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주말 북리뷰에서 '처리'해야 할 책들이 몇 권씩은 된다. 이번주엔 리하르트 다비드 프레히트의 <나는 누구인가>(21세기북스, 2008)도 그 중 하나다. 생소한 저자나 흔한 책 제목은 전혀 눈길을 끌지 않지만, '독일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라는 광고문구는 호기심을 유도한다. 독일 사람들이 열광(?)하는 책은, 특히나 철학책은 어떤 것일까, 란 궁금증. 저자는 학술 저널리스트라고 한다(흠, 저널리즘적인 '글발'에 기댄 책인가? 하지만 철학박사이기도 하다). 국역본은 저자의 사진을 띠지에 크게 박아놓았는데, 젊은 저자의 '외모'로도 승부를 보려는 심산인가 보다. 아동틱한 독어판의 표지와 대비된다...

경향신문(08. 10. 11)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와 뇌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시오는 서로 가는 길은 달랐지만 가고자 하는 곳은 같았다. 연구 분야는 달라도 그들은 평생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매달렸다. 데카르트가 찾은 인간이해의 열쇠가 ‘이성’이었다면 다마시오가 발견한 답은 ‘감정과 느낌’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철학이라 부르는 학문은 데카르트를 논하고 이성에 천착할 뿐 다마시오를 거론하거나 감정을 중시하지 않는다. 독일의 학술저널리스트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사진)가 볼 때 인간을 이해하는 데 이성과 감정 가운데 어느 하나가 우위에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성과 감정을 아울러야 ‘나라는 존재’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철학은 뇌신경과학의 성과를 쉬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철학과 뇌신경과학은 따로 논다. 심리학, 생물학에 대한 철학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배워왔던 철학의 틀만으로 인간 이해에 다가갈 수 없다고 여긴다. 책은 ‘육체적인 나’에서 ‘도덕적인 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나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을 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왜 남을 돕는 것일까’ ‘도덕은 타고 나는 것일까’ ‘조물주는 계시는가’ 등 살면서 한번쯤은 부닥쳐 봤을 법한 질문 34가지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저자는 기존 철학 교육이 불만이었다. 지나치게 사상의 역사적 서술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철학 교육이 학생의 지적 창의성과 사색을 북돋우기보다 암기 능력만 키워주는 아카데미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루하지 않은 철학 입문서를 쓰고 싶었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다양한 학문과 주제를 넘나들며 철학의 원초적 질문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흡사 딱딱한 철학 개론서에 강렬한 한 방 펀치를 날리는 듯하다.

가령 미국 TV시리즈 <스타트렉>의 등장인물 미스터 스폭을 통해 ‘감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나열한다. 스폭은 감정이 거세된 채 이성적 사고만 하는 외계인이다. 저자는 스폭을 통해 감정과 이성의 차이·양면성을 알기 쉽게 드러낸다. 그러나 결코 유치하지 않고 논리가 정연하다. 또한 동물도 고통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피터 싱어를 통해 ‘동물을 먹어도 될까’라는 윤리적 질문에 다가간다. 고래의 고통을 꼼꼼하게 설명하면서 환경보호론에 담겨 있는 철학적 질문을 더듬어보기도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34가지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이 어렴풋이 손에 잡힐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취하는 철학의 태도는 ‘장르 파괴’이자 통섭이다. 철학 고유의 문제의식만으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학문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소유욕에 대해 성찰할 때 게오르크 짐멜 못지않게 로빈슨 크루소를 주목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안락사, 배아 복제, 자살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한 성찰도 적지 않다. 이 책이 여타 철학 개론서와 다른 점이다.

이 책은 지난해 독일에서 철학 입문서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에 등극, 1년간 45만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풍부한 일화를 통해 철학에 쉽게 다가가게 만드는 글솜씨가 인정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학년 논술교재로도 괜찮을 듯하다.(서영찬기자)

08. 10. 12.

P.S. 독일에서도 인정받은 글솜씨가 어떤 것인지 한번 '구경'해봐야겠다. 타이틀만 놓고 보자면 개인적으로 더 관심이 가는 책은 작년에 같이 나온 책 <Lenin kam nur bis Lüdenscheid>이다. 좌파 가정에서 자란 자신의 어린시절을 다룬 자서전인 듯싶다(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http://www.lenin-film.de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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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의 생각
    from sanghyun's me2DAY 2008-10-13 02:59 
    철학 교육이 학생의 지적 창의성과 사색을 북돋우기보다 암기 능력만 키워주는 아카데미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hahaha 2008-12-12 18:18   좋아요 0 | URL
이 영화 보고 싶네요! /ㅅ/ 언젠가 들어오려나?

로쟈 2008-12-12 23:29   좋아요 0 | URL
네, 재미있을 듯싶어요...
 

미국식 탐욕의 대명사라면 단연 '월스트리트이다. '금융자본 권력의 역사 350년'을 다룬 존 스틸 고든의 <월스트리트 제국>(참솔, 2002)은 그런 점에서 '뒤늦게' 눈길을 끄는 책인데, 마침 참고할 만한 칼럼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미국 관련 기사들을 연이어 스크랩해놓은 계기가 된 칼럼이다.



경향신문(08. 10. 11) [서재에서]탐욕의 거리, 월스트리트

“탐욕스러운 월스트리트 금융귀족들의 실패를 왜 납세자의 돈으로 구제해야 하느냐. 월스트리트 스스로 구제금융 자금을 조성하라.”

부시 미 행정부가 마련한 7000억달러 구제금융안을 연방 하원에서 처음 표결할 당시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의 격앙된 주장이다. 표결 토론을 보면서 마이클 더글러스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월스트리트>가 먼저 떠올랐다. 이 영화에서 기업 사냥꾼인 주인공 고든 게코(더글러스)는 텔다 페이퍼 주주총회에서 소리 높여 연설한다.



탐욕은 좋은 것입니다. 탐욕은 옳은 것입니다. 탐욕은 효과가 납니다. 탐욕은 명료하게 하고, 헤치고 나가게 하며, 전진하는 정신의 진수(眞髓)를 북돋웁니다. 탐욕, 그 모든 것들 중에서 인생, 돈, 사랑, 지식에 대한 탐욕은 인류를 도약시켰습니다. 탐욕은 텔다 페이퍼를 살릴 뿐만 아니라 미국이라고 불리는, 또다른 삐걱거리는 기업도 구해낼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주주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은 이 연설만큼 월스트리트를 상징하는 말도 찾아보기 어렵다. 월스트리트만큼 모든 사람들이 돈이라는 한 가지 욕망을 탐닉하는 곳도 드물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사가 존 스틸 고든의 역작 <월스트리트 제국>(참솔)도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금융제국의 탐욕적인 게임과 심판 없이 글로벌화한 금융시장의 파국을 경고했다. 월스트리트의 욕망은 마약왕에 비견될 정도다. ‘곰과 황소는 돈을 벌지만 돼지는 돈을 벌지 못한다’는 월스트리트의 격언에 무지했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사람들의 말로를 그린 대목은 타산지석이다. 강세시장에서도 돈을 벌고 약세시장에서도 돈을 벌 수 있지만 과욕으론 결코 돈을 벌 수 없다는 뜻이다.



2000년에 첫 출간된 이 책에서는 월스트리트가 자유화·시장화·규제완화라는 레이건 경제철학을 등에 업고 ‘탐욕의 전성기’를 구가한 1980년대, 인터넷 거품으로 ‘탐욕의 극치’를 달린 90년대가 가장 극적으로 그려진다.



350여년간의 ‘월스트리트 통사’이면서도 드라마처럼 흥미로운 것은 다채로운 등장인물 때문이다. 거대한 게임 같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화려무비하다. JP 모건 같은 위기의 구세주, 가치투자의 선구자 벤저민 그레이엄, 도덕 귀족의 대표적인 인물 코닐리어스 반더빌트,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 같은 주연급 거물이 있는가 하면 한 시대를 풍미한 악당 대니얼 드류, 감방에 가야 했던 뉴욕 증권거래소 회장 리처드 휘트니 같은 사기·협잡꾼들, 피눈물로 범벅이 된 개미들에 이르기까지. 물론 미국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에서부터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 이르는 정부 고관들의 배역도 생생하게 소묘된다. 그러잖아도 월스트리트의 역사는 많고 많은 신화와 일화, 우화로 점철돼 있다.

영국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이 쌓은 나무 담장에 불과했던 월스트리트가 오랫동안 무소불위의 금융 권력을 휘두르는 제국으로 군림한 역사가 굴곡지게 펼쳐진다. <부의 제국>으로 이름을 더욱 널리 알린 고든이 월스트리트를 하나의 제국으로 파악한 것은 더없이 적절하다. 월스트리트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순진한 인간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는 지적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미국민들은 이제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된 월스트리트의 탐욕과 악마 같은 습성을 비난하고 분노한다. ‘어떤 나무도 하늘까지 자라지 않는다’는 또 다른 월스트리트의 격언을 막상 자신들은 잊고 살았던 데 대한 업보가 아닐까. “사회주의의 최대 약점은 사회주의 그 자체이고, 자본주의의 최대 약점은 자본가 그 자체”라며 전 지구적 금융감독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고든의 정문일침(頂門一鍼)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용’이라도 되면 다행이겠다.(김학순 선임기자)

08. 10. 11.

P.S. "사회주의의 최대 약점은 사회주의 그 자체이고, 자본주의의 최대 약점은 자본가 그 자체”라는 저자 고든의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새로운 지적은 아니지만 '월스트리트 통사'를 훑은 저자의 말인지라 무게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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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12 16:14   좋아요 0 | URL
유럽의 로스차일드,미국의 모건 집안...돈으로 세계를 쥐락펴락한 괴물들...마이클 더글라스의 영화가 궁금하네요.

로쟈 2008-10-12 19:43   좋아요 0 | URL
저도 극장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찰리 쉰과 같이 나온 거 같은데요...
 

서점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얇은 분량 때문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는데, 이번주 언론리뷰들에서 크게 다루어진 책이 있다.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문학수첩, 2008)가 그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경력을 가진 일본계 저널리스트 츠츠미 미카(한겨레의 표기로는 '쓰쓰미 미카'). 알고보니 일본에서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젊은 일본 여성이 쓴 소박한 미국사회 심층취재기' 정도의 책도 우리는 안 갖고 있는 건지 문득 의문이 든다. 한겨레와 조선일보의 리뷰를 같이 옮겨놓는다.

한겨레(08. 10. 11) '신자유주의 난민’ 넘쳐나는 미국

미국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선망이 얼마나 골수에 박혀 있는지는 인터넷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패권주의 전쟁이나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폐해를 지적하거나, 그런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비판하는 글들에는 으레 ‘반미 좌파’라는 낙인을 찍거나 냉소적 빈정거림과 함께 ‘그래도 가장 잘살고 가장 강력한 미국’한테 배우고 그들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댓글들이 붙기 십상이다. 부실 주택금융 파탄이 부른 대공황 풍문 속에 미국이 주도해온 신자유주의 체제가 실패로 귀착된 것이 거의 확실해진 지금도 그렇다.

개중엔 미국이 문제를 안고 있는 건 인정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이웃 대국들에 둘러싸인 한국의 선택지는 그래도 미국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 또는 숙명론까지 들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글쎄, 이 현실론, 숙명론이야말로 바로 미국 때문에 조성된 일종의 자가발전적, 자기모순적인 뒤틀린 상황논리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근본적인 회의 또는 재검토를 해볼 필요가 있지만, 그 전에 먼저 미국이 과연 가장 잘살고 그래도 여전히 제일 잘나가는 나라인지부터 다시 한 번 물어보자. 과연 그런가?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문학수첩)라는, 젊은 일본 여성이 쓴 소박한 미국사회 심층취재기(원서는 문고판 이와나미 신서, 2008년 1월 출간)가 “그렇지 않다”는 답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과잉 또는 허구의 이념적 잣대로 어쭙잖게 상대를 난도질하는 풍조 속에 갈가리 찢어져 이젠 서로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게 된 우리 사회에서 올해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받고, <산케이신문>부터 <아사히신문>까지 고루 평가받은 이 이방의 베스트셀러가 현지취재 르포를 통해 전하는 미국 사회 실상은 그래도 참고할 만하지 않을까?

도쿄에서 태어나 뉴욕주립대·시립대 대학원에서 국제관계론을 공부하고 유엔 여성개발기금,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뉴욕지국을 거쳐 미국 노무라증권에서 근무하다 2001년 9·11 사태 때 무너져내린 세계무역센터 빌딩 바로 옆 건물 사무실에서 몸이 날아갈 정도의 충격파를 경험한 뒤 급속히 변해가는 미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 지은이 쓰쓰미 미카(38)의 현장보고는 남다른 강점이 있다. 정책 체험자나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구체적 증언을 통해 사실을 생생하게 드러냄으로써 이제까지 미국의 실패에 대해 보고 들으면서도 먼 나라 얘기로만 여기던 사람들에게 바로 자신의 문제처럼 다가오게 만든다.

읽다 보면 절로 이런 생각이 치밀어 오른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 밀어붙이고 있는 거의 모든 정책들이 실은 미국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가. 게다가 놀랍게도 그들 정책은 하나같이 이미 실패로 끝났거나 거의 실패로 귀결되고 있는 것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태가 이러한데도 우리 정부나 미국 신봉자들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미국 뒤쫓아가기에 여념이 없다는 사실이다. 쓰쓰미의 문제의식 속에는 고이즈미와 아베 정권 때 미국을 열심히 추종한 자신의 조국 일본이 되풀이하고 있는 미국식 실패에 대한 탄식과 분노와 경계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쓰쓰미가 찾아가는 현장은 다섯 군데다. 첫 번째는 가난 때문에 비만아가 급증하고 있는 학교현장. 부시 정권이 가속한 신자유주의 민영화와 경쟁제일주의, 친대기업 규제완화가 빈곤지역 학교 지원금을 대폭 깎았고 이는 할인·무료 급식에 의존하는 아이들에게 비만을 부르는 싸구려 정크푸드 공급으로 이어졌다. 2006년 미국 국세조사에서 4인 가족 기준으로 연간 수입이 2만달러 이하면 ‘빈곤’가정으로 분류된다. 2006년 미국의 빈곤인구는 3650만명으로 전인구의 12.6%. 그중 18살 이하 빈곤아동은 17.6%(6명에 1명꼴)로 2000년부터 5년 동안 11%(130만명)나 늘었다. 2006년에 하루 7달러 이하의 수입으로 삶을 이어간 미국인이 6000만.

두 번째는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문에 쑥대밭이 된 뉴올리언스. 1천명 이상이 사망하고 재난 뒤 2년이 지나도록 도심인구의 절반도 돌아오지 못한,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뉴올리언스의 비극은 연방재난관리청(FEMA)의 민영화에서 시작된 인재였다.

세 번째는 다른 선진국들 평균의 2.5배나 되는 1인당 의료비를 부담(연간 5635달러, 2006년 4인 가족 부담 평균 의료보험료는 1만1500달러)하면서도 유아 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 나라 중 가장 높고, 의료보험 미가입 인구가 4700만(2010년엔 5200만)이나 되는 의료현장. 2005년 전체 파산건수 208만건 중 204만건이 개인파산인데 그 절반 이상이 병원 치료비 때문이었다. 하루 입원한 맹장염 수술비가 1만2000달러. 의료보험 가입자도 속수무책. 의료 민영화의 귀결이다.

네 번째는 학자금과 생활비 지원을 미끼로 삼아 가난한 고교생들까지 입도선매식으로 포섭해가는 군 모병 현장.

다섯 번째가 병참은 물론 전투까지 민간기업이 대체해 가는 군사부문 민영화 현장. 이 역시 불법이민자 등 더는 갈 데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지독한 가난을 돈벌이 기반으로 삼고 있다. 거기엔 ‘켈로그 브라운 앤 루트’ 같은 민간 파견회사가 있고, 그 뒤엔 대형 석유 서비스·건설업체 핼리버튼, 블랙워터 유에스에이 등이, 또 그 뒤엔 1995년부터 2000년까지 핼리버튼 시이오(CEO)였던 딕 체니 부통령 등 유력 정치인들이 있고 그들과 유착한 기업과 언론이 있다.

결국 이렇다. 신자유주의로 세상은 소수의 가진자와 대다수의 빈곤층으로 양극화한다. 양극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못가진자들 사이 경쟁은 격화하고 그들은 더욱 가난해지는 반면 가진자들은 못가진자들을 더욱 싸게 더욱 쉽게 부릴 수 있게 되고 그걸 토대로 더욱더 많은 부를 쌓아올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파고든 곳도 바로 이 확산일로의 빈곤지대다. 쓰쓰미가 찾은 현장 다섯 곳의 비극은 바로 빈곤을 축재의 원천으로 삼는 신자유주의 빈곤 비즈니스의 귀결이자 그 출발점이다.(한승동 선임기자)

조선일보(08. 10. 11) 먹고 살 돈이 없어서 그들은 전쟁터로 향했다

"사실은 정말 괜찮은 일자리가 있는데 말이죠."
미국 뉴욕주 뉴버그에 사는 트럭운전사 마이클 브라운은 2005년 8월 모르는 남자로부터 귀를 솔깃하게 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브라운 씨죠? 처음 뵙겠습니다. 돈을 많이 빌려 쓰고 계신 것 같은데…." 빚독촉이라는 생각에 전화를 끊으려 할 때 '정말 괜찮은 일자리가 있다'는 말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전화를 건 남자는 국제적인 규모의 파견회사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연봉이 6만5000달러(약 9000만원)인 트럭운전사 자리가 있다"고 했다. 목소리는 친절하고 밝았다.

마이클은 수입이 너무 적어 하루하루가 힘에 부친 상황이었다. 아들의 병원 수술비는 마이클의 지급능력을 훨씬 넘어 있었고, 빚을 갚지 못해 '돌려막기'를 하는 사이에 그의 이름은 다중채무자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네, 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되죠?"

다음날 곧장 취업 설명회장으로 간 마이클은 자신의 일터가 전쟁중인 이라크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루 12시간, 주7일 근무. 사망해도 시체는 본국으로 송환되지 않고 현지에서 화장된다는 설명에 사람들은 웅성거렸지만 이어진 연봉 이야기에 참가자 전원이 계약서에 사인했다. 전쟁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참전을 결정하는 장면이다.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의 저자인 츠츠미 미카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옆 빌딩의 노무라 증권에서 일하던 중 9·11 사태를 직접 목격하고 저널리스트로 변신했다. 저자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 아래 생명이나 안전, 국민의 생활에 관한 국가의 중추기능이 극단적으로 민영화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단숨에 추진됐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역시 '민영화된 전쟁'의 희생자이고, 이는 국가 차원의 '빈곤 비즈니스'(빈곤층 대상으로 시장을 확대하는 사업)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인간이 대량으로 소비되는 구조의 심각성을 고발한다. 빈곤층 지원비용 삭감으로 인해 아동들이 저렴한 정크푸드만을 찾아 발생하는 비만 문제,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통해 드러난 민영화된 재해대책의 부실함, 공적 의료보험이 없어 비싼 의료비 때문에 파산하는 중류층, 공부할 돈이 없어 군대로 가는 학생들…. 일본인인 저자는 미국의 어두운 현실을 뒤쫓고 있는 오늘날 일본에 경고 메시지를 던진다. 한국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마이클은 약속된 급료를 다 받았을까? 다 받았다. 하지만 책에 따르면 마이클은 방사능 물질에 노출된 탓으로 귀국 후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힘들게 번 돈은 치료비로 바닥이 났다. 마이클은 집에 누워서 지내고, 부인이 밤낮으로 일해 연명하고 있다.(김상민 기자)

08.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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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거꾸로 달리는 빈곤대국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30 11:27 
    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두 권의 여행기에 대한 리뷰를 챙겨놓는다. 정확하게는, 각각 한국 작가와 일본 저널리스트의 미국 '횡단기'이다. '유재현의 미국 사회 기행'이란 부제가 붙은 <거꾸로 달리는 미국>(그린비, 2009)은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그린비, 2009) 같은 그의 아시아 기행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듯싶다. 아시아에서는 걷고 미국에서는 달린다는 차이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낯선 아시아
 
 
노이에자이트 2008-10-12 16:09   좋아요 0 | URL
이와나미에서 나왔다면 저자의 수준은 안심해도 되겠군요.기행문이 여행안내서 수준을 넘어 문명비평의 경지에 이르르려면 저자의 수준이 아무래도 높아야죠.

로쟈 2008-10-12 19:42   좋아요 0 | URL
네, 겉보기보다는 탄탄한 책인가 봅니다...
 

세계 경제의 불황 국면을 맞이하여 미국 경제의 추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대선도 앞두고 있기에 미국 정치도 연일 기사화되고 있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떠올리게 된 책은 모리스 버만의 <미국 문화의 몰락>(황금가지, 2002)이다. 책을 읽어서가 아니라 이 참에 읽어볼 마음이 생겨서이다(알라딘에는 품절로 뜬다). 리뷰기사를 찾으니 생각보다 오래전에 나온 책이다.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미국 문화의 몰락'이 결코 남의 나라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모르겠다. 미국식이라면 몰락마저도 황홀해 할 한국인들도 있지 않을까?). 오래전 기사 두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오마이뉴스(02. 09. 05) 미국문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나

80년대 초 나는 원로시인 고은 선생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은 미국에 다녀온 경험을 토대로 "미국은 머지않아 멸망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선생은 주로 도덕의 붕괴에 따른 미국의 멸망을 말씀하시는 듯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올해 나는 저명한 미국의 문화역사학자 모리스 버만(Morris Berman)이 쓴 <미국문화의 몰락(The Twilight of American Culture/심현식 옮김/황금가지 펴냄)>을 읽게 된다. 미국은 고은 선생이 멸망할 것이라고 진단한 이후 20년이나 버텼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의 학자가 자기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미국은 지금 세계를 점령할 듯이 호령한다. 테러분자들을 소탕한다고 아프가니스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이라크 대통령 후세인을 축출하겠다고 을러댄다. 여중생들을 장갑차로 깔아 죽인 미군을 내놓으라고 하면 죄가 없다고 강변하고, 우리나라, 우리 문화의 상징인 덕수궁터를 짓밟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배 정도나 되는 규모로 대사관과 아파트를 짓겠다고 으르렁거린다.

더구나 미국기업인 맥도날드, 코카콜라는 상품으로 세계를 평정한다. 세계 어디나 맥도날드의 햄버거로 도배하여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를 이룩하며,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까지 '가구가락(可口可樂:cocacola)'을 마구 뿌려댄다. 미국이 생산한 군수물자 등 미국의 상품을 사주지 않으면 미국정부의 압력에 당해낼 국가가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21세기는 미국의 독무대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리스 버만의 지적처럼 미국문화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지 않을까? 글쓴이는 미국문화가 멸망할 거라는 정황으로 다음의 4가지를 들고 있다.

1.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즉, 부익부 빈익빈은 극에 달해 있으며, 미국의 중산층은 붕괴됐다. 2. 사회보장제도가 위기에 빠져 있다. 3. 반지성주의에 따른 지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문맹률은 급증한다. 4. 상업주의 문화가 지배하는데 따른 정신적 황폐함이 극심하다.

중산층은 전체 사회의 허리 구실을 한다. 이 허리가 붕괴됐으니 사회 전체가 온전할 리 없다. 글쓴이는 말한다. 고대 로마 시민들이 검투경기와 서커스에 넋이 나가 있었던 이후 고대로마제국의 멸망이 온 것처럼 오늘날 미국 시민들이 할리우드가 만든 블록버스터 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미국 멸망의 징조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중들이 지엽적인 문제에 온통 정신이 팔리거나 문화적인 삶이 끊임없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면, 그 국가는 분명히 문화적인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버만이 진단한 말이다. 미국 문화는 엉망진창으로 죽어간다고 판단한다. 겉보기에는 활력이 넘치고 경제도 호황을 누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책의 부제로 '기업의 문화 지배와 교양 문화의 종말'이라고 한 것처럼 기업이 지배하는 상업주의 문화에 목적의식도 창조력도 매몰되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미국 사회의 활력은 상업주의 문화의 광란일 뿐이다.

물론 그는 이 멸망을 해결할 방법으로 수도사적 해법을 제시한다. 수도사적 해법이란 어떤 조직적 운동이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생활방식을 뜻한다. 즉 거창하거나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 대신 미술관이나 음악회를 찾고, 베스트셀러 대신 고전을 읽는 등의 작지만 의식있는 실천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문화의 몰락이 아니라 한국문화의 몰락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버만이 지적하는 미국문화 멸망의 정황 4가지는 한국의 사회에서 드러나는 정황 그대로이다. 특히 IMF 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모두가 이 책을 읽은 다음 경각심을 갖고 한국문화의 몰락을 방지할 수도사적 해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할 일이다. 미국문화의 몰락은 미국만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 바로 한국의 우리 자신들도 걱정해야할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김영조 기자)

주간동아(02. 07. 04) "미국, 지금 너 떨고 있니?”

‘멍청한 백인들’(나무와 숲 펴냄)에서 마이클 무어가 미국 사회의 제도적 부조리와 정경유착 문제를 통렬히 비판한 데 이어, 문화역사학자 모리스 버만은 ‘미국 문화의 몰락’을 예고한다. 4~5세기경 로마제국처럼 미국은 화려했던 전성기를 뒤로하고 몰락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버만은 ‘미국 문화의 몰락’에서 얼핏 보기에 미국이 에너지와 활력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활력이 상품 구매와 소유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혼란스러움에 불과한 이런 에너지가 미국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공허함을 숨기는 구실을 해서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고 경고했다.

사실 미국 지식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비슷한 경고를 했다.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은 “미국이 겉으로는 민주주의라는 화려한 장식을 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몇몇 기업이 권력을 휘두르는 과두정치 체제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했고, 사회비평가인 토머스 프랭크는 “인간 의식에 대한 시장의 화려한 승리”라며 ‘암흑시대’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버만이 “미국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독일 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저서 ‘서구의 몰락’에서 찾을 수 있다. 슈펭글러의 종말론적 역사관에 근거해 저자는 미국 몰락의 징후를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가속화, 둘째 사회·경제적 문제를 사회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한 비용투자에 따른 한계이익 감소, 셋째 비판적 사고 및 지적 의식수준 등의 급격한 저하와 문맹률의 확산, 넷째 정신적인 죽음(문화의 저급화). 21세기 미국은 이미 이 네 가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둔재 생산국 미국’의 현실은 참담하다. 미국 성인의 42%가 세계지도에서 일본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15%는 미국조차 찾지 못한다. 1996년 10월 설문조사에서 대통령 후보가 누구인지 모르는 유권자가 10명 중 1명. 저자는 과거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의 정신병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대통령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을 상기시켰다. 그 밖에도 한 토크쇼에서 미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작위 인터뷰를 한 결과, 지구에 달이 몇 개 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한 학생(천문학 수업은 A학점이었다고 함)이 있는가 하면, 3의 제곱을 6 혹은 27이라고 대답한 경우도 있다. 일본의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도 ‘도쿄대생은 바보가 됐는가’라는 책에서 일본 대학생들의 무식함을 개탄한 적이 있는데, 일본의 추락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미국 문화의 몰락’은 역설적으로 몰락을 막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기서 저자는 ‘수도사적 해법’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문화를 지키기 위한 역사적 선례를 보면 로마제국의 혼란기에 그리스 로마가 남긴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 앞장선 것은 수도사들이었다. 이들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책과 필사본을 모으고 베껴 600년 후 새로운 유럽 문화 태동에 쓰일 수 있도록 했다.

현대의 정신적 수도사들은 상업주의 광고에서 거짓과 진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으며, 컴퓨터와 인터넷을 유용한 도구로 활용하지만 삶과 도구를 바꿀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이들은 다니엘 스틸 대신 호머를 읽고, 자녀를 데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러 가는 대신 캠핑이나 박물관을 찾는다. 진리의 탐구, 예술의 함양, 비판적 사고방식은 바로 이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즉 쇼핑이라는 오락에 빠져 있는 98%를 제외한 나머지 2%가 미국 사회를 구해낼 정신적 수도사가 될 것이다.

‘미국 문화의 몰락’은 미국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문화비평서이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드러난다. 먼저 저자는 미국이 직면한 문화적 위기를 경고하는 데 급급해 정작 지켜야만 하는 ‘미국 문화’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또 ‘수도사적 해법’이 담고 있는 엘리트주의나 지나친 고급문화 취향은 거부감을 준다. 그러나 ‘지구를 살리자’ 유의 구호성 문화운동이 지닌 한계를 감안하면 소수가 조용히, 그렇지만 맡은 소임을 다하자는 ‘게릴라성 문화재건 운동’에 기대를 걸어봄직하다. 세계화 과정에서 더 이상 ‘미국 문화’가 미국만의 것이 아니듯, ‘미국 문화의 몰락’은 한가한 남의 나라 걱정거리로만 읽히지 않는다.

08. 10. 11.

P.S. <미국 문화의 몰락>(2000)에 이어지는 버만의 책은 <미국의 암흑시대: 제국의 마지막 국면>(2006)이다. 타이틀로 보아 '속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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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 2008-10-11 21:05   좋아요 0 | URL
'미국 문화의 몰락'이라는 제목이 섹시하군요. 그런데 미국 문화의 흥성한 시절을 언제로 보는가에 따라 얘기가 달라지겟죠. 아마도 이 책과 저자는 미국에서 신보수주의의 등장과 함께 벌이진 '문화 전쟁'의 맥락에서 읽지 않으면 위에 소개 기사처럼 헛다리만 짚게 될 것 같습니다. 사회의 자유주의 분위기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광범위한 신보수주의 운동의 차원에서 말이죠 -- 동성애, 낙태 등을 둘러싼 논쟁, 대중문화의 폭력성 논쟁, 교회가 미국인의 삶에서 점점 덜 중요해짐 등등. 점점 도덕과 규율과 종교와 '가족의 가치' 같은 것을 내세우면서 대중 문화에 대한 검열 같은걸 확대하려고 하는 이 운동의 맥락에서 놓고 읽어야 할 책인거 같습니다.

로쟈 2008-10-11 21:10   좋아요 0 | URL
버만의 입장이 앨런 블륨류의 보수주의와 비슷한 입장인지, 좀 다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위키에 나오는 모리스 버만에 대한 소개가 너무 간략해서요.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는 비슷한 면도 있는 거 같고...

cretois 2008-10-12 00:43   좋아요 0 | URL
앨런 블룸이나 사무엘 헌팅턴처럼 노골적이진 않습니다. 제목처럼 미국의 패권과 그 몰락에 대해서가 아니라 '건강한 나라'라는 미국의 이미지의 상실에 대한 '통분'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 통분이 이문열 따위처럼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문화적'이고 '학술적'인 비판에 근거하지요.
기본적으로 버먼은 퓨리터니즘에 대한 향수가 깊습니다. 부제처럼 기업(자본)의 지배 아래 놓은 미국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스탠스를 취하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은 아마도 좀 몽상적이었던 듯(읽은지 오래돼서).
evol님의 지적, 적절합니다.

로쟈 2008-10-12 10:28   좋아요 0 | URL
부제만으로도 내용 정리가 되는 책이라 제쳐두었다가 다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유익한 코멘트 감사.^^

노이에자이트 2008-10-12 16:04   좋아요 0 | URL
토마스 카알라일이 <과거와 현재>에서 당시 영국의 속물성을 지적한 것과 비슷하군요.상업성과 속물성은 사이가 좋은가 봐요.

로쟈 2008-10-12 19:42   좋아요 0 | URL
속물성을 이용할 줄 알아야 팔리니까요...
 

이번주 신간 가운데는 마이클 하트의 <네그리 사상의 진화>(갈무리, 2008)도 들어 있다. 저자나 제목이나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 않아서 들춰보지도 않았는데(게다가 요즘 나오는 좌파 사상서들에는 왜 다들 '우파적 책값'이 붙어있는지!), 리뷰를 읽어보니 나름대로 흥미를 끄는 책이다. 가령 출판사측의 이런 책소개는 어떤가.

2004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대규모 포럼에서 ‘이탈리아 효과’가 진지하게 검토되었다. 이 포럼의 주요 내용은 철학의 주도권이 이전의 영미철학에서 1990년대에는 프랑스철학으로, 21세기의 벽두인 2000년대에는 이탈리아 철학으로 옮겨갔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1968혁명의 철학자들인 프랑스의 들뢰즈, 기 드보르, 푸꼬 등이 모두 사망한 후 안또니오 네그리, 빠올로 비르노(<다중>), 조르조 아감벤(<호모 사케르>), 마우리찌오 랏짜랏또(<비물질노동과 다중>), 프랑꼬 베라르디 등 이탈리아 철학의 흥기 현상을 주목하였다. 최근 한국에도 ‘이탈리아 효과’가 거세지고 있으며, 이 뿌리에는 안또니오 네그리의 사상이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그간의 한국 내 논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이러한 네그리 사상을 한눈에 밝혀주는 입체적 조감도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요점은 '이탈리아 효과'의 한 기원인 네그리 사상의 입체적 조감도를 제시해준다는 것이 <네그리 사상의 진화>가 갖는 의의이겠다.

겨레(08. 10. 11) 참한 학자, 성난 전복자…젊은 네그리의 두 얼굴

마이클 하트(미국 듀크대 교수)는 아우토노미아(자율) 이론가 안토니오 네그리와의 공동작업으로 유명해진 사람이다. 1990년대 이후 그의 지적 동지이자 스승인 네그리와 함께 <디오니소스의 노동> <제국> <다중>을 집필함으로써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하트가 93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 가운데 후반부를 번역한 책이다. 6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젊은 네그리의 이론적·실천적 투쟁을 추적한 것이 이 책이다.

하트의 박사학위 논문 전반부는 <들뢰즈 사상의 진화>(갈무리)라는 이름으로 먼저 번역돼 나온 책에 소개됐다. 이 부분도 역시 질 들뢰즈 사상의 형성 과정을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의 박사학위 논문이 두 권의 책으로 나뉘어 나온 셈인데, 그런 만큼 두 책을 묶어 함께 읽는 것이 하트의 문제의식을 이해하는 데 더 유용하다.

하트가 들뢰즈와 네그리의 초기 작업에 공통으로 주목한 것은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헤겔 변증법’에 대항할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니체를 통해서, 네그리는 레닌을 통해서 헤겔 변증법 극복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왜 이들이 반헤겔·반변증법의 기치를 올렸는지는 <들뢰즈 사상의 진화> 서론에 간명하게 서술돼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 ‘부정’도 부정 자체로 놔두지 않고 지양을 통해 종합에 합류시켜 버리는데, 이 사실이 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지배체제를 부정해도 결국에 또다른 지배체제로 포섭되고 마는 변증법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 변증법적 부정에 맞서 들뢰즈와 네그리가 공히 내세우는 것이 ‘비변증법적 부정’이다. “비변증법적 부정은 더 단순하고 더 절대적이다.” 이 비변증법적 부정을 하트는 ‘절대적 부정’ ‘총체적 부정’ ‘근원적 부정’이라고 부른다. 종합으로 지양되지 않고 부정 그 자체로 끝나는 부정, 완전한 파괴·소멸·폐허만 남기는 부정, 그리하여 그 빈터에서 새로운 존재의 구성으로 이어지는 부정이 네그리와 들뢰즈가 말한 부정이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말하자면, 이 비변증법적 절대 부정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트는 먼저 1960년대의 네그리가 이론과 실천에서 보였던 내적 긴장에 주목한다. 오페라이스모(노동자주의)라는 이탈리아 이론운동에 몸담았던 당시의 네그리는 흔히 ‘두 명의 네그리’ 혹은 ‘분열된 인격’으로 묘사된다. 이론의 영역에서 네그리는 지적이고도 성실한 학자였다. “지적 도야와 사상의 모험에 매료된 순수한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동시에 네그리는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학습하고 그들의 사보타주를 선동하는 “전의에 찬 성난 전복자”였다. ‘훌륭한 교수’와 ‘사악한 교사’ 라는 두 얼굴 사이에서 네그리는 찢겨 있었다.

이론의 영역에서 네그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단숨에 극복할 방안을 찾지 못했지만, 실천의 영역에서는 노동자들의 전복적 투쟁을 옹호했다. 둘 사이의 분열과 긴장은, 그람시의 용어로 말하자면, ‘지성의 비관주의’ 대 ‘의지의 낙관주의’의 갈등이었다. 하트는 이 긴장이 1970년대에 들어와 극도로 커진 뒤 파열·폭발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그 폭발이란 노동자들의 힘에 입각한 실천을 통해 ‘자본의 변증법’을 깨뜨리는 길로 나아간 것을 말한다. 노동자들을 포섭하여 그 힘의 분출을 봉쇄하는 자본의 변증법적 운동을 폐지해버리고, 노동자들의 실천적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때 네그리는 선언했다. “변증법은 끝났다. 헤겔은 죽었다.”

하트는 네그리가 이 비변증법적 부정의 지평을 발견한 것이 레닌을 재해석한 결과라고 말한다. 새롭게 해석된 레닌은 이론 자체보다 혁명 주체의 실천을 앞세우는 레닌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때의 레닌이 니체와 다르지 않다는 하트의 해석이다. “니체와 레닌 사이의 유사성은 주체의 힘이 모든 논점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점에 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모든 것은 주관적일 뿐이다’라는 초라한 표현을 쓰지 말고, ‘그것은 또한 우리의 작품이다’라고 하자.” 주체가 기존의 세계를 없애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니체와 레닌은 “파괴적 계기, 곧 그 파괴적 힘이 너무나 격렬하여 사물의 현재 상태를 완전히 깨부수면서 현재의 지평 전체를 무너뜨리는 힘”을 제시한다. 이런 레닌적 국면을 거쳐 네그리는 이후 아우토노미아 운동으로 나아간다.(고명섭 기자)

08. 10. 10.

P.S. 기사에서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하트가 93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 가운데 후반부를 번역한 책이다."라고 했는데 착오이다. 93년은 학위논문의 일부를 발전시킨 <들뢰즈 사상의 진화>가 출간된 해이고, 하트의 박사학위논문은 1990년에 나왔다. 그 제목이 <조직화의 예술: 질 들뢰즈와 안토니오 네그리에서 정치적 존재론의 기초(The Art of Organization: Foundations of a Political Ontology in Gilles Deleuze and Antonio Negri)>(워싱턴대학, 1990)이다. 철학박사논문이 아니라 문학박사, 비교문학박사논문이다(그러니까 들뢰즈와 네그리를 '비교'한 논문인 것). 하트는 듀크대학의 이탈리아어문학과 소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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