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이니만큼 관련기사를 하나 스크랩해놓는다. '한글날 영문학자 도정일을 만나다'가 기사의 컨셉이다(웁스, '컨셉'이라니!). 대부분 지당한 말씀이며 몇 가지 지적은 곱씹어볼 만하다...

한겨레(08. 10. 10) 도정일 “영어 몰입교육은 사고력 부족한 반거충이 만들 뿐”

영문학자인 도정일(67) 경희대 명예교수는 한국인 가운데 ‘서구 계몽주의 지식인’의 전형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평을 듣는다. 지난 7일 그를 만나 모국어에 대한 철학과 최근의 영어교육 논란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9일 한글날이 계기가 됐다. 영문학자와 웬 한국어? 얼핏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이런 이유에서다. 우선 그는 ‘가장 정확하고 유려한 우리 문장을 구사한다’는 찬사를 들을 만큼 모국어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각별하기로 유명하다. 다른 한편으론 이명박 정부의 ‘영어 몰입교육’ 파동으로 우리말을 둘러싼 논의 지형의 한가운데에 영어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국어학 권위자들께서 말씀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도 교수는 조심스러워 했다. 그러나 이 비상한 ‘국어 위기 상황’을 헤쳐나갈 지혜를 구하는 데 관할구역을 따질 여유가 어디 있을까. ‘영어로 초래된 지금의 혼미 상황에선 영문학자이면서도 모국어로 글을 써 문필가의 명성을 얻은 선생께서, 더 냉철한 진단과 대안을 제시할 적임자인지 모른다’는 요청에 그가 입을 열었다. 영문학자인 자신에게 모국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서부터 그는 시작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표현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실현 행위 그 자체입니다. 40년 넘게 영문학을 해 왔지만 저에게 ‘제1의 언어’는 한국어입니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체득했고 나이 들어 치매가 와도 망실되지 않을 언어가 한국어니까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도정일의 집’은 한국어인 셈입니다.”

‘광풍’으로까지 불리는 영어교육 이상열기에 대해 그는 거침이 없었다. 몰입교육 같은 섣부른 시도가 ‘반거충이’(무엇을 배우다 중도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를 양산해낼 뿐이라는 쓴소리가 이어졌다. “요즘 대학의 공통된 고민이 이른바 ‘국제화’ 한답시고 경쟁적으로 받아들인 특례 입학생들입니다. 어린 시절 외국에 건너가 살다가 특별 전형으로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인데, 이들 상당수가 한국어는 물론 외국어 실력에서도 실용 회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생각하고 개념화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성장기에 하나의 언어에 깊이 몰입해볼 기회를 갖지 못했으니 읽고, 쓰고, 사고하고, 표현하는 고등의 언어 활동이 취약한 게 당연하죠. 몰입교육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교육에 모든 교육자원을 집중시키는 초·중·고등학교의 풍토도 도마에 올랐다. 영어교육도 좋지만 모국어와 비판적 사고력을 키워주는 인문 교육을 희생시켜선 안 된다는 지적이었다. “지금 초·중·고등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교육청의 지원을 받기 위해 기존의 도서관이나 학생 자치공간에 영어학습 시설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사서도 없는 학교에 한 해 1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들여 원어민 교사를 초빙하겠다는 겁니다. 통탄스런 일입니다.”

영어 광풍의 배후로 그는 지난 10여년 새 우리 사회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시장전체주의’를 지목했다. 그가 볼 때 교육은 시장이 요구하는 ‘맞춤형 인간’을 양성하는 것으로 목적이 변질된 지 오래다. 학교에서 국어보다 영어가, 읽고 생각하는 영어보다 듣고 소통하는 실용 영어가 강조되는 것도 ‘시장의 언어’가 ‘삶의 언어’를 압도하면서 빚어진 현상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습니다. 영어를 못하면 깡통 차고 지하도에 나앉아야 할 것처럼 협박하는데, 이것을 견뎌낼 간 큰 국민이 얼마나 있겠어요. 공포에 나포된 국민들이 영어라는 ‘생존 복음’에 너 나 없이 매달리는 형국입니다.”

영어 문제에 대처하는 진보진영의 자세에도 일침을 놓았다. “1980년대 ‘반제투쟁’하듯” 해선 안 된다는 충고였다. “영어가 지배적 언어가 된 데는 정치·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영어 자체가 갖는 포용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모든 시대에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가 필요한 법입니다. 영어를 인류의 소통을 가능케 한 공유자산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그의 ‘영어론’은 국어학계의 폐쇄성에 대한 지적으로 귀결됐다. “우리말 우리글이 최고라는 자만은 버려야지요. 우리말의 표현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컨대 우리말에는 영어의 룩(look)이나 심(seem)처럼 ‘~인 것처럼 보인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속된 말로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사물의 거죽과 속알맹이가 같을 수 있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현상과 비가시적 본질을 구분하는 표현법이 불가피한데도, 이를 무조건 ‘영어식’이라 배척해선 곤란합니다.”

누구보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기로 정평이 난 그였지만, 우리말의 문장구조에 한계를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고백도 들을 수 있었다. 한때 영어의 관계대명사가 가능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전개되는 논법 구조를 부러워한 적이 있다는 얘기였다. “학자나 작가 등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우리말이 갖는 표현의 한계를 돌파하는 방법을 고민해야지요. 이웃 언어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자기갱신하는 노력을 방기하는 것도 일종의 직무유기입니다.”

이날 도 교수는 책읽기 운동을 위한 협약 체결 문제로 경남 김해를 방문했다 막 상경한 터였다. (그는 독서 활성화와 공공도서관 확충운동을 벌이는 ‘책읽는 사회 만들기’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출장의 피로가 덜 풀렸을 법한데도 한마디 한마디 공들여 풀어놓는 말을 옮기니 곧 글이 되었다.(이세영기자)

08.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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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스 2008-10-10 09:12   좋아요 0 | URL
"서구 계몽주의 지식인의 전형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도정일선생은 이 표현을 좋아하실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8-10-10 22:52   좋아요 0 | URL
'계몽주의'란 말도 스펙트럼이 넓으니까요. '가장 정확하고 유려한 우리 문장을 구사한다'는 평도 인용해놓았기 때문에 '손해'는 아닐 듯싶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0 15:58   좋아요 0 | URL
국어라든가 국사라든가 하는 단어도 이제 버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이상한 게 고대부터 현대까지를 다루면 국사인데 한국 근현대사는 국사 근현대사라고 하지 않더러구요.

로쟈 2008-10-10 22:54   좋아요 0 | URL
내부자, 외부자 시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일본에서는 자기들의 국사를 일본사라고 한다지만... 학교에서 '국어'를 배우는 것과 '한국어'를 배우는 건 감이 좀 다른데, 가령 '국어'가 필수과목이라면 '한국어'는 선택과목 아닐까요?^^;
 

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면에 실린 기사를 옮겨놓는다('로쟈의 인문학서재' 대신에 3주에 한번씩 출판면을 쓰게 됐다). 최근에 나온 앤드류 달비의 <언어의 종말>(작가정신, 2008)에 대한 리뷰인데(표기법상으론 '앤드루 달비'인 모양이다), '언어전쟁' '언어 제국주의' '영어 공용화론' 등의 쟁점들과 연관지어 다뤄보려고 했으나 시간과 분량의 제약상 마음뿐이었다. 책상에 잔뜩 쌓아놓은 관련서들만 미진한 독서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한겨레21(08. 10. 13) 거꾸로 바벨탑 이야기

“저들은 한 민족이며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이 이런 일을 시작하였으니 앞으로 마음만 먹으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가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잘 아는 대로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하늘에까지 닿을 탑을 쌓고자 했지만 이에 분노한 여호와께서 세상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일은 무산됐다. 그렇게 ‘보편 언어’를 상실한 인류의 언어는 이후에 분화를 거듭했다. 가령 원시 인도-유럽어만 하더라도 사템어와 켄툼어로 분화되며, 켄툼어에 속하는 게르만어는 다시 서게르만어, 동게르만어, 북게르만어 등으로 분화됐다. 그리고 북게르만어는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페어로어, 아이슬란드어, 그리고 사어(死語)가 된 노른어 등으로 또다시 나뉘었다. 언어의 다양성은 이러한 분화과정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 분화는 무한정 계속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반대다. <언어의 종말>(작가정신 펴냄)의 저자 앤드루 달비에 따르면, 언어 분화의 역과정, 곧 언어의 통합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인류의 언어가 처해 있는 위험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통계를 보면, 현재 전세계에서 1언어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는 약 5천 개이며 이 중 21세기에만 2500개 가량의 언어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평균 2주에 1개꼴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200년 이내에 전세계적으로 200개 정도의 언어만 남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200이란 수는 국가의 수와 대략 일치한다. 곧  앞으로 국가어 외의 소수 언어들은 대부분 소실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단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은 국민이라고 여겨지며, 국민은 국가를 구성해야 한다.”는 언어 민족주의 명제가 이러한 통합과 소실 과정의 중요한 배후다.

그런데 언어의 운명이 이렇듯 국가권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면 국가어들의 운명조차 자신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정치적․경제적 세계화에 따라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소통될 수 있는 세계어 혹은 국제어에 대한 요구가 점차 강화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현실에서 영어는 많은 나라에서 국가어로, 또 전 세계적으로는 제2언어, 제3언어로 급속하게 확산돼가고 있다. 따라서 소수 언어 대부분이 사라진 이후에 벌어질 ‘언어전쟁’은 개별 국가어들과 영어와의 전쟁이 될 것이고 어쩌면 영어만이 사용되는 시점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언어 제국주의, 보다 구체적으로 '어 제국주의 시대' 도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세 때만 하더라도 앵글로색슨의 한 부족어였던 영어는 어떻게 세계적인 언어로 성장했을까? 앤드루 달비는 영어와 로마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어의 확산과정에 세 가지 경로의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첫 번째 경로는 식민화이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걸친 방대한 식민지를 경영했고, 영어는 식민지 이주자들의 유일한 '링구아 프랑카'(공통언어)였다. 두 번째 경로는 제국과 속국 사이의 관계가 초래한 것으로 제국의 속국에서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자기 발전과 부를 얻는 최선의 경로는 영어를 아는 것이었다. 고위관리가 되거나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영어가 필수적이었고, 모든  고등교육은 영어로 이루어졌다. 세번째 경로는 원거리 교역, 특히 해상교역이다. 영어로 이루어지는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영어와 영어의 친척어인 피진어(상거래 과정에서 생겨난 간략화된 영어)가 점점 확산돼갔다.

그리하여 현재 영어 사용자는 ‘유창한’ 사용자를 기준으로 전세계적으로 7억 명에 이르며, ‘충분한 정도로 구사하는’ 영어 사용자는 18억 명을 넘어선다. 게다가 인도를 포함해 약 70개국에서 국가어 혹은 공용어로 쓰이고 있으며 영어학습자 수가 세계인구의 약 3분의 1에 육박하리라는 통계도 나온다. 그리고 이런 영어 집중화의 이면이 소수 언어의 소실과 언어적 다양성의 상실이다. 이것은 어떤 문제점을 낳는가?

언어학자로서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세계의 각 언어로 전승되고 보존되어온 지식을 우리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번역할 때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직접 건너갈 수 없으며 항상 현실 세계를 거쳐서 가야만 한다. 이때 각 언어는 세계를 보고 나누고 구분하는 각기 다른 관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것이 그려내는 현실 세계의 지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즉, 각 언어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각기 다른 통찰력을 제공해주며 우리에겐 그러한 대안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 한 언어의 소실은 곧 인간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의 상실이다. 게다가 더 중요하게는 다른 언어와의 상호작용만이 우리 각자의 언어를 더욱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준다. 영어만 하더라도 새로운 단어와 리듬과 생각들을 다른 언어들에서 얻어옴으로써 활력을 얻고 번영을 구가해왔다. 하지만 영어 제국주의와 함께 전체 언어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든다면 영어의 창조성과 유연성 또한 시들어버릴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성서의 바벨탑 이야기를 우리는 어쩌면 거꾸로 읽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자, 우리가 가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는 신의 저주는 오히려 축복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언어적 혼잡성과 다양성 덕분에 인류는 바벨탑보다 더 높은 성공의 탑을 쌓아온 것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전세는 역전돼가고 있다. “처음에 세상에는 하나의 언어만 있었고, 단어도 몇 개 되지 않았다.”라고 바벨탑 이야기는 시작한다. 종말의 이야기는 이러할 것이다. “종말에 세상에는 하나의 언어밖에 없었다. 모두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서로 알아듣지 못했다.”

08. 10. 08.

P.S. 주제에 대한 관심 때문에 부랴부랴 훑어본 책이지만 <언어의 종말>은 내용에 비해 너무 두껍다는 인상을 준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다른 책들에 견주어도 그렇다. 게다가 뭔가 '한방'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내내 갖게 한다. 가령, 영어와 라틴어의 확산과정 사이의 세 가지 유사성을 지적한 대목에서 두 번째 경로를 '제국과 속국 사이의 관계가 초래한 것'이라고 나는 적었지만, 실제 책에는 달랑 '정부와 정부가 초래한 것'이라고만 돼 있다. 국내에는 지방대 도서관 두 곳에만 소장돼 있어서 미처 원문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설사 원문이 그렇게 돼 있더라도 너무 모호하고 뭉툭하다. 생각해보니 그런 모호함/뭉툭함이 책을 두루 관철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더불어 놀란 것이 있다면 이 주제분야의 책으로 국내에 소개된 몇몇 저자들이 서로에 대해 전혀 참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앤드류 달비를 비롯하여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이제이북스, 2003)의 공저자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수잔 로메인은 얼마전 방한한 바 있다), 그리고 <언어전쟁>(한국문화사, 2001)과 <언어와 식민주의>(유로서적, 2004)의 저자 루이-장 칼베, <언어 제국주의란 무엇인가>(돌베개, 2005)에 '영어 제국주의의 어제와 오늘'을 싣고 있는 로버트 필립슨 등은 서로 교차 참조할 법하지만, 서로에 대한 아무런 인용도 하고 있지 않았다(참고문헌에 나타나질 않는다). 마치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탓에 말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이 분야가 원래 그런 것인지, 단지 부분적인 우연일 뿐인지 의아하게 여겨졌다. 덧붙여, 참고문헌을 훑어보다가 관심을 갖게 됐는데, 로버트 필립슨의 <언어 제국주의>(1992) 같은 책은 다소 오래됐더라도 소개가 되면 좋겠다. 루이-장 칼베의 <세계 언어의 생태학>(2006) 같은 신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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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0-08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들, 거꾸로 읽는 바벨탑의 종말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가슴에 깊이 와 닿습니다. 하나라도 더 많은 언어를 배우고 또 익히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 듯한 기분입니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세계가 도래할 때 오히려 더욱 서로 알아듣지 못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며 서로 소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은 실로 '슬픈' 아이러니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성경 속 바베탑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하나의 언어가 도래한 '끔찍한' 상황에 대한 일종의 전복과 위반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08-10-09 22:59   좋아요 0 | URL
그게 참 많이 줄어들어도 5천개라고 하니 말이 통하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요...

딸기 2008-10-08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꾸란에서는 알라가 사람들이 서로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 애쓰라는 뜻으로 일부러 언어를 다르게 했다고 돼 있다더군요.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

로쟈 2008-10-09 23:00   좋아요 0 | URL
<언어전쟁>은 꾸란 얘기도 좀 나오더라구요...
 

며칠전 마이리스트(http://blog.aladin.co.kr/mramor/2334537)로 뽑아놓은 책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책과함께, 2008)에 대한 인터뷰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공저자들을 우리말 연구의 '드림팀'이라고 내가 불렀지만, 보통은 '수수께끼팀'이라고 불리는 모양이다. 저자들이 이번에 낸 것이 다섯번째 책인데, 이후에도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 한글 교양서가 꾸준히 이어지면 좋겠다...

공동작업을 통해 지금까지 다섯 권의 국어 관련 책을 펴낸 정주리 교수, 시정곤 교수, 최경봉 교수, 고(故) 박영준 교수(사진 왼쪽부터).

경향신문(08. 10. 08) "대중과 단절된 국어 존립의미 없다”

박영준 전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2007년 작고), 시정곤 KAIST 인문사회과학부·문화기술대학원 교수(44), 정주리 동서울대 교양과 교수(44),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43). 사람들은 이들을 ‘팀’이라고 불렀다. ‘수수께끼팀’이라고도 했다. 2002년 이들이 함께 펴낸 첫 책 <우리말의 수수께끼>(김영사) 덕분이다. 이후 <한국어가 사라진다면>(한겨레신문사), <영어공용화 국가의 말과 삶>(한국문화사), <역사가 새겨진 우리말 이야기>(고즈윈)를 잇따라 내놓았다. 우리말·글의 의미와 가치를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쓴 책들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책과함께)도 마찬가지다. 한글 창제 및 보급의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면서 한글의 원리와 기능을 쉽게 풀었다. 이 책은 정 교수가 개인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했지만 이들 ‘팀’의 다섯번째 ‘공동작업’ 결과물이다.

한글이 우리 것이니까 무조건 좋다가 아니라 제대로 된 평가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학자들끼리 아무리 얘기해봤자 소용없어요. 대중이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관심을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제대로 된 정보와 지식들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시 교수)

“학자들의 논문을 읽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됩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다른 사람들과 의미있게 나누는 게 필요합니다. 학자들이 세상과 단절하고 산다면 학문 자체가 존립할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최 교수)

고려대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함께 수학했던 이들이 ‘국어학의 대중화 작업’에 의기투합한 것은 2000년. 나이도, 근무지도, 관심 분야도 조금씩 달랐지만 국어를 대중화시키자는 생각만은 일치했다. 주제에 대해 함께 연구하고 각자 관심 있는 부분을 맡아 집필한 뒤 토론하고 수정하는 작업이 매번 1년씩 이어졌다. 성남·부산·대전·익산 등 근무지가 서로 다른 터라 모임을 갖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많이 애용했던 모임 장소가 서울역이었다.

주위의 시선이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대중서 쓸 시간에 논문 한 편 더 쓰라는 식이었다. 최 교수는 “지금도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교수라는 사람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모여서 할 만한 일이냐’고 문제 제기하는 분들도 있다”고 전하면서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우리들이라도 물꼬를 트자고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 교수도 “사실 논문 한 편 쓰는 것보다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책을 쓰는 게 더 힘들다”면서 “네 사람이 모두 같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해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에 펴낸 ‘한글에…’는 한글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만들어졌고, 어떻게 쓰였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한글을 민족주의적 측면에서만 강조하면서 단편적인 지식으로만 전달하는 대신 한글이 왜 필요한지 그 가치를 다시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시 교수는 “역사적으로 고유문자가 없는 민족의 말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면서 “고유문자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번쯤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일반 국민들이 모국어와 고유문자가 있는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기본 방향이 흔들리면 언어의 양극화가 심화된다”고 덧붙였다.

이들의 ‘공동작업’는 지난해 11월 팀의 리더였던 박영준 교수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잠시 주춤했다. 박 교수는 임종 직전까지 동료들에게 자신의 병세를 알리지 않았다. 이번 책이 1년이나 늦게 나온 이유다. 책의 마무리는 시 교수와 최 교수가 했다. “새 책을 가지고 박 교수님 산소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오겠죠. 하지만 초심만 변치 않는다면 공동작업은 계속되지 않을까요.”(시 교수) (김진우기자)

08. 10. 08.

P.S. 이 '수수께끼팀'에 영어학 전공자인 장영준 교수가 객원으로 가세해서 낸 책 두 권이 <한국어가 사라진다면>(한겨레출판, 2003)과 <영어 공용화 국가의 말과 삶>(한국문화사, 2004)이다. 후자는 문화관광부의 용역을 받아 수행한 연구보고서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두 책 모두 영어 공용화 문제에 관한 유용한 참고문헌이다. <한국어가 사라진다면>은 '2023년, 영어 식민지 대한민국을 가다'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2023년부터 영어 공용화가 시행되는 것으로 가정하여 쓴 흥미로운 책이다. 출간 당시의 리뷰를 참고로 옮겨놓는다.

한겨레(03. 09. 05) 영어 공용화 가상 암울한 미래 역설

이 책은 미래로 떠나는 여행이다. 영화 <백 투더 퓨처>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갖가지 모험을 즐기는 여행은 아니다. 머리로 떠나는 암울한 묵시록적 여행이다. 2003년 한국사회 현실에 기반해 합리적 추론과 개연성을 얽어가는 테마 여행이다. 독자는 영어 공용화가 전격 실시된 2023년부터 500년 뒤까지를 여행하게 된다.

2023년 새해 벽두 매스컴으로부터 영어 공용화를 실시한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한국의 영어 공용화는 거의 유례가 없는 경우에 속한다. 식민지 경험이 영어 사용으로 이어진 인도·필리핀 등과 같은 유형에 속하지 않고, 다민족·다종교를 아우르기 위한 필요 차원에서 영어를 사용한 측면이 강했던 싱가포르도 아니고, 지역별로 사용 언어가 달랐던 캐나다·벨기에도 아니었다.

영어 공용화 이후 30년이 흐르자, 정부가 한국어 보존이라는 특수목적을 위해 각 지역마다 설립했던 마지막 한국어학교가 폐교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학비는 영어학교의 절반밖에 안 됐는데도, 입학생이 너무 적어서다. 한국어와 영어를 일선 학교에서 동시에 교육한다는 애매한 원칙은 결국 “학교마다 재량에 맞게 영어와 한국어 중에서 선택하며 수행한다”는 자율원칙으로 선회했고, 학부모와 아이들은 영어학교로 쏠렸던 것이다. 좋은 영어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4~5살 때부터 입시과외를 시키는 사태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확산됐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풍조도 사라지지 않는다. “사투리 영어에 물들기 전 정통 영어를 숙달시켜야 한다는 또 다른 강박관념”이 자리잡기 시작해서다.

영어 공용화 60년 뒤, 정부는 전라도에서 영어를 말하는 ‘정글리시’나, 경상도에서 영어를 말하는 ‘갱글리시’가 만연하자, ‘표준 영어’를 제정한다. ‘아야’나 ‘어머’처럼 어떤 상황에서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오는 말들이 ‘웁스’(oups) 등으로 대체된다. 한국어는 가난한 지역이나 산간벽지에서 겨우 들을 수 있게 된다. 100년 뒤엔 중국어 공용화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마침내 2523년엔 400년 전 매설된 타임캡슐에서 ‘우리말’(코리언)’이라는 제목의 문법책이 발견되면서, 낯선 그 언어를 영어에 섞어 쓰는 게 유식함의 표지처럼 되는 현상이 생긴다.

시정곤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등 5명의 학자가 1년이 넘게 작업한 이 가상의 시나리오는 언어가 우리 일상과 얼마나 질기게 연결돼 있는지, 그래서 결국 영어 공용화는 우리 문화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떤 학술적 접근보다 실감나게 전달하고 있다.(조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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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돈강>의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의 단편집이 새롭게 출간됐다. <숄로호프 단편선>(민음사, 2008). 중편 '인간의 운명'(1957)외에 단편집 <돈 강 이야기>(1926)에서 뽑은 13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인간의 운명>이나 <돈강 이야기>는 예전에 한번 소개된 적이 있다(영화 <인간의 운명>은 유튜브에서 그런대로 볼 수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kWRPkMks3i8 참조). 겸사겸사 남아 있는 작품들의 리스트를 뽑아놓는다. 참고로 숄로호프는 196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간단한 스케치는 http://www.youtube.com/watch?v=glf2fMWs4bg 참조). 낼모레면 올해의 수상자가 발표될 텐데, 스웨덴 언론의 추측대로 르 클레지오가 수상하게 될지 궁금하다. 러시아작가의 수상도 오래 전이어서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텐데... 

아래는 중국에서 나온 '연환화' <고요한 돈강>. 예전엔 이런 책도 나왔었다! 대하장편인 <고요한 돈강>의 줄거리를 잡는 데 유익했던 책이다(물론 율브린너 주연의 영화도 도움을 줄 수 있겠다). 러시아판 <고요한 돈강>에서 두 주인공 그리고리와 악시냐의 러브신은 http://www.youtube.com/watch?v=pB8CoKkF8aQ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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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로호프 단편선
미하일 숄로호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27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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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돈강 1
미하일 숄로호프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8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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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돈강 2
미하일 숄로호프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8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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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되는 처녀지 - 상- 일월교양문예 15
미하일 숄로호프 지음, 현원창 옮김 / 일월서각 / 1986년 5월
5,000원 → 4,500원(10%할인) / 마일리지 2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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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08 16:57   좋아요 0 | URL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이 집단창작이라고 한때 스캔들이 난 적 있는데 간단히 소개해 주시겠어요?

로쟈 2008-10-08 17:33   좋아요 0 | URL
지금 <숄로호프 단편선>은 안 갖고 있는데, 역자후기를 보니 비교적 최근에 초고가 발견되고 그에 대한 연구서가 나암으로써 저작권 문제는 일단락됐다고 하네요...
 

교수신문의 '서평'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945). 인문사회과학 시리즈에 대한 '품평'을 담고 있는데, 유명시리즈에 대한 비판과 별로 주목되지 않았던 시리즈에 대한 호평을 포함하고 있어서 한번쯤 읽고 참고할 만하다. '인문사회과학 시리즈의 가벼움 혹은 뚝심'이 부제다...

교수신문(08. 10. 06) 저자의 유명세를 감당할 진정성은 있는가

아마도 대다수가 동의할 인문사회과학의 성격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그 본질이 기성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 제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식 자체의 창조와 환기에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경쟁과 생존의 방정식으로 환원되는 이 시대의 일차원성이 심화될수록, 비루하기 짝이 없는 문제틀 전복해 새롭게 읽어내겠다는 인문사회과학의 야심은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문사회과학의 이러한 야심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학자들의 연구가 활성화돼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연구 성과를 흡수하고, 다시 비판적으로 내뱉을 대중의 존재와 그 대중과 인문학을 접선시킬 ‘가독성’ 있는 책들의 존재가 요구된다. 요즘 서점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문사회과학 시리즈물은 바로 이 가독성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관심을 끄는 시리즈로는 우선 생각의 나무의 ‘問라이브러리’ 시리즈가 있다. H(Humanities), A(Arts), L(Literature) 등 세부 시리즈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에 대해 출판사는 ‘답이 아닌 질문의 절실함을 위하여’라는 모토 아래 20세기 극복과 21세기 비전 추구를 통해 지식의 공공성 회복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기획됐다고 밝히고 있다.

김우창, 도정일, 최장집, 장회익, 강수돌, 윤평중과 같이 무게감 있는 논자들을 통해 ‘정의와 정의의 조건’,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등 오늘의 우리가 제기해야 될 물음들을 제기하고 있고, 이후에도 박명림, 임지현, 이어령 등 저명한 필진들의 책을 준지하고 있다.

우선 윤평중 교수가 ‘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에서 리영희, 송두율 교수에 대해 차분하게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 눈에 띈다. 윤 교수는 리영희 교수에 대해서, 분명 한국 지성사에 남긴 흔적이 작지 않지만, 그 과오도 분명히 해야한다면서, 특히 리 교수를 옹호하는 일부 교수들의 비합리적이고 편향된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이미 일간지를 통해 문제가 됐던 윤 교수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 앞으로 지식인 사회가 어떻게 반응을 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강수돌 교수가 경쟁의 내면화를 자기소외와 연결하는 대목도 주목해야 하는데,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목소리 높이기 좋아하는 우리 사회(특히 지식인들) 특유의 풍토가 실은 자기비판과 성찰이라는 의무는 방기했음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정일 교수가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에서 시장전체주의를 인문학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김우창, 장회익, 최장집의 책들은 촌철살인의 맛이 다소 떨어지긴 해도 무난하게 시대의 문제점과 해법을 진단하고 있다.

그런데 윤 교수가 표현한 자기 비판적 계몽의 정신을 바로 이 ‘問라이브러리’ 시리즈 자체에 적용하면 어떨까. 이 시리즈는 저평한 필진에서 수려한 표지 그리고 일목요연한 내용 전개에 이르기까지 가독성을 최대한 고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페이지를 술술 넘기게 하는 바로 그 깔끔함이 오히려 마음에 걸린다. 왜냐하면 인문사회과학의 생명은 우리의 ‘지금과 여기(jetzt und hier)’를 불편하게 만들고, 페이지 하나를 두고서도 며칠 밤을 고심하게 하는 거친 생경스러움에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 측은 유명 지식인들이 직접 집필한 책이라는 점을 자랑스레 내세우고 있지만, 저자의 유명세가 책의 무게를 더하는 그러한 책이 과연 진정성이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일종의 우울증 속에 있는 듯이 보이는 사회와 학계에 신선한 화두를 던져보기 위해 기획됐다는 새물결의 ‘What’s up’시리즈는 보다 발랄한 외양을 띠고 있다. 바디우, 지젝, 아감벤 등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는 필자들을 통해 ‘사도 바울-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호모사케르-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등의 제목으로 한층 세계적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문제인가. 승승장구(?)하는 자본주의의에 대한 문제제기라면 이미 지겹게 들어오지 않았던가. 필자들의 새로움은 자본주의, 제국, 시대에 대한 문제제기를 생명, 사도 바울, 쓰레기와 같은 독특한 우회로를 통해 행하고자 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언어와 개념의 독창성이 국내 논자들의 신문 사설 같은 건조함보다 인기가 있는 이유일 것이다. 다만 외국 학자들의 논의를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책의 내용에 대한 설명도 부족해, 대체 우리의 어떤 현실 문제와 연관할 수 있을지 쉽사리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지젝, 아감벤이나 바디우의 이름이 그 자체로는 신선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이름이 일종의 지적 트랜드로서 유행하고 있는 국내에서는 그다지 신선해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이다. 지젝, 아감벤이 정말로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들일까

이후 출판사의 ‘아주 특별한 상식 NN(NO-NONSENSE)’ 시리즈는 세계화, 기후변화, 공정 무역, 테러리즘 등 시대의 중요한 쟁점들을 친절하게 검토하고 있다. 일목요연한 구성은 짜임새가 있으나, 문제를 절실하게 제기하는 인문학서적이라기보다는 논술용 참고서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와 비슷한 포맷으로 시중에는 웅진 지식 하우스의 고정관념 Q시리즈 외에 다양한 시리즈물들이 나와 있는데, 가독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인문학서라고 보기에는 무게가 한참 떨어지는 책들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유려하지만 가독성에 대한 요구에 강박당한 시리즈물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귀감이 될 만한 시리즈물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선인 출판사의 구술자료 총서다.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내가 겪은 건국과 갈등’, ‘빼앗긴 시대 빼앗긴 시절-제주도 민중들의 이야기’ 등의 제목을 단 시리즈는 유명한 학자도 아니고, 세련된 문체를 구사하는 필자들은 아니지만, 진실함의 곡진함 곧 삶의 진정성을 가장 절절하게 전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의 신산했던 삶이 오늘의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가독성을 이유로 밋밋한 시리즈물을 찍어내기에 여념이 없는 풍토를 반성하게 한다.



아르케의 ‘희망제작소 뿌리총서’도 진지한 문제의식으로 뭉친 시리즈이다. 일본 저자들의 책을 번역했다는 점이 다소 눈에 걸리지만, ‘창발마을 만들기’, ‘1% 너머로 보는 지역활성화’등 이른바 풀뿌리 자치 운동에 대한 실천적 모색을 한다는 점이 돋보인다.  한편 가독성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뚝심있는 행보를 보여주는 시리즈물들도 꽤 눈에 띈다.



성균관대 출판부의 ‘유학사상가 총서시리즈’나 다할미디어의 ‘호남 역사문화 연구총서’도 유행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다만, 학술적 가치는 높으나, 인문학적인 문제의식을 불어넣기에는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아쉬운 시리즈들이다.(오주훈 기자)

08. 10.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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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7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8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8 17:00   좋아요 0 | URL
부모님들의 신산한 삶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애매하네요.

로쟈 2008-10-08 17:35   좋아요 0 | URL
기자의 선호 같습니다. 구술자료 자체가 인문학은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