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완소남 배우 소지섭의 재기작 정도로만 알고 있던 영화 <영화는 영화다>가 '문제작'이란 사실은 최근에 영화/시사 잡지의 기사들을 보고서야 알았다. 데뷔작을 찍은 장훈 감독이 김기덕 감독 연출부 출신이란 것도. 게다가 이 액션영화의 시나리오를 김기덕 감독이 썼고, 이 저예산 영화에 100만 관객이 들었다는 것도! 그래서 정작 김기덕 감독의 최신작 <비몽>보다도 더 관심을 갖게 됐다(기회가 주어진다면 <영화는 영화다>를 먼저 보겠다는 얘기다). 주초에 읽은 시사인의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비몽>과 관련한 인터뷰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312776.html 참조).   

시사인(08. 09. 30) “영화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생사람 잡지 말고 호구조사부터 들어가자. <영화는 영화다>를 만든 장훈 감독(34)은 영화 전문지 <KINO>에서 기자로 일하다 독립영화 감독으로 두각을 나타낸 그 장훈 감독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혼동한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영화 학자조차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 고백하자면 기자도 그 장훈과 동일인물이라고 짐작했다.

그만큼 장훈 감독은 영화판 안에서조차 베일에 싸인 사람이다. 유일한 ‘정보’라고 해봐야 김기덕 감독 아래에서 오랫동안 조감독 생활을 했다는 것 정도. 미술을 공부했고, 별다른 배경 없이 영화계에 등장했다는 점도 김기덕 감독과 닮았다.

그런 그가 ‘사고’를 쳤다. 7억원도 안 들인 저예산 작품인 <영화는 영화다>가 관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제작비의 열 배 가까운 수입을 벌어들인 것이다. 평단의 반응도 뜨거웠다. 최근 지속된 한국 영화의 불황 속에 내린 단비였다. 무엇보다 그 감독이 글자 그대로 무명의 ‘신인’이라는 점에서 화제가 됐다.

감독이 배우를 조립할 순 없어

그런데 직접 만나본 장훈 감독은 영 뜻밖이었다. 혈기와 패기 넘치는 신인 감독의 풍모를 기대한 건 오산이었다. 말수가 적었고, 목소리는 낮았다. 액션 장면 난무하는 장편영화 촬영을 겨우 47일 만에 끝마친 열혈 감독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뜻밖인 건 겉모습만이 아니었다. 이 젊은 감독은 현장을 장악하려 들지 않았다. 

“어떤 배우나 스태프라도 결국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더군요. 몸이 안 될 때도 있고, 마음이 안 열릴 때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영화 속 봉 감독처럼 무리하게 주문하지는 않아요. 각자가 할 수 있는 능력에 한계가 있는데, 그 이상을 요구하다보면 어떤 경우엔 그 사람이 가진 정체성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하는 일도 생기잖아요.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영화는 찍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제가 그 사람을 다시 조립해줄 수는 없잖아요.”



장 감독에게는 김기덕 감독의 후광이 서려 있다. <영화는 영화다> 시나리오의 원작을 김기덕 감독이 썼고 영화 제작도 김기덕필름에서 맡았다. 영화 촬영 때 배우와 스태프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것도 김기덕 감독의 영향 때문이다. 혹여 김 감독의 ‘그늘’에 갇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될 법도 한데, 스스로도 김기덕 감독의 후광을 마다하지 않는다.

“김기덕 감독님에게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더 배울 것이 많지요. 특히 김기덕 감독은 다른 사람 돈으로 영화를 만들 땐 결코 손해를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어요. 영화는 로또가 아니기 때문에 대박을 꿈꾸진 않더라도 손해 보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다음 영화를 또 준비할 수 있으니까요.”

장훈 감독과 김기덕 감독의 만남은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술대학에 다니던 시절, 학교 강연에 김 감독을 초빙한 인연으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졸업할 무렵인 2003년, 취업과 영화를 고민하던 그에게 김 감독이 <사마리아> 연출부에서 일할 것을 권했다. ‘한번 일해보면’ 영화판 일을 계속할지 결정할 수 있으리라는 조언이었다. 그 뒤 연출부 막일부터 시작해, 첫 영화로 ‘입봉(첫 작품 데뷔를 뜻하는 영화계 은어)’할 때까지 둘은 햇수로 6년 동안 한 배를 탔다.     

첫 작품부터 화제를 몰고 온 걸출한 신인이지만, 그의 ‘히스토리’는 평범하기 짝이 없다. 영화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누구처럼 장안에 소문난 ‘시네마 키드’도 아니었다. 대학 시절 학내 신문에 만평을 그린 것 정도가 제법 특출난 이력이다. 

제가 원래 나서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에요. 학창 시절에도 존재감 없이 사는 게 좋았어요. 유명해지고 싶어서 영화한 것도 아니고…. 다만 영화 공부는 나름 열심히 했어요. 제가 약간 메모광인데, 영화 볼 때 늘 수첩을 옆에 끼고 이런저런 메모를 했습니다. 어두운 극장에서 메모를 해놓고, 집에 돌아와 다시 옮겨 적곤 했지요. 그러다 보면 영화에 대해 갖는 저의 생각이 좀더 구체화되고 발전하더군요. 그런 생각의 실마리를 잡아내기 위해서, 더 열심히 메모를 했습니다.”

중요한 건 영화가 아니라 삶

장 감독은 주변 동생들이 더러 영화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오면 일단 고개부터 젓고 본다. 속으로는 그들이 영화 쪽에서 일하기를 바라면서도 그렇다. 현직에 있는 선배가 ‘하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끝내 하겠다고 나서는 각오가 있어야 ‘사람답게 살기 힘든’ 영화판에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일이란 게 어렵지요. 직장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촬영 들어가면 명절 때도 집에 못 가기 일쑤고…. 어떤 감독님은 작업 공간이 없어서 PC방에서 컵라면 먹으면서 시나리오 작업을 한답니다.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들 사진을 모니터 화면에 깔아놓고, 힘들 때마다 그 사진 보고 힘내서 시나리오를 쓰는 거죠. 그럼에도 이 일을 계속하는 걸 보면 설명하기 힘든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영화는 영화다>에서 영화배우 수타(강지환)가  “당신이 연기가 뭔지 알아?”라고 묻자 주인공 강패(소지섭)는 이렇게 답한다. “연기란 게 별 거 있나, 인생 잘 만나서 편하게 남 흉내나 내면서 사는 거지.” 장훈 감독에게도 똑같이 물었다. 당신, 영화가 뭔지 아느냐고.

“아직은 ‘삶을 위한 은유인 것 같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네요. 삶이 중요하지요. 하지만 영화 작업을 더 하다보면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어떤 영화를 만드느냐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것이겠죠. 그래서 매번 새로운 해답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는 영화다’라고 당차게 선언한 젊은 감독의 해답 찾기는, 실은 이제 막 시작인 셈이다.(이오성기자)

장훈 감독 : 1975년생. 대학에서 시각디자인 전공하고 졸업 뒤 김기덕 감독 연출부 생활.  2003년 <사마리아> 연출부 / 2004년 <신부수업> <빈집> 연출부 / 2005년 <활> 조감독 / 2006년 <시간> 조감독 / 2008년 <영화는 영화다> 연출.

08. 10.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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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03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나서 영화평 멋지게 써주세요.소지섭,강지환은 정말 훤칠하고 길쭉길쭉하죠?

로쟈 2008-10-04 00:56   좋아요 0 | URL
조만간 볼 기회는 없을 듯싶은데요.^^;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부산영화제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외지인'도 물론 그런 축제에 손님으로 참여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부산 시민들(만)의 '특권'이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서울에는 없는 것 하나씩을 지방도시들이 다들 나눠가진다면 좋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오늘 개막한 제13회 영화제에도 개막작 <스탈린의 선물>을 비롯해서 눈길을 유혹하는 영화들이 많다. 모두 그림의 떡이라 생각하지만, 왕가위의 <동사서독 리덕스>는 '떡 중의 떡'으로 특히나 침이 고이게 만든다. 기본 골격은 달라지지 않았을 법한데, 어떻게 새로 편집됐는지 궁금하다. 게다가 홍콩 최고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영화이니만큼, 허무하고도 허무한 인생사를 주제로 함에도 불구하고 호사스럽고도 호사스러운 영화가 아니었던가(나는 첫 개봉 당시 명보극장과 명보아트홀에서 연거푸 본 기억이 있다. 같은 날 저녁에). 정식으로 개봉되기를 기대한다.

한국일보(08. 10. 02) '동사서독…' 부산서 놓치면 후회할 영화들!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는 필리핀과 중앙아시아 등 그 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권 영화들에 주목했다. 카자흐스탄 영화 <스탈린의 선물>(감독 루스템 압드라쉐프)가 개막작으로 지정된 것이 그 방증이다. 아시아권 23개국에서 초청된 50여 편의 영화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색다른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인 필리핀-프랑스 합작 영화 <서비스>(감독 브리얀테 멘도사)는 현대를 사는 인간의 위선을 비판한 수작이다. 여성들에게는 죽어가는 커리어우먼의 마지막 100일을 그린 필리핀 영화 <100>(감독 크리스 마르티네즈)를 추천한다. 이 외에도 필리핀 영화 <고해><제이>와 카자흐스탄 영화 <무당의 춤>도 눈에 띈다.

보다 상업적인 영화를 원하는 팬들에게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 리덕스>가 제격이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도 특별 상영됐던 <동사서독 리덕스>는 고(故) 장국영의 모습을 비롯해 홍콩 유명배우를 한꺼번에 만들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영화 <참새>(감독 두기봉)는 오랜만에 홍콩 누와르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아시아 각국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 섹션인 '아시아의 슈퍼히어로'로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영웅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홍길동의 이야기를 다룬 1967년작 <홍길동전>(감독 신동헌)을 비롯해 <머큐리맨>(태국) <라스틱맨>(필리핀) <치착맨2>(말레이시아> 등 다양한 '맨'을 만나볼 수 있다. 끝으로 영화제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개막작 <스탈린의 선물>과 폐막작 <나는 행복합니다>(감독 윤종찬)은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다.(안진용기자)

08. 10. 02.

P.S. <동사서독 리덕스>의 예고편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Oos8-vS6Dz4 참조. 더불어, 칸느영화제에서의 특별시사회에 관한 뉴스보도는 http://www.youtube.com/watch?v=2MKW28H1xHI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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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3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3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8-10-03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참 좋아했던 영화입니다. 이번 영화제에서도 제일 먼저 표가 동났다고 하더군요.
시간이 되어 다시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로쟈 2008-10-03 21:08   좋아요 0 | URL
아, 부산이시죠?!^^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꼽아본 지도 딱 1년이 됐다. 해서 '10월의 읽을 만한 책'이란 제목은 작년에 이어 두번째로 단다. 이렇게 10번, 같은 제목을 달면 후딱 10년이 지나갈 터이니 그땐 50대 지천명이요, 인생무상이겠다. 바라건대, 그런 불상사는 없었으면 싶다(좀더 폼나는 일들이 있지 않겠는가?). 절반은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이니 빨리 해치우도록 하겠다(도서 이미지의 사이즈가 변경된 탓에 이번부터는 분야별로 3권씩만 꼽는다). 여러 가지 사정상 책읽을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을 만한 책들'을 꼽자니 적개심까지 솟는다. 책들에게 묻고 싶다. "나오기만 하면 다야?" "니들이 독자를 알어?" (약간 과장해서) "요즘 밥 먹기도 힘들어!" 들은 체도 않는군...

1. 문학

작가 신경숙씨가 꼽은 문학분야의 책은 아모스 오즈의 <숲의 가족>(창비, 2008). 작가의 이름은 생소하지 않지만 나는 읽은 작품이 없는 작가다. "아모스 오즈는 이스라엘 출신의 지식인이며 세계적으로는 명망 있는 작가이다. 여기에 소개하려는 <숲의 가족> 이외에도 많은 저서를 가지고 있으며 이스라엘에서 영향력이 크고 존경을 받는 작가이다. <숲의 가족>은 겨우 138쪽밖에 되지 않은 짧은 소설이지만 다 읽고 나면 그 울림이 큰 소설이다." 얇은 소설이므로 더이상은 소개는 옮겨오지 않도록 한다.

곧 시즌이 다가오지만 심심찮게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오즈의 책으론 <나의 미카엘>(민음사, 1998)을 비롯해서 여러 권이 출간돼 있다. <지하실의 검은표범>(지식의숲, 2007)이 작년에 나온 책이고, 먼저 나온 책들 가운데는 <여자를 안다는 것>(열린책들, 2001/2006)이 눈길을 끈다. 타이틀상으로는 말이다. 생각해보니 이스라엘 작가로는 에프라임 키숀 외에 아모스 오즈 정도가 아는 이름이다. 더 소개된 작가가 있는지?..

2. 역사

이덕일씨가 꼽은 역사분야의 책은 '인물로 보는 남북 현대사'를 표방한 <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역사비평사, 2008)이다. "박정희와 김일성(정치), 염상섭과 한설야(문학), 유진오와 최용달(법학), 이태규와 리승기(과학), 윤봉춘과 문예봉(영화) 등 각 분야의 대표적인 인물을 통해 남북 각 분야의 흐름과 현재의 동향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 책이다. "각 분야의 대표적인 두 사람의 삶을 통해 때로는 남북의 이질성을, 때로는 동질성을 느낄 수 있다"고.  

라이벌이라고 하니까 최근 첫 세 권이 출간된 손세일의 <이승만과 김구>(나남, 2008)이 떠오른다. 분량으로 미루어보자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가장 방대한, 따라서 가장 자세한 평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콜린 에번스의 <라이벌>(이마고, 2008)도 같은 컨셉의 책이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역사 속의 10대 앙숙들'이 부제. 별로 재미는 못본 책인 듯싶은데, 그 10대 앙숙들의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세계사'의 라이벌이라고 하기엔 시야가 좀 좁긴 하군).

엘리자베스 1세 vs 메리 | 종교문제로 위장된 두 여왕의 권력 다툼
올리버 크롬웰 vs 찰스 1세 | 지상의 왕과 천상의 왕이 맞붙다
애런 버 vs 알렉산더 해밀턴 | 상대방에 대한 음모와 술수로 결국 자신을 파멸시킨 미국의 두 정객
해트필드가 vs 매코이가 | 돼지 한 마리로 시작된 두 가문의 유혈 복수극
요시프 스탈린 vs 레온 트로츠키 | 철의 장막 뒤에 감추어진 검은 음모와 비정한 암살극
로알드 아문센 vs 로버트 F. 스콧 | 죽음을 통해 패배를 승리로 뒤바꾼 대역전의 드라마
심프슨 부인 vs 퀸 마더 | 왕비가 되고 싶었던 미국 여인과 왕비가 되기 싫었던 영국 여인
버나드 로 몽고메리 vs 조지 패튼 | 실리보다 명예를 좇다 오점을 남긴 연합군의 쌍두마차
린든 B. 존슨 vs 로버트 F. 케네디 | 존 F. 케네디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두 야심가
에드거 후버 vs 마틴 루터 킹 | 20세기 미국의 진정한 우상은 누구인가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꼽은 철학분야의 책은 제롬 클레망의 <하루 10분 딸과 함께 문화논쟁>(에코리브르, 2008)이다. 생소한 책인데, 소개는 이렇다. "이 책은 문화를 놓고 펼치는 부녀간의 대화이다. 아버지는 저명한 문화 행정가이고 딸은 열일곱의 발랄한 학생이다. 이야기는 일상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쉽고 짧게 이어진다. 복잡하고 추상적인 말은 없고 엄숙한 이론도 없다. 있는 것은 일단 커다란 세대차이다. 세대차이가 커다랗게 벌어지다가 다시 좁혀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대화는 다양한 주제들을 가볍게 풀어가고 있다. 인종, 종교, 언어, 전쟁, 예술, 문학, 영화, 철학, 유행, 독서, 인터넷, 게임, 드라마, 햄버거, 청바지 등등이 그런 것이다."

굳이 철학서로 분류할 필요는 없을 성싶은데(알라딘 분류상으론 '청소년을 위한 문화/예술'이다. 내가 못보고 지나칠 만하다), 나도 딸아이를 두고 있는지라 눈길이 조금 머물기는 한다(그런 대화라면 나는 10년쯤 후에 해봐야겠다). 실제 청소년을 위한 교양철학서로 생각나는 것은 빗토리오 회슬레의 <철학이 알고 싶어요>(문학사상사, 1997)이다. 독일의 이 저명한 철학자가 노라 카라는 12살짜리 소녀와 2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토대로 한 책이라 한다. 국내서로는 김용규의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주니어김영사, 2006) 시리즈를 들 수 있겠다...

4. 정치

손호철 교수가 꼽은 정치분야의 책은 육성철의 <세상을 향해 어퍼컷>(샨티, 2008)이다. 소개를 읽어봐야 감은 잡을 수 있는데, "일상에 부딪히는 부조리와 인권침해에 대해 굴종하지 않고 싸운 38명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담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책이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론 "국가인권위원회에 인권침해 소송을 제기한 사연 중 재미있으면서도 의미 있는 사건들을 소개한 이 책은, 인권문제를 거창하고 어려운 이론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들의 이웃의 이야기를 통해 깨우치게 해 주는 뛰어난 인권교과서이다."

인권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이 분야의 책들을 활발하게 펴내고 또 소개하고 있는 조효제 교수이다. 지난 여름에 나온 <인권의 풍경>(교양인, 2008)과 함께 그가 번역한 <세계인권사사상>(길, 2005) 정도는 기억해둘 만하다. 책 이름을 기억하는 것 정도는 돈 드는 일이 아니다(기억해두면 나중에 도서관에서라도 손길이 미칠 수 있다).

5. 경제/경영

이번달부터는 추천자가 정운찬 교수에서 이준구 교수(서울대 경제학부)로 바뀌었다.  첫 추천도서는 <상식 밖의 경제학>(청림출판, 2008). 표지는 좀 값싸보이는데, 은근히 입소문이 난 책인가 보다. MBC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의 진행자 유종일 교수의 추천사는 이렇다. "경제학에 과연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올까?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는 가정 하에 성립된 표준경제학의 강력한 이론들이, 과연 행동경제학이 실험을 통해 보여주는 ‘체계적인 비합리성’의 증거 앞에서 천동설처럼 무너지고 말 것인가? 경제학의 새로운 기초를 놓아가고 있는 행동경제학의 맛과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책이다." 재미있는 책인가 보다.

똑같이 상식과 통념에 도전한다고 광고되었던 책은 스티븐 레빗 등의 <괴짜경제학>(웅진지식하우스, 2005)이 있다.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였다는 이 책은 "마약 판매상은 왜 어른이 되어도 부모와 함께 사는걸까? 어린이에게 어떤 것이 더 위험할까, 총 아니면 수영장? KKK와 부동산 중개업자의 공통점은? 낙태의 합법화가 범죄율을 줄였는가? 온라인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거짓말은?" 등의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 나도 구입했던 책이다. 더불어, 도모노 노리오의 <행동경제학>(지형, 2007)도. 1년에 내가 구입하는 경제분야의 책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이므로 예외적인 책들이기도 하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꼽은 사회분야의 책은 로빈 메레디스의 <마오를 이긴 중국 간디를 넘은 인도>(이슬, 2008)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67억 세계인구의 약 37%를 차지하는 중국과 인도가 국가경제의 틀을 어떻게 혁신함으로써 세계인이 주시하는 고성장 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는가를 저자 특유의 통찰과 풍부한 예증으로 알기 쉽게 풀이한 시사성 교양서이다." 재미있게도 원제는 '코끼리와 용(The Elephant and the Dragon)'이다.

중국을 다룬 책으로 손호철 교수의 현지 르포 <레드로드>(이매진, 2008)도 꼽을 만하다. 인도에 관한 책으론 인도문화 전도사를 자임한다는 델리대 김도영 교수의 <인도인과 인도문화>(산지니, 2007)도 눈에 띈다. 20년 동안 인도에 살면서 들여다본 인도인과 인도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고 한다. 

7. 과학

장경애 편집장이 꼽은 과학분야의 책은 얼마전 같이 사고를 당한 제자의 가족으로부터 손해배상 소송을 당해 기사가 뜨기도 했던 이상묵 교수(와 강인식 기자)의 <0.1그램의 희망>(랜덤하우스코리아, 2008)이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고서 다시 과학자로서 재기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므로 과학분야의 책이라기보다는 인물/평전분야에 해당하는 책이다.

이교수가 '한국의 스티븐 호킹'으로 불리기도 하는 만큼 같이 생각나는 책은 <스티븐 호킹 과학의 일생>(해냄, 2004). 그의 전 아내 제인 호킹이 쓴 <스티븐 호킹: 천재와 보낸 25년>(흥부네박, 2000)도 오래전에 출간됐었다. 과학자의 사생활이야 사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고, 때론 모르는 게 더 나을 때도 있지만...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200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작가, 2008)이다. '작가'는 책을 낸 곳이다. 재작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이 '오늘의 영화'는 1년간 국내에 소개된 영화들의 면면과 의의를 짚어보는 기획으로 유익해 보인다. 가령, 이런 식이다. "2008년에 국내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두 편의 영화는 국내의 <밀양>과 국외의 <색, 계>였다. <200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는 이 두 작품을 포함한 총 20편의 영화를 ‘2008년의 영화’로 뽑았다. 그리고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작품에 대해 다양한 해설과 평, 그 영화의 독특한 작품성 등을 재미있게 실었다."

영화관련서로는 조흡 교수의 <영화가 정치다>(인물과사상사, 2008), 그리고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의 이행기적 성찰'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김소연의 <실재의 죽음>(도서출판b, 2008)도 한번쯤 손에 들어봄 직하다. 전자가 현단계 한국문화에서 영화가 놓여 있는 컨텍스트를 분석하고 있다면 후자는 한국영화의 한 흐름에 대한 자세한 정신분석적 비평을 시도하고 있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꼽은 교양분야의 책은 최절주의 <해피...엔딩, 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궁리, 2008)이다. 저자나 책이나 모두 낯선데, 저자는 전직 언론이고 책은 죽음의 철학이 아니라 죽음에 관한 심층취재 다큐멘터리라 한다. "크게 보면 1부에서는 미국인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 2부에서는 일본인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다룬다"고.

바로 떠오르는 책은 얼마전에 출간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죽음과 죽어감>(이레, 2008) 소위 '사망학' 분야의 고전인데,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이 겪는 심경의 변화를 상징화한 '죽음의 5단계'를 정리.소개해 지금까지 줄곧 죽음을 앞둔 환자 자신뿐 아니라 시한부 환자들을 대해야 하는 의사 및 간호사, 그리고 그 환자들 곁에서 도움을 주는 성직자들과 호스피스 봉사자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고 하는 책이다. 그 5단계를 선구적으로 묘파하고 있는 소설이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작가정신, 2005)이다. 죽음뿐만 아니라 톨스토이를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책이다.  

10. 언어

보통 평전류를 마지막으로 꼽고는 했는데, 이달에는 '죽음' 얘기도 나온 김에 언어의 죽음을 주제로 한 책들을 골라놓는다. 최근 출간된 <언어의 종말>(작가정신, 2008)을 비롯해서 <언어의 죽음>(이론과실천, 2005),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이제이북스, 2003) 등이 관련된 책들이다. 몇몇 언어만이 팽창/확장해가는 '언어 제국주의' 시대에 언어의 다양성의 문제에 대해서 한번쯤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올해는 또 영어 공용어화 논란이 있은 지 10년째 되는 해이기도 한데,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에 대해서도 한글날에 즈음에 생각해보면 좋겠다...

08. 10. 01.

P.S. 이달의 고전은 내친 김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룬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원전 번역을 포함하여 여러 종의 번역이 나와 있으며 예전에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고 더 많이 소개됐던 책이다. 박홍규 교수의 <소크라테스 두번 죽이기>(필맥, 2005)도 길잡이 삼아 읽어보면 좋겠다. '길잡이'라기보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반민주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서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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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01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세일 씨는 약 40년 전 <이승만과 김구>를 펴낸 후 정말 엄청난 증보판을 내기 시작하는군요.초판의 10배는 될 걸요.월간 조선 연재할 때 보니까 최근의 연구성과도 두루두루 섭렵했더라구요.70이 넘었는데 대단한 열성이죠.

로쟈 2008-10-01 22:36   좋아요 0 | URL
40년전 초판이면 대체 언제 나온 건가요?!.. 아, 1970년에 냈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시사평론선인 <인권과 민족주의>엔 1975년 글 중에서 이승만 살리기를 비판하는 것이 있어요.4,19정신이 시들해져가는데 이승만 살리기는 말도 안된다...그런 내용이지요.초판<이승만과 김구>는 구하기가 힘들어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헌책방에선 <인권과 민족주의>를 샀죠.

로쟈 2008-10-02 22:23   좋아요 0 | URL
균형감각은 있는 언론인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정희 시대 때만 해도 이승만과 차별화하려는 노력 때문인지 그다지 지금 같은 이승만 살리기는 탄력을 못 받았던 것 같아요.이승만이나 장면은 모두 구시대 정치인이고 군인인 자기들이 진보나 근대화 세력이라는 자부심에 그 전임자들을 깎아내렸죠.사실 박정희 열풍도 문민정부 이후의 현상이죠.

로쟈 2008-10-03 21:13   좋아요 0 | URL
박정희주의자들의 이승만 숭배는 넌센스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3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을 생산해내는 방식의 변화라고나 할까요...

로쟈 2008-10-04 09:22   좋아요 0 | URL
생산해내면서 편의적으로 이용해먹는 방식 같습니다...
 

내일자 한겨레에서 조순 전 경제부총리의 릴레이 기고를 스크랩해놓는다.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 사태를 신자유주의의 '거픔'이 터진 것으로 규정하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얻어야 하는 교훈에 대해서 짚어주고 있는 칼럼이다. 경제전문가들조차도 이번 사태의 끝을 가늠할 수 없다고 하니(당연히 임기응변식 처방 외에 마땅한 대책도 제시되지 않을 터이다) 두고볼 밖에.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예언대로 본격적인 '이행기' 모드로 진입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겨레(08. 10. 01) [특별 릴레이 기고] 신자유주의 ‘거품’이 터졌다

미국 금융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7000억달러의 공적자금 투입 법안이 하원에서 부결됐다. 최악의 금융 위기가 크나큰 경제위기로 확대됐다. 경제는 이제 막 길고 캄캄한 터널로 진입했다. 언제 어떻게 그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 확실한 것은 터널 속의 세월은 길고 추울 것이며, 그 출구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금융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거품에 있었다. 오랫동안 주식과 부동산에 조성된 거품이 지난 8월부터 계속 터지고 있다. 거품이 터짐으로써, 개인과 금융기관이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개인소비가 줄고 기업의 수익이 격감했다. 약 일주일 동안 미국전역에서 회사채 발행이 한 건도 없는 상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어떤 미국 국회의원의 말을 빌린다면, 미국경제는 곧 심장의 고동이 멈춰질 지경이었다. 우선 심장마비는 막아야 하기 때문에, 7000억달러 구제금융 법안이 나온 것이다.


미국은 원래, 금융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나라였다. 미국 사람들은 원래 흥청망청하는 국민이 아니다. 그런 미국에 왜 이런 거품이 생겼는가. 그 이유는 1980년대 말부터 경제정책의 중점이 ‘메인스트리트’로부터 ‘월스트리트’로 옮아갔기 때문이다. 월가출신 인물이 계속 중앙은행 총재 자리를 지켰다. 재무장관도 월가 출신이 많았다. 경제정책의 기조는 월가의 이익이 되도록, 가급적 유동성을 많이 공급하여 자산시장을 부추겼다. 종래 경제정책의 중점이었던 산업구조, 국제수지, 사회보장, 서민생활 등은 사각지대로 물러났다.

월가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금융에 대한 기본을 망각했다. 원래 금융업이란 남의 돈을 가지고 차질없이 운영해야 하는 기업이다. 때문에 좋은 금융가는 보수적이어야 하고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월가 사람들은 너무 자유롭게 자기 이익만 챙겼다. 그러다가 이번의 덜컥수에 걸렸다. 그린스펀 전 연준의장은 최근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금융에 작동해야 경제가 잘 된다는 말을 했다. 19년이나 중앙은행 총재직을 지킨 사람이 이런 글을 쓰다니,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였다. 아연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소련이 망한 후로 1990년대 미국에는 장밋빛 도취감이 감돌았다. 이제, 전쟁과 혼란의 역사는 끝났다, 자유방임을 하면 다 잘 된다, 정부는 작을수록 좋다, 경상수지 적자 따위는 문제 없다, 기업은 주가를 올리면 된다, 이런 식이었다. 자유화, 개방화, 민영화, 작은 정부면 그만이라는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에 확산됐다. 남미, 아시아, 러시아 등의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월가의 금융꾼들은 많은 이익을 챙겼다.

아! 그러나, 인간의 시야는 짧은데 비해 세상은 빨리 변한다. 환락이 지나치면, 비애가 온다. 미국경제가 부메랑 효과를 맞았다. 개도국이나 맞아야 할 ‘국제통화기금(IMF) 폭탄’을 미국이 맞은 셈이다.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했다. 5대 투자은행이 거의 다 몰락했다.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 에이아이지(AIG)가 ‘구제’를 받았다.

문제는 장래이다.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다. ‘구’자유주의의 난맥을 처리한 1930년대 ‘뉴딜’식 정책이 나올 것인가. 그 가능성은 원래는 없었다고 나는 보았지만, 이제는 모종의 ‘뉴’ 뉴딜이 불가피해진 것도 같다. ‘신’자유주의는, 많은 자유주의자들의 뜻과는 달리 숨통이 막혀버렸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가지고는 경제의 실물부문의 문제들, 이를테면, 국내총생산(GDP)의 6%에 달하는 경상수지 적자, 0%의 개인 저축, 70년대 이후로 실질적인 증가 없는 근로자 소득, 의료혜택 없는 4700만 미국인, 깊어가는 양극화 등의 현실을 바로잡을 수 없다.

7000억달러는 미국 당국이 가지는 마지막 카드였다. 그것은 사실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미봉책으로 붕괴된 시스템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사실 7000억 달러를 가지고 충분할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의회도 모르고 있었다. 매케인도 오바마도 이 카드에 찬성했다. 앞으로의 경제에 대한 아무런 의견도 그들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영·미의 금융모델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세계를 위해 우선 미국이 바른 길을 찾기 바란다. 심리적인 공황을 벗어나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 심기일전, 상상력을 발휘하기 바란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각론은 아직 논할 단계가 아니다. 총론은 명백하다. 첫째, 신자유주의는 언제 어디서나 못 쓴다. 미국도 이 과정을 졸업했다. 둘째, 나라가 잘되자면, 정부와 민간의 역할 분담이 잘돼 있어야 한다. 민간이 정부를 대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셋째, 금융부문과 실물부문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넷째, 금융가는 용감해서는 안 된다. 지나친 이노베이션을 해서도 안 된다.(조순/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 부총리)

08. 0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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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8-10-01 10:00   좋아요 0 | URL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이 사람은 천상 학자인데 왜 정치판에 뛰어들어 그 험한 꼴들을 봤나 싶은 거예요. '원로'만이 쓸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분석이 참 좋네요. 고맙습니다.

로쟈 2008-10-01 20:27   좋아요 0 | URL
인간 자체가 정치적 동물이라면 '정치판'이 따로 있는 건 아닐 테지요. 한국어의 '정치'란 그냥 권모술수의 동의어가 돼버렸지만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1 22:26   좋아요 0 | URL
그린스펀도 아담 스미스를 중학교 사회교과서로만 배웠나 보군요.

로쟈 2008-10-01 22:34   좋아요 0 | URL
저금리 기조 때문에 부실 대출이 급증했다고 하니까 그린스펀도 면책 대상은 아니죠...

노이에자이트 2008-10-01 23:13   좋아요 0 | URL
미국 플로리다 어느 동네는 완전히 유령마을이 되었더군요.빈 집에 차압딱지 붙은 집 투성이...그나마 사람사는 집도 이사갈 준비를 하는데...이러려고 소련을 무너뜨렸나요?

로쟈 2008-10-02 22:22   좋아요 0 | URL
미국도 무너지는 거겠죠...
 

오전에 예기치않게 병원에서 시간을 죽이게 됐다. 빈손으로 TV만 바라보는 건 불쾌한 일이어서 부랴부랴 편의점에서 신문을 사들고 와 꼼꼼하게(!) 읽었다(그래도 시간이 남아 여성지까지 들췄지만). 그 중 마음에 든 칼럼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원전인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다시 읽으며 미국 금융위기의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오늘의 빅뉴스는 미국의 금융구제안이 하원에서 부결됐다는 소식이어서 타결을 전제로 한 아침신문의 기사들이 '어제' 신문의 기사가 돼버렸다).    

경향신문(08. 09. 30) 맥베스의 ‘보이지 않는 손’

김정환 시인이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에 나섰다. 그 첫 결실이 지난달 5권짜리로 나왔다. 4대 비극 가운데 나는 ‘맥베스’부터 손을 댔다. 인간의 야망과 탐욕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빠른 템포로 보여주기도 하거니와, 세계 경제를 뒤흔들어 놓고 있는 월스트리트의 금융위기 상황 탓이기도 했다. 월가의 이른바 금융공학의 ‘천재’들과 정부가 끼어들지 말아야 시장의 창의성이 발휘된다고 목청을 높여온 시장 만능주의자들이 ‘탈(脫)규제’의 신주단지로 떠받들다가 막상 위기가 터지니까 보이지 않게 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 그 첫 발설자인 맥베스의 육성을 김 시인의 번역으로 다시 듣고 싶었던 것이다.

'맥베스’는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가 마녀의 예언에 혹해 던컨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지만, 예언대로 제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하고 던컨의 아들에게 복수의 죽임을 당한다는 줄거리다. 그 과정에서 맥베스는 역모에 동참한 친구 뱅쿼의 아들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은 두려워해 이들 부자를 살해하려 자객을 보내는데, 불안해하는 아내에게 “모르는 게 좋아, 내 여보는, 나중에 박수만 치면 돼”라며 이렇게 말한다.

- 이기심에 대한 파멸이 原典 -

“오라, 눈꺼풀 꿰매는 밤, 가려다오, 목도리로, 가여운 날의 부드러운 두 눈을, 그리고 피비리고 보이지 않는 네 손으로 말살하고 갈가리 찢어라, 그 위대한 생명의 임대 계약을, 그것이 나를 계속 창백하게 하노니. …나쁘게 시작된 일은 나쁜 짓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노니.”

이것이 애덤 스미스의 말이라며 경제를 안다는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보이지 않는 손’의 원전이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자본을 국내 산업의 지원에 사용하고 노동생산물이 최대 가치를 갖도록 노동을 이끈다면, 각 개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수입을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가 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된다…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목적을 증진시키게 된다”고 했다. 탈규제론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그것이 누적돼 결국 더 나은 사회가 된다’며 보이지 않는 손을 시장 만능주의의 제단(祭壇)에 모셔왔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를 지낸 경제학자 존 케이는 이게 잘못이라고 꼬집는다. 셰익스피어와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기원을 스미스의 책에서 찾으려 하거나, 현대 경제를 이해하는데 그의 말을 끌어다 쓰는 것은 실수”라고 잘라 말한다. ‘도덕감정론’을 쓴 윤리학자이자 셰익스피어의 팬이었던 스미스는 인간의 마음이 나쁜 것에 물들기 쉽다고 보았던 만큼 자유주의를 찬양하기 위해 이 말을 쓰지도 않았을뿐더러, 맥베스의 이기적 행동이 사회 전체의 후생을 증진시키기는커녕 자신까지 파멸로 이끈다는 교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월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렇다. 시장 만능주의자들의 신주단지는 헛것이었지만, 맥베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섭리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규제를 피해가며 첨단 금융공학을 통해 고위험 고수익의 복합 금융상품을 팔아 재미를 봤던 투자은행들이 몰락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규제 받지 않는 이기심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봉사한 것이 아니라, 탐욕의 종점이 언제나 비극일 수 밖에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 美금융위기도 ‘탐욕의 종말’ -

실물을 뒷받침해 경제를 돌리는 도구이어야 할 금융이 ‘몸통을 흔드는 꼬리’가 된 것이 ‘금융 무정부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는 데 국제사회에 이견은 없다. 금융뿐 아니라 경제시스템에 대한 대대적 수리가 필요하다는 게 금융선진국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그런데 우리 정부만 규제개혁 속도론을 외치며 워싱턴과 월가 사람들이 용도폐기한 신주단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400년 전의 셰익스피어를 다시 불러내고, 맥베스의 피비리고 보이지 않는 손을 지금 읽어야 한다며 슬그머니 번역을 내놓은 김 시인의 혜안이 돋보일 뿐이다.(유병선|논설위원)

08. 0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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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EAV 2008-10-01 08:49   좋아요 0 | URL
'원전읽기'의 중요성이랄까요, 혹은 유사-과학(공학)이고 싶거나, 지식-권력이고 싶은 경제학사 없는 경제학의 한계랄까요? 아무튼 『도덕감정론』은 커녕 『국부론』도 읽지 않는 경제학자들을 비꼬던 『아담 스미스 구하기』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로쟈 2008-10-01 20:24   좋아요 0 | URL
안 읽어도 생색을 낼 수 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