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일이 있어서 근무 없이 '재택'만 하고 있는데, 점심에 졸음이 쏟아진 탓에 한두 시간을 혼수상태로 보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잔뜩 흐린 날씨에 아직 비는 오직 않고 있다. 해야 할일들이 너무 많아 정신줄 대신에 할일들의 줄을 놓고 싶지만, 어디 형편이 또 그런가. 그런 형편에 또 잠시 신문 사이트들을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신간 소식은 없지만, 그럼에도 기사 한 토막 정도는 스크랩해놓는다(견적이 나오는 페이퍼들은 다룰 수가 없으니 궁여지책의 '알리바이'다). 한일 역사학 원로들이 털어놓은 고백담을 묶은 <역사가의 탄생>(지식산업사, 2008)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일보(08. 09. 22) '나는 왜 역사가가 됐는가'

2001년부터 매년 가을 서울과 도쿄에서는 양국의 역사학자들이 참가하는 '한ㆍ일 역사가 회의'가 번갈아가며 열리고 있다. 한국사, 일본사, 서양사를 망라하는 양국의 대표적인 역사연구자들이 상호이해를 심화시키자는 취지로 여는 권위있는 학술회의다. 이 회의에서는 2회(2002년ㆍ도쿄) 때부터 일종의 전야제 행사로 "나는 왜 역사가가 됐는가?" 를 주제로 양국의 대표적 역사가들이 진행하는 자전적인 공개강연회가 관례화했다. 본회의도 의미있지만, 이 강연은 양국 역사학자들의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역사연구로 이어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어 사학계는 물론 일반인의 관심을 끌어왔다.

최근 발간된 <역사가의 탄생>(지식산업사 발행)은 2002~2007년 펼쳐진 이 공개강연을 묶은 책이다. 강연자들의 면면만으로도 양국 역사학계의 계보를 쓸 수 있을 정도로, 노대가들이 강연회를 진행했다. 한국측에서는 작고한 이기백(1924~2004), 고병익(1924~2004)과 김용섭(77) 등 6명의 학자들이 연사로 참여했다. 식민사관과 유물사관의 극복, 서양사 방법론의 한국화, 내재적 발전론의 입론 등 각 분야에서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학자들이다. 이타카키 유조(板垣雄三),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 와다 하루키(和田春木) 등 일본측 발표자 7명도 중동사 연구, 근현대 한일 관계사, 북한 현대사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학자들이다.

이들은 왜 역사가가 되었을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파시즘 시기에 '군국소년'으로 유년기를 보냈던 많은 일본 사학자들은 전전의 일본적 가치가 전면부정된 '전후 격동기'의 경험이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역사학 연구의 길로 이끌었다고 털어놓았다.

독일 사회주의운동사의 대가인 고 니시카와 마사오(西川正雄ㆍ1933~2008) 센슈대 교수는 종전 직후 "전차 안에서 한 중년 여인이 '우리는 도죠한테 속았다'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까지 사용하던 교과서에서 군국주의적인 문장을 모두 먹물로 칠해 지우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당시의 정신적 혼란기를 회상했다. 나카쓰카 아키라 나라여자대 명예교수는 "전쟁 전부터 천황제에 굴복하는 일 없이 비전향을 고수했던 스승 야마베 겐타로 씨로부터 일본 근대사 연구에 있어서 조선 문제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털어놓았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좌우대립,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숨 돌릴 틈 없었던 근ㆍ현대사의 체험이 역사가의 길로 인도했다고 자서(自敍)했다. 고 이기백 서강대 명예교수는 " 절망의 수렁 속에서도 오산학교의 전통이 민족에 대한 책임을 저에게 일깨워주었다"고 회고했으며, 이원순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소학교 4학년 때 일본어와 일본사를 국어, 국사라는 교과서로 공부했던 역사적 슬픔은 충격이었다"고 적었다.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전쟁의 원인이 한말 일제하 이래 계급문제, 사회모순의 집약이라고 생각이 들었다"며 농업사 연구에 투신한 계기를 밝혔다.

그들을 역사의 길로 이끈 것은 '시대의 불운'이었으나 역사학계에는 축복이었다. 이 책의 일본어판은 도쿄대출판부에서 출간될 예정이다.(이왕구기자) 

08. 09. 22.

 

 

 

 

 

 

 P.S. 신간 소개를 접할 때마다 기억력 테스트를 해봐야 한다. <역사가의 탄생>이 제일 먼저 떠올리게 해주는 책은? 하는 식. 아무래도 <나는 왜 역사가가 되었나>(에코리브르, 2001)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다. "프랑스가 배출한 세계적인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주제는 제목과 같은, '나는 왜 역사가가 되었나'. 이 책은 역사가들이 쓴 것이지만 논문 모음집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내적인 고백이나 자서전도 아니다. 이 책은 역사학에 있어 하나의 실험이다. 책을 엮은 피에르 노라는 이에 '에고 - 역사(ego-d'histoire)'라는 새로운 장르 개념을 부여하였다. 역사가들은 마치 다른 연구 대상의 역사를 기록하듯이 자기 자신의 역사를 써 내려간다. 그들이 다른 연구 대상을 향해 던졌던 종합적이고 냉철한 시선으로 말이다."라고 소개되는 책(나로선 아직 소장하고 있지 않은 책이다).

사실 이 책은 지난주에 다른 경로로도 떠올린 바 있다. 부르디외의 <호모 아카데미쿠스>(동문선, 2005)를 필요 때문에 잠시 손에 들었는데 서론에 해당하는 1장의 '이 책을 불태울 것인가?'의 에피그라프로 부르디외는 샤를 페기(1873-1914)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이 책을 불태울 것인가?'는 영어로는 "A 'Book for Burning'?"을 옮긴 것이고, '불태워야 할 책'은 이지의 '분서(焚書)'를 가리키므로 <호모 아카데미쿠스>는 부르디외의 <분서>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들은 역사가들이 하는 식의 역사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역사적 세부사항의 무한성을 철저히 고찰하기를 원하지만, 자신들이 이러한 세부사항의 무한성에서 고려의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역사적 서열 속에서 자신들이 있기를 바라지 않고, 마치 의사가 아프거나 죽기를 바라지 않는 것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샤를 페기, <돈 속편>)

여기에 인용한 것은 영역본과 비교해보니 첫문장이 오역돼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역사가들이 하는 식의 역사를 원치 않는다."는 영역본에 따르면 "Historians don't want to write a history of historians."를 옮긴 것이다. 곧 "역사가들은 역사가들의 역사를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불어 원문에 '그들'이라고만 돼 있다 하더라도 문맥상 그들이 '역사가'라는 것 정도는 옮겨줘야 이 인용문의 의미가 살아날 텐데, 일단 국역본은 그러질 않았다. 게다가 '역사가들의 역사'를 '역사가들이 하는 식의 역사'로 잘못 옮겼다.

샤를 페기가 지적하는 것은 마치 의사들이 자기가 아프거나 죽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역사가들은 자신을 역사적 질서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호모 아카데미쿠스>에서 부르디외가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학문세계와 대학제도 분석이다. 이것은 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속해 있는 세계/제도이다(부르디외는 <강의에 대한 강의>에서 자신의 사회학 강의에 대한 사회학을 시도한 바 있다). 페기의 글을 인용한 맥락이다.

<역사가의 탄생>이나 <나는 왜 역사가가 되었는가>가 다루고 있는 '에고-역사'이면서 '역사가의 개인사'이다. 그것이 보다 확장된다면 '역사가의 역사'가 될 수 있겠다. 요즘 나의 관심은 그러한 자기 반영적/반성적 인식에 쏠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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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22 22:30   좋아요 0 | URL
샤를르 페기가 한 말을 에드워드 카도 한 적이 있죠...역사가는 마치 자신들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저 높은 산정에서 산 밑을 고생하며 걸어가는 이들을 여유있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으로 여기기 쉽지만 사실은 자신 역시 보통사람들처럼 터벅터벅 걸어가는 대열 속의 한사람일 뿐이다...

로쟈 2008-09-22 22:41   좋아요 0 | URL
자신도 환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까먹는 의사들처럼 역사가들도 스스로를 열외로 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그런 건 다른 분야들에서도 일반적인 듯싶어요...
 

바르트 관련자료를 검색하다가 오래전 기사가 눈에 띄어 (먼지를 털어내고) 옮겨놓는다. 97년(07년이 아니라!) 봄이니 10년도 더 전의 기사다. "국내 최대의 단행본 출판사인 고려원(대표 김낙천)의 부도가 출판계를 강타하고 있다."란 기사와 나란히 떠 있으므로 세월의 더께를 짐작해볼 수 있다. 롤랑 바르트 전집의 첫권으로 나온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 1997)을 소개하고 있다.  

한겨레21(97. 04. 03) 텍스트의 즐거움

미셸 푸코,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질 들뢰즈 등과 함께 90년대 한국의 지식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프랑스 현대 사상가의 대열에 한사람을 더 추가한다면 아마도 기호학자 롤랑 바 르트가 될 것이다. 특히 문화현상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이 크게 유행하면서 문학기호학의 창 시자인 바르트에 대한 지적 관심은 문학 분야뿐 아니라 비평계 전반에 걸쳐 증폭되어 왔다.

도서출판 동문선이 20여권이 넘는 바르트의 모든 저작을 출판키로 기획한 것도 이런 관심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동문선은 최근 `텍스트의 즐거움'을 시작으로 앞으로 5년간 모두 28권으 로 이뤄진 ‘롤랑 바르트 전집’을 펴내기 시작했다. 첫권으로 나온 `텍스트의 즐거움'(전집12)은 바르트의 후기 사상을 이해하는 출발점 구실을 하는 책이다.

바르트 후기 사상 이해의 출발점
문학기호학의 창시자이자 후기구조주의 사상가의 일원으로 알려진 바르트 의 학문적 편력은 기호학에 전력한 전반기와 이른바 텍스트 이론에 주력 한 후반기로 크게 대별된다. `텍스트의 즐거움'은 `사랑의 단상'과 함께 바로 후기 바르트를 대표하는 저서로 꼽힌다. `텍스트의 즐거움'은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 이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화두들, 즉 작품에서 저자의 위치, 독자는 누구인가, 작품과 텍스트는 어 떻게 다른가 하는 점 등 그의 문학기호학의 기본적인 논제들을 그 자신이 쓴 글과 책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책의 편집도 앞머리에 편역자인 김희 영 교수(한국외대 불어과)의 해제와 ‘저자의 죽음’(1968) ‘작품에서 텍스트로’(1971) 등 바르트의 짧은 글을 배치한 다음, 후기 작업의 이론적 틀을 제시한 유명한 저서 ‘텍스트의 즐거움’(1973)과 1977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취임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 연설문 ‘강의’ 등을 수록해 독자들이 바르트의 텍스트 이론에 접근하는 데 용이하도록 했 다. 이 밖에 바르트가 생전에 출판을 허락한 유일한 일기 ‘심의’와 바르트 의 사유체계를 비교적 잘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 세편의 대담 등을 덧붙이고 있다.

롤랑 바르트(1915~1980)는 40세 때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사회학 연구원이 된 뒤부터 기호학에 관한 많은 글을 발표하여 학문적 명성을 쌓기 시작해 1976년 프랑스 지식인의 최고 영예라고 할 수 있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선임됐다. `신화학' `모드의 체계' `사랑의 단상' `텍스트의 즐거움' 등 20여권의 저서와 글들을 남겼다.

유럽에서도 난해하기로 이름난 바르트의 사유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기호학 이론이나 텍스트 이론 등은 자주 거론되고 인용되지만 정확히 그 의미를 파악하는 독자들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후기 사상의 핵심인 텍스트 이론은 작품의 생산자인 “저자를 죽임으로써 ” 비로소 출발한다.

작품에서 작가를 죽여야 진정한 의미의 독자가 탄생한다는 그의 발언은 난해하다. 무슨 뜻일가? 바르트에 따르면 작품을 만든 저자는 “역사적으 로 보아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 산물”이다. 따라서 진정한 글쓰 기는 “저자가 철저히 배제되는 것이고, 그 지점에서 독자가 탄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의 텍스트 이론에서 저자의 개념은 그 지위를 상실 한다. 저자는 사라지고 오로지 “글쓰기를 배합하고 조립하는 조작자, 또 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가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없는’ 작품, 즉 텍스트는 무엇인가? 여전히 난해하기 는 마찬가지지만 바르트의 설명을 들어보면 “‘작품’이 단일하고도 안정된 기호체계라면, ‘텍스트’는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언할 수 없는 무 한한 시니피앙(기의)들의 짜임”이다. 작품이 “의미를 변경할 수 없는 고정된 것이라면, 텍스트는 의미생산이 무한하게 가능한 열린 공간”이라 는 것이다.

“작가는 합리적 자본주의 산물이다”
따라서 독자는 해독해야 할 의미가 사라진 텍스트의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텍스트를 만난다. 롤랑 바르트에게 텍스트란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구체적이고 관능적인 공간이고, 비로소 그 둘은 경이롭고도 소중한 욕망의 여행을 시작”하는 빈 공간이다.

바르트의 주장은 권력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도 명확히 나타난다. “언어는 파시스트적”이라며 언어 자체가 가지는 권력성을 갈파한다. 그의 텍 스트 이론에 따르면 “언어의 폭력성, 지배 견해의 폭력, 상투적인 것에 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역사성의 회복과, 능동적인 글쓰기가 필요”하다. “언어가 권력을 행사하려고 들 때마다 그 언어를 버리고 다른 자리 로 옮겨가는 것”이다. 권력이 우리를 이용할 수 없는 곳으로. 그곳은 어디인가? 바르트는 그곳을 “도덕성 또는 소설적인 것”이라고 가리킨다. “진실의 불확실성을 깨닫고, 끝없이 새로운 것을 향해, 불가능한 지평을 향해 나아갈 때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 바르트 이론의 결론이다.(이인우기자)

08. 09. 21.

P.S. 알라딘에서도 검색이 되지만, 바르트의 책은 <텍스트의 즐거움>(연세대출판부, 1990)으로도 출간된 적이 있다. 그다지 즐겁게 읽히는 텍스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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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2008-09-21 17:23   좋아요 0 | URL
'그다지 즐겁게 읽히지 텍스트는 아니었다'면 아주 후한 평이십니다. ^^;

로쟈 2008-09-22 16:38   좋아요 0 | URL
연대출판부본을 읽어보신 모양이군요.^^;
 

지난주 신간 중에 '오래된 새책'으로 눈길을 끄는 책은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산책자, 2008)이다. 재출간된 책인 만큼 자세한 서평은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북페이지에서 자세한 소개를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돼 있다.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을 다시 한국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이 책은 1997년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오래도록 절판된 상태로 ‘기호’로만 남아 있어, 적지 않은 인문 지성 독자들이 재발간을 기다려온 텍스트였다. 이번에 스키라 판(Skira, 1970)을 번역한 1997년 번역 판본에 더해 세이유 판(Seuil, 2005)의 몇 군데 수정사항을 반영해, 동일한 역자의 섬세한 재작업을 거쳐 새로운 한국 판본을 출간하게 되었다. 특히 이번 산책자 판 『기호의 제국』은 <산책자의 에쎄Essaie>라는 이름으로 이어질 ‘그윽한 사유와 새로운 비평이 담긴 지성 에세이 시리즈’의 첫 권으로써, 현대적 감수성으로 빚은 ‘텍스트의 즐거움’을 찾는 탐서가(산책자)들을 인도하는 ‘산책로 표지판’이기도 하다.

나는 이전 민음사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몇 군데 수정사항만 확인하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은 콘텐츠로만 읽는 것도 아니어서(e-book을 나는 즐기지 않는다) 막상 표지를 보면 견물생심이 된다. 비록 민음사판의 표지가 더 마음에 들지만(알라딘에 이미지가 없어서 리브로에서 가져왔다).

소개를 조금 더 따라가본다. "구조주의 시대의 도래를 예고한, 혁신적인 이론과 문체로 빛나는 현대 비평의 핵심 텍스트『기호의 제국』에서 바르트가 구성해낸 일본은 하나의 텍스트이며, 그는 “그곳에서 나는 여행객이나 방문객이 아니라 독자”라고 말한다. 그가 일본에서 읽고 있는 여러 문화 현상들은 간단한 사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씌어진 텍스트다. 그것도 단순한 논리나 사건 중심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하이쿠처럼 언어를 통해 언어의 핵심에 이르려는, 몸짓으로서의 글쓰기를 통해 씌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일본 문화라는 텍스트에 대한 일종의 비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기호의 제국>은 일본이란 텍스트보다는 바르트란 텍스트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텍스트이다. 바르트에 대해서 말해주는 텍스트도 그 자신이 쓴 것을 포함해서 몇 권이 소개돼 있다. 역시나 절판된 자서전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강, 1997), 문학이론가 조너선 컬러의 <바르트>(시공사, 1999), 그리고 최근의 책으로 그레이엄 앨런의 <문제적 텍스트 롤랑 바르트>(앨피, 2006)가 '바르트 로드맵'으로 추천할 만하다.

얇은 책으론 트리포나스의 <바르트와 기호의 제국>(이제이북스, 2003)도 유용하다. 바르트라는 '기호의 제국'에 대한 1시간짜리 유람기이다. 그리고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을 직접 맛보고 싶다면 가장 '대중적인' 바르트 텍스트인 <사랑의 단상>(문학과지성사, 1991; 동문선, 2004)부터 집어드는 것이 안전하겠다...

08. 09. 21.

P.S. 바르트의 책을 검색해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은 한명숙 역의 <유행과 문자의상 체계>(경춘사, 1994)이다. 짐작엔 <모드의 체계>(동문선, 1998)와 같은 책이 아닌가 싶은데, 분량이 258쪽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완역은 아닌 듯싶다. 책은 바르트의 박사학위논문으로 씌어진 것이어서 가장 '딱딱하다'. 현재는 둘다 절판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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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9-2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운 [재]신간 소식이군요! "동일한 역자[들]의 섬세한 재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너무 궁금해서 책을 빨리 구입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로쟈 2008-09-22 16:39   좋아요 0 | URL
리뷰도 올려주시길.^^

열매 2008-09-21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동일한 역자(들)의 섬세한 재작업'이란 말이 왠만해선 믿어지지 않으니 출판계에 대한 제나름의 불신이 심하긴 한가 봅니다.

재번역본이 나오면 무작위로 3~4군데 정도 펼쳐서 구판과 비교해보는데, 이때까지는 글자 한자 변한 케이스도 보지 못했습니다. 가격은 변화무쌍했지만요. 물론 개역때마다 (원전과도 무관해보일 정도로 변신하는) 임석진교수의 <정신현상학>같은 개역판은 드문 케이스일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저렇게 광고하는데 얼마나 개역되었는지 궁금하긴 합니다만,
영 구입버튼은 눌러지지 않을 것 같네요-..-;

람혼 2008-09-21 15:47   좋아요 0 | URL
실로 이심전심입니다... 임석진 선생이 저 <정신현상학> 번역에 '투신'하는 끊임없는 노력은 정말 보기 드문 경우죠("원전과도 무관해 보일 정도"라는 말에 잠시 웃었습니다^^ 한길사 판은 지식산업사 판보다 조금 더 '부드럽게' 의역하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고 또 헤겔 원문의 복잡한 복문들을 좀 더 끊어서 번역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임석진 선생의 번역은 한 저자를 오랜 세월 동안 만나고 또 그의 문장을 여러 시간 동안 옮겨올 때 갖게 되는 일종의 '동체화(同體化)'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호의 제국>의 재번역도ㅡ그러한 불신의 와중에서도ㅡ'최소한' 그런 개역이기를 바라는 마음 한 자락 담아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1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겔의 노동의 개념>지식산업사 도 저자의 프랑크푸르트 대학 학위논문인데 이을호,황태연 번역을 10년 뒤에 저자가 다시 직접 번역해 내놓는 걸 보니 성실하고 꼼꼼한 분인가 봐요.음...정신현상학 번역도 그랬군요.

로쟈 2008-09-22 16:40   좋아요 0 | URL
헤겔이 독일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면 임석진 번역의 헤겔도 한국어로 번역되어야 하다고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2 22:24   좋아요 0 | URL
황태연 씨는 요즘 주역에 열중한 나머지 전공인 독일 사상은 소홀히 하시는 듯...

로쟈 2008-09-23 00:08   좋아요 0 | URL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다 보니 '관념론'이라는 게 시시해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PhEAV 2008-09-22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를 요즘 원전과 국역구판을 함께 읽고 있는데, 국역신판과 구판을 비교해보니, 한 부분이 나아졌다 싶으면, 다른 한 부분이 엉망이 되어있는 걸 보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헌책방에서 구한 『기호의 제국』 민음사판을 업그레이드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되네요. -_-...
이렇게 불신하면서도 결국 또 책을 사게 될 것 같다는 이 중독자의 불안감 ㅠ,.ㅠ (저는 왜 하라는 공부를 하는게 아니라 책 수집만 하는지... 후덜덜;;)

로쟈 2008-09-22 16:40   좋아요 0 | URL
증상이 저랑 비슷한데요.^^;

람혼 2008-09-23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도착해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Garabagne'에 대한 역자의 주석이었는데요, 보고나서 크게 웃어버렸습니다, 그 웃음의 의미는 참으로 다층적이고 복잡했었지만요...^^

로쟈 2008-09-23 22:16   좋아요 0 | URL
언젠가 페이퍼로 쓰셨죠?^^
 

교양과학서 독자라면 제목이 단박에 리처드 파인만의 자서전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말로 비튼 것도 아니고, 원래 제목이 그렇다. 새로 나온 아이작 뉴턴의 전기를 언급한 김에(http://blog.aladin.co.kr/mramor/2311334) 파인만의 이 베스트셀러에 대한 서평도 챙겨두도록 한다. 나는 아주 오래전 두 권으로 나오기 전 판본으로 읽었다. 최근 이 자서전은 파인만 서거 20주년 기념 특별판으로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와 <남이야 뭐라 하건!>을 합본한 <파인만!>(사이언스북스, 2008)으로 다시 출간됐다.   

경향신문(08. 09. 20) [자서전 읽기](6) 리처드 파인만의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파인만의 동료과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파인만이 모험과 우스개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지는 것이 영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축구로 치자면 개인기가 출중해 문지기마저 희롱하는 화려한 플레이를 자랑하는 골잡이로만 돋을새김된 면이 있다고 본 것이다. 프리먼 다이슨도 그런 점이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파인만의 과학스타일은 빛나고 인상주의적이었던 바 “불투명한 미분 방정식이 아니라 투명한 그림으로 자연을 설명했고, 칠판을 가득 메운 비의적인 기호가 아니라 극적인 몸짓과 온갖 의성어를 동원해서 강연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의 과학정신은 보수성을 짙게 띠고 있었다고 프리먼 다이슨은 힘주어 말한다.

파인만은 물리학 분야에서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나타났을 적에 그것이 얼마나 멋지냐보다 얼마나 올바른 것이냐를 판단의 잣대로 내세웠다. 그 자신이 일순간의 놀라운 발명으로 과학의 새 지평을 열기보다는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세심하고 고된 과정을 거쳐 새로운 이론을 내놓았다. “그가 만든 것 중에서 서둘러 구축한 것은 하나도 없고, 이 모든 것들은 세월의 시험을 견디고 서 있다.”



하지만 파인만의 진중함과 진정성, 그리고 끈기를 동경해서 ‘파인만 씨, 농담도 잘 하시네!’(사이언스북스, 이하 ‘파인만!’)를 읽을 리는 없다. 결코 과학자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화, 그러니까 과학자와 군사 전문가들이 한 데 모여 있는 데서 남의 금고를 열어젖히고, 죽음이 예고된 여성과 결혼하는 순애보를 남기고, 밴드에서 드럼을 치며 삶을 즐길 줄 알고, 바에서 만난 여성을 꼬드기려고 애썼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기행만 일삼았다면 무에 대단하겠느냐만, 그 와중에도 196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고 1986년에 일어난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의 폭발원인을 밝혀내 성가를 올린 출중한 학자였기에 그의 자서전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이리라.

나는 ‘파인만!’을 읽으면서 대뜸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의 일대기를 보노라면 과학자들이 겪었음직한 성장과정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는 말이다. ‘이름 하여 천재과학자는 어떻게 태어날까?’라는 관점으로 이 책을 읽노라면 새로운 것을 깨우치게 된다.

먼저 아버지의 역할. 그의 아버지는 제복장사를 했다. 아내에게 만약 아들이 태어나면 과학자가 될 거라 했다니, 과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파인만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는 그를 무릎에 앉혀놓고 백과사전을 읽어주곤 했다. 동화책이 아니라 백과사전을 읽어주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읽어주는 방식도 남달랐다. 공룡 항목에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나오고, “이 공룡은 키가 7~8m이며 머리 둘레가 2m 정도”라고 풀이되어 있었다. 이 구절을 읽고나서 아버지는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자 했다. 공룡이 만약 집앞 뜰에 서 있다면 책을 읽는 2층 창문에 닿을 만한 크기인데 머리가 커서 창문으로 들어올 수는 없겠다고 말해주었다. 딱딱한 내용을 실감나게 풀어 설명하는 과정에서 과학적 흥미는 배가되었다. 아버지는 늘 예를 들어 설명하고 대화로 가르치려 했다. “강요나 억압은 전혀 없었고 단지 흥미롭고 사랑이 깃든 대화가 있을 뿐이었다.” 훗날 그가 명강의로 이름을 날리게 된 힘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아버지는 스승이자 경쟁자이기도 한 법이다. 열세 살 적에 도서관에서 미적분학 책을 빌리려 하자 어린아이가 왜 이런 책을 보려 하느냐고 사서가 물었다. 아버지께서 보려 한다고 거짓말하고는 빌려와 혼자 공부했다. 아버지도 읽었는데, 복잡하다며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비교적 쉽고 간단하다고 느꼈는데 말이다. 늘 가르침을 받아왔는데, 이제 가르쳐드릴 정도로 훌쩍 자라났다. ‘청출어람’은 이럴 때 쓰라고 사전에 있는 말이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사한 내용이 장회익의 자서전 ‘공부도둑’에도 나온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다. 그럼에도 동료들이 ‘장 박사’라 부를 만큼 견실한 토목기술자로 살아갔다. 평소 수학과 물리학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는 데다 꾸준히 관련학문을 공부해 온 덕이다. 장회익이 일찌감치 이들 과목에 흥미를 느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아버지가 여러 차례 미적분학을 혼자 힘으로는 공부해낼 수 없다고 실토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러브의 ‘미적분학’을 읽고나서 눈을 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미적분을 이해했다며, 가르쳐드리겠노라 선언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설익은 지식을 아랑곳하지 않고 흔쾌히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무릇 이 땅의 아버지들은 스스로 물어보아야겠다. 다음 세대에게 지적 흥미와 자극을 주는 살아있는 교육을 하고 있는가라고. 그리고 기억해야겠다. 모든 것은 아버지한테 배우는 법이라는 것을.

두 번째는 어린이를 위한 과학자 위인전에 물릴 정도로 나오는 내용이다. 왕성한 지적 흥미를 이겨내지 못해 실험을 하다 사고를 겪는 일이 많다는 점이다. 개구쟁이에 익살꾼이었던 그가 남 보기에 아슬아슬한 일을 얼마나 자주 저질렀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기껏 말했는데 친구들이 믿지 않으면 실제로 보여주겠다고 나섰다. 오줌이 중력으로 떨어진다고 우기는 친구에게 물구나무 서서 오줌 눌 수 있다며 실연을 해보였다. 코카콜라와 아스피린을 같이 먹으면 기절한다고 말한 친구가 있었다. 논쟁이 이상하게 발전해 무엇을 먼저 먹어야 하는지로 번졌다. 그래서 몸소 나섰다. 세 번 실험했는데, 아스피린 먼저 먹기, 둘 섞어먹기, 콜라 먼저 먹기. 결과는? 기절하는 것은 고사하고 잠이 안와 수학문제를 실컷 풀어보았단다. 동네 꼬마들을 대상으로 화학을 이용한 마술쇼를 한 적도 있다. 광대기질이 있는지라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다. 벤젠을 이용해 손에 불을 붙이고는 불이 났다고 호들갑을 떨며 쇼를 마쳤다고 한다. 친구들이 믿지 않자 재연을 해보였다. 이번에는 손에 화상을 입는 큰 사고가 났다. 이유인즉슨, 어릴 때와 달리 손등에 난 털이 심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자서전의 백미라 할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도 실험에 얽힌 이야기가 여럿 나온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 하나. 형이 등산 가면서 실험실 열쇠를 맡겼다며 같이 가자고 친구가 찾아왔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다. 열 여섯살 때다. 둘 다 화학자가 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친구는 그것으로 돈벌이와 안정된 삶을 꿈꿨다. 프리모 레비에게는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뜻했다. 두 사람은 실험실에서 화학교과서에 나와 있는 현상들 가운데 적어도 하나 정도는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웃음가스로 알려진 아산화질소를 만들려 했다. 연기가 엄청 피워 올라 웃음은 고사하고 질식할 뻔했다. 결과가 확실한 실험에 도전하려고 물을 전기분해해보기로 했다. 양극 쪽의 병에 기체가 절반 정도 찼는데, 친구가 그것이 수소와 산소라는 증거가 없다 했다. 모욕감을 느낀 프리모 레비가 음극 쪽의 유리병 주둥이 근처로 성냥을 켰다. 폭발이 일어났다. 그때를 회고하며 적은 문장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니까 그것은 수소였다. 태양과 별들 속에서 타고 있는 것이고, 영원한 침묵 속에서 뭉치면서 온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집에도 실험실이 있었다(형 것이든 친구 것이든). 큰 사고가 날 뻔하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지적 호기심을 실험으로 풀어가며 과학자로 성장해나갔다. 예전과 달리 학교에 실험실이 많이 늘었다는 말을 전해 듣기는 했으나, 입시에 치인 청소년들이 얼마나 자유롭고 흥미롭게 실험에 매달릴지 모르겠다. 기반도 만들어주지 않고 노벨상 받자고 팔 걷어붙이는 것은 도둑놈 심보일 뿐이다.

계통발생의 과정을 거친 파인만이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세울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은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파인만!’을 읽으면서 이 점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이 책의 가치를 높이고 흥미를 돋워주는 대목도 여기에 있는 바, 권위에 대한 도전이 바로 그것이다.

로스엘러모스에서 파인만은 위대한 과학자들을 만난다. 막 박사학위를 마친 그에게 눈길을 돌릴 거물은 없다. 단, 한스 베터는 예외였다고 한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와 건방진 젊은이를 붙들고 논쟁을 벌인다. 그러면 그 젊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요, 아니요, 그건 미친 생각이에요. 이건 이렇게 될 거예요.” 그러자 한스 베터는 ‘잠깐만’이라 하고는 왜 자신이 미치지 않고 젊은이가 미쳤는지 설명한다. 무례한 젊은이가 파인만이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닐스 보어가 만나자고 했다. 효율적으로 폭탄을 만들 아이디어가 있다며 설명하자 파인만은 그렇게는 잘 안될 거라고 대꾸했다. 닐스 보어의 반론이 있자 약간 나은 것 같지만 여전히 바보 같은 생각이라며 비판했다. 두 시간 남짓 공방이 벌어졌다. 그때야 닐스 보어가 말했다. “이제 거물들을 불러모을 수 있겠군.”

창조와 혁신은 권위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다. 창의의 영역에 영원한 법칙은 없다. 지금까지 유효한 것만 있을 뿐이다. 의심하고 비틀어보고 다시 생각해보고 질문해 나갈 때 새 지평이 열리는 법이다. “남이야 뭐라 하건!” 자기의 주장을 당당히 펼치는 정신이 우리에게는 절실하다. 그리고 그 도전을 높이 쳐주는 너그러움 또한 간절하다.

파인만에게도 아킬레스 건은 있다. 과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그는 무심했다. 원자폭탄 실험이 끝났을 때 로스엘러모스는 잔치분위기였다. 그런데 밥 윌슨은 울상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든 것은 흉악한 거야”라는 말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대해 파인만은 “우리는 충분히 이유가 있어서 시작했고, 열심히 한 덕분에 성공했고, 이것은 즐거운 일이고, 짜릿한 일이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이 문제를 더 깊이 있게 고민하려면 ‘파인만의 과학이란 무엇인가?’(승산)를 보아야 한다.

이 강연집에서 그는 “이것은 ‘과학자의 책임과 윤리의식’에 대한 문제라고 볼 수 있을 텐데, 난 여기에 대해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진 않을 것이다. 이것을 ‘과학의 문제’라고 말하는 건 좀 과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건 오히려 인도주의적인 문제에 훨씬 더 가깝다. 과학을 통해 어떻게 그 힘을 얻는지는 분명하지만 그걸 어떻게 규제할지는 분명치 않은데, 그것은 이 문제가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며 과학자가 여기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황우석 사태를 겪으며 과학과 사회, 그리고 윤리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낀 바 있다. 오로지 발견의 가치 때문에 과학자가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파인만!’은 일반적인 자서전과 달리 대필한 책이다. 동료였던 로버트 레이턴의 아들 랠프 레이턴이 파인만과 어울리면서 들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파인만이 원고를 검토하고 가필하고 출판을 승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래서 이 책의 지은이는 리처드 파인만이고 엮은이는 랠프 레이턴이다. 저작권도 유족과 엮은이가 공유한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쓰는 글이 자서전이다. 그런데 우리는 돈 벌고 힘 있는 사람들이 문필가를 고용해 자신의 삶을 미화하는 것이 자서전인양 여긴다. 당연히 자신이 직접 쓴 듯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구술하고 이를 대신 써줄 수는 있다. 그러나 누가 썼는지를 밝히느냐 아니냐는 분명히 다른 문제다. ‘파인만!’은 우리의 천박한 자서전 문화를 되돌아보게 한다.



파인만을 과학자로 만든 것은 어린 시절부터 지적 호기심을 실험으로 풀어냈던 태도였다. 그리고 파인만이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세울 수 있었던 절대적인 힘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창조와 혁신은 권위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다. 창의의 영역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의심해보고, 비틀어 보고, 다시 생각해 보고, 질문할 때 새 지평이 열리는 법이다. 남이 뭐라 하든 자기의 주장을 당당히 펼쳤던 파인만이기에 그는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었다.(이권우 | 도서평론가)

08. 09. 21.

P.S. 알다시피 파인만의 삶과 과학을 다룬 자세한 전기에는 제임스 글릭의 <천재>(승산, 2005)가 있다. <파인만!>과 함께 세트로 갖춰둘 만하다(파인만의 아버지에 대해서 관심이 간다). 아래는 세 권의 표지이다. <천재>의 원서와 사이언스북스판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 그리고 내가 읽은 <파인만씨, 농담도 정말 잘하시네요!>(도솔,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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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21 16:08   좋아요 0 | URL
멀리 갈 것 없이 일본만 해도 전기나 평전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게 꽤 많아요.구미에선 현역정치인이나 관료가 자서전을 쓴다면 미리 출판사가 경쟁을 할 정도인데 우리나라엔 이런 모습 보기가 힘들죠.

로쟈 2008-09-22 16:41   좋아요 0 | URL
그쪽은 글쓰기 문화가 있는 것이죠. 우리에겐 없는...

노이에자이트 2008-09-22 22:25   좋아요 0 | URL
잘못 쓰면 압력이 엄청나게 오는 우리나라에 비해 그 쪽 나라는 그런 게 비교적 덜한가봐요.

로쟈 2008-09-23 00:07   좋아요 0 | URL
그보다는 '지식인=저자'라는 인식이 자리잡지 못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웅변가들만 더러 있었구요...

yoonta 2008-09-23 12:12   좋아요 0 | URL
과학을 "인도주의의 문제"라고 봤다면 파인만은 정말로 순진하거나 아니면 순진한 척하는 사람이네요. 과학(기술)은 인도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과학도 결국 정치의 문제일 수밖에 없죠. 머레이 겔만이 말했듯이 지나치게 자신의 인기관리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인문학적 소양도 좀 별로인듯 하고요.

로쟈 2008-09-23 14:08   좋아요 0 | URL
'과학 천재'와 세상사는 대체로 무관하기 때문이겠죠(여성이라면 다르겠지만). 파인만이 특별히 생각없는 사람은 아니고, 사실 현장의 과학자들 대부분이 파인만 이상의 정치의식은 갖고 있지 않을 듯싶은데요('과학철학'이라는 말 자체도 대개는 싫어한다고 하니까요). 아, 아인슈타인 같은 이들은 예외겠네요...
 

이번주 신간들 가운데 한권만 읽어야 한다면 개인적으론 제임스 글릭의 <아이작 뉴턴>(승산, 2008)을 고르고 싶다. 과학자 평전이야 요즘 흔하게 나오는 것이지만 일단 베스트셀러 <카오스>의 저자이자 리처드 파인만의 전기 <천재>(승산, 2005)를 쓴 과학 저널리스트 제임스 글릭의 책이란 점, 그리고 물론 뉴턴의 전기를 한권쯤은 읽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거기에 보태진다. 이미 소개된 뉴턴의 전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글릭의 책은 짧으면서도 정확하다는 강점을 갖는다고. 저명한 과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턴의 삶과 업적에 진지한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글릭의 이 전기를 그 훌륭한 출발점으로 추천한다. 이 책에는 세 가지 중요한 장점이 있다. 정확하고 읽기 쉬우며 짧다. 글릭은 원전으로 돌아가서 뉴턴을 되살려냈다.”

디지털타임즈(08. 09. 17) 고뇌하는 `인간 뉴턴`의 삶 엿보기

과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끼리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시험기간 땀을 뻘뻘 흘리며 벼락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갈릴레오와 뉴턴만 없었으면 이 고생을 안 해도 될 텐데."

대다수 사람들에게 뉴턴은 플라톤, 테레사 수녀, 에디슨처럼 바다 건너 온 하나의 위인에 불과하지만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뉴턴은 애증의 대상이다. 우리 모두가 뉴턴이 밝혀낸 세상의 원리 안에서 살아가는 까닭에 그는 세상에 빛을 전달함과 동시에 지독한 공부거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렇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뉴턴주의자라고 말한다. 우리가 힘과 질량에 대해 말할 때, 하늘로 폴짝 뛰어올랐다가 이내 주저앉은 순간 중력의 법칙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그 생각 속에 바로 뉴턴의 업적이 그림자처럼 숨어 있기 때문이다. 뉴턴의 법칙은 곧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칙인 셈이다. 따라서 뉴턴이 세계를 인식하는 틀을 구축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자신의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책은 뉴턴의 과학적 성과와 그 의의를 짚어보는 작업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뉴턴의 삶을 조명한다. 진위 논쟁을 부르기도 했던 뉴턴의 여자 문제에서부터(뉴턴은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여자와 관계하지 않은 동성애자라는 통설이 있다) 그가 평생 가장 멀리 이동한 거리는 고작 150마일을 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하나의 개인으로서 특이함을 보였던 뉴턴의 면모도 소개한다.

결국 뉴턴도 하나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뉴턴이 너무 오래된 위인이어서 거리감을 느끼거나 머리 아프게 이것저것 많은 사실을 밝혀낸 천재 과학자라는 데서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고뇌하는 `인간 뉴턴`을 만나볼 수 있다.(이지성기자)

08. 09. 20.

P.S. 아이작 뉴턴의 평전으로 가장 정평 있는 것은 리처드 웨스트폴의 <결코 쉬지 않는(Never at rest : A Biography of Issac Newton)>(1983)이다. 무려 930쪽에 이르는 책이니까 방대함에 있어서도 견줄 만한 책이 없겠다(결코 쉬지 않고 읽어도 꼬박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까?). 다행히도 저자는 일반 독자들을 위해 축약본을 따로 냈고(1994년) 이 축약본의 우리말 번역이 <프린키피아의 천재>(사이언스북스, 2001)이다(그래도 580쪽이다!). 여유가 있다면 글릭의 책과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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