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의 일정을 소화하고 집에 돌아오니 이 시간이다. 아니 '소화'에는 시간이 좀더 필요하겠다. 책과 복사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상에는 신문지도 몇 장 얹어져 있는데, 스크랩을 해둔다고 미뤄놓은 것들이다. 일단 하나만 옮겨놓는다. 이달초 방한했던 홀거 하이데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이다(굳이 분류하자면 전공은 경영학인 모양이다). 한국의 '집단 트라우마'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와 노동자 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학자라는 점이 이채롭다. 덧붙여,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의 자유를 목줄에 이끌려 산책 나온 강아지에 '적확하게' 비유한 것이 눈길을 끈다(언제 써먹어야겠다!).

경향신문(08. 09. 09) “지구화는 트라우마의 심화과정”

‘지구화’는 자유로운 삶의 확대 과정인가, 트라우마(상처)의 심화 과정인가. 이 물음에 홀거 하이데 독일 브레멘대 명예교수(69·사진)는 ‘지구화’는 자유라는 허상 속에서 심화되는 트라우마라고 답한다.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연구단의 ‘지구화와 문화적 경계들: 탈경계 문화변동 현상의 비판적 재검토’ 국제학술대회(9월 4~5일)를 위해 방한한 하이데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자본과 시장이라는 외부 힘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통해 트라우마를 내면화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 회사 대표가 걱정하던 것들을 이제는 종업원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 우리 나라의 경제가 망하면 내가 끝장난다는 그런 위기감을 개인이 걱정하고 있어요. 그 위기란 그저 돈벌이의 위기일 뿐, 진정 사람 사는 것의 위기와 다를 수 있는데도, 사회는 끊임없이 협력을 요구합니다.”

한국사회의 중장년층에 만연한 일중독 현상이나 과로사는 ‘지구화의 경쟁논리가 하나의 집단적 트라우마로 각각의 개인에 내장되며 벌어지는 병리현상’이라는 것이다. 하이데 교수는 공원에 산책 나온 강아지를 예로 들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자유는 길이가 늘었다 줄었다 하는 목줄에 이끌려 산책 나온 강아지의 자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강아지의 모습이 자유로워 보이죠. 그런데 결국 그것은 주인(자본)의 손아귀 아래에서의 자유일 뿐입니다.” 이 자유는 “폭력적 과정을 겪은 이후 상처 받은 이들의 자유”이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처벌하고, 정신병동에 가두거나 사형으로 완전히 격리시키는 등 근대 자본주의 정착 과정에서 이뤄졌던 폭력적 과정 후에 만들어진 자유”다.

하이데 교수는 상대적으로 한국사회의 집단적 트라우마가 심하다고 했다. “일제식민지와 미군정, 한국전쟁, 군부독재 등을 압축적으로 겪으면서 매우 폭력적인 과정으로 형성됐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민주화됐다고 하는 현 시점에도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법에 의해 일부 사람들을 가두는 것이 집단 트라우마가 강한 사회임을 증명합니다.”

그는 또 한국사회의 집단 트라우마가 대물림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고 했다. “어른들이 직장과 사회 생활에서 받은 압력과 트라우마가 집집마다 아이들에게 전가됩니다. 부모 자격으로 자식에게 성적 올리기만 강요하고, 아이들의 진정한 내면적 욕구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가 되는 식으로 트라우마의 악순환이 이뤄집니다.”

이러한 악순환에 대한 돌파구는 근원 모를 두려움, 공포를 인정하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그는 “주위 사람들과 아픔을 나눌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효도, 예의 때문에 아무 말도 못꺼내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맞을 각오로 아이가 자신의 욕구를 말하는 순간 해결 가능성이 생깁니다.”

하이데 교수는 촛불집회가 단적인 예라고 했다. 무엇보다 비폭력성에 주목했다. “내 스스로 진정 강하다고 생각하면 주먹을 보이지 않고 얌전하게 말로 합니다. 대중은 내면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비폭력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또 촛불집회의 자발성도 꼽았다. “힘은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중앙 통제가 아닌 각자 자기를 조직화하고 분권화하는 개별 행동에서 나옵니다. 각자 스스로 움직이니 정권 차원에서도 어떻게 대응할지 당황할 수밖에 없었죠. 일이 벌어질 땐 있지도 않은 ‘배후’ 얘기를 하다가 뒤늦게 검거 선풍을 일으킵니다. 오세철 교수 체포건처럼 뒤늦게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고, 자다가 뒷북치는 행태를 보입니다. 대중의 자기조직화, 자발성이 갖는 강한 힘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하이데 교수는 강한 집단 트라우마 후에 민중이 자기 삶에 대한 책임성을 갖는 자세가 생겼는데, 그것이 촛불집회를 통해 잘 드러났다고 진단했다. 그렇기에 “한국사회에서 아직 희망을 얘기할 수 있다”고 했다.

하이데 교수는
1987년 7월 노동자 대투쟁 때 한국에 처음 온 뒤 한국 자본주의와 노동자 운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저서 ‘노동사회에서 벗어나기’가 국내에 소개돼 있으며, 강수돌 고려대 교수가 그의 제자다. 이날 인터뷰도 강 교수의 독일어 통역으로 이뤄졌다.(손제민기자)

08. 09. 14.

 

 

 

 

P.S. 기사 덕분에 강수돌 교수의 책들을 검색해봤다. <경영과 노동>(한울, 1997/2002), <노동의 희망>(이후, 2001), <일중독에서 벗어나기>(메이데이, 2007),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생각의나무, 2008) 등의 리스트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찾아보니 <신자유주의 IMF 그리고 국제연대>(문화과학사, 1998)에도 '세계시장, 신자유주의 , 그리고 살아있는 연대' 란 제목으로 하이데 교수가 쓴 글이 포함돼 있다. <당대비평>(2003년 여름호)에는 '노동중독에서 탈출하기: 노동조합은 노동중독 사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란 글이 실려 있다. 몇 차례 방한하기도 하여 한국과는 인연이 깊은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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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4 2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4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명절 대이동'에 동참한지라 책을 읽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어서 인터넷 서핑이나 하고 있다. 읽어볼 만한 신간들도 찾아보게 되는데, 우선 순위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한 책에 '전 세계 권력 지형에 대한 비판적 조망'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대담집 <역사로서의 현재>(모티브북, 2008)가 있다.

 

네르멘 샤이크란 저자의 이름은 생소한데, "아시아 소사이어티 연구원 네르멘 샤이크가 수년에 걸쳐 아마티아 센, 헬레나 노르베르-호지 등 세계적인 석학들을 만나 현대 권력과 국제 정치학이 그려내는 전 세계 권력 지형에 대해 인터뷰한 것을 묶은 대담집이다. 국제 문제의 근원이 되는 광범위한 역사적.정치적.경제적 맥락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한다"고. 찾아보니 간단한 소개기사 하나 정도가 떠 있을 뿐이다(요즘은 웬만한 분량의 소개로는 출판사 소개보다 빈약할 경우가 많다). 저자가 (짐작에는) 파키스탄 출신이라 대담자에 이슬람쪽 지식인이 많이 포함돼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이 아닌가 한다.   

동아일보(08. 09. 13) 세계적 석학 13명이 말하는…‘역사로서의 현재’

미국 뉴욕의 아시아 소사이어티 연구원 네르멘 샤이크 씨는 최근 몇 년에 걸쳐 세계적 석학 13명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인도 출신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과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스웨덴 출신의 생태환경연구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란의 인권운동가 시린 에바디 등 면면이 쟁쟁하다. 석학들이 인터뷰에서 각각 세계경제, 페미니즘, 인권, 환경, 이슬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털어놓은 이야기들을 묶은 책.

빈곤 연구의 대가인 센 씨는 “단순히 경제만 성장시키는 개발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능력을 확대시킴으로써 자유를 확산시키는 개발이 돼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단순히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개발이 아니라 인간적 부를 증진시키는 개발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

스티글리츠 씨는 1997년 아시아의 금융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이 월스트리트의 이익을 위해 동아시아의 약화를 꾀했다는 음모론에 대해 “이해관계에 있는 모두를 음모의 배에 승선시킬 수 있다고 생각지 않으며, 많은 이들은 강한 동아시아가 세계 경제와 미국에 긍정적이라고 믿는다”고 반대 의견을 밝혔다.

미국 뉴 아메리칸 파운데이션의 선임연구원 아나톨 리벤 씨는 미국 민족주의의 특징으로 ‘여러 나라에 빛을 비추는 나라라고 믿는 메시아주의(messianism)’를 꼽았다. 이 믿음은 평소에는 수동적이지만 9·11테러 같은 공격을 받으면 적극적 형태로 바뀌어 세계를 미국화하려는 욕망을 나타낸다고 그는 지적했다.(금동근 기자)

08. 09. 13.

P.S. 참고로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1부 세계 경제
1장 아마티아 센Amartya Sen - 15
2장 헬레나 노르베르-호지Helena Norberg-Hodge - 39
3장 산자이 레디Sanjay Reddy - 57
4장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 97

2부 탈식민주의와 신제국주의
5장 파르타 차테르지Partha Chatterjee - 123
6장 마흐무드 맘다니Mahmood Mamdani - 159
7장 아나톨 리벤Anatol Lieven - 185

3부 페미니즘과 인권
8장 시린 에바디Shirin Ebadi - 231
9장 릴라 아부-루고드Lila Abu-Lughod - 239
10장 사바 마흐무드Saba Mahmood - 249
11장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 - 287

4부 세속주의와 이슬람
12장 탈랄 아사드Talal Asad - 341
13장 질 아니자르Gil Anidjar -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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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부키, 2008)가 거의 20년만에 다시 나왔다. 첫 번역본 <레이스 뜨는 여자>(예하, 1989)의 역자인 이재형씨가 손을 더 보아서 냈는데, 덕분에 잠깐 2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을 했다(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과 함께 이 책을 읽던 부대 관사의 당번병 방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1989년이었다). 젊은 독자들에겐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책은 "콩쿠르 수상작이자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영화 <레이스 뜨는 여자>(1977)의 원작 소설"이다. "얀 베르메르의 동명의 그림(하지만 '레이스 짜는 여인'으로 표기된다)에서 제목을 따온 이 소설은 문학이 씨줄로, 철학과 사회학, 심리학이 날줄로 엮혀 있는 프랑스 현대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개인적으론 이자벨 위페르와 관련한 페이퍼들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http://blog.aladin.co.kr/mramor/1548659 참조). 반가운 마음에 자료를 찾으니 바로 얼마전에 장석주씨가 쓴 '독서일기'가 있어 스크랩해놓는다.  

 

뉴스메이커(08. 08. 20) 뽐므는 정말로 ‘흔해 빠진 여자’일까?

프랑스 낭테르 대학에서 남학생의 여학생 기숙사 출입을 막는 데 따른 불만에서 촉발한 시위는 5월 한 달 동안 프랑스 전역에서 대학생 시위와 1000만 노동자의 대규모 파업으로 번진다. 불이 산소를 만나 타오르듯 냉전과 베트남전과 같은 시대의 화두를 끌어안으며 젊은이들을 저항과 해방의 열망으로 타오르게 했다. 그러나 ‘68혁명’은 하나의 이념과 기획으로 묶을 수 없다. 모든 금지에 대한 저항, 구속 없이 즐기는 삶에 대한 열망이 그 이념과 기획을 대체했다. 궁극적으로 낡은 정치체제와 신체에 가하는 낡은 도덕 관습들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이었다.

‘68혁명’의 거센 불길이 지나간 뒤에 남은 것은 마리화나와 히피, 마오주의(Maoism), 그리고 성의 해방이다. 그 중에서 마오주의는 최악의 유산으로 꼽혔다. 젊은이들 사이에 번진 파시즘 독재자에 대한 이상한 열광은 이해할 수 없었다. ‘68혁명’에 대한 평가는 낡은 도덕과 정치체제를 새것으로 바꾸려는 ‘혁명’이거나, 혹은 무질서와 파괴로 얼룩진 재앙이라고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분명한 것은 ‘68혁명’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대중의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는 점이다. 그 움직임은 국가와 권위에서 오는 일체의 통제와 억압에 대한 저항이고, 혹은 하나로 묶일 수 없는 다양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만든 사건의 연속체였다. ‘68혁명’은 저렇게 다른 목소리들이다. 다양한 차이 안에서 그 목소리는 변화하려는 열망과 그 극단을 드러낸다. 그 목소리는 조직되지 않고, 기성 조직에 기대지도 않는다. 그 목소리는 신체를 포획하는 그 무엇을 스스로 바꾸고자 하였을 뿐이다.



파스칼 레네는 ‘68혁명’의 중심을 가로질러 나온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이자 소설가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레이스 뜨는 여자’는 ‘68혁명’의 여진(餘震) 속에서 씌어진, ‘68혁명’이 지핀 변화를 향한 열망이 스민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68혁명’이 젊은이들의 의식과 행동에 어떻게 스며들고 변화의 무늬를 남겼는지를 찾아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그들은 확실히 ‘68혁명’ 이전 세대와는 무언가 다를 것이다. ‘금지만이 금지된다’ 혹은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라는 ‘68혁명’의 강령을 간접적이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체화해낸 세대는 성에 대한 낡은 도덕적 관습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녀는 매일 밤 그렇게 하기라도 했듯이, 서두르지 않고 스스로 옷을 벗었다. 그녀는 바지의 주름을 잡아서 의자 등받이에 놓아두었다. 청년은 그런 식의 침착함에 얼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계속되어온, 육체를 향한 그의 육체의 동작의 탐색은 그토록 단순하고 말없는 침착성과 비교할 때 정말 우스꽝스러운 노력이었고 어려움이었던 것처럼 그에게는 보였다. 하지만 그는 뽐므가 평소에는 덜 세심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 앞에서 자발적으로 옷을 벗는다. 스스로 옷을 벗음은 하나의 비밀의식이다.



한 존재란 그 자체로 얼마나 충만한 존재인가. 파스칼 레네가 묘사하는 여주인공 뽐므는 다음과 같다. “충만이란 그 나이(열네 살이라고 해두자)의 여자 아이에게는 적합한 말이 아니지만, 이 아이는 꽉 차 있다는 인상을 즉시 풍겼다. 바삐 움직이거나 앉아 있거나 길게 드러누운 채 꼼짝 않고 꿈을 꾸거나,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거나, 그녀의 정신이 그녀에게서 벗어나 잠시 꾸벅꾸벅 졸거나 간에 그녀의 육체의 존재는 온 방 안에 군림했다. 뽐므, 그녀는 이제 막, 그러나 완전한 동질성과 놀랄 만한 밀도를 갖추고 완성된 것이다. 그녀의 영혼 또한 틀림없이 단단하고 두툼할 것이다. 그것은 그 존재가 추상화한 눈길이나 말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는 그런 사람들의 영혼이 아니었다. 정말 하찮아 보이는 그녀의 움직임과 활동조차도 그녀를 매 순간의 영원성 속에 구현시켰다.”

가난이 진부한 재앙이라면 “완전한 동질성과 놀랄 만한 밀도를 갖추고 완성된” 뽐므의 삶은 진부한 재앙의 억센 손아귀에 잡힌 셈이다. 그러나 가난이나 천직(賤職) 따위는 한 사람의 심오한 본성을 어쩌지 못한다. 그러나 관습의 독재에 빠진 시선은 한 사람을 심오한 본성을 가진 충만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내의를 책임 맡은 하녀’ ‘물 배달하는 여인’ '레이스 뜨는 여자’로 보게 한다. 남자의 시선은 그 여자의 존재로 스미지 못하고 그 여자가 수행하는 직분 위로 미끄러진다. 그럴 때 몸은 소통하지 않고 다만 소비된다.

처녀와 청년은 우연히 만나 성교를 하고, 함께 식사를 한다. 두 존재의 다름은 이내 드러난다. “그들은 제비콩 샐러드를 먹었는데, 청년은 처녀의 의도를 해독할 수 없었고, 처녀는 그런 건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순히 청년과 함께 있는 데, 그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데 만족해했으며, 그래서 그녀는 할 말을 찾아내지 못해서 주눅이 들어 있는 그 청년의 침묵을 불안해하지 않았다.” 처녀는 청년의 존재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마찬가지로 청년 역시 처녀의 존재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요컨대 그들은 동일한 세계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이었다. 한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은 상대방을 만족시키지 못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똑같은 즐거움을 나누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서 태어났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녀가 자기에게 뭘 기대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존재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감은 몰이해와 혐오감으로 나타난다.

청년은 처녀가 이빨 닦을 때 내는 소리, 침대에서 처녀의 발이 제 몸에 닿는 것, 잠든 처녀의 숨소리조차 견디기 힘들어한다. 처녀의 현전 자체가 욕구를 휘발시키고 실망과 유감 속으로 빠뜨린다. “그에게는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뽐므가 일을 끝내고 돌아와 방으로 들어오면, 충만감도, 기쁨도 사라져버렸다. 반대로 그녀의 현전은 그녀에 대한 욕구를 그에게서 앗아갔다. 그것은 매번 변함없이 가볍고 겨우 느껴지면서도 진정한 실망이었으며 똑같은 유감이었다.” 미래의 박물관장인 청년은 어디에나 있는 흔한 처녀를 만나 성교까지 나누지만 처녀 존재 자체에서 오는 실망과 환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약하자면 이 처녀는 그 ‘68혁명’에 대한 하나의 은유는 아닐까. 그리고 청년은 실패한 혁명에서 오는 실망과 환멸에 빠진 그 숱한 자율주의자들, 작가 자신을 포함한 지식인 계급의 표상은 아닐까.

“그런데 그로 말하자면 자아를 기증하려고 하는 그 처녀를 만류할 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잠자기 전에 끄는 것을 잊어버린 전등만큼도 그 촛불에 대해 염려하지 않은 채로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그 작은 촛불이 자기 앞에서 타도록 내버려두었다.” 정욕의 시선들은 어디서나 ‘덮칠 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떠돈다. 타자에게 제 자아를 기증하려는 ‘흔해 빠진 여자'는 잠자기 전에 불 끄기를 잊는 남자의 수만큼이나 희귀하다. 흔한 것은 그 여자를 ‘흔해 빠진 여자’라고 믿는 일방적 해석의 오류에 빠지는 남자들이다.

우연히 만난 처녀를 남자가 ‘흔해 빠진 여자’로 묶을 때 여자는 영원히 남자의 이방(異邦), 바깥에 머문다. 여자를 제 생의 가치 영역에서 배제할 때 남자 역시 여자의 이방으로 전락하는 결과에 이른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날리는, 아주 조금은 비극적인 꽃가루로 비유했던 이 인물을 포착하면서, 작가는 이 인물을 손상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렇게 연약한 존재에 어울릴 만큼 섬세하고 정밀한 글쓰기는 존재할 수 없으리라. ‘레이스 뜨는 여자’는 그녀가 짠 세공품의 투명함 그 자체 속에서 나타나게 해야 할 것이다.”



태생적 배경이 다른 두 남녀의 만남, 동거와 헤어짐, 여자의 거식증과 정신병원행 따위는 흔한 연애소설의 외관을 취하지만 이 소설은 흔한 연애소설은 아니다. 이 섬세하게 연애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시대에 대한 중의적 사유를 덧씌운 ‘레이스 뜨는 여자’는 선택과 배제의 오류에 대한 관찰을 보여준다. 더 또렷하게 말하자면 선택과 배제에 대한 심리적 고찰과 철학적 탐색으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정교하게 짠 레이스와 같이 아름다운 세공품 그 자체인 여자가 가난이나 천직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의 폭력에 의해 비참한 자아로 떨어지는지, 해석의 폭력이 어떻게 여자의 현전이 감춘 감수성, 아름다움, 평온함 따위를 지워버리는지를 묘사한다. 파스칼 레네는 그 묘사를 실패한 혁명이 만든 실망과 환멸 위에 덧씌운다.(장석주)

08.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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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akim 2008-09-13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읽어보네요. 극한 디테일이 주는 각성의 시선과 의식의 깨어남 같은 것. 그러면서 그 눈을 통해 머리속이 환해지는 경험이 오랜 시간을 거슬러 접속되네요. 로쟈님 잘 지내시죠?

로쟈 2008-09-13 08:53   좋아요 0 | URL
바쁜 일은 끝내셨나요?^^

2008-09-13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3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3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3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5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9-15 09:57   좋아요 0 | URL
축하합니다.^^ 이사도 하셨으니 제2의 인생이시겠는데요.^^
 

이번주에 가장 주목한 신간은 지성사가 도미니크 라카프라의 <치유의 역사학으로>(푸른역사, 2008)이지만 아직 별다른 리뷰가 뜨지 않고 있다. 해서 대신에 리좀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된 <들뢰즈와 시간의 세 가지 종합>(그린비, 2008)에 대한 리뷰를 옮겨놓는다. '학술서' 범주에 들어갈 만한 책이지만 뜻밖에도 북리뷰의 메인도서로 다루어졌다. 독특하게도 프로이트를 통하여 들뢰즈의 시간론을 검토하고 있는 책이라 한다. 리뷰를 보고서 알았지만, 저자 키스 포크너는<싹트는 생명>(산해, 2005)의 저자 키스 안셀 피어슨의 제자이고 책은 그의 박사학위논문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학술서'로 분류할 수 있는 근거이다.  

문화일보(08. 09. 12)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다른 차원일 뿐”

“과거와 미래는 현재라고 가정된 순간과 구분되는 어떤 순간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순간들을 수축하는 현재 그 자체의 차원들을 지칭할 뿐이다.” 최근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는 ‘차이’의 철학자로 불리는 프랑스의 들뢰즈(1925~1995)일 것이다. ‘철학아카데미’등 인문학 공부모임들에서는 들뢰즈를 ‘독해’하고자 하는 강좌가 연일 이어진다. 들뢰즈는 새로운 철학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넘어야 할 ‘벽’과도 같이 막막하고 어렵다.

국내에서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쓴 ‘천의 고원’이나 그 전에 나온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주로 접해졌다. 이 책들을 주석서를 통하지 않고 직접 끝까지 읽은 독자가 많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들뢰즈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이자 그의 철학의 바탕이라 할 수 있는 ‘차이와 반복’을 완독한 독자는 더 적을 것이다. 그 중에도 2장 ‘대자적 반복’은 이 책의 저자도 실토하듯이 “전문가들만이 해석할 수 있는 비의적(秘義的) 지식”으로 가득하다. 이런 불친절한 저자가 다시 없다는 ‘울분’(?)마저 치민다.



이 책은 바로 들뢰즈의 ‘시간론’인 ‘차이와 반복’의 2장을 풀어내고 있다. 영국인인 저자 포크너는 들뢰즈로 생명을 탁월하게 설명한 ‘싹트는 생명’의 저자 키스 안셀-피어슨의 제자로 들뢰즈의 시간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다.

우리는 흔히 시간을 일직선 상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로 흐르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이런 시간관은 깨진 지 오래다. 들뢰즈에게 시간은, 짧게 요약하면, ‘수축’을 통해 유지되는 한에서 과거는 현재에 속하며 미래도 똑같은 ‘수축’ 안에서 성립하는 기대이므로 미래 역시 현재에 속한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다른 차원을 지칭할 뿐이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들뢰즈의 시간론은 시간을 통해 주체가 형성된다는 ‘시간적 주체론’이며, 따라서 ‘차이와 반복’은 현대 철학자들이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존재론’이다. 그의 ‘시간론=주체론’은 ‘반복’과 ‘시간의 수동적 종합’이 뇌관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의 시간론은 칸트가 정초한 세 가지 종합, ‘포착-재생-재인’을 변환시킨 것이다. 이같은 세 가지 종합은 직관, 구상력, 오성으로부터 비롯된다. 포착된 외부 대상은 주체에 의해 구성되고 지성적으로 통합되는 ‘능동적 종합’이다. 들뢰즈는 칸트의 ‘능동적 종합’에 ‘수동적 수축’을 추가한다. '수동적 종합’을 알자면 먼저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의 세 가지 층위- 물질적 층위, 수동적 종합의 층위, 반성적 표상의 층위-를 이해해야 한다. 반복의 물질적 층위는 즉자(卽自)의 층위로 물질자체의 반복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시간이 성립하지 않는다. 시간은 계기들의 ‘종합’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자적 반복이 정신에 의해 대자(對自)적으로 종합될 때 곧 반복을 묶거나 수축할 수 있다. 시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있어 이같은 종합은 칸트처럼 능동적이고 의식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 종합’이다. 즉 능동적이고 구성적인 주체 아래에 있는 수동적 자아(애벌레 자아)들이 의식 이전의 ‘관조’를 통해 순간들을 수축하여 ‘살아있는 현재’가 종합된다. 이 시간의 정초인 현재가 흐르고 이행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과거가 동시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현재가 시간의 정초(시원)라며 과거는 현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습관’의 형식을 통해 종합되었다면, 과거는 ‘기억’의 형식을 통해 종합된다. 이러한 두 시간의 종합과 달리 시간의 세번째 종합인 미래는 주체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같이 시간이 종합되는 과정에서 주체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주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시간과 함께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간적 주체가 아니라 시간적 주체인 것이다. “나는 시간이 우리의 감정적인 생활에 추동력을 준다는 것, 항구적인 것으로 보이는 ‘자아’가 잔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거울로서 또는 희미하게 빛나는 반사로서 활동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는 수동적 종합의 정신분석학적 맥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프로이트를 전면에 끌어내고 있다. 국내 독자들은 이 점에서 다소 의아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의 주석서 등을 통해 들뢰즈-가타리는 프로이트를 잡아먹을 듯이 비판해온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을 논할 때 초점이 되는 흄, 베르그손, 니체 이외에 프로이트와 들뢰즈의 연관성을 보지 않고서는 즉 무의식적 층위를 중심으로 다른 층위들이 함께 엮이면서 작동하는 복잡한 주체의 형성과 그로 인한 시간의 발생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들뢰즈와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꼼꼼하게 비교, 독해하면서 어떤 면에 프로이트와 들뢰즈 간에 영향관계가 있는지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분석학의 층위에서 펼쳐지는 들뢰즈의 시간론을 독창적으로 펼치고 있다.(엄주엽기자)

08.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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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김우창 칼럼'을 옮겨놓는다.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것인데, 지난달 말 방한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인문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강연을 다루고 있다. 고려대에서 있었던 첫번째 강연주제인 '정화된 민주주의'(번역원고에 따라 언론에서는 '순화된 민주주의'라고 표기했었다)에 대한 논평을 겸하여 '나라 사랑'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나로선 '세계시민주의와 애국주의'에 대한 글을 얼마전에 작성하기도 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 참고로, 누스바움 교수의 세 차례 강연원고는 원문과 함께 인터넷에서 입수할 수 있다(나는 세번째 강연을 직접 듣기도 했다). 간단한 관련 동영상은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OnAir/YIBW_showMPICNewsPopup.aspx?contents_id=MYH20080825004600355&bandwidth=700 참조.

  

경향신문(08. 09. 11) 나라 사랑과 인간 사랑

지난 8월27일부터 사흘간 학술진흥재단의 초청으로 방한한 미국 시카고 대학의 마사 누스바움 교수의 강연회가 있었다. 그는 지금 미국 철학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 가운데 하나지만, 거기에는 철학적 깊이 이외에도 미국 철학을 상아탑으로부터 공공의 공간으로 끌어 낸 철학자라는 사실이 관계되어 있다. 브라운 대학의 고전철학 교수로 있던 그가 시카고 대학 법학대학원의 교수로 옮겨 간 것도 철학이나 문학 그리고 인문과학이 사회 현실 이해와 실천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법학 교육에는 법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인문과학이 제공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사건의 구체적 정황의 정확한 파악은 분석력과 함께 감성적 사고의 훈련을 거친 사람이라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스바움 교수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것이다.

이번 방한 중 고려대학교에서 있었던 첫 번째 강연은, ‘정화된 애국주의가 가능한가?’라는 제목이었다. 나라 사랑에는 대체로 남의 나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에 대한 규범은 포함되지 않는다. 어떻게 나라 사랑을 더욱 보편적인 인간 사랑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는가? 이것이 가능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있어서이다 - 누스바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 애국심·인간애 근원은 애향심 -

이때의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적 이권의 맹목적 추구를 옹호하는 체제를 말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민주주의의 이상은 모든 사람의 자율, 동등 그리고 위엄을 신장하고 보장하는 체제이다. 국가는 사회 일부에서 일어나는 지나친 탐욕과 이기주의의 추구를 억제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동기의 다국적 기업과 세계시장의 횡포를 막아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인종, 성, 계급에 기초한 차별 또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폐지도 국가의 의무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어려운 상황에 있는 나라에 대한 원조, 인도적 배려, 그리고 평화와 전쟁 방지는 자연스러운 국가 목표의 일부가 된다. 누스바움 교수의 생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애국심은 이 모든 도덕적 규범을 포용하는 것이어서 마땅하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와 이상들이 반드시 나라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각될 필요가 있는가? 누스바움 교수에게 정서적인 것이 짜여 들어가지 않는 이성적 판단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결하게 된다. 애국심은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생겨난다. 거기에는 공동의 상징물과 기억과 시와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크게 작용한다. 이러한 것들이 전통과 문화가 되고 의례(儀禮)로 정립된다. 여기에서 길러지는 애국심에 보편적 인간 가치를 통합한 것이 정화된 애국주의이다.

누스바움 교수의 강연이 말한 애국심과 보편적 가치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과 통합의 문제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제시된 통합 방법이 모순을 충분히 참조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려대 강연 후 청중으로부터 나온 질문의 하나는 “애국심에 정서적, 상징적 자산이 중요하다면 분단된 나라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질문은 이민자나 이주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있을 수 있다. 누스바움 교수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았지만, 구태여 답변을 생각해 본다면, 소수자에 대한 일체의 차별을 거부하는 정치체제가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답이 가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체제가 소극적인 의미에서 소수자 문화의 위엄을 보장할 수는 있겠지만, 이문화(異文化) 속에 사는 사람의 문제를 완전히 풀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또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다른 나라와의 사이에 평화적 관계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이라크 전쟁은 민주주의라는 명분이 전쟁의 구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또는 어떤 정치 이론가들이 말하듯이, 애국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른 나라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전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전쟁의 상태가 사람들이 가장 애국적이 되는 조건이라는 관찰도 있고, 집단 심리를 동원하기 위하여 가상의 적대국이나 집단을 조작 이용하려는 정치 정략도 가능하다.

어쩌면 모순은 모순대로 인정하면서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옳을는지 모른다. 2차대전과 독일 점령을 경험한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어떤 사람이 전선(戰線)의 저쪽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가, 국가를 위해서 거짓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 옳은가 - 이러한 문제들을 고민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나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것은 복잡한 현실 여건과의 관계 속에서만 저울질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국에 대한 누스바움 교수의 말에는 여전히 경청해야 할 사항이 있다. 메를로퐁티와 조금 다른 의미에서이지만, 그가 구체적 상황과 감정을 중요시한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화된 애국주의론에서는 이 입장을 조금 느슨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좁은 구체성이 관점과 생각을 좁히게 될 것을 우려한다. 그리하여 가족이나 지역 등의 좁은 단위가 마음을 좁히는 데 대하여 나라는 그것을 한껏 넓히면서 실효성을 갖는 테두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을 넓히는 것이 공간적 확대에 일치해야만 하는 것일까?

- ‘고향파괴’ 새도시 건설 멈춰야 -

영어의 애국심(patriotism)의 어원에 들어 있는 파트리아(patria)는 나라보다는 고향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애국심은 애향심의 확대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공간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내 가족이 나에게 중요하다면 다른 가족도 중요하고, 내 나라가 나에게 중요하다면, 남에게는 그의 나라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마음의 움직임이 여기에 관계된다. 자기의 일로 다른 사람의 일을 미루어 생각하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구체성의 심화는 마음의 확대 그리고 공간의 확대를 가져 온다.

국가가 실효성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은 그 강제력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보편성은 반성의 능력과 문화에서 온다. 그리고 그것에 토양이 되는 것은 고장과 고장 사람들의 교감이다. 누스바움 교수는 애국심을 말하면서,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그 연설에서 미국의 국토를 - ‘뉴햄프셔의 광막한 구릉들’ ‘캘리포니아의 굽어진 해안’과 같이 -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을 칭찬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구체적인 사물이고 사건이다. 그러나 이 킹 목사의 언급은 다분히 추상적이고 상투적인 수사에 의존한다. 참으로 구체적인 것은 나와 이웃과 선조가 살았던 고장과 그 이야기이다.

우리가 그간 해온 일은 새로운 도시 건설의 이름으로 몸을 두고 살 수 있는 고장과 이웃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새 건설은 마음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지속적인 공동체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구체적인 의미에서 파트리아의 보존을 생각할 때가 되었지 않나 한다. 마음과 몸과 땅과 사람이 교감하며 정주하는 데에서 나라 사랑도 나오고 인간 사랑도 나온다.(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08. 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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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1 2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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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1 2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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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2 1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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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2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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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2 1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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