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에 실은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를 다루고 있는데, 분량도 줄어든 탓에 정말로 '가장자리'만 언급하고 말았다. 본론은 따로 써야 할 모양이다...

시사IN(08. 10. 27) 랑시에르를 읽는 ‘호사’ 누려보니…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제목이 그렇다. ‘정치’도 아니고 ‘정치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가장자리’는 또 무언가? 올해부터 본격 소개되기 시작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대표작’을 손에 들고 가장 먼저 던질 법한 질문이다. 초판이 아닌 수정증보판을 옮겼기 때문에 국역본에는 한국어판 서문까지 포함해서 저자의 서문만 세 편이 실려 있다. “한국의 독자들 손에 도달함으로써, 이 책은 1986년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시작한 시공간 속의 여행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한국어판 서문은 예외적일 만큼 긴 분량이며 그 자체로 자세한 해제를 겸한다. 거기에 ‘옮긴이의 덧말’까지 말 그대로 덧붙어 있으니 독자로서는 예상치 못한 호사다.

미테랑, 현자의 ‘권위’로 시라크 압도


‘정치의 종언’을 주제로 한 첫 장에서 랑시에르가 검토하는 것은 1988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과 총리 시라크가 맞붙었던 대통령 선거이다. 1981년 사회당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미테랑은 공약을 110개 내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재선에 임하면서 그는 공약을 단 하나도 제시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반(反)공약’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시라크를 압도하며 여유 있게 재선에 성공했다. 비결은 무엇일까?

‘젊은 총리’ 시라크가 ‘늙은 대통령’ 미테랑을 겨냥해 내세운 건 약속과 역량, 말과 현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나 하는 인간’과 ‘언제나 진보하는 역동적 인간’이라는 이분법이었다. 그러한 이분법이 ‘미테랑이냐 시라크냐’ 하는 양자택일 구도라고 선전한 것이다. 반면에 미테랑이 유일하게 내세운 건, 예외적인 공약 단 하나였다. 만약 그러한 이분법에 빠지게 된다면 프랑스에서는 내분과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최악의 약속’, 그것 하나였다. 그는 약속 대신에 현자의 ‘권위(potestas)’를 내세운 것이고, 그로써 시라크의 ‘역량(potentia)’을 압도할 수 있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것은 ‘약속의 종언’ 곧 ‘정치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는 그것이 갖는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서 철학자답게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같은 그리스 철학 경전을 재검토한다. 그러고는 마지막 장에서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까지 도출해낸다. 하지만 그러한 호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여정을 한국어 번역본으로 따라가는 건 손쉽지 않다. 문장들이 내내 머리의 가장자리에서만 맴돌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소개되는 책이지만 아직 갈 길이 먼 듯하다.

08.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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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0-31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국역본 출간 소식을 가장 먼저 챙겨두고ㅡ이전에 보고 꽂아두었던 원서도 옆에 딱 꺼내놓고서ㅡ비교독해/번역점검을 할 준비를 마쳤는데요, 과연 이번에는 어떨지 사뭇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겐 호사(豪奢)이자 동시에 호사(好事)이기도 하지만, 그 호사에 다마(多魔)가 끼지 않을까 언제나 걱정입니다(그리고 이 걱정이 언제나 기우(杞憂)에 그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12월에는 랑시에르가 서울을 방문해 몇 개의 강연을 연다고 하니, 몇몇 흥미로운 장면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역시나 기대하고 있습니다.

로쟈 2008-11-01 08:41   좋아요 0 | URL
네, 독후감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한국일보에서 김영명 교수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한국에 한국 경제학자가 있는가?'(http://blog.aladin.co.kr/mramor/2370604)란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에 한국 정치학이 있는가?'란 물음도 가능하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학문의 정체성'이란 화두가 꽤 오래전 '유행'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제껏 별다른 진전이 없어 보이는 현실은 이래저래 씁쓸하다. 가을 탓만은 아닐 것이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한국일보(08. 10. 29) [김영명 칼럼/10월 29일] 짝퉁 장사

"4ㆍ19 이후 50년 동안 서울대가 한 일이라곤 반역사적이고 비도덕적인 엉터리 권력에 빌붙어 곡학아세를 하거나 외국 이론을 들여와 '짝퉁 장사'를 한 것밖에 없다." 김지하 씨가 서울대 세미나에서 한 발언(한국일보 10월 10일자)이다(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810/h2008101003005722020.htm).

아직 요원한 학문의 정체성 확립
동감이다. 글쓴이도 꽤 오래 전부터 한국 지성계의 짝퉁 장사를 비판해 왔고, 자기 나름대로 대안을 찾아보기도 하였다. 김지하 씨는 자신이 모색하는 생명사상을 학계에서 알아주지 않아 섭섭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그는 유명인사이니 나 같은 사람도 그런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유명하지 않은 내가 <신한국론>이라는 책에서 제시한 '단일사회론'은 아는 사람조차 없다.

그런데 실상 우리 학문의 정체성을 찾자는 소리는 옛날부터 있었다. 철학자 박종홍(朴鍾鴻ㆍ1903~1976) 선생이 젊었을 적인 1933년에 이미 그런 말을 하였다. 그 뒤 75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무것도 없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말은 하는 사람들이 좀 늘었다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뭔가를 해보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서양 중심주의 고발, 탈식민성 모색 등의 담론들은 무성하다. 쉽게 말하여 "이런저런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렇게 해보겠다"고 선언하는 사람은 드물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왜 그럴까? 답은 위 김지하 씨의 말에 다 나와 있다. 권력과 명성과 지위에 도움 되지 않는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 것을 옮기지 않으면, 다시 말해 짝퉁 장사를 하지 않으면 그것이 장악하고 있는 지식 권력에서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탈식민성 모색'이라는 담론 자체가 탈식민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식민적'인 기묘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김지하 씨의 생명사상이 한국에서 힘을 얻으려면 오히려 미국 사람들이 먼저 알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한국인들이 그게 좋은 것인가 보다 하고 관심을 쏟을 것이다. 그래서 김지하 씨도 글을 영어로 써야 한다, 이렇게 되나?

학문의 식민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처럼 학자들이 비겁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무능해서 그렇기도 하다. 남의 것을 베끼거나 옮기지 않고 자기 것을 만드는 일은 원래 어려운 법이다. 자기 이론이나 철학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기 나름대로의 분석틀을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어렵게 만들어놓은 분석틀을 미국 사람 것이 아니라고, 또 주류 학계의 것이 아니라고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더더욱 힘은 빠지게 되어 있다.

또 다른 까닭은 능력에 비해 턱없이 눈만 높아졌기 때문이다. 세련되고 치밀한 미국 이론들을 보니 이에 필적할 만한 자기 이론을 만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나의 분석틀도 이런 점에서는 유치한 수준인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나서서 만들어 놓으면 다음 사람이 그것을 다듬고 덧붙이고 하는 일을 하면 된다. 아무도 시작을 하려 하지 않으니 우리 것이 나올 리가 없다.



자기 것ㆍ우리 것 모색 실행해야
우리 것을 만들자고 하는 말을 지금 있는 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무슨 대단한 이론을 만들자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외국 학문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속에서나마 우리 것을 가미해 볼 수도 있다. 그렇게 자꾸 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 것이 조금씩 나올 수 있다. 정치학자인 글쓴이는 외국 사람에게 내놓을 만한 '한국 정치학'이 없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럽다. 다른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천하지 않으면 이런 모든 말들이 다 부질없다.(김영명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08. 10. 29.

P.S. 우리 이론을 만들어내는 일이 어렵다면 외국의 이론이라도 한국적 현실에 제대로 적용하고 활용하는 일이 차선책은 되지 않을까 싶다. 강준만 교수의 신간 <지방은 식민지다>(개마고원, 2008) 때문에 든 생각이다. 책의 부제가 '지방자치.지방문화.지방언론의 정치학'이다. 한국 사회의 '지방' 문제를 들여다보기 위해 강교수가 끌어오고 있는 것은 '내부 식민지' 이론이다.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것이다.

마누엘 카스텔(Manuel Castells)은 남미의 도시화를 ‘종속적 도시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남미의 도시 형태는 남미에서 생산된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과정에서 잉여가치의 송출구 역할을 함으로써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1970년대 남미에서 ‘내부식민지(internal colony)’ 또는 ‘내적 식민지’ 이론이 대두되었다. ‘제4의 식민지(the 4th colony)’ 또는 ‘식민지 속의 식민지(colonies within colonies)’라고도 한다. 식민지는 국가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한 국가 내에서도 극심한 지역간 불평등의 형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록 내부식민지론이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저자는 그것이 지금의 지방문제를 들여다보는 데 유용한 잣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적용이 이론의 보강/강화로 나타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이론적 시야를 확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학문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요한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라면 지금이라도 좀더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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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기사를 보고 저녁에 서점에 들러 손에 든 책은 사르트르의 자서전 <말>(민음사, 2008)이다(알라딘에는 아직 입고가 안된 듯하다). 예전에 정명환 선생의 다른 번역본으로 읽었지만, 이번에 역자가 새롭게 개정판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말>은 좋아하는 책이고 또 내가 불어 원서까지 갖고 있는, 많지 않은 책 중의 하나여서 이번 번역본의 재출간이 반갑다. 오직 '읽기'와 '쓰기'만으로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이 독특한 자서전은 오래전 기억을 다시금 잠시 떠올리게 해주는 '기억 재생기'이기도 하다. 계기가 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10. 28) '나는 왜 문학병을 앓았나' 사르트르의 고백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자서전으로 꼽히는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자서전 <말>이 44년 만에 새로 번역돼 나왔다. 최근 민음사에서 발간된 <말>은 고 김붕구(1922~1991) 서울대 교수와 함께 1964년 이 책을 번역했던 정명환(79) 서울대 명예교수가 본문을 수정하고 새로 주석을 단 판본이다.



정 교수는 이 책의 해설에서 "1964년 <말>의 출간이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그 해 가을 사르트르가 노벨상 수상을 거절하자 한 출판사의 요청으로 김 교수와 함께 거의 한 달 만에 번역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내가 맡은 1부의 번역에는 지금 누가 들추어볼까 겁이 날 정도로 잘못된 곳이 많았다"며 박맹호 민음사 회장의 권유로 개역을 시작해 1년 반에 걸쳐 작업을 마쳤다고 밝혔다.

자서전은 한살 때 아버지를 여읜 사르트르가 외조부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낸 유년시절로부터 시작된다. 그 시절은 사르트르의 정신적 토양이 됐다. 이 책의 1부와 2부인 '읽기'와 '쓰기'가 그 토양이다. 키 작고 병약했으며, 약한 사시(斜視) 증세를 보였던 소년 사르트르는 양서로 가득찬 외조부의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스스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 일곱살 무렵부터 외조부와 운문으로 편지를 교환한 일화 등을 들려준다.

정 교수는 '읽기'와 '쓰기'를 통해 자존감을 획득했던 사르트르지만 그는 자서전에서 이를 일종의 '문학병'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사르트르는 자서전에서 "할아버지가 나를 구해 주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속임수로 나를 끌어넣었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말>을 쓸 무렵 '문학 결별' 선언을 하며 문학과 현실참여의 분기점에서 양자의 관계성에 대해 고민하던 사르트르의 심경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그러나 자서전 말미에서는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앞으로도 쓸 것이다"라도 적고 있다. 정 교수는 이는 단순히 정치적 참여를 촉구하기 위한 문학이 아니라, 정치는 정치대로 중시하되 기존질서를 비판하고 절대미의 경지를 추구하는, '정치적 참여를 넘어서는 문학'을 추구하겠다는 사르트르의 문학적 지향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말>을 어떤 각도에서 읽느냐의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여러 각도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 야릇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여러 철학적 저서와 문학작품의 씨앗을 어김없이 찾아볼 수 있고, 또 당시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귀중한 시사를 얻을 만하다"고 <말>이 가지는 의미를 밝혔다.(이왕구기자)

08. 10. 28.

P.S. 잠시 찾아보니 기사에서 언급된 최초의 번역본은 <말>(지문각, 1965)이다. 1964년 사르트르가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고 나서 김붕구 교수와 함께 한달만에 옮겼다고 하니까 책은 1965년초에 나왔겠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다시 나온 <말>(민예사, 1992)이다. 역자는 동일한데, 부분적으로 수정이 가해졌는지는 모르겠다. 김붕구 교수를 역자로 한 책으로 <책읽기와 글쓰기>(삼문, 1994)도 출간됐었다. 이 역시 <말>을 옮긴 것이다. 완역이었는지는 긴가민가한데, 만약 그렇다면 김붕구본의 독자적인 <말>이겠다. 이 두 불문학자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도 각각 번역하는 바람에 나는 두 종의 번역본을 읽었다...

사르트르 얘기가 나온 김에 한권만 더 적어놓자면, 계약결혼한 아내 보부아르가 그의 죽음에 부친 책 <작별의 예식>(두레, 1982)도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평론집 <책읽기의 괴로움>(민음사, 1984)에서 이 책에 관한 아름다운 평문을 읽고 시립도서관에서 찾아 읽은 기억이 난다. 아, 손에 닿을 듯이 기억이 나는데, 너무도 오래전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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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 Les Mots (이경석 옮김)
    from 성실히 살았으면 2009-08-25 23:39 
    장 폴 사르트르가 50대 후반에 쓴 자전적 소설이다. 사르트르의 (엄마쪽)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사르트르가 처음 책을 접하고 말을 배우고, 혼자 영화 찍는 것처럼 연기 놀이를 하고, 소설을 읽고 쓰게 되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것이 사르트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야기하는 책이다. 참고로 예전에 번역되어 "책읽기와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1990년대에 나온 책도 있고, 최근 민음사 시리즈로 나온 것도 있다. 이 책을 접하게..
 
 
2008-10-29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9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8-10-29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시안 프로이트 같애, 아님 말고.^^ 오랜만이어요, 언제 만나서 밥먹읍시다.

로쟈 2008-10-29 22:51   좋아요 0 | URL
아님 같애요. 한번 밥 먹으면 몇 년씩 가네요.^^;
 

커피 브레이크에 잠깐 시간을 내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인문학의 갱신과 역할에 대해서 다룬 두 권의 책, <인문학의 즐거움>과 <저항의 인문학>을 뭉뚱그려서 다룬 글이다. 모두 상반기에 나온 책이고 몇 차례 페이퍼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얼마전 인문주간을 계기로 '인문학 문제'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았다.

한겨레21(08. 11. 03) 시민 가까이의 인문학

지난 10월 6일부터 12일까지 한국학술진흥재단 주최의 인문주간 행사가 열렸다. 2006년 ‘인문학 위기’에 대한 대응의 하나로 마련된 행사가 세 번째를 맞았고, 올해의 주제는 ‘일상으로서의 인문학’이었다. 학술제와 대중 강연, 답사, 문화 체험, 공연·전시 등의 프로그램은 예년과 다르지 않았지만 참여기관수가 늘어나면서 행사의 규모도 조금 커졌다고 한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직접 참여해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인문주간’을 보내면서 인문학을 주제로 한 책 두 권을 떠올려보았다. 미국 러트거스대학에서 교양과정의 작문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다는 커트 스펠마이어의 <인문학의 즐거움>(휴먼&북스 펴냄)과 컬럼비아대학에 오래 몸담았던 저명한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마티 펴냄)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을 직접 쓰는 게 낫지 않을까

‘21세기 인문학의 재창조를 위하여’란 거창한 부제를 달고 있는 <인문학의 즐거움>은 사실 ‘즐거움’과는 다소 무관한 책이다. 원제 ‘아츠 오브 리빙(Arts of Living)’은 ‘삶의 기술’이나 ‘삶의 예술’로 번역될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자가 제시하려는 바람직한 인문학상일 뿐이고 실제로 그의 초점은 현재의 인문학에 대한 비판에 놓여 있다. 목차에 걸린 ‘거대한 분리 - 시민사회와 전문가’나 ‘이론이 치른 대가 - 인문학의 고립과 지식’ 같은 장 제목이 미리 암시해주는 대로 저자의 비판은 주로 ‘인문학의 엘리트 프로페셔널리즘’을 향한다. 사유의 핵심이 단지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을 바꾸는 데 있다고 믿는 그는 인문학의 목적이 전문지식과 일상적인 생활세계를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문학은 ‘교양’이 아닌 ‘과학’을 표방하면서, 전문가를 위한 학문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면서 고립과 소외를 자초했다. 인문학자들이 자신의 입지를 고수하기 방책으로 과학에서와 같은 정확성을 모색해왔지만 그 결과는 시민대중과의 단절을 대가로 치른 '유사 과학'이었다. 인문학은 과학의 방법론을 모방함으로써 과학의 경쟁자가 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과연 그러한 상황에서 “나는 인문학 전반이 우리의 실제생활에는 그다지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연구에 너무 많은 자원을 쏟아 붓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저자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을까?

한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예술의 가치를 존중하기 위해서라면 영문학 같은 학문을 후원할 것이 아니라 예술을 직접 후원하는 게 더 낫지 않으냐고 말한다. 예컨대, 그는 ‘1900년까지의 영국소설’ 같은 과목을 의사, 공학자, 웹마스터 등과 같은 비전공자들에게 문화적 소양을 길러준다는 이유로, 혹은 정치적 견해를 수정하기 위해 가르치는 것보다는 수강생들이 실제로 소설을 ‘쓰고’ 리놀륨 판화를 ‘만들고’ 사진을 ‘찍는’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물론 대부분 대학제도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의 인문학자라면 결코 동의하지 않을 주장이지만 인문학이 더 시민 가까이 다가서고 보다 더 예술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음미해볼 만하다.

<인문학의 즐거움>의 저자보다는 전통적인 인문학과 인문주의를 옹호하는 편이지만 <저항의 인문학>에서 사이드가 강조하는 것도 인문학의 사회적 책임과 작가와 지식인의 공적 역할이다. 그 또한 인문학의 토대와 인문학을 둘러싼 정세가 변화했으며 그에 따라서 인문학의 정체성과 역할 또한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인정한다.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한 탈식민주의 이론가로서 사이드가 주로 비판하는 것은 근대 인문학의 유럽중심주의다. 이 점에서는 세계체제론자인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견해를 같이하는데, 그들에 따르면 근대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역사적으로 유럽이 전 세계체제를 지배하던 특정 시점에 유럽의 문제, 특히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미국이라는 다섯 나라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주제선택이나 이론화방식, 방법론, 인식론 등에서 이들 학문은 그것이 태동했던 시대의 제약을 떠안게 되었다. 그러한 제약과 편견에서 탈피하기 위해 사이드는 교양교육의 주요 과목을 서구 정전으로 제한하는 일, 세계를 이해하는 유럽중심주의적 관점과 태도, 제3세계의 전통과 언어에 대한 무관심 따위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주의의 새로운 관심과 역할이 요청되는 것이다.   

인문주의와 나란히 가는 '민주적 비판'

사이드에게서 그러한 인문주의와 나란히 가는 것이 ‘민주적 비판’이며, 이것이 작가와 지식인의 공적 역할이다. 그는 지식인을 가리키는 아랍어 단어 두 가지에서 영감을 끌어낸다. 그 두 단어는 ‘무타카프(muthaqqaf)’와 ‘무파키르(mufakir)’인데, 무타카프는 문화/교양을 뜻하는 ‘타카파(thaqafa)’에서, 무파키르는 사유를 뜻하는 ‘키프르(kifr)’에서 온 단어다. 곧 지식인이란 교양을 가진 인간이면서 사유하는 인간이다. 오늘날 지식사회의 전문화가 낳은 부정적인 양상은 이러한 전통적 지식인의 단절이고, 학계와 공적 영역의 분리다. 이러한 현실에서 사이드가 강조하는 작가-지식인의 역할은 사회정의와 경제적 평등, 그리고 ‘자유로서의 발전’(아마티아 센)에 대한 요구다. 그것은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말을 빌면, “현실주의적 유토피아를 집합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사회적 조건의 창출”을 돕는 역할이다.

인문학 위기 담론의 유행 이후에 한국사회에서는 '최고경영자(CEO)인문학' '노숙자인문학'이 새로운 인문학의 희망처럼 번져가고 있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중요한 것은 CEO도 아니고 노숙자도 아닌 ‘CEO와 노숙자 사이’가 아닐까? 바로 민주주의의 주권자로서 일반 시민들이 공부하고 향유해야 할 중간층 인문학의 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인문학인가?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 ‘인문학의 즐거움’을 맛보기 전에, ‘저항의 인문학’을 실천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통과해야할 질문처럼 보인다.

08. 10. 28.

P.S. 관련페이퍼로는 '음란과 궁상 사이의 인문학'(http://blog.aladin.co.kr/mramor/1616364), '인문학의 즐거움에 대한 아쉬움'(http://blog.aladin.co.kr/mramor/2029908), '에드워드 사이드와 라이오넬 트릴링'(http://blog.aladin.co.kr/mramor/2246701) 등을 더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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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진행형 2008-10-28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한겨레21에서 글 보고, 수업시간에 이 두 권의 책을 추천하고 싶어서
글 퍼갑니다...

물론 출처 표시는 했는데,
그래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먼저 허락받지 못하고 퍼간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양해해주시길 바라면서...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

로쟈 2008-10-29 00:04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한데, 학생들보다는 강사들이 읽어야 할 책인데요.^^; <인문학의 즐거움>은 두툼한 만큼 좀 전문적일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구요, <저항의 인문학>은 번역이 썩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대학원생쯤 돼야 소화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가시장미 2008-10-29 0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댓글을 보니 두 권 다 제가 읽기에는 어려울 듯 하네요. -_ㅠ 강사들 말고- 학생들이 읽을 수 있을만한.. 쉬운 책도 추천좀 해주시와요. ^^

로쟈 2008-10-29 17:19   좋아요 0 | URL
<희망의 인문학>은 쉬운 편입니다. 다른 고전 읽기들도 비교적...^^;

2008-10-29 1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9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코리아, 2007)의 저자 앨런 와이즈먼이 다시 한국을 찾았다. ‘DMZ 보존을 위한 국제콘퍼런스’ 참석과 함께 그의 책 <가비오따쓰>(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재출간을 기념하는 뜻인 듯하다. 지난주 서점에 깔린 <가비오따쓰>가 재출간 도서(월간 말, 2002)라는 건 알았지만 역자가 생태공동체운동가인 황대권씨라는 건 이번에 알았다. 마침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 저자와 역자, 두 사람의 대담이 게재되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10. 27) “DMZ는 자연의 자기치유력 산 증거”

‘가비오타스(Gaviotas)’는 콜롬비아 동부 야노스의 오지에 있는 작은 생태공동체다. 그러나 인구 200여명의 조그만 마을이 일으킨 작은 기적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가비오타스인들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불모의 땅에 열대우림을 부활시켰다.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하고 소나무를 심었다. 또 수경재배법을 통해 채소를 자급자족했다. 무상 교육, 무상 의료를 실시하며 구성원들이 창조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 가비오타스를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모델로 보여주면서 전 세계에 감동과 각성을 불러일으켰던 책이 <가비오따스>(랜덤하우스)다.

저자 앨런 와이즈먼(61)은 가비오타스인들의 고군분투기를 통해 환경을 손상시키는 힘이 거꾸로 그것을 회복시키는 데도 사용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그는 ‘인간 없는 세상’이라는 도발적인 상상을 통해 오늘날 ‘인간 있는 세상’의 문제점을 통찰한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DMZ 보존을 위한 국제콘퍼런스’ 참석과 <가비오따스> 재출간을 맞아 한국을 찾은 그를 <가비오따스>의 번역가이자 <야생초 편지>의 저자인 황대권씨(53)가 지난 24일 만나 대담을 나눴다.



황대권=<인간 없는 세상>은 DMZ(비무장지대)가 모티브였다. DMZ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앨런 와이즈먼(이하 와이즈먼)=같은 민족이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사이를 뚫고 새가 날아와 먹이를 먹는다. 한때 폐허였던 곳이 생명들로 가득 차 있다. DMZ는 자연의 자기치유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많은 사람들이 내 책의 DMZ 부분이 가장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DMZ처럼 연약하고 아름답지만 위기에 처해 있다. DMZ 보존은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종을 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대립 상태에 있는 남북한이 협력하는 일이기도 하다.



황대권=나는 <야생초편지> 등을 통해 전통적 농업이 타격을 입을 것이기 때문에 야생의 풀을 식량으로 삼고 야생에 적응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와이즈먼=그렇다. 화석연료에 기초한 전통적 농업은 지속될 수 없다. 물을 오염시키고 토양을 파괴한다. 20세기 농업 기술은 화학비료와 유전자조작으로 지구를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식량 생산량이 증가한 만큼 빈곤층도 20세기에만 4배가 늘었다.

황대권=이 시점에 <가비오따스> 출간 10년을 놓칠 수 없다.

와이즈먼=<인간 없는 세상>이 제목처럼 ‘우리가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에 대한 얘기라면 <가비오따스>는 인류가 어떻게 자연과 함께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가 주는 교훈이 필요하다.



황대권=10년 동안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는 어떻게 변했나.

와이즈먼=가장 중요한 것은 가비오타스가 콜롬비아의 극심한 폭력적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비무장 공동체인데도 사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지금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실험을 하고 있다. 야자나무를 심어서 지속가능한 바이오연료를 개발하고 있다. 대부분 바이오연료를 위해 숲을 밀어버리지만 가비오타스는 기존 숲과 함께 야자나무를 심고 그것이 숲의 토양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황대권=가비오타스가 자급자족 공동체지만, 생산물을 바깥 세계에 파는 구조여서 예측하기 힘든 세계 경제에 의존한다는 딜레마가 있는 것 아닌가.

와이즈먼=가비오타스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세계와 연결돼 있다.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까지는 생태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지만 너무 커져버리면 부작용이 생긴다. 우리가 커지는 것만을 위한 성장을 계속한다면 스스로를 파괴하는 사태에 직면할 것이다. 지금의 경제위기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번영’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다. 지금까지 크기를 키우는 성장을 번영이라고 했다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인류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가비오타스는 ‘선한 자본주의’의 사례다. 지속가능성에 가장 가까운 생태공동체다. 좋은 제품을 만들고 그것이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 재활용되도록 노력한다.

황대권=한국에도 생태공동체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 생태공동체 운동의 현황은 어떤가.

와이즈먼=미국에는 LA 한가운데에 커다란 생태공동체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등 매우 저렴하게 살면서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미국에는 또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소비자가 생산자의 영농을 미리 지원하고, 수확물을 분배하는 것)가 확산되고 있다. 석유 에너지의 위기와 심각한 대기 오염 등으로 인해 생태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더 늘어날 것이다.

황대권=좌우 대립이 심각한 콜롬비아에서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가 살아남은 것을 보고 희망을 봤다. 가비오타스의 성공 이유는 무엇일까.

와이즈먼=가비오타스는 철저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또 모든 이들이 공동체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했다. 그들이 비무장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게 필요할 때도 있지만 정치적 중립이 효과적일 때도 있다. 나는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고 운동가도 아니다. 저널리스트다. 연구하고 사실을 발견해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내 책에는 무엇이 그렇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명백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설교하는 게 아니라 사실만을 보여준다. 그것이 책이 성공한 이유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도 단지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깨달음을 준다.

황대권=세계 금융위기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인간 없는 세상’에 한 발 다가가는 것 아닌가.

와이즈먼=금융위기는 <인간 없는 세상>에서 말한 대로 어떤 것이 지나치게 커지면 더 이상 지속적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지구는 수많은 재앙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아름답게 살아남았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지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다. 이는 순전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는 우리가 지구와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앨런 와이즈먼은 누구?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애리조나대 국제저널리즘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하퍼’ ‘뉴욕타임스’ ‘애틀랜틱먼슬리’ 등의 매체와 미국 국영라디오방송인 NPR에 진보적 관점의 글을 기고해왔다. ‘LA타임스’ 객원편집위원을 지냈다. 다수의 수상경력을 가진 베테랑 작가이기도 하다. 꼼꼼한 현장 취재와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간결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글을 써왔다. 지난해 펴낸 <인간 없는 세상>으로 ‘미국 최고의 과학 저술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한국을 비롯해 세계 20개국에 출간되면서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08.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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