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주말판에는 '서양사상의 뿌리를 찾아서'가 연재되는데, 서양고전학 전공자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집필하고 있다. 한 면의 2/3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나름 파격적인 지면구성이라고 할 만하다. 얼마전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관한 연재를 옮겨온 바 있는데, "'삶에 대한 앎'은 삶의 강제다"라는 주장을 내건 이번 주 꼭지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4. 28) 지식의 궁극적 쓸모

지식의 쓸모는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을까? 권력 획득의 도구에, 재산 증식에, 박학다식함의 자랑에 있을까? 지식이 자본인, 지식-자본(scientia-capitalismus)의 시대에 쓸모없는 물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쓸모없는 물음과 잠시 씨름하고자 한다. 우리는 도대체 왜 뭔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가? “인간은 본성상 알기를 원하기”(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80 a 21) 때문이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에 따르면, 지식은 “어떤 쓸모”가 있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모르는 것과 부딪혔을 때 자신이 모른다는 자각과 함께 그것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생겨나고, 이는 생활의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앎 자체의 욕구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이 ‘앎 자체’에 대한 욕구는, 그것이 욕구인 한, 욕구의 주체인 인간에 속하지만, 이 욕구는 좀 특이해서, 욕구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무엇’이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한다. 재미있는 생각이다. 대체로 지식의 습득 여부가 학력을 결정하고, 학력이 삶의 수준(?)을 결정하는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좀 이상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좀더 읽어 보자.

“가장 보편적인 것이 사람들에 있어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다. 감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기에. 지식 중에서 일차적인 것에 가장 가까운 지식이 가장 정확하다. 더 적은 수의 원리로 구성된 지식이 추가적인 원리를 필요로 하는 지식보다 더 정확한 지식이기에 그렇다. 예를 들면 산술학이 기하학보다 더 정확하듯이 말이다. 원인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또한 가르침을 더 준다. 각각의 것에 있어서 원인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많은 가르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를 목표로 하는 앎과 지식은 지식을 대상으로 삼는 지식에 속한다. 그 자체로의 지식을 선택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체로’ 지식인 것을 선택할 것이다. 이 지식은 무엇보다도 대상에 대한 지식의 지식이다.” (‘형이상학’ 982b 21-982b10)



읽다보니 어느 사이에, “사물들의 일차적인 원인들과 원리들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세계에 도달해 버렸다. 여기가 형이상학의 세계다(Ecce! hic est metaphysica). 지식이 지식을 대상으로 놓고 따지는 세계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을 묻고 싶다. 형이상학의 세계에 온 소감을! 어렵고, 무슨 소린지 감을 못 잡겠고, 철학하는 사람들 정말 쓸모없는 짓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한 가지만 확인하고 이론(理論)의 세계에서 현실(現實)의 세계, 삶의 세계로 돌아가자.

어떤 이가 무엇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다 해서, 그 정보가 완전한 지식일까?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서 그것이 단편적 정보는 될지언정, 진정한 앎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에 대한 지식이 앎으로 성립하려면, 그 지식에 대한 앎의 체계(학문)가 성립해 있을 때만이 가능할 것이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앎이 앎으로 설 수 있도록, 앎에 대한 앎의 세계에 대한 기초를 마련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어떤 쓸모” 없는 앎, “앎 자체”의 욕구가 펼쳐낸 이론의 세계가 “학문(scientia)”의 세계다. 학문은 ‘쓸모없음’이 만들어낸 세계인 셈이다. 하지만 ‘진리(veritas)’가 상주하는 공간이 또한 학문의 세계다.

이렇게 앎의 세계에서 위엄과 권리를 자랑하던 진리를 삶의 세계로 끌어 내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다. “철학(지혜의 사랑, 학문)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피타고라스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물에 실제 지식을 넓혀준 현인(賢人)이기도 한다. (중략) 그러나 학문이 처음 생겨났던 고대로부터 소크라테스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학문은 수(數)와 운동(運動)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만물이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어디로 되돌아가는지 그리고 별자리의 크기와 별자리 사이의 거리와 ‘별들의’ 운행 행로 등 온통 천문(天文)에만 정성을 기울였다. 물론 소크라테스도 ‘자연학자’ 아낙사고라스의 제자인 아르케라오스의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첫 번째다. 처음으로 학문을 하늘의 세계에서 도시(국가)로 끌어 내렸고 또한 집안으로 끌고 들어왔던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삶(vita)에 대해서, 사람 사는 법(mores)에 대해서, 선과 악에 대해서 따지고 캐물었다. 다양한 관점에서 따지고 캐묻는 방식과 다루었던 주제들의 폭넓음과 그가 보여주었던 지성의 크기는, 이는 플라톤의 기억과 기록을 통해서 신적 경지의 반열에 올랐다.”(‘투스쿨라눔의 대화’ 제5권 10~11장).

키케로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삶의 문제를 걸어서 앎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한 첫 번째 사람인 셈이다. 앎의 세계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이전의 학문 세계와는 다른 종류의 앎의 세계를 열고 있다. 삶의 입장에서 앎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기존 앎 중심의 지식 세계가 삶의 통제를 받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를 통해서 앎의 세계와 삶의 세계 사이에는 서로 교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겨나는데, 이 통로가 “철학”이라는 길(via)이다.

키케로가 말하듯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피타고라스의 철학(앎)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삶과 앎을 연결해준다는 점에서, 앎을 일차 대상으로 추구하는 분과 학문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삶의 요구를 앎의 세계에 요구하고 전달한다는 점에 삶의 지킴이로서, 앎의 세계의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학문인, 철학이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인 셈이다. 앎 일반을 지칭하는 의미로서의 철학이 아닌, 비판적 기능의 수행자로서의 철학이 말이다.

비판적 의미에서 “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던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그는 이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삶에 실천한 철인(哲人)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안다는 것과 철학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름을 일깨워 준 이가 소크라테스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앎과 삶의 관계에 대해서 좀더 따져보면 어떨는지? 곧 삶과 앎은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앎은 삶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삶이 앎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아마도 가능하다면 앎이 삶을 통제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싶다. 앎은 예측 가능하고, 항상성(constantia)을 보장하기에. 하지만 앎이 삶의 영역을 얼마나 포괄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안다는 것의 경계는 어딜까?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은 아닐까? 결국 앎의 구경(究竟)은 결국 미지(未知)의 바다가 아닐까? 그런데 삶은 이 미지의 바다에 던져진 것이라면, 앎은 삶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삶은 앎의 통제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인간조건(conditio humana)의 근본적인 제약에 부딪히고 만다. 그러니까 앎이 삶의 전 영역을 모두 포섭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예컨대 아름다움에 대해서, 과연 보편의 앎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 정확한 계산이 가능하지 않은 그리고 일률적인 척도와 기준을 허용해선 안 되는 영역이기에 그렇다. 곧 앎의 보편 세계가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고 마구잡이로 개입해선 안 되는 공간이 삶의 공간엔 있고, 실은 그것이 ‘사람살이’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삶은 앎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은 분명하다. 아는 것이 힘(Knowledge is power)인 시대를 넘어, 모르면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기에 그렇다. 어찌 되었든 배워야 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을 믿는다.

그러면 앎은 삶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따져보자. 앎이 앎의 세계 안에서만 머무르고, 삶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문제에 대해선 이미 소크라테스가 비판했다. 그는 앎의 세계만을 중시하는 학문(Wissenschaft)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접근해, 삶의 영역에서의 앎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곧 철학(Philosophie)을 정초했다. ‘삶 안에서의 앎’의 문제에 대한 길잡이가 철학이라는 점에 대해선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동조한다. “철학에 의해서 삶 전체는 교정 받고 지도되어야 한다. (중략) 삶의 지도자인 철학이여, 덕의 탐구자요 악덕의 방어자여, 철학 없이 우리 자신을, 우리의 삶을 도대체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고 (미략)” (‘투스쿨라눔의 대화’ 제5권 5장).



삶의 입장에서 탐구 결과에 대한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은 채, 지식만을 생산하는 앎의 지식생산 공장으로서의 학문이 아닌, 삶의 길잡이로서 철학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키케로는 소크라테스 철학의 계승자로 보인다. 곧 앎은 삶의 조정과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앎이 없는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삶이 없는 앎’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매일 저녁 뉴스를 통해 접하는 현대적 비극의 배경에는 아마도 ‘삶 없는 앎’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삶에 대한 앎’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절실하게 여기지 않는 풍토가 한 원인일 것이다. 따라서 ‘삶에 대한 앎’을 배우는 일, 곧 인문 교양은 삶의 장식이 아니라 삶의 강제이다. 그것이 장식이 아니라 강제인 것은 삶의 어느 중요한 순간에 삶을 결정짓는 지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행운이 지배하는 삶의 세계에서 말이다.

특히 삶의 지배자가 행운이 아니라 지혜임을 배우는 일은, 어느 순간 삶의 강제가 아니라 삶의 지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삶에 대한 앎’에 대해선 최소한의 “삶의 강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듣기 싫고 거북해도 말이다. 물론 그러다가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들어야만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더불어 살아야 하는 한, 삶의 강제는 필요하다.(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07. 0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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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전설적인 첼리스트이면서 국내에는 장한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제 바람구두님의 페이퍼를 읽고 처음 알게 됐는데, 관련 부고기사들을 옮겨놓는다. 클래식에 특별한 취향이 없는 탓에 그의 죽음에 별다른 감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정도를 갖고 있나 보다). 다만, 과거 절친했던 한 친구가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첼리스트 정도로 기억이 날 따름(그녀는 로스트로포비치의 내한 공연을 빼놓지 않았다). 기사를 읽다가 알게 된 건 지휘자로서의 데뷔작이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는 것. 1968년이었고 볼쇼이에서였다...

한국일보(07. 04. 28) '천상의 선율' 러 첼로 거장 로스트로포비치 '천상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러시아 출신 첼리스트 겸 지휘자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가 27일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 로스트로포비치는 간장 질환으로 입원 치료 중이었다. 1927년 구소련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음악가 부모 밑에서 태어난 그는 13세 때 첫 첼로 공개 연주를 했다. 16세 때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배운 피아노와 첼로 외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지휘도 공부했다.



23세 때 소비에트 시절 최고의 영예인 스탈린상을 받으며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고, 서방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반체제 인사 솔제니친을 옹호하는 글을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보냈다가 요주의 인물로 찍혀 국내 활동과 해외 연주여행을 제한 받자 74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파리에 머물던 78년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나 90년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에 의해 복권돼 모스크바로 금의환향했다.

냉전시절 구소련의 예술적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로도 잘 알려진 그는 91년 민주화에 저항하는 구소련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다시 모스크바로 날아가 이에 맞서는 시위대에 합류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그 앞에서 즉흥 연주를 했고, 99년 다시 그 자리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 기념공연을 했다.

첼리스트로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테크닉과 깊이를 보였을 뿐 아니라 첼로의 레퍼토리를 넓히는 데 누구보다 힘써 수많은 곡의 작곡을 위촉하고 직접 초연했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브리튼, 루토슬라브스키, 펜데레츠키, 뒤티외 등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첼로 곡을 썼다. 한국 첼리스트 장한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수많은 어린 첼리스트들의 정신적 후원자로도 유명하다.



지휘자로 데뷔한 것은 1968년, 볼쇼이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지휘하면서부터다. 망명 후 첼로 연주와 지휘를 병행한 그는 77년 워싱턴의 내셔널심포니 음악 감독이 되어 17년간 이끌면서 지휘했고, 세계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객원지휘했다. 프랑스의 레종도뇌르 훈장 등 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최근에는 아내인 소프라노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와 함께 아제르바이잔 어린이를 위한 건강 재단을 만들어 운영해왔다.(오미환 기자)

동아일보(07. 04. 28) "거장, 천상의 현을 울리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별세"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 첼리스트 겸 지휘자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27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고인은 지난해 말 간 질환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으나 이날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 그는 지난달 27일 80세 생일을 맞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크렘린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이달 들어 건강이 악화됐다.



1927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태어났으며 모스크바 국립 콘서바토리를 졸업한 뒤 1945년 소련 국제음악콩쿠르에서 황금상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를 사사했으며 리히테르(피아노)의 반주로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에밀 길렐스(피아노)와 레오니트 코간(바이올린)과 트리오로도 활동했다.

1974년에는 반체제 인사인 솔제니친과 사하로프를 공개 지지했다가 추방당했다. 공민권을 박탈당한 뒤 서방에서 자신의 역사를 다시 만들었다. 첼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적 연주를 선보인 그를 위해 작곡가들은 앞 다투어 곡을 헌정했다. 생전에 세계 초연한 작품은 240곡이 넘는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벽돌 더미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했다. 1990년 소련 체제 붕괴 후 복권된 로스트로포비치 부부는 1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첫 무대에서 지휘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비창’은 세기의 명연으로 손꼽힌다.

러시아인들은 그를 ‘슬라바’(영광)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므스티슬라프’를 짧게 줄인 이 애칭은 최고 연주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도 4, 5차례 공연을 가졌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의 김치와 갈비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에서 나를 부르면 언제든지 가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전승훈 기자)



■ 애제자 장한나의 추모

세계적인 첼리스트 장한나(24·사진) 씨는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그의 애제자가 됐다. 장 씨는 27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한 시대가 막을 내린 느낌”이라며 스승에 대한 애도의 뜻을 밝혔다. 이를 정리했다.

선생님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첼리스트였다. 처음 만난 것은 11세 때였다. 선생님 앞에서 연주하고 싶어 선생님이 파리에서 여는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 나갔다. 선생님은 “처음에 첼로가 혼자 걸어 나오고 있는 것 같아 놀랐는데 뒤에 조그만 여자애가 있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연주를 마친 뒤 선생님은 나를 번쩍 안아 주셨다.

이후 15세 때까지 워싱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선생님을 찾아가 레슨을 받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마지막 레슨을 받던 날 선생님은 “네게 음악의 열쇠를 주었다. 이제 그 문을 열고 나가 너만의 음악을 만들어라”고 말씀하셨다.



1996년 첫 음반을 녹음할 때 선생님께서 지휘를 해 주셨다. 선생님은 “첼리스트 음반의 녹음을 지휘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며 “나이 들면 그 뜻을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첼리스트로서의 대물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음반은 선생님께서 지휘한 유일한 첼리스트의 음반이 됐다.(전승훈 기자)

07.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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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4-29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스트로보피치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들어봤는데, 로스트로포비치가
매우 공들인 연주라고는 하지만 (요요마가 20대에 한 녹음한 곡을 60대에 했으니깐요..)
저한테는 별로 안 땡기더군요. 안너 빌스마나 피에르 푸르니에의 연주를 더 좋아한다는...

(p.s)그나저나 이 분 녹음도 30년만 지나면 모두 저작인접권이 풀리겠군요.흐흐흐...ㅡㅡ;; (돌아가신 분에게 이 무슨 망발..ㅡㅡ)

필라멘트 2007-04-29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이 관심분야가 아님에도 음악관련 기사를 소개해주신 로쟈님에게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60대에 와서야 바흐전곡을 녹음했는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거장의 겸손함과 신중함을 느끼게 합니다. 미샤 마이스키, 요요마.. 푸르니에.. 다들 훌륭한 첼리스트들이지만 로스트로포비치의 완벽한 경지에 이르기엔 아직.. 이번 3월에 푸틴 대통령이 크렘린궁에 초청해 팔순을 기념했는데.. 최고의 거장에 대한 입증이랄까요 예우랄까요. 아무튼 20~21세기 최고의 음악가를 잃어서 많이 아쉽습니다.

로쟈 2007-04-29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ravinsky님/ 거장의 경우에도 호오는 갈리더군요...
juin님/ 그렇군요.^^
ysp988님/ 음악은 관심분야가 아니지만 '러시아' 음악가라서요.^^
 

경향신문에 주말마다 연재되는 '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의 이번주 꼭지가 '문학위기론과 한국소설'을 다루고 있다. 가라타니의 종언론 이후에 그에 대한 수긍과 비판이 일종의 유행담론처럼 돼 버렸는데, 기사는 문학평론가 신수정씨의 적극적인 문학옹호론으로 읽힌다. 

경향신문(07. 04. 28) 문학위기론과 한국소설

얼마 전에 9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의 하나로 우리 문학을 풍요롭게 했던 소설가 고 김소진을 추모하는 단행본 ‘소진의 기억’이 발간되었다(*지난주에 페이퍼에서 다룬 바 있다). 1991년 등단 이후 1997년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주로 서울 길음동 산동네 판자촌의 기억을 자신의 소설적 소재로 삼아왔던 이 작가는 80년대 노동소설의 관념주의와 구별되는 그 특유의 따뜻한 민중적 공감을 소설 속에 자주 표출해왔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동료들과 후배들이 시와 소설을 싣고 작가와의 추억을 회고하는 장을 마련한 이 추모집은 한 시대의 종말과 그를 애도하는 감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소진이 죽은 해인 1997년을 역설적인 의미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으로 규정하는 후배 작가 김연수의 글이 특히 그러했다. 1993년 이십대의 나이로 등단한 뒤 이렇다 할 작품을 쓰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던 김연수는 1997년 5월 생애 처음으로 넥타이를 매고 직장에 출근하는 삶을 살게 된다. 곧이어 일산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오랫동안 사귀어온 여자친구와 결혼을 한다. 1997년 이전이라면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IMF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으로 마감되는 1997년은 그에게 오랜 예술가-낭인 생활을 접고 생활인이자 한 집안의 가장으로 구속되는 결절점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닌 어떤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1997년을 우리 문학사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는 없을까. 1997년, 1963년생 소설가 하나는 조용히 한 생을 접었고, 1970년생 소설가 하나는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을까봐 불안감에 시달리며 어쩔 수 없이 직업의 세계 속으로 투항해 갔다. 어쨌든 그 이후의 한국문학이 그 이전의 그것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달라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몇몇 스타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초판 3000부를 소화하기도 버거운 우리 출판시장의 침체는 말할 것도 없고 영화나 텔레비전과 같은 영상매체 및 컴퓨터 사이버 매체의 약진에 힘입어 점차 소멸해가는 장르의 하나로 스스로를 규정할 수밖에 없게 된 저간의 사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1997년 이후 한국문학은 이제까지 문학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가정되고 또 당연히 그러리라 요구되어 왔던 모든 전제들이 무시되거나 폄하되는 새로운 문학 환경 속으로 뛰어들게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 사태를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말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로 대표되는 근대문학은 공감의 공동체, 즉 네이션의 기반이다. 소설이 단순한 읽을거리들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소설은 그 스스로 철학이나 종교보다 더 심원한 인식론적·도덕적 기능을 떠맡음으로써 근대적 국민국가를 상상하는 주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우리가 소설을 근대의 역동적 힘이 살아 움직이는 가장 현실적이고 진실한 허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 특유의 능력은 오늘의 문학적 현실 속에서는 더 이상 발휘되기 어렵다. 1950년대 미국소설에서 시작해 1990년대 일본소설, 그리고 1990년대 말의 한국소설들에 이르는 과정은 이 사실을 말의 의미 그대로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해 일본소설이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는 것이 이즈음 일본문학계의 현실이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근대소설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가라타니가 보기에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다만 협소한 형식 속에 안주한 오락물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한 이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진단에 우리마저 쉽게 주눅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한국소설 역시 일본의 전철을 많은 부분 그대로 밟고 있는 듯 보인다. 현재 소설 시장의 대부분은 일본번역소설들이 차지하고 있다.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장르소설에서부터 다양한 형식의 본격문학에 이르기까지 일본소설이 한국 독자들의 감수성에 미치는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사태가 이런 식으로 계속 흘러간다면 우리 소설 시장 역시 더 이상 일본식 소설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소설 시장 역시 이미 일본풍 소설에 의해 잠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시장과 독자를 상대로 근대소설의 이상만을 강조할 수 없을 것이다. 가라타니가 이야기한 대로 소설은 이제 그 이전의 자신의 규준 대신 새로운 시대적 이상을 표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시내 대형 서점에 달려가면 이 모든 사태를 그대로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소설이 지금 당장 그간의 전통과 결별하고 오로지 가벼운 상업주의와 내통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문학의 위기, 근대문학의 종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야기들은 때로 우리 소설이 진흙 속에서 펼치고 있는 이 움직임에 다소 인색한 경향이 있다. IMF의 경제적 여파보다 그로 인해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는 어떤 사태에 휘말려 버린 자신들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더 불안해하던 김연수 또래의 작가들은 선배들의 소설이 끝나는 곳에서 자신들의 소설을 다시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우리 소설이 이룬 성과들은 이들 세대의 불안감을 기반으로 꽃피워진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들은 선배들의 고답적 문학 형식을 거부하는 한편, 그들의 문학정신은 그대로 이어받고자 했다. 김연수를 비롯하여 김영하, 김경욱, 천운영, 윤성희, 강영숙, 조경란, 김중혁, 박민규, 천명관, 편혜영, 이기호 등의 소설적 성취가 말해주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소설을 근대소설의 외양과 다르다고 해서 쉽게 배척하는 것은 근거 없는 문학위기론으로 문학을 대체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이기 쉽다. 가라타니의 말처럼 소설이 더 이상의 비판적 정치 기능을 상실했다면 문학이 아니어도 그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은 많을 것이다(*가라타니 자신의 말이기도 하다). 이라크 반전운동을 펼치고 있는 오수연이나 생태 환경운동에 헌신하는 최성각, 베트남이나 몽골 작가들과의 연대를 기획하는 방현석과 전성태 등은 한국소설에 불어닥친 이 딜레마를 구체적인 사회운동과의 접맥을 통해 해결해나가려는 움직임을 대표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소설계엔 황석영과 같은 근대소설의 적자가 현재까지도 여전히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오랜 영어생활에서 해방되자마자 그간의 침묵을 보상하려는 듯 ‘오래된 정원’에서부터 ‘손님’을 거쳐 ‘심청’에 이르는 해원의 길을 모색해나가고 있는 그의 움직임은 한국소설의 현재를 웅변한다.

우리는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일된 국민국가를 이룩하지 못했다. 한국소설은 아직 한 번도 이 정황을 잊어본 적이 없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 조건은 우리 소설을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적 현실로부터 결코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 근대문학의 종언론이 때로 배부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식 속물주의가 멀리 수평선 저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시장의 이름으로 우리 소설의 형질 변경을 요구하고 나선다. 지금 우리 소설에 불어 닥친 대중문화담론들은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문학은 이 경계에 있다. 한편에는 동아시아의 정치적 모순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속물적 소비주의가 있다. 우리 소설이 이 가운데 어느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한국소설의 미래가 동아시아의 미래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소설은 여전히 근대문학의 정언명령에 충실한 것 아닐까. 한국소설은 아직 근대적 기획의 열정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이다.(신수정|문학평론가)

경향신문(07. 04. 28) 근대소설 희망을 본다

황석영의 ‘심청’은 심청전의 구조를 빌려 온몸으로 동아시아 근대를 살아내야 했던 한 여자의 운명을 재현하고 있는 소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심청은 전근대적 효(孝)이데올로기의 화신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봉건사회의 균열을 방지하고 지배질서의 우위를 확인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황석영은 이 심청의 이야기를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황석영의 심청은 단순한 희생물이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형식을 선보이는 근대의 전복적인 힘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단지 자신의 몸 하나를 자본으로 중국 남경, 일본 등 19세기 말 동아시아 일대를 주유하는 심청의 여정은 근대적 풍랑에 내던져진 한반도의 운명에 대한 하나의 은유에 가깝다.

이에 비할 만한 젊은 작가의 소설로 김영하의 ‘검은꽃’을 들 수 있다. 19세기 말 봉건조선으로부터 멕시코로 이어지는 이산의 여정은 이 소설에서도 중요한 소설적 구조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신세대의 대표주자로 이야기되는 김영하의 소설적 관심사가 그의 선배라고 할 황석영의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을 가지게 된다. 봉건조선으로부터 근대로 내던져진 19세기 다양한 계급군상들의 근대에 대한 반응양상을 재현하는 작가의 시선은 한국소설의 미래와 관련, 지금 우리 소설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황석영과 김영하가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한국소설의 자장이 근대소설의 영역을 확장하고 변형시키는 장관을 기대해 볼 일이다.(신수정/문학평론가)

07. 04. 28-29.

P.S. 평론가의 논점을 간추리면: (1)1997년은 우리 문학사의 터닝 포인트일 수 있다. 이후의 한국문학이 그 이전의 그것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달라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2)가라타니 고진은 이 사태를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말로 규정한다. 근대문학(소설)은 공감의 공동체로서의 네이션(국민국가)를 떠받치는 기반이었지만 오늘날의 문학은 더이상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 않다. (3)1950년대 미국소설에서 시작해 1990년대 일본소설, 그리고 1990년대 말의 한국소설들에 이르는 과정은 이 사실을 말의 의미 그대로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4)하지만 이러한 비관적 전망에 쉽게 주눅들 필요는 없다. 근대소설의 외양과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1990년대 후반의 한국 작가들은 선배들의 문학정신(근대문학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근거 없는 문학위기론으로 문학을 대체하는 것이다. (5)더구나 우리는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일된 국민국가를 이룩하지 못했다. 한국소설은 아직 한 번도 이 정황을 잊어본 적이 없다. 한국소설은 아직 근대적 기획의 열정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이다.

이에 대한 의문은 이런 것이다: (1)1997년이 우리문학사의 터닝포인트이며 1990년대 말의 한국소설들은 '근대문학의 종언'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주장과 '근거 없는 문학위기론/문학종언론'은 어떻게 양립가능한 것인지? (2)근대소설과는 외양이 다른 방식으로 근대문학의 정신을 보전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가라타니의 종언론에 대한 논박이 되는 것인지? (3)김연수를 비롯하여 김영하, 김경욱, 천운영, 윤성희, 강영숙, 조경란, 김중혁, 박민규, 천명관, 편혜영, 이기호 등의 소설적 성취가 과연 '근대적 기획의 열정'과 관련하여 평가되는 것인지? 즉, 이들 젊은 작가들의 소설이 단순한 읽을거리를 넘어서 "철학이나 종교보다 더 심원한 인식론적·도덕적 기능"을 떠맡고 있기에 의미심장한 것인지? (4)더불어 이러한 문학정신의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왜 동아시아의 정치적 모순과, 미국식 속물적 소비주의 가운데 우리 소설이 어느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게 될지는 알 수 없는 것인지? 열정만으로는 부족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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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8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28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저는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요.--;
 

독일로 간 작가 배수아씨의 근황 기사를 옮겨놓는다. 독일 작가 야콥 하인의 소설 번역이 얼마전 출간됐는데, 그와 관련한 인터뷰 기사이다. 기사를 보고 안 것인데 번역 생활 3년동안 (공식적으로만) 7권의 번역서를 냈다고 한다. 창작과 번역으로만 채워진 이국에서의 이방인 생활이, 문득 부러워지는군... 사실 작가는 '외국인 놀이'의 달인이었기에 굳이 독일에까지 건너갈 필요가 있었을까, 란 의문을 나는 전부터 갖고 있었다. 한데,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로 글쓰기'가 작가 배수아의 방법론인 이상, 생각해보면, 외국생활은 한국어를 '외국어'로서 만끽하는 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여건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생은 다른 나라에 있다?..

 

한국일보(07. 04. 28) "야콥 하인 소설 읽는 순간 내 거야! 느낌"

배수아(42)씨를 만났다. 소설가가 아닌 번역가로서 말이다. 그녀가 번역한 독일 소설가 야콥 하인의 장편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영림카디널)가 출간됐다. 이 작가의 데뷔작 <나의 첫번째 티셔츠>는 배씨의 ‘첫번째 번역작’이기도 하다. 동독 출신, 1971년 생, 소아정신과 의사인 하인의 작품을 배씨가 처음 접한 건 독일 체류 중이던 2003년이었다. 동독에서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그의 데뷔작엔 으레 있을 법한 슬픔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짧고 유쾌하게 전개되는 문장, 연신 웃음을 빼물게 하는 유머만이 반짝였다. 게다가 유명 소설가(크리스토프 하인)인 아버지의 후광까지! “읽는 순간 ‘바로 내 거야!’란 느낌이 들었어요. 이걸 영원히 소유하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 떠오른 게 번역이었죠.”

하인은 97년부터 베를린의 카페에서 자신의 글을 낭독하는 젊은 작가 모임에 속해 있다. 이들의 작품 낭독은 엄숙과 상극이다. 무대 위에서 담배까지 물고 청중을 즐겁게 해주는, 스탠딩 코미디에 가까운 것이란 게 배씨의 설명이다. 카페를 찾은 출판사 관계자의 귀를 번쩍 틔워 책으로 나온 그의 작품 1, 2호는, 그래서 연예적 요소가 다분했고 독일의 젊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배씨가 이번에 소개하는 하인의 세 번째 소설은 다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는 내용으로, 읽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자전적 작품이다. 작가의 슬픔에 동화돼 열흘 만에 번역을 마쳤다는 배씨는 “솔직하면서도 감정의 과잉을 억누르는 작가의 태도가 오히려 비애감을 더했다”는 소감을 밝힌다. 덧붙여 작가가 처음으로 ‘듣는 독자’가 아닌 ‘읽는 독자’를 의식하면서 한층 성숙해졌다고 평한다.

소설은 4월의 어느날 아들인 ‘나’가 어머니의 심상찮은 호출을 받는 것으로 열리고, 이듬해 1월 ‘나’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집안을 둘러보는 것으로 닫힌다.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유난히 친밀했던 모자 간의 올망졸망한 추억들이다. 부엌에서 요리하던 어머니와 도란거릴 때의 행복, 함께 영화를 보며 어머니 손바닥에서 집어먹던 과자의 달콤함, 여름캠프 기차를 놓쳐 울고 있는 ‘나’를 자가용에 싣고 먼 길을 달리던 어머니의 멋진 모습…. 정말 그렇다. 담담하게 말할수록 더욱 짙어지는 슬픔의 농도.

‘소설가 배수아’ 만큼이나 ‘번역가 배수아’도 다작이다. 번역 생활 3년 만에 벌써 일곱번 째 번역서다. 장편과 소설집을 각각 2권씩 내면서도 말이다. “사실… 번역 능력 기르기 차원에서 다른 필명으로 번역한 책도 있답니다.” 이 부지런한 작가는 계간지에 보낼 단편 집필과 장르소설 번역을 마저 마친 뒤 7월께부터 400쪽 넘는 장편소설 번역에 나선다.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독일 소설가 마틴 발저의 최근작이다. 자세한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아주 특별한 연애소설”이란다.(이훈성 기자) 

07.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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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4-28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수아도 많이 늙었네요--;;

로쟈 2007-04-28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늙어가는 거야 다들 일 없이도 하는 일이죠...
 

예정된 일정이 취소되어 약간 일찍 귀가하게 되었고 그걸 빌미로 잠시 부지런을 떤다. '작가와 문학사이' 연재를 옮겨오려는 것. 차례상 이번주엔 시인이 다루어지게 되는데,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이장욱이 시인으로 호출됐다(그는 시인들로부터 즐겨 해설을 부탁받는 시인이다). 한동안 연락이 없어서 그의 근황이 궁금하던 차였는데, 지면기사에서 '만나보게' 되는군.

경향신문(07. 04. 28) [작가와 문학사이](16)이장욱-그는 그냥 ‘문학’이다

뛰어난 시인들은 자기만의 목소리를 갖는다. 둔한 귀에 그것은 때로 소음으로 들릴 수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이 고성능 안테나다. 예컨대 김행숙·황병승·김민정 등의 독창적인 목소리는 어떻게 한국 시사(詩史)에 안착할 수 있었던가. 일단은 그 목소리 자체의 힘이겠지만, 그들의 첫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해설이 탁월한 안테나의 역할을 해준 탓도 있다. 그 해설을 모두 한 사람이 썼다. 이장욱. 그는 소위 ‘미래파’의 산파 중 하나다. 그 자신이 이미 뛰어난 시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첫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2002)은 충분히 읽히지 않은, 그러나 좋은 시집이다. 어떤 시에서 화자는 X레이 사진을 보다가 문득 한 소식 깨친다. “고백은 지겹다, 모든 고백은 거짓이다.”(‘감상적인 필름’) 본래 ‘고백’은 내면, 진실, 질서로 구성되는 성(聖)삼위일체의 산물이다. 내면이 있고 내면의 진실이라는 것 또한 있어 그것이 질서 있게 전달될 수 있다는 믿음이 고백을 낳는다. 그러나 보라, X레이 사진에 내면 따위는 찍히지 않는다! 이 유물론은 2000년대 시의 공통감각 중 하나다. 자, 고백으로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내면 없는 화자를 창안했고(‘코끼리군’이라는 화자) 좀 다른 고백을 시도했으며(‘편집증’에 대한 관심) 무질서의 아름다움을 탐구했다(시공간의 혼란).



이 미학과 관계하는 이장욱의 개인 어휘가 ‘자세’다. 내면이 없는 무인칭의 존재들이 만나고 엇갈리며 빚어내는 카오스적인 무늬를 일러 ‘자세’라 한다. 진실은 존재의 어떤 자세다. 이를테면 “헛것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자세”(‘편집증 환자가 앉아 있는 광장’)가 그의 관심사다. “누군가 그대를 불렀다고 생각하여/그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단 하나의 이미지로 정화되는 생/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호명’) 그는 그런 자세들을 ‘사랑’한다. 그의 시가 대개는 냉정하면서도 어딘가 낙관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 사랑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시집 ‘정오의 희망곡’(2006)에서 이 스타일은 거의 완성된다.

“비가 내리자 / 나는 드디어 단순해졌다 / 당신을 잊고 / 잠시 무표정하다가 / 아침을 먹고 / 잤다 // 낮에는 무한한 길을 걸어갔다 / 친구들은 호전적이거나 비관적이고 / 내 몸은 굳어갔다 // 한 사람을 살해하고 / 두 사람을 사랑하고 / 잠깐 울다가 / 음악을 들었다 // 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 나의 죽음은 변하지 않았다 / 나는 금욕적이며 / 장래 희망이 있다 // 1968년이 오자 /프라하의 봄이 끝났다 / 레드 제플린이 결성되었다 /김수영이 죽었다 // 그 후로도 오랫동안 / 나는 여전히 태어나지 않았다 /비가 내리자 /나는 단순하게 /잠깐 울다가 /전진하였다.”(‘좀비 산책’ 전문)

묘하게 슬픈 시다. 1인칭을 3인칭처럼 다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면과 깊이와 원근법이 없어지지만, 덕분에 이상한 울림이 생겨난다. 접속사가 없어서 더 그렇다. 좀비가 부질없게도 ‘사랑’과 ‘장래 희망’을 말하고 있어 쓸쓸하고, “한 사람을 살해하고 두 사람을 사랑하고”와 같은 접속사 없는 문장의 무심한 울림 때문에 더 쓸쓸하다. 이것이 이장욱 풍의 세계다. 낯익은 일상과 익숙한 수사학이 철저히 살균되어 있다. 20세기 모더니즘의 열기와 치기에 심드렁한 21세기형 모더니즘이다. 그가 “널 사랑해”(‘근하신년’)라고 말하면 신기하게도 전혀 느끼하지가 않다. 그의 매력이다.



이 사람을 보라. 그는 러시아 현대시 연구서를 펴낸 노문학도다. 아니다. 그는 당대 한국시의 첨단을 탐사한 평론들을 쓴 평론가다. 아니다. 그는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소설가다. 아니다. ‘픽션에세이’라는 이상한 장르를 만들어낸 에세이스트다. 아니다. 그는 본래 시인이다. 아니다…… 뭐랄까, 그는 그냥 ‘문학’이다. 한국 문학사에서 매우 희귀한 사례다. 그는 ‘외계인 인터뷰’라는 제목의 시와 평론을 쓴 적이 있다. 그는 마치 이 행성에서 행해지고 있는 문학이라는 것의 실체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외계인처럼 보인다. 농담이다. 지구인이 아니어도 좋으니, ‘이장욱’이라는 이름의 문학은 계속 전진하라.(신형철|문학평론가)

07. 0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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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4-28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이장욱의 시집을 사면서 로쟈님에게 있을 시인의 친필싸인이 들어있는 시집과 교환해야지..하고 작심을 했더랬습니다. 지금이사 밝히는것이지만..:D

로쟈 2007-04-28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오의 희망곡>에는 사인이 들어있는 거 같은데 어디에 두었는지 얼른 눈에 띄진 않네요.^^;

ozzy2012 2007-04-30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픽션에세이'는 어디서 나온 말이죠? ^^;;

로쟈 2007-04-3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문학에 연재됐던 글입니다.

수유 2007-04-30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가가린과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도 대문 얼굴로 쓰시는군요. 굳이 그의 몰 연대가 1968이기 때문에? ㅎㅎ

로쟈 2007-04-30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간혹 지구를 떠나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