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출간됐지만 무심코 지나쳐버렸다가 오늘에서야 '발동'이 걸린 책이 있다. 과학저술가 필립 볼의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까치, 2008)가 그것이다. 책 표지만 보고 그렇고 그런 교양과학서겠거니 생각했지만 목차를 보니 좀더 근사한 책이란 걸 알 수 있다('사회물리학'이라니!). 최근에 나온 교양과학서들 가운데서는 가장 먼저 읽고픈 책이다(우울한 것은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이지만). 아니 사회학 책인가?! 지난주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09. 20) 인간행동·관계 속에 존재하는 물리학법칙

물리학은 물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다. 그런데 지난 20여년 동안 이 분야에선 특별한 일이 진행되어 왔다. 물질세계를 이해하려고 개발했던 방법과 아이디어들이 뜻밖의 분야에 응용되기 시작했다. 물리학이 사람들의 상호작용과 사회적 행동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는 ‘사회의 물리학’(physics of society)이 부상한 것이다. 물리학은 열린 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결정하고 투표하며, 어떻게 집단과 조직을 형성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틀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금융시장의 움직임이나 사회적·상업적 네트워크에 숨겨진 구조를 밝혀내고 갈등과 협력의 정치학을 분석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는 이처럼 물리학을 사회학·정치학·경제학 등에 결합시킨 새로운 사회물리학의 역사적 궤적과 최근 동향을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저명한 과학저술가인 저자는 토머스 홉스와 애덤 스미스에서부터 게임이론과 인터넷 네트워크에 대한 현대적 연구에 이르기까지 물리학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풍부하게 제시하는 한편 사회물리학의 한계와 위험성에 대해서도 살폈다.

사회물리학을 모색했던 최초의 인물은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였다. 그는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고 자명하다고 믿는 공리(公理)로부터 인간의 상호작용, 정치, 사회에 대한 과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대표작 ‘리바이어던’은 갈릴레오의 역학을 근거로 삼았다. 이 같은 홉스의 사상은 로크 등을 통해 후세의 사상가들에게 전해졌다. 책에는 애덤 스미스, 칸트, 콩트, 밀 등 홉스와 같은 아이디어를 추구했던 이들과 함께 사회물리학의 정립에 기여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물리학을 통계적인 것으로 만든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 사회통계학을 이용해 정치경제학을 연구한 윌리엄 페티.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이해라는 개념을 널리 확산시킨 천문학자 아돌프 케틀레, 역사 자체를 과학으로 본 헨리 토머스 버클 등이다.

헬빙과 몰나르는 물리학을 바탕으로 보행자들의 움직임에 대한 수학적 모델을 개발했다. 하나의 문을 지나가려는 사람들은 일부가 한쪽으로 통과한 후에 다른 방향으로 통과하는 일이 번갈아 일어난다.

사회적 행동을 정량화하려고 시도한 현대 연구자들의 연구와 실험들도 풍부하게 소개된다. 사회물리학은 보행자들의 흐름에서 전기 전하를 가진 입자들에게 작용하는 전자기 힘과 비슷한 사회적 압력을 읽어내고, 도시 팽창의 복잡한 유기적 성격의 실마리를 박테리아 군체의 비평형 성장과정에 대한 연구에서 찾는다. 덩어리가 커질수록 더 빨리 성장하고 작은 덩어리들은 사라지거나 다른 덩어리에 의해서 삼켜지는 ‘오스트발트 성숙’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 기업인수와 세계화와 연결된다. 물리학은 왜 정체가 생기는지를 이해하고 주가의 움직임 등 경제를 예측하려는 시도들에도 개입한다.

책에는 상전이, 멱법칙, 자기조직화 패턴, 집단적 움직임, 무규모 네트워크 등 낯선 개념들이 등장하지만 흥미로운 실험 사례들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미국 배우 케빈 베이컨이 다른 배우와 몇 단계를 거치면 아는 사이인지 파악하는 ‘케빈 베이컨 게임’의 다양한 ‘버전’들이 나오기도 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 17개 국가들의 제휴관계를 거의 흡사하게 재현해내는 실험도 소개된다.

저자는 “인간이 자신의 의사대로 행동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더라도 그들이 집단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렇지만 사회물리학이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단언한다. “개인적 책임과 집단적 책임을 어떻게 정의하며, 삶에 있어 무엇이 중요한가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는 사회물리학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김진우기자)

08. 09. 27.

P.S. 알라딘에서 검색되는 원서의 표지는 국역본 이상으로 심심하다. 찾아보니 좀더 근사한 다른 표지가 있다.

표지에 국역본에서와 마찬가지로 '2005년도 아벤티스 과학저술상 수상작'이라고 적혀 있다. 그게 어떤 상인지 일반독자로선 알 수가 없지만, 스티븐 호킹의 <호두껍질 속의 우주>(2002년)와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2004년)가 이전 수상작이라고 하니 허튼 상은 아니다. 역자인 이덕환 교수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까치, 2003)도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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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한국일보에 실린 글을 옮겨놓는다(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809/h2008092702460884210.htm). '책과 인생' 코너에 5매짜리 원고를 청탁받고 쓴 것이다. '거창한' 주제를 짧게 쓰려고 하니 특별히 떠오르는 기억도 드물어서 어제 새벽에 책장 가까이에 있는 니진스키의 책을 펴놓고 예전에 쓴 글도 참고하여 몇 자 적었다. '눈물의 바다 러시아 문학'이란 '과장된' 제목은 물론 나의 작품이 아니다...

 

 

 

 

 

 

  

한국일보(08. 09. 27) [책과 인생] 눈물의 바다 러시아 문학

능글맞기도 하지만 괜히 잘 우는 사람들이란 고정관념을 나는 러시아인들에 대해 갖고 있다. 물증을 대라고 하면 내가 만났던 러시아인들이 아니라 내가 읽은 러시아인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까. 하지만, 가령 전설적인 무용가 니진스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바라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란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제목은 조금 과장된 것이다. 정신질환을 앓으며 요양원에 입원해 있던 니진스키가 아예 정신을 놓기 전에 쓴 일기이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나온 같은 역자의 첫 우리말 번역본에는 그냥 <니진스키의 고백>이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몇년 전 모스크바에서 구한 러시아어본의 제목은 <감정>이다. 물론 이 제목들이야 편집자의 작품일 것이다.

20대 초반의 어느날 나는 지방의 한 시립도서관에서 <니진스키의 고백>을 빌려 읽은 적이 있다. 이렇게 시작했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내 처는 줄곧 울고 있다. 나 역시 운다." 이건 뭐 달리 대책이 없다. 읽으면서 같이 우는 수밖에.

니진스키는 고기를 먹으면서 울고, 사랑의 시를 적으면서 울고, 아내의 울음 때문에 또 운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대한 예술가' 이전에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은 단순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 고통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신조차도 가여워한 한 영혼의 고통이다. 어느 시인을 위해 울어주던 버드나무처럼 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운다. 그 생각만 하면 나도 눈물이 난다.

아직 능글맞은 중년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빈들거리는 일이 잦은 나는 그런 때마다 반쯤 정신 나간 무용가의 눈물을 떠올리곤 한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문학은 그런 눈물의 바다이기도 하다. 그들은 삶을 너무 사랑한 것이 아닐까?

08. 09. 27.

P.S. 니진스키의 일기 얘기를 꺼낸 김에 관련서들의 이미지도 옮겨놓는다. 먼저 내가 제일 처음 읽은 <니진스키의 고백>(문예출판사, 1975).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발췌본의 번역이어서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와는 번역대본이 다르다. 제대로 된 완역본이 1995년 파리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1999년에 영역본이 나왔다. <절규>는 그것을 옮긴 것이어서 <고백>과는 차례도 다르다. 내가 아는 러시아어본이 나온 것은 2000년이 돼서다.

이 <고백>은 나중에 구하려고 하니 눈에 띄지 않아서(지금이라면 구할 수 있을 듯싶지만) 한 시립도서관의 책을 복사해서 갖고 있다. 그의 여동생이자 안무가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의 책 <나의 오빠 니진스키>(문예출판사, 1988)와 아내 로몰라 니진스키가 쓴 회고록 <천재는 어디로: 무용의 신 니진스키>(까치, 1981)도 이덕희씨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니진스키 3종 세트'라 할 만하지만, 나는 따로 갖고 있지 않다.

  

러시아에서 출간된 니진스키 관련서를 오래만에 검색해보았다. 먼저 그의 일기의 러시아어본인 <감정>(2000).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표지는 두 종이 있다. 왼쪽이 더 마음에 들지만 내가 갖고 있는 건 오른쪽.

Вацлав Нижинский ЧувствоВацлав Нижинский Чувство

그의 아내 로몰라의 회고록도 두 종이 눈에 띈다. 그밖에 전기 작가 리처드 버클의 전기 번역서 등이 더 있다. 관련서가 많지는 않은 것이다.

Ромола Нижинская Вацлав Нижинский. Воспоминания NijinskyРомола Нижинская Вацлав Нижински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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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7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27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9-27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의 저공비행'에서 러시아어 책 표지들을 보니까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이야말로 '러시아 문학도의 뜨거운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글 잘 읽었습니다(글을 읽고나니 제목을 붙인 편집자의 선택이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로쟈 2008-09-27 23:24   좋아요 0 | URL
원인 제공은 했지만 포커스가 거기에 맞춰질 줄은...^^;

Ritournelle 2008-09-28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서재는 러시아적 세계의 전도사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 러시아어를 배우고 싶은 욕망이 불끈불끈 쏫기도 한답니다.

로쟈 2008-09-28 20:36   좋아요 0 | URL
1년만 배워도 니진스키는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며칠전에 마땅한 리뷰가 없어서 올려놓지 못한 책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의 <악의 쾌락 변태에 대하여>(에코의서재, 2008)이다. 루디네스코는 전기 <자크 라캉>(새물결, 2000)의 저자이며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저자 소개란에는 "프랑스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정신분석학자로 평가받는다"라고 돼 있는데(파리 7대학이라면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동료인 것 아닌가?), 헤겔과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최고'는 '최고'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있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주제보다는 저자에게 이끌린 것이다('악의 쾌락'이란 제목도 유혹적이긴 하지만). 주말 북리뷰들에 예상했던 것보다 자세한 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8. 09. 27) ‘비천’한 것인가, ‘숭고’한 것인가 도착(倒錯)

사디즘·마조히즘·소아성애증·페티시즘·관음증·노출증·의상도착증·분변음욕증…. 도착(倒錯)은 때로는 ‘비천’하고 때로는 ‘숭고’하다. 퇴폐, 악마성, 인간성 상실, 잔인성 등을 특징으로 하지만 한편으로는 창조적이고 복종을 거부해 숭고함을 보이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도착증이 ‘인류만의 소행’이라는 사실이다. 15세기 프랑스의 질 드 레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인간만이 쾌락을 위해 300명의 아이들을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도착증은 일부 ‘사악한’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게 아니다. 인간 사회 어디에나 존재하는 구조적인 현상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감추려고 하는 우리 자신의 어두운 일면을 보란 듯이 내보이는, 우리의 일부이자 인류의 일부분이다.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정신분석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파리 7대학 역사학과 교수가 한 번도 정식으로 다뤄진 적이 없는 ‘도착의 역사’를 추적하는 이유다.

도착증은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도착자들은 누구인가. 저자가 정의하는 도착자는 악행을 저지를 뿐만 아니라 악에서 쾌락을 느끼고 스스로 그 사실을 의식하는 사람이다. 책은 중세를 시발점으로 도착증과 도착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천사를 조명하면서 도착에 대한 사회의 ‘도착적’인 강박관념을 허무는 작업을 진행한다. 아울러 우리 내면의 감춰진 어두운 부분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성찰했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책을 따라 ‘도착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만만치 않다. 온갖 변태적이고 잔악한 행위들을 실천한 도착자들이 잇따라 등장하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 신비주의 성직자들은 배설물을 먹거나 스스로를 학대하는 행위를 통해 비천함을 숭고함으로 바꾸고자 했다. 질 드 레는 아이들을 잡아다가 사지를 자르고 죽어가는 아이들 앞에서 사정을 했다. 18세기의 저주받은 작가 사드는 수음, 펠라티오, 항문성교를 조장한 사상 최악의 패륜아로 일생의 3분의 1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도착을 자유를 향한 해방과 혁명으로 묘사한 위대한 성애문학 작가로 칭송받기도 한다.

책은 특히 19세기 도착자들을 정의하고 통제하기 위해 다듬어진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계몽주의가 도래하면서 도착증은 ‘공포의 대상’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저주받은 종족’과 치료가능성이 있는 이들로 나눴다. 모든 비정상적인 행위들을 목록화해 단속했고 특히 자연을 거스르는, 즉 번식을 거부하는 자위하는 어린이, 동성애자, 히스테리 여성을 가장 도착적인 인간들로 규정했다. 저자는 이 같은 실증주의적 정신의학 담론들이야말로 강박적이고 나아가 도착적이라고 일갈한다. 아이들의 자위를 막기 위해 발기 방지 상자나 음경의 외과시술 등 기괴하기까지 한 각종 치료법이 유행했던 당시 모습이 또다른 도착이 아니냐는 것. 개개인의 욕망에 대한 사회와 권력, 그리고 과학의 억압도 도착이라는 주장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 같은 억압과 차단의 가장 극단적이고 도착적인 결말이 20세기의 아우슈비츠다. 그곳은 “한 국가가 어떻게 계몽주의의 이상과 정반대 방향으로 작업한 끝에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지, 어떻게 과학을 도구로 삼아 인간성 자체를 말살하는지”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아우슈비츠의 살인마들이 “끔찍할 정도의 정상상태”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들의 정상상태가 “도착증 전체를 포괄하는 도착적인 체계에 대한 집착의 증후”라고 지적한다. 때문에 그들은 대량학살을 자행하고도 합리화하거나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던 루돌프 헤스는 심지어 “희생자들 스스로가 자기 파괴를 갈망했다”고까지 이야기하는 도착증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21세기 우리 사회의 도착증은 어떨까. 소아성애자와 테러리스트가 도착증의 가장 극악한 형태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소아성애자에게 약물을 처방하려는 시도에서도 ‘도착적인 무언가’를 읽어낸다. 잠재적 범죄의 위험도가 높은 아기들을 식별하려는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근절시키겠다는 과학만능주의의 귀환이자 생체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다. 저자는 “유기적인 삶을 차분히 관리하기 위해 악·갈등·운명·무절제를 제거하는 것, 도착증을 해결하겠다는 계획이야말로 새로운 형태의 도착증이 아닐까”라고 묻는다.

결국 책이 ‘도착의 역사’를 통해 사유하고자 하는 것은 점차 도착적인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이 시대다. 저자는 “오늘날 산업기술사회는 때로 신체를 외설적으로 물신숭배함으로써, 때로는 도착증 개념을 폐지하는 청교도적인 의학담론을 통해서” 점점 도착적으로 변해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특히 “현대의 새로운 안식처”인 양 인기를 모으고 있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문제삼으면서 “투명함과 감시를 예찬하고 자신의 저주받은 부분을 소멸시키는 일에 혈안이 된 사회야말로 도착적인 사회”라고 꼬집는다. 논쟁적인 주장들을 담은 이 책은 우리 내면의 도착적 욕망을 새롭게 호명하면서 우리가 맞서야 할 더 큰 문제는 개인적인 도착자가 아니라 도착적인 체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의 맺음말이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더 이상 도착증의 이름을 붙이지 못하게 된다고 가정하면 숨어 있는 그것의 변형과 마주치는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어둠을.”(김진우기자)

08. 09. 27.

P.S. 북페이지의 저자 인터뷰도 참고할 만하다. 유튜브에는 인터뷰 동영상들도 올라와 있다(http://kr.youtube.com/watch?v=9D7DqI1U49w 참조). 말은 통하지 않지만 몇몇 자료 화면들을 참고가 될 수 있겠다.

이번 책의 목적은 선과 악에 대한 탐색이더군요. 그 질문 속에서 도착증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겁니까?
도착증의 특징은 그것이 악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즐긴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부 범죄자들은 도착적이지 않습니다. 악을 즐기지 않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딱히 범죄자가 아니면서도 악을 즐기는 도착자들이 있습니다. 그 형상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습니다.

질 드 레의 사례에 대해서 오랫동안 언급하시더군요.
질 드 레는 그 역전 가능성의 증거입니다. 대단히 복잡한 인물이죠. 그는 진정한 반항인이었던 잔 다르크에게 매료되어 선을 향해 이끌립니다. 그러나 잔 다르크가 국가의 이상을 구현했음에도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면서 그 영웅주의의 세계가 무너지자 질 드 레는 그때부터 악에 빠져듭니다. 그는 약 300명의 아이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살인마로 여겨지고 있죠. 그의 재판을 계기로 사람들은 처음으로 악의 근원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됩니다. 악의 세력을 추궁받은 질 드 레는 자신이 받았던 교육이 원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인류의 역사 위를 맴돌던 질문이 비로소 제기됩니다. 악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 질문은 요즘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악은 인간의 타고난 속성일까요?
우리가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속성이죠. 동물의 세계에는 악과 도착증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의 파괴충동을 선에 대한 이상으로 탈바꿈시켜서 최악의 짓거리들을 저지를 수 있죠. 동물은 결코 나치주의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잔인한 동물이라 해도 악을 즐기지는 않으니까요. 악을 즐기려면 악에 대한 의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동물계에 속해 있다고는 해도 동물은 아니죠. 난 우리를 동물과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도착증의 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사드는 별도의 경우죠.
사드는 좀 특별합니다. 하지만 그가 만일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범죄에 빠져들었으리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죠. 사드는 성도착증의 목록을 최초로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도착증에 대한 질문을 이론으로 정립시킨 사람입니다. 그는 법칙을 완전히 전복시킵니다. 계몽시대 인간이었던 그에게 있어서 선이란 지옥에 내동댕이쳐져야 마땅한 것이죠. 사드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 가지 정치체제 속에서 살았습니다. 구체제, 혁명기 그리고 제정시대 말입니다. 그는 늘 자신이 살던 시대와 괴리되어 있었습니다. 구체제에서 그는 매춘부들에게 저지른 가혹한 행위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성모독과 계간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죠. 그 두 가지 범죄는 혁명을 통해 폐지됩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신에게 맞서다가 로베스피에르가 다시 신권을 확립시키면서 제정시대 체제에서는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되죠. 하지만 사드가 미쳤던가요? 처음으로 사람들은 미치광이와 반미치광이를 구분하게 되죠. 사드와 함께 유럽 의학은 도착증을 점령하게 됩니다. 도착적 행동은 그때부터 악마의 화신으로서 악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정신건강에 속하게 되죠.

중세에 신비주의자들은 악의 세력을 내세워 신에게 도전했습니다. 18세기에 자유사상가들은 기존의 도덕을 무시했고요.
신비주의자들은 완전히 도착적인 희생의식(채찍질, 오물 삼키기)을 치르며 전대미문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신에게 자신들의 육체를 바쳤습니다. 반대로 자유사상가들은 쾌락의 도덕으로 질서에 맞섰습니다. 그들은 모든 형태의 자유를 요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의 자유를 포함해서 말이죠. 고대부터 도착증은 먼저 성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절대적인 도착증으로 평가되는 계간은 모든 세기를 관통하는 것이었고요. ('저자와의 인터뷰', <리베라시옹> 2007.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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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9-27 11:00   좋아요 0 | URL
저로서는 상당히 반가운(?) 주제로군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보사르(Bossard) 신부가 "정확히 잔 다르크의 반대"라고 평가했던 질 드 레(Gilles de Rais)의 재판에 관해서는 바타이유도 장문의 서론을 붙여 두툼한 책 한 권 분량의 분석을 남기고 있죠. 루디네스코가 저 책에서 바토리(Bathory) 또한 언급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리뷰를 읽으니까 사드에 대해서라면 저 정도의 평가와 분석은 사실 예전에도 이미 많이 나와 있던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루디네스코의 '새로운' 시각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리베라시옹> 사이트에서 인터뷰를 검색해보니 '계간'으로 번역된 원어는 'sodomie'였군요... 보통 요즘은 '남색(男色)'이라고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계간(鷄姦)'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신 <리베라시옹> 인터뷰 번역자의 언어관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또한 기사를 보니까 마지막 두 문장("고대부터 도착증은 먼저 성적인 영역에... 모든 세기를 관통하는 것이었고요.")은 루디네스코의 말이 아니라 인터뷰어의 언급이더군요(그리고 인터뷰 전체를 번역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궁금한 점: 사드의 초상 위에 있는 그림은 '푸른 수염'인가요...?

로쟈 2008-09-27 12:50   좋아요 0 | URL
네, '푸른 수염'입니다. 원기사에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 번역에 대한 지적이 재미있네요. 저는 '계간'이 무슨 뜻인가 했습니다.^^

람혼 2008-09-27 16:35   좋아요 0 | URL
그림은 처음 보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푸른 수염'일 것 같아 여쭤보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저 그림이 매우 '정겹게' 느껴지네요... 갑자기 머릿속으로 '계간지(鷄姦紙...?)'라는 단어를 만들어보고는 저 혼자 또 '살짝 맛간 사람'처럼 즐겁게 웃었더랬습니다.^^

로쟈 2008-09-27 23:26   좋아요 0 | URL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6:08   좋아요 0 | URL
계간,남색...다들 고색창연한 단어들이네요.요즘은 남색이란 단어도 잘 안 쓰던데...동성연애라는 단어보다 운치가 있죠?

람혼 2008-09-27 16:3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동성애"는 "homosexuality"의 번역어로 굳어진 경향이 있기도 하거니와, 또한 그보다 더 세밀히 보자면, 단어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 단어가 지닌 '역사'와 '유래'를 고려했을 때, "sodomy"는 단순히 "동성애"라는 지극히 '현대적'이고 '중립적'인 단어로 옮기는 것보다는 '남색', '비역' 등의 단어로 옮기는 것이 보다 번역의 '층위'에 더 합당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그래도 "계간"은 참 '色다른' 번역어라는 생각은 듭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7 22:23   좋아요 0 | URL
맞아요.비역살이란 단어에서 나온 비역질도 있죠.엉덩이 살을 비역살이라고 하죠.
 

자칭 'C급 경제학자' 우석훈의 '한국경제대안시리즈'가 네번째 책 <괴물의 탄생>(개마고원, 2008)이 출간됨으로써 완결되었다(이번에 두번째 책의 개정판 <조직의 재발견>도 같이 출간됐다). 첫권인 <88만원 세대>(레디앙, 2007)가 출간된 것이 작년 여름이니까 이 시리즈는 완간까지 1년 반도 걸리지 않았다. 저자의 필력도 필력이지만 그만큼 한국경제의 상황이, 그리고 그것이 놓여 있는 세계경제 정세가 다급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증례이기도 할 것이다. '대안'이란 건 언제나 시의성(타이밍)과 관련하여서만 의의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최근에 읽은 월러스틴은 앞으로 20-50년 사이에 세계체제의 변환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지만 우석훈이 보는 한국경제의 상황은 보다 긴박하다. 앞으로 5년 이내에 결정된다니까(때문에 숙성된 'A급 경제학'를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다!). 곧 5년 내에 "현재의 '주류 극우파 국가'에서 정상적인 국가가 되거나, 아니면 중남미식 저성장 비효율 국가로 전환되거나 하는 그 두 가지 길 사이에서 중대한 분기점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위대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 선택을 위한 참고자료로 우석훈 경제학을 '명랑하게' 필독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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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08년 09월 25일에 저장
품절

조직의 재발견- 한국 자본주의와 기업이 빠진 조직의 덫, 개정판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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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조직론으로 본 한국 자본주의의 본질적 위기와 그 해법
우석훈.박권일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8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08년 09월 25일에 저장
구판절판
촌놈들의 제국주의-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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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8-09-26 21:37   좋아요 0 | URL
우석훈선생 얼마전에 만났었어요.
사실은 성사되지 못한 우리 모임(?)에 나오시라고 청도 했었는데...
확답은 못 받았지만요. :P
암튼 로쟈님이야말로 내공이 대단한 분이라고, 이분도 인정하시던걸요.
대단한 로쟈님! ^^

로쟈 2008-09-27 12:5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C급'은 되지요.^^;
 

커피 브레이크에 아침에 읽은 칼럼을 옮겨놓는다(스크랩은 한번 더 읽는 효과가 있다). 최근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김우창칼럼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에서부터 터진 이번 위기 국면이 과연 미국식 자본주의의 붕괴, 더 나아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종말을 가져올 것인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개연성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개인적으로 금융쪽에 대해서 아는 바도, 관심도 별로 없는지라(하긴 예금잔액이 별로 없기도 하다. 나는 '모기지'란 말의 뜻도 이번에 알았다, 아니 찾아봤다) 사태의 추이에 대해서는 기사나 칼럼에 의지하여 판단할 따름이다. 오늘 읽은 칼럼은 그래도 내가 다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었다.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 이유이다.  

  

경향신문(08. 09. 25) 금융위기 - 제도와 인간 가치

세계 굴지의 금융기관들이 줄지어 도산한다는 뉴스가 신문에 연일 보도되고 있다. 미국에서 시작한 도산과 파산의 폭풍이 영국과 기타 유럽 여러 나라의 경제를 흔들고 아시아에 밀려오고 있다. 무언가 대사변이 일어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물론 경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 그 원인이나 연계관계 그리고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이 일이 범상스러운 일이 아님을 몸으로 느낄 수는 있다.

소위 서브프라임 주택 융자 위기가 이야기되더니, 금융관계회사라는 프레디맥과 패니메이, 리먼브라더스에 이어 AIG 보험회사 등이 파산하거나 도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는 보도가 연이어 세상을 어지럽게 했다. 다만 지금 말한 회사 중에 셋은 미국정부의 긴급조처로 파산을 면하게 되었고, 이어 미국정부는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 위기로부터 금융회사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의회에 7000억달러의 긴급예산 배정을 요구하였다. 이 액수는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투입한 경비에 비교된다고 하니까, 그 규모의 크기가 얼마나 막대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처로 일단은 사태가 수습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의 위기는 몇 개의 큰 사고가 아니라 오늘의 국제 금융시장 체제 전체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내는 일이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종말의 시작을 가리킨다는 관점도 대두하고 있다.

- 공익을 망각한 美금융기관들 -

시장원리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지켜왔던, 미국의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는 금융회사 도산을 방지하기 위한 미국정부의 조치를 하나의 거대한 위선에 해당한다고 비판하였다. 지금까지 금융회사들이 위험도를 적당히 호도했던 것은 사기이며, 정부가 그것에 대하여 눈감아 왔던 것은 무능 무책임한 일이었다. 그 결과가 이번의 사건인데, 평소에 금융시장 규제를 반대해온 회사들이 이제 와서 정부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위선적인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스티글리츠 교수는, 그러니까, 오늘의 사태에 대한 책임은 해당 기업체가 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오늘의 경제 체제 전체가 그러한 기업들의 파산으로 붕괴할 것으로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선이라는 말의 진의(眞意)는, 적절한 규제 없이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시장인데, 그것을 감추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상품의 안전성 보장을 적극화하는 몇 가지 안을 내놓았다. 거기에는 “붕괴를 허용하기에는 너무 비대한 회사”가 출현하는 것을 방지하고 그것을 분할하는 것과 같은, 공정 경쟁 확보를 위한 법을 강화하는 안도 있고, 금융회사의 보수 규정을 엄격화하는 일도 포함된다. 후자는 기업 간부들의 보수가 단기적 수익률에 연결되어 그것이 부정직하고 위선적인 기업 운영의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스티글리츠 교수가 오늘의 금융시장을 대체할 전적으로 새로운 방안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가 비판하듯이, 금융업의 경영형태가 사기와 위선을 포함한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면, 금융업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과 윤리의 문제이고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근본과제는 기업으로 하여금 윤리적 기준을 준수하게 하는 것이다. 거꾸로 보면, 그것은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요구를 경제 질서로 풀어내는 일이다. 물론 스티글리츠의 관점에도 윤리적 도덕적 고려가 들어 있다. 결국 그의 비판이 기초하고 있는 것도 정직성, 공정성, 공익성 등의 기준이다. 그리고 기업에도 그러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윤리 도덕의 경제제도화를 보장할 수 있는 간단한 해결책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처음 주목을 많이 받았던 것은 주택 금융회사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 회사이다. 패니메이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으로 저금리 주택자금을 일반 서민에게 대여하여 서민의 주택 소유를 용이하게 하고, 그로 인하여 자극된 주택 건설로써 30년대 공황기의 고용 확대를 기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회사의 소유주는 주주들이면서도, 정부로부터 여러 혜택을 받았다. 프레디맥은 앞의 회사와 비슷한 목적을 가졌으면서, 그 독점 방지를 위하여 60년대에 추가로 설립된 회사이다. 그러니까 두 회사는 사익보다는 공익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에 이 회사들은 본래의 목적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로 변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부 정책의 변화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회사들이 공익 회사로서 감독기관의 감독을 벗어나기가 쉬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금융재난 원인의 하나인 소위 ‘서브프라임 모기지’-상환 능력이 불확실한 서민에게 주는 주택 담보 융자-도 정부의 보호 아래 회사가 쉽게 들여 올 수 있었던 외국 자본과의 연결로 인하여 확대된 것이다.)

AIG가 위의 회사들과 같은 성격의 회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AIG의 명분상의 주업은 보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험은 원래 사회적 성격이 강한 사업이다. 그것은, 노동의 부담을 공동체가 나누어 지는 두레나 품앗이처럼, 사람이 겪게 되는 여러 위험을 협동적으로 분담하는 일을 기업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때 그것은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본주의의 위험을 줄이는, 사회복지 기업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당초의 기능은 근래에 와서 많이 약화되고, 사실 AIG 같은 경우, 보험이 그 주업인지도 확실치 않다. 이러한 변화는 금융자본의 비대화, 공권력의 태만과 변질, 그리고 기업 활동을 공동체적 기반으로부터 분리해 낸 세계화와 더불어 가속화되었다.

- ‘인간성 실현’ 없는 제도는 몰락 -

이미 비친 바와 같이, 이번의 미국발(發) 세계 금융위기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자본주의를 대체하려고 하였던 것이 공산주의 실험이었는데 그것이 결딴난 지금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대안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대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거에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의 커다란 기획을 세운다면, 인간적 삶의 신장(伸張)을 위한 쉼 없는 조정과 균형의 노력이 필요 없어진다고 착각하는 제도가 실패하는 제도이다. 물론 사회에는 인간성 실현의 이상에 대한 기본적 합의가 존재하여야 한다. 인간의 존엄을 잊지 않는 한, 이 이상은 간단하다면 간단한 것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물음에 열려 있는 것이라야 한다.

물어야 할 물음의 하나는 무한한 경제발전 또는 부의 축적이 인간됨의 모든 것이라는 강박적 느낌을 향한 것이다. 이것은 사회 전체에도, 개인의 삶에 대하여서도 물어야 한다. 파산한 리먼브라더스 CEO의 작년 보수는 4500만달러였다. 미국의 최고 경영자와 일반근로자의 봉급 차이는 30년 전에 30배, 작년에는 344배였다. 작년에 하버드대학 4학년생의 47%가, 금년에는 37%가 금융업계로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돈의 폭풍이 오늘의 세계를 휘몰아간다. 규모는 다를망정, 그 폭풍의 위력이 우리 사회에서 덜 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폭풍이 어찌 마음에만 불고 제도를 휩쓰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무엇이 인간의 인간됨을 드높이는가를 묻는 마음은 제도에 균형을 주는 중요한 기제이다.(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08. 09. 25.

P.S. 가장 단순하게는 "미국의 최고 경영자와 일반근로자의 봉급 차이는 30년 전에 30배, 작년에는 344배였다"는 사실 자체의 문제성을 인지하는 것이 요점이다. 그것을 '승자 독식사회'의 자연스러운 룰로 용인할 때(사회적 빈곤을 개인적인 나태의 자연스런 귀결로 치부할 때), 그리하여 '20:80사회'를 넘어서 '1:99사회' 곧 '상위1%를 위한 사회'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사회는 파국으로부터 멀지 않다. '1%의 대한민국'으로 질주하는/내몰리는 정부의 행태와 사회적 분위기가 염려를 넘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현상황에서 자연스레 예견되는 '총체적 몰락'으로부터 과연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

P.S.2. 미국 금융위기('월가의 침몰')에 대한 이번주 시사IN의 특집기사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0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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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9-25 15:43   좋아요 0 | URL
사실 현재 미국정부의 조치가 '위선적'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오히려 이렇듯 '위선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위선적'이겠지만요). 예를 들자면 1930년대의 대공황 시기를 떠올려볼 때(당시의 뉴딜 정책과 현재 미국정부의 금융지원을 비교해보는 것, 그 안에서 거대 금융자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금융자본에게는 일종의 '전략적'인 역사-반복 체계가 존재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질 정도입니다. 위기를 창출하고 그를 통해 다시 이득을 얻는 기괴한 시스템으로서는 오히려 대성공인 것이죠. 어제(9월 24일) 중앙일보의 칼럼 면을 보니 김종수 논설위원이라는 분이 '미국식 자본주의는 결코 [이 정도 쇼크로는] 붕괴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다소 '자기암시적'이라 할 칼럼을 하나 쓰셨던데요('미국은 금융위기를 극복할 것이다'라거나 '비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진다'고 하는 등 거의 열렬하고 간절하게 응원하는 논조였지요...), 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그 요지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그 쇼크는 사실 수동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창출'된 면도 있기 때문이죠. 그 논설위원의 말이 맞을 겁니다, 아마도 '이 정도 쇼크로는' 결코(?) 미국식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겠죠...(사실 저로서는 이 점이 가장 '안타깝고 분한' 부분이긴 하지만요). 논설위원이라는 분이 금융자본의 논리를 너무 '순진무구하게'만 바라보고 있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로쟈님이 추신에서 "가장 단순하게는"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저 임금 차이의 기하급수적인 증가야말로 금융자본의 기형적 자기증식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가장 큰 '수혜'를 누가 입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하나의 증거라고 해야겠지요.

로쟈 2008-09-25 22:51   좋아요 0 | URL
현재까지는 '위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니까 붕괴 여부에 대해서도 확언할 수는 없을 듯싶습니다. 다만 적어도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종말을 고했다는 것 정도는 합의가 되는 듯싶어요.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규제해야지만 제대로 돌아가는 자본주의라면 그 자본주의는 여전히 '자본주의'인지도 생각해볼 문제이겠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6:12   좋아요 0 | URL
김종수 그 양반 전형적인 중앙일보 사나이죠.중앙일보 냄새가 팍팍 풍기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