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 시리즈를 챙겨서 본다. 오늘이 여덟번 째인 걸로 보아 매번 챙겨 읽은 건 아니지만 읽을 거리는 많다. 다 옮겨오진 못하고, 현 미국발 금융위기를 마르크스와 하이에크, 두 경제학자의 시각에서 비교 분석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여전히 이번 위기의 본질이 정부의 지나친 개입에 있다는 '신자유주의론자'의 시각이 놀랍긴 하지만, 참조는 할 수 있겠다...   

경향신문(0. 01. 12)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금융위기를 보는 두개의 시각  

 

노동·자본간 불평등 심화…금융 독재는 역사적 침몰

금융위기 속 ‘마르크스의 반격’
“역사는 종말을 고했다. ‘우파의 이념적 승리’는 완료됐고, 모두가 만족한 가운데 자본주의는 사회구조의 결정적 형식으로 굳어졌다.” 우리를 거의 설득시킨 이 담론은 2008년의 금융 대지진으로 무너졌다. 런던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2008년 10월13일은 영국 자본주의 시스템이 실패한 날로 기록될 것”이라 평가했다. 뉴욕 월가의 시위대는 “마르크스가 옳았다!”라는 팻말을 치켜들었다.

<자본론> 등 한 세기 반 이전 마르크스의 저작 모두를 현 상황에 직접 대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과 다를 바 없는 사회상을 제시한다. “금융 귀족이 법을 명하고 국정을 지도하며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어 여론을 지배한다. 이들이 전 영역에서 생산에 의하지 않고 타인의 부를 강탈하면서, 매춘, 사기 등을 재생산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는 1848년 혁명 직전 프랑스의 묘사다.

금융위기 원인으로는 복잡한 금융 상품의 휘발성, 자체 규제 불능의 자본시장, 금융계의 도덕적 해이 등이 거론된다. ‘실물경제’에 대한 ‘가상경제’의 시스템 붕괴가 원인이란다. 하지만 ‘가상’의 비극은 ‘실물’에 뿌리를 둔다. 서브프라임 사태는 은행 융자를 안고 집을 산 수백만 미국 가계의 부채상환 불능 상태에서 야기됐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축적의 일반 원칙’을 보자. 그는 자본가 계급이 생산의 사회적 조건을 사유할 경우 “생산 발전의 모든 수단이 지배 수단, 생산자 착취 수단으로 전복된다”고 설명한다. 생산자들이 희생되는 동안 축적된 자본은 자체 동력을 얻어 광적으로 비약한다. ‘한 극점에서의 부의 축적’은 정반대 극점에서 ‘비례적 빈곤 누적’을 초래, 격렬한 상업·금융위기를 낳는다.

신용위기의 파괴력은 생산위기로 전화됐다. 이는 노동·자본 간 분배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최근까지만 해도 시장 자유주의의 적실성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던 자유주의자들이 자본의 ‘도덕화’, 금융 ‘규제’ 등 위기 해결책을 들고 나선다. 자본의 도덕화란 블랙코미디다. 자유경쟁 체제가 망친 사회 미덕은 바로 ‘도덕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진정 도덕적 경제생활을 원한다면, 악덕 기업주의 잘못 따위 지엽이 아닌 근본을 바로잡아야 한다. 모든 개인적 행위들 너머 자본주의 원칙, 그게 문제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부를 창출하는 수단, 상품으로 전락시킨다. 물론 국가의 규제 기능으로 사회의 비도덕을 개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자 감세, 우정 민영화를 벌이는 사르코지 등 우파 정권에 규제자 역할을 기대하는 일은 순진하거나 위선적인 짓이다. 



사회적 관계가 근본적으로 재고돼야 한다. 마르크스는 <1844년 수고>에서 ‘소외된 노동’의 개념을 고안했다. 임금 노동자가 자신의 물질적, 도덕적 결핍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을 위해 부를 창출하는 저주스러운 상황을 뜻한다. 산업재해, 정리해고, 저임금 등 오늘날 임금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이 이 개념을 뒷받침한다. 자본은 생산자들을 끊임없이 생산 수단에서 괴리시키고, 무한경쟁 상태로 내몬다. 기술적, 경제적, 정치적, 이념적 과정으로 생산자를 포섭, 종속시킨다.

금융위기는 인간소외의 단면을 보여준다. 아무도 위기를 원치 않았지만 모두 위기에 노출된다. 자본주의는 ‘일반화된 규제 철폐’를 극단적으로 몰아붙여 규제 부재의 황무지를 만든다. 스스로 규제할 능력이 결여된 체제는 구성원에게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 우리는 즉시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대안은 동유럽에서 실패한 공산주의 ‘실험’ 탓에 왜곡당한다. 스탈린-브레즈네프식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로 오인되는 동안 사람들은 진정한 ‘공산주의’의 의미를 도외시한다. “다른 사회란 파멸적 유토피아일 뿐이다. 우리는 인간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라는 냉소가 퍼진다.

자유주의 사상에서 ‘인간’은 사회로부터 유래되지 않은 자생체이고, 오직 자신의 이익에 충만한 동물(호모 에코노미쿠스)이다. 따라서 인간 사회는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지배하는 사유 재산의 사회만 가능하다고 한다. ‘경쟁적 인간’ 이데올로기는 ‘살인자가 되자’는 비인간적 교육을 권장한다. 일확천금의 광풍 속에 전방위적 탈문명화를 진행한다. 하지만 결국 금융독재의 역사적 침몰 맨 밑바닥에 자유주의적 인간 담론이 깔려버렸다.

마르크스는 자유주의 담론에 대항할 혁명의 초안을 제시한다. 그는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자신의 여섯 번째 테제에 “인간의 본성은 개별적으로 분리된 개인의 고유한 어떤 추상물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전체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라고 썼다. 자유주의 담론과 반대로 ‘인간’은 ‘인간의 세상’에서 유래한다. 인간과 사회는 서로 상대방을 발달시킨다. 그렇다. 우리는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으며, 이는 사회를 바람직하게 바꾸는 조건하에서 가능한 것이다.(루시앙 세브 프랑스 공산당 중앙위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췌(www.ilemonde.com)) 

 

 ▲마르크스

자본주의는 내재적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하려 노력하지만, 극복 수단들이 결국 더 큰 한계를 새로 만들어낼 뿐이다. (자본론 3권)

금융거래 활동이 스스로 가치를 생산해낸다는 생각은 ‘가장 바보 같은 망상’일 뿐이다. (자본론 3권) 



시장실패 아닌 정책 잘못…위기본질 지나친 개입 탓 

신자유주의는 실패했나?
최근 비우량 담보 시장에서 촉발된 미국발 금융위기로 경제가 혼란에 빠지자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시장 개입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금융위기의 원인이 규제 완화와 작은 정부 때문이라고,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선언하면서 큰 정부의 도래를 환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같은 진단과 해법은 금융위기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접근에서 나온 것이다.

그 본질에 접근하는 중요한 단서는 상환능력이 없는 저소득층에 대한 주택 담보 대출이다. 이 담보 대출의 부실화에서 부동산 시장의 거품 붕괴가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저소득층에 대한 주택 담보 대출을 늘려 부동산 시장의 거품을 야기한 원인이다.

그 원인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1995년 지역재투자법(CRA)을 대폭 개정해 은행들로 하여금 저소득층에 대한 담보 대출을 늘리도록 했다. “누구나 내 집 갖기”라는 주택 보급 정책을 위해서였다. 의회와 정부는 연방주택청(FHA)이나 주택도시개발부(HUD) 등 정부기관을 동원해 은행들에는 대출심사 기준을 대폭 낮추도록, 패니메이(Fannie Mae)와 프레디맥(Freddie Mac)에는 비우량 주택 담보와 이에 근거한 유동화 증권을 구매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자 은행들은 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위험한 담보 대출을 늘리고 이를 유동화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주택가격의 버블을 야기한 두 번째 요인은 서민들의 주택보유를 확장하기 위해 정부가 지원하는 모기지 전문회사의 도덕적 해이다. 정부와 의회는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손실에 대한 보증을 약속했다. 그래서 그들은 손실은 생각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비우량 담보 구입과 이에 기반을 둔 유동화 증권의 규모를 늘려갔다. 그 결과는 서민층 주택구입의 활성화와 주택가격의 버블이다.

금융위기의 세 번째 원인은 연방준비은행의 방만한 통화정책이다. 심지어 1%라는 초저금리정책을 통해서 유동성을 확대시켰다. 은행들은 늘어난 유동성을 소화하기 위해 저마다 대출처를 찾아 나섰다. 이것이 주택시장의 과열로 연결되었다.  



이 세 가지 요인은 자유와 책임, 작은 정부를 국정원리로 하는 신자유주의를 저버린 정책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의 금융위기는 시장실패가 아니라 정부정책의 잘못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시장규제와 손실의 보증이 없었더라면, 유동성을 과잉 공급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위기가 월가의 탐욕 때문에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은 옳지 않다. 탐욕은 자기 이익추구로서 특수한 사람이나 상황에서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늘 어디에서나 목격되는 인간의 불변적인 심성이다. 따라서 이것을 가지고는 평시와는 전적으로 상이한 금융충격의 발생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탐욕을 위기로까지 몰고 간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시장에 거침없이 풀린 돈과 정부의 시장 개입이 그 이유다.

금융위기가 규제 완화의 탓이라는 주장도 터무니없다. 80년대 말 이래 지속적으로 규제가 증가해왔는데 규제가 가장 많이 늘어난 부문은 주택 부문이고 그 다음이 금융 부문이다. 99년 ‘그램-리치-브릴리 법’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겸업이 허용됐다. 이런 규제 완화가 금융위기의 원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겸업이 금지됐더라면 이번 금융위기로 상업은행들이 신용위기에 몰려 있던 투자은행을 흡수 합병하지 못해 위기의 여파가 더욱 극심했을 것이다.

감독부실이 위기의 원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지식 문제 때문에 정부의 시장에 대한 감독이 어렵다. 감독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언제, 그리고 왜 감독해야 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필요한데 정부는 그런 지식을 전부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정부의 감독은 늘 부실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감독에 필요한 지식과 관련해 시장이 정부보다 현명하다. 시장은 그 같은 지식을 발견하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시장이 교란되면 ‘발견의 절차’가 작동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시장을 교란시킨 요인이다. 그것은 방만한 통화 공급과 정부의 시장 개입이다.

금융위기의 원인이 정부의 개입임에도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문제의 해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 때문이다. 시장 개입은 경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고 지금의 고통을 미뤄 나중에 더 큰 고통을 겪을 위험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고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손놓고 뒷짐지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확립하는 일이다. 개인의 책임과 경제활동을 방해하는 제도와 규제들을 걷어 내고,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하고 세금을 낮춰야 한다. 그러면 우리 경제는 지금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안정적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정도(正道)다.(민경국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하이에크

국가의 경제 개입은 모든 개인을 노예로 만든다. <노예의 길>(1944)

정부의 시장 개입은 문제이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자유의 헌법>(1961)

세상을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은 치명적 자만이다. <치명적 자만:사회주의의 오류>(1988) 

09. 01. 12.  

P.S. '마르크스냐 하이에크냐'라는 이분법적 문제설정에 대한 비판은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50840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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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1-12 23:50   좋아요 0 | URL
오...민경국 씨가 경향신문에 글을 쓰다니...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요.요즘 민 씨와 같은 주장을 하는 해외인사들의 글이 세계일보에 자주 실리고 있지요.하지만 한국판 뉴딜이라면서 전형적인 정부개입형 경기부양책을 쓰고 있는 현정부의 경제정책엔 뉴라이트 경제학자들이 별다른 말을 안하던데요.

로쟈 2009-01-13 01:25   좋아요 0 | URL
특이하게도 강원대에 (신)자유주의 학풍이 있습니다. 신중섭 교수 같은 양반도 있고...

비로그인 2009-01-13 00:15   좋아요 0 | URL
"위기의 본질이 정부의 지나친 개입에 있다는 '신자유주의론자'의 시각"은 정말 놀랍군요. 아무리 보아도 반론을 위한 반론 제기, 그 이상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정치경제에 대한 제 상식이 얕은 수준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만 보더라도 금융과 기업에 대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인 방임 정책을 자성하고 비판하는 소리가 높지요. 미국 정치의 본질이 금권 정치임을 잊지 않는다면, 그리고 현재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 그릇된 정책이라면, 이 그릇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힘을 행사한 것이 금권이고, 이 금권이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안다면, 이 금권의 출처가 되는 거대 기업이 정부를 비판한다는 것은 제 꼬리를 무는 격이 아닐까요? 의식 있는 미국 국민의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난은 대기업, 특히 초국적 거대 기업에 대한 비난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국의 실정에 대한 직접적인 포섭 기제로 적용하여 설명할 수는 없겠지요. 정부의 규제가 너무 강력해서 불행을 초래했다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이 규제의 제정과 적용이 편파적이었고, 이 편파적인 규제의 밝은 편에 선 무리가 힘 있는 쪽이고 어두운 편에 선 무리가 금융권을 비롯한 피해자들이라면 말입니다.

그냥 제 관찰과 소견일 뿐입니다. 극구 주장할 것을 못되지요. 다만 신자유주의 자체에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가야 할 길인듯 하는 경향신문의 뒤의 사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기가 힘이 듭니다. 로쟈님 말씀대로 참고나 할까요...

로쟈 2009-01-13 01:27   좋아요 0 | URL
경제학계에서도 소수의견이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아랫글은 '사설'은 아닙니다. 경향에서는 두 가지 상반되는 시각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예요...

비로그인 2009-01-13 04:47   좋아요 0 | URL
네, 그렇군요.

PhEAV 2009-01-13 00:2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시장의 정부개입에 대해 쓴소리를 해야 할 때인 것입니~! (변사풍으로)

로쟈 2009-01-13 01:2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시장의 정부개입은 왜들 자연스럽게 여기는 걸까요...
 

고교 독서평설 1월호에 실은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계획상으론 올 한 해 세계문학 작가들을 갑론을박의 쟁점으로 다루게 되는데, 제일 첫머리에 올린 작가는 역시나 셰익스피어다(두 번째부터는 좀 고민이지만). 그건 셰익스피어에 대한 찬양 못지 않게 비판도 더러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건상 두루 다루지는 못하고 셰익스피어의 만년작 <폭풍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봐야 '문제제기' 정도에 불과하지만...  

고교 독서평설(09년 1월호) 셰익스피어는 제국주의자인가?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흔히 세계적인 문호의 대명사로 꼽힌다.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의 4대 비극을 비롯해, 그가 남긴 대부분의 작품이 세계 전역에서 읽히고 무대에 오른다. 또 많은 작품이 영화화되어 스크린에서 상영된다. 이렇게 보면, 셰익스피어만큼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대중화된 작가도 드물다. 아예 ‘셰익스피어 산업’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다. 이러한 현상은 얼핏 그의 문학이 갖는 보편적 호소력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누구나 그의 문학을 공감하며 즐길 수 있고 더불어 그의 작품에서 삶에 대한 보편적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보편성, 장벽에 부딪히다
‘진실로 위대한 작가 셰익스피어!’ 이것이 셰익스피어에 대한 우리의 통념이다. 그러한 통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주 인용되는 말이 있다. “나는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는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의 말이다. 대단한 자부심의 표현이다. 하지만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인도인들도 공감할 수 있을까? 인도의 대학 영문학과에서도 셰익스피어를 읽고 공부하며 ‘과연 셰익스피어!’라고 맞장구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셰익스피어 문학의 보편성에 대해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셰익스피어의 문학 역시 한 천재의 소산(所産, 어떤 행위나 상황 등에 따른 결과로 나타난 것)인 동시에,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산물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방대한 식민지를 경영한 17세기 대영 제국의 한 극작가의 작품이 시대와 국적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문학적 감동을 선사한다는 것은 어딘지 미심쩍다.  

그리고 사실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호평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의 유려하고 시적인 언어에 대해 ‘가식적’이란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은 모두 가식으로 가득한 부자연스러운 언어로 말한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주장이다. 그럼에도 이렇듯 과장되고 가식적인 언어가 환영을 받는다면, 그건 셰익스피어의 생존 당시나 현재에나 상류층의 비종교적이고 부도덕한 심리 상태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톨스토이는 꼬집는다. 요컨대, 셰익스피어의 문학이 톨스토이를 설득하지는 못한 것이다. 하물며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의 독자라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미국의 한 여성 인류학자가 인간의 본성은 다 마찬가지이므로 자신이 방문했던 서아프리카의 티브족 사람들도 <햄릿>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녀가 <햄릿>의 첫 장면을 원주민들에게 설명할 때부터 ‘셰익스피어의 보편성’은 장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성(城)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세 사내 앞에 얼마 전에 죽은 부왕(父王)이 나타났다고 말하자, 티브족 사람들은 죽은 자가 다시 걸어 다니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이들은 특이하게도 유령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시체도 아니고 좀비도 아닌, 죽은 부왕의 유령에 대해서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또 부왕과 그를 죽인 동생 클로디어스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는지를 물어서 인류학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보기엔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하지만, 정작 <햄릿>에서는 아무런 설명도 주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견해 차이가 더욱 극명해지는 것은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의 처신을 문제 삼을 때였다. 보통 서양의 독자들은 남편을 여읜 거트루드가 적절한 애도 기간이 끝나기 전에 너무 빨리 재혼했다고 생각한다. 극 중의 햄릿도 같은 생각이어서 “오 하느님, 이성적 사고가 결여된 짐승도 그보다는 더 오래 애도했을 텐데!”라고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티브족 사람들은 거트루드가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렸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랐다. “남편이 없다면 누가 당신 밭의 김을 매 주나요?”라는 것이 티브족 아낙의 물음이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 <햄릿>이라지만, 이 작품에 대한 티브족 사람들의 반응은 그러한 ‘명성’이 반드시 보편적 공감을 보증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셰익스피어 작품 뒤집어 읽기 - <폭풍우>
그런데 셰익스피어 읽기는 문화적 차이가 빚어내는 이러한 견해차를 확인하는 정도에만 그치지 않는다. 정반대의 평가도 제시되기 때문이다. 통념적인 셰익스피어 읽기와 이해에 맞서 ‘셰익스피어는 제국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박홍규 교수는,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의 문학이 팽창주의의 길로 접어든 대영 제국 시기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곧 그의 작품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영국사에서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튜더 왕조(1485~1603) 말기에서 스튜어트 왕조(1603~1688) 초기를 가리킨다. 정치사적으로 보면 이 시대는 봉건주의에서 절대주의 국가로 넘어가는 이행기였다. 절대주의 국가에서 권력은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엘리자베스 여왕(1533~1603) 시대에도 왕권에 반대하는 세력은 철저하게 탄압받았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왕위 찬탈을 둘러싼 권력 다툼을 자주 다루는데, 명확하게 왕권을 지지하는 것이 그의 정치적 입장이었다. 

   

한편 경제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봉건적 공동사회에서 상업적 이익사회로 넘어가는 이행기였다. 상업적 이익사회는 상품 거래를 통해서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 자본주의의 융성과 맞물려 형성되며, 이 상업 자본주의는 ‘지리상의 발견’의 결과로 촉진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1451~1506)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약 100년간 식민지 쟁탈전을 주도한 나라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었다. 영국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대서양의 패권을 차지하고, 17세기에 들어서 식민지 경영의 선두 국가가 된다. 흥미롭게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활동은 이러한 영국의 식민 사업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의 작품에 중세 이래 유럽의 무역 중심지였던 베니스가 자주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 가운데 식민주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마지막 작품 <폭풍우>(1611)다. ‘태풍’ 또는 ‘템페스트’란 제목으로도 번역·공연되는 이 작품은 보통 희비극으로 분류되는데,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나폴리의 왕 알론소 일행은 아프리카 튜니스에서 결혼식을 마친 뒤 배를 타고 돌아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난파하여 어느 섬에 도착한다. 그 섬에는 12년 전 밀라노의 공작이었다가 동생 안토니오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어린 딸 미란다와 도망쳤던 프로스페로가 살고 있다. 알론소 일행을 난파시킨 폭풍우는 그가 복수를 위해 마법을 부려 일으킨 것이다. 

처음 프로스페로가 도착했을 때 섬은 시코락스라는 여자 마법사가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스페로는 그녀를 물리치고 그녀의 아들이기도 한 ‘야만인’ 칼리반과 많은 요정을 노예나 부하로 삼는다. 그는 알론소와 안토니오를 다시 만나 용서하고서 미란다를 알론소의 아들 페르디난드와 결혼시키고, 그 자신은 밀라노 공작의 지위를 회복한다. 한편 칼리반은 주인인 프로스페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계획하지만 실패하고 그에게 용서를 구한다.    

작품의 중심 플롯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알론소 일행에 대한 프로스페로의 복수’와 ‘프로스페로에 대한 칼리반의 반란’이다. 전자가 권력 쟁탈전의 양상을 띤다면, 후자는 ‘식민지 해방 투쟁’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여기서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 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관심이 대상이 되는 것은 ‘프로스페로와 칼리반의 관계’다. ‘칼리반(Caliban)’이라는 이름 자체가 식인종을 뜻하는 ‘캐니벌(cannibal)’에서 왔다는 점은, 이 작품에서 ‘원주민’ 칼리반이 어떻게 형상화되는지 미리 짐작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작품 속에서 그는 주로 ‘야만적이고 흉측한 노예’로 소개된다. 2막에서 칼리반을 처음 본, 알론소의 광대 트린쿨로는 아예 이렇게까지 말한다. “이게 뭐야? 인간이야? 생선이야? 죽은 거야? 산 거야? 생선이네. 생선 냄새가 나. 잡은 지 오래된 생선 냄새야. 싱싱하지 않은 말린 대구 같은데. 괴상한 생선인걸!” 그는 이 ‘괴물’을 영국으로 데려가면 한밑천 잡을 거라고 상상한다. 영국인들은 죽은 인디언을 구경하는 데도 돈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식민 시대에는 원주민들이 서커스단의 동물처럼 구경거리로 전시되어 돈벌이에 이용되기도 했다. 프로스페로의 표현을 빌리면, 칼리반은 ‘악마와 사악한 마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악한 노예’일 뿐이다. 이런 부정적인 묘사 때문에 <폭풍우>의 공연사에서 칼리반은 17세기에는 야만스러운 괴물로, 18세기에는 다양한 악행의 구현자로, 19세기에는 반인반수(半人半獸)로, 그리고 20세기에는 인간에 내재한 야수성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평가는 식민주의적 시선만을 일방적으로 반영하고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애당초 섬의 주인은 칼리반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칼리반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섬은 내 거야, 내 어머니 시코락스 거였으니까. 그걸 네가 나한테서 뺏어 갔지.” 처음 프로스페로와 대면했을 때 칼리반은 그의 온정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섬의 구석구석을 보여 주었다. 프로스페로는 그런 칼리반에게 미란다를 강간하려 했다는 죄를 씌워 마법으로 제압하고, 바위 안에 가둔 다음 노예로 삼아 버린다. 칼리반을 부를 때마다 욕설을 입에 담지만 형편상 그가 없으면 곤란하다. 칼리반이 불도 지피고, 나무도 해 오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약탈과 지배는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미란다의 말은 시사적이면서도 노골적이다.  

“난 너를 측은히 여겨 말을 가르쳐 주었고, 매번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 이 야만종, 네가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짐승처럼 어버버거릴 때 내가 말이 통하게 해 주었다. 아무리 가르쳐도 네놈의 비천한 천성은 고쳐지지 않아. 선량한 우리로선 곁에 두고 봐 줄 수가 없어. 그러니 바위 속에 가둬 두는 것은 당연하지.”

하지만 칼리반 가르치기는 결코 시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칼리반에 대한 ‘계몽’은 부차적이며, 오히려 그에 대한 지배를 더욱 원활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곧 프로스페로와 미란다의 언어 교육은 칼리반이 말을 더 잘 알아듣게 만들어서, 더욱 쉽게 부려먹고 착취하기 위해 이루어졌을 뿐이다. 19세기 이후 ‘영어’가 식민지 지배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대목은 셰익스피어의 날카로운 통찰로도 읽힌다.  

그러면 칼리반은 이러한 ‘주인의 논리’에 어떻게 대꾸하는가? “네년이 내게 말을 가르쳤지, 덕분에 난 저주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붉은 종기 역병에나 걸려라, 이년.” 칼리반의 욕설은 그가 받은 교육의 결과이며 ‘되받아치기’다. 칼리반은 제국의 언어를 배우지만 그 언어로 욕을 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문명화’ 교육의 이면을 드러내 주면서 저항의 가능성도 제시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칼리반의 저항, 곧 반란 기도는 실현되지 않는다. 알론소의 집사인 술주정뱅이 스테파노를 새로운 왕으로 모시고 프로스페로에게 대항하려 하지만, 그의 반란은 희화적으로 묘사될 뿐 결국 프로스페로의 사냥개들에게 단숨에 제압당한다.  



고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빼앗긴 자신의 섬을 되찾으려는 칼리반의 시도는 식민지 해방 투쟁에 값하지만, 그는 이것이 스테파노라는 새로운 주인을 섬김으로써 가능하리라고 본다. 셰익스피어의 정치적 입장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다. 그는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을 탐욕과 환상이 빚어낸 어리석은 행동으로 줄곧 그려 왔고, <폭풍우>에서 칼리반의 반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프로스페로가 자신의 적들을 모두 용서하는 5막은 전형적인 셰익스피어식 대단원으로, 그의 용서를 받은 칼리반은 다시금 ‘길들여진 노예’ 상태로 돌아가 자발적으로 순종을 맹세한다. 그들의 확고한 주종 관계가 재차 확인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결말을 통해 셰익스피어는 ‘야만인’ 칼리반이 교정이 필요한 위협적인 존재이고, 강간이나 모반 같은 그의 반(反)사회적 행위는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그 당시 연극의 주된 관객이었던 영국 지배 계급의 식민주의적 태도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폭풍우>는 프로스페로식의 ‘식민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다시 읽을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의 원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와 무관하게 말이다. 셰익스피어를 제국주의자로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을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폭풍우>가 그렇듯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용도로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으며, 그것이 고전의 의의이기도 하다. 

09. 01. 11. 

 

P.S.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원고지 30매는 얼마간 준비를 필요로 하고, 개인적으로는 공부할 핑계도 된다. <폭풍우>를 중심으로 글을 쓰기로 작정한 덕분에 관련 자료를 제법 찾아읽었다. 물론 챙겨놓고 미처  읽지 못한 자료가 더 많지만, 국내에서 씌어진 논문과 관련서만 해도 10여 종 이상 읽은 듯하다(나중에 좀더 긴 분량의 글을 쓰려고 한다). 챙겨놓은 자료들 가운데 가장 부듯하게 생각하는 것은 '논쟁 작품 연구(A Case Study in Critical Controversy)' 시리즈의 한 권으로 나온 <템페스트>(2000)이다. 제랄드 그라프와 제임스 펠란의 편집이고 350쪽 분량. <템페스트>의 원문과 함께 관련 쟁점을 일목 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주요 논문들을 싣고 있다(한국문학에도 이런 기획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손에 넣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챙겨보려고 하는 자료는 해롤드 블룸 편집의 <템페스트>(2007). 역시나 주요 비평모음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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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1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9-01-12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티브족 사람들의 얘기 인상적이네요. 김정환씨가 번역한 세익스피어를 올해 한 번 읽어볼까싶은데 그게 세익스피어 자체보다도 김정환씨가 그걸 완역한 이유가 뭘까가 더 궁금해서라고나 할까요? 뭐 세익스피어를 제대로 읽어본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도 이유가 되긴 하지만요. ^^ 새해죠.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올 한해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

로쟈 2009-01-13 01:20   좋아요 0 | URL
김정환 시인은 영문과 출신이고 셰익스피어 번역을 오래전부터 필생의 숙원사업으로 얘기하던 분입니다. 바람돌이님도 새해 건강하시길...

비로그인 2009-01-12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 읽기(해석)의 시금석이 되는 작품을 택하셨군요. 콜리지(Coloeridge)는 템페스트의 프로스페로는 바로 셰익스피어 자신이라고도 했지요. 식민지화에 대한 화두를 비롯해서 많은 화제를 풍부히 제공해주는 템페스트 연재, 기대됩니다. 혹시 원문도 함께 인용해주실 건가요? 예를 들어, 프로스페로가 칼리반을 언급하며 'this thing of darkness I / Acknowledge mine.' 이라고 한 부분에서 주어 'I'에서 동사 'Acknowledge'가 떨어져 다음 줄에 쓰이기 때문에 칼리반과의 자신과 닮았음을 인정하면서 잠시 주저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것 말입니다. 본문에 가득한 그런 장치가 한글 번역에서 표현되었다면 모르지만요. 어쨌든 셰익스피어는 무엇보다 언어의 마술사요, 인간심리의 마술사이니까요. 마노니 때문에 프로스페로가 수난이군요. ^^

비로그인 2009-01-12 22:28   좋아요 0 | URL
아, 그런데 고등학생들이 대상이라면 원본까지 인용하기는 좀 그렇겠군요... 아무튼 이 복잡한 작품에 대한 로쟈님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로쟈 2009-01-13 01:21   좋아요 0 | URL
아, 이건 연재가 아니고요, 단타성 글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푹풍우>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고는 싶지만요...

비로그인 2009-01-13 04:50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아쉽습니다. 언제 <폭풍우>에 대해 좀더 다루시게 되면 혹 제가 놓치지 않도록 알려주세요. ^^

드팀전 2009-01-12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실제로 세익스피어 작품을 가지고 원주민들에게 그런 실험을 한 학자들도 있군요.^^ 웃기는 에피소드 같지만 문화인류학자의 입장에서는 해 보고 싶은 실험이었으리라 생각도 듭니다.
<햄릿>의 아버지 유령을 보니-올리비에 영화 속 사진 같습니다- 지젝이 말한 '죽은지 모르는 아버지'도 생각이 나구요.
<템페스트>이야기는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의 세익스피어버전 같습니다. 결론이 탈식민주의와 고전에 대한 옹호로 이어져서 좋네요.^^

로쟈 2009-01-13 01:23   좋아요 0 | URL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피에르 바야르가 소개하고 있는 것인데, 바야르의 책에 <햄릿에 관한 앙케트. 귀머거리들의 대화>가 있죠. 제가 소개해보자고 출판사들에 얘기한 적이 있는데, 별로 관심들을 안 갖더군요...
 

촘스키 독자라면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모색, 1999)를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원제는 'Profit over People'이고 부제는 '촘스키의 신자유주의 비판'. 이미 10년 전에 나온 '고전적인' 신자유주의 비판서다. 요점은 이 제목들에서도 확인된다. '비즈니스-프렌들리'한 정부와 기업의 이익(profit)이 국민(people)보다 우선하는 게 신자유주의라는 얘기. 간략한 소개는 이렇다.   

  

노암 촘스키의 새로운 평론 모음집.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글들은 인터넷 진보잡지 <Z>에 기고된 글들이다. 이 책에서 촘스키는 전세계에서 일종의 계급 전쟁을 촉발하고 있는 친기업적 정치·경제정책인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역사적 투쟁을 통하여 신자유주의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소수의 부자가 다수의 시민권과 정치권을 제한하려는 책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자유시장, 기업에 의한 여론의 지배를 통해 민간 기업의 이익만을 증대시키는 정책을 강요하여, 결국 사회보장과 환경을 철저히 무시하는 결과를 낳은 소수의 폭력을 비판한다.   

10년 전 책에 대해서 뒷북성 멘트를 붙이는 것은 내가 아직 안 읽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가 구속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 책의 제목을 다시금 상기하게 됐기 때문이다(내일 동네 도서관에서 대출해봐야겠다). 사실 촘스키의 또 다른 책 <미국의 제3세계 침략정책>(일월서각, 1999; 원래는 <미국대외정책론>(일월서각, 1985)이라고 출간됐던 책으로 원제는 '워싱턴 커넥션과 제3세계 파시즘')에 관해 찾아보던 차여서(유감스럽게도 절판됐다) 쉽게 연상됐을 수도 있다. 아무려나 경제상황 못지 않게 정치상황도 10년, 혹은 20년전으로 퇴행한 것처럼 보이는지라 읽어야 할 책도 덩달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듯싶다.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를 '오늘의 멘트'로 정하고 엠파스에서 검색해보니 뉴스쪽으론 이런 칼럼들이 뜬다. 조선일보의 시론은 오늘자이고, 한겨레의 프리즘은 작년 봄의 것이다. 이 대조적인 칼럼을 읽자니 '국민'에 대해서, 그리고 국민을 빙자하는 '저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새삼스럽지 않더라도 한번 읽어보시길. 엠파스 검색시 나타나는 형광펜 표시는 일부러 놔두었고, 굵은 글씨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만평은 경향신문 '김용민의 그림마당'에서 가져왔다.

조선일보(09. 01. 10) [시론] 난동을 망각하는 죄(罪) 

1969년 일어난 도쿄대 야스다(安田) 강당 사건은 일본 학생운동의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었다. 도쿄대는 전해부터 좌파 학생조직인 전공투(全共鬪)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더러운 제국대학 엘리트의 재생산을 막자는 것이었고, 그 뜻대로 도쿄대는 1969년도 신입생 선발을 포기했다. 1월 18일 경시청 기동대 8500명은 야스다 강당에 집결한 7000여 명 투쟁대에 대한 진압을 개시했다. 작전은 다음 날 강당이 불타면서 종료됐다. 이 치열한 공방전은 이틀간 TV를 통해 일본 전역에 생중계됐다.  

1960년대 일본의 학생운동은 풍속이나 패션으로 여겨질 만큼 막강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전공투는 야스다 강당 극렬투쟁으로 학생과 시민의 혐오를 사고 사회로부터 외면됐다. 결국 이들은 소수 과격화 집단이 되어 요도호를 납치하고 해외에서 테러를 자행하는 등 자멸의 길을 가게 된다. 도쿄대는 야스다 강당이 불에 탔던 흔적을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폭력집단의 극단적 일탈행위를 후대에 길이 기억시키기 위해서다.  

1989년의 부산 동의대사건은 한국판 야스다사건이라 할 만하다. 동의대 총학생회는 원래 입시부정행위 때문에 교내투쟁을 시작했으나 노동절 날 느닷없이 파출소를 습격했고, 사태가 확대되자 전경 다섯 명을 납치했다. 끝내 경찰이 투입되자 시너와 석유를 바닥에 붓고 불을 질러 경찰관 7명을 사망하게 했다. 일본의 야스다 강당 사건과는 달리 이 엽기적 난동행위는 뒤틀린 역사적 판정만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는 동의대 사건 주역 4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격상시켜 명예회복과 보상을 받게 해준 것이다. 또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헌법재판소는 동의대사건으로 희생당한 경찰 유족들이 이 같은 조치의 부당성을 호소하며 낸 헌법소원마저 각하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는 극렬투쟁이 되풀이되고 오히려 고무를 받아 확대 재생산된다. 광우병사태의 경우 우리 국민 다수는 소수집단의 조작에 놀아난 자신을 치욕스러워하고 그 음모자가 다시 준동 못하도록 사회적 압력을 가해야 한다. 그러나 MBC의 왜곡방송 행태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사직당국은 이들을 소환조사조차 안 하고 있다. 광우병사태가 진정된 지 반년도 안 돼 작금의 국회의사당 난행사태가 발생했지만 이것도 곧 잊힐 것이다. 현 정치행태로 보면, 민노당 대표를 포함해 시정의 폭력배처럼 난동한 국회의원들, 그 보좌관들은 아무 처벌 없이 넘겨질 것이다. 결국 한국에서는 넘지 못할 선이 없다. 한국사회는 파괴적 소수 정치집단의 광분(狂奔)에서 해방될 면역력이 없는 것이다.  

한 사회는 물적 토대로만 형성되지 않는다. 국가사회에는 누구나 지켜야 할 사회적 가치가 있고 이를 수호하려는 국민적 의지가 있어야 한다. 곧, 지식과 이성 수준, 법률, 도덕과 질서를 건전하게 유지하려는 국민정신이 존재해야 함을 말한다. 국민이 동의대사건, 광우병사태, 국회난동 등 되풀이당하는 유린(蹂躪)에 무감각한 것은 그만큼 국민정신이 마비됐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국민 새로운 사회발전을 수용할 수 없다. 비열한 소수 야만집단에 앉아서 당하는 국민 국제사회에서도 제 대접을 받을 수 없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현 정권이 우선 정신적으로 강력해져야 한다. 광우병과 국회의 무정부 난장판은 모두 이명박 정권 아래서 일어난 일이다. 이 정권은 상황을 피하고 타협했을 뿐이지 과거정권의 적폐를 청산하고 법질서를 세움에 치열하게 나서지 못했다. 국가경영자의 결단력이 훼손됨을 보면 국민 정권에 대한 신뢰와 기대치를 상실하고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국민의 압도적 지지로 탄생한 정권이 국가 운영방향을 단호히 세우고 명백한 범법자를 처벌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향후 국정파괴의 책임자를 유권자가 심판해야 한다는 말은 옳지만 그들은 기억력이 짧고 단기적 인기영합 약속에 쏠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언론과 사회단체들이 국민을 대신해 정치가들의 언행을 모두 기록, 보존해서 때가 되면 적극적으로 투표자에게 알려야 한다. 국회는 이미 18대 의원의 역사적 난동현장을 모두 청소해 버렸다. 그러나 지난 20일간의 국회파괴사건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우리 국민 이 기록물을 국회 로텐더 홀에 365일 24시간 전시하도록 강력히 꾸준하게 요구해야 한다. 과거 잘못에서 배우지 못하는 국민이 어떻게 선진국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김영봉 중앙대 교수·경제학)    

한겨레(08. 04. 25) [한겨레프리즘] 철탑에서 본 대한민국 주식회사

인천지하철 부평구청역 3번 출구 옆 지상 25m 0.6평짜리 공간. 잠깐 올려다봐도 아찔한 철탑에선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는 지엠대우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규가 터져 나온다. 한 사람은 그곳에서 시린 겨울을 보냈고, 또 한 사람은 잔인한 봄을 견디고 있다. 회사 서문 앞에선 또다른 노동자가 해고자 전원 복직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이다. 오늘로 120일을 넘긴 고공농성과 18일째 이어온 단식. 원청업체인 지엠대우차는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고, 정부도 이렇다 할 중재 노력이 없다. 대화를 기다리는 이곳엔 철거 위협과 벌금 고지서가 날아든다.   

지엠대우차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찾아가 노사 화합의 상징으로 치켜세운 곳이다. 비정규직의 철탑 농성장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비즈니스 프렌들리’. 그는 이번 미·일 방문에서 “나는 대한민국 주식회사의 시이오(최고경영자)다”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친기업’을 넘은 ‘국가의 기업화’ 선언이라 할 만하다. 외국인 투자자들한테 박수를 받은 발언 뒤편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300일을 넘긴 이랜드 노동자들의 복직 요구에 대해 노동부 장관은 ‘노사 자율로 해결해야 한다’며 팔짱만 끼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학교도 자율화하겠다’며 0교시-우열반을 허용해 아이들을 입시경쟁으로 내몬다. 기획재정부 장관은 건강보험을 민간의보로 바꿔 가겠다고 말한다. 고공철탑 위 비좁은 공간에서 새우잠을 자는 노동자, 등수 공개 압박감에 모의고사를 잘못 봤다며 몸을 던지는 아이, ‘손가락이 잘려도 돈이 없으면 병원에 가서 봉합수술을 받지 못하는’ 영화 <식코> 장면처럼 의료비 부담에 가슴을 졸이는 환자들.  

대한민국 주식회사의 풍경이다. 경쟁과 시장화라는 구호 아래 사회 공공성은 뿌리째 흔들린다. 정부는 국민 섬기기보다 기업에 대한 봉사를 우선시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경쟁력 없는 건 희생돼도 어쩔 수 없다는 섬뜩한 맹신이 퍼져간다. 사회적 약자는 ‘다수의 이익이 먼저’라는 이데올로기 앞에 침묵을 강요당한다. 이런 모습은 국민과 소통 없는 통상정책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을 위해 광우병 위험까지 수입하는가’라는 물음에 돌아오는 것은 “(미국산 쇠고기가) 마음에 안 들면 적게 사면 된다”라는 대한민국 최고경영자의 소신이다. 정부는 국회에 비준동의를 조속히 해 달라고 압박할 뿐 보완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는 대답이 없다.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의 정책위의장마저 “정부는 대책을 내놓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최대 피해가 예상되는 농민들의 절박한 호소는 ‘희생 불가피론’에 묻힌다. 함께 대책을 고민해 주길 바라는 최소한의 희망조차 번번이 배신당한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공공성을 지키는 건 정부가 할 일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무책임을 자율로 포장하는 이명박 정부. “(국가의) 기업화는 대중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고, 여론을 조종하며, 세상의 운영방법에 대한 기본적 결정권을 소수 권력자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촘스키의 저서 <그들에게 국민 없다>에 실린 경고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에서 졸지에 대한민국 종업원으로 바뀌어 버린 듯한 지금, 대한민국 주식회사에 묻는다. 국민이 낸 세금을 쓰면서 정부를 기업처럼 운영해도 되는가?(정태우) 

09. 01. 10.   

P.S. 김영봉 교수의 칼럼에서 배울 점이 많다. 조선일보를 요즘 거의 보지 않아서 이렇게 노골적인 '선동'도 오랜만에 읽어본다. "향후 국정파괴의 책임자를 유권자가 심판해야 한다는 말은 옳지만 그들은 기억력이 짧고 단기적 인기영합 약속에 쏠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언론과 사회단체들이 국민을 대신해 정치가들의 언행을 모두 기록, 보존해서 때가 되면 적극적으로 투표자에게 알려야 한다." 유권자들의 기억력이 짧기 때문에 언론과 사회단체에서 정치가들의 언행을 모두 기록, 보존해서 때가 되면 적극적으로 투표자에게 알려야 한다는 말. 백번 맞는 말이다. 다음 총선과 대선을 위해서도 그 말 그대로 해주었으면 좋겠다. 왜 있잖은가. '747'이니 '3000포인트'니 '뉴타운'이니 하던 말들. 제발 현 정권과 정치인들의 언행을 모두 기록, 보존해두었다가 알려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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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기의 생각
    from bbb's me2DAY 2009-01-11 11:09 
    로쟈님 알라딘 블로그 (제대로된 읽을꺼리들을 이야기해주시다니 느무 좋음)
 
 
노이에자이트 2009-01-11 00:08   좋아요 0 | URL
조선일보 칼럼 정말 과격하고 섬뜩하네요.무서워요.야스다 강당 사건을 왜 저런 식으로만 볼까요? 전형적인 강경우익의 시각으로 그 사건을 보았군요.굉장히 익숙한 논리예요.5공 때도 야스다 강당 사건 그리고 적군파...비판하는 다큐멘타리를 텔리비전에서 방영했지요.

로쟈 2009-01-11 20:50   좋아요 0 | URL
5공때와 뭐가 다른지 슬슬 의문을 갖게 됩니다. 똑같이 반민주적 정권인데, 사실 경제는 더 안 좋죠...

cretois 2009-01-11 00:28   좋아요 0 | URL
조선의 어제 사설도 막상막하죠. 국민 혹은 유권자의 상당수가 이런 신문에 동조(!)하는 현실 역시 괴기스럽습니다. 미네르바와 아고라들에 찬성하진 않지만 이런건 정말 옛날의 '토끼몰이'를 연상케하는군요.

로쟈 2009-01-11 20:50   좋아요 0 | URL
당장은 이렇게 망해가는구나, 내지는 말아먹는구나란 생각밖에는...

2009-01-11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9-01-11 20:51   좋아요 0 | URL
네, 재미있고 다이나믹하죠. 외신란에도 자주 오른다잖아요...^^;

jouissance 2009-01-11 19:50   좋아요 0 | URL
정말이지 괴기스러운 풍경입니다. 70%의 이 나라 신문독자들이 저런 어처구니 없는 선전선동으로 도배된 기사를 매일 읽고 있다니 말입니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퍼센티지입니다. 저 70%가 이 나라 저질 민족주의와 결합해 유사시 어떤 형태로든 파시즘 태동의 토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미래입니다. 어떻게 보면 파시즘에 가장 취약한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지금 쥐박이 정권은 유사 파시즘이라 봐야겠지요. 로쟈님도 조심하세요^^ 쥐박이 친위대원들이 로쟈님 글까지 호시탐탐 감시하고 있을 줄 모릅니다. 아다시피 저들이 들이대는 죄목이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잖아요. 정말 쥐박이 무리들이 벌리고 있는 짓거리들을 보고 있자면 화염병 던지는 사람들의 심리를 알겠어요. 대체 무슨 이런 회괴망측한 놈들이 있습니까..ㅠㅠ

로쟈 2009-01-11 20:52   좋아요 0 | URL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여럿 계시네요...^^;

jouissance 2009-01-11 22:02   좋아요 0 | URL
저는 훗날 무지 쪽팔릴 것 같아서 기회가 주어지면 최소한 '구류'라도 살고 나오려구 준비하고 있습니다. 10년 뒤에 '그래도 이 아빠는 쥐박이 정권에 저항했단다' 한마디는 날릴 수 있는 명분은 쌓아야지 않겠어요...^^ 어제 미네르바 동영상을 보면서 조금 아쉽더라구요. 쥐박이 정권을 향하여 '의연하게' 한마디 던지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는데..ㅠㅠ

로쟈 2009-01-11 22:21   좋아요 0 | URL
아고라에는 문체를 분석한 글들도 올라오던데, 아무래도 제 생각엔 '미네르바들'이 있는 거 같습니다...

고티 2009-01-11 23:59   좋아요 0 | URL
ㅋㅋㅋ '국민'은 '없'군요!
 

모처럼 흥미를 끄는 영화이론서가 출간됐다. 바바라 크리드의 <여성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여이연, 2008). '씨네 페미니즘' 분야의 책인데, 원저가 1993년에 나왔으니 나이값만으로도 이 분야의 '고전'이겠다. 대략적인 소개는 이렇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관통하는 씨네 페미니즘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이다. ‘왜 영화가 여성주의의 관심사이며, 어째서 여성주의적 관점이 영화 안에서 중요한지를 보여주면서 씨네 페미니즘에 주목할 만한 공헌’을 한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크리드의 <여성괴물>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공포영화를 둘러싼 담론은 대체로 남성 괴물 대 여성 희생자의 구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1990년대가 되어서야, 크리드의 작업을 통해, 이제까지는 힘없는 희생자의 자리에만 위치 지어졌던 여성이 드디어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던 여성괴물을 설명하기 위해 크리드는 정신분석학의 방법론을 경유한다. 이 책의 1부에서 크리드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비체’ 개념을 통해 여성괴물성을 추적하며, 2부에서는 프로이트의 거세 이론을 비판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가 막바로 떠올리게 되는 책은 이 분야의 원조격인 몰리 해스켈의 <숭배에서 강간까지>(나남출판, 2008)이다. '영화에 나타난 여성상'을 다룬 이 책은 "해스켈이 1974년에 발표한 영화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이다. 문학에서의 페미니즘 비평이 남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표현된 여성 이미지 연구에서 출발한 것처럼 페미니즘 영화 비평도 주류 영화에서 묘사된 여성 이미지의 분석에서 출발하였다.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보는 남성들의 이율배반적이고 이분법적인 이해가 영화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었는지를 분석한다." 해서 두 책을 모아놓고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리스트는 그래서 만들어놓는다.


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여성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바바라 크리드 지음, 손희정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8년 12월
17,000원 → 16,150원(5%할인) / 마일리지 490원(3% 적립)
2009년 01월 10일에 저장
구판절판
The Monstrous-feminine : Film, Feminism, Psychoanalysis (Paperback)
바바라 크리드 지음 / Routledge / 1993년 9월
89,270원 → 73,200원(18%할인) / 마일리지 3,660원(5% 적립)
2009년 01월 10일에 저장
품절
여성 없는 페미니즘
타니아 모들스키 지음, 노영숙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8년 8월
15,000원 → 14,250원(5%할인) / 마일리지 430원(3% 적립)
*지금 주문하면 "7월 11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01월 10일에 저장

너무 많이 알았던 히치콕?- 영화.여성.가부장제적 무의식
타니아 모들스키 지음, 임옥희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7년 10월
16,500원 → 15,670원(6%할인) / 마일리지 480원(3% 적립)
2009년 01월 10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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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모로 특이한 책이 출간됐다. <무감각은 범죄다>(이루, 2009). 일단 번역서가 아니라는 점. 저자인 이희원씨는 독일에서 유물론 미학을 공부하다가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이란 책("<자본론> 이후 최고의 책"이란 평도 있다고 한다)을 접하고 흠뻑 빠져서 박사학위논문을 썼다고 한다. ''저항의 미학'으로서의 성 미학'이란 부제를 보고 나는 페터 바이스 연구서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저항의 미학>에 대한 소개는 차후에 이루어질 모양이고, 이번에 나온 책은 저자의 '성 미학'이다. 그런데, 이게 또 흔하게 연상할 수 있는 '섹슈얼리티의 미학'이 아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섹스의 미학'이다. '대상적 활동으로서의 성행위'를 주제로 한 책이기 때문이다. 짐작에 가장 유사한 범주의 책이라면 빌헬름 라이히의 <성혁명>이나 <오르가즘의 기능> 등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여하튼 '성 미학'과 '저항의 미학'을 틀거리로 한 독특한 책이다. 그런 독특한 이론적 작업으로 이종영씨의 '이행총서'와도 견주게 하는데, 왠지 <성적 지배와 그 양식들>(새물결, 2001)과 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책을 읽기 전 인상이 일단은 그렇고, 관련리뷰를 미리 읽어본다.   

한국일보(09. 01. 10) 인간의 성행위에 깃든 저항의 미학 

이 책을 소화하려면 '대상적 활동'이라는 마르크스 철학의 개념부터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모든 사물은 그 자체로 독립돼 설명되지 않고, 다른 것과의 연관 관계 속에서 파악된다고 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기 바깥의 세계를 조작해 변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기도 변화하는 관계를 통해서만 인간은 이해된다. 이 책은 그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성행위를 분석한 결과다.

저자는 이 책을 쓴 이유를 "넘쳐나는 성 담론 중에서 그 어떤 것도 '성적 존재로서의 나'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서문에 밝혔다. 저자에 따르면 성행위는 한 개인의 이기적 만족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성행위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표현할 뿐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고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노동 및 예술 활동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대상적"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대상적 행위로서 성행위를 규명하기 위해 '오르가즘 체험'을 분석한다. 인간의 성적 능력이 제대로 펼쳐졌을 때를 가정하고, 그때의 성감 기제가 움직이는 원리를 밝힘으로써 성행위의 철학적ㆍ미학적 의미를 추출해낸다.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 이론과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 이론이 동원되고, 발전적으로 해체ㆍ수용된다. 그리고 오르가즘 체험이 지닌 인성론적 함의를 구성해 간다.

대상적 활동으로서 성행위를 다루는 저자의 관점은 결국 '성행위는 능력의 문제다'라는 명제로 수렴된다. 오르가즘은 전방위적 자기실현을 위한 자기 인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르가즘 불능은 생리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를 표현하고 그럼으로써 자기를 취하는' 저항능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성 담론은 저항의 미학으로 연결된다.

내밀한 영역에 감춰져 있던 감각 기제들을 현대 미학의 복잡한 이론을 거푸집 삼아 사출해 낸 결론은, 마르크스의 테제이기도 한 '인간적 감각의 회복'을 향해 간다. 저자는 자신의 고통에 견주어 남의 그것을 감지해 낼 수 있는 것이, 대상적 활동으로서 성행위를 경험해 본 이들의 공통점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성관계를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상대의 고통을 정면으로 뚫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감각의 기능 장애로서 무감각'을, 저자가 '범죄'라고 규정한 까닭이다.(유상호기자) 

09. 01. 10. 

 

P.S. 몇 권의 이미지를 나열했지만, 바타이유와 라이히의 책들이 <무감각은 범죄다>를 읽기 위한 '베이스'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에서 전개할 성에 대한 모든 논의들에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전제는 인간의 성적 행위는 그 핵심에서 대표적인 '대상적 활동'의 예라는 것이다. (...) 인간의 성적 능력의 변화, 발전, 쇠퇴 등은 오르가즘 이론을 통해 매우 효과적으로 설명된다. 이를 위해 대상적 활동으로서의 성 행위라는 지평 위에서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 이론과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 이론이 적극적으로 수용된다."(20쪽)  

한편, 저자가 관심을 부추기는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은 영역본 기준으로 3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소설'이다. 아무래도 쉽게 소개될 성싶지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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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jjismy의 생각
    from jjjismy's me2DAY 2009-01-11 02:19 
    성행위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표현할 뿐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고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노동 및 예술 활동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대상적
 
 
비로그인 2009-01-10 11:15   좋아요 0 | URL
페터 바이스<저항의 미학>은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전체가 1천 쪽이 넘는데 영역본은 1/3만 나와 있습니다.Austerlitz(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책)의 저자 W.G. Sebald에서 Magnum Opus 라고 해서 구미는 당기지만 한두 장 읽어 보니 "밀림 속"에 들어가는 기분이더군요. 영역을 역자가 애 좀 먹었을 것 같아요. 읽는 것은 나중에 시간이 한꺼번에 많이 날 때 고려해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로쟈 2009-01-10 11:32   좋아요 0 | URL
네, 1권만 뜨더군요. 안 그래도 대작은 많은데...--;

비로그인 2009-01-10 11:17   좋아요 0 | URL
Sebald가 에서 -> Sebald가 에서.

비로그인 2009-01-10 11:19   좋아요 0 | URL
미안합니다. 'Sebald가'와 '에서' 사이에 책의 링크가 있는데 저장을 하고 나니 계속 안 보이는군요. 입니다.

로쟈 2009-01-10 11:22   좋아요 0 | URL
계속 안 보이는데요.^^ 알라딘 댓글에 용량 제한이 있는가봐요.

비로그인 2009-01-10 11:20   좋아요 0 | URL
알 수 없는 일이군요. On the Natural History of Destruction이 계속 안먹히니... 이번에도 보이지 않으면 그냥 두겠습니다.

로쟈 2009-01-10 11:33   좋아요 0 | URL
제목과 표지만으로도 흥미를 끄는 책이네요.^^

비로그인 2009-01-10 11:32   좋아요 0 | URL
댓글에 저자 이름이나 책 이름에 link 를 할 수 있는 html tag 를 씌워주었는데 그래서 변칙적인 현상이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공연히 지면을 지저분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비로그인 2009-01-10 11:46   좋아요 0 | URL
제발드의 작품은 아직 한국에 소개가 안 되어 있는 것 같군요. 대표작 <아우슈터리츠>조차도 번역이 안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좀 의외입니다. 그는 그렇게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것입니다. 그의 대표작은 저자가 아직 생존해 있었을 때 저자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영국의 Anthea Bell 할머니가 영역되었는데 원작 못지 않은 번역이라는 평입니다. 제발드 자신도 영어는 영국 작가 못지 않지만 작품 활동은 계속 독어로 했지요. 제가 독문학을 번역할 실력이 되면 출판사에 이 책을 들고가 내자고 할 것입니다.

로쟈 2009-01-10 13:29   좋아요 0 | URL
<이민자들>(창비, 2008)이란 책이 얼마 전에 나왔는데요. 다른 책들도 소개될 여지가 있겠네요...

비로그인 2009-01-10 19:1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한 권이 얼마 전에 소개되었군요. 이제야 제발드가 국내에 소개되는군요! 그의 아름다운 글이 잘 소개되기만을 바랍니다. 독일인이고 독일어로 글을 썼지만 20대 초반부터 줄곧 영국에서 살았고 영미권에서 제발드라고 계속 들어서인지 제발트라고 하니 다른 사람처럼 들리는군요.^^

로쟈 2009-01-10 19:59   좋아요 0 | URL
덕분에 저도 한 사람 더 챙기게 됐습니다.^^

비로그인 2009-01-10 20:39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레이다에 걸리지 않고 저공비행한 작가가 다 있었군요.^^ 그것도 저공비행하는 로쟈님의 레이다에 말입니다.^^

로쟈 2009-01-10 20:48   좋아요 0 | URL
'세계의 책'이란 카테고리도 두고 있지만 러시아책 모니터링을 그만둔 지도 오래됐습니다. 쏟아지는 국내서만 카바하기도 어렵습니다.^^;

비로그인 2009-01-10 21:09   좋아요 0 | URL
제발드 인터뷰 링크를 소개합니다. 2001년 12월6일자 인터뷰입니다. (그는 며칠 뒤 12월14일에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그의 글이 어떤지 약간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제가 흠모하는 베테랑 번역가인 안시아 벨 할머니가 <아우슈털리츠>의 번역에 대해 한 말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제발드의 독일어는 의도적으로 19세기의 독일어를 구사하여 많은 부분에서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작품이 그러합니다. <이민자들>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그의 정교한 문체가 한글 번역본에서 - 많이는 못하더라도 -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면 합니다. 이 인터뷰는 <이민자들>로 얘기가 시작됩니다. 처음에 잠시 광고가 나오고 인터뷰가 방송됩니다. (이 인터뷰어인 Silverblatt는 KCRW 에서 많은 유명작가들을 인터뷰했습니다.) http://www.kcrw.com/media-player/mediaPlayer2.html?type=audio&id=bw011206w_g_sebald

노이에자이트 2009-01-11 00:27   좋아요 0 | URL
제가 작년에 로쟈 님과 초창기에 댓글 교환했을 때 페터 바이스<부모와의 이별>가지고 있다고 말한 적이 생각나네요.저는 이 작가를 사회주의자이면서 혁명에 대한 작품이 많은 것으로만 알았는데 이런 책은 여기서 알게 되었습니다.자본론 이후의 명저라...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