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의 출세작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의 출간 소식을 '마이리스트'로 갈무리한 바 있는데, 책의 요지를 짚어주는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몇 가지 줄거리만 챙겨두어도 인문 이론서를 읽는 데 도움이 된다.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은 책의 부제이다...

한겨레(08. 12. 20) 주디스 버틀러 “여성은 없다”

<젠더 트러블>은 페미니즘 담론 안팎에 일대 논란을 불러일으킨 저작이다. 1990년 출간한 이 책으로 지은이 주디스 버틀러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페미니즘 세계의 스타로 떠올랐고, 페미니즘 논쟁의 중심에 섰다. 논란이 거셌던 것은 남성 대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아래 여성 해방의 정치를 주도하던 페미니즘 운동의 주류를 이 책이 정면으로 치받았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여성이라는 단일한 주체를 해체하고자 했다. 또 여성이 설령 계급·인종 같은 분할선에 따라 복수로 존재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여성이라는 범주 아래 하나의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여성 정체성 담론도 해체돼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버틀러가 보기에 여성이라는 젠더는 결코 동일한 범주로 묶일 수 없는 이질성의 집합이었다. 그러므로 책의 제목 ‘젠더 트러블’은 ‘젠더’ 내부에 이미 항상 ‘트러블’이 있다는 선언적 진단이며, 젠더에 트러블을 일으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알려진 대로 버틀러는 ‘퀴어(동성애자) 이론’의 창시자라는 호칭도 얻었는데, 이 책의 재판(1999년) 서문에서 이례적으로 자신의 사적인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자라면서 젠더 규범의 어떤 폭력성을 인식하게 된” 그는 16살 때 “격렬한 커밍아웃”을 했다. 사람들이 그를 여성이라고 지칭하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요구했는데, 그런 요구 때문에 고통받다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마침내 밝혔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이렇게 동성애자로서 자신이 겪었던 삶을 이론화하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조차 이질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그 자신의 처지가 그를 급진적·근본적 사고로 이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버틀러가 시도하는 것은 여성 정체성 문제를 래디컬하게 파헤침으로써 정체성 담론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버틀러가 이론적 수혈을 받은 곳은 프랑스 철학계인데, 이 책에서도 사르트르·푸코·보부아르·크리스테바·이리가레의 이론에 대한 인용과 성찰을 만날 수 있다. 그 자신의 말로 표현하면 ‘프랑스 철학의 미국적 구성물’이 이 책인 셈이다. 이때 버틀러는 푸코를 통해 만난 니체의 계보학을 분석과 비판의 방법론으로 삼아 프랑스 페미니즘 담론을 해체적으로 읽어냄으로써 그 자신의 이론을 재구성한다.

버틀러의 가장 충격적인 주장은 섹스(생물학적 성)가 문화적·제도적 힘 속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명제다. 이 명제를 입증해 가는 과정에서 그가 먼저 인용하는 것이 보부아르의 유명한 주장,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보부아르의 명제에는 여성이 생물학적 성(섹스)과는 별개로 젠더(사회·문화적 성)를 차후에 구성한다는 암시가 깔려 있다. 젠더와 섹스가 분리되는 것인데, 이 분리를 논리적 극한까지 밀어붙여 보면, “섹스/젠더 구분은 섹스로 결정된 몸과 문화로 구성된 젠더간의 극단적 단절을 시사한다.” 젠더가 섹스와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이론화되면, “젠더 자체는 자유롭게 떠도는 인공물”이 된다. 그럴 경우,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의 특징을 지녔더라도 젠더상으로는 여성인 존재가 나올 수가 있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그 결과 남자와 남성적인 것은 남자의 몸을 의미하는 만큼이나 쉽게 여자의 몸을 의미할 수 있고, 여자와 여성적인 것은 여자의 몸을 의미하는 만큼이나 쉽게 남자의 몸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젠더가 이렇게 생물학적 성과는 무관하게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면, 여성 정체성의 본질적 근거는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버틀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생물학적 성(섹스) 자체가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주장을 편다. 생물학적 성이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자연’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성/남성의 이분법으로 포괄할 수 없는 여러 부류의 이질적 존재들이 있으며, 이들이 문화적 강제 속에서 하나의 생물학적 성으로 고정될 뿐이라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섹스가 자연에 관계되듯 젠더가 문화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젠더(사회·문화적 성)의 원인 또는 기원은 섹스(생물학적 성)이며 섹스의 결과가 젠더라는 통념이 여기서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역으로 섹스는 젠더라는 문화적 강제 속에서 구성되는 것, 다시 말해 젠더의 결과이자 효과라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인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보부아르의 명제가 비유가 아닌 직설의 지위를 얻게 된다.

버틀러의 주장은 여성성의 본질적 바탕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따라서 여성이라는 범주의 보편성에 입각해 여성성·모성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체성 정치’는 토대를 잃어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 정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점을 버틀러는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다”라고 간명하게 이야기한다. 여성이라는 보편적 정체성을 해체하더라도, 해방을 위한 일시적·잠정적 연대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다.(고명섭 기자)

08. 12. 19.

P.S. <젠더 트러블>의 출간으로 잠시 유예해 두었던 독서도 가능하게 되었다.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의 5장은 '정치적 열정적 (탈)애착들, 혹은 프로이트 독자로서의 주디스 버틀러'를 다루고 있다. 얼마전 방한했던 자크 랑시에르에 대해서는 4장에서 읽어볼 수 있다. 주말에 먼지를 좀 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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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8-12-20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리학적 삼인방에서 버틀러는 영미 전통에 해당하는 영역에 속하지요?

로쟈 2008-12-20 10:44   좋아요 0 | URL
영-불-독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프랑스 철학의 미국적 구성물'이라고 자평하는 걸 보면 영미 전통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는데요. 버틀러는 헤겔 철학에도 정통합니다...

헛헛헛헛 2009-01-15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 글 감사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 ^^

버틀러의 논의들 중 특히 '생물학적 성(섹스) 자체가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주장'에 여전히 동의하기가 힘든데... 이에 대해 어떤 근거들을 들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참고로, [젠더 트러블]과 관계된 논쟁들은 어디서 찾아볼 수가 있을까요???
 

연말까지 혀를 차게 되는 일의 연속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은 일들이 요즘 한국사회에선 떼로 일어난다('블랙 스완'이 떼지어 날아다니는 듯하다). 고난도의 관심분산 전략이 아닌가란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일제고사에 반대했다고 교사들이 파면당한 일도 현 정권의 자랑할 만한 치적일는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사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교사들의 부당징계 철회투쟁을 지지하며 관련칼럼과 수기를 모아놓는다. 다른 일로 좀 일찍 일어났다가 또 속 터지는 기사들만 읽었다...  

한겨레(08. 12. 19) [기고] 시험을 치르지 않을 헌법적 권리 / 박경신

최근 전국수준 학업성취평가(일제고사)에 학생들이 응시하지 않도록 허용했다는 이유로 담당 교사들이 해임·파면돼 논란이 일고 있다. 하지만 이 논란의 당사자들은 기본적으로 교육권의 주체가 학생임을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징계당한 교사들은 ‘일제고사 거부 교사’들이 아니다. 일제고사를 거부한 것은 학생이며 교사들은 이 학생들이 억지로 시험을 보도록 강제하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는 학생들이 일제고사를 거부할 권리가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할 권리가 있다면 이를 침해하지 않은 교사는 상을 줘야지 징계를 할 수는 없다.

학생의 교육권이 헌법적으로 독특한 점은 교육자의 방침에 따라 교육 수용자(학생)의 권리가 일정하게 제약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공부하기 싫더라도 일정한 ‘강요’를 통해 조금씩 재미를 들이도록 하여 나중에는 큰 보람을 느끼도록 하는 것은 올바른 교육방법이다. 하지만 강요의 도구는 교육적이어야 한다. 곧 공부를 잘 못하거나 열심히 안 하는 학생은 평점을 낮게 주거나 다음 단계의 교육과정으로 진급시키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징계 또는 과태료 등의 강제수단을 동원할 수는 없다.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주거나 다른 학생의 교육을 방해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시험도 마찬가지다. 시험은 보통 학생이 한 단계의 교과과정을 충실히 이수하여 다음 단계의 교과과정으로 이행할 준비가 되었는지, 또는 그 학생이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 학력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절차다. 학생 본인이 진급이나 학력평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해 부모의 동의를 얻어 그 시험을 일부러 보지 않는다고 해서 교육당국이 그 부모나 학생을 징계할 수는 없다. 단지 그 시험을 영점 처리하면 될 일이다. 시험을 보고 틀린 개수대로 학생들을 때리던 과거의 교육은 명백히 잘못된 것임을, 우리는 몸서리치며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학생이 부모의 동의를 얻어 ‘일제고사’를 보지 않겠다는 것은 학생의 헌법적인 권리였으며, 교사들은 학생의 헌법적 권리를 존중해줄 의무가 있었고, 그러한 의무를 이행한 교사들을 징계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었다. 특히 이번 ‘일제고사’는 다른 시험과 달리 순전히 교육당국이 각 학생 및 학교의 성취도를 전국적으로 판단해 보고 교육시스템의 효율성을 자체평가하기 위해 진행했던 것이다. 순전히 교육당국의 정보수집 활동으로 학생의 교육권 보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그런 시험은 학생들이 더욱더 거부할 권리가 있다. 미국의 몇몇 주들은 주 단위 졸업시험을 보지만 어떤 학생도 이 시험을 볼 의무는 없으며, 어떤 교사도 학생들이 빠짐없이 이 시험을 보도록 하지 않았다고 하여 징계당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이와 같은 자신의 권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교육당국과 학교가 위계와 강압으로 시험응시를 강요하고 있었고, 일부 교사들이 그 학생들이나 그 부모들에게 학생들의 권리를 고지해 준 것 이라면 교사들은 공익적인 내부 고발자라고도 할 수 있다.

학생은 자신의 전국 석차를 알지 않을 권리가 있다. 치기 싫은 시험을 침으로써 다른 학생들이 자신들의 전국 석차를 알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할 의무도 없다. 이번 일제고사는 교육시스템의 점검 및 학교간 성적 비교 등 순전히 교육당국의 행정적 필요로 수행된 것이다. 학생은 이에 동원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징계를 당한 교사들은 학생들의 권리를 보호하려 했던 것이므로 이들 교사들에 대한 징계는 위헌이다.(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경향신문(08. 12. 19) [금요논단]홉스의 국가論, 한국의 국가폭력

근대 초기 영국의 철학자였던 홉스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 늑대와 같아서 그대로 내버려두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인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지킬 수 없다. 이런 자연적 전쟁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통해 인간의 폭력적 공격성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때로는 국가라는 것이 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성가신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타자의 폭력으로부터 나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울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것이 홉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국가이론은 서양에서는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한국에서는 잘못된 이론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는 다른 사람의 폭력이 아니라 국가의 폭력이야말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요인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행패를 부리지 않으면 개인의 삶이 훨씬 더 평화롭고 조화로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국가기구는 시민을 적으로 삼아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시민들 사이의 전쟁상태를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국가기구와 시민공동체 사이에 전쟁상태를 스스로 조성해 왔던 것이다.

자유·권리 지키는 울타리
이 세상에 국가와 시민공동체 사이에 불화가 없는 나라는 없다. 왜냐하면 국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 역시 특정한 개인들인 까닭에 다른 사람들과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충돌하는 이해관계가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조정되는 한에서 국가는 정치적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나라 안에서 자기와 이해관계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대등한 시민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폭력으로 억압하려 하거나 적대적으로 말살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경우 만약 국가기구가 표면적으로라도 다수의 이익을 대변한다면 소수자들을 희생양 삼는 파시즘적 전체주의가 득세하게 된다. 하지만 국가기구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 국민을 적으로 몰아간다면 그 때는 국가기구와 대다수 시민공동체 사이에 전쟁상태가 초래될 수밖에 없다.

파시즘이 서양 나라들의 병리현상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기구와 시민공동체 사이의 전쟁상태가 수백 년 이래 나라의 불치병이었다. 왜냐하면 국민 모두의 공공적 이익이 아니라 자기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사유화하는 것이 이 나라 지배계급의 집요한 습속이기 때문이다. 공공적 이익을 지키는 데는 지극히 무능하면서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들이 이 나라의 상류층인데, 이들은 자기들의 그런 무능과 탐욕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을 틀어막기 위해 다시 국가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국민의 마음에 원한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이를 테면 자동차를 몰고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운전면허를 취소하여 가난한 장애인 부부의 생계를 막거나, 일제고사에 반대했다 하여 여러 명의 교사들을 한꺼번에 해고하는 것이 모두 그런 권력 남용이라 할 수 있다. 사소한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 이런 일은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폭력이다. 그런데 이런 만행을 법의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것이 한국의 권력집단인 것이다.

‘촛불’을 짓밟은 권력 남용
멀리는 동학농민전쟁에서부터 가까이는 87년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에서 20~30년 만에 한 번씩 엄청난 봉기가 나라를 뒤흔들고 때때로 국가기구를 전복시켜온 까닭도 바로 이런 야만적인 국가폭력 때문이다. 권력집단이 동료시민을 적대시하고 법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크고 작은 폭력을 행사할 때 그들은 이를 통해 시민 봉기의 에너지를 스스로 축적하게 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씨알들의 분노는 지진처럼 대지를 뒤흔들고 썩은 권력의 성채를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지난 봄, 여름 이 나라를 밝혔던 촛불은 명백히 그런 지진의 전조였다. 머지않아 그 전조는 현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니 가난한 우리는 서로의 체온으로 이 추위를 견디자.(김상봉 | 전남대 교수·철학)

오마이뉴스(08. 12. 18) 졸업앨범에서 사진도 빼겠답니다

일제고사에 반대해 학생들의 대체수업을 허락한 교사 7인에게 파면 및 해임 처분 결정이 17일 최종 통보됐다. <오마이뉴스>는 징계를 받은 7인의 교사 가운데 한 명인 유현초등학교 설은주 교사가 보내온 글을 싣는다.

12월 16일 수요일 저녁, 농성장에 도착한 난 몸이 좋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과 만남, 나라는 사람을 말로서 드러내야 하는 인터뷰, 앉으면 이어지는 회의, 추운 농성장,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생경하기만 하고 피곤했다. 그리고. 내일 학교에 가면 해임통지서를 받을 것이란 말이 선생님들 사이에 술렁이고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중징계 방침 이후부터 지난 주 수요일, 해임결정까지, 오늘의 이 장면을 난 꽤 구체적으로 상상해내려 했었던 것 같다. 근데 아무래도 어렵다. 실감이 나질 않는다. 선배언니의 차를 타고 조금 일찍 농성장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찾아온 교감 선생님이 내민 해임 통지서
집에 가면 뭘 해야 하나? 글을 써야지. 학교 선생님들께 드리는 편지. 학교 선생님들의 반응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얼굴 뵐 용기가 나질 않아 편지로 대신해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 아이들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아니 떠올려야만 했다. 오늘 이 저녁이 내가 우리 아이들과 함께하는 마지막을 준비할 유일한 시간인 거다. 집에 가면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아 어쩌지. 아이들 하나하나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이날 모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불가능했다. 집으로 돌아왔다. 허깨비 같은 몸을 이끌고 선배와 함께 들어와 내일 해야 하는 일, 그래서 지금 준비해야 하는 일을 나누어 생각해봤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문을 열었다. 내 앞엔 교감선생님과 부장 선생님이 서 계셨다. 한 손엔 누런 봉투. 현관에 서서 봉투를 내미신다.

해임통지서.

이건 그동안 상상해낸 장면과 너무 다르다. 10월부터 늘 이런 식이다. 조금 더 견뎌내기 위해, 덜 상처받기 위해 난 늘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해 뒀었다. 하지만 실제로 내 앞에 전개되는 건 늘 그 이상이었다. 많은 말을 쏟아냈던 것 같다. 나와 이 사람을 둘러싼 이 기묘한 공기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선.

"교감선생님, 저 그다지 다른 사람 아닙니다. 우린 그냥 아이들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 다른 것뿐이에요.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교감선생님 마음 할퀴려고 그러는 거 아니란 거 제발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학교를 떠나지만 전 정말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리고 우리 조합원 선생님들, 그렇게 너무 상처주지 마세요. 모두 다 너무너무 열심히 하고 아이들 사랑하는 후배들이잖아요. 우린 그저 조금 다른 것뿐인데요. 제발 제발 알아주세요."

교감 선생님은 내일 학교에서 아이들 보는 건 어렵겠다고 하신다. 새 담임을 만나는 날인데 아이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았으면 한단다. 새 담임을 맞을 시간은 있는데, 열 달을 고스란히 함께했던 우리 아이들과 내가 헤어지는 시간은 왜 주지 않는 거죠? 도대체 왜?

교감선생님은 이러니 나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교감선생님에겐 지금 이 순간도 내가 내 이야기만 하는 걸로 보이나 보다. 이것 또한 지침이라면, 난 또 부탁해야만 했다. 제발 마지막 정리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짐싸는 것으로 하고 인사하고 나올 테니 모른 척하시라 했다. 이것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고 17일, 교사가 아닌 신분으로 난 아이들을 만났다. 교문부터 막아서시는 교감선생님을 옆에 두고, 평소에 늘 출근하던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실은 모든 게 그대로였다. 아이들, 협동해서 다같이 꾸몄던 판화, 일하는 손 그림, 아기자기해서 모든 이가 부러워하던 내 책상, 모든 게 그대로인데 이제 이곳은 내가 설 곳이 아니라 한다. 밤새 머릿속에 뒤엉켜있었던 많은 말들 속에서, 겨우 몇 마디를 하는데도 교감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은 복도에서 채근을 하신다. 아이들과 난 그냥 이렇게 헤어져버렸다.

아이들 보며 겉으로 웃었고, 속으로 울었다
다시 돌아온 농성장. 아이들의 문자메시지는 이어진다. '화이팅, 글로 갈게요, 어떠케 가요?, 선생님 곁엔 저희들이 있어여, 힘내요.' '오늘 급식 케익 나오는데, 저희 밥 먹어요 밥 드셨어요? 카레 나왔어요 카레 제일 싫어하는데, 이제 곧 수학경시봐요 응원해줘요.'

아이들이 곁에 있는 듯 나의 손가락은 핸드폰 위로 바쁘게 움직이고, 그렇게 아이들은 계속 내 옆에서 속삭이고 살아 움직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시교육청 앞까지 찾아온 아이들은 17일,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이야기로 들려주고. 아이들은 촛불 문화제에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또 선생님이 유도해서 집회 나왔다고 사람들이 말할까봐, 그게 걱정이 되어 발언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 아이들을 보며 겉으로 웃었고, 속으로 울었다.

나에게 학교는 유리로 둘러싸인 성이다. 소통하고자 하지만, 그러려고 노력했지만 내 목소리는 투명한 벽에 부딪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지금 난 그 유리벽 밖에 있다. 세상은 나와 아이들을 떼어놓았다. 아이들 졸업앨범에서 내 사진을 빼겠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다시 한 번 오열을 터뜨렸다.

그냥. 그냥 오늘(17일) 하루는 좀 많이 힘들다. 하지만 늘 그랬듯, 난 다시 기운을 차릴 거고 일어날 거다. 이 거리에 나와 함께 서있는 사람들과 내 앞에 가로막힌 벽을 부수고, 난 다시 우리 아이들을 만날 것이다.

08.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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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19 15:15   좋아요 0 | URL
공교육의 경쟁력을 제고하겠다고 약속한 이들.하지만 성추행 교사,학생을 구타하는 교사들은 솜방망이 처벌로 끝내면서 이런 일에는 서슬퍼렇게 나서가지고 무슨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건지...학교를 군사정권 때의 반공궐기 대회장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있나보죠.

로쟈 2008-12-19 23:31   좋아요 0 | URL
어차피 막가파식이니까요. 동료교사들이 얼마나 연대할지 개인적으론 궁금합니다...

Julio 2008-12-20 10:46   좋아요 0 | URL
제가 촛불에서 찾은 단어 '연대'란 단어 댓글 달아봅니다.
로쟈님이 말하시는 연대가 어떻게 될지....

식의주와 연계되면, 우리나라에선 어떤 식의 연대가 이루어질지...
저역시 금해지는군요!

갠적으로는 23일 하루라도 가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로쟈 2008-12-20 22:52   좋아요 0 | URL
암튼 여러 가지 방식의 모색이 필요해 보입니다...
 

주초에 읽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2008년판 '전태일 평전'이라고 가름되는 두 노동자에 대한 평전의 서평이고, <당신은 나의 영혼>(삶이보이는창, 2008)이 그 평전의 이름이다(검색해보니 <전태일 평전>도 절판됐다!). 말미에 "2008년 한국 사회의 쓰디쓴 자화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 눈에 밟힌다...

시사IN(08. 12. 15) 대한민국에는 지금도 ‘전태일’이 존재한다

1983년. <전태일 평전>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지금과는 다른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전태일’과 저자 이름(조영래)은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고, <전태일 평전>은 고전이 되었다.



2008년, 여기 책 한 권이 있다. <당신은 나의 영혼>. 2003년 세상을 등진 두 노동자 이해남·이현중에 대한 평전이다. 충남에서 노조 활동에 열심이었던 세원테크 노조원 이현중은 암으로, 노조위원장이었던 이해남은 분신해 사망했다. 노조가 결성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있었던 일을 담았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불편하다. <전태일 평전> 때처럼 48년 전 일도 아니고 고작 7∼8년 전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첫 대목을 보자. 2001년 이해남이 노조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은 이현중이 작업반장에게 맞는 것을 보고 나서였다. 작업반장은 ‘예비군 훈련이 끝나고 난 후 회사에 와서 한 시간 동안 일을 할 수 있었는데도, 농땡이를 쳤다’면서 욕을 하고, 두들겨 팼다. 이해남이 이를 말리자 관리자들의 반응은 이랬다. “아니꼬우면 그만두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차이조차 알지 못하던 노동자 이해남이 노조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계기였다.

잔업을 강제로 해야 하고, 시급이 고작 2160원인 회사. 조합원이라고 해봐야 겨우 60명인 이 작은 노조는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전쟁 같은 일을 겪었다. 용역깡패, 손해배상, 가압류…. 소설가 윤동수씨는 이 책을 쓰기 위해 관련자 70∼80명을 취재했는데, 중요한 순간마다 그들의 증언을 그대로 수록했다. 오랜 수배 생활을 겪던 이해남은 계열사 공장에서 분신한다. 그리고 2004년, 회사 측과 가까운 이들이 노조를 ‘접수’했다. 이 아픈 패배의 기록에 마음이 시리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저자가 맨 앞 장에 왜 이 한 줄을 적어놓았는지 알 수 있다. ‘오, 놀라워라! 우리가 인간이라니!’

책을 다 읽고서 ‘세원테크’에 대한 보도를 찾아보니 이 투쟁을 다룬 기사가 거의 없다. 무관심이 철저했다. 그리고 올해 12월, 수출 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이 회사 대표의 인터뷰가 여럿 눈에 띈다. 이 책에서 ‘노조를 없애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사람’으로 기술된 이 경영자는 한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회사 경영은 경영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종업원이 하는 것이다. 종업원이 자고 일어나면 좋은 회사에 출근해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두 극단의 기록은 2008년 한국 사회의 쓰디쓴 자화상이다.(차형석기자)

08. 12. 18.

P.S. 서평기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터뷰기사를 찾아봤다. 눈에 띄는 건 아래 기사다. '두 극단의 기록'이 어떤 것인가를 대비해보기 위해 옮겨놓는다.

주간무역(08. 12. 04) '사람이 재산' 인재경영 불황 모른다

“Best for you.” 시대에 한발 앞선 경영감각과 사람중심의 경영철학으로 글로벌경제위기 속에서도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세원물산 김문기 회장.



그는 다양한 생산성 향상 프로그램을 도입해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베스트 & 워스트’ 제도를 통해 원가 절감과 생산성 향상 운동을 뿌리내리게 했다. 사원의 역량 개발을 위한 ‘멘토링제도’를 운영해 정착시키고 ‘이모셔널 비지트’, ‘아빠가 쏜다’ 등 직원 가족의 회사 방문 프로그램을 통해 애사심을 향상시키고 창립 이래 무 분규 사업장을 일궈왔다.

김 회장은 현재 자동차 부품 전문 업체인 세원물산을 비롯해 계열사 세원정공, 세원테크, 세원E&I, 삼하세원(중국법인), 그리고 착공 중에 있는 세원아메리카(미국법인)를 경영하고 있다. 스폿로보트, 대형프레스 등의 시설을 갖추고 현대차로부터 원재료인 철판 등을 구입해 FRONT SIDE MEMBER, COWL CROSS MEMBER, DASH PANEL, RADIATOR 등의 자동차 차체부품을 주로 생산하여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등에 납품하고 있다.

지난 해 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한 후, 올해 글로벌경제위기 속에서도 꾸준한 수출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 들어 10월까지 우크라이나 등지에 3600만 달러, 미국에 2000만 달러, 사우디아라이바, 필리핀 등 아시아 국가에 1600만 달러를 수출하는 등 향후 매년 20% 이상의 수출 증가세가 이어질 것으로도 전망된다. 김 회장에게서 45회 무역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은 소감과 앞으로의 기대에 대해 들었다.
 
-먼저 금탑산업훈장을 받으시게 된 것을 축하한다. 글로벌시장 악조건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성장한 비법이 있다고 들었다.

적극적인 신규시장 개척 노력이 주효했던 것 같다. 회사 자체 기술연구소를 통한 독창적인 신기술 개발 노력, 품질향상을 위한 투자도 한몫했다. 생산 공정을 자동화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다. 우선 신시장개척을 위해서는 영어와 중국어로 된 카탈로그와 홍보영화를 제작해 해외바이어에게 발송했다. 시장개척을 위해서는 먼저 해외시장을 알아야한다고 판단하고 각종 해외 산업박람회에 참여했다. BMW구매본부장을 비롯, 인도 마루티, 포드 등의 해외 주요바이어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우리 제품과 생산과정을 직접 보여줬다.
 
-세원물산만의 비법이 있다면?

제품개발에서부터 생산기술까지 차별화된 능력 확보뿐 아니라 Best&Worst 제도 도입, 불량률 제로에 도전하는 single PPM 및 6시그마를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또 생산 공정의 95%를 자동화하여 생산성향상을 이뤘다.
 
-회사를 운영하다보면 어려움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사람이 재산이다. ‘인재 경영’ 이라는 기업 이념을 실천코자 경비원, 환경미화담당자에서부터 경영진에 이르기까지 전 임직원에게 TPS(TOYOTA Productivity System)연수 기회를 부여 하는 등 인재 역량 강화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오고 있다. 지난 98년 IMF의 한파로 동종의 기업들이 쓰러져 갈 때에도 ‘사람이 재산’ 이라는 원칙으로 모든 임직원이 단결해 단 한 명의 해고도 없이 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올 들어 글로벌시장 환경악화로 어려움이 크지만 저만의 경영소신을 믿고 갈 생각이다.
 
-최근 글로벌경제위기에 대한 견해, 향후 대책은?

현재의 위기가 1년, 아니면 그 이상도 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최근 급격하게 나빠진 글로벌 무역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개척노력이 필요하다. 1월도 아끼는 절약경영을 실천해야겠지만 투자는 과감히 해 새로운 기회에 미리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처럼 어려울 때일수록 ‘정도경영’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투명한 경영으로 직원들이 상생의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수상소감 한마디.

대내외 악재 속에서 ‘세원’의 이름을 지켜주고 있는 세원그룹 임직원들과 이 영광을 함께 한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자동차 업계가 처한 어려운 경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책임과 노력을 다 할 것이다. 더 큰 변화와 혁신으로 21세기 자동차 산업을 이끌어 가는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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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19 15:19   좋아요 0 | URL
세원그룹 사장 같은 이들이 걸핏하면 가족경영 운운하지요.시실은 가축보다 못하게 대접하면서...가죽을 벗겨먹고.

로쟈 2008-12-19 23:29   좋아요 0 | URL
아침에 읽은 88만원 세대의 칼럼도 '가족주의'의 허울을 잘 벗겨내더군요. '가족'이면 경영권도 넘겨줘야죠...
 

미국의 페미니스트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의 대표작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이 출간됐다. 그동안 입소문만 무성했던 이 책은 "현존하는 최고의 페미니즘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의 주저로, 섹스(sex)와 젠더(gender)의 구분을 허물고, 지배 권력의 토대인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의 본질을 폭로함으로써 기존 페미니즘의 패러다임을 단숨에 전복시킨 책이다." 아직 십여 일 정도 더 남았지만 올해의 마지막 '이론서'가 아닐까도 싶다. 덕분에 '주디스 버틀러 읽기'도 어느 정도 규모를 갖게 됐다. 독서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버틀러에 대한 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5624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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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사라 살리 지음, 김정경 옮김 / 앨피 / 2007년 7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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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 읽기-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
임옥희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6년 7월
15,000원 → 14,250원(5%할인) / 마일리지 43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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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트러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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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불확실한 삶-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주디스 버틀러 지음, 양효실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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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 방한하기도 했던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글로벌 위험사회>가 내년 6월경 한국어로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역자인 박미애 박사가 '글로벌 위험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을 미리 정리해주고 있는 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아주 오랜만에 '세계의 책' 카테고리에 넣어둔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2. 11) 글로벌 리스크는 세계시민사회를 도래시키나

울리히 벡의 신간 <글로벌 위험사회>(Weltrisikogesellschaft)가 지난해 독일에서 출간되었다. 전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불안을 ‘글로벌 리스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벡의 논의를 통해, 오늘날 세계적 위기를 타파할 해결책을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미국의 비우량담보대출 사태로 촉발된 경제위기의 한파가 전세계를 뒤덮고 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결정적인 해결책이 마땅히 없다는 사실이 사태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몇 개국에 국한되었던 90년대 아시아 금융위기와 달리, 현재의 경제위기는 유럽의 최북단 조그만 섬나라 아이슬란드에 이르기까지 예외를 두지 않고 무차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기의 파괴력을 피해갈 수 있는 곳, 그 영향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가 글로벌 위험지대에 앉아 있다”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진단이 어느 때보다 현실감과 설득력을 얻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1986년 11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7개월 후 벡은 <위험사회>를 출간했다. 당시 서구사회를 사로잡고 있던 불안과 불편함을 ‘리스크’라는 개념으로 적확하게 포착한 그의 분석은 30여 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이제 사회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사회는 스스로 생산한 위험에 직면해 있지만, 이 위험을 이슈화하고 논의함으로써 성찰적이게 된다는 근본 명제로 벡은 산업적 현대와 구분되는 제2의 현대를 기록하는 한편, 현대 안에 내재된 자기혁신의 힘을 강조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7년 벡은 과거의 진단을 한층 강화하고 확대하여 ‘글로벌 위험사회’를 논한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그동안 재앙과 리스크 역시 세계화되었고, 이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리스크와 ‘위험’, 리스크와 ‘재앙’을 구분하는 개념의 세분화와 국민국가적 관점에서 초국가적 관점으로의 시각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9.11사태로 서구 민주주의의 자기신뢰를 파괴한 국제적 테러리즘, 쓰나미와 카트리나로 현실화된 기후재앙, 지금까지 위력을 떨치고 있는 국제적 금융위기와 같은 ‘큰 리스크’가 현대사회의 근본 토대와 인간 실존의 자명성을 파괴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저자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했다고 말한다.

재앙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
지구온난화로 인해 도쿄와 런던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수 있는 가능성, 유전공학의 획기적 발전이 가져올 인간형질의 변화,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테러공격 등 벡이 책 서두에 극적으로 묘사하는 재앙의 시나리오는 묵시론적 종말의 무시무시한 예언을 연상시킨다. 19세기 말 선배들을 쫓아 벡 역시 세계몰락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계몽된 성찰적 현대성 속에 더 이상 자기극복의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역시 인간의 감수성을 연마하고 행위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한스 요나스가 말한 의미에서) ‘공포의 발견술’을 사용하는 것인가?

지난해 독일에서 <글로벌 위험사회>의 출판 이후 나온 비판 중 하나는 이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 같은 태도, 벡이 ‘연출하는’ 재앙 시나리오의 과장된 측면을 겨냥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현재 전세계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현실 속에서 무색해진다. 글로벌 차원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큰 리스크’는 우리가 이제까지 사용했던 합리적 위기대처 수단만으로, 즉 지식이라는 의미에서의 성찰만으로 극복할 수 없으며, 그것이 오히려 또 다른 리스크와 재앙을 불러올지 모른다는 그의 주장이 현실에서 검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성찰적 습득은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글로벌 성찰이 총체적 경제파국으로의 추락을 불러오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벡의 말은 리스크를 줄이려는 시도가 또 다른 리스크를 불러온 작금의 금융위기에 그대로 적용된다.   

벡이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말하는 리스크는 재앙이 아니라 ‘재앙의 예상’이다.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거나 테러공격이 발생하거나 금융위기가 발생함으로써 리스크가 현실이 되는 순간, 리스크는 재앙으로 변한다. 리스크는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미래의 사건이지만, 일어날 경우 경제적으로 보상할 수도, 기술적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 재앙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 대량학살 무기가 테러리스트들의 수중에 떨어지면, 때는 이미 늦다. 기후재앙으로 해수면이 높아진다면, 때는 이미 늦다. 그러므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현재에 선취하여 그것을 근거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토대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역설과 딜레마가 글로벌 리스크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리스크를 함께 관리하는 세계시민사회
그러므로 글로벌 위험사회는 인류를 ‘전부 아니면 무’라는 상황 앞에 세우는 사회이며, ‘우리가 모르는지도 모르는 것’에도 불구하고 예측하고 행동해야 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벡은 바로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으로부터 ‘세계주의’의 계기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 원인과 영향을 어느 한 지리적 장소나 공간으로 제한할 수 없고, 그 결과를 원칙적으로 계산할 수 없으며, 그 피해를 보상할 수 없는 글로벌 리스크는 지구촌 주민 모두에게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며, 원하든 원치 않든 문화적 타자를 자신의 지각 속에 포함시킬 것을 강요한다. 종교, 피부색, 국적, 삶의 상황, 과거와 미래가 서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의 실존을 위협하는 글로벌 리스크의 강요로 인해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세계주의는 비록 강요된 세계주의라 하더라도, 규범적 원칙일 뿐 아니라 현실이 된다. 

한편 먼 타자를 가까운 내부 타자로 수용하고, 문화적 타자에 대한 인정을 긍정적 가치로 해석하는 세계주의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내의 불평등에 대한 강한 감수성과 인식을 함축한다. 글로벌 리스크는 모든 사회 계층에, 모든 국가에 똑같은 정도의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무엇보다 뉴올리언스의 흑인 거주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기후재앙이 일어난다면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하는 사하라 사막과 히말라야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또한 글로벌 경제위기는 누구보다 서민계층을 힘들게 한다. 대부분의 경우 리스크를 결정하는 것은 선진국이고 리스크 결정에 따른 위험의 피해를 입는 것은 후진국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리스크 관리를 위한 세계시민사회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벡이 세계주의에 대한 요청으로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계시민사회’와 ‘글로벌 통치’이다. 우리 모두가 비자의적으로 세계위험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이상 ‘지구적 책임윤리’를 발전시켜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는 불가능한 해결책을 함께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벡은 비정부조직들과 사회운동들이 서로 연합한 초국가적 제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금융위기가 국가간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는 점차 (국적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세계시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세계시민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또 글로벌 통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하나의 과제로 남는다. 벡은 언뜻 글로벌 리스크를 연출하는 경고자의 역할에만 충실한 듯 보이지만, 미래 세계시민사회의 구축을 위해서도 글로벌 위험사회에 대한 철저한 현실인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박미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학 사회학 박사)

08. 12. 17.

P.S. 영어본으로는 <세계위험사회>란 책도 지난 1999년에 출간된 바 있다. 작년에 나온 독어본 <글로벌 위험사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업그레이드 버전일까?.. 내친 김에 울리히 벡이 지난 가을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도 옮겨놓는다.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다.

한겨레(08. 10. 24) 세계 위기 ‘국경없는 대응’ 필요/ 울리히 벡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중국식 체제와도 거리를 두어온 서구의 복음 원리, 즉 자유시장 경제가 하룻밤 사이에 허공으로 사라졌다. 열광적인 개종자라도 되는 듯 설쳐대는 은행가들은 정작 이윤은 자기네들이 챙기면서 손실은 ‘국유화’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때론 조롱거리로, 때론 악마 취급을 당하면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던 중국식 국가계획경제가, 이제 자유방임을 외쳐대던 앵글로색슨 사회의 중심부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일까? 글로벌 금융위기가 몰고 온 세계정치의 대변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비상 상황이 닥칠 것이란 ‘기대’는 전세계의 국경 없는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비상 상황은 더 이상 일국 단위가 아닌 범지구적인 사건이다. 세계 경제위기, 기후 변화, 테러리즘 등 ‘세계적 위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회적, 공간적, 시간적인 의미에서 비상상황의 ‘탈국경화’ 가 진행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세계정치 무대에서 새로운 금융정책의 장이 지금 그리고 바로 여기서 열리고 있다는 점에서, 비상 상황은 ‘사회적’으로 탈국경화되고 있다. 이는 가장 좋은 구제방안을 둘러싼 각국 정부의 경쟁에서 잘 드러나는데,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처럼 경쟁의 승자에게는 국내외적으로 불사조처럼 정치적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고 있다. 그간의 완고한 국제정치 룰을 변화시키려는 권력 게임은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사이에서, 또 글로벌 경제와 정치, 초국가적 기구들 사이 등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게임에서는 누구도 혼자서만 승리를 챙길 수는 없다. 마치 한 나라의 정부가 글로벌한 테러리즘과 맞서 싸울 수 없듯이, 한 나라 정부가 혼자 힘으로 기후변화와 맞서 싸울 수 없고, 한 나라 정부 혼자서 금융시장의 대파국에 대처할 수 없다.

비상 상황은 ‘공간적’으로도 기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극도로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금융 리스크란 계산될 수도, 만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국민국가가 중심이 된 ‘첫번째 근대’의 공간에서도 가끔씩 나타나는 대규모 피해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피해는 적어도 만회할 수 있는 것이었고, 실제로 각국은 그 피해를 (예를 들어 금전적인 수단을 통해) 어느 정도 되돌려왔다. 그러나 만일 세계 금융 시스템이 붕괴된다면, 지구상의 기후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변화한다면, 테러조직이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쥐게 된다면, 때는 이미 늦다. 이처럼 인류가 맞닥뜨린 질적으로 새로운 위협 앞에서 더 이상 ‘만회’의 논리는 설 자리가 잃게 되고, 대신 ‘예방’의 원리가 그 자리를 꿰찬다.

마지막으로 비상 상황의 ‘시간적’ 탈국경화는 앞서 말한 위험의 계산 불가능성에서도 잘 나타난다. 모든 이들은 바로 눈앞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며 으레 파국의 악순환이 이제는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이라 믿고 싶어한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더 나쁜 상황이 비로소 자신들 눈앞에 닥쳐 그 희망이 산산조각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계 금융 시스템에서 ‘악성’ 신용이란, 마치 끝없는 폭설 속에서 일어나는 눈사태와 비슷하다. 즉 사람들은 리스크의 존재는 알지만, 언제 어디서 눈덩이가 무너져내릴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이처럼, 모든 이들을 나락으로 몰고가려 위협하는 각종 위험에 대한 인식은 그 위험에 맞선 대항 행동을 촉발시키는 동력이 된다. 일국 차원의 정치공간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 세계정치 차원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볼 때, 글로벌한 위험에 대한 인식은 만만찮은 대가를 치러야했다. 보통은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그 인식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위험의 ‘지각’(수용)이 절대적 힘을 발휘하다보니, 세계무대 차원에서 글로벌 위험에 맞서려는 시도의 유효기간도 미디어의 관심에만 크게 휘둘려왔다.

오늘날 동시대인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물질적 상호의존성의 망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그래서 세계 위험사회의 민감한 작동기제가 아예 붕괴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베버와 푸코 같은 이들에게는 공포의 시나리오였던 ‘다스려지는 세계’, 곧 통제 합리성이 지금 이 순간 금융위기의 잠재적 희생자들에게 하나의 동아줄이 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역설적 상황에서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은 어찌됐든 국민국가의 이기주의가 제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범세계주의자(코스모폴리탄)로 탈바꿈해야한다는 점일 게다. 물론, 이는 파국에 대한 ‘기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또 다른 가능성이란 이런 움직임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일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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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로벌 위험사회와 세계시민주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29 21:39 
    몇 권의 신간과 함께 오늘 주문한 책은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글로벌 위험사회>(길, 2010)다. <위험사회>(새물결)의 문제의식을 더 확장한 걸로 보이는데, 소개기사를 보니 글로벌 리스크를 통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벡은 세계시민주의에 주목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기도 해서 챙겨놓는다.  한겨레(10. 09. 30) "글로벌화된 리스크 세계시민주의가 통제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