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한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됐다는 게 이맘때 쓰게 되는 표현이지만, 올해는 '지리한 장마'가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무더위가 시작된 듯하다. 밤마다 잠깐씩 짬을 내어 아파트 단지 사잇길을 왕복으로 걸어다니는 '걷기 운동'을 지난주부터 시작했는데, 비 때문에 거른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장마가 이름값을 하지 못한 지는 좀 됐다고 봐야겠다. 장마 스스로가 지레 지리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장마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무엇으로 장마인가, 나는 이대로 장마여도 좋은가, 등등의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는지도.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건 그때부터이다(물론 그 전에 일이 꼬였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진단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일의 변주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왜, 나는 장남인가, 어쩌다 나는 가장이 됐는가, 에서부터 세상은 어째서 이 모양인가, 에 이르기까지. 대답없는 질문을 던지는 건 (하이데거 말대로) 현존재의 특권이다. 그리고 여름에 피서는커녕 책읽을 시간도 감지덕지하는 인간은 그런 특권을 좀 남용해도 좋겠다(그런 소리가 피서지에까지 들릴 리는 만무하니까). 이왕이면 이런 엄포도 놓아가면서. "책, 내가 너 아니면 읽을 게 없을 줄 알아?!"

 

 

 

 

그런 엄포 때문은 아니겠지만, 책들은 휴가를 반납한 듯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그런 책들 가운데, 새로이 맘에 드는 얼굴, 그러니까 '뉴 페이스' 몇을 꼽아보기로 한다. 첫번째로 꼽는 건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의 기능>(그린비). 얼마전에 나왔던 두툼한 전기 <빌헬름 라이히: 세상을 향한 분노>(양문)가 함께 읽어볼 만한 라이히 컬렉션이 되겠다(알라딘에는 6권의 책이 뜨는데, 이미지가 제공되는 건 위의 3권이다. 물론 거기에 적어도 두 권쯤은 더 추가되어야 한다.). 80년대에 출간됐었던 <파시즘의 대중심리>(현상과인식, 1986)도 조만간 재번역되어 출간된다고 하니까 기다려볼 일이고. 흔히 '프로이트 좌파'로 분류되는 라이히 입문서로서 내가 추천할 만한 것은 <프로이트 급진주의 : 빌헬름 라이히, 게자 로하임, 허버트 마르쿠제(The Freudian left)>(종로서적, 1981)이다. 내가 '라이히'란 이름을 처음 접해본 책이고 나에게 그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책이다(덕분에 만화로 된 라이히 전기도 읽었다). 

프로이트 좌파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주의를 접목시켜보고자 한 이론가들을 가리키며, 라이히와 함께 거명된 이름들 중(로하임의 저작이 번역돼 있는가?) 마르쿠제를 떠올려보면 이들의 구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각자의 진로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성해방과 계급투쟁을 연관지어 사고하고자 했던 것이고, 이들은 주류 마르크스주의로부터는 모두 찬밥의 대우를 받았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물론 라이히의 경우가 가장 유별나지만(그는 말년에 '오르곤 에너지' 연구에 몰두하다가 학계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미국 식품의약국에도 제소되어 복역하다가 감옥에서 죽었다). 그 유별난 사람의 유별난 생각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면, 라이히의 책 두어 권쯤 들고 피서지로 향하면 되겠다(물론 연인과 동행하면서 <오르가즘의 기능>을 들고갔다간 라이히 이상으로 따돌림 받을 수 있다. 그 점은 주의하시압).

 

 

 

 

두번째로 꼽고 싶은 건 신간 들뢰즈 연구서로서 키스 안셀 피어슨의 <싹트는 생명(Germinal life)>(산해)이다. 부제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인데, 들뢰즈 연구서를 좀 뒤적여본 사람이라면 피어슨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니체와 베르그송 연구서를 갖고 있는 소장 학자인데, 언젠가 한번 그의 논문을 읽고 믿음직 하다 싶어서 그의 연구서라면 모두 복사해둔 적이 있다. 그런 그의 책이 최초로 우리말 번역을 얻은 것(책의 원서는 내 책상 머리에 몇 년째 꽂혀 있는 중이다). 번역은 국내의 대표적인 들뢰지안의 한 사람인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가 맡았다. 같은 역자가 이전에 옮긴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이어지는 것일 텐데, 생명철학은 들뢰즈에 대한 나의 세 가지 관심사 중 하나이다. 다른 두 가지는 언어철학과 영화철학(국내에 소개가 좀 빈약한 건 언어철학쪽이다. 해서 르세르클의 <들뢰즈와 언어> 같은 책도 번역되어야 구색이 맞다고 본다).

역자는 후기에서 들뢰즈 철학의 요체로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데, 그 '잠재적인 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나로선 '배아줄기세포'가 아닌가 한다(그건 '기관없는 신체'이기도 하다). 들뢰즈의 생명철학이 윤리학적 함축도 가질 수 있는 건 그런 때문일 것이다. 역자는 또다른 빼어난 들뢰즈 연구서로서 마누엘 데 란다의 저작을 거명하고 있는데, 이쯤에서 내가 기대하는 책은 지젝의 들뢰즈론 <신체 없는 기관>이다. 이에 대해서는 재작년 내한 강연의 한 주제로 지젝이 다루기도 했다(<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참조).

 

 

 

 

세번째 책은 엔디 매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Metromarxism)>(시울)로 '도시 맑스주의'란 새로운(?) 분야를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맑스가 살았던 18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도시와 맑스주의의 관계를 맑스를 포함한 엥겔스, 벤야민, 레페브르, 드보르, 카스텔, 하비, 버먼 등과 같은 일련의 맑스주의자들의 견해를 도시문화학이라는 필터에 맞추어 전기적이면서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서술한 도시맑스주의 개괄서." 최근의 관심사 하나와 맞아떨어지기에 구미를 당기는 책이다. 이 '도시맑스주의'라는 건 적어도 나에겐 '사이버맑스주의'보다는 흥미로운 주제이다.  


      

 

 

 

네번째로 꼽을 책은 오규원 신간 두 권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301번째 책으로 나온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가 그의 시집이고, <날 이미지와 시>가 그의 시론이다. 아마도 지난주에 신간 소개를 했더라면 이 책들을 제일 먼저 꼽고 좀 장황한 얘기들을 늘어놓았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그 사이에 바람이 좀 빠져버렸다. 시집과 시론집은 내가 아는 '오규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시집의 해설을 쓴 정과리에 따르면 그 '오규원'은 '절대 관념의 탐구자'로서의 오규원이었다(흔히 김춘수와 비교되는). 그리고 그런 한에서 그는 한국시의 현상학자이며, 후설이다(한국시의 하이데거는, 릴케와 횔덜린은 누구인가?).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몇 마디 하려면 좀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정과리만큼은 아닌데, 그는 70쪽 분량의 시집에 60쪽이 넘는 해설을 붙여놓았다.

그가 '독자'라는 주어로 그런 '민폐'를 독자 일반에게 떠넘기려는 건 좀 볼썽사나운 수작이다. 그는 오규원 시에 대해서 '안에서 안을 부수는 공간'이라고 이름붙인바 있는데, "하지만 독자는 얼마 전 <르몽드>의 기자가 케르테스의 소설에 대해 똑같은 명칭을 쓰는 걸 읽고는 혼자 즐거워한다."에서 혼자 즐거워한 주체(주어)는 정과리이지 독자 일반이 아니다. 그가 독자라는 제유를 통해서(라도) 독자의 자리를 독점하는 건 주제에 넘는 일 아닌가? 그는 마치 자신만이 오규원 시에 대해서 샅샅히 해부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그는 시집의 첫 시편들을 차례대로 분석해나가는데, 그런 방식으로 분석이 다 갈무리될 리 없다. 해서 숙제가 남는바, "그러나 시집 전체, 즉 모든 시편들의 구성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차후로 미루기로 하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더 바람직했던 건 이 해설 자체가 '다른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지 않았을까? 오규원 시집에 걸맞는 해설은 투명하고 담백한 글이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처럼.).   

 

 

 

 

다섯번째 책은 오랜만에 고른 미술책이다. 할 포스터의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아트북스). 부제는 "포스트모던 시각으로 본 초현실주의와 프로이트"이다. 저자는 프린스턴대 교수로서 저명한 미학지 <옥토버>의 편집자이고, 현대미술의 철학적 해명을 다룬 여러 저서를 갖고 있다. 그 중 <실재의 귀환(The Retun of the Real)>(경성대출판부, 2003 )가 번역돼 있고, 편저로 <반미학(Anti-Aesthetic)>(현대미학사, 2002), <시각과 시각성(Vision and Visuality)>(경성대출판부, 2004) 등이 소개돼 있다(이 중 <반미학>은 읽을 만한 번역이 아닌 걸로 알고 있다. 나머지 책에 대해서도 장담하진 못하겠다. 내용 자체가 쉽지 않은 면도 있고.) 

소개에 따르면 이 책에서 "저자는 '초현실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줄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초현실주의 시대의 것'이어야 하고, 또 '그 분야 내부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의 범주로는 초현실주의에 나타난 이질적인 작업들과 심리적 갈등, 사회적 모순 따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책은 프로이트의 '언캐니(the uncanny)' 개념을 불빛삼아 초현실주의 텍스트와 이미지의 동굴을 탐사한다." '언캐니'란 건 흔히 '기괴함' 섬뜩함'으로 번역되는 프로이트의 용어이다(국역본 프로이트 전집에서는 '기이한 낯설음'이라고 옮기고 있다). 문학작품 분석에서도 자주 사용되는데, 초현실주의 회화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한번 읽어봄 직하다.

 

 

 

 

한편, 저명한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이데아>(예경)도 출간됐다(곰브리치와 쌍벽을 이루던가?). "도상해석학의 창시자이자 '독일 태생의 유태인으로 나치 시절 미국으로 망명한 저명한 미술사학자이자 예술철학자', 파노프스키의 초기 연구 성과를 집약하고 있는 책이다. 파노프스키는 책을 통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조형 예술 이론에 끼친 결정적인 영향과 시대에 따른 변화상, 한 마디로 "미의 이데아란 개념의 역사적 운명"을 추적한다."고 소개돼 있다. 그의 책으론 이미 <도상해석학 연구>(시공사, 2002)가 소개돼 있다.

05. 07. 18.


 

 

 

 

P.S. 소개에서 빠진 책은 저래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사이언스북스). 이전에 동아사이언스 북스 시리즈로 나오던 책들이 이번에 재출간됐는데, 그때 빠졌던 책으로 내가 가장 아쉬워했던 게 이 책 <섹스의 진화>이다. 이미 저자의 책을 한두 권 읽어본 독자는 알겠지만, '다이아몬드의 모든 책'이다. 그 다이아몬드의 최신간은 <붕괴(Collapse)>이다(아직 번역되지 않았는데, 알라딘에서 원서 구입이 가능하군). 575쪽의 방대한 분량인데, 어떤 사회가 왜, 어떻게 망하고 안 망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한국이란 나라가 망조가 든 나라인지(그래서 얼른 이민가는 게 상책인지), 기대를 걸어볼 만한 나라인지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한번 읽어봄 직하다. 물론 얼른 번역되었으면 더 좋겠다. 500쪽이 넘는 원서를 턱없이 읽어나가다간 사회생활 망가지기 십상이다...    

 

 

 

 

P.S.2. '들뢰즈 책'에 신간이 더 있다. 브라이언 마수미가 쓴 <천개의 고원 -사용자 가이드>(접힘펼침)이 그것이다. 말 그대로 매뉴얼인데, 별로 두껍지 않았던 걸로 기억되는 책이 331쪽으로 나왔다. '매뉴얼'을 자임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전위적인' 매뉴얼을 시도한 책이라 친절한 주석서와는 거리가 멀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 전에 같은 출판사, 같은 역자에 의해 나왔던 책은 <프로이트의 거짓말>(접힘펼침, 2004)로 유진 홀랜드가 쓴 <안티 오이디푸스> 가이드북이다. 보다 친절한 쪽은 이 책인데, 문제는 '전위적인' 책의 판형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Deleuze and Guattari's anti-Oedipus)>란 원제가 뜬금없이 <프로이트의 거짓말>로 옮겨진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트북 같은 판형을 고집한 탓에 161쪽 짜리 책이 539쪽으로 둔갑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이미 나온 걸 어쩌랴만). 이런 '전위적인' 책이 많이 팔렸을 리 없는 건 당연하므로 출판사쪽의 '계산'을 짐작할 도리가 없다(나는 책 갖고 장난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책은 좋은 번역만 가지고도 충분히 튄다. '예술'은 다른 데 가서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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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07-19 00:22   좋아요 0 | URL
소개해주신 지젝을 읽고 있답니다. 쉽지 않군요. 오선생의 시집을 들고 좀전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정과리 선생의 뒷글은 주례사비평을 넘어 지독히 정치적이라는(좀 치사하다 싶을 만큼 자신의 해석을 늘어놓는) 뉘앙스가 짙더군요.

릴케 현상 2005-07-18 22:17   좋아요 0 | URL
딴 건 모르겠지만 정과리가 저러는 건 소문이 날 만큼 난 것 같아요-_-

poptrash 2005-07-19 01:59   좋아요 0 | URL
정말 잘 읽고 있어요. 제가 요즘 하는 일이 신간들 들여다보는 일이라서, 또 소개해주시는 분야가 제가 다루고 있는 책들이라서 관심 갖고 보고 있습니다. 아, 저는 뭐 학술적인 일이 아니라 그냥 '기계적인' 일을 하는 '알바생' 이랍니다. 책 좀 많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 나오는 책들 다 재미있게 보이는데, 막상 어느것 하나도 읽기가 쉽지 않네요 저로서는.

로쟈 2005-07-19 09:24   좋아요 0 | URL
저도 실질 소득면에서는 '알바생'입니다. 나오는 책들을 다 재미있게 보고 계시다니 부럽네요.^^ (저는 대개 구경만 합니다.)

palefire 2005-07-19 09:55   좋아요 0 | URL
언제나 충실한 책소개 해주시는 로자님. 안셀 피어슨의 책은 일부 Deleuzeguattarrian들에게 보이는 성급함과 경박함이 없어서 좋습니다. Germ/Milieu의 관계부터 들뢰즈-베르그송을 풀어가려는 노력도 깊이가 있고요.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는 바로 보관함에 등록해놔야겠네요. 올려주신 목록중 관심분야상 제일 반가운 건 역시 할 포스터의 [Compulsive Beauty]입니다. 조금 훑어본 바로는 번역이 나쁘지 않습니다. [실재의 귀환]은 역어와 문장이 난삽한 편. MIT/October라인의 치밀하고 꼼꼼한 미술/시각문화비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포스터의 책이 원서로만 방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가장 최근 저서인 [Prosthetic Gods]를 더 꼼꼼히 봐야겠다는 열망을 주는 책)

palefire 2005-07-19 09:56   좋아요 0 | URL
그리고, [몸체 없는 기관]은 역시 번역중입니다. 라캉 관련 전공자 들뢰즈 공부한 사람 하나가 공역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로쟈 2005-07-19 12:11   좋아요 0 | URL
포스터의 책이 괜찮은 번역이라니 다행이군요. <실재의 귀환>에서 별로 재미를 못본 터라... <신체 없는 기관>은 도서출판b에서 근간으로 예고돼 있습니다...

주니다 2005-07-19 15:04   좋아요 0 | URL
<오르가즘의 기능>은 집에 놀러온 사람들에게 괜한 오해를 살만한 제목이군요.^^ <실재의 귀환>도 아직 다 보지 못했는데, 신간이 나왔더군요. 저도 서점에서 잠깐 살펴 봤는데, 일단 한국말이 잘 안되는 <실재의 귀환> 보다는 훨씬 문장이 매끄러웠습니다.(내용의 오역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ps.2에서 소개하신 책 2권의 상태는 어떤지요? 일전에 서점에서 <프로이트의 거짓말>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들루즈와 과타리'(과메기가 떠올랐습니다.)라는 말에 이 무신 해괴한 책인고 했답니다. 역자가 미국에서 공부했던 것 같은데, 그 동네에서는 '들루즈, 과타리'라고 발음하나부죠? 그나저나 장마가 지지부진 끝나고 무척 덥네요. 방학이지만 아마도 학교에 매일 출근하실터,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늙으니 안나던 땀도 줄줄입니다) 언제 함께 시원한 생맥주라도 한잔 해야할텐데....

로쟈 2005-07-19 15:16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시원한 생맥주는 모스크바에서 마셔본 기억이 마지막입니다.^^;) '과타리'는 좀 이상한 표음인데(u가 묵음이므로), '가따리'를 고집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프라이드'인 걸 어쩌겠습니까? 마수미의 책은 번역본을 제가 직접 보지 못했고, <거짓말>은 폼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대출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장식용 책이지 독서용 책이 아니더군요...

테렌티우스 2006-12-09 12:29   좋아요 0 | URL
이미 절판되었지만 아마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라이히의 책은 다음의 책일 것 같아요: "프로이트와의 대화:, 빌헬름 라이히 편저, 황재우 역, 종로서적, 1982.

그리고 이 역자 황재우씨는 바로 시인 황지우씨입니다...^^ 황재우가 바로 시인의 본명이지요. 지우는 본인 이름의 오식이던가 오타였는데, 시인은 이게 오히려 마음에 들어 필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말을 어느 인터뷰에선가 읽은 기억이 나네요...

테렌티우스 2006-12-09 12:32   좋아요 0 | URL
그리고 위 책의 내용은 프로이트와의 대화가 전혀 아니라... 라이히가 한 대담자와 프로이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내용이지요... 아마도 당시 82년에 라이히가 너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출판사에서 제안한 제목일 듯 싶네요...

로쟈 2006-12-09 15:5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책은 저도 완독하진 않았지만 들춰본 적이 있습니다. 요즘 분위기로는 다시 나와도 좋은 듯한데요. 황재우(^^) 역의 <변증법적 상상력>과 함께...

테렌티우스 2006-12-09 23:28   좋아요 0 | URL
<변증법적 상상력> 박사학위 논문으로 최상급이지요. 푸코나 벤야민 혹은 크리스테바의 것들보다는 한 급 아래라 할지라도 기존의 문제의식을 너무도 일목요연하게 자기만의 시각으로 - 혹은 논쟁적으로 - 잘 정리해 놓았지요. 더구나 호르크하이머가 서문을 써주었지요. 저도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저자가 당사자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미출간 자료들을 섭렵하는 등 당시의 분위기를 파악하기엔 아주 그만인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천할 만한 책이지요.
 

 

 

 

 

꺼내놓은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하겠다. 생각보다 견적이 많이 나올 듯하지만, 최대한 줄여서. 역시나 제목은 (이미 언급했던 대로) 속임수이다.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바람에 '부담스런' 제목을 달게 됐지만, 지난번에 속으신 분들이 또 속지는 않을 것이므로 양해의 말을 덧붙이지는 않겠다. 이런저런 번역에 대해서 참견하는 일이 어쩌다가 내가 즐겨하는 일처럼 돼 버렸지만,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 그냥 책을 읽는 것이다(우리말 책이면 더 좋고). 물론 좋은 책을. 책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자꾸 이런 참견들을 늘어놓는 것은 그렇게 마음놓고 읽을 수 있도록 책들이 나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제만 하더라도 나는 도서관에서 몇 달 전에 주문해두었던 책으로 힐리스 밀러의 <문학에 대하여>(동문선, 2004)를 대출해왔다... 이하의 내용은 너무 길어진 듯해서 '참을 수 없는 번역의 부끄러움'이란 제하에 따로 리뷰란에 옮겨놓았다. 참고하시길... 하여간에 그래서, 좋은 책 읽을 시간의 상당 부분을 나는 나쁜 책들에 대한 불평으로 채워넣고 있다. 이것도 쓸데없이 예민한 독자의 업보라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상황이 호전되는 것으로 보상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여간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마저 읽어보기로 한다. 그렇다고 진도가 막나가는 것도 아니다(왜 그런지는 지난번에 설명했다). 지난번에 한 문장을 읽은 데 이어서 오늘도 고작 한 단락을 읽게 될 것이다. 어디냐면, #3의 마지막 한 대목이다. 먼저, 5종의 우리말 번역을 차례로 나열해 보겠다.

-"화보가 들어있는 신문이나 주간뉴스 영화가 제공해주고 있는 복제사진들은 그림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그림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있는데 반하여 복제사진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부터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분위기(=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현대의 지각 작용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이 세상에 있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지각작용의 감각이 너무나 커졌기 때문에 지각작용은 복제를 통하여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찾아내고 있을 정도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통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는 것이 직관의 영역에서도 그래도 나타나고 있다. 현실이 대중에 적응하고 또 대중이 현실에 적응하는 현상은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이다."(반성완)

-"화보나 주간뉴스에서 쉽게 느낄 수 있듯이 복제는 사진(그림)과 뚜렷이 구별된다. 후자(그림)에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얽혀 짜여 있지만 반면 전자(복제)에는 일시적인 것과 반복가능성이 들어 있다. 대상의 껍질을 벗긴다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는 감각의 표지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동일한 유의 것에 대한 감지의 의미'는, 복제품을 수단으로 하여 일회적인 것에서도 그것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되었다. 대중을 향한 실재의 방향 자세나 실재를 향한 대중의 방향 자세는 사고나 직관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하나의 과정이다."(차봉희)

-"확실히 사진잡지나 뉴스 영화에 의해 보여지는 복제는 육안으로 보는 모습과는 다르다. 전자에서 일시성과 반복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후자에선 유일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껍질로부터 대상을 떼어내는 것, 즉 영적 분위기(=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에 있어서 '사물의 보편적 동질성에 대한 감각'이 복제라는 수단을 통해서 심지어는 유일한 대상으로부터도 그 동질성을 추출해낼 수 이는 정도에까지 달하게 되었다는 표시다. 이것은 이론 분야에서 점점 더 커가는 통계의 중요성으로도 나타나지만 지각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대중에 대해 현실을 적응시키는 것 혹은 현실에 대해 대중을 적응시키는 일은 지각에서와 같이 사고에 있어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다."(이태동)

-"그리고 화보가 실린 신문과 주간 뉴스가 마련해주는 복제는 분명 그림과는 다르다. 일시성과 반복성이 전자(복제)에 아주 긴밀하게 얽혀있다. 껍질로부터 대상을 분리해내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는 (우리시대) 지각의 특징이거니와 지각의 '세계 속에서의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 커져서 그 감각은 복제를 수단으로 삼아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획득해낸다. 따라서 이론의 영역에서 점점 증대하는 통계로서의 의의로서 두드러지는 것은 직관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대중에 대한 실제의 적응과 실제에 대한 대중의 적응은 직관에 대해서 만큼이나 사유에 대해서도 무한한 범위의 과정이다."(강유원팀)

-"그림이 실린 신문이나 주간 뉴스가 늘 준비해 가지고 있는 재생산(복제)는 오해의 소지없이 그림과는 구별된다. 그림 속에선 일회성과 지속이 서로 밀접하게 엉켜 있다면 복제 속에선 일시성과 반복가능성이 그렇게 서로 엉켜있는 것이다. 사물을 그 외피로부터 풀어내는 것, 아우라의 파괴가 '오늘날' 지각의 표지다. 세계에 존재하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그 지각의 감성은, 그 지각이 재생산(복제)을 수단으로 하여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얻어낼 수 있을 정도로 자라나버렸다. 그리하여 이론의 영역에서 통계학의 중요성의 증가가 드러내주는 것이 시각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현실이 대중을 향하고 대중이 현실을 향하는 것은 사유를 위해서도 직관을 위해서도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이다."(김남시)

이에 해당하는 독어 원문(주어캄프 전집본)과 영역본(하버드대 선집본)의 단락은 각각 아래와 같다.

-"Und unverkennbar unterscheidet sich die Reproduktion, wie illestrierte Zeitung und Wochenschau sie in Bereitschaft halten, vom Bilde. Einmaligkeit und Daur sind in diesem so eng verschränkt wie Flüchtigkeit und Wiederholbarkeit in jener. Die Entschälung des Gegenstandes aus seiner Hülle, die Zertrümmerung der Aura, ist die Signatur einer Wahrnehmung, dern >Sinn Für das Gleichartige in der Welt< so gewachsen ist, daß sie es mittels der Reproduktion auch dem Einmligen abgewinnt. So bekundet sich im anschaulichen Bereich was sich im Bereich der Theorie als die zunehmende Bedeutung der Statistik bemerkbar macht. Die Ausrichtung der realität auf die Massen und der Massen auf sie ist ein Vorgang von unbegrenzter Tragweite sowohl für das Denken wie für die Anschauung."(1-2권, pp. 479-80) 


-"And the reproduction, as offered by illustrated magazines and newsreels, differs unmistakably from the image. Uniqueness and permanence are as closely entwined in the latter as are transitoriness and repeatability in the former. The stripping of the veil from the object, the destruction of the aura, is the signature of a perception whose 'sense for sameness in the world' has so increased that, by means of reproduction, it extracts sameness even from what is unique. Thus is manifested in the field of perception what in the theoretical sphere is noticeable in the increasing significance of statistics. The alignment of reality with the masses and of the masses with reality is a process of immeasurable importance for both thinking and perception."(1권, pp. 255-6) 

여기에 러시아어본을 더 참조하겠지만, 러시아어의 키릴 문자들마저 여기에 옮겨오지는 않겠다. 번역문들은 보통 5-6개의 문장으로 구성돼 있다.  첫번째 문장의 요지는 영어로 하면, reproduction(Reproduktion)과 image(Bilde)는 다르다/구별된다는 것('구분된다'가 아니다).  대략 '복제'와 '그림' 사이의 구별로 옮겨져 있는데(이태동 역에서, 'image'를 '육안으로 보는 모습'이라 옮긴 것은 불필요한/부정확한 의역이다), 나라면 '복제 이미지'와 '그림' 사이의 구별 정도로 해두겠다.  영어의 newreels을 반성완과 이태동은 주간뉴스 영화라고 옮겼고, 다른 번역들은 그냥 '주간뉴스'라고만 했는데, 이건 러시아어본과도 대조해 보건대 전자가 더 정확하다(그러니까 과거 '대한뉴스'처럼 영화관에서 상영된 뉴스인 것).  

두번째 문장은 그 '복제 이미지'와 '그림' 간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후자(=그림)의 특징은 일회성(유일성)과 지속성이고, 전자(=복제 이미지)의 특징은 일시성과 반복(가능)성이다(강유원팀 역에서는 댓구의 전반부가 누락됐다).

세번째 문장은 그림 대신에 복제 이미지가 넘쳐나는 기술복제 시대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건 한마디로 대상으로부터 일회성과 지속성이라는 '껍질/외피'를 걷어낸 '아우라의 파괴'이다. 거기서 물론 '껍질'로 은유된 것은 '아우라'인바, 나는 Hülle(싸개/외피)의 역어로 영어본의 'veil'이 더 맘에 든다. 즉, 나라면, "대상으로부터 베일을 걷어내는 것, 즉 아우라의 파괴가 우리시대 지각의 특징이다" 정도로 옮겨두고 싶다. 그 '우리시대'의 내용은 관계사를 통해서 설명되는데, '세계에서 동질적인 것에 대한 취향'이 날로 증가하여(그건 기술복제시대 '대중의 취향'이다, 나는 Sinn(sense)의 역어로 '감각' 대신에 러시아어본을 따라 '취향'으로 옮기고 싶다) 이젠 일회적인 것에서까지 복제를 통해서 동질적인 것을 뽑아내고자 하는 시대이다.

네번째 문장(차봉희 역에서는 누락되었다)부터는 오늘의 주제와 연관된 것이므로 조금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다시 나열해 보면 이렇다(인용문의 강조는 모두 나의 것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통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는 것이 직관의 영역에서도 그래도 나타나고 있다."(반성완)

-"이것은 이론 분야에서 점점 더 커가는 통계의 중요성으로도 나타나지만 지각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이태동)

-"따라서 이론의 영역에서 점점 증대하는 통계로서의 의의로서 두드러지는 것은 직관적인 영역에서도 나타난다."(강유원팀)

-"그리하여 이론의 영역에서 통계학의 중요성의 증가가 드러내주는 것이 시각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김남시)

-"So bekundet sich im anschaulichen Bereich was sich im Bereich der Theorie als die zunehmende Bedeutung der Statistik bemerkbar macht."(독어본)

-"Thus is manifested in the field of perception what in the theoretical sphere is noticeable in the increasing significance of statistics."(영어본)

현대에 와서 통계학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동질적인 것에 대한 취향의 우세/증가에 따라) 세계가 그만큼 동질화, 평준화되었다는 뜻이겠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통계란 건 사실 무의미하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복제 이미지'의 증가로 대별될 수 있는 지각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될 수 있다, 는 게 내가 이해하는 이 문장의 요지이다.

여기서 굵은 글씨로 강조한 대목들은 모두 'anschaulichen Bereich'의 번역인데,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에서는 에누리없이 지각의 영역(the field of perception)이라고 옮겨진 것이(이태동 역은 영어본을 중역한 것이기에 이에 따르고 있다) 대개의 국역본에서는 '직관의 영역'이라고 옮겨지고 있다. 뒤에 나오지만, 독어의 Anschauung이 보통 '직관'으로 옮겨지지만(특히 칸트철학의 용어로 굳어져 있다), 그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영어의 view이다. 내가 아는 몇 안되는 독어단어 Weltanschauung이 Welt+anschauung으로 구성된바, worldview, 곧 '세계관'이란 뜻을 가질 때의 그 '관(觀)'이 Anschauung의 우리말 뜻인 것. 그것이 비록 '직관'이란 뜻도 갖는다고 해도 이 문맥에서는 좀 뜬금없다(영어의 perception이나 러시아어의 vosprijatie는 '직관'과 무관한 단어들이다. 참고로 '직관'을 나타내는 영어의 'intuiton'은 '식스 센스'란 뜻을 강하게 가지며, instinct와 동의어이다).

김남시를 제외한 다른 번역자들이 '직관의 영역'이라고 자동적으로 번역한 것은 그 단어를 철학용어로 이미 접수하고 있기 때문인 듯도 하고, 앞에서 '지각'이라 옮긴 'Wahrnehmung'과 변별해주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Wahrnehmung과 Anschauung에 대해서 영어/러시아어본은 전혀 아무런 주저없이 '지각'이라고 옮긴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직관과 지각이 동의어로 취급될 수 없는 한, 이 대목에 적합한 역어는 '지각'이다(혹은 김남시처럼 '시각'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어차피 문제되고 있는 건 '시지각'이니까). 그건 이어지는 마지막 문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이 대중에 적응하고 또 대중이 현실에 적응하는 현상은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이다."(반성완)

-"대중을 향한 실재의 방향 자세나 실재를 향한 대중의 방향 자세는 사고나 직관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하나의 과정이다."(차봉희)

-"대중에 대해 현실을 적응시키는 것 혹은 현실에 대해 대중을 적응시키는 일은 지각에서와 같이 사고에 있어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다."(이태동)

-"대중에 대한 실제의 적응과 실제에 대한 대중의 적응은 직관에 대해서 만큼이나 사유에 대해서도 무한한 범위의 과정이다."(강유원팀)

-"현실이 대중을 향하고 대중이 현실을 향하는 것은 사유를 위해서도 직관을 위해서도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이다."(김남시)

-"Die Ausrichtung der realität auf die Massen und der Massen auf sie ist ein Vorgang von unbegrenzter Tragweite sowohl für das Denken wie für die Anschauung"(독어본)

-"The alignment of reality with the masses and of the masses with reality is a process of immeasurable importance for both thinking and perception."(영어본)

먼저, 여기서 'realität'를 '현실' 대신에 '실재'(차봉희)나 '실제'(강유원팀)로 옮긴 건 현실성이 떨어져 보인다. 문장의 마무리에서도 '무한한 연구영역을 지닌 과정'(이태동), '무한한 범위의 과정'(강유원팀)이나 '무척 넓은 영향력을 갖는 경과'(김남시) 등은 모두 초점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점은 이러이러한 것이 (우리시대의) 사유와 지각에 있어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중요성을 갖는,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과정이라는 것. '이러이러한 것'의 내용은 영어본을 따르자면 대중과 현실의 alignment(제휴/손붙잡기)이고, 러시아어본을 따르자면 상호 orientatija(정향)이다.   

이 마지막 문장의 속임수는 사실 'Anschauung'이라 할 만한데, 앞에서 '시각(적인 영역)'이라고 옮겼던 김남시조차도 이 대목에서는 '직관'이라고 옮기고 있다. 이건 거의 직관적인 번역들이라고 할 만한데, 이태동만이 유일하게 '지각'이라고 옮긴바 그가 '직항로'를 따라서, 곧 독어에서 바로 옮긴 것이 아니라 영어를 중역한 탓에 오역을 면할 수 있었다는 건 아이러니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번역은 '직항로'로 가는 게 합당하며 중요하지만 샛길들도 무시하지 말고 참조하라는 것이다(직항만을 믿고 가다가는 간혹 삼천포로 직행하는 경우들이 없지 않기 때문에)...

이로써 몇 시간을 투자해 한 문단을 읽었다. 다른 일들도 밀려 있는 탓에, 글의 나머지 부분들은 언제 다 읽게 될지 기약할 수 없다. 그저 믿을 만한 좋은 번역 '하나'를 갖고 있지 못한 탓에 번역의 '직항로' 시대(이윤기의 표현)에도 우리의 읽기는 '우회로'만을 따라가야 한다. 여름날 모스크바의 산책로 같은 길은 우리의 책읽기에서 언제쯤 마련되는 것인지...   

05.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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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y 2005-07-14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벤야민 공부를 하게 되는군요. 나머지 부분도 계속 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제게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벤야민을 잘 모릅니다만, 여기에 제시된 독일어 원본과 번역들에 기초해서 몇 마디 거들어볼까 합니다.

먼저 세 번째 문장에서 독일어 gewachen은 오타가 있었나 봅니다. (한글 번역 모두와 영역이 채택하고 있는) 커졌다, 자랐다 등의 뜻이 되려면 gewachsen이 되어야 하지요.

그런데 이 경우 감각(Sinn)이 커진다거나 자란다는 이야기가 썩 잘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로쟈님의 오타가 아니라 독일어 텍스트가 gewachen으로 되어 있다면, 벤야민 자신의 실수가 있었고 번역자들이 이것을 gewachsen으로 읽었다는 이야기겠죠. 하지만 이 경우 다른 가능성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벤야민이 (깨어났다는 뜻의) gewacht라고 써야 할 것을 gewachen이라고 썼을 가능성입니다. (독일인들도 범할 수 있는 실수입니다.) 이 가능성에 따라 세 번째 문장을 번역하면, “사물에서 외피를 벗겨내는 것, 아우라의 파괴는, 세계 내의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 깨어나서 (“깨어나서”가 싫으면 “각성되어”로 번역해도 좋겠지요), 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에서 조차도 동질적인 것을 획득해 내는 지각 방식의 특징이다.”가 되겠습니다. (einer Wahrnehmung에서 einer를 좀 강하게 “일종의” 정도의 의미로 읽었습니다.)


그 다음에 직관이냐 지각이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직관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우선 독일어 Anschauung은 어원적으로 직접(an) 보는 것(schauen)을 의미하고 우리말 직관이 여기에 어원적으로 일치합니다. 물론 어원과 별개로 직관의 의미가 무엇인가가 사실은 더 중요한 문제이겠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직관 항목을 찾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직관03 (直觀) [-꽌] 「명」「1」『교1』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음 2」『철』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 ≒직각03(直覺)

여기에서 1번 뜻은 정확하게 지금 문맥의 Anschauung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직관이라는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직관이라는 번역어가 단순히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것뿐 아니라, 지각이라는 번역어보다 낫다는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이야기해서 원어에서 다른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할 수만 있다면, 번역에서도 다른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좋습니다.

보다 중요하게는 지각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 경우, im anschaulichen Bereich / im Bereich der Theorie, für das Denken / für die Anschauung에서의 대구가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각의 영역/이론의 영역, 사유/지각 보다는 직관의 영역/이론의 영역, 사유/직관 의 대구가 더 분명하지요. 이론과 사유는 매개적인 인식방법이고 직관은 비매개적인 인식방법이니까요. 벤야민 자신도 이러한 대구를 염두에 두고 Wahrnehmung이라는 표현에서 Anschauung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realität을 현실로 번역하는 것은 좀 뜬금없어 보입니다. 벤야민이 III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대상과 자연적 대상이므로, 이 문장에서 그는 실재와 대중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Tragweite는 직역하면 사정거리라는 뜻입니다. 중요성이라는 뜻을 비유적으로 가질 수도 있으나, 문장의 맥락에서 보면, 사유에서나 직관에서나 무제한적인 사정거리를 가지는 과정, 즉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지금의 글을 읽으면서 제가 받은 느낌 한 가지는 영어 번역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을 것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Wahrnehnumg과 Anschauung을 구별없이 perception으로 번역한 것은 그렇다쳐도, Bild(그림)을 image로 번역한 것은 명백한 오역으로 보입니다.

로쟈 2005-07-14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하신 오타는 고쳤습니다. 오타가 어딘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그게 공연한 수고를 끼쳐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Anschauung의 역어에 대해서는 국어대사전을 인용하셨는데, 그것이 현재 '통용되는' 의미인지는 의문입니다(제가 보기에, 인용하신 두 가지 정의는 서로 양립되기 어려운 동음이의어로 처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감관의 작용을 통해 지식을 얻는 것과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파악하는 게 어찌 동일할 수 있을까요? 제가 '지각'과 '직관'이 동의어가 아니라면이라는 단서를 단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국어사전이나 백과사전에서 일반적으로 정의하는바는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이며(그래서 직각(直覺)이 동의어로 제시됩니다), 이는 영어의 intuition에 대응하는 걸로 설명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직관'이란 말에서 제가 떠올리는 바입니다. 만약에 그런 뜻이 제거된 상태에서 정의하신 첫번째 의미만을 전달할 수 있다면, 저는 '직관'이란 역어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지각'이란 역어를 선택하게 됩니다.

한편, 불어역에서는 'la réceptivité'로 옮긴다고 하는데, '지각을 통한 수용'의 측면을 드러내주는 듯합니다. 제가 강조하고픈 것은 그러한 지각이나 감관을 '통한' 인지입니다. 그리고, 지각의 영역/이론의 영역보다 직관의 영역/이론의 영역이란 대구가 더 분명하다고 하시면서, "직관은 비매개적인 인식방법"이라고 하셨는데, 그때의 '직관'이 바로 1번이 아닌 2번의 뜻입니다(때문에, '직관'이란 역어를 제가 오역이라고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과 관련하여 '현실'이란 번역이 뜬금없다고 하셨는데, 문맥상 동질적인 것에 대한 '대중'들의 취향과 (기술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동질적인 것을 뽑아내는 게 가능해진 '현실' 사이의 상호작용, 상호연루를 뜻한다고 저는 봅니다. '역사적 대상'과 '자연적 대상'이 이 단락의 키워드라는 건 이해하기 어려우며, '실재와 대중 사이의 관계'라는 표현도 저로선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Tragweite'의 경우, 제가 인용하지 않은 다른 영역본에서는 'scope'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그걸 제가 인용한 새 영역본에서는 importance라고 의역함으로써 뜻을 좀더 명확하게 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러시아어본도 마찬가지입니다. perception이란 역어는 두 번역본에 공통되며, 러시아어본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역어를 쓰고 있습니다. 영어나 러시아어로 똑같이 옮겨지는 독일어가 오역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제가 공감할 수 없습니다.

image는 아시다시피, 우리말 '이미지'보다는 더 광범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나름대로 벤야민 전문가들이 선택한 역어이므로 저로선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Bild는 상(像) 정도의 의미로 아는데, image가 거기에 대응하지 않는다는 지적이신지요? 영역본의 '명백한 오역'에 대해서는 제가 지적하거나 판별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paby 2005-07-14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트 이래 독일 철학에서 직관이라고 할 때는 대개 감각적 인식을 의미합니다. 감각적 인식이 개념을 통해서 매개되지 않은 인식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때문에 Anschauung이 직관으로 번역되고요.

참고로 독일어 Anschauung은 우리말 직관의 1번과 2번 뜻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직관 같은 것을 이야기할 때, 독일어에서 innere Anschauung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realität (또 영어에서 reality도) 지금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의 현실을 의미할 수는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영어로 current situation 정도의 의미죠.) 제가 이해하기로는 마지막 문장은 대중적 취향에 실재를 맞추는 것, 실재에 대중적 취향을 맞추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제가 없는 경우는 실재가 일회적인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켜줄 수 없겠지요. 하지만, 복제를 통해서 실재가 반복화되고 대중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죠.

Tragweite가 importance로 번역되는 것이 왜 뜻이 더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뜻을 잘못 전달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Bild는 이 맥락에서는 그냥 picture 같습니다. image는 특별히 일회적이지도 지속하지도 않지요. 반복적이고 비지속적인 image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로쟈 2005-07-14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독어의 경우 지각이나 직관을 한 단어로 쓰지만(권리와 법을 한 단어 droit로 쓰는 불어처럼) 한국어의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데리다의 <불량배들> 같은 경우 역자는 '주권자'를 "권리를 중단시킬 권리는 가진 자"라고 옮겨놓았더군요. 당연히 "법(혹은 헌정, 영어로는 law)을 중단시킬 권리(영어로는 right)를 가진 자"라고 옮겨져야 합니다. 불어에서는 아마도 같은 단어일 테니 '권리를 중단시킬 권리'라고 옮기는 게 무슨 잘못인가라는 반문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말로는 오역입니다.

지각과 직관을 뜻을 다 갖는 'Anschauung'의 경우도 비슷하지 않나 싶은데, 판단은 paby님이 하시기 바랍니다. 비근한 예이지만, 주어, 주어, 주제 등을 뜻하는 영어 단어 subject의 경우도, 그 우리말 역어들이 의미론적 가족유사성을 갖고 있지만, 문맥에 따라 다르게 번역해 주어야 혼동이 없습니다. Anschauung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고 있다는 건 제가 처음부터 전제로 한 것이며, 저는 이 대목의 문맥상 '지각'이 보다 타당한 역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실재'란 말은 저와 다르게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원본이란 뜻의 '실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경우 복제를 통해서 '반복화'된 것도 실재인가요? 저로선 서로 다른 텍스트를 읽고 있는 거라고 밖에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paby 2005-07-14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말씀드린 것은 우리말 직관도 독일어와 똑같이 두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누군가가 "우파"라는 번역어에 대해서 영어의 right이 이 경우는 오른쪽이 아니라 보수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파"라는 번역어는 오역이고 "보수파"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해 보죠. 이 경우, 우리말에서 "우"도 "보수적"의 뜻을 같는다고 지적하는 것이 적절한 대응이겠지요.

제가 이야기하는 실재는 사물, 사태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reality라는 말이 가지는 가장 중립적인 의미죠.

로쟈 2005-07-1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복되는 얘기지만, 다른 외국어 번역들의 사례들을 두고 보건대, (1)여기서 Anschauung은 '감관/지각을 통해 매개되는 인지'를 뜻하며, (2)우리말 '직관'은 비록 Anschauung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의미를 다 갖는다고 하더라도, '비매개적 인식'이란 뜻을 일차적으로, 그리고 더 강하게 갖기 때문에(저는 첫번째 뜻은 특수하게 사용된다고 생각하며, 지각과 직관이 일상어적 의미상으론 양립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3)이 경우에 적합한 역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한 지인에 다르면, 이 대목의 이태리어역은 'l'intuizione'인데, 짐작하시겠지만, 영어 단어 'intuition'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instinct의 뜻을 강하게 갖는 영어의 intuition과는 다르게 이태리어 'l'intuizione'는 'sensation'[sensazione]의 뜻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말씀은 이런 문맥에서라면 이탈리아어 'l'intuizione'을 intuition으로 영역하는 것도 일종의 오역이라는 것입니다(각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역이 다른 것이죠). 'Anschauung'과 '직관'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reality에 대해서는 말씀드린 대로, 저와는 다르게 이해하고 계신데, 제가 이해하는 reality의 가장 중립적인 의미는 '현실' 내지는 '현실성'입니다. '실재'는 말 그대로 real existence를 가리키는데, 그것이 어떤 사물의 실재, 우리의 감관/인지와는 무관하게 실제로 존재함을 뜻하는 걸 넘어서 '사태의 총체'까지 의미하는 단어인지는 의문입니다. 사태란 "일이 되어가는 형편이나 상태"를 뜻하며(흔하게는 영어의 situation), 그것은 심리적인 상황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한국어 '실재'는 그런 의미를 모두 포괄하지 않습니다.(덧붙여, 우리말에서 '우파'와 '보수파'는 동의어입니다. '우익보수'나 '보수우파' 등의 조어가 그래서 가능합니다. '지각'과 '직관'도 동의어인가요?)

paby 2005-07-14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schuung이나 직관이나 기본적인 뜻은 비매개적 인식입니다. 비매개적인 인식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독일어에서나 우리말에서나 1과 2의 뜻으로 갈려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죠.

이태리어 번역에서 percezione가 아니라 intuizione로 번역한 것은 우리말에서 지각이 아니라 직관으로 번역한 것과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reality 문제는 너무 문제가 확대될 것 같아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정도로 마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좀 지엽적인 문제였으니까요.

yoonta 2005-07-15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와 관련하여 철학소사전(동녁)을 참고해서 몇자 적어봅니다.
지각에도 두 가지 의미가 가능합니다. 첫째: 지각(wahrnehmung)은 감각을 바탕으로 성립하지만 개별적 감각들의 단순한 결합이 아닌 질적으로 새로운 감각적 반영이다..라는 정의가 있고요..둘째: 독어로 perzeption인 지각은 좁은 의미의 지각으로 의식에 이르지 못한 "지각의 한부분"을 말합니다. 즉 이 지각은 "무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는 "지각"입니다...
그리고 직관도 두가지로 나뉘는데요. 첫째: 직관(anschauung)은 감각 지각들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들을 총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때문에 "감각적 직관"과 같은 용어도 사용가능합니다. 즉 이 때의 직관은 지각을 통해 "매개적"으로 "인식된" 직관이라는 것이지요..독어사전에서는 "바라봄" "관조" "관찰"등으로도 해석됩니다.
반면 두 번째의 직관(독intuition)은 어떠한 매개없이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특별한 인식행위을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매개적" 성격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비매개적 직관은 일부 철학자에겐 신비적이면서 비합리적 인식방법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위의 문제와 관련하여..본문 속의 직관을 두 번째가 아닌 첫 번째 즉 지각을 통한 "매개적" 인식방법으로 본다면(독어로도 분명히 "intuition"이 아닌 "anschauung"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 두 번째의 번역어로 착각할수있는 두번째 직관(intuition)보다는 첫번째의 직관(anschauung)으로 해석가능한 "지각"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본문과 관련하여도 영화같은 것을 보는 행위는 지각(시지각)을 통해 인식을 얻는 행위이므로 더욱 그렇겠지요..이렇게 정리해서 본다면 anschauung을 보는 paby님의 해석(anschauung을 intuition으로 이해하는 해석)에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다시한번 이야기하면 매개적 직관 혹은 바라봄(anschauung)과 비매개적 직관(intuition)은 독어에도 분명히 구분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지각을 좁은 의미의 무의식적 지각으로 보았을 때(두번째의 지각) 그것은 anschauung과도 그리고 intuition과도 다른 것입니다..그런데 벤야민은 이런 의미의 지각을 의미한 것같지는 않고 따라서 제가 생각하기에 제일 적절한 방식은 그냥 번역어를 직관(anschauung)혹은 "바라봄"으로 한 다음 그 의미를 분명히 하는 역주를 다는 것 같군요...직관(anschauung)을 직관으로 번역한 것 자체는 사실 큰 잘못은 아니니까요..anschauung을 intuition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우리나라에서의 "직관"의 불분명한 사용이 문제인 것이지요...그렇지 않고 차선책으로 로쟈님 말씀대로 지각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역시 이것도 무의식적 지각이 될수 있으니 온전한 번역어는 아니지요..역시 역주가 있어야 됩니다...(강유원씨나 김남시씨의 번역에서도 정확히 wahrnehmung은 지각으로 anschauung은 직관으로 번역해 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어로 intuition을 직관으로 번역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오히려 영감 혹은 육감이 정확할 듯 합니다..이렇게 "영감"intuition(영어도 독어와 똑같이 intuition임)을 직관으로 해석하는 원인에는 아마도 영어로는 anschauung과 intuition의 구분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지금다시 찾아보니 anschauung에 해당되는 영어단어는 perception이고 intuition에 해당되는 단어는 intuition이군요..때문에 이태동씨가 perception을 지각으로 번역한 것은 어떻게 보면 오역이라고 할수있습니다... )


기타 현실이냐 실재냐의 문제도 현실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20세기적인 상황적 성격의 묘사가능성 때문에 다시말해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한 영화라는 매체의 현실적 상황 속에서 영화를 보는게 가능하다라는 점에서 실재보다는 현실이 더 적절한 번역어 인 것 같네요..

단 제가 참조한 철학소사전(동녁)의 의미구분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구분이 아니라면 이야기가 또 틀려질 수도 있으니..그냥 참조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

로쟈 2005-07-15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페이퍼를 쓰기 전에 일역본을 확인해보고자 했지만, 도서관 실종도서여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일역본이 의미있는 것은 아시다시피 '지각'이나 '직관'이니 하는 우리말 철학어/학술어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된 용어들이니까요.

제 견해는 이렇습니다. (아마도 일본어) '직관'에는 '바라봄' 혹은 '바로 봄'이란 의미의 직관[직꽌]이 있고, 감관의 매개 없이 바로 깨달음, 즉 직각이란 의미의 '직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한자 조어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두 의미는 파생관계에 놓여 있을 법한데, 저로선 감관의 매개성 유무를 놓고 볼 때 두 의미가 두 개의 단어로 처리되어야 하지 않나 싶고, 우리말에서 '직관'의 최근의 용례들은 이 중 두번째 의미로 굳어져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초 독어 anschauung의 대응어였는지는 모르겠으나(일어를 경유한) 현재는 영어intuition의 대응어로 굳어지는 것이죠. 일반론이지만, 말의 의미는 용례(usage)에 의해서 결정되며 따라서 변화합니다. 벤야민 번역문에서 '직관'이란 말을 독어 anschauung의 역어로 수용할 수 있는 독자(두 분 같은 경우)라면 오해의 소지가 적겠으나 일반 독자라면 이 번역문을 바로 이해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는 번역에서 이해가능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문학작품이라면 사정이 약간 다르지만) 이 경우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 그렇듯이 '지각'이란 역어가 적합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번역에서 100% 대응하는 역어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하며, 무의미합니다(그런 경우엔 번역이란 '과정' 자체가 불필요하니까). 더 나은 번역, 더 이해하기 쉬운 번역을 시도할 따름입니다.

어쨌든 의견 차이가 그닥 좁혀지진 않았더라도 생각할 꺼리를 제공해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한가지, yoonta님의 견해중 "anschauung에 해당되는 영어단어는 perception이고 intuition에 해당되는 단어는 intuition이군요..때문에 이태동씨가 perception을 지각으로 번역한 것은 어떻게 보면 오역이라고 할수있습니다."는 제가 이해할 수 없군요.

독영사전을 찾아보셨다면 아시겠지만, anschauung의 뜻으로 intuition은 뜨지 않습니다. 우리와는 사정이 다른 것이며, perception이란 역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들은 (영어권 화자나 연구자의 지적이 아닌 이상) 저로선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언어'감각'이란 건 그닥 단순한 게 아니니까요...

paby 2005-07-15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 제 해석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 해석이 아닙니다. 저는 일관적으로 "직관"이 1번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직관"이라는 번역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지요. 저는 위에서 "칸트 이래 독일 철학에서 직관이라고 할 때는 대개 감각적 인식을 의미합니다. 감각적 인식이 개념을 통해서 매개되지 않은 인식이기 때문이지요."라고 이야기했지요.

직관과 사유의 대비, 즉 개념을 통해 매개되지 않은 인식과 개념에 의해 매개된 인식 사이의 대비는 칸트 이래 독일의 철학적 전통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넓게 보면 이 전통에서 벗어나 있지 않을 벤야민도 이런 대비에 익숙했을 테고요. (참고로, 불어 번역에서 Anschauung을 감관을 통한 수용의 의미로 번역했다는 것도 바로 이것이 개념을 통해 매개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킨 번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현실이라는 번역어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현실이라는 단어가 "20세기적인 상황적 성격의 묘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벤야민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바에 따르면) 실재를 대중에게 맞추는 일이 (예를 들어 기술적 복제 따위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바로 20세기의 현실이지요.

paby 2005-07-15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저도 번역에서 이해가능성을 매우 중시 여깁니다. 그런데 사실 1번 뜻의 직관이라는 말은 철학용어로 매우 흔하게 통용되고 있는 표현입니다. 근세철학 개론 수업만 들었어도 이런 의미의 직관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벤야민 번역자들이 고심하지 않고 그냥 직관이라고 옮긴 것이죠. 단언하건대, 번역자들 중 누구도 직관이 2번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번역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독일어 Anschauung이 1번 뜻을 가지는 경우 직관으로 번역되니까요. (오히려 Anschuung이 2번 뜻을 가지는 경우가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고민의 대상이 되겠지요.)

물론 철학과 관련없는 사람들이 일상언어에서 직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이런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문맥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직관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일상적 의미의 직관을 사용할 때, 이것을 사고와 대비시키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참고로 제가 인용한 표준 국어 대사전은 국립국어연구원에서 2001년 cd로 발행되었고, http://www.korean.go.kr/000_new/50_dic_search.htm# 에서 단어찾기가 가능합니다.)

paby 2005-07-15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영어에서도 직관의 1번 뜻을 intuition이라고 옮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칸트 번역에서는 대개 그냥 intuition을 쓰지요. 물론 독영 사전에도 있습니다. Langenscheidts의 Anschauung 항목에 마지막으로 등재된 intuition은 분명 칸트 철학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도 벤야민의 영어 번역에서 perception을 쓰지 말고 intuition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한글 번역의 경우에도 지각이라고 쓰는 것이 오역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다만 "직관"이 오역이라는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 그리고 "직관"이 "지각"보다 오히려 나은 번역이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 제일 좋은 번역만이 오역이 아니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yoonta 2005-07-15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내용을 보면서 다시한번 놀랍게 느끼는게 독일어가 가지는 정확한 개념사용입니다..우리말에서나 영어에서도 거의 구분없이 사용되는 지각도 그렇고 직관도 그렇고 독어에서는 정확하게 구별하여 사용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독어의 그 놀라운 조어능력이란...-_-

로쟈님 댓글 중에 좀 이해 안되는게 제 말은 이태동씨가 anschauung을 perception으로 해석한 영어본을 근거로..percption을 지각으로 번역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지
anschauung을 perception으로 번역한 영역자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어에서는 지각으로서의 perception과 직관으로서의 perception이 구별없이 사용되는 듯한데(불확실함. 확인해주실수 있는분 부탁바랍니다-_-)..이 때문에 이태동씨가 직관을 지각으로 번역한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영어에서는 지각perception(독wahrnehmung 혹은 perzeption)과 직관perception(독 anschauung)을 어떻게 구분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맥에 따라 파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사실 직관이라는 용어가 intuition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일반인의 경우에는 주로 '영감'이해되지 않나요? 그것을 직관으로 보는 경우가 오히려 저희들 처럼 철학공부좀 한 사람들테나 많은것 같은데요? 뭐 통계가 나와있는 건 아니니 누가 맞다고 할수는 없겠네요..그리고 paby님의 글을 다시보니 제가 좀 오해한 부분이 있네요..지송^^
독어에서도 anschauung이 intuition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엄밀한 철학적 개념구분은 아니겠지요? 벤야민의 글도 분명 anschauung과 intuition은 구분하여 쓴 것으로 보여집니다. 지각wahrnehmung과 직관anschauung을 구별한것 처럼 말이지요..

로쟈 2005-07-16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by님과는 의견/입장 차이만을 확인하게 되는군요. 그리고 yoonta님, 제가 본 사전들에서 영어의 perception은 직관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더불어, 제가 참조한 러시아어본에서도 해당 독어는 영어와 마찬가지로 '지각'으로 옮기고 있으며(이 러시아어 단어도 '직관'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저로선 5종의 국역본보다는 서로 일치하게 옮기고 있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군요.

그리고 매번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훌륭한 외국어가 아니라 둔감한 한국어입니다. "우리말에서나 영어에서도 거의 구분없이 사용되는 지각도 그렇고 직관도 그렇고 독어에서는 정확하게 구별하여 사용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리고 하신 건 다소 의외인데, 현재의 혼선을 낳은 건 독어 anschauung의 중의성이니까 말입니다...

yoonta 2005-07-17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rception [psépn]
n.
1 지각(知覺)(력, 작용); 인식, 인지(認知), 이해; 직관, 직시
2 지각되는 것, 지각 대상; 【법】 취득액, 점유 취득, 징수 ((임차료 등의))
3 견해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지각> 그리고 <직관> 눈에 안보이시나요?
다음 영어사전에서 찾은 겁니다.. 사전이 틀렸다고 한다면 할말 없구요..

기타 독영사전을 찾아보면 perception은 wahrnehmung이라고 나오고 독한사전을 찾아보면 perzeption은 지각이라고 나옵니다.(교학사독한사전) wahrnehmung은 지각이라고 나오고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perception을 anschauung의 역어로 영어권에서 사용하는가 안하는가인데요..
für das Denken wie für die Anschauung..
for both thinking and perception...
님이 직접 인용하신 벤야민독어본과 영어본입니다..
정확히 perception을 anschauung으로 옮기고 있고요..(anschauung이 직관이라는 것은 또 이야기할필요 없겠죠? )

그리고 혹시나 해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영어본을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In whatsoever mode, or by whatsoever means, our knowledge may relate to objects, it is at least quite clear that the only manner in which it immediately relates to them is by means of an intuition.
보시는 바와 같이 직관을 intuition으로 번역했군요...다른 영어본볼까요..
IN whatever manner and by whatever means a mode of knowledge
may relate to objects, intuition is that through which it
is in immediate relation to them,....
역시 직관을 intuition으로 번역했습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직관anschauung을 intuition으로 영역했다는 것은 이번에 확인했고요...그러나 이 칸트에서의 intuition이 영감(비매개적 직관)이 아니라는 점은 동의하실겁니다..

그런데 perception이 지각에 쓰이는 건 분명한데 직관에 쓰이는지는 불분명하다는 식으로 위 댓글에서 제가 말했으니...anschauung이 intuition으로도 영역될 수있다는 점을 이번 기회에 확인한 셈이 됐네요..

따라서 지금까지의 정보로만 기초로한다면 perception은 wahrnehmung으로는 사용하지만 anschauung으로는 적어도 칸트책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벤야민책은 예외).. 그러나 한국어 번역에서의 perception에는 직관도 있다는 점입니다..

직관과 관련해서는...
직관은 두가지의미로 사용가능한데.
(칸트적) 직관anschauung은 영어로 벤야민책에서는 perception으로...
칸트책에서는 intuition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직관(영감)은 영어로 역시 intuition입니다..
이처럼 영어에서는 직관을 두가지 의미에 모두 intuition을 사용합니다..

결국 이번 혼동이 온 원인에는 anschauung을 번역하는데 perception으로도(벤야민영어본)....intuition(칸트순수이성비판영어본)으로도 사용하는 영어해석상의 혼용 혹은 perception을 지각 혹은 지관으로 번역하는 한국어해석의 혼용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보고요.. anschauung을 1번직관과 2번직관으로 섞어쓰는 독어의 혼용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매번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훌륭한 외국어가 아니라 둔감한 한국어입니다. "우리말에서나 영어에서도 거의 구분없이 사용되는 지각도 그렇고 직관도 그렇고 독어에서는 정확하게 구별하여 사용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리고 하신 건 다소 의외인데, 현재의 혼선을 낳은 건 독어 anschauung의 중의성이니까 말입니다..."

제가 둔감한 한국어 감각을 가졌다는 요지의 말씀이신데...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지 영 기분이 나쁘군요..설사 제가 정말로 둔감했다고 하더라도 꼭 "둔감한 한국어"라는 식으로 표현하여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셔야 했나요?

직관을 1번직관과 2번 직관 구분없이 intuition으로 (때로는 perception으로)사용하는 영어(혹은 한국어)때문에 혼선이 온것인가요....칸트적 의미의 직관은 어김없이 anschauung으로만 사용하고 영감으로의 직감은 intuition으로 사용하는 독어의 "중의성"때문에 혼선이 오는 것인가요?

제 말투가 특별히 님께 기분나쁘게 한 부분은 없었던 것으로 믿습니다. 전 다만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했을 뿐이고요..
그것에 잘못이 있는것 같다면..차근차근 지적해주면 그만 입니다..(적어도 님글을 관심읽게 읽고 댓글다는 사람한테 보일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꼭..둔감한 한국어.......라는식으로 말씀하셔야만 했나요?

로쟈 2005-07-17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nschauung이 특히 칸트에게서 '직관'으로 번역된다는 얘기는 제가 처음부터 한 것입니다("특히 칸트철학의 용어로 굳어져 있다). #3은 처음부터 지각과 관련하여 현대에서의 아우라의 파괴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저는 이 대목에서 anschauung의 역어가 '지각'이 더 타당하며,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도 그렇게 옮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독어본에 비추어 영어본의 오역들을 지적하실 만큼(이 경우 러시아어본도 오역입니다) 훌륭한 외국어 실력을 보여주셨는데, 저로선 왜 '지각'과 '직관'이란 우리말 의미의 차이가 감지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었을 따름입니다(intuition을 '지각'으로 옮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perception을 직관이라고 옮기진 않지요. 문제는 anschauung의 경우 두 가지 의미를 다 갖고 있기에 문맥에 따라 가려써야 한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둔감한 한국어'란 표현으로 기분 나쁘게 해드렸다면 죄송하군요. 그런 뉘앙스가 없지는 않지만, 제 의도는 yoonta님의 독일어 예찬에 호응하기 위해서 학문어로서 한국어 자체가 갖는 '둔감함'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물론 저로선 아이러니를 담은 것이니 이래저래 불쾌하실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 yoonta님을 겨냥한 건 아니라는 걸 밝혀둡니다(그리고 제 브리핑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이 특이하게도 모두 '알라디너'는 아니시더군요. 설마 제 서재에만 들르시는 건 아니시겠죠? 가면의 소통이 아닌 쌍방향 소통이라면, 서로간에 오해를 줄이고 이해의 폭을 늘릴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비슷한 공부를 하고 계신 거라면 가끔은 페이퍼도 써주시기 바랍니다...).

릴케 현상 2005-07-1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은 '알라디너'는 댓글 달 수가 없네요-_- 읽고나면 그냥 어리벙벙해져서리^^

로쟈 2005-07-18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외계'에서 오신 분들이 무섭습니다.^^

yoonta 2005-07-1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 말이 꼭 맞다는 의미에서 글을 쓴 것은 아니고..이렇게 볼수도 있지 않느냐 차원에서 댓글쓴 것이니 굳이 로쟈님 견해에 안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쨋든 로쟈님글을 계기로 생각지 못했던 용어들에 대한 정리는 확실히
한 셈이 됐네요..

그리고 저 외계인 아닌데요-_- 제가 페이퍼나 리뷰등을 쓰지 않는건 이곳을 알게 된것도 비교적 최근이고 글을 쓸만한 내공도 못되고 해서..유보하고 있는 중입니다.
근데 꼭 페이퍼를 써야 '알라디너'가 되는건 아니지요? ^^

로쟈 2005-07-19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유령이신가요?^^ '알라디너'라는 건 이 공간에서 '거주'한다는, 그래서 먹고 자고 하면서 생활하는 티를 낸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yoonta님의 서재는 '청정지역'이더군요. 저는 '생활'에 내공이 필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외계는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 '거주'하신다면, 굳이 알라디너가 되실 필요는 없지만, 하도 자주 방문하시길래...

yoonta 2005-07-19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은 댓글 다는 중에도 나온다고 봅니다..페이퍼등을 써서 교류하는게 물론 정석이긴 하겠지만..그렇지않다고 로쟈님이 손해?본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제가 님 서재에 자주방문하는 건 그만큼 님글이 저한테 재미있어서 아니겠습니까.. 로쟈님 이야기 듣다보면 왠지 괜히 제가 님 서재에 와서 물만 흐려놓는 사람이 되는것 같네요.. 댓글은 앞으로 자제하도록 하지요..

로쟈 2005-07-20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의 자제를 부탁드린 건 전혀 아닌데,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그리고 약간은 흐린 물에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 서재는 '청정지역'이 아니므로 마음껏 휘저으셔도 됩니다.^^). 저로선 '특별한'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기 때문에 '교류'에 대한 바람을 가져보았을 뿐입니다. 제게도 '재미'를 나누어주시길 바랍니다...

2005-08-02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목은, 이런 제목이라면 필시 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거라는 계산에서 단 것이다. 나로선 벤야민에 대해서 (알랭 드) 보통이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에서 풀어놓은 만큼 아는바 없으며, 읽은바 또한 없다. 그러니, 제목만을 따라오신 분은 이 대목에서 걸음/눈길을 돌리시면 된다(다음엔 속지 마시압!). 원래 달려고 했던 제목은 '벤야민에서의 지각과 직관'이라는 학술논문틱한 제목이었다. 그 제목 역시 일종의 속임수이지만, 나는 읽는이에게 부담을 주는 속임수보다는 감성을 자극하는(?) 속임수를 택했다. 하지만, 어찌됐든 이 속임수가 결과적으론 속임수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아래에서 고집하게 될 것이다. 

벤야민의 전기(사생활)를 조금이라도 엿본이라면 이 불운한 문예비평가이자 매체이론가이자 번역가이자 간혹 신비주의적 맑시스트라고도 불리는 벤야민을 좋아하지 않기란 매우 어렵다. 때문에 나도 벤야민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 호감은 어떤 동일시와 자기연민 같은 게 포함돼 있는 것이어서(그는 대우받지 못하는 사학자(私學者)들의 우상이다) 호들갑스럽게 내세울 만한 건 못된다. 그러니 딱히 그런 정도의 애정만을 가지고 그를 애독할 수는 없다. 나는 애정을 과신하지 않는다.

최근에 그의 책과 그에 관한 책들(통칭하여 '벤야민 책')을 뒤적거렸는바, 그건 나름의 필요 때문이었다(뒤적거리는 것만으로 그 필요가 충족되진 않았지만). 이래저래 모아놓은 벤야민 책들이 20여권은 된다. 내게 시간-자본이 남아도는 게 아니므로 무작정 읽을 수는 없고, 내가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테마들과 관련해서만 그의 책들을 참조하게 되는데, 그 테마들이란 '벤야민과 도시', '폭력비판', '벤야민의 언어/번역론', 그리고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등이다. 각 테마들에 대해서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필요한 규모만큼의 글들이 씌어질 것이다(모든 애정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요즘은 전공 서적 이외에 지젝과 데리다, 사카이 나오키, 스티븐 멀할(뮬홀) 등의 책들을 (언제나 그렇지만) 두서없이 읽는데, 엊저녁에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사르트르론(그의 박사학위논문)에 대한 해설을 읽고 나서(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따로 쓰게 될 것이다) 한동안 제쳐놓았던 벤야민의 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다시 펼쳐놓았다. 분산돼 있긴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텍스트는, 독어를 모르지만 참고로 복사해놓은 독어 텍스트 외에 2종의 영역본과 러시아어본, 그리고 5종의 우리말 번역본(반성완, 차봉희, 이태동, 강유원, 김남시)이다.  

국역본 중 반성완 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와 차봉희 역, <현대예술과 사회>(문학과지성사)는 독어본을 옮긴 것이고, 이태동 역, <문예이론과 비평>(문예출판사)은 아렌트가 편집한 영역본 <일루미네이션>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김남시본(발터 벤야민 카페)과 강유원본(강유원 등의 CP그룹이 옮긴 것이다)은 온라인상에서만 구할 수 있는 번역이다. 굳이 이렇게 많은 텍스트들이 '읽기'에 동원되는 까닭은 믿고 신뢰할 만한, 즉 마음놓고 인용할 만한 우리말 확정본 번역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기 출간된 3종의 번역에 문제나 오역이 있다면(강유원, 김남시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한다) 이를 교정한 새 번역본이 출간되는 게 필요하고 마땅한 일이겠으나 아직은 사정이 여의치 않은 듯하다.

이 글은 그런 사정 얘기의 한 꼭지 정도 된다. 해서, 당신은 벤야민을 좋아하시는지? 만약에 그렇다면,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그의 '실제' 모습이 어떤 것인가 정도는 확인해보고픈 생각이 들지 않을까? 아는 만큼 사랑한다지만, 사랑한다면 어느 만큼은 알 필요도 있다. 물론 그 '어느 만큼'의 내용은 남들도 다 아는 '윤곽'이 아니라 소소한 '디테일'이다. 등짝이나 배꼽 아래에 난 점 따위야 그 사람의 인격과 무관하지만, 그걸 인지하는 건 애정지수와 거리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해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2, #3에서 정의되고 있는 '아우라'는 이 글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기본'에 불과하다. "당신, 아우라가 뭔지 말해봐?" 정도의 질문으로는 애정을 판가름할 수 없는 것. 대신에 물을 수 있는 건, (#2의 끝머리에서 벤야민이 인용하는바) 아벨 강스가 무슨 얘기를 한 거야, 같은 질문이다.

어젯밤에 침침한 눈으로 텍스트를 읽다가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온갖 번역본을 다시 확인해본 대목인데, (이상하게도) 별 차이는 없지만 5가지 국역본을 차례로 제시한다.

-1927년 아벨 강스는 다음과 같이 열광적으로 말한 바 있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반성완)

-아벨 강스는 1927년 이미 이렇게 외쳤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은 영화화될 것이다..."(차봉희)

-1927년 아벨 강스는 다음과 같이 열광적으로 외쳤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이태동)

-1927년 아벨강스가 열광적으로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은 영화화될 것이다..."고 외쳤을 때...(강유원)

-1927년 아벨 강스가 다음과 같이 열광적으로 외쳤을 때 -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김남시)

이에 대한 영역본은 (2종 모두) 대략 "When Abel Gance fervently proclaimed in 1927, 'Shakespeare, Rembrandt, Beethoven will make films..."라고 옮기고 있다. (사소하지만) 무슨 차이인가? 영역본은 형태상 능동문인 'will make films'가 의미상으론 수동문인 'will be made films'의 뜻을 갖지 않는 한(국역본들에 따라서 처음에 나는 그런 게 아닌가란 생각을 했다. 영문법 박사도 아닌지라, 나는 남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안다) 내용은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를 만들/찍을 것이다..."란 내용이다.

벤야민의 독어본에서 인용문은 "Shkespeare, Rembrandt, Beethoven werden filmen..."이다. 이 역시 아벨 강스의 불어 텍스트를 벤야민이 옮겨온 것이므로 '원문'으로서의 지위를 갖는 건 아니다. 구문은 단순한데,  추측하자면 werden이 미래시제 조동사이고(사전에는 werden이 '-가 되다'란 뜻도 갖는 걸로 돼 있다), filmen이 동사원형(부정법)이어야 영역본에 대응한다. 러시아어본도 같은 식이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와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를 만들/찍을 것이다..."가 의미론적으로 동치가 아닌 이상(물론 아니다) 어떤 해석이 맞는 것일까? 안타깝지만, 나는 5종의 국역본 대신에 영어와 러시아어본이 맞다고 본다. 그건 의미의 논리상 그렇다.

앞 대목에서 벤야민의 대중운동의 가장 유력한 매체(대리자)로서 영화가 갖는 사회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고, 그런 맥락에서 아벨 강스를 인용한다. 그리고 아벨 강스가 열광적으로 외치고 있는 바는 바야흐로 현대(1927년)는 '영화의 시대'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과거 문학의 천재(셰익스피어), 미술의 천재(렘브란트), 음악의 천재(베토벤)도 (그런 거 다 물려놓고) 모두 영화를 찍게 될 거라는 것(가자, 영화로!). 즉, 내가 보기에 이 대목에서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대명사이다. 국역본의 역자들은 이들을 모두 고유명사로 보았고, 그럴 경우 이미 죽은 사람들이 영화를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역시 논리상!) '영화화될 것이다'라고 옮긴 것이다(직역을 강조하는 이들까지 이 대목에서는 '의역'에의 유혹에 굴복한 것일까?)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번역과 저술상의 오역에 대한 이재호 교수의 비판(<문화의 오역>)에 대한 이윤기씨의 답글을 <한겨레21>에서 읽었다. 서두에서 그는 문예지 '현대문학'의 자문위원 하던 시절에 어느 읍내에 나갔다가 '현대문짝'이라 씌어진 간판을 '현대문학'으로 잘못 읽었던 경험을 소개한다. "마음의 장난에 눈이 속은 것이다." 아무리 해당언어에 능통하다 하더라도 그런 마음의 장난(=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한 때로 오역은 불가피하다. 아마 아벨 강스의 사례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이윤기씨의 답글의 요지는 "내 뜰(=번역)에서 잡초(=오역)를 뽑아준 건 고맙지만 저주에 가까운 비아냥은 도움 안돼(므로)" 사양하고 싶다는 것이다. 잡초 없는 뜰이 없듯이, 오역/오독으로부터 자유로운 번역도 없다, 적어도 드물다는 것이 그의 전제이며 나도 거기에 공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한 부지런히 잡초들을 솎아내는 일이며 줄여나가는 일이다. 물론 그런 솎아내기가 유효한 건 적어도 '뜰'인 경우에 한에서이다. 아예 '잡초밭'인 곳에서 '솎아낸다'는 건 무의미하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잡초밭'은 드물지 않다.

벤야민 번역에 국한하여 말하자면, 반성완 교수 등의 번역은 이윤기씨의 경우처럼 (저주를 퍼부을 게 아니라) 그래도 잘 솎아내고 읽어볼 만한 번역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기대 수준을 우리가 좀 높일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새로운 기준에 부응하는 벤야민 번역을 갖고 있는지는 아직 의심스럽다. 이건 다음에 #3에서의 지각과 직관의 문제를 다루면서 한번 더 따져보기로 하겠다...  

05. 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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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5-07-12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미상으로 따지자면 가정법 과거로 would make가 will make보다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도 능동으로 보는게 맞을 것 같군요..
불어본의 경우는 어떤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네요..
어떻게 정말 저 많은 번역본이 전부다 동일한 오류를 범할수 있을까요..신기하네요..정말..어쨋든 다시한번 느끼는 거지만 님의 대단한 스캔? 능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근데 난 왜 맨날 로쟈님 서재에 와서 놀고 있는 거지? 책임 지세욧..-_-

로쟈 2005-07-12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정법 과거라기 보다는 가정법 현재(?) 이거나 그냥 미래시제입니다. 요는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을 대명사(내지는 대표단수)로 보는 겁니다(그러니 굳이 가정법 과거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yoonta님은 방학이신가요?^^

주니다 2005-07-12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좋아합니다.(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5개의 번역본이 신기하게도 동일한 실수를 했군요. 그걸 잡아내는 로쟈님은....^^

로쟈 2005-07-1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졸지에 교정시력이 좋은 사람처럼 돼 버렸는데, 사실 제가 시력이 썩 좋은 건 아니랍니다.^^ 그냥 오역들이 눈에 자꾸 띄네요...

무우 2005-07-14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ilmen을 make film으로 옮긴 영역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filmen에는 "영화에 나오다(배우로서)"라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직역하자면, "셱, 램, 베가 영화에 나올 것이다"가 될 겁니다. 따라서 세 사람의 이름을 대명사로 보기보다는, 영화에 등장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겠지요. "영화화 되리라"는 번역이 어색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명사로, 타동사(능동)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원뜻에 가까운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고로 영역본 기술복제는 여러 군데에 오역이 있습니다. 주로 동사 해석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5-07-1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분이 아벨 강스의 불어본에서 확인해준 바도, 제 의견과 같습니다. 제가 제시한 역자의 한 분인 김남시씨도 다시 정정된 번역이 맞다고 하셨구요. "영화화 되리라"는 번역이 어색한 것은 사실이지만" "원뜻에 가까운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라는 건 어떤 '논리'에서 가능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영역본으로 제가 참조한 건 기존의 <일루미네이션> 외 하버드대학에서 새로 나온 선집 번역입니다. 우리가 영역본을 탓할 처지가 아직 못된다는 점은, '지각과 직관의 문제'를 다룬 다른 페이퍼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momo 2005-07-14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장난...하니까 생각나는데...일전에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말하길...서점에서 <타고르선집>이 <고다르선집>으로 보이는 현상이...있었다는...동감이 간다는...

무우 2005-07-14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벨 강스의 원문을 참조 하셨다니까 주인장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벤야민의 인용문만 보고 잘못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벤야민이 옮겨 놓은 독일어 에서는 "영화에 등장하다"가 더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뒤에 신화, 종교, 영웅들이 영화에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 앞에 "스케일이 큰 역사영화"라는 구절을 봐서도요. 또한 이 절의 내용이 예술'작품'의 아우라 상실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도요. 그들이 영화로 달려가리라는 아벨 강스의 의도를 벤야민이 의도적으로 "오역"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죠. 이런 사례는 벤야민 텍스트에 종종 등장하기도 하구요. 마지막으로 하버드 선집의 영역이 우리가 문제 삼을 바 못된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기술복제에 대한 영역본에서는요.

로쟈 2005-07-14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야민이 의도적으로 '오역'했을 거라고 짐작하신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아마 영역본의 '오역들'도 의도적일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을 유지하고 있는 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갖게 되는 생각은 "텍스트란 각자의 텍스트이다"라는 겁니다. 각자가 상상하는 텍스트...(영역본과 관련해서도 제가 기존의 국역들을 읽고서 이해할 수 없었던 대목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저로선 탓할 수가 없습니다. 무우님의 더 좋은 번역을 기대하는 수밖에.)

한데, 이미 죽은 셰익스피어와 렘브란트와 베토벤이 (배우로서?) 왜 영화에 등장하게 되며, 어떻게 등장하게 되는 것인지요? 왜 하필 (고유명사로서의) 이 세 사람인 것인지요?(참고로, 세 사람은 영화를 찍는 주체들이고, 신화, 종교, 영웅 등은 찍히는 대상들입니다. 이게 왜 자연스럽지 않은가요?) 이런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고민하기보다는 저는 그냥 '제 텍스트'를 고집하도록 하겠습니다...

paby 2005-07-14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문제에 대해서는 로쟈님의 지적이 전적으로 타당해 보입니다. filmen이 "(배우로) 영화에 나오다"라는 뜻이 있다는 것은 내용상 그렇다는 것이지 그렇게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filmen은 우리말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말이죠. 이게 배우가 주어가 되면, 예를 들어, 설경구가 영화를 찍는다고 하면, 영화를 찍는다는 말의 의미가 영화에 등장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겠지요. 아벨강스든, 벤야민이든, 영어 번역이든, 모두 영화를 찍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의도적 오역" 같은 것이 있었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momo 2005-07-15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의 감옥에서는 수인이 신이던가....
 

'로쟈의 브리핑'은 즐찾 300이 넘어선 걸 기념하여 엊그제 만든 나 대로의 '이벤트'이다. 나는 무슨 답례성 선심을 쓰는 대신에(나누어드릴 선심도 없지만), 새로 한 꼭지를 만듦으로써 나의 서재를 찾아주시는 분들에 대한 내 '책임'의 분량을 늘리기로 했다. 브리핑(briefing)이란 말은 '요약보고', 그러니까 "짦게 줄인 보고"를 뜻한다. 나는 그 말을 에누리없이 접수한다. 즉, 이 꼭지는 내가 읽은 온갖 종류의 글들을 요약해서 보고하는 내용들로 구성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런 작업이 때로 긴요하다. 읽은 글들을 갖다버릴 때이다. 읽어놓았지만 막상 미처 정리를 하지 못해서 무겁게 껴안고 다녀야 하는 글(프린트)들이 내겐 적지 않다. 버리자니 아깝고 갖고 다니자니 부담스럽다. 평소에 브리핑해두는 습관을 길러두지 않은 탓이다. 해서 겸사겸사 '로쟈의 브리핑'은 시작된다. 이게 나와 비슷한 관심을 가진 몇몇 분들에게도 '브리핑 효과' 를 낳을 수 있다면 반갑고 다행스런 일이 될 것이다. 그 이상은 나의 몫이 아니다.  

브리핑 거리들은 정말로 널려 있지만, 책상에서 제일 먼저 손에 잡힌 건, 혹은 가장 만만하게 눈에 띈 건 김항의 "말하는 입과 먹는 입"(<세계의문학>, 여름호)이다(사실은 데리다의 "이론을 좇아서"란 글을 염두에 두었지만 아직 다 읽지 않았다). 필자는 동경대학교 박사과정에 있는데,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초극론>(민음사)를 우리말로 옮긴바 있고, 나는 <세계의 문학>지에서 그의 글을 두번째로 읽게 되었다. 국가와 폭력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글은 생각보다 견적이 많이 나온다. 제대로 검토하기 위해서 참조해야 할 저자들이 여럿 되기 때문이다. 글의 결미를 따르더라도, "아렌트의 분할과 푸코의 역사, 슈미트의 법-국가론과 결정, 벤야민의 언어-문학론 및 역사-신학,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드-노모스론 드이 성좌를 이루는 하나의 배치를 확인하는 일"의 견적이 어찌 만만하겠는가?(나로선 이 주제에 관하여 최소한 벤야민과 슈미트, 들뢰즈와 아감벤 정도를 참조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거기에 지젝과 데리다를 베이스로 깔아야 한다고 본다. 이건 나대로의 프로젝트이다.)

 

여기서 다룰 수 있는 건 그냥 글의 서두뿐이다. 이 서두는 <안티-오이디푸스>의 서두이기도 하다: "그것(Ça)은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흐르며, 때로는 멈추면서, 도처에서 그것은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호흡을 하고, 그것은 열을 내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싸고, 그것은 섹스를 한다. 그럼에도 '한데 싸잡아 그것(le ça)'이라 불렀으니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도처에서 이것은 여러 기계들이다. 게다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이것들은 서로 연결하고, 접속하여 기계의 기계가 되는 것이다."

 

이 문단에 대한 필자의 해설: "여기서 '그것(Ça)'은 입이다. 호흡하고, 열을 내뿜고, 먹는 입. 항문과 연관되고 성기를 빠는 입. 이렇게 다른 기계와 연결된 기계인 입을 '그것(le ça=Es)'이라 부른 일, 즉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에 해당하는 '그것'이라 싸잡아 부른 것은 잘못이었다. 입을 대표하는 입 일반은 없기 때문이며, 입은 항상 무언가에 열결된 기계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가만이 입을 그것(Es)이라 부르며 안심한다."(강조는 나의 것)이 대목을 읽고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몇 년 전의 '논쟁(?)'이다. <문학과 사회> 2002년 여름호에 이종영의 "파시스트 들뢰즈와 가타리가 반(反)파시즘을 말하다"란 글이 실렸고(이 글의 풀-버전은 <내면성의 형식들>(2002)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파시즘과 반(反)파시즘'이란 보론으로 들어가 있다), 이어서 이를 반박하는 김재인의 글 "파시즘과 비인간주의 사이에서 외면당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가을호에 게재됐다. 이 논쟁의 핵심(즉, 들뢰즈/가타리가 파시스트냐 아니냐)은 여기서의 관심사가 아닌데, 다만 흥미로웠던 건 인용한 대목에서 '르 싸'의 해석을 놓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자신이 엉터리 번역본인 국역본 <앙띠 오이디푸스>를 참조하고 있다고(그러니까 <안티 오이디푸스>를 제대로 읽지 않았으며 당연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김재인에 대해서 이종영은 독자들/친구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었다: "김재인 씨는 <앙띠 오이디푸스> 한글판의 번역이 엉망이고 ‘위서’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김재인 씨가 사례로 제시한 내용은 저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김재인 씨는 <앙띠 오이디푸스> 한글판에서 잘못된 번역의 대표적 사례로 <앙띠 오이디푸스>의 첫 문단을 듭니다. 즉 한글판에서 ‘이드’(Id, das Es)로 옮겨놓은 첫 문단의 ‘싸’(ça)가 ‘이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앙띠 오이디푸스> 첫 문단의 ‘싸’(ça)는 명백히 ‘이드’입니다. 왜냐하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숨쉬고 뜨거워지고... 똥누고 성교를 하는’ ‘그것’에 대해 말한 후, ‘그것’을 정관사를 붙여 ‘르 싸’(le ça)라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그들은 정관사 ‘르’를 강조합니다... 김재인 씨는 이 첫 문단의 ‘그것’이 ‘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똥누는 것은 토악질을 하는 것이고 성교는 하는 것은 키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러한 자의적 해석을 하는 사람이 과연 <앙띠 오이디푸스>를 최명관 씨보다 더 잘 번역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갑니다."

 

이에 대해서 김재인은 이렇게 반박한바 있다: "내 주장을 반복하면 이렇다. 들뢰즈-가타리가 ‘르’를 떼어야 한다고 했을 때 이는 ‘의도적인 혼동’을 염두에 두고서 그렇게 한 것이다. 즉 프로이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는 프로이트를 혼동시키기 위해.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프로이트는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수 정관사를 쓴 것은 더더욱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수 부정관사를 써서 ‘des ça’라고 했어야 옳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양체요 리좀이다. 그래서 첫 문단의 그것이 ‘입’을 가리킨다는 점은 명백하다. 나는 모든 ‘그것’이, ‘그것’ 일반이 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은 그것의 한 사례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 첫 문단의 서술을 잘 읽어보면 이 점은 명백하다(절대로 자의적 해석이 아니다). 이런 해석을 제시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강조는 나의 것) 

 

그리고 이제 김항이 두번째인 듯하다(하지만, 이 '독특한 해석'의 반복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나로선 이 서두에서의 '그것(Ça)'이 어떻게 '입'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자못 궁금하고 신기하지만 두 사람이나 이런 '독특한' 해석(처음 김재인이 그러한 견해를 제시했을 때, 그것은 그 자신의 말대로 '유일무이한' 해석이었다. 전세계를 통틀어서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항만 빼놓고)을 제안/지지할 때는 정색하게 된다. 정말로 '입'이 열을 내면서, 먹으면서, 똥을 싸고 섹스를 하는가? 아마도 김재인/김항은 토악질=똥으로 오랄섹스=섹스라는 비유적 등식화를 여기서 추가적으로 요구하게 될 듯하다(정신분석학이 모든 게 '그것=입'의 문제라고 주장하며 오랄섹스에 대해 근심하는 학문인가? 정신분석가만이 입을 그것(Es)으로 부르며 안심한다? 나는 어떤 정신분석가들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들뢰즈/가타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은유/비유를 혐오한다(이것들은 은유가 아니다!). 고로 똥은 똥이고 섹스는 섹스다.

 

김항의 인용/번역문에서 바로 제시돼 있듯이, "도처에서 이것(Ça)은 여러 기계들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유방이나 입은 이 기계들 가운데 하나이다. 상식적으로 읽을 때, 들뢰즈/가타리는 이 (욕망하는)기계들을 통칭해서 그것(독어로 Es/ 불어로 le Ça/ 영어로 Id)이라고 정신분석학이 명명한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계들의 복수성을 일반화하고 단수화하는 것이기 때문에(반복하지만, '기계들'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더불어 그것은 '입'이라는 단일한 기계가 아니라, '기계들'이다). 물론 이어지는 대목에서 보듯이, 식욕상실자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기계' '말하는 기계' '숨쉬는 기계' 어느 것(=기능)이 될지 불확정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이 '기계들'의 대용어나 통칭어가 될 수는 없다.

 

김재인은 "나는 모든 ‘그것’이, ‘그것’ 일반이 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입은 그것의 한 사례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맞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맨처음 '그것'은 입이 아니다. 김항은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에 해당하는 '그것'이라 싸잡아 부른 것은 잘못이었다"라고 말했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내가 아는 정신분석학에서 입을 무의식(=그것)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두 유능한 연구자의 입에서 왜 이런 '독특한' 주장이 반복되는 것인지 다시금 궁금하고 신기하다. 그런데, 이런 것도 브리핑인가?..

 

05. 07.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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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7-05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갑니다

로쟈 2005-07-05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쁘실 텐데, '출근'하셨군요.^^

마냐 2005-07-05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0 축하합니다. 이벤트의 새로운 세상을 또 여셨네요....다만, 전 다음 브리핑을 기대하렴다. 요번건 제게 어려버서..^^;

로쟈 2005-07-05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다음엔 좀 쉬운 걸로 챙겨오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어이, 미스 김!..

주니다 2005-07-05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핑 좀 자주 해주세요....

로쟈 2005-07-05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러고는 싶습니다.^^

yoonta 2005-07-07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가 첫문단에서 <그것>은..이라고 하지않고 <그것들>은 이라고 했으면 혼돈이 덜했을 텐데-_-...
뒤에서도 <그것들은 기계들이다>..라고 말하듯이 말이죠..
그랬다면 <그것은 입니다>혹은 <그것은 이드다>라는 식의 혼동은 하지 않았을 듯..
그리고 최명관씨의 번역책의 첫 문단의 본문은 이상없죠....
그놈의 각주가 말썽이지..-_-

로쟈 2005-07-07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주의 첫번째 문장까지도 저는 이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역본의 경우, Everywhere 'it' is machines... 그러니까 <그것은 기계들이다>입니다. 불어본은 다른가요?..

yoonta 2005-07-07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어본은 저도 본적이 없네요-_-;;
불어본도 그것(it)이라고..단수의<싸>로 했을 듯하네요..
제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그러니깐..Everywhere it is machines보다는
Everywhere they are machines라고 들뢰즈가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였고요..머 사실 단수로해도..그것은 입이다.그것은 이드다라는식의 오역만 하지않는다면 무방하긴 합니다만..
물론 들뢰즈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해독까지 염두에 두고 글을 친절하게 쓸 필요는 없겠죠....
어쨋든 김재인씬 가끔 좀 억지스러운 때가 있는듯..

yoonta 2005-07-07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 들뢰즈는 <싸>와 <르 싸>를 구분해서 사용했죠..프로이트의 이드는 <르 싸>에는 해당될지 모르지만 첫 문장의<싸>는...즉 <그것=그것들>은 <르 싸>는..아니다라는 의미로 말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그것들은 기계들이다 >라고 정리했죠...

로쟈 2005-07-07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갖고 계신 듯하지만, 영역본은 What a mistake to have ever said 'the' id. Everywhere 'it' is machines...로 나갑니다(''표시는 이탤릭체입니다). 저는 여기에 아무런 애매한 구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 불어로는 '싸'로만 표기되는 것이 영어로는 it와 id,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어서(그래서 영역본이 더 이해하기가 쉬운데) 혼란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yoonta님의 정리를 반복하자면, It(싸)는 id(르 싸)가 아니라 machines(기계들)이라는 게 들뢰즈의 주장입니다...

yoonta 2005-07-07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It과 Id가 번갈아 나와서 최명관님은 it을 id로 본것이죠..이정도는 이해해줄만 합니다..그런데 it을 입으로 독해하는 센스는 정말..-_-;;;

yoonta 2005-07-07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개의 고원이란 제목도 사실 수많은 고원정도되는 의미라고 한다면 오히려 천의 고원이라고 번역하는게 더 좋지 않을까요? 꼼꼼함이 지나쳐서 오히려 부작용이 나는 케이스가 김재인씨인 듯..

로쟈 2005-07-07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좀 의견이 다른데, '천의 고원'이란 건 일본식 조어입니다('백의 고원'이나 '만의 고원'이 얼마나 어색한 표현인지 생각해보시길). 우리말로는 '천개의 고원'이 더 타당하며, 굳이 '뜻'을 옮기자면 '만 개의 고원'쯤 되겠죠(우리말 '만'은 '셀수없이 많은'이란 뜻을 '천'보다는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에).

yoonta 2005-07-07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재인님도 그런 점에서 천개의 고원이라고 한 것같기는 하더라고요..그런데 사실 따지고 모면 일본식조어..한국식조어를 구분하는게 모호할 때가 많아서리..
아예 수많은 고원으로 하는게 좋지 않나요?
영어에서도 millions of,thousands of 하면 그냥 수많은,무수한등으로 번역하듯이 말이죠..

로쟈 2005-07-11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본도 그냥 '천 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 아닌가요? 일어식 조어라는 건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같은 역어에서 잘 드러납니다. 영어로는 Magic mountain일 텐데, '마의 산'이란 건 일역본의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것이죠. '천의 고원'도 일역본의 제목일 겁니다...

yoonta 2005-07-11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찾아보니 일본어본은 천의 어쩌구..(천자만 읽을수 있기때문에-_-) 독어본은 Tausend...등으로 되어있네요..마의 산도 그런경우군요..그럼 마법의 산이라고 하는게 더 좋을까요? ^^

biosculp 2005-07-18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나서 몇자 씁니다. 김재인식으로 애기하자면 입이 아니라 똥꼬가 더 낳지 않을 까 하는 생각네요. 똥눟고 성교하고 이런게 입보다는 똥꼬가 더?
 

장마철 치고는 모처럼 개인 날이다. 두 주 전에 책정리(=노가다)를 좀 한 후유증으로 며칠 앓고 나서는 '회복기' 같은 한 주를 보냈다(그래봐야 여기저기 좀 쑤시고 배탈이 난 정도였지만). 15년 전 제대를 하고 나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단촐한 하숙집 독방에 둥지를 틀었을 때, 내가 싸들고 온 책들은 4단짜리 책장을 절반도 채우지 못했었다. 물론 그러고 2년이 못 되어 내 방은 다리를 뻗고 자기도 어려울 만큼 책들로 가득 차게 되었지만(책이 많은 게 아니라 방이 작았다고 해두자). 당시는 책이 지금처럼 많이 나오지도 않았고, 책을 구할 수 있는 루트가 지금처럼 다양하지도 않았다(요즘은 소장하는 책 중 사는 책의 비율이 20% 정도밖에 안된다. 나머지는 다 복사/제본한 책들이다). 물론 요즘은 구하기 힘든 (원서)마스터본들을 당시에는 쉽게 접할 수 있었지만. 하여간에 그 증식 속도에 있어서 책들은 어느 박테리아 못지 않다. 한마디로 못말리는 책들인 것.

세월은 흘러, 6년전 지금 살고 있는 전세집에 이사를 올 때 아파트 경비 아저씨는 서점을 하다가 왔냐고 내게 물었다. 지금 그 책들은 2배가 넘게 불어나 있으며, 이번에 50-60권을 갖다 버렸다(그간에 이렇게 버리고 남주고 헌책방에 갖다 팔고 한 책들이 500권은 된다). 전체로 따지면 아마 1%도 안될 듯싶지만. 집사람이 몰래 갖다버린다고 하도 으름장을 놓길래 자진해서 읍참마속을 결행한 것. 장마철이지만 책은 다행히도 잠시 비가 멎은 날에 내다놓았다. 주로 잡지와 소설책(무슨무슨 수상작품집), 그리고 <복잡계 경제학> 같은 책들이었다(사다놓은 경제학 책만 해도 꽤 되는 내가 재테크의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아이러니이자 여기저기서 무시당하는 빌미이다). <어리숙한 척 남자 부려먹기> 같은 책도 누가 볼세라 이 참에 버렸다.

그렇게 갖다 버리고, 또 베란다에 마련한 새 박스들에다 잔뜩 구겨넣어서 생존공간을 얼마간 확보했다. 딸아이는 집이 아주 넓어졌다고 좋아했지만(남들이 보면 웃을 일이다), 읽을 책만 사서 읽으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그건 오늘 아침에도 반복됐다). 이젠 아이도 어느새 못말릴 나이가 돼 버렸다. 하지만, 아이도 언젠가는 알아줄지 모른다. 책이라는 환상이 아빠의 존재근거이며 아빠의 DNA는 (A-T-C-G 대신에) 어쩌면 B-O-O-K 라는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젠장, 이런 bookish한 책귀신 얘기 대신에 다시, 새로 나온 책들 얘기나 좀 하기로 한다. 제일 먼저 꼽을 책은 '러시아 문화사'란 부제를 단 올랜도 파이지스(O. Figes)의 <나타샤 댄스>(이카루스)이다. 소개에 따르면 "러시아의 근대화를 시작한 표트르 대제가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18세기 초에서부터 소비에트의 브레즈네프시대인 1970년대까지 300백년간의 러시아 문화사를 다루는 책"으로서 "도식적인 사상사 혹은 문화적 인물들의 전기를 넘어 역사와 미술, 음악, 발레, 영화 등을 복합적으로 아우르고 있다." 저자는 1959년생의 비교적 젊은 러시아사가로서 런던대학에 재직중이다. 원서의 이미지를 나란히 올려놓았지만(표지는 원서의 것이 더 마음에 든다), 사실 이 책은 2년쯤 전에 몇 권의 러시아사 책을 아마존에서 구입하면서 사들였던 책 중의 하나이다(같은 저자의 러시아 혁명사 와 함께). 저자는 생소했지만, 러시아사 관련서들 가운데 평이 아주 좋았고(에릭 홈스봄도 상찬한 책이다) 분량도 미더웠다(우리말 번역본이 1015쪽인데, 원서도 729쪽에 이른다). 내가 놀란 것은 이만한 부피의 러시아사 책이 아무런 소리소문없이 툭 번역돼 나온 것.

이 분야에서 그만한 부피에 버금하는 책들은 역시나 러시아 문화사의 전개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덕형의 <천년의 울림 -러시아문화예술>(성균관대출판부, 2001)와 존 톰슨의 <20세기 러시아 현대사>(사회평론, 2004)가 있다.  각각 528쪽과 776쪽. <나타샤 댄스>가 얼마나 방대한 분량인지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문화사 분야에 모처럼 읽을 만한 책이 출간된 것이 반갑고 기쁘다. 최근에 출간되어 예상밖(?)의 판매실적을 거두고 있는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 '현상'이 거품이나 유행이 아니라면 러시아사의 폭넓은 맥락을 보여주고 있는 책들 또한 많이 읽힐 것으로 기대해봄 직하다. 덧붙여, 러시아사쪽 또다른 신간 리처드 휴의 <전함 포템킨>(서해문집).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1925)로 더 잘 알려진 포템킨 호의 반란사건은 1905년 1차 혁명의 도화선이 됐었던 사건이자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담은 책으로 보이는데, 영화의 결말과는 다르게 실제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었고 주모자들은 총살을 당하거나 유형에 처해진 걸로 안다(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은 장르상 '(역사) 판타지'이다). <전함 포템킨>과 관련한 책들은 나는 두 권 더 갖고 있는데, 이것들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는 신만이 아신다.

 

 

 

 

두번째 책은 지난 2003년 가을 방한했던 슬라보예 지젝의 강연록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이다. 지난 가을쯤에 나왔어야 할 책이 다소 연착했다. 이미 온라인상에 모든 강연원고와 번역문이 공개돼 있는 만큼 책으로 묶이는 게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 같은 지젝의 애독자에게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일단 너절하게 널려있는 프린트물들을 시원스레 갖다버릴 수 있게 된 것. 그 비용이 18,000원이니까 싼 건 아니다. 책에는 네 개의 강연문과 한 개의 특별강연문, 모두 5편의 강연원고와 번역문이 차례로 실려 있는데, 아쉬운 건 그해 가을호인가 겨울호 <철학과 현실>에 실련던 지젝과 김상환 교수의 대담 등이 빠진 것. 지젝의 서문을 달고는 있지만, 책에는 아무런 역자 해제도 붙어 있지 않다. 아무래도 성의가 부족하다 싶은데, '다산 기념 철학강좌' 시리즈의 일곱번째 책으로서 억지로 구색을 맞추기 위해 출간된 것이 아닌가 싶다. 번역이라도 좀 수정이 됐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법한데, 실상은 역시나 그다지 개선된 듯하지 않다(짐작에 책임 교정자가 없었다는 얘기다). 가령, 17쪽에서 '선의(善意)의 봉사'는 '재화의 공급servicing of the goods'의 오역이다. 이런 단순한 오역(실수)도 체크되지 않고 책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게 유감스럽다(이 강연문들은 시간이 되면 나중에라도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볼 계획이다).

 

 

 

 

그런 유감을 좀 달래기 위해서 꼽아본 책은 프랑스의 정치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학사)이다. 이미 그의 <폭력의 고고학>(울력, 2002)이 출간돼 있으며('끌라스트르'로 검색해야 한다), 그에 대한 소개는 이미 그때 한번 이루어진바 있다. 다시 반복하자면, "삐에르 끌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과 당시를 풍미하던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을 극복하고 원시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1970년대 프랑스 지식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간되는 <폭력의 고고학>은 그가 죽고 난 후 1980년 그가 발표했던 에세이와 서평, 그리고 연구물을 모아 펴낸 유고집이다. 연구 논문들은 1976년에 나온 또 다른 논문집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들을 보다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이번에 나온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그 '또 다른 논문집'이다. 그러니 두 책이 서로 보족적으로 읽혀질 만하다. 클라스트르에 대한 해설은  <오늘의 프랑스 사상가들>(문예출판사, 1998)이 자세하다. 거기에서 클라스트르는 르네 지라르와 비교/대비되고 있는바, 가령 <폭력과 성스러움>(민음사) 등과 같이 읽어보는 것도 독서의 한 가지 방법.

 

 

 

세번째 책은 고전 번역으로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아카넷). 전 3권 2,500쪽이 넘는 그야말로 방대한 분량이다. 존 듀이, 찰스 샌더스 퍼스와 함께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세 거두로 꼽히는 윌리엄 제임스의 주저 중 하나인데(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하버드대학에 오래 봉직했는데, 1875년 미국대학 최초로 심리학 강의를 개설했다고 한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인 셈이다), 소개를 보니까 이건 그의 저술여정에서 첫번째 시기의 결과물이다.

"제임스의 저술 시기는 대략 세 단계로 구분된다. 첫번째는 스코틀랜드와 독일철학의 정신이해와 골상학의 관점에서 심리학을 연구했던 당시 미국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실험에 기초한 심리현상연구를 통해 독자적으로 기능주의 심리학을 수립한 시기이다. 이때 <심리학원론>을 출판했다. 두번째는 종교나 철학에 관련된 주제들을 연구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제임스는 여러 곳으로부터 초빙을 받아 강의를 하였는데, 그 결과물은 책으로 출판되어 제임스에게 명성을 안겨다주기도 하였다. 이 무렵 에든버러대학으로부터 기포드 강연 초청을 받아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20개의 주제로 나누어 강연하였다. 세번째는 프래그머티즘, 진리론, 그리고 그의 인식론적인 급진적 경험론에 대한 강연을 통해 자기만의 독특한 사상을 확립한 시기이다. 대표적인 강연은 1908~1909년에 행한 옥스퍼드 대학의 히버트 강연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 저술로는 <프래그머티즘> <다원적 우주> <진리의 의미> 등이 있다." 

이 중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한길사, 2000)이 이미 소개돼 있다(번역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역자의 지젝 번역으로 봐서는). 세번째 단계의 <프래그머티즘>은 비교적 얇은 책인데, 아직 소개되지 않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프래그머티즘의 길잡이>(철학과현실사)에 내용이 일부 발췌돼 있던가 정리돼 있었던 듯하다). 어쨌든, <심리학의 원리> 같은 고전의 번역/소개는 반가운 일이지만, 이걸 언제, 누가 읽어(줘)야 하는지는 의문이다(심리학 전공자들은 읽는가?) 멜빌의 <모비딕>보다 두꺼운 책이 그것도 소설이 아니라 철학책인 것이니까!

하여간에 심리학 분야에서 내가 언제쯤 번역될지, 과연 번역이 가능은 한 건지 의문을 가졌던 두 권의 책 중 하나가 이번에 나왔다. 나머지 하나는 야스퍼스의 <일반 정신병리학>(1913)이다. 1997년에 나온 리프린트 영역본의 분량이 594쪽이니까 이 책 역시 나름대로 방대하다.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어서 가끔씩 모스크바의 대형서점에 가서 눈길만 주던 책이었다(2만원쯤 했던 듯싶다). 제임스와 야스퍼스는 모두 의대 출신 철학자들이다. 보통 철학자들은 신학이나 수학 전공자들이 많으며, 러셀에 의하면 그들이 철학의 두 계보이다. 거기에 다른 두 계보를 덧붙이자면 나는 문학과 의학을 꼽겠다. 이 네 가지 계보를 정리하는 건 물론 돈벼락을 맞은 이후에 주제를 모르는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네번째 책은 'e시대의 절대문학' 시리즈의 첫권으로 나온 권미선의 <돈키호테>(살림)이다. 부제는 '비극적 운명을 짊어진 희극적 영웅'으로 돼 있고, 분량은 204쪽이니까 기대보다는 얇다. 아마도 중고생들까지 과녁 안에 넣고 있는 모양이다. 성에 차지는 않지만, 논술 입시용으로 고전들에 대한 급조된 요약정리들이 판치는 판국에 200쪽 정도라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라고 해두어야겠다. <신곡>, <서유기>, <마담 보다리>, <모비딕>, <동물농장/1984> 등이 이번에 같은 시리즈로 나온 책들이다. 물론 이런 류의 해제를 읽고 나서 손에 들어야 하는 책은 원전이다. 돈키호테의 경우에는 출간 400주년을 기념하여 새 번역본 <돈키호테>(시공사, 2004)도 출간돼 있다(이게 최초의 스페인어 완역본이라면, 이전에 나온 책들은 어찌된 것인가? 범우사판은?). 시간이 부족하다면 책만 사두고 가끔씩 이 대목, 저 대목 뒤적거려보면 된다. 한편,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돈키호테의 영향권하에 있는 작가인데, 특히 <백치>가 그렇다. 그 작품에서 우리는 가장 독특한 돈키호테 해석을 만나볼 수 있는데, 이른바 그리스도-돈키호테 형상의 주인공 므이쉬킨. 동시에 므이쉬킨은 그리스도 형상에 대한 가장 독특한 해석이기도 하다. 돈키호테-그리스도.(참고로 파스테르나크는 그리스도를 햄릿 형상으로 이해한다.)

다섯번째 책은  처음 러시아사와 운을 맞추기 위한 미국사 책으로 레이 라파엘의 <미국의 탄생>(그린비). '미국 역사 교과서가 왜곡한 건국의 진실들'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작년에 나온 아주 따끈따근한 책이며, 저명한 역사가 하워드 진이 품질을 보증하고 있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하워드 진과 더불어 미국 민중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역사가로 평가받는 저자가 미국의 역사 왜곡을 고발하는 책이다. 아울러 미국 건국을 둘러싼 신화의 본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미국이라는 나라가 독립을 성취할 수 있게 만든 미국 민중의 진정한 정신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그러니 나란히 읽을 책들도 자연스레 추려진다. 잘 모르는 분야에서는 믿을 만한 사람 한 사람만 물고 늘어지면 되는데, 미국사의 경우엔 <미국 민중저항사>(일월서각)의 저자 하워드 진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의 <오만한 제국>(당대, 2001)이나 자전적 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의 중립은 없다>(이후, 2002) 정도를 일단 리스트에 올려놓기로 하자...

05. 07. 03.

P.S. 이밖에도 나온 책들은 많지만, 내가 굳이 군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좋은 책들이다. 보관함에 있는 책들을 차례로 다섯 권만 호명해보면 이렇다.

 

 

 

 

<나타샤 댄스> 대신에 박태균의 <한국전쟁>(책과함께),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대신에 폴 패튼의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심리학의 원리> 대신에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선집>(아카넷), <돈키호테> 대신에 <단테>(푸른숲), 그리고 <미국의 탄생> 대신에 <엘리건트 유니버스>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승산)를 집어넣어도 다섯 권의 책으로 모자람이 없다. 이 또다른 선택도 충분히 옹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또 다른 한판의 바둑이다.

 

 

 

 

지난번에 <시네마2>(시각과언어)에 대해서 언급한다고 해놓고 지나쳤는데, 이제 비로소 들뢰즈의 '영화론' 전체를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된 건 반가운 일이다. 2차 문헌만을 읽는 건 어떤 음식을 '알기' 위해서 안내서를 읽는 것만큼이나 싱거운 일일 수 있다. 중요한 건 '먹어보는' 것이다. 직접 말이다.

그간에 여러 차례가 역자가 바뀌었다는 소문을 들은바 있는데, 이번에 나온 <시네마2>는 최상의 선택/결과이었기를 기대한다. 재미있는 건 이 책의 책날개. 여전히 <시네마2>가 근간으로 돼 있고 역자는 엉뚱한 사람의 이름으로 돼 있다. 출판사가 얼마나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정신없었는가' 를 웅변하는 듯하다. 하지만, 마무리를 잘해서 욕먹을 일은 없는 법이니,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정/교열 등의 후반부 작업에 출판사들이 좀더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되었다...(그나저나 아마존에서 떠온 이미지들은 왜 안 뜨는 걸까?)  

 05. 07.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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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7-04 18:43   좋아요 0 | URL
음....미디어 리뷰에선 별로 땡기지 않던 '나타샤 댄스' 확실하게 땡스 투 해놓겠슴다.....미국의 탄생에 대해서도 갑자기 동하는군요..
무엇보다, 로쟈님, 앞 부분이 훨 재밌슴다.ㅋㅋㅋ 페이퍼질 좀 자주 해주시길.

로쟈 2005-07-04 18:59   좋아요 0 | URL
그게 말임다. 집에서 인터넷이 안되는 관계로... 아마 지금의 10배 정도는 글을 올릴 수 있을 텐데요(생계와 무관한?)... 어쩌면 다행인지도...

돌바람 2005-07-04 19:18   좋아요 0 | URL
후문으론 올해 안에 송병선 선생 번역의 <돈 키호테>도 나올 것 같다고 하네요. 박철 선생이 선배이거나 스승쯤 될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뭔가 바로잡고 싶다고 하시는 것 같은데. 그래서 시공사판 가지고 있긴 한데 나중에 읽으려구요.

로쟈 2005-07-05 13:38   좋아요 0 | URL
저도 더 기다려봐야겠군요.^^

주니다 2005-07-05 15:30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이젠 성적도 다 넘기셨을테고 본격적인 방학이겠군요. 방학은 학생들에겐 좋겠지만 시간강사들에겐 실업자로 전락해야하는 서글픈 기간이죠^^ 지난달엔 골치아픈 일들 때문에 (어차피 책도 많이 보지 않았지만) 읽던 책들이 손을 떠난지 오래되버렸습니다. 제 손엔 대신 술잔만.... 책들이 쉼없이 쏟아지고 있지만 곧 이사를 해야되는 처지라 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보지도 않는 책 사모으는 것도 '쇼핑 중독'일까요? 방학 잘 보내세요....

로쟈 2005-07-05 16:34   좋아요 0 | URL
'골치아픈 일들'로 바쁘셨군요. 이사까지 하신다면, 이 여름에 이열치열이 될 거 같은데, 건강에 유의하시길... 방학이라 강사료도 안 나오는데, 일은 왜 줄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