그런 노무현까지 어미의 마음으로 껴안자고 역설했으니, 나로선 “오지랖도 참 넓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종석은 “노무현이 아무리 나빠도 최병렬이나 이회창보다는 수백 배 덜 나쁘고, 전두환보다는 수만 배 덜 나쁘다”(199쪽)는 논리를 내세워 특검법 통과에 한나라당과 공조한 민주당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나는 여기서 고종석의 평소 ‘쿨함’이 사라졌다는 게 흥미롭다. 이는 그가 ‘개인’보다는 집단적 ‘대의’를 앞세운 탓이리라. 나도 평소 대안을 어지간히 강조하는 편이지만, 잘못된 것을 비판함에 있어서 늘 그 결과와 대안까지 미리 생각하고 비판에 임하진 않는다. 그런데 고종석은, 비록 그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단어를 혐오할망정, 사실상 국가와 민족을 염려하는 지극한 애국심을 발휘했으니 이 어인 일인가.

<바리에떼>엔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 대한 성실한 반론이 실려 있다. 87쪽에서 137쪽에 이르는 긴 글이다. 고종석 스스로 “식민지 시기의 역사적 복권을 통해 민주주의 운동의 정통성을 흔들려는 온갖 ‘경제론’들의 급소를 이 글이 비교적 정교하게 움켜쥐었다고 나는 판단한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 이상이다. 최근 홍수처럼 쏟아져나오고 있는 식민지 시절에 대한 모든 논란에 대해 명쾌한 교통정리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종석은 복거일을 내내 비판하지만 그의 비판은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하다. 나는 복거일에 대한 과분한 대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복거일은 철저한 사회진화론자이며,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니 보수주의니 하는 건 편의적으로 동원되는 것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고종석이 복거일의 자기 교정 가능성에 대해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건 자신이 복거일로부터 배운 점이 있다는 것에 대한 책임 윤리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닌가 의심하곤 한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고종석과 같은 희귀한 지식인이 있다는 건 한국 지식계의 축복이지만, 내가 정작 높이 평가하는 그의 미덕은 매사를 깊이 꿰뚫어보는 시력이다. 내 기준으론 보아선 과도할망정 고종석의 엄격한 책임 윤리가 곳곳에 스며드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물질적으론 낮은 곳에 있을망정 정신적으론 높은 곳에 서서 진보 아닌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일부 진보주의가 고종석형 진보주의로 교체되는 그런 세상은 언제 올 것인가?(강준만)

07. 03. 11.

P.S. 내친김에 <바리에떼>에 대한 한겨레의 서평도 옮겨놓는다(알다시피 한겨레는 그가 한때 몸담았던 매체이다). '이너'도 '아우터'도 아닌 (보통은 남들에게 욕먹는) 그의 포지션을 나는 지지한다. 언젠가 적었지만 나는 고종석과 대동소이한 입장을 갖고 있다(차이라면 내가 그보다 개인주의와 쾌락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서 덜 지지한다는 것 정도이다).  

한겨레(07. 20. 16) ‘이너’도 ‘아우터’도 아닌 고종석의 자유생각

1993년 첫 저서 <기자들>을 펴낸 저자가 17번째로 세상에 내놓은 책이다. 지난해 3권을 출간했고 올해 1월이 가기 전에 다시 새 책을 펴냈다. 1년 사이 4권의 책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저자가 상당한 독자층을 확보한 인기글쟁이라는 점과, 그의 글쓰기가 밥벌이와 직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 저자는 2005년 3월부터 직장 출근을 하지 않고 있다. 돈을 초월한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여가와 행복을 위해서라도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이 책은 삶을 털어 글을 쓸 수 있는 조건을 완비한 한 ‘행복한 글쟁이’의 자유로운 사변의 모둠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 많은 친구인 소설가 이인성의 산문집 발문에서부터 지난 대선에서의 호남 몰표를 옹호한 정치 에세이와 한국 보수주의에 대한 비판 글까지 동시대를 종횡무진 횡단한다. 저자 글의 미덕은, 그가 소리높여 외치는 좌파적 주장이 편벽한 이념의 틀 속에서 획일적으로 생산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실존적 성찰 속에서 잉태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의 텍스트가 놓인 지점이 공과 사를 버무린 제3의 공간에 있다는 점과도 상통할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자유의 의미를 가르쳐준 사부 복거일과 격렬히 대결한다. 일제와 친일세력에 대해 정황론을 들이대며 옹호하는 사부를 거침없이 밀어붙인다. 이 전투에서 그가 어떤 논리를 갖다 대더라고 그가 퇴직의 변으로 실토한 넋두리보다 더 설득력을 갖기 힘들 것이다. “점점 기력과 지력이 사그라드는 세월을 좀 더 자유롭게, 홀가분하게 살고 싶었다.” 식민 이상의 부자유스러움이 어디 있겠는가. 

유난히 자주 나오는 ‘친밀도’에 대한 언급도 그의 사유방식을 가늠케한다. “내가 아직 순수하지 않고 기품과 거리가 있는 것은 내가 황인숙과 충분히 가까운 친구가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시인 황인숙에 대해) “그와 나 사이에는 무수한 친구들이 있다. 그를 중심으로 한 ‘이너’라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 내 자리는 없기 쉬울 것이다. 내 자리는 아마 ‘이너’와 ‘아우터’의 경계에 있을 것이다.”(소설가 이인성에 대해) 그리고 덧붙였다. “이방인들이 들이 쉬는 공기는 자유의 공기이므로.” 그의 글의 특장인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는 섬세한 태도의 근원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이정도면 설명되지 않을까.(강성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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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7-03-11 19:37   좋아요 0 | URL
오마이뉴스에 노회찬이 대통령이 되면 매년 20조씩 걷어 양극화를 해소한다고 나오네요. 좀 무서워 지는게 그러나 엿되면 뒷감당은, 지금 노무현 정부도 양극화를 내세우고 격차줄인다고 하다 더 벌어지게 만들고 있는데요.

심산 스쿨에 들어가보니 조중걸 선생이 암으로 강의를 중단했다고 나오더군요.
학생들에게 쓴 편지가 게시판에 있던데 안습되더군요.

로쟈 2007-03-11 20:20   좋아요 0 | URL
민노당은 그런 게 어필할 거라고 생각한 거 같군요... 생면부지이지만 조선생 얘기는 안타깝네요. 그의 본격적인 저작들이 나온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드팀전 2007-03-11 22:23   좋아요 0 | URL
저도 한겨레21 기사는 읽었습니다...
한겨레 기사 중 이 부분
.......저자 글의 미덕은, 그가 소리높여 외치는 좌파적 주장이 편벽한 이념의 틀 속에서 획일적으로 생산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실존적 성찰 속에서 잉태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의 텍스트가 놓인 지점이 공과 사를 버무린 제3의 공간에 있다는 점과도 상통할 것이다.........

여기에 힘을 주고 싶어지네요.좌파 우파보다 우선시 되야할 것은 그의 이념이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실천적 영역에서 살아내고 있는지..그거 아닐까 싶습니다.....그렇지 못한 '공부'는 제게 그다지 존경받지 못합니다.'자본론'을 100번읽고 암기할 수 있다 할지라도.

로쟈 2007-03-11 22:32   좋아요 0 | URL
저는 거기에 보태서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책임 윤리가 박약한 편이다. 책임 윤리란 어떤 일을 할 때 나타난 결과뿐만 아니라 예상 가능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윤리의식을 말한다. 옳은 일이니까 결과에 개의치 않고 무조건 밀어붙인다는 진보주의는 책임 윤리가 없는 모험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는 '상식적인' 지적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말들'과 자칭 진보주의자들을 제가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마태우스 2007-03-11 22:35   좋아요 0 | URL
진정한 자유주의자 고종석... 저도 그분 책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많이 배웠죠.... 바리에따 주문했습니다 꾸벅.

로쟈 2007-03-11 22:45   좋아요 0 | URL
저도 재미있게 읽고 많이 배웠으니 '동학'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제가 인사받을 일은 아닌 거 같은데요.^^
 

'작가와 문학사이'의 아홉번째 타자는 소설가 김중혁이다. '소설 이천년대'를 꾸려나가는 작가군의 한 사람. 자신을 '레고 블록'의 덩어리로 규정하면서 소설 쓰기 또한 그러한 '블록쌓기'적인 유희로 간주하는 게 아닌가 싶은 이 작가에 대해서 심진경 평론가가 깔끔하게 정리해놓고 있다. 이름도 그렇지만 외모 또한 '중량'이 좀 나갈 것 같은 작가에게서 그런 블록 얘기와 '무용지물의 박물학'을 듣는다는 게 좀 낯설 때도 있다. 그런 것이 또한 '소설 이천년대'의 특징인지도.  

경향신문(07. 03. 10) [작가와 문학사이](9)김중혁-낯섦으로 문학을 완성해가다

펭귄뉴스’라는 낯선 제목의 단편집 말미에 김중혁은 자신을 하나의 ‘레고 블록’ 혹은 수많은 레고 블록들로 이루어진 ‘덩어리’라고 말한다. 이때 ‘레고 블록’과 ‘덩어리’는 다른 말이 아니다. ‘레고 블록’은 ‘덩어리’다. 수많은 ‘레고 블록’이 조립과 해체를 거듭하면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고, 이 ‘덩어리’는 다른 누군가의 ‘레고 블록’ 한 조각이 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레고 블록’ 한 조각이자, 다양한 레고 블록들의 조합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나’라는 오래된 자기동일적 명제는 부정된다. ‘나’는 ‘나 이외의 것’을 통해서만 구성되는 부정의 산물인 셈이다.

김중혁에게서 발견되는 이러한 자기 인식의 메커니즘은 그대로 문학에도 적용된다. 그에 따르면 소설이란 “세상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술을 집대성해야만 겨우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1925년산 축음기 크리덴저’)과도 같은 것이다. 사용가치와 도구성을 상실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술을 집대성’하는 일, 김중혁에게 소설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소설은 엄청난 자기 연마와 수양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문학은 무가치한 것이다. 즉 문학은 ‘무엇을 위하여’라는 실용적·도구적 목적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무가치한 것이다. 그러나 오래 전 김현 선생이 지적한 것처럼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 사회의 실용적, 관습적 가치를 반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가치와 의미를 꿈꾸게 한다. 그러니 문학이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김현 선생의 입론은 <한국문학의 위상>에서 읽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도구는 그 도구성을 상실한 뒤에야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고장난 타자기는 유용한 도구로서의 실용성을 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49개의 이빨을 가진 ‘회색괴물’로 다시 태어난다.(‘회색괴물’) 타자기만이 아니다. 페달도 안장도 없는 자전거(‘바나나 주식회사’)나 촉각과 상상력으로만 읽을 수 있는 나무지도(‘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모두 원래의 용도와는 전혀 다른, 현재의 관습적 시스템 속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그래서 제품 사용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낯섦을 통해서만 무용하지만 의미있는 사물이 된다. 그러한 사물은 자명하고 투명한 제품이나 상품과는 달리, 도대체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불투명하고 낯선 것으로, 상품의 세계를 교란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다. 김중혁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무용지물’을 문학의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언뜻 몸 가벼워보이는 김중혁의 문학적 행보를 결코 가볍다고 볼 수 없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는 ‘현대문학’에 다소 엉뚱하고 쓸모없는 발명품을 소개하는 카툰(‘인간개발 프로젝트’)을 연재하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디오 기기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하고 다양한 장르의 LP판을 수집하기도 하며, 새로 출시된 컴퓨터나 전자제품을 누구보다 먼저 받아들이는 얼리 어댑터(early adapter)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사물-소설은 이러한 마니아적 취향과 감수성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소설을 단순히 취향의 세계로만 볼 수 없는 것은 그러한 문학 아닌 것들의 뒤죽박죽 잡동사니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가치함의 가치라는 문학적 역설은 그렇게 ‘문학은 문학’이라는 자기동일적 순환논법을 거부하고 문학 아닌 쓸데없는 짓거리와 결합하고 교환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문학은 생산, 유통, 소비되는 상품으로써의 운명을 거부할 수 없다. 결코 그러한 사실은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보통의 상품과는 다른 사용법과 가치를 갖는 ‘사물’이라는 점, 그러한 사물이야말로 상품으로써의 문학이 갖는 부정의 존재방식이라는 점. 김중혁의 사물-소설은 그렇게 문학과 사물, 문학과 상품 사이를 넘나들면서 지금 우리 시대 문학의 존재의미에 대해 질문한다.(심진경|문학평론가·서울예대 강사)

07. 03. 10.

P.S. 연초에 게재되었던 '문화계 이 사람을 보라' 시리즈의 기사도 이 참에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1. 04) [2007 문화계 이사람을 보라] 3. 소설가 김중혁씨

그 ‘유명한’ 김중혁(36)을 만났다. 패서너블한 안경테와 언밸런스한 헤어스타일, 왼쪽 귀고리가 먼저 눈에 띈다. 추운 날씨에도 안에는 검정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겉에는 카키색 점퍼에다 숄더백을 걸친 것이 소설가라기보다 팝아티스트처럼 보인다. 소설을 쓰면서 잡지사 기자로, 프리랜서로 다양한 글을 써왔던 경력 덕분에 자세는 낮고 행동은 민첩하다. 문단의 어떤 모임에서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 사진을 찍다가 작가로서 멋진 인사말을 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소설가 김중혁은 새삼 주목을 요하지 않을 만큼 유명한 존재다. 지난해 3월 첫 소설집 ‘펭귄뉴스’(문학과지성사)를 낸 뒤 모든 게 달라졌다. 그의 작품은 ‘마니아적 취향으로 사물의 세계에 천착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인간중심주의를 깬 존재’ ‘디지털 문명이 인간의 감각을 바꾼 가운데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아날로그 감성에 대한 조명’ 등의 찬사를 받았다.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의 최종 후보로 오르내렸다. 한 중견작가는 “신인들의 작품은 새롭기는 하지만 좋다는 생각은 안드는데 ‘펭귄뉴스’는 새로우면서도 좋았다”고 칭찬했다.

“등단 6년 만에 책을 냈는데 재미있는 한해였어요. 계간지에 한 편씩 발표할 때는 얻지 못했던 독자들의 관심과 반응이 실감으로 다가왔고요. 책이라는 물질이 자기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김중혁 소설에는 자전거, 라디오, 타자기, 전화 등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것들이 등장한다. 지나간 추억이 올드 팝송이나 빛바랜 사물 속에서 반추되는 것처럼 작은 실마리로부터 농축된 이야기를 끌어낸다. 대중문화적 감성과 깊은 인생철학, 쿨한 서사와 예리한 감수성의 포착, 폭넓은 관심사와 집중력이 조화되면서 독특한 개성을 발휘한다. 실제로도 그는 학창시절부터 빌보드차트 100곡을 외우고 다녔던 음악광이자 요리, 여행, 영화, 미술 등 다방면에 걸친 박학다식과 취미를 자랑한다. 첨단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컴퓨터 라디오 등 기계에도 관심이 많다. 일러스트도 직접 그린다.

“못해도 재미있다 싶으면 해요. 그림을 잘 못그렸는데 일러스트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왜 학교 다닐 때 책에다 낙서하는 애들 있잖아요. 제가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상상력과 글, 그림이 모두 들어간 낙서야말로 종합예술인 것 같아요.”

책을 읽다보면 영화를 봐야 하고 그럼 만화가 밀려 있고 좋은 전시도 많고…. 그는 놀 때가 가장 바쁘다. 그래도 그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소설쓰기다. 모든 경험이 그 자체로 흥미롭지만 소설쓰기라는 한 꼭지점으로 수렴된다. 그러면서도 항상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의 70%만 한다는 것이 그의 삶의 원칙이다. 그래야 남은 힘으로 뭔가 새로운 걸 할 수 있으니까.

그는 시로 문학에 입문했다. 경북 김천 중앙초등학교 4학년때 만난 가장 친한 친구 김연수(소설가)와 중·고교 문예반에서 시공부를 했다. 그후 계명대 국문과에 들어갔는데 4학년때 비로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신춘문예에 여러차례 낙방했으며 2000년 계간 문학과사회에 ‘펭귄뉴스’를 내면서 등단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온 뒤 ‘페이퍼’ 등 잡지에 음악칼럼, 인터뷰를 썼으며 ‘리브로’ ‘베스트 레스토랑’ ‘트레블러’라는 전문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소설에만 매달리지 않은 이유는 억지로 쓰기보다는 쓰고 싶은 것을 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 걸친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청탁이 쇄도하면서 6개 단편을 쏟아냈다. 다음 소설집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음악을 소재로 한 작품을 썼다. 음악이 어떻게 우리의 섬세한 감정을 건드리는지, 왜 소리를 들으면 상상하게 되는지 등이 관심사다. 1~2편만 더하면 소설집을 묶어낼 수 있지만 거기서 멈췄다. 그 대신 지난 연말에 한 일간지 주말판 기자로 취직을 했다. 직장에 다니면서 꾸준히 장편을 쓰자는 생각이다. “소설집을 또 내는 것은 왠지 기만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그는 “내 단편을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장편을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다.

“소설가로 각광 받으면서 더욱 소설에 매진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취직한다니까 주변에서 우려하는 분도 많았고요. 그러나 소설을 쓰자고 강박관념을 가지면 소설이 안써질 것 같고, 소설만 쓰기에는 바깥에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아요. 전업작가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는 요즘 재미있는 책으로 자기 또래 작가들의 소설을 권한다. 이기호 박형서 편혜영 김애란 한유주 등에게 입사동기와 같은 느낌을 갖는다. ‘평생 같이 직장 다니면서 재미있게 놀아야지’ 하는 생각인데 그들이 커가는 걸 보면 샘도 좀 나고 뿌듯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본다. 힙합에서 피처링(다른 뮤지션이 한 소절을 연주해주는 것)처럼 ‘내 소설에서 잔인한 부분은 편혜영에게 맡겨볼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다. 그러기 위해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그의 새해 목표다.(한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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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10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문학에서의 '피처링'이라.. 패러디와는 또 다른 맛이네요.
대사는 김훈, 서사는 윤대녕.. 뭐 이런 것! ㅋ

로쟈 2007-03-1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닐 거 같습니다. 그게 생산적인 '합작'이 된다면 편견을 가질 이유도 없겠구요. 단지 그게 생각만큼 잘될까 싶은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