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 전시회가 '또' 개최되는 모양이다. '또'라고 한 것은 지난 연말에 '앤디 워홀 그래픽'전이 개최된 바 있기 때문이다(관련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026004). 이름하여 '앤디 워홀 팩토리'. 실제고 워홀 자신이 이끈 예술가 집단을 '팩토리'라고 불렀다. 전시회 소식은 아침에 '필름2.0'에 '앤디 워홀의 영화세계' 기획기사가 다루어지고 있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여기서는 한국일보의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참고로, 그의 영화들은 국내에서는 이번에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라고 한다. 워홀과 팝아트 애호가들에게는 '굿뉴스'이겠다.

한국일보(07. 03. 19)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 팩토리' 展

‘팝 아트의 왕자’ 앤디 워홀(1928~1987)이 죽은 지 20년, 그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는 대규모 회고전 <앤디 워홀 팩토리>가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15일 시작됐다. 워홀의 고향인 미국 피츠버그의 앤디 워홀 미술관에서 시기별 대표작 200여 점을 가져왔다.지난해 가을 서울대미술관과 쌈지길 전시로 불기 시작한 워홀 붐에 정점을 찍는 대형 전시다.

워홀은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만개한 팝아트를 대표하는 작가다. 팝 아트는 신문ㆍ잡지ㆍTV 같은 대중 매체, 상품 광고, 쇼윈도 등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만화 주인공, 영화 배우 등 대중적인 요소를 작품에 끌어들여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의 이분법을 무력화했다. 작품을 만드는 기법도 실크스크린처럼 상업 광고 등에 자주 쓰는 대량 복제 인쇄 방식을 썼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고 했던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Fctory), 즉 ‘공장’ 이라고 불렀다. 그는 ‘공장’에서 작품을 대량 생산했다. 똑 같은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그러니까 손 작업이 아니라 기계를 써서, 많은 조수를 부려서, 공산품 제조하듯 지겨울 만큼 반복적으로 찍어냈다. 마릴린 먼로, 마오쩌둥 같은 유명인이나 캠벨 수프 깡통 같은 일상 용품의 이미지를 수없이 복제해서 나열했다. 그는 작가의 독창성이나 개성, 감정까지 없애버린 대량생산물로서의 예술을 원했다.

왜 그랬을까. 아니, 그런 것도 예술인가. 친절한 설명은 아니지만 워홀이 했던 말이 있다. “나는 지겨운 것들을 좋아한다. 왜냐고? 당신이 곧이곧대로 똑 같은 것을 더 많이 쳐다보면 볼수록, 의미는 더욱 더 사라져 없어지고, 당신은 더욱 더 텅 빈 상태가 되어 더욱 더 좋은 기분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마오쩌둥이나 캠벨 수프 이미지로 벽을 도배하고 동선을 이리저리 엇갈리게 배치하는 등 워홀의 공장 분위기를 살려 공간을 독특하게 연출했다. 60년대 캠벨 수프 통조림 연작부터 꽃, 마릴린 먼로, 재클린 케네디 등 유명인의 초상 복제, 교통 사고나 추락사, 케네디 암살 사건 등의 신문 보도 이미지를 복제한 재난 연작, 다빈치나 보티첼리 등의 르네상스 명화를 차용한 작품 등 워홀의 주요 작품을 망라하고 있다.

특히 죽음의 이미지를 다룬 재난 연작은, 얼핏 화려하거나 경박하게 느껴지는 워홀의 세계가 지닌 깊은 어둠 혹은 정신적 외상의 흔적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들 연작은 끔찍한 사고나 죽음조차 대중 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내보임으로써 일상적인 것으로 소비시키고 마는 현대의 상황을, 미동도 하지 않고 차갑게 보여준다. 가발을 쓰거나 여장을 한 채 찍은 자화상도 인상적이다. 실크스크린 작품들 외에 드로잉, 사진 작품, 전시 포스터 등도 볼 수 있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은 워홀이 찍은 영화 8편을 상영한다. 워홀은 1960년대 후반부터 100편이 넘는 장편 영화를 제작했다. 감정을 배제한 채 장시간 꼼작하지 않고 극히 일상적인 장면을 관찰하고 기록한 그의 필름은 연출과는 거리가 멀다.

워홀은 스타가 되고 싶어했고, 소원대로 스타가 되어 지금도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돈도 왕창 벌었다. 그가 남긴 재산은 무려 1조 달러다. 작업실로 유명인들을 불러 시끌벅적 파티를 할 때도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며 일을 했던, 일 중독자이기도 하다.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워홀이 왜 그리 대단하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번 전시는 그런 질문들에 흥미로운 열쇠를 제공한다. 6월 10일까지.(오미환 기자)

07. 0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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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3-20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주 한국방송 토요일 문화다큐시리즈 주제가 앤디 워홀이었어요.아기 앉고 왔다 갔다하면서 봤는데....잭슨 폴락 이야기 보다가 아기가 울어서...워홀 이야기는 별로 못봣다는.^^

로쟈 2007-03-20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기를 '앉고' 계셨다니 쇼킹합니다.^^; 그가 벌어들인 돈 액수로도 확인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예술가형이 아닌가 싶어요...

드팀전 2007-03-20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아기를 안고...ㅋㅋ
 

아침에 경향신문에서 읽은 칼럼은 '대학 밖에서 꽃피는 인문학'. 실제 대학 밖의 비공식 '강의'도 한두 가지 맡아서 하고 있는 처지라 눈길이 가는 제목이었다. 기사의 낙관적인 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교양 인문학의 향방과 관련한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더불어, 대학가 교양 과목들의 폐강 현황을 다루고 있는 문화일보의 기사도 옮겨놓는다. 이 또한 호들갑을 떨 만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고, 은근히 '교양과목' 경시 풍조를 정당화하는 역효과를 낳기도 있지만 '데이터'로서의 가치는 있다(사실 교양 과목의 폐강에는 대학마다 최소 수강인원을 30명 이상 등으로 '과도하게' 설정하고 있는 것도 주된 이유로 작용한다. 비용 절감 차원이라지만 그로 인한 '과밀 강좌'가 교양과목 개설의 본래 취지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문화일보(07. 03. 19) '교양’이 무너지는 상아탑

교양 인문학과 제2외국어 강좌들이 대학에서 대거 퇴출되고 있다. 취업 준비에 목을 매고 있는 학생들에게 역사·문화·민속 등 순수 인문학 교양 강좌는 ‘사치’가 됐기 때문이다. 90년대 인기를 끌었던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 컴퓨터 교양 강좌도 대거 폐강됐다. 학생들의 관심이 ‘개발’보다는 ‘활용’으로 넘어간 세태 변화를 반영한 것이지만, 교양을 쌓아야 할 대학신입생들로부터 ‘교양’을 아예 배제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교양 인문학은 퇴출 1순위 = 역사와 문화 등 교양 인문학 강좌들은 대부분 대학의 폐강 리스트에서 발견된다. 성균관대에서는 ‘일본역사탐구’, ‘세계영화와 문화교류’ 등 10여개의 역사·문화 관련 강좌가 최소 수강인원을 못채워 폐강됐다. 중앙대에서는 ‘문화 이해와 수사학’ ‘현대사회와 민속’ 등이, 한양대는 ‘동아시아 문화’ 등이 폐강 명단에 포함됐다. 철학 관련 강좌도 인기가 없기는 마찬가지. 동국대에서는 ‘철학·과학·생명·가치’, ‘현대사회의 철학적 이해’ 등의 강좌가 폐강됐고, 서강대에서는 ‘신학적 인간학’ 등이 기준 수강생을 채우지 못했다.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수용자 중심의 교육으로 바뀌고 학생들이 취직 준비 등을 우선시하면서 실용적인 학문에 치우쳐 공부하는 현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 했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도 “최근 대학들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 배출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지식의 변화속도 가 매우 빠른 현대 사회에서 대학은 오히려 기초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2외국어도 관심 밖으로 = 국내 기업의 중국 진출이 확대되면서 중국어 인기는 여전하지만 독일어나 프랑스어 등 전통적 제2 외국어는 학생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중앙대에서는 ‘독일문화와 예술’, ‘독일 정치와 사회’ 등이 폐강됐고, 성균관 대에서도 ‘독어의미론’ 등의 강좌가 폐강됐다. 숙명여대의 ‘ 독일어1’ 강좌, 단국대의 ‘기초독일어’ 등의 강좌도 폐강됐다. 동국대에서는 ‘기초독일어’, ‘기초불어’ 등이 폐강됐다.

김영주 숭실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사실 우리나라에 진출한 독일 기업만도 300여개가 되는데 세계화가 미국화로 오인되면서 독일 관련 과목들이 폐강되고 있다”면서 “진정한 세계화를 위 해서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컴퓨터 언어도 옛날 얘기 =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과 관련된 기초 강좌들도 쇠퇴 일로를 걷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인력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학생들의 관심은 컴퓨터 활용에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대에서는 ‘자바(JAVA)프로그래밍’과 ‘웹 프로그래밍’ 강좌가, 단국대 ‘비주얼베이직(Visual Basic) 입문’, 동국대 ‘프로그래밍기초와실습’ 등의 강좌가 폐강됐다. 연세대의 ‘컴퓨터와 IT 기술의 발전과 활용’, 성신여대의 ‘IT와 지리정보’ 강좌 등도 폐강 리스트에 올랐다.(음성원 기자)

경향신문(07. 03. 19) 대학 밖에서 꽃피는 인문학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는 필자에게 최근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최근 한 단체의 초청을 받아 근현대사를 강의했는데, 수강생들의 자세가 대학과 달리 진지하고 열정적이어서 내심 놀랐다고 말했다. 수강생들은 복지재단이나 장애인·아동생활시설 등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들. 그는 사회복지사들이 전공과 무관해 보이는 역사·철학 등에 관심을 갖는 것을 보고 인문학의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고 했다.

서울 예술의전당 이동국 학예사도 지난 겨울 추사 학술강좌에 참여한 수강생들의 열기에서 인문학의 힘을 느꼈다고 전했다. 1월부터 두 달간 주말에 열린 특별 강좌에는 매번 200명 가까이가 몰렸다. 연 인원이 1000명에 달했다. ‘추사의 학문과 예술’ 등 모두 21개 강좌가 개설됐는데, 토요일 1시부터 7시까지 진행된 강좌를 빠짐없이 들은 사람도 상당수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 학예사는 “전시장에서 구체적인 작품을 놓고 강의한 게 관객들에게 어필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인문학이 꽃피고 있다. ‘인문학 위기 선언’이 나온 지가 불과 몇달 전인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이다. 만개하지는 않았어도 최소한 개화할 조짐은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물론 대학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곳의 인문학은 여전히 ‘위기’이다. 문학, 역사학, 철학 관련 학과들은 학생수를 채우지 못해 폐과 대상 1순위이다. 서울대를 비롯한 많은 대학들이 대학원 중심 대학을 외치지만, 정작 진학자가 없어 공허한 울림이 되고 있다.



반면 캠퍼스 밖의 인문학 공부의 열기는 뜨겁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안 연구공동체를 표방하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이다. 이곳은 그간 단기적으로 운영해온 강좌를 올해부터 학기제로 바꿔 장기 강좌 중심으로 꾸렸다. 철학, 고전강독, 문화예술, 글쓰기를 강의한다. 수강료가 과목당 35만원씩 하는데도 접수를 받기 시작한 지 1주일도 안돼 정원을 다 채웠다. 강좌뿐 아니라 회원들의 공동 연구에도 힘을 쏟고 있는 ‘수유+너머’는 지난주 ‘모더니티의 지층들’이라는 묵직한 사회학 개설서를 펴내 주목을 받고 있다.

부산의 ‘인디고서원’은 이제 꽤 이름을 얻었다. 인디고서원은 서점이다. 그러나 인디고는 책 판매에 그치지 않고 독서 프로그램 운영, 명사 초청 강연 등을 통해 청소년 대상의 인문학 교육장이 되고 있다. 이밖에 철학아카데미,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디지털문화예술아카데미 등에서 다양한 인문학 강좌를 열고 있다.

주목할 점은 최근의 인문학 교육이 서민과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공회 노숙인다시서기 지원센터는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을 개설하고, 광명시는 ‘광명시민대학’에 인문학 과정을 포함시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또 ‘경기광역 자활후견센터’와 ‘관악일터나눔 자활후견기관’ ‘노원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도 각각 지역민을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운영중이다.



지난주에는 의정부교도소에서 국내 처음으로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좌가 열렸다. ‘빈자(貧者)의 인문학’을 내건 얼 쇼리스가 창안한 클레멘토 코스를 한국에 적용한 것이다. 10년 전 뉴욕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철학, 예술 등을 가르쳤던 얼 쇼리스는 “인문학이 가난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에게 정당한 힘을 갖게 해 준다”고 믿고 있다. 인문학(humanitas)을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학문’이라 한다면, 쇼리스의 ‘빈자의 인문학’은 인문학의 본령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쇼리스의 인문학 강좌는 이제 캐나다, 호주, 멕시코 등 4개 대륙으로 수출돼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의 인문학 위기는 학문 또는 인문학자의 위기라기보다는 인문적 지적 풍토의 허약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이런 측면에서 교양을 쌓고, 자신을 성찰하며, 삶을 바꿔나가는 ‘장외의 인문학’ 열기는 분명 주목할 일이다.

교육부와 학술진흥재단은 올해 인문학 위기 타개를 위해 200억원을 투입할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 ‘위기에 처한 대학’을 지원하기 위해 쓰여질 터이지만, 대학 밖의 인문학 활동에 대해서도 지원 방안이 검토돼야 하지 않을까(*국가에서 지원하는 인문학은 여전히 '대학 밖'의 인문학일까?). 그간 많은 학술지원사업이 내실보다는 외형에 치우쳤다는 비난이 많았다. 이제는 인문학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는 공부와 연구 활동에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진정한 대학은 넓은 캠퍼스가 아니라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지는’(‘大學’) 곳이기 때문이다.(조운찬 문화1부장)

07. 0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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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19 16:18   좋아요 0 | URL
이런 현상들이 제가 음모론을 신봉하는 이유입니다. 후후

토토랑 2007-03-19 17:28   좋아요 0 | URL
흠흠... 중간에 조금 딴지이긴 하지만요 로쟈님..
IT 인력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고는 하지만.. 점점 유입인력이 감소하고 있어서
요즘은 인력소싱하기도 힘들어요 --;;;
몇년만 지나면 IT쪽 인력난이 대두될거에요..아마.. 인문학과는 상관이 없지만 그냥 주절주절 하고 갑니다.

기인 2007-03-19 17:48   좋아요 0 | URL
음 퍼갑니다;; 수료하면 강의 자리 구할 수 있을지 원;;
 

한 대학신문에 기고했던 기사를 옮겨놓는다. 갑작스런 청탁을 받고 급조한 것이어서 미흡한 대목들이 없지 않은데, 핑계라면 분량이 너무 한정돼 있었다는 것. "보드리야르의 사상과 업적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지, 그의 학문(사상)이 어떻게 전수돼고 있는지"에 대해서 12매 분량으로 쓰는 일은 나의 능력을 벗어난다. 그저 한 '독자'로서 몇 가지 인상만을 나열하는 데 만족했다.  

대중적으로는 ‘매트릭스’의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1929-2007)가 세상을 떠났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하이퍼리얼리티의 이론가에게 걸맞은 표현을 쓰자면 이 세계로부터 ‘로그아웃’했다. <사물의 체계>(1968)로 지식사회에 명함을 내민 지 얼추 40년만이다.  

그리하여 그의 학문적/이론적 삶에 대한 본격적인 독해와 평가가 이제 남은 이들의 몫이 되었다. 그것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네는 두 가지 알약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처럼도 보인다. 빨간약이냐 파란약이냐, 혹은 보드리야르를 기억할 것인가 잊어버릴 것인가.

 

빨간약을 입에 넣을 경우 우리에게 펼쳐지는 초기화면은 1960년대 중반 프랑스 지식계의 풍경이다. 보드리야르는 낭테르대학에서 <현대세계의 일상성>(1968)의 저자 앙리 르페브르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하고 롤랑 바르트의 <모드의 체계>(1967)을 연상시키는 첫 번째 연구서를 출간한다. 그것이 <사물의 체계>이다(*국역본이 신뢰할 만한지는 의문이다). 이 ‘사물’에 대한 관심은 그의 이론적 여정에서 줄곧 견지된다.

 

 

 

 

 

 

 

 


자신의 이론적 여정을 요약해주고 있는 책 <암호>(2000)에서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첫 번째 ‘패스워드’가 바로 ‘사물(objet)’이었다. "나에게 사물은 암호 중의 암호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그러한 관점을 취했는데, 왜냐하면 주체라는 문제틀과 단절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물의 문제는 (...) 지금까지도 나의 사유의 지평으로 남아있다."고 그는 적었다.


보드리야르가 다루는 사물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상품’들이다. 1960년대는 사물들이 득세하게 된 시대, 본격적인 상품들의 시대였다(동시대 작가인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1965)을 떠올려보라). 그러한 시대를 일컫는 말이 ‘소비사회’이며 이 새로운 사회를 주도하는 것은 더 이상 생산이 아니라 소비이다. 그의 초기 사회학적 작업은 이 소비사회의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에 바쳐진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소비사회에서의 상품가치는 ‘사용가치/교환가치’라는 문제틀만으로 더 이상 유효하게 분석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재평가하면서 ‘기호가치’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요즘 쓰는 말로는 ‘브랜드가치’가 예가 되겠는데, 가령 사치성 소비재, 소위 ‘명품’에 대한 수요는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란 용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명품의 가치는 말 그대로 ‘이름값’이기 때문이다.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1972)은 그러한 ‘이름값’으로서의 기호가치에 대한 이론적 분석이다. 그에 따르면 상품은 더 이상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데 봉사한다.    


상품들과 기호가치가 범람하는 보드리야르적 세계는 1970년대 후반 이후에 컴퓨터화되고 디지털화된 세계로 ‘버전-업’된다. 그것이 그가 펼쳐놓는 두 번째 화면이며, 보드리야르는 이것을 ‘코드’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부른다. 여기서도 여전히 사물들은 그의 주된 관심대상이지만 그 존재론적 차원은 변화한다. 이것은 가상세계이지만 현실과 가상이라는 구분/구획 자체가 무효화되기에, 즉 더 이상 원본과 모사물(시뮬라크르)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가 유지되지 않기에 ‘가상화된 현실’이고 ‘현실화된 가상’이다. 그러한 현실-가상을 축조하는 방식이 시뮬라시옹이다(이 새로운 시대, 포스트모던은 ‘나훈아’의 시대가 아니라 ‘너훈아’의 시대이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세계는 가역성의 원리가 지배하며 극단적으로 말해서 죽음조차도 불가능한 세계이다(우리는 로그아웃할 수 있을 따름이다). “걸프전을 일어나지 않았다” 같은 악명 높은 주장은 그러한 차원에서 제기된다. 이 ‘불가능한 죽음’을 이제 우리는 ‘보드리야르’라는 기호-이름에도 되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름의 주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가 보드리야르라는 ‘빨간약’을 먹을 때마다 우리 눈앞에 언제나 되살아날 것이다.

 

07. 03. 19.

 

 

 

 

 

 

 

 

 

 

P.S. 짤막한 기고문을 작성하는 일이라고 해서 품이 덜 드는 건 아니고 나는 부랴부랴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에서 리처드 레인이 쓴 <장 보드리야르>(루틀리지, 2000)을 구해 읽어보았다. 물론 서론과 문헌해제를 주로 읽어본 것이었지만(*최근 번역돼 나왔다. -08. 03. 07). 

 

 

 

 

 

 

 

 

 

그리고 몇몇 관련문헌들을 읽어보았다. 이런 글을 쓸 때 요긴한 책은 존 레흐트의 <현대 사상가 50>과 존 페파니스의 <이질성의 철학>, 그리고 미셸 리샤르 등이 쓴 <오늘의 프랑스 사상가들> 등이다. 마단 사럽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도 보드리야르에 대해서 한 장이 할애돼 있다(이 장은 개정판에 추가된 것이며,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 초판에는 빠져 있다).

 

한편, 처음 작성한 원고에는 다음과 같은 자기변명조의 문단이 포함돼 있었다: "내게 잠시 부여된 역할은 얼치기 장의사의 그것이다. 관을 짜기 위해서 죽은 자의 치수를 재듯이 그가 남긴 이론 혹은 사상의 사이즈를 재는 것이 나의 몫이다. 현실적으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하지만 내가 거들지 않더라도 견적은 이미 다 나와 있다!). 모사물(시뮬라크르)이 실재를 대신하는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라면 불가능할 것도 없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사실 보드리야르 자신이 ‘지적 사기꾼’이란 혹평도 심심찮게 들었던 만큼 그의 사상에 대해서 섣부른 관견을 늘어놓는 일이 심하게 무례한 건 아니겠다." 그건 내가 다른 사상가들에 관해서였다면 섣불리 이런 일을 맡지 않았을 거란 얘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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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7-03-1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네요..^^;; 그래도 끝까지 읽어봤어요.

로쟈 2007-03-19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닥을 잡고 읽으시면 그렇게 이해 곤란한 얘기들을 늘어놓는 사람은 아닙니다.^^;

faai 2007-03-20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짧게 쓰기가 더 어려운 법이죠.
 

<롤리타>로 유명한 러시아계 작가 블라디미르 나코보프의 저명한 인시류(나비/나방류) 전문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롤리타>를 제외하면 변변한 번역 작품이나 무게 있는 연구서를 접할 수 없는 게 국내의 현실인데, 이 인시류 학자 나보코프의 전모를 다룬 중량감 있는 저서가 번역/출간됐다.

구내서점에 갔다가 냉큼 사들고 온 책의 타이틀이 바로 <나보코프 블루스>(해나무, 2007)이고, '한 천재 문학가의 과학 오디세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는 인시류 학자인 커트 존슨과 <뉴욕타임즈> 편집자인 스티브 코츠. 그리고 제목의 '블루'는 "남아메리카의 가장 외진 지역에 서식하는 다양한 나비 무리를 아우르는 명칭"으로서 나보코프는 ‘블루’ 전문가였다고 한다. 언젠가 나보코프 관련서들을 검색하다가 보아둔 책이었는데, 이렇듯 빨리 국내에 소개될 줄은 몰랐다(원저는 1999년에 나왔다).

인시류학자로서 나보코프의 전문성은 1945년 하버드대 비교동물학 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위촉되었던 사실에서도 확인되는데, 그는 블루의 분류체계에 관한 여러 새로운 논문을 발표한 바도 있으니 나비 수집과 연구가 취미 수준은 넘어선 것이었다. 

책은 "만약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나비 연구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고백한 나보코프의 나비에 대한 특별한 열정을 다루고 있는데,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생전에 쓴 추천사에 따르면, "두 저자 존슨콰 코츠의 생물학적 전문성과 나보코프의 업적에 대한 철저한 이해 덕분에 우리는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문학자이자 과학자가 지니는 두 가지 표상을 통합하고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뒷표지에 나란히 달려 있는 또다른 추천사에 따르면 "한 전설적인 작가의 과학적 발견과 그것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과정, 거의 반세기가 지난 후의 재발견과 확장을 다루고 있는 <나보코프 블루스>는 한마디로 놀라운 책이다. 과학적 발견의 아이러니와 우연, 빠르게 확장되어가는 생물다양성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어 누구에게라도 매력 있게 다가갈 것이다."

이 추천사의 필자가 저명한 나보코프 연구자이자 가장 권위있는 평전의 저자 브라이언 보이드이다. 그가 쓴 전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 시절'과 '미국 시절' 두 권으로 돼 있는데, 이미 독어와 러시아어 등으도 완역되었다(아래 이미지는 러시아어본 <미국 시절>과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

나보코프에 대한 전기가 소개된다면,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과 함께 가장 먼저 번역되어야 할 책이다...

07. 03. 19.

P.S. 참고로, 나보코프의 나비 연구에 관한 책은 <나보코프 블루스>가 처음이 아니다. <나보코프의 인시류: 유형과 종류>(서울기획, 2001)란 책이 출간된 바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Joann Karges이고 지난 1985년에 출간된 아주 얇은 책으로 <나보코프 블루스>의 참고문헌에도 포함돼 있다. 국역본은 오래전에 국립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복사해둔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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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7-03-19 17:41   좋아요 0 | URL
Ada or Ador: Family Chronicle인가 하는 책에서....(배다른 오누이의 사랑...성...을 다룬 파격적 소설..)..나비나 곤충 관찰에 대한 묘사가 많이 등장했던걸로 기억해요...주인공인 Ada가 소녀시절 곤충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던...기억이...
나보코프...참으로 독특한 천재지요....

로쟈 2007-03-19 19:58   좋아요 0 | URL
나보코프 애독자시네요.^^ 다른 작품에서도 나비 모티브가 자주 나오는데, 나보코프는 국내에 소개된 작품 수가 너무 적어서 아쉽습니다...

수유 2007-03-19 20:39   좋아요 0 | URL
저도 냉큼 사왔습니다..그리고 링크하실줄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젊은 나보코프와 늙은 나보코프는 많이 다르군요..그의 인생여정과 관련이 있겠지요..
 

20세기의 역사를 통째로 다룬 책들도 이젠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 나온 클라이브 폰팅의 <진보와 야만>(돌베개, 2007) 또한 '20세기 통사'이다. 특징이라면 유럽 중심적 관점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 책이라는 점. 언론 리뷰들에서 많이 다루어졌기에 더 보탤 말은 없다. 문화일보의 리뷰가 자세하기에 관련기사와 함께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7. 03. 16) 진보, 야만을 낳다 - 20세기 인류발전의 빛과 그림자

[질문 1]지난 20세기 사람들의 사망 원인 가운데 질병과 기아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다음 중 무엇이었을까. ⓐ교통사고 ⓑ제노사이드(Genocide·민족, 종교 등의 차이를 이유로 한 집단 학살 행위) ⓒ자연재해 ⓓ전쟁 [질문 2] 지난 20세기 세계 각국의 정부형태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입헌군주정 ⓓ독재 [질문 3] 20세기 말 인류는 1900년에 비해 얼마나 늘어났을까. ⓐ1.5배 ⓑ2배 ⓒ3배 ⓓ4배

세 질문의 답은 모두 ⓓ다. 지난 세기 교통사고로 2500만명, 자연재해로 1000만명, 제노사이드로 1400만명이 죽은 데 비해 전쟁으로 인해 1억5000만명이 사망했다. 물론 기근으로 인해 죽은 인구는 이를 훨씬 웃돌았다. 또한 자유민주정부나 사회주의 정부보다 20세기를 지배했던 정부형태는 바로 독재였다. 인구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해 100년 사이에 약 4배로 늘어났다. 이 같은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기술의 발전을 이룩한 20세기지만 그 이면에 이처럼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것은 역사의 진보 또는 발전이란 개념을 무색게 하는 것이 아닌가.



‘20세기의 역사’란 부제가 붙은 책은, 한마디로 지난 세기 인류가 이룩한 진보의 이면엔 야만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다고 규정한다. 진보와 야만이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돼 있다는 것이다(이젠 이러한 시각 또한 상식이 되어야 하겠다). 저자는 “20세기에 있었던 두 개의 가장 파괴적인 정치운동, 즉 공산주의와 나치즘은 유럽의 역사와 사고방식의 깊숙한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20세기의 야만성은) 18세기 계몽주의와 19세기로부터 물려받은 유럽적 유산의 훨씬 더 어두운 측면”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진보주의는 거대한 생산력 증대와 인구증가, 인간 수명의 획기적 연장, 세계의 통합 등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파시즘과 나치즘, 1·2차 세계대전과 집단학살, 국가폭력, 독재정권, 거대한 환경파괴 등 기괴한 야만을 낳았다는 것이다. 책은 이 같은 진보와 야만의 20세기를 풍부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세밀하게 보여준다.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보자.

◆ 식량부족과 기아 = 1990년대 말에도 매년 4000만명이 굶어죽거나 그와 연관된 질병으로 사망했다. 물론 전 세계의 식량 생산은 크게 늘어났으나 인구증가율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게다가 분배의 측면에선 이전보다 훨씬 불평등해졌다. 아주 보수적으로 추산하더라도 20세기 100년 동안 기근으로 인해 최소 1억명이 죽었다. 일생 동안 배고픔과 반(半)아사 상태에서 산 사람들의 수는 수십억 명에 달한다.

◆ 공업 생산의 편중 = 1953년 이후 20년 동안 세계 공업 산출량은 이전 150년간의 공업 산출량의 총합과 맞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단히 편중돼 있었다. 20세기 말에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세 나라의 공업 생산이 세계의 절반을 차지했으며, 여기에 중국, 독일, 프랑스, 영국을 합친 7개국의 공업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의 4분의 3에 이르렀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의 비중은 더 하락했다.

◆ 부의 불균형 = 전 세계 사람들의 평균 소득이 증가했지만 이 역시 불평등한 현상이었다. 1900년에 가장 부유했던 국가들은 2000년에도 가장 부유했고, 최빈국들도 거의 변함이 없었다.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간극은 줄어들기는커녕 훨씬 더 벌어졌다. 20세기 초 3배에 달했던 중심부와 주변부의 소득 격차는 20세기 말에는 7배 차이로 늘어났다. 1990년대 중반에 89개국 사람들이 1980년대보다 더 가난해졌고, 43개국 사람들은 심지어 1970년대보다도 가난해졌다.

◆ 국가폭력의 증대 = 20세기에 각 국 정부는 자국민을 얼마나 죽였을까. 최악은 5000만명을 기록한 공산당 치하 중국이다. 1700만명을 기록한 소련과 1000만명의 자국민을 죽인 국민당 치하 중국이 뒤를 잇고 있다. 아시아 공산주의 정권은 최소 400만명을 학살했으며, 독립 이후의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300만명에 가까운 자국민을 죽였다. 전 세계적으로 정부에 의해 학살당한 국민은 최소 1억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진보가 이룩한 성과에 대한 지적 또한 잊지 않는다. 20세기에는 산업 생산의 거대한 팽창이 있었고, 이것은 19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었다. 전기를 비롯, 자동차·전화·TV 등 신기술은 인류의 삶을 변화시켰다. 20세기가 막 시작되면서 만들어졌던 원시적 수준의 비행기는 세기 말엔 수억 명의 사람들이 매년 지구 곳곳을 여행할 수 있는 수준으로 도약했다. 컴퓨터와 반도체, 로봇과 실리콘 칩 등과 같은 기술은 20세기 초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술이었다. 또한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글자를 깨우쳤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20세기는 진보와 야만이 나란히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면서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큰 야만성은, 세계가 매우 빈곤한 압도적 다수와 부유한 소수 사이의 거대하고, 더욱 증대하는 불평등으로 특징지어졌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주변부의 극빈국에서 중심부 국가로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한국인들로선 선뜻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군부독재의 세월을 헤쳐왔던 우리 역시 이 같은 ‘진보와 야만의 20세기’를 극명하게 경험한 것이 아니겠는가.(김영번기자)

 

문화일보(07. 03. 20) "日 자본주의 급성장은 식민무역 덕”

영국 역사학자 클라이브 폰팅의 저서 ‘진보와 야만’에선 20세기 주변부 국가에서 반(半)중심부 국가로 지위 상승한 국가로 한국과 대만을 꼽는다. 1900년대 초의 세계 역학 구도가 20세기 말에도 크게 변하지 않은 가운데 100년 동안 주변부 국가에서 중심부로 가까이 다가선 국가들은 찾아보기 힘드는데, 유독 한국과 대만이 그같은 ‘희귀한’ 사례로 꼽힐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과 대만이 그같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어떤 원인과 과정이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는 논문들을 집중 소개한 책이 최근 발간됐다. 한국을 비롯, 일본·대만 학자 11명이 힘을 합쳐 만든 ‘일본 자본주의와 한국·대만’(전통과 현대)이다. 1945년 이전의 일본과 한국, 대만의 경제를 통시적으로 고찰한 책은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동아시아 경제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한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 하의 조선과 대만 경제를 실증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이 시기에 일어난 3국의 경제변동을 가감없이 전달하고 있다. 저자들은 이와 관련, “식민지에서 공업화 전개나 생산력의 발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식민지 지배의 미화 또는 정당화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면서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는 어떠한 궤변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 한국 및 일본·대만의 고속성장 배경 = 호리 가즈오(堀和生) 일본 교토(京都)대 교수는 ‘일본제국과 식민지 관계의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에서 무역 분석 결과를 통해 1·2차 대전 사이의 일본과 조선·대만 간 관계의 특징을 분석하고 있다. 일본의 무역량은 1930년대에 특이할 정도로 팽창했다. 1930년대 말 일본의 대 식민지 무역은 당시 최대의 식민 제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대 식민지 무역량을 능가할 정도였다. 이는 곧 식민지가 일본에 광대한 시장을 제공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식민지가 일본에 대량의 곡물과 식료품을 제공하면서, 역으로 일본으로부터 생산재와 자본재를 도입하는 무역 내용은 일본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맞물려 있다.

호리 교수는 “양차 대전 사이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분업관계, 즉 자본주의적 국제관계가 형성되어가고 있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면서 “그것은 일본제국의 팽창, 침략과 전쟁, 식민지 지배의 강화라는 과정과 겹쳐 있었다”고 밝혔다. 이같은 과정이 식민지 주민을 위해 진행된 것은 아니었으며, 때로는 식민지 주민의 의사에 반하는 방향으로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 이후 이 지역의 고도성장은 이같은 역사적 과정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 호리 교수의 결론이다.

2차 대전 이후 거대한 미국시장의 등장이나 기술 이전의 가능성이라는 일반적인 조건이 다른 국가에도 있었음에도 유독 일본이 선진자본국으로 올라서고, 한국·대만이 신흥공업국(NICs)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시대 동아시아에서 형성됐던 역사적 조건에서 그 원인 중 하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은 식민지 및 종속지역 등의 주변 사회를 자본주의에 적합하게 재편성함으로써 일본 자본주의 발전에 아주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냈으며, 조선과 대만은 그같은 자본주의적 재편성에 의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산업사회로 변모해갔다고 호리 교수는 밝혔다.

◆ 조선과 대만의 공업화 = 김낙년 동국대 교수는 수록문 ‘식민지 시대 공업화 비교:대만과 조선’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체제는 자국의 제도를 식민지에 이식해 본국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구했다는 점에 가장 큰 특징이 있다”고 밝혔다. 즉, 식민지 시대 초기부터 토지제도 개혁에 착수했으며, 관세와 통화제도를 일본에 통합시켰다는 것. 이같은 제도적 통합은 대만과 조선경제에 매우 유사한 특징을 부여했다. 대일 무역이 급증, 무역의존도가 매우 높은 형태로 변모했으며 일본 자본이 주도하는 이식(移植)공업화가 전개됐다.

김 교수는 “광복 후 한국과 대만의 경제성장 유형은 식민지 시대와 매우 흡사했다”면서 “이러한 연속성은 한국과 대만이 두 시기 모두 개방체제 하에 놓여 있었다는 점에 기인한 듯하다”고 추론했다. 즉, 2차 대전 이후 식민지 지배에서 독립한 나라들은 개방체제를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지만, 한국과 대만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대외 개방으로 정책을 전환한 데에는 이같은 식민지 하 개방체제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과 대만이 NICs로 발전할 수 있었던 하나의 조건이 됐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 그는 또 “광복후 경제가 식민지 시대와 비교해 두드러진 특징은 민족국가가 출현, 산업정책이 전개됐다는 점”이라며 “특히 한국은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이 적극적으로 이뤄져 대만과 거시적 경제 운용 등에서 차이를 초래했다”고 덧붙였다.(김영번기자)

07. 0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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