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마땅한 리뷰가 없어서 올려놓지 못한 책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의 <악의 쾌락 변태에 대하여>(에코의서재, 2008)이다. 루디네스코는 전기 <자크 라캉>(새물결, 2000)의 저자이며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저자 소개란에는 "프랑스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정신분석학자로 평가받는다"라고 돼 있는데(파리 7대학이라면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동료인 것 아닌가?), 헤겔과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최고'는 '최고'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있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주제보다는 저자에게 이끌린 것이다('악의 쾌락'이란 제목도 유혹적이긴 하지만). 주말 북리뷰들에 예상했던 것보다 자세한 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8. 09. 27) ‘비천’한 것인가, ‘숭고’한 것인가 도착(倒錯)

사디즘·마조히즘·소아성애증·페티시즘·관음증·노출증·의상도착증·분변음욕증…. 도착(倒錯)은 때로는 ‘비천’하고 때로는 ‘숭고’하다. 퇴폐, 악마성, 인간성 상실, 잔인성 등을 특징으로 하지만 한편으로는 창조적이고 복종을 거부해 숭고함을 보이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도착증이 ‘인류만의 소행’이라는 사실이다. 15세기 프랑스의 질 드 레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인간만이 쾌락을 위해 300명의 아이들을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도착증은 일부 ‘사악한’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게 아니다. 인간 사회 어디에나 존재하는 구조적인 현상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감추려고 하는 우리 자신의 어두운 일면을 보란 듯이 내보이는, 우리의 일부이자 인류의 일부분이다.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정신분석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파리 7대학 역사학과 교수가 한 번도 정식으로 다뤄진 적이 없는 ‘도착의 역사’를 추적하는 이유다.

도착증은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도착자들은 누구인가. 저자가 정의하는 도착자는 악행을 저지를 뿐만 아니라 악에서 쾌락을 느끼고 스스로 그 사실을 의식하는 사람이다. 책은 중세를 시발점으로 도착증과 도착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천사를 조명하면서 도착에 대한 사회의 ‘도착적’인 강박관념을 허무는 작업을 진행한다. 아울러 우리 내면의 감춰진 어두운 부분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성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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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따라 ‘도착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만만치 않다. 온갖 변태적이고 잔악한 행위들을 실천한 도착자들이 잇따라 등장하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 신비주의 성직자들은 배설물을 먹거나 스스로를 학대하는 행위를 통해 비천함을 숭고함으로 바꾸고자 했다. 질 드 레는 아이들을 잡아다가 사지를 자르고 죽어가는 아이들 앞에서 사정을 했다. 18세기의 저주받은 작가 사드는 수음, 펠라티오, 항문성교를 조장한 사상 최악의 패륜아로 일생의 3분의 1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도착을 자유를 향한 해방과 혁명으로 묘사한 위대한 성애문학 작가로 칭송받기도 한다.

책은 특히 19세기 도착자들을 정의하고 통제하기 위해 다듬어진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계몽주의가 도래하면서 도착증은 ‘공포의 대상’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저주받은 종족’과 치료가능성이 있는 이들로 나눴다. 모든 비정상적인 행위들을 목록화해 단속했고 특히 자연을 거스르는, 즉 번식을 거부하는 자위하는 어린이, 동성애자, 히스테리 여성을 가장 도착적인 인간들로 규정했다. 저자는 이 같은 실증주의적 정신의학 담론들이야말로 강박적이고 나아가 도착적이라고 일갈한다. 아이들의 자위를 막기 위해 발기 방지 상자나 음경의 외과시술 등 기괴하기까지 한 각종 치료법이 유행했던 당시 모습이 또다른 도착이 아니냐는 것. 개개인의 욕망에 대한 사회와 권력, 그리고 과학의 억압도 도착이라는 주장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 같은 억압과 차단의 가장 극단적이고 도착적인 결말이 20세기의 아우슈비츠다. 그곳은 “한 국가가 어떻게 계몽주의의 이상과 정반대 방향으로 작업한 끝에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지, 어떻게 과학을 도구로 삼아 인간성 자체를 말살하는지”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아우슈비츠의 살인마들이 “끔찍할 정도의 정상상태”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들의 정상상태가 “도착증 전체를 포괄하는 도착적인 체계에 대한 집착의 증후”라고 지적한다. 때문에 그들은 대량학살을 자행하고도 합리화하거나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던 루돌프 헤스는 심지어 “희생자들 스스로가 자기 파괴를 갈망했다”고까지 이야기하는 도착증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21세기 우리 사회의 도착증은 어떨까. 소아성애자와 테러리스트가 도착증의 가장 극악한 형태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소아성애자에게 약물을 처방하려는 시도에서도 ‘도착적인 무언가’를 읽어낸다. 잠재적 범죄의 위험도가 높은 아기들을 식별하려는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근절시키겠다는 과학만능주의의 귀환이자 생체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다. 저자는 “유기적인 삶을 차분히 관리하기 위해 악·갈등·운명·무절제를 제거하는 것, 도착증을 해결하겠다는 계획이야말로 새로운 형태의 도착증이 아닐까”라고 묻는다.

결국 책이 ‘도착의 역사’를 통해 사유하고자 하는 것은 점차 도착적인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이 시대다. 저자는 “오늘날 산업기술사회는 때로 신체를 외설적으로 물신숭배함으로써, 때로는 도착증 개념을 폐지하는 청교도적인 의학담론을 통해서” 점점 도착적으로 변해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특히 “현대의 새로운 안식처”인 양 인기를 모으고 있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문제삼으면서 “투명함과 감시를 예찬하고 자신의 저주받은 부분을 소멸시키는 일에 혈안이 된 사회야말로 도착적인 사회”라고 꼬집는다. 논쟁적인 주장들을 담은 이 책은 우리 내면의 도착적 욕망을 새롭게 호명하면서 우리가 맞서야 할 더 큰 문제는 개인적인 도착자가 아니라 도착적인 체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의 맺음말이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더 이상 도착증의 이름을 붙이지 못하게 된다고 가정하면 숨어 있는 그것의 변형과 마주치는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내면에 숨어 있는 어둠을.”(김진우기자)

08. 09. 27.

P.S. 북페이지의 저자 인터뷰도 참고할 만하다. 유튜브에는 인터뷰 동영상들도 올라와 있다(http://kr.youtube.com/watch?v=9D7DqI1U49w 참조). 말은 통하지 않지만 몇몇 자료 화면들을 참고가 될 수 있겠다.

이번 책의 목적은 선과 악에 대한 탐색이더군요. 그 질문 속에서 도착증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겁니까?
도착증의 특징은 그것이 악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즐긴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부 범죄자들은 도착적이지 않습니다. 악을 즐기지 않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딱히 범죄자가 아니면서도 악을 즐기는 도착자들이 있습니다. 그 형상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습니다.

질 드 레의 사례에 대해서 오랫동안 언급하시더군요.
질 드 레는 그 역전 가능성의 증거입니다. 대단히 복잡한 인물이죠. 그는 진정한 반항인이었던 잔 다르크에게 매료되어 선을 향해 이끌립니다. 그러나 잔 다르크가 국가의 이상을 구현했음에도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면서 그 영웅주의의 세계가 무너지자 질 드 레는 그때부터 악에 빠져듭니다. 그는 약 300명의 아이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살인마로 여겨지고 있죠. 그의 재판을 계기로 사람들은 처음으로 악의 근원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됩니다. 악의 세력을 추궁받은 질 드 레는 자신이 받았던 교육이 원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인류의 역사 위를 맴돌던 질문이 비로소 제기됩니다. 악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 질문은 요즘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악은 인간의 타고난 속성일까요?
우리가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속성이죠. 동물의 세계에는 악과 도착증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의 파괴충동을 선에 대한 이상으로 탈바꿈시켜서 최악의 짓거리들을 저지를 수 있죠. 동물은 결코 나치주의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잔인한 동물이라 해도 악을 즐기지는 않으니까요. 악을 즐기려면 악에 대한 의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동물계에 속해 있다고는 해도 동물은 아니죠. 난 우리를 동물과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도착증의 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사드는 별도의 경우죠.
사드는 좀 특별합니다. 하지만 그가 만일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범죄에 빠져들었으리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죠. 사드는 성도착증의 목록을 최초로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도착증에 대한 질문을 이론으로 정립시킨 사람입니다. 그는 법칙을 완전히 전복시킵니다. 계몽시대 인간이었던 그에게 있어서 선이란 지옥에 내동댕이쳐져야 마땅한 것이죠. 사드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 가지 정치체제 속에서 살았습니다. 구체제, 혁명기 그리고 제정시대 말입니다. 그는 늘 자신이 살던 시대와 괴리되어 있었습니다. 구체제에서 그는 매춘부들에게 저지른 가혹한 행위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성모독과 계간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죠. 그 두 가지 범죄는 혁명을 통해 폐지됩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신에게 맞서다가 로베스피에르가 다시 신권을 확립시키면서 제정시대 체제에서는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되죠. 하지만 사드가 미쳤던가요? 처음으로 사람들은 미치광이와 반미치광이를 구분하게 되죠. 사드와 함께 유럽 의학은 도착증을 점령하게 됩니다. 도착적 행동은 그때부터 악마의 화신으로서 악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정신건강에 속하게 되죠.

중세에 신비주의자들은 악의 세력을 내세워 신에게 도전했습니다. 18세기에 자유사상가들은 기존의 도덕을 무시했고요.
신비주의자들은 완전히 도착적인 희생의식(채찍질, 오물 삼키기)을 치르며 전대미문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신에게 자신들의 육체를 바쳤습니다. 반대로 자유사상가들은 쾌락의 도덕으로 질서에 맞섰습니다. 그들은 모든 형태의 자유를 요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의 자유를 포함해서 말이죠. 고대부터 도착증은 먼저 성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절대적인 도착증으로 평가되는 계간은 모든 세기를 관통하는 것이었고요. ('저자와의 인터뷰', <리베라시옹> 2007.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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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9-27 11:00   좋아요 0 | URL
저로서는 상당히 반가운(?) 주제로군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보사르(Bossard) 신부가 "정확히 잔 다르크의 반대"라고 평가했던 질 드 레(Gilles de Rais)의 재판에 관해서는 바타이유도 장문의 서론을 붙여 두툼한 책 한 권 분량의 분석을 남기고 있죠. 루디네스코가 저 책에서 바토리(Bathory) 또한 언급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리뷰를 읽으니까 사드에 대해서라면 저 정도의 평가와 분석은 사실 예전에도 이미 많이 나와 있던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루디네스코의 '새로운' 시각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리베라시옹> 사이트에서 인터뷰를 검색해보니 '계간'으로 번역된 원어는 'sodomie'였군요... 보통 요즘은 '남색(男色)'이라고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계간(鷄姦)'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신 <리베라시옹> 인터뷰 번역자의 언어관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또한 기사를 보니까 마지막 두 문장("고대부터 도착증은 먼저 성적인 영역에... 모든 세기를 관통하는 것이었고요.")은 루디네스코의 말이 아니라 인터뷰어의 언급이더군요(그리고 인터뷰 전체를 번역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궁금한 점: 사드의 초상 위에 있는 그림은 '푸른 수염'인가요...?

로쟈 2008-09-27 12:50   좋아요 0 | URL
네, '푸른 수염'입니다. 원기사에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 번역에 대한 지적이 재미있네요. 저는 '계간'이 무슨 뜻인가 했습니다.^^

람혼 2008-09-27 16:35   좋아요 0 | URL
그림은 처음 보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푸른 수염'일 것 같아 여쭤보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저 그림이 매우 '정겹게' 느껴지네요... 갑자기 머릿속으로 '계간지(鷄姦紙...?)'라는 단어를 만들어보고는 저 혼자 또 '살짝 맛간 사람'처럼 즐겁게 웃었더랬습니다.^^

로쟈 2008-09-27 23:26   좋아요 0 | URL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6:08   좋아요 0 | URL
계간,남색...다들 고색창연한 단어들이네요.요즘은 남색이란 단어도 잘 안 쓰던데...동성연애라는 단어보다 운치가 있죠?

람혼 2008-09-27 16:3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동성애"는 "homosexuality"의 번역어로 굳어진 경향이 있기도 하거니와, 또한 그보다 더 세밀히 보자면, 단어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 단어가 지닌 '역사'와 '유래'를 고려했을 때, "sodomy"는 단순히 "동성애"라는 지극히 '현대적'이고 '중립적'인 단어로 옮기는 것보다는 '남색', '비역' 등의 단어로 옮기는 것이 보다 번역의 '층위'에 더 합당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그래도 "계간"은 참 '色다른' 번역어라는 생각은 듭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7 22:23   좋아요 0 | URL
맞아요.비역살이란 단어에서 나온 비역질도 있죠.엉덩이 살을 비역살이라고 하죠.
 

커피 브레이크에 아침에 읽은 칼럼을 옮겨놓는다(스크랩은 한번 더 읽는 효과가 있다). 최근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김우창칼럼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에서부터 터진 이번 위기 국면이 과연 미국식 자본주의의 붕괴, 더 나아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종말을 가져올 것인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개연성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개인적으로 금융쪽에 대해서 아는 바도, 관심도 별로 없는지라(하긴 예금잔액이 별로 없기도 하다. 나는 '모기지'란 말의 뜻도 이번에 알았다, 아니 찾아봤다) 사태의 추이에 대해서는 기사나 칼럼에 의지하여 판단할 따름이다. 오늘 읽은 칼럼은 그래도 내가 다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었다.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 이유이다.  

  

경향신문(08. 09. 25) 금융위기 - 제도와 인간 가치

세계 굴지의 금융기관들이 줄지어 도산한다는 뉴스가 신문에 연일 보도되고 있다. 미국에서 시작한 도산과 파산의 폭풍이 영국과 기타 유럽 여러 나라의 경제를 흔들고 아시아에 밀려오고 있다. 무언가 대사변이 일어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물론 경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 그 원인이나 연계관계 그리고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이 일이 범상스러운 일이 아님을 몸으로 느낄 수는 있다.

소위 서브프라임 주택 융자 위기가 이야기되더니, 금융관계회사라는 프레디맥과 패니메이, 리먼브라더스에 이어 AIG 보험회사 등이 파산하거나 도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는 보도가 연이어 세상을 어지럽게 했다. 다만 지금 말한 회사 중에 셋은 미국정부의 긴급조처로 파산을 면하게 되었고, 이어 미국정부는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 위기로부터 금융회사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의회에 7000억달러의 긴급예산 배정을 요구하였다. 이 액수는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투입한 경비에 비교된다고 하니까, 그 규모의 크기가 얼마나 막대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처로 일단은 사태가 수습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의 위기는 몇 개의 큰 사고가 아니라 오늘의 국제 금융시장 체제 전체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내는 일이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종말의 시작을 가리킨다는 관점도 대두하고 있다.

- 공익을 망각한 美금융기관들 -

시장원리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지켜왔던, 미국의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는 금융회사 도산을 방지하기 위한 미국정부의 조치를 하나의 거대한 위선에 해당한다고 비판하였다. 지금까지 금융회사들이 위험도를 적당히 호도했던 것은 사기이며, 정부가 그것에 대하여 눈감아 왔던 것은 무능 무책임한 일이었다. 그 결과가 이번의 사건인데, 평소에 금융시장 규제를 반대해온 회사들이 이제 와서 정부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위선적인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스티글리츠 교수는, 그러니까, 오늘의 사태에 대한 책임은 해당 기업체가 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오늘의 경제 체제 전체가 그러한 기업들의 파산으로 붕괴할 것으로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선이라는 말의 진의(眞意)는, 적절한 규제 없이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시장인데, 그것을 감추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상품의 안전성 보장을 적극화하는 몇 가지 안을 내놓았다. 거기에는 “붕괴를 허용하기에는 너무 비대한 회사”가 출현하는 것을 방지하고 그것을 분할하는 것과 같은, 공정 경쟁 확보를 위한 법을 강화하는 안도 있고, 금융회사의 보수 규정을 엄격화하는 일도 포함된다. 후자는 기업 간부들의 보수가 단기적 수익률에 연결되어 그것이 부정직하고 위선적인 기업 운영의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스티글리츠 교수가 오늘의 금융시장을 대체할 전적으로 새로운 방안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가 비판하듯이, 금융업의 경영형태가 사기와 위선을 포함한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면, 금융업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과 윤리의 문제이고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근본과제는 기업으로 하여금 윤리적 기준을 준수하게 하는 것이다. 거꾸로 보면, 그것은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요구를 경제 질서로 풀어내는 일이다. 물론 스티글리츠의 관점에도 윤리적 도덕적 고려가 들어 있다. 결국 그의 비판이 기초하고 있는 것도 정직성, 공정성, 공익성 등의 기준이다. 그리고 기업에도 그러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윤리 도덕의 경제제도화를 보장할 수 있는 간단한 해결책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처음 주목을 많이 받았던 것은 주택 금융회사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 회사이다. 패니메이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으로 저금리 주택자금을 일반 서민에게 대여하여 서민의 주택 소유를 용이하게 하고, 그로 인하여 자극된 주택 건설로써 30년대 공황기의 고용 확대를 기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회사의 소유주는 주주들이면서도, 정부로부터 여러 혜택을 받았다. 프레디맥은 앞의 회사와 비슷한 목적을 가졌으면서, 그 독점 방지를 위하여 60년대에 추가로 설립된 회사이다. 그러니까 두 회사는 사익보다는 공익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에 이 회사들은 본래의 목적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로 변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부 정책의 변화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회사들이 공익 회사로서 감독기관의 감독을 벗어나기가 쉬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금융재난 원인의 하나인 소위 ‘서브프라임 모기지’-상환 능력이 불확실한 서민에게 주는 주택 담보 융자-도 정부의 보호 아래 회사가 쉽게 들여 올 수 있었던 외국 자본과의 연결로 인하여 확대된 것이다.)

AIG가 위의 회사들과 같은 성격의 회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AIG의 명분상의 주업은 보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험은 원래 사회적 성격이 강한 사업이다. 그것은, 노동의 부담을 공동체가 나누어 지는 두레나 품앗이처럼, 사람이 겪게 되는 여러 위험을 협동적으로 분담하는 일을 기업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때 그것은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본주의의 위험을 줄이는, 사회복지 기업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당초의 기능은 근래에 와서 많이 약화되고, 사실 AIG 같은 경우, 보험이 그 주업인지도 확실치 않다. 이러한 변화는 금융자본의 비대화, 공권력의 태만과 변질, 그리고 기업 활동을 공동체적 기반으로부터 분리해 낸 세계화와 더불어 가속화되었다.

- ‘인간성 실현’ 없는 제도는 몰락 -

이미 비친 바와 같이, 이번의 미국발(發) 세계 금융위기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자본주의를 대체하려고 하였던 것이 공산주의 실험이었는데 그것이 결딴난 지금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대안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대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거에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의 커다란 기획을 세운다면, 인간적 삶의 신장(伸張)을 위한 쉼 없는 조정과 균형의 노력이 필요 없어진다고 착각하는 제도가 실패하는 제도이다. 물론 사회에는 인간성 실현의 이상에 대한 기본적 합의가 존재하여야 한다. 인간의 존엄을 잊지 않는 한, 이 이상은 간단하다면 간단한 것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물음에 열려 있는 것이라야 한다.

물어야 할 물음의 하나는 무한한 경제발전 또는 부의 축적이 인간됨의 모든 것이라는 강박적 느낌을 향한 것이다. 이것은 사회 전체에도, 개인의 삶에 대하여서도 물어야 한다. 파산한 리먼브라더스 CEO의 작년 보수는 4500만달러였다. 미국의 최고 경영자와 일반근로자의 봉급 차이는 30년 전에 30배, 작년에는 344배였다. 작년에 하버드대학 4학년생의 47%가, 금년에는 37%가 금융업계로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돈의 폭풍이 오늘의 세계를 휘몰아간다. 규모는 다를망정, 그 폭풍의 위력이 우리 사회에서 덜 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폭풍이 어찌 마음에만 불고 제도를 휩쓰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무엇이 인간의 인간됨을 드높이는가를 묻는 마음은 제도에 균형을 주는 중요한 기제이다.(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08. 09. 25.

P.S. 가장 단순하게는 "미국의 최고 경영자와 일반근로자의 봉급 차이는 30년 전에 30배, 작년에는 344배였다"는 사실 자체의 문제성을 인지하는 것이 요점이다. 그것을 '승자 독식사회'의 자연스러운 룰로 용인할 때(사회적 빈곤을 개인적인 나태의 자연스런 귀결로 치부할 때), 그리하여 '20:80사회'를 넘어서 '1:99사회' 곧 '상위1%를 위한 사회'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사회는 파국으로부터 멀지 않다. '1%의 대한민국'으로 질주하는/내몰리는 정부의 행태와 사회적 분위기가 염려를 넘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현상황에서 자연스레 예견되는 '총체적 몰락'으로부터 과연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

P.S.2. 미국 금융위기('월가의 침몰')에 대한 이번주 시사IN의 특집기사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0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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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9-25 15:43   좋아요 0 | URL
사실 현재 미국정부의 조치가 '위선적'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오히려 이렇듯 '위선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위선적'이겠지만요). 예를 들자면 1930년대의 대공황 시기를 떠올려볼 때(당시의 뉴딜 정책과 현재 미국정부의 금융지원을 비교해보는 것, 그 안에서 거대 금융자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금융자본에게는 일종의 '전략적'인 역사-반복 체계가 존재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질 정도입니다. 위기를 창출하고 그를 통해 다시 이득을 얻는 기괴한 시스템으로서는 오히려 대성공인 것이죠. 어제(9월 24일) 중앙일보의 칼럼 면을 보니 김종수 논설위원이라는 분이 '미국식 자본주의는 결코 [이 정도 쇼크로는] 붕괴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다소 '자기암시적'이라 할 칼럼을 하나 쓰셨던데요('미국은 금융위기를 극복할 것이다'라거나 '비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진다'고 하는 등 거의 열렬하고 간절하게 응원하는 논조였지요...), 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그 요지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그 쇼크는 사실 수동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창출'된 면도 있기 때문이죠. 그 논설위원의 말이 맞을 겁니다, 아마도 '이 정도 쇼크로는' 결코(?) 미국식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겠죠...(사실 저로서는 이 점이 가장 '안타깝고 분한' 부분이긴 하지만요). 논설위원이라는 분이 금융자본의 논리를 너무 '순진무구하게'만 바라보고 있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로쟈님이 추신에서 "가장 단순하게는"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저 임금 차이의 기하급수적인 증가야말로 금융자본의 기형적 자기증식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가장 큰 '수혜'를 누가 입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하나의 증거라고 해야겠지요.

로쟈 2008-09-25 22:51   좋아요 0 | URL
현재까지는 '위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니까 붕괴 여부에 대해서도 확언할 수는 없을 듯싶습니다. 다만 적어도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종말을 고했다는 것 정도는 합의가 되는 듯싶어요.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규제해야지만 제대로 돌아가는 자본주의라면 그 자본주의는 여전히 '자본주의'인지도 생각해볼 문제이겠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6:12   좋아요 0 | URL
김종수 그 양반 전형적인 중앙일보 사나이죠.중앙일보 냄새가 팍팍 풍기던데...
 

러시아의 FSB(연방보안국) 간부가 2차대전 패전을 앞둔 일본군이 철군에 앞서 사할린 지역에서 저지른 한인 민간인 학살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룬 소설을 펴냈다고 한다(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9/23/0902000000AKR20080923057300096.HTML). 기사를 읽다보니 책상맡에 놓여있는 신문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제 때 스크랩을 해놓지 못하고 미뤄놓은 것인데, 호주국립대의 개번 매코맥 명예교수가 정부수립 60주년의 '슬픈 진실'을 밝히고 있는 칼럼이다. 한국전쟁시 죄수와 양민 학살이라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칼럼에 대한 별다른 반향을 접하지 못했다(다 아는 내용이란 말인가? 만약 사실이라면 역사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 교과서 개편논의가 다시 일고 있는 듯한데, 엉뚱한 거 건드리지 말고 이런 '슬픈 진실'이나 후손들에게 똑바로 교육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경향신문(08. 09. 02) [개번 매코맥 칼럼]정부수립 60주년의 ‘슬픈 진실’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정부가 수립된 지 60주년이 됐다. 생일은 미래를 계획할 뿐만 아니라 과거를 되돌아보는 시기다. 하지만 슬픈 진실은 1948년에 출범한 공화국(Republic)이 6개의 공화국 중 첫번째 공화국에 불과하고, 그 역사에는 축하할 것보다 한탄할 것이 많다는 점이다.

우선 이 공화국은 유엔(본질상 미국)의 창조물이다. 한국인의 역할은 최소한에 그쳤다. 미국은 1947년 한국 문제를 유엔에 위임했고, 명목상 독립적이고 단일한 정부수립을 감독할 기구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준비했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들이 관리하고 있는 한반도 남쪽에서 별도의 선거를 치르도록 강요했다. 임시위원단의 주요 회원국이었던 캐나다와 호주, 의장국이었던 인도는 이에 저항했다. 국토의 반쪽에서만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그들의 사명이 아니었다. 테러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민주적인 선거는 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美에 의해 창조된 ‘反共 공화국’
임시위원단이 1948년 3월11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치러진다는 것을 조건으로’ 선거 여부를 표결에 부쳤을 때 캐나다와 호주는 반대표를 던졌다. ‘자유로운 분위기’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한의 단독 선거가 국가의 분열을 강화할 것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결국 임시위원단은 투표를 실시했다. 의장인 인도 외교관 KPS 메논이 이상하게도 입장을 바꿨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시인 모윤숙)을 향한 그의 사랑이 그의 더 나은 판단을 압도했다. 그가 회고록에 썼듯이 그것은 “외교관으로 봉직하는 동안 내 심장이 내 머리를 이기도록 허락했던 유일한 경우”였다. 사적이고 경솔한 행동에서 더 나은 결과가 도출되는 일은 거의 없다.



단기적으로 남북의 단독 선거는 제주에서 소요를 야기해 수만 명이 살해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20세기 아시아에서 벌어진 대규모 잔학행위 중 하나였다. 장기적으로는 두 개의 한국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2년 후 전쟁이 터질 무대가 준비된 것이다. 12월 유엔 결의는 이승만 정부에 대해 ‘한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정통성을 부여했다. 제1공화국이 수립된 지 2년 후, 유엔은 공화국을 방어하기 위해 전례 없는 참전 조치를 취했다. 그 전쟁이 끝난 후 6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방어에 수반됐던 끔찍한 사실의 세부 내용들이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다.

조선인민군이 남쪽으로 진격하자 이승만 정부는 감옥에 수감돼 있던 북한 협력자를 제거하고, 감옥을 빠져나간 정적을 추적해 가능한 한 많이 살해하기 위한 단계를 밟았다. 한국 암흑세계의 중심은 대전이었다. 유엔과 남한군의 연락장교로 복무하던 호주 육군장교 2명은 7월9일 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길에 죄수들을 태우고 남쪽으로 향하는 트럭 호위대를 목격했다. 장교들 중 하나인 스튜어트 피치 대령은 1982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바로 내 눈 앞에서 2~3명이 사망하는 것을 봤다. 그들의 머리는 라이플총의 개머리판에 맞아 계란처럼 부서졌다.” 후일 공주에서 그는 죄수들이 총살당했다고 들었다.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던 사진잡지 ‘픽처 포스트’에 실린 사진 한 장은 트럭 한 대 분량의 죄수들을 보여준다. 사진 설명은 “금강 둔치에서 남한의 반역 혐의자들이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히고 있고, 유엔이 이 문제에 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며칠 후인 7월13일 북한군은 금강을 건넜고 7월20일 대전을 포위했다. 그들과 함께 공산주의 성향의 신문 ‘데일리 워커’의 특파원인 영국인 기자 앨런 위닝턴이 도착했다. 위닝턴은 대전 근처 ‘낭월’이라 불리는 마을에서 대규모 무덤을 보았다. 마을 주민들과 논의한 끝에 그는 대전 지역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 7000여 명에 대한 집단 학살이 일어난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런던에서 위닝턴의 기사가 보도된 시점에 북한의 ‘조선 인민보’도 희생자가 7000여 명이라며 이 학살 소식을 전했다. 미군 무관 또한 이것을 백악관에 보고했다. 이 보고는 남한군에 책임이 있으며 죄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이 (이승만 대통령을 의미하는) ‘최고위급 당국’에서 내려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조사도 실시되지 않았다. 대신 (아마도 워싱턴에 있는) 누군가가 이 사건을 전쟁 중에 있었던 특이하면서도 단일한 북측의 학살로 뒤바꾸기로 결심했다. 사건은 (미군이 묘사한 대로) “ ‘난징의 강간’ ‘바르샤바 게토’와 함께 역사적 사료로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꾸며졌다. 사건의 이 같은 각색본이 1953년 10월 전세계에 출판되면서 대전 학살은 북한이 유난히 잔인하게 행동했던 주요 사례가 됐고, 북한이 ‘악의 축’으로 지명되는 데 일부 기여했다.

사건이 발생하고 40년 이상이 흘러 한국의 월간지 ‘말’이 진실을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 1992년의 일이다. 한국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5년 설립)가 조사 결과물을 발표하기까지는 그로부터 16년이 더 걸렸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처음 한 달간, 즉 제1공화국이 수립되고 3년이 흐른 시점에, 적어도 10만명의 양민이 바로 그 공화국이 세우고 통제하는 군대의 손에 학살됐다. 대전 학살은 수많은 참사 중에서 최악의 사례다. 대량 학살은 남한 땅의 남북과 동서에 걸쳐 일어났고 셀 수 없이 많은 시체가 얕게 판 무덤에 던져지거나 광산 혹은 바다 속에 버려졌다. 진실·화해위는 수백건의 다른 사례들을 조사하고 있다. 이 사례에서 미군은 대부분 공중에서 ‘흰 옷을 입은 사람들’(한국 양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을 소사하고 네이팜탄으로 공격한 것으로 비난받고 있다.

‘10만 양민 학살’ 이승만은 전범
이 참사들에 대한 폭로는 2008년 들어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반응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공화국의 고위급 정치 지도자들이나 미국, 유엔은 어떤 논평도 하지 않았다. 어떤 신문도 관련 사설을 쓰거나 칼럼을 게재하지 않았다. 한국 바깥의 보도도 균일하지 않았다. AP통신이 공들여 작성한 기사를 일부 미국 신문과 영국 BBC 방송이 다시 보도했지만 미국과 유엔의 책임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우리는 세르비아나 다르푸르의 잔혹 행위, 티베트와 그루지야, 때로는 북한의 인권 침해를 비난하지만, 우리에게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점은 너무 고통스러워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결과 두 가지의 불명예가 정부수립 기념일을 장막으로 가린다. 첫째, 한국이라는 국가는 유엔과 한국인들에게 강요된 미국의 창조물이다. 이 국가의 존재 이유는 민족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닌, 反공산주의다. 둘째, 공화국의 첫번째 대통령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것은 오늘날 비난받고 있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가 저지른 전쟁 범죄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 책임은 맥아더 장군과 트루먼 대통령,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에게 있다. 진실을 알고 있었거나 혹은 알았어야 했던, 하지만 한국전쟁이 우리의 이름으로 치러진 방식에 눈감아버렸던 모든 나라의 정부와 시민들도 그 책임을 나눠 져야 한다.(정리 최희진기자)

Korea at 60
 
 The Republic of Korea has turned 60. Birthdays are a time for looking back over the past as well as for planning the future. The sad truth, however, is that the Republic that was born in 1948 was only the first of six, and that its record contains little to celebrate and much to lament. It is unlikely that many Koreans today remember it with pride or pleasure.
 
 In the first place, this Republic was uniquely a United Nations (which at that time meant essentially a US) creation. Koreans played a minimal role. The United States entrusted the Korean problem to the UN in 1947 and saw to the establishment of UNTCOK (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as a body nominally to oversee the creation of a unified, independent Korea, but then pressed for separate elections in its southern controlled zone. Three key members of the committee - Canada, Australia, and India (its chair) - resisted. To conduct elections in half a country was not their mission, and there could be no democratic elections under the then prevailing conditions of police state terror.1) When the Commission voted on 11 March 1948 to observe elections "provided they were held in a free atmosphere," Canada and Australia both voted against, because there plainly was no "free atmosphere," and they deplored what they saw as a step towards entrenching the division of the country But the vote was carried in the Commission because its chair, the Indian diplomat KPS Menon, did a bizarre volte-face. He switched his vote because his love for a Korean woman (the poet Marian Mo or Mo Yun-suk) prevailed over his better judgment. It was, he wrote in his Memoirs, "the only occasion in my service when I allowed my heart to prevail over my head."2) Rarely did greater consequence follow from personal indiscretion.
 
 In the short term, separate elections led to the uprising in Cheju where tens of thousands of people were killed (in one of the great atrocities of 20th century Asia) and in the longer term to the establishment of separate Korean regimes under conditions that that set the scene for war two years later. In December, a UN resolution conferred legitimacy on the Rhee government as "the only legal government in Korea." Australia proposed this resolution, thus abandoning its pursuit of autonomous middle power principle and adopting instead the principle of "Follow the United States," (what in Korean might be known as sadae) which it was to follow thereafter for much of the remainder of the 20th century.3)
 
 Two years after founding the Republic, the UN itself took the unprecedented step of going to war to defend it and now, nearly six decades after that war ended, horrendous details of what that defense entailed continue to come to light.
 
 As the Korean People's Army advanced south the Rhee regime took steps to clear its prisons of possible Northern collaborators and to track down and kill as many as it could of those opponents who were not already in prison. The heart of the Korean darkness was Daejeon.
 
 On July 9, two Australian army officers, liaising between the UN and South Korean forces, were on the road from Taejon to Konju when they saw a convoy of trucks loaded with prisoners going south. One of them, Colonel Stewart Peach, recalled in a 1982 interview with this author: "Before my very eyes I saw at least two or three killed, their heads broken like eggs with the butts of rifles."4) Later, in Konju, he was told that prisoners were being shot. A contemporary photograph in the London Picture Post shows a truckload of such prisoners, described as "South Korean suspected traitors," on the banks of the Kum River "on their way to execution," adding that the matter was under investigation by the UN.5) Days later, on 13 July, the North Korean forces crossed the Kum River, and on 20 July captured Daejeon. With them came the British journalist (correspondent for the communist Daily Worker) Alan Winnington. Winnington saw mass graves at a village called "Rangwul" near Daejeon, and from discussions with villagers, he too concluded that a major massacre had occurred, with approximately 7,000 prisoners from the jails of Daejeon and nearby summarily executed and buried in mass graves dug by locally press-ganged peasants.6) Around the same time that Winnington's report was published in London, the North Korean Choson Inminbo reported the massacre, giving the figure of 7,000 victims.7) The US military attache also reported it to Washington, making clear that South Korean forces were responsible and that the orders to execute the prisoners had come from "the highest authority" (which could only mean President Syngman Rhee).
 
 No investigation was conducted. Instead, somebody (presumably in Washington) decided to turn this into a Northern massacre, the characteristic, single atrocity of the entire war, one worthy (as the US Army described it) "of being recorded in the annals of history along with the Rape of Nanking, the Warsaw Ghetto."8) As that version of events was published around the world in October 1953,9) the Daejeon Massacre became the centrepiece of the case that North Korea was exceptionally brutal, an impression that remains alive today and accounts in part for the designation "Axis of Evil."
 
 It was 1992, more than 40 years after the events occurred, before the South Korean monthly Mal began to tell the true story,10) and it took another 16 years before the South Korean government's semi-official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established in 2005) began to publish its findings. According to the TRC, during the first months of the Korean War, Year Three of the Republic, at least 100,000 citizens were slaughtered by forces set up and controlled by that very republic.11) Daejeon was only the worst of a litany of horrors. Mass murder took place the length and breadth of the country, countless bodies being dumped in shallow graves or abandoned mines or into the sea. The TRC is also investigating hundreds of cases in which the US military is directly accused of indiscriminate bombing, strafing, or napalming of "people in white" (ie, Korean civilians) mostly from the air.
 
 Revelations about these horrors have flowed steadily during 2008. Yet they have met little response: no comment from senior political leaders of the Republic itself, or the United States, or the United Nations, nor (so far as I am aware) has there been a single newspaper editorial or significant "opinion" essay in Korea itself. Coverage outside Korea has been patchy. The story as painstakingly told by Associated Press has been carried by some US newspapers and by the BBC, but rarely with a focus on the American and UN responsibility.12) While we unequivocally denounce atrocities in Serbia or in Darfur, and human rights denials in Tibet or in Georgia, or for that matter North Korea, those for which we ourselves bear responsibility seem too painful to contemplate.
 
 Two grim reflections therefore cast their pall over the birthday celebrations: first, that the South Korean state was a US creation, imposed on the United Nations and on the Korean people, whose raison d'etre was neither nationalism nor democracy but simply anti-communism, and, second, that the first president of the republic was guilty of war crimes far exceeding those of which the Bosnian Serb leader Radovan Karazic is accused today. That responsibility is shared by General Macarthur, President Truman, UN Secretary-General Trygve Lie, and by the governments and citizens of all those countries that knew, or should have known, but turned a blind eye to the way the war of 1950-53 was fought in our names.

 <이하 주석>
 
 1) The Australian delegate on UNTCOK referred to the torture and murder of political opponents as “accepted and commonplace.” See my Cold War Hot War: An Australian Perspective on the Korean War, Sydney,, Hale and Iremonger, 1983, resumed in subsequent books, including Target North Korea: Pushing North Korea to the Brink of Nuclear Catastrophe, New York, Nation Books, 2004 (Korean edition from Icarus Media, Seoul, 2007).
 2) K.P.S. Menon, Many Worlds Revisited: An Autobiography, Bombay 1981, p. 259. Menon‘s waxed poetic and nostalgic in his memoirs, describing the accord he felt with Mo on “such elemental things as the sun and moon and stars, love and grief and joy.” Mo pinned all her hopes on him and wrote poems to him as “saviour of Korea.” He did not disappoint her.
 3) J.W. Burton, The Alternative, Sydney, 1954, p. 90. (Burton, Secretary of the Australian Department of Foreign Affairs between 1947 and June 1950, was the first to describe Australia’s foreign policy shift in these terms.)
 4) Interview with this author, Sydney, 14 August 1982.
 5) Stephen Simmons (journalist) and Haywood Magee (photographer), “War in Korea,” Picture Post, vo.l 48, No. 5, July 1950, p. 17. (The caption describes the incident as a matter “which has been investigated by a United Nations observer.”)
 6) Alan Winnington, “U.S. Belsen in Korea,” The Daily Worker, 9 August 1950. (The British government gave serious consideration to trying Winnington for treason over this report.)
 7) Park Myung-lim, [Pak Myong-nim], Han‘guk 1950: Ch?njaeng-gwa P’y?nghwa (Korea 1950: War and Peace), Seoul, Nanam, 2002, p. 324 (According to Park, these orders were issued “at the highest levels” and were not limited by geographical area.).
 8) “Korean Historical Report,” War Crimes Division, Judge Advocate Section, Korean Communications Zone, APO 234, Cumulative to 30 June 1953, Copy in Australian Archives, Victorian division, MP 729/8, Department of the Army, Classified Correspondence Files, 1945-1957, File 66/431/25.
 9) See, for example, Daily Telegraph(Sydney), 30 October 1953.
 10) No Ka-Won, “Taejon hyongmuso sachon sanbaek myong haksal sakon” (The massacre of 4,300 men from the Taejon prison), Mal, February 1992, pp. 122-31.
 11)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Republic of Korea, “Alleged communists massacred under the eyes of American soldiers,” Seoul, 16 June 2008, (with photographs released on 5 May 2008 by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http://www.jinsil.go.kr/English/Information/notice/read.asp?num=193&pageno=&stype=&sval=&data_years=&data_month=
 Associated Press has made great efforts to investigate and publish this story. See especially Charles Hanley, “Fear, secrecy kept 1950 Korea mass killings hidden,” May 18, 2008, http://news.yahoo.com/s/ap/20080518/ap_on_re_as/korea_mass_executions_covered_up,
 And Charles J Hanley and Jae-Soon Chang, “Impact: Thousands killed by US‘s Korean ally” Associated Press, 18 May 2008,
 http://ap.google.com/article/ALeqM5h2rT2wzhviymfyfyRdmdKw6tciagD90O9DJ80.
 and the remarkable “Inter active” file, with its video testimony of one of those involved in the mass killings:
 http://hosted.ap.org/specials/interactives/_international/korea_masskillings/index.html?SITE=AP.
 Gregory Henderson, then employed in the US embassy in Seoul and later prominent historian and author of a classic study of Korean politics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Cambridge, Mass., Harvard UP, 1968, p. 167) also put the figure of “probably over 100,000” on those summarily executed at this time.
 12) Despite Australia’s involvement in the events surrounding the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and in the War itself, the findings of the Commission are yet (as of late August 2008) to be reported there.

08. 09. 23.

P.S. 매코맥 교수의 책으론 <일본 허울뿐인 풍요>(창비, 1998)와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이카루스미디어, 2006)이 소개돼 있다. 후자는 "30년 넘게 남북한, 중국, 일본 등 동북아 국가들에 대해 연구해 온 학자 개번 맥코맥 교수가 최근 북한을 둘러싼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전망과 조언을 담은 책이다." 이런 조언을 정작 들어야 할 사람들은 다 귀를 막고 있는 듯하여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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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3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23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6 18:10   좋아요 0 | URL
매논과 모윤숙의 로맨스는 찢겨진 산하를 통해서 유명해졌죠.모윤숙 씨는 자신이 대한민국 탄생에 공헌했다며 생전에 상당히 자랑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로쟈 2008-09-27 12:53   좋아요 0 | URL
영화화될 수도 있겠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6:00   좋아요 0 | URL
에로물이 될 것 같은데요...
 

이미 예고된 대로(http://blog.aladin.co.kr/mramor/2234968) '체호프의 가을'이 시작되었다. 이번 가을에 찾아온 모든 공연을 보지는 못하지만 한두 편 정도는 관람할 수 있을 듯하다. 참고가 될 만한 소개 기사들을 한번 더 스크랩해놓는다.

뉴시스(08. 09. 15) 가을 한국연극을 감싸는 체호프 향기

러시아의 소설가 겸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가 가을의 한국에서 부활하고 있다. 일상의 소소한 해프닝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나약하고 추악한 본성을 가차없이 까발리는 것으로 유명한 체호프다.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 희로애락을 담은 작품들로 시대와 배경을 초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문호다. 러시아 공연팀의 ‘바냐 아저씨’와 ‘세 자매’, ‘바냐 아저씨’를 아르헨티나 식으로 해석한 ‘비련의 여인을 바라보는 스파이’, 체호프의 작품은 아니지만 부인인 배우 올가 크니페르의 이야기를 담은 칠레 연극 ‘체호프의 네바’, 그리고 한국의 ‘벚꽃 동산’ 등이 일제히 무대에 오른다.

‘바냐 아저씨’의 바냐는 러시아 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 중 하나다. 주인공 바냐는 죽은 여동생을 위해 그녀의 남편과 딸을 돌보다 매부가 속물임을 알고는 실망과 허탈에 빠진다. 이 고뇌는 매부의 후처인 엘레나를 향한 사모의 정이 싹트면서 한층 심각해진다. 저택을 배경으로 우둔한 인간을 풍자한다. 10월 3~5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02-760-4877



‘비련의 여인을 바라보는 스파이’ 는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채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가는 ‘바냐 아저씨’의 인물들을 아르헨티나의 조상으로 해석했다. 유럽을 견디지 못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이들의 의문, 즉 ‘과연 아무런 희망도 없는 오늘을 견뎌내면 내일 우리의 후손들은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는 ‘바냐 아저씨’의 고민과 일맥상통한다. 26~28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오른다. 02-760-4877



‘체호프의 네바’는 러시아 배우 겸 체호프의 부인인 올가 크니페르의 이야기다. 러시아 최고의 여배우로 인기를 누렸지만 남편의 죽음을 옆에서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는 올가다. 그녀의 친구 마샤, 알레코 등이 러시아 네바강이 흐르는 도시를 바라보며 연극의 아름다움을 논한다. 18~20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볼 수 있다. 02-760-4877

◇거창한 배경이 아닌 일상에서의 인간 본질을 논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놓지 않는 연극이 ‘벚꽃동산’ 이다. 희극적인 캐릭터들을 통해 부조리한 삶의 비극성을 보여준다. 남편과 자식을 잃고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 라네프스카야 부인에게 남은 것은 곧 경매에 넘어갈 벚꽃동산 뿐이다. 주위에서는 동산의 벚나무들을 잘라 별장지로 조성하라고 설득하지만 여인은 부유한 시절의 습관에 젖어 살 궁리 따위는 하지 않는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돈을 흥청망청 쓴다. 결국 삶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18일부터 10월12일까지 서울남산 드라마센터 무대에 오른다. 02-889-3561



‘세자매’는 ‘갈매기’, ‘바냐 아저씨’, ‘벚꽃 동산’과 함께 체호프의 4대 희곡 가운데 하나다. 작은 마을의 세 자매와 남자 형제들은 늘 대도시인 모스크바를 동경한다. 그러나 꿈은 실현되지 않는다. 언제나 바람으로만 그칠 뿐이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만 선뜻 행동으로 옮기는 못하는 지극히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이다. 꿈과 현실의 충돌을 담담한 필체, 서정적인 러시아 언어와 노래, 속담 등으로 그려냈다. 25~27일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에서 공연된다. 02-2280-4297 (이민정기자)

뉴스컬쳐(08. 09. 12) 올 가을, 체호프 제대로 알고보자

‘미묘하다’ , ‘모호하다’, ‘비밀스럽다’, ‘수수께끼 같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름아닌 러시아의 대문호 체호프의 희곡 앞에 따라오는 수식어들이다. 미묘하고 모호한, 그래서 비밀스런 수수께끼 같은 체호프의 작품들이 올 가을, 극장마다 풍년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후대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작인 만큼, 체호프의 희곡은 늘 공연되어 왔다. 그러나 올 가을 확실히 남다르다. 체홉의 4대 장막전이라 일컫는 ‘바냐아저씨’, ‘벚꽃동산’, ‘갈매기’, ‘세자매’가 모두 공연된다. 그런가 하면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국외 유명 단체의 공연, 원작의 완벽 재현 또는 전혀 다른 해석으로 만나보는 다채로운 체호프의 공연들이 줄줄이 준비되어 있다. 체호프, 우린 왜 그의 작품에 매료 될 수 밖에 없는가. 올 가을, 체호프를 제대로 알고 만나자.

체호프 없이 현대 희곡을 논하지 말라

올 가을, 체호프의 작품을 앞다투어 선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희비극이 공존하는 쓸쓸한 러시아의 정서가 가을과 잘 어울려서도 그러하지만, 올해는 체호프의 탄생 150주년을 2년 앞두고 있는 해이기도 하다. 1860년 1월 17일 러시아 남부 작은 도시 따간로그에서 오늘의 대문호 체호프가 탄생했다. 그는 이후 45년의 짧은 생애 동안 10편의 단막극과 7편의 장막극 등 모두 17편의 희곡을 남긴, 20세기를 대표하는 극작가가 되었다.

이 뛰어난 극작가는 본래 모스크바 의과 대학을 졸업한 의사였다. 대학 진학 후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단편 소설을 오락 잡지에 기고하면서 문학과 연을 맺은 그의 전기에는 풍자와 애수가 가득한 단편들이 가득하다. 작가로서의 자각을 새로이 하며 탄생된 첫 희곡은 ‘이바노프’로 그 이후 1895년을 기점으로 그를 대표하는 장막극 갈매기, 바냐아저씨 등이 집필되었다. 객관적인 문학론을 중심으로 한 그의 작품은 입센과 더불어 사실주의 연극의 문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모스끄바 예술극장을 대표하는 간판 작품으로 선구적인 근대 연극의 무대화에 성공하였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연출가이자 배우인 스타니슬랍스키는 그의 저서 ‘예술에서 나의 삶’을 통해 체호프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갈매기]와 [바냐아저씨]의 성공 이후에 극단(모스끄바 예술극장)은 이제 체호프의 새 희곡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이렇게 우리 운명은 그때부터 안톤 빠블로비치 체호프의 손에 놓여 있었다. 희곡이 있으면 공연 시즌이 있고, 희곡이 없으면 극단은 고유의 향기를 잃게 되었다.”라고.

자연스런 일상, 그 속의 숨은 그림 찾기

체호프의 희곡에는 희망과 고통으로 얼룩진 일상이 다양하게 변주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행복을 열망하며 보람 있고 충만한 삶을 원하지만 현실에 부딪히며 좌절하고 타협하는 것이 체홉 등장 인물의 운명이다. 10대부터 60대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등장인물들이 그 세대만의 희망과 고통을 토로한다. 저 마다의 이유로 하나같이 가슴 시리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들은 내면적이다. 보통의 연극에서처럼 등장인물들이 드러내놓고 다투거나 충돌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각자의 ‘눈’으로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부대끼며, 그를 극복하려는 심리적인 내면의 갈등이 작품을 꽉 채운다.

그러다 보니 극은 눈에 보이는 갈등이나 클라이맥스 없이 잔잔히 흘러간다. 체호프의 작품을 보다 보면 일상에서 숨은 그림을 찾고 있다라는 느낌을 받는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한 귀로 흘리기 쉽상이다. 상세한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체호프의 희곡에는 명쾌한 주제도, 플롯도, 행동도 없다. 그렇지만 체호프의 희곡에는 우리 일상의 숨은 면면이 디테일하면서도 복합적으로 제시된다.

나와 비슷한, 내 주변의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거북스럽지 않다. 편안하다. 수면 아래에서 요동치는 삶의 ‘조용한 꺼리’들을 무대 위로 직접 끌어올려 눈으로 확인하는 쾌감이 남다르다. 시∙공간을 초월해도 통용되는 삶의 본질에 대한 주제와, 작가 특유의 객관적이고 담담한 시각은 자유로운 감상을 허락한다. 이러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올 가을 체호프에게 제대로 빠져들게 한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를 통해 만나보는 체호프스페셜

체호프의 다양한 작품들이 공연되는 올 가을, 이 축제에 가면 체호프를 제대로 만날 수 있다. 뛰어난 국내외 현대예술작품을 소개하는 제 8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가 바로 그다. 올해 축제에는 연극 14작품 중 4작품이 체호프의 작품으로, 체호프 스페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에서 온 전통의 체호프의 작품을 만나고 싶다면 러시아 타바코프 극단의 '바냐 아저씨'(10.3-5,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를 추천한다. 이 작품은 리투아니아 출신의 젊은 연출가 민다우가스 카르바우스키스와 만든 작품으로 2005년 러시아 황금마스크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여배우상을 받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 격동기를 배경으로 도시인의 세속적인 욕망과 시골사람들의 순박함을 대비시키며 원작과 밀착된 공연을 선보인다.

러시아 연출가인 에프로스는 “저마다 자신만의 체호프가 있다”고 했다. 여기 아르헨티나의 시선이 담긴 새로운 체호프의 ‘바냐아저씨’가 온다. ‘비련의 여인을 바라보는 스파이’ (9.26~28,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가 바로 그것이다. 최소한의 무대에서 연출가 다니엘 베로네세는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채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가는 원작의 인물들을 유럽을 견디지 못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아르헨티나 조상의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한국 연출, 한국배우의 체호프가 만나고 싶다면 극단 수의 ‘벚꽃동산’ (9.12~10.12, 남산드라마센터)을 보자. 연출가 구태환이 ‘비계덩어리’ ‘나생문’에 이어 선보이는 ‘2008 고전시리즈’로 가감 없이 원전에 충실한 있는 그대로의 체호프를 선보인다. 인상 깊은 마리아에서 귀부인 라네프스까야로 변신하는 강효성과 가수에서 연기자로 변신한 데니안의 변신도 주목할만하다.

그런가 하면 체호프가 직접 집필한 작품은 아니지만, 체호프의 부인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의 삶을 다룬 작품도 무대에 오른다. 칠레 블랑꼬극단이 선보일 '체홉의 네바'(9.19-9.20,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가 그것이다. 연출가 기예르모 깔데런이 실제 인물인 올가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허구를 가미해 쓴 이 작품은, 올가와 그의 친구들이 논하는 연극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1905년 네바 강을 피로 물들인 학살 사건 '피의 일요일'과 맞물려 전개된다.

바야흐로 가을이 오면 조금은 고독해지고, 조금은 허무해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2008년 상반기 일상의 비극과 희극 사이를 오가며 그저 바쁘게만 지냈다면, 올 가을 체홉을 만나보자. 지극히 평범한 나와 같은 인물들이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숨은 그림들을 제시한다. 조금은 느긋하게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조금은 진지하게 그들의 고민과 어깨를 나란히 해보자. 그렇게 숨은그림에 동그라미가 늘어갈 때 쯤이면, 올 가을 현대 희곡의 진수도 맛보면서 일상의 발견으로 내면이 그득해지는 풍성한 가을이 될 수 있다.(김미소기자)

08. 09. 22.

P.S. 체호프와 그의 드라마에 관한 페이퍼로는 '안톤 체호프를 찾아서'(http://blog.aladin.co.kr/mramor/914178), '레프 도진과 체호프'(http://blog.aladin.co.kr/mramor/834340) 등을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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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22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체호프의 6호실을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희곡은 아니지만 내용이 좋더라구요.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도 이 소설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나구요.

로쟈 2008-09-23 00:10   좋아요 0 | URL
러시아에서는 TV용으로라도 만들어졌을 법한데요...

람혼 2008-09-22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굉장히 관극을 고대하고 있는 연극들인데, 과연 정말로 갈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행운이 따른다면 극장에서 로쟈님을 우연히 만날 기회를 얻을 수도 있겠는데요? ^^

로쟈 2008-09-23 00:10   좋아요 0 | URL
네, 어쩌면...^^
 

집안에 일이 있어서 근무 없이 '재택'만 하고 있는데, 점심에 졸음이 쏟아진 탓에 한두 시간을 혼수상태로 보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잔뜩 흐린 날씨에 아직 비는 오직 않고 있다. 해야 할일들이 너무 많아 정신줄 대신에 할일들의 줄을 놓고 싶지만, 어디 형편이 또 그런가. 그런 형편에 또 잠시 신문 사이트들을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신간 소식은 없지만, 그럼에도 기사 한 토막 정도는 스크랩해놓는다(견적이 나오는 페이퍼들은 다룰 수가 없으니 궁여지책의 '알리바이'다). 한일 역사학 원로들이 털어놓은 고백담을 묶은 <역사가의 탄생>(지식산업사, 2008)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일보(08. 09. 22) '나는 왜 역사가가 됐는가'

2001년부터 매년 가을 서울과 도쿄에서는 양국의 역사학자들이 참가하는 '한ㆍ일 역사가 회의'가 번갈아가며 열리고 있다. 한국사, 일본사, 서양사를 망라하는 양국의 대표적인 역사연구자들이 상호이해를 심화시키자는 취지로 여는 권위있는 학술회의다. 이 회의에서는 2회(2002년ㆍ도쿄) 때부터 일종의 전야제 행사로 "나는 왜 역사가가 됐는가?" 를 주제로 양국의 대표적 역사가들이 진행하는 자전적인 공개강연회가 관례화했다. 본회의도 의미있지만, 이 강연은 양국 역사학자들의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역사연구로 이어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어 사학계는 물론 일반인의 관심을 끌어왔다.

최근 발간된 <역사가의 탄생>(지식산업사 발행)은 2002~2007년 펼쳐진 이 공개강연을 묶은 책이다. 강연자들의 면면만으로도 양국 역사학계의 계보를 쓸 수 있을 정도로, 노대가들이 강연회를 진행했다. 한국측에서는 작고한 이기백(1924~2004), 고병익(1924~2004)과 김용섭(77) 등 6명의 학자들이 연사로 참여했다. 식민사관과 유물사관의 극복, 서양사 방법론의 한국화, 내재적 발전론의 입론 등 각 분야에서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학자들이다. 이타카키 유조(板垣雄三),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 와다 하루키(和田春木) 등 일본측 발표자 7명도 중동사 연구, 근현대 한일 관계사, 북한 현대사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학자들이다.

이들은 왜 역사가가 되었을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파시즘 시기에 '군국소년'으로 유년기를 보냈던 많은 일본 사학자들은 전전의 일본적 가치가 전면부정된 '전후 격동기'의 경험이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역사학 연구의 길로 이끌었다고 털어놓았다.

독일 사회주의운동사의 대가인 고 니시카와 마사오(西川正雄ㆍ1933~2008) 센슈대 교수는 종전 직후 "전차 안에서 한 중년 여인이 '우리는 도죠한테 속았다'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까지 사용하던 교과서에서 군국주의적인 문장을 모두 먹물로 칠해 지우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당시의 정신적 혼란기를 회상했다. 나카쓰카 아키라 나라여자대 명예교수는 "전쟁 전부터 천황제에 굴복하는 일 없이 비전향을 고수했던 스승 야마베 겐타로 씨로부터 일본 근대사 연구에 있어서 조선 문제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털어놓았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좌우대립,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숨 돌릴 틈 없었던 근ㆍ현대사의 체험이 역사가의 길로 인도했다고 자서(自敍)했다. 고 이기백 서강대 명예교수는 " 절망의 수렁 속에서도 오산학교의 전통이 민족에 대한 책임을 저에게 일깨워주었다"고 회고했으며, 이원순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소학교 4학년 때 일본어와 일본사를 국어, 국사라는 교과서로 공부했던 역사적 슬픔은 충격이었다"고 적었다.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전쟁의 원인이 한말 일제하 이래 계급문제, 사회모순의 집약이라고 생각이 들었다"며 농업사 연구에 투신한 계기를 밝혔다.

그들을 역사의 길로 이끈 것은 '시대의 불운'이었으나 역사학계에는 축복이었다. 이 책의 일본어판은 도쿄대출판부에서 출간될 예정이다.(이왕구기자) 

08. 09. 22.

 

 

 

 

 

 

 P.S. 신간 소개를 접할 때마다 기억력 테스트를 해봐야 한다. <역사가의 탄생>이 제일 먼저 떠올리게 해주는 책은? 하는 식. 아무래도 <나는 왜 역사가가 되었나>(에코리브르, 2001)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다. "프랑스가 배출한 세계적인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주제는 제목과 같은, '나는 왜 역사가가 되었나'. 이 책은 역사가들이 쓴 것이지만 논문 모음집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내적인 고백이나 자서전도 아니다. 이 책은 역사학에 있어 하나의 실험이다. 책을 엮은 피에르 노라는 이에 '에고 - 역사(ego-d'histoire)'라는 새로운 장르 개념을 부여하였다. 역사가들은 마치 다른 연구 대상의 역사를 기록하듯이 자기 자신의 역사를 써 내려간다. 그들이 다른 연구 대상을 향해 던졌던 종합적이고 냉철한 시선으로 말이다."라고 소개되는 책(나로선 아직 소장하고 있지 않은 책이다).

사실 이 책은 지난주에 다른 경로로도 떠올린 바 있다. 부르디외의 <호모 아카데미쿠스>(동문선, 2005)를 필요 때문에 잠시 손에 들었는데 서론에 해당하는 1장의 '이 책을 불태울 것인가?'의 에피그라프로 부르디외는 샤를 페기(1873-1914)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이 책을 불태울 것인가?'는 영어로는 "A 'Book for Burning'?"을 옮긴 것이고, '불태워야 할 책'은 이지의 '분서(焚書)'를 가리키므로 <호모 아카데미쿠스>는 부르디외의 <분서>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들은 역사가들이 하는 식의 역사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역사적 세부사항의 무한성을 철저히 고찰하기를 원하지만, 자신들이 이러한 세부사항의 무한성에서 고려의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역사적 서열 속에서 자신들이 있기를 바라지 않고, 마치 의사가 아프거나 죽기를 바라지 않는 것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샤를 페기, <돈 속편>)

여기에 인용한 것은 영역본과 비교해보니 첫문장이 오역돼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역사가들이 하는 식의 역사를 원치 않는다."는 영역본에 따르면 "Historians don't want to write a history of historians."를 옮긴 것이다. 곧 "역사가들은 역사가들의 역사를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불어 원문에 '그들'이라고만 돼 있다 하더라도 문맥상 그들이 '역사가'라는 것 정도는 옮겨줘야 이 인용문의 의미가 살아날 텐데, 일단 국역본은 그러질 않았다. 게다가 '역사가들의 역사'를 '역사가들이 하는 식의 역사'로 잘못 옮겼다.

샤를 페기가 지적하는 것은 마치 의사들이 자기가 아프거나 죽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역사가들은 자신을 역사적 질서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호모 아카데미쿠스>에서 부르디외가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학문세계와 대학제도 분석이다. 이것은 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속해 있는 세계/제도이다(부르디외는 <강의에 대한 강의>에서 자신의 사회학 강의에 대한 사회학을 시도한 바 있다). 페기의 글을 인용한 맥락이다.

<역사가의 탄생>이나 <나는 왜 역사가가 되었는가>가 다루고 있는 '에고-역사'이면서 '역사가의 개인사'이다. 그것이 보다 확장된다면 '역사가의 역사'가 될 수 있겠다. 요즘 나의 관심은 그러한 자기 반영적/반성적 인식에 쏠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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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22 22:30   좋아요 0 | URL
샤를르 페기가 한 말을 에드워드 카도 한 적이 있죠...역사가는 마치 자신들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저 높은 산정에서 산 밑을 고생하며 걸어가는 이들을 여유있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으로 여기기 쉽지만 사실은 자신 역시 보통사람들처럼 터벅터벅 걸어가는 대열 속의 한사람일 뿐이다...

로쟈 2008-09-22 22:41   좋아요 0 | URL
자신도 환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까먹는 의사들처럼 역사가들도 스스로를 열외로 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그런 건 다른 분야들에서도 일반적인 듯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