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로 내주까지는 강의를 비웠다. <전쟁과 평화>에 비유하자면 나폴레옹 원정군에게 모스크바까지 내준 것과 비슷하다. 와신상담, 쓸개를 맛보며 버틴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바닥이 보이면 반등의 기회도 생기는 법.

느즈막이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면서 세계사를 포함한 세계문학사와 혁명론 같은 책을 써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에 바로 착수한다는 건 아니고(세계문학의 대강을 그린 세계문학강의는 올해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기초공사용 구덩이는 팔 수 있겠다는 것(혁명론과 관련해서 읽어야 할 책 몇권을 일단 추렸다).

그리고 또 든 생각에 문학에 빠져 죽기 전에 깔려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것. 어제 출판사의 요청으로 서가 사진 몇장을 찍어 보냈는데, 거실의 메인 서가가 세계문학전집 서가다. 당연하게도 전부가 꽂혀 있는 건 아니지만 대략 80퍼센트는 되는 듯싶다(칸마다 이중으로 꽂혀 있다). 세계문학강의는 주로 이 책들과 씨름하는 일이다(참고문헌과 논문자료가 거기에 더 얹어진다. 다 모으면 산더미다).

이렇듯 빠져죽거나 깔려죽을지 모른다는 건, 그렇지만 소수의 실감일 것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문학책이 서가 한칸도 채우지 못하는 집도 있지 않겠는가(러시아라면 예외겠다. 어진간한 집에 작가전집이 빼곡히 꽂혀 있을 만큼 사회주의 시절에 책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책에 빠져죽지 않기‘나 ‘문학에 빠져죽지 않기‘는 특이한 호들갑으로 비쳐질 만하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가 생각이 났다. 학부때 한국문학 강의를 내가 제안해서 같이 들었던 친구다. 종교학 강의도 여럿 같이 들었다. 어제 그 친구가 좋다고 평했던 이재선 교수의 <현대 한국소설사>(민음사)를 중고본으로 구입하면서(1991년판으로 절판된 지 오래되었다) 지난날의 우정이 생각났다. 그 친구라면 몇마디 해줄 것 같기에. 그러고보니 영화 ‘이지 라이더‘(1969)도 같이 보았었군. 그 친구라면 ‘문학에 깔려죽지 않기‘에 맞장구를 쳐주었을 것이다. 절친한 사이였지만 우리는 ‘같이‘ 깔려 죽을 기회를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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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20-03-07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서 조만간 만나시죠...

로쟈 2020-03-07 13:42   좋아요 0 | URL
광주엔 5-6월에 강의가.~

모맘 2020-03-07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로나는 많은 감정의 변화를 한꺼번에 맛보게 합니다 자발적 방콕은 아니었지만 처음엔 오랜만의 휴식이라 생각했고 그리곤 공포, 의심(아줌마들의 톡이 많은 정보를 가지고 계속 카톡카톡했어요)에 빠지게 하더니 어느 순간부턴 희망과 감동 그러다 무감각(사망자발생에도),
지금은 일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됐습니다ㅎ 대형마트에 나가보면 지난주와는 양상이 달라졌거든요
이젠 적응해야죠ㅎㅎ

모맘 2020-03-07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생각보다 안 읽혀진다는게 참 희한합니다^^무엇이 책을 읽게 했던거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20-03-07 19:49   좋아요 0 | URL
빨리 상황이 진정되어야 할 텐데요. 힘 내시길.^^;

최신기 2020-03-07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주부터 로자님의 책에 빠져 죽지않고 지내는중입니다. 일단 한국현대문학수업 책 너무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병주 선생도 다시봤네요.여성작가도 낸다고 하니 너무 기대됩니다. 이번주는 문학에 빠져 죽지않기 읽고 있구요^

로쟈 2020-03-07 19:48   좋아요 0 | URL
아, 즐독하시길.~^^
 

제목에서 곧바로 릴케를 떠올렸다면 세계문학 독자로서 자격을 인정받을 만하다. 아울러 릴케와 로댕의 듀오그라피,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뮤진트리)까지 떠올렸다면 서평가로서 자격을 갖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책(나는 영어판을 갖고 있다)까지 갖고 있다면 내가 인정할 만한 장서가다.

이번에 나온 <당신은 당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에디투스)는 릴케의 글모음으로 ‘삶을 위한 일곱 개의 주석‘이 부제다. 릴케의 글 일곱 편을 모은 것도 아니다. 흥미롭게도 모두 편자가 골라서 엮고 제목까지 붙였다. 릴케의 글을 재료로 한권의 책을 창조해낸 것. 보통 ‘초역‘이라고 나온 책들이 이런 방식으로 엮은 것이기에 생소한 건 아니다(가장 많이 나와있는 건 니체의 책이다). 릴케의 산문집으로는 보통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나란히 꽂아둘 만하다.

˝1900년부터 릴케의 작품들을 출간해 온 유서 깊은 인젤 출판사에서, ‘삶’이라는 주제에 대한 그의 문장들을 선별하여 재구성한 산문집이다. 단순한 잠언집이 아니며, 오랫동안 릴케의 문학에 깊이 천착해 왔던 엮은이의 편집이 개입된, 엄연한 하나의 창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이라는 커다란 주제에 대한 시인의 무수한 답변의 시도들을 한데 엮어, 새로이 일곱 개의 짧은 글로 간추려 낸 일종의 비평적 꼴라주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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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세계문학전집의 현황과 특징

11년 전에 적은 현황이다. 업데이트가 필요한데 그런 걸 요청하는 지면도, 해볼 만한 의욕도 현재는 갖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누군가 써준다면 기꺼이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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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전집까지 나와 있기에 카프카의 작품집이 나온다는 건 뉴스거리가 아니다. 세계문학전집판이어도 그렇다. 그럼에도 특기한다. 창비판으로 나온 ‘프란츠 카프카 단편선‘, <변신. 단식광대>.

몇가지 특이사항과 의의를 적자면, 먼저 창비판으론 <성>에 이어서 두번째로 나온 카프카 작품이다(더 계획돼 있을까?). 솔출판사의 전집을 제외하면 각 세계문학전집의 카프카 레퍼토리는 제각각이다. 민음사는 단편집으로 <변신. 시골의사> 한권, 문학동네는 <소송> 한권, 열린책들은 단편집 <변신>과 <소송> 두권, 을유문화사는 단편집 <변신. 선고>와 <소송> 두권. 펭귄클래식은 <소송>과 <성> 두권 등이다. 주로 단편집과 <소송>이 번역돼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 전집판과 기타 번역본을 더할 수 있으니 카프카는 나름대로 풍족한 편이다.

두번째 특이사항은 2인공역이라는 점. 배분을 어떻게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 정도 분량의 작품집을 공역한 사례는 희소하다. 카프카 전공의 편영수 교수와 괴테 전공의(창비판 <젊은 베르터의 고뇌>의 역자) 임홍배 교수의 합작인데 어떤 결과물이 나온 것인지 궁금하다. 소개에 따르면 120쪽에 이르는 해설이 실렸는데 이 또한 관심거리다. 카프카의 주요 작품들을 강의에서 읽었고 나대로의 견해도 갖고 있어서다.

특이사항과는 별도로 내게 이 번역본이 갖는 의의는 다소 엉뚱한 데 있다. 그건 작품 제목을 확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장편과 달리 카프카의 단편들은 번역본들마다 제목이 조금씩 달라서 지칭하기가 불편했다. ‘단식광대‘만 하더라도 ‘단식술사‘(을유문화사)나 ‘어느 단식광대‘(솔)로 표기가 엇갈렸다. 제목에 관해서라면 창비판을 표준으로 삼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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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제니의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문학과지성사)이 손 닿는 곳에 있어서 펼쳐들었다.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읽을 수 있는 시집은 아니어서 덮었다. 요즘 나오는 많은 시집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인의 관심도 언어로 보인다. 언어를 관찰하고 심문하고 학대하고 다시 어르기. 자기지시적이라는 시어의 특징은 자폐적이라는 말과도 바로 통한다. 좀처럼 외출하지 않는 언어들.

가장 많은 시편들의 제목이 ‘발화 연습 문장‘이다. 제목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조차도 그 시편들 가운데 한 문장이다. 어느 스포츠 경기이건 선수들의 연습 장면이나 연습경기(시범경기라고도 하고)도 관람거리가 된다. 열성팬들이라면 기꺼이 스타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에 대해서 더이상 그런 열정이나 인내를 갖고 있지 않다. 언어실험이나 무의미시는 이상부터 김춘수, 오규원까지로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이승훈의 비대상시도 때로 속도감을 보여주었다. 나는 왜 많은 젊은 시인들이 자폐적 세계에서 발화연습만을 거듭하고 있는지 이해 불가하다.

이제니 시에 한정된 건 아니지만 가령 이런 제목의 시. ‘있었던 것이 있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고‘. 소위 젊은 시인들의 어떤 시집을 펼치더라도 이런 투의 식상한 문장과 발상을 만나게 된다(지시와 의미의 문제는 언어학과 언어철학에서 매우 진지하게, 지겨울 정도로 다뤄온 주제다. 시가 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주제가 더이상 아니다).

한낮은 태양의 눈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있었던 것이 있었던 곳에는 있었던 것이 있었던 것처럼 있었다. 사라진 것의 자리를 메우는 것 같지만 빛은 공백을 환기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마음의 짐이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의 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익숙한 자리에서 위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라진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사라진 흔적조차 흔적을 남긴다.(...)

말에 정서와 실감이 얼마나 실려있는가. 그게 빠진다면 비어있는 말이고 무의미한 말이다. 그게 소위 발화연습 삼아 흘려쓴 것들이리라. 열성 독자가 아닌 나는 선수들이 진짜 경기에서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독자는 이상의 ‘절벽‘부터 김춘수의 ‘꽃‘과 김수영의 ‘꽃잎‘까지 다 읽어왔다. 이들을 뛰어넘거나 그에 준하는 시를 읽고 싶은 것이지 ‘연습‘을 읽으려는 게 아니다). 시인들의 발화연습을 굳이 독자를 상대로 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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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20-03-05 0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전력질주보다 눈에 띄는 운동복과 헤어스타일에 더 신경을 쓰고 나온 선수를 보는 씁쓸함~ 한편을 읽고도 오랜시간 그 의미에 잠길수있는 그런 시가 좋습니다~

로쟈 2020-03-05 10:56   좋아요 0 | URL
시집도 시인도 너무 많아서 ‘연습‘까지 지켜볼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