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의 읽을 만한 책을 꼽아본다. 간행물윤리위원회 추천도서는 그젠가 발표되었고, 내주에는 책을 골라둘 만한 여유가 없을 듯싶어서 미리 작성해놓기로 한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내년 전망이 밝지 않은 탓에 새해를 맞는 일이 전혀 기쁘지 않다(하긴 올해도 그랬다. 그리고 정말로 1년 동안 즐거운 일이 드물었다). 다만 개인적으로 겨울 동안의 일이 잘 마무리되어 '무사히' 봄을 맞게 되기만을 바라는 정도다(그게 새해 소망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1월도 12월만큼이나 금방 지나간다. 그 '없는' 시간에 읽을 만한 책이 뭐가 있을까?..  

1. 문학 

작가 신경숙씨가 꼽은 문학분야의 책은 <그림과 함께 읽는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까치, 2008)이다. 무슨 책인가? "어떤 책은 책의 내용을 알기도 전에 표지만 보고도 그 책이 좋아서 두 손으로 쓸어보게 되는 책이 있다. <그림과 함께 읽는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는 그런 책이다.(...) 권태에 빠진 청년이 오후에 홍차와 곁들여 마들렌느를 먹다가 그 맛을 회상하며 소설의 단초를 풀어나가는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에는 미술관을 방불케 할 만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그림들이 등장한다. 소설 속의 수많은 회화들은 그저 그림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의 의식의 흐름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흐름을 주도한다. <스완씨 댁쪽으로>를 비롯해 7권의 책 속 그림과 관련된 대목만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잃어버린 시간'이 '잃어버린 시절'로 바뀐 것은 '티내기'의 일종일 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다. 여하튼 더 친숙한 제목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그림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이 책은 그 그림들을 프루스트의 원문과 같이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 일종의 '보너스'이고 '서플먼트'이겠다. 그걸 제대로 감상하려면, 물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먼저 손에 들어야겠고. 나는 책들이 다 박스에 들어가 있어서 '잃어버린 시간'보다 '잃어버린 박스'를 먼저 찾아야 할 형편이지만, <갇힌 여인> 같은 경우는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어볼까도 한다.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민음사, 1997)과 이성복의 <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문학과지성사, 2004)도 마들렌 과자처럼 곁들여 읽을 만하다.   

 

7부작 중에 굳이 <갇힌 여인>을 거명한 것은 샹탈 애커만의 영화 <갇힌 여인>(2000)을 보기 위해서다. 이 영화에 대한 조금 고급한 해설은 이렇다. 

1970년대 초반에 루키노 비스콘티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꽤 비장한 생각을 갖고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를 스크린 위로 옮겨내려는 작업에 착수했지만 결국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해롤드 핀터가 동참했던 조셉 로지의 뒤이은 ‘프루스트 프로젝트’도 실현에 이르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현대)영화는 알랭 레네의 예에서 보듯 프루스트로부터 신선한 자극과 심원한 배움을 드물지 않게 구해왔음에도 방대함과 심오함과 복잡함이 뒤엉킨 프루스트의 실지(實地)마저 감히 정복하진 못했다. 실제로 영화화 프로젝트에 돌입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미신에 가까운 두려움을 가졌었다는 비스콘티의 태도는 프루스트란 대작가를 곤혹스럽게 대하는 영화 자체의 전반적인 태도와 통하는 데가 있지 않나 싶다.  



영화가 프루스트에 대한 그 같은 두려움 혹은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최근의 일인데, 그 공로는 <되찾은 시간>(1999)의 라울 루이즈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폴커 슐뢴도르프의 <스완의 사랑>(1983)이 시기상으로는 앞선 프루스트 영화이지만 겉만 번지르르하고 전반적으로는 밋밋한 이 코스튬 드라마에서 어떤 영화적 ‘성취’를 발견하긴 어렵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편을 빼어나게 각색한 이 영화에서 그는 프루스트의 다층적인 세계가 영화의 마술적인 힘과 조화롭게 만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루스트와 영화’라는 이슈를 고려할 때 좀더 놀라워해야 할 ‘사건’은 루이즈의 선구자적인 영화가 나온 바로 다음해에 샹탈 애커만의 <갇힌 여인>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프루스트의 텍스트에 다가가는 쪽인 루이즈와 달리 그것을 영화감독이 자기쪽으로 끌고 오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애커만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5편에 해당하는 <갇힌 여인>(La Prisonniere)에서 핵심이 된다고 생각하는 설정과 주제를 추출해내서 그것을 그녀 특유의 ‘내핍의 미학’ 안에 용해해 <갇힌 여인>(La Captive)이란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축조된, 프루스트 영화로는 믿을 수 없게 단순해 보이면서도 주제와 형식에의 과감한 탐구를 포기하지 않는 이 영화는 프루스트를 대하는 ‘다른’ 식의 창의적인 태도가 존재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인다.(홍성남_영화평론가)  

요는 한번 봐볼 만하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프루스트의 소설을 먼저 읽어보는 게 유익하지 않을까 라는 것이다. 사실 한국어 완역본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긴 한데 개인적으론 원로 불문학자 홍승오 선생의 번역을 고대하고 있다. 어디선가 읽은 바로는 정년 퇴임 이후에 이 작품의 번역을 필생의 과제로 삼겠다고 하신 까닭이다. 워낙 대작이라 과연 또다른 한국어본이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  

2. 역사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추천한 책은 김덕진의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푸른역사, 2008)이다. '17세기의 또다른 역사'라고 소개 페이퍼를 올려놓은 적이 있는 책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2441832). 전문가의 평은 이렇다. "흉년(凶年)의 원인은 대개 다섯 가지다. 한해(旱害:가뭄)·수해(水害)·냉해(冷害)·풍해(風害)·충해(蟲害)가 그것인데, 이중 한 두 가지만 겹쳐도 쑥대밭이 된다. 이 다섯 가지 재해가 한꺼번에 닥쳤을 때가 이 책에서 서술하는 현종 11년(1670)과 현종 12년(1671) 때였다. 이를 경신(庚辛)대기근이라고 부르는데, 현종 11년 봄 냉해(冷害)와 한해(旱害)가 밭농사를 망치더니 여름에는 수해가 논농사를 휩쓸었다. 겨우 살아남은 작물을 가을철의 풍해(風害)·충해(蟲害)·냉해가 다시 덮쳤다.(...) 2년에 걸친 대기근이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뒤바꾸어 놓는지 ‘기근’이란 현미경을 통해 본 새로운 역사서다."   

이 '새로운 역사서'와 함께 읽어볼 만한 책은 '기념비적인 역사서'이다. 짐작에 2008년에 나온 가장 중요한 한국사 책은 제임스 팔레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산처럼, 2008)이 아닌가 싶다. 간략한 설명으론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나타난 경세사상을 초점으로 삼아 조선 후기 유교적 경세론의 실체를 추적해간" 책인데, 저자가 그런 길을 택한 건 "유형원이 17세기 조선 사회의 약점에 대한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분석을 쓴 조선의 첫 번째 학자로서 <반계수록>을 통해 조선의 유교적 사회의 본질과 복잡성을 파악하는 데 훌륭한 경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어제 팔레 교수의 <전통한국의 정치와 정책>(신원문화사, 1993)과 영어로 나온 <Views on Korean Social History(한국사회사에 대한 관점)>을 배송받았고, 지난주에는 미국의 한국학을 개관하는 글들을 좀 읽었다(한홍구 교수와 팔레 교수의 정년 기념대담도 포함된다). 몇 가지 이야깃거리들이 있는데, 기회를 봐서 1월에 풀어놓도록 하겠다(분량도 분량이지만 20년간의 노작인 <유교적 경세론>은 워낙 고가인지라 일단 1월에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값을 마련해야겠다!).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청소년용이다. 김보일의 <14살 철학소년>(부멘토, 2008). 추천의 변은  이렇다. "청소년을 위한 철학 에세이. 엽서 분량의 짧은 글들 속에 재미와 교훈, 지식과 상상, 사례와 통찰이 깔끔하게 엮여있다. 이야기는 언제나 상식을 깨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무지개 색은 일곱 가지일까? 기생충은 쓸모가 없을까? 굶주림은 식량 부족 때문일까? 동물은 야만적인 존재일까? 앵무새 같이 통념을 내뱉기 쉬운 청소년에게 지혜의 세계에 눈뜨게 하는 물음이다. 돈키호테처럼 천방지축이기 쉬운 청소년에게는 바르고 올바른 생각의 무게를 일깨울 것이다. 성장기에 있는 중·고등학생에게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어떻게 길러주어야 할지를 늘 고민하는 국어교사의 역작이다." 

그런데 왜 하필 14살인가? 중1 나이다. 예전엔 17살(고1) 때 뭔가 결정하거나 결정되는 걸로 생각했는데, 요즘은 하도 '선행'을 하니 이 또한 빨라진 모양이다(하긴 국제중 입시라는 것도 새로 생기지 않았나?). 찾아보니 열네살 때 인생의 진로도 결정해야 하고 토플도 만점 받아야 한다. 왜 사는지, 철학적 고민을 해볼 만한 나이다!  

 

잇대어 읽을 만한 철학서로는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가 있다. 국내에 3-4종의 번역이 나와 있는 듯싶고 그만큼 대중적이란 뜻도 된다. 개인적으론 제일 처음 읽은 철학서이기도 하다. 그래도 고3 때였던 듯싶은데, 요즘의 준재들에 비하면 많이 늦은 편이겠다. 뭐 늦더라도 꾸준한 것이 미덕이라면 나의 철학 성적표도 나쁘진 않아 보이지만... 

 

4. 정치 

정치분야의 책으로 손호철 교수가 고른 것은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의 <진정한 리더는 떠난후에 아름답다>(중앙북스, 2008)이다. 사실 내용이야 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는 책이다. 즉, "<진정한 리더는 떠난 후에 아름답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은퇴 후의 삶을 담담하게 기술한 의미 있는 책이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세계를 평화롭게, 인류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백악관을 떠난 뒤 카터재단을 만들어 세계를 누벼온 그의 후반부의 인생을 감동적으로 그려내 감동을 주고 있다." 요는 우리의 '전직'들과 비교된다는. 하지만 미국의 경우에도 카터의 퇴직 후 활동이 예외적인 것 아닌가? 게다가 그 자신이 재임시에는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난 79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카터는 내가 기억하는 첫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다('땅콩장수' 출신의 카터는 전임자인 포드를 누르고 당선됐는데, 그 이전이라면 정치에 관심을 갖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게 어느덧 30년 전 아닌가? 흠,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서도 30년을 더 산다는 건 좀 드문 일이지 싶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하는 경제/경영서는 유영만의 <내려가는 연습>(위즈덤하우스, 2008)이다. 제목만으로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데, 부제가 '경제빙하기의 새로운 생존 패러다임'이다. 아하, 싶은 책. 저자는 교육공학자이자 지식생태학자이고, "이 책은 지금처럼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다." 왜 그런 메시지가 필요한가? 현재 "1997년 말의 경제위기를 잘 버텨낸 사람조차 겁먹게 만들 정도의 빙하기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747 노래를 부르던 어떤 이조차도 어제는 내년 상반기에 마이너스 성장을 할 수도 있다고 실토를 했다. "생존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이 심각한 상황에서 살아남는 지혜는 과연 무엇일까? 필자는 바로 지금 항복을 선언하고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하기를 권한다. 오르려면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낮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발휘하라고 말한다." 좀 식상한 충고인데, 어떤 위로를 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라면, <공황전야>(지안, 2008)의 현실을 보다 냉철하게 직시하고 <장기 20세기>(그린비, 2008)라는 추이와 전망을 살펴보는 쪽을 택하고 싶다. 내려가는 법? 사실, 지금은 내려가는 정도가 아니라 추락하는 중이므로 중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착지' 아닐까?..   

6. 사회

흐흐,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은 <르몽드 세계사>(휴머니스트, 2008)이다. 흐흐, 하고 웃음이 나온 건 지난주에 얻은 책이기 때문이다. 이미 소개한 적이 있는데, "<르몽드 세계사>의 특징은 세계 각처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파편화된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새의 눈(bird's eye)'이라는 거시적 안목으로 바라 볼 수 있게끔 구성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세계사”라는 제목이 붙여졌으되, 읽기와 보기라는 이원적 의사전달 형식에 기초해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관류하는 인류사의 이모저모를 선별된 250개의 지도를 곁들인 104개의 핵심 키워드를 통해 간결히 설명하는 독특한 기획이 돋보이는 지리책이자 역사책이다." 한마디로 좋은 책이고, 좋은 보교재다.  

사회분야 책 추천이 '지리책이자 역사책'에 대한 권유로 바뀌었는데, 내친 김에 보태자면 조반니 아리기와 비버리 실버의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모티브북, 2008)와 마르크 페로의 <새로운 세계사>(범우사, 1994)도 읽어볼 만하다. 페로의 책은 얼마전 <식민주의 흑서>(소나무, 2008)가 번역된 덕분에 챙겨두게 된 책인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부터 세계사의 여정을 시작하는 독특한 구성으로 돼 있다. 그가 편집한 <식민주의 흑서>는 하권까지 완간되면 기념으로 다룰 예정이다. 

  

7. 과학 

장경애 편집장이 추천한 과학분야의 책도 눈에 익은 책이다.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30편의 에세이 모음집 <과학이 나를 부른다>(사이언스북스, 2008). "우리에게 과학이란 무엇인가’란 화두를 두고 소설가, 문학평론가, 과학철학자, 과학기자, 종교학자, 번역가, 물리학자, 화학자 등 과학 밖에 있는, 과학의 변경지대에 있는, 그리고 과학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진솔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30편의 에세이는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가 발간하는 웹진 ‘크로스로드’에 실렸던 글들로 과학자는 연구자나 교육자로서 현장에서 느낀 감상이나 일화를, 인문학자는 최근의 지적 관심사에서 과학을 주제로 한 칼럼을 담았다." 참고로, 그 소설가는 김연수이고, 문학평론가는 김병익 선생이다.  

과학이 부르는 대로 가보면 펼쳐지는 장관이 있다. <현대과학의 풍경>(궁리, 2008)이다. 두 권짜리이고 값도 만만찮지만, 17세기 과학혁명 이후 과학사의 흐름을 일람하는 데 좋은 책이다. 잠시 소개기사를 참고하면, "1권은 화학혁명, 에너지 보존, 다윈 혁명, 유전학, 대륙이동설, 20세기 물리학 등 17~20세기의 과학적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다룬다. 2권은 과학단체, 과학과 종교, 대중과학, 생물학과 이데올로기, 과학과 젠더 등 주제별로 현대 과학의 관심사를 다룬다. 애초에 교과서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만큼 과학기술학, 과학사에 대한 학구적 관심과 이해가 있는 독자들에게 권할 만하다. 그렇지 않다면 단순치 않은 전개방식과 다수의 번역자들이 편차를 보이는 번역투 문체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을 수도 있다."(한국일보)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사이드의 <그림의 목소리>(아트북스, 2008). 무슨 책일까 궁금하게 만드는데, 이런 컨셉이라고 한다. "<그림의 목소리> 안에는 너무나 서로 다른 서른아홉 점의 작품들이 들어 있다.(...) 사이드는 그림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상상으로 그 장면을 희곡으로 풀어내기도 하고, 주관적인 별도의 소설을 쓰기도 하고, 시적 이미지를 글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 글을 읽다보면 내가 본 시각과 작가가 본 시각이 매우 다르기도 하고 유사하기도 한 면들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 이 책은 그러한 비교 경험을 통해 독자의 상상력도 불러일으키는 뜻밖의 효과가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목소리'를 다룬 예술 분야의 책이 또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프랑스의 영화비평가이자 감독인 미셸 시옹의 <오디오-비전>(한나래, 2004)과 <영화의 목소리>(동문선, 2005)를 고른다. <영화와 소리>(민음사, 2000)까지 하면 '3종 세트'다. 이 분야에서는 독창적이면서 독보적이란 평을 듣는 책들이며 영어로도 번역돼 있다(찾아보니 시옹의 데이비드 린치론도 영역돼 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군!). 이렇게 생겨주신 분이다.  

개인적으로도 영화에서의 목소리, 특히 보이스-오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있는데, 그거 '연구'하는 일로도 1월 한달은 모자라겠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꼽은 교양분야의 책은 '라이프 스토리'다. 고바야시 데루유키의 <앞은 못 봐도 정의는 본다>(강, 2008). 제목에서 어림할 수 있는 대로, "일본 최초의 시각장애 변호사’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니는 교토의 다케시타 요시키 변호사의 라이프스토리다." '라이프 스토리'란 장르가 국내에선 아직 그렇게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지 않은 듯싶은데, '로스쿨' 준비서라고 하면 차라리 반응이 더 빠르겠다(준비생이 수만 명 아닌가?).  

주인공 고바야시는 누구인가? "1951년생, 우리 나이로 58세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정상이었다가 실명을 한 그는 한 때의 방황을 딛고 일어서 대학에 진학한다. 그는 사법시험 공부와 더불어 ‘점자 사법시험 실시’라는 초유의 사회운동도 함께 병행해야 했다. 게다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안마사의 일도 해야 했다. 우리의 사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일본 정부가 이런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점자 사법시험을 제정한 것이 1973년이다. 이후 아홉 차례의 도전 끝에 마침내 ‘일본 최초의 시각장애 변호사’는 탄생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시각장애 사법시험 합격자가 탄생했다. 198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다케시다 변호사보다 27년 늦었다."  

음, 그 '27년'이 한국과 일본의 격차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 정권 들어서는 더 벌어졌겠다. 최근 시각 장애 합격자가 탄생한 것 말고 다른 지표는 모두 후퇴한 듯싶으니까. 대체복무제가 백지화된 걸 포함해서 말이다.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 금태섭 변호사의 <디케의 눈>(궁리, 2008)과 한정우 현직 법률실장의 <변호사가 절대 알려주지 않는 31가지 진실>(한국경제신문, 2008)을 고른다. 금 변호사는 검사 시절인 2006년 한겨레에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라는 연재칼럼을 실었다가 열렬한 호응과 함께 내부의 '압력'을 받은 이력이 있다. 조국 교수(서울대 법학과)의 평에 따르면, "저자는 검사 생활을 접은 후 바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도 법의 '속살'을 보여주는 작업을 계속 해왔다. 미국 역사의 흐름을 바꾼 여덟 편의 재판을 소개한 <세상을 바꾼 법정>을 번역한 이후, 이번에는 책을 들고 나왔다. 이번 책에서 그는 국내외에 일어난 중요한 법적 사건과 자신이 검사와 변호사로 직접 겪은 경험들을 중심으로 쉬우면서도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필치로 법과 세상을 이야기한다." 이 또한 로스쿨 준비생들의 필독서 아니겠는가.  

한 실장의 책은 전작인 <세 번만 읽어도 좋은 변호사를 만나 승소하는 법>(다산초당, 2006)과 <억울한 의료사고, 제대로 대처하는 법>(다산초당, 2007)에 이어서 '법률 소비자운동' 도움서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이다. "변호사가 의뢰인을 어떻게 속이고 폭리를 취하는지 그 과정을 폭로하고, 올바른 법률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현재의 법률문제들에 대해 속속들이 밝히고, 더 나은 법조계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또한 잘못 아는 법률상식과 더불어 현직 법률실장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정보와 사례를 담았다." 한다. '변호사가 말하지 않는 불쾌한 진실'을 공개하는 셈이니 거의 내부 고발자 수준 아닌가? 저자가 '전직'이 아니라 '현직'이란 점이 그래서 눈길을 끈다. 동업자들이 눈총이 심할 듯싶어서. 아무려나 억울하고 속 터지는 일들이 많을 성싶은 새해에 찾을 일이 많은 책이겠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10. 식민주의 

내 맘대로 고르는 책은 '식민주의'를 주제로 골랐다. 올해 주목할 만한 관련서들이 몇 권 출간되면서, 그리고 강준만의 <지방은 식민지다>(개마고원, 2008)에 자극을 받기도 해서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된 주제다. 내부 식민지이건, 외부 식민지이건 '식민주의적 상황'이란 여전히 유효한 현실인식의 틀인 듯싶고, 유럽 중심주의와도 맞물린 식민주의의 극복과 청산이 여전히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이다.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포스트식민주의) 관련서는 굉장히 많다. 일단은 마르크 페로가 편집한 <식민주의 흑사>(소나무, 2008), 제임스 블라우트의 <식민주의자의 세계모델>(성균관대출판부, 2008), 위르게 오스터함멜의 <식민주의>(역사비평사, 2006)를 골라놓는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2423241 참조).  

08. 12. 27.  

 

P.S. 1월의 읽을 만한 고전은 스피노자의 <정치론>(갈무리, 2008)이다. 3종의 번역서가 있다는 얘기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2483656). 미완성작이어서 아쉽긴 한데(특히나 '민주정'에 관한 장이 완결되지 않았다), 군주정과 귀족정에 대한 그의 사유에서 요긴한 통찰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여력이 있다면 네그리의 <전복적 스피노자>(그린비, 2005),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이제이북스, 2005) 등도 참조할 수 있겠다. 뒷표지의 문구대로라면, <정치론>은 "제국 시대의 전쟁과 권력에 맞선 절대적 민주주의 사상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어쩌면 잃어버린!) 민주주의를 수호하거나 되찾기 위한 지침서로 삼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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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2-28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기의 <장기20세기>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도착했군요.

로쟈 2008-12-28 09:09   좋아요 0 | URL
네, 출간일이 성탄절이예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8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침내 <전통한국의 정치와 정책>을 읽으시는군요.멋진 서평 기대하겠습니다.

로쟈 2008-12-29 08:12   좋아요 0 | URL
책이 절판될까봐 일단 손에 넣은 것이구요, 우선은 요지만 챙겨두었습니다. 읽는 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고요...

수유 2008-12-29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월 책들은 흥미가 가는 책들이 많은데요...서점에 함 나가야것습니다.

2008-12-29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30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31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9-01-0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민주의 흑서] 실물 보신적 있으세요? 보신적 있으시다면 번역이나 도판이 로쟈님이 보시기에는 괜찮은지 좀 알려주세요. 촌구석에 살다보니 별 부탁을 다 합니다. 새해에도 귀찮게 해 드릴것 같군요. 그 대신에 새해 제가 가질 복까지 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9-01-01 21:25   좋아요 0 | URL
책은 바로 구입했습니다. 도판은 많지 않구요, 번역은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 않았지만 괜찮은 듯싶습니다. 임지현 교수가 추천사까지 쓰기도 했고...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함께 세계체계론(세계체제론)을 주도하고 있는 조반니 아리기의 대표작 <장기 20세기>(그린비, 2008)가 번역돼 나왔다. 아마도 사회과학서로서는 올해의 마지막 '수확'이 아닌가 싶다. 책은 1994년에 출간된 '고전'이며 저자 아리기는 현재 개정판을 준비중에 있다고 한다. 역자는 세계체계론 소개에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는 백승욱 교수. 그의 <자본주의 역사강의>(그린비, 2006)로 위밍업을 한 다음에 얼마전에 출간된, 비버리 실버와의 공저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모티브북, 2008)과 같이 읽으면 심화된 독서가 가능하겠다. 미국 세계헤모니 시대의 종말 이후가 어떻게 될는지 시사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시대가 뒤숭숭하다 보니 이런 독서도 '여가용'이 아니라 '생존용'이다. 살기 팍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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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20세기-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
조반니 아리기 지음, 백승욱 옮김 / 그린비 / 2008년 12월
35,000원 → 31,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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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
지오바니 아리기, 비버리 실버 지음, 최흥주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10월
25,900원 → 25,900원(0%할인) / 마일리지 510원(2%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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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본주의 역사 강의
백승욱 지음 / 그린비 / 2006년 11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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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이광근 옮김 / 당대 / 2005년 3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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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관심도서 중의 하나는 리처드 코치 등의 <서구의 자멸>(말글빛냄, 2009)이다. 발행일로는 2009년에 나온 책이다(이 주에는 그런 책들이 좀 된다). 코치는 성공학 지침서로 읽히는 <80/20 법칙>의 저자이기도 한데, 저자의 진의와 무관하게 '80/20' 사회를 떠올리게 하며 그러한 사회적 양극화에 뒤이어 '자멸'이 도래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그 책을 옮긴 공병호씨도 그렇게 생각할까?). 저자들은 '종말이냐 진화냐'라는 선택지를 제시하지만 나는 자꾸 '종말이냐 자살이냐'로 읽는다...

한국일보(08. 12. 27) 종말이냐 진화냐… 기로에 선 서구문명 

9ㆍ11 테러 직후 오사마 빈 라덴은 "서구문명의 가치관은 파괴되었다. 자유와 인권, 인간성을 상징하던 위엄있는 두 개의 탑이 무너져내렸다. 연기처럼 영영 사라져버린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는 과장된 정치적 선전일 뿐이다. 빌딩 두 개가 무너졌다고 문명이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자멸>의 저자들은 테러 자체가 위협인 것이 아니라, 문명을 지탱해온 사상과 태도들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서구문명의 실상은 더 암울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80/20 법칙>의 저자인 리처드 코치와 영국 하원의원, 문화언론체육부장관을 지낸 크리스 스미스는 이 책 <서구의 자멸>에서 북미와 유럽, 호주에 걸쳐있는 서구문명이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간직해온 성공 요인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해 자멸할지도 모른다고 예측하고 있다.

저자들은 서구문명을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문명 가운데 가장 번성하게 만든 요인으로 그리스도교, 낙관주의, 과학, 성장, 자유주의, 개인주의 등 6가지를 꼽았다. 이들은 이 6가지 핵심적인 신념과 행동패턴의 의미, 그것이 태동한 배경, 변천의 역사, 인류의 삶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고 현재 상태와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을 밝혔다. 개인의 의무, 사랑에 중심을 둔 자기개선, 평등과 연민에 대한 헌신 등 그리스도교의 유산은 여전히 청신호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인들에게 보편적이었던 낙관주의는 쇠퇴했으며, 과학 발전의 과정에서 우주는 불확실하며 우리가 알 수 있는 목적이나 원리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과학의 권위는 약화됐다.

또 경제는 크게 성장했지만 지구의 생태균형은 심각하게 어지럽혀져 서구문명이 진화하지 않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면 그 가장 유력한 원인은 '생태적 자멸'이 될 것으로 진단했다. 개인주의가 사회의 부유하지 못한 구성원들에게 안겨주는 경제적 심리적 어려움은 황신호를 깜박이게 한다. 서구인들의 냉소와 무관심으로 자유주의의 수준과 깊이가 사상 최저치에 가까운 것은 적신호다. 

서구는 지금 냉소주의와 이기주의, 무관심, 권력의 재집중 등으로 종말로 가느냐 아니면 용기의 회복, 서구문화에 대한 확신, 유럽인들의 단결 등으로 진화의 길로 가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결론이다. 한국사회가 60년 동안 모델로 삼아온 서구사회를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책이다.(남경욱기자) 

08. 12. 27.   

P.S. 리뷰만 보아서는 통찰을 주는 책인지 서구문명 비판을 재탕하고 있는 식상한 책인지 얼른 식별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자들이 제시하는 서구 모델의 몇 가지 핵심에 대한 검토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시사가 되어줄 듯싶다. 덕분에 생각난 책은 수학자이자 '유나바머'로 잘 알려진 폭탄 테러리스트 테어도르 존 카진스키의 <산업사회와 그 미래>(박영률출판사, 2006)이다. 그가 진단하는 산업사회의 미래가 곧 들이닥칠 한국의 미래와도 겹쳐지기 때문이다(청소년 버전으론 그냥 '동물농장'이고 '1984년'이다. 산업화되고 디지털화된 동원체제이고 전체주의다). '폭탄 테러'를 통해서라도 저지하려고 했을 만큼 암울한 미래다... 물론 반전이 없지는 않다. 아래 같은 기사를 읽으면 '종말이냐 자살이냐'의 선택지도 우선은 권력의 차지인 듯싶다(그들은 권력이 문명보다도 더 오래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겨레(08. 12. 27) 방송사에 ‘파업참가자 처리하라’ 사실상 으름장

정부 대변인인 신재민(사진)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이 26일 전국언론노조의 총파업을 ‘불법 파업’으로 규정하고 엄정대처 방침을 밝힌 것은 총파업에 대한 정부의 강경대응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그는 애초 개인 일정을 이유로 취소했던 이날 정례 기자간담회를 되살리면서 미리 준비한 메모를 꺼내 읽었다. 또 그는 자신의 발언이 “정부 안에서 교감이 이뤄진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 정부 차원에서 충분히 조율된 ‘준비된 발언’이라는 것이다.

우선 그의 발언에는 언론노조의 총파업을 불법으로 몰고 가 강경대응하겠다는 정부 의지가 담겨 있다. 그는 이번 파업이 “노사간의 교섭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폈다. 최상재 언론노조 위원장이 이번 파업에 대해 “언론노동자들의 신분과 지위 변화에 심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노동법상 합법 파업”이라고 주장한 것을 정면반박하며 ‘불법의 낙인’을 찍었다. 더 나아가 그는 “합법 파업은 보호해야 하지만 불법 파업은 엄정하고 단호히 대처할 수밖에 없다”며, 경찰력 동원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 또한 그의 발언에는 방송사 노조의 극한투쟁을 불러온 한나라당의 언론관계법 강행처리를 측면지원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그는 “국회 입법을 둘러싸고 파업이 이뤄진 전례를 찾기는 거의 어렵다”며 언론관계법 처리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충돌을 불사하면서까지 언론관계법을 강행처리하겠다고 하는 정부의 의지는 문화방송의 보도 태도에 대한 그의 거침없는 비판 속에 잘 드러났다. 그는 한나라당의 언론관계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문화방송의 보도와 관련해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특정 방송사의 사적 이익을 위해 사유화하는 행위로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비윤리적 행위”라고 매도하며 “엠비시 보도는 자기 회사 입장에 부합하는 내용이 많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정파적인 방송은 없다”고 비판했다. 그의 이런 발언은 방송법 개정에 반대 의사를 내비친 엄기영 문화방송 사장을 압박하는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언론노조 등은 신 차관의 발언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망언’”이라고 일축했다. 채수현 정책실장은 “언론관련법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다면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한나라당 스스로 철회할 것”이라며 “언론노조는 총파업 수위를 최대치로 높여 모든 지·본부가 전면 제작거부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정부의 불법 파업 규정에 대해선 “방송구조의 큰 틀이 바뀌고 미디어산업이 재편되면 언론노동자들이 해고나 비정규직 전락 등에 직면할 수 있다”며 “그런데 어떻게 노사간의 교섭 대상이 아니냐”고 반박했다. 김재용 문화방송노조 민주방송실천위원회 간사는 신 차관이 문화방송 보도를 ‘정파적’이라고 문제 삼은 데 대해 “재벌과 조중동이 지상파 방송까지 장악하면 민주주의의 근본인 여론 다양성이 훼손되는데 어떻게 정파적 보도라고 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신 차관이 파업 참가자에 대해 각 언론사 차원의 조처를 주문했지만, 문화방송 경영진은 이번 파업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어 회사 차원의 조처에 나설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이 경우 다음 절차로 정부가 경찰을 투입해 파업 주동자 처벌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언론노조 쪽의 의지 또한 ‘결사항전’의 태세여서 충돌의 상처는 쉽게 헤아리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김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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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27 18:12   좋아요 0 | URL
신재민 아저씨 무서워...조폭같이 생겼어요.

로쟈 2008-12-27 23:41   좋아요 0 | URL
인물들이 어째 다 그렇죠? 그렇게 변해가는 모양입니다...

jouissance 2008-12-27 19:18   좋아요 0 | URL
생긴거만 조폭이 아니라 하는 짓거리도 영락 조폭입니다. 조폭은 그래도 동네에서만 조폭 활동을 하지만 이 신종 조폭들은 온 나라를 대상으로 조폭 짓거리를 서슴치 않고 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저 조폭 떨거지들이 지들이 이 나라에서 가장 잘 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차라리 '연민'해 버리는 게 나을 듯 싶어요. 연민이라도 하지 않고는 남은 4년을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서요. 저는 요즘 신문까지 취소했답니다. 원형탈모 생길 것 같아서...

로쟈 2008-12-27 23:43   좋아요 0 | URL
탈모는 주의하셔야죠.^^; 문제는 사시미를 든 놈들과 우리가 같은 방에 있다는 점이죠.--;
 

스피노자 <정치론>의 새 번역본이 출간됐다. <정치론>(갈무리, 2008). 처음엔 <신학-정치론>의 일부가 번역된 것인가 했는데, 예전에 <국가론>(서문당, 2001)이라고 소개된 책이다. 동서문화사판의 <에티카/정치론>도 최근에 다시 출간되어 졸지에 3종의 번역본을 거느리게 되었다(내가 그런 경우다). 예기치 않은 리뷰도 올라와 있어서 옮겨놓는다. 예기치 않았다는 건,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걸 깜박 잊은 때문이다. 어느새 2008년의 마지막 주말이다. 이 마지막 주에 나오는 책들이 주로 정치론이고 혁명론이다. 전운이 감도는 2009년을 미리 예고해주는 듯싶다(말미에 붙인 사진은 '미디어오늘'의 기사에서 가져왔다)... 

      

한겨레(08. 12. 27) 스피노자 “대중 분노케 한다면 국가 아니다

네덜란드 철학자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1632~1677)의 주저로는 <윤리학> <신학-정치론> <정치론> 세 종이 꼽힌다. 이 가운데 마지막 주저인 <정치론>이 새롭게 번역돼 나왔다. 새 번역본에는 주요 구절마다 옮긴이의 상세한 해설이 달렸다. 옮긴이 김호경 교수(서울장신대·신학)는 질 들뢰즈, 안토니오 네그리, 에티엔 발리바르를 비롯해 스피노자 철학을 오늘의 사상으로 되살려내는 데 공헌을 한 현대 연구자들의 해석을 적극 참조해 해설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그들의 해석을 통해 스피노자는 ‘전복적·급진적’ 사상가의 모습을 좀더 뚜렷이 드러낸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17세기는 근대국가의 태동기였다. 얼핏 보면 스피노자는 매우 관념적인 사유에 골몰했던 비현실적인 사람 같지만, 실상 그의 관심사는 삶의 구체적 지반을 떠난 적이 없다. 그는 촘촘하게 짜인 논리의 그물로 삶의 문제를 전면적이고 총체적으로 해명하려고 했다. 그런 만큼 삶의 현실을 규정하는 정치의 문제도 그의 사상 속에서 해명되어야 했다.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핀 것이 <정치론>이다. 동시에 <정치론>은 먼저 저술된 <윤리학>과 <신학-정치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저작이다. <윤리학>이 자연이라는 총체적 세계 안에 인간을 배치하고 그 인간의 본성을 포착하는 저작이라면, <신학-정치론>에서는 신학과 함께 민주주의 문제가 탐구된다. <정치론>은 <윤리학>의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삼고 <신학-정치론>의 문제의식을 더욱 깊이 파고들어 이 사유들을 응집하고 확장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국가의 세 형태로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을 제시하고 이들을 차례로 고찰한다. 스피노자는 세 정체가 다 나름대로 합리적 존재 근거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근본적으로 민주정에 맞춰져 있다. 민주정이야말로 사람들의 본성을 가장 넓게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정체라고 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스피노자는 민주정 부분을 상세히 서술하지 못하고 폐병의 침탈을 받아 44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미완성 유작이다. 그렇지만 앞선 저작들과 연결지어 살필 때 그의 민주주의 정치이론은 어렵지 않게 구성될 수 있으며, 특히 인간과 국가의 본성을 설명한 <정치론> 전반부를 통해 그의 정치사상은 비교적 충실하게 이해될 수 있다. 

스피노자 사유의 출발점은 ‘코나투스’(conatus)다.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에게 ‘자기보존본능’이 내재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을 가리켜 코나투스라고 부른다. 코나투스에는 정념과 이성이 함께 섞여 있다. 모든 인간은 이 코나투스를 실현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욕망이다. 이 욕망에 휘둘려 정념의 노예가 될 때 인간은 부자유 상태에 빠진다. 반대로 이성이 욕망을 적절하게 제어하고 조절하면 그때 인간은 자유롭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욕망을 근절할 수는 없고, 욕망을 좋은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것만이 가능하다. 욕망을 전환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이성이다.

인간이 욕망을 제거할 수 없다면 욕망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욕망을 날뛰게 하는, 사랑·미움·시기·분노 따위의 정념들 때문에 인간은 공동의 법이 없으면 갈등과 충돌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동의 법을 통해 공동의 질서를 유지하는 국가가 필요하다. 국가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자유를 누리려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가느냐 하는 데 있다. 스피노자는 국가도 인간과 같이 이성과 정념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본다. 국가가 이성의 명령을 따를 때 구성원의 보편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지만, 정념의 힘에 끌려가면 국가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패덕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때 이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것이 다중(대중)이다. 국가의 힘을 구성하는 것이 다중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목표도 다중의 평화와 자유다. 여기에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사상이 배어 있다.

이 다중의 삶을 배반하는 국가는 국가로서 자격이 없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대다수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국가의 권리에 속하지 않는다.” 국가는 자신의 권력으로 개인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정념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적인 국가는 다중의 존경을 받지만, 이성적이지 못한 국가는 다중의 저항에 부닥친다. 그럴 때 국가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공포를 조장하는데, 공포는 결과적으로 국가 권력을 위태롭게 할 뿐이다. 다중이 소요를 일으키고 법을 경멸한다면 그 원인은 다중의 사악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사악함에 있다. “신민(국민)들의 부도덕과 무질서와 불복종은 국가에 원인이 있다.” 이 모든 혼란은 국가가 덕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 스피노자는 특히 다중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강조한다. “맹종하는 것만을 익힌 양떼처럼 신민들을 다루는 국가는, 국가라기보다는 황무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좋은 국가는 다중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로 만들어지고 유지된다는 것이다.(고명섭 기자) 

08. 12. 26.    

P.S. "다중이 소요를 일으키고 법을 경멸한다면 그 원인은 다중의 사악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사악함에 있다. “신민(국민)들의 부도덕과 무질서와 불복종은 국가에 원인이 있다.” 이 모든 혼란은 국가가 덕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 같은 대목에서 세밑을 맞는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아무래도 지금의 대한민국은 덕이 없다. 사악하고 포악하다. 이것은 국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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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7 0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7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7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7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8-12-27 05:42   좋아요 0 | URL
따뜻하게 보내고 싶은 연말에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일들이 한 둘이 아니네요. -_ㅠ

로쟈 2008-12-27 07:22   좋아요 0 | URL
새해 전망이 이렇게 어두운 것도 굉장히 오랜만인 거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7 18:07   좋아요 0 | URL
일본만 해도 우익인 산케이 요리우리 신문이 우리나라 조중동만큼의 구독률은 아닌데...한겨레나 경향 구독률은 아사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하기야 전라도에서도 조중동이 1위니까...그 정도 구독률이면 됐지,기어코 방송시장에까지 뛰어들려는 욕심은 참...거시기합니다.

로쟈 2008-12-27 23:37   좋아요 0 | URL
나름으로는 사활을 걸고 있는지도 모르죠. 지난달이간 분석기사로는 뛰어들어도 전망이 그다지 밝지는 않다던데요. 자금도 부족하고...

Mephistopheles 2008-12-27 18:31   좋아요 0 | URL
이건 뭐 정부는 마피아 같고...
경찰들은 마피아 밑에서 궂은 일 처리하는 행동대장 똘마니들 같고..에휴.

로쟈 2008-12-27 23:39   좋아요 0 | URL
국가기구의 정체가 원래 '마피아'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는 면은 있습니다. 잘만하면 '최악의 정권'으로 역사에 남을 것 같아요...
 

분위기 있는 곳에서 외식을 해야 한다고 조르는 아이 때문에 밖에 나갔다가 분위기 그저 그렇고 맛도 별로 없는 저녁식사를 하고 온 뒤라, 게다가 속까지 더부룩하여 글을 쓸 만한 기분도 아니지만(이것이 메리 크리스마스란 말인가!) 생각난 김에 메모 정도는 해놓는다. 예수에 관한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저술가 게리 윌스의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돋을새김, 2007)를 지난달에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돋을새김, 2007)와 함께 구입해서 조금 읽어본 적이 있다(두 책의 영어본도 같이 구했지만, 지금 찾다가 포기한 탓에 번역본만 갖고 이 메모를 작성한다). 기억엔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을 읽으면서 참고하려던 것이었고, 바디우의 <사도 바울>(새물결, 2008)을 포함해서 몇 권의 책을 그렇게 뒤적인 듯하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의 원제는 그냥 'What Jesus Meant'이고 이건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의미한 것' 내지는 '예수가 말한 것'이라고 직역될 수 있겠지만, 국역본의 제목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서문보다 먼저 등장하는 '번역에 대하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몇 쪽 분량의 '일러두기'만을 읽었고 그걸로도 책값을 뽑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대한 독자평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나와는 계산방식이 다르거나 더 비싼 값을 주고 산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 읽지 않은 책이지만 성경과 예수에 대한 길잡이로 유익하지 않나 싶다.  

'번역에 대하여'에서 다루고 있는 건 예수가 사용한 언어와 그 번역 문제다. 성경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자세히 알려고 한 적도 없지만) 초기의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사용된 그리스어가 완전 저잣거리의 언어여서 전혀 우아하지도 고상하지도 않다고. 박식한 고전주의자 니체가 이렇게 말해놓았을 정도다. "만약 하나님이 신약성서를 작성했다면, (하나님은) 분명 깜짝 놀랄 만큼 그리스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신은 자신의 우아함에 굳이 시련을 부여하여 이처럼 타락한 언어 사용을 선택했다."   

사정이 그렇게 된 것은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의 정복 때문이다. 그가 방대한 영토를 정복했을 때 피정복 지역의 사람들이 정복자 및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공용 그리스어'였다. 일종의 혼합언어인 이것을 '코이네'라고 부르는데, 백과사전의 설명을 더 참조하면 이렇다.  

BC 4세기부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AD 6세기 중엽)까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및 헬레니즘 문명에 동화된 일부 아프리카와 근동지방에서 사용되었다. 주로 아테네 방언에 바탕을 둔 코이네는 2세기까지는 다른 고대 그리스어 방언들을 완전히 몰아냈다. <구약성서>(70인역 그리스어 성서)와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판, 역사가 폴리비오스와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저서는 코이네를 사용하고 있다. 코이네는 근대 그리스어의 토대를 이루었다.     

말하자면 한국인과 일본인이 만나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때 미국인은 잘 못 알아듣는 그 '영어'가 일종의 '코이네'이다. 대부분의 혼합언어처럼 이 코이네는 섬세함이 부족하여 기초적인 단어들만 접속사도 없이 길게 나열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복음서들은 빌라도 같은 로마인이나 예수와 같은 아람어 설교자들고 그의 제자들이 함께 사용했던 이 기초적인 언어로 씌어졌다."  

'아람어'란 말이 생소한 분들을 위해 역시나 백과사전을 인용한다.

BC 7~6세기에 차츰 아카드어를 대신하여 근동지방의 링구아 프랑카(국제혼성어)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다. 아람어는 히브리어 대신 유대인의의 언어가 되었다. <구약성서>의 <다니엘>과 <에즈라>는 아람어로 씌어 있으며, 바빌로니아 <탈무드>(유대 율법과 주해를 집대성한 책)와 예루살렘 <탈무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이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가 사용한 이 아람어가 히브리어와는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못 들어본 말은 아니다.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그린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배우들이 사용한 말이 고대 아람어와 라틴어이기 때문이다('고대 아람어'는 어떻게 재구해낸 것일까? 우리는 삼국시대의 한국어를 모르지 않는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은 그래서 아람어의 그리스어(코이네) 번역이다. 그리고 그 점이 바울의 언어와 예수의 언어 사이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특이한 그리스어라고는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그리스어로 기록한 반면에 예수는 아람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반-니체주의자였던 빌라모비츠 묄렌도르프는 이 바울의 언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바울의 그리스어는 학파 또는 그 어떤 모델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없으며, 그의 내적인 마음 상태에서 어색하지만 직접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의 언어처럼 여전히 그리스어이며, 아람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남겨진 시간>, 15쪽) 

강조한 대목은 오역이다. 어순을 약간 조정하여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그리스어이며, 예수의 언어처럼 아람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야 맞다(원문은 "his Greek is not translated Aramaic (as are the sayings of Jesus)"이다).  

자, 그렇다면 예수는 그 그리스어로 번역된 아람어로 어떻게 말했나?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What to me and to you, woman)?'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2장 4절에 나오는 문장인데, 내가 갖고 있는 개역한글판으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나이까"이고 병기된 NIV판 영역으로는 "Dear woman, why do you involve me?"이다. 우리말 번역보다는 영어 번역에서 차이가 더 도드라지는데, "Dear woman, why do you involve me?"와 비교하면 "What to me and to you, woman?"은 흡사 콩글리쉬 아닌가?  

게리 윌스는 여러 가지 예를 더 들고 있는데, 누가복음 2장 49절은 또 어떤가?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I must be at my father's)?"가 직역이고, 개역한글판과 영어판으로는 각각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와 "Didn't you know I had to be in my Father's house?"로 옮겨졌다. 여기서도 "I must be at my father's?""Didn't you know I had to be in my Father's house?" 간의 차이를 음미해보는 것이 좋겠다. 윌스의 부연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예수가 아버지의 무엇에 있어야 한다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아서 주석자들이 논쟁을 벌인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문장들이 이런 식으로 투박하고 모호하여 성서 번역자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 그리스어(코이네) 문장들을 정확하게 옮기기보다는 우아하게 옮기는 데 더 주안점을 두었다고.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사실 이 대목의 우리말 번역은 "What to me and to you, woman?"의 투박함이 많이 제거돼 있다. 실상은 거의 이런 수준이 아니었을까? "야야, 그게 니랑 나랑한테 뭐시간디?").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영어 번역들은 신약성서의 '결점들'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문법을 보강하고, 시제를 보다 일정하게 맞추었으며 반복어구를 잘라냈다." 그리하여 공손한 고어체로 이루어진 품위 있는 성서를 만들어냈다(흠, <바이블 키워드>와 <아시모프의 바이블>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그렇게 하여 얻어진 것이 '킹 제임스' 번역본이며 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진짜' 성서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이어지는 그의 주장은 내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다. "만약 새로운 번역이 원전의 효과를 그대로 재현하려 한다면 품위가 없어야 한다. 복음서의 언어에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복음서 속의 언어는 언어학적 세속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거칠게 다듬어진 위엄이다."(10쪽) 그래야지만 "하층민 남자로서 노동자 출신인 자신의 제자들과 일상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예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고 윌스는 말한다.  

  

그런 성서를 사실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않으며, 그런 예수 또한 우리 곁에 있지 않다(대신 우리 곁에 있는 건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와 '추락하는 한국교회'다). 마치 '예수 메시아'란 뜻의 '예수 크리스토스'를 그냥 '예수 그리스도'라고 음역함으로써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의 '메시아'를 배제하고 유예시킨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는 아닌지('메시아' 대신에 우리가 갖게 된 것이 반항적 록정신을 상실한 '거세당한 슈퍼스타'이다. '한국형 슈퍼스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의 서문은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란 제목을 갖고 있다. 저자는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몇 가지 행적만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What Would Jesus Do)?" 운동의 허상을 폭로한다(사정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리하면 이렇다. 과연 사람들은 예수처럼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말라고 한다거나(마태8:22) 부모를 미워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마태8:22, 누가14:26) 혹은 자신들이 일궈낸 성공에 대해 자부심을 품고 있는 교외의 부자 교회를 찾아가(혹은 소망교회를 찾아가) 헌금접시를 들고 있는 사람을 채찍으로 내리치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요한 2:16)라고 하거나 "강도들의 소굴"(마가11:17)이라고 고함칠 수 있을까? 

또한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아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태23:27)고 외치고,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태 10:34)고 하거나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려고 왔다"(누가12:49)고 한다면, 그런 예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연 예수가 했던 바를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내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축복과 은총을 받아서) 기름이 번지르한 윤택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 '왜 나입니까?'라고 반문하며 고뇌하는 자의 모습이다. 그건 사실 마리아가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받는 장면에 이미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게는 마리아의 성수태고지를 주제로 한 그림이나 조각들 중에서, 마리아를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표현해놓은 작품이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고 한 게리 윌스의 말에, 나는 전폭적으로 공감한다(그가 사례로 제시한 건 로렌초 베네치아노의 그림이지만 눈에 띄지 않아서 보티첼리의 그림을 옮겨놓는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리란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는 대경실색한다.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라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하고 궁금히 여겼다."(누가1:29) NIV판으로는 "Mary was greatly troubled at his words and wondered what kind of greeting this might be." 인류의 역사가 그 수태로 인하여 좀 바뀌었다면 그 기원적 정념이 놀람이고 공포였다는 점도 주의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기쁨보다 먼저 우리에게 도래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나는, 성탄절을 보내며, 생각한다... 

08. 12. 25. 

 

P.S. 예전 같으면 눈길도 가지 않을 책들인데, 요즘은 나이 탓인지 관심분야가 더 넓어졌다. '성경과 기독교'란 주제와 관련하여 더 읽어볼 만한 책은 바트 에르만(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청림출판, 2006) 등의 책이다. 저자는 신약학의 권위자라고 하는데,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 가운데서도 관심이 가는 타이틀이 많다.  

 

<예수>를 비롯해서 <신약>, <신의 문제> 등이 그런 타이틀이고 내년봄 출간 예정인 그의 최신작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이다(러셀도 같은 제목의 책을 쓴 적이 있다). '바로 이 책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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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12-25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영화 개봉했을 당시 인터뷰에서 본 것 같아요. 예수님 역을 맡은 배우가 아람어로 된 성경을 몇 십번 읽고서 연기했다고 하던걸요. (대단해라!)

로쟈 2008-12-25 23:58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아람어 성경의 성립연대가 언제였는지 알면 되겠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은 아무래도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게 성서해석학자들의 중평입니다.그래서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가 성서엔 혼재해 있다고 하죠.

로쟈 2008-12-25 23:59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책상맡에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분도출판사)란 책이 놓여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2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제가 그 책을 말하려고 했어요.광주의 한 가톨릭 서점에서 몇년전 할인판매할 때 분도 출판사 책을 많이 샀지요.개신교 신학자들 책도 내고 일반 인문사회과학 책도 좋은 게 많이 나오죠.

로쟈 2008-12-26 12:52   좋아요 0 | URL
요즘은 다들 구하기 힘든 책이 돼버렸어요...--;

람혼 2008-12-26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의 '상상적 형상'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같은 제목을 패러디하여 "예수는 저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로쟈 2008-12-26 12:5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몇년 전에 당시 유대인인가 표준형 얼굴이 크게 보도된 적이 있지요(요즘 우락부락하고 입술 두툼한). '예수는 이날 태어나지 않았다'까지 포함해서 두루두루 시리즈가 될 법도 합니다.^^

비로그인 2008-12-2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그간 눈으로만 읽고 가다가 처음 글 남깁니다.
아람어와 코이네에 대한 글을 읽고 정찬의 소설집 <아늑한 길>에 실린 '아늑한 길'
을 펴보았습니다. 그곳에 아람어에 대한 내용이 꽤나 자세히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람어는 문자 없이 구전되기만 한 민중의 언어인 빨리어와도 비교할 만하지 싶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12-26 12:49   좋아요 0 | URL
아 정찬의 소설에도 나오는군요...

누런마음황구 2008-12-26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를 읽으려고 하다가, 좋은글 읽고 갑니다.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

로쟈 2008-12-26 12:49   좋아요 0 | URL
그냥 일종의 책소개였습니다.^^;

neoscrum 2008-12-26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내용과 관련해서 <성경 왜곡의 역사>도 재미있습니다.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206490 성경의 원본을 찾는 신학자들이 보기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는 그 유명한 에피소드는 초기 성경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부터 현재 쓰는 성경의 여러 오류들까지..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로쟈 2008-12-26 12:48   좋아요 0 | URL
바로 제가 찾던 류의 책입니다.^^ 바트 어만(에르만)이 꽤나 저명한 학자군요. 바로 올려놓습니다...

anathema 2008-12-27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ratton Ladewig, "An Examination of the Orthodoxy of the Variants in Light of Bart Ehrman`s The Orthodox Corruption of Scripture" (Th.M. thesis, Dallas Theological Seminary, 2000).

로쟈 2008-12-27 23:41   좋아요 0 | URL
학위논문까지 뒤져볼 정도의 관심은 아니구요, <성서 왜곡의 역사> 정도로 충분합니다. 다만 더 소개가 되면 좋겠네요...

anathema 2008-12-2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논문은 바트 어만의 문제점을 지적한 논문입니다.^^ 바트 어만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바트 어만의 주장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지요. 다른 사본학자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로쟈 2008-12-28 12:22   좋아요 0 | URL
Th.M. thesis이면 석사논문인가요? 아직 '사본학자'라고 부를 순 없겠고, 그가 권위 있는 새 책을 낸다면 읽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