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그러니까 지난해에 주문했지만 해를 넘겨서 받게 되는(배송중이다) 책은 사이먼 재럿의 <백치라 불린 사람들>이다. ‘백치‘란 말은 자동적으로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떠올리게 하는데 책은 문학보다는 역사를 다룬다(문학작품도 자연스레 언급되겠지만). ‘지능과 관념 · 법 · 문화 · 인종 담론이 미친 지적 장애의 역사‘가 부제.

제목 때문에 같이 떠올리는 건 아비탈 로넬의 <어리석음>이다. 지적 장애의 역사에 철학적 성찰을 보탤 수 있겠다.

˝얼핏 보기엔 어리석음을 논한 서양의 다양한 저작을 새롭게 읽는 형식이지만 어떤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거나 일정한 주제에 따라 묶여 있지는 않다. 여기에 핀천, 도스토옙스키, 워즈워스의 작품들에 대한 비판적 읽기가 더해지고, 칸트, 키르케고르, 워즈워스에 대한 명상은 위성이라는 명칭 아래 별도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읽어서 핀천의 책은 무얼 다뤘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도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올해 미국문학강의를 진행하면 다시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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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바디우의 주저 <존재와 사건>을 읽기 위하여, 내지는 <존재와 사건>과 관련한 잡담 정도의 페이퍼다. 물론 길게 늘어놓을 시간은 없으니 짧게. 계기는 박영진의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이다. 부제가 '알랭 바디우의 <진리의 내재성> 읽기'. <진리의 내재성>은 2018년에 나온 책으로 아직 국역본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그런 상황에서 '읽기'는 그냥 '시식' 혹은 '시음'에 대응하는 '시독' 정도의 의미가 있겠다). 바디우의 원저 <진리의 내재성>은 부제가 '존재와 사건3'이다. 
















저자는 라캉과 바디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소개되는데, 앞서 라캉과 바디우에 관한 저역서를 몇 권 출간했다. <사랑, 그 절대성의 여정>은 그 연장선상에 놓인 책. 그런데 부제 때문에 <존재와 사건>의 출간현황을 확인해보았다. 영어로는 세 권의 모두 번역돼 있다. 
















반면 국역서는 현재로선 <존재와 사건> 하나뿐이다(벌써 10년 됐군). 아직 절판되지 않았지만 가격이나 분량이나 쉽게 엄두를 내기 어렵다. 
















거기에 입문서나 입문서로 삼을 만한 책도 나와 있다. '독자'로서는 다른 책들이 밀려 있기에 순서를 미뤄둘 수밖에 없지만, '수집가'로서는 나머지 2, 3권도 번역돼 나오길 기대하게 되는데,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바디우 책과 관련해서는 특이한 출판사에서 매우 어렵게 출간했다가 절판시키고는 하는데, <가끔씩 우리는 영원을 경험한다>도 지난봄에 (알게모르게) 번역본이 나왔다. 처음 나왔던 <모호한 재앙에 대하여>가 제목 그대로였던지라 구입은 보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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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에 예술론 강의에서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를 읽었고, 이번주부터는 <미를 욕보이다>를 읽는다. 강의자료를 만들다가 자연스레 앤디 워홀의 책들에도 눈길을 주게 된다. 더불어 단토의 책도 몇 권 더.


 













예술론 강의에서는 단토 입문격의 책으로 마지막 저작 <무엇이 예술인가>(2013)를 읽고, <예술의 종말 이후>(1997)를 다루었는데, <미를 욕보이다>(2003)는 그 사이에 발표된 책이다. 이어서 <앤디 워홀>(2009)을 읽을 수 있지만, 국내 번역서 <앤디 워홀 이야기>는 유감스럽게도 청소년 위인전으로 변조된 엉터리책이다. 단토의 <앤디 워홀>은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쳐야 하기에, 워홀에 대해서는 다른 책들을 따로 봐야 한다. 














워홀 소개서들을 제외하고 살펴보니 그래필 노블로 나온 <앤디 워홀>이 있다. <앤디 워홀의 철학>과 <앤디 워홀 일기>는 앞서 나온 책들. 
















단토에 관한 책으로는 <아서 단토: 팝의 철학자>도 있는데(비교저 얇은 책이다), 그의 <앤디 워홀>과 짝이 될 만하다. 단토는 팝아트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예술운동으로 평가하고 있기에(예술의 종말론이 바로 팝아트에서 이끌어내는 주장이다) '팝의 철학자'라는 별칭도 어색하진 않다. <미를 욕보이다>와 함께 읽어보려 한다. 















국내에 소개된 단토의 책 가운데 나머지는 주요 저작에 포함되는 <일상적인 것의 변용>과 <철학하는 예술> 등이다. <철학하는 예술> 등은 절판되었고 번역도 좋지 않아서 별로 의미가 없다. 대신 단토 사후에 나온 유작과 연구서들이 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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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이자 주말이었던 어제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마지막 주문들 가운데 하나는 배송이 월요일로 넘겨졌다) 마사 누스바움의 <연약한 선>이다('Nussbaum'은 여러 표기가 경합했는데 '누스바움'으로 안착되는 듯하다). 1947년생인 저자의 첫 주저로 1986년에 초판이 나왔고 15년 뒤인 2001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국내 소개된 20권쯤의 저서 가운데서도 가장 앞서는 책이면서 누스바움의 이력에서도 출발점에 해당하는 책(1971년부터 초고를 썼다고 한다. 대학원시절이었겠다). 개인적으로 두꺼운 원서를 일찌감치 구해둔 책이어서 번역서의 출간이 반가웠다. 
















누스바움의 책으로는 2021년에 나온 신작 <교만의 요새>도 최근 번역돼 나왔으니, 대략 시작과 끝에 해당한다고, 적자마자 확인해보니 1월에 <동물을 위한 정의>가 예고돼 있다. 75세라는 나이를 고려하면 아주 정력적이다. 


내가 처음 만난 누스바움은 <시적 정의>의 저자이면서, 애국심론과 역량론의 저자였다. 고전학자 누스바움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연약한 선>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이후에 주로 동정, 연민, 혐오, 수치, 분노 등의 감정에 대한 책들이 국내에 주로 소개되었다. 40권에 가까운 전체 저작이 다 소개되진 않을테고 다 읽을 만한 여력도 갖고 있지 않지만 <연약한 선>에 대한 독서를 앞두고(2023년의 첫 관심저자가 내겐 누스바움과 앤디 워홀이다. 물론 강의와 직간접으로 연관돼 있는 저자들이다) 누스바움의 주요 저작을 연대기적으로 따라가본다. (위키피디아를 참고하면) 여섯 권이다. 


<연약한 선>(1986/2001)






 










<인간성 수업>(1997)

















<성과 사회 정의>(미번역)
















<혐오와 수치심>(2004)















<혐오에서 인류애로>(2010)
















<역량의 창조>(2011)
















대략 주제별로 안배돼 있는데, 나로선 <정치적 감정>(2013)도 주요 저작으로 꼽고 있다. 국내에는 <감정의 격동>과 <분노와 용서> 등도 번역돼 있다.  
















미국의 대표적 여성 인문학자(미국의 첫 여성 고전학자다)로서 누스바움의 경험과 학문적 이력은 표본적 의미를 갖는다. 비록 7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고전학계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지만, 현재는 세계적인 석학으로서의 평판을 누리고 있으며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2018년에는 베르그루엔 철학상을 받기도 했다(2016년부터 시상된 상으로 '철학의 노벨상'이라고도 불린다. 상금이 100만달러이며, 지난해 수상자가 일본의 가라타니 고진이다. 참고로 첫 수상자는 캐나다의 찰스 테일러였고, 누스바움은 미국의 첫 수상자였다. 여성으로서는 2017년 영국의 오노라 오닐에 이은 두번째 수상자). 
















덧붙이자면, 누스바움이 고전학자에서 출발하여 인문학 전반과 사회적 정의의 문제로까지 관심을 확장해나가는 중요한 계기가 된 건 인도 출신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과의 만남, 그리고 협력이었다. 센의 저작들도 같이 참고할 필요가 있다. 아래 사진은 1992년의 누스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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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남편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은 아내

2년 전 페이퍼다. 러시아 중단편 읽기가 해를 넘기게 됐는데 조셴코와 도블라토프의 작품은 이미 지난달에 읽었다(여성작가들을 남겨놓고 있다). 절판된 책들도 있어서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 기약할 수 없는 날들이 그렇게 또 지나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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