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시장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베스트셀러 <시를 잊은 그대에게>의 저자 정재찬 교수의 신작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인플루엔셜)을 보다가 아주 오랜만에 김종삼 시와 만났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출전이 시집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1982)여서 확인해보니 정말 오래 전에 서점에서 본 적이 있는 시집(대학 구내서점에서였을 것이다).

나는 시선집 <북치는 소년>(민음사)과 <김종삼 전집>(청하)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사이에 두 종의 전집이 더 나왔다. 한권은 무려 1000쪽이 넘는 ‘정집‘이다. 2018년에 나온 <김종삼 정집>(북치는소년). 출판사 이름이 아예 북치는소년이다! 당장은 구입할 여유가 없지만 현대시 강의에서 김종삼 시도 다룰 기회를 한번 만들어야겠다.

내가 최초로 만난 김종삼의 시는 ‘서시‘다. 학부 1학년때 기숙사 동기 가운데 국어교육과 학생이 있었는데 방인가 사물함인가에 복사용지로 프린트한 ‘서시‘를 붙여놓았었다.

헬리콥터가 지나자
밭이랑이랑
들꽃들이랑
하늬바람을 일으킨다
상쾌하다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 갔으리라

흔히 ‘여백과 잔상의 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종삼의 시세계를 잘 응축해서 보여준다. 그에 비하면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는 평범한 시다. 표제작으로도 삼았던 건 시에 대한 그의 자세나 태도를 잘 대변해서였을 것이다. 내게 김종삼은 그보다 더 상쾌한 시를 쓴 시인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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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대작가 옌롄커의 소설이 한권 더 번역돼 나왔다. 2013년작 <작렬지>(자음과모음).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필두로 한 그의 작품은 대략 7-8편 가량 번역되었고 나는 강의에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에 더하여 <딩씨 마을의 꿈>과 <사서>를 읽었다. <작렬지>를 포함해 아직 서너 권의 ‘여유분‘이 있는 셈.

˝해마다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호명되는 옌롄커의 신작 소설. 작가가 직접 역사지리서의 편찬을 맡아 작성한 것이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된다. ‘자례’라는 허구의 마을이 점차 대도시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딩씨 마을의 꿈>이 에이즈에 점령당한 지독한 현실을 이미 죽어 땅에 묻힌 열두 살 소년의 시선으로 그려낸 리얼리즘과 판타지가 결합된 작품이라면, <작렬지>는 작가 옌롄커가 자신의 고향 땅인 ‘자례’의 역사지리서를 맡아 쓰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의 작품이다. 이처럼 허구를 가장한 사실(중국의 현실)을 통해 작품과 현실을 더욱 단단히 밀착시킨다.˝

중국의 현실을 소설적 서사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물음 혹은 과제와 관련하여 나로선 가장 주목하는 작가가 옌롄커다(위화와 쑤퉁의 소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에서). 모든 시도가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더 낫게 실패하는 사례를 옌롄커는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작렬지>에도 기대를 갖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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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다는 섬모가 좋다
인간다움이 제거된 부드러운 털이 좋다
둥글고 잘 휘어지는 등이 좋다
구불구불 헤엄치는 무정형의 등이 좋다
휩쓸고 지나가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온순한 맨발이 좋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매순간 새롭게 생겨나는 위족이 좋다
때로 썩어가는 먹이를 구하지만
소화시킬 수 없는 것은 다시 내보내는 식포가 좋다
맑은 물에도 살고 짠물에도 살며
너무 많은 물은 머금지 않는 수축포가 좋다
일정한 크기가 되면
둘로 쪼개지는 가난한 영토가 좋다
둘로 나누지만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아서 좋다
 
그는 사랑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찾아온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끌어안았던 태고의 신비
그 저녁의 온기를 기억해낸 것뿐이다
섬모와 섬모가 닿았던 감촉을 다시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나희덕,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

따로 해석할 게 없는 시들이 좋다. 때로는 아메바가 되고 싶었던 이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시이리라.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황지우) 같은 시를 읽어 마땅한 겨울 마지막날에, 책장에서 우연히 꺼내 펼쳐든 시집에서 아메바를 발견하고 나는 곧바로 아몌바 편이 된다.

다시, 읽던 애덤 스미스로 돌아간다. 평생 독신이었던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대한 해설을 읽던 차였다. 그도 아메바를 그리워한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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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1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1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상당수 강의 일정이 취소되거나 연기돼 갑작스레 무급휴가를 갖게 되었다. 강의와는 별도로 써야 할 원고와 교정거리가 쌓여 있으니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원래는 거기에 더해서 매주 10개 안팎의 강의가 있었다. 갑작스레 주어진 시간에 할 만한 생산적인 활동을 궁리해보다가(한시적 실직이기도 하므로)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1353)을 이 참에 읽기로 했다. 정색하고 읽은 적은 없어서다.

오래전에 단테의 <신곡>(1321)은 강의에서 읽었지만 <데카메론>은 다룰 기회가 없었다. 근대소설의 전조로서 <데카메론>과 <캔터베리 이야기> 등을 언젠가 강의에서 다루려고 했지만 무산됐었다. 이래저래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 문학강의가 숙제처럼 남았었는데 코로나 사태를 핑계로 <데카메론>을 읽으려는 것. 1348년 페스트의 참상을 목도하고 구상한 작품으로 알려지기에 ‘코로나 시절‘과 조응하는 면도 있다. 안 그래도 카뮈의 <페스트>(1947)가 이즈음 독자들이 많이 찾는 소설이 되었는데, 그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데카메론>도 독서목록에 올릴 만하다.

<데카메론>은 열흘간 10명의 화자가 들려주는 100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에 맞추기 위해 나도 열흘간 읽으며 소감을 남기려 한다(작품에서는 평일만 계산하기에 날짜로는 두주간이다). ‘코로나 시절의 독서‘라고나 할까. 강의경력으로 치면 24년차에 이런 일도 겪는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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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20-02-29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와 강의 24년차라니 대단하십니다. 강의 8년차인 저도 요즘 강의가 다 없어져서 아내가 대리운전이라도 하라고 타박합니다 ㅠㅠ 데카메론은 제가 고3 때 너무 공부하기 싫어서 이것저것 뒤지다 읽은 책이어요. 의외로 재미있어서, 고전도 재밌구나를 느끼게 해줬습니다. 암튼 빨리 코로나가 종식돼서 로쟈님과 제가 강의를 할 수 있게 되길 빕니다.

로쟈 2020-02-29 14:11   좋아요 0 | URL
아 개강이 연기된거죠? 유급휴가도 눈치보이시나요?^^

마태우스 2020-03-01 22:25   좋아요 0 | URL
그, 그게 아니고요 저도 외부강의로 먹고 살잖습니까. 근데 그게 다 취소됐습니다. ㅜㅜ

로쟈 2020-03-01 23:36   좋아요 1 | URL
부업 말씀인 걸로.^^

오지 2020-02-29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천일야화가 떠오르네요. 천일야화는
열린책들판으로? 건강 보살피시길.

로쟈 2020-02-29 14:12   좋아요 0 | URL
천일야화까지는 다시 손댈 계획이 없지만 중세문학까지 올라가다보면 그리될수도.~
 
 전출처 : 로쟈 > '지구화 시대의 영문학'에 대한 단상

무려 16년 전에 쓴 글이다. <지구화시대의 영문학>(창비)이란 책의 출간에 즈음하여 백낙청 문학론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을 적었다.
코로나 사태로 시절이 하수상하다. 총선 같은 정치적 일정은 나중 문제이고 당장 일상의 루틴 자체가 타격을 받고 있다. 앞으로 고비가 될 한달간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궁리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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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글이 2020-02-28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부분 강의가 취소되셨을 듯..
다들 힘내고 잘 버팁시다~~~

로쟈 2020-02-29 14:09   좋아요 0 | URL
네 다들 어려운 시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