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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름슬레우를 다룬 글에서 미루어 두었던 숙제를 해치우기로 한다. 검토의 대상은 <그라마톨로지>(민음사)에서 옐름슬레우와 관련된 대목들이다. 2장 ‘언어학과 문자학’ 중 115-121쪽. 오역이라고 생각하는 몇몇 부분을 예로 들고 문제점을 지적해 보겠다. 내가 참고한 것은 스피박(G. Spivak)의 영역본 'Of Grammatology'(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6)이다.



먼저, 115쪽 하단부: “정의상 언리소는 비물질적이며 물질적인(음성적, 문자적 등) 실체(또 의미적, 심리적, 논리적인 실체)와 독립되어 있다.” 이 대목은 괄호가 잘못 쳐져 있는데, “정의상 언리소는 비물질적 실체(의미적, 심리적, 논리적), 물질적 실체(음성적, 문자적 등)와 독립적이다.”로 고쳐져야 한다. 이어서 “우리가 위에서 제안했듯이, 소리와 의미의 단위는 여기서 놀이의 확실한 폐쇄이다.”/ “The unity of sound and of sense is indeed here, as I proposed above, the reassuring closing of play.”(57쪽)

바로 이전에 얘기되고 있는 것은 엘름슬레우의 언리학(Glossemantics) 개념들이 갖는 특징으로서의 형식성(formality)이다. 이에 따르면, “소리와 언어 사이에는 아무 연계성”이 없다.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 ‘유희’이다. 이것은, 소쉬르식 용어를 쓰자면, 기표와 기의간의 안정된 결합이 유예되면서, 즉 기표가 미끄러지면서 벌어지는 유희이다. 그런데, 소리라는 단위나 의미라는 단위는 자연스레 그들간의 안정적인 결합을 가정하면서 이러한 유희를 중단시킨다. 해서, “우리가[내가] 앞에서 주장한 바 있듯이, 소리 단위와 의미 단위는 정말로 그러한 유희를 확실하게 중단시킨다[는 뜻을 갖는다].”(난 처음에, ‘소리와 의미의 결합’이라고 봤는데, of가 양쪽에 걸린 걸로 봐서는 각각의 단위로 해석돼야 할 듯하다. 그럼에도 ‘the unity of sound and sense’라고 해석하면 더 이해하기 편하다.)

다음, 옐름슬레우로부터의 인용: “...그러나 어느 경우든 현대 언어학이 인지하듯 통시적 고찰은 공시적 기술에 대해 변별적이지 못하다.”(118쪽) 변별적이지 못하다라는 말은 구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통시적 고찰=공시적 기술’이 되는가? 문맥으로 봐서, 통시적 고찰은 공시적 기술(description)과 ‘무관하다’고 옮겨져야 한다(영역은 A are irrelevant for B 구문이다).

이어지는 언어학자 울달 인용문. “...왜냐하면 형식과 실체의 차이라는 개념 덕분에 우리는 언어와 문자가 대체로 유일하고 동일한 언어 표현들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for it is only through the concept of difference between form and substance that we can explain the possibility of speech and writing existing at the same time as expressions of one and the same language.”(58-9쪽)

문제는 speech를 ‘언어’라고 옮긴 것.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건,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이다. 따라서 ‘언어와 문자’는 ‘음성과 문자’로 고쳐져야 한다. 다시 옮기면, “왜냐하면 형식과 실체라는 서로 다른 개념 덕분에 우리는 음성과 문자가 각각 같은 언어에 대한 동등한 표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지는 부분: “만약의 공기의 유출 또는 잉크의 유출, 이 두 가지 실체 중 하나가 언어 자체의 일부분이라면 언어를 바꾸지 않고 이 둘 중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If either of these two substances, the stream of air or the stream of ink, were an integral part of the language itself, it would not be possible to go from one to other without changing the language” 여기서 ‘공기의 유출’은 ‘음성(언어)’이고 ‘잉크의 유출’은 ‘문자(언어)’이다. 잘못 옮긴 건, ‘일부분이라면’이라고 한 것. 완전히 반대로 옮긴 것인데, ‘전체라면(integral)’으로 옮겨야 한다. 그래야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

다시 옮기면, “만약에 공기의 유출[음성]이나 혹은 잉크의 유출[문자]이라는 이 두 가지 실체 중 어느 하나가 한 언어의 전체라면, 그 언어를 바꾸지 않고 한 실체에서 다른 실체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즉 L1(언어1)=S(음성)이거나 L2(언어2)=W(문자)라면, 당연히 S에서 W가 교호하기 위해서는 두 개 이상의 언어(L1, L2)가 필요하다. 이건 형식논리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옐름슬레우와 그의 코펜하겐학파가 소쉬르처럼 음성언어에만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 문자언어 혹은 표기적(graphic) 표현-실체에 의존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개방한다는 것. 이들은 음성과 문자에 표현적 실체(substance of expression)로서의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 그들은 서로 독립적이며 서로를 대신할 수 없다.

해서, “언리학은 문학적 요소에 대한 접근과 문학에서 형식의 놀이와 규정된 표현 실체를 연결하는 문자로 표기된 텍스트로 통하는 것에 대한 접근을 지칭한다.”(120쪽 두번째 문단) 이건 우리말로 너무 심하지 않을까? 영역은 이렇다: “It[Glossemantics] showed how to reach the literary element, to what in literature passes through an irreducibly graphic text, tying the play of form to a determined substance of expression.”(59쪽)

다시 옮기면, “언리학은 (문학의) 이 ‘문자적’ 요소, 즉 문학에서 ‘형식의 유희’[기표의 유희]를 규정된 표현 실체[의미]에 연결시켜 주는, 이 환원불가능한 표기 텍스트를 관통하고 있는 그 무엇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literary를 ‘문학적’이 아닌 ‘문자적’으로 옮겼다. 이탤릭체로 강조돼 있는 것이 그것의 어원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문(文)적’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어색하기에 ‘문자적’이라고 해둔다.

데리다는 이 문자적 표기에는 텍스트의 ‘의미’(현전으로서의 음성)로 다 환원될 수 없는 요소가 있다고 보며 옐름슬레우와 코펜하겐학파의 언리학은 이를 이론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코펜하겐학파가 루소나 소쉬르와 달리 문학에 관심을 나타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의 작업을 더욱 전면화(radicalize)한다.

“따라서 문학사나 문학 텍스트 일반의 구조에서 이 심급을 벗어나는 것은 일정한 기술 유형을 필요로 할 가치가 있는데, 언리학이 아마 그 규범과 가능성 조건을 최상으로 도출시켰을 것이다.”(121쪽)/ “That which, within the history of literature and in the structure of a literary text in general, escapes that framework, merits a type of description whose norms and conditions of possibility glossemantics has perhaps better isolated.”(59쪽)

오포야즈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의 문학성(being-literary; literariness), 혹은 ‘문학적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면서, 음운론적 심급을 특권화하고, 그것이 지배적인 시문학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코펜하겐 학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시만이 아닌) 문학 전반의 ‘문학성’의 탐구에 관심을 두며, 이때 언리학이 요긴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 해서, 다시 옮기면, “문학사나 문학 텍스트의 일반 구조에서 (형식주의자들의) 이론적 틀을 벗어나면서도 그 규범과 가능성의 조건을 하나의 유형으로 기술할 필요가 있는, 그러한 유형을 언리학은 보다 잘 도출시켜 왔다.” 약간 의역을 했는데, isolate의 번역이 좀 까다롭다.

계속. “아마도 이렇게 해서 언리학은 문학 테스트의 구조와 문학성의 문학적 생성사에서, 특히 <근대성>이라는 개념에서 순전히 문자 표기적인 성층을 연구하는 데 최상의 준비를 해온 것이다.”/ “It has perhaps thus better prepared itself to study the purely graphic stratum within the structure of the literary text within the history of the becoming-literary of literality, notably in its 'modernity.'”

불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literality는 '문학성'이 아니라 '문자성'이다. 다시 옮기면, “언리학은 문자성이 점차 문학으로 생성되어 가는 역사, 특히 그 ‘근대성’의 역사 속에서 문학 텍스트의 구조 안에 들어 있는 순전히 표기적인 층위에 대한 보다 나은 연구를 준비해 왔다.”

이어지는 문단들도 읽기에 불편한데, 하여간에 이런 식으로 계속 읽어나가야 한다...



덧붙임: 앞에서 약간 의역했다고 한 부분에 대한 러시아어판 번역(Laputsky옮김, 2000)을 우리말로 옮기면, "문학사와 문학텍스트의 구조에서 음성과 무관한 것은 다른 설명을 요구했고, 그것의 규범과 가능조건에 대해서는 특히 언리학이 분명 더 잘 밝혀주었다."(185쪽) 더 간명하게 번역돼 있는데, 이해하기도 물론 더 쉽다.(여기서 다른 설명이란 건, 음운론과 시에 집중했던 형식주의와는 다른 설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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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고원>(새물결) 3장을 읽기 전에 내가 읽은 건 4장의 1절이다(147-167쪽). ‘화용론적 전회’라고 할 만한 새로운 언어철학을 들뢰즈/가타리는 제시하고 있는데, <분자혁명>(푸른숲)이나 <기계적 무의식>(푸른숲)에서 반복적으로 이 주제가 다루어지는 걸로 미루어 여기엔 가타리의 몫이 더 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 이 부분이 들뢰즈/가타리와 관련하여 나의 일차적인 관심사항이다.

<천개의 고원>은 분명 공들인 번역이다. 나는 거기에 대해선 이의를 달지 않겠다. 하지만, 유려하거나 세심한 번역은 아니다. 나는 새물결판과 함께 수유연구실판도 같이 읽었는데, 전자가 후자보다는 더 가독성이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미 다른 자리에서 지적했듯이, ‘화용론’을 ‘화행론’으로, ‘의미작용’을 ‘기표작용’으로 번역한 것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수유연구실판은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그런 걸 제외하면, 내가 읽은 범위 내에서 수유연구실판보다 더 나은 번역이다.

가령, 수유판에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 ‘샤를뤼스’를 ‘카를루스’로, 연속살인범의 닉네임인 ‘샘의 아들’을 무슨 영화나 소설의 작품명으로 옮겨놓았다(85쪽). ‘끔찍스런 능력’(수유, 80쪽)이란 말보다는 ‘가공할 만한 능력’(새물결, 148쪽)이 더 적절하다. 그리고 수유판에서는 ‘간접화법’을 무리하게 전부 ‘간접적 담론’이라고 옮겼다. 물론, 예외는 있다. 나는 ‘작은 사형선고(sentence de mort)가 있다’(새물결, 149쪽)보다는 ‘어느 정도는 사형선고가... 있다’(수유, 81쪽)가, ‘집단적 배치’(새물결)보다는 ‘집합적 배치’(수유)가 더 적합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리스도’는 왜 ‘크리스트’(158쪽)라고 옮기는가?

먼저, 두 번역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오역. 영어의 shifter를 모두 ‘연동소’(수유, 83쪽/새물결, 153쪽)라고 한 건, 불한사전에 그렇게 돼 있는지는 몰라도, 적절하지 않다. 언어학 용어로서 ‘전환사’라고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 subject란 말은 철학에서는 ‘주체’이지만, 언어학에서는 ‘주어’를 뜻하는 단어이다. 영어나 불어에서는 통일해서 쓰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이걸 우리말로 번역할 경우에는 문제가 된다. 이 4장에서는 언어학적 문맥에서 쓰이고 있기 때문에 항상 subject에는 ‘주체’란 뜻 외에도 ‘주어’라는 뉘앙스가 들어가고, 또 명백하게 ‘주어’로 옮겨져야 하는 대목도 있다. 참고로, 이진경은 <노마디즘1>(휴머니스트)에서 ‘주체(주어)’ 혹은 ‘주어(주체)’로 표기하고 있다(266-7쪽).

예컨대, “이런 것들은 주체화의 과정 또는 주체의 소환을 랑그 속에 배분한다. 이것들이 랑그에 의존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소리이다.”(154쪽)에서 ‘주체의 소환’은 ‘주어의 할당’의 오역이다(수유, 84쪽도 마찬가지이다). ‘주체-주어’의 혼용이 혼동의 여지가 있다면, 적어도 ‘주체(주어)의 할당’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내가 갖고 있는 맛수미(Massumi)의 영역본에서 이 대목은 “which, far from depending on subjectification proceedings or assignations of subjects in language, in fact determine their distribution.”(78쪽)이다. 새물결판은 끊어서 번역했는데, 이 문장의 전체주어는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 등이다. 해서 다시 옮기면, “[이 배치 등은] 언어(랑그) 속에서의 주체화(주어화) 과정이나 주체(주어)의 할당에 의존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사실상 그들의 배분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이 [배치 등]이다.”

언어학적 문맥을 간과해서 나온 코믹한 오역이 그 다음에 이어진다. “각 랑그에서 주체 형태소들의 역할과 몫을 측정하는 이런 ‘행위-언표’ 배치물을 설명하는 데 있어 의사소통이 정보보다 더 좋은 개념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상호 주관성이 의미생성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할 수도 없다.”(같은 쪽) 여기서 ‘주체 형태소들’라고 옮긴 것은 영어로는 subject morphemes이다. 즉 ‘주어 형태소’이다(이걸 수유판에선 한술 더 떠서 ‘주관적 형태소’라고 옮겼다. 그럼 객관적 형태소도 있나?). 그리고 ‘역할과 몫’(역할과 몫은 뭐가 다른가?)이라고 한 건 수유판을 따라서 ‘역할과 범위’(role and range)라고 해야 하고, ‘측정하는’이라고 한 건 ‘한정하는’(delimit)으로 고쳐야 한다. 역자가 이 대목의 문맥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한 대목만 더 들겠다: “물론 우리는 집단적 배치물을 정의해 볼 수는 있다. 행위와 언표의 잉여복합체라고, 또 이 복합체는 필연적으로 집단적 배치물을 얻어낸다고 말이다.”(157쪽) 이 대목의 수유판 번역: “물론 우리는 집합적 배치를 행위와 언표의 잉여적 복합체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언표는 필연적으로 행위를 완성한다.”(85쪽)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관계대명사의 선행사를 각기 다르게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맛수미의 영역: “We can no doubt define the collective assemblage as the redundant complex of the act and the statement that necessarily accomplishes it.”(80쪽) 불어나 영어나 비슷할 텐데, 새물결판은 관계사 that의 선행사를 complex로 봤고, 수유판은 statement로 봤다. 또 그에 따른 목적어 it을 새물결판은 collective assemblage로 수유판은 act로 봤다. 어느 쪽이 타당한가? 당신은 어느 쪽에 판돈을 걸겠는가?

내가 영문법에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that의 선행사는 당연히 statement이다. 만약에 다른 걸 받으려면, statement 다음에 쉼표(,)라도 붙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정의의 문형은 “A를 B로 정의한다”인데, 지저분하게 뒤에 뭐가 붙는다는 건 문장의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문맥상으로도 들뢰즈/가타리가 앞에서 강조한 것이 모든 언표가 행위-담지적이라는 점이었으므로, 그런 내용을 고려한다면, 수유판의 번역이 타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단, 나라면 ‘완성하다’는 ‘실행하다’로 옮기겠다. 해서 다시 옮기면, “물론 우리는 집합적 배치라는 것을 행위와 반드시 그를 실행하는 언표와의 잉여적인 복합체라고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다.” 혹시 의견이 다르신 분은 반박해 주시기 바란다...

덧붙임: 앞의 문장에서 왜 행위와 언표의 '복합체'가 아니라 '잉여적인 복합체'일까? 그건 언표 또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거기엔 중복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잉여적'이란 말은 '(불필요한) 중복'이란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는 게 내 생각이다. 이 대목의 새물결판 번역은 그런 의미 또한 설명할 수 없기에 확실한 오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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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새물결)에서 가장 어렵다는 3장(도덕의 지질학)을 읽다가 옐름슬레우(Hjelmslev)로 빠지게 됐다. 사실 내가 관심있는 건 들뢰즈/가타리의 기호학 비판과 언어철학인데(그래서, 4-5장만 읽으려고 하다가, 3장을 먼저 읽어야겠기에 작전상 후퇴했다), 그들의 주장에 결정적인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 옐름슬레우의 언어학, 즉 언리학(Glossemantics)이다(그레마스의 기호학 또한 옐름슬레우라는 언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장, 수도없이 쏟아지는 ‘표현과 내용’, ‘형식과 실체’란 말의 감을 잡지 않고서는 <천 개의 고원>을 읽어나갈 수가 없다.

이진경의 <노마디즘1>(휴머니스트)에서 비교적 친절한 설명을 읽을 수는 있지만, 역시 그걸로는 부족해서 관련서적을 뒤적이게 된다. 이때 요긴한 참조가 되어주는 책이 존 레흐트의 <현대사상가 50>(현실문화연구)이다. 약간의 오타/오역이 흠이긴 하지만, 그만하면 80%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다. 그리고 서정철의 <기호에서 텍스트로>(민음사). 5명의 언어학자/기호학자를 다루고 있는 책의 한 장이 옐름슬레우에게 할당돼 있다. 내가 읽은 바로는, 그래도 국내 필자가 쓴, 옐름슬레우에 대한 가장 자세한 소개이다.

옐름슬레우의 주요어 중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건, 형식form과 짝을 이루는 substance이다. 철학에선 주로 ‘실체’라고 옮기고 언어학에서는 ‘실질’이라고 옮기기 때문에(서정철도 ‘실질’로 옮기고 있다) 좀 애를 먹이는데, 같은 언어학자인 최승언의 <일반언어학강의>(민음사)나 김성도의 <그라마톨로지>(민음사) 번역에서도 ‘실체’로 번역하고 있으므로 그냥 일률적으로 ‘실체’로 옮겨도 무방하겠다.

 

 

 



문제는 번역된 옐름슬레우의 주저 <랑가쥬 이론 서설>(동문선)의 번역이 수준이하라는 것(동문선은 오역 전문출판사로서 수위를 다툴 듯하다). 이 책은 이진경도 참조하고 있지만, 용케 오역인 부분들만 피해가고 있다. 원저가 덴마크어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불역본도 어차피 중역이어서, 영역본과 비교해 보는 것이 적반하장격은 아니다. 가장 짜증나는 건 'substance'를 전부 '본질'로 옮겨놓은 것. 비록 철학에서 ‘실체’란 말이 ‘본질’과 비슷한 뜻을 가질 때도 있지만, 불어학 전공자들인 두 역자의 언어학적 상식이 의심스런 대목이다. 레흐트에 의하면, 옐름슬레우의 ‘실체’는 가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비가시적인 '본질'과는 차이가 나며, 따라서 그렇게 옮겨서는 안된다.

더불어 마음에 안드는 건 ‘형식’을 또 전부 ‘형태’로 번역하고 있는 것. 화용론의 주장대로, 언어의 의미는 그 사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만, 웬만하면 관례를 지켜줬으면 좋겠다. 가령, <천개의 고원>의 역자는 언어학/기호학 용어중 ‘화용론’을 ‘화행론’으로, ‘의미작용’을 ‘기표작용’으로 생경하게 옮겨놓는데, 그럴 듯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인 번역임을 면치 못한다. 마치 ‘등신’이란 말을 좋은 취지로 썼다는 딴나라당 국회위원의 경우처럼.

<랑가쥬 이론 서설>이란 제목도 그렇다. 불어에서의 랑그와 랑가주를 구별해주기 위해서 쓴 거 같지만, 랑그와 달리 랑가쥬는 언어학에서도 그다지 상용되는 말은 아니다. 해서, 랑그로서의 언어와 랑가주로서의 언어가 혼동될 경우에만 괄호안에 넣어주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가령, 크리스테바의 <언어, 그 미지의 것>(민음사)에서의 ‘언어’는 ‘랑가쥬’를 가리키지만, <랑가쥬, 그 미지의 것>이란 제목을 일반 독자가 언어학 책으로 알아볼 확률은 지극히 낮을 것이다.

번역본만으로는 의미파악이 거의 되지 않거나 아주 힘든, 의미의 변비통만 안겨주는 책인데, 한 대목만 보자; “소쉬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본질은 전적으로 형태에 좌우되고 우리는 어떤 의미로도 - 정확히 말해 그 여건에 따라 - 독립적인 존재를 형태에 부여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만 한다.”(68쪽) 이에 대한 영역은 “If we maintain Saussure's terminology- and precisely from his assumptions - it becomes clear that the substance depends on the form to such a degree that it lives exclusively by its favor and can in no sense be said to have independent existence."(50쪽)이다.

우선, 우리말 번역문에서 ‘본질’과 ‘형태’는 앞서 말했듯이 오역이므로 ‘실체’와 ‘형식’으로 바꿔서 이해해보자. 일단 번역문은 (1)실체는 형식에 좌우된다, (2)우리는 독립적인 존재를 형식에 부여할 수 없다, 라는 두 가진 진술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왜 ‘실체’를 얘기하다가 갑자기 ‘형식’으로 초점이 넘어갔느냐는 것이다. 뒷부분의 불어 원문은 이렇다: “il nous faut alors rendre compt - et precisement d'apres des donnes - que la substance depond exclusivement de la forme et qu'on ne peut en aucun sens lui preter d'existence independante."(불역본, 68쪽)

나로선 불어사전을 가지고 더듬거리며 읽는 수준이기에 유창하게 번역하진 못하지만, 역자들이 마지막에 있는 대명사 lui를 substance가 아닌 forme를 받는 걸로 해석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다시 느끼는 거지만, 번역에서 대명사나 관계사의 선행사를 잘못 짚게 되면, 치명적인 오역을 낳을 수밖에 없다. 통사적으로 모호할 경우엔 논리적으로 따져봐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역자들은 만만한 불어실력에만 의존한 듯하다.

해서 다시 옮기면, “소쉬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실체는 전적으로 형식에 의존한다. 때문에 (그의 전제/가정들에 따라서) 실체가 독자적인 실재성을 갖는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괄호로 묶은 “and precisely from his assumptions”나 “et precisement d'apres des donnes”은 앞의 전제/가정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즉 실체와 형식에 관한 내용이 앞에 주어져 있는데, 그에 따라서 이러이러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국역본이 “정확히 말해 그 여건에 따라”라고 옮긴 것 역시 오역이다.

사소한 대명사 착오가 사소하지 않은 오역을 낳는다. 엘름슬레우와 관련하여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민음사/동문선)이다. 존 레흐트를 참조한 것이지만, 국역본 117-121쪽 정도에서 옐름슬레우의 언리학에 대한 데리다의 평가를 읽어볼 수 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없다. 역자는 언어학자임에도 불구하고(그나마 언어학자의 번역이어서 사정이 좀 나은 걸까?), 여러 곳에서 치명적인 오역을 범하고 있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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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sboy 2007-05-16 0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역만을 고려해보면,

"우리가 소쉬르의 용어를 따른다면(그리고 정확히 말해 그의 전제들에 입각해본다면), 실체는 반드시 형식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고, 결코 [그 자체로는] 독립적인 실존을 갖는다고 얘기될 수 없다는 점에서 명백히 실체는 형식에 의존해 있다."

로쟈 2007-05-16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페이퍼에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번역해주신 대로입니다. 숙제가 여기도 남아있었네요.^^;
 

어제 한 서점에 갔다가 원래 사려고 했던 손디의 <문학해석학이란 무엇인가>(아카넷)와 함께 들뢰즈 입문서 한권을 손에 들고 왔다. 클레어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가 그것이다. 콜브룩의 원저는 "Routledge critical thinkers"의 한권으로 나온 것으로, 가장 얇고, 가장 쉽고, 가장 편안한 입문서이다.

 

 

 



책은 미국의 여성시인 '에밀리 디킨슨'을 두번이나 '디킨스'로 오기하는 등 약간의 교정 부실을 드러내지만, 번역의 가독성은 좋은 편이다. 역자는 폴 페이튼의 <들뢰즈와 정치이론>도 곧 역간할 모양인데,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지젝에 비해서 여러모로 운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번역과 관련하여 아쉬운 점이 없지 않은데(사실은 짜증나는 점이다), 그건 역자가 'power'(불어의 puissance)를 계속 '역능'으로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겐 '권능'이란 단어보다도 더 역겨운 이 '역능'이란 말은 국어사전에도 등재돼 있지 않은 일어이다. 순전히 스피노자에서 (영어로) power와 force를 구별하기 위해 얻어다 쓴 이 말이 잠시의 궁여지책은 될수 있을지언정 관용어로 굳어질 만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사실은 짜증스럽다). 스피노자에 관한, 번역된 이차문헌들을 내가 잘 읽지 않는 이유는 과장없이 순전히 이 '역능'이 말이 꼴사나와서이다.

이 신간의 경우에도 '역능'이란 단어를 그냥 '힘'으로 읽어도 독해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스피노자 전문가는 '역량'으로 옮길 것을 제안하지만). 역자(들)의 무사안일한 무신경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역능'으로 옮기는 것이 '파워'로 옮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번역에 대해서 타박을 했지만, 한가지 배운 것도 있다. 그건 들뢰즈에게서 impersonal을 '비인칭적'이라고 옮긴 것. 나는 지난번에 흔히 '비인격적'이라고 옮겨지는 이 용어를 '비인칭적'이란 말과 견주어 보다가 (자신이 없어서)'익명적'이라고 옮기고 말았는데, '비인칭적'이란 말이 더 적합하다는 걸 신간을 읽으며 깨달았다(물론 역자가 그렇게 옮기고 있다).

번역에서 까다로운 건 jouissance나 power의 경우도 그렇지만, 해당 용어에 대응하는 우리말이 여럿 있을 경우이다. impersonal의 경우도 그러한데, 이것은 세분야에 걸쳐 있다. '비인격적'(윤리학), '익명적'(사회학), '비인칭적'(언어학). 그런데, inhuman을 떠올리게 하는 '비인격적'이란 말은 여기서 가장 먼저 제외될 만하다(바디우의 <존재의 함성>의 역자도 '비인격적'이라고 옮기는데, '사례'로 옮겨지는 게 더 자연스러운 case를 전부 '경우'라고 옮길 걸로 봐서 역자의 우리말 감각엔 문제가 좀 있다). '익명적'과 '비인칭적' 중에서 내가 '비인칭적'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것이 '사유'와 종종 결합되어 쓰이기 때문이다. 즉 (인칭적 사유에 대하여) '비인칭적 사유'. 실제로, 들뢰즈는 언어학과 수학, 자연과학의 용어들을 즐겨 참조한다. 그런 맥락에서라도 impersonal의 역어로는 '비인칭적'이 가장 적합해 보인다.

이미 언급한대로, 책은 술술 읽힌다. 들뢰즈의 현란한 용어들에 지레 겁을 집어먹었던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손에 집어들 만하다. 하루만 투자한다면, 어디에 가서라도 들뢰즈에 대해서 한두 마디 할 만한 용기가 생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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