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파일들을 뒤적이다가 오래전에 써둔 글을 발견했다. 기억에 99년 12월말쯤 한 독서강좌에서 강의안으로 사용한 것인데(<기형도 전집>이 나온 걸 빌미로 하게 된 강의였다), 언제가 쓰고자 하는 '기형도론'의 초안 성격을 갖는다. 자료 정리 차원에서 여기에 옮겨둔다(각주는 제외하거나 압축하였다).

 

 

 


1. 편집증/분열증적 문명

남자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정으로부터, 혹은 여자로부터. 어느쪽이든 멋지지 않느냐. 여자들이나 아이들도 서투른 만류 공작 같은 하고 있을 틈이 있으면, 남겨지는 것보다 먼저 도망치는 쪽이 낫다. 행선지 같은 건 알게 뭐냐. 어쨌든 도망쳐라, 도망쳐라, 어디까지든... 여기서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인간에게는 두 형태, 즉 파라노이아paranoia형과 스키조프레니아schizophrenia형이 있다는 최근의 주장이다. 파라노이아라는 건 편집증형을 말하는데, 과거의 모든 일을 적분(=통합)integrate하여 짊어지고 있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10억원을 가지고 있는 구두쇠가 10만원만 더, 5만원만 더, 라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에 대해, 스키조프레니아라는 건 분열증형으로, 그때마다 시점 제로에서 미분(=차이화)differentiate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항상 <지금>의 상황을 예민하게 살피면서 순간순간에 모든 것을 거는 도박꾼 같은 사람이 그 전형이다.

가장 기본적인 편집증형의 행동이라고 한다면, <정주(定住)하는> 것이 될 것이다. 가정을 이루고, 그곳을 중심으로 영토의 확대를 도모하는 동시에, 재산을 산더미처럼 축적한다. 아내를 성적으로 독점하고, 태어난 자식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가정의 발전을 도모한다. 이 게임은 도중에서 그만두면 진다. <그만둘 수 없다, 멈출 수 없다>를 계속하여, 어쩔 수 없이 편집증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병이라고 하면 병이지만, 근대 문명은 이런 편집증적 추진력에 의해 여기까지 성장해온 것이다... 그런데, 사태가 급변하기라도 하면, 편집증형은 약해진다. 잘못하다가는 울타리 안에 들어박혀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가 목숨을 바치게 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여기서 <정주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등장하는 것이 <도망치는 사람>이다. 이 녀석은 무슨 일이 있으면 도망친다. 머무르지 않고 아무튼 도망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이 가볍지 않으면 안된다. 가정이라는 중심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선에 몸을 둔다. 재산을 부지런히 모으거나, 가장으로서 처자식 위에 군림하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때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이용하고, 대를 이을 아이도 적당하게 씨를 뿌려놓고 뒷일은 운명에 맡겨버린다. 의지가 되는 것은 사태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센스, 우연에 대한 직감, 그것뿐이다. 이렇게 되면 정말 분열증형이라 할 만하다... <편집증적 인간>으로부터 <분열증적 인간>으로, <정주하는 문명>에서 <도망치는 문명>으로의 대전환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편집증적 인간은 모든 과거를 적분(=통합)하여 등뒤에 짊어지고 그것에 매달려 있는 것을 뜻한다. 편집증적 인간은 <따라잡고 뛰어넘어라> 경주에 열심인 경주자이다. 그는 한발이라도 앞으로 나가자, 조금이라도 많이 축적하자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계속 열심이다. 한편, 분열증형은 그때마다 시점 제로에서 미분(=차이화)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분열증적 인간은 <따라잡고 뛰어넘어라> 경주에서 추월당했다고 하더라도, 금방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고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달려가버린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아이들은 스키조 키즈다. 금방 정신이 산만해지고, 한눈을 팔고, 다른 데로 빠진다. 오로지 <따라잡고 뛰어넘어라>의 편집증적 추진력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근대 사회는 그러한 스키조 키즈를 강인하게 편집증적으로 만들고 경주 과정으로 억지로 끌어들이는 일을 존립 조건으로 하고 있다... 일정한 방향으로 숨 가쁘게 달리는 편집증형의 자본주의적 인간은 이제 종언을 고하고 있다. 그 후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아사다 아키라, <도주론>)

 

 

 

 


2. 20세기 한국시와 기형도

20세기 한국시와 기형도를 읽는데 있어서 편집증/분열증의 도식이 왜 필요한가? 대답은 간단하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재미에 맛을 들였고, 급속도로 전자 미디어화되어 가는 문화와 삶의 양태 또한 이러한 재미의 윤리(fun ethic)를 권유하고 부추긴다.(나에게 재미가 있으면 좋은 거고, 없으면 나쁜 거.) 그것이 대안이 될지 어떨지는 속단할 수 없다. “어쨌든, 분열증적인 운동성과 편집증적인 억압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니까. 다만, 여기서는 20세기 한국시의 편집증/분열증적 시의 운동과 계보를 간략하게 더듬어보는 것으로 기형도 읽기에 대한 예비공작을 대신하도록 한다.

<황무지>(1922)의 시인이자, 아마도 가장 유명한 20세기 시인, T. S. 엘리엇은 시뿐만 아니라 시론에서도 정력적이었는데, 그가 유달리 강조한 것은 전통과 역사의식이었다. 모름지기 25세 이후에도 시를 쓰려는 자는 역사에 대한 “감”을 먼저 연마해야 한다는 것. 그가 말하는 역사는 단순한 시사(詩史)를 넘어서 종교사, 종교적/상징적 상상력의 역사에 걸쳐 있지만, 하여간에 시란 것이 젊은 날의 겉멋이나 치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줄곧 강조하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김춘수는 (25세 이후에도?) 시론(詩論)을 갖고 있지 않은 시인은 천재이거나 아마추어라고 평했는데, 시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 혹은 관념(idea)이 없다면 일찌감치 시는 그만두는 것이 좋다는 뜻을 그의 주장은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시론이란 것이 모국어에 대한 감각과 시사(詩史)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가능하지 않다고 할 때(김춘수 또한 시론(詩論)에 정력적인 시인이며 여러 권의 시론집을 낸 바 있다),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시의 전통과 역사적 전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에 대한 부단한 의식 속에서, 그것과 맞서며 아주 조금씩 전진해나갈 따름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편집증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인은 그 이전에 씌어진 모든 시를 다 읽고 나서야 거기에 한 문장, 혹은 한 글자 덧붙일 수 있을 따름이다. 편집증적인 시의 역사?..

그러한 시의 역사를 재구성할 때, 20세기 한국시란 무엇이었나? 20세기 초에 한국시의 기초를 이룬 시인들의 이름으로 김소월(魂의 시), 이육사(精神의 시), 이상(技巧의 시) 등등의 계보를 지적할 수 있을 테지만(김윤식의 분류이다), 20세기를 통틀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시업(詩業) 60년을 넘긴 미당 서정주를 들 것이다. 그의 정치적 과오 때문에 한때 미당(未堂)보다는 말당(末堂)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그가 우리 부족시의 족장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을 자임하는 그의 시를 보라(*이 글은 그가 작고하기 이전에 씌어졌다).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시를 못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깎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깎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이/ 아내 손톱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시를 못쓰날에 할망구 손톱 발톱 깎어주며 마음 달래는 일도 “이뿌게” 시로 만드는 그의 솜씨는 대가급이다. 그러나 서정주의 시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있는, 체념적 달관 혹은 달관적 체념의 세계(비평가 김현은 서정주의 정신주의에 대해서 “그의 정신주의는 그가 그의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않는 데서 기인하는 태도의 희극”이라고 적은 바 있다)는 이념(idea), 혹은 형이상(形而上)을 배제한 세계이다(“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추천사(鞦韆詞)>는 구절에는 그의 체념적 달관이 집약되어 있다. 이 이념-이후에 그는 “가난이란 한낱 襤樓에 지나지 않는다/.../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無等을 부며>)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것이 또한 달관적 체념의 세계이다).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같이 활동했던 청마 유치환은 서정주와 달리 이념적 ‘깃발’을 표나게 내세운 바 있으나, 언어적 조탁에 있어서 그에 미치지 못했고, 한자어투로 이루어진 그의 남성적 어조는 계보를 얻지 못했다(청마를 가까이 한 이에 김춘수가 있지만, 김춘수의 여성적 세계는 유치환의 남성적 세계와 대조적이다. 김춘수 자신이 시인하는 바이지만, 그의 초기시는 서정주의 계보에 속한다). 그리고 그의 시업(詩業) 또한 너무 일찍 한국시사에서 단절되었다. 그리하여 멀리는 40년대부터, 한국시단은 미당과 그 일가(一家)에 의해 접수된다(한국시사에서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사례인 ‘청록파’의 경우, 박두진의 몇몇 시편들을 제외하면 비이념적 정관적(靜觀的)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다. 박목월의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구름에 달가듯”한 세계엔 이념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그림(=풍경)만 남고 목소리가 빠진 시는 왜소하다).

그리하여 여기에 유사-오디푸스 콤플렉스가 개입한다. 미당 이후의 시인은 하여간에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미당과 싸워야 했다. 그를 넘어서거나 그와 다른 세계로 질주해야만 했던 것이다. 5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이 잠시 시림(詩林)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곧 빈수레였다는 것이 들통난다. 그들은 木馬를 타고간 소녀의 옷자락 얘기만 잠시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언어(말부림)’를 가지고 미당에 맞서 그보다 윗길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고은 정도가 서정주의 어법을 가지고도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남은 희귀한 사례이다), 그의 시업이 60년을 넘길 수 있을는지?

미당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이라는 것은 미당의 이념적 ‘퇴행’을 걸고 넘어질 수 있는 이념이어야 했다. 60년대 김수영과 김춘수는 이 점에서 제각각의 방식이긴 하지만, 뚜렷하다. 60년대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이념적 화두가 ‘자유’였다는 점에서 김수영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손색이 없다. “달나라의 장난” 같은 그의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노래, 아니 절규한 것이 바로 자유였기 때문이다. 산문적인 그의 시의 어법 또한 미당과는 전혀 종류를 달리하였다. 4.19 이후에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그 방을 생각하며>)고 그는 적고 있는데, 조금 다른 맥락에서, 김수영은 미당의 그늘 아래 놓인 해방 이후 한국시사에서 자신의 ‘방’을 마련한 드문 예에 속한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김춘수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미당의 빈 자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는 언어의 이념(이라기보다는 관념)을 자신의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이 또한 의미(=역사)로부터의 도피, 혹은 퇴행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힘든 경우지만, 어쨌거나 언어의 가지 끝에 매달리는 데는 성공한다. 이념의 부재로 미당의 시를 특징지울 수 있다면, 김춘수의 시는 한술 더 떠서 의미의 부재를 지향한다. 언어적 자의식을 대표하는 그에게 시는 “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고 “얼굴을 가리운 나의 新婦”이다. 그것은 말부림의 세계가 아니라, 말 비우기의 세계, 의미의 빈 그릇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어쨌거나 김수영과 김춘수에 와서 한국시는 미당시에서 탈색된 근대성(=시대성)을 다시 획득한다. 그러나 그것은 김수영의 이른 죽음을 대가로 치른 것이었다. 그리고 맞은 70년대에도 미당시는 여전히 도전/극복의 대상이다.

젊은 전사들의 이름으로 평론가 김현은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을 지목하고 있는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즐거운 편지>)의 황동규는 “물 빛 라일락의 빛과 香”을 가진 미당의 “永遠” 대신에 비극적 세계인식의 “자세”를 대립시키고,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병신 같은 女子, 시집 같은 女子,...”(<한 잎의 女子>)의 오규원은 대상과 언어와의 관계를 의혹이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연기(緣起)론 세계인식에 딴지를 건다. 거기에 “나는 별아저씨, 바람 남편이지”의 시인 정현종의 “숨통“과 “걸음걸이”가 미당의 행보를 뒤쫓는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70년대를 증언할 수 있는 시인은 70년대의 포문을 연 <오적(五賊)>(1970)의 김지하이다. 그는 대뜸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던가. “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이 황토(黃土)의 땅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일에 비하면, 조곤조곤한 시들은 좀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70년대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것 또한 그의 ‘대표성’을 수긍하게 한다. 시 또한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마땅했을 시기가 아니었던가.

80년대 한국시는 80년 광주에서 시작된다. 그보다 조금 먼저 등단한 이성복은 이 “정든 유곽”의 땅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진단서를 제출한 바 있지만(이성복은 기형도의 전사(前史)로서 빼놓을 수 없다.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그날>)라는 진술은 기형도의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안개>)란 진술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형도에 와서 그 “아픔”, “신음소리”는 “개인적인 불행”으로 이미 내면화된다), 가장 명료하게 80년대를 규정한 이는 황지우이다.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에프킬라를 뿌리며>) 여기서 황지우의 “초토”는 김지하의 “황토”에 견줄 만하다.

80년대는 죽음의 연대였고, 시인들은 네크로필리야(necrophilia)에 들린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그 죽음을 파헤치고 음미하였다. 죽음에 분노하였고, 그 부채의식에 통곡하였다. 간혹 미치기도 하였다. “아싸라비야, 도로아미타불”이나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찍이 나는>)고 한 최승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성복의 어법을 빌리자면, “모두 죽었는데, 아무도 죽은 줄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죽음의 기운이 조금씩 떨쳐지는 것은 87년 이후이다. 그 이후 한국사회는 개량적․형식적 민주화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이어진 90년대에 80년대는 이미 “과거”가 돼 버리고, “후일담”이 횡행한다(한국사회는 가끔 (나쁜 쪽으로) 정신분열증적이다. 과거-망각(청산이 아니다!)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듯하다. 정신분열증적인 포스트-모던사회에서의 선전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3. 기형도-정거장-고드름

잠시 에둘러왔지만, 기형도의 시가 자리하는 건 80년대 말이다. 100년의 한국시사가 두 쪽에 요약될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편집증적인 시읽기에 있어서) 시의 전사(前史)를 모르고 한 시인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전공작이 필요하였다. 미리 말하자면, 기형도의 시는 죽음-의식과 비관적 세계인식의 한 극점으로 평가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80년대적이지만, 그의 비관론이 개인사적인 근원을 더 강하게 갖는다는 점에서 80년대를 넘어선다. 그렇다고 90년대적일까?

참고로, 90년대적인 시(현상)으로 장정일과 유하의 경우를 들고 싶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의 장정일과 <무림일기>(1989),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유하는 키치적인 상상력과 패러디적인 기법으로 무장하고 “진지한 시”의 전통에 냉소를 퍼붓는다.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식혀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시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 무렵 하남 당에서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아,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大血劫)/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空輸無極破天掌)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이들의 “가벼운 흥분”과 재미의 세계는 80년대적인 무거움과 극적이면서 단호하게 결별한다. 이는 새로운 시이면서, 시의 끝(=종말)이다. 근황? 장정일은 일찍이 시를 그만 두었고, 유하는 영화계 주변을 맴돌다가 다시 시의 초심(初心)으로 되돌가겠다며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를 발표하고 욕을 먹는다.

하긴 90년대의 많은 시인들이 기형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그의 시에도 불운한 시대의 징후/이미지들이 알레고리나 상징의 형태로 들어서 있다. 하지만 그 징후/이미지들은 그의 “개인적인 불행”과 겹쳐지면서 증폭되는 것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니다. 그는 어떠한 “후일담”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집요하게 비관적이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오래된 書籍>)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장미빛 인생>)
“자시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가란 말인가!”(<여행자>)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진눈깨비>)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

이 비관론의 출처는 개인적인 심리적 외상(外傷, trauma)이다. 그 상처로 여러 평자들이 지목하고 있는 바는, 유년/소년시절의 가난과 청년시절의 실연이다. 거기에 덧붙여서 소년시절 누이의 죽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러한 상처는 상징이 아니다. 대리체험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이다. “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고 평론가 김현이 적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또한 그것이다. 그러한 상처 이후에 기형도에겐 집이 없다.

여기서 그가 떠나온 자리를 기록해 두기로 하자. 어린시절의 가족사와 가난을 증언하고 있는 여러 시편 가운데서 <폭풍의 언덕>의 끝부분: “다음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폭풍의 밤마다 언덕에 오르는 일을 그만두엇다. 무수한 변증의 비며을 지르는 풀잎을 사납게 베어 넘어뜨리며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였다.”

보라,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추억>) “딱딱한 손”이란 건 유사-죽음의 이미지이다. ‘상처’ 이후에 그에겐 집이 없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 다시는 그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물 속의 사막>의 끝부분: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장마통에 집을 버”린 개처럼 (눈)물마저 집을 버려서 이젠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나의 악몽조차 적셔주지(=위로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라는 도저한 비관조차도 빌딩 속이라는 이 도시적 공간에서는 아무런 반향을 얻지 못한다. 이런 비관이 그에게 포즈가 아니었다니!). 그런 그의 마음은 죽음이 잠시 유예된 거처일 뿐이며, “저녁의 정거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시의 이러한 결말은 서두에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려다”고 한 화자의 의지와 모순된다. 그의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행위(포기/체념)가 역설적으로 그에겐 마지막 남은 희망이라는 뜻일까? 모든 희망을 포기함으로써, 희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그는 역설적으로 희망의 문턱에 서게 되는 것일까? 혹 그에게 희망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이 누추한 육체” 속에 가두어진 삶의 비극성으로부터의 해방이 어찌 희망이 아닐 수 있겠는가! 어쨌거나, 그는 추억이 잠시 머물다 가거나 손을 깨물고 가는 정거장이다. 또 길 위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남발하는 여행자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러한 ‘여행’의 이미지들이 다른 세계로의 아무런 탈출구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인도(印度)로 가지도 않고 타히티로 가지도 않는다. 그는 항상 떠나되 언제나 제자리이다. 그는 정거장이되, 모든 길들이 흘러(들어)오는 정거장이다. 그는 정거장(停車場)에 정거(停居)되어 있다. 그는 거기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왜? 그에게 이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어라고 중얼거리는가? “어둠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에 의하면 일생을 그르친 것은 오히려 희망이다. 그는 희망에 떠밀려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여행을 하지만, 결국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조차],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여행자>) 그래서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하지만,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여행자>).

기형도의 시는 꿈을 꾸는 시가 아니라, 추억에 들려 있는, 사로잡혀 있는 시이다. 그는 편집증적으로 추억에 매달리며, 그것에 시달린다.(추억에 바쳐진 시들의 예시는 장석주의 <기형도, 혹은 길 위에서의 중얼거림> 참조.) 추억은 그에게 상처이며 억압이고 죽음에의 유혹이다. 추억은, 혹은 추억의 통합/집적은 그를 더욱 지치게 하고 늙게 만든다. 그는 일찍이 집을 잃고, <정주민(定住民)>의 대열에서 이탈했지만, 그렇다고 마음 가볍게 <유량민/유목민>의 대열에 합류하지도 못한다. 그는 자유롭게 증발하지도 못하고(=유랑민), 물이 되어 흘러 대지에 스며들지도(=정주민) 않는 고드름과도 같다. 그는 문밖에서 서성이며 밤새 처마끝을 지키고 서 있다. 그가 견디는 외로운 천형을 보라.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오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벼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고드름의 이미지는 기형도적 편집증의 정점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그토록 가늘은 유리막대처럼 위태로운 모습”(<폭풍의 언덕>)의 반복이면서, 그 자신의 “낡아바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와 조응하는 이미지이다: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위험한 가계․1969>) 등에서 보여지듯이, 그의 잠(=안식)은 일시적이고, 그래서 불안하다. 그것은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라는 아버지의 진술이나, “나는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러닝 셔츠가 흙투성이가 되어 어디만큼 날아가는가를 두눈 부릅뜨고 헤아려보았다.”(<폭풍의 언덕>) 같은 구절과 조응한다. “가난한 아버지” “아버지, 불쌍한 내 장난감/ 내가 그린, 물그림 아버지”(<너무 큰 등받이의자>) 등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무력함’, ‘굳게 뿌리내리지 못함’은 그에게서 ‘집없음’(→여행자→정거장)으로 표상되는데, 그의 ‘정거장’은 동적인 운동성보다는 정적인 정체(停滯)성을 주된 자질로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거장은 고드름과 통한다.

그의 꿈, 고드름의 (냉각된!) 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생을 적시는 것이다. 기형도의 시는 딱딱하게 굳어진 눈물의 시이고, 고체화된 액성의 시이다. 오오, 그런 그의 시를 우리가 어찌 비웃을 것이냐, 버려둘 것이냐!..

 

 



 

 

4. 다시, 분열증적 읽기

대강 건너뛰면서 기형도 시의 한 가지 주제를 살펴보았다. 추억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이 고드름이란 이미지로 극화되는 과정에 어떤 논리를 부여하고 싶었지만, 결과는 신통찮다. 많은 걸 건너뛰고 생략했기 때문이다(시간관계상!). 기형도 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그의 보편문법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의 ‘편집증적’ 읽기 또한 다시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시에 등장하는 모든 이미지들의 반복을 좇아가며 거기에 논리를 부여하려는 편집증적 읽기, 시사(詩史)적인 맥락에 대한 집착적 읽기에서 놓여난다면, 우리는 시집의 아무 페이지나 읽고 또 덮어둘 수 있을 것이다. 아무 구절이나 암송하고, 간혹 정거장이나 혹은 술집에서 되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잊을 것이다. 시에 대해서, 시인에 대해서... 왜냐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는 나는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生의 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燈皮를 다 닦아내는 薄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바람은 그대 쪽으로>)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生의 僻地”를 두고 얼마나 많은 밤을 메마른 눈물로, 불면으로 지새웠던가(손수건을 씹어댔던가!). 그럼에도, 여전한 것...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沈黙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다닌다.”

그리하여, 현명한 당신은 이제 알 것이다. 이 모두가 다만 침묵하기 위해서 말해진 것일 뿐이라는 것을!... (어서 도망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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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무 때문에 토요일 오전부터 학교에 나왔다. 귀국 이후엔 처음이다. 조용할 줄 알았는데, 점심을 먹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북적거린다(대개 나와 같은 종류의 용무이다). 한 편의 프로그램성 글을 작성하는 것이 오늘의 할일인데, 아직 동료들의 글이 도착하지 않은 걸 핑계로 잠시 쉬고 있다. 이 잡는 기분으로 몇 자 적는다. 오는 길에 두 종의 토요일자 신문에서 북리뷰도 읽은 티를 낼 겸.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가 출간예정이라는 건 지난번 글에서 언급한바 있는데, 책은 지난주에 서점에 깔렸고 나는 어제 출판사측으로부터 책을 건네받았다. 옮긴이 서문에 내 이름이 언급돼 있는데, 러시아어 인명과 작품명을 교정한 인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연은 전적으로 우연에 기인한다. 모스크바에서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던 중 우연히 역자가 운영하는 벤야민 카페에 '모스크바 일기'가 번역/소개돼 있다는 내용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알게 되었던 것. 카페에 올라와 있던 초역에는 러시아어 인명/지명 등이 잘못 표기돼 있는 경우가 많아서 '잠자는 숲속의 벤야민'이란 통신문을 통해 지적한바 있는데, 눈 밝은 출판사측에서 연락을 취해 왔다. 귀국 준비 때문에 별로 경황이 없었지만, 나는 보내준 '일기' 원고파일의 절반 가량을 훑어보고 귀국했다.

 

교정은 흔쾌히 맡기로 했지만, 귀국 이후에 이런저런 잡일과 병치레로 맡은 일을 만족할 만큼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은근히 걱정이 없지 않았지만, 책이 현재의 깔끔한 모양새로 나온 것은 출판사측의 '전문가적' 편집/교정 덕분이다. (아마도 문교부의 '외래어 표기안'대로) 러시아어의 무성음화를 우리말 표기에 반영한 것 정도가 나로선 약간 낯설게 느껴지는데('메이에르홀드(Meyerhold)'를 '메이에르홀트'로 표기하는 식), 그러한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헷갈릴 건 없다고 본다. 61쪽에서 펠트로 만든 장화 '발란키스'도 내가 갖고 있는 영어본(1986년)과 러시아어본(1997년)에는 '발렌키'로 돼 있는데, 이게 선택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책 표지에도 사진으로 들어가 있는 '바실리' 성당을 '바실리우스' 성당이라고 (라틴식으로) 표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경우는 러시아쪽 표기를 살려주는 게 낫지 않나 싶다(물론 우리말 표기가 러시아쪽 표기를 전적으로 존중하는 건 아니다. 예컨대, 러시아어 '시비리'는 우리말로 '시베리아'라고 표기된다. 이미 굳어져 버렸기 때문에 고치지 않는 것).

 

잘 읽히는 책이지만, 가끔 미심쩍다고 생각되는 대목들이 없지는 않은바, 내가 읽은 범위내에서 두어 가지를 지적한다(나는 오는 길에 63쪽까지 읽었다). 37쪽에서, 독일과 러시아 신문 기사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는 대목인데, "500-600줄 사이의 기사들은 예외없이 그렇다"는 "여기서는(=러시아에서는) 500-600줄 짜리 기사가 드물지 않다"란 내용이다. 독일 신문들은 짤막하게 '결론'을 제시하지만, 러시아 신문들은 자료를 폭넓게 제시한다는 것(이건 요즘도 그런 편이다). 60쪽에서, 구걸을 다루고 있는 대목인데, "거리 구석구석, 특히 외국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있는 구역"은 "거리 곳곳에, 특히 외국인들의 비즈니스 구역" 정도의 뜻이지 않을까 싶다. 외국인(사업가들)이 적선에 더 관대하기 때문에 걸인들이 더 모인다는 내용일 테니까. 좌판을 벌인다는 건, (비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면) 우리의 경우 노점상을 뜻하는데, 1926년에 외국인들이 모스크바 시내 한복판에서 노점상을 할 일은 없어 보인다.

 

61쪽의 '어린 노숙자' 사진은 영어본에 따르면, 지가 베르토프의 뉴스필름에서 따온 것이다(주석의 경우 영어본이 더 자세한 경우가 많았다). 이 사진은 물론(!) 러시아어본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62쪽,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비실제적 환상"에서 '환상'은 영어나 러시아어본에서모두 복수형이고 fantasies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판타지'이다('환상'은 단수형으로만 쓴다). 문맥상 '환상'과는 약간 다른 의미여야 할 듯하다. 그리고 63쪽, 불가코프의 <투르빈가의 나날들> 공연을 보러완 청중(=관객)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대목인데, "여기엔 코뮤니스트들은 거의 하나도 없었고 검정 혹은 푸른 색 블라우스도 눈에 띄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흔히 여성용 옷을 지칭하는 '블라우스'는 남성용 잠바나 제복 정도로 바뀌어야 할 듯싶다. 영어본은 tunic이라고 옮기고 있고, 러시아어로는 '블루즈'란 단어를 쓰고 있는데 '블루즈'는 여성용 블라우스와 함께 남성용 잠바도 뜻한다. 내 생각에 검정 잠바, 파란 잠바는 밀리찌야(경찰) 등을 가리키는 환유가 아닌가 싶다...

 

 

 

 

 

 

 

 

 

 

그건 그렇고, 책 얘기나 (시간관계상) 얼른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제일 먼저 꼽을 책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소설 <바람의 그림자>(문학과지성사)이다. 북리뷰란들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지고 있는 작품이므로 별다른 얘기를 덧붙이지 않겠다. 우리에게 처음 소개되는 작가 사폰은 스페인 출신으로 그의 이 작품은 20개국의 언어로 번역된 대형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도대체 스페인 사람들은 무슨 소설을 읽는가라는 주변적인 관심만 가지고도 읽어볼 만하다고 본다. 대중적 평가뿐만 아니라 문학성에 있어서도 여러 사람이 보증을 서고 있는 작품. 문학과지성사가 파스칼 키냐르에 이어서 새롭게 내세우는 '간판'이 아닌가 싶은데, 한국 작가들의 소설만 가지고는 더이상 '영업'이 안된다는 인식이 이런 소설들의 번역출판에는 전제돼 있다. 그래서 '추리소설 결정판'(문화일보)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뒷맛이 달지만은 않다.

 

 

 

 

 

 

 

 

 

두번째는 역사서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사계절). 이 또한 한겨레에서 크게 다루고 있으므로 군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이 책의 원제는 <칭키스 칸과 근대 세계의 형성>인데, 제목이 말해주는 바대로, 칭기스 칸의 '보편적' 제국건설이 '근대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것. 그러니까 '그리스=세계'나 '중국=세계'의 레벨이 아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세계'라는 건 세계사의 이 유일무이한 주역이 이루어놓은 결과이다. 더불어, 그의 몽고 제국은 '러시아'의 발명자이기도 하다. 몽고(타타르)에 대한 항전과 대타의식에서 루시(러시아의 고어명)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방면의 역사서가 드문 상황이기에 특별히 이 자리에 이 책을 올려놓는다. 저자인 잭 웨더포드는 인류학자로서 <돈의 역사와 비밀 그 은밀한 유혹>(원제는 '화폐의 역사', 청양, 2001)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인류학도 상당히 박식한 학문, 박식을 요구하는 학문이다.

 

 

 

 

 

 

 

 

 

 

세번째 책은 역사학에 관한 책으로 <굿바이 E. H. 카>(푸른역사)이다. 책은 1961년에 나온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40주년(2001년) 기념심포지엄의 발표논문들을 모은 것이다(한겨레의 고명섭 기자는 이 책이 1982년에 죽은 카의 20주기를 맞이하여 개최된 심포의 산물이라고 적는데, 착오인 듯싶다. 땡겨서 하지 않는 한, 20주기는 2002년이어야 하므로.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가 1962년에 나온 걸로 적고 있다). 대학가의 필독서였던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란 정의로 잘 알려져 있는 책이고, 국내에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준비하던(카는 서문만을 써넣고 죽었다) 2판 <역사란 무엇인가>(까치, 1997)도 번역돼 있다.

 

 

 

 

 

 

 

 

 

 

40년, 강산도 여러 번 바뀔 만한 세월인 만큼 당연히 역사학의 지형에도 변화가 생겼을 법하다. 책은 그러한 지형의 변화를 일람해 보는 데 요긴할 듯하다. 그간에 특히 강세를 보이고 있는 건 문화사, 미시사인데, 이번 주 한겨레의 '아깝다! 이 책'란에는대표적인 미시사학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길, 2004)가 다시 소개되고 있다. 출판사로선 열과 성을 다해서 만든 책인데, 생각만큼 안 나가고 있다는 것. 지난주 자프란스키의 <니체>(문예출판사)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렇게 나온 책들은 독자들이 좀 사줘야 한다. 독자가 좋은 책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책들도 좋은 독자들을 외면하고 돈맛이나 챙기기 마련이기에. 언젠가 모스크바 통신에서 언급한 듯한데, 작년에 러시아에서 나온 긴즈부르그 선집은 역사분야 베스트(2권)의 하나였다. 참고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타의식에서 씌어진 책이 케이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혜안, 1999)이다. 원제는 'Rethinking history'.

 

 

 

 

 

 

 

 

 

네번째 책은 김용준 고대 명예교수의 <과학과 종교 사이>(돌베게). 화학 전공의 과학자로서 그리고 모태신앙을 가진 종교인으로서 자신의 40년 학문적 삶 혹은 여정을 총결산하고 있는 이 책은 '과학인 김용준의 연구노트'라는 부제를 갖고 있으며, 계간 <과학사상>에 10년간 연재한 것을 모은 것이다. 나는 부분적으로 읽어본 기억이 있는데, 그의 종교 정향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는 있지만, 그의 학문적 열정과 여정에는 배울 만한 대목이 많다. 일독해볼 만한 책.

 

 

 

 

 

 

 

 

 

이 책은 한겨레와 동아일보 서평에서 모두 크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동아일보의 시작은 이렇다: "1900년 태생으로 말년까지도 논문을 발표하다 2002년 별세한 가다머를 생각하면 나는 저절로 숙연해진다. 그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환갑노인이 되도록 무명의 학자로 칩거해 있다가 나이 60에 '진리와 방법'이라는 불후의 명저를 내놓음으로써 일약 세계적인 학자로 군림한 그 신실함은 내게 너무나도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해서 불현듯 가다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는데, 사실 어제는 러시아에서 온 책들 가운데 <진리와 방법>을 찾아내기도 했다. 500루블(2만원) 주고 산 책. 영어본 <진리와 방법>의 경우 개역본까지 몇 년전에 나왔건만 한국어본은 1/3 정도만 나온 채 소식이 없다. 이런 게 한국의 학문과 교양의 평균적 수준이 난장이 수준에서 계속 머물러 있는 그럴 듯한 이유이다.

 

딱히 더 꼽고 싶은 책이 없어서 다섯번째 책은 근간으로 나올 책을 기록해둔다. 도서관에 책을 주문하기 위해서 아마존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건데, 지젝 선집 과 그의 또다른 책 이 올해 안에 나오는 것으로 예고돼 있다. 출판사는 Verso가 아니라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이며, 두 권 모두 350쪽 안팎의 두툼한 분량이다. 짐작컨대, 아무도 그보다 더 많이 쓸 수는 없다! 지젝-오타쿠들의 걸음이 더 빨라져야겠다...

 

05.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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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5-04-06 15:27   좋아요 0 | URL
옮긴이 서문에 언급된 이름은....'로쟈'더군요.
로쟈가 박노자의 다른 필명이라....ㅎㅎㅎ, 귀여운 상상력
올해 안에 로쟈님의 전공관련 연구서적이 출간될건가요?

로쟈 2005-04-06 16:32   좋아요 0 | URL
어떻게 아셨나요?! 아마도 학위논문이 출간될 듯한데, 워낙에 소량을 찍는 거라 구경하시기는 힘들 듯합니다.^^

주니다 2005-04-07 17:23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페이퍼에 힌트가 있었던거죠 뭐.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나저나 그 책이 시중에 깔리는게 아닌가봐요? 섭섭하네요.
어디가면 구경이라도 할 수 있을까요? 하핫
 

어제 집에 가는 길에 사서 읽은 한국일보에는 눈길을 끄는 글이 둘 있었다. 먼저, 매주 연재되는 고종석의 시인산책. '시인공화국 풍경들'이란 타이틀이 연재의 제목인데, 내가 어제 처음으로 읽은 이 연재는 김영승의 <반성>을 다루고 있었다. 나는 오늘 부랴부랴 인터넷에서 나머지 4회분의 연재를 마저 읽는다. 그간에 그가 다루었던 시인들은 김소월, 김정환, 성미정, 김수영이었다.



김소월에 이어서 김정환의 시집을 다루는 것도 의외이지만, 이어서 성미정의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을 읽는 건 파격적이다(이 시집을 나는 안 갖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그런 파격은 의도된 것인 듯하다. 김수영은 물론 이름값하는 시인이고("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안 시인은 '몽상가'가 아니었다), 이어서 어제 다루어진 시인은 '아름다운 폐인'으로 자칭하는 김영승.

고종석이 연재하는 시인공화국의 풍경들은 내게 낯설지 않은 풍경들이며 그래서 반갑다. 매주 한번씩은 한 명의 시인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져본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나로서도 할말이 없지 않은 시인들임에랴. 해서, 고종석의 시인산책은 한동안 내가 손꼽아 기다리는 연재가 될 것이다. 나중에 책으로 묶여도 좋을 것이고.

내가 이런 식으로 고대했던 연재는 아주 오래전 김훈/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과 김성우 논설위원의 '러시아문학기행'이었다. 15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그리고나서 한참 후에 김훈의 '자전거 기행'이 있었다. 하루하루 흘러가는 게 세월이지만, 그런 기행/연재는 그 세월에 품위를 부여한다. 그 품위는 비록 얇은 신문지에 실려오지만, 그걸 읽는 마음에 얇지 않은 부듯함을 전달해준다. 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더라도 그런 시대에 대한 회고만으로도 당분간은 풍족하다.

두번째는 사르트르(1905. 6. 21 - 1980. 4. 15)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프랑스에서는 올해를 '사르트르의 해'로 정하고 대규모의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 그와 병행하여 국내에서도 기념행사들이 기획/진행중이라고 전한다. 그의 마지막 대저 <변증법적 이성비판>도 번역출간될 거라는 얘기도 있고.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이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 그의 노벨상 수상거부(1964) 40주년을 계기로 몇 마디 거든 바 있는데, 분위기가 그런 만큼 나도 뭔가 '준비'는 해야겠다. 러시아어본도 몇 권 구해본 김에 '비로소' 좀 읽기도 하고.

  

사르트르에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의당 그의 전기 <사르트르>(창, 1993) 나 자서전 <말>을 집어들 만하지만, 내가 추천하고 싶은 것은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을유문화사, 2005)이다. 거기서 사르트르에 관한 장은 역설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지성'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지식인들'에 대한 이 냉혹한 비판서를 통해서 거품을 말끔히 제거한 다음에 문제적인 저작들을 읽어보는 게 내가 권할 만한 순서이다. 가령,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전형적인 남성우월주의자였다"라는 걸 미리 알고서 사르트르를 읽어보시라는 것이다. 그래야지 지식인들은 그 '모순' 속에서 제값을 발휘한다.

존슨의 책은 이전에 <지식인들>(한언, 1993)이라고 처음 출간됐었고,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벌거벗은 지식인들>(1999)도 같은 책을 옮긴 것이다. 이번에 나온 것까지 역자가 모두 다르다. 제일 처음 나온 걸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번역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그런 기사들과 함께 전철에서 (다시) 읽은 건 아즈마 히로키의 글 '우편적 불안들'(몇년전에 동서문학지에 번역돼 실렸다)인데, 이 글은 자신의 출세작 <존재론적, 우편적>(1998)에 대한 해제적 성격의 강연문이다. 지난 2월초 모스크바에서 돌아오자 마자 (우연히 복사물이 눈에 띄어) 읽게 된 것인데,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계발적인 글이다. 해서 '우편적 불안에 대하여'란 제목의 글을 '모스크바 통신'에 이어지는 마무리로 기획하기도 했었지만, (병치레 때문에) 결과적으론 실현되지 못하고 미루어졌다. 뒤늦게 작성되는 만큼 이 글은 원래의 의도를 다 포괄하거나 포함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저 히로키의 생각을 따라가면서 몇 마디 첨언을 할 생각이다.

  

 

 

 

 

 

 

 

먼저 히로키에 대해서. 1971년생인 그는 (소련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1991년 약관 20세에 '솔제니친 사론'을 통해서 등단한다. 프랑스 현대사상과 데리다 철학에 능통한 그는 <존재론적, 우편적>이라는 데뷔작을 통해서 제2의 아키라란 평을 듣는데, 아키라는 <구조의 힘>(국역본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을 쓴 비평가 아사다 아키라를 말한다. 본문에서 그 자신이 비교하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국내에 소개된 바를 참조하면 가라타니 고진 - 아사다 아키라 - 아즈마 히로키 정도의 계보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히로키는 '젊은 피'이자 비평의 제3세대, 혹은 새로운 세대쯤 되는 듯하다.

일본의 비평공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나는 고진이나 아키라를 흥미롭게 읽었고, 그런 흥미 면에서라면 히로키 또한 뒤지지 않는다(거기에 대응할 만한 한국 비평가를 거명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존재론적, 우편적>이나 <우편적 불안들> 같은 그의 주저들이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근래에는 동경대 대학원쪽으로 유학을 가는 이들도 많이 있으므로 번역자원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히로키는 이 강연문의 서두에서 먼저 '콘스타티브(constative)'와 '퍼포머티브(performative)'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들어가는데, 전자는 '사실확인적'이란 말이고 후자는 '행위수행적'이란 뜻이다. 그걸 드러내는 문장을 우리말로는 각각 '진술문'과 '수행문'이라고 보통 번역한다. '진술문'은 맞다, 틀리다를 판별할 수 있는 문장을 말하지만, '수행문'의 경우엔 그런 진위의 범주가 적용될 수 없다. '수행문'은 대신에 성공하거나 실패한다(즉 '통하였는냐?'가 수행문의 기준이다). 때문에 수행문은 현실(컨텍스트)과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기능이 이해될 수 있다.

히로키의 전제는 사회의 단편화, 포스트모던화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사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특권적인 시점이 부재하다는 것. 이른바 총체적 시점, 혹은 총체성의 상실이다. 그러한 상실(하루키 번역본의 표현의 빌자면, '상실의 시대')이 전면화되는 것이 1990년대이며(그러니까 소련과 동구권의 대몰락 이후이며) 그러한 처지에서는 자신의 메시지(편지)가 제대로 도착하는 건지 마는 건지 불확실하게 된다. '우편적 불안'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아키라의 <구조와 힘>(1983)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전체를 조망하는 퍼스펙티브를 제시하고자 애를 쓰는데, 거꾸로 말하면 1980년대에는 그래도 우편적 불안이란 걸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게 히로키의 상황판단이고,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은 점점 더 아주 작은 '취미 공동체' 내의 소통으로 축소된다. 오타쿠 문화는 그러한 (변화된) 사회적 상황의 소산이다.

정리해서 얘기하면, 포스트모던화는 두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처음엔 "문화전체(사회전체)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명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좀비처럼 살아남아 있는 단계"로서, 여기서는 아직 '우편적 불안'이 전면화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때의 전망이란 건 날조이고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아사다 아키라가 제시한 전망이 이미 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소통되었다는 데에서 확인된다(그러니까 <구조와 힘>에 열광하는 소수의 '취미 공동체'가 있었을 따름).

두번째 단계를 히로키는 1989년경부터로 보는데, 이 단계에서는 사회전체를 예측한다는 게 더더욱 어려워졌고 사람들은 더이상 전체를 조망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그저 자잘한 우편적 불안에나 시달리게 된다. 90년대가 바로 그러한 시대이다(한국소설사의 지형에서라면 윤대녕, 신경숙의 소설들이 통하던/먹히던 시대이다. '은어낚시통신' 같은 취미 공동체!). 그걸 부정하고, 날조이더라도 전체이론에 계속 매달리게 되면 오움진리교 같은 현상을 낳게 된다고 히로키는 지적한다.

아키라와 히로키는 각각 이 두 단계에 각각 대응하는 비평가이며, 아키라에서 히로키로의 이행은 들뢰즈에서 데리다로의 이행이다(그럼 오움진리교에 해당하는 건 네그리?). 그러한 상황인식을 전제로 하여 히로키는 자신의 <존재론적, 우편적>이 '우편적 불안'을 '우편적 향락'으로 바꿔보려는 기획의 소산이었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그는 '상징계'의 힘이 약화된 것이 요즘의 현실이 아닌가 지적하면서 메가 히트 애니메이션 <미녀전사 세일러문>을 만든 감독 이쿠하라 구니히코의 말을 인용하는데, 내가 보기엔 혜안이다. 그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은 아주 가까운 것과 아주 먼 것밖에 모른다. 즉, 연애 아니면 세계의 종말에나 관심을 두는 것이다. "바꿔 말해 그들의 감각으로는 연애나 가족문제 같은 지극히 자기주변적인 문제와 세계의 파멸 같은 지극히 추상적인 이야기가 하나로 달라붙어 있는 것이죠."

그러한 지적을 라캉식으로 바꿔서 말하자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상계와 현실계(=실재)에만 들러붙어 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리얼한 것(=실재) 아니면 이미저리한 것(=상상계) 밖에 없다. 심볼릭한 것(=상징계)가 약화되고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을 이어받으면서 히로키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가 포스트모던해져 버린 결과 요즘 사람들은 세계가 가까운 것과 먼 것으로 분열되어 있는 것으로서 느끼고 있습니다. 가족이나 우주 이외의 '일본'이나 '국가'라는 중간 레벨의 존재에 대한 감각은 쏙 빠져버려 있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라캉도 말했듯이 맨먼저 약해지는 것이 언어의 힘인 셈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현상이 지금 일본에서 표면화되고 있습니다."

그럼 한국은? 얼핏 '대-한-민-국'을 열호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양극화로부터 비켜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대한민국'이 이들에게서 '중간항'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혹 자신에게 '가까운 것'이거나 '먼 것'으로서의 '대한민국'은 아닐는지? 어쨌든 "상징계, 즉 심볼릭한 레벨이 없어지면 사람들의 관심은 상상적인 인간관계나 '세계의 종말'로 집중"된다. 이런 경우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지구의 소멸'이라는 거대서사적 테마는 그저 주인공과 애인 사이의 작은 인간관계를 부각시키는 소재로서나 쓰인다.

한국적인 드라마에서라면 '세계의 종말'에 대응하는 것이 아마도 죽음일 듯싶다. <가을동화>인지 <겨울동화>인지 하는 드라마들에서 연애(상상계)-결혼(상징계)-죽음(실재)이라는 3항에서 '결혼'이 배제된 것이 주된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과 가족들간의 오손도손, 티격태격을 다룬 일일드라마들에서도 그러한 인간관계를 벗어난 주제(이런 경우에는 국가)가 다루어지는 예는 거의 없다. 그런 건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영역으로 제쳐놓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저마다 오타쿠가 된다(요즘 언론에서는 '진보상업주의'라는 말을 쓰던데, '진보오타쿠' '좌파오타쿠'란 말도 가능할 것이다. 거기서 소수의 취미 공동체에 대응하는 것은 소수의 이념 공동체이다).

데리다에 대한 좀 특이한 책을 쓴 히로키는 이런 시각을 내비친다: "데리다의 저서를 즐거이 읽는 독자는 제가 생각하기에 일본에서 천명, 유럽에서 이천 명, 아메리카에서 이천 명이 다일 것입니다(*그런 셈법이라면 한국에서는 오백 명 미만이다). 그들은 하나의 취미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만나면 국적이나 문화적 배경이달라도 단번에 얘기가 통합니다. 데리다를 둘러싼 '수다'가 점점 증식되고 데리다에 대한 메일 리스트가 개설되곤 하지요. 저의 책이 번역되는 것은 이 '수다'에 등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나 또한 그런 수다에 끼어드는 걸 좋아하지만.)

그런 진단을 좀더 확장하자면, 들뢰즈를 기치로 내세운 수다 공동체, 알쏭달쏭한 타자 담론을 중심으로 모인 수다 공동체 등이 공통의 언어 없이 난립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공부와 삶의 괴리이면서 나는 이게 인문학 위기의 본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방법은 두 가지. 공통의 언어를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쪽과 작은 취미 공동체 안에서 끝까지 살아가야 한다는 쪽. 히로키는 그 중간에 서 있고 싶다고 하면서 그 방법에 대한 시도로 자신의 저작을 규정짓는다(고진의 '트랜스크리틱'도 그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 그리고 그게 데리다 철학의 의의라고 평가한다: "제가 좋아하는 데리다의 말 중에 위대한 사상가란 언제나 조금 큰 우체국이다'라는 것이 있는데, 실제로 이 세계에 있어서 철학의 역할은 편지(정보)를 배달하는 우편적인 기능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히로키가 주목하는 데리다의 텍스트는 <우편엽서>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 글의 절반이다(시간/분량상 여기서 끊는다. 이후에 내용은 가라타니 고진의 비평에 대한 평으로 이어지는데, 관심이 있으신 분은 직접 참조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이 정도만으로도 많은 걸 평정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취미 공동체의 수다거리가 돼 버린 문학에 대해서도(우리 주변의 쿤데라 오타구, 하루키 오타쿠, 도스토예프스키 오타쿠, 지젝 오타쿠 등등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공동체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가? 공동체를 넘어선 공화국을 꾸릴 수 있는가? 질문은 아직 열려 있다.

이런 내용의 글을 다시 읽은 건, 그리고 3월의 마지막날에 (뒤늦게라도) 정리해두는 건 어제 모스크바에서 부친 책들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두 달이 넘게 걸린 셈인데, 아무튼 비로소 나의 '도착'은 완료되었다. 모스크바에서 내내 했던 일 중의 하나는 통신문을 쓰는 거였는데, '모스크바여 안녕'이란 마지막 통신문이 비로소 제값의 무게를 갖게 된 것. '모스크바여, 다시 안녕!' 다스비다냐!..

05. 03. 31

P.S. '우편적 불안'에 이어서 지난 2월에 내가 쓰고자 했던 건 윤동주와 정현종, 두 시인에 대한 것이었다(2월 16일이 윤동주의 기일이었지만, 대부분 무관심했다. 그리고 2월말에 정현종 시인은 '문학교수'로서 정년퇴직했다. 시인으로선 정년이 없겠지만) . 물론 타이밍을 놓친 터라 다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선 다른 기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삐딱하게 보기>의 3장 읽기(생각보다는 오역이 많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그리고 '국가'(고진의 <일본정신의 기원>이 요긴한 읽을 거리였다)가 당분간 읽고 생각해볼 거리이다. 생각이 모이면, 정리해두도록 하겠다.

P.S.2. 어제 잠시 '로쟈'란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다가 몇몇 블로그에 나의 글이 올려져 있는 걸 보았다. 한 블로그에서는 '로쟈'가 박노자의 다른 필명인 걸로 소개돼 있었는데(모스크바로 되돌아간?), (이미 귀화하여 한국인이긴 하지만) 박노자만큼 내가 (한국어를!) 잘 쓴다는 것이 자랑할 만한 일인지는 좀더 따져보아야겠다(내가 그보다 한국어를 더 오래 배우고 써왔건만).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대해서 나는 서평을 쓴바 있으며, 그 중 한 구절이 한동안 신문광고에 인용되기도 했었다. 박노자는 누구처럼 자기 책의 서평을 쓸 만한 위인은 아니므로 '로쟈=박노자'란 오해는 불식되었으면 한다. 다시 밝혀두지만, 로쟈는 (로자 룩셈부르크와도 무관하며)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름, '로지온'의 애칭이다(왜 그 이름을 쓰게 됐는지는 내년쯤이면 아시게 된다).

P.S.3. 눈에 띈 오타를 손보면서 몇 마디 덧붙인다. 그렇게 적은 분량을 쓴 건 아니지만, 급하게 작성하다 보니까 본문을 충분한 분량으로 쓰지 못했다(모스크바에서였다면 지금의 두 배 정도의 분량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걸 보완할 수는 없고, 오늘(만우절) 아침에 읽은 글 한 대목을 인용해두기로 한다. 이번주 <한겨레21>은 '태극기 세대'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 특집의 한 꼭지는 '그 불안하고 기이한 개인주의'(전효관)란 제목을 달고 있다. 필자의 지적을 잠시 들어본다.

"나는 촛불시위와 월드컵을 통해 광장을 놀이의 공간으로 전환시켰다든지, 공적 영역에 개인 욕망의 문제를 투사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다만, 놀이와 연대의 소재가 왜 민족과 국가고 태극기일 수밖에 없는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느낄 뿐이다. 여전히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이라는 작은 주체와 국가라는 큰 주체 사이에 부재하는 연대의 형식과 내용일 듯하다. 젊은 세대는 개인주의화를 통해 형성된 감수성의 연장선에서 개인의 권리에 민감하다. 하지만 집단으로서 권리에는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다. 높은 인권 감수성과 낮은 정치 의식의 충돌은 태극기 세대를 규정짓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권리 주장이 생존을 위한 방어라는 측면에서 제한되어 사회적 공간과 연대 능력의 발전으로 드러나지 못할 수 있다. 개인과 국가 사이 중간 영역의 공백이 여전히 문제고, 작은 주체들의 연대와 공감을 통해 매개 영역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지적하는바, '개인이라는 작은 주체'와 '국가라는 큰 주체' 사이에 부재하는 연대의 형식과 내용이라는 것이 내가 본문에서 거론하고자 했던 중간항이다. 그 중간항의 프로이트적 상관항이 바로 자아이며, 현대는 그러한 자아의 약화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일본의 오타쿠 세대나 한국의 태극기 세대나 마찬가지가 아닐까라는 게 나의 짐작이다. 사드와 함께 칸트는 넘쳐나지만, 그걸 매개해주는 자아는 약화되어 있으며 무시되고 있다. 그럴 경우 제일 먼저 약해지는 것은 (라캉-히로키도 지적하다시피) 언어의 힘이다. 그때 언어라는 건 코드화된 랑가주, 즉 랑그를 말한다. 서로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코드, 문법, 규칙. 그게 상징계이다.

어린애들의 옹알이 같은 말들과 UFO성 언어들이 인터넷상에서 범람하고 있는 것은 상징계의 약화/무시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젊은이들의 '유아화'이다. 히로키가 예로 들고 있는 건 이런 식의 대화이다. "저거 괜찮지?", "이게 좋다", "그건 안돼." 혹은 언어를 생략한 이미지만의 소통, 혹은 음악을 통한 소통. "좋지?" "응, 좋아!" 오직 그들만이 통하는('논리'가 아니라 '느낌'으로 통하는) 언어로 은밀하게 소통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랑그는 최소화되는 것. 이런 것들이 게임세대, 비주얼 세대, 넷세대들에게서 지배적이 되어 간다는 것이 히로키 등의 지적이며 내가 동의하는 바다. 그렇다고 공통의 언어를 다시금 억지로라도 만들어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현재의 조건에서 작은 공동체의 한계를 '트랜스'해보려고 애를 써야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자기만족적인 공동체에 안주하며 '바깥'으로의 외출을 포기해야 하는 건지. 남은 선택지는 대략 그 세 가지이다. '우편적 향락'이란 아마도 그 두번째 길이 인도하는 선택지에서 누릴 수 있는 향락이지 싶다.

몇 마디 덧붙여 보았는데, 본문의 내용이 좀더 수월하게 전달되었는지?..(알 도리가 없는 건가?)

05. 04. 01.

 

 

 

P.S. 분문에서 언급한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문학동네, 2007)이 번역돼 나왔다. 근간 소식은 작년부터 접하고 있었던 터인데, 생각보다 분량은 얇다. 예전에 이 책과 관련한 기사는 http://blog.aladin.co.kr/mramor/854169 에 모아놓은 바 있다. 그의 <존재론적, 우편적>도 근간 예정이라고 하니까 모아서 읽어봄 직하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 존재하는 듯하지만...

07. 0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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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1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5-04-01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기대됩니다. 로쟈님...

로쟈 2005-04-01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랄 게 없는 건데요.^^ 한 가지, 본문에서 언급한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은 도서출판b에서 번역서가 나온다는군요...

sqiz 2020-12-03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의 존재론적,우편적을 해설하는 내용에 대해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
 

지난 토요일자 한겨레 '책과사람'란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진 것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가 100권을 돌파했다는 소식이다.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부터 구춘권의 <메가테러리즘과 미국의 세계질서전쟁>까지이고 만 5년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1년에 대략 20권씩의 책을 낸 셈인데, 그간에 국내 출판계를 대표하는 문고본으로 성장했고, 뒤이은 문고본들의 모델이 돼 주었으니 치하할 만한 일이다(물론 문학과지성의 스펙트럼문고가 있었지만, 국내 필자들만의 '인문서'로 채워진 것은 책세상문고만의 덕목이다). 100권 통틀어 65만부가 나갔다고 하니까 권당 평균으로 치자면 6,500부가 나간 셈이고 이건 다른 출판사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적이다. 대개 2쇄까지는 찍었다는 얘기니까(본전은 뽑았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나는 이 시리즈의 책을 10권쯤 읽은 거 같은데,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정치와 진리> 등이 기억에 남는 책들이다.

 

 

 

 

 

2003년도부터 나오기 시작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은 '우리시대'의 기획이 성공한 덕분에 꾸려지게 된 것인데, 이 시리즈의 최신간은 러시아 작가 불가코프의 희곡 <조야의 아파트/질주>이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작가로 잘 알려진 불가코프는 비록 작가로서 불운한 생애를 보내긴 했지만, 러시아 20세기의 최대 작가 중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최대 극작가이다. 20세기 작가들 중에서 그는 아마도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가일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백위군>(<투르빈가의 나날들>이 각색본인데, <백위군>이란 이름으로 무대에 더 자주 오른다)과 이번에 번역된 두 작품 등이며, <질주>는 영화로도 제작됐다(국내에도 출시돼 있다). 

 

 

 

 

불가코프의 다른 드라마로는 몰리에르의 생애를 다룬 <위선자들의 밀교>(연극과인간, 2001)가 같은 역자에 이해 번역/소개된바 있으며, 장편 <백위군>(열린책들, 1996), 중편집 <개의 심장>(열린책들, 1998), <비운의 달걀>(1999, 대구효성카톨린대출판부) 등이 번역돼 있다. 그의 중편들은 대부분 풍자소설에 속하며, <백위군>은 내전기를 다룬 작품. 그리고 그의 걸작 <거장과 마르가리타>은 한길사에서 출간된바 있지만, 절판되었고 현재 다른 역자에 의해서 번역이 준비되고 있는 걸로 안다(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현재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다). 대략 이 정도 규모이면 20세기 러시아에서 수위를 다툴 만한 작가의 전모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을 듯싶다.

불가코프의 <조야의 아파트>를 제일 먼저 꼽은 것은 책세상문고를 기념하고 작가의 지명도를 고려해서이지만, 한편으론 안면이 있는 역자에게서 책을 선사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름대로 홍보도 해줄 필요가 있는 것. 하지만, 이런 경우는 지극히 드물어서 나는 대부분의 책들을 내 돈 주고 사서 읽어야 한다.  그건 '악마적인' 차이이다. 증정받은 책들에 대해선 오타나 오역 등에 구애받지 않지만, 내 돈 주고 산 책들에 대해서 나는 엄격하다. 그 책들에는 나의 땀과 수난과 눈물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강 얼버무리면서 넘어갈 일은 아닌 것이다.

 

 

 

 

두번째로 꼽을 책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숲)이고, 천병희 교수의 번역이다. 1만 1995행이라는 데 우리말 최초의 완역본이다. <변신이야기>는 이전에 솔출판사(김명복 역, 1993)와 민음사(이윤기 역, 1994/1998) 본이 나와 있지만, 모두 중역본이며 고대 라틴어에서 옮긴 것으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라고 장황한 제목이 붙은 것은 그러한 사정을 드러내주기 위함일 것이다. 물론 중역이더라도 내용이 정확하고 문체가 유려하다면 굳이 원전 번역이 강조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형편이 그렇지가 않아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민음 세계문학전집의 간판으로 나온 이윤기본만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강대진의 지적인데, 어느 잡지에 실린 비평문이 그의 서평집 <잔혹한 책읽기>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전 번역이 강조되는 건 그 때문이다.

천 교수는 그리스와 라틴 고전문학 번역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데, 조만간 키케로의 책이 후속작으로 출간될 거라고 한다. 한편 천교수가 번역한 그리스 고전들은 단국대출판부에서 나오고 있는데, 그 책들의 북디자인은 좀 수준 이하다(덕분에 나는 한권의 책도 안 사고 있다). 공들여 번역한 작품들이 허름한 모양새로 나오는 건 좀 무성의하게 보인다. 겉멋만 든 책들보다야 양반이긴 하지만, 좀 때깔이 있는 책들로 다시 나왔으면 싶다.

 

 

 

 

때깔로만 치자면 동문선의 책들도 빠지진 않을 것이다. 내가 비교적 혐오하는 출판사이지만, 전공과 관심 때문에 자주 신간들을 둘러보게 되는 것도 이 출판사의 책들이다. 동문선의 최신간은 주디스 버틀러의 <안티고네의 주장>이다.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Body Matters)>(인간사랑, 2003)가 소개된바 있는데, 페미니즘 이론과 퀴어이론의 새로운 강자로서 주목받고 있는 여성 이론가이다. 그녀의 대표작은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이란 부제를 단 <젠더 트러불>이고, <권력의 심리적 삶>, <흥분하기 쉬운 발화> 등의 저서들을 연이어 냈다. 나는 버틀러의 책(복사본)을 여러 권 갖고 있는데, 그건 영문학과 페미니즘쪽에서 주목받는 이론가로 부상함에 따라 그녀의 책 대부분이 저렴한 마스터본으로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안티고네의 주장>(2000)은 그 시절에 따로 복사해두었던 책인데, 원서는 103쪽 분량의 얇은 책이다(번역서는 138쪽).

 

 

 

 

아무리 중요한 이론가라 하더라도 (대개의 동문선의 책들이 그런 것처럼) 번역을 신뢰할 수 없으면 나오나 마다한 책들인데(귀국 이후에 내가 읽은 최악은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동문선)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번역을 하고 출간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책.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백의)와 쌍벽을 이룬다) 다행히도 신간의 경우에는 버틀러 전공자가 번역을 맡았고 (드문 일이지만) 38쪽의 역자 해설까지 덧붙였다. 그러니 다소간 비싼 책이더라도 엉터리는 아닐 것이다.

 

 

 

 

버틀러와 관련해서 읽어볼 만한 논문은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에 실린 콥젝의 "성과 이성의 안락사"이다. 콥젝은 <젠더 트러블>에서 개진된, 생물학적 성에 대한 버틀러식의 해체에 동의하면서도 성의 문제가 순전히 가변적/수행적인 것이라는 버틀러의 주장에 대해서는 칸트와 라캉을 경유하여 반박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조는 지젝에게서도 이어지는데, 곧 출간예정인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의 한 장을 지젝은 버틀러에 대한 비판에 할애하고 있기도 하다. 콥젝의 논문은 <나의 욕망을 읽어봐>에 실려 있는데, 그녀의 또 다른 책 <여자가 없다고 상상해봐>는 근간 예정이다.

 

 

 

 

세번째 책은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새물결, 2004)이다. 이 책은 작년 12월에 나온 걸로 돼 있는데, 내가 서점에서 책을 본 게 최근이다. 요사의 책으론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문학동네, 2002)와 <세상종말전쟁>(새물결, 2003) 등이 최근에 나온 작품들이다. 나는 전자를 좀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요사는 남미 3대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는 '이야기꾼'이다. '요사의 모든 책'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 나오는 족족 읽어볼 일. 약간 유감스러운 건 책이 두 권을 분권돼 나왔다는 점. 출판사로선 그게 여러 모로 편하고 이익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두꺼운 책을 선호하는 나로선 불만스럽다. 분량으로 봐선 한권으로 묶여도 됐을 만한 책이다.  

                             

 

 

 

 

네번째 책은 <E=mc2>(생각의나무)이란 베스트셀러를 썼던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신간 <일렉트릭 유니버스>(생각의나무)이다. 제목 그대로 전기에 관한 것인데, "전화, 라디오, 레이더, 컴퓨터, 심지어 비아그라까지, 전기력의 힘을 빌어 탄생한 물건과 그들의 역사를 담았다"고. 이런 교양과학서를 읽은 지가 이젠 꽤 되는 것 같다. 휴식 같은 시간들이 내겐 없었던 셈. 에드 레지스의 <누가 아인슈타인의 연구실을 차지했을까>(지호)도 읽어볼 만한 책인데, 나는 이전에 <아인슈타인 방의 사람들>(웅진닷컴, 1993)이란 제목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프린스턴고등학술연구원 사람들의 '프렌즈' 같은 이야기들. 옛날엔 이런 책들을 읽을 시간이 있었는데...

 

 

 

 

끝으로 벤야민 관련 신간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와 유사하게 파사주 프로젝트에 대한 해설서인 듯. 382쪽으로 돼 있지만, 번역서의 여백이 상당히 헐렁해서 원서는 300쪽이 안될 것 같다. 이런 식의 두툼한 책은 낭비적이며 책값도 비싸게 매겨진다는 점에서 전혀 반갑지 않다. 얄팍하게 책장사를 하려는 궁리들은 자제해주었으면 좋겠다. 벤야민의 또다른 책으로 <모스크바 일기>(그린비)가 이번주에 출간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참견하기도 한 책이어서 기대가 된다...

05. 03. 28.

P.S. 다음에는 그간에 나온 영화관련 책들에서 읽고 싶은 것들을 꼽아보도록 하겠다... 

 

 

 

 

P.S.2. 한권만 더. 레비스트로스의 예술론이라고 할 <보다 듣다 읽다>(이매진)이 출간됐다. 원저는 1993년에 나왔고 "인류학자의 시각에서 푸생, 뒤샹, 모네, 들라크루아, 보티첼리를 보고, 라모, 바그너, 베토벤, 로시니를 듣고, 디드로, 랭보, 보들레르를 새롭게 읽어낸다."고 소개되고 있다(레비스트로스는 서양 고전음악의 애호가로서 그에 대한 자부심도 피력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미 지난 1994년에 <레비스트로스의 미학에세이>(동아출판사)로 나왔던 책이다. 역자는 물론 다르다. 나는 이전에 나온 걸 갖고는 있지만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 그다지 좋은 번역도 아니었던 듯싶다. '헌 책'이지만 '새 푸대'에 담으면 좀 나아지는 게 있을지도...

05. 0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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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28 16:42   좋아요 0 | URL
앗, 오늘 한겨레에서 다뤄주었군요. 책세상 문고... 기특한 시리즈지요?

로쟈 2005-03-29 13:14   좋아요 0 | URL
'오늘'이 아니라 '지난 토요일'입니다.^^ 바람구두님도 애독하시는 것 같더군요...
 

최근에 나온 책들 얘기를 꺼내놓기 전에 최근에 개봉한 영화 두 편에 대한 얘기부터 늘어놓기로 한다. 그 두 편이란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과 이상일의 <69 식스티나인>이다. 전자는 68년에 관한 영화이고, 후자는 69년에 관한 영화이다. 이미 한국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나로선 영화관에 들락거릴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게 아주 당연하기에, 개봉 영화들을 본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러시아에서 산 비디오시디를 노트북에 복사해놓고 있기 때문에 가끔 볼 때가 있다(러시아어 시나리오도 갖고 있다). 그리고 <69>에 대해서는 몇 개의 영화평을 통해서 대략 어림짐작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영화이어서인지 근래의 영화평들 가운데는 두 영화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것도 드물지 않다. 오늘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몽상가들>, 혁명은 노는 것"(<필름2.0>)이란 평도 그런 경우인데, 베르톨루치의 영화를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하면서 이렇게 언급한다: "물론 <몽상가들>의 결말은 시시하다. 어쩌면 베르톨루치는 그 당시 거리에서 벌어졌던 혁명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럴 바에야 지지 않는 법은 웃어주는 것이다. 이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에 나오는 전언이기도 하지만 베르톨루치는 그걸 다른 방식으로 얘기할 뿐이다." 소설 <69>는 물론 영화 <69>의 원작이다. 요컨대, 베르톨루치와 무라카미 류/이상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은 내용은 얘기하고 있다는 것. 그 같은 내용이란 글의 제목을 빌자면, '혁명은 노는 것'이라는 전언이다.

<몽상가들>에서 김영진이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이런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테오와 이자벨 부모가 휴가를 마치고 잠시 집에 들렀을 때 그들은 자식들과 그들의 친구가 저질러놓은 완벽한 집안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에 질겁하면서도 그걸 존중해준다.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용돈을 던져놓고는 다시 휴가를 떠난다. 이 장면은 충격이다. 다음 세대의 도덕을 현재형으로 강요하지 않는 자그마한 혁명의 도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사회가 오늘날의 수준만큼이나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하튼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이었던 68년 5월 혁명 덕분이다."

갓 스물에 이른 세 청춘남녀가 서로 벗고 뒹굴고 하는 '관능의 막다른 골목에서 혁명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읽어내는 건 평론가의 권리이고 관객의 권리이다. 하지만, 자유로운/방종한 아이들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을 부모들이 존중해주는 장면에 대해 '충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좀 오버이다. 부모가 그렇게 방임하는 것은 그들이 성인이어서라기보다는 아직 (순진무구한) 어린애들이기 때문은 아닌가?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용돈을 던져놓고는 다시 휴가를 떠난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혁명을 자기들끼리의 '노는 것'으로 전유할 수 있는 물적 토대는 부르주아인 부모의 돈이다. 그 돈으로 히히덕거리면서 "자신들의 출신 성분의 토대를 공격"한다는 게 얼마만큼의 진정성을 가질까? 강남의 여피족들이 자녀가 대마초를 피우고 혼음하는 걸 방임하는 일이 과연 얼마나 '혁명적'일까? "뼛속 깊이까지 가부장적 도덕으로 무장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방임에 의해서 과연 머지 않은 미래에 프랑스 수준만큼 진보할 수 있을까? 뼛속 깊이 가부장적이기는커녕 피부와 머리카락까지 노린내를 풍기면서 길거리에서 자기들끼리의 영어로 떠들어대며 흥청대는 일부 유학생들의 비가부장적인 행태에서 과연 어떤 '진보'를 식별해낼 수 있을까?

해서 영화 <몽상가들>에 베르톨루치 자신과 자신의 세대에 대한 얼마만큼의 애정이 담겨있는지 나로선 가늠할 수 없지만(내가 이 영화에서 읽는 건 주로 영화광 어린애들의 치기에 대한 비아냥이기에), 이 영화가 '청춘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는 문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순응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본 베르톨루치의 걸작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이며, 거기에는 '몽상'이 아닌 '현실'이 그려져 있다(그러니 '마지막 탱고'는 '마지막 몽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러한 현실과의 조우(혹은 상징적 거세)를 장면화하고 있지 않은 영화 <몽상가들>은 역설적이지만, '미성년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불과하다.

"남녀성기의 노출과 혼음을 전면 허용한 것은 처음"(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등급분류소위원회)이라는 데, 사실이라면 이 영화는 내가 본 러시아판과 마찬가지로 세 남녀가 말 그대로 발가벗고 나온다(이 영화는 영화사적 의미가 아닌 '개봉사적 의미'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면 정도로 '성인'영화의 등급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당연하다. 발가벗고 나오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은 이 영화가 철없는 미성년들의 영화이며, 미성년들을 위한, 애들을 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상상하라, 그리고 마음껏 벗어제껴라, 돈은 줄 테니까."라는 식이니까. '혁명은 노는 것'을 조금 비틀어서 말하자면, '혁명은 돈이 좀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지난주 <필름2.0>은 <몽상가들>에 대해서 김영진과는 전혀 반대되는 평을 실었는데, "발가벗은 육체가 놓친 것"이란 제하의 평에서 평론가 정지연은 이렇게 쓴다: "베르톨루치가 <몽상가들>에서 부활시킨 68년 5월은 혁명조차도 유희로 쾌락했던 시네필들의 몽환적 시기에 다름아니다. 혁명이 계급이 아니라 세대에 의해 수행된다는 벤야민의 직감이 맞는 것이라면, 이들이 혁명을 수행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테오와 이자벨은 랑글루아 시위에 동참하고, 급진적 사회변화를 거부하는 아버지에 맞서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하다. 이들의 방에 붙어 있는 <중국여인>의 포스터, 마오 형상의 스탠드,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단지 실내장식물일 뿐이다. 이들은 거리의 진실에 관심이 없다. 그들을 지금 사로잡은 것은 부르주아의 요새와도 같은 아버지의 저택에서 고급 와인과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에로스의 쾌락일 뿐이다."

다른 대목들에서 비친 '엄숙주의자'적 시선에 내가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용한 대목에 대해서는 십분 동의한다. 다만, 나로선 <몽상가들>을 비판하는 정지연의 시각이 '몽상가들'을 비아냥거리는 베르톨루치의 시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입각점은 다르더라도). 듣기에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베르톨루치는 1970년작 <순응자>를 통해 변절하며 자신의 '아버지-형상'인 고다르를 매우 증오했다고 한다. 내가 <몽상가들>을 처음 보면서 느낀 것은 (프랑스 시네마테크의 설립자인) 랑글루아의 아들들, 고다르와 트뤼포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비아냥이다. 그는 그들을 비판하는 대신에 다만 그들이 순진했다고 말한다. 이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도 그는 68혁명의 '한계'와 '좌절'을 거리를 두고 우회적으로 그려낸바 있다. 그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를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할 수 없듯이 <몽상가들>에서 (미국에서 건너온) 매튜를 (이탈리아에서 건너갔던)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나는 그런 방향에서 이 영화에 대한 평이 나오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필름2.0>의 두 평론가는 좀 다른 방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러시아어 대사들을 듣는 통에 내가 잘못 이해한 대목들이 있었는지도). 나중에 다른 지면의 영화평들을 들춰봐야겠다(주로 <씨네21>을 보던 내가 <필름2.0>를 들추게 된 건 '돈' 때문이다. 1/3 값이니까. 돈 때문에 고민하는 건 성인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 <필름2.0>에서 제일 재미있는 코너는 <토크2.1>이다).

영화 <69> 또한 사정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 영화에는 "데모나 바리케이드 같은 것, 멋지다고 생각해"라는 여학생이 나오고, 이 여학생 때문에 학교를 봉쇄하기로 마음먹는 남학생이 등장한다고 하니까. 원작소설보다는 경쾌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기본 설정 자체는 유지되고 있을 터이다. 지난주 문화일보에 실린 영화평(이안젤라의 시네마토크)에 의하면,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골학생들은 "한편으로는 학교 바리케이드 봉쇄를 실행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록 페스티벌을 기획한다. 한편으로는 미군기지 담을 넘는 반미적 일탈사고를 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흑인병사의 성교장면을 훔쳐보면서 영어와 미국문화에 빠져든다. 왜냐고? 이들이 세상에 이기는 방법으로 택한 전략이란 바로 즐겁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즐겁게 사는 투쟁 전략 또는 청춘의 핑계'로 지양하고자 하는 것은 "전후 기성세대의 보수적 권위주의와 전공투로 상징되는 좌파학생운동의 급진주의"이다. 그들은 이 양 진영을 조롱한다. 모든 건 "눈 앞에 있는 여학생"을 위한 것, "바리케이드도 페스티발도 그 여학생에게 주목받기 위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유희는 청춘의 특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청춘들이 모두 기성세대가 돼 버린 지금도 그럴까?



지난주 <필름2.0>의 <69>를 다룬 영화평에서 평론가 이상용은 (프랑스 68혁명을 모방한) 이 해프닝성 짝뚱에도 진실'은 있다고 쓴다(<몽상가들>에 의하면, 68혁명 또한 폼이자 제스처에 지나지 않지만). "68혁명에 대한 답변이라고 읽히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서인 <안티 오이디푸스>를 빌자면, 혁명이란 사회나 인간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어야 한다. 켄 일행은 그 누구보다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것이 비록 고다르의 영화를 핑계대어 여학생을 꼬시고,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빌어 자유를 흉내내는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충실히 배설한다. 켄은 입버릇처럼 즐거우면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한다. 정답은 여기에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담은 청춘의 기관차는 무언가를 재보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가득 안고 부딪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구 반대편에서 체험한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이었다."

재일교포 감독 이양일도 이 영화에서 "지금은 없어진 그 시대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회생시키고 싶었다"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은 다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68세대나 69세대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류, 혹은 기성세대가 된 지금 왜 세상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걸까? 혹은 왜 이것밖에는 달라지지 않은 걸까? 그건 '즐거움' 자체가 우리 삶의 물적 토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특정한 사회적 토대와 관계가 허용하는 상부구조이자 잉여이고 기분이다. <69>를 쓰는 작가는 그걸 써서 밥벌이를 하는 전업작가이다. 거기에서 즐거움만 읽어내는 건 순진한 태도이다. 다들 아는 것이지만, 69라는 건 특정한 성적 체위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욕망을 대변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하지만, 69라는 체위만으로는 어떠한 재생산(reproduction)도 가능하지 않다. 바꿔 말하면, 그 욕망은 아무런 물적 토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니, 그러한 기호가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이었다면(<몽상가들>에서도 그렇지만), 혁명이란 그저 폼(form)이며 폼(foam)이다.



 

 

 

마음껏 전시되는 육체들에도 불구하고 <몽상가들>은 내게 틴토 브라스의 영화들보다도 재미가 없었는데(물론 브라스는 주로 엉덩이를 전시한다), <69>는 그보다는 재미있을 걸로 보인다. 하지만, 재미 혹은 재미의 윤리(fun ethic)는 말 그대로 (자기충족적인) 재미를 위한 것이다.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한 것. 거기에 진정한 혁명이니 기운이니 하는 문구를 갖다 붙이는 건 보기에 불편하다. 혁명이 아무리 대단한 게 아닐지언정 거기엔 피흘림이 있고 피냄새가 섞여 있다(그런 점에서 아직 보지 않았지만, 내가 지지하는 영화는 최양일의 <피와 뼈>이다. '피와 뼈'에 비한다면 '69'는 애들 장난이다). 그게 마스터베이션과의 차이이다...

P.S. 최근에 나온 책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영화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굳이 책 얘기를 덧붙이자면, 베르톨루치에 관한 것으로 <베르톨루치, 중요한 장면들>(예건사, 1991)을 들어볼 수 있다. 절판된 책이어서 구하기가 쉽진 않지만). 글을 나누는 수밖에. 제목도 바꿔서 걸고. 아즈마 히로키 얘기도 덧붙이려고 했는데, 복사한 글을 들고 오지 않았다. 다음에 보완하기로 한다...

05. 03. 28

 지난주 <한겨레21>에 두 영화에 대한 소개 기사("청춘의 꽃, 68을 기억하는가")가 실린 걸 뒤늦게 읽었다. 내가 읽은 평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균형이 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이 기사를 먼저 읽었더라면 나는 굳이 두 영화에 대해 군말을 덧붙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 대목만 인용해 둔다:

"두 감독이 돌아보는 60년대는 같으면서 다르다. 두 영화는 60년대를 혁명의 시대이기에 앞서 축제의 계절이었다고 회고한다. <몽상가들>은 섹스를, <69>는 청춘을 내세운다. 인류의 마지막 청춘세대였던 68세대 출신인 베르톨루치 감독은 60년대를 돌아보며 분열한다. 베르톨루치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영화는 60년대를 조롱한다. 베르톨루치는 “미래에 대해 깊은 우울감을 가지고 있을 요즘 젊은이들에게 나는 긍정적으로 희망으로 가득 찼던 그때를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매튜의 시선을 빌려 쌍둥이 남매의 일탈적 행동이 미숙아들의 자폐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감독은 자신의 세대를 긍정하고 싶어하지만, 감독을 포위한 현실은 감독의 무의식에서 희망을 거세한 듯 보인다. 그의 시선은 자꾸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찾는 매슈에게 쏠린다."

<몽상가들>에 대한 유효하면서도 적절한 읽기이다(내가 말하고 싶었던바 또한 <몽상가들>이 60년대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조롱'혹은 비아냥이라는 것이다)...

 0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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