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부키, 2008)가 거의 20년만에 다시 나왔다. 첫 번역본 <레이스 뜨는 여자>(예하, 1989)의 역자인 이재형씨가 손을 더 보아서 냈는데, 덕분에 잠깐 2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을 했다(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과 함께 이 책을 읽던 부대 관사의 당번병 방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1989년이었다). 젊은 독자들에겐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책은 "콩쿠르 수상작이자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영화 <레이스 뜨는 여자>(1977)의 원작 소설"이다. "얀 베르메르의 동명의 그림(하지만 '레이스 짜는 여인'으로 표기된다)에서 제목을 따온 이 소설은 문학이 씨줄로, 철학과 사회학, 심리학이 날줄로 엮혀 있는 프랑스 현대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개인적으론 이자벨 위페르와 관련한 페이퍼들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http://blog.aladin.co.kr/mramor/1548659 참조). 반가운 마음에 자료를 찾으니 바로 얼마전에 장석주씨가 쓴 '독서일기'가 있어 스크랩해놓는다.  

 

뉴스메이커(08. 08. 20) 뽐므는 정말로 ‘흔해 빠진 여자’일까?

프랑스 낭테르 대학에서 남학생의 여학생 기숙사 출입을 막는 데 따른 불만에서 촉발한 시위는 5월 한 달 동안 프랑스 전역에서 대학생 시위와 1000만 노동자의 대규모 파업으로 번진다. 불이 산소를 만나 타오르듯 냉전과 베트남전과 같은 시대의 화두를 끌어안으며 젊은이들을 저항과 해방의 열망으로 타오르게 했다. 그러나 ‘68혁명’은 하나의 이념과 기획으로 묶을 수 없다. 모든 금지에 대한 저항, 구속 없이 즐기는 삶에 대한 열망이 그 이념과 기획을 대체했다. 궁극적으로 낡은 정치체제와 신체에 가하는 낡은 도덕 관습들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이었다.

‘68혁명’의 거센 불길이 지나간 뒤에 남은 것은 마리화나와 히피, 마오주의(Maoism), 그리고 성의 해방이다. 그 중에서 마오주의는 최악의 유산으로 꼽혔다. 젊은이들 사이에 번진 파시즘 독재자에 대한 이상한 열광은 이해할 수 없었다. ‘68혁명’에 대한 평가는 낡은 도덕과 정치체제를 새것으로 바꾸려는 ‘혁명’이거나, 혹은 무질서와 파괴로 얼룩진 재앙이라고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분명한 것은 ‘68혁명’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대중의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는 점이다. 그 움직임은 국가와 권위에서 오는 일체의 통제와 억압에 대한 저항이고, 혹은 하나로 묶일 수 없는 다양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만든 사건의 연속체였다. ‘68혁명’은 저렇게 다른 목소리들이다. 다양한 차이 안에서 그 목소리는 변화하려는 열망과 그 극단을 드러낸다. 그 목소리는 조직되지 않고, 기성 조직에 기대지도 않는다. 그 목소리는 신체를 포획하는 그 무엇을 스스로 바꾸고자 하였을 뿐이다.



파스칼 레네는 ‘68혁명’의 중심을 가로질러 나온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이자 소설가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레이스 뜨는 여자’는 ‘68혁명’의 여진(餘震) 속에서 씌어진, ‘68혁명’이 지핀 변화를 향한 열망이 스민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68혁명’이 젊은이들의 의식과 행동에 어떻게 스며들고 변화의 무늬를 남겼는지를 찾아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그들은 확실히 ‘68혁명’ 이전 세대와는 무언가 다를 것이다. ‘금지만이 금지된다’ 혹은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라는 ‘68혁명’의 강령을 간접적이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체화해낸 세대는 성에 대한 낡은 도덕적 관습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녀는 매일 밤 그렇게 하기라도 했듯이, 서두르지 않고 스스로 옷을 벗었다. 그녀는 바지의 주름을 잡아서 의자 등받이에 놓아두었다. 청년은 그런 식의 침착함에 얼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계속되어온, 육체를 향한 그의 육체의 동작의 탐색은 그토록 단순하고 말없는 침착성과 비교할 때 정말 우스꽝스러운 노력이었고 어려움이었던 것처럼 그에게는 보였다. 하지만 그는 뽐므가 평소에는 덜 세심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 앞에서 자발적으로 옷을 벗는다. 스스로 옷을 벗음은 하나의 비밀의식이다.



한 존재란 그 자체로 얼마나 충만한 존재인가. 파스칼 레네가 묘사하는 여주인공 뽐므는 다음과 같다. “충만이란 그 나이(열네 살이라고 해두자)의 여자 아이에게는 적합한 말이 아니지만, 이 아이는 꽉 차 있다는 인상을 즉시 풍겼다. 바삐 움직이거나 앉아 있거나 길게 드러누운 채 꼼짝 않고 꿈을 꾸거나,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거나, 그녀의 정신이 그녀에게서 벗어나 잠시 꾸벅꾸벅 졸거나 간에 그녀의 육체의 존재는 온 방 안에 군림했다. 뽐므, 그녀는 이제 막, 그러나 완전한 동질성과 놀랄 만한 밀도를 갖추고 완성된 것이다. 그녀의 영혼 또한 틀림없이 단단하고 두툼할 것이다. 그것은 그 존재가 추상화한 눈길이나 말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는 그런 사람들의 영혼이 아니었다. 정말 하찮아 보이는 그녀의 움직임과 활동조차도 그녀를 매 순간의 영원성 속에 구현시켰다.”

가난이 진부한 재앙이라면 “완전한 동질성과 놀랄 만한 밀도를 갖추고 완성된” 뽐므의 삶은 진부한 재앙의 억센 손아귀에 잡힌 셈이다. 그러나 가난이나 천직(賤職) 따위는 한 사람의 심오한 본성을 어쩌지 못한다. 그러나 관습의 독재에 빠진 시선은 한 사람을 심오한 본성을 가진 충만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내의를 책임 맡은 하녀’ ‘물 배달하는 여인’ '레이스 뜨는 여자’로 보게 한다. 남자의 시선은 그 여자의 존재로 스미지 못하고 그 여자가 수행하는 직분 위로 미끄러진다. 그럴 때 몸은 소통하지 않고 다만 소비된다.

처녀와 청년은 우연히 만나 성교를 하고, 함께 식사를 한다. 두 존재의 다름은 이내 드러난다. “그들은 제비콩 샐러드를 먹었는데, 청년은 처녀의 의도를 해독할 수 없었고, 처녀는 그런 건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순히 청년과 함께 있는 데, 그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데 만족해했으며, 그래서 그녀는 할 말을 찾아내지 못해서 주눅이 들어 있는 그 청년의 침묵을 불안해하지 않았다.” 처녀는 청년의 존재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마찬가지로 청년 역시 처녀의 존재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요컨대 그들은 동일한 세계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이었다. 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은 상대방을 만족시키지 못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똑같은 즐거움을 나누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서 태어났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녀가 자기에게 뭘 기대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존재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감은 몰이해와 혐오감으로 나타난다.

청년은 처녀가 이빨 닦을 때 내는 소리, 침대에서 처녀의 발이 제 몸에 닿는 것, 잠든 처녀의 숨소리조차 견디기 힘들어한다. 처녀의 현전 자체가 욕구를 휘발시키고 실망과 유감 속으로 빠뜨린다. “그에게는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뽐므가 일을 끝내고 돌아와 방으로 들어오면, 충만감도, 기쁨도 사라져버렸다. 반대로 그녀의 현전은 그녀에 대한 욕구를 그에게서 앗아갔다. 그것은 매번 변함없이 가볍고 겨우 느껴지면서도 진정한 실망이었으며 똑같은 유감이었다.” 미래의 박물관장인 청년은 어디에나 있는 흔한 처녀를 만나 성교까지 나누지만 처녀 존재 자체에서 오는 실망과 환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약하자면 이 처녀는 그 ‘68혁명’에 대한 하나의 은유는 아닐까. 그리고 청년은 실패한 혁명에서 오는 실망과 환멸에 빠진 그 숱한 자율주의자들, 작가 자신을 포함한 지식인 계급의 표상은 아닐까.

“그런데 그로 말하자면 자아를 기증하려고 하는 그 처녀를 만류할 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잠자기 전에 끄는 것을 잊어버린 전등만큼도 그 촛불에 대해 염려하지 않은 채로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그 작은 촛불이 자기 앞에서 타도록 내버려두었다.” 정욕의 시선들은 어디서나 ‘덮칠 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떠돈다. 타자에게 제 자아를 기증하려는 ‘흔해 빠진 여자'는 잠자기 전에 불 끄기를 잊는 남자의 수만큼이나 희귀하다. 흔한 것은 그 여자를 ‘흔해 빠진 여자’라고 믿는 일방적 해석의 오류에 빠지는 남자들이다.

우연히 만난 처녀를 남자가 ‘흔해 빠진 여자’로 묶을 때 여자는 영원히 남자의 이방(異邦), 바깥에 머문다. 여자를 제 생의 가치 영역에서 배제할 때 남자 역시 여자의 이방으로 전락하는 결과에 이른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날리는, 아주 조금은 비극적인 꽃가루로 비유했던 이 인물을 포착하면서, 작가는 이 인물을 손상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렇게 연약한 존재에 어울릴 만큼 섬세하고 정밀한 글쓰기는 존재할 수 없으리라. ‘레이스 뜨는 여자’는 그녀가 짠 세공품의 투명함 그 자체 속에서 나타나게 해야 할 것이다.”



태생적 배경이 다른 두 남녀의 만남, 동거와 헤어짐, 여자의 거식증과 정신병원행 따위는 흔한 연애소설의 외관을 취하지만 이 소설은 흔한 연애소설은 아니다. 이 섬세하게 연애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시대에 대한 중의적 사유를 덧씌운 ‘레이스 뜨는 여자’는 선택과 배제의 오류에 대한 관찰을 보여준다. 더 또렷하게 말하자면 선택과 배제에 대한 심리적 고찰과 철학적 탐색으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정교하게 짠 레이스와 같이 아름다운 세공품 그 자체인 여자가 가난이나 천직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의 폭력에 의해 비참한 자아로 떨어지는지, 해석의 폭력이 어떻게 여자의 현전이 감춘 감수성, 아름다움, 평온함 따위를 지워버리는지를 묘사한다. 파스칼 레네는 그 묘사를 실패한 혁명이 만든 실망과 환멸 위에 덧씌운다.(장석주)

08.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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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akim 2008-09-13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읽어보네요. 극한 디테일이 주는 각성의 시선과 의식의 깨어남 같은 것. 그러면서 그 눈을 통해 머리속이 환해지는 경험이 오랜 시간을 거슬러 접속되네요. 로쟈님 잘 지내시죠?

로쟈 2008-09-13 08:53   좋아요 0 | URL
바쁜 일은 끝내셨나요?^^

2008-09-13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3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3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3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5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9-15 09:57   좋아요 0 | URL
축하합니다.^^ 이사도 하셨으니 제2의 인생이시겠는데요.^^
 

이번주에 가장 주목한 신간은 지성사가 도미니크 라카프라의 <치유의 역사학으로>(푸른역사, 2008)이지만 아직 별다른 리뷰가 뜨지 않고 있다. 해서 대신에 리좀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된 <들뢰즈와 시간의 세 가지 종합>(그린비, 2008)에 대한 리뷰를 옮겨놓는다. '학술서' 범주에 들어갈 만한 책이지만 뜻밖에도 북리뷰의 메인도서로 다루어졌다. 독특하게도 프로이트를 통하여 들뢰즈의 시간론을 검토하고 있는 책이라 한다. 리뷰를 보고서 알았지만, 저자 키스 포크너는<싹트는 생명>(산해, 2005)의 저자 키스 안셀 피어슨의 제자이고 책은 그의 박사학위논문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학술서'로 분류할 수 있는 근거이다.  

문화일보(08. 09. 12)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다른 차원일 뿐”

“과거와 미래는 현재라고 가정된 순간과 구분되는 어떤 순간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순간들을 수축하는 현재 그 자체의 차원들을 지칭할 뿐이다.” 최근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는 ‘차이’의 철학자로 불리는 프랑스의 들뢰즈(1925~1995)일 것이다. ‘철학아카데미’등 인문학 공부모임들에서는 들뢰즈를 ‘독해’하고자 하는 강좌가 연일 이어진다. 들뢰즈는 새로운 철학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넘어야 할 ‘벽’과도 같이 막막하고 어렵다.

국내에서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쓴 ‘천의 고원’이나 그 전에 나온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주로 접해졌다. 이 책들을 주석서를 통하지 않고 직접 끝까지 읽은 독자가 많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들뢰즈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이자 그의 철학의 바탕이라 할 수 있는 ‘차이와 반복’을 완독한 독자는 더 적을 것이다. 그 중에도 2장 ‘대자적 반복’은 이 책의 저자도 실토하듯이 “전문가들만이 해석할 수 있는 비의적(秘義的) 지식”으로 가득하다. 이런 불친절한 저자가 다시 없다는 ‘울분’(?)마저 치민다.



이 책은 바로 들뢰즈의 ‘시간론’인 ‘차이와 반복’의 2장을 풀어내고 있다. 영국인인 저자 포크너는 들뢰즈로 생명을 탁월하게 설명한 ‘싹트는 생명’의 저자 키스 안셀-피어슨의 제자로 들뢰즈의 시간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다.

우리는 흔히 시간을 일직선 상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로 흐르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이런 시간관은 깨진 지 오래다. 들뢰즈에게 시간은, 짧게 요약하면, ‘수축’을 통해 유지되는 한에서 과거는 현재에 속하며 미래도 똑같은 ‘수축’ 안에서 성립하는 기대이므로 미래 역시 현재에 속한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다른 차원을 지칭할 뿐이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들뢰즈의 시간론은 시간을 통해 주체가 형성된다는 ‘시간적 주체론’이며, 따라서 ‘차이와 반복’은 현대 철학자들이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존재론’이다. 그의 ‘시간론=주체론’은 ‘반복’과 ‘시간의 수동적 종합’이 뇌관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의 시간론은 칸트가 정초한 세 가지 종합, ‘포착-재생-재인’을 변환시킨 것이다. 이같은 세 가지 종합은 직관, 구상력, 오성으로부터 비롯된다. 포착된 외부 대상은 주체에 의해 구성되고 지성적으로 통합되는 ‘능동적 종합’이다. 들뢰즈는 칸트의 ‘능동적 종합’에 ‘수동적 수축’을 추가한다. '수동적 종합’을 알자면 먼저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의 세 가지 층위- 물질적 층위, 수동적 종합의 층위, 반성적 표상의 층위-를 이해해야 한다. 반복의 물질적 층위는 즉자(卽自)의 층위로 물질자체의 반복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시간이 성립하지 않는다. 시간은 계기들의 ‘종합’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자적 반복이 정신에 의해 대자(對自)적으로 종합될 때 곧 반복을 묶거나 수축할 수 있다. 시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있어 이같은 종합은 칸트처럼 능동적이고 의식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 종합’이다. 즉 능동적이고 구성적인 주체 아래에 있는 수동적 자아(애벌레 자아)들이 의식 이전의 ‘관조’를 통해 순간들을 수축하여 ‘살아있는 현재’가 종합된다. 이 시간의 정초인 현재가 흐르고 이행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과거가 동시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현재가 시간의 정초(시원)라며 과거는 현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습관’의 형식을 통해 종합되었다면, 과거는 ‘기억’의 형식을 통해 종합된다. 이러한 두 시간의 종합과 달리 시간의 세번째 종합인 미래는 주체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같이 시간이 종합되는 과정에서 주체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주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시간과 함께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간적 주체가 아니라 시간적 주체인 것이다. “나는 시간이 우리의 감정적인 생활에 추동력을 준다는 것, 항구적인 것으로 보이는 ‘자아’가 잔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거울로서 또는 희미하게 빛나는 반사로서 활동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는 수동적 종합의 정신분석학적 맥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프로이트를 전면에 끌어내고 있다. 국내 독자들은 이 점에서 다소 의아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의 주석서 등을 통해 들뢰즈-가타리는 프로이트를 잡아먹을 듯이 비판해온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을 논할 때 초점이 되는 흄, 베르그손, 니체 이외에 프로이트와 들뢰즈의 연관성을 보지 않고서는 즉 무의식적 층위를 중심으로 다른 층위들이 함께 엮이면서 작동하는 복잡한 주체의 형성과 그로 인한 시간의 발생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들뢰즈와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꼼꼼하게 비교, 독해하면서 어떤 면에 프로이트와 들뢰즈 간에 영향관계가 있는지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분석학의 층위에서 펼쳐지는 들뢰즈의 시간론을 독창적으로 펼치고 있다.(엄주엽기자)

08.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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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김우창 칼럼'을 옮겨놓는다.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것인데, 지난달 말 방한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인문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강연을 다루고 있다. 고려대에서 있었던 첫번째 강연주제인 '정화된 민주주의'(번역원고에 따라 언론에서는 '순화된 민주주의'라고 표기했었다)에 대한 논평을 겸하여 '나라 사랑'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나로선 '세계시민주의와 애국주의'에 대한 글을 얼마전에 작성하기도 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 참고로, 누스바움 교수의 세 차례 강연원고는 원문과 함께 인터넷에서 입수할 수 있다(나는 세번째 강연을 직접 듣기도 했다). 간단한 관련 동영상은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OnAir/YIBW_showMPICNewsPopup.aspx?contents_id=MYH20080825004600355&bandwidth=700 참조.

  

경향신문(08. 09. 11) 나라 사랑과 인간 사랑

지난 8월27일부터 사흘간 학술진흥재단의 초청으로 방한한 미국 시카고 대학의 마사 누스바움 교수의 강연회가 있었다. 그는 지금 미국 철학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 가운데 하나지만, 거기에는 철학적 깊이 이외에도 미국 철학을 상아탑으로부터 공공의 공간으로 끌어 낸 철학자라는 사실이 관계되어 있다. 브라운 대학의 고전철학 교수로 있던 그가 시카고 대학 법학대학원의 교수로 옮겨 간 것도 철학이나 문학 그리고 인문과학이 사회 현실 이해와 실천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법학 교육에는 법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인문과학이 제공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사건의 구체적 정황의 정확한 파악은 분석력과 함께 감성적 사고의 훈련을 거친 사람이라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스바움 교수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것이다.

이번 방한 중 고려대학교에서 있었던 첫 번째 강연은, ‘정화된 애국주의가 가능한가?’라는 제목이었다. 나라 사랑에는 대체로 남의 나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에 대한 규범은 포함되지 않는다. 어떻게 나라 사랑을 더욱 보편적인 인간 사랑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는가? 이것이 가능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있어서이다 - 누스바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 애국심·인간애 근원은 애향심 -

이때의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적 이권의 맹목적 추구를 옹호하는 체제를 말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민주주의의 이상은 모든 사람의 자율, 동등 그리고 위엄을 신장하고 보장하는 체제이다. 국가는 사회 일부에서 일어나는 지나친 탐욕과 이기주의의 추구를 억제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동기의 다국적 기업과 세계시장의 횡포를 막아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인종, 성, 계급에 기초한 차별 또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폐지도 국가의 의무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어려운 상황에 있는 나라에 대한 원조, 인도적 배려, 그리고 평화와 전쟁 방지는 자연스러운 국가 목표의 일부가 된다. 누스바움 교수의 생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애국심은 이 모든 도덕적 규범을 포용하는 것이어서 마땅하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와 이상들이 반드시 나라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각될 필요가 있는가? 누스바움 교수에게 정서적인 것이 짜여 들어가지 않는 이성적 판단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결하게 된다. 애국심은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생겨난다. 거기에는 공동의 상징물과 기억과 시와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크게 작용한다. 이러한 것들이 전통과 문화가 되고 의례(儀禮)로 정립된다. 여기에서 길러지는 애국심에 보편적 인간 가치를 통합한 것이 정화된 애국주의이다.

누스바움 교수의 강연이 말한 애국심과 보편적 가치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과 통합의 문제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제시된 통합 방법이 모순을 충분히 참조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려대 강연 후 청중으로부터 나온 질문의 하나는 “애국심에 정서적, 상징적 자산이 중요하다면 분단된 나라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질문은 이민자나 이주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있을 수 있다. 누스바움 교수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았지만, 구태여 답변을 생각해 본다면, 소수자에 대한 일체의 차별을 거부하는 정치체제가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답이 가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체제가 소극적인 의미에서 소수자 문화의 위엄을 보장할 수는 있겠지만, 이문화(異文化) 속에 사는 사람의 문제를 완전히 풀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또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다른 나라와의 사이에 평화적 관계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이라크 전쟁은 민주주의라는 명분이 전쟁의 구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또는 어떤 정치 이론가들이 말하듯이, 애국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른 나라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전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전쟁의 상태가 사람들이 가장 애국적이 되는 조건이라는 관찰도 있고, 집단 심리를 동원하기 위하여 가상의 적대국이나 집단을 조작 이용하려는 정치 정략도 가능하다.

어쩌면 모순은 모순대로 인정하면서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옳을는지 모른다. 2차대전과 독일 점령을 경험한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어떤 사람이 전선(戰線)의 저쪽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가, 국가를 위해서 거짓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 옳은가 - 이러한 문제들을 고민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나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것은 복잡한 현실 여건과의 관계 속에서만 저울질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국에 대한 누스바움 교수의 말에는 여전히 경청해야 할 사항이 있다. 메를로퐁티와 조금 다른 의미에서이지만, 그가 구체적 상황과 감정을 중요시한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화된 애국주의론에서는 이 입장을 조금 느슨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좁은 구체성이 관점과 생각을 좁히게 될 것을 우려한다. 그리하여 가족이나 지역 등의 좁은 단위가 마음을 좁히는 데 대하여 나라는 그것을 한껏 넓히면서 실효성을 갖는 테두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을 넓히는 것이 공간적 확대에 일치해야만 하는 것일까?

- ‘고향파괴’ 새도시 건설 멈춰야 -

영어의 애국심(patriotism)의 어원에 들어 있는 파트리아(patria)는 나라보다는 고향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애국심은 애향심의 확대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공간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내 가족이 나에게 중요하다면 다른 가족도 중요하고, 내 나라가 나에게 중요하다면, 남에게는 그의 나라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마음의 움직임이 여기에 관계된다. 자기의 일로 다른 사람의 일을 미루어 생각하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구체성의 심화는 마음의 확대 그리고 공간의 확대를 가져 온다.

국가가 실효성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은 그 강제력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보편성은 반성의 능력과 문화에서 온다. 그리고 그것에 토양이 되는 것은 고장과 고장 사람들의 교감이다. 누스바움 교수는 애국심을 말하면서,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그 연설에서 미국의 국토를 - ‘뉴햄프셔의 광막한 구릉들’ ‘캘리포니아의 굽어진 해안’과 같이 -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을 칭찬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구체적인 사물이고 사건이다. 그러나 이 킹 목사의 언급은 다분히 추상적이고 상투적인 수사에 의존한다. 참으로 구체적인 것은 나와 이웃과 선조가 살았던 고장과 그 이야기이다.

우리가 그간 해온 일은 새로운 도시 건설의 이름으로 몸을 두고 살 수 있는 고장과 이웃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새 건설은 마음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지속적인 공동체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구체적인 의미에서 파트리아의 보존을 생각할 때가 되었지 않나 한다. 마음과 몸과 땅과 사람이 교감하며 정주하는 데에서 나라 사랑도 나오고 인간 사랑도 나온다.(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08. 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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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1 2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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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1 2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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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2 1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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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2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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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2 1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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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자음과 모음>(2008년 가을 창간호)에 실린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과 수잔 벅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성대출판부, 2008)에 대한 리뷰를 의도한 글이며 '가상대담'의 형식을 빌렸다(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언급도 일부 포함돼 있다). 아래는 글의 결론부이다.

 

  

 

 

로쟈: 한편으로 지젝 선생님은 정치적 ‘전체주의’에 대한 진부한 비판들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셨는데요. 조금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지젝: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좌파들은 정치적 테러의 뿌리가 도구적 이성, 즉 과학기술적 착취의 ‘원리’가 사회로까지 확장돼서 사람들을 ‘새로운 인간’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재료로 다룬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정치적 테러는 바로 물질적 생산 영역의 자율성이 부정되고 정치적 논리에 종속됐다는 걸 보여줍니다. 한데, 발리바르에서 랑시에르와 바디우를 거쳐 라클라우와 무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인 것’에 관한 프랑스제 이론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경제영역을 ‘존재론적’ 위엄이 제거된 ‘존재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거기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요.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합니다. 둘 다 볼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축소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됩니다. 하지만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의 ‘긴급성’을 의식했다는 점입니다. 불가능하지만 필요한 과제로 생각했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도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레닌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 경제가 핵심이야. 전투는 거기서 결정될 거고, 우리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마법을 깨뜨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반세계화 운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명한 듯이 말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태클을 걸어야 합니다. 즉,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우리는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로쟈: 그러니까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식으로 일면만을 주장하는 것은 ‘덤 앤 더머’식이 되겠군요. 때문에 두 겹의 싸움이 필요하겠습니다. 반자본주의 운동이 필요하지만,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 곧 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반자본주의가 제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런 말씀이시죠? 자유민주주의의 유산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환상이라고 정리하겠습니다. 여기서 정치와 경제는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틀로 보자면 주권국가와 자본주의의 관계와 비슷할 거 같네요. 가라타니는 국민국가(민족국가)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새롭게 국민국가를 만들어낸 최초의 예로 나폴레옹의 유럽정복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지적을 따른 것인데요, 사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러시아의 국민(민족)의식이 고취되면서 러시아란 국민국가가 새롭게 탄생하게 됐다는 사실도 떠올리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가 다루고 있는 바이기도 하지요. 벅모스 선생님도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주목을 하셨죠?

벅모스: 네, 프랑스의 역사가 푸레의 말을 빌면, 프랑스인들은 대중을 국가로 통합해서 근대 민주주의국가를 만든 최초의 사람들입니다. 주권체로서의 ‘인민’에 의한 테러의 원형과 그리고 ‘민주주의’ 민족국가에 의한 군사적 침략의 원형, 이 두 가지가 프랑스 혁명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 혁명이 대중민주주의의 두 가지 모델인 민족국가(nation-state)와 혁명계급(revolutionary class)의 기원이라는 점이죠.

로쟈: 흥미로운 대목인데, 그 두 가지 모델을 선생님은 ‘정치적 상상계’ 개념을 갖고 비교하셨습니다.        



벅모스: ‘정치적 상상계’는 발레리 포도로가의 개념입니다. 지형학적 개념으로 정치적 행위자들이 위치해 있는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장(場)을 가리킵니다. 세 가지 아이콘이 이 장에는 들어오게 되는데, 공동의 적, 정치집단, 그리고 주권기관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대중주권의 두 모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이 정치적 상상계가 다르게 그려져요. 사회주의는 ‘상호 적대적인, 투쟁하는 계급들’이라는 정치적 상상계에 기초하며, 자본주의는 ‘상호 배제적이면서,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민족국가들’이라는 정치적 상상계에 기초합니다.

근대의 이 두 가지 정치적 비전 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어떤 차원이 시각적 경관을 결정짓느냐입니다. 시각적 경관이란 적의 본질과 위치,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는 영토를 결정하는 것을 말해요. 민족국가들에서 그 차원은 공간이고, 계급투쟁(계급전쟁)에서 그 차원은 시간입니다. 공간은 민족국가들의 정치적 상상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는데, 국가가 된다는 것은 영토를 소유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반면에 계급투쟁에서 영토는 일시적입니다. 계급 혁명은 시대를 앞질러 간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이 승리는 영토의 획득이 아니라 역사적 진보라는 용어로 기술되는 것이에요.

로쟈: 방금 말씀하신 두 가지 정치적 상상계의 구분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계급투쟁에서 공간은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단지 전술인 데 반해서, 민족국가에서 시간은 전술에 불과하며 공간이 모든 것이다.”라고 책에 쓰셨는데, 이러한 차이는 소위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구분해서 사고하는 데 아주 유용한 개념틀이 되어줄 것 같습니다. 더불어,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외교적 마찰을 빚고 있는 한국과 일본, 두 민족국가의 행보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구요. 정반대되는 사례일 텐데, 1918년에 레닌은 우크라이나 전체를 독일에 양도하는 브레스트-리토브스크 강화조약에 기꺼이 서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인용하셨습니다. “나는 시대를 얻기 위해서 공간을 양여하고 싶다.”

벅모스: 네, 두 가지 태도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이죠. 이 양쪽의 정치적 상상계에서 민족과 계급 사이에는 변증법적 관계가 있습니다. 민족국가 모델에서는 계급적 차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 정체성이 계급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인정됩니다. 부자나 노숙자나 모두 ‘미국’이고 ‘한국인’이고 하는 식이 되죠. 반면에 소련에서는 계급귀속이 민족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간주됐고, 민족은 역사적으로 한시적인 정치적 형태로 이해되었습니다. 양쪽 모두 소수민족에 자율적 주권을 부여하지 않았는데, 민족국가의 경우엔 영토의 경계에 대한 위협을 진압하기 위해서였고, 계급투쟁의 경우에는 민족분리주의의 위협이 역사를 퇴보시킨다고 보았던 것이죠.

로쟈: 그러고 보면, 혁명은 무엇보다도 ‘시간’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덧 저희 대담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한 말씀씩 해주시길 바랍니다.



지젝: 흔히 혁명에는 두 가지 모델, 두 가지 양립 불가능한 논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역사적 진화의 필연성에 따라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적절한 때’라는 것은 따로 없으며 혁명적 기회가 나타나면 ‘정상적인’ 발전 과정을 우회해서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에요. 우리의 과제는 레닌이 1914년에 대응하여 한 일을 1990년에 대응하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죠.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레닌’은 무엇보다는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사고금지’의 상황을 중단시킬 강력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레닌’이란 기표는 우리가 다시금 사유하도록 허락받았다는 것,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벅모스: 제 결론 또한 유물론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입니다. 역사의 선구자를 자처했던 공산당은 서구의 산업발달에 지속적으로 뒤처진 경제시스템 내에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그리고 민족국가 시스템은 민족국가의 통제를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전지국적 자본주의 경제 내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만약 냉전시대가 끝났다면 그것은 어느 한쪽이 이겨서라기보다는 각각의 정치 담론의 정당성이 각자의 물질적 발전에 의해 근본적인 도전을 받았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국경으로 구획된 공간의 제약과 단선적인 시간의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꿈은, 레닌의 말을 빌자면, “현실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급진적(as radical as reality itself)”이어야 할 것입니다...

08.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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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차적 관점이 요구하는 것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13 23:50 
    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간략한 리뷰이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지젝!>에 대한 페이퍼와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을 다룬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를 같이 참고할 수 있다.    한겨레21(09. 04, 20) 정치 경제, 두 겹의 싸움이 필요하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다큐멘터리 영화 <지젝!>(2005)에서
 
 
드팀전 2008-09-11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를 썼던 수잔 벅모스지요? 그녀의 '정치적 상상계" 개념은 민족/계급 문제를 유형화하는 또 다른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주는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09-11 22:57   좋아요 0 | URL
네, 그 벅모스입니다. 유익한 책인데, 번역은 유감스럽게도 부실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12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부분 계급문제,민족문제를 논하는 것을 보니 공간에 집착하는 한 민족주의에 계급문제는 매몰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로쟈 2008-09-13 08:53   좋아요 0 | URL
네, 그게 요점입니다.
 

어제 월러스틴의 <역사적 자본주의>를 대출하러 갔다가(박스보관도서인 듯싶어서 대출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론 그냥 구입했다) 자본주의 관련를 몇 권 둘러보게 되었다. 눈에 띈 책들을 중심으로 임의적인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주제와 관련된 책들은 부지기수인지라 어차피 모두 포괄할 수는 없다. 새로 번역된 마르크스의 <자본>도 필독서이겠지만 당분간은 읽을 여력이 없어서 빼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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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자본주의 / 자본주의 문명
이매뉴엘 월러스틴 지음 / 창비 / 199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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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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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역사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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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250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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