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인생의 시간은 한정돼 있다. 오십대가 되면 아무래도 시간을 자꾸 재보게 된다. 읽어야 할 책과 써야 할 책, 그리고 내게 남은 시간에 대해. 톨스토이의 우화를 떠올리자면,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교훈을 되새겨보게 된다. 하룻동안 걸어다닌 땅을 다 소유지로 삼을 수 있지만, 단 해지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는. 너무 욕심을 부릴 수 없기에 적당한 시점에서 발길을 돌려야 한다. 어디까지 읽어야 할까, 매번 고심하게 되는 이유다. 
















그럼에도 읽어야 한는 작품들이 있다. 필독서이고 고전이고 그렇다. 괴테의 <파우스트>나 (아직 읽지 않았지만)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 같은 작품들도 당연히 거기에 속한다. 강의에서 다루는 작품들이지만 다만 분량 때문에 또 쉽게 목록에 넣지는 못한다. 두 작품에 대해 참고할 만한 책들이 나와서 페이퍼를 적는다. 먼저 <파우스트>에 대해서는 독문학자 안진태 교수의 연구서 <불멸의 파우스트>(열린책들)가 나왔다. 괴테와 <파우스트>에 관한 어지간한 책들은 모두 갖고 있는데, 이번 책은 적어도 분량으로는 압도적이다(1000쪽이다). 이런 '무모한' 분량의 책은 국내에서 다시 나오지 않을 성싶다. <파우스트> 번역본도 대부분 갖고 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번역본 가운데, 전영애 교수(전집판) 번역본과 함께 기회가 닿으면 일독해봐야겠다. 
















안진태 교수는 독자적으로 독문학과 주요 작가들에 대한 연구서를 꾸준히 내놓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괴테와 파우스트에 관한 책도 이미 몇 권 들어 있다. <괴테 문학 강의>와 <파우스트의 여성적 본질> 같은 책을 나는 갖고 있다. <불별의 파우스트>가 최종 종합판이지 싶다. 


 














이 참에 다시 생각난 것은 승계호 교수의 <철학으로 읽는 괴테 니체 바그너>(반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독해하고 있는 책. 마지막 바그너의 작품은 방대하기도 하고 오페라에 문외한이어서 손을 놓고 있었는데, 얼마전에 번역본을 구입했다(삶과꿈에서 나온 것으로. 풍월당판은 보류중이다). 이 세 작품이 중요한 것은, 혹은 특이한 것은 프랑스문학의 잘 보여주는 근대소설의 길과는 다른 길을 제시해서다. <파우스트>부터가 '소설'이 아니라 (특이한 종류의) '비극'이다. 


근대 이행기와 근대의 문학적 장르로서 서사시와 비극, 그리고 소설의 의의를 해명하는 것이 문학사적 과제 가운데 하나인데, 그에 대한 생각의 가닥을 갖고 있어서 적당한 분량으로 정리해볼 계획이다. 프랑코 모레티의 책들이 참고가 되지만 생각을 달리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따로 책을 쓰려는 것. 모레티는 '교양소설'을 표준으로 삼았지만, 독일산 교양소설 대신에 프랑스산 사회소설을 근대소설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강의에서도 자주 언급한다). 곧 발자크-플로베르-졸라의 프랑스소설사와 대비되는 것이 괴테-바그너-니체의 독일문학이고 독일사상이다. 이 대비는 프랑스사회사와 독일사회사에 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디킨스나 하디만큼 읽히지 않지만, 조지 엘리엇은 19세기 영문학 최대 작가(라고들 한다). 그녀의 최대작이 <미들마치>(주영사)라는 건 번역본이 다시 나왔을 때 한 차례 언급했는데, '미들마치 해설서'가 이번에 나왔다. 리베카 메드의 <내 인생의 미들마치>(주영사)다. "저명한 영국소설 <미들마치>를 읽고 자란 저자가 중년의 나이에 다시 읽으면서 그 소설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미들마치>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겠다. 다만, 1416쪽짜리 <미들마치>를 어떻게 분권해줄 수는 없는지. 두께와 무게 때문에(거기에 가격도 물론) 강의에서 다룰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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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diggety 2021-03-06 0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이 해설서를 쓴 리베카 미드가 영문판 펭귄 딜럭스 클래식 판본의 서문을 썼더라구요. 미들마치는 정말 영문학의 필독 작품인데 한국에서는 읽은 사람이 거의 없는게 아쉽네요
 
 전출처 : 로쟈 > "이 삶아놓은 돼지머리 같은 놈아"

12년 전에 쓴 독서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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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년 간 신춘문예 당선시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원하의 첫 시집이 나왔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문학동네). 꽤 오랫동안 신춘문예 시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지 않다가 <신춘문예당선시집>을 구해서 읽은 게 2018년이 아니었나 싶다(기억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혹은 그 이전에도 당선시집을 읽었다 하더라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바로 화제의 당선시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때문이었다. 


















시에 대한, 시집에 대한 글을 간간이 올리면서 대개 언어실험적인 무의미시 경향에 대해 비판적인 코멘트를 달고는 했는데, 그와는 대비되는 시가 이원하의 시였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그 시의 전문이 이렇다.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주에 부는 바람 때문에 깃털이 다 뽑혔어요,

발전에 끝이 없죠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_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이 시의 희귀한(상대적으로 희귀해졌다) 미덕은 자연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시로 만들어낼 줄 안다는 데 있다(한국현대시의 기원이 되는 소월의 어법이 그러했다. 그렇지만 남성시인 소월이 여성적 어조로 만들어낸 '특이한' 시들이었다). 나는 이 시가 예외적인 성취인지, 아니면 이 시인의 탁월한 개성인지 궁금했는데, 시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반가움과 기대를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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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20-04-10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바로 장바구니 담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로제트50 2020-04-10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은 거의 안 사는데.
이것은 장바구니에 넣습니다~^^
 

초판본 셰익스피어 해프닝에 대해서 지난주에 적었는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그런 상술이 판치게 되면 다른 '멀쩡한' 번역본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전집은 물론 개별 작품도 다수의 번역본이 나와있지만 아무래도 독자가 가장 많이 찾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4대비극'일 수밖에 없다. 세계문학전집판을 중심으로 추천할 만한 4대비극판을 골라보았다. 


참고로, 현재 가장 많이 읽히는 셰익스피어 번역본은 민음사판인데(4대비극 세트판도 나와있다), 나로선 선호하지 않아서 따로 이런 페이퍼를 적는다(가장 많이 읽히는 번역본이 추천 번역본이라면 굳이 이런 페이퍼를 적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문제는 민음사판 외에 4대비극판을 모두 갖춘 세계문학전집판이 많지 않다는 데 있다. 세계문학전집판과 함께 부분적으로 셰익스피어 전집까지 끼워서 고르기로 한다. 






























먼저 추천할 만한 번역본은 '시공 RSC 셰익스피어 선집'이다. RSC는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의 약칭으로 판본은 1623년에 나온 최초의 전집판이다(제1이절판). <햄릿>의 경우도 대다수 번역본인 비평판(아든판)을 대본으로 삼고 있는 데 반해서 시공사판만은 예외적으로 1623년판을 옮긴 것이다(1603년판 '나쁜 햄릿'이 또다른 예외 판본이다). 이 선집은 <로미오와 줄리엣>까지 포함해 다섯 권으로 구성돼 있다. 











시공사판은 소장용으로도 좋은데, 문제는 하드커버이고 책값이 좀 비싸다는 데 있다. 보급판으로 4대비극을 한권짜리로 묶은 판본도 나왔었지만 한정판이었는지 일찍 절판되었다. 강의 교재로 쓰지 못하는 이유다. 






























다른 세계문학전집판 가운데 4대비극이 다 들어가 있는 경우는 열린책들판과 펭귄클래식판이 있는데, 추천본은 열린책들판이다(펭귄판은 두 가지 커버로 나와있는데, 일부 품절된 상태다). 박우수, 권오숙 두 전공자가 두 편씩을 번역하고 있다. 




























원로 영문학자 박우수 교수는 한국외대출판부판 셰익스피어전집도 주도하고 있는데, 이번에 <오셀로>가 나오면서 4대비극이 다 채워졌다(이 페이퍼를 쓰게 된 계기다). 추천 번역본인데 대학출판부판이라는 게 약점이다. 
















민음사, 열린책들과 함께 세계문학전집판을 대표하는 문학동네의 셰익스피어는 이경식 교수의 번역으로만 세 작품이 나와있는데, 4대비극 가운데서는 <햄릿>이 유일하다. 셰익스피어 강의에서는 <베니스의 상인>과 <템페스트>까지 넣어서 같이 다룰 수 있지만 '4대비극'을 강의하게 되면 선택지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다. 
















창비판도 4대비극은 <햄릿>만 나와 있다. 을유문화사판은 <리어왕/맥베스>만 나와있다(<로미오와 줄리엣>과 함께). 이 역시 4대비극을 강의에서 다룰 때는 교재로 쓰기 어렵다. 4대비극 강의는 최소 4주의 일정이 확보되어야 하기에, 생각해보니 몇 차례 정도밖에 없었다. 교재를 특정하지는 않았는데, 언젠가 다시 다루게 된다면 (선택지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고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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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예일 마피아의 대부와 이론전쟁

13년 전에 쓴 페이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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