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걸작의 공간 방문기

9년 전에 쓴 리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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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의 신작 <세로토닌>(문학동네)에 대해 적은 글을 옮겨놓는다. 신청자들에게는 지난달에 문학동네 뉴스레터로 발송된 글이기도 하다. 

















우엘벡 소설의 종합판 <세로토닌>, "이것이 우엘벡이다!"


미셸 우엘벡이란 이름을 처음 본 건 아마 슬라보예 지젝의 책에서였을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이었을까. <소립자><플랫폼> 등 초기작에 대한 지젝의 논평을 읽었고, 덕분에 직접 우엘벡을 읽지 않고도 우엘벡의 위치와 의의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한국어로는 <플랫폼>2002년에 처음 번역되었지만 나는 2006년에 <소립자>가 나온 뒤에야 우엘벡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더 따져보면 그 사이에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의 대담집 <공공의 적들>(2010)이 소개되었는데 나는 공공의 적들로 호명된 두 사람이 프랑스의 좌(레비)와 우(우엘벡)를 대표하는 지식인이군, 하는 정도의 소감만을 가졌다. 좌파 전통이 강한 프랑스 지식사회에서 우엘벡은 분명 이례적인 존재라는 느낌과 함께. 2015년의 화제작 <복종>이 번역 소개된 걸 계기로 동시대 프랑스 작가들을 강의에서 다루기로 작정한 나는 르 클레지오, 파트릭 모디아노와 함께 우엘벡을 대표 작가로 골랐고 우엘벡의 <소립자><복종>을 읽었다.



 














풍문으로만 접하던 우엘벡을 직접 대면한 그때의 소감은 이 작가가 매우 잘 쓴다는 거였다. 멋쩍은 표현이긴 하지만 우리 시대 최고의 논쟁적 작가라는 평판에 작가로서의 역량이 가려진 것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내가 보기에 우엘벡은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다루고자 하는 작가였다. 프랑스문학의 계보에서 보자면 플로베르보다는 발자크 과에 속하는 작가라고 할까. 흔히 인간극시리즈를 통해서 발자크는 왕정복고시대 프랑스의 거대한 사회적 벽화를 그려냈다고 평가받는다. 근대 사회소설의 표준을 세운 공로가 자연스레 발자크에게 돌려진다. (사교형 작가 발자크에 비하면 은둔형으로 분류될 법한 플로베르는 정교한 문체와 세심한 묘사를 통해서 소설의 또다른 모델을 만들었다. 소위 모더니즘 이전의 모더니스트로서, 모더니즘 문학의 본질과 세계괸적 토대를 가늠하게 해준 작가가 플로베르다.)

 

우엘벡이 발자크형 작가라는 것은 그가 어떻게 쓸 것인가보다는 무엇을 쓸 것인가에 방점을 두는 작가라는 뜻이기도 하다(작품의 분량만 보자면 엄청난 다산성의 작가 발자크와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는 독자를 독서의 미궁에 빠뜨리거나 상징의 숲에서 서성거리게 만들지 않는다. 시적인 문장들의 홍수에 떠내려가게 만들지도 않으며 예기치 않은 반전이나 도약으로 독자의 뒤통수를 치지도 않는다. 경험상 우엘벡의 소설은 초반의 설정에서 연역하거나 예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며 장면들의 배치 역시 상식과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들이 화제를 모으고 또 재미있게 읽히는 건 정밀한 현실 묘사와 시대의 문제에 대한 징후적 포착,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지적 냉소주의와 탐닉적 성애관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우엘벡의 최신작 <세로토닌>은 그런 면에서 보면 이것이 우엘벡이다!”라고 보란듯이 과시하는 작품이다. 일부 평론가들은 우엘벡 전작들의 동어반복라는 비판도 한다지만 그들은 작품보다도 먼저 우엘벡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우엘벡의 소설을 전부 읽지는 못했지만 <세로토닌>, 우엘벡 소설의 종합판으로 읽혔고, 정치적 견해와는 별개로 우엘벡 소설의 전폭적인 지지자가 되게끔 한다(프랑스 작가에게 또 한번 노벨상이 주어진다면 우엘벡의 차례라고 말하고 싶다. 2004년 급진적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수상만큼 파격적이라고 할 테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우엘벡은 현실과 세태에 대한 묘사와 함께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지목한다. 작가나 주인공이 그러한 현실에 대해 갖고 있는 정서나 태도와는 별개로 상황 묘사와 정확한 문제 제시는 그 자체로 동시대 소설의 책무이자 핵심 덕목이다.

 

<세로토닌>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신세대 항우울제 캅토릭스를 처방받아 복용중인 마흔여섯 살의 사내 플로랑클로드 라브루스트다(줄여서 플로랑이라고 부르자). 플로랑은 농업대학을 졸업하고서(우엘벡 자신이 파리국립농업학교 출신이다) GMO로 악명 높은 기업 몬산토에서 일하다가 노르망디 지역의 농업수림지역청으로 이직했고 가장 최근에는 농산부의 위촉직 공무원으로 일한 농업전문가다. 애초에 이공과대학이나 경영대학이 아닌 농업대학에 진학한 것은 남다른 이상을 품어서였지만 졸업 이후 그의 직업적 경력은 그 이상을 차츰 배반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몬산토에서 생산하는 종자와 비료 및 살충제가 농업에 얼마나 파괴적인 역할을 하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고 농업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한 고민과 식견도 갖고 있었다. 공무원이 되어 자신의 이상을 펼쳐보고자 하지만 그는 현실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한다. 유럽연합 내에서 프랑스 농업의 위치를 지켜보고자 애를 쓰지만 유럽 영농 예산을 가장 많이 끌어온다 하더라도 프랑스의 농업을 되살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세상은 내가 바꿀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며, 다른 이들이 나보다 훨씬 야심만만하고 의욕적이고 아마도 똑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할까.” 그러한 현실은 투쟁이냐 외면이냐라는 선택지를 가능하게 하지만 농민이 아닌 농업전문가 플로랑에게 투쟁은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반면에 농업대학 친구이면서 노르망디 지역에 방대한 농지를 갖고 있는 지주 귀족 에메릭은 사정이 그와 다르다. 자유무역체제하에서 붕괴되어가는 농업 현실에 맞서서 농민들과 함께 총을 들고 시위에 나섰던 그는 경찰과 대치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그 여파로 벌어진 총격전에서 열 명의 농부가 숨지고 경찰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농촌의 현실 문제로 인한 귀족 희생자에메릭은 플로랑과는 분명히 다른 선택을 보여주지만, 그러한 투쟁이 과연 대세를 바꿔놓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세로토닌>이 예고했다고 하여 화제를 모은 프랑스의 노란 조끼시위를 보아도 그렇다.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안은 저지시켰지만 과연 하락을 거듭하는 농업 현실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 적어도 플로랑은, 그리고 우엘벡은 회의적이다.

 

대학 시절부터 진지한 인간이었던 에메릭과 달리 여자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고백하는 플로랑은(이상을 갖고서 대학에 진학했다는 말과는 다소 어긋난다), 그렇지만 여자들은 모두 창녀라고 생각한다(이 역시도 그가 카미유라는 여성에 대해 갖고 있는 특별한 감정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직업인의 삶은 아무런 쾌락도 선사하지 않기에 창녀보다도 못하다. 농업전문가라는 자신의 직업 혹은 직무에서 아무런 의미와 보람도 찾지 못한 플로랑의 삶이 여자들과의 사적인 관계와 섹스의 기록으로만 채워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때 그의 삶은 그의 페니스의 삶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섹스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나머지는 대개 섹스와 함께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신체적 노화와 함께 그의 페니스의 삶도 차츰 한계에 도달한다. 스무 살 아래의 일본인 동거녀 유주(‘유즈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와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갖게 된 무력감과 공허감은 그를 자발적 실종자의 삶으로 내몬다. 독특하게 프랑스적인 자발적 실종은 프랑스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로 허용된다. 프랑스에서 가족 포기는 개인의 선택사항으로 범죄행위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플로랑의 자발적 실종은 일단 유주를 응징하면서 그녀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선택이지만, 스스로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지우는 행위라는 점에서 유사 자살의 의미를 갖는다(자살을 유예하는 유사 자살이다).

 

이미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능력을 상실한 플로랑에게 자발적 실종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반으로 쪼개지는 작고 하얀 타원형의 알약이다<세로토닌>의 서두다. 캅토릭스는 항우울증 약으로 행복 호르몬으로 불리는 세로토닌의 분비를 촉진하는 약제다. 삶의 행복을 능동적으로 추구하거나 성취할 수 없는 이들에게 캅토릭스는 그 대용이 된다. 그렇지만 약제에 의한 행복감(항우울)은 비록 동일한 생리적 메커니즘에 기반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행복감의 유사물 혹은 축소형일 수밖에 없다. 플로랑은 다른 복용자와 마찬가지로 리비도 상실 및 성기능 장애라는 부작용을 겪는데, 섹스가 인생의 전부라고 믿는 그로서는 자멸적인 상황이다.

 

돌이켜보면 다른 삶의 가능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그가 최고의 행복감을 경험한 카미유와의 관계를 망치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적어도 플로랑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이미 지나간 시간과 기회를 되찾을 방도는 없다. “늙어 죽어가던 짐승플로랑의 남은 인생은 설사 자살충동을 가까스로 버텨낸다 하더라도 캅토릭스의 용량과 은행 잔고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세로토닌>이 보여주는 세계는 플로랑의 판단에 따르면 죽은 세계다. “이 세상은 이미 죽었다. 나에겐 죽은 세상이었고, 비단 나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세상은 그냥 죽었다.” 세계의 죽음은 알랭 바디우 같은 철학자의 표현을 따르면 무세계성이고 세계 상실이다. 세계 상실의 짝이 되는 것은 주체 상실이다. 우리는 주체를 잃어버릴 때 세계 역시 잃어버리게 된다(세계 상실의 공간을 채우는 것이 기계적인 섹스와 포르노그라피다).

 

플로랑이 경험한 주체 상실과 세계 상실은 과연 그만의 경험일까, 아니면 그의 주장대로 우리 모두의 경험일까? 주체 회복을 위한 시도는 농업 회생을 위한 에메릭의 기도만큼이나 무망한 것일까? 과연 자발적 실종이 최종적 파멸에 대한, 무력하지만 유일하게 가능한 해법일까? <세로토닌>은 우리가 어떤 교착상태에 놓여 있고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하도록 떠민다. 그 책임을 떠안지 않을 때 세계가 한 알의 알약으로 축소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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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조지프 브로드스키의 에세이가 출간됐다(러시아 이름으론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러시아의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가 베네치아에 관해 쓴 에세이"라고 소개되는 <베네치아의 겨울빛>(뮤질트리). 앞서 나왔던 시집이나 에세이집들이 모두 절판된 터라 이제 이 한권만 검색된다. 

















지난해 봄 이탈리아 문학기행 때 1박 2일 머물렀던 게 나로선 인연의 전부이지만, 그래도 경험을 되살리게 해줄 만한 에세이들일 것 같아서 미리 기대가 된다. 

















베네치아와 관련해서는 스가 아쓰코의 산문집 <베네치아의 종소리>를 비롯해서 나와 있는 책들이 좀 있다. 뮈세와 릴케의 여행기도 눈에 띄는군. 토마스 만의 <베네치에서의 죽음>은 제쳐놓더라도. 


출판사 뮤진트리는 시리 허스트베트의 책들로 기억되는데, 이런 에세이들은 잘 찾아서 출간한다. 내친 김에 브로드스키의 에세이들이 더 소개되면 좋겠다(시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기에 요구하긴 어렵고). 
















대표 에세이집이 <슬픔과 이성에 관하여>와 <하나 반짜리 방에서> 등으로 보인다(과거에 'Less than One'이 '하나 반짜리 방에서'로 번역됐었다). 
















러시아 시인이지만 미국 망명 시인이기도 한데, 같은 망명작가로 세르게이 도블라토프와 깊은 교분이 있었다. 몇년 전에 영화 <도블라토프>에서도 브로드스키의 시낭송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래가 영화에서의 브로드스키(왼쪽)와 도블라토프(오른쪽). 보르드스키 평전도 나와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찾아보니 레프 로세프가 쓴 평전이 영어로 번역돼 있다(러시아어판은 옛날에 구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영어판은 눈에 띈 김에 바로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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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캐서린 맨스필드의 작품집이 나왔다. <뭔가 유치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민음사). 10년 전에 문동카페에 연재했던 로쟈의 스페큘럼에서 맨스필드의 단편들을 읽은 기억을 최근에 되살리게 되어('지난오늘'에서 몇 차례 옮겨놓았다) 안 그래도 관심을 가던 차였다. 오래 전에 헤어진 애인까지는 아니고, 여동생과 재회하는 느낌이랄까(35살에 요절했기에 항상 아련하게 떠올려지는 작가가 맨스필드다). 여동생이 없지만 어차피 상상적 관계이니 혈육이 못 되란 법도 없다. 

















캐서린 맨스필드(1888-1923)에 관한 몇 가지. 일단 뉴질랜드 출신의 작가다. 버지니아 울프, D. H. 로렌스 등과 교분이 있었다(로렌스와 더 가까웠는데, 상류층 출신이 울프와는 달리 로렌스와는 처지가 비슷했던 탓이다). 그리고 단편소설만 썼다. 정확히 말하면 장편소설을 쓰지 않았다. 시집과 비평집도 갖고 있으나 아무래도 문학사가 기억하는 것은 단편작가로서의 맨스필드다. 순정한 단편작가.


문학강의에서 주로 장편소설들을 다루기에 단편작가를 읽는 일은 드문 편이다(러시아문학에서는 고골과 체호프의 단편들, 그리고 세계문학에서는 앨리스 먼로 정도. 물론 에드거 앨런 포나 모파상의 단편들, 그리고 호손과 멜빌의 단편들도 읽지만 전체 강의에서 보자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단편은 독자적인 장르이고, 대개 장편소설과 감당하는 몫이 다르다. 그리고 근현대문학사의 주류는 아무래도 장편소설에 의해 주도된다. 그에 비하면 시와 단편소설은 주변적 장르다. 그래도 가끔은 주변적인 것에 끌리기도 한다. 맨스필드처럼 '뭔가 유치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작가를 만날 때면 더더욱. 


작가 프로필에 따르면 맨스필드는 생전에 서너 권의 단편집을 발표했다. 뉴질랜드에서의 소녀시절을 다루었다는 <전주곡>(1918)은 위키피디아에 서지가 뜨지 않는다(이런 경우도 있나?). 


<독일의 하숙에서>(1911)

<축복>(1920)

<가든파티>(1922)
















생전에 마지막 발표한 작품집이기도 해서 가장 유명한 소설집이 <가든파티>(<원유회>로도 번역)다. 국내 출간본 대부분이 이 제목으로 돼 있다. 표제작과 '차 한 잔' 등이 대표작. 그리고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작가 사후에 유작이 두 권 더 나온다. 


<비둘기의 둥지>(1923) 

<뭔가 유치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1924). 


이번에 나온 번역본은 전체 25편 가운데 13편을 옮겼다니까 절반을 옮긴 셈. 사실 맨스필드는 작품수가 아주 많은 건 아니기에 단편 전집 내지 준전집도 나올 수 있는 작가다(현대문학판을 기다려볼까). 


지난주에 또다른 재발견된 단편 작가로 루시아 벌린을 다루기도 했는데, 오직 단편만을 쓴 순정한 단편작가들만 모아서 조명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이 경우 조이스 캐롤 오츠 같은 장르 불문 다작의 작가는 빠진다). 아, 맨스필드와 울프의 결정적인 차이도 그것이다. 단편만 쓴 작가와 단편도 쓴 작가(울프와 맨스필드를 다룬 책들도 있는데 구해봐야겠다. 울프가 뉴질랜드 '촌뜨기' 맨스필드를 무시했다던가, 질투했다던가). 


왠지 친근하면서도 아련한 작가 캐서린 맨스필드를 떠올리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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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1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01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로쟈 > “나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10년 전의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 읽기다.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으로 넘어가겠다고 해놓고 10년이 흘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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