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역사학자 이성시 교수의 <만들어진 고대>(삼인, 2001)란 책이 있다. "동아시아 각국이 자신의 근대 민족국가의 '국민'을 형성하기 위한 정치적 의지를 고대사를 투사하고 있고 이것은 고대사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낳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씌어진 책이다. 근현대사라고 다를까? 각국의 이해관계와 감정은 이 경우에도 역사인식의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한 시도를 담은 책들이 출간되어 눈길을 끈다(한 권은 엊그제 주문한 책이기도 하다). 간단한 소개기사에서 문제의식 정도는 확인해두면 좋겠다.  

 

한국일보(08. 11. 11) "동북아 근현대사 인식, 공통분모를 찾아라"

동북아시아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큰 장벽은 '감정'이다. 피해의식과 편협한 민족주의가 섞인 흥분은 연구자의 토론 공간을 종종 스포츠 중계석 같은 분위기로 몰고 간다. 그런 감정의 과잉을 걷어내고 역사 인식의 공통분모를 모색하는 두 권의 책이 출간됐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나남 발행)과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창비 발행)은 학문적 논리로 무장한 선동이 아니라, 객관적인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한 소통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러일전쟁에서부터 역사교과서 문제에 이르기까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 부(負)의 역사를 벗어나기 위하여

현대송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가 엮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은 독도, 야스쿠니, 위안부, 교과서 문제 등에 대한 한ㆍ일 학자 12명의 논문집이다. 현 교수는 머리말에서 "이들 문제에 대해 한국의 사회적 관심이 월등히 높지만, 그렇다고 한국 사회의 이해도가 더 높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일본=악'이라는 고정관념이 진실을 찾는 노력과 깊이있는 성찰의 진전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귀가 먼 사람들끼리의 대화"를 극복하기 위해, 이 책은 '가해자 일본, 피해자 한국'의 일원적 관계 도식을 벗어난 다양한 관점을 보여준다.

호리 카즈오 교토대 교수는 "1905년 다케시마(독도)를 영토에 편입한 것이 정당하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양국의 사료를 근거로 통박한다. <세종실록> <증보문헌비고> 등에 독도가 조선 영토로 표현된 반면, <대일본사>와 메이지 시대의 여러 자료에는 독도를 영토에서 제외하고 있다는 것이 근거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한일합방 100주년이 되는 2010년까지 한일조약(1965)을 보완하는 '역사영토조약'을 체결할 것을 제안한다.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 인정 내용을 조약에 넣고, 대신 한국은 일본 어민의 어업권을 보장할 것을 명기하자"는 것이 그가 구상하는 독도 문제의 해결책이다.

강덕상 시가현립대 명예교수는 최근 5, 6년 새 강화된 일본의 '대한(對韓) 내셔널리즘'의 배경을 짚는다. 그는 한류 바람이 양국의 간극을 좁힐 것이라는 기대에 대해 "한류는 시각과 청각, 미각에 한정된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일본의 젊은이들 가운데는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고, 한국과 북한이 원래 하나의 국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 적다"는 것이 재일동포 2세인 강 교수의 인식이다. 한국인이 멋과 맛의 범주에서 벗어나 독도, 야스쿠니, 교과서 등을 말하면 '한국은 왜 불만을 말하는가, 도대체 몇 번을 사죄하면 좋은가'라는 혐한(嫌韓) 정서가 인다는 것이다. 무지가 온존하는 한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여전할 것이라는 견해다.

이 책을 기획한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독도해양영토연구센터는 해외 학계에 한일 관계의 현안을 균형있게 소개한 책이 부족한 현실을 감안해, 이 책의 영문판을 11월까지 발간할 계획이다.



■ 한ㆍ중ㆍ일이 함께 읽는 근현대사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은 아사히신문이 2007년 3월부터 올해 3월까지 연재한 특집 기획기사 '역사는 살아 있다: 동아시아의 150년'을 묶은 것이다. 아사히신문 기자들은 2005년 봄 교과서 왜곡과 위안부 문제로 촉발된 한국과 중국의 대규모 반일시위를 계기로 이 기획을 구상하게 됐다. 기획은 동아시아 근현대사 150년의 중대 사건을 10가지 테마로 구성, 현지의 목격자 및 학자들을 직접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다. 각 장의 끝에는 해당 사안을 다루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 4국의 역사교과서를 비교해 각국의 시각 차를 보여준다.

예컨대 '러일전쟁과 조선의 식민화'(4장)을 재구성하기 위해 취재진은 일본의 마쯔무라 마사요시 러일전쟁연구회 회장, 중국으 리시쒀 난카이대 교수, 한국의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를 각각 인터뷰한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아시아 신흥국이 유럽 강대국에 도전한 전쟁"(마쯔무라)이며 "청나라에 입헌제도 도입에 박차를 가하게 만든 계기"(리시쒀)였고, 동시에 "한반도를 군사상 생명선으로 생각한 일본에 의한 수탈과 억압의 출발점"(정재정)이라는 세 가지 측면이 입체적으로 조명된다. 더불어 일본 교과서에서 이 사건이 국가적 우월감의 근거로 다뤄지는 배경을 짚는다. 반면 한국의 교과서는 '지배와 약탈의 역사'로 이 시기를 51쪽에 걸쳐 상술한다.

저자들은 이 책의 서문에 "기억은 명기(銘記)하는 힘과 환기(喚起)하는 힘의 합력"이며 "기억은 타자와 이야기하고 공유함으로써 비로소 역사가 되는 것"이라고 썼다. 이 책은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출간됐으며, 중국과 대만에서도 곧 간행될 예정이다.(유상호기자)

08.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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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11-12 00:24   좋아요 0 | URL
아 이책들 관심가는 책이네요. 조만간 봐야할 듯...
근데 책표지 넣으실때 알라딘상품넣기 기능좀 해주심 안될까요?
땡스투가 안돼요. ㅠ.ㅠ 이런 책 리뷰도 별로 안올라오기 땜에 로쟈님 외에는 할 사람도 없단 말씀.... ^^;;

로쟈 2008-11-12 00:33   좋아요 0 | URL
펀글을 상품페이지에 노출시키면 저작권에 저촉된다고 합니다.^^;

드팀전 2008-11-12 09:27   좋아요 0 | URL
<만들어진 고대>는 나온지가 좀 되었지요?...저 책이 나왔던 시점이 기억날 듯 한데...당시 신문 책 소개와 서평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탈근대적 시점으로 '국민국가들의 국사만들기'를 지적한 책으로 기억됩니다.'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라는 것을 거꾸로 짚어가는 책이었겠지요. 당시 학계에서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련되서 나왔던 '중국사''한국사'도 아닌 '만주사' 내지는 광의의 '동북 아시아사'라는 개념이 나왔던 것으로 압니다. 이게 당시에 민족주의적 사관에서는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에 포섭되어가는 개념으로 비판받기도 했었던 것 같아요. 저 책이 나왔을 때 관심있게 지켜보고 읽지 않았는데..다시 보니 반갑군요.

로쟈 2008-11-12 21:31   좋아요 0 | URL
2001년이니까 꽤 오래전이네요.^^
 

교수신문에서 '최근 미시사의 성과들'을 다룬 서평을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7195). 미시사 관련서 세 권이 서평의 대상이다. 직접 읽을 수 있는 형편은 못 되더라도 '어디에 가면 무엇이 있더라' 정도는 챙겨두어야겠다. 그 또한 교양이므로...

 

교수신문(08. 11. 10) 진실 독점하는 ‘全知的’ 관점 버리니 잊혀진 인간의 얼굴이 보이네

미시사란 비유하자면 줌인(zoom-in)의 역사다. 미시사가 줌인 하고자 하는 것은 實名의 인간 개인 혹은 소집단이 영위해 온 구체적인 삶의 細切이다. 인류학자들이 ‘마을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연구하는 것처럼, 미시사가들 역시 과거를 멀리서 관찰하기보다는 과거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들과 공감하며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고자 애쓴다. 종래의 역사에 비해 미시사가 종종 더 미묘하고도 다층적인 인간 감정과 정서와 욕망들을 분별해 내곤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접근법 덕분이다.

인간의 구체적 삶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지향하는 미시사가 그들을 ‘설명’하기보다는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때로는 그 이야기 속에 역사가 자신도 슬쩍 끼어든다. 미시사는 더 이상 역사적 진실을 독점하는 ‘全知的’ 관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역사 속에서 잊혀져온 수많은 기억과 목소리와 얼굴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할 따름이다.

1960년대 말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약 20년간은 미시사가 새로이 출현한 시기였다. 이 시기 1세대 저작들은 대체로 사회사적 기반 위에 미시사적 관점을 접목한 것으로 미시사회사적 경향이 농후했다. 2세대는 시기상 대략 1990년대 이후의 저작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특징은 우선 양적 팽창인데, 최근 20여 년간 수많은 미시사 저작들이 쏟아졌다. 연구시기도 1세대의 주류였던 근대 초를 벗어나 20세기까지 확장됐다. 연구범위와 주제도 다양해져서 이례적 사건과 반복적 일상을 넘나들며 젠더, 가족, 몸, 경계인,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문화적 요소로 그 관심사를 넓히고 있다. 지방사, 생활사, 여성사, 구술사, 풍속사, 문화사 등도 그 성격상 미시사와 공유하는 점이 많다.



로렐 대처 울리히의 『한 산파의 이야기: 자술 일기에 근거한 마서 발라드의 생애, 1785~1812』(1990)는 2세대 미시사의 대표적 저작이라 볼 수 있다. 저자는 여기서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까지 미국 메인 주 케네벡 강가에 위치한 100가구 내외의 작은 마을 할로웰에 살았던 마서 발라드란 산파가 죽을 때까지 무려 30년 가까운 긴 세월에 걸쳐 쓴 비망록식 일기에 기초해그녀의 삶을 되짚어가고 있다(이 책이 일기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산파일기’란 역서명은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녀는 이 기간 동안 겨울에는 얼어붙고 봄에는 범람하는 위험한 강을 오가며 816번이나 주변 마을의 아기를 받아냈다. 마서의 일기는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완고한 일상성으로 점철돼 있지만, 이런 점이야말로 사료로서 일기가 갖는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기도 하다. 정확히 9천965일 동안의 일을 기록한  마서의 일기는 그녀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과의 관계망을 엿보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마서의 시대에 산파란 단순한 직업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한 편으로 남편의 부족한 벌이를 보충해 가족을 부양하는 방책이었지만, 동시에 마음 속 깊이 이웃과의 공감을 느끼게 하는 일종의 소명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일기는 당시까지 대학에서 교육받은 (남성)의사가 아니라 (여성)산파가 출산에서 훨씬 더 중심 역할을 했다는 의료사의 중요한 사실도 깨우쳐 준다. 또한 통상적인 장부에는 나와 있지 않은 가계 경제의 이면들, 즉 아마씨를 언제 뿌리고 어떻게 키우고 언제 수확했는지, 그것으로 마서와 그녀의 딸들이 어떻게 실을 잦고 베를 짰는지도 세세히 얘기해준다. 아메리카 동북부의 외진 마을에 살았던 마서와 그 주변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 기억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미시사이다.



이제 1차대전 직전, 제3공화국 시절의 프랑스 파리로 옮겨가 보자. 에드워드 베렌슨이 쓴 『카요부인의 재판』(1992)이 다루고 있는 드라마의 주인공은 전직 총리이자 좌익 급진당 당수였던 조제프 카요의 부인 앙리에트이다. 무대는 보수파 일간지 <르 피가로>의 편집장 가스통 칼메트의 사무실. 시간은 1914년 3월 16일 오후 6시경이다. 당시 칼메트는 근 석 달 동안 온갖 저열한 수단을 동원해 조제프 카요를 비방하는 기사를 게재해오고 있었다. 급기야 3월 13일에는 조제프가 情婦 베르트 게이당(뒤에 그의 첫째 아내가 된다. 앙리에트는 두 번째 아내였다)에게 보낸 비밀 私信까지 공개하면서 그 속에 담긴 그의 도덕적·정치적 위선을 만천하에 공개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3일 뒤 가스통의 사무실을 찾은 앙리에트는 브라우닝 자동권총으로 그를 난사해 절명케 한다. 7월 28일 저녁, 배심원단은 놀랍게도 그녀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이 희대의 사건은 일단 막을 내린다.

프랑스가 전쟁에 참전하기 3일전까지도 거의 모든 신문의 첫머리를 장식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됐던 이 재판은 이른바 ‘벨 에포크’라 불린 세기말 프랑스의 거의 모든 문제점들이 함축돼 있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가족과 사랑, 도덕과 이데올로기, 여성성과 남성성, 섹슈얼리티와 정치에 대한 상반된 가치들이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던 전쟁 직전 프랑스 사회의 단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대는 다시 15세기 후반의 피렌체.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전문가인 마르티네스가 2003년 ‘감독한’ 최신작 『사월의 유혈극: 피렌체와 반 메디치 음모』다. 이 역시 카요 재판처럼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 강도는 훨씬 더 끔찍하고 엽기적이다. 1478년 4월 26일, 일단의 자객들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으로 들어가던 메디치가의 일명 ‘大人’ 로렌초(번역과는 달리 ‘위대한 로렌초’가 아니다. 원래 그의 ‘위대한’ 행적 때문에 붙은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습격한다.

당시 병색이 짙었던 줄리아노는 칼에 난자당해 죽었으나 로렌초는 운 좋게 달아난다. 이것이 이른바 ‘파치 음모’이다. 이는 신흥 귀족 메디치가에 밀려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던 명문 파치가가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비호 아래 일대 반전을 노린 사건이었다. 하지만 곧 로렌초의 피비린내 나는 무자비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주모자들은 붙잡혀서 처참하게 살해되고 그 시체는 아이들의 놀이감으로 또는 개의 먹잇감으로 던져진다. 심지어 정적의 시체 일부를 먹는 ‘카니발리즘’의 제의가 행해지기까지 한다. 저자는 ‘파치 음모’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전통적인 공화주의 판도를 무력화하려는 메디치가의 또 다른 ‘음모’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메디치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최근 서구 학계의 대체적인 경향에 대한 반발이라고도 할 수 있다.

파당성이 강한 이탈리아 학계의 풍토에서 이러한 시도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저자가 지금까지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진짜’ 역사가는 없었다고 단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르티네스는 이 사건을 하나의 창으로 삼아 당시 피렌체에서의 이념 투쟁, 정략적 혼인 정책, 정적을 말살하는 ‘창의적인’ 갖가지 방법, 후원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자유’의 한계 등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층위들을 상세히 전해준다. 하지만 성벽으로 둘러싸인 최대 인구 7~8만의 당시 피렌체에서는 이 모든 측면이 정치라는 용광로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또 다른 주장이다.

이 세 저작들의 공통점은 마서의 일기든, 카요의 재판이든, 혹은 파치의 음모든 간에, 모두가 그것을 하나의 창으로 삼아 그것을 둘러싼 더 넓은 컨텍스트와 더 깊은 층위들을 판별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각자의 변용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이것이야말로 미시사를 가로지르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곽차섭 부산대·서양사)

08.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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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 2008-11-12 01:46   좋아요 0 | URL
필자가 서양사학자라서 최근 번역된 책 세권만 소개한거 같은데, 사실 비슷한 방법론으로 한국사를 들여다본 저서들도 상당히 많은거 같습니다. 이제 시작이겟지만요. 특히 최근에 나온 (아직 살펴보지는 못한) '양반의 사생활'이 이런 접근법으로서 좋은 예가 아닌가 싶군요.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510787
사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위의 세권 중 두번째와 세번째는 미시사 책을 몇권 읽어보면 느낄 수 잇는 '소재주의'가 감지되는데요, 물론 읽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얘기하는게 편견이겟지만요.

로쟈 2008-11-12 21:30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소재를 찾아내는 것도 능력일 듯싶은데요.^^

반딧불이 2008-11-12 23:44   좋아요 0 | URL
최근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를 재미있고 읽고 미시사를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로쟈님 덕분에 새로운 책들을 알게 되었네요. 감사드립니다.

로쟈 2008-11-13 06:56   좋아요 0 | URL
이후엔 '긴즈부르그'로 표기됩니다. 저도 옮겨놓았을 뿐인 걸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기사 몇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지난 주말에 한국학술단체협의회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행사가 개최되었는데, 이와 관련한 기사가 두 편이고, 거기에 덧붙인 건 피아니스트 강충모 교수의 인터뷰 기사이다. 학단협 20년에 대한 회고의 주조음이 '뼈저린 반성'인 것이 이채롭다(관심을 끄는 발표주제들이 있어서 홈피의 자료실을 찾았더니 고작 서너 편의 발표문만 덩그러니 올려져 있다. 역시나 반성은 말뿐인 듯싶다). 대저 학문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더불어, 이 학문/예술과 삶, 그리고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본다. 개인적인 스크랩이지만 혹여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이 더 계실까봐 '공개'로 해놓는다...  

한국일보(08. 11. 06) 2008년 한국사회 진보의 자기반성

2008년 한국 사회에서 '진보'란 어떤 목소리일까. 한국학술단체협의회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21세기 진보와 진보학술운동의 과제'를 주제로 연합 학술대회를 7, 8일 건국대에서 연다. 학단협은 6월항쟁의 열기가 남아 있던 1988년 진보적 학술단체들이 결성한 협의회로, 현재 26개 단체 5,000여명의 회원들이 '학술활동을 통한 사회 민주화'를 목표로 각종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번 대회는 신자유주의의 전지구적 확산과 국내 보수정권 출현이라는 환경 속에서 진보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마련됐다. 두 편의 발표 논문을 통해 2008년 오늘, 진보의 목소리를 미리 들어본다.

김범춘 건국대 강사(철학)의 발표문 '지연되는 미래와 진보 철학'은 진보의 뼈저린 자기반성을 담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진보는 때때로 악수를 두는 멍청한 보수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갖고 있는 '저항'이라는 낡은 콘텐츠마저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방적 콘텐츠로서 진보가 행사하던 이론적 우위가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진보는 진보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콘텐츠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는 진단했다. 그는 "이 처참한 현실을 메우기 위해 이론의 과잉은 불가피"하지만 그렇게 끌어들인 레비나스, 로티, 벤야민, 들뢰즈도 제대로 소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현실에 맞는 레시피(조리법)도 없이 그저 번역하고 세미나하고 논문 쓰고 토론한 결과, 진보적 지식인은 새로운 지식의 홍보전문가이거나 출판전문가로 변신했다"고 통렬히 비판했다.

김재현 경남대 교수(철학)는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장을 위하여'라는 발표문을 "민주주의가 갖는 문제에 대한 처방은 더 많은 민주주의다"라는 존 듀이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시대정신이 따로 있고, 진보진영의 시대정신이 따로 있는가"라고 물은 뒤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미성숙한 것"이라고 스스로 답한다. 그리고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사회권, 인정투쟁, 민주주의 등의 개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 교수는 '진보, 개혁의 위기는 민생의 위기이고 민생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문제의식은 민주주의의 확장을 통해 해결 가능한 것으로 본다. 비정규직, 소수자 인권, 실업자 생존권 등의 문제를 들며 이것이 아직 남아 있는 '반민주 대 민주'의 전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는 최장집 교수의 말을 다시 인용하며 끝을 맺었다.(유상호 기자)

한겨레(08. 11. 06) 학단협 20돌 ‘학술운동 제도권화’ 자성 목소리

국내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연구단체의 협의기구인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가 창립 20년을 맞았다. 1988년 11월 한국산업사회연구회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정치연구회 등 10개의 진보적 학술단체가 모여 출범한 학단협은 “연구와 학술 활동을 통해 사회 민주화에 이바지한다”는 정관이 말해주듯 학술 ‘운동’ 단체로서 실천적 지향이 뚜렷했다. 이론을 매개로 현실을 비판하는 ‘이론적 실천’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변혁을 위한 ‘실천적 이론’을 안출하려 했고, 일부는 그 이론을 들고 현실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지금 학단협 안팎에선 “학술운동이 제도권 내부의 ‘교수운동’이 되어버렸다”거나 “운동의 정체성을 잃고 국가기관의 ‘협치’(governance) 파트너로 전락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서유석 학단협 상임대표도 “학술운동이 상당 부분 ‘제도권 학회’의 연합운동으로 축소된 측면이 있다”고 인정한다. 핵심 회원단체들이 정부 지원을 받는 제도권 학회로 자리매김되고, 연구활동 역시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이나 학술진흥재단(학진)의 등재지 기준에 따라 규율되면서 지식생산 역시 특정 방향으로 구조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88년 문학예술연구소 회원으로 학단협 창립에도 참여했던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만드는 사람)는 이런 현상을 ‘학문의 국가종속’이란 관점에서 비판한다. 그는 “종속은 두 가지 형태로 이뤄졌는데, 하나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연구자들 일부가 통치시스템에 적극 가담하는 형태였다면, 다른 하나는 학술진흥기금을 매개로 학술활동이 정부 통제체제에 편입되는 방식이었다”며 “두 가지 모두 학문 자율성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진단했다.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활동하는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학술운동’이란 명칭 자체에 회의적이다. 이 교수는 “연구자 대부분 대학에 자리를 얻고, 단체들 역시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 학단협은 제도권 안에서 공식 지분을 가진 ‘좌파 학계’가 됐다”며 “특히 학술지를 운영하거나 학진의 심사에 참여하는 좌파 연구자들의 행태는 과거 그들이 비판했던 우파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꼬집었다.

90년대 중반 산업사회연구회 활동을 통해 학단협과 인연을 맺은 신진욱 중앙대 교수도 “진보 학술지들이 학진의 등재(후보)지가 되면서 연구자들에게 표준화·획일화된 글쓰기가 강요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게재 기준을 충족시키려다 보니 대중과의 소통 지점은 좁아지고, 운동에 대한 실천적 고민도 약화되는 문제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학단협 안에서도 자성과 쇄신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2003년 상임대표를 지낸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학술운동이 외부 권력과의 싸움은 중시하면서도 내부의 제도·문화·관행을 개혁하는 데는 소홀했던 게 사실”이라며 “우리 스스로를 권력대상으로 성찰하지 않는 한 운동의 발전은 없다”고 진단했다. 조 교수는 8일 열리는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와 함께 △탈국가·생태·여성주의 시각의 내재화 △복합적 신계급담론의 정교화 △제도권·비제도권의 경계 허물기 △학벌주의·학진 질서 타파 △신자유주의적 지식생산 규칙의 극복 등을 진보 학술운동의 과제로 의제화할 계획이다.

80년대 초반 김진균·변형윤 등 해직교수들을 중심으로 분과학문별 소규모 연구그룹이 생겨난 뒤 대학원생·사회운동가를 주축으로 세를 규합해간 학술운동은 88년 6월 서관모 충북대 교수의 논문에 대한 검찰조사에 공동 대응하는 과정에서 상설 협의체인 학단협을 탄생시켰다. 현재 26개 단체 5000여명의 연구자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매년 한 차례의 연합 심포지엄을 열며, 수시로 사회 쟁점과 관련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이세영 기자)



경향신문(08. 11. 10) 피아니스트 강충모 “클래식의 대중화? 그건 난센스”

피아니스트 강충모(48·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참 ‘미련한’ 사람이다. 서울이 월드컵 열기로 한창 뜨겁던 2002년 초여름, 그는 바흐의 피아노 음악을 암보(暗譜)로 연주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바흐의 느리고 차분한 음악을 연주하면서 “월드컵도 중요하지만 나같은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었다.

그의 고집스러운 행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바흐 전곡 연주’를 펼친 그는, 곧바로 해설과 연주를 병행하는 ‘렉처 콘서트’를 시작했다. 이 또한 5년 계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이달 15일에 마침내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6일 서초동에서 만난 강충모는 “이제 좀 지쳤다. 앞으로 4~5년 연주를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두 가지 문제를 풀어보려고 렉처 콘서트를 시작했지요. 피아노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악보만 들여다보는 게 답답했어요. 음악은 오선지 속에만 들어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작곡가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해야 하고, 왜 그 곡을 작곡했는가, 담겨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등등, 악보의 이면(裏面)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죠. 또 하나의 동기는 ‘클래식 대중화’라는 구호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죠. 제가 9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당시 한창 인기있던 <열린 음악회>를 보면서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클래식을 ‘대중화’한다는 발상 자체가 난센스 아닙니까? 대중화라는 말만 앞세우면서, 오히려 사람들을 클래식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방식이죠.”

그는 “한국의 음악문화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외국 연주자들이 내한해 한국 청중을 우습게 보는 연주를 펼치는 걸 심심찮게 본다”면서 “그 무성의한 연주를 지켜보노라면 같은 연주자로서 분노가 치민다”고 했다. 또 “허명(虛名)뿐인 연주에 청중이 열렬히 기립박수를 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고도 했다.

제가 한창 바흐를 연주하고 있을 때, 외국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한 분이 내한했어요. 저도 그 콘서트에 갔었지요. 그 사람이 연주할 곡도 바흐였거든요.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이었어요. 상당히 기대를 하고 갔었는데, 연주가 아주 무성의한 겁니다. 심지어 펼쳐놓은 악보를 군데군데 건너뛰면서, 그야말로 ‘대충’ 하더라고요. 한국 청중을 너무 ‘쉽게’ 본 거죠. 또 어떤 연주회에서는 중간에 그냥 나와버린 적도 있어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문제 많았던 연주에 청중이 열광하더라고요.”

한국의 연주회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일부 청중의 키치(Kitsch)적 태도. 강충모는 신분이나 교양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음악회장을 찾아오는, 속물적인 ‘문화 귀족’들에게도 일침을 놨다. 그는 “입장료가 비싼 연주회일수록 그런 청중이 많다”며 “콘서트홀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사교장으로 변질돼선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연주자를 꿈꾸는 후학들에게는 ‘해석의 깊이’를, 콘서트홀을 찾는 청중에겐 음악에 대한 ‘이해와 견해’를 갖게 해주고 싶어서 5년간 렉처 콘서트를 이끌어왔다는 강충모. 그는 ‘인투 더 클래식’이라고 이름붙인 이 장기 프로젝트를 1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마감하면서 세 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한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대곡(大曲)으로 꼽히는 ‘21번 B플랫장조 D.960’, 베토벤 후기의 초탈한 음악성을 대변하는 ‘소나타 32번 c단조’, 쇼팽이 작곡한 3곡의 소나타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 ‘3번 b단조’ 등이다. 3곡의 공통점은 세 작곡가의 마지막 소나타라는 점. 그래서 연주회 이름도 ‘마지막 소나타’로 붙였다. 특히 베토벤의 소나타 32번은 강충모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이라며 애착을 표하는 곡이다.

그는 “죽을 때 가져가고 싶은 음악이 있는가?”라는 마지막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있다”고 답했다. “어떤 곡이냐?”고 묻자, “베토벤의 32번, 말러의 ‘대지의 노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2악장”이라고 답했다.(글·문학수 선임기자)

08.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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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1-11 09:20   좋아요 0 | URL
^^ 콘서트홀이야말로 '과시적소비'를 가장 세련된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공간 중에 하나일겝니다. 강충모가 좋아하는 곡은 저도 좋아하는 음악들이네요. 가을 요맘때는 중국 한시에 곡을 붙인 말러의 '대지의 노래'가 귀에 잘 들립니다.

로쟈 2008-11-12 00:53   좋아요 0 | URL
청중들의 키치적 태도 못지 않게 문제인 건 공연비평 같습니다. 좋은 공연과 부실한 공연을 가려주는 비평문화가 제대로 자리잡고 있다면 허술한 공연이 발붙이기 어려울 듯싶은데, 사정은 그렇지 못한 듯해서요...

수유 2008-11-11 09:44   좋아요 0 | URL
슈베르트 D.960은 이 계절하고도 아주 잘 어울리죠..저도 좋아하는 곡들입니다.
나이들면서 슈베르트의 곡들의 어떤 진정성들이 와닿아요..
별 관련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콘서트홀의 '키치적 행태'야 익히 보아온 것들이고..그래도 요즘 많이 나아진것 같기도 한데
뭐 그렇습니다.

로쟈 2008-11-12 00:56   좋아요 0 | URL
공짜표 청중과 '문화 귀족' 없이도 고급 공연문화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1-11 16:35   좋아요 0 | URL
학단협...가물가물 기억나는 단체...한나라당이 재집권했으니 예전 군사정권 때처럼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로쟈 2008-11-12 00:51   좋아요 0 | URL
별로 기대가 가지는 않는데요.--;
 

중앙대 대학원신문에서 학술 동향 관련기사를 몇 편 스크랩해놓는다(http://www.cauon.net/news/articleList.html?sc_area=I&sc_word=jaewoni). 기초학문 및 인문학에 대한 지원체계의 부족, 이로 인한 연구자의 정체성 위기와 타개 전망의 불투명이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대학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학문 자체는 절대적인 것인지 의문이다). 독일 인문학계도 침체돼 있는 형편이라고 하니, '인문학은 어디로 가는가'란 물음만큼은 두루 적용될 듯싶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03) 위협받는 기초학문과 인문학의 위상

곧 한국사회에 공룡이 출현한다. 2008년 기준 한 해 예산 약 1조 원의 한국학술진흥재단과 1조5천억 원의 한국과학재단, 6백억 원의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이 ‘한국연구재단’으로 통합될 예정이다. 정부발표에 따르면, 한국연구재단은 인문학, 사회과학, 과학을 통틀어 한 해 약 2조5천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의 학술연구 지원활동을 전담할 예정이다.

여러 곳으로 분산된 연구지원체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프로그램매니저(PM) 제도를 도입하면 연구자의 불편이 해소되고 전문성이 강화될 것이라 정부는 예상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번 통합으로 “기초원천연구투자 확대”와 “기초연구지원시스템 효율화 및 선진화”가 이뤄져 “기초원천연구의 창조적 역량 극대화, 지식기반사회의 성장잠재력 확충, 과학기술 5대 강국 구현의 기초체력 강화”를 이룰 것이라 예상한다.

그런데 이 엄청난 규모의 통합이 실제 학술연구활동에 미칠 영향에 관해서는 아직 심도 깊은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3개의 재단을 하나로 통합했을 때의 장단점에 관해 정부는 분명하고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연구지원체계를 일원화해야 효율적인 관리가 가능하다는 주장만 있을 뿐이다. 지난 8월 8일 학술단체협의회, (전국)인문과학연구소협의회, (전국)사회과학분야중점연구소협의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공개토론회는 이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토론회에 참여한 학자들은 이번 통합이 성과주의와 관료주의를 따르는 발상일 뿐만 아니라 기초학문과 인문학의 위상 자체를 뒤흔들 수 있다며 우려를 드러냈다.

연구활동을 위축시키는 연구지원체계
기본적으로 이번 통합은 정부의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의 일부이다. 29개 공공기관을 13개 기관으로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한국연구재단이 설립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통합은 학술연구지원정책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 공공기관의 구조조정과 더 많이 연관되어 있다. 자연히 한국연구재단의 설립은 학문의 과정보다 효과적인 결과물에, 학술연구의 다양성보다 국제경쟁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따라서 가시적인 성과를 낳을 수 있는 분야에만 예산이 집중될 것이다.

물론 인문한국(HK)이나 두뇌한국(BK21), 누리사업(NURI)처럼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업들이 갑작스레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재단의 통합이 학문후속세대의 삶을, 특히 인문학이나 기초학문과 연관된 학문후속세대의 삶을 지금 당장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원을 위한 ‘조건’을 고려하면 그 위협은 곧 드러난다. 그동안 학술진흥재단 지원의 여러 문제점들이 지적되어왔는데, 이번 통합은 한국연구재단의 사무총장과 PM에게 더 많은 권한을 집중시켜서 ‘학문의 편향성’을 더 심화시킬 예정이다. 특히 심사자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경우, 권력을 가진 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연구지원사업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학계의 연구방향도 요동치리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연구성과에 대한 양적인 평가를 보완하겠다고 밝히지만 그 질적 보완은 한국의 특성보다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를 것이다. 그러니 학문후속세대의 능력이 자기 전공에 대한 열정이나 능력보다 영어논문 작성능력으로 평가받는 왜곡된 현상은 더 심각해질 것이다. 또한 학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인력을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이 연구능력보다 더 빛을 발할 것이다. 이런 정책은 대학원 내부에도 영향을 미쳐 한정된 프로젝트를 놓고 대학 내에서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고, 교수는 마치 기업체의 팀장처럼 자신의 학생들을 훈련시킬 것이다. 학제간 연구는 상품일 뿐이고 대학원사회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기업으로 변할 것이다.

대학을 바꿔야 학문이 산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정부와 대학은 소위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 사업을 놓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다. 해외의 석학을 유치해서 한국 대학의 수준을 세계 수준으로 높이고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겠다며 정부는 5년간 1조 원에 가까운 예산을 쏟아 부을 예정이다. 많은 돈을 주고 해외에서 모셔온 소수의 석학이 한국 대학의 수준을 높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예산은 한국의 수많은 학문후속세대에게 쓰여야 할 예산에서 전용된 것이고 이를 통해 학문의 종속성이 더 심화될 것이다. 사실 학문후속세대가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은 국가나 기업같은 외부환경이 아니라 대학이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사학재단들은 그런 기본적인 투자를 외면하고 있다. 매년 엄청난 액수의 적립금이 쌓이지만 등록금은 늘어나고 연구에 필요한 돈마저 프로젝트를 통해 마련해야 한다. 외국의 학자를 서로 데려오려고 꼴사나운 경쟁을 벌이면서도 정작 시간강사들의 처우는 기본적인 보장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학문후속세대의 미래를 논할 수 있을까?(하승우/ 지행네트워크 연구위원)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26) 흔들리는 연구자의 정체성, 어려워지는 소통

최근 '학력 인플레'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지난 9월 3일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2008년 교육기본통계조사’(올해 4월 1일 기준)에 따르면 대학 진학률은 84%에 육박했다. 이는 해외 주요 국가들의 대학 진학률이 50% 안팎에 머무는 것을 감안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평균 최종학력의 전반적인 상승 탓에 학력의 가치 자체가 저하되는 현상을 뜻하는 학력 인플레가 더욱 가속화된 것이다. 

흔히 학력 인플레는 대학 졸업생이 고교 졸업생의 일자리를, 대학원 졸업생이 대학 졸업생의 일자리를 차지하는 ‘하향 구직’ 현상을 낳는다. 그리고 이 현상이 뒤집힌 형태로, 저하된 졸업장의 가치를 만회하기 위한 ‘묻지마 진학’ 현상을 낳는다. 문제는 이 두 현상이 장기간의 경제침체로 인한 고학력실업 문제, 날로 높아지는 등록금 문제와 결부되어 비자발적인 학업중단(포기)이나 휴학 비율의 상승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대학원생들의 ‘연구자로서의 정체성’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연구성과로 소통하기?
이런 상황에서도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거나 유지해갈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자신의 연구성과를 공개적으로 소통시키는 것이다. “각종 언론매체나 잡지에 실린 반응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지난 98년 석사논문을 단행본으로 출판했던 김정한 씨(서강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사수료)의 말이다. 김씨는 석사논문을 마친 뒤 ‘계속 공부를 해야 할까’, ‘내가 연구자로서 능력이 있나’와 같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김씨는 그때 주변에서 들은 평가에 힘입어 연구자로 살아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제 연구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기보다는 ‘내 문제의식이 소통되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더 공부해서 더 많이 소통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그러나 지금은 김씨처럼 소중한 경험을 누릴 기회가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다. 현재 출판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학위논문을 공간(公刊)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취업과 박사과정 진학의 기로에 놓인 석사의 경우에 논문 출판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수익성을 중시하는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박사논문, 그것도 인맥으로 소개받거나 이미 다른 경로로 실력을 ‘검증’받은 사람들의 박사논문만을 출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바로 단행본으로 출판해도 될 만큼 내용이 알찬 학위논문들이 아니면 출판이 힘들 것이다”라고 돌베게 출판사의 김희진 인문팀장은 말한다. “그리고 현실적이고 시의성 있는 주제, 출판시장에서 원하는 주제들을 다룰수록 좋다.” 요컨대 출판계에서 교양서나 대중서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면 대학원생들이 연구성과를 출판하기가 불가능한 셈이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논문형 글쓰기로는 대중독자를 사로잡을 수 없다. 하물며 펜과 종이보다 마우스와 스크린에 익숙한 젊은층을 유인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 논문을 읽어줘!
물론 자신의 연구성과를 소통시킬 수 있는 통로가 단행본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학술지가 있다. 현재 학술진흥재단의 등재학술지는 902종, 등재후보학술지는 533종에 달한다. 이에 포함되지 않은 학술지까지 포함한다면 그 종수는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학술지는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소통이 내부적으로만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한소장의 지적처럼 “대부분의 등재지가 내용의 참신함보다는 논문형 글쓰기만을 암묵적으로 강제하므로 발랄한 글쓰기를 봉쇄한다”는 단점이 있다.

또 다른 통로로 잡지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작년 10월 한국언론재단이 발표한 ‘잡지 경영 현황과 발전 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에서 발행되는 학술/학회지는 123종이다. 그러나 이는 아동지ㆍ교육학습지까지 포함한 숫자이다. 실제로 활발히 유통되고 있는 학술/학회지는 30종 미만이라는 게 출판계의 정설이다. 그나마 이 적은 종수마저도 숱한 잡지들의 휴간·폐간·신간이 반복되면서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온라인상의 블로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해보라는 출판관계자들도 있다. 블로그 글쓰기를 통해 논문형 글쓰기가 아닌 대중적 글쓰기를 훈련하고 불특정 다수와 소통하는 경험을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데 있다. 출판계에서 말하는 대중적 글쓰기가 소통을 원활하게 해줄 수 있을지언정 만병통치약은 아닐 것이다.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방법이 꼭 대중과의 소통이어야만 할 이유도 없다. 중요한 것은 연구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스스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다.(이재원 편집위원)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26) 침체된 독일의 인문학계

임마뉴엘 칸트, 게오르그 헤겔, 칼 맑스, 프리드리히 니체, 에드문트 후설, 마르틴 하이데거, 발터 벤야민, 테오도르 아도르노, 칼 포퍼, 위르겐 하버마스 등 위대한 사상가들을 낳으며 전세계의 지적 논쟁을 주도한 독일 인문학계가 긴 침묵에 빠져 있다. 인문학자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인문학의 경제화와 국제화가 독일 인문학계의 비판정신을 짓누르고 있다고 한다. 독일의 사례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편집자주>

여전히 많은 철학·문학잡지들이 발행되고, 인문학 서적들도 계속 집필·번역되고 있지만 독일의 인문학계는 긴 침묵상태에 빠져 있다. 1960년대의 실증주의 논쟁, 1970년대의 해석학 논쟁만큼의 철학사적 의미를 갖는 건 아닐지라도 1986~7년 홀로코스트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위르겐 하버마스와 에른스트 놀테 사이에서 벌어졌던 ‘역사가 논쟁’, 1999년 유전자 복제기술과 관련해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휴머니즘 전통을 도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섬으로써 촉발된 ‘슬로터다이크 논쟁’ 이후로는 현실 문제나 시대적 진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내세울 만한 인문학적 논쟁이나 쟁점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올해 6월 15일 만하임대학의 요헨 회리시 교수가 SWR2 라디오 인터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현재 독일의 인문학자들은 자기 분야의 전문적·서지적 문제들에만 매달리면서 현실 문제에 어떤 테제를 제기할 만한 자신감은 잃어버린 듯하다. 왜 그럴까?

인문학자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인문학의 경제화·국제화
여기엔 무엇보다도 독일사회 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대학, 특히 인문학과들의 거센 구조조정이 작용하고 있다. 지난 정권 때부터 시작된 독일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얼마 전부터 대학에도 변화를 요구하며 본격화됐다. 그중 인문학이 가장 큰 개혁 대상이었다는 것은 1995~2005년 사이에만 총 663개의 인문학 교수 자리가 통폐합으로 없어졌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프리드리히 니체 등의) 독일 인문학적 전통을 이어가던 문헌학과ㆍ교육학과는 이 기간 동안 35%의 교수자리를 삭감당해야 했고, 지금도 많은 인문학과들은 퇴직 교수의 후임을 선출하지 않는 방식으로 교수정원을 줄여가고 있다.

이로 인해 1999년 1인당 75.3명이었던 인문학과 교수 대 학생 비율은 2003년에 93.7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인문학 교수들이 더 많은 수업과 행정 부담을 맡아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나아가 지금까지 정부 예산으로 이뤄지던 대학운영을 등록금 도입과 기업스폰서를 얻는 방식으로 자율화하려는 방침에 따라 인문학자들에게도 개별 연구와 저술 활동보다는 기업 등으로부터 재정후원을 얻기 쉬운 공동연구 프로젝트가 권고되고 있다.

‘인문학의 경제화’와 ‘국제화’라는 모토로 진행되고 있는 이와 같은 대학의 실용주의적 전환은 학생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1999년부터 독일 대학들은 연구 중심의 전통적인 마스터 과정(우리나라의 학사와 석사가 통합되어 있는 과정) 대신 졸업 후 취업준비에 더 역점을 두는 바첼러 과정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에 대해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과 교수 마르틴 젤은 인문학자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공동연구, 연구평가, 기업스폰싱 등이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연구를 구조적으로 가로막고 오히려 큰 시간낭비를 초래하고 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힘을 잃어버린 비판이론의 토포스
또한 독일 인문학계의 침체는 독일에서 진보적 지식인들의 입지가 협소해지고 있는 상황과도 관련되어 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독일 인문학계를 지배하던 비판이론의 토포스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적 전망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나라보다 선진적인 노동조건과 사회보장을 갖추고 있던 사회민주주의 국가 독일이 세계화된 자본주의 경제의 압력에 밀려 이를 후퇴시키고 사람들에겐 열악한 조건의 일자리나마 감사히 받아들이게 하는 현재의 상황은 현실 비판의 토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2년 전, 별로 새로울 것도 없던 하버마스나 귄터 그라스의 나치 전력을 문제 삼아 독일을 대표하는 이 두 비판적 지식인들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가 이뤄진 이후 소위 ‘새로운 시민성’을 내세우는 보수주의 흐름으로부터 좌파에 대한 이념적 공세가 강해지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이다.

이는 무엇보다 올해 40주년을 맞이한 68혁명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작년 <슈피겔>(44호)이 “68세대에게 자비를, 전부 다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라는 교묘한 제목의 타이틀 기사로 포문을 열었다. 그 뒤 68세대는 서구 문화의 업적을 경멸ㆍ거부하고, 가족파괴와 출산율 저하에 책임이 있으며, 결국 오늘날 모두가 받아들여야 하는 성과중심의 사회원리를 속물적이라고 거부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현실 적응력을 상실케 했다고 비판받았다. 68년 학생운동의 주역이자 현재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역사가 중 한 명인 괴츠 알리는 <우리의 투쟁>(2008)을 통해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패러디한 제목이 암시하듯) 심지어 68세대가 나치즘에 열광했던 1933년 독일 젊은 세대들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답습하고 있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최근 미국 금융시장의 붕괴로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의 몰락이 예견되고 있는 가운데, 독일에선 자본에 대한 사회적 규제의 요구가 점점 높아져가고 있다. 이것이 독일 인문학의 위축된 비판정신을 부활시키는 방향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오히려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쳐 국가의 행정권력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나아갈지는 현재의 인문학자들이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김남시/ 독일 훔볼트대학 문화학과 박사과정)

08. 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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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09 15:43   좋아요 0 | URL
귄터 그라스가 소년 시절 나치 친위대원이었다는 고백을 하자 요아힘 페스트는 엄청난 분노를 퍼부었지요.평소에도 반공우익 색채가 진했던 페스트인지라 그라스 너 잘 걸렸다 생각하고
그랬을 거에요.노인네가 너무 격노하면 건강에 안 좋죠.얼마 못가서 페스트는 죽더라구요.년도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네오나치들이 그라스를 구타해서 병원신세 지게 한 적도 있었죠.폭력성은 독일우익들이 일본우익보다 훨씬 더한것 같아요.

로쟈 2008-11-09 20:49   좋아요 0 | URL
전에 그라스 건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놓은 적이 있는데, 비공개로 해놓았습니다. 크리스타 볼프 건과 함께 현대 독일문학에선 양대 스캔들이 아닌가 싶어요...
 

이번주 언론의 북리뷰에서 초점이 된 책은 '킬링필드'의 악몽을 다룬 필립 쇼트의 <폴 포트 평전>(실천문학사, 2008)이다. 877쪽이니까 두께로도 눈길을 끄는 책이다(2005년에 나온 원저 자체가 560쪽에 이른다). 함부로 손에 들지는 못하겠지만 리뷰 정도는 챙겨놓도록 한다.

경향신문(08. 11. 08) 왜 캄보디아 사회는 ‘킬링필드’를 내버려뒀나

킬링 필드(Killing Field)’는 현대사에서 ‘악몽’의 다른 이름이다.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장악한 1975년 4월부터 79년 1월까지 캄보디아 인구 700만명 가운데 150만명이 희생됐다. 상당수가 숙청당했고 나머지는 질병·강제노동·기아로 인해 사망했다. 지도자들의 정치적 야욕으로 단 한 번에 이토록 높은 사망률이 발생한 사례는 역사상 처음이다.

1988년 중국 남부 징강산에 있는 마오쩌둥의 옛 게릴라 기지를 방문한 폴 포트.

폴 포트(1925~98년)는 이 끔찍한 ‘악몽’의 최고기획자였다. 그의 기획은 극단적으로 과격했고 또 냉혹했다. 정권을 잡은 3년8개월 동안 250만명의 프놈펜 시민들이 지방으로 쫓겨났고 집산주의 정책으로 전 국민은 자유와 개성을 박탈당했다. 화폐·법정·신문·우편·해외 원거리통신은 폐지됐다. 집단 개념이 강조돼 ‘나’ 대신 ‘우리’라는 말을 써야 했고, 자기 부모를 ‘숙부’ ‘숙모’로, 다른 사람을 ‘아버지’ ‘어머니’로 불러야 했다. 

포트와 크메르루주의 혁명이 극단으로 치달은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왜 ‘정의롭고 부유한 사회’를 향한 꿈이 ‘인류 최악의 참사’로 변했을까. <폴 포트 평전>은 이 같은 의문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영국의 타임스와 BBC 등의 해외통신원으로 활동했던 저자는 크메르루주 핵심인물들과의 인터뷰와 프놈펜·베이징·하노이·모스크바·파리의 각 정부 및 당 문서자료를 바탕으로 영문 부제(‘Anatomy of a Nightmare’) 그대로 20세기의 ‘악몽’을 냉철하게 ‘해부’해 나간다.



책은 훗날 폴 포트로 불려지게 되는 살로트 소르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형식을 취하지만 단순한 인물 전기를 넘어선다. 캄보디아의 비극이 어떻게 배태되고 진행됐는지를 캄보디아의 역사와 지정학적 위치, 종교와 문화, 정치·사회제도 등 다각도로 분석했다. 나아가 자국의 이익에만 몰두했던 베트남 등 주변국과 미·중·소 등 강대국과의 관계를 살피면서 캄보디아 현대사를 꼼꼼하게 되살려냈다. 문제적 인물을 통해 시대의 모순을 짚어내는 평전의 본보기라 할 만하다. 

저자는 비극이 잉태된 원인을 캄보디아의 독특한 문화와 사회 조건에서 찾는다. 소승불교의 규범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던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악인을 물리칠 선인의 화신”으로 여겼다. 사랑과 슬픔 등 모든 감정은 떨쳐버려야 할 개인주의의 소산으로 보고 일부 지역에서 웃거나 노래하는 것조차 금지한 것은 마치 소승불교에서 열반에 이르려면 속세의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한 것과 비슷했다. 폴 포트가 육체노동을 강조한 것도 육체노동이 프롤레타리아 의식을 연마하는 수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비극의 씨앗은 크메르루주가 농민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저자는 “전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농민혁명에는 도시에 대한 분노라는 특징이 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프놈펜에 입성한 크메르루주에게 프놈펜의 ‘타락상’은 혐오와 분노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도시민이 땅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개조해야 도시생활에서 묻은 오물을 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폴 포트는 “낡은 사상이나 이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혁명의 불길’ 속에 사라지고 나면 캄보디아가 더 강해지고 깨끗해져서 공산체제의 본보기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당시 폴 포트와 그의 동료들이 만든 것은 국민을 ‘벽 없는 감옥’에 가두는 ‘현대 최초의 노예제국가’였다.

크메르루주 여성대대가 행군하는 모습(1974년쯤).

저자는 “폴 포트 정권의 잔혹성은 캄보디아 역사에 책임이 있다”고 밝힌다. 봉건적 전통질서가 여전한 상황에서 이들은 과격한 방법이 아니면 캄보디아가 변할 수 없다고 여겼다. 더욱이 캄보디아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결심은 한층 더 강했다. “힘없는 동물도 구석에 몰리면 본능적으로 쫓아오는 포식자에게 덤벼들듯이 폴 포트는 사투(死鬪)가 방책이라고 여겼다”는 설명이다. 

부관의 자녀들과 함께한 폴 포트.

그런데 ‘킬링 필드’의 책임이 모두 폴 포트와 그의 동료들에게만 있을까. 책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전쟁을 야기하거나 지원한 외국 국가들에도 책임을 묻는다. 저자는 “‘베트남전쟁이 없었다면 크메르루주도 없었다’는 단순한 등식에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미국은 60~70년대 폴 포트에게 집권 동기를 마련해주었고 80년대 반(反)베트남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폴 포트에게 계속 힘을 실어줬다. 중국은 베트남과 소련의 세력 강화를 막기 위해 크메르루주를 적극 지원했고 베트남의 공산세력도 자신들의 전쟁 승리를 위해 캄보디아 공산세력과 협력 및 결별을 반복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캄보디아의 슬픈 역사에는 프랑스 보호령이라는 제국주의 역사와 동서냉전의 역사가 고스란히 개입되어 있다. 저자는 나아가 현 캄보디아 정부의 부도덕성과 부패를 묵인하는 국제사회에도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책은 그러나 가장 큰 책임이 캄보디아인에게 있음을 냉정하게 따진다. ‘악몽’을 기획한 폴 포트와 그의 동료들뿐만 아니라 이들이 약속한 미래상에 투자한 캄보디아 지식인층과 자신의 권력에만 몰두한 시아누크 국왕, 국내의 정적을 제거하려고 자국 국민들의 고통은 무시한 채 적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던 지도자들 역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신랄한 비판은 책의 첫머리에 던져졌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도대체 왜 캄보디아 사회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자비심과 동정심, 선의와 품위를 저버린 채 끔찍한 만행이 자행되는 것을 내버려두었고 또 여전히 내버려두고 있냐”는. 그리고 이 질문은 또다른 곳을 향한다. 나치 독일에서부터 르완다, 보스니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로 무장한 테러조직에 이르기까지 21세기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또다른 ‘악몽들’에.(김진우기자)

08. 11. 08.

P.S. 한겨레의 리뷰는 '악몽으로 끝난 유토피아의 꿈'(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20596.html) 참조. 크메르루즈 통치에 대한 지젝의 분석은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 152-156쪽에서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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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9 0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09 1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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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09 15:36   좋아요 0 | URL
캄보디아는 베트남의 식민통치를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까요.힘도 없고 국제사회도 아무 관심이 없고...캄보디아가 베트남을 침략한 뒤 이것은 캄보디아를 침략한 것이 아니고 폴 포트의 압제에서 구해주려고 했다고 명분을 내세운 뒤 베트남 주민들을 캄보디아로 대량이주시켜 캄보디아에서 좋은 땅을 다 뺏고 상권까지 다 장악했어요.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 실상을 알고 난 뒤 역사허무주의자가 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죠.하지만 공산국가에 대한 환상은 전혀 남지 않았습니다.애초에도 그다지 환상이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로쟈 2008-11-09 20:51   좋아요 0 | URL
니체가 역사의 유해성이라고 한 게 떠오르네요. 굳이 공산주의사가 아니더라도 문명사 전체가 야만의 역사 아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