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패튼의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2005)를 읽고 있다(패튼은 <차이와 반복>의 영역자이다). '들뢰즈와 정치'는 '들뢰즈와 철학'(구체적으론 '들뢰즈의 경험론')에 이어서 이번 가을에 계획하고 있는 들뢰즈 읽기의 두번째 테마인바, 패튼의 책은 그 주제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안내서이다. 내가 읽은 건 책의 '서론'인데, '정치철학자로서의 들뢰즈'를 읽기 위한 몇 가지 기본사항을 소개하고 있다. 그걸 따라가보면서 몇 마디 덧붙이는 것이 이 '메모'의 목적이다.

 

 

 

 

일단 무엇을 읽어야 할 것인가? 들뢰즈와 정치란 주제를 염두에 둔다면, 가장 기본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안티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이다. 네그리와의 한 대담에서 들뢰즈 자신이 인정한 것이지만, <안티오이디푸스>는 하나의 완전한 '정치철학서'이며, <천 개의 고원>은 '정치철학적 문제들의 목록'이다.

한편, <들뢰즈와 정치>의 역자는 시종일관 <앙티외디푸스>와 <천의 고원들>이란 독자적인 역어를 사용한다(<질 들뢰즈>에서는 '안티외디푸스' '안티오이디푸스'란 역어들이 더러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건 물론 번역서의 모든 인용이 기존의 국역본들에 대한 참조 없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노골적인' 암시이기도 하다. 어려운 원서들이 계속 번역되고 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읽어주지 않으니 소모적이면서 비생산적인 노릇이다. 들뢰즈가 염려하는 커뮤니케이션(소통)의 시대에, 들뢰즈의 바람대로 '비커뮤니케이션(non-communication)'을 가장 잘 실행하고 있는 동네가 국내 들뢰지안들의 동네가 아닌가 싶다.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과 함께 읽어야 할 텍스트는 (1)"'많은 정치'라고 제목이 붙여져 있는 클레르 파르네와 함께 쓴 책인 <대화들>의 한 장", (2)"푸코에 대한 책", (3)'통제사회들에 대한 후기'라고 제목이 붙어 있는 푸코적인 주제들에 대한 에세이" 등이다. (1)에 해당하는 것이 <디알로그>(동문선, 2005)라고 옮겨진 책의 제4장 '정치들'이다(영역본의 장제목은 'Many Politics'). 그리고 (2)에 해당하는 것이 <푸코>(동문선, 2003)와 <들뢰즈의 푸코>(새길, 1995), 두 권이다. 그리고 (3)에 해당하는 것이 <대담 1972-1990>(솔, 1993/1994) 5장에 실린 '추신: 통제사회에 대하여'란 글이다. 이 5장은 '정치'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통제와 생성'이란 제목이 붙은 네그리와의 대담 또한 들뢰즈 정치철학의 윤곽을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대담 텍스트이다.  

 

 

 

 

1993년 초에 초판이 나온 <대담>은 내게 들뢰즈에 대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책이며, 이후에 들뢰즈의, 들뢰즈에 대한 책들을 지속적으로 사들이도록 한 '죄목'을 갖고 있다. 한데, 이번에 5장에 묶인 두 편의 글을 읽으며 따져보니까 대담의 부분부분을 단편적으로 읽었을 뿐 제대로 읽은 적이 그간에 한번도 없었다(12년 동안!). 하긴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담>의 번역은 '골동품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비록 1992년에 나온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와 함께 <대담>은 국내에 들뢰즈를 처음 소개한 '공로'가 인정되지만 번역서로서의 실효성은 이미 다한 것이 아닌가 싶고.(참고로 책자 형태로 나온 최초의 들뢰즈 번역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내가 아는 한, 이정우 편역의 <구조주의를 넘어서>(인간사, 1990)에 실린 '리좀' 번역이다. 아마도 지금의 역자라면 재번역의 욕구를 강하게 느끼겠지만). 

이미 들뢰즈의 카프카론이 <카프카>(동문선, 2001)로 재번역돼 출간된 것이 수년 전 일이다. 해서 <대담> 또한 제대로 다시 옮겨질 때가 되었다.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의 '문헌목록'에서 서동욱도 지적한 바 있지만, 국역본 <대담>은 전체 17편의 글 중에서 12편만을 옮긴 부분역이다. 들뢰즈의 육성을 담은 입문서로서 더없이 요긴한, 그리고 훌륭한 책이므로 조만간 새롭게 완역되기를 기대한다.  

 

 

 

 

패튼이 나열한 목록들에 덧붙여져야 할 책이 최근에 번역돼 나왔는데, 니콜래스 쏘번(N. Thoburn)이라는 젊은 학자의(나보다 젊다!) <들뢰즈 맑스주의>(갈무리)가 그것이다. 표지에도 그렇고 이 책의 원제가 'Deleuzian Marxism'처럼 돼 있는데, 내가 확인한 바로 책의 원제는  <들뢰즈, 맑스, 그리고 정치(Deleuze, Marx, and politics)>(Routledge, 2003)이다.

책은 들뢰즈가 미완으로 남겨놓은 마지막 유작 <맑스의 위대함(The Grandeur of Marx)>에서 실마리를 얻고 있다. 한 들뢰즈 연구자의 소개를 빌면, "쏘번의 책은, 맑스주의의 핵심 텍스트들에 대한 면밀한 독해 속에서, 들뢰즈와 안또니오 네그리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한 분석 속에서, 그리고 들뢰즈의 정치학과 친화성을 갖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탈리아의 오뻬라이스모 운동과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정치이론 및 전략들에 대한 유익한 설명 속에서 (전체로서의 삶과 그 삶을 고양시키는 탈주선의 창출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맑스주의자이자 코뮤니스트로서의) 들뢰즈의 정치적 기여를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들뢰즈주의 연구가 결정적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해서, 이 가을에 읽을 책이 하나 더 늘었다...

05. 10. 03.

 

 

 

 

P.S. 본문에서 들뢰지언 동네의 '비커뮤니케이션'에 관해 언급했는데, 가령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은 들뢰즈의 문헌 인용시 원저와 함께 자신이 옮긴 두 권의 역서, 그리고 (<천 개의 고원> 대신에) 연구공간 '너머' 자료실의 <천의 고원>을 사용한다. 소위 '전문연구자'가 원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간된 번역서도 아닌, 저작권에도 저촉되는 번역을 굳이 인용하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다. <천 개의 고원> 번역이 부분적으로 불만족스러울 수 있을지라도 인용시에 '부분수정'을 하면 된다(그렇다고 <천의 고원> 번역이 그토록 탁월한가?).

예전에 한 저널에서는 <천 개의 고원>(새물결, 2001) 출간에 맞추어 이 들뢰즈 책에 대해 서평을 쓴다면서 <천 개의 고원>이 아닌 <천의 고원>을 서평 텍스트로 삼은 적도 있었다. 혹 번역에 미비한 대목이 있다면, 그걸 지적해야 하는 것이 서평 아닌가? 스피노자-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참으로 '슬픈' 일이되, 옆에서 보기에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참고로, <들뢰즈의 철학>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경험론과 철학'이란 보론이다. 책은 들뢰즈 철학에 대한 '학술적인' 안내서로서 훌륭하지만, (소수적인 책이 아니라) '다수적인' 책이다('소수문학'을 옹호/주창하는 들뢰즈이지만, 그의 말마따나 그런 경우에도 얼마든지 '다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법이다).   

들뢰즈의 <대담> 번역에 대해서는 이미 완역 개정판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했으므로 군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나치 수용소(Nazi camps)'를 '나치 군대'로 옮긴다거나 '자본가(capitalist)'를 '자본주의자'로 옮긴 것 등은 원문과 대조해보지 않아도 오역임을 알 수 있다. 번역하기 까다롭지만 'people'을 '대중'이라고 옮긴 것도 상식밖이다(김재인은 '민족'이라고 옮기고, 이진경은 '민중'이라고 옮겼다. <들뢰즈와 정치>의 역자는 '사람(들)'이라고 옮기고. 참고로 러시아어본은 '나로드' 라고 옮긴다. 가장 적합한 역어는 '나로드'의 역어이기도 한 '인민(人民)'이라고 보지만, 이게 공산주의 용어로 등록돼 있는 탓에 역어로서 불편을 야기한다. 가령, 'people to come'을 어떻게 옮기는가? 도래할 민족? 도래할 민중? 도래할 사람들? 좀더 생각해볼 문제이다).

<질 들뢰즈>, <들뢰즈와 정치> 역자의 '전매특허'는 '아상블라주'이다(<들뢰즈와 정치>의 첫번째 역주도 이에 관한 것이다). 'assemblage'의 역어인데, 불어에도 같은 단어가 있지만, 들뢰즈의 영역 용어로서의 'assemblage'는 불어의 'assemblage'가 아니라 'agencement'의 역어이다(<천 개의 고원>, 12쪽 참조. 이 또한 첫번째 역주이다). 그러니 제대로 번지수를 맞추려면 '아장스망'이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한데, 거의 대부분의 들뢰즈 연구자들이 '배치(물)'라고 옮겨쓰는 단어를 굳이 '아상블라주'라고 (이상하게) 음역해주면 독자들의 이해가 용이해지는가? 제멋으로 하는 번역이라고 쳐도 좀 희한한 취향이 아닐 수 없다(이런 취향만 아니라면 내 생각에 역자는 더 완성도 높은 번역을 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

내가 읽은 서론에서의 오역 두 가지. "그[들뢰즈]의 단언에 따르면 정치적이라고 불릴 가치가 있는 어떤 철학도 자본주의의 본성과 진화를 설명해야만 한다."(28쪽) 네그리와의 대담에서 나오는 대목인데, 맥락을 모르고 읽어봐도 '설명'에의 요구는 조금 과도하지 않을까? 역자가 옮긴 것은 'take account of'이고, 그건 '고려하다' '주의하다' 정도의 뜻이다('설명하다'는 'account for'이다). 역시 같은 대담에 나오는 것인데, "이것이 인간조건에 대한 염세주의나 허무주의, 네그리가 시사하는 것처럼 일종의 비극적인 약속어음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야야 할까?"(33쪽) '비극적인 약속어음'? 이런 튀는 번역이 오역이 아닐 수가 없다. 'tragic note'를 옮긴 것인데, 의당 '비극적 음조'라고 옮겨져야 한다. 물론 'note'에는 '약속어음'이란 뜻도 있지만, 이 경우엔 (다른 오역들이 그렇듯이) 써먹을 수 없는 '부도어음'이다...

05. 10.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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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5-10-03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비로그인 2005-10-03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헿헿... OTL

yoonta 2005-10-04 0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맑스주의라는 책..저도 저 책은 일단 사 두긴 했는데..갈무리에서는 왜 항상 자신들이 펴낸 책이름에서 맑스주의를 강조하는건지 모르겠더군요. 전에 나온 푸코와의 대담책도..ramarks on Marx라는 원재를 푸코의 맑스라고 바꾸었고..이번도 그렇고요..

맑스와의 친화성을 강조해야 책이 잘팔린다고 생각해서인지(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네요-_-)..아니면 자율주의와 맑시즘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인지.... 혹은 자율주의가 가지는 아나키즘적 지향성을 맑시즘의 이론적 정교함으로 보완하려는 성격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지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자율주의(혹은 코뮨주의)와 들뢰즈와의 거리는 가까울지 몰라도 코뮨주의(혹은 아나키즘)와 맑시즘사이의 거리는 꽤 멀다고 생각하는데...이번에 나온 들뢰즈 맑스주의라는 책에서 들뢰즈주의?로 표현되는 코뮨주의(혹은 아나키즘)와 맑스주의와의 거리를 얼마나 좁히고 있는지는 일단 읽어보고 평가해 볼 일이군요.

로쟈 2005-10-04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수정하고 첨가한 대목이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다시 퍼가심이). yoonta님/정신분석에서는 '강박증'이라고 하잖아요. '독실한 신앙'이란 게 옆에서 보기엔 좀 불편하긴 하죠...

palefire 2005-10-04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ople(peuple)의 국역은 골치거리긴 한데, [시간-이미지]와 [질 들뢰즈의 시간 기계]는 모두 '민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나마 '인민' 빼고는 제일 나은 듯해 보입니다. 그리고 국내 들뢰지언들의 '비커뮤니케이션'은 한탄스러운 일이지만 쉽게 나아질 것 같지 않아보여서 역시 안타깝습니다.

로쟈 2005-10-0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맑스주의자'로서의 들뢰즈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지요). 아무래도 '민족'에는 다른 뉘앙스들이 많이 겹쳐져 있어서요(김재인씨가 어떤 의향에서 그렇게 옮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들뢰즈 커넥션>에서 좀 께름칙하더군요)...

myth 2005-10-05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동욱이 <들뢰즈의 철학>에서 수유판 '천의 고원'을 인용한 것은 김재인의 정식 번역본 '천 개의 고원'에 대한 불만이나 여타의 대단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저술 당시 저자가 유학 중이었던 탓에 그 무렵 출간된 새물결판을 구해볼 수 없어서였다는 해명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아요.

로쟈 2005-10-06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제가 좀 이해할 수 없는 건 <천 개의 고원>만 원서로 읽을 수 없었다는 얘기도 되기 때문이죠. 그가 다른 학술적인 글들에서 번역본을 인용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며, 들뢰즈는 자신이 전공하는 철학자인데 말입니다. 더불어, 유학중이어서 책을 구해볼 수 없었다는 건 아시겠지만, 넌센스입니다(필요한 책을 다 구해볼 수 있습니다). 구해볼 필요를 못 느꼈다고 해야 정확하다고 봅니다...
 

비가 제법 많이 내리는, 어느덧 9월의 마지막날이다. 지난번 연재의 글을 쓴 게 '그 여름의 끝'이었는데, 그 새 한달이 지난 것. 10월의 마지막 날(정확히는 '밤')만큼 운치가 있거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9월의 마지막 날을 '기념'해서 몇 권의 책을 꼽아본다. 사실 지난 한달은 지난 2월에 귀국한 이래 나의 취향에  맞는 책이 가장 적게 출간된 달이기도 하다. 해서, 이 연재가 다소 늦어진 것은 나의 게으름과 무관하다는 걸 미리 알려드린다(소수의 애독자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첫손가락에 꼽고 싶은 책은 브라이언 매기의 <트리스탄 코드>(심산)이다. '바그너와 철학'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데, 소개에 따르면 "바그너의 음악에 미친 철학의 영향"을 주로 밝히면서 "그 영향이 그의 오페라 -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파르지팔', 그리고 특히 '니벨룽의 반지' - 에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보여준다." 계속 옮겨오자면, "또한 지은이는 예술적 천재인 바그너뿐만이 아니라 역겨울 정도로 심한 편집증과 이기주의 성향을 지닌 바그너까지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바그너가 어린 니체와 나눈 길고도 친밀한 친교와 영향 관계도 다루고 있다. 그 다음으로 저자는 바그너가 가장 크게 오해받는 나치와의 연관이 허상이라는 해명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다."

알다시피 지난 토요일부터 어제까지 러시아의 거장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가 국내 초연되었다(4부작의 18시간짜리 공연).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규모나 지명도로 봐서는 '올해의 공연'으로 꼽힐 만한 대작이다. 이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이 달에는 바그너와 그의 오페라에 관련된 책들이 몇 권 출간됐고, <트린스탄 코드>도 그 중 하나이다. 일단 시의성이 있는 책. 게다가 나로선 저자의 책들을 읽어본 경험이 있어서 친숙하고 또 600쪽이 넘는 분량도 미덥기 때문에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게 된다.

저자인 브라이언 매기는 전형적인 옥스포드 철학자라는 인상을 주는데, 내가 읽어본 그의 책은 <현대 철학의 쟁점들은 무엇인가>(심설당, 1989)란 두툼한 책과 <칼 포퍼>(문학과지성사, 1982)란 얇은 책이다(내가 읽지 않았지만, 철학입문서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시공사, 2002)도 나와 있다. 원제는 '철학 이야기'). <현대 철학의 쟁점>은, 기억에 여러 철학자/작가들과 나눈 방송대담인데, '철학과 문학'이란 주제에 대해서는 영국 최고의 지성파 여성작가 아이리스 머독과 나눈 대담을 기록하고 있다. 철학입문서로 추천할 만하다.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서 문외한이기 때문에, 니체와의 관련(<바그너의 경우>)을 제외하면 바그너란 이름이 내게 떠올려주는 이는 대학 1학년때 교양영어를 강의하신 시인-교수님이다. 교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이 괴물-천재 음악가 바그너에 관한 에세이였고, 그걸 빌미로 해서 바그너와 그의 음악세계에 대해 귀동냥을 했던 것이 바그너에 대한 나의 상식/교양의 8할을 차지한다. 나머지 2할?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주제음악(바그너와 영화음악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단골 레퍼토리이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바그너'의 거의 전부인바, 작년에 나는 이 영화의 러시아판 비디오CD(감독판)를 사서 보기도 했다. 혹 10년쯤 후엔 <니벨룽의 반지>를 '경험'하고픈 욕심과 여유를 갖게 될는지 모를 일이다.(한편, 1952년에 독어본이 나왔던 아도르노의 바그너론이 <바그너를 찾아서(In Search of Wagner)>란 제목으로 1981년에 영역됐었고, 올해 개정판이 나왔다. 개정판의 서문은 '오페라광' 슬라보예 지젝이 쓰고 있다).  

 

두번째 책은 미술에 관한 것이다. 스티븐 컨의 <문학과 예술의 문화사 1840-1900>(휴머니스트). 원제는 '사랑의 눈길들: 1840-1900년 영국과 프랑스의 회화와 소설에 나타난 시선'이다. 원제는 책의 내용과 주제에 대해서 대부분을 이미 말해주는데, 작년에 나온 같은 저자의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0-1918>(휴머니스트)와 짝을 이루는 책이다. 저자는 "19세기 문화의 중심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회화와 문학 속 '남녀의 시선'에 주목"하며,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에서와 마찬가지로 "19세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고 전방위적으로 조명하는 솜씨를 보여준"다고.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조지 엘리엇, 토머스 하디, 샬럿 브론테 등의 시와 소설, 그리고 130여 점의 고갱, 르누아르, 드가, 마네, 밀레이, 로세티, 티소, 번 존스 등의 회화 작품들이 풍성하게 등장"한단다. 그러니 19세기 문화사 도감으로라도 서가에 꽂아둘 만하지 않은가? 참고로 20세기 프랑스 철학에서의 시선의 문제를 다룬 책으론 마틴 제이의  <내리깐 시선(Downcast eyes : the denigration of vision in twentieth-century French thought)>(1993, 632쪽)이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일종의 지성사. 마틴 제이는 <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와 이론, 1923-1950>(돌베개, 1981)의 저자이다.

 

 

 

 

세번째 책은 세 권의 시집이다. <유랑시인>(한길사)은 "우크라니아의 역사와 시정(詩情)을 탁월하게 묘사해 우크라이나의 국민시인으로 추앙받는 타라스 셰브첸코의 대표 장시(長詩) 21편을 엄선해 묶은 책. 맑고 순수한 개인적 정서를 노래한 서정시나 환상적 담시뿐만 아니라,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는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현실을 소재로 삼거나 억압적 정치 체제와 농노제를 반대하는 혁명적 정치사상을 담고 있는 주요 시들을 싣고 있다." 더불어 꽤 많은 분량의 충실한 해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평전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고. 작년인 2004년 겨울 '오렌지 혁명'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우크라이나는 얼마전 유센코(유시첸코) 대통령이 혁명의 동지이자 상징이었던 티모센코 총리와 갈라섬으로써 다시금 외신란에 오르내렸는데(정치의 꽃 또한 '화무십일홍'이다), <유랑시인>은 좀 다른 역사적 맥락과 시각에서 우크라이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줄 듯하다.

 

 

 

 

 

참고로, 우크라이나 출신의 가장 위대한 작가는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이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썼다. 그는 우크라이나 민속과 민담을 소재로 한 <지칸카 근촌 야화>(8편의 이야기 가운데, 6편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절판됐다)로 러시아문단에 데뷔하게 되며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대장 불바(불리바)>를 쓰기도 했다(우리에겐 주로 '아동물'로 소개돼 있다). 드라마작가로서의 그의 대표작은 <검찰관>(1836)인바, 이 책은 얼마전에 새 번역본이 출간됐다(조주관 역, 민음사). 그리고 이 작품은 10월에 러시아의 저명한 연출가 발레리 포킨이 이끄는 알렉산드린스키 극단에 의해 '(수원)경기도문화의전당'과 '(서울)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다. 포킨의 <검찰관>은 1910-20년대 혁신적인 연출가 메이에르홀드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메이에르홀드의 <검찰관> 초연은 지난 1926년 겨울에 있었고, 벤야민은 그 공연을 직접 본 소감을 <모스크바 일기>(그린비)에 간단히 적고 있다(이 '전설적인' 공연에 대해서 벤야민이나 당대 관객들은 다소 불만이었는데, 배우였던 메이에르홀드의 아내가 너무 '설쳤다'는 것도 불만의 한 이유였다). 나는 오늘 포킨의 공연을 예매했다. 

 

 

 

 

두번째 시집은 한국계 러시아 음유시인 율리 김의 내한공연에 맞춰 출간된 <율리 김, 자유를 노래하다>(뿌쉬낀하우스)이다. 공연은 10월말로 예정돼 있는데, 이번에 나온 시집에는 그의 음반 2장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다. 율리 김이란 이름을 나는 작년에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처음 듣게 되었는데, 한국계 가수로는 대중가요를 부르는 '아니타 최'(빅토르 최와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이름 자체는 빅토르 최를 연상시킨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요절한 로커 빅토르 최는 러시안 록의 '전설'이다)와 함께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후반 러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음유시인은 아르바트거리에 동상이 세워져 있기도 한 오쿠자바(아꾸자바)이다. 그의 시집은 <나의 사랑, 나의 인생>(새미, 2001)으로 번역/소개돼 있다. 오쿠자바가 서정적이라면 내가 TV에서 자주 들은 율리 김의 노래는 경쾌하면서도 서정적이고 유머러스했다. 동시대 러시아 음유시인의 계보를 한국계 러시아인이 잇고 있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일이다.

 

 

 

 

세번째 시집은 평론가를 겸하고 있는 권혁웅 시인의 <마징가 계보학>(창비)이다. 오늘자 한겨레의 북리뷰란에서 크게 소개된바 있으므로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겠다. 그 리뷰는 '산동네의 추억, 아픔 삭인 너스레'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요즘시의 대표적인 경향이라고 하는 '추의 미학' 혹은 '엽기시'로부터 그의 시들이 한 걸음 떨어져 있다는 걸 암시받을 수 있다. 최재봉 기자의 연상대로, 시집은 유하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같은 시집들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권혁웅은 '성북구 삼선동' 키드쯤 된다. 삼선동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70년대말 서울 산동네의 풍경이라는 것은 어림짐작할 수 있는 바다. 산동네 이야기라는 점에서 최기자는 이번 시집을 요절 작가 김소진의 <장석조네 사람들>의 시적 버전이라고도 평한다. 아무려나 그 시절, 그 동네의 얘기가 마음을 잡아끌 만한 독자들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 권혁웅보다 내게 익숙한 건 평론가, 혹은 문학연구자 권혁웅이다. 나는 그의 학위논문이기도 한 <한국 현대시의 시작방법 연구>(깊은샘, 2001)를 좀 읽어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은유, 환유, 제유라는 세 가지 수사학(적 전략)으로 한국 현대시작법의 계통을 세우려고 시도했다. 적어도 나의 견문으론 우리시 연구에서 시의 의미론이나 주제론 이전에 통사론에 주목하고 이를 자세하게 분석해 들어가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것이 전문연구서들을 그닥 많이 들여다보는 편이 아니면서도 그의 책을 사서 읽어본 이유이다.(한편으로 얼마전 나는 한 술자리에서 이 시인-평론가와 몇 마디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엽기시' 계열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푸근하고 마음씨 좋은 시인이었다. 단, '고스톱에 관한 보고서' 같은 제목의 시들로 미루어보건대, 그와 고스톱을 치는 것만은 삼가해야 할 듯. 짐작에 그는 마음좋게 피박, 광박 다 덮어씌울 '실력자'이므로).  

 

 

 

 

 

다시 책얘기로 돌아와서, 네번째 책은 원로 철학자 박이문 선생의 <논어의 논리>(문학과지성사)이다. 그의 <노장사상>(문학과지성사, 2004, 개정판)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번의 '논어 이야기'에도 눈길이 갈 만하다. 저자가 비록 서양철학 전공자이긴 하나 글에서 논리(로고스)를 끌어내는 일에서 동서양의 분별은 사소하다. 고려대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는 이승환 교수는 "나 자신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거울을 필요로 한다. 때로 거울은 내가 모르고 지내던 나의 모습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박이문 교수의 <논어의 논리>는 정작 우리 자신이 모르고 지내던 <논어>의 가치를 새롭게 드러내주는 거울과도 같은 책이다."라고 추천하고 있기도 하다. 너무도 많은 '논어'들 가운데, 분량이 가장 컴팩트하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우리도 때로는 얇고 투명한 책들을 읽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논리'를 다룬 책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김경만 교수의 <담론과 해방>(궁리). '비판이론이 해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국내에서 나온 책으론 드물게도 서구 사회학 이론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지식인이 이론적 비판을 통해 사회.정치.문화적 변동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믿음'이 강조되어 왔다고 지적하고, 이렇게 우리가 당연시하는 지식인들의 사회적.정치적 역할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상정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의 말을 좀더 옮기면, "우리는 이제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적 논의를 사회나 정치개혁에 도움이 안 된다는 구실로 외면하면서 하버마스 같이 평생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을 추구해 온 이론가들을 한편으로는 존경하고 대접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버려야 할 때가 됐다" 더불어, "독자적 한국사회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서양의 이론에 의존해왔다는 자성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그들 이론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그들과의 '비판적 대화'를 유도해냄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비판적 대화'의 시도인 셈.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출간된 이 책에 대한 반응은 뜨거운 듯하다. 단적으로 대가급 철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의 추천사는 이렇다(바우만의 책들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김경만은 <담론과 해방>에서 우리 시대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이 극복하려고 했던 장애물들, 즉 그들이 제기했지만 결국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던 문제들, 또한 그들의 저작에서 제기되었어야 했지만 그들이 피하거나 간과했던 문제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폭넓게 분석하고 있다. 지식이 가지는 윤리적 영향력과 지식이 인간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진 어느 누구도 김경민의 분석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를 풀려는 미래의 모든 시도는 이 책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비판적 대화'의 물꼬는 트인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경만 교수의 다른 책으론 작년초에 나온 <과학지식과 사회이론>(한길사)과 번역서 <지식과 사회의 상>(한길사, 2000)이 있다. 그런 '전력'에서 알 수 있지만, 저자는 과학/이론 사회학에 정통한, 한국에서는 좀 희귀한 사회학자이다. 참고로, 분야는 조금 다르지만, 도전적인 자세로 '이론 다시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책으론 두달쯤 전에 나온 산본마쓰의 <탈근대군주론>(갈무리)도 기억해둘 만하다. 나는 이 책의 번역서가 나오자마자 원서를 도서관에 주문해놓았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마도 겨울쯤에나 읽어보게 될 듯하다. 그래, 그렇게 또 겨울이 올 것이다. 이 가을이 지나가면...

05. 09. 30.

 

 

 

 

P.S. 다섯 권에 꼽지는 않았지만, 눈에 띄는 책 중의 하나는 로베르 마조리의 <동물원에서 사라진 철학자>(마티)이다.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는 책으론 좀 특이한데, "책에 실린 33개 항목들은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이나 촌극을 찍은 즉석사진과도 같다. 그 안에서 철학자는 특정 동물들에 대해 말하는데, 때로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어리석은 소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새나 개나 옴벌레를 묘사하면서 사상의 본질을 몇 마디 우화로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힐데가르트는 고래를, 칸트는 코끼리를 전설의 동물처럼 생각했다. 디오게네스는 낙지를 먹다가 개에게 물려죽었다는 일화가 있고, 루소는 오랑우탄을 일종의 유사 인류로 보았다. 소크라테스의 전기가오리나 니체의 사자는 그들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호라 할 만하다. 저자는 농담을 하는 척하면서, 한 철학자의 사상 세계를 슬쩍 일별하게 한다."(저자에 따르면, 들뢰즈/가타리는 '진드기', 데리다는 '고양이'와 짝지을 수 있다.) 

재치가 돋보이는 경쾌한 책인데, 프랑스에서 2005년 2월에 발간된 이 책은 2004년 7월 19일부터 8월 28일까지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 시옹'에 여름 특집으로 연재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얇은 분량이긴 해도) 굉장히 빨리 번역/소개되는 셈. 특별히 이 책이 눈에 띈 것은 책의 몇 장을 몇 달 전에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인즉슨, '저명한' 역자께서 몇몇 장의 검토를 의뢰해오셨기 때문인데, 돌이켜 생각하면 과분한 일이었다. 내가 의견을 덧붙일 만한 여지가 없는 깔끔한 번역이었기에...

그나저나 '동물원에서 사라진 철학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건가? 이들을 다시 데려와야 하나? 이젠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수의학도 배워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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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9-30 22:20   좋아요 0 | URL
오늘도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마냐 2005-09-30 22:27   좋아요 0 | URL
지식동냥 잘하구 갑니다. 꾸벅.

Tamino 2005-09-30 22:48   좋아요 0 | URL
님의 부지런함이 부럽습니다. 덕택에 저같은 게으른 사람에게는 이책저책 사서 보고 실망하고 본전생각하는 일이 줄어드니 말입니다.

비로그인 2005-10-01 07:38   좋아요 0 | URL
오늘도 좋은 책소개 받고 갑니다. 꾸벅.

로쟈 2005-10-03 13:05   좋아요 0 | URL
찾아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는 체'하는 도리를 간간이 실천하고 있을 뿐입니다...
 

'고유명사'란 말로 내가 지칭하고자 하는 것은 번역서들에 등장하는 인명과 작품명 등이다. 독자에게 생소한 고유명사라면 역자가 '특권'을 가지고 몇 가지 원칙(가령, 원음 표기나 교육부의 외국어 표기안 등)에 따라 '처음'으로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관례(상식)에 따르거나 그에 준하여 표기하는 것이 옳다고 보며, 그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타당한 이유를 명시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가령, 왜 '베르그송' 대신에 '베르그손'이라 표기하는지 등). 아무런 이유 없이, 역자의 독단에 따라 '임의로' 표기하는 것은, 그리하여 '오역'을 만드는 것은 착오가 아니라면 대개 무지의 결과이거나 오만의 소산이다. 그걸 '관습'에 대한 '도전'으로 미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드는 것은 낮에 도서관에서 유진 홀랜드의 <프로이트의 거짓말>(접힘과펼침, 2004)이라는 '괴이한' 책을 잠시 들춰보다가(번역서의 제목 자체가 '거짓말'이다) 찾아보기에서 '루칵스'란 인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루칵스? 눈치빠른 이라면 짐작할 수 있을 텐데, 헝가리 출신의 독일 비평가 'Lukacs(루카치)'를 그렇게 표기한 것. 가뜩이나 역자는 '들뢰즈'를 '들루즈'로 '가타리'를 '과타리'로 표기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성(singularity!)을 과시하고 있는데, '루칵스'란 표기를 보니까 그 독자성이 무지/오만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는 걸 알겠다. 본문의 내용이야 어떠하든 이 정도면 책을 집어들었다가 다시 놓을 수밖에.

사실 고유명사를 제대로 옮겨주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느 정도 지명도 있는 저자/작가들의 이름을 잘못 표기해주는 것은, 번역의 수준과 무관하더라도, 역자의 '무지'를 에누리 없이 드러내주는 것이므로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그런 '사소한' 오역으로 인상을 구긴다면, 억울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만한 '지명도'의 저자/작가명, 혹은 작품명이라면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서 얼마든지 쉽게 검색하고 교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러한 무지와 오만을 거드는 것은 불찰과 다소간의 게으름이다. 가령, 리처드 커니의 <이방인, 신, 괴물>(개마고원, 2004)처럼 나름대로 잘 읽히는 번역서에서 프랑스의 비평가 '블랑쇼(Maurice Blanchot)'를 '블랑코'(40쪽)로 읽어주게 되면, 역자가 적어도 문학비평쪽으론 감감하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이므로 유쾌하지 않은 일이겠다(현대미학사에서 나온 다른 책의 경우지만,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를 '바데스'로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의 무지를 폭로한다).

비교적 양호한 번역서인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 2004)에서도 고유명사 표기에 대한 무신경함은  역자의 체면을 깎아먹는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를 초지일관 '보들리야르'라고 옮겨준 것은 착각에 의한 거라고 쳐도,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을 <위대한 기대>로 옮기게 되면 무지와 함께 무교양이 한꺼번에 드러나버린다. <지하생활자의 수기> 혹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로 번역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지하로부터 온 기록들(Notes from Underground)>이라고 영역본 제목을 직역하게 되면, '들뢰즈와 문학'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는 저자 콜브룩과 역자는 코드가 잘 맞지 않는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조금만 검색해 보더라도 그런 정도는 충분히 '아는 체' 할 수는 있는 일인데, 역자가 고집을 부린 것은 (反들뢰즈적이게도) 문학을 너무 무시한 처사가 아닐까?

 

 

 

 

그런 경우에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에 나오는 단편 <고통스러운 경우(A painful Case)>가 한 부인이 기차에 치여죽은 사건을 다루고 있기에 <참혹한 사건>(김종건 역)이라고 옮겨져야 한다든가, 역자가 '레이몽 카버(Ramond Caver)'의 <짧은 컷들(Short Cuts)>이라고 옮긴 작품이 '레이몬드 카버'의 <숏컷>(집사재, 1996)으로 소설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로버트 알트만의 '걸작' <숏컷>이라는 사실은 '초과적인' 지식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쓴, 노벨상 수상작가 쿳시(J. M. Coetzee)의 <포(Foe)>(책세상, 2003)를 역자가 '코에체의 <적>'으로 옮긴 것도 이해할 만하지만, 좋은 번역서를 내놓고서 굳이 이런 류의 사소한 실수들로 '무식하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는지?

물론 실수라고 하기엔 좀 불성실한 대목도 있긴 한데, 카프카의 <단식 광대(The Hunger Artist>를 '굶주린 예술가'(74쪽)와 '배고픈 예술가'(227쪽)로 다르게 번역해놓고 찾아보기에서도 각기 다른 항목으로 설정한 것은 좀 희극적이다. 이 모두가 피할 수 있었던 오류들이라는 건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참고로, 콜브룩이 164쪽에 '돈 데릴로의 위대한 포스트모던 소설 <하얀 소음>'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작품은 얼마전에 국역본이 나왔다. 돈 드릴로, <화이트 노이즈>(창비))

하여간에 이런 '사소한'(하지만, 무시하면 창피한) 오류들은 거의 모든 번역서들에서 튀어나온다. 하지만, 동구권이나 동남아 등 우리에게 표기가 생소한 지역 언어들의 표기에서가 아니라면(이런 건 좀 어렵다. 가령, 흔히 '무카로프스키'로 불리는 체코의 미학이론가의 바른 표기는 '무카르좁스키'이며, '벨라 발라즈'로 표기되는 헝가리 출신의 영화이론가는 '벨라 발라슈'이다, 등등).  웬만큼은 상식과 관례에 따라 착오/오류를 피해볼 수 있다. 이젠 피해도 좋을 러시아어 인명표기의 오류를 몇 가지 지적하면서 잔소리 같은 이 글을 마친다(나의 결론은 굳이 쓸데없이/억울하게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지 말자는 것이다. 무릇 아는 체하는 것은 지식인의 도리이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민음사, 2004)에 고골(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등장하는 몇 안되는 러시아인이면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러시아 철학자 '체스토프(L. Chestov)의 바른 표기는 '셰스토프'이다. 그의 책으론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니체: 비극의 철학>(현대사상사, 1987)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불어로 'Chestov'를 '체스토프'라고 읽는가? 그럴 법하지 않으므로, 아마도 '체스토프'는 '상상해본 러시아어'인 듯하다). 물론 <차이와 반복>은 훌륭한 번역서이므로 이런 옥의 티가 개정판에서는 교정되기를 기대한다.

독일의 러시아문학 애호가인 엘스베트 볼프하임 여사의 <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테인>(아카넷, 2005)은 읽을 만한 저작이자 듀오그라피의 한 전범이다. 이 책을 최근에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역시나 고유명사 표기는 실수들을 포함하고 있다. 좀 낯선 인명으로 1920년대 연극이론가이자 극작가로 '추츠학(Chuzhak)'이라고 옮겨진 이는 '추작'(니콜라이 추작)이라고 표기해야 옳다('추츠학'은 독어식으로 읽어준 것인가?).

올랜도 파이지스의 훌륭한 러시아 문화사 <나타샤 댄스>(이카루스미디어, 2005)도 양호한 번역서인데, 유감스럽게도 러시아사의 가장 '위대한' 황제 '표트르 대제'를 모두 영어식으로 '피터 대제(Peter the Great)'라고 표기했다(영어의 '알렉산더'는 전부 러시아어로 '알렉산드르'이다). '피터'란 표현이 입에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엔 '예카테리나 2세'도 '캐더린 2세'라고 표기해야 하며, '모스크바'도 '모스코우'라고 읽어줘야 일관적인 것이 된다. 이 또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거나 러시아 전공자의 교정을 거쳤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오류들이다...

05. 0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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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efire 2005-09-29 2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더 놀란 건 돈 드릴리오의 [화이트 노이즈]가 번역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이제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를 기대해도 되는 걸까요?) 그래도 현재까지 가장 재미있었던(안타깝다기보다는 그냥 알고 깔깔 웃었던) 고유명사 오기는 보르헤스 전집 중 하나에 실렸던 '두레르'가 아니었을까 싶네요.(화가 중 한 명입니다)
Balasz가 '발라즈'로 표기되고 있는 건 오래도록 떠돌아서 저로서도 사실 약간은 낯섭니다. 이런 사례들이 영화 쪽에도 종종 등장합니다. Jean Epstein의 경우 국내에는 불어식 발음으로 '엡스탱'으로 거의 쓰지만 Epstein 본인은 유태계였고 생전에 자신을의 이름을'엡슈타인'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딸기 2005-09-30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칵스...는 심하군요. 저도 아는 이름을...

딸기 2005-09-30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하면 '조지 루칵스'도 될 수 있겠군요 ^^

로쟈 2005-09-30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palefire님/ 지적하신 대로, 고유명사 표기는 사실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쿳시'만 하더라도 처음 보면 '코에체' 정도 거든요. 역자가 저자에게 문의한 결과 '쿳시'라고 읽어달랬답니다. 물론 '읽는 대로' 표기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철자도 발음만큼 중요합니다), 인명의 경우 존중해줄 필요는 있는 것이죠. 스트롱베리님/ 예, '루칵스'는 좀 심한 경우죠. 제가 이런 글까지 쓰게 만들었으니...

마냐 2005-10-01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루칵스. 지하로부터의 노트....모두 기절할 노릇임다. 어이없다 못해 웃음이 나오는.
근데, 로쟈님...국제뉴스 정리하다보면, 고유명사 표기 무지 어려버요. 동구권 이름의 경우도 여전히 어렵구, 포르투갈어도 어렵죠. 음음.

로쟈 2005-10-03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어려운 거 맞습니다. 근데, 우리에게 이미 소개돼 있는 좀 이름있는 작가/작품들 정도는 '알아서' 써줘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이죠. 안 그래도 어려운데...

숨은아이 2005-10-0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서재에는 처음 옵니다. 자료로 간직하고 싶어 퍼갑니다. 꾸벅.

수퍼겜보이 2005-10-0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옷. 루카치 스펠링이 그런 것이었군요. 저도 퍼갑니다. 꾸벅-
 

 

 

 

 

<들뢰즈 커넥션>의 맨마지막 문장은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239쪽)이다. 원문은 [T]he whole problem is to believe in a world that includes them[=fools]."(142쪽) 지난주에 거의 한달이 걸린 책읽기를 끝냈다. 다른 일들과 겹치기도 했고, 원서와 꼼꼼히 대조하며 읽은 탓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시간이 걸린 셈인데, 이 글은 그 '책떨이'쯤 된다. 다른 일들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도 얼마간의 마무리는 필요할 듯하다.

'바보들'은 다소 뜬금없을 듯한데, 이 마지막 문장을 포함하고 있는 마지막 문단에서 라이크만이 얘기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아리아드네, 즉 통제사회에 맞게 적응해서, 전자 뇌-도시 속에서 그것과 더불어 작용하며, 우리의 실존에서 낯설고 독자적인 것에 '긍정'을 말할 수 있고, 예술과 예술의지, 새로운 감각과 감각의 구성을 향한 취향을 불어일으킬 수 있는 아리아드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핍하고 있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우리는 그것을 너무 많이 갖고 있다) 차라리 생성하고 있을지 모르는 것에 대한, 그것이 우리 자신 안에 현실화되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에 대한, 우리들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이런 믿음이다. 들뢰즈는, 그것이 바보들을 웃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하의 원문은 이렇다: "For what we lack is not communication (we have too much of that), but rather this belief in what we may yet come, and in the peculiar time and logic of its effectuation in ourselves and in our relations with one another. That may make fools laugh, said Deleuze - the whole problem is to believe in a world that includes them." 여기서 우리에게 부족하다고 한 '믿음'의 세 가지 대상은 (1)(우리가) 생성하고 있을지 모르는 것(what we may yet come) (2)그것이 우리 자신 안에 현실화되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the peculiar time and logic of its effectuation in ourselves) (3)우리들 서로간의 관계(our relations with one another) 등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믿음이 '바보들을 웃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어떤 세계(=하나의 세계)를 믿는 일이다?

(*paby님의 지적에 따른 것인데, 믿음의 대상의 두 가지이다. 역자를 잠시나마 따라간 나의 불찰이다. 원문을 내 식대로 다시 옮기면,  "왜냐하면, 우리에게 부족한 건 오히려 우리가 여전히 생성할 수 있는 뭔가에 대한 믿음,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서로 간의 관계 속에서 그것을 만들어 내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믿음은, 들뢰즈에 따르면, 바보들을 웃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그런 잠재성들을 포함하고 있는 어떤 세계를 우리가 믿는 것이다.")

원문의 'them'을 <들뢰즈 커넥션>의 역자는 'fools'로 봐서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 문제의 모든 것(the whole problem)이라고 했다. 이때의 바보들은 '성스런 바보(holy fools)'라도 되는 걸까? 뭔가 심오한 얘기를 하는 것도 같으며, 마지막 문장으로서의 여운도 남긴다. 하지만, '상식적인 논리'에 기대면 좀 이상하다.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 나의 (허술한) 문법 지식은 them=fools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지만, 나의 직관은 이 '시적인' 문장을 신뢰할 수 없도록 한다. '그것들'이란 앞에서 믿음의 대상으로 나열한 두 가지가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그래야 상식적인 논리상 말이 되는 거 아닌가?). 적어도 그렇게 읽는 쪽이 내가 그 문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나 같은 '바보'는 '모든 문제는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를 믿는 일이다'란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오직 '심오한 바보'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가령, 나 같은 '바보'가 더불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들뢰즈 자신이 몸의 조건(phystic condition)이 그를 덮치자 마자"(238쪽)에서 'phystic'이란 이상한/희귀한 원서의 단어를 나는 그냥 'physic'의 오타라고 생각한다. 역자도 그렇게 생각했음 직한데 굳이 'phystic condition'이라고 병기해주는 이유는 뭘까?(이런 게 역자의 '공'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233쪽에서도 '비조직적 판(anorgniezed plan)'이라고 '희한한' 원어가 병기돼 있는데, 이건 'anorganized plan'(138쪽)의 오타이다. 물론 나는 'anorganized'도 'unorganized'의 오타라고 생각하며, (원서에서의) 그 정도 실수는 이해해줄 수 있다고 본다. 하니, 그냥 '비조직적 판'이라고 옮겨주면 될 것을 굳이 오타를 그것도 또다른 오타들까지 보태서 'anorgniezed plan'이라고 병기해주는 이유는 무엇인지?(역자가 한번이라도 다시 읽어본 것일까?) 예컨대, 129쪽에서 '르루아 구랑(Leroi-Gouhran)'이란 인명은 원서의 '르루아-구롱(Leroi-Gouhron)'이란 오타를 교정한 것이다. 그런 정도의 '상식적인 교정'이 왜 다른 사례들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은 것인지?

하여간에 이 번역서에는 그런 식으로 무성의해 보이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역자가 오역들에 대해서는 '상시교정'하겠다고 하니까 추이를 지켜볼 일이지만, 정말로 뒤늦게 '외양간 고치는 일'을 피할 수 없었는지는 의문이다. 역자가 '이 책의 백미'라고 적극 추천하고 있는 6장에서도 오역들(혹은 '이견들')은 튀어나온다. 216쪽에서 "그것은 '비밀'을 통해 숨겨진 후 드러내지는 것이 아닌 어떤 것이다."란 문장의 원문은 "something that, though 'secret,' is not hidden and then disclosed."(127쪽)이며 역자는 'though secret'(비록 '비밀'이더라도)를 'through secret'로 잘못 보았다. 같은 쪽에서 "'강렬'과 관련해서 현대작품에서 일어나는 일은..."은 "What happens in the modern work, regarded as 'intensive'..."를 옮긴 것인데, 역시나 'regarded as'(-한 것으로 간주되는)를 'as regards'(-에 관련해서)로 잘못 읽었다.

223쪽에서 현상학에 대해 들뢰즈가 이의를 제기하는 대목. 들뢰즈는 베이컨적인 '고기(meat)'와 대비하여 현상학의 '살(flesh)'은 부드럽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현상학이 여전히 분별하려 노력하는 세계의 초월적 개념에 둘러싸이지 않을 때에만, '하나의 삶'의 가능성이 현상학적 '삶의 세계'에서 해방되고 지각을 조건짓는 데 이바지하는 방식에서 해방될 때에만, 감각은 충분히 실험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원문은 "For sensation becomes fully a matter of experimentation only when it is no longer enclosed in the transcendental conception of the world that phenomenology still tries to discern - when the possibilities of 'a life' are freed from the phenomenologial 'life-world,' and the ways it serves to condition perception."(132쪽).

문제는 굵은 글씨로 표기한, 'serves'의 주어인 대명사 'it'을 무얼로 볼 것인가 하는 점. 번역문에서는 "'하나의 삶'의 가능성(들)"이 주어처럼 돼 있지만, 그건 복수 명사이므로 당연히 serves의 주어가 될 수 없다. it은 문맥상 바로 앞에 나오는 'life-world'를 받으며 이 현상학의 용어는, 역자도 알겠지만, 관례상 '생활세계'로 번역한다. 해서 강조된 문장을 다시 옮기면, "'하나의 삶'의 가능성들이 현상학의 '생활세계'에서 벗어나게 될 때, 그리고 그 생활세계가 지각을 조건짓는 방식들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정도이다.   

224쪽에서, "들뢰즈의 실험주의적 미학의 문제는, '미학적 의미에서의 가능성'에 대한 조사가 항상 맞대결하는 '질식(suffocation)'의 의미다. 그리고 이 의미가 주어지는 기본적이 정감은 우울증 또는 스피노자가 '슬픈 정념'이라 부른 것이다." 원문은 "The problem in Deleuze's experimentalist aesthetic is the sense of 'suffocation' against which the search for 'possibility in the aesthetic sense' is always directed."(132쪽) 의견 차이일 수 있는데, 일관적으로 '의미'라고 옮겨진 'sense'가 이런 대목들에서는 내가 보기에 '느낌'이나 '감(感)'이란 뜻을 강하게 갖는다. 해서, '질식의 의미'보다는 '질식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적어도 같이 병기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조사'라고 옮겨진 'search'는 '탐구'가 더 타당할 것이다('조사'는 보통 'research'를 가리키니까).

같은 쪽 각주33)에서 프린트상으로 엉겨나온 글자들은 부주의한 교정의 결과일 터이다. 오역에 해당하는 것은 그 다음: "비록 라캉이 (...) 자신의 카톨릭교를 통해 법과 그것의 명령에 앞서는 즐거운 지식으로까지 밀어붙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대목의 원문은 "as though Lacan were pushing through his Catholicism to a gay science prior to the law and its Order..."(165쪽)이다. 굵은 글씨로 표시했지만, 역자가 양보절로 옮긴 이 문장은 가정법 문장이다. 희한하게도 역자는 가정법 문장들을 거의 제대로 옮기지 않았다(설마 못한 것일까?). 가령 51쪽 각주12)에서 "로티가 이끌렸던 '대담이론'에 대해서 듀이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는 "듀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로 옮겨져야 한다(듀이는 1952년에 죽었고, 로티는 1931년생이다. 안면도 없었을 대학생 로티에 대해서 듀이가 무슨 생각을 했을 리 만무하다). 또 84쪽에서 "들뢰즈는 (...) 철학이 정말이지 아테네에서 플라톤과 더불어서보다는 다른 곳에서 출발했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고 돼 있는데, 원문은 "Deleuze says that philosophy might well have started elsewhere than in Athens and with Pato."(40쪽)이며,  "들뢰즈는 철학이 아테네에서 플라톤과 더불어서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에서 출발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다. 그건 또다른 철학사의 잠재성이었다(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갖게 된 출발점은 그리스철학이다).

시간관계상 하나만 더 지적한다. 237쪽에서 "왜냐하면 그런 믿음, 그런 '아이스테시스'가 있을 때면..."의 원문은 "For when there is no such belief, no such 'aisthesis..."(140쪽)이다. 단순한 건데, 역자는 'no'를 빼먹음으로써 부정문을 긍정문으로 바꿔서 옮겼다. 불성실이 아니라면 이런 허술한 실수가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하기 곤란하다. 내게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다른 대목의 오역들도 마저 지적하겠지만, 그건 나중에 필요할 경우의 일로 미루어둔다(이런 게 유쾌한 일은 결코 아니므로).   

개인적으로 나는 라이크만의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과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 그리고 들뢰즈의 대담 <디알로그>(동문선), 세 권에 대한 간단한 리뷰를 애초에 기획했었다. 그래서 <들뢰즈 커넥션>과 함께 <질 들뢰즈>를 읽었고(<질 들뢰즈>는 두 챕터 정도를 남겨놓았는데, <들뢰즈 커넥션>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이다. 비록 일부 번역어에 내가 동의하지 않으며, 문학작품들에 대한 역자의 '무지'가 옥의 티이긴 하지만), <디알로그>를 읽고 있다. '간단한 리뷰'를 기획했음에도 불구하고 제 때에 실행되지 않은 것은 물론 불어난 일의 견적 때문이며 대부분은 쉽게 읽을 줄 알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들뢰즈 커넥션> 탓이다. 내가 이 번역서에 갖게 되는 '감정'은 부분적으로 거기에 기인한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너희가 들뢰즈를 아느냐'는 식의 만듦새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가령 원서에서도 미주로 돌려진 들뢰즈 원전의 인용문 주가 굳이 각주로 옮겨진 이유는 무엇인가? 국역본이라곤 역자 자신의 번역서들까지도 깡그리 인용되지 않은 각주가 일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더구나 각주의 원서명들은 번역도 안 해놓았으면서). 게다가 무슨 학술논문도 아니면서 첫 페이지부터 '들뢰즈(Deleuze)'라고 '명찰'을 달게 하더니(자기 집에서 이름표 달고 있는 꼴이다), '플라톤(Platon)'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라고 국적불명('Aristoteles'는 정말 그렇다)의 표기를 병기해놓는 건 또 뭔가? 들뢰즈를 읽는 독자가 설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누구인지 모를까봐 걱정이 되었을까? 원서에 그냥 'Ethics'라고 돼 있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Ethica in Ordine Germetrio Demonstrata'라고 장황하게 라틴어 원저명을 병기해놓은 '깊은 뜻'은 무엇일까? 이걸 '세심한 배려'로 읽어야 하나? 그런 배려가 일차적으로 지향했어야 하는 것은 그런 류의 '티내기'가 아니라 오역을 최소화한 '성실한' 번역이었다.

역자가 재번역하고 있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는 이런 투정을 부릴 일이 없기를 기대한다...

05. 09. 26.  

P.S. 르페브르님의 '바보들의 세계'에 관련한 대목을 찾아주셨다. 들뢰즈의 <시네마2>에 나오는 것으로 영역본 쪽수로는 173쪽(불어본 225쪽)이다.

We must believe in the body, but as in the germ of life, the seed which splits open the paving stones, which has been preserved and lives on in the holy shroud or the mummy's bandages, and which bears witness to life, in this world as it is. We need an ethic or a faith, which makes fools laugh; it is not a need to believe in something else, but a need in this world, of which fools are a part.

르페브르님의 번역으로 이 대목은 "우리에게는 바보들도 웃게 만들 수 있는 윤리나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믿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바보들이 일부를 이루고 있는 이 세계를 믿어야 한다는 요구이다" 정도의 뜻이다. 아마도 이것이 <들뢰즈 커넥션>에서 라이크만이 염두에 두고 있는 대목일 듯싶다. 따라서 '바보들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와 관련한 나의 의혹은 나의 오독이다. 단, 나로선 자세한 맥락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다소 뜬금없는 표현으로 느꼈던 것. 아무튼 역자에겐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역자에게 직접 한 수 배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반나절만에 내가 궁금했던 대목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 나로선 소득이 없지 않다. 무지한 자가 배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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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y 2005-09-26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도 발견하지 못하신 오역이 있군요. 문제의 구절에서 믿음의 대상은 셋이 아니라 둘입니다. 다음과 같은 정도가 적절한 번역이겠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소통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건 너무 많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오히려 우리가 아직도 도달할 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믿음,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서로의 관계 안에 그것을 만들어 내는 특이한 시간과 논리에 대한 믿음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그것은 바보들을 웃게 만들 수도 있다 – 모든 문제는 그들을 포함하는 세계를 믿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겠는데, 저야 들뢰즈도 모르고 들뢰즈 커넥션도 읽어 보지 않았으니, 주어진 영어 문장 하나와 저의 상상력만 동원해서 짐작을 해 봅니다. 일단 “그것”은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도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서로의 관계 안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만들어지게 되면, “그것”은 바보들을 (바보들도?) 웃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조건들을 만족시켜 주는 “그것”이 도대체 뭘까요? 아마도 그것은 들뢰즈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상태 정도가 되겠지요. 그리고, 제 추측으로는, 그런 이상적 상태가 바로 “바보”들이 웃는 세계, “바보”들을 포함하는 세계인 것 같네요. (* 그리고 문법적으로 보아도 them은 fools가 맞습니다.)

로쟈 2005-09-27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믿음의 대상에 관한 건 옳은 지적이십니다. '바보들'을 문제삼느라고 제가 거기까지는 주의를 두지 못했군요.^^ 문법적으로 them이 fools를 받을 수도 있을 거라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이른바 문법적 모호성이겠죠. 하지만, paby님의 추측에는 동의하지 않는데, 저로선 어려운 해설이 필요한 곡예보다는 간단한 상식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belief in/believe in 구문의 유사성이 여기서 의미상의 반복을 만들어낸다고 보며, 그럴 경우 굳이 다른 (거창한) 해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건 제 '추측'이며, 들뢰즈가 '바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을 찾아본다면 풀릴 수 있는 의문이라고 봅니다. 저 또한 들뢰지안이 아니어서 어디서 나오는 얘기인지 현재로선 집어올 수 없지만...

paby 2005-09-27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해설(로쟈님에 따르면, "어려운 해설이 필요한 곡예"가 필요하지 않은, "간단한 상식"에 따른 해설)에 의하면, them은 도대체 무엇이 됩니까? what we may yet come과 the peculiar time and logic of its effectuation in...을 병렬적으로 연결한 것이 되나요? 이들을 them으로 받는다는 것은 문법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곤란하지요. (우선 what절과 명사를 함께 묶어서 them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곤란합니다. 그리고 어떤 것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논리를 엮어서 그 모두를 포함하는 세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내용적으로 곤란하지요. 어떤 것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논리라는 것은 내용적으로 동등한 차원의 것이 아니니까요.)

사실 바로 believe in의 구문적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는 "간단한 상식" 때문에 저는 what we may yet come이 a world that includes them과 실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해설이 필요한 곡예"는 왜 저자가 양자를 실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는지, 그리고 왜 여기에 갑자기 fools가 등장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죠.

로쟈님의 설명에서도 여전히 fools가 왜 등장하는지는 설명이 필요한 사실이지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어려운 해설이 필요한 곡예"가 있어야 할 테고요. 갑자기 아무런 상관없이 이야기를 끌여들이면서 책을 끝냈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제가 보기에는 훨씬 더 어려운 해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로쟈님 방식을 따를 경우 그러한 해설이 어떻게 가능할지 짐작도 할 수 없으니까요.) 또한 로쟈님의 해설에서, believe in 구문의 유사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도 전/혀/ 분명하지 않습니다. X를 믿는다는 것과 X를 포함하는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니까요.

제 생각으로는 로쟈님이 believe in의 내용으로 our relations가 있다고 오해하셔서 그러한 잘못된 "해설"을 제시하셨던 것 같습니다.

armdown 2005-09-29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습니다. 문법상의 명백한 오류들은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제 홈페이지를 통해 바로잡겠습니다. 그밖의 사소한 정황들은 나중에 시간이 될 때 밝히고 또 해설하겠습니다. 바보들의 문제 잘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

lefebvre 2005-09-27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보들의 문제 잘 풀어보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장은 좀 빈정 상하는 표현이군요. 라이크만이 (간접) 인용한 들뢰즈의 문장은 Cinema 2: The Time-Image, p.173.[Cinéma 2: l'image-temps, p.225.]에 나옵니다. (물론 뉘앙스의 문제이긴 하지만) "잘 풀어보라"라는 말은 마치 수수께기를 낸 문제제출자의 태도 같군요. "나는 아는데 너희는 모르냐?" 식의......흠......

paby 2005-09-27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보았는데, 문제의 구절을 새로 번역하신 부분을 추가하셨군요. 그런데 그 번역은 오역입니다. "간단한 상식"에 따르면, 대쉬(-) 이후에 나오는 문장은 대쉬 앞의 문장을 설명하는 기능을 담고 있지요. "하지만"의 뜻을 넣어서 번역될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번역되려면 반/드/시/ "but" 따위의 말이 있어야 하지요.) 로쟈님의 설명을 고집하시려다 보니 그런 "난해한 독해"가 생기고 결과적으로 오역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paby 2005-09-2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ps.도 있었군요;; 어쨌거나 이젠 지난 문제가 되었네요. 참고로 "Platon"과 "Aristoteles"는 "국적불명"이 아니라 그들의 원래 이름을 로마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그런 표기를 병기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말이죠.)

로쟈 2005-09-2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려나 Paby님의 지속적인 관심/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문법적/축어적 의미가 통하지 않을 때는 의미가 통하도록 어떻게든 비틀어보는 성향이 있는데, 간혹 그런 게 안 통할 때도 있지요.^^ Platon과 Aristoteles가 음역 표기라는 건 다 아는 얘기입니다. '국적 불명'이란 그게 '영어'도 아니고 '불어'도 '한국어'도 아니란 것입니다(단, 불어로도 Platon이라고 표기하는 듯하지만, 그때는 '음역'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고유명사의 원어 병기는 혼동의 여지가 있거나, 생소할 경우에 해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혹은 정식으로 소개할 경우(풀네임과 생몰연대를 같이 적을 경우). 제가 철학 번역서들을 읽으면서 가장 짜증스러울 때는, 그런 경우들에 해당하지 않으면서 '플라톤(Platon)', '칸트(Kant)', '헤겔(Hegel)' 등으로 병기해줄 때입니다. 그러한 표기는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으면서 '철학자연' 혹은 '철학서연'하는 티를 냅니다. 저는 그런 태도를 혐오합니다...

paby 2005-09-28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드릴 사람은 오히려 저지요. 이런 식의 귀동냥을 통해서 얻는 것도 적지 않은 것 같거든요. 제가 참견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참견하지 않는 경우에도요. 참고라고 끝에 붙인 것은 사족이 되어 버렸네요^^ 사실 저도 "칸트(Kant)" 이런 식의 병기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에 대한 거부감이 로쟈님만큼 크지는 않은 것 같지만요. 다만, 그런 문제는 그것이 "국적불명"인가 아닌가와는 좀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굳이 국적을 찾는 것이 문제라면, "Platon"과 "Aristoteles"는 "Kant"나 "Hegel"처럼 독일어라고 하면 되잖아요^^;;;

palefire 2005-09-29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마지막이 머리에 와닿았던 - 저는 이 책을 원서로 접할 때 5-6장, 특히 6장을 흥미롭게 읽었었기에 - 저로서는 이런 논의들이 이어진게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jaewoni님(제가 누군지 아시겠죠?)이 적절히 잘 지적해 주셨네요. '세계에 대한 믿음'은 영화와 사유의 관계, 영화의 내재적 형식뿐 아니라 영화의 윤리적 존재에 대한 들뢰즈의 속내를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어쨌든(저는 아직 국역본을 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문단을 다시 보니 [시간-이미지]의 7장(로자님도 인용하신 그 부분은 7장 제2절의 마지막 문장들입니다. '사유의 무력함'에 대해 모던영화가 대응하는 방식들을 논하고 있죠')의 맥락에서 - 좀 더 포함하자면 '통제사회'론과 [시간-이미지]결말부의 연관성에서 - 쓰인 부분입니다. 저자가 직접인용부호를 달아주었다면 더욱 친절했겠지만, 저자가 이 문단의 처음을 열면서 특별히 따온표를 단 'belief-in-the-world'(belief=croire)가 [시간-이미지]와의 연관성을 알려주는군요.

palefire 2005-09-29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이 경우 로자님도 수긍하신 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역자의 번역이 맞습니다. 다만 이 부분에서 저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보완하고 있는 맥락들을 역주로 개입했다면 좀 더 친절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바보들'에 대해 로자님같은 탁월한 주석자-교정자님도 의문을 표시했을 정도니까요. 역주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던 듯합니다. paby님이 의문을 표하신 '우리가 아직 생성하고 있을 지 모르는 것'과 '바보들을 포함하는 세계'는 서로 다른 대상입니다. 전자는 잠재성의 차원이고 후자는 커뮤니케이션과 '정보'가 창궐하는 통제사회의 상황 일반을 가리킵니다. 바보들([시간-이미지]의 영역본과 여기서는 fool, [시간-이미지] 원본에서는 idiot)을 웃게 만든다는 건 바로 통제사회를 맹신하거나 혹은 이를 관장하는 바로 그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로쟈 2005-09-29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네마2>의 국역본을 어제 저도 읽어봤습니다. 흥미로운 대목이어서 곧 '브리핑'을 올릴 생각입니다. 더불어, 아직 다 풀지 못한 의문점들도(idiot와 fool에 관련된 것인데, 둘이 같은 뜻인가요?)...

yoonta 2005-09-29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아니었으면 모른채 넘어갈뻔 했던 오류들이 많이 수정된 거 같네요. 김재인님 홈피에서 보다 여기서 그 책의 수정을 보는게 빠르다는건..좀 문제가 있는 거 같네요. 한가지 아쉬운건..번역에 대한 지적보다는 라이크만의 책 내용에 대한 로쟈님의 견해가 더 듣고싶은데...그건 없네요..^^

로쟈 2005-09-29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 끝에서 사정 얘기를 약간 언급했는데, <디알로그>까지 마저 읽게 되면 리뷰를 쓸 계획입니다. 주제는 (1)들뢰즈의 경험론, (2)들뢰즈와 정치, (3)들뢰즈와 영화이며, (3)은 당장 기약할 수 없지만, (1), (2)는 이번 가을에 쓸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대단한 분량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yoonta 2005-09-29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군요...기대하고 있겠습니다..^^

lefebvre 2005-10-01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lefire 님/ 음......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분은 혹시 맞으시다면, 연락 좀 주시겠습니까? 저희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나요? ^^;;
 

 

 

 

 

"들뢰즈와 '하나의 삶'"에 이어지는 브리핑이다. 지난번에 나는 <들뢰즈 커넥션>의 5장 전반부(143-163쪽)를 주로 검토대상으로 삼아서 이 책의 번역과 교정이 좀더 꼼꼼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에 유감을 표했었다. 하지만, 이어서 제시한 일부 오역의 사례들이 그러한 유감/결론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란 반론도 제기됐었다. '부당한 지적'이란 역자의 반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능하다. 그러한 반론에 답함과 동시에 내가 근거없는 유감을 표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밝혀두기 위해서 5장의 나머지 후반부(163-192쪽)에서의 '오역', 혹은 번역에 대한 나의 '이견'을 제시하도록 한다(시간/분량 관계상 내용에 관한 정리는 생략한다. 해서 이 글은 '브리핑 없는 브리핑'이 될 것이다). 참고적으로 말해두자면, 다른 장들보다 더 많이 눈에 띄는 건 사실이지만, 특별히 5장에만 오역이 집중돼 있는 것은 아니다. 

-163쪽. "우리는 우리 자신을 라이프니츠의 '모호한 아담' 또는 스피노자의 '독자적 본질'로 보거나 또는 각자 하나의 무의식을, 독자화하는 불특정의 무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만 한다." 여기선 굵은 글씨 부분이 더 들어가야 한다.

-164쪽. "저 '특성없는' 자들은 '자신을 재인지'하기 위한 직접화법을 더 이상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접화법'은 'direct speech(narration)'이 아니라 'straight narratives'를 옮긴 것인데, 둘이 같은 뜻인지 의문이다. '직접적인 이야기(서사)'란 뜻 아닌가? 이어지는 문장: "이 상황에서 복잡화하는 만남은 사건들이 펼쳐지는 기본절차로서의 동일시하는 재인지를 대체한다." 원문은 "In this situation, complexifying encounter replaces identifying recognition as a basic procedure through which events unfold."(92쪽) 'A replace B as C'는 'A가 B를 대신해 C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사전에 다 나온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는 'A=복잡화하는 만남', 'B=동일시하는 재인지', 'C=사건들이 펼쳐지는 기본절차'이다. 역자는 B와 C를 동일시해버렸는데,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내다버린 격이다.

-164쪽 마지막 문장. "따라서 들뢰즈는 '타자들과의 구체적인 관계'에 대한 사르트르의 초상에 대해 쓸데없는 열정이라고, 불가능한 재인지를 향한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원문은 "Thus he[Deleuze] takes issue with Sartre's portrait of  'concrete relations with others' as a futile passion, rooted in a desire for an impossible recognition, saying that it preserves the very notion of subject and object(...)"이다. 역자는 '사르트르의 초상'을 'concrete relations with others'으로만 봤는데, 나는 "Sartre's portrait of  'concrete relations with others' as a futile passion, rooted in a desire for an impossible recognition"까지라고 본다.

'take issue with'는 '-와 의견이 맞지 않다', '대립하다'란 뜻이며,  'take A as B'처럼 'A를 B로 간주하다'란 뜻으로 쓰이지 않는다(사전에 그런 용례가 없다). 더구나 '부질없는 수난(futile passion)'이나 '불가능한 인정을 향한 욕망(desire for an impossible recognition)' 같은 건 사르트르의 관용구 아닌가? 따라서 다시 옮기면, "들뢰즈는 '타자와의 구체적 관계'를 불가능한 인정을 향한 욕망에 뿌리를 둔 부질없는 수난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트르트식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역자에 따르면, 사르트르가 '타자들과의 구체적인 관계'에 대한 '쓸데없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설마 '타자의 지옥'을 얘기한 사르트르가 그랬을까?

-170쪽. "들뢰즈가 '상대적 탈영토화'라 부르는 것에서처럼, 뭔가 그것을 역동일성이나 역국가로 '보상'하는 것이 필요할지라도 말이다." 원문은 "(...) it is necessary to 'compensate it with a counteridentity or counternation, as in what he calls 'relative deterritorialization'"(96쪽) 'compensate A with B'는 'A를 B로 상쇄하다'란 뜻이다. '-에 대해서 보상하다'에 해당하는 것은 'compensate for'이다. '보상'과 '상쇄'를 동의어로 본다면 할 수 없지만.

-170쪽.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은 것"은 "not to be unworthy(indigne) of what happens to us."을 옮긴 것인데, 'not'은 어디로 간 것인지? 이 스토아학파적인 '실천적 물음'은 4장에서도 한번 나왔었다.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게 되지 않을 수 있는가'"(100쪽) "how 'not to be unworthy of what happens to us.'"(51쪽) 같은 원문을 옮긴 것인데,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은 것'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게 되지 않는 것'이 같은 뜻인가? 뒷문장이 맞게 옮긴 것이지만, 우리말로서는 '괴이하다'.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걸맞지 않을 수 없는가"로 옮길 수는 없는 것일까?

-175쪽. 푸코와 관련된 대목들에서 역자는 'disciplinary'를 '분과적'이라고 옮겼는데, 푸코의 텍스트를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미심쩍다. 가령 각주 39)에서 "푸코에게 도시 인구통계학의 문제는 분과의 형성을 야기하는 문제들의 핵심 원천이다."라는 문장은 "For Foucault, problems of urban demography supplied a key source of the problems that led to the formation of the disciplines."(161쪽)을 옮긴 것인데, 역자는 62쪽에서 'disciplines'을 '훈육'이라 옮긴 바 있다("들뢰즈는 푸코가 훈육 분석에서 진단했던 것과는 다른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물론 단어의 뜻은 문맥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것이지만, 나는 이 두 문맥이 서로 다른 것인지 의심스럽다. 같은 각주에서 'the politics of health'를 '보건의 정치학'이 아닌 '건강의 정치'로 옮긴 역자의 감각을 믿어야 하는지도.

-179쪽에서 흄의 개념 'conventions'를 (앞장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협약'으로 옮겼는데, 이 또한 맞는 것인지 궁금하다(흄의 책을 찾아 읽어야 하나?). 흄은 자아(self)라는 걸 '나'라고 말하는 습관에서 파생된 '사회적 협약'의 산물로 보는데, '협약'보다는 '관습'이란 역어가 더 적당한 것이 아닐까?(즉 '자아'는 '관습'적인 것이다) 들뢰즈가 경탄하는 게 "흄이 이렇게 고전적인 계약이론에서 벗어나서 그 대신 정부의 '신뢰성'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방식"이라고 한다면, '협약' 개념이 어떻게 고전적인 '계약이론'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인지? 영국 경험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선 상식에 근거하여 그런 의문을 갖게 된다.

-179쪽. 하단부에서 폭력에 관한 대목들인데, "이 잠재적 폭력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이해관계나 선택들의 다소간 '합리적인' 배열을 통해 단순하게 정착될 수 없는 문제다." 같은 문장은 우리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폭력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단순하게 정착될 수 없는 문제다."? 물론 '정착되다'는 'be settled'의 번역인데, ('be settled down' 정도라면 모를까) 여기서는 '진정되다' '가라앉다' 정도의 뜻이겠다. 그런 정도의 수단들로는 진정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 이어지는 문장: "공동체도 사회도 그것을 포함할 수 없는 것이다."("neither Gemeinschaft nor Gesellschaft can contain it.") 여기서 '그것'은 '폭력의 문제'이다. 폭력의 문제를 포함할 수 없다? 우리말로 이상하면 한번 더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contain'은 '포함하다'란 뜻 외에도 '억제하다(restrain)'란 뜻을 갖고 있으며, 여기선 그런 뜻이어야 말이 되지 않을까?

-183쪽.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국가의 기원으로 보는 '홉스의 허구(fiction)'는 '홉스의 가설'로 옮기고 싶다. 이건 그냥 내 취향이다.

-186쪽. 칸트에 관한 내용인데, "칸트는 '법' 및 복종에 대한 법의 '정언적' 요청의 주위를 '선'이 돌고 있는 것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그런 복종에서 '도구적' 세계로부터의 자유의 원천 또는 목적이나 그것의 '가언적 명령을 발견한다." 원문은 "He[Kant] proposed to see the Good as revolving aroung the Law and its 'categorical' call for obedience, finding in such obedience the source of a freedom from the 'instrumental' world or ends and its 'hypothetical' imperatives."(107쪽) 문제가 되는 것은 finding의 목적어이다. 역자는 'the source of a freedom or ends and its 'hypothetical' imperatives' 전체를 목적어로 보았지만, 나로선 'the source of a freedom'만 finding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나는 '도구적 세계'와 '목적들 및 그 가언적 명령들'을 동의어로 보는 것이고, 정언적 명령에 대한 복종에서 칸트는 그러한 것들로부터의 '자유의 원천'을 발견했다는 얘기. 역자를 따르자면, '그런 복종'(=정언적 명령에의 복종)에서 '가언적 명령'을 발견한다는 것이 되는데, 말이 되는 것인지? 적어도 내가 아는 칸트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다(상식을 '상투적 지식'으로 정의하는 역자는 의견이 다를 수 있으므로 나의 무지를 깨우쳐 주시기 바란다). 

-187쪽. 안티고네 얘기인데, "가령 우리는 안티고네를 개별적 법들이나 도시의 선에 항상 앞서는 이 '법'과 우리가 그것에 영향을 미치려 할 때 일어나는 일을 극으로 표현한 여성 인물이라고 읽을 수 있다." 원문은 "one might read Antigone, for example, as a feminine figure who dramatizes this Law that always precedes the particular laws or the good of a city, and what happens when one tries to act upon it."(108쪽) 역자는 'act upon'을 '영향을 미치다'로 해석했는데(물론 그런 뜻도 있다), 여기서는 문맥상 '-에 따라서 행동하다'란 뜻이다. <안티고네>는 여주인공이 개별적인 법(law) 혹은 도시의 선에 반해서 그 대문자 법(Law)에 따라 행동하려고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극화한 작품이므로...

비록 주의하고자 했지만, 사소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지적들, 그래서 부당하고 편파적인 지적들을 이 글은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171쪽에서의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자면) 부득불 "타자를 위해 말하는 것의 무례함(indignity of speaking for others)"을 또한번 범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무례함'은 잘못된 '표상'이나 '동일시'에 묶이지 않는 "나와 우리를 말하는 새로운 습관(new habits of saying I and we)"을 우리가 발명해내기까지는 감수해야 하는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혹 역자의 주변에 예의바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좀 무례한 이들도 있었더라면, 역자의 바람대로 <들뢰즈 커넥션>이 들뢰즈 사상에 대한 '중요한 입문서' 역할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런 역할이 포텐셜로만 머물고 만 것 같아서 거듭 유감스럽다...

05. 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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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5-09-11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요일에 왠일이십니까? 쏟아지는 바쁜일 때문에 학교에 나오신 것인지?
대문의 그림이 바꼈군요.

로쟈 2005-09-1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락까지 싸들고 왔습니다(흑흑)... 그림은 러시아 출신 화가 야블렌스키의 얼굴 시리즈입니다. 아주 오래전 러시아 아방가르드 전시회때 어느 미술관에서 전시된 적도 있었던 듯. 제가 좋아하는 그림들입니다...

armdown 2005-09-2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잘 보내셨는지요...언급하신 몇몇 대목들은 명백한 잘못으로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부당하고 편파적인 지적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제 홈페이지에서 몇 가지 언급을 하려다 말았는데(건강이 심히 좋지 않아 한 달 이상을 거의 외부 활동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 이 자리에서도 반론 또는 답변을 달기는 어렵군요. 제가 편파적이라 한 까닭은, 이 책 원서 자체가 담고 있는 많은 오류들을 하나하나 잡아내며 번역한 '공'(이것이 과를 용납케 하는 빌미가 되지는 않지만)은 전혀 언급도 없이 '과'만을 언급해서 독자들이 오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기대가 컸기에 실망이 크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고, 제 불찰이기에 앞으로 더 잘하도록 격려하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지적 중에서 받아들일 만한 것들은 제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할 터이니 그것을 답변으로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쟈 2005-09-22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이 안 좋으셨군요. 속히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역자의 '공'에 대해서 제가 둔감했다면, 제가 '원서 자체가 담고 있는 많은 오류들'을 짚어낼 만한 안목을 갖고 있지 않아서일 겁니다(제가 발견한 건 원서 인명에서의 오타가 하나 교정된 것뿐입니다). 이 점은 양지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는데, 그러한 '많은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라이크만이 책은 '좋은 책'이며 훌륭한 입문서인가요? 더불어, 원저자의 오류가 교정된 대목에서는 역자가 개입해서 지적하고 교정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 아닐는지요?(독자가 역자의 '공'을 스스로 헤아려야 한다는 건 일반적이지 않은 요구 같습니다.) 역주가 적게 붙어 있는 번역서도 아닌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